2악장 0 혹은 -1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3/20 20:25 http://blog.naver.com/wgreene/110002708910 Amadeus 음악 : Pour Que Tu M`Aimes Encore - il divo(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Pour Que Tu M'aim.. 2악장 0, 혹은 -1편 오르페우스 관을 지나며 로제리오 교수는 괜스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있는 것 이라고는, 8월의 끈적한 습기를 빨아들이고 있는 밤하늘에 가려진 수목이 전부였다. 아마데우스 학생들이 한여름 밤의 수면에 취한 늦은 시각, 그는 조용히 한 숨을 내쉰 뒤 다시 걷기 시작하였다. 그는 평소부터 걷는 시간을 아까워 할 정도로 확실하고 분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약속’이 정해진 현재, 걸음을 훨씬 빨리 재촉해야 했다. 혼혈인 특유의 신비로운 그의 외모가 집무실이 있는 건물 밖 가로등에 잠깐 비칠 때의 시각은 밤 열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런. 그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차며 아예 계단을 뛰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약속 시간은 바로 새벽 영 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젊은 교수는 뛰는 중간 중간 몇 장의 악보를 흘리는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듯이 그의 흥건히 젖은 이마의 땀과 불벼락이라도 맞은 놀란 표정은 그가 뛰어가야 할 만큼 긴장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지 않던가. 로제리오는 마침내 어두운 복도 끝에 위치한 자신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고 넥타이를 고쳤다. 도어를 열기까지는 마치 하루가 또 지난 것처럼 끔찍할 정도로 길게 느껴졌다. 그는 젠틀한 미소를 억지로 띠우며 기어이 집무실 안에 들어섰다. “늦으셨군요. 보통 약속 시간보다 십 분 정도 일찍 와 계시는 줄로 아는데…….” “……!” 로제리오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나머지 악보들을 몽땅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의 젠틀한 미소마저 파랗게 굳었다. 그는 정확히 앞을 응시했지만 어쩐지 피카소의 작품처럼 쉽게 해석 될 수 없는 누군가가 한 번에 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랜만입니다. 로제리오 교수님.” 또 한 번 자신과 만나기로 한 이의 소리가 부드럽게 터져 나왔다. 젊은 로제리오 교수는 그제 서야 침착하게 대답하기 위해 마른침을 삼켰다. 저 쪽 푸르싱싱한 수목의 이파리가 달빛을 머금은 채 창문을 치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달밤의 긴 그림자를 입구에 서 있는 로제리오의 발끝까지 연결시킨 자가 많이 기다렸다는 듯이 테이블을 집고 일어섰다. 로제리오는 숨이 막힐 정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뛰어와서? 그래. 그래서 땀이 흐르고 흥분 했을 게다. 그는 떨어진 악보를 아무렇지 않다는 듯 줍더니 창가 테이블 쪽으로 걸었다. “오랜만일세, 테레사.” 인사를 건네는 그의 입술 밖으로 약간의 신음이 섞여 나왔다. 학생들의 분란, 작은 혁명이라는 이름의 수치, 단 한 명의 자퇴학생, 그 후 죽은 도시처럼 변한 아름다운 한국의 아마데우스에 1년 만에 찾아온 손님은 다름 아닌 테레사였다. 로제리오는 창가 옆 테이블에 그와 마주 앉아서야 안정을 취했는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소식을 끊고 시력 회복을 위해 미국의 병원에 입원해 있다던 테레사와 아마데우스에서 다시 만나다니! 그는 숨을 내쉬며 들이닥친 이 생각 덕분에 또 다시 초조해졌다. 테레사와 수페리우스가 없는 1년 동안의 아마데우스는 로제리오 교수식으로 따지자면 ‘차분’한 상태였다. 테레사가 다시 나타났다니, 그는 두려워졌다. 또 다시 지옥 같은 폭동이 일어나고 없어진 낙오자의 모임이 부활 할 것 같아졌고, 학생들을 선동하다 못 해 교수들의 지위를 바닥에 깔아뭉갤 것 만 같아서였다. 로제리오의 이런 불안함 따위야 진즉에 알았다는 듯 여유로운 투를 내뱉는 테레사가 천천히 선글라스를 벗었다. “무엇을 어쩌겠다고 찾아온 게 아닙니다.” “자네, 눈은…….” 로제리오의 불안함은 기가 막히게도 테레사가 선글라스를 벗는 순간 완치되었다. 선글라스를 벗고 손에 쥔 테레사의 두 눈은 꽉 감겨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깐 눈을 떴지만, 그것은 사람의 평범한 눈이 아닌 탁하고 더러운 것이 잔뜩 끼어있는 꼴이었다. 그는 눈을 떠도 사방이 보이지 않는 장님임에 틀림없었다. 길게 자란 머리칼은 테레사의 여윈 어깨까지 자라 있었다. 로제리오는 그가 안됐다는 생각에 앞서 현재 자신의 앞에 있는 테레사는 과거의 테레사가 절대 아니라는 판단이 섰고,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묽은 눈동자를 보여준 뒤, 테레사는 다시 선글라스를 썼다. 푹 파인 양 쪽 볼 못지않게 부르튼 입술이 천천히 열린다. “눈은, 전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수술 일정이 한 번 더 잡히긴 했지만, 취소했지요. 다섯 번이나 수술을 했는데도 나아지지 않았으니 눈에 대한 미련은 버리기로 했습니다.” “…….” “오늘 교수님을 뵙자고 한 이유는, 흔한 인사 때문이 아닙니다.” “만나자마자 본론부터 꺼내는 건가?” “허튼 대화는 아까운 시간을 낭비시킬 뿐이니까요.” “그렇…지…….” 로제리오는 그제 서야 안타까운 생각이 밀려와 가슴이 미어졌다. 1년 전까지의 테레사는 누구보다 자신을 잘 이해해 주는 멋진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시간의 낭비는 죄악이라고 믿는 로제리오를 좋아해 주던 멋진 학생이었다. 아니, 학생 이상의 빛이었다. “차라도 한 잔 마실 텐가?” “아니오. 교수님이나 한 잔 드시지요. 긴장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 “향기는 변함이 없더군요. 장미 문을 지나 수풀까지 퍼져있는 특유의 부드러운 향기 덕분에 이 곳으로 오면서 많이 좋았습니다.” “그렇잖아도 이번에 정원사 스무 명을 더 채용했지. 분수대 근처 잔디를 더 심어볼까 계획 중이라네.” “…향기는 그대로여도…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오르페우스 관에서 새벽까지 들려야 할 열정의… 소리들이 없더군요.” “…….” “밤이 이럴진대, 낮의 모습은 어떨지 보이지 않아도 보입니다.” “그건 새로운 규칙 중에…”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테레사는 말을 아끼기로 작정 한 모양이었다. 로제리오는 그에겐 보이지 않겠지만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다 식은 홍차를 따라 마셨다. 밤이 뜨거운데, 사람이 차가워서 둘은 덥지도 춥지도 않은 상태였다. 혁명 이후의 1년은, 로제리오 교수에게 아주 빠른 속도를 보였었다. 그렇다면, 테레사는 어땠을까? 치료 중인 병원의 위치를 기자들과 가까운 지인들에게까지 밝히지 않았던 테레사는 길게 느껴졌을까, 혹은 짧았을까. 로제리오는 이 점을 묻지 않기로 했다. 그는 많이 여위였기 때문이다. 당당한 태도에 반해 마른 모습은 그의 1년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는 힘들었던 것이다. 그 힘든 시간을 이기고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리라. 그리고 로제리오 교수의 분석적인 상상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테레사는 억지로 웃음을 입가에 칠하는 현재, 탁자 밑으로 내린 손에 주먹을 쥐면서까지 긴장을 감추려 들기 때문이었다. “본론이 아닌 결론의 한 줄부터 읊자면… 교수님. 도와주십시오.” “…….” 무엇을, 무엇을? 대책 없이 도와 달라는 어절은 테레사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1년 사이 사막처럼 변한 아마데우스처럼 테레사도 변한 것일까? 로제리오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짧은 텀이 갑갑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저는 현재 두려울 게 없거든요.” “……?” “실권을 잡은 사람을 찾기 위해, 지난달부터 바오르 신부님과 수녀님들, 또 사비나 교수님과 관리자들을 물색 해 봤습니다.” “……!” “그래서 오늘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 테레사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옅은 밤공기가 부드럽게 밀려올 때, 테레사는 마치 정령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아마데우스 전체가 움직이는 듯 한 묘한 환각이 로제리오 교수에게 미쳤다. “부탁들입니다….” “테레사!” “신혜성이를 다시 받아 주십시오.” “!” 테레사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나설 차례라고 믿었다. 아주 오래 전, 혜성을 정복하기로 한 이상 그는 두려울 게 없었다. 그는 로제리오 교수와 형식적인 몇 마디를 오고 가던 끝에, 기어이 이를 악 물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지난 1년 따위는 없어도 좋다. 그 시간 동안 시력을 잃은 고뇌에 충분히 젖었으니, 이제는 없어도 좋다. 테레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로제리오는 틀림없이 놀란 눈으로 자신을 내려보고 있을 것이다. 앉지도, 서지도 못 한 채 주변을 둘러볼 것이다. 그리고 테레사의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들어맞았다. 상업주의 일면이 가득한 로제리오는 혹시 이 장면을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며 굳건히 닫혀있는 집무실 도어를 몇 번이나 돌아봤기 때문이다. 로제리오는 느닷없이 자신의 앞에 무릎 꿇은 과거의 빛을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가 왜 이러느냐는 듯이 여유로운 말을 꺼내려 할 때를 놓치지 않고, 테레사는 장대비처럼 강한 어절을 터뜨렸다. 그는 현재 두려울 게 없는 상태이지 않던가. 아름다운 아마데우스의 아마데우스. 그의 황홀한 입술이 열린다. “수페리우스의 자퇴 용지서 최종 승인 권한이 교수님께 있다는 점을 압니다.” “테레사 그건…” 어디선가 1년의 긴 시간이 칼에 찔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둘은 현재에 집착 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물론 그 승인은 저의 허가가 떨어져야 하겠지요.” “…그렇지. 하지만 현재는…“ “현재는 교수님의 것입니다. 저는 지금 그것을 돌려 달라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 그리고 칼에 찔린 1년의 시간이 마침내 찢어지고 죽어 버릴 때, 테레사는 무릎을 짚던 손을 올려 선글라스까지 벗어서 내려놨다. 그는 잠깐 고개를 숙였다. 중대한 결심이 이제야 완성된 모양이었다. 대책 없이 나타난 테레사 만큼이나 놀란 로제리오는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자신은 감정적으로 치우쳐진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실권을 잡을 수 있지 않았던가. 그런 자신에게 과거의 정을 앞세워 가매 이론을 펼치는 테레사의 부탁이라니! 로제리오가 방황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테레사가 파고들었다. “수페리우스는 돌아올 것입니다.” “……재능 있는 아이들은 아주 많다 테레사. 나는 지나간 것에 덜미를 쥐고 흔들 만큼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자네는 잘 알 텐데.” 테레사는 로제리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매혹적인 입 꼬리를 진심으로 올렸다. 그의 미소에 오싹 소름이 끼친 로제리오가 꼬아 앉은 다리에 경련이 일어났는지 서둘러 반대로 꼬았다. “압니다. 알기 때문에,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 그의 힘 있는 한 마디 한 마디는 로제리오의 입에 마 악 물린 파이프를 테이블에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테레사는 그 소리를 모두 듣고,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고개를 들었다. 앞은 당연히 보이지 않는다. 표정은 어떨까. 우는 아이처럼 약한 표정 따위는 나에게 없다. 잘 하고 있어 테레사. 그는 스스로를 재촉하기 시작하였다. “교수님. 당신은 저의 이런 모습을 최초로 보시는 겁니다.” 무릎을 꿇은 테레사! 로제리오는 부랴부랴 그를 의자에 앉히기 위해 말투를 부드럽게 바꿨지만, 그 안의 핵심은 지지 않고 전달하였다. “그렇다고 달라질 건 없어요. 아마데우스는 변했어. 테레사, 위원회는 해산 되었어. 교수들의 권한을 학생들이 지휘했던 것은 월권 이상의 미친 행동이었음을 부인하지 못 할 텐데?” 이렇게까지 설명하고, 또 미안하다는 진심이 섞인 말투라면 테레사는 이해해 주겠지? 다른 화제를 꺼내자- 라고 로제리오가 결심하던 찰나, 전혀 엉뚱한 소리가 테레사의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잘못 했습니다.” “!” 로제리오는 저 사람이 과연 테레사가 맞는가 싶어 얼어붙은 자세에서 조금의 미동도 보일 수 없었다. 귀를 의심해 봤지만 집무실 안에는 둘 이상의 사람이 없지 않던가. “고작 어린 학생이, 재능 있다고 감히 한국 아마데우스의 건축 에서부터 활동 범위 모든 부분에 영향을 끼쳤던 것, 죄송합니다.” “나한테 이러지 말고…” 마침내 로제리오가 문제를 회피하려 들 때, 조목조목 이치를 따지는 이는 테레사로 바뀐다. “바오르 신부님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최종 승인 용지는 바로, 로제리오 교수님… 당신에게 있다 구요.” “…….” 테레사의 목소리가 차츰 커져간다. 그의 소리는 로제리오의 굳은 몸과 그의 파란 영혼마저 압도하였다. “믿어 주십시오.” “…….” “월권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데우스는 저의 모든 것 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저의 현재에 모든 부분은…” “…….” “수페리우스 신혜성 입니다.” “!” 로제리오가 테레사- 라고 소리치기도 전에, 그는 바닥에 고개를 숙인 뒤 등을 세웠다. “믿어 주십시오.” “…….” 로제리오 교수는 여전히 난감하다는 듯 한 숨을 내쉬었다. 그는 물론 알고 있었다. 어린 소년 테레사가 보잘 것 없는 나라 한국에서, 그 이름값을 떨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천재가 되기 위해 능력 이상의 것을 끄집어냈고, 전 세계 인 앞에서 '은어의 손놀림'이라는 수식어를 쟁취했었다. 한국을 알렸다. 그 덕분에, 일본에 세워질 위기에 처했던 아마데우스 건축을 한국에로 돌리기까지 했다. 그는 아마데우스 그 이상의 산물이 아니던가. 그런 그가, 최종 승인자로 군림하던 그가, 로제리오 자신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다! 믿기 어려운 현재, 로제리오는 타는 듯 한 전율에 입술을 바르르 떨고 그를 지켜보는 것 이상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마침내 테레사는 더듬더듬 앞을 짚으며 무릎발로 기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있는 로제리오의 바지자락을 쥐었다. 그의 용맹한 손과, 눈이 쉼 없이 떨고 있음이 로제리오의 눈에도 보였다. 식별이 불분명한 영 적인 무엇이, 이 상업주의자 로제리오에게도 보였다는 것이다. 테레사는 고였던 눈물을 흘렸다. “수페리우스 신혜성.” “…….” “나 테레사의 수페리우스는 반드시 해 낼 것입니다.” “…!” 힘 있게, 자신 있게 스스로를 다그치며 내뱉는 음성과 함께 테레사의 뺨을 적시는 눈물이 반짝였다. 쉬지 않고 뛰는 그의 심장은 입술이 떠드는 신혜성 이라는 이름 하나에 발광을 부렸다. 테레사는 더 세게 톤을 울렸다. “그는 돌아올 것입니다. 아니, 돌아오게 하는 것 역시 당신께서 도와 주셔야겠습니다.” “테레…” “그의 자퇴를 철회 해 주십시오.” “…….” “이렇게 애원하겠습니다. 매일 빌라면 빌겠습니다.” “…이…렇게 까지 하는 이유가 뭐…지요 테레사. 자네는 그 한 사람이 아닌 다른 이에게 시선을 돌려도…” “그에게 음악은, '전부' 입니다.” “…….” “과거의 저처럼, 그의 전부는 현재 음악 입니다. 그것을 알아챈 나의 능력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 “그리고.” “…….” “음악이 전부라는 그는, 나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 경직된 사람은 로제리오 한 사람 밖에 없었다. 테레사는 어쩐지 중대한 부탁을 하면서도 ‘수페리우스’,‘신혜성’이라는 구절을 내뱉을 땐 표정이 부드러웠기 때문이다. 그래 그것은 마치… “나는 그 놀라운 사람 덕분에 슈만이 되었습니다.” “테. 테…” 슈만! 그래. 그 표정은 클라라를 바라보는 슈만의 표정이 아니고 뭔가! 로제리오는 몸 전체에 퍼지는 흥분에 엉덩이를 들썩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소름이 끼치다 못 해 말을 똑바로 잇지 못 할 상황이다. 로제리오와는 반대로 갈수록 당당하게 할 소릴 다 꺼내는 테레사는 앞이 보이지 않아도 자력에 의해 빛으로 변하는 사후 영혼처럼 신비로웠다. “그의 자퇴서를 철회 해 주신다면, 저도 보답할 것입니다. 이 위기의 한국 아마데우스를 다시 살릴 테니까요.” “어…어떻게……?” “눈 먼 테레사의 연주… 그리고, 몰락한 보스턴의 아마데우스의 부활, 나아가 영국 아마데우스의 '인정' 까지. 내 관심 밖이었던 그것들을 '한국의 테레사'가 실현 시키겠습니다.” “!” 마침내 로제리오는 화제를 바꿔야겠다는 결심을 포기했다. 지난 1년 여 간의 생각을 조리 있고 확실하게- 그것도 모자라 앞으로의 미래까지 당당하게 선언하는 테레사 앞에서 로제리오가 맞대응 할만한 꺼리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저 마른침을 삼키며 테레사가 하는 소리를 음악처럼 감상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부탁이 있습니다.” “…….” “지금 제가 교수님께 부탁한 일은, 혜성이에게 비밀로 부쳐 주십시오.” “그건… 내가 아직 철회 하겠다고 대답 하지도 않았고….” 로제리오의 이 말에 테레사는 당연히 멋진 미소로 화답하였다. 교수의 어투는 이미 지는 태양이오, 마른 흙이었기 때문이다. 로제리오의 떠듬떠듬 나오는 말투는 마지 못 해 내뱉는 아이의 투정과 다를 것이 없었다. “당신에겐 유리한 조건입니다. 싸구려 재즈 가수로 몰락한 수페리우스의 화려한 부활, 그리고 눈 먼 테레사의 세계 활약. 국제적인 이슈가 되는 아마데우스, 그들의 스승… 로제리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로제리오는 들뜨는 마음을 감추기 위해 찬 홍차를 술처럼 한 번에 들이켰다. 마음이 들뜨는 이유는 첫째, 테레사가 1년 만에 나타나서였다. 둘째는 그의 시력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그 답지 않은 부탁과 미래를 똑똑히 들었기 때문이다. 로제리오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던 테레사는 싱긋 웃으며 일어섰다. “대답을 주시는 즉시, 저는 보스턴으로 떠날 것입니다.” “이틀 후에 연락을 취하겠네.” “예. 고맙습니다.” 테레사는 얼추 짐작하여 로제리오 교수가 앉아있을 자리에 허리를 한 번 숙인 뒤, 정확히 문 쪽으로 지팡이를 움직였다. 상당히 숙달 된 솜씨로 미루어 보건데 테레사는 그간 장님으로 살기 위해 이를 악 물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가 짧은 거리지만 움직이는 모양새는 마치 앞을 보는 사람처럼 노련하기 짝이 없었다. “테레사.” “…예, 교수님.” 황갈색 도어를 열고 한 걸음 내딛던 테레사가 로제리오의 들뜬 음성을 알아차리고 피식 웃었다. 그는 멋진 등을 돌려서 또 로제리오의 음성이 있는 자리를 정확히 응시하였다. 저 까만 선글라스는 그러고 보면 멋을 부리기 위해 일부러 쓴 모양새 같다. 이럴 수가. 그가 시력을 잃긴 확실히 잃었나? 로제리오는 컵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많이 변했어.” 로제리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테레사는 목청 높여 하하하 웃었다. 당황하는 자는 오직 로제리오 교수뿐이었다. 새벽 한 시를 내달리는 현재, 테레사는 웃음소리를 거두고 철처럼 딱딱하고 분명한 투로 대답하였다. “아마데우스는 변했습니다.” “!” 아마데우스가 황량하게 변했듯이, 자신도 변하는 게 당연한 이치이지 않느냐는 속 뜻을 로제리오가 모를 리가 없다. 테레사는 포부에 찬 어투를 계속 읊었다. “그리고, 수페리우스는 앞으로도 계속 우리들을 변하게 할 것입니다.” “!” 또 논리 정연한 것을 확실시 하는 교수를 배려하는 취지로 상냥한 설명도 덧붙였다. “그는 혁명을 겪었고, 혁명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학교를 바꿀 유일한 인물이니까요.” “어…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지?” “낙오자의 모임 문정혁, 위원회장 테레사. 그 둘의 중심에서 그는 모든 것을 알고 겪은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변혁을 일으킬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끝으로 다시 도어를 박차고 나가려던 때, 테레사의 눈썹이 로제리오의 다음말로 인해 경직되었고, 그를 불같이 돌아보게 만들었다. “그는 현재 망가졌어. 예전 자네의 이름 덕분에 가십에 오른 유일한 이었지만, 자퇴서를 낸 이후 1년 내내 이태원의 싸구려 주점에서…” 테레사는 로제리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스라친 어투로, 흡사 예전의 히스테리칼한 어투를 찾은 것처럼 분명하게 입을 열었다. “특히! 소수의 독일인들이 한국에 올 때 꼭 들린다는 바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곳은 수페리우스의 작은 무대일 뿐입니다.” “!” 로제리오는 휭휭 소리 내는 머리 속의 언어와는 달리, 입 밖에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테레사의 올곧은 신념과 기대를 저버릴 수 없다는 것 따위는 없다. 그의 단호한 어투 속의 진실 들을 로제리오는 부인 할 수 없었던 탓이다. “흥청망청 술을 마시는 무리들에게 그는 클래식을 알려 준다지요. 어두운 부분만 읽으려 하지 마십시오.” “자네가 암 만 그렇게 설명해도 나는…” “솔베이지를 부르는 소년.” “……?” 로제리오가 무슨 말을 해도 다 받아 칠 준비가 되었음을 시사하듯, 테레사는 칼같이 그의 문장을 잘랐다. 새벽이 길어지고 있다. “우리의 수페리우스가 당신이 지적한 이태원의 거리에서, 1년을 지내며 얻은 수식어라고 합니다. 이래도 그가 망가졌다고 자신하십니까.” “…!” “그가 왜 필요한 지, 교수님은 정말로 이틀 동안 고민하셔야겠습니다. 사비나 교수님께서 왜 지난 1년 동안 학생들 레슨 시간을 쪼개 가면서까지 수페리우스 신혜성을 주기적으로 찾아 가서 설득 하시는지도 진지하게 고민하셔야 합니다. 왜 천하의 테레사가 두 눈을 잃고도 당당하게 그를 찾는지, 왜 이민우가 죽으면서 까지 그를 보호하려 했는지, 그토록 절망적이었던 혁명이 어떤 식으로 무마 되었었는지.” “!” 테레사의 말은 일사천리로 이어지고 있다. 그 확실하다 평이 자자한 로제리오 교수 마저도 흡수될 지경인 테레사의 말은 마치 스펀지 같았다. 그는 언어로서 로제리오의 얕은 흔들림을 몽땅 빨아들이고 있었다. 테레사는 나가려던 것을 아예 중단하고 자신의 가여운 교수를 위해 힘 있는 설명을, 바닥에 간간히 지팡이를 짚으며 힐책을, 가끔 부드러운 어투를 섞어 회유를 반복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천하의 로제리오 마저 움직이고 있었다. 천주의 품으로 돌아간 이민우 학생,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혁명의 시간들이 있기까지… “죽은 무덤처럼 변한 우리의 한국 아마데우스를, 그렇다면 옳게 바꿀 인물일지 아닐지도… 똑똑히 생각해 보십시오. 교수님 말씀대로 인재는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음악만으로도 힘들어하기 때문에 그 이상을 읽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한국 아마데우스 외의 귀찮은 것들은 신경 쓰지 않았듯이요.” “…….” 자신의 경우를 빗대며 상황을 이해시키는 테레사는, 여전히 수재이며 학생 이상의 거대한 빛 덩어리처럼 보인다. 로제리오의 눈이 붉게 변해 가는 것 따위를 전혀 알 리 없는 테레사가 낮은 탄식의 숨을 내뱉으며 약간 말하는 속도를 줄였다. 그의 선글라스 안에 가려진 묽은 눈동자는 과거 오래 전을 회상하는 듯싶었다. 낭랑했던 목소리가 흙을 끼얹은 물처럼 멀건 색을 퍼뜨릴 때, 테레사는 로제리오가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 공기가 옳게 전달해 주기를 바란다며 허공에 쉼 없이 언어를 띄웠고, 가끔 고개도 숙이며 노를 저었다. “그는 아마데우스의 애송이였습니다. 그것을 스스로도 인정했습니다.” “그랬지…….” “그런 그가, 죽은 무덤으로 바뀐 학교로 돌아오는 순간 무엇을 느끼고 몸으로 실천할 지 저는 궁금해서 목이 타고 숨이 막힙니다.” “!” 툭. 투둑. 로제리오의 가슴에 이름모를 철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1년 내내 이 순간만을 기다린 것처럼 뜨거운 야망 따위는 없던 로제리오의 인생이 단 칼에 베어지는 기분이었다. 테레사는 몇 마디를 건넨 것뿐인데, 로제리오는 이 기분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 신혜성의 입학을 시작으로 아마데우스는 그가 사라지기까지 단 한 시도 조용하지 않았었다. 그는 어찌 됐든 학교 전체를 들뜨게 만든 장본인이지 않던가. 로제리오의 머리 속이 복잡하게 과거를 얽맬 때 쯤, 테레사는 말의 끝맺음을 위해 문고리를 쥐었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대로 돌진하는 애송이 임을 스스로도 잘 알기 때문이지요. 그게 그의 말도 못 할 감수성의 변이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 “우리는 그가 그래서 필요하거든요.” “하…….” 그가 문고리를 다시 돌렸을 때, 로제리오는 테레사가 했던 모든 말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감을 느꼈다. 강한 충격이 지나갔다. 그래서 그가 필요하다며 쭉 설명했던 테레사가 소름 끼친 나머지 아무런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아마데우스의 테레사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즉, 한국의 아마데우스 전체가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저는 아직 제 자신이 큰 보배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니까요.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훌륭하신 로제리오 교수님.” 그 말을 끝으로 테레사가 밖으로 나갔을 때, 로제리오는 무려 두 시간 동안 같은 자세에서 흔들림 없이 앉아 있기만 했다. 시간은 결코 헛되이 보내면 안 된다는 그가, 1년 만에 찾아온 테레사로 인해 처음으로 두 시간을 마냥 흘러 보낸 것이다. 테레사 역시 집무 관 밖으로 나오자마자 자신을 기다리던 차에 올라탔고, 녹초가 된 전신을 추스르기 바쁘다. 오랜 만에 입은 아마데우스 예식복이 땀에 젖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1년이 사라질 수 있게 까만 시야가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비서에게 출발하라 이르며, 테레사는 승용차 뒤 자리에서 아예 드러누웠다. 피식 피식 웃음이 세어 나온다. 새벽이 진해질 때 테레사는 선글라스를 귀찮다는 듯 빼서 바닥에 버린 뒤, 조용히 속삭였다. “나타나라… 신혜성. 움직여라… 수페… …리우스.” 혁명 이후 1년 동안 모두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들의 대화가 의미하는 바는 대체 무엇인가? 갑자기 이게 무슨 스토리란 말인가! 자. 이제 당신이 확인하는 시간은 테레사와 로제리오 교수가 대화했던 시점에서 다시 1년 전으로 거슬러 간다. 그것이 당신이 읽는 아마데우스 2악장의 시작이다. wgreene@naver.com 06/03/20 아마데우스 2악장 0, 혹은 -1 훗날 제본으로 만들 때를 대비해서 문장 나열법을 1악장과 다르게 했습니다. 원래는 몽땅 붙이려고 했으나 그건 읽으실 때 힘드실 것 같아서 문장 부분만 살짝 띄웠지요. 다시 팬픽을 적어서 올리는 현재(비록 적어놨던 거라고 해도) 미안하고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 많네요. 항상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참. 피에스인데, 연재중인 것에는 답글 달 수 있게 하겠습니다. ^_~ wgreene. 화이트그린 덧글 12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0 혹은 -1편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0 혹은 -1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1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1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3/22 16:49 http://blog.naver.com/wgreene/110002755877 Amadeus 음악 : 내일은 비 - 내 머리 속의 지우개OST中(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내일은 비 (Classic)-미.. 2악장 1편 페르퀸트는 솔베이지와 사랑을 약속한 사이였어. 그는 거부의 아들이었지. 게다가 몽상가이면서 방랑 아였어. 헌데 거부라는 말이 다 뭐겠는가… 자신의 아버지가 무절제한 생활을 해 버린 덕분에, 그토록 많은 재산을 다 탕진하고야 말았는데… 그렇게 거부의 껍질이 벗겨질 때, 하필이면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 거야. 방랑 아였던 페르퀸트의 방탕한 생활은 쭉 이어졌지. 뭐… 방랑 이라봤자 돈을 벌기 위해 외국으로 나간 거지만… 말을 바꾸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별을 준 꼴이잖아. 그는 솔베이지와 함께 외국으로 나간 게 아니었거든. 어쨌든 고생 끝에 돈을 모았는데 고향에 돌아 올 때, 하필이면 산적을 만났어. 그래서 외국에서 번 돈 마저도 다 빼앗기고야 말았지. 결국 그에게 남은 것 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게 되었어. 게다가 세월이 많이 흘러서 그는 백발노인이 되었지. 그래… 근데 어머니가 살던 고향 오두막에 페르가 돌아왔을 때, 그를 맞이하는 것은 어머니가 아닌 바로, 연인 솔베이지였던 거야… 그녀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거든. 그게 솔베이지의 사랑이었으니까……. 자신을 기다려 준 솔베이지의 품에 안겨서 결국 페르퀸트는 죽어. 그 노래야. 깊은 안도와 한 순간의 평화와 함께 맞이한 죽음 앞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부른 솔베이지의 노래… 솔베이지는 어떻게 되었냐고? 그녀는 그 노래를 부르며 조용히 그를 따라 가는 거지… 울지 마. 너는 왜 이런 얘기 하나에 우는 거지, 수페리우스? 아마데우스에서 한 참 벗어나야 나타나는 정류장의 버스가 출발했다. 해는 모두 솟아 자연이 지저귈 일만 남았다. 또 세상은 원 없이 돌아가겠노라 으스대며 혜성의 뺨을 수 십 번 치고 지나갔다. 그 때 의 순간을 모두 기억 하고 싶다는 듯이, 혜성은 번번이 고개를 올렸다. 먼 허공을 향해 무언의 암시를 하듯이, 그는 꼭 돌아올 것을 향해 길길이 마법을 부리는 요술 지팡이로 변한 것처럼 보였다. 건드리면 펑 터져 사라질 것처럼 숭고해 보이기까지 하다. 적어도 그의 짐을 들어주는 짐꾼이 된 히스의 시선에는 그렇게 비쳤다. 버리려는 사람 같았고, 또 버리지 않으려고 고집을 피우는 사람 같았다. 히스는 그래서 정확한 것을 묻지 않고 버스에 나란히 오를 때까지 조용히 따라붙기만 했다. 혜성은 몇 번이나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했다. 근 며칠간의 기억과 자신이 아마데우스 학생으로서 누렸던 기쁨을 아예 잊기로 결심하니 마음이 편해졌고, 또 뜨거워졌던 탓이다. 그래서 자신의 짐을 빼앗다시피 들어주고 따라오다 못 해 버스에 동석하는 히스에 대해 염두 할 겨를이 없었다. 모든 교복을 반납하고 난 뒤, 평상복 이라는 것을 입지 않았던가. 한 참 전부터 떠들었음직한 히스의 음성이 인식 된 것은 버스가 출발하고서도 무려 이십여 분이나 지난 후였다. 혜성은 창가 방향에서 사람을 향해 처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해서, 전에도 느꼈지만, 너는 어깨가 작아. 키도 작아.” “…….” 음악 이야기를 했겠지. 그는 독일 아마데우스의 테레사라 불리고 있고, 지휘 전공이라고 했어. 그리고 이자벨을 한 때 뜨겁게 사랑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것은 나의 입학시험 연주 때 그가 이자벨을 보던 시선을 기억하면 소문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혜성은 그가 신기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히스클리프 폰 뤠겐부르크 라는 청년이 독일 정복을 입고 자신의 버스 뒷자리에 앉아 있는 게 현실 같지가 않아서였다. 또 그는 현실 사람 같지 않게 잘 생기기까지 했다. 그래,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이며 이상이고 거짓일까. 아마데우스 밖으로 온전히 벗어나도, 내 가슴은 그것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수목의 향기에 감탄을 터뜨리는데… “머리도 작고, 손가락도 작아. 발도 작아.” “…….” “입도 작아. 눈도 코도 작아. 몸도 작아.” 한국인이 하얗다라는 구분과는 판이하게 다른 우유 빛 피부는 히스의 녹색 눈을 돋보이게 한다. 짜라라 비명을 지르는 창 밖의 햇살은 히스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어서 오직 그에게만 빛을 쪼이는 것 같았다. 그는 작은 소녀들이 열광 할만한 가치가 있을 정도로 날씬하고 아름답고 멋진 사내였다. 뭐가 그리 작다는 것인지, 시큰둥한 표정으로 혜성의 몸을 훑어보며 중얼거리는 히스를 향해 혜성은 버스에 타서 처음으로 대답했다. “……마음이 커서 괜찮아.” “놀릴 때만 말을 하는 건가?” “…….” 히스의 눈이 말도 못하게 커졌다. 동시에 흙길을 지나치던 버스가 낯선 동네에 잠시 정차한다. 혜성은 히스를 정면으로 쏘아보며 날카롭게 물었다. “왜 따라 오는 거니, 히스? 산책 하는 중이라면서.” 이에 히스는 싱긋 웃으며 창 쪽으로 턱 짓을 하였다. 그의 샤프한 턱이 움직이는 것은 정말로 그림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도 사실주의 화백이 노련한 붓놀림을 시작하기 직전 열심히 크로키 중인 장면 같았다. “하프의 선율이 사라졌다 수페리우스. 봐.” 또 하프의 선율? 그 이야기를 꺼내면 내가 말아지는 줄로 아는 게 틀림없다. 혜성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야기한 밖을 응시하였다. 건조한 투를 내뱉고 싶지 않아도, 마음이 들뜨고 침체 된 것이 공존하는 관계로 그의 소리에는 색이 없었다. “…아이들은 거짓말을 했어.” “?” “네가 어딜 봐서 독일의 테레사 라는 거야. 테레사는 전혀 너 같지 않아.” “뭐…?” 아마데우스를 내 발로, 내 의지로 벗어났어. 테레사와 다시 만나기 위한 안녕을 했지. 그런데 태양이 떠오르려던 찰나에 아마데우스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줬어. 너는 잊어서는 결코 안 된다고, 너의 전부를 너는 잊을 수가 없을 거라며 진저리나는 싱싱함을 하프의 소리와 함께 보여주었어. 그리고 네가 나타났다, 히스. 공평한 저 하늘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너를 보여주더구나. 너는 무엇이니.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왜 따라오고 그래. 나는 중대한 일을 하고 와서 조용히 사색에 잠기고 싶단 말이야. 너 때문에 공상에 빠지지도 못 해.” “계속 해 봐.” “뭘?” 어깨를 웅크린 혜성은 이 상태에서 뒤 자석의 창문을 활짝 열면 밖으로 쏟아질 것처럼 한없이 작아보였다. 히스는 혹시라도 그가 창문을 열 것이 염려 되었는지 혜성의 어깨를 살짝 쥐었다. “글자만 읽다가… 가십으로만 너를 읽다가 직접 말 하는 걸 보는 게 신기해서 그래.” “내가 겪었던 일은 가십으로 족해. 떠들고 싶지 않은데….” “…….” 히스의 하얀 수건 같이 부드러운 손을 어깨 짓으로 치우며, 혜성은 긴 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이유야 상관없이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이라는 판단이 미쳐서이다. 적어도 짐을 들어주고, 용케 따라붙은 이유야 모르지만 히스라는 인물에게 혜성은 뭔가 말을 해 줘야 한다는 것을 감지한 것이리라. 그는 작은 입술을 이리저리 깨물다가 피유- 하고 숨을 내쉬는 것으로 첫 어절을 끊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까.” “우는 게 순서에 맞을 것 같은데 수페리우스?” 혜성의 어깨까지 살짝 고개를 당겨온 히스가 조각처럼 푹 파인 눈두덩 이를 들이대며 진지하게 물었다. 그의 행동에 당황한 혜성이 그의 안면을 손바닥으로 밀어낸다. 훤칠한 사내가 아이의 손바닥에 밀려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갔다. 또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하는 사람은 처음이라며 입을 딱 열었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낯선 사람과 흥을 낼 기분도 아닌 혜성이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밖을 응시했다. 그의 긴 속눈썹이 없는 바람을 빚었는지 추르르 떨린다. “그래… 내가 수페리우스가 아니라는 것부터 시작하자.” “…….” 하지만 혜성은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히스는 새벽이 사라질 때부터 입을 닫아버린 그가 정말로 사라질 것처럼 보였었던 아찔함을 기억해 냈다. 그래서일까. 혜성이 말을 하는 현재에도 히스는 그가 많이 궁금하고 신기했다. 오늘따라 히스는 새벽길을 걷고 싶었었다. 장소를 물색하던 중 아마데우스 근처를 서성이려고 마음먹을 때, 테레사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그는 어리둥절한 히스를 향해 아주 다급하게 소리쳤었다. 게다가 그는 워낙 경황이 없었던 탓에 상대가 히스라는 것을 알고 독일어와 한국어를 섞어서 사용하기까지 했다. 『 히스! 그래, 너밖에 없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 『 테…레사…? 』 테레사는 혜성이를 보살펴 달라고, 하지만 자신이 이런 부탁을 한 것은 말 하지 말아 달라며 흐느끼듯이 말했고, 그렇게 히스를 놀라게 했었다. 비록 그가 수화기 저 편에서 어서 뛰어 나가라고 고함을 치는 바람에 정신없이 아마데우스 정문으로 향하긴 했지만, 정말로 수페리우스가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었다. 게다가 테레사의 비명에 가까운 부탁이라니. 그의 그런 본능에 가까운 소리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히스는 천하의 테레사의 입에서 하이 톤의 소리를 터지게 한 장본인 인 수페리우스가 봐도봐도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태원에서 뭘 하게?” “……?” 아무 생각 없이 버스에서 내린 뒤, 혜성은 부랴부랴 따라붙는 히스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 “…그냥… …아마데우스에서 많이 떨어졌다고 생각해서 내린 거야.” “…….” 어느 동네여도 상관없다. 그저 몇 시간이 지나, 버스를 갈아타고 또 갈아타던 끝에 도착한 곳이 아마데우스 학교에서 많이 떨어졌다고 사려 되서 내렸다는 기똥찬 대답에 히스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가십 이상 가는 대단한 일을 겪은 게 틀림없을 텐데, 혜성은 자신을 수페리우스 라고 부르지 말라는 칼 같은 대답만 하지 않던가. 둘은 조용히 거리를 걸었다. 이태원 교회 근처에서 하차한 탓에, 상당한 외국인 들이 오가는 풍경이 낯설었는지 흠칫 흠칫 놀라는 수페리우스가 많이 귀여웠던 히스는 피식 웃었다. 교회 바로 근처에는 이태원 카톨릭 성당이 지어져 있었는데, 잘 걷던 수페리우스는 그 자리에서 멈춰서 한동안 정지해 있었다. 높은 십자가를 올려 보는 수페리우스는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싶었다. “한국이 아닌 줄 알았어… 버스가 외국에 도착한 줄 알았어.” “…이태원이라니깐.” 뭐야. 십자가를 보며 숭고한 말을 내뱉을 줄 알았는데, 고작 외국인 줄 알았다는 게 전부인가? 히스는 벙 찐 표정으로 다시 큰 골목 쪽으로 걷는 혜성의 뒤를 쫒았다. 갑자기 누군가에게 쫒기 듯이, 혹은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것처럼 걸음 속도가 말도 못하게 빨라졌다. 보면 볼수록 신기하다. 멈춰 있을 때는 목각 인형처럼 작은 미동조차 없고, 움직이는 것조차 러시아 인형처럼 투명하면서도 옅은 흔들림만 보인다. 그가 웃을 때는 어떤 인형이 연상될까? 히스는 이 생각들 덕분에 그의 미소가 많이 궁금해 졌지만 억지로 웃어 보라고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하철 역 근처의 진저 바를 지나칠 때, 수페리우스는 또 걸음을 멈췄다. 장사를 마친 한국인과, 두 명의 외국인이 문을 닫고 있었다. 그 모양새를 한 참이나 구경하던 그는, 히스가 당황하는 것 즈음이야 개의치 않고 다시 걸었다. 이번에는 차이나 시티와 디아블로 라는 곳에서 정지한 수페리우스가 닫힌 안 쪽을 열심히 상상하는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히스는 그 옆에 아예 짐들을 내려놓고 아이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게 해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둘은 또 빠릿 하게 걸었다. 이태원의 큰길가를 모두 돌았을 무렵, 혜성이 작은 골목 하나를 발견했는지 그 쪽으로 야금야금 들어간다. “?” 한 시도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그의 성격인가? 왜 기껏해야 길 하나인데 걸어가면 끝나는 것을 파고들지 못 해 안달인 걸까? 도통 그를 이해 할 수 없던 히스는 독일어로 중얼중얼 거리며 혜성이 빠져나간 틈새에 어정쩡한 자세로 끼었다. 덕분에 혜성이 되 돌아와서 자신의 짐 중 몇 가지를 들어 주었다. 혜성의 작은 몸 만 겨우 빠져나갈 정도의 틈새는 보기보다 많이 좁았던 탓이다. “!” 틈새를 겨우 빠져나온 히스는 가벼운 옷가지 짐들마저 털썩- 바닥에 떨어뜨렸다. 쾅- 하고 이른 오전부터 전신을 후려 차는 내면의 소리가 히스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절대 음감 이라는 흔한 별칭이 자신에게도 있는데, 틀림없이 그랬는데… 하며 자학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틈새를 빠져 나오려는 히스를 기다려주지 않고, 저 쪽 으로 달려간 수페리우스가 마냥 정지한 채 있는 장소는 다름 아닌 레코드 가게였기 때문이다. 하여, 히스는 전신이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목각 인형 이라고 칭한 것은 그가 아닌 자신이 된 기분이었다. 부지런한 레코드 가게 주인이 이른 아침부터 셔터를 올리고 장사를 준비할 때, 밖으로 터져 나오는 선율은 히스의 귀에도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저 작은 아이는 이 낯선 동네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여리하게 들리는 선율의 진원을 찾기 위해 골목 골목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나도 낯설어서 캐치해 내지 못 한 작은 박자를 좆아서 너는 여기를 찾은 거니? 히스는 저도 모르게 세어 나오는 신음을 참아내며 넋을 잃은 혜성의 근처까지 걸었다. “히스, 잠깐 멈춰 주겠니?” “?” 혜성은 히스의 옷을 쥐고 가랑잎처럼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히스는 멈추겠노라 대답하기도 전에 혜성의 제 멋대로 하는 행동 덕분에 마냥 듣기만 해야 했다. 아무래도 히스가 자신을 지나쳐 가거나, 다른 말로 자신을 방해 하려는 줄로 여겼나 보다. 아마데우스의 유일한 자퇴학생, 그러나 유일한 수페리우스였던 혜성이 즐겁게 입술을 열었다. “이 음악을 많이 들어봤었는데… 그래, 흔하지만 흔한 것으로 자리 할 만치 많은 사람들이 향수처럼 기억하고 있을 이것… 그저 애수라는 단어 밖에 떠오르지 않지만, 곡명은 그게 아닐 거야, 그렇지? 발랄한 바이올린의 선율이 끼어들 때조차 슬픔이 묻어나오는… 나는 이것을 국민 학교 때부터 배워서 알고 있었는데…….” “쿡…….” “왜……?” 귀는 여전히 활짝 연 상태에서 혜성은 위를 쳐다보았다. 선율은 가슴이 아플 정도로 잔잔하게 주위를 치장하고 있었다. 키가 작은 수페리우스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히스는 약간 어깨를 숙였다. 가까운 거리에서 속삭여 주는 히스의 입김이 간지러웠던 탓에 이야기를 듣는 종종 혜성은 어깨를 움찔 움찔 떨고 볼을 붉힌다. 재미있다. 귀엽다. 테레사의 수페리우스는 이런 사람이란 말인가? 왜 테레사는 이 사람을 나한테 갑자기 부탁한 걸까? “그리고 또 뭐가 느껴지는데? 곡명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 현재, 수페리우스… 너는 뭐가 그렇게 저미기에 걷던 것도 멈추고, 시련의 시간조차 잊을 만큼 음악을 얘기하잖아.” 그가 걷던 것을 멈춘 것이 아니라, 이 선율을 찾아 걸었다는 것을 히스는 물론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돌려서 말하기로 한다. 수페리우스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트인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작은 소년으로서는 감당하기 버거운 것들을 겪은 그가 안돼 보여서 이기도 했다. 혜성은 팔을 쭉 뻗어서 허공에 빙글빙글 돌렸다. 입술이 마저 웃지 않는 대신 그의 팔이 웃는 것이라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웃기지… 곡명이 떠오르지 않는데 나는 선율을 기억하는 이유로… 그게 슬프고 동화 되는 거야. 가슴이 아프고… 슬픈데, 계속 아팠으면 좋겠다는 처절함이 숨어있어. 만약, 이 아픔을 누가 떨쳐 주겠노라 네 고통을 너를 위해 지워 주겠노라 상냥하게 말을 붙여도, 나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이 음들이 그래” “…….” 한없이 투명한 순수함이 혜성의 눈동자에 묻어나고 있다. 그 빛이 말도 못하게 반짝일 때, 히스는 어깨를 펴려던 것을 관두었다. “오래 전이 떠올라… 그래… 그 때도 그랬어. 히스… 내가 성가대의 소리를 궁금해 했던 게 아마데우스로의 첫 출발 이었다고 말 했던 것을 기억하니…?”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그걸 잊겠습니까.” “만약, 내가 그 때 확인한 거대한 아마데우스 성당… 미카엘 성가대의 목소리가 그 닥 예쁘지 않았더라도, 나는 반했을 거야” “……어…째서?” 히스의 안면은 아예 혜성의 뺨에 붙이다시피 가까워졌다. 아이는 그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상하다. 이상한 일이다. 비록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테레사가 아끼는 수페리우스는 적어도 이자벨처럼 한 눈에 아름다움이 느껴지거나 놀라운 재능이 뒤범벅이인 유형 일 줄 알았는데… 작은 새처럼 지저귀기만 하면서도 사람을 빨아들이는 능력을 지닌 이 사람은 혹시 진짜로 인형이 아닐까? “그건 설명할 수 없는 거야. 정혁이가 얘기해 준 감수성의 변이 라는 것 때문일까… 무중력에서 둥둥 떠다니다가 누군가가 확 잡아채는 그 기분… 떠날 수 없는 집착이 시작 되는 건데… 나는 그것을 너에게 설명 해 줄 수가 없어. 백 번을 설명해도 너는 내가 아닌 이상, 아마… 이해 할 수 없을 거야.” “다시 A단조로 시작되고 있다…….” “그래…….” 곡명이 생각나지 않지만 그 느낌은 누구보다 잘 설명할 수 있노라 기쁘게 떠들던 혜성이 다시 조용해졌다. 히스의 말마따나 어림잡아 A단조쯤 되는 음이 다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음이라도 듣는 즉시 알아채는 히스의 재능이 자신에게 없어도, 지금 혜성은 충분히 즐거운 상태였다. 자신은 아마데우스를 떠나겠다고만 했지, 결코 음악을 두 번 다시 안 듣겠다는 선언은 감히 못 하지 않았던가. 하늘은 선물을 내려 주듯이 나에게 음악에의 휴식을 주셨어. 낯선 이태원의 골목에서, 또 낯선 이와 함께 짐을 내려놓고 경청하는 선율은 가슴이 아릴만큼 전신이 간지러울 만큼 황홀했다. 오르페우스 관에서 수도 없이 들었던 번쩍 번쩍 한 악기의 소리가 아닌, 길거리 평범한 음악이 주는 감동은 자신의 현재와 아주 잘 어울리기도 하다. 만약, 지금 자신이 오르페우스 관에 있다면 틀림없이 어떤 음악을 들어도 그것은 위로가 될 수 없었을 테니… 혜성의 표정과 허공에 박자를 휘두르는 손 짓, 낮은 허밍까지 샅샅이 살피며 한 참 동안 있던 히스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나는 그냥… 너를 네가 가는 곳 까지 짐 만 옮겨 주려는 게 오늘의 목적 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 “예전의 테레사가, 그 허망한 소프라노 소리를 듣고 왜 단 번에 너란 아이를 수페리우스로 정했는지 나는 알 것 같아졌거든.” “?” “독일 아마데우스의 테레사라 불리는 입장이라서 그런 걸까. 뭐… 좋다. 이유야 붙이기 나름이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페르 라는 인물이 있는데…” “?” “그가 방랑의 길을 떠났지. 그 주인공 페르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솔베이지… 솔베이지의 영원한 사랑을 노래 한 거다.” “솔베이지!” “쿡…….” “그래! 솔베이지였어! 어디서 많이 들어봤다 싶더라니… 솔베이지, 솔베이지였어! 하하하! 히스! 솔베이지!” “그래 그래….” “하지만 어떡하지? 나는 바이올린은 잘 모르는데… 내가 이걸 연주 할 수 있을까?” “…….” 히스의 얘기를 먼 나라 소식처럼 넋을 잃고 경청하던 혜성이 자지러지며 좋아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손뼉을 치던 것을 중단하고 선율에 쓰인 바이올린을 걱정하며 시무룩하게 쳐 지는 게 아닌가! 히스는 기가 막혔다. 도대체 몇 번씩 오고가는 아이의 변화, 그 박자를 이해하기 어려워서였다. 계집아이들이 보통 그런 식이기는 하지만 그건 히스의 앞에서 잘 보이기 위해 종종 그럴 뿐이지 대다수는 그렇지도 않다. 그럼, 수페리우스가 계집아이라는 소린가? 아니, 그는 현재 아주 절망의 상태 혹은 포기의 바닥에서 울음을 터트리고 한탄을 거듭해야 하는 게 순서에 맞지 않을까? 어떻게 절망 이라는 상태를 익숙하게 진행 시키는 거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히스는 차츰 침울해 졌던 수페리우스가 자신을 부르는 탓에 정신을 차렸다. “히스.” “?” “아니면, 불러 볼 수 있을까?” “당연하지.” “…나는 미친 걸까 히스…….” “?” “내가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너를 붙들고 무슨 소릴 하는 걸까… 고작 몇 시간 전에, 자퇴서를 냈는데.” “잠깐만 기다려.” “…….” 히스는 곧장 레코드점 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함박웃음을 머금고 나오는 게 아닌가. 게다가 그의 손에는 따뜻한 커피까지 쥐어져 있었다. 혜성의 가슴에 봄이 불어왔다. 여름의 오전이라지만, 오늘따라 바람은 추웠던 탓일까. 봄의 바람이 살레살레 불어주는 현재, 혜성은 온 몸이 자상한 진흙에 덮이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여기 앉자.” “?” 레코드점 주인이 히스의 정복을 알아보고 그의 부탁을 들어 줬다는 것이다. 바로 혜성의 넋을 사로잡아버린 지금의 음악을 자신들이 자리를 뜰 때 까지 쭉 틀어 달라는 부탁을… 그런 어울리지 않는 무모한 면을 당당하게 자기 식대로 하는 모양은 꼭 테레사와 닮아 있다. 혜성은 그제 서야 편안하게 커피를 홀짝이며 그가 야기한 레코드점 옆의 사각 박스에 주저앉았다. 음악이 한 결 더 미세한 부분까지 잘 들려왔다. 하지만 그 세포처럼 작은 부분까지 파동을 보이게끔 하는 솔베이지 선율은 모처럼 찾아온 여유를 동반하여 혜성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기도 한다. “흐이이….” “!” “흐이이이이…” “!!” 결국 망설일 틈도 없이 가슴이 시키는 대로 쭉 쭉 눈물을 흘리고 옹알이 하는 아기처럼 그 소리 내뱉는 혜성의 타령이 이어졌다. 히스는 또 펄쩍 뛰며 당황했다. 듣고 싶어 하는 음악, 실컷 들으면서 쉬라고 커피까지 받아 왔는데, 흐이이 소리까지 그대로 읊으면서 아이처럼 우는 수페리우스라니! 가십 기자들은 모두 소설 작가들이 아닐까? 이런 녀석이 어떻게 수페리우스지? 이 녀석은 혹시 테레사 앞에서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한 배우 출신이 아닌가? wgreene@navear.com 덧글 2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1편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1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2편 ▼ 다음글 - 2악장 0 혹은 -1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2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3/22 17:01 http://blog.naver.com/wgreene/110002756184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 Amadeus 음악 : Dust In The Wind (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Dust In The Wind-Sarah.. 2악장 2편 “흐이 흐이이이. 이. 이이이…” “음… 음악이 슬픈 건가?” “……흐이이이….” “!”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물을 떨어뜨린다. 뭐라도 해 줘야 할 것 같다. 안아줘야 하나? 아무리 카사노바로 평이 자자하다지만, 이런 작고 마른 녀석을 무슨 맛에 안아 준단 말인가! 히스는 진심으로 고민하게 된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그만 실소를 터뜨렸다. 히스의 실소 즈음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이라는 듯이 혜성은 바닥에 뚝 뚝 굵은 방울을 떨어뜨리기만 한다. 저 음악은, 이 작은 녀석에게 많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틀림없다. “들으면 다 생각나고 알겠지만… 그래도 자세히 설명을 붙여볼까….” “모… 모올… 히이….” 도대체 언제까지 울려는 거지? 이러다가 그의 몸에 있는 피까지 몽땅 눈물로 변해서 나오겠어. 망측한 상상까지 하게 된 히스는 자신의 이런 생각마저 우스웠던 탓에 피식 피식 소리를 내며 천천히 허공에 언어를 빚었다. “페르퀸트는 솔베이지와 사랑을 약속한 사이였어.” “…….” 이럴수가. 솔베이지와 페르의 이야기를 꺼내기 무섭게 히이이 하던 것을 중단한다. 그제 서야 커피를 들이키는 혜성의 패턴이 통 적응이 안 된 히스가 독일어로 중얼중얼 몇 마디를 읊더니 혜성이 어서 다음 말을 하라는 듯 부추기자 흠칫 놀라서 생각에 잠기는 눈동자를 그렸다. 독일 아마데우스의 테레사라 불리는 사내가 바람과도 같은 어절을 읊는다. 이제 이 곳은 화려한 아마데우스도, 성당도 아닌 길거리 구석이라지만 솔베이지가 사는 향긋한 풀냄새 고향으로 바뀐다. “그는 거부의 아들이었지. 게다가 몽상가이면서 방랑 아였어. 헌데 거부라는 말이 다 뭐겠는가… 자신의 아버지가 무절제한 생활을 해 버린 덕분에, 그토록 많은 재산을 다 탕진하고야 말았는데…” “…….” 병아리처럼 찰 싹 달라붙어서 히스의 이야기에 진지해진 낯을 끄덕이는 수페리우스의 머리칼을 저도 모르게 쓰다듬는다. 솔베이지의 선율이 연기처럼 주변에 맴돌 때, 둘은 조용조용 떠들며 낯설었던 현재까지의 만남을 순식간에 완화 시킨다. “…그렇게 거부의 껍질이 벗겨질 때, 하필이면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 거야. 방랑 아였던 페르퀸트의 방탕한 생활은 쭉 이어졌지.” “방…랑?” “뭐… 방랑 이라봤자 돈을 벌기 위해 외국으로 나간 거지만… 말을 바꾸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별을 준 꼴이잖아.” “왜?” 조용히 앉아 있으면 오죽 좋겠느냐만, 이 궁금증 많은 작은 입술은 틈만 나면 왜? 왜? 하면서 말을 가로막았다. 히스는 하는 수 없이 왜 라는 질문을 하면 얘기를 여기서 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는 솔베이지와 함께 외국으로 나간 게 아니었거든. 어쨌든 고생 끝에 돈을 모았는데 고향에 돌아 올 때, 하필이면 산적을 만났어. 그래서 외국에서 번 돈 마저도 다 빼앗기고야 말았지.” “…….” 왜? 라고 물어 보라고 계속 시킬 걸 그랬나? 히스는 몽롱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건 혹시 수페리우스가 아니라 저 자신이 아닌지 되물어야 할 판이었다. 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머리 위에 솟을수록 둘의 찬 공기가 사라지는데도 싸아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에게 남은 것 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게 되었어. 게다가 세월이 많이 흘러서 그는 백발노인이 되었지.” “…….” 정말 대답을 하게 할 껄 그랬나? 라는 히스의 눈치에 굴하지 않고 바닥을 응시한 채 고개만 끄덕이던 혜성이 진심으로 그의 얘기에 동화 되었는지 작은 미동조차 없다. “그래… 근데 어머니가 살던 고향 오두막에 페르가 돌아왔을 때, 그를 맞이하는 것은 어머니가 아닌 바로, 연인 솔베이지였던 거야… 그녀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거든. 그게 솔베이지의 사랑이었으니까…….” “!” “왜, 왜.” “아니야.” 그 때, 번쩍 고개를 들어 마주 보는 혜성 덕분에 히스는 턱을 뒤로 당기며 놀란다. 혜성은 솔베이지의 마음과 또 페르의 마음을 동시에 깊이깊이 느끼고 있었다. 이것은 어린 시절 한 번은 듣고 지나친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세월 이라는 강을 건너면서 숱한 기억들과 부딪히던 탓에 잠시 잊긴 했지만, 지금처럼 다시 떠올리면 기억이란 새로이 새겨지는 것이다. 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수페리우스를 아예 포기한 히스는 나른한 어절을 읊었다. “자신을 기다려 준 솔베이지의 품에 안겨서 결국 페르퀸트는 죽어.” “…….” “그 노래야. 깊은 안도와 한 순간의 평화와 함께 맞이한 죽음 앞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부른 솔베이지의 노래…”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됐을까?” 다짜고짜 히스를 똑 바로 쳐다보며 묻는 혜성의 가슴이 쿵쾅 쿵쾅 뛰어댄다. 사랑 이라는 공유는 사람이 아닌 이야기 속에서도 이처럼 파동을 보인다. 이야기도, 결국은 사랑을 품은 사람의 영혼이 빚은 산물이기 때문이다. 테레사와 이민우와 정혁과 자신. 서로 서로의 얽혔던 사슬이 이야기에 결부 지어지면서 견딜 수 없는 오라가 미치는 데, 혜성은 미적지근한 표정으로 말만 내놓는 히스가 그래서 얄미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히스, 그는 진짜 사랑을 경험해 보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솔베이지는 어떻게 되었냐고?” “그래!” 저도 모르게 꽥 소리를 치며 혜성은 고여 있던 향수를 흘렸다. “…그녀는 그 노래를 부르며 조용히 그를 따라 가는 거지… 울지 마. 너는 왜 이런 얘기 하나에 우는 거지, 수페리우스?” “…….” 네 이야기를 통해서 나의 것들이 보여서 그래… “고마워… 지금 당장 이것을 계속 듣고 싶었거든… 그리고 네 이야기도 듣고 싶었나봐….” “…….” 솔베이지의 사랑 이야기에 눈물을 보인 혜성이 살며시 웃으며 추억의 강을 벗어나려 한다. 그는 자신이 겪은 사랑과 찢어진 추억을 이로서 겨우 뒤로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히스는 여전히 낯선 사람이고 나의 이런 자잘한 부분을 동완이처럼 알 리야 없지만, 참 이상하지. 그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눈물은 더 이상 흐르지 않지만, 그 이상으로 붉어진 수페리우스의 눈동자가 말한다. 허공에 실리는 잔 념을 훌훌 불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그는 명상에 빠진 공허한 눈동자로 히스가 아닌 세상에게 화답하듯이 움직였다. “근데 어떡하지… 아마 질리는 때는 없을 거야. 나는 한 번 뭐에 빠지면 질리다 라는 것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거든….” “…….” “마음이 아파… 솔베이지는 얼마나 슬펐을까…….” “네가 마음 아프다는 평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지. 이건 연주 형식이…” “그런 건 나중에 알아도 돼… 영원한 사랑을 읊는 기약 없는 기다림에 솔베이지는 스스로 즐거움을 찾고… 그것은 가끔 이었겠지….” “.....” “내가 이것을 불러본다면, 나는 솔베이지를 이해 할 수 있게 될까.” “!” “너는 그냥 가… 히스… 짐은 여기에 놓고….” 계속 같은 톤으로 중얼거리는 혜성은 지평선 끝에서 한 참은 솟아버린 태양을 올려보며 히스를 챙겨 주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테레사의 부탁을 받은 이상, 또 자기 스스로도 확고한 결심이 섰기 때문에 히스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 대신 대화를 시도해 보았다. “…페르귄트를 위한 부수음악 중에 하나지. 초연 된 시기가… 1876년 인 걸로 기억하는데, 네가 걱정하는 것과 별 개로. 이건 당연히 피아노용으로 편곡 된 것도 있어.” “정말? 정말이니?” 괜히 지휘 전공이 아니지 않겠는가. 사람과 대화하다 보면 특성 정도야 쉽게 캐치하는 히스가, 작은 수페리우스의 구조를 몽땅 알아챘는지 그의 표정을 바꿔버렸다. 테레사보다 약간 더 큰 키를 자랑하는 히스가 쭈욱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켠다. 그러자 혜성이 눈빛을 빛내며 따라서 일어섰다. 이태원 골목 구석까지 한 낮의 태양이 몸을 기댄다. 이제 커피가 아니어도 두 사람은 따뜻해 질 수 있게 되었다. “당연한 것 아닌가… 그건 어느 곡이나 할 것 없이…….” “…좋다…….” 히스는 자신의 결심에 종지부를 찍었다. 무엇인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테레사가 봤던 그 무엇 이라는 놈이 자신에게도 미친 것 만은 확실했다. 만약 이대로 혜성을 보내 버린다면 자신은 평생 아쉬워 할 게 안 봐도 자명한 일이다. 이럴 수가. 이렇게 되고 보니, 테레사가 자신에게 부탁 한 게 고마워질 정도다. 어쨌든 그는 가십으로 만족해야 했던 한국 수페리우스를 직접 겪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분석적인 생각이 그에게 파고들어왔다. 하여, 히스의 눈빛이 아주 잠깐이지만 시베리아의 연못처럼 차게 얼었다. 그것은 찰나의 순간이어서 본인 이외에는 눈치 챌 수 없을 정도였다. 자, 수페리우스. 너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지? 너는 한국 아마데우스와 내가 아는 극과 극의 인물들을 모두 파멸로 흔들어 버렸다. 지금의 너는 갓난아이 같아서,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고 사실 믿지 않는 상황이지. 그걸 내 앞에서 서서히 증명해 봐라. 소문을 듣자 하니, 존경하는 테레사의 양 쪽 눈이 너 하나 때문에 빛을 잃었다고 한다. 만약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에 대한 놀라움과 분노는 잠시 잊어주지. 그러니, 너는 반드시 앞으로의 시간에 걸쳐 인내심 강한 나의 납득을 얻지 않고서는 벗어날 수 없을 거다. “집으로 갈 거야,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가 아니야.” “수페리우스야.” “아니야.” 그는 말이 없다가도 자신을 놀리는 소리가 들리면 즉각 반응을 보인다. 귀여운 사람이다. 그냥 귀여운 사람일 뿐이다. 음악과 학교가 현재 공존하지 않아서 그렇게만 보이는 걸까? “수페리우스야.” “…너 왜 그래. 넌 나를 잘 모르잖아.” 혜성은 일부러 차갑게 대답하고, 또 그의 손에서 짐 까지 몽땅 뺏어 왔는데도 졸졸졸 따라오는 히스가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집으로 갈 생각은 물론 없었다. 자신은 아마데우스에 입학 하는 순간부터 완전히 혼자가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았던가. 어머니는 음악을 좋아하셨던 아버지를 싫어했었다. 때문에 혜성을 자식 취급 하지 않겠노라 못을 박으셨고, 그 증거로 아마데우스에 생활하는 내내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으셨다. 아직 집에 찾아가는 것은 순서에 맞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히스라는 녀석이 없어 져야지만 제대로 앞일에 대해 계획을 짜 볼 텐데 통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너의 가십은 외울 정도로 많이 읽었다. 흥미로웠거든. 테레사 못지않게 너도 재미있어서….” “나는 장난감이 아니야.” 괜히 맞장구쳤나? 라고 후회하기 무섭게, 역시나- 히스의 경쾌한 대답이 나왔다. “그래 너는 수페리우스야.” “아니라니까…….” “신…혜성… 그건 발음이 익숙치가 않고 잘 안 돼.” “…이제 부를 일 없어. 넌 가던 길 가.” “집으로 갈거니?” “…아니.” “왜?” 두 사람은 다시 버스 정류장에 돌아왔다. 혜성은 이태원의 레코드점에 다시 가 볼 생각에 어서 히스를 버스에 태우고 싶어 했지만, 그는 막무가내로 굴었다. “빨리 가….” “따라 와.” “……?” 게다가 혜성이 짐을 바닥에 내려놓는 것과 동시에 훌쩍 제 것처럼 쥐더니 등을 돌리는 게 아닌가. 히스! 라고 소리치려던 혜성이 그의 다음 말에 그만 멈칫 한다. “배고파.” “아… 나도.” 그리고 저도 모르게 대답 해 버리고야 말았다. 많이 긴장했던 지난날이 사르르 녹아내려서, 지금의 혜성은 솜털처럼 가벼운 상태여서일까. “풉.” “…왜…?” “아니다. 빨리 밥 먹으러 가자.” “…….” “안 먹어?” “밥 먹고 넌 가던 길 가는 거다?” “후식 먹으면서 생각해 보마.” “…후식? 우리 후식도 먹니? 뭐?” “…….” “…왜?” 잠시 눈을 크게 뜨던 히스가 콧김을 푹 푹 내뱉더니,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이 허리를 젖혀가며 시원하게 웃는다. “하하하하하-” “……?” 이렇게 단순한 사람이 어떻게? 라는 물음표가 히스를 어지럽게 했지만, 그럴수록 상상과는 다른 수페리우스의 모습이 귀여워서 견딜 수 없었던 탓이다. 긴 시간 두고 보기로 한 이상, 하나하나 알아가기로 했기 때문에 히스는 마냥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 하! 하하하하-” “넌 정말 이상한 사람이구나 히스. 뭐가 독일의 테레사 라는 거람… 뭐가… 테….” “! 가자. 얼른 가-” 둘은 어느새 성당을 지나쳐 넓은 골목길로 돌아오게 되었다. 또 테레사 라는 말에 금 새 표정이 바뀐 혜성이 멈칫거리자, 놀란 히스가 큰 소리로 재촉하기 바쁘다. 히스는 넓은 번화가를 쭉 걷다가 중간에 있는 골목에 익숙한 걸음으로 들어섰다. 그대로 쭉 걸어 가려던 혜성이 외려 당황해서 그의 뒤를 쫒는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아까의 레코드점에서 그닥 멀지 않은 지점이었고, 낡은 간판이 대낮에도 번쩍 번쩍 빛나는 Lumpen 이라는 재즈바였다. “룸펜?” “독일 사람들이 자주 오는 곳이다.” “룸펜이 뭐야?” “부랑자. 방랑자.” “오… 그럼….” “Guten morgen!” 히스는 도어를 여는 즉시 우렁찬 인사를 던졌다. 혜성이 깜짝 놀랄 정도로 큰 인사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어두운 저 쪽에서 똑같은 인사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무래도 이 곳은 히스가 한국에 올 때면 단골로 들리는 곳임에 틀림없었다. 히스가 자신과 똑같은 국적을 지닌 듯 한 주인과 몇 마디를 주고받고 올 때 까지, 혜성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멍청하게 서서 내부를 둘러보았다. 엉망진창일 줄 알았는데, 그것 보다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대낮인데도 사람을 들뜨게 하는 곳이다. 나무 목재로 건축한 탓일까. 사방에서 뿜어지는 목재 향은 마치 스위스 오두막에 있는 기분에 젖게 한다. 가운데에 있는 낮은 무대와, 마이크, 또 작은 피아노가 인상적이다. 아니, 인상적이다 라는 표현 이상의…! 아직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커다란 것을 깨달은 혜성이 피아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려던 때, 마침 주문을 마친 히스가 부랴부랴 아이의 손을 잡고 창가 쪽 테이블로 안내했다. 자리마다 장식용으로 세워진 위스키 병 진열이 고풍스럽기보다, 자유롭게 느껴진다. 그래. 히스와 참 잘 어울리는 곳이다. 히스가 주문한 음식은 십 분도 지나지 않아 나왔다. 스프 따위가 나올 줄 알았는데, 장소와 맞지 않게 김치와 밥이 나오자 이유 물을 새도 없이 정신없이 먹기 바쁜 혜성은 더 이상 분위기 따위를 살피지 않았다. 자신보다 더 개걸스럽게 우장창 먹기 바쁜 히스를 힐끔 보니, 그제 서야 안정감이 들었다. “나는 알고 있어.” “뭘 말입니까 수페리우스군?” 뒤이어 나온 후식 아이스크림을 스푼으로 뜨며 혜성이 진지하게 말했다. 고춧가루가 끼었다고 놀리던 히스가 키득키득 웃던 것을 중단한다. 혜성은 입을 가리고 물을 마시더니 주변을 둘러보며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휙- 센 바람이 히스의 내면에 불었다. 아마 이 바람은 저 작은 수페리우스의 내면에는 진즉에 스쳤을 것이다. 그의 변한 눈동자를 보면 이젠 알 수 있다. 혜성은 재즈 바와, 피아노, 그리고 무대와 마이크를 보는 순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배가 채워진 지금에서야 꺼내려는 것이다! 그리고 히스의 그 예상은 모두 맞았다. 혜성은 들뜨는 기분을 억지로 참아가며 부들 부들 손도 떨었기 때문이다. “…네 앞에서는 원래의 나처럼 굴 거라고 약속하지.” “…?” “나는 이제부터 밑바닥까지 제대로 떨어져 볼 계획이다 히스!” “!” 그렇지만 이런 대답을 예상한 건 아니었는데…. 다시 아마데우스에 가서 자퇴서를 취소하겠다, 혹은 다른 학교를 알아보겠다 따위를 기대했던 히스가 입에 물고 있던 스푼을 툭 테이블에 떨어뜨렸다. “자. 어서 도망가” “!” 게다가 도망가라고까지 한다. 낭패의 빛을 띠는 히스에 반해 혜성은 아주 즐거워서 목소리의 높낮이가 사정없이 오르내리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혜성은 이태원에 온 것, 그리고 히스가 이 곳에 데려온 것 모두를 스스로의 운명이라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데우스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이 아니야. 내가 벗어났어. 내가 원한 길 끝에 나의 발이 밟은 곳이지. 그렇다면 분명히 내가 쓰일 곳이 있을 거야! 실로 오랜만에 잊었던 감각이 혜성의 파란 내면에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나는 어리 숙한 내 모습을 알고 있지. 대화 하다 보면 나의 의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웃고 만만하게 볼 때가 많다. 나는 잘 알지. 나를 내가 잘 알고 있어.” “수페리우…스?” 이 때 히스는 커다란 망치로 얻어맞은 꼴을 부인 할 수 없었다. 그는 알고 있다! 자신이 봤던 시선마저 몽땅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천진난만함은 그의 악이 아니라 그의 선으로서 스스로 이용할 정도라는 것이다! “네 앞에서는 그렇게 계속 굴 거다. 본 모습을 한 사람 쯤에게 보여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도대체…” “내가 다른 모습을 남 앞에서 취해도 놀라지 말라는 뜻으로 한 소리야.” “…내가 널 데려가려는 것도 알고 있는 건가…….” “테레사의 부탁이 있었겠지?” “!” 테레사까지 모두 예상하고 있었단 말인가? 혜성을 아주 단순한 성향으로만 판단했던 히스는 자신의 판단미스를 제대로 깨달았다. 그는 전혀 단순하지 않다. 그럼 솔직한 걸까? 그렇다고 그게 전부가 아니다. 그는. 그는… 모르겠어, 수페리우스. 너를 더 꾸준히 봐야 나는 알겠어. “미리 말 해 둘 게 있는데, 네가 방금 나의 지껄이는 소리들을 통해서 무엇을 느꼈는지 나는 몰라. 하지만 네 표정은 뭘 느꼈는지 깜짝 놀라더라. 너는 나에게서 어떤 영감을 느껴도, 나에게서 테레사는 될 수 없어.” 무섭도록 진지하게 선을 긋는 혜성의 시야에서 이제 히스는 귀찮은 인물이 아니다. 그를 떼어 버리는 것 보다 중요한 것들이 시선에 잡혔을 때, 히스는 무의미해진다. 늘 자신은 그래 왔었다. 아마데우스에서 학생들이 자신을 애송이라고 불러도 돌진할 수 있는 기력은 늘 이런 식으로 숨어 있었다. 나아가기 위해서는 사람은 기다리고, 다듬을 줄도 알아야 한다. 그래! 나는 다듬기 위해 현재를 기다린다. 음악을 버리지 않고 기다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야. 솔베이지, 솔베이지의 노래를 들었던 아까처럼!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동완이한테 배웠어.” “…뭘!” “나에 대해서 제대로 밝힌 뒤, 적정선을 긋고 서서히 친분을 쌓는 방법.” “?” “네가 만약 원래의 오래전 내 모습부터 쭉 지켜봐 온 친한 사람이라면 지금쯤 이런 말도 했을 거다.” “…뭐라고?” 이제 마구 놀라고를 반복하는 쪽은 히스로 바뀐다. 그는 짧은 시간 동안 확실하게 말을 꺼내는 혜성을 주워 담기에도 벅찼기 때문이다. 혜성은 나직이 웃으며 속삭여 주었다. 오후의 미명이 둘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이제 한여름의 더위가 느껴진다. “변했구나.” “!” “변했구나 혜성아 라고.” 그리고 과거의 바람이 송살하게 피부를 스쳐 지나간다. 어쩐지 자신이 입학했던 시절은 오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솔베이지의 이야기처럼, 테레사의 손을 잡은 그 이야기는 까마득하기만 했다. 가슴이 말도 못 하게 뛴다. “뭐… 원래는 바보였다는 건가?” “비슷해.” “그럼 지금은 바보가 아니라면 뭐지?” “지금도 바보야. 애송이라고 부르거든.” “애송이는… 무슨 뜻이지?” “바보라는 뜻이야.” “???” “하하하-!” 상대의 모습에 웃는 위치도 혜성으로 바뀌었다. 히스는 그를 알면 알수록 목이 말라서 갑갑할 지경이었다. 두고 보자- 너를 알아내겠다- 따위의 결심마저 히스를 잡아 주지 못했다. 막무가내로 내 멋대로 잘 해 보겠다 식으로 떠드는 혜성을 그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기에 빨아들이기만 한다. 그 덕분에 히스는 방금 혜성이 시원하게 목청 높여 웃는 포인트까지 놓쳤다. 그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글쎄… 내가 보는 수페리우스는 저돌적이지만 순수한 면이 많아서 귀여운 줄로 알았는데… 지금 보니까 냉정….” “그렇지!” “?” “앞으로 내 입으로 먼저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전 까지, 너는 아무 말도 말아 줘.” “견딜 수 없을 텐데…?” 너는 아마데우스와 음악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뮤즈로서 견딜 수 없을 텐데? 라는 뉘앙스를 전달하는 동시에 히스는 쾌재를 외쳤다. 짧은 시간이지만, 지켜본바 이런 화제를 꺼낼 시엔 수페리우스는 기가 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히스의 판단 미스였다. 스스로에게 활력을 불어넣고 계획을 구상한 이상, 혜성은 전혀 흔들릴 짬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혜성은 저릿하게 웃으며 상냥한 대답을 했다. “…너는 역시 독일의 테레사가 아니야.” “수페리우스!” “왜.” 수페리우스라고 부르지 말라며 화를 내지도 않는다. 이젠 그러던지 말던 지 개의치 않겠다는 건지, 재즈 바 내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까지 한다. 독일어를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에 대해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혜성의 소리를 듣던 도중, 히스가 폭발하듯 소리쳤다. “나랑 독일로 갈래? 내가 증명하지. 내가 왜 테레사라 불리는지!” “너나 가.” “…음악에 대한 함구… 그럼, 아마데우스에 대한 것도 안 돼?” “니가 왜 나랑 같이 움직이는지는 모르겠는데, 안 돼.” “음…….” 미간을 찌푸리는 히스를 싱글싱글 마주보며 어깨를 주 욱 편 혜성은 한 웅 큼 자란 듯싶었다. 무궁한 빛은 반대로 혜성에게만 쪼이는 기분이다. 히스가 뭐라고 한마디 더 하려던 때, 탁자를 탁 치며 혜성이 물었다. “어디까지 따라 올 계획인 거지?” “왜 그렇게 밀어내려고 해?” 그리고 아주 무서운 눈으로 혜성은 경고하듯이 히스를 본다.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갈 거야. 내 성격조차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끼일 거야.” “바닥에 떨어지기 위해서?” “그래.” “예민한 사람이구나, 수페리우스는… 가십을 보면 안 그런 것 같던데….” “가십 얘기 하지 마.” “쫑알 쫑알 말도 많고…….” “가던지 말던 지 맘대로 해라.” 자신의 짐을 어깨에 짊으며 일어서는 혜성의 등에 대고, 히스는 그제 서야 정신을 차렸는지 여유로운 투를 흘렸다. 둘을 가르는 이름모를 노랫소리가 구수하게 퍼지고 있었다. “너는.” “…….” “너는 이미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다, 수페리우스.” “……?” 혜성의 어깨가 멈칫 하더니 두 걸음도 못 가서 멈췄다. 저 쪽 레코드를 정리하던 주인이 아름다운 정복을 입은 사내와 한국 사내를 힐끔 응시하고 있다. 폭포처럼 웅장하게 터지는 히스의 음절 하나하나에 혜성의 심장이 쿵 하니 내려앉았다. 늘 무언가를 알게 되었을 때면 저도 모르게 소스라치는 영혼이 억눌렀었다. 그 기분이다.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너는 나를 모른다고.” “!” 혜성이 짐을 진 채로 돌아보자, 히스는 상냥하게 웃으며 강하게 대꾸하였다. “네가 나에 대해서 아는 게 대체 뭐가 있지? 이름 석 자는 모르는 사람과 말 하다 보면 나오게 되고, 기억하게 되는 거다. 자, 그 이상으로 아는 것을 떠들어 봐.” “…….”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너의 작은 짐 중에 하나가 된다. 어때.” “…….” 히스는 자신을 하염없이 쏘아보는 혜성의 코앞까지 와서 그의 어깨에 걸려있는 무거운 짐들을 툭 툭 쳤다. 그리고 약간 인상을 쓰며 자신의 소매로 그의 입매에 묻어있는 반찬국물을 닦았다. 허리를 숙였고, 난감해 하는 혜성의 선한 눈동자와 마주친다. 짝! 하고 손뼉이 마주치는 것 보다 강한 스파크가 서로에게 마구 엉켰다. “사실은 외롭고 두려웠지? 그렇지만 너는 안심하기는 일러. 나는 가방 일 뿐이니까. 짐이 추가 되어봤자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거든.” “…너의 스케줄은 어떻게 되는 거니…….” 환호성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새로운 것을 기다리던 히스는 그 기분을 누르며 씨 익 웃었다. “짐짝의 스케줄은 주인 손에 달려있다.” “너는 한국말을 나보다 잘 하는 것 같다 히스.” “테레사랑 1년만 같이 살아 봐라. 뭐… 욕부터 배울 때도 있지만.” “…욕? 어떤 것?” 바 주인에게 값을 지불한 뒤, 날아갈 것처럼 가벼운 스탭과 함께 밖을 나선 히스의 등에 따라붙으며 혜성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테레사! 이제 그 음성이 불어와도 아주 아프고 그립기만 한 게 아니야.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나봐. 분명히 나는 이 곳 어딘가에서 음악을 잊지 않고 있을 테니까. 혜성의 가벼워진 발걸음을 눈치로 맞춘 히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십칠… 이었던가? 그게 욕이라던데?” “누가?” “테레사가.” “그래… 맞아. 십칠. 그게 욕이야.” “십칠이 아니었나…….” “…….” “십 육인가… 한국인은 이상해. 왜 숫자가 욕이 될까. 아, 이십팔 이었던 것 같다, 수페리우스. 어때? 맞지?” “…사실은 모든 숫자가 다 욕이야.” “!” 뭐라고! 숫자가 다! 파랗게 질린 히스가 정말 놀랐는지 독일어로 뭐라고 중얼중얼 거릴 때, 혜성은 아마데우스 땅을 벗어난 이래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여유롭게 편한 미소를 지었다. 미카엘 성가대가 아니어도 무대가 있는 곳이라면 노래를 할 수 있다. 오르페우스 관이 아니어도 피아노가 있다면 연주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마데우스 땅이 아니어도 살아 있다면, 음악은 영혼을 부축 인다. 천지개벽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자연은 늘 그대로일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이란, 바꾸기에 달려있다. 같은 것이라도 상황은 천치 만별로 뻗어 나간다. 잡자. 좋은 놈으로 그 날아가는 생각이란 놈을 잡는 거다. “히스! 아까 레코드점 주인한테 한 번 더 부탁해 줄 수 있지?” “어떻게 숫자가 다 욕일 수가 있지!? 수페리우스!” 혜성에게 아까의 재즈 바에서 설마 일 할 생각이냐고 채근하려던 히스가 도리어 그에게 휩쓸려서 꽥 소리 지른다. “하하하-” 무거운 짐을 얹고도 없을 때보다 더 가벼운 등을 보이는 혜성은 오후의 이태원 한 복판에서 진심으로 웃음을 칠할 수 있게 되었다. 불굴의 아마데우스여. 서로가 서로를 버려도 살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이 세상에 음악이 죽지 않는 이상, 영혼은 사람이 죽어도 기쁨을 표현할 것이다. 이 세상에 감동이 죽지 않는 이상, 음악은 영혼이 죽어도 소리를 지를 것이다. 바닥으로 떨어지기 위한 나의 시작을, 너는 똑똑히 기억해 다오. 아름다운 너의 몸짓이 아니어도, 나는 또 다른 세상에서 죽은 날개를 펼 수 있음을 증명 할 테니, 사람은 가장 낮은 곳에서라도, 목표가 있으면 살 수 있다는 것을 증명 할 테니, 너는 지금처럼 예쁜 웃음 지으면 그만이다. 중요한 것은, 깨달았다는 현재이며, 실천하겠다는 바로 지금이다! wgreene@naver.com 1편, 2편 두 편 올렸습니다. 반가워 해 주신 분들께 사랑을 드리며...(정말 댓글과 인삿글 덕분에 올리게 된;) 음.. 늘 처음 시작은 써야지! 하고 마음먹은 부분 내지 중간에 가기 전까지는 미흡하게만 보이는군요. 뭐.. 처음부터 재미있으면 더 이상한거야;(라고 조용히 외쳐본다ㅜㅜ) 민우는 죽기 전에 혜성이에게 네가 학교를 바꿀 수 있다고 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당분간 쭉 나오게 될 히스는, 동완+진+정혁+민우 ..라는 합체로봇정도 될까요.. 앞으로 그렇거라는... 룰모델은 당신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_~ 그리고 2악장은 제 식으로 따지자면 신혜성의 나태기; 입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wgreene 화이트그린. 060322 덧글 5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2편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2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3편 ▼ 다음글 - 2악장 1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3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3/23 17:02 http://blog.naver.com/wgreene/110002781034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 Amadeus 음악 : Steve Raiman - After The Rain (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After The Rain-Steve R.. 2악장 3편 여름은 아름다워야 한다. 겨울이 주었던 환상의 눈발을 봄은 미처 지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을은 필요 이상의 오동색을 만물에 자랑하며 우리를 고독하게 한다. 봄이 오면 세월에 무지한 새들 만이 지저귈 뿐이다. 그러니 여름에는 불행하면 안 되는 것이다. 계절 하나 일 뿐이라며 여름에의 불행을 홀대 할 때, 너의 그 일 년은 오랜 세월 속에 두고 보면, 암흑으로 자리 할 것이다. 여름은 반드시 아름다워야 한다. 아마데우스는 발칵 뒤집혔다. 물론 폭동이 일어나거나 누군가가 다친 다고해서 뒤집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마음 이라는 것은, 때론 흉물스럽기까지 해서, 폭력보다 더 한 올가미를 씌우는데, 그것은 공중에 떠다니는 기분으로 바꿔 놓는다. 정지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예전과 다르다 라는 느낌이 꾸준히 지속되는 것, 그것 역시 뒤집힌 것 이라고 하겠다. 더 이상 놀랄 거리가 있겠느냐 묻는 이가 만약 당신이라면, 아름다운 제복을 입은 학생들은 이를 세우고 돌진 할 테니 가만히 있어라. 새벽이 지나도 습기는 이상 하리만큼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따라 아마데우스 학생들은 유독 침체된 모습이었다. 아니, 어쩌면 앞으로 쭉 이 모습 일 것 이라며 스타트 선을 넘은 꼴이었다.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물이 흐르는 분수대를 지난다. 저마다 할 말이 많은 표정이지만, 정작 마주쳐서는 윙윙 떠도는 언어를 꺼낼 수가 없었다. 너무 많은 이야기가 내제되어 있을 때엔 말 하는 요령조차 인간에겐 허락되지 않기 때문일까! 그래서 그들은 악기에 미치기로 약속 한 것처럼 말을 안 하는 대신에 연주에 몰입되었다. 오르페우스관은 터져 나갈 듯이 붐볐고, 새벽이 되도 소리는 하염없이 아마데우스를 떠날 줄 몰랐다. 그런데 그들은 며칠이 지나도 자신들이 왜 공허함과 사투를 벌이는지 이유를 몰랐다. 저 화려한 분수대와, 싱싱한 자연은 사람에게 가장 우위를 주는 여름임에 틀림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왜 넋이 나간 슬픔과 껴안고 있어야 하는지 이유를 몰랐다. 그건 아주 안 좋은 기류였다. 이대로 여름이 훌쩍 지나 버리면, 더 큰 고독이 가슴을 출렁거리게 하는 가을이 오기 때문이었다. 하여, 이유를 찾아야 한다! 라고 정신을 차렸을 때, 그들은 깨달았다. 이 학교에 수페리우스가 없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또 어디선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임하기 위해 애를 쓴다. 물론 그곳도 여름이다. 습기를 모두 빨아들이고 있는 목재 내부는, 튼튼한 외형에 차단되어 있다. 그 곳은 여름의 습기 따위야 상관없이 상당한 아이들이 몰려 있는 성가대 연습실 이었다. 수페리우스가 자퇴서를 낸 지 이틀이 지나, 침체된 표정으로 모인 그들은 열심히 회의에 임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당장 이번 주 미사곡 연습 때문이었는데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소프라노 솔로’ 자리를 뽑기 위해서였다. 두 시간이 지나도 통 진전이 되지 않는 회의에 지칠 때 즈음, 이자벨 장과 친한 무리 중 하나였던 소녀가 심드렁한 투로 말했다. “수산나가 하면 되겠지.” 그에 수산나는 내색하진 않았지만 입가에 홍조를 머금었다. 하지만 금 새 반대의 의견이 툭 튀어나왔다. “수산나가 할 수 있을까?” 그들과 반대쪽에 앉아있던 무리들은, 혜성을 옹호하던 알토 파트 아이들이었다. 그 여자 아이들은 혜성의 유리구슬처럼 청명한 소리를 그리워하는 표정으로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수산나는 아무 말 없이 휙 그들을 스쳐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냥 수산나 한테 하라고 하지 뭐.” “그러자.” 그들은 말을 하면서도 수산나의 음성을 전혀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녀는 소프라노 파트이긴 했지만 전체 음색에 묻혀 있었던 관계로 특출 난 유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때 그들은 깨달았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일단 튀었다는 것- 그래서 사람과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는 것- 그것이 설령 시기에 짙은 욕 일 지라도- 아주 대단한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누구든지 소프라노 솔로는 할 수 있다. 그러나 눈에 띈다는 것, 일개 파트를 맡는다고 해도 눈이 부셔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또한 능력임을 그들은 인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수페리우스는 더 이상 이 땅에 우리들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늘 애송이라고 괄시하던 다른 파트의 무리들조차 뒤늦은 그리움의 표정과 후회를 반복 해 봤자 늦은 것은 어쩔 수 없다. ‘내가!’ 3일 전, 그 작은 몸으로 전교생 앞에서 감히 미사의 흐름을 조각냈던 인물을 그들은 숨이 가쁠 만큼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아마데우스를! 떠난다!’ 천지를 아그라트리는 비명을 지를 때, 그는 울고 있었다. 단 한 줄을 읊는 내내 미카엘 성가대의 소프라노 솔로이자 작은 수페리우스로 모두의 시선과 학대를 받던 그는, 더러워진 예식 복을 움켜쥐고 비명처럼 외쳤었다. 그 때 모두는 어땠는가. 메시야의 음성을 전해들은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성가대 아이들조차 뭐에 미쳤었는지, 모세의 가십에 흔들려서 혜성을 일단 확인하고 추궁하자- 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들은 혜성에게 달콤한 회유책을 펼치며 네가 정말 이런 짓을 저질렀니? 라고 추궁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른다. 달콤한 회유책이라는 발상이 한 사람이 아닌, 전체 인원에게 공통으로 펼쳐지면, 그것은 당사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행위라는 것을 사람은 경험해 보지 않은 이상 알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아마데우스, 아마데우스를! 떠난다!’ 이민우가 딱 한 번 연주했던 베토벤과 흡사하게 기교를 부렸던 작은 손목과 얇은 팔을 그들은 소름이 끼칠 만큼 기억하고 있었다. 좌중은, 음악을 떠나서는 결코 살 수 없는 우리들이 대체 무슨 짓을 벌이는 건가! 라며 그 때 깨달음을 얻었지만, 모든 것을 주고 알고 보니 생기 까지 주었던 수페리우스는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고 아마데우스를 떠났다. 유일한 자퇴 학생이 되어, 자신이 주었던 ‘여름’을 모두 회수해 갔다. 그가 여름을 가져간 뒤, 거의 모든 학생들은 그 사람만큼 수페리우스 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이는 또 없을 거라고 인정하게 된다. 그의 부재를 통해서야 깨닫고야 만다. 그것이 결국 사람이다. 수페리우스의 부재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마데우스를 변하게 했다. 가십이 주를 이뤘던 인쇄 동은 테오제네스가 아닌 모세를 중심으로 다시 기계를 돌리고 활자를 찍기 시작했다. 테오제네스는 1년 휴학계를 제출했다고 한다. 그리고 단 이틀 만에 아마데우스 총 지휘권을 맡게 된 로제리오 교수는 바오르 신부님과 긴 시간 회의 한 끝에 테오제네스를 비롯한 많은 아이들이 제출한 휴학계에 승인 딱지를 붙여 줬다. 학교의 권한을 쥐게 된 로제리오 교수는 많은 것에 변화를 주었다. 학교의 특수성을 좀 더 체계화시키기 위해, 낙오자의 모임과 반 아마데우스 단체가 그토록 원했던 ‘열린 공간’에 대한 건의는 무시하고, 여전히 닫힌 학교로 유지하는 것, 또한 규칙적인 생활 습관을 위해 의무적인 연습 시간과 밤 12시 이후에는 오르페우스 관을 출입 할 수 없다는 것 등등 그는 자신이 구상하는 게 전부 정답이라 여겼는지 조금만 떠오르는 게 있으면 즉각 시행하도록 명령했다. 하나 둘 로제리오 교수의 방식을 탐탁치 않아 하는 무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무엇이든 새로운 체계가 생기면 반발하는 무리들이 생기는 법이다. 또 로제리오는 일주일에 한 번은 외출을 허락해 주었지만, 참 이상하지. 그 규칙이 시행됨과 동시에, 학교 밖으로 나가는 학생은 단 하나도 없었다. 막상 현실로 조건이 주어지면, 상상과의 갭이 생기기 때문이다. 별 것도 아닌 것에 열정을 퍼 붓기도 하는 것이 사람이기도 하다. 시간이 지나, 진저리나는 습기의 여름이 앞으로의 1년 까지 장악해 버리려던 때 아마데우스에도 가을 입학식과 졸업식이 치러졌다. 스물넷이 되면 자연스럽게 졸업하게 되는 학생들은 형식적으로 9월의 빛나는 아마데우스 뱃지를 달았다. 바야흐로 혁명에 대한 소문을 얼기설기 주워들은 작은 신입생들은 숨통 막히는 조용한 분위기에 어리둥절 하는 때가 닥쳤다. 물론 그들은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모른다. 한국 아마데우스의 혁명은, 그 어떤 언론에도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사 알게 되더라도 언론은 조작되기 마련이다. 힘 있는 자는 누구든지 말을 조정할 수 있는 세상이지 않던가. 때문에 새파란 신입생들은, 수페리우스와 테레사에 대한 기대는 했지만, 그 누구도 낙오자의 모임이 있다는 것은 몰랐다. 그런 식으로 낙오자의 모임 이라는 것은 모두가 쉬쉬하는 가운데 처량 맞게 잊혀져 간다. 신입생들은, 원래부터 이 학교의 분위기가 무겁고 조용한 것이라고 로제리오가 바꿔 버린 규칙 속에서 적응하기 시작 할 것이다. 표정 없는 자신의 선배들을 통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그들은 그들 식으로 생활을 꾸릴 것이다. 테레사가 아마데우스 병동에서 퇴원 한 것은 9월의 화려한 신입생 입학식이 있기 하루 전 이었다. 그는 한국 의료진이 권유한 대로 미국 오하이오 주로 떠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는 오하이오주 라는 소리에 눈 치료 보다는 세다 포인트… 라고 말을 흐리며 작게 웃기만 했다고 한다. 그곳이 어디냐는 소리에 그저 재미있는 공원 이며 자신이 어린 시절 콘서트를 전전 할 때 몇 번 가 봤었다는 대답을 했고, 더 자세하게 물으려 하자 아예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그런 테레사가 휠체어에 앉아서 아마데우스 밖으로 나선다. 한 달 내내 병동 밖으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던 테레사는, 머리 부분 즉 눈이 있는 쪽을 휙 휙 감은 채로 수술을 위해 학생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언론을 비 롯 모든 사람들에게 쉬쉬 해 달라고 했지만, 테레사가 모습을 나타내기를 간절히 기다렸던 아마데우스 학생들은 기어이 그를 보기 위해 찾아왔다. 소식이란 한 명에게 전해지기 무섭게 퍼지고 또 퍼지고 사람들 이라는 물결을 이룬다. “테……!” 그가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자 반가움에 섣불리 이름을 입에 담던 한 소녀가 그대로 굳어 버린다. 늘 머릿속에 저장해 둔 테레사의 용모는 단정하고, 기품이 있으며, 우아한 멋과, 강하고 부드러운 멋이 공존하여 우러러 보던 사내였기 때문일까. 테레사를 부르려던 소녀가 바닥에 쓰러진다. “테레…사…?” “어… 허어….” 소년들은 눈시울을 붉혔고, 소녀들은 아예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흐느꼈다. 군중은 다 지난 후에야 죄 값을 치르는 것이다. 수페리우스의 부재 못지않게 큰 충격으로 닥친 테레사의 위태로운 모습! 그들은 거센 풍랑에 맞아 잃어버린 노를 넓은 바다에서 찾는 선원이 된 꼴이었다. 테오제네스가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아서 입을 다물고 있는 테레사의 여윈 모습, 그의 조금 커진 듯 한 정복,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린 몹쓸 붕대… 아이들은 하나 둘 오열하기 시작했다. “테… 테레사… 아… 아아… 테레에사아….” “으… 으윽. 으. 으으으.” “테레사… 선배에… 으… 흐으.” 아마데우스의 아마데우스. 누가 감히 저 사람을 저렇게, 우리의 빛을 일그러뜨렸나! 그의 추락은 거두절미하고 절망만을 의미한다. 그가 사라지면, 이 아마데우스에는 누가 있는가? 휴학계를 낸 문정혁이 돌아올 리가 없다! 로제리오 교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아마데우스의 이것저것 규칙 사항을 바꿔 가고 있다! 왜 몰랐지? 왜 우리들은 테레사에 대해서 몰랐던 거지? 그를 전부 안다고 느낀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한 학교를 짊어 졌던 몫이 저 사람에겐 얼마나 무거운 것으로 작용 되었을지, 그들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누구보다 음악을 사랑했기 때문에 헌신적으로 학교를 위했던 그를, 그가 유일하게 발굴했던 수페리우스와 함께 내 친 것이다. 그것도 그를 동경했던 자신들이 내 쳤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 많은 학생들은 울음을 짜 내며 그저 멀리서 그가 승용차에 타고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 볼 뿐이었다. 그 때였다. “테레사! 테레사! 선배! 선배에--!” “!” 용기 있는 학생 한 명이 나선 것이다. 아니, 그는 멀리서부터 뛰어 온 모양이었다. 학생들이 눈물 흘리며 차마 앞으로 나서지 못 할 때 그는 멈추는 과정 없이 승용차 쪽으로 돌진했기 때문이다. “선배! 테레사 선배! 테레사!” “……?” “김동완 이라고 합니다! 테레사, 저는…” “!” 동완 이었다. 학생들이 테레사 에게서 이십 여 미터 떨어져서 훌쩍이고 가슴을 쥐는 반면, 나타나는 즉시 용기 있게 돌진해서 테레사를 부른 그는 동완 이었다. 혜성의 부재를 어쩌면 가장 찢어지게 괴로워했을 그는, 수페리우스의 가장 편한 벗이었던 동완 이었다. 그는 울고 있었다. 눈물이 범벅이 되어 볼 아래로 물이 뚝 뚝 떨어진다. 차창을 마구 두드리던 동완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흠칫 놀란 테레사의 표정에 저도 모르게 ‘하느님!’하고 외쳤다. 테레사는 더듬더듬 창 밖으로 팔을 내밀었다. 동완이 그 손을 쥐었다. “눈! 꼭! 꼭… 꼭 고치세요 선배!” “…….” “저는… 저는…….” 테레사는 울먹이는 동완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고 싶었는지, 아래로 내렸던 나머지 팔을 올렸다. 그리고 차창 밖으로 내밀었지만, 동완의 몸 밖에 만져지지 않는 것이다. 동완은 당장 허리를 숙였다. 그제 서야 동완의 푸석한 머리칼이 테레사의 기품 있는 손바닥에 닿는다. 테레사는 진즉부터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너를 알고 있다. 낙오자의 모임에서 우리의 그림자를 지켜주었고… 나의 수페리우스와 처음부터 함께 해 주었지… 너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걸로 아는데…….” 동완은 찢어져라 울고 싶은 내면을 억지로 삼킨 채 웃으려 노력했다. 차라리 테레사가 자신의 일그러진 모습을 못 봐서 다행이라는 처절함이 미칠 만큼 그의 영혼은 부서져 날아가던 참이었다. “예.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그런가.” 테레사는 옅게 웃었다. 한 달 만에 처음으로 사람답게 대화라는 것을 해 보기 때문일까. 그의 옆 좌석에 앉아있는 테오제네스 조차 흔들릴 정도로 테레사는 자상하게 웃으며 연신 동완의 어린 뺨과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마치 동완을 통해서 수페리우스를 대신 느끼려는 것처럼 정성스럽게 어루어 준다. 동완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계속! 제대로! 선배님 싫어하다가, 그게 아니었구나- 라는 걸 깨달을 수 있게! 선배님 꼭 눈 고쳐서… 고쳐서…….” 뮤즈 그 자체인 사람의 입에서 악기를 부시라는 말을 꺼내게 했었다. 동완은 미칠 것 만 같았지만, 그래봤자 이 사람이 겪은 고통에 비할 바가 못 됨을 알았다. 참아야 한다. “그래… 나는 다시 돌아 올 거다.” “으… 으윽….” 하지만 참아 지지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어리고 어리석기 때문에 계속 미안해 한다. “울지 마라. 내가 돌아 올 때, 네 가장 친한 친구도 돌아올 거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만나기 위해서 헤어지기로 했다. 그러니까 동완아… 너는 혜성이를 원망해서는 안 된다.” “…….” “가라. 사내놈이 눈물이 흔하구나. 하하하.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 허점을 보이다니, 나는 널 눈물 질질 흘리는 못난 녀석으로 기억하기 싫다.” “…꼭… 오세요….” “그래. 너도 나와 혜성이가 돌아오기 전 까지는 도망치지 말고 잘 지내 봐라.” “!” 동완의 손이 부들부들 떠는 것을 알고 테레사는 더 힘을 주었다. 이제 둘의 손바닥도 눈물을 흘린다. 여름은 그들의 눈물을 부추긴다. “혜성이가 얘기해 줬었다. 나중에 그 애한테 직접 따져라.” “아 저 그건… 저기… 비밀이었는데…….” “하하하하-” 테레사의 차가 출발했다. 멀리 매연을 내뿜는 차의 뒤꽁무니를 하염없이 쳐다보는 동완의 곁으로 선호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동완은 자신의 곁에 선호가 오기 무섭게 그의 손을 꽉 쥐었다. 흠칫 놀란 선호가 아무 말 없이 잡힌 손을 내버려둔다. “선배….” “…….” 물에 섞이면서도 비옥한 토양처럼 갈라진 언어가 흙처럼 날아갈 때, 선호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저는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자퇴하려고 했는데… 도망치려고 했는데….” “…동완아…….” “나에게는 심리학만큼 중요한 게 없었는데… 우정이야 그래봤자 별 것 아닌 줄 알았는데…….” “동완아아….” “그게 아니었어요… 그게 아니었어요….” “…….” 동완은 입술을 깨물며 그 위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가슴이 용광로보다 뜨겁게 솟았다. 우리들은 성장한 것을 안다. 그러나 가슴이 뜨거운 것을 절감하는 이 때, 영원히 자라지 않는 게 나을 뻔 한 지도 몰라……. 지평선 끝으로 잠식하는 태양처럼 그림이 되는 게 나을 지도 몰라……. “율 성당으로 가지.” 라는 테레사의 말에 테오제네스는 신음을 참아냈다. 이자벨을 만나서 무얼 어쩌려고? 라고 따지자니 우스웠다. 그는 자신이 인쇄 동을 버리고 휴학계를 낸 것에 뭐라고 힐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테오제네스는 멋진 정장을 입었지만, 헐거워진 정복을 입은 테레사에 비하면 자신은 한 참 멀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외형 이상의 영혼마저 사람을 압도하는 능력이 있음을 그는 또 알았다. 아마데우스를 벗어나서, 눈 수술에 총력을 기울여도 시원찮을 판에, 테레사는 아마데우스를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체 이 무모한 뮤즈를 누가 탓하겠는가! 율 성당에 도착하는 즉시, 테레사는 시간을 지체하지 말자며 걷는 것 대신 휠체어를 택하겠노라- 라고 말을 꺼냈다. 테레사가 긴장하지 않는 대신, 테오제네스는 자신이 긴장하기로 했다. 시야가 읽히지 않아서 오히려 용기가 생긴 걸까. 그는 왜 자신이 버린 여자를 만나겠다는 걸까. 설마 자기와 함께 오하이오로 떠나자는 권유를 위해? 아니 그럴 리가 없어. 굳건히 입을 다문 테레사의 머리를 내려보며 테오제네스는 고개를 저었다. 수녀님들의 안내에 따라 둘은 이자벨이 쉬고 있는 율 성당 뒤 벤치에 도착했다. 맛 깔 나는 바람이 여름을 잠시 물러 주던 참이었다. 저 쪽 비단처럼 반짝이는 여인이 있었다. 사랑에의 고통을 겪은 뒤, 다시 만난 이자벨은 소녀티를 모두 벗고 자라 있었다. 하릴 없이 걷고, 벤치에 앉아서 사색에 잠기기를 반복하던 이자벨은, 진분홍 노을을 달고 나타난 테레사와 마주치는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진…….” 울음 섞인 소리가 들려온다. 아주 가느다란 실처럼 끊어질 듯 팽팽해지는 그 목소리를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테레사가 이자벨의 앞에 도착하는 즉시 휠체어에서 일어났다. “떠나기 전에 할 말이 있어서 왔어.” “…….” 이자벨은 그리움에 사무친 눈으로 당장 진의 품에 와락 안겼다. 품에 파고들어오는 이자벨을 물리치지도 다정하게 팔로 둘러주지도 않는 테레사의 머리 속에는 미카엘 성가대의 성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여인의 애증보다도 더 큰 숭고함이 테레사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그는 이 순간조차도 아마데우스를 걱정하는 스스로가 기가 막혔지만, 이것이 운명이라면 순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천천히 이자벨의 뺨을 쥐었다. 더듬거리던 테레사의 손가락이 부드러운 그녀의 뺨에 닿자, 그녀는 긴 신음 소리를 흘렸다. 얼마나 그리워했던 그의 품인가!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애증의 목소리! 그의 훈풍! 그의 손! 이자벨은 이제야 그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줄로 믿어 의심치 않았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테레사의 무표정 속의 칼 같은 내용은 그녀의 풍부한 사랑에의 표정을 얼어붙게 했다. “성가대로 돌아가라.” “!” “어린애처럼 구는 것은 그만 하고, 돌아 가.” “진!” 그녀는 기가 막히고 화가 나서 눈물은커녕 목소리도 제대로 터지지 않았다. 뭐라고? 이제 와서 혁명 따위를 겪더니 양 쪽 눈은 보이지도 않는 처지가 된 주제에 나에게 뭐라고? 그녀의 사나운 시선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마데우스 성가대는 한국 제일의 수준임을 이어 가야 한다. 현재 경황으로 봐서는 뭘 새로 뽑거나 할 처지가 아니니까, 돌아가라.” “…못 해. 안 해!” “이자벨!” 한 때는 사랑했던 사람들일 지도 모른다. 그것이 욕심에서건, 집착에서건 사랑이라는 달콤한 이름에 넋을 팔고 피부를 부닥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테레사의 노기 띤 소리에 지지 않고 소리치는 이자벨의 목울대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자벨은 그렇게 소리치면서도 테레사의 허리는 꽉 쥐고 놓지 않는다. “나랑… 나랑 프랑스로 가는 거야 진… 내가 간호 해 줄게. 내가 알아 봤는데, 내 고향 쪽 농가 중에 비싼 값을 주면 눈을 주겠다는 가난한 치들도 많….” “!” 짜 악- 이자벨의 뺨이 돌아갔다. 그리고 그녀는 분노 가득한 테레사의 손찌검에 그만 바닥을 굴렀다. 둘을 지켜보던 테오제네스가 놀라서 달려왔지만, 이자벨은 바닥에 쓰러진 채로 온 몸을 떨기만 할 뿐 테오제네스의 손은 뿌리쳤다. “왜! 왜 안 돼? 뭐? 나한테 성가대로 돌아가라고? 네가 없는 그 지옥에 또 가라고?” “…가자. 테오제네스.” “테레사!” “어서!” “넌 기억 못하지, 진? 나는 너 하나만 보고 아마데우스를 선택했었어! 네가 유럽을 전전할 때 나는 피가 말랐어! 네가 애송이 따위에게 신경 쓸 때 나는 파멸을 예상했어!” “뭐-” 마침내 테레사의 손이 한 번 더 허공에 올라갈 때, 테오제네스는 그녀를 부축하던 것을 관두고 부랴부랴 그를 휠체어에 태웠다. 둘은 이자벨이 비명처럼 지르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율 성당 밖으로 벗어났다. 참옥한 대지 위에서 공기를 들이 마시는 것처럼 가시지 않는 체증이 둘을 괴롭혔다. 이자벨에게, 그녀에게 정말 음악은 아무 값어치도 없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그녀 자신도 모르는 뮤즈에의 세상이 한 남자에 의해 가려져 있을 뿐이다. 그 가려진 것이 치워졌다고 여겼는데, 그녀는 아직 멀었어. 공항으로 향할 때까지 테레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먹 쥔 양 손은 공항에 도착해서도 기내에 오를 때도 전혀 떨림을 멈추지 못했다. 1년을 살게 할 여름이 죽어가고 있다. 여름은 아름다워야 한다. 겨울이 주었던 환상의 눈발을 봄은 미처 지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을은 필요 이상의 오동색을 만물에 자랑하며 우리를 고독하게 한다. 봄이 오면 세월에 무지한 새들 만이 지저귈 뿐이다. 그러니 여름에는 불행하면 안 되는 것이다. 계절 하나 일 뿐이라며 여름에의 불행을 홀대 할 때, 너의 그 일 년은 오랜 세월 속에 두고 보면, 암흑으로 자리 할 것이다. 여름은 반드시 아름다워야 한다. Lumpen(룸펜)이 재즈 바로 명성이 높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유명한 가수나 광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룸펜은 가끔 독일식 맥주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찾는 곳 정도로만 사람들은 이태원 거리에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룸펜을 시작으로 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은 9월부터였다. 목소리가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사람이 새벽 세 시부터 삼십분 동안 노래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한국인인데, 일본 혼혈처럼 보이기도 하고 특징은 여자인지 남자인지 가끔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세련된 아름다움이 반짝 반짝 빛난다는 것이다. 또 소문에 따르자면, 하루걸러 한 번 꼴로 이태원 패거리들이 거는 시비를 잘 참아내다가 욱 하는 성질을 못 이기고 작은 주먹으로 우당탕 덤빈다는 것이다. 그 날이 또 오늘인가보다. 룸펜의 고혹하게 칠해진 주황색 무대 중앙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마이크를 쥐고 있던 혜성이 독사와 같은 눈초리로 누군가를 세게 노려보더니, 급기야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며 최근 유일하게 잘 외운 독일어로 크게 소리쳤다. “hurensohn!(개새끼!) hurensooooohn--!” “!” 음악이 멈추고, 혜성과 엉킨 누군가가 무대 밑에서 구를 때, 얼큰하게 취한 외국인들은 저마다 떠들며 킬킬킬 웃기 시작하였다. 혜성이 달려들 때를 잘 맞추어, 히스가 룸펜 도어를 열었다. 그리고 혜성이 연신 후렌존! 후렌존! 하며 상스러운 욕을 하고, 작은 몸으로 누군가의 멱살을 쥐었을 때 히스는 기가 막힌 나머지 이마를 딱 치며 소리쳤다. “이런! 십칠!” 또 무대에서 노래하고 연주하는 혜성에게 꺼지라면서 웬 놈들이 독일어로 지껄인 게 분명했다. 저도 모르게 한 달 전 혜성과 대화했던 것 중, 십칠 이라는 단어를 아예 한국 욕으로 인정해 버린 히스가 연신 십칠 십칠을 반복하며 우당탕 소란스러운 쪽으로 달려갔다. wgreene@naver.com 당신은 어떻습니까...?^^ 여기까지가 바로 예전에 1악장 완결 직후 확실하게 적어 놨던 부분이고(수정도 했디만;), 다음편 부터는 수정 과정이 아주 많기 때문에 올리는 속도가 아주 빠르지는 않을 듯 싶습니다. 사람은 관심을 먹고 사는 동물인 법. 그러기에 변수는 나타날지도 모르지만...^^ 음.. 그리고 원래 3편은 롬펜 나오기 전까진데 그냥 혜성이 조금이라도 보여주려고... 릭셩북 선물 많이 구입해 주세요. 예쁜 책이 될거에요.(라고 믿고있다;) 즐거운 날 되세요! wgreene. 화이트그린(20060323) 3편 올림. 피에스. 이름을 좀 바꿔봤는데 이상한가요?-_;; 다락방 하니까 먼지 생각나서(음...) 애플파이님이 얘기했던 작은 하얀세상으로 바꿨습니다. 작하. 줄임말로 이상하고(작두에 목매서 하직해라 같잖아요) 리하. 리틀 하얀세상.(괜히 뿌듯하다) 예전의 하얀세상 생각나시거나 하면, 메모로그 누르셔서 뭐 적으셔도 괜찮습니다.^_~ 음.. 역시 나중에 공지로 다시 올려야겠군.(중얼중얼) 덧글 7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3편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3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4편 ▼ 다음글 - 2악장 2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4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3/26 22:41 http://blog.naver.com/wgreene/110002871863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 Amadeus 음악 : 피아노 트리오 E-Flat 장조 Op.100, D.929 중 2악장 (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피아노 트리오 E-Flat .. 2악장 4편 꿈이었을지도 몰라. 환각 이라고들 하지. 진짜 현실은 지금 일지도 몰라. 그럴수록 이상은 멀어지며, 꿈은 가까워지지. 아마데우스라는 곳은 영원히 꿈이요 멀어지는 이상일 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의 현재를 붙잡기 위해서, 나는 그렇게 여기기로 했다, 멋쟁이 히스. “히스! 짐! 지임!” “뭐? …십칠!” 혜성의 짐! 이라는 짜증 섞인 질책에 그만 히스는 말리려던 두 사람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저것은 히스에게만 적용되는 경고조이다. 이 때 히스가 움직이면 혜성은 가뜩이나 흥분한 상태에서 아무 말이나 마구 지껄일 게 틀림없다. 히스는 입술을 깨물며 멍청하게 섰다. 그리고 보았다. 뿌연 담배연기가 아니어도 충분히 몽롱한 룸펜 내부의 주홍 조명들과 같은 음절만 재생되는 레코드판 위에는 어떤 놈이 던져놓은 장화 때문에 수리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새벽 세 시의 재즈 바는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아니, 세 시 이십분이라서 그런 건가? “한국에서는! 한국말로 해-!” 광기에 사로잡힌 듯 한 강한 어절은 혜성의 소프라노 솔로 시절을 연상시키지만 환각은 잠시였다. 욕을 하면서도 눈을 파랗게 빛내는 수페리우스는 도리어 이 순간을 기다린 것처럼 광분을 질렀던 탓이다. 그는 두꺼운 사내놈 위에 올라탄 채로 휙 휙 큰 모션을 취하며 히스가 망연자실 서 있는 곳을 찾았다. 그리고 씨 익 웃으며 저주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립스틱을 반짝이는 게 아닌가. 밑바닥에서 즐거워하는 수페리우스의 내면이 말한다. 너는 네 입으로 나에게 짐짝이라고 했다. 너의 주인은 현재 즐겁다. 거추장스러운 네 놈은 주인을 방해 하지 말아라. 그리고 소리친다. “어이, 짐! 끼어들면 머리통을 작살 낼 줄 알어! 알았지? 아웃이다!” “…….” “Es Totungen!(죽여 버려!)” 보라색 마스카라와 함께 칼 같이 번뜩이는 혜성의 동공은 금 새 라도 히스의 목을 분질러 버릴 것처럼 뜨거웠다. 전혀 차갑지 않아. 그가 야기한 밑바닥 이란 것은 지옥 속의 화염인가? 그는 한 달 전부터 미지근한 중온 따위는 없이 온통 뜨겁거나 알래스카해의 바닥처럼 차가웠다. 구경 꾼 중 혜성의 밑에 깔린 놈의 잔챙이로 보이는 녀석이 죽여 버려! 라고 소리칠 때를 잘 맞추어 사람들이 어어어어~ 하며 오버 액션을 취하더니 등을 젖혔다. 바로, 혜성의 얇은 몸이 놈이 밀어내는 굵은 장딴지 힘에 그만 공중에 훌쩍 날렸기 때문이다. “어… 어? 킥… 킥킥킥. 저 후렌~존이! 날 던져?” 혜성이 엉덩이를 털며 다시 바닥에서 술 냄새 풍기는 놈에게 달려들 때, 히스도 같이 움직였다. 그러나 혜성이 더 빨랐다. “짐! 움직이지 마! 이제 막 재미있어질라고 하는데….” “!” 또 같은 소리가 히스를 가두었다. 너는 네 스스로 짐짝이 되겠다고 약속했으니, 만약 위급한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내가 짐! 이라고 소리치면 너는 끼어들지 말라는 것을 뜻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게 이런 상황에 적용될 줄 알았더라면, 히스는 결코 가볍게 약속의 도장을 찍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도대체 겁이 없는 건가, 아니면 몰라서 저러는 걸까? 상대 놈은 혜성보다 힘도 세고 덩치도 크다. 무모하게 그 녀석 위에 앉아 봤자 수페리우스! 너에게 득이 될 게 없다. 저 놈도 그렇지. 비실비실한 혜성이 제 배에 올라타서 주먹질을 해 봤자, 아이랑 놀아주는 아버지처럼 히죽 이죽 웃으면서 다 받아주질 않던가. 저 몸에는 도저히 때릴 구석 이라는 게 없던 탓이다. 히스는 눈을 부릅뜬 채 정지해 있었다. 자신이 움직이는 것과 상관없이 새벽 세 시 이십분의 룸펜 박자는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다. “…….” “뭐? 내가 네 놈들 때문에 독일어 꼭 마스터 할 거다! 뭐라고 욕을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네 놈 알아듣기 쉽게 나도 설명해주지. 이 후렌존! 후렌조오오오온!” 으악. 괜히 후렌존 가르쳐 줬다! 영악한 것. 웃으면서 상냥하게 물어 볼 때 알아 봤어야 돼! 히스는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가, 또 한 걸음 나가다가 ‘짐!’이라는 쏘아붙임에 뒤로 물러서고를 반복하며 초조함에 식은땀을 흘렸다. 이윽고 몇 초를 더 참아주던 히스가, 파랗게 질린 채로 걷는다. 혜성에게 잘 맞아주던 녀석이 지루해졌는지 그 작은 뺨을 팔꿈치로 가격했기 때문이다. “악-!” 뺨을 쥔 채로 바닥에 버둥거렸던 혜성이 마침내 못 참겠다는 듯이, 장식용 술병을 양 손에 쥐었을 때, 마침 히스가 도착했다. 혜성이 병을 쥐자 휘파람 소리를 내던 우두머리 녀석이 제대로 덤벼 보라며 슬슬 화를 부추길 때, 히스는 이 놈을 테레사한테 묶어서라도 데려 갔어야 했다고 몇 번째인지 모를 후회를 하던 참이었다. “날! 쳤어!” 벌써 한 쪽 뺨이 말도 못 하게 붓기 시작한 혜성이 아예 이성을 뽑은 채로 갈기갈기 소리치자 히스는 사색이 된 몰골로 둘의 사이에 섰다. 그러자 주변 구경하던 놈들이 꺼지라면서 야유를 퍼붓는다. 십칠- 테레사! 나는 두 번 다시 수페리우스와 관련된 부탁은 일체 듣지 않겠습니다! 히스의 우아한 셔츠가 북- 찢겼다. 그의 팔이 나타남과 동시에 구경하던 떨거지 자식이 그를 비키라며 잡아 당겼기 때문이다. 히스는 분노를 참아내며 긴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냉큼 소리쳤다. “십칠! 짐 약속 취소 한다 수페리우스~” “쳐… 쳤어? 날 쳤어? 아… 아프잖아! 개새끼! 후렌존 자식! 이 후렌존 새끼! 이 후렌치파이!” “파이?” 혜성의 가벼운 몸짓을 맞아주던 놈이 파이라는 소리에 궁금하다는 듯이 목을 살짝 올리자, 그것에 완전히 폭발해버린 혜성이 야! 하면서 온 몸을 던지다시피 스타트를 끊을 때였다. “엇~차!” “잉?” “으이구 십칠.” “야! 짐!” “십칠 십칠….” 히스의 옆구리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된 혜성이 붉어진 낯으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른다. 때문에 작은 손에 쥐어져 있던 술병이 놀란 나머지 바닥에 떼구르르 구르고, 때를 잘 맞추어 룸펜에 비상용으로 늘 존재하던 오디오에서 시끄러운 락이 터져 나왔다. “십 분 남았잖아! 내려 놔!” “Ja, Ja, Entschuldigung!(네, 네, 죄송합니다!)” 혜성을 대신해서 슐디궁 슐디궁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저 쪽 미군도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쏘리, 머리 까만 놈도 보이 길래 스미마생 스미마생- 삽시간에 몇 나라의 짧은 말을 정신없이 내뱉는 히스의 얼굴 전체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 무슨 싸구려 오페라란 말인가! 아니지. 어떻게 이 순간조차 오페라의 한 장면은 아닐까 하는 기가 막힌 환상이 스쳐 지나간단 말인가! 히스는 어떤 장면에서도 결부 짓게 되는 음악에의 상상에 짜증마저 일었다. 그러나 참아야 한다. 자신의 팔에 매달려 있는 수페리우스는 한 달 전부터 참을성 이라는 글자를 아예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슐디궁 같은 소리하네! 놔 아--!” “Ja, Ja.” 허공에 삿대질도 해 보고 발도 굴러 봤지만 키도 크고 체격이 듬직한 히스는 더 힘을 주고 무대를 벗어날 뿐이었다. 마침내 바닥에서 맞아주기 놀이 따위를 하던 녀석이 크하하하 웃을 때, 혜성이 그 와중에서도 허공에 발을 구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야! 후렌치파이! 또 여기 오면 알아서 해! 너는 죽었어! 죽었어!” 멀쩡하게 살아 있는 녀석을 향해 쉼 없이 죽었어 죽었어를 반복하던 혜성이 다 쉰 소리를 멈춘 것은, 다락방에 도착해서였다. “윽!” “역시 운동부족이군.” “!” 가만히 있어도 먼지가 폴폴 풍기는 목재 바닥에 혜성을 던져 버린 뒤, 히스는 찢어진 소매로 땀을 닦으며 담배를 물었다. 이럴 수가. 한 달 전부터 찍어 놨던 샵의 비싼 블라우스를 찢기다니! 앞으로 다섯 번이나 돈을 더 지불해야 하는데! 또 이럴 수가. 계단에 올라오면서 담배를 흘린 모양이다. 다섯 개비가 남아 있어야 하는데, 딱 한 개비밖에 없다니. “비실~ 비실~” “짐!” 때문에 낮은 도어를 열고 계단을 구르고 있던 담배 두 개비를 겨우 찾아 온 뒤, 가쁜 숨을 내쉬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수페리우스를 비아냥거리는 히스의 마음도 썩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성냥에 불을 붙이는 즉시 히스의 눈에 확인된 것은 몸 여기저기에 묻은 바닥의 먼지를 털어내며 수증기를 뿜어내는 하얀 수페리우스였다. “…짐 취소다. 너 같은 거 재수 옴 붙었어.” “?” “너 같은 거 십칠이야.” “!” 십칠! 그것은 히스가 유일하게 인식하는 한국의 욕이 아닌가! 저 혼자 이를 갈더니 깔끔하게 내뱉은 말이 너무나도 직설적이어서, 히스는 담배를 문 채로 꽥 소리 쳤다. “네가 짐이라면서!” 첫 날에는, 어디 다쳤어? 참지 그랬니… 라는 말로 다독였고, 두 번째 날에는 다음부터 그러지 마라 수페리우스… 세 번째 날 부터는 아예 이런 식으로 짊어지고 와서 던졌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히스는 수도 없이 혜성에게 물었었다. 그러나 이게 밑바닥이니? 라고 물어봤자 혜성은 아무 대답도 해 주지 않았었다. 지금처럼 짐 이네 아니네 하며 언성을 높이고 더러워진 채로 싸우기 바쁘다. 그리고 싸우다가 꼬리를 내리는 것은 늘, 히스의 몫이었다. 그의 불똥이 튀는 것을 막을 사람이 이태원 거리에서는 자신 밖에 없던 탓이다. “말하는 짐 봤냐. 발로 걷는 가방 봤냐.” “…….” “그냥 나랑 같이 청소나 하자, 수페리우스. 이 동네 놈들 건드려 봤자 너만 다쳐. 이들의 문화는 그저 흥겹기만 하면 되는 거란 걸 왜 몰라? 그들의 문화를 방해하지 말고….” “…….” “가방 말을 들어라.” 바로 그 때, 3층 그들이 있는 다락방 밑 무대에서 혜성을 욕하는 것이 틀림없는 익숙한 목소리가 고래고래 터져 나왔다. 혜성의 귀가 쫑긋 세워지고 멍투성이 인 몸을 일으켜서 문가에 온 것은 그야말로 찰나였다. “이 못생긴 짐짝이! 비켜!” “오, 안 돼 안돼. 오, 오.” “힛쓰!” “오, 노노. 가만히, 가만히.” “…….” 그제 서야 혜성의 앞에서 양 손으로 막는 히스가 눈을 크게 뜨며 어쩌지 못한다. 필터 부근까지 태워진 담배를 아는지 모르는지, 히스가 공중에 양 팔을 안 쪽으로 저으며 혜성을 진정 시키기 시작했다. “힛쓰!” “…….” 혜성이 아무리 다락방 밖으로 나가려고 발버둥 쳐 봤자 히스의 힘 앞에서는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는 결국 구석에 있는 매트리스 위에 웅크리고 앉아서 훌쩍이기 시작했다. 그제 서야 안심이 된 히스는 겨우 사람 키만 한 높이의 천장을 만지작거리고 담배를 태우며 그가 완전히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를 기다린다. 늘 저렇게 소리치고 화를 실컷 낸 뒤, 혜성은 위로 없이 우는 상태가 지나야 원상복귀 되었던 탓이다. 울지 마…라고 위로 하는 것도 거부하는 사람이라니! 얼마나 더 지나야 그의 패턴을 이해 할 수 있을까? 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히스는 살레살레 고개를 저었다. 혜성이 룸펜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된 계기는 물론 히스 덕분이었다. 주인과 진즉부터 안면이 튼 히스는 대수롭지 않게 혜성을 소개시켜 주었었다. 그 첫 날 까지만 해도 조용하고 말이 없던 혜성이 변한 것은 다음날, 새벽 세 시가 지나서였다. 그는 속된말로 까무라치게 할 만큼 변해버렸다. 바에서 접시를 우아하게 진열하던 히스가 입을 딱 벌렸을 때, 첫 날의 혜성은 무대에 거의 벗은 차림새로 올랐었다. 자신들이 숙식하게 된 좁은 다락방에서 굴러다니던 팬츠 따위를 어떻게 발견하곤 자기 식대로 입고 나타나서 그는… “아직 멀었습니까 수페리우스?” “흡… 흑… 응….” “…….” 저렇게 어두운 구석에서 혼자 진정될 때 까지 우는 것을 조절하는 수페리우스는, 한 달 전 새벽 세 시 무대에서 창녀처럼 옷을 입는 둥 마는 둥, 솔베이지를 불렀었다. 솔베이지라니! 그 때 히스는 얼굴이 다 화끈거려서 부들부들 떨며 바닥에 주저앉았었다. 도대체 상식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아무리 음악이 좋아도 그렇지, 여기가 어딘지 모르는 건가! “수프 가져다줄까?” “흑… 아… 아아니…이.” “…….” 마스카라 범벅이 되어 우는 모양은 첫 날 솔베이지를 퍼뜨렸던 날과 비슷한 꼴이다. 히스는 그 날을 어제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주저앉았듯이, 혜성의 기똥찬 화음에 놀란 것은 룸펜을 찾은 손님들도 마찬가지였었다. 그들은 딱딱하게 굳어서 혜성의 노래가 끝나고서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못했었다. 새벽녘이면 하루를 마감하기 위해 룸펜을 찾는 이태원 패거리들이 과감하게 꺼지라면서 혜성에게 행패를 부린 것은 그 다음날부터였다. 그리고 히스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바로, 연약하게만 인식했던 수페리우스의 반격 이었다.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욕을 할 테면 해 봐라- 식으로 깔깔깔 웃으며 덤볐기 때문이다. 천주여- 히스는 가슴에 십자가를 그리며 그 날 놀랐던 가슴을 지금도 쓸어내린다. “머리카락 뭉쳤다.” “…….” 히스는 자상하게 그의 뺨의 눈물을 닦아주고, 또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그는 정말로 밑바닥을 원하고 있었다. 그 증거가 여기 있지 않던가. 달라붙는 옷이야 그렇다 치고, 순결한 상징이나 다름없었던 까만 머리칼을 노랗게 염색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 전 히스가 아마데우스 연주회장에서 봤던 혜성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현재가 있다. 혜성은 히스가 여전히 귀찮기만 했다. 그는 어떻게 보면 정혁이와 느낌이 비슷하다. 잘 생긴 것으로 따지자면 누구와 붙여놔도 우위를 가릴 수 없을 만큼 멋진 청년이긴 하지만, 그 속을 때론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을 짐짝처럼 못되게 던질 때는 이민우가 떠올라서 뭉클해졌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냉철하게 자기 식대로 할 말 다 꺼내면서도 그게 상대방에게 어떤 피해를 입히는지 모르는 꼴을 목격할 때는 테레사나 다름없었다. 이런저런 조언을 유창하게 퍼부을 땐 동완이가 가면을 쓰고 있는 줄로 착각하기도 한다. 때때로 혜성 자신을 유심히 관찰할 때의 히스는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메마른 그의 녹색 눈동자가 혜성의 영혼마저 압도하려 들 때, 바로 지금처럼! 겉은 한없이 너그러운 척 하지만 그 속은 도저히 알 수 없을 때! “저 놈들을 어떻게 하지….” “글쎄. 그 놈들의 우두머리를 제압하면 되려나.” “우두머리?” “그냥 해 본 소리다.” “…….” 하루 종일 말이 없다가도 히스와 단 둘이 다락방에 있을 때면 참았던 언어를 몽땅 터뜨리던 혜성이 잠잠히 생각에 잠겼다. 우두머리… 우두머리라… 아까 그 곰 같은 녀석이 우두머리인 줄 알았는데… 그 놈 보다 더 큰 고래자식을 끽 소리 못 하게 만들어야지 내가 시원하게 값을 받고 연주와 노래를 할 수 있다는 건가? “내가 좋았던 음악을, 다같이 좋자고 그냥 부르기로 했던 건데….” “여긴 모차르트가 아니니까.” 아마데우스라고 말을 하려다가, 그 이야기는 절대 금물이라는 혜성의 경고가 번뜩 생각난 나머지 히스는 모차르트라고 돌려서 말했지만 혜성은 그 점은 대강 넘어가는 듯싶었다. “왜 그러지? 듣기가 싫은 건가? 그렇다면, 왜 싫은 거지?” “…….” “듣게 하고야 말겠어.” “…….” 그건 무모한 거야- 라고 충고하려던 히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혜성의 화장을 손수 지워준 뒤 낡은 매트리스에 엎어졌다. 말을 해도 자기 생각 때문에 듣지 못 할 것을 알기 때문에 굳이 충고할 필요는 없었던 탓이다. 혜성과 나란히 엎드린 채 히스는 담배를 물었다. 그리고 혜성에게도 한 가치를 권했지만 역시나 거절한다. 그는 타락을 원하지만 적당한 선 까지만 빠지려 든다. 필시 목소리를 아끼는 탓이겠지. 그도 아니면 벌이에 지장이 생길까봐? 누가 그 오페라를 원한다고 이태원 바닥에서 목소리를 아끼는 거지 수페리우스? 한동안 말없이 꼼지락거리던 혜성은 저 스스로 얼음을 수건에 감싸고 와서 뺨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나란히 엎드려 있는 현재, 나무 바닥 아래 사람들은 시간을 잊은 채 흥겨운 가락에 취해 있다. 다 깨 부셔 버릴 것처럼 잔인한 음표가 뒤죽박죽 섞이고, 기계음과 음성이 혼합된 헤비메탈에 웃고 즐긴다. 혜성은 귀를 잠시 막았다. 슬쩍 옆을 돌아보자 팔꿈치를 누른 채 자신을 하염없이 응시하던 히스와 눈이 마주쳤다. “…….” “…….” 눈싸움이라도 한 판 벌어진 양 서로서로를 줄기차게 노려보던 둘은, 슬슬 졸음이 밀려왔는지 동시에 눈을 깜빡였다. 언제 흥분했냐는 듯이 쉬이 진정하게 된 혜성이 얼음찜질을 하며 작게 속삭였다. “히스 너는….” 다 식은 달빛이 처참하게 일그러진 모양새로 나무판을 뚫고 둘에게로 미쳤다. 손바닥만한 창문 덕분에 미세하게 반짝이는 달빛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혜성은 히스를 시켜서 전구 등을 켰다. 작은 다락방이 반짝거린다. 다시금 옆에 눕는 히스를 향해 혜성은 작은 입술을 움직거렸다. 바닥의 먼지가 해일을 일으켰는지 온온한 곳곳에 반딧불마냥 춤을 추고 있었다. 메탈 소음은 먼지의 춤 덕분에 사그라들고, 둘은 잠들기 직전 피곤한 낯으로 서로를 신기하게 쳐다본다. 한 달 째 이 생활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생판 남이었던 히스와 정신없이 하루를 지낸 뒤, 마주보며 눕기. 최근에 또 그의 파트너가 바뀐 것 같았는데… “분홍색.” “?” 서로의 몸에 흐르는 땀이 질질 묻는 것에 상관없이 혜성이 하품을 하며 말을 꺼냈다. 바다 위의 표범 이라는 이상한 오페라를 연구 중이었던 히스가 흠칫 놀라서 몽상에의 눈빛을 차단한다. 가끔씩 혜성이 결론부터 이야기를 시작 할 때면 히스는 긴장하기 마련이었다. 늘 이런 식이 있은 다음이면, 혜성은 히스를 놀라게 할 거리를 실행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히스의 긴장감과는 다른 부드러운 어절이 다락방 곳곳에 미친다. “머리칼이 분홍색이면 잘 어울릴 것 같아, 히스는.” “분홍이라면…….” 그는 한국말을 아주 유창하게 잘 하고 이해하는 사람이지만, 딱 하나 관념이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욕과 색깔에 대한 부분에서였다. 혜성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에 분홍색 비슷한 무언가가 있는지 뒤지기 시작했다. “이거.” “!” 때마침 매트리스 바닥에 잡힌 펜이 분홍색이었다. “어울릴 거야. 넌 피부가 하얘서 안 어울리는 게 없겠지만…….” “네가 좋아하는 색인가?” 히스는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계집아이들이 즐겨 쓰는 분홍색 펜을 손가락에 돌렸다. 이 색으로 염색을 하면 틀림없이 히스가 미쳤다 따위의 소문이 퍼질 것이다. 그는 그 생각 하나 만으로도 괴로웠는지 머리칼을 움켜쥐며 으윽 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혜성은 조용히 그의 옆에 엎드려서 한 쪽 팔을 괸 채 뚫어지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히스의 투명한 녹색 눈을 보며 이번에는 생각이 바뀌었는지, 머리칼을 살짝 살짝 스치던 작은 손이 말한다. “분홍보다는… …블루가 낫겠어.” “블루!” 이번에는 한 번에 알아들은 히스가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혜성은 매트리스에 찍은 팔꿈치를 중심으로 얇은 팔에 뺨을 부비며 향긋하게 웃었다. 눈 꼬리가 휘어지자 혜성의 연한 상아색 머리카락이 가느다랗게 흐트러졌다. 느닷없이 꺼낸 염색 얘기에 많이 당황해 하는 히스가 여전히 혜성에게는 신선하다. “그게 내가 좋아하는 색이다. 파란색.” “…….” “왜?” 갈수록 위태로워 보이는 혜성의 이유가 무엇일까- 그간 고민해 봤는데 정답은 바로 이것이었다. 혜성이 염색한 상아색 머리카락 덕분에 더 하얄 수밖에 없는 그의 피부, 그리고 가끔씩 터져 나오는 자명종과 같이 울림을 주는 미소… 히스는 벌써부터 염색 한다는 것에 신중을 기하는지 몰두한 표정으로 물었다. 바닥 저 쪽에 나뒹구는 손거울은 벌써 히스의 손에 잡힌 지 오래였다. “꼭 염색을 해야 하나?” “네 눈동자처럼 녹색은 어떨까 고민해 봤지만, 역시나 별로야.” “어째 서지?” “나는 파랑색이 더 좋거든.” “?” 제 멋대로 변해가는 혜성의 장단에 얼추 적응 한 히스는, 그러냐면서 손거울로 자신의 머리칼을 심각하게 쳐다본다. 조각처럼 섬세하고 날카로운 외모가 파란색 때문에 부드러움을 상실하면 어쩌냐는 질문에, 혜성은 아기처럼 방글방글 웃었다. “그렇지 않아…….” “……?” 혜성의 마른 손가락이 나란히 엎드려있는 히스의 앞 머리카락을 사뿐히 만져준다. 가벼운 탄성이 세포 곳곳에 미쳤다. 왠지 눈을 감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혜성의 손가락은 약간 차가운 반면 아주 부드러웠다. 작은 수페리우스의 노래와 같은 음성이 달의 기운에 실린다. “네 머리 위에 하늘과 바다가 생기는 거다, 히스. …바다는 차가운 게 아니야. 바다는 힘이 있지. 인간이 가장 무서워하는 세월에 결코… 무릎을 꿇지 않고 더 큰 능력을 발휘하거든. 때로는 화도 내지. 그러나 걱정 할 건 없어. 바다와 같은 색을 지닌 하늘이 노여움을 금방 진정시켜 주거든.” “!” 말을 하는 족족 볼이 아팠는지 인상을 찡그리는 혜성이 가여웠던 히스는 얼음찜질을 하는 쪽을 향해 호~ 호~ 하면서 옅은 바람을 불어주었다. 둘은 그러면서도 서로가 이상한 인연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아주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물론이다. “세상천지를 둘러봐라. 바다와 하늘보다 아름다운 색은 또 없을 테니까. 하하하.” “음…….” 고민하는 히스의 안면 아주 가까이에 자신을 드리우며 혜성은 송달거렸다. “그럼 더 멋있어질 거야…….” “!” “너만 공중에 떠 있으면 재미없잖아, 히스. 같이 놀아야지…….” “!” 뭘 논단 말인가! 염색을 하면 밑바닥 끝을 느낄 수 있다는 소리? 사람을 이토록 제 멋대로 가지고 노는 사람이 어딜 봐서 순수하고 착하고 귀엽다는 거람! 히스는 소문으로 들었던 한국 아마데우스의 수페리우스와 관련된 소문을 완전히 믿지 않기에 이르렀다. 그는 위태롭고, 아름답다. 그래,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그의 입학시험 연주회 때도 느꼈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당시의 수페리우스는 전혀 나태하지도 위험하지도 않은 한낱 소년일 뿐이었다. 한 번 봤던 그의 인상이 그럴 정도인데, 아마도 한국 학생들이 기억하는 수페리우스는 그의 말마따나 정말 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게 정답이라면 그가 야기한대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딱 한 번 제대로 변하기로 한 것일 테다. “염색하고 올게.” “지금? 이 새벽에 어디서?” 매트리스 끝에 앉아서 부랴부랴 옷매무새를 정돈하던 히스가 혜성의 말에 시계를 흐릿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새벽 네 시 하고도 반이 지났다. “쟈크 한테 해 달라고 하지 뭐.” “그는 너의 새 애인?” “음…. 그렇지?” “하하하- 한 달 내내 몇 번이나 애인이 바뀌는 거니, 히스?” 그의 서랍 안에 가득한 콘돔을 괜히 꺼내 보이며 혜성이 약을 올렸다. 화들짝 놀란 히스가 손을 뻗어서 서랍을 닫은 뒤, 깔깔깔 웃기 바쁜 작은 수페리우스의 몸을 덮었다. 그의 눈이 다시 묻는다. 언제까지 이 생활을 할 거니, 수페리우스? 혜성이 강한 눈초리로 자신을 누른 그에게 화답했다. 이제 시작이야…. 히스는 나가기 직전에 괜스레 등을 돌리더니 갑자기 떠오른 방 금의 것을 심통 난 아이처럼 물었다. “그런데 수페리우스!” “왜.” 부르는 족족 차갑고 짧게 대답하는 혜성의 모습이 그의 진짜라고 믿는 히스가 약간 망설이는 듯싶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는 왜 나한테 반하지를 않는 거지?” “…….” “정말 네가 처음이다! 혹시 마음을 숨기고 있는 건가?” “미련하기는… …짐짝에게 반하는 취미는 없다.” “!” “큭큭큭….” 더듬더듬 매트리스 아래 눌려있는 위스키 병을 찾아 낸 뒤, 반짝 눈을 빛낸 혜성이 심드렁한 투로 대답하자 히스가 아예 굳어버린다. 그 모습을 위스키 병에 비친 것으로 확인하며 혜성은 자지러지게 웃었다. 말도 못 하게 여유로운 평화, 그러나 위태롭기까지 한 영원이 자신의 영혼에 바짝 붙어있는 기분이었다. 시원하게 웃어도 가벼워지지 않지만, 무거워지지도 않는 무중력의 상태. 아. 이것도 혹시 행복인가? 혜성은 병 채로 위스키를 꿀꺽꿀꺽 마신 뒤, 도전적인 눈매로 히스를 쳐다보았다. 히스는 도어를 쥐고, 반듯한 녹색 눈동자로 또 묻고 있는 듯싶었다. 혜성은 대답 대신 술을 마시며 가운데 손가락을 쭉 내밀었다. 대답 했잖아. 이제 시작이라고…. 혜성의 상스러운 행동에 기가 막힌다며 얼굴이 붉어진 히스가 십칠 십칠! 하고 다락방 밖으로 나갔을 때, 혜성은 키득키득 웃으며 조용히 잠에 빠져들었다. 꿈이었을지도 몰라. 환각 이라고들 하지. 진짜 현실은 지금 일지도 몰라. 그럴수록 이상은 멀어지며, 꿈은 가까워지지. 아마데우스라는 곳은 영원히 꿈이요 멀어지는 이상일 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의 현재를 붙잡기 위해서, 나는 그렇게 여기기로 했다, 멋쟁이 히스. wgreene@naver.com 덧글 3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4편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4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5편 ▼ 다음글 - 2악장 3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5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3/26 22:47 http://blog.naver.com/wgreene/110002872010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326 4, 5편 업데) Amadeus 음악 : 피아노 트리오 E-Flat 장조 Op.100, D.929 중 2악장 (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피아노 트리오 E-Flat .. 2악장 5편 꿈이었을지도 몰라. 환각 이라고들 하지. 진짜 현실은 지금 일지도 몰라. 그럴수록 이상은 멀어지며, 꿈은 가까워지지. 아마데우스라는 곳은 영원히 꿈이요 멀어지는 이상일 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의 현재를 붙잡기 위해서, 나는 그렇게 여기기로 했다, 멋쟁이 히스. 룸펜이 다시 시끄러워진 것은 채 이틀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 날의 혜성은 매혹적인 붉은 실크 재질을 입고 길거리에 파는 긴 속눈썹을 붙였다. 다행이 그 날의 곰 같은 독일 놈은 나타나지 않았다. 혜성은 바텐더 복장으로 조심조심 자신을 주시하는 히스에게 가볍게 윙크를 한 뒤 마이크를 잡았다. 하루라도 음악이 없으면 살 수가 없어. 책을 잃다가 물음표를 보면 바하가 떠올라. 설령 밑바닥이라고 정한 지점이 현재라고 해도, 음악이 없이는 하루가 길어. 혜성은 목을 가다듬고, 레코드를 끼웠다. 잔잔한 솔베이지 선율이 흘렀다. 여린 박자와 함께 비명을 참는 듯 한 바이올린의 음표가 주홍빛 룸펜을 슬픈 바다에 빠지게 했다. 낮에는 충분히 수면을 취한 뒤, 룸펜을 청소하기 시작하는 히스를 거들고, 새벽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그리고 마이크를 잡는 거야. 그게 싫은 날에는 궤짝처럼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가여운 피아노 건반을 눌러 주는 거지. 물론 아무도 좋아하지 않아. 그 누구도 갈채를 퍼붓지 않는 이 곳에서…. 혜성의 연주를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겼었다. 혹자는 그를 미치광이 취급을 했다. 하지만 혜성은 새벽 세 시 라는 시간을 무기로, 얼큰하게 취한 외국인들을 무시한 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기로 결심한 지 오래였다. 히스가 막아도 되지 않는 일이 바로 이것이지 않던가. 혜성은 자신이 왜 이렇게 하는지 이유는 생각지도 않고 무조건 하려고 덤볐다. 전혀 아름답지 않다. 지금의 수페리우스는 전혀 아름답지 않아. 옆에서 혜성을 욕하는 바텐더 녀석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며 히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지난밤 염색한 푸른색 염색 덕분에 히스의 목 주변은 온통 그 색 천지였다. “오늘은 저 정도에서 그치나 본데…?” “…….” 바텐더 녀석의 말마따나 오늘 혜성에게 시비 거는 녀석은 그저 취객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는 매혹적인 눈매로 모든 이를 유혹하듯 마이크를 쥐고 엉뚱한 곡을 부르는 혜성에게 시끄럽다며 양주를 부었을 뿐이니까. 오늘의 혜성은 상대가 조무래기 따위도 안 된다는 것, 그리고 또 피곤했던 탓에 조용조용 젖은 몰골로 남은 삼십분 동안 노래만 했다. 텅 빈 눈으로 술을 뚝 뚝 떨어뜨리며 솔베이지를 끝냈을 때, 혜성은 조용히 무대를 내려왔다. 그는 심기가 불편했다. 왜 오늘은 나타나지 않았지? 그 곰 자식. 거의 가라앉은 뺨의 붓기 부분을 꾹 누르며, 혜성은 신경질적인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히스가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아주 무기력한 무언가가 슬슬 혜성의 목을 조여 오고 있었다. 사람은 가끔 자신의 상황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여 주위를 탓 할 때가 많다. 이유가 무엇이지? 네 탓이야- 식으로, 알고 보면 문제의 근원은 자신에게 있는 것을 남에게로 돌리는 것이다. 무기력과 시기 질투, 또 분노와 맥이 빠지는 것에 대한 이유는 틀림없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사람은 모른다. 그래서 혜성 역시 오늘의 연주가 영 탐탁치 않은 이유를 히스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마음에 안 들어.” “블루… 괜찮다면서?” “피곤하다.” “이상해? 이상해?” 혜성은 대답 없이 다락방의 더러운 바닥에 엎드린 채 하나 둘 옷을 벗기 시작하였다. 히스가 쳐다보고 있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오늘따라 끈적한 무기력함이 자신을 들쑤시는 이유를 찾아야 했다. 찾지 못하면 내일도, 모레도, 자신은 이유 없이 무대에 서고 또 이유 없이 시비 거는 무리들에게 화를 퍼부을 것이다. 이 생활을 한 달 이상 지속하자니 이젠 재미없어졌다. 더 끝없는 무언가로 빠져야만 해… 그래야 돼… 스스로를 향해 압력을 가 하던 혜성은 조용히 나무 바닥에 엎어져서 종이와 펜을 쥐었다. 히스가 보름 전부터 알려준 라틴어와 독어, 그리고 작곡에 대한 공부를 오늘 집중해서 하면 꽉 눌린 이 기분이 가실 것 같아서였다. 그런 혜성의 엎드린 모습을 습관처럼 관찰하기 위해 히스는 바텐더 복장으로 의자에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혜성을 예의주시하는 히스의 양 손과 턱은 돌려 앉은 의자의 머리 부분에 꼭 기대고 있었다. “……?” “…….” 뭘 쳐다봐? 식으로 괜히 히스를 찌릿 노려본 뒤, 혜성은 싱글싱글 웃어주는 그의 눈동자에 가운데 손가락을 덤으로 날려 준 뒤 종이 쪼가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젠 혜성이 어떤 짓을 해도 십칠 이라는 말을 잘 꺼내지 않는다. 괘씸하다. 오늘 기분이 안 좋고, 막혀있는 듯 체증이 가시지 않는 이유는 저 놈 때문인가? 맨 바닥에서 속옷만 입은 채로 여윈 등을 하얗게 빛내던 혜성이 조심조심 펜을 굴렸다. 독어 까지는 어떻게 해 보겠는데, 라틴어로 파고들자니 머리가 복잡해진다. 그래. 오늘은 오선지에 콩나물이나 찍자. 하는 결심에 피유- 한 숨을 내쉬고 꽉 막힌 머릿속을 움직여 본다. 히스는 여전히 혜성의 머리맡에 의자를 붙인 채 내려보고 있다. 혜성이 또 노려보자 이젠 면역이 되었는지 시선을 피하지도 않는다. 히스와 함께 지내는 족족 알게 된 사실이 많다. 첫째, 그는 전혀 테레사가 아니다. 둘째, 그는 말도 못 할 바람둥이 이다. 어떻게 일주일에 세 번 이나 애인이 바뀌는 걸까? 제일 오래 간 그의 애인은 일주일 기록을 세웠던가? 이태원 바닥에 굴러다니는 인간들을 모두 제 것으로 만들 작정인지 히스는 파란 머리칼을 손거울로 정돈하면서, 자신을 생각하는 혜성을 꿈에도 모르는 채 힐끔거리고 있다. 묘한 둘의 관계는 계속되고 있다. 혜성이 히스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였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독일의 테레사 라는 수식어는 그의 입에서 파생되었다는 것. 언제고 동완이를 만나면 제일 먼저 고자질 해 버려야지……. 하루 종일 재즈 바에서 하는 소리라고는 예스, 혹은 노 밖에 없는 혜성 덕분에, 그는 알게 모르게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존재로 떨어지고 있었다. 히스의 걱정 가득한 시선 따위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이라는 듯, 혜성은 기존의 솔베이지 악보를 옆에 펼쳐놓고 자신이 조금씩 바꿔 보리라- 음표를 적기 시작하였다. 신이 나서 오선지에 낙서 하는 혜성을 위에서 쳐다보던 히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 이상하지. 아마데우스에서와는 달리, 이 바에서, 또 이 다락방에서 보는 혜성은 늘씬하고 커 보인다. 장소가 바뀌면 사람도 바뀌는 걸까. 자신이 왜 솔베이지를 추구하는지, 또 왜 기분이 들락날락 인지 근원을 파헤치려 들지도 않는다. 바람에 날리는 이삭처럼 자유롭고, 그래서 위태로워서 봐 줄 수가 없다. 내일이면 또 다른 쪽 뺨에 상처가 생길지도 모르는 수페리우스는, 겪을수록 괴짜임에 틀림없었다. 솔베이지 선율에서 약간 바꾸기만 하는 일종의 변주곡을 작사하며 혜성은 즐거운 듯 콧노래를 흘렸다. 의자 머리에 턱 기댄 채 구경하던 히스가 자신이 가르치려고 노력했던 흔적들이-독일어 단어-바닥에 나뒹구는 모습을 보며 씁쓸한 투로 중얼거린다. “…내가 왜 널 가르치고 있는 거람.” “오지 마. 가르치지 마.” 지지 않고 대답하는 꼴을 보아하니, 그도 자신 못지않게 긴장하고 경계했음이 드러난다. 히스는 기분이 나빠졌다. 익숙해지려고 해도, 감히 자신에게 함부로 구는 이 작은 녀석은 기분이 나빠서 견딜 수가 없다. “십칠…” “욕 하지 마.” “…….” “킥….” 히스가 자신을 어떤 표정으로 보고 있을지 뻔히 다 아는 혜성이 턱을 올렸다. 과연, 침울해진 그가 의자 머리에 누른 턱을 더 세게 찧으며 혜성을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모호한 달빛이 어제보다 더 어그라진 형상으로 여릿하게 찾아들었다. 나폴갱이 먼지들은 느린 선율이 흐르는 룸펜의 분위기에 걸맞게 조용조용 춤을 추었다. 좁은 다락방은 먼지와, 주홍빛 전구, 그리고 일그러진 달빛에 반사되어 윤이 나는 두 사람이 전부였지만, 그래서 꽉 찬 것이리라. 히스와 눈이 마주친 뒤 혜성은 생긋 눈 꼬리를 휘이며 미소 지었다. 흠칫 놀라는 히스의 표정을 보는 순간 역했던 방금 전까지의 기분이 물러나는 것 같았다. 혜성이 뭐라고 다음 말을 잇기도 전에 히스가 뭐에 홀린 표정으로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너… 등선이 참 예쁘다.” 이에 몽롱한 기분이 식어버린 혜성이 차갑게 대꾸하였다. “…멋있다고 정정해 히스.” “키스 해 보고 싶어.” 제정신이 아니군. 혜성은 쯧쯧 혀를 차며 기지개를 켰다. 날씬하고 마른 등이 움직이는 족족 히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 시선을 알아챈 혜성이 슬쩍 묻는다. 밤이 지루해지고 있다. “자크랑 헤어졌어?” “자크가 아니야. 이번에는…….” “관두자.” 또 다른 놈이나 여자를 사귀는 게 틀림없겠지. 왜 저런 놈이 내 옆에서 떨어지지 않는 거람! 없던 짜증이 생긴 혜성이 통 개운해지지 않는 요즘을 떠올리며 부르르 떨었다. 반쯤 감은 눈으로 혜성을 내려보던 히스의 박자가 도착한 것은 그 때였다. “네 등이 예뻐서 키스하고 싶어, 수페리우스.” “…키스받기 싫어.” “하!” “흠… 여기서는 8분의 6박자가 낫겠지…….” “수페리우스!” “왜.” 당돌하게 눈 꼬리를 치켜세우는 혜성의 모든 것은 그의 머리칼만큼이나 상아빛이 감돌았다. 히스는 갑자기 찾아온 이 당혹스러운 기분에 오늘 아침에 사귀기로 약속한 여인을 떠올려 봤다. 오… 십칠. 그런데 이름이 뭐였지? 너무 많은 사람들을 사귀었나? 차분히 여인의 이름을 생각해 내던 히스는 자신이 왜 이런 것을 고민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에까지 미치자 얄미운 수페리우스를 톡 쏘아보았다. 그래. 문제는 저 녀석 때문이다. 애인 사이는 아니지만, 나 히스클리프와 매일 매일을 지내면서도 표정 변화 따위는 전혀 없이 차갑기만 한 저 수페리우스 때문이다. “너는… …너는 왜… 나한테 반하지를 않지?” “…그러게 말이다.” 심드렁한 혜성의 대답에 화가 머리 꼭대기 까지 솟은 히스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다가 키보다 약간 낮은 다락방 천정에 머리를 세게 부딪쳤다. 그 덕분에 우수수 떨어지는 먼지에 콜록거리던 혜성이 한심하다는 듯이 히스를 와락 노려보았다. 히스는 전혀 물러섬 없이 크게 소리쳤다. “난, 남자한테는 더 부드럽게 한단 말이야!” “누구였지… 아. 제이슨이랑 다시 만나 그럼.” “싫어! 제이슨은 혀가 꼭 곰탕 같단 말이야!”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점점 말수가 줄어드는 것 같고, 감정 변화라고는 무대에서밖에 안 보여주는 수페리우스 때문에 내가 미쳤나? 라는 히스의 자책이 끝나기도 전에 혜성은 웃음을 참는 것처럼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곰… …그럼 사슴 만나.” “!” 혜성은 그를 놀리는 게 아주 재미있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아마데우스 안에서는 누군가에게 놀림을 당했으면 당했지, 자신이 깔아 댄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상관없다- 식으로 마음이 변해서일까. 히스의 기분 따위에 상관없이 아무 말이나 내뱉고, 또 무대에서 횡포를 부릴 때마다 혜성은 즐거운 스릴 때문에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흐으음… 왜 늘 같은 부분에서 막히지… 아. 아아. 아아아아….” “수페리우스!” “…….” “진짜야. 남자랑 하면 되게 잘 해.” “…….” “정말인데…….” 혜성은 늘씬한 등을 약간 움직였다. 그의 팔이 턱을 괼 때, 히스는 진심을 다 하려는 듯이 혹은 분하다는 듯이 다음 말을 준비하려고 했다. 혜성은 펜으로 그가 앉아있는 의자를 톡 톡 두드리며 나른한 어절을 읊었다. 과거를 몽땅 끌어들이는 입술이 있다. “너는 꼭…….” “?” 잊었노라 자신했던 과거의 세기가 한 데 끓어오를 때, 수페리우스의 눈빛이 자상하게 바뀐다. 음표를 그리던 악장의 다음 부분은 텅 빈 채로, 혜성은 과거의 눈동자를 즐겁게 떠들었다. “세 사람을 합쳐 놓은 것 같다, 히스…….” “셋? 셋이나? …내가 메두사도 아니고…….” “테레사의 낭만적이되 힘 있는 리더십, 문정혁의 부드러운 애절함. 그리고…….” “그리고?” 고개를 쑤욱 내밀어서 혜성의 이마에 닿을 뻔 했던 히스의 입술을 에일리언 보듯 괴상하게 쳐다보던 과거의 수페리우스는 홱 등을 숙였다. “…엄마 닭 같아.” “닭?” “…그래.” “!” 사람이 아닌 닭이라니! 취소해! 라고 윽박지르며 혜성의 등을 발로 툭툭 치던 히스가 혜성이 잡아 끄는 바람에 엎어질 때, 두 사람은 조용히 깨달았다. 혜성이 스스로 테레사와 아마데우스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리고 혜성은, 대수롭지 않게 꺼낸 지금의 아마데우스 구절을 바로 다음날이 되어서 후회하게 된다. 어쩌면 히스에게 지금 아마데우스 이야기를 꺼낸 것은 실언이야- 라고 못을 박지 않았던 탓일 게다. 여느 때처럼 새벽 세 시, 약속된 시간에 무대에 오른 혜성은 오늘도 그 곰 같은 자식이 안 왔네- 라며 인상을 찌푸린 채 마이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혜성의 이상한 발작 같은 공연에 이력이 난 손님들은 저마다 농을 지껄이며 무시하기에 이르렀다. “……!” 그 누구도 저 하찮고 작은 가수에게 집중하지도 않았거늘, 혜성은 별안간 마이크를 쥔 채로 굳어버렸다. 사지 육신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쾅- 가을의 바람이 전신을 휘몰아칠 때, 혜성은 고작 한 달이 약간 지난 현재를 보이기 싫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눈물이 툭 떨어졌고, 그를 지루하게 지켜보던 몇 명의 술고래들이 욕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시, 시끄러워!” 제 정신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 혜성이 멍청한 투로 소리쳤다. 히스는 오늘따라 아무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혜성은 제 앞에 보이는 것이 믿을 수 없었는지, 그물 옷을 모두 떨리우며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히… 히… 히-스!!” 너무 큰 소리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 데 몰리자, 이번에는 마이크를 치우고 소리쳤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가을의 바람에 붉게 쳐들어와 혜성의 심장을 후려 쳤다. 악! 하고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돌처럼 굳고, 피를 뿜어내는 심장에의 고통이 숨통을 막는다. 혜성은 눈을 감았다. 찐득한 싸구려 마스카라 물기가 뺨에 쭈르르 타고 내려왔다. 눈을 뜰 수가 없다. 저 쪽 혜성의 모습을 언제부터 관찰했을지 모를 이가 아이와 비슷한 포즈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혜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팠지만 눈을 여전히 뜰 수 없었다. 히스에게 아마데우스 구절을 대화 중 섞어서 말한 다음날이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사람은 바로 사비나 교수였기 때문이다. “망할! 히이-스!” 옅은 새벽의 종소리가 룸펜의 자명종을 울릴 때, 혜성은 정 중앙에서부터 바람을 일으키듯이 비명을 지르더니 작고 볼품없는 무대에 무릎을 꿇었다. 꿈이었을지도 몰라. 환각 이라고들 하지. 진짜 현실은 지금 일지도 몰라. 그럴수록 이상은 멀어지며, 꿈은 가까워지지. 아마데우스라는 곳은 영원히 꿈이요 멀어지는 이상일 지도 모른다. 아직은 그래야만 해… 아직은 멀어야만 돼… wgreene@naver.com 안녕하세요 그린입니다. 두 편 올렸으니까 읽으실 때 차질 없으시길 바랍니다. 4편이 분량이 예상 밖으로 길어져서 잘라냈는데.. 그래서 5편이 너무 짧군요. 어쩔 수 없습니다.(퍽-) 자르지 않으면 블로그가 느려져서; 반가워 해 주시는 분들께 모든 기쁨을 드립니다. 그나저나 히스와 좌절하기는 예상 편수가 열 편 이었는데 나태기가 늘어날 것 같아서 걱정이군요.(늘 이런식이지 늘! ㅜㅜ) 왜냐면 수페리우스가 이태원에서 뭔갈 하는데 그 시도 비슷한 부분이 아직 나오지도 않아서...(큰일이다.. 쓸데없는 문장 모조리 다 삭제 했는데도 왜이러니 모차릇트?) 그리고 이것은 작년 8월 이후 다시 시작하는 2악장이니까, 기억나지 않으시면 1악장부터 천천히 보시는 게 당연합니다; 그걸로 절대 죄송하다는 말은 금물입니다; 부족한 글 기억해 주시고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달콤한 주말이 끝났습니다. 좋은 한 주 시작하세요! 화이팅! * 그리고 저의 댓글에 대한 답글은 각 편 하단에 댓글란에 낑겨서 올렸습니다. ^_~ wgreene. 화이트그린 2악장 4, 5편 올림(060326) 덧글 10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5편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5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6편 ▼ 다음글 - 2악장 4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6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4/03 15:19 http://blog.naver.com/wgreene/110003080305 Amadeus 음악 : Horchat Hai Caliptus(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Horchat Hai Caliptus [.. 아직은 저에게 추억을 가져오지 마세요. 견딜 수 있는 힘의 뿌리가 땅 속 깊이 가지를 뻗기 전에, 당신이 섣불리 여는 추억은 나의 숨을 찌르고 죽일 거예요. 2악장 6편 사람이 무너지는 것은 그야말로 한 순간 이라더니, 그 문장 지어낸 태초의 인물을 잡아서 사지를 찢어 버리고 싶을 정도의 격정이 넋을 찌른다. 혜성은 숨 쉬는 법을 잊은 물체처럼 멍하니 서서 온갖 욕과 싸구려 언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크캉- 레코드판이 돌아가는 동시에 시끄러운 락이 터져 나왔다. 새벽 세 시의 룸펜은 낮처럼 잔잔한 재즈가 아닌 이태원 패거리들을 위한 락과 메탈로 도배가 되는데, 혜성이 주어진 시간 내에 노래를 하지 않자 웨이터 녀석이 재빨리 판을 재생시킨 것이다. 사람들은 혜성에게 보냈던 야유를 빨리 잊어버리고 저마다 흥에 겨워 푸념과 농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나비와 벌이 날아다니는 공간이 자연스레 연상되었던 아마데우스가 그려졌다. 혜성은 주변 곳곳을 멍청하게 돌아보았다. 단추 소리와 함께 좁은 무대의 조명이 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성은 움직일 수 없었다. 영혼과 육체의 박자가 엇 박으로 비껴갈 때, 세상은 분해 되고 시야는 흐려진다. 초침은 그대로여도 사방은 느리게 정지하기 위해 속도를 줄인다. 공포라는 놈은 그런 식으로 찾아오는 법이다. 이대로 박제가 되어 영원히 움직이지 않으면 참 좋으련만, 벌써 박제가 되었다며 나의 다리는 떠드는구나. 헌데, 내 머리와 생각과 교만과 저주받을 감수성은 어째서 박제가 되지 않았단 말인가! “수페리우스…….” “!” “수페리우스.” 그 때 몸이 민첩하게 움직여졌다. 혜성을 부르며 조금씩 다가오는 사비나 교수의 슬픈 눈동자와 그녀의 두툼하되 작은 체구가 진짜로 움직이는 것을 보자 얼어 붙어있던 몸뚱아리가 저도 모르게 무대 밖으로 달음질한 것이다. 오 하느님! 천주여! 누구든지 나를 지켜보는 자여! 벨벳 시트가 지저분하게 깔린 다락방 쪽 계단을 밟을 때, 혜성의 심장은 역할을 잃었다. 세게 뛰다 못 해 차라리 죽는 것을 택했나 보다. 마음이 아프기 전에 가슴은 죽어서인지 아무런 작용도 보이지 않는다. 둔기가 치고 지난 것처럼 얼얼한 뇌도 죽었다. 그래서 움직이기 수월하니 나는 괜찮아. 더러운 벨벳 시트와 잘 어울리는 얇은 드레스 천을 허리에 두른 탓에 혜성은 몇 번이나 고꾸라지면서도 뒤를 돌아 볼 수 없었다. 사비나 교수가 쫒아오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예상이 들기 무섭게 목소리가 귀청을 후려 찬다. “수페리우스!” “!” 천주여! 심장이 다시 말도 못 하게 뛸 때, 혜성은 반쯤 벗겨진 벨벳 드레스 천을 바닥에 벗어 던지고 계단을 뛰었다. 목소리는 계속 혜성의 귀를 못 살게 굴었다. 진공관 상태에서처럼 윙윙 울리는 사비나 교수의 찢어지는 부름을 혜성은 막을 도리가 없었다. 눈물로 얼룩진 뺨 전체에 보라색 마스카라가 찐득하니 흔적을 그렸지만 지울 수가 없다. 그는 양 쪽 귀를 막고 몸으로 도어를 열었다. “흐. 흐으. 흐. 흐허. 허.” “…….” 도어를 닫고 등을 기댄 뒤, 혜성은 거친 숨을 내쉬며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이 들었던 사비나 교수의 음성은 모두 환청 이라는 것 마저 알았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 봤자 저 밖 어디선가 이 쪽으로 올라오는 소리, 또 문 밖에서 노크하는 소리 따위는 전혀 들리지 않았던 탓이다. 도와주세요, 안돼요 아직은 그럴 수 없어요! 엇 박으로 비져 나오는 사나운 음성들이 혜성의 여윈 어깨부터 짓누르듯 파고들어왔던 방금 전이 지금처럼 생생해질 때, 혜성은 스르르 주저앉았다. 어그라든 달빛이 평화와 휴식을 준답시고 다락방의 지붕 창문 안으로 사르르 밀려 들어와서 수페리우스의 발끝에 미쳤다. 혜성의 흥분이 약간 가실 때 즈음 달빛에 취해 등을 돌리고 있던 히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왔다. 그가 도어에 기대어 주저앉아 있는 혜성의 앞에 서자 길게 늘어진 달그림자가 세련되게 바뀌었다. 사시사철 바뀌지 않겠노라 약속의 도장을 찍는 거짓말에 능한 가을의 바람이 살랑 살랑 몸을 흔들며 둘을 스쳤다. “네가 알렸지.” “.....” 히스는 대답 없이 물끄러미 내려 보기만 했다. 지금의 수페리우스는 눈을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위태로워서 뭐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았지만 그럴 수 없다. 히스는 자신의 역할이 어디까지인지 잘 알아서, 따사로운 봄볕처럼 만개하며 웃어 줄 때가 있었듯이 지금처럼 경계선을 긋기도 한다. 그 경계선 이라는 놈의 출발이 하필이면 지금 이라는 게 조금 문제이긴 하지만…. 테레사와 이자벨에게 관심을 줬던 이후, 히스 자신은 그 누구에게도 '공평' 이상의 관심을 준 기억이 없었다. 지금 수페리우스와 매일매일 지내는 것은 그래서 히스에게 때때로 고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을 보고 한 눈에 반하지도 않았다! 죽은 사람처럼 넋을 잃은 눈으로 밤이면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저 작은 몸이 보기 싫어서, 그래. 그래서 히스는 저 자신의 지겨운 사투가 싫어서 사비나 교수를 이 곳 까지 불렀는지도 모르겠다. 저토록 괴로워하는 수페리우스를 목격 할 줄을 알면서도, 히스는 그래야만 했다. 아닌 척 하면서도 그는 사람이기 때문에 낯선 수페리우스와 함께하며 차곡차곡 쌓인 지겨움 이라는 것을 이런 식으로라도 털어 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수페리우스의 분노를 보는 순간, 사비나 교수에게 연락했던 것을 바로 후회했다. 정도 이상 가는 '사람'의 색이 되어 흐느끼는 수페리우스를 막상 현실에서 목격하니 이상하게 가슴이 옥죄어져 덤불숲에 나체로 내던져진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그 어디라도 따라 오지 마. 나, 나는 날이 밝으면 또 떠날 거야.” “…….” “제기랄.” “…….” “십칠… 십칠.” “!” 뭐라고? 십칠? 나한테 하는 소리인가?! 히스는 가슴이 아픈 것을 떠나서 불쾌감이 엄습하는 현재를 조절할 능력을 잃었다. 박애주의 성향이 있다- 라는 오래 전 누군가가 설명한 자신의 기질은, 수페리우스에게 이것저것을 가르쳐 주는 생활을 하며 깨달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지지 않는 불쾌감은 히스를 더 밖으로 밀어내기만 한다. 자꾸 비껴가고, 종잡을 수 없는 수페리우스의 매일 매일은 히스의 '공평'했던 시선의 능력마저 잡아먹은 것이다. 또 떠난 다구? 내가 사비나 교수를 불러와서? 나 때문에? 내가 왜! 히스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확 소리치려던 내용을 억지로 삼키더니, 노여운 숨을 길게 내쉬었다. 달빛이 차차 시들해져 가을의 향기도 죽어 없어질 때, 그는 차가운 투로 반문했다. “사람 같지가 않더군. 너는 계속 사람 같지가 않았어. 아마데우스에서 벗어나서 버스를 탈 때도, 사비나 교수님을 보기 전 까지도, 말은 하지만 공중에 붕 뜬 것 처 럼 보였었지. 밑바닥이라고 네 입으로 잘도 지껄였지만, 도대체 뭐가 밑바닥이라는지 나는 모르겠더군.” “…….” 그는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났다. 그 증거로 날카롭게 쪼아대는 언어가 고개를 숙이고 웅크린 수페리우스를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화를 도저히 멈출 수가 없어서 마냥 터뜨리기만 했다. 목각 인형이 된 수페리우스는 옅은 가을의 바람을 억지로 쥔 형상이 되어 그 자신조차 바람처럼 흔들리는 듯싶었다. “계속 도망만 치는 게 밑바닥으로 떨어지기……인가.” “!” 바로 그 때, 미동조차 없던 혜성의 어깨가 움찔 떨린다. 오, 이럴 수가. 그가 미동을 보이는 순간 히스의 마음에 안정감이 찾아들었다. 자신의 말에 무엇이라도 그가 반응해 주길 기다렸던 걸까? 모르겠다 아직은…. “그것도 네 인생의 한 부분이다 수페리우스.” “…….” “그리고 니가 사람을 죽였나, 나라를 버렸나? 아니면, 사랑을 버렸어?” “!” 히스는 재빨리 몸을 숙였다. 무릎을 꿇고 조심스레 혜성의 뺨을 들어 올렸다. 다리를 모은 채 웅크리고 있던 수페리우스의 뺨은 온통 보라색 천지였다. 맙소사, 십칠! 예쁜 얼굴을 보라색이 가렸다니! 멋쟁이 히스는 자신이 아끼는 새하얀 블라우스 깃으로 그의 뺨을 닦아주며 조금 부드럽게 말투를 바꾸었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혹시 자신이 인내하며 지금껏 그를 쭉 지켜봐 온 것은 혹시 그가 예뻐서는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너는 네가 밑바닥이라고 정한 곳에서조차 음악을 택했다. 그것조차 망각한 건가?” “!” 좀 더 고개를 숙이고 수페리우스의 작고 도톰한 귀볼 가까이에 입김과 함께 속삭이는 히스의 입가에 미소가 만연하다. 움찔 움찔 입김이 스치는 족족 반응을 보이는 수페리우스를 알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왜 매일 밤 솔베이지를 부르지 못 해 안달인 거지?” “…….” 수페리우스의 눈물이 모두 그치고, 자신의 말투가 부드럽게 바뀐 것 때문인지 갑자기 기분이 평온해진 히스는 이 와중에도 장난기가 발동했나 보다. 통 생각을 알 수 없는 수페리우스의 귓가에 촉촉한 물기가 고일 지경으로 가까이서 속삭이기로 한다. 간간히 그의 입술이 수페리우스의 귓가에 스쳤다. 혜성은 그 때마다 몸부림을 치듯 깜짝 깜짝 놀랐고, 히스는 더 기분이 좋아져서 몸을 붙이기 급급하다. “레퀴엠이 있던 신입생 연주회 때, 너희 그림자 놈이 널 이렇게 부르더군.” “…….” 히스가 귀찮아진 혜성이 아예 몸을 일으키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는 순간, 그의 길고 탄탄한 팔이 웅크린 수페리우스의 양 쪽을 차단했다. 도어에 손바닥을 붙인 채, 히스는 봐도봐도 흥미로운 이 작은 사람의 다른 쪽 귓가에 나지막한 어절로 속삭였다. 자신이 왜 이렇게 하는지 모르지만, 이 순간 왜 답지 않은 행동을 취하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어려웠지만, 히스는 그저 지금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괜찮았다. “왜 그렇게 부르는지 알 것도 같다. 다람쥐 같이 웅크린 수페리우스….” “…….” “한 번 부르기 시작하면 나도 계속 그렇게 부르게 될 것 같은데…….” “…….” 혜성의 뺨에 또르르 구슬 같은 한 방울의 물이 흐를 때, 히스는 천천히 팔을 숙이며 마치 키스할 때 속삭이는 것처럼 감미롭고도 잔잔하면서도 뜨거운 기운을 실어서 속삭였다. “울지 마, 마드모아젤.” “!” 아주 잠깐이지만 사계는 그 둘을 중심으로 번쩍 파장을 보이더니 서서히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듯싶었다. 히스의 내면에 출렁이던 바다가 폭포처럼 바닥에 쏟아졌다. 그래서 쉴 새 없이 입 밖으로 유창한 한국어가 그의 조각 같은 아름다운 용모와 잘 어울리게 흘러내렸다. “울지 마, 이상한 수페리우스.” “…….” “울지 마, 나쁜 다람쥐.” “…….” “울지 마, 순결한 마드모아젤.” “…….” “어디 보자… 나쁜 다람쥐가 가장 어울리는데? 후후…….” “…….” 가슴이 뛰었다. 상황이 재미있어서? 히스는 몽롱하게 도취되는 지금 이 순간이 신기했다. 밖에서는 사비나 교수가 계시고, 이 녀석은 울고 멍청하게 있는데… 나는 뭐라고 지껄이는 거람? 바로 그 때, 마드모아젤 이라는 구절이 끝나기도 전에 혜성이 히스의 진한 녹색 눈동자를 마주쳤다. 히스는 다시 기분이 이상해졌다. 나빠진 건지 좋아진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슬픔을 머금고 있는 수페리우스의 눈동자와 가까이에서 마주치니 약간의 장난을 섞었던 방금까지의 기운이 싹 가신 것이다. 그는 그래서 마음 그대로의 음울하고 차가운 심여를 꺼내고야 말았다. “왜 우는 건 넌데, 내가 이렇게 화가 나는 거지. 그래서 소리를 질렀는데 그건…….” “히스.” “……?” 왜? 나쁜 다람쥐? 라고 저도 모르게 대답할 뻔 한 히스가 싱그럽게 미소를 지었지만, 그것은 혜성의 이어지는 대답에 섞여 흐트러지고 사라졌다. “사비나 교수님은 아직 계실까? 계실까, 히스?” “…….” 금방 이라도 키스 할 것처럼 가까웠던 안면이 떨어진다. 수페리우스가 벌떡 일어나서 히스를 밀친 탓이었다. 히스는 아무런 대답 없이 조용히 스스로를 돌이켜 보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며 도어 앞에 앉아있기만 한다. “그 분을 뵙고 와야겠어.” “…그래라 나쁜 다람쥐.” “뭐? 여하튼, 방금 조언 고마웠다 히스! 넌 정말… 아니다. 나중에 말 하자.” “맘~ 대로.” 서로가 서로를 알기도 전에 시작해서 너그러운 말투 속에 감춰졌던 경계와 긴장의 끈을 잡아당기던 생활이 잠시 풀어지는 듯싶었으나 그것은 금 새 팽팽하게 당겨진다. “왜 저러지?” “십칠… 십칠….” 도어를 닫는 내내 들리는 히스의 욕 짓거리에 수페리우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혜성은 물론 자신에게 잘 들리는 소리만 인지했다. 히스가 귓가에 속삭일 때면 간지러웠던 통에 몇 몇 개의 문장은 흘러 보내기 일 수였기 때문이다. 마드모아젤 이라는 구절에서 정혁이가 떠올라서 몸을 떨었고, 솔베이지 라는 구절에서는 채찍으로 맞는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가 히스에게서 제대로 새겨들은 것은 바로 '도망'이라는 구절이었다. 밑바닥 이란 것이 도망치기만 하는 꼴이라면 말이 되겠는가!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을 시작으로, 혜성은 히스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가슴이 뛰었다. 그가 뭐라고 떠드는지 귀가 간질거렸지만, 사비나 교수님을 이대로 보내는 것은 정말 '도망'이라는 글자 이상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조바심이 들었다. 만나야 돼, 그 분을 여기까지 오시게 한 이상 나는 만나야겠어! 때문에 다락방 도어를 박차고 나간 뒤, 어떻게 계단을 내려갔는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룸펜 내부를 둘러보았다. 긴 안도의 숨을 내쉬며 혜성은 아까보다는 깨끗해진 몰골로 구석의 창가 자리에 앉아 계시는 한결같은 사비나 교수 쪽으로 걸었다. 그리고 그녀의 자리에 도착하기도 전에 추스릴수 없는 심 여를 쥐고 거칠게 외쳤다. “교수님.” “…….” 엉망이 된 룸펜 내부는 시끄러웠지만, 사비나 교수와 마주보고 있는 지점은 이상하리만치 정적만이 가득했다. 혜성은 그녀의 앞자리에 앉아서 세차게 뛰는 심장처럼 말을 하려고 했지만 쉽게 말문이 열리지는 않았다. 맨 다리가 드러난 짧은 팬츠를 사비나 교수는 전혀 훑어보지도, 고깝게 전체를 해석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처음과는 달리 매우 평온한 표정으로 혜성의 낯선 분장을 정겹게 마주보기만 했다. 그래서 혜성 역시 뒤죽박죽 섞여 있는 내면의 홍수에 잔잔한 태양을 비출 수 있게 되었다. 룸펜의 레코드판이 좀 더 느린 박자의 락 음악으로 바뀔 때, 그녀는 음악이 바뀌는 순간을 기다린 것처럼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손바닥 안에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것처럼 조심스레 팔을 뻗었지만 혜성은 고개를 내리지 않았다. “네 특실에 이게 있더구나… 작은 수페리우스.” “저는… …….” 저는 작은 수페리우스가 아니에요 교수님- 이라는 말을 꺼내고 싶었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어느새 자신의 눈물을 닦았고, 맞은 편 아이의 손을 탁자 위에 포개고 있었다. 그래서 말이 더 나오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더 정확한 이유를 따지자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은 뒤 혜성의 뺨을 쓸어주는 사비나 교수의 입술은 참았던 안부 인사 대신에 결론을 먼저 읊어 주어서 였기도 하다. “네 흔적들은 너도 원하지 않을 것 같지만… 어쩐지 이게 눈에 띄더구나.” “…….” “전해 줘야 할 것 같았어.” “…….” “눈도 마주치지 않는 거니 작은 수페리우스.” “…….” 사람의 가슴이 말한다. 너는 잊겠노라 노력하기도 전에 그리움을 만났으니, 이렇게 된 바에야 그냥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냐고 가슴이 묻는다. 가끔은 울음을 짜낸다. 혜성은 내면 저 쪽의 질문에게 그게 아니라고 항변하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말 하는 법을 잃어버린 거니.” “…….” “마주치기 싫고 말을 하기 싫은 거구나. 내가 반갑지 않은 게지.” “…….” “보고 싶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거니 작은 아이야.” “…….” 이번에는 다른 쪽의 내면이 강하게 불어왔다. 바람이 멈춘 지역에서 왜 이렇게 사방이 조용한 거냐고 묻는 것이다. 혜성이 아무 대답을 못하자, 그를 대신하여 내면의 또 다른 무엇이 대답한다. 그렇게 물으려 하는 너 만이 조용한 것이다. 네가 서 있는 곳은 태풍의 눈 이기 때문이지. 그래서 너는 너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기다리며 받는 고통을 전혀 모르는 것 이라는 대답을 감정 기 없는 소리로 지껄이는 것이다.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순서가 뒤죽박죽인 게지.” “…….” “말을 하면 걷잡을 수 없을 것 같든, 수페리우스?” “…….” 그래… 그래. 피바다가 된 내면을 버려둔 채, 혜성은 눈을 떴다. 다 지워진 화장 자국을 보이기 싫었지만 피할 도리가 없지 않던가. 오, 이 순간조차 룸펜의 구석에서 빛처럼 어리 쬐어 주시는 이 분의 순결한 손바닥이 쓸어간 나의 자리는 전과 다를 것이 없어라. “너를 확인하고, 이것을 전해 주는 것으로 오늘을 마치마.” “…….” “다 타고 낡아서 녹슨 열쇠가, 너의 화려한 특실에 어울리지 않게 걸려 있더구나.” “!” '엄마 닭은 다 아는 수가 있어… 우리 울보 흐이…….' 혜성의 눈이 번쩍 뜨였을 때, 어디선가 서러운 음성이 그를 교차해 갔다. 저 열쇠를 기억하고 있다. 굳은 심장에서 마지막 피를 뽑게 했던 저 열쇠를 기억한다. 화염에 휩싸인 낙오자의 동굴을 향해 어리석게 돌진했던 혜성을 지켜주기 위해, 열쇠로 지하 감옥 문을 열고 달려와서 온 몸으로 막아줬던 민우의 온기가 담겨있는…. 저 열쇠를 알고 있다. 그래서 두고 왔던 것을, 사비나는 꺼낸 것이다. 혜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많은 양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가져가. 이런 건 필요 없어….' 감옥에 갇혔던 그를 빼 주고 싶은 욕심에, 위원회에서 저 못된 열쇠를 내 손으로 훔쳤었지. 그리고 거절하는 그의 말대로 나는 열쇠를 갖고 돌아왔어야 하는데, 그에게 선물로 주는 과오를 저질렀었다. 나는 나의 죄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 가슴이 사무쳐서 숨도 쉬지 못 할 정도로 처절하게. 아프게! 울어도 눈물이 아닐 정도로! 서서히 밀려오는 슬픔을 감당하기 싫어서 하루 이틀 미루기만 했던 결과, 바로 이 순간 미칠 듯이! 미칠 듯이……. “그래서 가져왔다. 지금의 너는 아마데우스 특실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 이 열쇠와 어울리게 변했거든. 너의 의도야 모르지만, 나는 오늘 가져온 것 중 열쇠만 주고 돌아가마.” “…….” 사비나 교수와 마주치는 순간, 혜성은 홀로 저 바다의 거센 폭풍우에 있지만 아무런 물기를 스칠 수 없는, 태풍의 눈 한 가운데에 있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들 뜬 기분이 아니며 거룩한 평화도 아니다. 마르고 쩔어 버린 영혼이 예전 기억들에 이르노니, 살아 라 살아라……. 화자의 입에서 도저히 전해지지 않는 울음, 살아라. 살아라. 혜성은 자신의 손을 꼭 잡아 주시는 사비나 교수의 시선을 다시 피했다. 그 분은 마치 어머니 같았다. 정형화 된 어머니 같은 이미지였다. 작지만 풍성한 체구를 지닌 사비나는 혜성의 손바닥을 폈다. 오, 교수님! 혜성은 흠칫 몸을 떨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특실 이라는 단어조차 낯설어요. 나는 아마데우스의 유일한 자퇴 학생입니다. 나는 사람을 죽였어요. 사람들을 혼란시켰어요. 그리고 나는 비겁하게 도망쳤어요. 사랑을 알 것 같은 사람에게 죽음을 주었으며, 가르침과 동경을 준 사람에게 아픔과 시련을, 나를 질투하는 자를 나는 더 질투하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나는 그래서 저 바다의 밑으로 밑으로 계속 빠져 봐야 혼돈이 정리 될 거예요. “내가 제대로 가져온 모양이 구나… 무엇을 일단 가져와서 줄까 고심했었는데….” “으… 으흐… 으…….” “고작 녹슨 열쇠라지만, 너는 이것 때문에 우는구나. 열쇠는 너를 울리는 구나.” “…으… 으으….”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열쇠 중에, 너를 뒤 흔드는 열쇠는 오직 이것 하나 밖에 없을 테니, 주인은 너 밖에 없다 수페리우스.” “으흐… 으흐. 으흐으으으.” “걱정 마렴, 작은 아이야… 아픔을 주었으니, 언젠가는 기쁨과 충만함 역시 너에게 돌려 줄 거야. 세상의 모든 것에는 기쁨과 슬픔이 함께 있는 법이거든…….” “흐으으으으…….” “그러니, 너는 이것을 쥐고 살아야 한다.” 겉이 거의 벗겨진 열쇠를 혜성의 손에 쥐어 준 뒤, 사비나 교수는 나가려는지 채비를 꾸리기 시작했다. 번쩍! 그제 서야 고개를 들고 정신을 차린다. 교수님이 나가시면 잠시 동안 떠올렸던 아마데우스의 기억은 사라지는 건가? 어제처럼?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교수님이 오신 것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뒤로 제껴 두었던 추억과의 잔인한 싸움이 비로소 시작 되는 것이다. “교수님…….” “그래…….” 나는 지금처럼 오래오래 고여 있을 거예요. 고인 물은 바다를 향하지 않겠지만, 저 스스로 빗줄기의 힘에 기대어 흙길을 부수면 언젠가는 바다에 도착 하겠지요. 아직은 물이 고이지도 않았어요. 혜성의 낮은 속삭임은 그러나 내면을 사정없이 휘저을 뿐 결코 소리 내어 밖으로 터지지는 않았다. 그는 몇 번이고 교수님을 불렀다. 그녀는 가벼운 가디 건을 걸친 채로 흐느끼는 혜성의 볼을 어루고 아이의 다음 말을 기다려 준다. “교수님….” “그래… 가여운 아이야….” “저는….” “…괜찮아….” “아직 추억이 될 수 없어서 그래요….” “…….” 많은 말을 하고 싶은데, 가슴을 다 꺼내 보이고 싶은데, 교만한 나의 입술은 제대로 열리지가 않아요. 머리를 무덤에 뉘여야겠어요. 정지한 머리는 쉬운 말도 어렵게 꺼내게 해요. “그래서…….” “모든 것이 추억이 되면 돌아 올 수 있겠다는 뜻 이구나…….” “모르겠어요…. 아직은 아무것도… 다… 싫어요…….” “…….” 혜성의 차가운 손가락에 깍지를 끼어 준 뒤 사비나 교수는 힘을 주었다. 무의 상태에서 유의 모든 것을 체험한 아이의 고통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아이의 고통은 지금 이 순간을 겪으면서도 현실이 받아지지 않을 정도로 힘든 것이다. 그래. 이 아이의 시련은 유의 상태에서 출발했던 테레사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라는 판단이 사비나 교수를 잠깐 이지만 공포로 얼어붙게 했다. “교수님… 저는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 추억이 될 거라는 게 너무… 견딜 수가 없어요….” “!” 또 사비나 교수를 더 소름 끼치게 한 것은, 수페리우스의 바닥 저 쪽 지지 않고 불을 켜는 무언가가 그녀에게 보여 서였다. 진실로 아이가 절망이고 지옥이라면 수페리우스는 벌써 사라졌을 것이다. 상황이 견디기 싫었다면 아마데우스 안에서 사람들이 휘두르는 대로 조용히 말없이 지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쨌든 자신의 의지대로- 설사 그것이 무중력의 상태의지라 할지라도- 움직이고 있다는 지금의 발견은, 사비나 교수를 휘 청이 게 했다. 막다른 곳에서도 이 아이는 쓰러지지 않는다. 쓰러지는 척을 하는 것뿐이다. 바로 지금처럼. 여기서 더 무섭고 소름이 끼치는 것은 이 아이는 자신이 쓰러지는 척을 하는 현재를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스스로의 그런 마음을 잘 알기 때문에 그 마음에의 변화 과정을 안쓰러워하고 싫어하는 것뿐이다! 사비나 교수는 테레사 못지않게 보는 족족 알아 낼 것투성이 인 수페리우스를 한 참 이나 넋을 잃고 내려봐야 했다. “좋은 날이 언젠가는 올 거예요. 그런데 지금 순간순간들이 미래의 추억이 될 거란 사실이 두려워요… 그러나 어쩔 수가 없어요.” “…….” “그래서 조금 변화를 주기로 했어요….” “!” 어떤 것을? 너는 도대체 이런 구석에서 전혀 영 적인 게 없는 이 곳에서 무엇을 느끼고? 사비나는 급하게 물어 보려던 것을 혜성의 다음 말을 들으며 없앴다. “그래서 교수님 가시는 길에 보기로 했는데… 앞으로는 저 찾아오지 말아 주세요….” “……아니.” “!” “나는 너를 꾸준히 찾아 올 생각 이란다 수페리우스.” “!” 쓸쓸하고 마른 혜성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 주며, 사비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핸드백을 챙기면서도 쉬지 않고 답을 해 주었다. 살랑거리는 가을의 새벽이 룸펜의 창가에 미친다. 그것은 테레사가 야기한 하프의 선율이 되어 두 사람을 서서히 쪼여주기 시작했다. “음악에 있어서 나이 따위는 필요 없다는 설명은 오래 전에 했으니 하지 않으마. 네 안에 숨겨진 열정이 두려움 밖으로 떨쳐 나오기까지의 과정. 나는 그것을 지켜볼 것이다.” “…….” “영원히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아.” “!” “정말은, 이 말이 듣고 싶었던 거지?” “…….” 사비나 교수와 혜성의 귀에는 더 이상 룸펜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안 들렸는지도 모른다. 귀는 보다 정확하고 내 것과 관련된 것을 흡수하는 능력이 있나 보다. 혜성은 그녀의 말에 울컥 하고 밀려오는 감동을 주체할 수 없어서 그저 옅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여기도 네가 있다면 빛이 될 수 있어. 그러니 굳이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다, 수페리우스. 여기 있어도 괜찮다. 너는 괜찮은 거야. 세상 모든 것은 보배이니까.” “교수님…….” “낡은 집도 비를 피할 수 있다면 그 순간만큼은 보석보다 귀하고 아름다운 거야.” “…….” “세상에 필요하지 않은 것 이라는 건 없어. 천주님께서 그런 것은 만들지 않으셨거든.” “…….” “다음에 찾아 올 땐, 나도 너의 현재가 되었으면 한다…….” 그녀는 그렇게 말을 남기고 혜성의 손에 쥐어진 열쇠를 또 한 번 확인하더니 룸펜을 나섰다. 혜성은 창 밖으로 멀어져가는 사비나 교수의 뒷모습을 보며 서러워지는 감정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간 밑바닥이라고 말은 했지만, 자신이 인정한 이 곳에서 뭘 제대로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판단이 들었고, 그것은 혜성의 내면에 더 할 나위 없는 수치심마저 안겨준다. 사비나는 돌아선 등을 돌리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는 하프의 선율을 쪼이며 멀어져가는 사비나 교수의 등에게 말을 붙였다. 자상한 슈베르트의 선율, 사비나 교수님. 아직은 저에게 추억을 가져오지 마세요. 견딜 수 있는 힘의 뿌리가 땅 속 깊이 가지를 뻗기 전에, 당신이 섣불리 여는 추억은 나의 숨을 찌르고 죽일 거예요. 세상에 잊을 수 있는 건 없어요. 내가 잊어도 존재는 벽과 공기 중 에 바람처럼 영원히 숨을 쉬니까요. 내가 죽어도 사실은 수 십 수 백 번 내 죽은 넋에 뺨을 때릴 거예요. 결국 잊으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잊혀지지 않지요. 추억 이라는 글자는 아주 잔인합니다. 결국은 자기위안을 위하여 우리는 추억 이라는 글자와 친해지지요. 수도 없이 그 글자에 등을 기대고 가슴을 포개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다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나는 그것에 마음이 아파서 숨이 쉬어지지 않아요. 돌아올 고통을 위하여 추억을 빚기가 두려워 졌기 때문이지요. 만들어진 추억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현재 역시, 미래의 추억이기에…. 추억은 잔인한 글자이지만, 때로는 힘을 준다고 하던데 나는 그것을 아직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가 알려준 밑바닥 이란 곳에서 몸을 웅크린 갓 난 아이처럼 잠을 자고 싶네요. 추억이 주는 칼에 난도질을 당하고, 피를 닦은 뒤, 상처가 아물 때 즈음, 공기 중의 바람에 섞여서 나는 돌아갈 거예요. 어차피 세상에 잊을 수 있는 건 단 하나도 없으니까요. 밑바닥의 첫 걸음에서, 나는 이것을 배웠어요. 현재도 미래의 추억이라는 것을…. + 슬픈 웃음님이 아마데우스와 비슷한 이미지라면서 안부게시판에 올려주신 사진입니다.^_~ 정말 똑같은데요? 고마워요. 이 포스트를.. 덧글 5개 엮인글 쓰기 /data18/2006/4/3/276/1234-wgreene.jpg@nhn@45710@nhn@1@nhn@493@nhn@229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6편 /data18/2006/4/3/276/1234-wgreene.jpg@nhn@45710@nhn@1@nhn@493@nhn@229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6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7편 ▼ 다음글 - 2악장 5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7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4/03 15:25 http://blog.naver.com/wgreene/110003080432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403 6편,7편 업데) Amadeus 음악 : Horchat Hai Caliptus(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Horchat Hai Caliptus [.. " 답은 하나였다. " 2악장 7편 아직은 저에게 추억을 가져오지 마세요. 견딜 수 있는 힘의 뿌리가 땅 속 깊이 가지를 뻗기 전에, 당신이 섣불리 여는 추억은 나의 숨을 찌르고 죽일 거예요. 세상에 잊을 수 있는 건 없어요. 내가 잊어도 존재는 벽과 공기 중에 바람처럼 영원히 숨을 쉬니까요. 내가 죽어도 사실은 수 십 수 백 번 내 죽은 넋에 뺨을 때릴 거예요. 결국 잊으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잊혀지지 않지요. 추억 이라는 글자는 아주 잔인합니다. 결국은 자기위안을 위하여 우리는 추억 이라는 글자와 친해지지요. 수도 없이 그 글자에 등을 기대고 가슴을 포개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다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나는 그것에 마음이 아파서 숨이 쉬어지지 않아요. 돌아올 고통을 위하여 추억을 빚기가 두려워 졌기 때문이지요. 만들어진 추억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현재 역시, 미래의 추억이기에…. 추억은 잔인한 글자이지만, 때로는 힘을 준다고 하던데 나는 그것을 아직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가 알려준 밑바닥 이란 곳에서 몸을 웅크린 갓 난 아이처럼 잠을 자고 싶네요. 추억이 주는 칼에 난도질을 당하고, 피를 닦은 뒤, 상처가 아물 때 즈음, 공기 중의 바람에 섞여서 나는 돌아갈 거예요. 어차피 세상에 잊을 수 있는 건 단 하나도 없으니까요. 밑바닥의 첫 걸음에서, 나는 이것을 배웠어요. 현재도 미래의 추억이라는 것을…. -사비나 교수와의 스침. 수페리우스의 내면- 7편 시작 사비나 교수가 다녀간 뒤, 혜성은 한동안 슬픔에 젖어 지냈다. 히스는 또 애인이 바뀌었는지 벌써 몇 번 째 인지 모를 그이를 위해 몸단장에 열을 올린다. 사비나 교수가 다녀간 뒤, 다섯 번째의 날이 밝자 혜성은 처음보다 열쇠를 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그것은 아주 충만하고도 영 적인 무언가 였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풍부한 전율이지만, 영혼을 사로잡는 것은 못된다. 같이 있자 민우야. 그래, 같이 있자. 이 곳은 너의 모임 장소이다. 지하 동굴이지. 이 곳은 네가 애증을 품었던 바오르 신부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야. 네가 좋아하는 술이 있고, 너의 병아리가 있고, 사람들이 있다. 이틀이 더 지나자 혜성은 비로소 깨달았다. 민우를 저 높은 하늘로 진즉에 보냈다고 여겼었는데, 그동안은 진짜 보낸 게 아니었다는 것을 안 것이다. 그가 죽은 직후 한동안은 지하 감옥에서 있었지만, 그것은 진정한 슬픔과의 대화가 아니었다. 그를 웃으면서 부를 수 있는, 그를 인정하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현재가 되어서야 나는 그를 하늘로 보냈다- 라는 문장이 인정이 된 것이다. 그 느낌은 마치 새로운 푸른 싹이 움트는 기운과 엇비슷했다. 가슴이 웅실댈 때는 마치 민우의 심장이 함께 뛰는 느낌 덕분에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사비나 교수가 다녀간 뒤, 열흘째가 되자 가을은 아주 짙어져서 사방팔방 낙엽으로 노래를 퍼뜨리고 있었다. 또, 히스는 뭐가 불만인지 혜성을 전과 같이 대해 주지 않는다. 약간의 가벼움과 약간의 진지함이 섞여 있지만 흔한 친구 관계가 아니기에 늘 내면 저 쪽 서로를 경계했던 둘은,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척 각자의 것에 열을 올린다. 새로운 그이를 위해 파란색 머리칼을 이리 저리 정돈하던 히스가, 열흘 전 자신의 머리칼을 보고 기겁을 하셨던 사비나 교수가 문득 떠올랐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바닥에 맨 몸을 엎드린 채, 늦은 밤 새벽을 기다리는 수페리우스는 조용히 독일어와 라틴어 단어를 외우는 중이었다. 둘은 그러고 보니 근 사흘 내내 말 한 마디 없이 지냈다. 물론 작곡이며 이것저것을 가르쳐 줄 때야 말이 많았지만, 그 흔한 아침인사 따위도 두 사람에겐 없었다. 그 어색함의 시작은 사비나 교수가 다녀간 날부터였다. 아마 이 어색함은 히스에게만 적용되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히스… 내 등에 키스 할래?” 별안간 튀어 나오는 엄청난 소리에 빗을 머리칼에 꽂은 채로 놀라서 혜성을 내려보던 히스가 여전히 눈을 크게 뜬 채로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아니.” “그럼… 나랑 섹스 할래?” “…아니.” 또 왜 저러는 거지? 내가 그동안 차갑게 말을 안 한 것에 대한 복수인가? 쿵쾅쿵쾅 요동질을 하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히스는 숨을 수차례 내뱉었다. 정말 복수인가? 아니, 그는 내가 저에게 이렇게 말을 안 하며 지내는 것도 모르는 것 같은데… 히스는 그가 또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깨를 들썩일 때를 잘 맞추어 머리칼에 삔 처 럼 꽂혀있던 빗을 뺐다. “몸을 합쳤을 때는 어떤 느낌이니….” “…….” 빗을 빼자 더 엄청난 소리가 나와서 히스를 경직하게 만든다. 그래서 히스는 이번에는 옷을 갈아입어야겠다는 결심에 스르르 셔츠를 벗었다. 근사한 그의 육체가 달빛에 출렁인다. 그림처럼 곳곳에 반사광과 그림자가 미치는 그의 조각 같은 육체는 날렵하고도 세련되었다. 힘이 느껴졌다. 지휘를 전공하는 멋진 팔은 섬세한 줄기로 꿈틀거렸다. 하지만 바닥에 엎드려 있는 혜성은 심드렁한 투로 또 같은 것을 묻는다. “몸을 합칠 때….” “…….”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거니…? 영혼과 영혼이 교화 될 때 서로에게 얽혀서…?” “…….” 정말 궁금했는지, 혜성은 고개를 번쩍 올려서 거울 앞에 서 있는 히스를 마주봤다. 작은 머리통이 이리 저리 움직이자 그의 상아색 머리칼이 말도 못하게 흩어진다. 오, 그의 머리칼이 움직이는 모양은 마치 새벽나절 천지에 도배되는 하프의 선율 같다. 히스는 그와 말을 다시 하게 된 현재, 전처럼 기분이 또 나빠지려고 한다. 도대체 왜? “그래… 만약 그런 거라면 너무 복잡해진다… 히스… 그럼 나를 위로 해 주면 안 될까?” “수페리우스.” “응?” “…나한테 반한거지?” 끄이익- 낮은 의자를 끌어와서 늘 그렇듯이 길게 바닥에 엎드려 있는 혜성의 머리맡에 세우고, 다리를 벌려 앉아서 내려보는 입술이 묻는다. 히스의 진지한 물음표가 스치자 도리어 기가 막힌다는 듯이 혜성이 그의 진초록 눈동자를 향해 야유를 퍼붓는다. “…뭐어? …으엑. …아니.” 하지만 전혀 흔들림 없이 반쯤 감긴 히스의 눈동자는 마치 자신의 연인에게 하는 듯 한 구절을 계속 읊는 게 아닌가. 혜성은 괜히 말을 꺼냈다며 사정없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빛이 굴절되어 스팩트럼의 모든 색을 천하에 공개한 것처럼, 뿌연 먼지마저 색을 입힌 작은 공간이 달빛과 함께 짜라라 음표 슈즈를 신는다. 갑자기 다락방 곳곳이 선율로 들뜬다. “나의 영혼을 느끼고 싶어진 거지?” “쯧쯧.…아니….” “그런데 왜 그런 야한 말을 해?” “…….” “나랑 자고 싶은 거지, 수페리우스?” 의자 머리에 기댄 앞부분을 숙이며 히스는 이상하리만치 진지하게 물어왔다. 혜성은 그의 안면을 손바닥으로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너는 나랑 한 몸이 되어서, 영혼이 얽히게 되면 놀랄 거야. 내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 지 알게 되어서… 그래서 너와 한 몸이 되지 않기로 했어.” “?” “히스… 나는 왜 힘든 것을 찾지 못해서 안달일까. 다들 쉽게쉽게 살잖아.” “…….” 수페리우스는 그 말을 하면서도 많이 걱정인지 느닷없이 얼굴을 숙인다. 히스는 또 기가 막혔다. 도대체 걱정을 만드는 게 취미인가! 이젠 별 게 다 걱정이라는군! 뭐? 영혼이 얽혀서 어째? 힘든 것이 십칠? 그와 이젠 진짜로 공부 외에는 말도 하지 말아야지- 라는 결심에 마침표를 찍을 때였다. “나는 왜 이렇게 어리석을까.” 가지런히 흘러나오는 혜성의 다음 말은 얼굴이 울그락 푸르락 해진 히스를 다시 의자에 주저 앉게 만든 것이다. 그는 열흘 전처럼 자신도 모르게 몽롱한 표정을 그리며 천천히 머리를 숙였다. 끼이이이- 히스가 움직이는 대로 낮은 의자 머리 부분의 다리가 바닥에 눌리는 비명을 지른다. 혜성의 작은 등이 말도 못 하게 작아 보였던 히스는, 저도 모르게 자상한 말투를 꺼냈다. 가끔, 견딜 수 없는 기분을 들게 하는 작은 수페리우스는 가여워 보일 때가 있다. 지금처럼….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전에는 누구나 다 힘든 법이야. 누군가가 힘들게 시작한 터전을 잇는 사람들은 그래서 쉬운 거지….” “!” 저것과 비슷한 말을 분명히 들어 봤었다! 다 죽어가던 동공에 활력을 불어넣는 소리를! 혜성은 히스의 말을 듣는 내내 그게 누구일까-를 고심해 보았고 단 번에 생각해냈다. 동완이다! 동완이가 저것과 비슷한 말을 해 주었었다. 그 때도 나는 시련의 늪에서 빠져 나올 줄을 몰랐지. 결국 늪에서 구출하기까지 내 스스로의 힘이 필요했지만… 그래. 그래…. 사비나 교수님이 다녀가신 뒤, 혜성은 가장 태초의 것부터 차분히 되돌아오는 과정을 내면으로부터 거쳤었다. 룸펜에 온 것이 운명이라면, 솔베이지를 들었던 이 귀도 운명일 것이다. 그래, 운명일 거야! 답은 하나였다. 부르고 싶고, 느끼고 싶어서였다. 답은 아주 단순하고 간단 명로 했다. 그리고 혜성 자신이 좋아하듯이 다른 사람들과 은연중에 나누고 싶었던 거다. 공허했던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노래를 하면서도, 연주를 하면서도 흥을 낼 수 없었던 정적에의 이유는 '함께'가 아니어서였다. 장소가 아마데우스가 아닌 이태원이라서… 라는 싸구려 틱 한 변명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다짜고짜 혜성이 새벽 세 시에 고작 삼십분 동안 무대에 있는 것을 왜 싫어할까? 그것에 대한 정답도 아주 쉽게 나왔다. 한스 라는 놈 때문이다. 이태원 패거리들은 낯선 동양 놈이 나타났다는 것에 먹이를 발견한 늑대처럼 이를 세웠을 뿐이다. 그들은 음악이 싫어서가 아니라, 단지 놀 거리를 발견한 것 때문에 무대를 방해했던 거야! 그 무리의 우두머리가 한스 라는 자식이었다. 몇 번 주먹으로 치고 받아봐서 기억하고 있지. 한스라… 스 자 들어가는 이름들은 왜 다 그 모양이란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혜성이 그 한스 라는 놈부터 직접 무대 밖, 아니 룸펜 밖에서 만나 봐야겠다는 결심이 솟구쳐서 숙였던 머리를 번쩍 올렸다. 그 때, 마침 혜성의 여윈 등에 정말로 키스하려고 머리 위에서 허리를 숙이던 히스의 턱에 세게 부딪히고야 말았다. “억.” “아야.” 무의식중에 당한 격이라서 정말 아팠는지, 의자에 앉은 채로 바닥을 뻥 뻥 차대는 히스가 턱을 쥔 채로 울상이다. 하나 둘 옷을 걸치며 혜성이 그런 히스를 톡 쏘아보았다. “무슨 짓 하려고 했어.” “짓? 네가 키스 해 달랐잖아! 오, 오, 아프다. 아프다.” “아, 그랬지. 그건 잠시 취소하자.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나서 그러니까 너는 여기 있어.” “오, 오…?? 어딜 가게?” 턱을 쥔 채로 흐느끼듯이 묻는 히스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가볍게 윙크를 하며 혜성이 주섬주섬 열흘 동안 편곡했던 솔베이지 악보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따라 오려는지 자신도 웃옷을 걸치는 히스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며 약을 올리듯이 한 마디만 싹 내뱉고 다락방 밑으로 쏜살같이 내려간다. “비밀이야.” “!” 제 멋대로 또 말하고 사라진 혜성에게 말려 든 히스가, 정말로 기분이 나빠져서 한 참이나 입을 벌린 채로 멍청하게 앉아 있는 다. 새벽 한 시가 다 되어 가는데 어딜 간다는 건지, 아니지. 그것보다 어떻게 저 놈과 내가 대화를 했지? 이런! 나는 공부 이외에는 단 한 마디도 주고받지 않을 계획이었는데! 이렇게 기분 나빠질 것을 알고……. “헤이… 정하… 내 턱 괜찮아?” “턱?” 수페리우스고 뭐고 간에, 이제는 진짜로 공부 이외에는 단 한 마디도 안 하겠다! 라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한 뒤, 히스는 룸펜 내에서 맥주를 나르던 녀석을 붙들고 턱을 내밀었다. 흠칫 놀라던 정하 라는 사내는 괜찮다는 말 대신, 의료품 상자가 있는 위치를 알려 주었다. “십칠! 오늘 데이트 약속 취소해야겠다. 턱이 가가멜… 가가멜….” “쿡….” 웨이터 복장으로 다시 갈아입고 온 히스가 누구와 말을 하더라도 꼭 턱을 손으로 가린 채 하는 모양이 우스웠는지 동료인 정하가 어깨를 치며 웃는다. 히스는 곧 있으면 배고프다고 밥 달라면서 나타나야 할 혜성이 어디쯤에서 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턱을 가린 채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데… 큰일이다. 룸펜 어느 곳에서도 수페리우스가 보이지 않는다. “어… 어딨지?”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가 보이지 않으면 늘 불안하다. 테레사가 부탁한 사람이라서 불안 한 게 틀림없었다. 히스의 불안한 어조를 어떻게 들었는지 정하가 쟁반을 쥐고 지나치며 대답해 주었다. “아… 그 녀석? 한스 패거리가 이 시각이면 어디서 있냐고 묻더니, 뛰어 나가던데?” “!” 한스? 한스 라면… 그, 후렌존? 오, 노! 하느님! 테레사! 히스는 정하의 말이 끝나는 즉시 턱을 쥔 채로 부리나케 밖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어디선가 제발 들으라는 듯이 내면 저 쪽에 꽥 꽥 소리 질렀다. 파랗게 질린 그의 피부가 벌써부터 이유모를 분노에 들썩이고 있었다. 십칠! 테레사! 저는 두 번 다시 이 귀찮은 수페리우스에 관한 부탁은 일체 듣지 않겠습니다! 한스 라는 놈은 혜성의 돌발 각오에 어울리지 않게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정하의 설명대로 이태원 역 근처의 진저 바에서 그는 자기 패거리들과 떨어진 채 홀로 잔을 들이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문에 따르자면 그도 독일인 이라고 했다. 독일인이라… 히스가 날렵하고 아주 아름다운 반면, 저 한스 라는 놈은 영락없이 곰이구나… 라고 중얼거리며 혜성은 또박또박 한국말로 그를 불렀다. “야. 나 좀 보자.” 말을 하면서도 신기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말은 꺼내 보지도 못 했을 텐데… 아마 정혁이에게 부탁했겠지? 아니면 민우에게 하소연을 했을 거야. 동완이의 확실한 언어에 기대거나, 음악으로 피했겠지. 테레사를 찾아가서 이러이러한 녀석이 있어요 라고 고자질 했을지도 모르겠다. 혜성이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은 현재 상황 덕분이었다. 자신을 도와 줄 수 있는 것은 결코 히스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라는 것을 그는 잘 알았기 때문이다. “후렌존.” “……?” 이크. 혜성은 입을 막았다. 이 말은 괜히 했다. 후렌존 이라는 뜻을 알아들은 상당한 무리들이 이 한스 곰과 비슷하게 혜성을 돌아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는 엉뚱한 쪽으로 말을 바꿨다. “나다. 후렌치파이.” “오…룸펜?” “그래. 룸펜이다. 후렌치파이.” “크크크크.” 삼 일 전에도, 이 녀석이 던진 장화에 머리통을 맞아서 잠깐이지만 기절했었다. 혜성이 그 때를 떠올리듯이, 한스도 그게 생각났는지 키득거린다. 기분이 나빠진 혜성은 주변을 살피며 어서 따라 나오라는 듯이 손짓을 열심히 했다. 과연, 효과가 있었는지 저 곰 녀석이 알아듣고 따라 나온다. 한 판 붙자는 걸로 오해하면 어떡하지… 아니야. 나는 작아서 그렇게 때릴 재미도 못 느낄 테니……. 그간 이 녀석은 혜성을 제대로 친 적이 없다. 그것을 혜성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안심하고 우두머리인 한스 녀석을 찾아 왔는지도 모르겠다. 한스는 곰 같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가느다란 휘파람을 불며 혜성을 따랐다. 둘은, 레코드점에서 그 닥 멀지 않은 좁은 틈새에 들어섰다. 혜성의 작은 몸이 그 곳에 쏙 들어가자, 그 곰 녀석이 잔뜩 실망한 낯으로 몸을 구기며 따라 들어왔다. 이 골목을 벗어나면 인적이 드문 작은 공터가 있다. 공터를 지나면 보이는 레코드점이 아니고서야 대화가 가능해지지... “응? 곰… 아니, 후렌치파이?” “…….” 대충 공터에 서서 입을 열려는 혜성에 반해, 그 한스 라는 녀석은 장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공터 왼 쪽의 구석에 구겨 들어간다. 또한, 놀랍게도 한국말로 대화를 먼저 시도하는 것이다. “여기가 좋다.” “!” “왜, 룸펜.” “한국말을 할 줄 알아?” 요새 한국말이 유행인가? 깜짝 놀라서 좁은 골목길 사이로 따라 들어오던 혜성이 묻자, 한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난… 혼혈아다.” “아….” “모르겠어? 튀기라고.” “…….” 그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표정을 고수한 채 큼지막한 넙적 다리 바깥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가을밤이 말도 못하게 서늘해진다. 차가운 기운 끝에 달려있는 물방울이 얼어서 사람 내면의 작은 불씨까지 녹일 것처럼, 모든 것은 순간 차가워졌다. 혜성은 할 말을 잃어 망연자실 그가 서 있는 어두운 쪽을 보며 가슴에 뭉갠 악보들을 추스 렀다. “미국 놈이야. 아버지는….” “…….” 독일인의 재즈 바에 자주 드나들 길래 당연히 독일인 일 줄 알았던 한스는 이제보니 진짜 이름이 아니었나 보다. 그의 진짜 국적처럼 사람들이 그를 부르는 이름은 가짜였다. 혜성은 갑자기 그가 측은해 졌지만 곧 그 감정을 정리했다. 앞으로 본격적으로 편곡한 솔베이지와 음성을 정성을 다 해 퍼뜨릴 것이다. 사비나 교수님이 다녀가신 것이 계기라고 해도 좋다. 내가 원하는 밑바닥은 이런 거였어. 지나간 것을 하나하나 되새기는 과정에 있어 필요한 장소였지. 이 곳 만큼 적당한 곳이 또 없어… 그 흔한 피아노 학원 따위도 없는 이 곳에도 낮에는 아이들이 뛰어 다녀. 나는 추억에의 정리가 필요한 현재, 솔베이지와 함께 하려고 하지. 헌데… 네가 방해가 된다. 너는 시작부터 말썽이었지. 한스. 그래서 네 녀석을 잡는게 순서에 맞는다. “이여… 몸 파는 일도 해?” “아니.” 혜성이 머뭇거리는 것을 다른 쪽으로 오해 했는지 한스가 위 아래로 눈을 흘겼다. 그에 전혀 발끈하지도 당황하지도 않은 혜성은 측은했던 방금 전의 시선에 불을 심었다. 활을 잡았다. 활시위를 당긴다. “그런데 무슨 볼일?” “네가 주동자라는 것을 알았거든.” “?” “나에게 야유를 보내는 주동자.” “…….” “말 해 봐라. 뭐가 문제지? 하루 스물 네 시간 중, 단 삼십분만. 그것도 손님이 없을 시간을 허락 받아서 나는 연주를 하고 노래를 해. 너는 그 시간에 오지 않으면 되는 거야. 아니면 삼십분만 조용히 참아주면 되는 거고. 굳이 따지려 드는 이유를 알고 싶어.” “.....” “클래식이 어려운가?” “!” 이 한 마디를 끝으로, 혜성은 잠시 말을 중단해야 했다. 한스가 지루하게 듣던 도중, 담배를 다 태웠는지 주먹을 제대로 날렸기 때문이다. 뺨을 강타당한 혜성이 붕 나르듯이 몸을 떼더니 바닥에 떨어졌다. “계집처럼 말이 많군. 사내라면 덤벼.” “허억. 헉.” “정말 계집인가?” “허어어. 허.” 가까스로 일어 선 혜성이 정신을 못 차리게끔 복부를 세게 후려 찬 뒤, 한스는 비아냥거리며 다가왔다. 까마득한 공포가 밀려왔지만, 막상 이리저리 맞고 보니 정신이 맑아진다. 혜성은 점점더 활시위를 당겼다. 한스는 여기 까지 따라 와 준 것에 대해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취지인 건지, 바닥에 엎어져서 배를 쥐고 있는 혜성의 몸을 쥐더니 바지 밸트를 풀기 시작했다. 미동 없이 있던 혜성은, 그가 지퍼를 내리려는 순간, 용수철처럼 상체를 들어 올렸다. 한스의 팔을 붙들고 비명처럼 외쳤다. 그러나 그것은 살려달라는 뻔한 말 따위가 전혀 아니었다. 이미 내면의 팽팽해진 활시위에 걸쳐진 활이 쉭- 날아갔기 때문이다. “내가 몸을 주면! 너는 좋아 해 줄 수 있는 건가?” “……?” 날카로운 활은 아득한 달 끝 까지 날아가고 있다. 가슴이 이유 없이 메인다. 그래서 미친 입술은 땅 끝까지 소리친다. “약속 할래? 나를 가지면, 너는 내가 솔베이지를 연주 할 때 조용히 있어 준다고, 약속 하는 거야?” “!” 우람한 덩치의 한스가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도중, 혜성이 꽥 꽥 거리는 내용을 인지했는지 바지를 막 내리려던 손을 굳혔다. 필터까지 태워졌던 담배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한스는 귀를 의심하는 눈치였다. 혜성은 그럴수록 지지 않고 소리쳤다. “자, 그럼 얼른 가져.” “!” 나는 현재 가진 게 없어. 그래서 버릴 것도 없어. 누구든 나의 없는 것을 통 할 수가 있다면 얼마든지 죄인이 되리오. 추억이 움직이고 있어. 미래는 어떨지 아직 몰라. 과거가 비참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현재를 움직여야 돼. 그래야 미래가 생기는 거야! 설령 지금이 밑바닥이라고 해도, 내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서, 미래에 열어보는 추억의 노트는 밑바닥이 아닌 쪽으로 자리 하게 될 거야. “어서.” “!” 누군가와 자 본 적이 없다. 영혼을 교화 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게 어떤 것 인 지는 안다. 저 높고 서러운 달이 둘이 있는 좁고 허름한 골목을 지날 때, 한스는 어쩌면 수페리우스의 붉어진 눈동자를 발견 했는지도 모른다. “왜… 왜? 히스가 남자 랑도 같이 잘 수 있다던데… 육체가 섞임으로서 상대를 이해하는 게 가능해진다면, 어서 그렇게 해.” “너… 혹시 바보냐.” 나는 빈손이야. “그래! 나는 바보다! 이왕이면 애송이라고 불러라.” “!” 이런 무모한 용기라니! 뺨은 동그랗게 부어서, 또 기집처럼 마른 몸은 바닥에 늘어뜨린 채, 아픈 배를 쥐고 그나마 힘을 짜 내며 소리치는 게 뭐라고? 어서 자길 가지고 이해해 달라고? 저게 사람이 할 소리란 말인가! 희번뜩 놀란 한스의 표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씩씩대면서도 한스의 상체 깃을 통 놓지 않는 혜성의 손이 사실은 옅게 떨고 있다는 것을 봤는지, 한스는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덕분에 그의 상체에 달라붙어 있던 혜성의 손가락 힘에 따라서 아이의 몸도 세워졌다. 한스는 이태원에서 살아 온 이래 이런 무모한 놈은 처음이었다. 그는 결국, 달밤에 잘 어울리게 곰 같은 몸을 마구 흔들며 골목 벽을 탕 탕 치며 웃어버렸다. “흐. 흐. 흐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 “만약 네 말이 정답이라면, 세상 모든 놈팽이들 한테 다 몸 팔 거냐? 흐하하하.” “…가엾…잖아.” “흐…?” 그간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 이었던 무대를 벗어나서인지, 둘은 영 어색하기만 한 현재의 어두움을 방패 삼아서 있는다. 혜성은 한스가 웃는 것에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는 도리어 더 먼 것의 공상에 취하여 눈을 흐리고 슬픈 음성을 노래처럼 퍼뜨렸다. “너도 들어 봐. 나는 평생 사랑할 거야. 이 음악에 빠지면 누구나 다 그렇게 될 거다. 이 기분을 모르고 살면 얼마나 억울하겠어? 안 그래?” “!” 사람의 시야가 미치지도 않는 까만 자리에 누더기가 된 악보를 펼치고 수페리우스의 입술이 노래를 퍼뜨린다. “사람 몸이야, 언젠가는 죽게 되어있어. 다 똑같은 거야. 유난 떨 필요 없어. 나는 몸보다 더 중요하다고 느끼는 게 있으면 아무렇지 않아. 오히려 다행이지 않아? 정말 아까 내 말이 정답이라면, 나는 평생 몸만 팔라면 팔겠다. 그렇게 하면 영혼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거겠지? 상대방이 나의 전율을 전수 받는 거야. 맞지? 그렇지?” “이… 이것 봐.” “자, 어서 내 몸에 너를 넣어.” “아니… 이거 봐.” 혜성이 막무가내로 한스의 두꺼운 손을 가져와서 제 바지에 쥘 때였다. 보이는 피부는 온통 붉어진 한스가 당황해서 혜성을 도리어 말리려던 때, 마침 누군가가 둘을 발견했는지 큰 발소리를 내며 뛰어오는 게 아닌가. 때마침 번쩍- 달빛이 전류처럼 모든 것을 스쳐 지나갔다. “십칠! 후렌존!!.” 턱을 가리고, 파란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달의 도움으로 정의의 기사처럼 나타난 인물은 히스였다. wgreene@naver.com 오랜만입니다. 두 편 올렸으니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더 올리고 싶었으나; 수정할 시간이...(먼산꾀꼬리가울지요야옹...퍽;) 걱정의 안부글을 주신 분들께 죄송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감기가 심하게 걸려서 며칠 병원에 있었거든요. 웬만하면 컴퓨터 사용하는데 이번 감기가 독하긴 정말 독했습니다. 감기 윈. 니가 최고야. 다들 감기 조심하세요. ^_~(정말 조심하여야 함. 왕 무서운 존재) 음.. 이 정도면 열 편 안에 수페리우스를 학교에 던질 수 있겠어..라고 가능성 있는 혼잣말을 한 뒤... 행복한 하루 되세요! ^^ 안부게시판에 답글이 혹시 안 달려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제정신이 돌아온 다음에... 사,사,사랑해요;(떨고있는가 그대...) * 참. 다음편과 이어지지는 않겠지만, 동완이 번외를 올릴까 생각 중입니다. 메일에서 발견하고 잠시 기절했다는... 1악장 중에 올렸어야 됐는데 마냥 썩혀 두었었더라구요;(퍽; 죽어;) 그럼, 좋은 밤 되세요! 러브~ wgreene. 화이트그린. 1악장 6편, 7편 올림(060403) + 쥰쥰님이 4월 1일 안부게시판에 멋진 사진과 함께 주신 글인데, 너무 좋아서 옮겨왔습니다.^_~ 어둠의 시간이 지나면 광명이 오리이다. 어둠이 내려와 긴 그림자 드리워 세상을 덮어도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 드러내며 고독과 절망을 울부짖어도 차가운 바람이 영혼마저 얼려버려도 새파란 달빛에 허리가 잘리어 나가도 겨울은 죽음의 계절이 아니기에 새로운 생명을 위한 조금은 긴 기다림의 시간이기에 반드시 봄은 올것이기에. 마음껏 비웃거라. 나에게 돌을 던지며 손가락질을 하며 욕을 하라. 아직 멀었다. 이정도의 시련과 고난으로는 어림도 없다. 어둠이여 너의 깊은 내면을 나에게 보여주어라. 남김없이 드러내 나를 휘감아라. 기꺼이 너를 위해 이 한 몸 내어줄 테이니. 적막한 어둠이여 나에게 오라. 기꺼이 두팔벌려 너를 마중할 것이니 허나, 나는 내안의 조그마한 촛불하나 켜둘터이다. 어둠이 내려 앉을수록 내안의 촛불 한 가치 더욱 밝게 타오를 터이다. 나를 태워 세상을 밝히겠노라. 나, 수페리우스. 아마데우스의 애송이 신혜성이 이 세상의 빛이 되겠노라. 이 포스트를.. 덧글 8개 엮인글 쓰기 /data20/2006/4/3/156/2345_1-wgreene.jpg@nhn@18154@nhn@1@nhn@320@nhn@233/data20/2006/4/3/93/7654-wgreene.jpg@nhn@18154@nhn@1@nhn@320@nhn@233/data18/2006/4/3/260/7654-wgreene.jpg@nhn@18154@nhn@1@nhn@320@nhn@233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7편 /data20/2006/4/3/156/2345_1-wgreene.jpg@nhn@18154@nhn@1@nhn@320@nhn@233/data20/2006/4/3/93/7654-wgreene.jpg@nhn@18154@nhn@1@nhn@320@nhn@233/data18/2006/4/3/260/7654-wgreene.jpg@nhn@18154@nhn@1@nhn@320@nhn@233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7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8편(솔베이지를 부르는 소년) ▼ 다음글 - 2악장 6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8편(솔베이지를 부르는 소년)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4/04 16:25 http://blog.naver.com/wgreene/110003108948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404 8편 추가 업데 060403 : 6,7업데) Amadeus 음악 : Horchat Hai Caliptus(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Horchat Hai Caliptus [.. “두 번 다시, 다른 곡은 듣고 싶지 않을 정도로 너희들의 오금이 저리게 만들어 주지.” 2악장 8편 화가 나! 신경 쓰여서 살 수가 없어! 왜 한 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거지? 왜 여느 계집이나 놈들처럼 맘대로 따라오지를 않는 거야! 보통 이 정도로 너그럽게 대해 주면 내 뜻대로 움직여 주기 마련이고, 성향 파악도 쉽게 되는데 왜 너는 아무것도 아니지, 수페리우스? 천주여! 오- 테레사! 그래요, 존경하는 테레사! 나 히스클리프 폰 뤠겐부르크는! 두 번 다시! 이 귀찮은 놈에 대한 부탁을 듣지 않겠습니다! 나 이외의 것에 나 이상으로 집중하게 하는 이 사람의 파장은… 테레사! 감히 나를 견딜 수 없게 하는 그의 불꽃같은 파란은…. 제발 테레사! - 한스와 혜성이 있는 곳을 뒤지며 히스의 내면中- 혜성이 그간 지켜봐 왔던 히스라는 청년의 이미지는 '정도'였다. 적당히 재미있고 즐거우며, 사람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멋 내기 좋아하는 이미지를 매우 자랑스러워하는 것에 반해 거절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거절에의 순간이 막상 닥치면 젠틀한 이미지로 변했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입장에서 대한다. 그가 매너 좋은 멋진 청년의 이미지로 거듭 날 수 있던 이유는, 그가 많은 애인을 바꿀 때의 가벼운 태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를 천박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참말이지 멋진 사람이기만 했다. 가벼운 화나 농담이 아니라 그도 진짜 이성을 잃은 때가 있을까? 라며 때때로 사람들은 궁금해 했다. 그렇지! 히스는 정말 세련미를 갖춘데다가 잘 생기기까지 했다. 화를 내지 않지만, 화를 내지 않아서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인내심의 크기가 어느 정도일 지 혜성은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자신과 오랜 친구처럼 지내주고 다 받아주는 그를 보면서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Ja ~ du!(그래~ 너!)” 그런 히스가 비수처럼 날렵하게 나타나서 적의 목을 물었을 때, 놀라는 것은 당연한 것일 테다. “히스!” 혜성이 히스테리칼한 소리로 외치는 것에 흠칫 놀란 것은 바지 지퍼가 반쯤 내려가 있는 한스 밖에 없었다. 적정선을 서로 넘지 않는 대신 약간의 경계를 속에 품으며 지냈던 히스는 적당히 가볍고 젠틀한 사내임에 틀림없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혜성의 음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의 시퍼런 칼을 심은 눈동자는 이성에의 감각을 내 던진 상태였다. 저 하늘의 사나운 달처럼 욕을 지껄이고 나타나더니, 짐승으로 변한 것이다. “히스! 히스!” “?” 난처하게 외치는 혜성의 팔을 밀어내는 속도도 전과 달랐다. 그는 혜성이 막기 전부터 날렵하게 몸을 움직였다. 일이 모두 마무리 될 때 즘에 나타난 히스도 놀랄 일이지만, 혜성을 정말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차라리 눈을 감고 싶을 정도의 처절한 열기가 좁은 골목을 꽉 에운 것이다. 한 마리의 거대하고 늘씬한 짐승이 불을 뿜는 모양새인 그것은 마치 환각을 빚는 속도와 맞붙어도 좋을 것이었다. 몸 밖으로 수증기를 뿜어내는 듯 한 그의 열기가 사방에 미칠 때, 다짜고짜 한스의 안면을 강타하는 행위가 이어졌다. 그가 왜 나타나자마자 화를 내는 거지? 라는 질문은 차마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그의 갑작스런 변화는 두려움 보다는 놀라움이 먼저 인식된다. 사람의 변화는 그렇게 파장을 미치는 것이다. “맙소사 히스-!” “!” 왜 그러는 거야! 오 하느님! 혜성은 정신없이 히스의 근처까지 갔지만 감히 건드리지도 못했다. 멍청하게 있던 한스가 무지막지하게 덤비는 히스의 주먹에 곤두박질이다. 쿵- 거대한 한스의 몸이 바닥에 떨어지며 먼지를 일으킬 때, 몇 명 술에 취한 놈들이 한스를 알아보고 부리나케 어딘가로 사라졌다. 히스의 주먹질은 가볍게 끝이 났다. 제법 살집이 많은 한스는 예상치 못한 강한 공격에 잠시 나가 떨어져 있었고, 그 틈을 내서 히스는 혜성의 양 쪽 어깨를 꽉 쥐고 부릅뜬 눈을 마주쳤다. “!” 오 하느님. 혜성은 그의 눈동자를 마주보는 순간 신음을 흘렸다. 좁혀진 녹색 눈동자는 지금껏 보아 왔던 푸르싱싱함 따위가 아닌 연푸른 안개를 가득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의 시선은 혜성을 보면서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그의 떨리는 음성이 열린다. “okay? Ist alles in Ordnung?(너… 너는 괜찮아? 너는 괜찮은 거야?)” “?” “okay? okay?” “아… 오케이? 오케이. 오케이 오케이 오케이!” “후….” 그는 정말 당황한 모양이었다. 자신이 어떤 나라의 말을 내뱉는 지도 모르는 채, 눈을 크게 뜬 채로 같은 대답을 하는 혜성을 뚫어지게 노려보기만 한다. 아이는 비로소 겁을 먹었다. 놀란 다음에는 그의 변화에 즉각 반응하는 법이다. 나가 떨어졌던 한스가 기가 막힌 이 상황을 뚫어지게 응시하지만, 히스는 그저 혜성의 작은 몸을 쥐고 흔들며 발아래부터 머리 위까지 샅샅이 훑기 바빴다. 그의 녹색 눈동자 옆으로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이 굵은 자국을 패자, 진지함이 결여되었던 그 동안의 히스는 혜성의 안에서 사라졌다. 두려워서일까. 가슴이 뛰어서 박자와 호흡은 계속 어긋났다. 달이 구름 사이를 벗어날 때, 비로소 제 정신이 돌아왔는지 히스는 겨우겨우 한국말로 물었다. “괘… 괜찮은 거야? 괜찮아? 어, 어디. 괜찮아?” “히스!” “괜찮아?” “너야말로 다친 거 아니야, 히스? 갑자기 여긴 어떻게 찾았어, 일 할 시간이잖아!” “!” “?” 히스는 여전히 혜성의 말을 듣지 않았다. 테레사의 부탁 때문에 그가 잠시 미친 게 틀림없었다. 이렇게나 확실하게 자기가 정한 지킴에의 약속에 철저하려는 유형 이었니, 히스? 혜성은 겁에 질린 눈으로 히스의 뺨을 쓸었지만, 그는 여전히 연녹색으로 변한 시선을 휙 돌리며 아이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리고는 한스를 잡아 삼킬 듯이 노려보는 것이다. 또 노려보는 즉시 큰 충격을 받았는지 입술을 깨물며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짐승의 소리나 진배없었다. “히스-!” 멍청하게 앉아서 둘을 구경하던 한스의 바지 벨트가 풀러져 있는 것을 히스가 본 것이다. 그리고 히스는 바로 이성을 잃었다. 왜 이성을 잃어야 하는 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 가- 정도를 지키며 상황을 살핀 다- 그 따위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지금까지의 히스가 순식간에 마법처럼 사라진 것이다. 왜 그래야 했을까? “오, 히스! 왜 그래! 힛쓰!!” 이성을 잃은 히스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광분 이라는 것을 했다. 백지장이 된 머리는 그의 육체에 지시를 내린다. 오로지 분노만이 그를 숨 쉬게 하도록 또 멋에 능한 육체마저 본능에 마비되도록 잔인한 지시를 내린 것이다. 갈갈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히스의 영혼마저 사로잡아 괴롭혔다. “!” “으허-!” 이번에는 제대로 몸을 날린 히스는 한스를 일으켜서 잽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의 센 주먹에 나가 떨어 진 한스가 얼얼해진 볼을 만지며 퉤- 붉은 침을 뱉었고, 더 빠르게 히스의 복부를 강타했다. 동시에 안면을 칠 때는 센 바람이 지난 것처럼 붕 떠서 서로 다른 벽에 떨어지고, 다시 짐승처럼 으르렁대며 얼룩진 공격을 하면서도, 그들은 왜 싸우는지 정확한 이유를 몰랐다. 지하의 하데스처럼 변한 히스는 마치 크고 강렬한 불꽃과도 같았다. 그래서 혜성은 한동안 정지한 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히스가 미친 걸까? 잘 지내다가, 내가 싫어져서 사비나 교수님을 지난번에 모셔오더니, 이제는 반항기에 접어든 거야?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면서까지 믿어야 하는 지금 상황이 기가 차서 혜성은 '으우억-'하는 이상한 고함과 함께 몸을 일으키는 히스에게 최후 방법을 써 보았다. “짐! 짐! 스톱! 그만 해! 짐-! 나 짐 이라고 했다!” “…….” 휙- 그 때 한 번 혜성을 노려보는 히스 덕분에 아이는 움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짐!” “…….” 싸우지 못 해 안달 난 환자처럼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파란 머리칼을 펄럭이며 한스 놈에게 엉겨 붙었다. 우당탕탕- 저희들끼리는 멋있을지 몰라도 보는 사람의 시야에는 커다란 쌀 두 포대가 엉겨 붙은 모양새인 그것을 어서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하다. 혜성은 그를 건드리기도 전에 전신에 뜨거운 열이 미쳐서 타 죽어버릴 것처럼 히스가 변했노라- 놀라서 번번이 막을 시기를 놓쳤다. “뭐야? 왜 이래! 미쳤어, 히스? 히스! 짐! 지임-!” “…….” 짐 이라고 수 십 번을 소리쳐도 망할 히스는 듣지 않는다! 도리어 한 참을 치던 히스가 틈을 보이기 무섭게 가만히 있어주면 좋을 것을, 신이 난 한스 놈이 코피가 터진 자리를 소매로 훔치며 복부 쪽에 머리를 박는다. 무식한 놈! 혜성이 꽥 소리치자 둘은 더 크게 으르렁댄다. 십 분 여간 치고받았을 무렵, 드디어 둘 사이에 약간의 텀이 생겼다. 혜성은 빠르게 둘의 사이에 섰다. 짐승의 숨을 흘리던 둘은 다짜고짜 막아 선 혜성 덕분에 허공에 쉭 올렸던 거칠어진 주먹을 멈칫 했고 당황하는 기색으로 팔을 내렸다. “갑자기 싸우고 싶어 진거니? 너 도대체- “ “힉- 히익- 흐- 흐윽- 헥- 헤-했어?” “엥?” 사내놈들 싸움이야 당연히 있을 수도 있다지만, 이게 뭔가. 혜성은 자신의 호소력 짙은 소리에 히스가 멈춰 준 것에 안심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는 도리어 자신의 오른 팔뚝을 쥔 혜성을 강렬한 눈으로 내려보며 이상한 질문을 쏟았기 때문이다. “했어? 이 놈이랑 했어?” “뭘.” “했어? 했어? 한 거야?” 한 참 동안 숨을 내뱉던 히스는 정리된 호흡으로 가뿐하게 같은 것을 묻고 또 물었다. 그제 서야 이놈이 뭘 묻는지 감지한 혜성은 입을 떡 벌리고 이마를 치며 되받아쳤다. “……네가 매일… 하는… 거? 섹스?” “!” 냉칼한 가을의 바람이 히스의 굳은 몸을 후려 찬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 움직일 수 없었다. 둘을 구경하기 위해 아예 팔 장을 끼고 휘파람을 불어대는 한스는 틈틈이 코피를 닦아내기 바쁘다. 하나 둘 구경꾼이 몰려들어서 좁은 골목 밖으로 눈에 익은 놈들이 한스와 히스를 보고 돈내기를 하고 있었다. “어서 사과 해. 이게 무슨 짓이야 히스. 그는 나에게 아무런 짓을 하지 않았어.” “…….” “아니지. 할 뻔은 했는데….” “!” 다시 주먹부터 나가려는 히스의 다혈질에 놀란 혜성이 벼락이라도 맞은 양 놀라서 아예 그의 허리를 덥석 쥐었다. 품에 파고들어가자 말할 수 없을 만치 거센 심장의 고동이 수페리우스의 안면을 덮쳤다. 두두둥. 두두둥. 두둥두둥두둥. 그것은 사나운 야수의 발소리처럼 웅장한 박자를 띠고 있었는데, 히스의 연녹색으로 변한 눈동자와 언밸런스할 정도로 잘 어우러졌다. 이 상황에 웬 답지 않은 망상이랴! 아이는 꽥 소리쳤다. “너 답지 않게 왜이래! 아무 일도 없었어!” “…….” “히스? 힛쓰!” “……저…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응?…응.” 구경꾼들은 하나 둘 달이 구름에 숨을 때를 맞추어 흩어지기 시작한다. 한스는 기다리기 지루했는지 둘의 께에서 약간 비켜서서 담배를 태웠다. 연한 담배 연기가 골목 깊숙이 퍼지자 히스의 활화산 같은 분노는 모두 사라졌다. 그는 평소대로의 장난기 많고 적당한 선을 그을 줄 아는 멋진 사내로 돌아온 것이다. 혜성은 비로소 안심한 기색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저…정말인거야? 거짓말 하는 거 아니야? 괘… 괜찮…괜찮은 거냐… 아무 일….” “히스… 히스?” “…….” “히스!” 넋이 나간 입술로 혜성의 온 몸을 어루만지며 글자에 도돌이표를 붙이던 히스는 느닷없이 닥쳤던 아까처럼 또 느닷없이 팔을 내렸다. 입을 다물고, 바람이 불어도 굳은 몸을 움직이려 들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왜 인지는 모르지만 눈시울이 붉어진 채 히스는 간다는 말도 없이 몸을 돌렸기 때문이다. 망연자실 서 있던 혜성이 담배를 반쯤 태운 한스에게 뭐라고 말을 붙일 때였다. “미안하다. 저 놈이 원래는 굉장히 젠틀하고 매너 좋기로 유명한 녀석인데… 히스!”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비수처럼 날아들어 온 인영이 있었다. 사라진 줄 알았던 히스가 되돌아 와서 한스를 불같이 노려보며 혜성의 팔목을 냉큼 쥔 것이다. 그러고는 허둥지둥 말을 잇기 위해 양 팔을 버둥대던 아이의 팔목을 꽉 쥐고 골목길을 벗어난다. 마치 중요한 물건을 두고 왔던 장소에 돌아와서 가져가는 것처럼, 그는 말 한 마디 없이 상대를 노려보기만 하고 혜성을 끌고 갔다. “크하하하하하!” 한스의 기똥찬 웃음소리가 두 사람의 등 뒤로 들릴 때, 또 소리가 멀어질 때도 히스의 무표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화석처럼 굳은 그의 무표정에 나비와 같은 생기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물기는 맺히기 무섭게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것 마냥 성난 표정은, 혜성의 손이 룸펜의 익숙한 공간에 닿을 때까지 풀어지지 않았다. 아니, 룸펜 안에서도 전혀 바뀌지 않았다. “걱정 시켜서 미안해.” “…….” “오늘 데이트 있다더니, 꼴이 엉망이 됐네. 미안해.” “…….” “미안해 히스.” 다락방에 도착하자 성큼 성큼 걸었던 방금과는 달리 부드러운 숨을 내쉬기만 하는 히스는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침대에 다리를 꼬아 앉은 상태였다. 오늘 같은 날에는 싱그러운 달빛이 온온하게 비추면 오죽 좋으련만, 아무것도 없이 사방은 암흑으로 도배가 되어 있어. 왜 미안한지, 네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걱정 되어서겠지. 나는 테레사로부터 부탁받은 사람이니까…. 한 번 더 그에게 미안하다고 해야겠노라- 혜성이 다가 설 때였다. 들어오는 순간부터 거울 앞을 떠날 줄 몰랐던 히스가 침대 위의 손거울을 뚫어지게 살피며 시퍼런 음성을 내뱉는 것이다. “듣기 싫어.” “…….” 뭐라고? 저런 말은 내 전문인데… 라는 식으로 혜성이 당황하는 건 또 알았는지 손거울 속의 혜성을 부드럽고도 강하게 응시하는 시선이 다음 말을 잇는다. “분명히 니가 미안해 라고 말을 나한테 해야 하는 상황인데도, 미안해 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 “……?” 바로 그 때, 사방을 밝혀줄 선명한 달빛이 바람의 향기를 실어 다락방 마루에 흘러들었다. 아주 아름다운 빛이 감싸는 족족 먼지는 연한 소용돌이를 일으켰고, 그걱대는 목재는 조그만 음표를 그리기 시작한다. 히스의 손거울이 그 달빛의 변화에 따라 작은 떨림을 밝히고, 음성은 박자를 잊지 않고 공기에 흩어진다. “나도 잘 모르겠어.” “데이트 못 나가서 화났구나.” 침대에 앉아있는 히스의 등에 등을 기대어 다리를 모아 앉은 혜성이 웅크린 채 옹알거리자, 그런 그를 손거울로 관찰하는 히스가 돌연 입술을 깨물었다. 그 스스로도 얘기치 못 한 혼란이 정리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무엇일까, 무엇일까? 왜, 어째서일까? 당신은 알 수 있겠는가? “…나도 그런 거였으면 좋겠다.” 라는 히스의 대답은 아주 오랜 침묵 이후에 빚어져서 둘의 주변에 한 참을 메아리쳤다. 혜성은 움찔 놀라더니 뜨거운 히스의 등에서 약간 고개를 올렸다. 달빛이 그들이 함께 하는 침대 주변까지 파고들어왔다. “히스는 화가 많이 났구나….” “…응. 나는 화가 많이 났어.” 그런데, 왜 화가 났는지는 모르겠어 수페리우스……. 두 사람은 등을 기댄 채로, 어색한 서로의 인연을 어떻게든 이어가기로 무언의 합의를 본다. 왜 라는 질문은 처음부터 없던 시작이었다. 어떻게 라는 과정조차 주어지지 않은 시작이었다. 그저 환한 달과 옅은 별 빛 만이 다락방 곳곳에 파동을 일으킨다. 달의 마력이 둘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래서 두 사람은 저희들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등을 기댄 채로 깍지를 꼈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나중으로 미루는 거야…. 그래… 귀찮으니까… 밑바닥의 세계에서 귀찮은 건 내버려 두면 돼…. 피식. 누가 그러래…. 닭이… 엄마 닭이 예전에 가르쳐줬어…. 그 닭 참 영리한 닭이네…. 괜찮아, 너도 그 닭이랑 비슷한 게 많아서 영리해 보여. 청승맞은 가을의 달이 하염없이 반짝인다. 새벽이 주는 하프의 선율을 사람들이 잊는 날까지……. 솔베이지를 부르는 소년 “왜 저런대!” 혜성은 성난 코뿔소마냥 크게 숨을 내쉬며 땅! 바닥을 쳤다. 콜콜한 먼지가 올라오자 다락방을 구경하던 정하가 그런 혜성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최근 친해지기 시작한 정하에게도 심술을 종종 부리는 혜성이 빈속에 술을 들이켰다. 정하는 조용히 다락방을 벗어났다. 룸펜에서 사람들이 인식하기를, 신혜성은 술만 마시고 화를 내거나 말을 안 한다- 이거 였다. 웨이터 녀석들은 혜성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 중 정하 라는 속 좋은 녀석만이 혜성에게 따라붙어 주었다. 제 멋대로 잘 지내는 혜성에게 10월의 마지막 주가 닥치자 새로운 불만이 싹텄다. 그저께 연락을 취한 한스가 자기 수하 놈들을 모두 이끌고 오늘 새벽 룸펜에 오기로 한 점? 물론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히스였다. 그가 말을 하지 않는다. 혜성의 앞에 정의로운 척 나타나서 한스와 붙던 날 이후로, 그는 혜성에게 말을 걸지도 대답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화가 났냐고 물었지만 고개를 가로저을 뿐, 그는 쟁만 닦는 게 더 재미있는지 혜성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뿐인가! 혜성이 신경질적으로 술을 들이키며 룸펜 구석에서 찌그러져 있다가 손님과 시비가 붙었을 때도, 그는 조용히 그것을 지켜보다가 말 한 마디 없이 데이트를 하러 나가 버렸다. “히스, 화가 많이 난 거니? 그럼 뭐가 화 난 거야?” “…….” “우리 블라우스 구경하러 갈까? 네 머리칼과 아주 잘 어울리는 게 새로 나왔어. 너 수제 좋아하잖아.” “…….” “맘대로 해!” “…….” “왜 저런대!” 주방에서 조용히 야식을 먹는 히스의 옆에서 협박도 하고 회유책도 써 봤지만 결국 모두 무시당한 혜성이 주방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정하에게 꽥 소리친다. 아까 와 똑 같이 왜 저런대! 라고 묻는 혜성이 오늘따라 이상하게 귀여워 보였던 정하가 싱글싱글 웃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정말 왜 저런대! 오늘은 그러면 안 되는데!” “쿡쿡쿡….” “왜 웃어?” “요새 네가 룸펜에 잘 적응하는 것 같아서… 신혜성.” “!” 적응… 적응이라. 정하의 말에 그제 서야 화색이 만연해진 혜성이 그게 정말이냐며 거듭 물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과는 많이 달라졌다. 어떤 게 밑바닥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냥 술만 처먹고 제 멋대로 노래나 부르는 게 정답은 아니었었다. 정하의 말이 틀리지 않다. 자신이 정한 장소에서의 제대로 된 적응 이야말로 또 다른 삶의 방식이며, 자신이 원한 밑바닥의 실천 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말 없이 화만 내고 저습하게 지내는 것이 진정한 끝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 것 같았다. 새벽 세 시가 되자 약속대로 한스가 서른 명이 넘는 자기 꼬봉들을 모두 이끌고 나타났다. 건달기 자자한 녀석들은 시끄럽게 떠들었고 거의 모든 자리를 장악했다. 한스와 멀리서 마주친 혜성이 대충 눈인사를 마치고 또 히스를 찾아보았지만 그는 주방에서 살기로 작정했는지 나올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인 채로 나타난 한스 역시, 히스와 비슷한 몰골이라는 게 재미있었는지 키득거리며 혜성은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내려왔다. 오늘은 혜성에게 있어 아주 의미 있는 날이었다. 벌써 10월의 막바지라지만 가을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안성맞춤인 날이라고 말을 바꾸면 되는 것이니 상관없다. 요즘 들어 아마데우스에 대한 향수는 거의 찾을 수 없고, 틈만 나면 룸펜 구석구석에로 관심을 뻗게 된 혜성은 매우 즐겁기만 했다. 그는 들떠서 상기된 채 여러 악보를 집었다. 후다닥 웨이터 복장에서 갈아입고 무대 쪽에 섰을 때, 사람들은 하던 것을 중단하고 화들짝 놀란 눈을 반짝였다. 저것이 오늘은 또 왜 저러지? 하나같이 이 생각들인 게 빤히 보였다. 혜성은 생글생글 웃던 중 갑자기 떠오른 히스 때문에 후다닥 주방에 뛰어갔다. 다른 때와 다르게 깔끔한 베이지색 면바지와 크림색 스웨터를 입고, 화장은 전혀 하지 않은 상아색 머리칼의 수페리우스는 유독 눈에 띄었다. 토끼처럼 가볍게 걸어서 도착한 주방 입구에 팔을 괸 채 그는 히스를 불렀다. “히스! 나 봐라?” “…….” “히스… 이따가 우리 샴페인 마시자.” “…….” “네가 싫으면 나만 마시지 뭐. 오늘은 기대해도 좋다.” “?” “후회하지 말고 바에 나와서 듣도록.” “?” 그게 무슨 소리냐며 고개를 휙 돌린 히스가 주방 입구 쪽을 응시했지만, 이미 수페리우스는 바람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자자한 음성의 잔해가 공기 중에 떠돌며 가뜩이나 복잡해진 히스의 내면에 톡톡 몸을 터뜨린다. 유난히 들뜬 혜성이 저 스스로 무대의 조명을 조정한 뒤 좁은 공간에 크게 올라섰다. 머리 위에 하얀 조명은 그동안 봐 왔던 주홍빛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의 바뀐 차림새처럼 상황은 경건하게 바뀌었다. 대학로의 소극장처럼 모든 이를 집중하게 만드는 참참 한 어두움 속의 환한 화이트는 좌중을 혜성의 빛나는 눈동자로 몰입시키는 힘이 있었다. 틀림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면, 모두가 인정하는 지금에의 문장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화장을 하지 않았지만, 오늘의 신혜성은 오히려 더 아름답고 신비롭다는 것, 그것이다. 평상시와 다르기 때문에 호기심 많은 손님들을 집중하게 만드는 룸펜의 작은 가수이자 연주자의 변화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혜성은 작은 손에 마이크를 쥐고 낭랑한 목소리로 지껄였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건 다 잊어.” “!” 놀란 것은 웨이터 녀석들 뿐 만이 아니었다. 반말이라니! 상대가 외국인 천지라고 해도, 한스 패거리들도 있는 앞에서 저런 경거망동이라니! 룸펜이라고 해도 그렇지! 설마 옷 벗고 스트립쇼라도 할 참인가! 혜성의 마이크 음성을 들은 히스 마저도 사색이 된 몰골로 주방에서 뛰쳐나왔다. “여태까지 들어봤던 샹송이며 오페라… 락이며, 뽕짝까지…. …다. 잊어.” 그가 미친 걸까! 히스는 조마조마하며 손톱을 깨물었다. 말을 하지 않았다고 벌이라도 주는 건가 수페리우스! 단체로 너에게 장화를 던지면 어쩌려고 그래! 하지만 혜성의 말들은 의외의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자신만만하고 약간의 오만함을 섞은 눈동자로 내리 깔듯이 내뱉는 소리들은 손님들을 흥분하게 했지만, 그만큼 몰입시키는 힘도 있었던 탓이다. 그들은 껄껄껄 웃으며 계속 해 보라는 듯이 야유를 퍼 부었지만, 그런 식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수페리우스의 작은 입술이 천박한 투로 으름장을 놓는다. 룸펜이 흔들린다. “두 번 다시, 다른 곡은 듣고 싶지 않을 정도로 너희들의 오금이 저리게 만들어 주지.” “!” “휘익~ “ 지저스! 히스가 허둥대며 무대 쪽으로 향할 때, 혜성이 그를 톡 쏘아보며 좌중을 향해 너스레를 부렸다. “저건 나의 짐짝이 아닌가?” “하하하하하-” 수페리우스! 라고 소리치던 히스는 졸지에 우스개 인물이 된 것이 화가 나서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음대로 해! 안 막아! 그는 아마 그런 식으로 화를 곱씹을 테다. 이 때 혜성의 목소리가 약간 긴장된 듯싶었지만, 그것은 즐거움으로 인한 설레임이 빚은 긴장이었다. “가슴으로 부르면… 노래는 머리로 터지지. 입으로 나오는 게 아니야. 머리로 나오는 거야. 나는 어제까지도 사실은 진심을 담아서 열정을 담아서 부른 적이 없어. 가만히 있지 말고 집중해서 너희들의 영혼을 질러 봐. 모르겠어? 여긴 룸펜이야!” “!” 저마다 방랑자의 지친 기색을 정당화 시키며 맥주와 술을 들이 키고 혜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폭풍전야의 거대한 끝 점에 닿을 때, 혜성은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무대를 약간씩 거닐며 말을 이었다. “방랑자가 부르는 노래니까 우린 다 같은 처지인 거다!” 때로는 강하게, “우리도 이런 노래에 감동 받을 수 있어, 그렇지?” 때로는 부드럽게, “한국 말 못 알아듣겠으면 옆 테이블 놈한테 내가 했던 말 해석해서 듣고… 너희들은 느끼기만 해. 여자보다 아름다운 것을 귀로 듣는 것도 흔하지 않지… 깜짝 놀라게 해 주마!” 그러나 확실하게! 그들은 아주 기대에 찬 눈치였다. 누가 감히 이런 소릴 손님들에게 하겠는가? 그것도 고작 재즈 연주자가? 방랑자만 새벽에 모여드는 이 곳에서? 또 싸움만 해 대는 한스 패거리들 전부를 모아놓고 가르치듯이? 저 놈은 미친놈인가? 그럼 미친 놈 노는 거 구경하지~ 그들은 어쨌든 집중했다. 정 중앙에 앉아있는 한스가 아무 행동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스는 야유를 퍼붓지도, 장화를 던지지도, 욕을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혜성의 말을 모두 듣고 가끔은 웃어주며 박수까지 쳐 주었다. 우두머리가 그렇게 나오자 나머지 녀석들과 손님들 마저 장단에 맞춰주는 꼴이 된 것이다. 혜성은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자만심과 교만이라고 누군가가 나의 지금 소리들에 손가락질을 해도 좋다. 애송이에게 밑바닥은 상관없어. 욕 해. 내가 잠깐 잊은 게 있는데, 작은 무대여도 이 시간만큼은 내 거야. 내가 최고인 자리지. 나는 아주 여유로운 상태인데, 이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소리거든. 룸펜의 생활에 익숙해지는 거야말로 밑바닥의 진정한 생활 아니겠는가. 오, 이토록 끝장나게 맛있는 술이 어디 또 있겠는가? 너저분하게 먼지 바닥에서 종일토록 여유 부리며 잠 만 자도 괜찮거든. 긴장하며 허둥지둥 지냈던 시간은 더 이상 없다. 아마데우스의 생활방식이 룸펜에서의 초기 때 많은 방해를 주었지만 이젠 없다. 나는 진정한 이 곳의 사람이 되었다. 음악에 몸을 팔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로워졌어. “정하야. 판을 끼워줘.” 눈을 감은 채로 하얀 조명 아래 수페리우스가 명령하자 홀린 눈으로 그를 지켜보던 정하가 솔베이지 반주가 들어있는 까만 레코드를 끼웠다. 그리고, 혜성의 눈이 번쩍 뜨였다. 나는 음악에 몸을 팔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로워졌어. 그러니, 이 자유를 돌려주마. 그의 내면은 전체를 향해 같은 소리를 크게 내뱉고 있었다. 그의 강렬한 시선이 뜻을 품었을 때, 마침내 짧은 반주는 끝이 났다. 한 때는 삼천여명의 기립박수를 받았고, 미카엘 성가대 솔로 자리를 자기 힘으로 쟁취해서 1년 내내 영화로운 자리를 빛냈다는 화려한 경력자이자 아마데우스의 유일한 수페리우스의 진정한 새벽 콘서트가 최초로 펼쳐진 것이다. wgreene@naver.com 소설 제목을 아싸리 수페리우스 라고 바꿀까봐요... 어제 여기까지 올리고 싶었기에, 오늘 마저 한 편 더 올립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저의 답글에 대한 감사답글은 여전히 답글란에 이어서 적었습니다.(이상한 설명..) 당부의 말 : 오래전에 1악장을 중단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이유가 제가 저의 영향을 받아서였습니다. 당시 일기장에도 적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영향을 받은 아마데우스는 스스로 미칠 노릇이었거든요. 시간이 지나서 극복이 될 때 1악장을 완결낼 수 있었던 경험으로 미루어 본 바.. 2악장을 적는 내내 1악장을 절대 클릭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지는, 1악장의 룰(마땅한 단어가 없구려..)에 익숙해 지시면, 2악장이 재미없고, 언젠가 3악장이 될 때 2악장의 룰(정말 다른 단어 없나..)을 찾으시면 안된다는.. 일종의 지레걱정인거죠.(퍽; 도대체 무슨 설명이양;) 미안, 걱정하는게 취미야....☞☜.... + 독일어 전공한 적이 전혀 없어서 번역기로 돌린 문장을 올렸는데 역시나 틀렸더군요. ;ㅁ; 앞으로 이것저것 찾아 보긴 하겠지만(번역기 나쁜놈..) 또 틀리게 될 경우 지적 부탁해요(쪼..쪽지로;;) ^ 3^ 다시 끝인사를... 즐거운 해피데이 되세요~ ^_~ wgreene 화이트그린. 060404 2악장 8편 추가로 올림. 덧글 10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8편(솔베이지를 부르는 소년)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8편(솔베이지를 부르는 소년)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9-1편 ▼ 다음글 - 2악장 7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9-1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4/07 14:56 http://blog.naver.com/wgreene/110003191783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407 9-1 반탱이 없데) Amadeus 음악 : 도나우 강의 잔물결(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도나우 강의 잔물결/이.. 더 놀라, 아직 멀었어. 삼천 명을 움직이던 내가 너희를 움직이지 못 할 것 같은가? 나는 밑바닥에서도 살아 있어. 여기서 살아나는 거야말로 부활의 시작이야! 닥치고 들어, 내가 알려 준다잖아. 이해가 먼저였던 거야. 무조건 ‘나’를 알리는 게 아니었어. 내가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이 되면, 못 할 게 없어, 바로 지금처럼! 나는 아마데우스의 수페리우스지. 하지만 애송이 라는 말이 더 편하니 그렇게 미친놈 보듯이 봐 줘. 2악장 9-1편(나머지 반은 나중에..)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멈췄다. 동시에 히스는 굳은 몸에 니스 칠을 막 끝낸 싸구려 조각상처럼 숨도 내쉬지 않았다. 흥겹게 농을 지껄이며 맥주잔을 부닥치던 좌중은 입가에 물고 있던 담배가 필터 끝까지 치고 들어올 때를 기다려서야 한 마디씩을 내뱉었다. 혜성을 감싼 백지의 조명은 그의 순결한 눈동자와 서늘한 입술만 훑고 지나가는 것 처럼 아찔했다. 사방에 정지된 물체를 당겨오듯이 목소리만으로도 모든 것을 집어오는 가냘픈 소리가 룸펜에 터졌다. 솔베이지의 선율이 잔잔하게 마치 물 위를 걷는 예수처럼 없는 자국을 가슴에 팬다. 그 사이를 뚫고 들어간 것은 틀림없이 혜성의 음성이었다. 없는 자국에 파도를 일으키려는 자가 마이크를 쥐고 동화 구연을 하듯이 나긋하되 강렬한 힘을 실어 좌중을 향해 언어를 흘린다. 이제 시작이다. “너희는 세상의 떨거지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지.” 멋진 노래나 한 판 벌일 줄 알고 기대했던 좌중의 눈빛이 모호해졌다. 혜성의 작은 몸은 여기 저기를 샅샅이 살폈기 때문이다. 그는 입으로는 말을 하지만 눈빛으로 한 사람씩 전부 스치는 자상한 나비처럼 움직였다. 좁은 무대는 서서히 넓어진다. “페르를 기다리던 솔베이지라는 계집이 있었다. 평~생을 기다렸던 거야. 백 발 노인이 될 때 까지 그를 기다렸어. 사랑했거든. 그러나 페르는 너희처럼 멋쟁이 방랑자였기 때문에 마냥 떠돌기만 했지.” 혜성은 불현듯 눈을 감고 선율을 음미하듯이, 시선을 즐기듯이 천천히 낡은 의자에 앉아서 짧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겨울이 떠나고 봄이 지나고, 그래 여름이 서툴고 해가 지나고 그래… 해가 지나고 당신은 제게 돌아오겠지요.” 한 판 연극이 벌어졌다! 히스는 조용히 떠드는 혜성과 그를 주목하는 한스를 번갈아 응시하며 혹시라도 저 놈이 맘이 바뀌어서 당장이라도 장화를 던지면 어떡하나- 싶어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그것은 히스의 단순한 걱정에 지나지 않았음을, 혜성은 서서히 증명했다. “분명 당신은 제게로 저는 약속했지요. 진정 당신을 기다립니다.” 혜성의 맑은 음성은 옅은 허밍처럼 참참 한 룸펜 조명까지 떨게 만들었다. 풍부한 전율이 선율이 침범하지 않은 목소리에 영 적인 것을 실을 때, 한스는 눈을 반짝이는 듯싶었다. 혜성은 아주 허망하고도 슬픈 표정으로 허공을 보며 소리쳤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 그리고 좌중을 위로하듯이 구연을 계속한다. 마침내 똑똑한 히스는 저 작은 수페리우스가 하는 말이 어떤 뜻인지를 알았다. 솔베이지의 선율을 틀어 놓고, 그는 한국어로 번역된 솔베이지 노래 가사를 시처럼 읊고 외치는 것이었다. 음악에 무지한 방랑자들을 향해 그는 솔베이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당신이 아직 태양을 보신다면, 신의 축복이 있기를.” 혜성의 떨리는 눈동자 밖으로 많은 사람이 지나쳤다. 영혼이 된 민우의 웃음소리가 귓전을 아프게 때렸다. 먼 노을이 잠식 할 때, 바오르 신부님이 그의 죽은 몸에 기댄 것 마저 혜성의 목소리는 눈으로 확인시켜 주었다. 오, 내 안의 신이여! 아직 이 보잘 것 없는 미물에게 삶을 허락하신다면 보다 유쾌하신 자비를 베푸소서! “당신이 그 분께 무릎을 꿇는다면 저는 당신을 기다립니다. 당신이 제 곁에 오실 때까지.” 이윽고 혜성의 시야를 스쳐 가는 문정혁이 지옥에서도 아파하지 않는 강렬한 시선으로 아이를 노려보았다. 혜성은 눈을 부릅뜬 채 더 확실한 투로 마이크를 쥐고 속삭였다. “당신이 제 곁에서 기다리신다면…… 그 곳에서 만나겠지요.” …테레사…… 라는 말을 아주 작게 입 모양으로만 만들고, 혜성의 구연은 끝이 났다. 사람들은 조용히 혜성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늘 시시콜콜한 농담 따위를 지껄이던 방랑자들은 룸펜에서 환각 상태에 직면한 것이다. 백지장처럼 새하얀 조명 아래 떠드는 어여쁜 입술이 새처럼 지저귀고, 톡 쏘는 봉오리 때의 장미처럼 감싸 안아주지만, 그의 가시가 목울대를 찌르는! 음성은 바다를 일으켰고, 없던 발자국은 수천의 낙인을 남기는 것처럼. 어쩐지 저 내용은 자신들에게 애원하는 것으로 들렸기 때문에 저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움켜쥐기도 했다. “너희는 자유로운 방랑자일 뿐이지… 누구는 마약을 하고, 또 누구는 범죄를 저지르고, 어떤 이는 생긴 게 다르다고 이 좁은 동네에서 멸시를 받고…….” 혜성의 말에 해당되는 인파들은 새벽 세 시가 지나는 현재, 각자를 휙휙 돌아보았다. 한스는 묵묵히 혜성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또 누구는 막 일 뿐인 인생이라지만… 썩은 시선을 받으면서도 세상의 떨거지며 밑바닥이라고들 하던데, 사실은 그게 아니지 않던가.” “!” “너희는 자유로운 방랑자일 뿐이니까.” “!” “나는 이 곳에서 페르를 기다리는 솔베이지가 되어서 매일 매일 새벽마다 그리움을 담아 눈물로…….” 혜성은 돌연 바닥에 엎드렸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 질 때, 그는 씨 익 웃으며 진정 자유를 호소하듯이 마이크를 입가에 붙인 채 간절한 투를 담아서 속삭였다. 히스의 전신에 이유 없이 소름이 와락 끼쳤다. 전신이 부들부들 떨린다. “눈~물로 곡을 드리리…….” 혜성이 양 손을 모두 허공에 뻗어 천천히 무대 바닥에 살포시 얹을 때,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우와아아.” “휘익~” 여기저기서 그레이트! 그레이트! 라는 그를 지지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삽시간에 벌어진 변화에 어리둥절한 이는 오직 히스 뿐 이었다. 그는 저 미친 환자처럼 발작 중인 상식 이상의 수페리우스를 멍청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수페리우스. 너는 무엇이지? 나는 소름이 끼쳐. 너는 어떤 인물이지? 연약한 너의 몸에서 가시가 나왔지만, 사람들은 그 가시의 찔림에 비명을 지르며 그레이트를 외쳐. 히스의 볼을 타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이 환각에 시달리던 통증은 눈물을 쏟았다. 저기 달보다 환한 자가 빛을 터뜨리며 자신 만만한 소리로 쉬지 않고 떠든다. 그의 지난 시간들이 빚어낸 스스로의 자신감은 돛대를 위협하는 강풍 앞에서도 바다 위를 유유히 지나치는 꼴이었다. 그의 혁명은 외형뿐만이 아니라, 내면까지 스스로에게 강인한 벽을 세웠던 것일까? 히스는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처음부터 오페라가 튀어 나오면 재미 없을 테니… 솔베이지는 페르가 좋아하는 락을 가미해서 편~곡 이란 놈을 바치리… 편곡이 뭔 줄 모르면 그냥 들으면 돼. 아니 이럴 수가. 편곡이라고 떠들긴 했지만 나도 까먹어 버렸거든.” “하하하하하.” 여기저기서 좌중의 입장에서 떠들어주는 그에게 지폐를 던지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말도 안 돼! 순간 이상한 조바심과 걱정이 히스를 두드렸다. 아주 귀중한 것이 송두리째 뿌리 채 어딘가로 빼앗기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여 히스는 정말로 바닥에 자신을 엎드린 혜성을 일으키고, 룸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조바심이 들었는지 무대에 다가가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히스보다 빠른 속도로 허공에 쭈 욱 얇은 허리를 세운 혜성은 정하에게 자신이 준비한 빠른 비트의 레코드를 돌려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파란 머리칼을 휘날리며 크게 부르는 히스의 음성은 룸펜의 사람들이 떠드는 통에 묻혀졌고, 아이는 늘씬한 몸을 일으켜서 빠른 비트가 시끄럽게 터지기 무섭게, 피아노에 몸을 앉혔다. 아이가 멀어지고 있다. 수페리우스가 하늘의 별이 되어 빠른 속도로 올라가려고 한다. 잡을 수 없다. 왜 잡아야 하는 지 그 이유는 아직 모른다. “브라~보!” “휘익~” 삼십 명이 훨씬 넘는 좌중은 모두 페르퀸트가 되었다. 그리고 솔베이지는 그들이 좋아하는 락 비트에 맞춰서 아이러니할 정도로 잘 어울리는 엇박자의 솔베이지의 노래 리듬을 건반에 누르기 시작했다. “!” 또 다시 좌중은 조용해졌다. 가사 따위는 없는 오로지 베이스와 드럼 투 성이 인 락 비트가 시끄러운 내부를 뚫고, 청명한 피아노의 솔직한 선율이 엉겅퀴처럼 묶여져 간다. 그들은 떠들고 싶어도, 1초가 다르게 지나쳐만 가는 저 화려하고도 굉장한 음악을 잡기 위해! 생전 처음 들어보는 별 해괴망측한 음악을 듣기 위해 눈을 크게 뜬 채로 입을 벌렸다. 모두의 영혼은 빨려 들어가듯이 혜성의 작은 손가락이 움직이는 쪽으로 집중되어간다. 뒤 쪽의 인파들은 어떻게든 그의 신기한 손가락과 외형을 자세히 보기 위해 아예 테이블 위에 의자를 들고 서서 꽥 꽥 소리치기도 했다. 연한 건반이 지나치는 소리에만 집중하면, 아주 연약한 솔베이지의 애원이 단어로 빚어질 것 같다. 그러나 방랑자들의 귀에 익숙한 흔한 락의 비트에 섞이자 음악은 새로운 것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오 세상에! 음악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는 그들이어도, 이것은 신선한 충격 이상의 것이 아닌가! 그들이 혜성의 피아노 반주와 오케스트라 단원이 된 락에 놀랄 때 즈음, 그는 이제 시작이라는 듯이 피아노에 장착한 마이크에 고개를 숙였다. 푸스스- 흩어지는 상아색 머리칼이 그를 여신처럼 돋보이게 했다. 비록 이 곳이 룸펜일 지라도, 아니 룸펜이기 때문에! “The winter may pass and the spring disappear, and the spring disappear the summer too will vanish and then the year, and then the year.” “!” 저 괴상한 박자 사이로 솔베이지 가사를 무조건 밀어 넣다니! 뒤죽박죽인 것 같지만 정확한 음정을 짚어내는 작은 손가락은 마치 창처럼 날렵하고 무시무시하다. 히스의 뛰는 가슴은 그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주 여유롭게 가사를 부르고, 락 비트에 맞춰서 비명을 지르는 아이는 아주 즐거운 등을 들썩이기까지 했다. “but this I know for certain, that you'll come vack again, that you'll come back again and even as I promised, you'll find me walting then yes, even as I promised, you'll find me walting then, you'll find me waiting then.” “…….” 박자는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락으로 통일되는 듯 한 클라이막스 부분이 올라오자, 돌연 레코드판이 뚜우우- 꺼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잠깐이지만 레코드 기계에 이상이 생긴 줄로 오해 했지만,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여린 박자만 꾸준히 누르던 수페리우스의 피아노 건반에 벼락이 떨어지는 것처럼 웅장한 무언가로의 변화가 뒤따랐다. 수페리우스의 내면이 소리친다. 더 놀라. 아직 멀었어. 삼천 명을 움직이던 내가 너희를 움직이지 못 할 것 같은가? 나는 밑바닥에서도 살아 있어. 여기서 살아나는 거야말로 부활의 시작이야! 닥치고 들어. 내가 알려 준다잖아. 이해가 먼저였던 거야. 무조건 ‘나’를 알리는 게 아니었어. 내가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이 되면, 못 할 게 없어, 바로 지금처럼! 나는 아마데우스의 수페리우스지. 하지만 애송이 라는 말이 더 편하니 그렇게 미친놈 보듯이 봐 줘. “!” 작게 떠들며 그나마 담소를 나누던 소수의 먼 인파까지도 완전히 피아노곡만 남게 된 현재, 입을 닥쳤다. 열린 귀는 자유자재로 저마다의 귀에 방랑의 지점을 찾아냈고, 혜성은 비로소 락이 아닌, 오페라를, 화음을, 성가대에서 배웠던 아찔한 독음을 제 기분대로 펼쳤다. 남은 소절들은 바로 그런 식의 과정을 통해 솔베이지와 한층 가까워진 방랑자의 이름표를 단 좌중을 몰입시켰다. 저 아이는 혹시 괴짜이지만 천재가 아닐까? 하는 아주 짧고 무거운 충격이 히스의 안면을 강타했다. “The winter may pass and the spring disappear, and the spring disappear the summer too will vanish and then the year, and then the year but this I know for certain, that you'll come vack again, that you'll come back again. and even as I promised, you'll find me walting then yes, even as I promised, you'll find me walting then, you'll find me waiting then…….” “…….” “…….” 사방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썰물의 지대가 몽땅 사라졌다. 날아오던 새도 즉사해서 땅에 덜어질 것처럼 흉측 한 침묵이 룸펜을 꽉 채웠다. 어디선가 숨죽여 흐느끼던 새벽 가을의 바람이 하프의 선율을 대롱대롱 매달고 찾아들었다. 혜성의 화려하게 바뀐 선율은 오히려 달콤하되 슬픈 음성의 박자에 잘 어울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 아름다운 소리를 조금이라도 더 들어보기 위하여, 흔히들 오페라의 한 장면처럼 없어지는 저것을 취하기 위해 몸을 당기기도 했다. 꿈처럼 아늑한 풍경은 혜성의 긴 연주가 끝나기 무섭게 폭풍후의 활을 쏘았다. 째깍. 쨍- 30분을 지나는 룸펜 자명종 소리가 지나자마자, 그들은 마법에서 간신히 벗어난 사람처럼, 헐떡이며 바닥이 들썩이도록 환호성을 질렀다. 테이블이 부서질 것처럼 흔들고, 누구는 락 페스티벌의 관중이 되어 바에 올라서서 참 소리를 터뜨렸다. “우와아아아아!” “브라보!!” “룸펜! 브라~보.” 천장이 무너지도록 한꺼번에 무대에 집중하는 소리는, 이태원 시내 곳곳에 퍼져나간다. 혜성은 조용히 피아노에서 일어났다. 앙코르를 원하는 좌중을 위해 허리를 숙였다. 어디선가 그가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서늘한 기운이 전신에 밀쳐졌고, 오싹한 나머지 작은 피부 곳곳에 소름이 끼쳤다. 그는 신음을 흘렸는데 글자가 동시에 작게 튀어나왔다. “테레…사…….” 나는 드디어 밑바닥이 무엇인 줄 알았습니다. 이 곳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 나는 그것을 즐기고 전혀 다른 음악을 통해. 아마데우스가 멸시 할 지도 모르는 제 멋 대로인 것을 취하는 현재, 알았습니다. “……더 듣고 싶어도, 내일 또 와서 들어. 참아.” “하하하하!” 음악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빛을 발 하는 게 진정한 자리라 구요… 테레사. 당신이 틀렸습니다. 당신이 알려준 하프의 선율은, 만 천하에 뚫리는 하프의 음성이었듯이…. 세상은 공평한 것, 무엇이든 귀가 있는 이상 심장을 지닌 이상, 나와 다를 게 없었던 것을요. 진땀이 흐르는 이마를 소매로 훔친 뒤, 혜성은 매우 귀찮다는 표정으로 좌중을 향해 술잔을 쭉 내민 뒤, 원 샷을 하면서 매콤한 질책을 흘렸다. 앙코르 따위는 없다. 듣고 싶어도 참으라는 그의 태도에 사람들은 오히려 좋아했다. 아마 그들은 내일도, 모레도 꾸준히 룸펜에 드나들 것이다. 그리고 혜성에게 장화를 던지거나 욕을 지껄이지는 않을 것이다. 한스가 지키고 있어서? 결코 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이제 신혜성 이라는 룸펜의 가수는, 페르를 기다리고 사랑하는 솔베이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태원의 룸펜에서 솔베이지를 부르는 상아색 머리칼의 소년이 마 악 뜬 서슬 퍼런 눈을 비로소 밝히기 시작했다. wgreene@naver.com 농땡이 칠 때가 제일 잘 써지는군요; 9편 전부를 올려야지 아마데우스 이야기에 올린 히스의 도나우강 구절이 나올텐데.. 시간상 반탱이 앞 부분을 먼저 보여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_~ 답글에 대한 저의 답글 역시 나머지 반이 올라가는 날...^^ wgreene 화이트그린 9-1 반탱이 올림 060407 덧글 5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9-1편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9-1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9-2편 ▼ 다음글 - 2악장 8편(솔베이지를 부르는 소년)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9-2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4/08 14:48 http://blog.naver.com/wgreene/110003220066 Amadeus 음악 : love story summer of 42-Godfather - Ernesto Cortazar(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Love Story-Summer Of 4.. Ich liebe 이히 리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술이 겹쳐졌다. dich 디히… 마침표는 서로의 얽혀있는 혀끝에서 누군가가 말 하는 것으로 찍혔다. Ich liebe dich…… 이히 리베 디히……(그대를 사랑해…) 2악장 9-2편(-1에 이어지는 거라서 매우 짧음) 누군가가 혜성의 가벼운 몸을 번쩍 어깨에 올렸다. 놀란 아이가 반쯤 채워져 있는 유리 글라스를 쥔 채로 경직되었지만, 긴장은 곧 풀렸다. 자상한 이의 커다란 손이 흔들거리는 아이의 몸이 쏟아지지 않도록 받쳐 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무대에서 내려오는 동시에 혜성을 번쩍 어깨에 올린 자는 한스 였다. “아하하! 한스!” “최고의 위로였다 룸펜!” 때를 잘 맞추어 누군가가 스페인 민요를 재생시켰다. 너도 나도 흥에 겨워서 잔을 높이 들고 한스가 지나가는 길을 비켜주고 소리를 질렀다. 음악의 공감은 실로 위대한 것이어서 없는 파도를 빚는다. 없는 우정을 실현시키고, 무의 지대에 꽃과 나무를 심어서 벌과 나비가 날아들게 한다. 잔잔한 공기에 향수를 입혀서 사람들의 코를 벌름거리게 하며, 웅크리고 있는 연약한 신체에는 활력을 불어넣는다. 바로 그것이 위대한 음악의 공감이자 힘 이라는 것을, 히스는 다시 한 번 알았으리라. 그는 자신이 배우고 생각하던 체계에 변화가 미치는 것이 두려울 정도였다. 늘 아마데우스 이상 가는 음악에의 흔적은 없는 게 당연하다고 배워왔다. 인간에게 교육은 평생을 좌지우지 하지 않던가? 그런 히스에게 있어서 이태원 룸펜에 오는 이유는 단 하나, 잠시 음악을 잊고 즐기기 위해서였다. 저 작은 수페리우스처럼 음악에의 활력을 불어 넣어준다? 그것도 클래식과 관련된 것을? 오 하느님! 천하의 히스라고 해도, 그는 전혀 그런 상상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무겁지 않나, 한스?” “전~혀. 뾰족한 전나무 뿌리가 꽂히는 것 같긴 하지만… 네가 말라서 그런 거니 참을 만 하다.” “전나무?” 신이 나서 엉덩이를 들썩이는 혜성의 동작 덕분에 엉치 뼈가 꾹 꾹 어깨에 눌리는 것을 뜻하는 것이리라. 아이는 자지러지게 웃으며 한스의 어깨에서 껑충 뛰어 밑에 착지했다. 찰랑- 하고 그의 잔에 있던 것이 비었다. 근처 테이블에 앉아서 둘을 지켜보던 즐거운 방랑자 녀석들이 그런 혜성의 잔에 냉큼 맥주를 부어댄다. “아하하하! 샴페인잔에 맥~주라. 좋군? 다같이 치어스~ “ 사방이 뱅글뱅글 돌아간다. 크리스마스 전야제 때 보았던 학생들의 왈츠처럼 모든 것은 들뜨고 즐겁기만 했다. 걷는 족족 바닥이 퍼뜨리는 왈츠의 스탭 덕분에 혜성은 거품이 이는 맥주를 샴페인의 홀쭉한 잔에 받아 마시면서도 아이처럼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멀리서 그런 혜성의 방종을 눈여겨보는 히스의 표정이 차츰 차츰 일그러지는 것도 모르는지, 아이는 자신의 노래에 감탄을 터뜨려준 고마운 좌중을 한 사람도 빠뜨리지 않고 인사 해 주었다. 테이블을 옮겨 다니는 그는 마치 나비처럼 가벼워 보였지만, 한 떨기 바람에 날리는 꽃처럼 금 새 라도 뽑힐 것 같이 위태롭기도 했다. 아예 술병을 다른 손에 쥐고 깔깔깔 웃으며 누군가의 농담에 고개를 마구 끄덕일 때는 오래 전 이민우로 변한 것처럼 자유 자적하기만 했다. 혜성은 지금 자신의 모습이 지난 날, 통 이해하지 못했던 이민우와 아주 흡사하다는 것을 행동을 취하면서 불현듯 깨달았다. 그래서 약간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그것은 술기운 때문일 테니 내버려 두기로 한다. 알 것 같다 민우야. 네가 왜 위태롭게 술을 들이키면서도 사시사철 즐거운 자유를 읊었었는지 나는 이제 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적당히 좀 하지?” “……?” 거의 모든 테이블을 돌았을 때의 혜성은 양 쪽 뺨이 울긋불긋 홍시처럼 변해 있었다. 그런 아이가 크게 휘청 이며 콸콸콸 술을 바닥에 흘렀을 때, 보다 못 한 히스가 그의 팔을 거칠게 휘어잡았다. “올라가자. 쉬는 게 좋겠어.” “어때…….” “?” 거하게 술에 취한 혜성이 최상위의 컨디션을 자랑하며 히스의 양 쪽 뺨을 꼬옥 감쌌다. 아이가 올린 짧은 팔을 위하여 히스는 시끄러운 와중에도 허리를 약간 숙여주었다. 두 사람이 있는 어두운바 구석으로는 간간히 두세 명씩 오고 가고 있었다. 혜성은 은밀한 비밀을 토로하듯이 약간은 거칠어진 호흡을 내뱉으며 도전적인 말씨를 빚었다. “너도 좋았지…? 히이…스?” “…….” “좋았다고 말 해. 계속 듣고 싶었다고 말 해. 나의 세상에 반했다고 말 해. 끄윽.” “!” “취했…끅. 나… 끅. 뜩.” 내면을 후려 차는 소리가 히스의 귀에 잔인하게 꽂히고, 다시 뽑히기 무섭게 더 세게 꽂히고를 반복한다. 좋았다고 말 해. 계속 듣고 싶었다고 말 해. 나의 세상에 반했다고 말 해. 푹- 자신의 품 안에서 쓰러지는 혜성을 재빨리 받아 안으면서도 그의 창백해진 표정은 도통 나아지질 않았다. 오히려 방금 전 취기에 밀려 떠든 혜성의 언어가 히스에게 ‘정답‘이라며 그간 숱하게 그렸던 물음표에게 화답을 일컬어준 것이다. 그는 멍청하게 계단을 오르면서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음악? 물론 놀랐지. 그러나 더 크게 놀란 게 있었다. 그 감정은 혜성을 처음 봤을 때는 그저 그런 별 볼 일 없는 것이었다. 한 번 두 번 시간을 보낼 때 마다 히스는 자신의 신경을 집중시키는 저 요망한 수페리우스를 향해 왜?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했었다. 나는 요 새 들어 빈번히 화가 나는 경우가 많았어. 데이트 할 때 방해가 될 정도로 수페리우스 라는 이름은 신경 쓰이게 했지. 도대체 왜? ‘나의 세상에 반했다고 말 해.’ 한스 놈과 붙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테레사보다 먼저 우장 창 깨어지는 꽃병이 떠올라서 깨진 유리에 찢어지는 살결처럼 마음이 아팠어. 도대체 왜? ‘나의 세상에 반했다고 말 해.’ 수페리우스가 엎드려서 공부하는 머리맡에 의자를 끌어놓고 앉아있는 시간은 지독하게 짧게만 느껴졌었지. 풍성한 가을날, 온화한 바람 앞에서 있어도 젖은 옷을 입고 시베리아 북단에 있는 것처럼 나는 시린 몸을 어쩔 줄 몰랐었어. 네가 방금 한스 놈의 어깨 위에서 덩~실 덩~실 거렸을 때, 나란 존재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잊은 것 같아서 억울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도대체 왜? ‘너는 결국 나의 세상에 반한거야.’ 맙소사! 히스는 다락방에 들어서는 동시에 휘몰아치는 혜성의 언어가 계속 해서 파고들어 오는 현재를 도저히 부인할 수가 없었다. ‘반했다는 건 그런 거야.’ “십… 십칠…….” 오싹- 아까와 비슷한 속도로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창백해진 피부로는 전염병처럼 번진 녹색의 땀이 흐르는 것 같았고, 침대에 뉘여 줌과 동시에 또르르르 벽 쪽으로 굴러가는 혜성의 작은 몸을 훑어보자 가슴이 쿡 쑤셔왔다. 눈물이 흐를 것처럼 억울해진 눈동자는 그를 쳐다 도 보지 말라며 히스에게 이성적인 판단을 선물했지만, 그는 그럴수록 저 작은 뒤태를 쏘아보기만 했다. ‘반했다는 건 그런 거야.’ 어떻게 해도 예쁘다.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화를 내면 귀엽다. 저 말라비틀어진 몸이 방금 전 기적을 행했다. 그는 죽어있는 사막에 풀을 심었고, 그 풀이 죽지 않게 물 까지 주었다. 그 때 히스는 심장이 오그라지도록 턱 막힌 한 숨이 저를 지배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히스는 파란 머리칼을 움켜쥐며 그가 잠들어 있는 옆에 조용히 앉았다. 수면에 취해 엷은 콧소리까지 내는 수페리우스의 몸을 무서워서 만질 수가 없다. 만지는 순간 뜻하지 않는 전류가 세포 곳곳에 침입해서 지금보다 더 한 아이의 음성이 히스를 지배할 것이 두려웠다. 그가 등을 돌리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정 면으로 배를 보이고 누운 상황이라면, 이 오묘한 기분에 못 이기는 척 당장 젖은 입술에 방탕한 나의 것을 눌렀을 테니……. “십칠…….” 새벽의 달이 하프의 선율을 머금어 모습을 감추려 할 때, 또 휘영청 밝은 달이 으리으리한 태양으로 변할 때 까지도… 히스는 한 자리에서 박제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영혼이 저 작은 몸에 흡수라도 된 양 그는 숨도 쉬지 않고 머리칼을 움켜 쥔 채 앉아 있기만 했다. 방에 들어오면 반드시 거울부터 확인하던 그는 결국 혜성이 느즈막히 몸을 일으킬 때 까지 고정된 자세에서 겨우겨우 숨만 내쉬었었다. 덧글 3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9-2편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9-2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10편 ▼ 다음글 - 2악장 9-1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10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4/08 14:52 http://blog.naver.com/wgreene/110003220195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408 10, 9-2 업데, 060407 9-1 반탱이 없데) Amadeus 음악 : love story summer of 42-Godfather - Ernesto Cortazar(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Love Story-Summer Of 4.. Ich liebe 이히 리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술이 겹쳐졌다. dich 디히… 마침표는 서로의 얽혀있는 혀끝에서 누군가가 말 하는 것으로 찍혔다. Ich liebe dich…… 이히 리베 디히……(그대를 사랑해…) 2악장 10편 솔베이지를 부르는 룸펜의 소년에 대한 소식은 일사천리로 퍼져 나갔다. 이태원 곳곳에 너부러져 있던 혼혈아들과 서러운 세월에 종지부를 찍고 싶어 하는 가여운 밤의 여자들, 또 이도 저도 아니지만 가벼운 휴식을 취하고 싶어 하는 인파들은 소문이 도착하는 즉시 새벽 세 시를 기억하고 룸펜에 찾아오기 시작했다. 혜성이 빚어낸 글자 없는 가십은 삼십 명의 출발에서 그 배의 숫자를 불러들이는 효과를 거둔 것이다. 이것은 기적일까? 글쎄. 기적의 진위 여부는 이 글을 지켜보는 당신의 판단에 맞기는 바다. 이태원은 한스 패거리의 집중을 시작으로 변하고 있었다. 한스 패거리와 적대 관계라는 다른 쪽 패거리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이들은 시시 때때로 룸펜의 수페리우스를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아이의 목소리는 젊은 시절의 슈베르트처럼 맑은 미성을 지녀서일까. 아니면 그의 싸구려 말투가 사람들은 좋아서일까. 그의 청순한 외모 뒤에 숨어 있는 열정 때문에? 어쨌든 사람들은 하나 둘 새벽 세 시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히스!” “…….”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이태원의 거리에서 밤에 활동하는 거의 모든 인력들이 혜성을 알아보고 반가워하는 것에 반 해, 히스는 더 차갑고 쌀쌀맞아졌던 탓이다. 혜성은 그런 그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전보다 바빠진 생활에의 활력을 잃지 않기 위해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삐딱하게 어긋나가는 혜성과 히스의 사이는 금새 다가온 11월의 막바지처럼 시리고 차갑기만 했다. 이제 혜성의 시간은 새벽 세 시에서 새벽 두 시부터 세 시까지로 바뀌었다. 그러나 아이는 부쩍 바빠지는 스케줄만큼 이나 변해가는 히스가 마주치는 족족 신경이 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히스, 나랑 말 하는 게 재미없어?” “…….” “한스네 애들이 마…작인가? 그거 알려 준다는데 너도 배울래?” “!” “왜?” “…….” 가을이 모두 물러간 이후, 쓸쓸해진 11월 마지막 주의 다락방 바닥을 청소하던 히스는, 막 들어온 혜성이 꺼내는 소리에 불같이 노려보기만 할 뿐 가타부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왜?” “…….” 그는 혹시 벙어리가 된 걸까? 최근 한 달 사이 그토록 좋아하는 쇼핑도 하지 않고, 혜성에게 말을 할 때는 외국어와 작곡에 대해 가르칠 뿐이었다. 사무적이고 딱딱한 투로 전혀 다른 방향을 보면서 알려주기만 하는 히스는 혜성에게 그 이상의 다정한 말은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왜!!” “…….” “왜 저런대!” “…….” 대답 없는 히스를 추궁하다가 지 풀에 꺽여서 쿵쾅거리며 계단을 내려가는 것은 역시나 혜성의 몫이다. 그는 정말로 이상해졌다. 말이 없어진 것은 고사하고, 최근에는 모든 애인들과 합동 이별 식 이라도 했는지 그의 애인이라는 자가 룸펜에 찾아오는 일도 없었다. 그런 히스가 혜성에게 다시 대화다운 대화를 부드럽게 시작 한 것은 12월 첫 째 주가 지나서였다. 잔인하고도 화려한 가을의 씨앗은 대지의 바람이 미는 힘에 떠밀려 사라지고, 풍성한 함박눈이 모든 상처를 덮어주는 계절이 닥치자, 깡 얼어버린 바닥처럼 히스는 또 달라진 것이다. 틀림없이 지난 한 달이 넘도록 그는 혜성을 못 본 척 무시했었는데, 스스로와 어떤 타협을 마친 건지 잔뜩 풀이 죽은 기색으로 주방에 있는 아이의 곁에 서더니 말을 건 것이다. 12 월 둘 째 주, 히스는 실로 오랜만의 음성을 조용히 떠들어 주었다. “밥…….” “?” “남기지 마…….” “왜… ……!” 주방 구석에 앉아서 의무적으로 비빔밥을 먹다가 맛이 별로였는지 반 이상이나 남긴 혜성이 조용히 한 숨을 내쉴 때였다. 불쑥 나타난 히스가, 10월에 있었던 혜성의 최초 콘서트 이후 처음으로 공부 이외의 말을 꺼낸 것이다! 때문에 대강 대답하던 혜성이 자신에게 말을 건넨 상대가 히스라는 것을 알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기까지 한다. 벙어리로 치부했던 이가 다시 말을 붙여준 게 감격스러워서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히스 녀석! 드디어 룸펜한테 말 하네?’ ‘정말? 둘이 다툰 게 풀린 건가?’ ‘어디 나도 나도!’ 혜성이 놀란 것 못지않게 당황한 것은 룸펜 식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웨이터 녀석들은 밤손님들을 맞이하다 말고 쪼르르 주방에 달려와서 좁은 문 안 쪽의 상황을 구경하려 들었다. 최근 한 달 사이 부쩍 몸이 마른 히스가 눈을 꿈뻑이며 자신을 올려보는 혜성의 보드라운 뺨에 손 등을 살짝 붙인다. 흠칫 놀란 혜성의 태도에 맞추어 둘을 지켜보던 주방 밖의 웨이터 녀석들도 흠칫 어깨를 떨었다. “더 먹는게 좋지 않을까…?” “그… 그… 그래. 그… 그런…그런가.” “이것도 안 먹으면 힘없어서 있다가 공연 못 하잖아 수페리우스….” “그… 그러… 그래.” 오늘 공연은 어땠어- 따위의 말조차도 없었던 히스가 미친 걸까? 다들 숨을 죽인 가운데, 부드럽게 흐르는 히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금이라도 그가 마음을 돌려서 차갑게 대꾸를 하지 않을지도 몰라. 룸펜이라 이름 하게 된 혜성을 히스가 시샘했기 때문에 그동안 서로 사이가 서먹했던 게 틀림없다고 철썩 같이 믿는 구경꾼들은 숨을 죽인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매끄러운 말만 연이어 히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아니면, 있다가 공연 끝나고 내가 스프 끓여줄까.” “그… 그…러… 럴래…?” 마침 룸펜의 사장 녀석이 주방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웨이터 녀석들에게 호통을 치자,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완전히 둘 만 남게 된 혜성과 히스는 여전히 생 계란을 삼키는 것처럼 미묘한 낯으로 대화라는 것을 한다. “응. 올라가서 쉬어. 공연 때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잖아.” “그… 그…러… 럴까.” 말은 하지만, 분명히 그가 하는 소리는 전과 같은 톤의 어절이지만, 혜성은 연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독한 안개가 끼인 눈동자로 꺼내지 못 한 통증을 애써 감추려는 저 눈빛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혜성은 부랴부랴 고개를 끄덕이고 주방을 나서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한 달 만에? 아니 그것보다 더 된 것 같은데? 이토록 시간이 지난 다음, 제 멋대로 또 혜성에게 친근하게 말을 붙이는 히스가 믿어지지 않아서였다. 또 내일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차갑게 굴지도 모를 노릇이지 않던가. “이봐 룸펜. 저 독일 놈과 화해 한 거야?” “…시끄러. 닥치고 노래나 들으시지?” “크크크큭.” “…….” 그래서 그 날은 연주를 하는 내내 한스 패거리들의 야유를 억지로 막으면서도 멀리서 있을 히스에게 집중했다. 물론 나날이 편곡을 시도하고 가끔 미뉴엣과 왈츠를 들려주는 혜성의 솜씨는 여느 재즈가 못지않게 화려하고 침착했다. 그의 길어진 상아색 머리카락처럼 아름다움 역시 여전했다. 그러나 12월의 둘째 주, 히스가 예전보다 살랑한 말을 건네 온 현재, 혜성은 무대 앞을 장악한 한스에게 농담을 내뱉으면서도 틈만 나면 힐끗 힐끗 먼 곳을 살폈다. “……?” 바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던 히스는 무대 위의 순결한 천사처럼 있는 혜성이 눈을 마주쳐 올 때 마다, 소름이 끼칠 만큼 자상하게 마주 웃어 주었다. 이크. 또 눈이 마주쳤는데 웃어주네. 혜성은 애써 침착하며 건반을 누르고, 무대를 휘저었지만 또다시 확인할 겸 히스가 있는 쪽으로 고개가 돌아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또 그가 웃는다. 오늘만 말을 하려는 걸까? 오늘만 웃으려는 건가? 히스가 오늘 정신이 나간 걸까? 혜성은 몇 번씩 고개를 갸웃거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지만 내일이면 다시 차갑게 그가 돌아설 거라 여기기로 한다. 그러나 혜성의 예상과는 달리 히스는 더 이상 바뀌지 않았다. 그는 한 달 동안 혜성에게 차갑게 군것에 대해 보상이라도 하듯이 더 나긋나긋하게 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를 지켜보는 혜성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히스는 아이의 곁을 떠날 줄을 몰랐다. “히스!” “……?” “…아니야.” “왜… 어디 아픈 거니?” “헉. …아, 아니.” “아프면 말 해줘.” “어… 그… 그러지 뭐.” 이게 뭐야! 혜성은 일주일가량 조마조마하며 히스를 지켜보던 끝에 정말 묻고 싶은 것, ‘너 왜 나한테 장난도 안 치고 무조건 잘 해?’라는 문장을 질러 버리려다가 제 풀에 꺽여 관뒀다. 히스의 진지한 녹색 눈동자는 자신과 마주치는 족족 무조건 적인 믿음에의 빛으로 똘똘 뭉쳐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아픈 거니? 아니. 아프면 말해줘. 그러지 뭐. 도대체 이게 무슨 대화란 소린가! 대화의 과정에 도리어 민망해진 혜성이 아무렇지 않은 척 미끈한 자세로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는 히스를 피해 다락방 계단에 서서 마구 벽을 발로 찼다. 하지만 익숙함 이라는 글자는 곧 찾아왔다. 길들여진다- 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또 한 주가 지나서 함박눈이 쏟아지는 계절을 피부로 느끼게 될 때 즈음, 아이는 히스의 자상한 태도에 금새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내버려 두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마술을 부린다. 아픈 것이 옅어지도록 하며, 향수를 부축이던 감성을 잦아들게 한다. 사나운 물욕에의 감정을 차차 누그려뜨려 이성을 찾아주고, 그리움에 찢어질 것 같은 붉은 피에 철의 갑옷을 입혀 주기도 한다. 사 계가 한 번 더 바뀔 때, 잊었던 아픔을 때론 다른 모습으로 돌려주기도 하지만, 그 때 역시 시간은 마술을 부리며 꼭대기까지 솟아 오른 감성을 켜켜 묶은 옛날로 돌려버린다. 시간이 주는 마술 덕분에 혜성은 늘 신경쓰였던 히스의 냉대에 익숙해 질 수 있었고, 또 그 마술 덕택에 다시 히스가 선물하는 부드러운 어절에 금방 적응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데우스를 향한 그리움의 열정이 룸펜에서 다시 피어난 것 역시 시간이 부려준 마술의 힘이 있기 때문이었음은 물론이다. 가만히 있어도 사물을 보면 자연스레 음표가 뇌리에 파고드는 12월의 셋째 주가 닥쳤다. 이 날은 눈이 내릴 것 같다는 한스의 농담 때문인지 밤 열두시가 지나자 하늘의 달이 냉큼 모습을 감췄다. 그래서일까. 달의 미명 없이 어두스럼한 다락방은 냉랭한 기운이 천지를 얼릴 것처럼 겨울의 힘을 자랑하고 있었다. 가끔은 혜성의 머리카락을 이유 없이 쓸어 주기도 하는 히스가 부리나케 다락방에 올라왔다. “지금 왔어?” “…네, 선생님.” “하하….” 또 가끔씩 히스는 아무렇지 않아 하는 혜성의 말투를 넋을 잃고 쳐다보곤 했다. 하루 종일 밖에서 한스 패거리들과 놀러 다녔던 혜성은 자신이 룸펜에 돌아오기 무섭게 다락방에 올라온 히스를 반갑게 맞이한다. 그와 공부하기로 한 날이기 때문에 열두시 종이 울리기 무섭게 아이는 룸펜에 돌아왔다. 이제 히스는 혜성이 한스와 돌아다니는 것에 대해 기분 나빠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 대신 정체를 알 수 없는 슬픔을 가득 안은 눈초리를 한 두 번씩 보여줄 뿐이었다. 그는 샘을 내는 걸까? 아무리 내가 한스와 친해 졌다고 해도, 히스 만큼은 아닌데… 혜성은 조용히 바닥에 깔려진 낡은 카펫에 배를 엎드렸다. 그가 엎드림과 거의 동시에 앞치마를 맨 채로 머뭇거리던 히스가 준비해 뒀던 의자를 끌어왔다. 다락방 조명등을 밝히자 달 빛 못지않게 근사한 빛이 둘의 머리 위에서 탄성을 자아내고, 까만 그림자가 서로에게 엉켰다. “눈이 올 것 같지… 히스?” “…….” “?” “…그래. 눈이 오겠다.” “…….” 가끔씩은 잘난 척도 하고, 신경질도 부렸던 처음의 히스는 혜성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가 천천히 대답하는 속도에 맞추어 바닥에서 엎드려 있던 혜성이 살짝 고개를 들고 시선을 확인한다. 그 순간 더 확실해진다. 예전처럼, 그 여름처럼 싱글하게 웃어주던 독일의 청년은 아예 사라졌노라고…… 마치 무엇에 대해 아주 아파하는 사람처럼 표정이 일그러지면서도 웃음 만은 건네는 저 가여운 행동의 정체는 무엇일까. 잠깐 침묵이 지난 뒤, 혜성은 늘 그렇듯이 엎드린 채 뺨을 카펫에 붙였다. 사르르 상아색 머리칼이 카펫에 흩어진다. 조명이 뜨겁다. 겨울은 전혀 춥지 않은 상태에서, 오직 세상을 쥐어짜는 매칼한 바람 소리만이 휘이이 들려 올 뿐이다. “한스와 돌아다니느라 피곤했지….?” “…조금.” 바닥에 펼쳐놓은 오선지에 낙서를 하며 혜성이 하품을 했다. 머리맡의 의자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서 아이를 내려다보는 히스의 풍성한 시선은 한없이 뜨겁다. 그의 시선은 혹자가 바라보기를, 아이의 뺨을 흠뻑 취하고 있는 낡은 카펫을 질투하는 것으로 오해해도 좋을 슬픔의 표상이었다. “너를 보는 지금… 겨울이지만 전혀 춥지 않은 지금… 떠오르는 게 있어….” “하아아아…흐….” “많이 피곤해?” “…쪼끔.” “하하….” “…아주 쪼금.” 길게 하품하는 혜성의 입술을 뚫어지게 내려보던 히스가 녹색 눈동자를 떨리운다. 바람도 허락 치 않은 지역에서, 동그란 조명 가운데의 둘은 서로에게 익숙한 자세로 엉뚱한 것을 묻고 답하고를 했다. 공부에 영 관심이 없는 오늘의 수페리우스를 지그시 내려보던 히스가, 먼 과거를 떠올리는 입술을 읊는다. “뭐가 떠오르냐면… 어떤 곡이지.” “…….” “그 곡은 나에게 충격이었지… 도나우 강의 잔물결….” “…계속 해 줘 히스.” 카펫에 볼을 누른 채로 칭얼대는 아이처럼 혜성이 조른다. 히스는 웃음이 나왔지만 참았다. 가벼운 공기가 세포를 콕 콕 누르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기분이 나른해 졌지만 졸립지는 않다. 한 달 전부터 인정하고, 최근 받아들였던 감정이 있기 때문일까. 팔을 뻗어 혜성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던 손이 말한다. “다섯 살이었나… 처음 피아노를 배울 때, 나는 정확한 음정을 확실하게 전달하는 재능 아로 정평이 났었지.” “그런 거 말고….” 자랑 하는 거 말고… 라는 말을 감추는 것이 뻔한 혜성의 소리에 히스가 엷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아색 머리카락을 오고 가는 그의 백지장처럼 하얀 손가락 마디마디가 깊은 슬픔에 패여 있다. 그것을 전혀 알 리 없는 수페리우스는 또 한 번 하품을 했다. “…어느 날인가… 도나우 강의 잔물결을 들었어. 열 살 남짓한 형뻘인 놈이 그걸 옆 칸 레슨 실에서 연주했었는데….” “…….” “심장이 말도 못하게 뛰는 거야. 음정, 박자, 악센트 따위 다 필요 없이 순수하게 은율이 주는 광폭함, 웃음, 열정, 화려함… 그 때 나는 생각했지. 세상에서 가장 굉장한 곡 일 거라고.” “…따라라라라라 따랑 딴딴 딴딴 따라라라….” “딴따랑 따라라 라라라랑… 그렇지.” “히스. 나도 그 곡을 좋아해. 가끔 화가 날 때 쉽게 연주하기에 아주 그럴싸했거든.” “네가 봐도 간단한 구성이지?” “그래도 간단한 구성이라서 더 난해 해 보이기도 하던데…….” “…….” 도나우 강의 잔물결의 음정을 얼추 흉내 내는 작은 입술이 조명 아래 반짝인다. 히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 혜성의 머리칼에 거닐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갈 무렵, 그의 말문이 다시 열렸다. 살며시 추워지려는 기색이 히스의 뺨부터 오돌 도돌 한 소름을 돋게 했다. 아주 서늘한 감정이 그의 께로 파고들었다. 이 감정은 평생 느끼지 못 한 순결한 것이어서, 히스는 조절하려고 노력하려는 현재에도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여섯 살 때까지 그 곡은 가장 멋있는 곡으로 기억 됐었는데….” “우아하고?” “그렇지.” “쿡쿡쿡. …근데?” “막상 때가 되서 배우니까… 너무 허무한거야.” “…….” “이렇게 쉽고, 간단하기만 한 구성이었다니! 나는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천국과 지옥을 오고 갔는데!” “!” 혜성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동시에 언제 그랬냐는 듯, 히스의 손가락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천국과 지옥! 바로 그의 입에서 파생되었던 전율이 아닌가! 아이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작년인지 제작 년 인지 시간개념도 모호해진 현재, 아마데우스 신입생 연주회 날 자신을 학생 감옥에까지 밀어부쳤 던 히스의 잔인한 혹평을 기억하고 있다! 히스 라는 사람이 그저 악마로 보였던 수페리우스의 시절을 잊을 리가 없다. 『 느낀 그대로 읊어라 히스. 』 『 이 아이가 당신의 수페리우스? 』 『 그렇다면? 』 『 수페리우스는 어리석게도, 청중의 얼을 빠지게 했습니다, 테레사. 아이는 마단조로 내려가는 순간부터 모든 음을 무시했거든요. 』 『 그래서? 』 『 레퀴엠 이었습니다. 』 참말이지 그 때 무대 위에서 잔인한 혹평을 건넸던 히스는 테레사 못지않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아름다운 만큼 냉철했고, 늘씬한 몸매에 걸친 독일의 정복은 그를 훨씬 돋보이고 신비롭게 해 주었었다. 그 당시 정혁의 뒤에서 시체처럼 굳었던 몸이라지만 혜성은 그 날, 신입생 연주회에서 처음 봤던 히스의 정갈하고도 냉혹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현재 마저도 그 때 처럼 두렵기만 하다. 지금 자신의 머리맡에 있는 인물과 동일인 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 …동정을 구하는 거지같은 표정을 거두어라. 우리는 또 보게 될 테니. 아름다운 수페리우스. 하하하하- 』 『 레퀴엠… 레… 그게 무슨 뜻이야!!! 』 『 자. 한국의 수페리우스. 다시 대답 해 봐라. 네가 생각하는 레퀴엠이 무엇이지? 』 무서웠고, 두려워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던 지하 감옥에서조차 히스는 동정심을 모르는 하데스처럼 아름답게 웃고 독설을 내뱉기만 했었다. 그의 조각 같은 외형은 그의 칼 같은 언어를 돋보이게만 할 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었다. 그래, 그 때를 똑똑히 기억하는 현재, 혜성은 머리맡에서 도돌이표를 붙이는 그가 믿기지 않았다. 혜성의 불같은 시선을 알고도 남는다는 듯이 유한 태도로 히스는 그러나 분명하게 다음 말을 잇는다. “그 때부터 쭉 거장의 음악을 감상할 기회는 많아졌지만, 어떤 것도 도나우 강의 잔물결 때처럼 숨 쉬지 못하게 한 건 없었어. 참 이상하지? 허무할 정도의 한탄 역시 주었었는데… 감동과 실망이 공존해서 멍청하게 심장은 뛰어대고…….” “…….” 아이의 심장이 말도 못 하게 철퍽철퍽 불의 지옥과 천국의 입구를 오고가며 뛸 때, 박자를 잘 맞추어 히스가 또렷한 말씨를 내뱉었다. “그게 레퀴엠이다.” “!” 오 하느님! 아이는 후다닥 스쳐간 불의 지옥이 아직도 눈시울을 뜨겁게 태우는 것을 느꼈다. 척추가 마비된 환자처럼 엎드린 자세에서 순간 손가락도 까딱 할 수 없었다. 그 언제가 되면 레퀴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겠지, 하지만 알 것도 같다- 라며 혼자 곱씹었던 학생 감옥에서의 느낌과는 확연히 다른 현재가 있다. 히스는 마치 그 때의 낯선 사람처럼 변한 표정으로 또박또박 자신의 사상을 읊어주었다. 음악가라면 모두 알고 있는 히스의 평, 레퀴엠이 혜성의 앞에서 다시 태어났다. “기쁨과 절망. 천국과 지옥이 동시에 찾아와서 움직일 수 없는 상태. 좌중은 죽은 이로 변하지. 경탄을 거듭하는 아름다운 어머니의 음성과 같은 오페라가 나와도, 정도 이상의 것이 되면 사람들은 ‘생각‘이라는 걸 먼저 하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숨을 참게 된다. 자기 생각과 맞아 떨어지는 시점이 와야 갈채를 퍼붓지. 미리 알고 있고 예측했던 악상과 전혀 다른 것이 극과 극으로 펼쳐지면 좌중은 자기도 모르게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거든.” “…….” “레퀴엠은 지독한 혹평과 찬란한 호평의 결합체다. 뭐… 일단 말로 설명하자면 그렇다고 볼 수 있지.” “…….” “사람들은 혹평을 아주 두려워하지. 최선을 다 한 스스로의 연주에 믿음이 있기 때문이야. 뭐… 대다수 독일 놈들은 그래도 레퀴엠을 평생에 한 번은 듣고 싶노라며 나를 데려가지 못 해 안달이긴 하지만…….” 한동안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둘은, 겨울의 눈 보다 시린 시선을 교차하기만 했다. 거대한 음표 투 성이인 음악이 한 차례 지난 것처럼 싸아해 진 다락방은 동그란 조명을 제외하면 온통 겨울이었다. 발가벗은 계절에 상처를 입히는 못된 계절처럼 하얗게 쳐다보던 끝에, 수페리우스가 천천히 고개를 내리며 속삭였다. “히스… 하지만 여긴 독일이 아닌데… 넌 독일에서 알려 주겠다며…….” “좀 더 정확한 것은 독일에서 체험하면 다 알게 돼.” “……?” “레퀴엠 천지거든. 뭐… 그것도 영국 놈들에겐 눈엣 가시지만.” “왜?” 혜성이 또 고개를 올려 바닥에 엎드린 몸으로 히스를 올려본다. 꽥 소리치는 것 또한 귀엽다는 듯이 히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들은 정석을 따라. 테레사도 그래서 영국 아마데우스는 좋아하지 않지. 런던 쪽도 우리들은 달가워하지 않고. 뭐… 천하의 음악도시 오스트리아의 빈을 때려눕힌 게 현재 아마데우스 재단들이니… 그 속에서 분란이 있는 것도 당연한 거니까… 어떤 단체든지 의견은 대립되기 마련이거든.” “…잘 …모르겠다.” “나중에 다 알게 되어 있어.” “나중에도 잘 모를 것 같다.” “받아쓰기나 하자.” “으…….” 다른 쪽으로 대화를 돌리기 위해 여러 가지를 골똘히 고민하는 혜성의 심각한 표정을 힐끗 곁눈질로 확인하는 히스의 입가에 미소가 만연하다. 그는 함께 지내는 혜성이 무엇을 좋아하고, 또 무엇을 싫어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일까. 히스는 다음 말을 건넴으로서 방금 전까지 끙끙대던 혜성의 표정을 해방시켜 주었다. “그럼 뭐… 뜻 대답하기 할까?” “그래!” 혜성이 방긋 웃는 것을 누구보다 기다린 것은 바로 히스였다. 아이의 웃는 모습은 봐도 봐도 기체처럼 날아가기만 했다. 그것은 마법이었다. 보고 싶지만, 보는 순간 감탄을 터뜨리기도 전에 날아가는 무엇, 그래서 마법이었다. 왜 마법인 지, 히스는 그 이유를 얼마 전부터 똑똑히 깨달았음은 물론이다. 독일어 단어를 말하면, 혜성이 한국어로 뜻을 대답한다. 물론 이것은 썩 좋은 방법이 아니었지만 혜성이 하고자 하니 히스는 가끔 이런 식으로 휴식 시간을 갖았다. 이 때 만큼은 한 마디씩 대답 할 때 마다 지난 가을의 코스모스처럼 혜성이 꼭 하얗게 웃어 주었기 때문이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아름다운 수페리우스의 미소를 매 순간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히스는 단어 대답하기를 잊지 않고 실천했다. 히스의 뇌리에 다가올 봄의 꽃이 만발한다. 동그란 아이의 머리통을 내려보던 그의 시선이 숨을 참았던 것을 터뜨리듯 두통처럼 알싸한 투를 터뜨렸다. 펑- 날아가는 공기 중의 언어에 섞인 통증마저 겨울은 아름답게 얼린다. “der Blume.” “블룸… 블루메… 꽃.” 이번 주 동안 암기 할 단어들은 몽땅 습득했는지 자신 있게 대답하는 수페리우스가 바닥을 쳐다 보며 싱그럽게 미소 지었다. 아이의 머리통을 내려보는 히스에게도 그 웃음이 보였다. 신기한 노릇이다. “Feuer…….” “포…포이어… 아, 파이어? 불!” “쿡… Wasser.” “물?” “예스. 그럼…Licht “ “리히트. 라이트! 빛!” 이 즈음 되서, 쓰면서 대답해 봐 수페리우스- 라고 히스가 으름장을 놓으면 분명히 미간을 좁힐 것이다. 잠시 즐거운 상상을 마친 히스는 차라리 지금처럼 계속 단어만 중얼거리기를 택했다. 두 사람을 흠뻑 적셔주는 다락방의 동그란 조명 곳곳에 히스의 얕은 신음과, 혜성의 물방울처럼 투명한 웃음이 섞였다. 아름답게 염색하는 섬유의 얇은 실처럼 시각을 자극하는 그것은, 현재 두 사람 만이 느낄 수 있는 저릿한 평화였다. “Dunkelheit “ “하이트라… 어둠.” “Geschichte.” “…역사.” “Schiksal….” “…운명.” 스무 개가 넘는 단어가 오고 가는 현재, 둘은 마냥 즐거웠다. 혜성은 최근 들어 더더욱 자상해진 히스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가 또 차갑게 변하면 어떡하지? 하던 걱정은 이제 더 이상 생기지 않았다. 히스가 왜 차가웠는지 궁금하지도 않다. 사람마다 개개인이 비밀은 있기 마련이고, 히스라고 해서 우울증에 걸리지 말란 법은 없기 때문이다. “…….” “…….” 이 쪽 저 쪽 카펫에 뺨을 부비며 대답하고 놀던 혜성이 잠시 말을 끊어버린 히스가 궁금했는지 번쩍 고개를 들었다가 조용히 머리를 숙였다. 다음 단어를 신중하게 생각하는 건지 히스의 표정이 아주 심각했기 때문이다. “…….” 왜 말을 안 하지? 더 이상 독일단어 생각나는 게 없나? 이상하네… 독일인이면서 왜 생각나는 게 없지… 지평선 너머의 아찔한 자태로 지는 태양처럼 온통 뜨겁기만 한 히스의 녹색 눈동자를 마주치기 어려웠던 혜성이,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입술을 움찔거릴 때였다. 겨울의 선물인 함박눈이 동그란 조명이 전부인 다락방 밖에 차곡히 쌓일 그 때, 추운 계절을 울릴 만치 뜨겁게 젖은 언어가 히스의 입을 타고 흘렀다. “이히…….” “…….” 머리를 굴려가며 최근 외운 단어들을 퍼뜩 연상하기 시작한 혜성이 엎드린 채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머리 위의 히스가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지켜보는 지도 모른 채, 아이는 이히…라고 시작된 허밍처럼 부서질 것 같은 그의 음성에 열중한다. “리베… 디히….” “음…….” 바야흐로 줄줄이 잘 대답하던 공부 시간이 막히는 때가 닥쳤다. 틀림없이 낯선 단어는 아닌데, 낯설지 않다는 것은 공부해 봤다는 흔적 아닌가? 혜성은 최선을 다 해서 노트에 적었던 단어들을 떠올려 봤지만 소용없었다. 방금 히스가 머리 위에서 해 준 소리는 낯선 단어가 아니지만 노트에 적혀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판단에 확신이 선 이유란, 아이가 최근 단어를 샅샅이 외운 것에 자신 있어서이기도 했다. “들어본 말인데….” “…….” “많이 들어본 것 같은 익숙함인데… 네가 최근 알려준 것에 있었니? 뭐였지? 잠깐 기억이 안 나는 것 같은데….” “…….” “다시 말해 줘.” 아예 바닥에 이마를 찧어가며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수페리우스가 그래도 히스가 알려 줬던 것 중의 하나겠지- 싶어서 심각한 투를 내뱉는다. 그 말을 기다린 것처럼, 겨울을 완전히 녹이는 허밍은 아까보다 가슴 저린 어절로 불쑥 나타났다. 어디선가 칼바람이 찢어지며 내지르는 비명 소리가 처참하게 들려온다. “이히 리베….” “!”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불현듯 물렁하고 뜨거운 것이 혜성의 입술을 덮쳤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돌연 바닥에 엎어져 있는 혜성의 어깨를 움켜 쥔 히스가 아이를 안아 올리듯이, 자신이 앉아 있는 높이에 맞추더니, 호수 같은 두 눈을 닫고, 강하게 입을 맞춘 것이다! ‘디히…….’ “!” 글자의 마침표는 당황한 나머지 입을 벌린 혜성의 혀가 히스에게 얽히는 순간 동시에 내뱉어진다. 엉거주춤 히스의 손아귀에 잡힌 혜성의 입 밖으로 얕은 신음 소리마저 터지지 않았다. 펑- 내면은 발작을 일으켰고, 놀란 가슴은 빠르게 빠르게 지구를 정복하려는 무법자의 다리처럼 가라앉힘 없이 뛰어댄다. 세상으로부터 방랑자 둘을 지켜주려는지, 자상한 함박눈은 좁은 다락방의 창문을 모두 가려준다. 그래서일까. 히스의 힘에 잡혀 몸을 카펫 위에 앉히는 때, 혜성의 손에 쥐어져 있던 펜이, 힘없이 마루 바닥에 굴러 간다……. 강렬하고 뜨거운 겨울이 태어날 때, 두 방랑자의 머리 속에 도나우 강의 잔물결의 강렬한 첫 주제가 쉬지 않고 반복되었다고 한다. 먼 훗날 생각하기를, 두 방랑자에게 있어서 지금처럼 여유롭고 행복한 시절은 또 없었다고 추억 할 지도 모를 그 때를 위해……. Ich liebe 이히 리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술이 겹쳐졌다. dich 디히… 마침표는 서로의 얽혀있는 혀끝에서 누군가가 말 하는 것으로 찍혔다. Ich liebe dich……. 이히 리베 디히…….(그대를 사랑해….) 세상에서 가장 슬프도록 아름다운 말이 있다면, 이히 리베 디히… wgreene@naver.com 독일어는 하나도 모르는 주제에 이히 리베 디히.. 라는 문장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래서 히스는 독일인으로 만들 수 밖에 없었고.. 히스가 독일인이기 때문에 독일에는 아마데우스가 있었어야 했음을.. 이제 밝힙니다...^^(무지한 자의 항변; 일단 저지르고 보는거야~ ..퍽;) 쥬뗌므가 더 좋았다면 저는 프랑스에 아마데우스를 지었을 테니까요. 봉솰? 말랑솰? 뮤슈? 데레솰라무?(테레사는 라면좋아해?) 끼요마마슈?(엄마닭 있어?) 에뤽슈르렉?(에릭은 슈렉) 뫄드뮌뤵쉥(마드모아젤 셩) 뭐 이런식의 오뫄라이슈솨솽스러운 문장들이 있을 뻔 했던... 아하하하하!(적어놓고 웃기다고 혼자 웃는다...-┌ ....흙....) 흠.. 어쨌든 이 그대를 사랑해.. 라는 이히 리베 디히가 있기 위해서 그가 필요했거든요... 어느덧 10편 입니다... 팬픽을 아예 버리려던 제가 적고 있는 현재가 감사하고 신기합니다. 오늘의 10편은 1 악장 때부터 너무너무 적고 싶었습니다. 이 문장을 적게 되어서, 아마데우스 적는게 너무 재미있어서 행복합니다. 이히 리베 디히.. 이히 리베 디히.. 천사씨들. 이히 리베 디히..... * 저 그런데 요새 좀 무리해서 적고 싶어서 올리긴 했는데; 감기가 완전히 다 나을때까진 진짜 안될듯; 약간의 잠수기를 갖겠습니다. 이히 리베 디히;(이히리베디히라고 하면 다야?; ...라고 하지 말고 에이... 에뤽슈르렉? ^^) wgreene 화이트그린. 9-2편, 10편 올림. + 악필소녀님이 안부게시판에 아마데우스를 생각하시며 주셨던 사진입니다. ^_~ 덧글 14개 엮인글 쓰기 /data20/2006/4/8/169/dkakepdntm_1-wgreene.jpg@nhn@40316@nhn@1@nhn@400@nhn@231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10편 /data20/2006/4/8/169/dkakepdntm_1-wgreene.jpg@nhn@40316@nhn@1@nhn@400@nhn@231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10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11편(섬세한 날의 시작) ▼ 다음글 - 2악장 9-2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11편(섬세한 날의 시작)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4/13 18:16 http://blog.naver.com/wgreene/110003371852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413 11편 업데) Amadeus 음악 : Love Theme (From The Film Cinema Paradiso)(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Love Theme (From The F.. 무대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 하다가 죽는 게 내 소원이었어. 그런데 너와 함께 하며 소원이 바뀌었지. 나는, 너랑 살다가 죽는 게 소원이다… 수페리우스. -다음 12편 히스의 장면 中- 2악장 11편 싱싱한 여름날 시작했던 이태원의 생활에 있어, 히스가 거의 마지막에 사귀었던 애인 자크가 룸펜에 나타난 것은 크리스마스이브 날 오전 이었다. “맙소사!” “저런!” 눈을 비비며 룸펜 내부를 청소하기 위해 나타난 무리들은 저마다의 감탄사를 내뱉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자기 뺨이 스치는 것처럼 엄청난 통증이 지나는 느낌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누군가는 찰싹! 하고 두 번이나 히스의 뺨이 돌아가는 모습을 멀리서 보던 도중 자기 뺨을 쓰윽 문지르기까지 했다.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히스를 향해 사나운 욕을 독일어와 영어를 섞어 지껄이던 자크는 한 번 더 히스의 뺨을 세게 치고 나가버렸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기엔 어울리지 않는 출현이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었다. 구경꾼을 더 놀라게 한 것은 옛 애인인 자크가 나감과 동시에 룸펜의 식구들에게 달려와서 허겁지겁 설득하는 히스의 애원 때문이었다. 뺨이 붉어진 그가, 아직도 졸린 눈을 비비며 다락방 쪽 계단을 의식하는지 몹시 초조해 한다. “알았지? 자크가 온 건 혜성이한테 말 하지 마!” “어……? 어…….” 바로 그 때, 혜성이 하품을 하며 계단에서 내려왔다. 불같이 돌아보는 히스의 시선이 온 몸에 꽂히자, 양 팔을 쭉 기지개를 켜며 입을 벌리던 혜성이 흠칫 놀라서 다시 계단 위로 올라간다. 스무 명 가량의 룸펜 식구들이 히스와 함께 몰려있던 터라, 혜성의 무방비한 모습을 나란히 목격했던 탓이었다. “으윽!” “?” 다락방으로 다시 올라가는 혜성을 쫒아서 금방 당도한 히스가 휙휙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평화 가득한 미소를 안면에 그린다. 너그러운 겨울의 햇살이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이하여 장신구 위에 이슬처럼 맺혀 있었다. 그리고,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터뜨렸던 아까의 수페리우스는 침대 위에 올라가서 이불을 머리 꼭대기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히스의 가슴이 말도 못하게 행복 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뛰기 시작한다. 두 사람 사이에 '이히 리베 디히'라는 말이 태어난 지 채 일주일이 지나지 않았다. “괜찮아. 하품 한 건 나밖에 안 봤어,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 “정말이야, 수페리우스.” “……거짓말!” 그러나 현재의 혜성에게 중요한 건, 며칠 전 히스가 키스를 하며 사랑한다는 말을 읊었다- 이것이 아니다. 아이의 양 볼이 이불 속에서 붉어진 채 꽥 소리친다. 거짓말! 그럴 리가 없잖아! 하품을 하며 내려가든, 기지개를 켜든, 그 좁은 다락방 쪽 계단은 사람의 시선에서 먼 곳이었는데……. “거짓말이 아니야, 수페리우스. 룸펜 녀석들은 계단에 먼지가 많이 쌓였다면서 먼지만 쳐다봤어.” “아니야!” “하하하하…. 진짜야. 네가 그늘 아래 하품하는 건 나밖에 안 봤어.” “…기지개도 켰었어….” “그랬어?” “머리카락도 엉켜 있었고…….” “오, …그건 나도 못 봤는데?” “…거짓말!” 머리는 까치집이 된 상태에서 멍청이처럼 하품 하는 모습을 룸펜의 모든 식구들이 동시에 쳐다 본 방금 전이 머리 속에서 뱅글뱅글 거린다. 엉뚱한 일로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혜성을 잘 아는 히스가 동그랗게 이불을 몸에 말고 웅크린 아이를 꼬옥 끌어안았다. 어떻게 해도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 그렇지! 독일 가곡 제목이었지? 사랑해… 이 뜻 맞지? 』 『 맞긴 한데……. 』 지난번의 키스 이후, 연필 까지 떨어뜨렸던 혜성은 히스의 입술이 떨어지기 무섭게 저런 대답부터 했다. 히스는 맹세 할 수 있다. 자신이 사랑의 어절을 속삭이며 상대를 유혹할 때 저런 식으로 대답했던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음을 천주께 달달 맹세 할 자신이 있었다. 그 정도로 수페리우스가 자신의 사랑 고백에 반응 한 것은 한 참 후에야 행해졌으니 말이다. 혜성은 히스의 고백에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한 참 생각한 뒤, 히스의 열정이 약간은 사그라 들 때를 기다려서 조용히 언급할 계획인가보다. 그러나 히스는 수페리우스가 대답 없이 애를 태울수록 그가 좋아서 머리가 터져 나갈 것 만 같았다. 테레사를 통해서 그를 처음 만났던 레퀴엠이 이제 히스에게는 '운명'으로 자리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수페리우스와의 만남에서부터 현재 까지는 운명 이었다. 지난 모든 사랑의 이름표를 달았던 그의 애인들은 마치 혜성을 만나기 위한 전야제처럼 여겨졌다. 외모 만으로 시선을 자극했던 이들은 늘 히스의 사랑을 옴팡 차지했었지만, 수페리우스는 그 반대이지 않던가. 서서히 밝혀지는 그의 아름다움에 도취될 때, 이미 그의 내면과 영혼으로부터 받았던 이끌림은 히스의 모든 것을 사로잡아 버렸었다. 이제 히스는 수페리우스가 백 번을 거절하고 잔인한 말을 해도 귀가 멀고 영혼이 사라져서 들리지 않고 없어질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자신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사람에게 이끌린 적이 없었던 탓이다. “갑갑해…….” “얼굴을 보여 줘…….” “안 돼.” “왜…?” 혜성이 숨어있는 이불을 송두리째 꽉 끌어안은 히스가 아이처럼 조르자, 낮고 분명한 투로 대답하는 수페리우스는 여전히 귀엽기만 하다. 마침내 히스가 혜성의 머리 쪽을 가린 이불을 치우기 위해 손을 뻗자 아이는 그것을 또 알았는지 냉큼 힘을 주어 머리맡을 꼭 꼭 가려버린다. “…또 뽀뽀 할 거잖아.” “…….” “오늘은 무슨 꽃 사 왔어?” “민들레.” “…….” “여기에 놓고 갈 테니까 천천히 나와.” “…….” 혜성이 덮고 있는 이불에 입술을 누른 뒤, 히스는 자상하게 웃어주었다. 그리고 조용히 다락방 밖으로 나간다. 혜성은 그의 발소리가 흐려지는 것을 똑똑히 확인한 다음에야 뽈록 고개를 이불 밖으로 내밀었다. “…….” 침대 위에는 손바닥처럼 작은 포장이 된 민들레가 납작한 노란 머리칼을 반짝이고 있었다. 혜성에게 고백한 다음부터, 늘 아이를 따라다니고, 오전 나절이면 비싸지는 않지만 작은 꽃다발을 성의껏 준비해 오는 히스의 행동이 오늘까지 이어졌다. 그는 참말로 로맨틱했다. 낭만이 몸에 배어있는 멋쟁이 독일 청년이었다. 그냥 있어주어도 아름다운 사람이, 늘 따라다니고, 지켜주려고 하며, 혜성이 싫어하면 키스를 양보해 준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오전이면 제 손으로 꽃을 찾아서 꺾어 오기까지 한다. 물론 화원에 가서 유들 한 화술을 활용한 뒤 재주껏 얻어온 작은 꽃들 이지만, 신문지에 감싸인 몇 송이 안 되는 꽃다발은 혜성에게 있어서 가장 성의 있고 화려한 것으로 보여 지기 마련이다. 비싼 가격표가 있다고 해서 전부가 아니다. 이처럼 정성과 마음이 매일매일 소박하게 이뤄지면 사람의 마음은 흔들리기 마련일 테니……. 방 안에 있는 나무통과 구멍이 뚫려 있는 것들을 죄다 모아서 다락방 창가 바닥에 진열 해 봤지만, 히스가 지금까지처럼 매일 매일 꽃을 선물하면 다락방의 모든 구석이 모자라게 될 날이 머지않았으리라. 노란 민들레를 조용히 손에 쥐며 혜성이 눈을 깜빡였다. 파란 머리칼을 휘날리며, 추운 겨울의 새벽, 이태원을 누볐을 히스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민들레를 쥐고 1분이나 앉았을까. 투다당- 엄청난 발소리를 내며 히스가 다시 다락방에 뛰어 올라왔다. “왜?” “빼 먹은 말이 있어서.” “그렇다고 국자를 들고 와?” “응?” 굉장히 중요한 말을 빠뜨렸었는지 주방에서 요리하던 차림새로 스프가 뚝 뚝 떨어지는 국자를 쥐고 올라 온 히스가, 이마를 차며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그는 국자를 허공에 멀찍이 떨어뜨린 채로 자신을 멍청하게 올려보는 수페리우스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온화한 숨결이 채 사라지기 전에 이번에는 잊지 않겠노라 다짐했는지 부드럽게 속삭여 준다. “메리 크리스마스…… 수페리우스.” “!” 아마데우스에서는 전야제로 한 참 바쁠 오늘, 이태원의 룸펜 에서도 크리스마스의 들뜬 분위기는 찾아온 것이다! 히스의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이브의 오전 나절 있었던 자크 사건은 혜성의 귀에도 전해졌다. 그랬느냐- 따위의 대답 한 번으로 일관하는 혜성의 심드렁한 태도에 덜컥 놀란 히스가 귀찮아하는 아이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건 오해라고 자신은 모든 애인과 깨끗하게 끝났다고 변명을 늘어놓는 시간이 낮 열두시 종소리가 들릴 때까지 이어졌다. 오후의 햇살이 밀려와서도 멈추지 않는 히스의 '오해 하지 마' 언변에 완전히 질려버린 혜성이, 그가 화장실로 간 사이에 훌쩍 룸펜 밖으로 달음질했다. 혜성이 사라지는 모양을 눈으로 쫒던 정하와 룸펜 식구들은 둘의 모습에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룸펜의 활력소가 되고 있었다. 저 하늘이 선물하는 화려한 눈 시위 처럼 계절보다 아름답게 닥친 두 사람의 인연은 이태원을 서서히 바꿔놓고 있다. 히스를 간신히 물리친 뒤, 아이는 빠른 걸음으로 또 들뜬 마음을 품에 껴안은 채 눈길을 밟았다. 발아래 찔리는 눈의 감각은 아마데우스의 땅에서 느꼈던 풍요로움과 매우 닮아있었다. 그 작은 발견은 크리스마스라는 성스러운 날을 맞이하여 아이를 아주 행복하게 해 주었고, 이태원에 온 이래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던 성당 역시 부드러운 눈으로 쳐다보게 했다. 마음속에 펼쳐진 전능하신 그 분의 선물은 속속들이 발작을 멈추지 않는다. 혜성의 걸음이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레코드점 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이태원의 거리 곳곳에 향기로운 음악을 퍼뜨리는 이 지점을, 혜성은 또 가장 좋아하기도 했다. 이 곳 덕분에 이태원에 와서 솔베이지를 나날이 퍼뜨려서일까. 그는 얇게 차려입은 옷차림에 추위를 물씬 느꼈는지 후다닥 좁은 레코드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오- 룸펜!” “메리 크리스마스!” “아… 오늘이 그 날인가?” “네! 그러니까 캐 롤을 틀어야지요!” “그래야지.” 날짜 개념이 모호한 레코드점 사장을 염려해서 달려 온 혜성이 안도의 한 숨을 내쉰다. 서서히 울려 퍼지는 정다운 크리스마스 캐 롤이 발바닥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타고 올라올 때, 혜성은 흥겨워서 콧노래로 따라 불렀다. 뜨거운 계절이 펼쳐진다. 여름보다 뜨겁게 내면에 출렁이는 뜨거운 바다의 계절, 그것은 겨울이었다. 이제 혜성은 왜 이 사납고 추운 계절이 폭풍을 잠재우리만치 뜨거울 수밖에 없는지 알 것도 같았다. 아주 잠깐 동안 전과 달라진 히스의 시선이 전신을 훑고 지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자신의 곳곳에 파고들어오는 그의 변화된 모습에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흔한 장난 따위도 없이 슬픔을 담은 눈으로, 연인보다 다정하게 나긋나긋해 진 히스는 가끔 힘든 날이면 기대고 싶을 정도로 혜성의 안에서 바뀌었기 때문일까. 은은한 캐 롤이 사방을 꿰어 찰 때, 유달리 각인되는 히스의 모양이 아이를 뜨겁게 달군다. 진즉부터 안면을 터 두었던 레코드점의 주인이 혜성에게 따뜻한 코코아를 대접해 준다. 그들은 웃으면서 이것저것을 하릴없이 떠들었다. 곧 있으면 함박눈이 쏟아질 것 같은 하늘 역시 어제와 다른 빛이 아니던가. 코코아를 반쯤 들이키던 혜성이, 최근 다정해진 히스라는 늪에 생각을 또 빠뜨릴 때 그의 눈동자가 천천히 흐려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금새 원상복귀 되어 레코드를 닦아내던 주인을 붙들고 방금 생각난 것을 묻는다. “히스에 대해서 잘 아시죠?” “엥?” 이태원에 온 첫 날, 히스의 아마데우스 정복을 알아보고 따뜻한 차를 건네었던 그가 퍼뜩 떠오른 나머지 혜성이 물었다. 그는 잠시 놀란 기색을 보이더니 천천히 수긍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가롭게 마주앉아 사방에 늘어져 있는 레코드판을 구경하던 둘의 도마에 히스가 올라온다. “글쎄… 그 청년에 대한 가십도 많이 봤지. 독일 쪽이라서 많지는 않지만… 엄청난 재원이더군. 세계 곳곳을 누비는 재능아가 여기에 있는 게 놀랄 정도로.” “오와…….” 혜성이 즉각 보이는 반응에 덩달아 신이 난 중년의 레코드점 주인이 담배를 태우던 것을 쉬이 꺼뜨리고 자신이 관심 있어 하는 분야에 대해 낱낱이 떠든다. 그는 아마데우스와 음악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평생토록 쏟아 붙는 유형임에 틀림없었다. 때문에, 자신과 이런 대화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 것을 매우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다. 혜성은 그의 기쁨을 속속들이 느낄 수 있었다. 대화 하는 족족 빛이 감도는 사내의 눈동자가 얼마나 행복에 젖어 있는지,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혜성 역시 스스로가 빛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제 작년인가… 보스턴 아마데우스 주최 야외 음악회에서 히스가 지휘를 맡았었지. 그걸 왜 기억하냐면,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각 일간지는 그날 공연을 1면에 대서특필했었거든. 가십 이상 으로 인쇄매체를 휘어잡았다는 소리야!” “대단하네요?” “대단하지. 암. 보스턴 아마데우스는 사람들의 관심 밖인데도 불구하고 그 날 공연에서 단체 기립박수를 받았을 정도면 그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거지.” “믿어지지가 않는데…….” “혹자는 그의 음악 영향도가 상업주의 이상이 안 된다고 비판부터 하려고 하는데, 어림없는 소리지. 상업주의란 즉, 가장 대중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다는 증거잖아. 그거야말로 힘 이지.” “그런데…….” “?” 문득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가는 또 다른 것 때문에, 혜성은 약간 미안한 기색으로 엉뚱한 질문을 꺼낸다. 잠깐 텀을 주는 혜성의 박자에 맞추어 레코드 점 주인은 괜찮다는 대답 대신에 따뜻한 코코아를 한 잔 더 따라 주었다. “…혹시 그의 성격에 대한 면도 가십에 있을 까요?” 혜성의 난처해하는 질문과는 달리, 화색이 감도는 중년의 사내는 기쁘게 소리치며 대답했다. “있지! 그는 소녀들이 열광하는 스타잖아. 아마 여기 이태원에 처박혀 있는 걸 알면 그의 팬클럽들이 난리 날 껄? 모델처럼 잘 빠지고 잘 생겼어.” “그럼… 그에게도 은어의 손놀림과 같은 수식어가 있을까요?” “황제.” “?” “황제, 혹은 히틀러. 단원 선발은 물론 독주자 선정 권 까지 장악한다더군? 그는 지휘 전공이잖아. 어디…….” 아예 자리를 털고 일어 선 사내는, 입구 쪽의 유리 진열대 밑을 쉭 쉭 뒤지기 시작했다. 혜성은 그를 뚫어지게 지켜보면서도, 방금 전까지 들었던 히스가 자신이 알고 있는 히스와 같은 인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기자니 자신은 그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점이 없는 탓이었다. 테레사처럼 같은 학교 울타리에서 지내보기는커녕, 겨우 알아낸 것이라고는 그의 호평이자 혹평의 산물인 레퀴엠 밖에 없지 않던가! 혜성이 혀를 쯧쯧 차며 자신의 낮은 지식정보 수준에 고개를 저을 때를 잘 맞추어 사내가 한 무더기의 파일을 안고 돌아왔다. 마주 앉아있는 사이에 낮은 박스를 엎어놓고, 임시방편으로 탁자를 만든 뒤 둘은 정신없이 '아마데우스 가십'만 나라 별로 모아져 있는 파일을 뒤지기 시작했다. 히스와 관련된 가십은 파일을 펼치고 세 장이 지나치기도 전에 번쩍 나타났다. 사내가 코코아를 홀짝이다 말고 반갑게 손가락을 가리켰다. “거기 밑줄 쳐 놨지! 읽어 봐!” “…네…에…….” 하지만 혜성이 놀란 것은 그의 가십이 줄줄이 적혀 있는 기사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현재 혜성은, 글자의 위에 있는 사진 속에 집중되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믿지 않았던 히스는 현재의 인물임을 똑똑히 증명하듯이, 파일 속의 사진은 비싼 장신구를 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화려함을 뽐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독일 아마데우스 예식 복을 입고, 백 명 가량의 오케스트라 단원을 지휘하는 히스의 칼 같은 표정이 사진에 나타나 있었다. 오싹- 소름이 끼칠 때, 혜성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한 냉철한 이가 독사처럼 위협하듯이 지휘봉을 허공에 찌르고 있다. 가슴이 또 엇박자로 뛰놀기 시작한다. 혜성은 서둘러 사진에서 한 참은 떨어져 있는 밑줄 친 부분을 읽었다. 그러나 한 번에 해석이 되지 않아서, 뛰어대는 가슴 때문에 몇 번이나 같은 부분을 읽고 또 읽어야 했다. 히스와 함께 지냈던 지금까지가 물거품처럼 터져 버렸다. “놀랍지?” “!” < 독재자 히틀러, 그러나 낭만의 왕국을 통솔하는 황제이기도 하는 히스클리프 폰 뤠겐부르크.> 가시처럼 날카롭게 웃어주는 멋진 청년이 지휘자로서 자리매김 했음을 똑똑히 시사하는 사진과 첫 문장에 완전히 넋이 풀린 혜성이 기대에 찬 사내에게 무의식중에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 그는 실로 냉정한 사람이다. 혹평으로 악명을 떨치는 만큼 사람들과 적정선을 긋기로도 유명하지만 그와 지내 본 사람들이 말하길 달콤하고 세련된 말투는 그가 콘서트에서와는 아주 다른 면을 보여 준다고 입을 모아 평한다. 그는 독재자일까? 아니면, 낭만의 황제일까?> 펑- 가슴 속 곳곳에 차오르는 전율이 혜성의 영혼까지 휘어잡았다. 마치 히스가 보스턴의 모든 이에게 기립 박수를 유도하던 그 때 처럼, 갑자기 일어서서 팔이 끊어질 때 까지 손뼉을 쳐야 할 것 처럼 으시으시 한 공포감이 감돌았던 탓이다. 발아래부터 저릿한 떨림이 글자를 확인하는 내내 풍선처럼 부풀어진다. < 잘 생긴 용모와 매력으로 인해 그는 특히 여성 팬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는데, 이 점을 두고 많은 평론가들은 히스클리프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2세 라는 말을 직설적으로 내뱉는다. 카라얀의 독재와, 매력을, 더 나아가 낭만과 젊음까지 쥐고 있는 젊은 독일의 청년의 레퀴엠은 이처럼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다.> “카라얀?” “유명한 지휘자 인가 봐. 나도 잘은 몰라.” 히스에 대한 새로운 발견 뒤에 나타난 이름이 궁금했던 혜성이 불쑥 물어오자 중년의 사내는 수털 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파일을 덮고 캐 롤에 귀를 기울였다. 아주 굉장한 전율이 방금 전 스치고 지나가서 더 이상의 글과 사진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스는 그냥 히스일 뿐인데…….” “네 앞에서 보여 지는 성격이 진짜 일 지도 모르지, 룸펜.” “그럴까요? 개구 장이 같은데…… 스토커 기질도 좀 있어요.” 회오리의 감각에서 겨우 벗어난 혜성이 방긋 웃으며 주절주절 속삭이자 사내가 씰룩거리며 웃었다. 진지하게 소곤거리는 혜성의 태도에 반 해, 오히려 그 진지함이 사내의 눈에는 귀엽기만 했기 때문이다. “글쎄…….” “바람둥이 이기도 해요. 진짜에요.” “…….” 그리고 레코드 점 주인인 그 사내는, 서둘러 파일들을 정리하고 원래 자리에 갖다 놓기 시작했다. 유리 진열대 하단에 잔뜩 꽂혀진 파일들 중 가장 끝에 남겨놨던 하얀색 파일과 저 쪽에서 생글생글 웃으며 자신을 쳐다보는 혜성을 번갈아 보며 그는 피식 웃었다. 혜성에게 내놓지 않은 그 하얀 파일은 바로, 한국의 아마데우스- 나아가 한국의 수페리우스에 대한 가십이 꽉 모아진 것이기 때문이다. 히스의 가십과 기사에 놀라는 혜성처럼, 지금의 레코드 점 주인은 신혜성 이라는 존재 자체를 신기해하는 중이리라. 그의 열정과 그의 땀이 먼 나라 이야기처럼 펼쳐져 있는 가십 파일을 잠깐 손에 쥔 뒤, 그는 조용히 아까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 식으로, 사내는 자신의 존재는 감춘 채 새처럼 떠드는 혜성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해 주었다. 두 사람이 두 잔 째인 코코아를 거의 들이켰을 때, 레코드점의 유리 도어가 활짝 열렸다. 웬 소녀가 살구 색 코트를 껴입고 나타났다. 혜성은 이 곳의 손님 이겠거니 싶어서 괜스레 주변을 둘러보기만 했다. 그러나 낯선 소녀의 발걸음은 곧 자신 쪽으로 닿았음을 인식하고 그는 고개를 올렸다. “아… 안녕하세요.” “?” 작고 여려 보이는 소녀 역시 이 레코드점의 단골인지 중년의 사내와 인사를 마치기 무섭게 혜성에게도 다가와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덕분에 눈을 껌뻑이면서도 덩달아 고개를 숙이는 혜성이 쭈뼛거리며 일어선다. 또 하나의 사건이 이 곳 이태원에서 마악 움틀 대려고 한다. 섬세한 날의 시작 “으하하! 히스!” 뺑소니를 치고 달아나는 걸음처럼, 휙 휙 이태원 거리를 날아갈 듯 달리며, 혜성은 허공에 대고 기쁨을 소리쳤다. 물론 오후의 크리스마스 거리에서 그를 부른다고 해서 불쑥 히스가 나타날 리는 없는데도 불구하고 혜성은 오두방정을 떨며 간지러운 입술을 터뜨리기 바쁘다. 모처럼 뛰어대는 가슴을 꽉 부여 쥔 채, 수페리우스는 룸펜을 향해 쉬지 않고 달려갔다. 방금 전 만났던 낯선 소녀가 읊어 준 문장들이 믿어지지 않아서였다. 『 지난번에… 아버지 몰래 선생님 공연을 쭉 찾아가서 보곤 했어요. 』 수줍은 소녀는 자신의 나이가 열다섯 이라고 했고, 나이 다음의 문장들은 아주 당당하고 기쁘게 혜성에게 전하였다. 소녀의 언어는 아주 맑은 설 레임을 담고 있었는데, 그것의 근원은 다름 아닌 혜성을 직접 가까이에서 보고 대화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녀의 설 레임은 곧 혜성에게 활력을 주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낯선 이의 설 레임이 전이된 영혼은 룸펜에 도착하기도 전에 발작을 부린다. 혜성은 뭉게뭉게 떠다니는 그 소녀의 음성이 도저히 현실에 미치지 않기에 뛰면서도 몇 번이나 볼을 꼬집어야 했다. 『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도 알아요. 왜 여기 계시는지는 모르지만, 역시 모두를 압도하는 공연을 펼치시더라구요……. 』 자신에게 왜 선생님이라고 부르느냐- 또, 어떻게 알았느냐가 궁금했던 혜성은 그 때, 자신들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레코드점 사장의 시선에 굴하지 않고 즉각 물었었다. 그 소녀는 양 볼에 불그스레한 홍조를 띤 채 하프처럼 가냘픈 어절을 낱낱이 고했다. 『 오래 전에, 아마데우스 성당 미사에 몰래 들어간 적이 있었거든요. 그 때, 선생님이 성가대 소프라노 솔로로 활약 하시는 것에 감동 받았었구요. 』 믿을 수 없어! 믿어지지 않아! 사그라들었던 열정의 바다가 뜨거움에 비명을 지르고 있어! 혜성은 양 볼을 찰싹 찰싹 치면서도 실실 웃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 저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 』 “히스-!” 가슴이 뻥 터져버릴 것처럼 희열이 전신을 지배할 무렵, 혜성은 룸펜 도어를 박차고 뛰어 들어갔다.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혜성을 알아보고 인사하는 한스 패거리들이 점심 식사를 하던 도중 그를 불렀지만, 아이는 그 소리를 못 들었다. 청각은 잠시 모든 기능을 마비 한 채, 재생 능력을 톡톡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 저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 』 피아노!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혜성을 말도 못 하게 들뜨게 해 준 것에 대한 보답을 위해서라도, 혜성은 무조건 알았다고 흔쾌히 수락했다. “히스!” 제일 먼저 다락방에 올라가고, 곳곳에 피어있는 민들레와 꽃 밖에 없음을 확인한 뒤, 부리나케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긴 혜성의 전체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 기쁜 소식을 어서 히스에게 쏟아내지 못하면 간질 환자가 되어서 앓아누울 것 만 같았다. 혜성은 주방에서 몰래 담배를 태우고 있던 히스의 쪽에 와락 안기듯이 서서 헥- 헥- 가쁜 숨을 내쉬는 동시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헥- 헥- 히, 히스! 헤에- 헥- 내, 내가 누굴 만났는 줄 알아?” “저런….” “?” 기쁨으로 반짝이는 혜성의 땀방울을 보자마자 미간을 좁힌 히스가 다짜고짜 아이를 꼭 끌어안고 등을 쓸어 주기 시작했다. 품 안에서 거칠게 숨을 내쉬는 것으로 보아, 또 멀리서부터 뛰어온 모양이었다. 왜 이렇게 그가 자신의 몸을 아무렇지 않게 혹사 시키는지, 히스는 죽을병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창백해진 낯으로 간신히 숨을 돌린 아이를 천천히 내려보았다. 주방을 바쁘게 오고 가는 웨이터 녀석들은 히스가 벽 쪽에 숨기다시피 세워 놓은 혜성을 언뜻 언뜻 훔쳐보다가도 냉큼 노려보는 히스 때문에 머리를 긁적이며 주방 밖으로 나가기 일 수다. “괜히 뛰어 다니 지 마, 수페리우스. 겨울에 땀이 나면 감기 걸리기 쉽잖아.” “내가 누굴 만났냐면!” “…후후….” 혜성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자기 블라우스 소매로 아이의 땀을 닦아주는 히스의 안면에 서서히 안도의 표정이 피었다. 그는 혜성이 땀을 흘리는 것을 목격하는 순간부터 마치 아이가 당장이라도 어떻게 될 것처럼 보였는지 걱정 되서 하얗게 겁에 질렸었기 때문이다. 부드럽게 봄바람처럼 응시해 주는 히스가 마음에 들었는지, 혜성은 가슴에 달랑거리는 음성을 가볍게 터뜨린다. “나를 선생님 이라고 불러주는 사람을 만났어!” “?” “나한테 피아노 레슨을 해 달래!” “?” 수페리우스가 왜 이러지? 어디 아픈가? 설마 아마데우스를 향한 느닷없는 상사병에라도 걸린 거야? 또 덜컥 겁을 집어먹은 히스가 그 창백해진 낯을 겨우 원상복귀 시킨 것은, 혜성이 방금 전에 만났다는 소녀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뒤였다. 그러나 굳어진 표정만큼은 도저히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할 거니?” “음… 낮에 자는 시간을 줄이면 돼.” “하지만…….” 이제는 혜성을 걱정하다 못 해 창백해진 피부가 경련이 일어날 것 같은 히스는 차라리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가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 있음을 그제 서야 눈치 챈 혜성이 부랴부랴 뒤늦은 변명이자 설명을 늘어뜨리기 시작한다. “걱정 하지 마. 난 하고 싶어.” 저것도 변명이라니! 히스는 답답한 나머지 한 손으로는 아이의 어깨를 휘어잡은 채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이마는 그가 얼마나 격정에 휩싸여 있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히스는 먼 허공을 응시하며 기똥찬 문장을 흘렸다. “네가 걱정 되서 난 미칠 지도 몰라.” “……?” “그래… 누구지? 한스 패 중에 한 계집아이? 동생뻘? 상당히 걸걸할 텐데…….” “아니. 그냥 평범하고 귀여운 여자애.” “!” “히스?” 혜성의 당당한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히스는 허공에 올렸던 시선을 불같이 내린 뒤 아이를 쏘아보았다. 험상궂어진 히스의 표정은 순식간에 찾아든 분노를 억지로 참아내는 꼴이었다. 통 이해하기 힘든 히스의 감정변화에 적응이 안 되는 혜성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서둘러 아이의 입술에 짧은 입맞춤을 한 뒤 히스는 애원하듯이 속삭였다. “하지 마. 그 애 레슨은 내가 해 줄게.” “또 허락없이 뽀뽀를… 싫어. 유리는 순수하게 피아노가 배우고 싶다는데, 네가 작업을 걸면 안 된단 말이야.” “!” “히스?” 뭐야? 이름도 벌써 알아? 유리? 게다가 뭐? 작업? 내가 그 어린 계집애한테 구차하게 시라도 읊으며 몸을 섞자고 달려들 것처럼 보인단 소린가! 무시무시하게 떨리는 히스의 녹색 눈동자는 크게 상처 입은 방금을 어떻게든 지워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무지한 혜성에게 '이히 리베 디히' 이상 가는 말은 어떻게 만들어 낼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던가! 그것은 평생에 아껴 왔던 히스의 유일한 문장 이었는데, 이럴 수가! 히스는 당장 아이의 연약한 어깨를 꽉 쥐고 흔들면서 크게 소리쳤다. “넌 정말! …진짜 바본가봐 수페리우스는! 내가 다른 것한테 관심이나 줄 것 같아?” “뭐 얏! 바보라고?” “지금 중요한 게 뭔 지 정말 몰라?” “왜 내 레슨 건을 니가 가져가려고 그래!” “오, 지저스! 수페리우스는 진짜 바본가 봐요!” “또 바보라고!?” 바보라는 말을 두 번이나 하다니! 내 입으로 내가 애송이 임을 시인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냉큼 한 쪽 팔을 올리는 혜성의 속도보다 빠르게, 얇은 팔목을 낚아 챈 뒤 히스는 아예 아이의 작은 몸을 꼬옥 끌어안아 버렸다. 약간씩 몸을 흔들며, 그는 협박 뒤의 회유를 펼친다. “…안 하면 안 돼? 왜… 왜, 왜! 한 시도 가만히 있질 못 하는 거야….” “그야… 작은 거라도 기회를 놓치는 바보로 살지 않을 거니까.” 문득, 어떤 생각이 그를 스쳤는지 몰라도 옆으로 몸을 살짝 흔들던 것을 중단한 히스가 혜성의 허리까지 더 세게 옥죄이며 달콤하지만 안쓰러운 투로 물었다. “내가 하지 말라고 반대하면, 너는 화 낼 거니 수페리우스?” “에… 화 보다는, 의견이 맞아 질 때까지 말을 안 하고 지낼 것 같은데…….” “!” “…….” 말을 안 하고 지낼 것 같다는 혜성의 청천벽력 같은 지껄임에 바닥까지 떨어진 감성이 있다. 히스는 천천히 혜성과 눈을 마주치며 한 참을 그렇게 들여다보았다. 흔들림 없는 불꽃같은 눈동자, 그 안에 섞여진 열정과 투지는 경험해 본 바 히스가 막을 수 있는 몫이 절대 아니었다. 그 눈빛을 지녔을 때의 혜성을 막아 본 기억이 히스에겐 없었다. 그는 마침내 포기했다는 뜻으로 축 늘어져서 주방 입구 쪽으로 등을 돌렸다. 상처 입은 늘씬한 등이 속삭인다. “그럼, 해…….” 왜 저런대! 입 밖으로 당장 히스에게 뭐가 기분이 나쁜 거냐고 쨍알 쨍알 따지고 싶었던 혜성은,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라는 점, 그리고 자신은 매우 기분이 좋은 상태라는 것을 감안하여 조용히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또, 지금 등을 돌린 히스는 왠지 가여워 보여서 이기도 했다. “…….” “…….” 혜성은 무의식중에 쫄래쫄래 병아리처럼 히스의 뒤 자국을 쫒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혜성도 모르는 오래 전부터의 습관이었다. 마음을 터 준 자가 어디로 향하면, 자신도 모르게 그 뒤를 쫒아가게 된다. 그 사람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한다. 동완이 그랬었고, 민우도 그랬었다. 하지만 그들은 귀찮아하면서도 혜성에게 자신들의 공간을 낱낱이 읊어 주고 알려 주었었다. 지금도 그 때와 다르지 않다. 테레사? 테레사 역시 물론이다. 그의 경우에는 아예 그를 보기 위해 아마데우스 땅을 밟지 않았던가.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근원을 자연히 쫒아 다니는 혜성이 아마 열 걸음 쯤 움직였을 때였다. “?” 휙-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아주 가까이를 스쳤다. 병아리가 되서 자신을 쫒아오는 혜성의 행동을 알아서일까. 혹은, 아이가 따라오든 오지 않든 상관없었을까. 열 걸음도 못 가서 휙 뒤를 돌아 선 히스가 성큼 성큼 되돌아오더니 멍하니 시선을 풀어 제낀 혜성의 가벼운 몸을 번쩍 안았기 때문이다. “이크!” “…….” 심기가 많이 불편한 듯 한 히스의 돌출 행동 덕분에 사분의 삼 박자로 뛰던 심장은 박자 개념이란 것을 잃었다. 그는 아이 스스로가 땅에 떨어질까 봐 두려운 나머지 자신의 목에 팔을 두르자 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고, 등으로 도어를 열어서 다락방에 섰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어… 어…….” 그리고 당황해 하는 혜성을 마루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그는 견딜 수 없는 무언가를 마음속에 갇아 둔 채 아이를 꼬옥 끌어안았다. 히스의 살결과 부드러운 블라우스의 감촉, 꽃의 향기까지 몽땅 밀려오자 그 나마의 박자 감각까지 모두 도망가 버린 혜성은 눈을 감았다. 살며시 수페리우스의 입 꼬리가 올라간다. 지난날의 고백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임을 수페리우스가 자각하는 순간이 겨우 닥쳤다. 아이의 팔이 히스의 넓은 등에 마주 올라온다. “귀여워서 아무 한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 “…그건 쫌 곤란한데… 내가 귀엽다니 징그러워 히스.” 자신을 마주 안아주는 혜성의 손길이 언제고 사라질 게 싫었는지 히스는 품 안의 아이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한 번 향한 마음을 내면이 지시하는 족족 흔들림 없이 꺼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한테 화가 나도 말을 안 하고 지내지는 말아 줘.” “…그것도 쫌 곤란한데…….” “안 놔 줄 거야.” 꽈악 조이는 히스의 팔 힘에 마침내 숨이 막힐 것처럼 답답해진 혜성이 붉어진 낯과는 반대로 상쾌하게 웃었다. 살짝 열어놓은 다락방 창 문 밖에서 불어오는 겨울의 바람이 살랑살랑 춤을 춘다. 싱그러운 바람의 향기와, 작은 꽃들이 내뿜는 호흡이 둘에게로 미쳐오는 현재, 평화라는 이름이 벽 줄기 곳곳에 타고 오른다. “아하하하. 알았어. 말 안하지 않을게.” “정말이지?” “그래. 얼른 놔. 내려가야지.” “놓으면 도망갈 것 같아…….” “이런 고집불통!” 히스의 등에 뻗었던 팔을 가져온 뒤, 냉큼 그의 넓은 가슴 안 쪽을 치며 수페리우스가 호통을 쳤다. 그러나 아이의 호통을 그저 사랑스럽게만 지켜보는 녹색의 눈동자는 바람 따라 흔들리기만 했다. 겨울의 시원한 바람이 둘의 냉랭했던 지대를 말끔히 씻어주니, 이제 남은 것은 벽 줄기에 새겨 진 평화의 실천일까. 품 안에서 꽥 소리치는 혜성의 박자에 키득키득 웃던 히스가 엄중한 투로 대답한다. “…우리 할머니가 옛날에 나한테 늘 하셨던 소린데…….” “찰거머리!” “…그건 세실이…….” 히스의 안면에 터오른 자연스러운 웃음이 그의 조각처럼 섬세한 곳곳에 파장을 일으킬 때, 혜성 역시 발작을 보이는 내면을 잠재우기 위해서 억지로 센 소리를 터뜨린다. “애송이!” “그건 네가 알려 준 거잖아… 한 번 만 키스 하고 나가자.” “으…….” “안 돼? 안 돼?” 위에서 허리까지 숙이며 혜성의 이마에 저의 이마를 붙이고 속삭이는 히스는, 여전히 뜨거운 열정의 사내였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독재자 지휘를 펼치며 자신과 가볍게 선을 긋고 경계하면서 여지껏 지내왔을까! 수 만 가지 생각은 잠시 뒤로 미룬 채, 현재 주어진 것들에 골똘히 고민하던 혜성이 휙 시선을 돌리더니 작게 대답했다. “뽀… 뽀뽀만 한다면…….” “하하하하. 귀여운 사람… 알았습니다.” 쪽! 소리 내어 혜성의 이마에 입술을 누른 뒤, 히스는 반쯤 풀어진 앞치마를 묶으며 장난기 가득한 어깨를 씰룩이더니 다락방 밖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 히스의 장난 같은 진심을 목격 하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현재, 혜성은 그의 멀어지는 등을 멍청하게 내려보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정말 뽀뽀만 하네…….” 그 작은 소리를 어떻게 주워들었는지, 계단의 하단 부분에 거의 내려가던 히스가 불쑥 큰 소리로 경쾌한 투를 내뱉는다. “아쉬워도 어쩔 수 없어 수페리우스. 진짜 키스하면 멈추지 못 할 것 같았거든!” “!” 저, 저게! 입을 쩍 벌린 채 망부석이 된 혜성이 한가을의 홍시처럼 붉어진 낯을 쏘아보는 것을 알아도 모르는 척, 녹색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청년이 한 번 더 진한 마침표를 찍었다. “빨리 내려 와 작은 마드모아젤~” “이… 이… 십칠! 이 개구쟁이 녀석!” “오, 오… 그건 어렸을 적에 나의 마마가 늘…….” “야!” 이 정도로 끈질기게 접근하는 사람도 있었다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혜성은, 자신을 놀리듯이 등을 씰룩이던 히스를 향해 계단을 전력 질주하여 내려가기 시작했다. 쿵쾅쿵쾅 소리 내는 혜성의 박자가 거의 도달할 때 쯤, 휙- 뒤 돌아 선 히스 때문에 오히려 발을 헛디딘 혜성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엎어지려고 한다. 그 때 히스는 바람처럼 날아온 혜성의 몸을 꼭 안아주었고, 혜성은 '또 당했다….'라고 중얼거리며 이마를 쳤다. 아주 낯설지만 설 레이는 이브 날의 밤이 다가오고 있다. 크리스마스이브 새벽 두 시의 룸펜은 터져 나갈 것처럼 사람들로 꽉 채워졌다. 한스 패거리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쏟아져 들어왔고, 테이블은 자리가 모자라서 몇 놈은 서서 즐긴다. 혜성 역시 오늘 만큼은 솔베이지 타령 대신에, 발랄하고 분위기 있는 캐 롤을 골라서 연주해 주었고 그들은 목청 높여 룸펜을 지지해 주었다. 열 공기로 채워진 룸펜의 넓은 곳곳에 선율은 끊이지 않고 재생되었으며, 그 누구도 사납게 장화를 던지거나 욕을 지껄이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는 모두에게 향수에의 감각과 지나칠 정도의 즐거움을 선사했던 것이다. “아~ 하. 좋다.” “적당히 마시지? 저 독일 놈이 계속 노려보는데?” “괜찮아 괜찮아.” 한 시간 하고도 반 이나 더 한 공연 덕분에 온 몸에 맺힌 땀을 쫙 흘리는 혜성은, 오늘따라 극에 달할 정도의 위태로움과 아름다움으로 모두의 시선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런 그를 쫒는 히스의 시선은 평소보다 날카로웠고, 둘을 나란히 지켜보는 한스 패거리들은 즐거워서 어쩔 줄을 모른다. 혜성은 한스의 맞은편에 앉아서 동그란 테이블 곳곳의 녀석들에게 맥주를 부어 준 뒤, 오늘은 자신이 쏘는 거라는 말을 내뱉음으로서 멀리서 지켜보던 히스를 창백하게 하더니 킬킬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아마 지금쯤 히스는, 서둘러 지갑에 들어있는 돈을 확인하기 위해 정신없을 것이다.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이하여 룸펜은 녹색과 붉음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아리따운 장신구들은 마치 여인의 화장처럼 눈이 부셔서 몇 번이나 그리움 짙은 시선을 사내들로 하여금 따라붙게 한다. 그 사이에 앉아있는 정갈한 차림의 혜성은 유일무의지지 않는 독을 지닌 꽃처럼 가장 빛이 났다. 그래서 함부로 굴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한 참 동안 오늘 레코드점에서 만났던 유리라는 소녀에 대해 자랑스레 떠들던 혜성이 막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킬 때 였다. 자신들의 룸펜이 떠드는 소리를 늘 농담처럼 듣고 웃어주기 일수였던 한스 패거리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졌음을 혜성은 맥주 500cc를 거의 비웠을 때 눈치 챘다. 왜 그러냐는 듯, 혜성이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제 옆에 앉아있는 레이놀드 라는 흑인 혼혈아 녀석의 옆구리를 치자 그는 심각한 투로 도리어 묻는 게 아닌가. “유리… 라면, 차이나 클럽 옆에 있는 샤우트 바 딸내미 아닌가?” “샤우트? 맞아. 그 건물이 자기 아버지 거라고 하던데…….” “그 쪽과 관계 짓지 마, 룸펜.” “……?” 이 번에는 레이놀드 못지않게 신중해 진 맞은편의 한스가 크리스마스 캐 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투로 강한 어조를 꽂았다. “우리 쪽이야 너와 친해 졌지만… 그래서 룸펜이 안전하다고 볼 수 있는데… 어떻게 보면 샤우트 쪽에 걸린 거라고도 할 수 있거든.” “무슨 소리야? 유리는 그저 아버지가 피아노를 반대 하셔서 나한테 몰래 알려 달라는 것뿐인데… 집에 피아노도 있대. 아버지가 안 계실 때 연주하면 된 다던데…….” “그런 문제가 아니라, 샤우트 쪽 패거리들과 우리 쪽이 영 사이가 안 좋거든. 그런 와중에 룸펜과 자기 딸이 엮였다는 소식을 들으면…….” 한스의 다음 말이 흐려지는 동시에, 레이놀드가 다급하게 끝 점 까지 찍어준다. 혜성은 듣느라 정신이 없으면서도, 절대 자신의 소신은 굽힐 수 없다며 눈을 부릅떴다. “기다렸다는 듯이 쳐들어오겠지. 건 수 잡았다는 식으로. 어쨌든 우리들은 적이니까.” “왜?” “몰라. 선대 때부터 쭉 이어져 왔어.” 이럴 수가! 그건 그 이유고, 나는 나대로의 다른 세상인데 어째서? 사상과 생활이 전혀 다른 그들은, 처음으로 의견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주변 환경이 그 테이블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았는지, 혜성은 불쾌해진 낯으로 사납게 언성을 높였다. “이유 없이 싸운단 말이야? 화해하면 되잖아! 오늘은 크리스마스야! 당장 화해 해버려!” 약간 취기가 맴도는 혜성의 몸짓을 알아 본 레이놀드를 비롯한 모두는, 그제 서야 피식 힘없는 웃음을 내뱉으며 치어스를 외치기로 한다. “뭐어?” “하하하하! 대화가 안 되는구먼, 애송이?” “…유리네 아버지는 왜 피아노를 반대하실까, 한스?” “자, 자, 마시자고! 치어스~” “……?” 상황에 몰리면, 늘 자기에게 필요한 이야기만 듣고 해석하게 되는 혜성은 여전히 그들의 경고 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맞장구 쳐 주는 척 하며 금방 채워진 잔을 높이 들고 고래 성을 지를 뿐이었다. 수 십 번도 더 외친 크리스마스! 를 또 소리치고, 하릴없는 농담 따먹기 따위를 하다 보니 방금 전까지의 이야기는 잠시 사라지는 듯싶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상황이 한 참 지나기 전 까지는 자신의 위주로 돌아보기 마련이다. 자신 만의 영역과 교만은 그 이름을 깨닫기 까지 세월을 보내지 않고서야 앎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혜성이 몇 잔이나 부어 마시는 모양을 쭉 눈으로 훑어보던 한스가 화장실을 가는 척 하면서 테이블을 돌아 나설 때였다. 그는 사람들이 정신없이 술을 동시에 마시는 때를 잘 맞추어 혜성의 뒤에서 허리를 숙인 뒤 빠르게 속삭였다. “혹시나 싶어서 하는 소린데… 이 봐 룸펜. 나한테 네가 전에 하려던 수작을 그 놈 한 테는 하지 마. 나처럼 통하지 않을 거야.” “……!” 다같이 마시는 맥주잔의 속도에 맞춰 입을 벌리고 술을 부어대던 혜성이 순간 차갑게 굳는다. 한스는 그가 방 금의 문장을 제대로 인지한 것을 확인 한 뒤, 마지막까지 조용히 경고 조를 내리꽂고 유유히 사라졌다. “절대로. 인정사정 안 봐 줄 거다. 인간미라고는 전혀 없는 놈이거든.” 도대체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는 건가? 무엇이? 왜? 이 글을 지켜보는 당신은 무엇을 예상하는가? 대체 이게 뭐 하자는 스토리일까? 아마도 당신이 예상하는 대로 이태원의 사건이란 놈은, 슬슬 제대로 된 판을 벌리려나 보다. wgreene@naver.com 걱정해 주신 덕분에 저의 감기놈은 싹 물러갔습니다. 슬슬 땡스투를 시작해 볼까요? ^_~ 이번에는 댓글이 저도 길어져서 이렇게 따로 소설 하단에 붙이게 되었습니다. 꼭 확인하세요! 별하님 : 저도 같이 펑- ^^ 히스가 예쁘지요? 고마워요. 마레님 : 이히 리베 디히를 위해 히스가 탄생되었다는게 너무 이상한 것 같아서 밝히지 않으려다가 그냥;; 그나저나 독일에 계시는군요..+_+ 고마워요 마레님! 악필소녀님 : 이히 리베 디히.. 그렇죠. 멋있어요. 악필님도 이히 리베 디히...^^ 에프셩님 : 에프님이 주시는 이 글이야 말로 저에게는 또 다른 평화의 레퀴엠이었습니다. 고마워요... 저의 작은 표현이 당신 덕분에 고개를 숙이며 좋아합니다.. 안젤리스님 : 오오 히스클리프의 이름의 값도 알아 주시는군요.+_+ 사실 폭풍의 언덕을 봤을때 뭐 이런 미린;;놈;;이 다 있냐 했긴 했지만.. 그만큼 사랑하는 마음이 순수하게 펼쳐졌노라 믿고 있는...(뭐래;) 예쁜 댓글 고마워요! 라이어님 : 오, 안녕하세요! 저번에 블로그에 찾아갔을때와는 닉네임이 다르셔서 누구신가 반가워했다는..^^(나는 스토커?;) 감기 조심하시고, 댓글 고마워요 라이어님! 슬픈웃음님 : 아.. 저도 이히 리베 디히.. 레퀴엠은 어떻게 보면 저의 무지의 산물;;(흑..) 그것을 예쁘게 봐 주셔서 고마워요 슬픈웃음님! ^^ ydog1001님 : 슬프고도 아름답게 읽어주신 천일님이 저는 더 고마운걸요. 고맙습니다..^^ 샤르망님 : 샤르망님도 몸조리 잘 하세요~ ^^ 꼬마님 : 아니에요.(뭐래 갑자기;) 꼬마님처럼 풍부하게 느껴 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에 보잘것 없는 글에서도 가끔은 빛이 나올 수 있는 거에요.. 고마워요. 저도 이히 리베 디히..^^ 달시님 : 와, 레퀴엠을 들으시면서 공부를 한다니! 대단합니다.+_+ 아이큐가 순간 높아진다는 말에 귀가 번쩍하네요.^^ 히스의 가상 이미지는 좋은 쪽으로 생각해 주세요. 고마워요.^^ 군림해버려님 : 군림님.. 가슴이 먼저 사랑에 울려졌기 때문에 그 말이 목을 통해 터져 나왔노라는 당신의 댓글을 다른 편이 올라옴으로서 떠나 보내는게 아쉬울 정도로.. 너무 멋집니다. 고마워요.. 언니분도 빨리 쾌차하시기를 바래요.^^ 레루스님 : 아.. 그렇지요? 1악장에서도 보면, 뭔가 암시 적인 문장이 종종 나옵니다. ^^ 헌데, 표현력이 넘치시는 분인듯... 괜스레 기분까지 우중충해지잖아! ->라는 문장은 앞으로 속으로 살짝 묻혀주세요.^_~ 유령님들 : 잘 지내요? 날씨가 많이 따뜻해졌습니다.(감기놈도 함께 오는 계절) 다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덧글 5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11편(섬세한 날의 시작)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11편(섬세한 날의 시작)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12편 ▼ 다음글 - 2악장 10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12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4/14 18:33 http://blog.naver.com/wgreene/110003402094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414 12편 업데 060413 11편 업데) Amadeus 음악 : love story summer of 42-Godfather - Ernesto Cortazar (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Love Story-Summer Of 4.. 네 입술에 이름을 붙여주지. 히스를 달아오르게 하는 입술. 그게 싫다면, 히스를 미치게 하는 입술. 히스를 위한 입술… 히스에 의한 입술. 히스의 입술… 나는 에이브러햄 링컨이다아~ 2악장 12편 한스와 레이놀드가 경고 조를 내리꽂았음에도 불구하고 룸펜에는 별다른 변화가 찾아들지 않았다. 변화라는 것은, 한 순간에 불화살처럼 뜨겁게 꽂혀서 영혼까지 태우는 것을 뜻한다. 눈에 보이고, 감각에 미치는 변화란 세상에 없다. 때가 지나서야 옳거니! 그것이 변화였구나! 라면서 사람들은 체험의 끝을 결정짓기 마련이다. 당신이 기다리고, 또 나도 기다리는 변화는 서서히 다가오고, 또 어쩌면 시작 됐는지도 모를 그 이상한 자식은 눈앞에 떵떵거리면서 나올 순서는 아니다 라는 것이다. 어쨌든 룸펜은 변한 게 한 가지도 없었다. 성탄 트리에 맥주를 부어대며 킬킬거렸던 레이놀드는 이듬해 새해가 지나서도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변화가 닥쳐서야 사람들은 참았던 말을 꺼내는 법이다. 때문에, 평소처럼 새벽 두 시에 공연하고, 유리 라는 샤우트의 소녀에게 피아노 레슨을 하는 혜성이 봉변을 당하지 않는 이상 변화라는 이름은 저기 룸펜 바닥에 뭉거진 대걸레 만 도 못 한 존재였다. 시끄러웠던 크리스마스와, 그것보다 배는 더 소란스러웠던 새해 카운트다운이 지나 어느덧 봄의 시작이라는 1월이 모두 끝나 간다. 시간은 아주 빠른 속도로 혜성의 머리칼과 풍요로운 감성이 깨닫기도 전에 쉭 지나치기 마련이다. 아마데우스에서 어떤 생활을 꾸리시는 건지 나날이 마르시는 사비나 교수님이 그 사이 두 차례에 걸쳐 수페리우스와 히스를 만나고 가셨지만 그건 흔히들 말하는 안부 인사에 지나지 않았다. 서서히 뭐가 바뀌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하나 둘 수페리우스를 주시하는 때가 1월의 막바지가 되니 노골적인 시선으로 돌변했다. 룸펜에 혜성이 나타난 것부터가 변화의 시작이었듯이 아이는 쉬지 않고 변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기 때문이다. 화장을 했고, 어영부영 노래랍시고 연주를 앞세워 새벽 무대에 오르더니, 별안간 한스 패거리를 이끌고 듣도 보지도 못 한 솔베이지 변주곡을 나날이 퍼뜨려 주었다. 게다가 해가 바뀌니 그는 선생님 이라는 호칭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유리 라는 소녀를 열심히 가르치기까지 한다. 한 가지 약간의 변화에 있어 추가 된 요인이 있는데, 히스였다. 늘 혜성을 걱정 해 주고, 그 안에 존재하고 있는 박애주의 사상을 모조리 꺼내다 못 해 바닥까지 박박 긁던 그가 기어이 감기에 걸려 앓아누운 것이다. “이 봐, 룸펜. 그 자식은 오늘도 아프대?” “히스? 히스는 꾀병이 취미야. 신경 쓰지 마.” “헤이. 너와 가장 친한 놈인데 그렇게 말해도 돼?” “…….” 물론 그러면 안 되겠지. 요 새 들어 자상하기만 하는 히스에게 못되게 굴었던 혜성이 한스의 말에 스스로 반성하는 계기를 갖는다. 1월의 마지막 날에도 룸펜에 찾아와서 혜성의 새벽 공연을 감상하던 한스가 얼큰하게 취한 낯으로 실실 웃고 있다. 한스의 말 대로 끙끙 앓아대는 히스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기에, 혜성은 서둘러 공연을 마치고 새벽 세 시 종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다락방에 올라갔다. “…….” “…….” 달칵- 문을 닫자 묘한 기류가 감돌았다. 노곤한 달빛이 이제는 쉬어도 좋다며 너르스름한 전율을 뿌려주고, 하프의 선율이 미치기까지 자신의 자리에서 다락방을 비춰 주겠노라 오기를 부린다. 사사하게 퍼지는 1월의 달빛이 가끔은 넓어 보이는 다락방 안 쪽에 물결처럼 흔적을 이뤘다. 그 덕분에 다락방 구석까지 널려져 있는 작은 꽃들이 기지개를 켰다. 어떤 꽃은 시간이 흘러 파삭 가루가 되었다. 매일 같이 혜성을 위해 꽃을 가져 온 히스의 흔적들이다. 다락방은 늘 봄 내음이 코를 찔렀다. 히스는 꽃향기에 방해가 될 까봐 그가 아끼는 향수도 뿌리지 않는다. 그렇게 한 달이 넘는 시간동안 단 하루도 지치지 않은 모습으로 혜성에게 꽃을 배달해 준 히스는, 최절정의 인내심마저 보여주었다. “히스… 좀 괜찮아졌어?” “…….” 이히 리베 디히… 라는 말이 마치 거짓이었을까? 꿈은 아니었을까? 라고 착각 할 정도로, 그는 혜성에게 왜 대답을 안 하냐는 둥으로 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혜성이 의아 해 할 정도로 깊이 있는 자세로 일관했고 항상 뒤에서 요모조모 따져 주기만 했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바람처럼 늘 혜성의 몸을 떠나지 않는다. 아이는 조용히 히스가 누워있는 침대 머리맡에 앉았다. 일주일에 두 번, 유리의 레슨을 갈 때면 그 점에 화가 난다며 시위 하듯이 방에서 나오지 않던 히스가 감기로 앓아누운 지 삼일 가량이 지났다. 그가 조용해지자 썰렁해진 룸펜에서, 혜성은 어쩐지 모든 것이 시큰둥하게 느껴졌다. 한 사람이 자신에게 미친 파장이 이 정도라니, 그 허전함에 가끔은 쓸쓸해지기도 했다. 오늘 공연을 지켜본 한스의 말마따나 자신이 히스에게 함부로 대한 점에 대해 반성까지 했다. 혜성의 부드러운 질문에 히스는 대답대신에 힘없이 늘어뜨렸던 긴 팔을 내밀었다. 손가락이 가여웠다. 그래서 혜성은 그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의 백지장처럼 하얀 손가락에 자신의 것을 끼워 주었다. 하얗지만 커다란 히스의 손가락에 혜성의 것이 끼이기 무섭게 그는 씨 익 입 꼬리를 올리며 아이가 손을 빼지 못하도록 깍지에 힘을 주는 게 아닌가. “어 쭈. 이제 좀 괜찮아졌나 보네. 그저께는 손가락도 못 들었으면서.” “…….” 씨 익 올라갔던 히스의 입 꼬리가 눈을 감은 상태에서 축 쳐진다. 혜성의 말 하나에 꼼짝도 못 하는 위인이 여기 있다. 살랑 살랑 바람 없이 움직일 줄 아는 착한 꽃들이 그 둘을 사방에서 구경한다. 혜성의 말이 사실이지만 손가락은 전혀 풀고 싶지 않았는지 히스는 고심하는 눈치였다. 문득 그의 뺨에 키스를 해 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드러운 아이의 입술이 약간의 땀이 맺혀있는 히스의 뺨을 스치자, 그는 그제 서야 녹색 눈을 떠 주었다. 풍요로운 달빛에 반사되는 녹색의 풍경은 그의 눈동자에만 머물러 있는 게 애석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열이 많이 내렸네…….” “…다 낫 어.” “네가 없으니까 룸펜이 텅 빈 것 같더라, 히스…….” “…….” “그리고, 나도 많이 쓸쓸했어. 그러니까 빨리 나아…….” “!” “히스!” 혜성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서운 속도로 자리를 박차고 상체를 일으킨 히스가 땀에 젖은 블라우스 차림으로 혜성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쿨럭! 쿨럭쿨럭!” “히스!” 혜성의 작은 몸을 꼭 품에 안은 채로 정신없이 큰 기침 소리를 내고 어깨를 흔들던 히스가 그래도 기분이 좋은지 절대 팔을 풀지 않았다. 팽- 하고 아이를 안은 채로 더듬더듬 티슈를 쥐고 코를 풀면서도 그는 기분이 좋아서 실실거렸다. 함지막한 그의 마음의 크기는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 테레사 때문에 나를 지켜본다던 너의 인내심도 놀랄 높이였는데, 사랑까지 할애하다니, 너는 대단한 사람이다 히스클리프. “콧물!” “…지금 풀었어. 깨끗해.” “다시 풀어! 코맹맹이 소리 나!” “매……?” 선뜻 한국말 코맹맹이를 이해 못 하던 히스가 안긴 채로 더듬더듬 티슈를 자기 쪽으로 내미는 혜성이 귀여웠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팽- 하고 또 코를 풀었다. 그는 이상하다. 아픈 와중에도 혜성에게 멋진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욕심에, 한심하다는 소릴 들으면서도 굳이 블라우스 새 것을 입겠다며 다섯 벌을 못 쓰게 버려 놨다. 그런데, 이렇게 팽팽 코를 푸는 것은 아무렇지 않다는 소리인가? 유럽 사람들은 다 그런 건가? 코 푸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 “어디 가?” “…이빨…….” “…누워서 쉬어.” “안 돼.” “왜?” “빨리 이빨 닦고, 너랑 키스할거야. 다 나서 괜찮아.” “!” 저놈이! 히스가 일어서서 등을 보이고 내뱉은 소리에 기가 막힌 혜성이 베개를 던지자, 그는 유연한 운동신경을 자랑하며 한 손에 그것을 잡았다. 나이스 캐치~ 하며 농담까지 하는 걸 보니 정말 감기가 다 나았나 보다. 새벽부터 감기의 흔적이 만연한 채로 샤워를 마친 히스가, 덜덜 떨면서 침대 속에 들어왔다. 시트를 새 것으로 갈아 준 혜성이 많이 고마웠는지 그는 약 봉지를 챙겨주는 아이의 작은 손을 열심히 동공으로 쫒아 다녔다. 어떻게 약 봉지를 쥐는 것도 사랑스럽기만 할까. 인형처럼 귀여운 저 사람은 그래도 까만 머리칼이 더 잘 어울릴 텐데……. 히스의 시선에 익숙해 진 혜성이 그러나 사납게 표정을 굳히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잘 해 줘야지- 싶어서 히스의 머리맡에 의자를 놓고 책을 읽던 혜성이 그 책을 바닥에 던지기까지 한다. 히스는 그래도 계속 떠들었다. 참다 못 한 혜성이 부리부리하게 치켜뜬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신경질적인 어투를 내뱉는다. “경고하는데, 지켜준다는 말 좀 하지 마!” “…….” “알았어?” 그렇다. 히스는 눈으로 항시 혜성의 아기자기한 행동을 쫒으며 쉬지 않고 속삭였던 것이다. 너를 지켜 줄 거야 수페리우스. 너를 보호해 줄 거야 수페리우스. 너를 지켜주고 싶어 작은 사람. 귀여운 마드모아젤, 너는 내가 지켜 줄 거야. 하염없이 달콤한 어절을 꺼내는 거야 그렇다 치고, 이 룸펜에서 지내는 내내 혜성은 '지켜주다'라는 소리만큼은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 소리가 싫었다. 너를 가질거야- 이 소리보다 그게 더 싫었다. 지켜준다 라는 것처럼 보호받는 자를 미치게 하는 문장은 또 없었던 탓이다. 이제 까지는 그 소리 하지 마! 라고 화만 냈던 혜성이 정도 이상으로 소리치자 이번에는 히스도 지지 않고 항변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고 싶다는 게 왜…….” “자기만족일 뿐이야!” 이 때, 히스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너무 놀라서 그의 심장이 저 달이 삼킨 것처럼 고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대로 자신의 달콤한 소리에 약간의 짜증만 낼 줄 알았거늘, 꽥 소리치는 수페리우스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유도 모르는 채, 그저 눈물을 흘릴 것처럼 눈시울을 붉힌 혜성이 가여워서 마음이 아팠다. 걱정 되서 토 할 것처럼 속이 쓰렸다. “지켜주려는 자들의 자기만족일 뿐이라고! 나는 지켜주는 것에서 행복과 안식을 얻는다? 그럼, 보호받고 마냥 사랑받는 사람은 얼씨구나 행복하고 좋아할 것 같니?” “!” 처음에는 그가 소리치는 게 놀라서, 두 번째는 그의 충혈 된 가여움이 슬퍼서, 나중이 되서야 그가 떠든 내용이 겨우 인식이 된 히스가 석고상처럼 굳었다. 혜성은 지켜주다 라는 단어에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이 짧은 단어는, 사랑에 있어 연인들 사이에 빈번한 이것은, 분명히 수페리우스에게 지난 아픔을 꺼내게 함이 틀림없었다. 히스는 이 순간, 미안해서 벼락이라도 맞고 싶은 심정에 견딜 수가 없어졌다. 게다가 현재의 혜성은 핑- 하고 눈초리부터 줄이 그어진 채 제 정신에서 이탈한 사람처럼 떠들어대지 않던가. 조마조마해 진 히스가 손을 뻗자 그것을 딱 쳐 내면서도 그는 순식간에 미친 자의 탈을 쓴 사람처럼 쉰 소리로 떠들었다. “나 때문에 누군가가! 그것도 소중한 사람이 나를 지켜준다고 했을 때! 그렇게 죽었을 때!” “!?” 죽었을 때? “그걸로 자기는 만족한다는 웃음이 무덤에 뉘인 때 남은 자는- 나는- 나는-!” “!!” 혜성은 자기가 방금 필요 이상으로 꺼낸 실언에 놀란 나머지 말을 멈추고 양 손으로 입을 가렸다. 실언이다. 이건 실언이야. 방금 민우가 웃으면서 나를 구해주고 죽는 장면이 영화처럼 스쳐 지나갔어. 나는 그를 보내기 싫은데도 보내야만 했어. 뚝- 굵은 눈물방울이 그 위를 쭈르르 타고 내렸다. 그러나 자기의 속내를 얼떨결에 꺼낸 혜성보다 더 상처받은 표정으로 히스는 당장에 몸을 내밀어 아이를 당겨 안았다. 내가 상처를 건드린 거야… 히스의 괴로운 표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히스가 안아주자 불에 데 인 것처럼 확 뿌리치려던 혜성은 그러나, 그가 억지로 당기는 통에 꼬옥 안기는 것을 벗어날 수 없었다. 혜성이 가끔씩 발작을 부리듯이 큰 소리로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 하는 때가 있는데, 예전의 고백하기 전의 히스라면 분명히 아이 스스로 진정 되기까지 울도록 내버려 두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히스는 마음이 아팠다. 산산이 부서져서 이대로 죽을 것처럼 혜성의 눈물 하나에 모든 것이 비틀어져 보였다. 그를 사랑한다고 한 이상, 지켜준다는 말도 속 시원하게 할 수 없어서 미안했다. 한 참이 지나 아이의 울음이 자자해진 것을 느낀 히스는, 연거푸 작은 머리칼에 입을 맞추며 달래 주기 시작했다. 안기가 조금 불편해 졌는지, 아예 혜성의 가벼운 몸을 자신의 탄탄한 허벅지 위에 앉힌 히스가 아기처럼 작은 몸을 쓸어 주었다. 그리고 묻는다. “그 사람을… 많이 사랑했었니…?” “…아마도…….” “…….” 히스의 투명한 녹색 눈동자에 흐릿한 안개가 끼 일 때, 두 사람이 영위하는 밑바닥이 서서히 갈라지는 비명을 질렀다. 가까워질수록, 멀어질 일만 남은 거라는 소리가 다가오는 것일까. 둘이 가까워질수록 밑바닥의 시간은 평소보다 빠르게 세상을 스쳤기 때문이다. 낯설었던 둘이, 하나가 되기까지 머지않았음을 둘은 어쩌면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혜성의 작은 소리를 들어주며 히스는 더 세게 안아주고 어루어 주었다. “사랑 할 뻔 했어… 나에게 사랑하는 방법을… 지혜를… 너그러움을… 알려주기만 했거든. 나는 준 게 하나도 없는데…….” “…….” “나는 정말로 준 게 하나도 없었는데…….” “수페리우스…….” “…….” 긴 한 숨을 내쉰 뒤, 히스는 혜성의 목에 입술을 묻은 채로 이 순간 꺼낼 소리는 아니지만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길고 나른하게 언어를 내렸다. 울먹이는 그의 소리가 한 템포 지날 때마다 칼에 찔리듯 나를 아프게 한다. 이토록 내가 사랑에 빠질 줄이야! 이토록 정신이 없어질 줄이야! 나는 히스인데! 나는 아마데우스의 히스클리픈데! 아마데우스… 멀기만 한 이름이여. 나는 이 순간이 좋아서 불안하기까지 하거늘… 없어질 언젠가가 미워서 견딜 수가 없어. 히스는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속삭였다. “나는 너의 그 사람이 부럽다…….” “…….” “너를 괴롭고도 즐겁게 하는 그 사람이 부러워…….” “…….” “지금 이 순간 하늘에서 너를 지켜보는 그 사람이고 싶을 정도로…….” “!” 잠깐 혜성과 눈을 마주친 히스는 번쩍 놀랐다. 자신의 말에 또 상처를 입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시 눈이 충혈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약한 달빛 때문일까? 진정이 된 수페리우스의 안면에 어두움이 밀려왔다. 나 때문에? 하여, 히스는 머리를 굴렸고 당장 큰 기침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쿠당- 그의 큰 몸이 먼지를 날리며 정말로 쓰러져 버리자,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선 혜성이 많이 놀랐는지 눈을 꿈뻑였다. “…….” “히스?”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고 입 밖으로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 히스를 잠깐 두고 보던 혜성은, 시간이 지나도 눈을 뜨지 않는 히스에게 제대로 놀랐는지 기겁한 소리를 내지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으아아 히스! 히스!” “…….” “히스. 괜찮아? 괜찮아?” “…….” “히스! 히스! 다시 아파졌어? 히스!” 이리 저리 몸을 흔드는 혜성의 방향대로 흔들리기만 하는 히스가 눈을 뜨고 윙크를 한 것은 무려 1분이나 더 지나서였다. 놀랐어? 라는 말까지 하며 불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창백해진 혜성을 바닥에서 올려보는 히스라니! “이게- ” 정말로 그가 순간 어떻게 된 줄로 오해 했던 혜성이 진정이 되자마자 오른손을 번쩍 올렸다. 괘씸해서 참을 수가 없다. 허공을 가르고 빠르게 그의 뺨을 때리려던 오른 손은 그러나, 날렵한 솜씨로 잡아채는 히스 덕분에 역할을 끝내지 못했다. “걱정했구나. 내 사랑… 울지 마. 안아줄게.” “징그럽게 왜, 왜이… 야! 어디 아픈 줄 알았잖아!” “후후….” “갑자기 이게 뭐야!” “하하하하하….” “왜 웃고 그래… 멍청아.” 놀란 가슴 때문에 맺혔던 눈물이 뚝 떨어진다. 혜성의 볼 아래 괘씸하게 흐르는 눈물을 스스럼없이 팔을 올려 닦아주던 히스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아- 길게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면서도 히스가 정말 괜찮은 게 확실한지 의심을 감추지 못 하는 혜성이 연신 노려본다. 아마도 괜찮은 척 하는 히스가 못미더운 모양이다. 그래서 히스가 순식간에 말을 꺼내며 몸을 일으켰다. “…내가 괜찮음을 증명해 주지.” “……?” 멍청하게 다리를 벌리고 앉아있던 혜성의 어깨가 금 새 히스의 손아귀에 잡히고 눈을 깜빡하는 사이에 바닥에 눕혀졌다. 푸사사- 가볍게 뉘였지만 강한 손힘으로 혜성의 양 팔을 바닥에 누른 뒤, 히스는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눈망울로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속삭였다. “이 팔을 뿌리쳐 봐.” “?” 바닥에 뉘인 혜성의 몸 위에 자신을 겹치고 그것도 모자라 아이의 얇은 팔목을 제 양 손으로 누른 히스가 부드럽게 속삭인다. 그의 행복해 하는 장난기 가득 한 녹색 눈동자가 반짝 반짝 윤이 난다. “이 팔을 뿌리쳐 봐. 그럼 네 소원대로 침대에서 조용히 누워서 쉴게. 지켜준다는 말도 네 기분이 나아질 때 까지 안 한다고 약속하지.” “…아…아퍼….” 꿈틀거려도 전혀 움직여주지 않는 히스가 괘씸했던 혜성이 이윽고 팔목에 눌린 아픔을 호소해도, 그는 오히려 입 꼬리만 살짝 올렸다. “오… 귀여운 사람. 미안해. 아프게 해서 미안해. 그러니까 얼른 뿌리쳐 봐. 나는 아직 힘을 제대로 안 줬는데 뭐가 아파. 하하하.” “잇….” 팔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자 온 몸을 파닥거리는 혜성이 최후 일격을 가한다는 뜻으로 목을 마구 움직였다. 그러자 이 이상 지켜보는 것은 고문 이라는 표정의 히스가 느닷없이 안면을 내렸다. 가볍게 아이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방금 양치질을 한 히스의 입술이 벌어지자 상큼한 치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래도 입을 열지 않는 혜성이 휙 휙 고개를 돌리기만 하자, 그건 또 그것대로 귀여웠는지 히스가 항복의 뜻으로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하…….” “…넌 너무 키스를 좋아하는 거 아니니?” “…네 입술에게 이름을 주지.” “……?” 사르르… 다시금 목을 숙이는 히스 덕분에 그의 파란 머리카락이 혜성의 반쯤 감긴 눈 꺼플 위에서 춤을 췄다. 온온한 달빛이 둘의 머리 꼭대기를 닿을 락 말 락 약을 올리고 있었으며, 주변으로는 싱싱한 꽃들이 신문지로 감싼 몸을 으스대고 있었다. 참말로 끊임없이 로맨틱한 스스로를 표출하기만 하는 히스의 달콤함에 녹아 버릴 것 같은 혜성은 펑 터지는 하얀 내면에 영혼을 뉘인다. 간지럽고, 상쾌하지만, 녹초가 될 것처럼 무너지는 내 안의 아성. 혜성의 눈동자가 자신을 노려봐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며, 히스는 몇 번이나 입맞춤을 하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이대로 네가 녹아 버려야 한다고 위협하듯이,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미뉴엣을 지휘하는 자가 여기 있다. “…히스를 달아오르게 하는 입술.” “!” “그게 싫다면….” “으…….” 꾸욱- 입술을 누른 채로 10초가 넘게 정지한 히스 덕분에 숨이 턱 막혔던 혜성이 작은 숨결을 내뱉자 한 번 더 쪽! 소리 내어 입술을 누른 뒤, 히스는 간지럽게 속삭였다. “히스를 미치게 하는 입술.” “그만 말 해…….” “히스를 위한 입술… 히스에 의한 입술. 히스의 입술… 나는 에이브러햄 링컨이다아~” “…응? 아어… 아하하하하!” 별안간 꼿꼿하게 몸을 세운 히스가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허공에 팔을 브이자로 그리더니 파란 머리칼을 마구 휘둘렀다. 그것에 웃지 않고 견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천진난만한 그의 패턴에 백기를 든 혜성이 온 몸을 오그라뜨리며 쉬지 않고 웃었다. 새벽 다섯 시까지 다락방에 먼지가 일도록 뛰어 다니며 놀던 둘은 피곤이 밀려왔는지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무릇 평화가 곳곳에 맴돌았다. 언제고 이 평화가 깨질 날이 닥치겠지만, 그 때 견디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지내야 할 것 처럼 어쩐지 의무적인 감각마저 서로를 지배한다. “히스. 나를 사랑하고 있니?” 혜성의 걱정 가득한 질문 때문에 잠깐 심각해진 히스는 이불 속에 숨어있던 아이의 손가락을 꼬옥 쥐어 주었다. 시처럼 풍요로운 자의 입술이 또 한 번 세상을 지휘한다. 미뉴엣으로? 왈츠? 이번에는 어떤 광시곡으로? “사랑이란 무엇일까… 나는 너를 계속 보고 싶고, 놓치고 싶지 않아졌는데, 그 결심 때문인지 너와 만나기만 하면 만지고 싶어진다.” “나는 너에게 아주 간단한 것을 물었는데…?” “전혀 간단하지 않아. 나는 독일인이야. 모든 독일 남자가 이러지는 않겠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가장 유별나다.” “이자벨을 사랑했니?” 히스는 잠깐 말을 멈췄다. 그렇다. 이 아이의 기억 속에 히스클리프는 이자벨과 진한 사랑을 나눈 사람으로 기억되는 지도 모른다. 그 생각 하나 만으로도 표정이 험하게 변한 히스는, 분명한 투로 오히려 옆에 누워있는 아이에게 질문했다. “테레사는 어떤 대답을 했었지?” “…….” 또 대답이 없을 것 마저 예상 했다는 듯이 그의 지휘는 계속되었다. “한 때의 열병이지. 청춘이란 그런 거야. 겉멋이지. 하루에도 수 만 번 사랑의 미뉴엣이 귓전에 들려. 이자벨은 테레사와 돈독해지기 위한 수단 이었는지도 모르지. 그녀는 또 예뻤으니까.” “이자벨은…….” “로미오가 사랑했던 로잘린이다.” “……!” 휙- 자기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수페리우스의 까만 눈동자가 크게 뜨여 있음을 똑똑히 확인 한 뒤, 히스는 찰랑거리는 미소에 윙크까지 곁들였다. 멋쟁이이자 바람둥이로 정평이 나서 소녀들의 가슴을 못살게 굴었던 히스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청춘의 열병, 이자벨 장.” “그럼 나는 줄리엣?” 키득키득 웃으며 묻는 혜성에 반 해, 히스는 아까보다 진지한 투로 고개를 저었다. 그의 광시곡이 제 2주제에 들어선다. “아니, 줄리엣 다음의 또 다른 그녀… 로미오가 살아 있었다면 몇 번의 사랑을 더 했을 것 같나? 그렇지 않아. 그는 두근거림을 느낀 로잘린에게 버림 받음으로써 '실연'이 무엇인 줄 배웠지. 그리고 줄리엣을 통해서 터질 것 같은 순수한 사랑을 배웠다. 그 후의 로미오라면, 그 감정들을 조절하면서 크게 성장해서, 진짜 자기 사랑을 찾았을 거다.” “나를 사랑하고 있니…….” “전혀 간단하지 않아…….” 별안간 마음의 조절이 쉽게 되지 않았는지, 히스는 혜성의 몸 위에 잠깐 자신을 겹쳐서 입술을 눌렀다. 새벽이 주는 하프의 선율이 둘의 머리맡을 짜라라 스쳐서일까. 마법사가 지팡이를 휘두른 걸까? 두근대는 가슴에의 이유란 무엇일까! 이 순간 밑바닥이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고 있어요! 혜성은 불가항력 이라는 말을 절실히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뜨거운 기운 가득히 세상을 지휘하던 그의 혀가 빠르고 강하게 혜성의 수줍어하는 혀를 휘어 감았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노련하게 혜성의 혀를 빨아 당기고 치아를 건드리는 히스의 행위에 가슴께까지 전율이 미칠 때 즘, 그는 어지러워하는 혜성의 입술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눕는 척을 하며 아이를 방심하게 하더니, 그 틈을 타서 재빨리 몸을 겹쳐 아까보다 강하게 입술을 눌렀다. 오색으로 펼쳐진 사방의 모든 것이 히스 히스 히스 라며 혜성의 귀에서 메아리쳤다. “히스… 너의 키스는 너무 뜨거워…….” “네 피부가 차가운 거다 수페리우스.” 입맞춤의 시간이 지나도 통 떨어질 줄 모르는 히스가 미련이 많은 입술로 상기된 혜성의 얼굴 곳곳을 누볐다. 그의 입술이 지나가는 소리에 몇 번씩 어깨를 들썩이던 혜성이 겨우 다음 말을 잇는다. “히스… 너는… 하지만 가끔 말 하는 것을 보면 차갑기도 해…….” “네가 걷는 뜨거운 길을 식혀 주기 위해서지…….” “…….” “이히 리베 디히….” “!” 순간 퍼뜩 정신을 차린 혜성이 뭐에 홀렸던 게 분명해! 라고 깨달음을 얻은 순례자마냥 기겁해서 그로부터 떨어졌다. 이런 적이 없었다! 물론, 자기 주제에 테레사와 정혁, 게다가 민우까지 주변에서 사랑에의 감각을 느끼게 해 준 자는 있었지만, 그들은 히스와 전혀 달랐다. 이토록이나 사람을 빨려 들어가게 자기 식으로 이끌다니! 그것도 아닌 것처럼 조용히, 하지만 서서히 이만큼이나! 무서울 정도로 저에게 이끌리게 하다니! 하지만 혜성의 이 판단은 너무 늦어 있었다. 두 달 만에 히스가 꺼내는 이히 리베 디히 라는 구절에서 도망치기란 어리석은 노릇이었다. 그의 분명하고도 한결같은 어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안절 부절 하는 혜성의 눈초리마저 삼켜 버릴 것처럼 촉촉한 입맞춤을 반복하던 히스는, 더 뜨겁고도 폭포처럼 차갑지만 강렬하게, 그러나 부드럽게- 상대를 정신 못 차리게 하는 자신 만의 평생 간직한 문장을 아낌없이 내보냈다. “이히…….” “히…스….” 그만해- 마음속으로 백 번은 넘게 소리친 짧은 문장이 도저히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가슴이 옥죄어져 숨이 턱 막히지만, 그를 막을 기력조차 없다. 손가락조차 움직여지지 않는 이 지대는, 갑자기 황금이 풍성한 나라로 바뀐 걸까. 눈이 부셔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리베… 디…히….” “히스…….” 하지만 막아야 해- 라고 혜성은 순간 판단했지만, 그것마저 늦어있었다. 히스의 거침없는 속 내는 이제 시작이었던 것이다. 강한 팔로 혜성의 어깨를 꽉 조여 안은 채, 사르르 녹아내릴 것 같은 말투로 히스는 광시곡의 찬란한 주제를 넘나들었다. 그것은 사랑의 미뉴엣을 담고 있었지만 어쩐지 떠오르는 은율은 마법사의 광시곡과 다를 게 없었다. “무대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 하다가 죽는 게 내 소원이었어. 너와 함께 하며 소원이 바뀌었다.” “…….” “너랑 살다가 죽는 게 소원이다. 수페리우스.” 오 하느님! 천주여! 마리아여, 마리아여, 그래요 테레사! 오 테레사 저는 어쩌면 좋아요. 아니, 이 순간에는 당신조차 제대로 떠오르지가 않아요. 갑자기 떠오른 또 다른 태양이 저를 삼켜 버리려 하잖아요. 잠깐이에요, 그럴거예요, 테레사. 대지는 움직이지 않잖아요. 저는 어떡하면 좋은 거예요? 아이의 내면이 울부짖을 때, 또 그것이 잠잠해질 때 까지도 히스는 변함없는 말씨로 영혼을 위협하려 들었다. 히스는 어떨지 모르지만, 혜성에게 있어서 히스의 모든 것은 삶의 위협이었다. 그의 출현 자체가 시작부터 위협 이었듯이 밑바닥의 현재까지도 숨 막히는 위협이다. 마침내 혜성은 딱딱하고 분명한 투로 선을 긋기로 한다. 저으기 팔로 밀어내더니 후다닥 침대 옆의 의자에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다리를 모은 채 웅크리고 앉아버린 혜성의 태도에 눈을 번쩍 뜬 히스를 위해 정신을 차린 아이는 날카롭게 대응했다.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 소원이라면… 그것은 헛된 망상에 지나지 않아.” “아니, 나에게 도전은 위대한 것이다.” 오 세상에. 그러나 이 미친 태양은 절대로 지는 법을 모르는 채 광시곡을 지휘한다. 혜성은 부러 큰 소리를 내어 비웃었다. 가슴이 뛰다 못 해 심장이 아예 뺨으로 튀어 올라올 지경이다. “하, 하하하하! 뭐? 이것 봐 히스. 너의 사고회로는 대체 어떻게 짜여 있는 거지? 하하하하- 하… 하….” 두근- 혜성은 몸을 더 웅크렸다. 자신이 웃던지 말던 지 상관없이, 그는 한층 더 진지해진 낯으로 오히려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표정이 되어 혜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히스도 바른 자세로 상체를 세워 앉더니 작게 웅크린 혜성을 불같이 응시한다. 숨이 막힌다. 그의 시선에 던지던 비웃음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보기 좋게 사라졌다. “나에게 음악은 도전이었어.” 테레사가 보인다… 하느님… 저 확실하고 분명한 사상이 꺼내지니 제 2의 테레사라는 그가 진짜 테레사와 겹쳐져서 혼돈의 바다에 빠졌다. “나에게 사랑이 도전이 되는 날이 올 줄 알았다.” 테레사… 정말 당신이다. 당신은 아직 지지 않았다면서, 서서히 다시 보이네요. “단지 그 대상이 네가 되었을 뿐이야.” 독일의 테레사… 네 말은 거짓이 아닐 지도 모르겠어. 혜성은 어쩐지 눈물이 터져 나올 것 만 같은 기분을 억지로 누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것의 값은 스스로가 매기는 것이다. 남들 보기에 쓸모없어 보이는 것 이라 할지라도, 내 자신이 값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전능한 것으로 매겼을 때의 소원이란, 헛된 망상이 아니라….” “…….” “위대한 산물로 바뀌는 것이다.” “……!” “알겠습니까 아름다운 수페리우스?” 그렇지만 이 세상에 테레사는 단 한 명인걸! 한 순간이지만 히스의 자신 만만한 사상에 도취되어 넋을 잃을 뻔 했다. 그러나 혜성은 그럴 수 없었다. 히스에게 사상이 있는 만큼, 혜성에게도 변하지 않는 소중한 것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혜성은 옳게 다 잡은 정신을 부여 쥔 채, 어느덧 자신의 뺨을 더듬는 그의 손을 내버려두고 차게 문장을 내뱉었다. 광시곡이 끝나간다. “세상에 테레사는 단 한 명뿐이야.” “…그가 너에게…….” 네가 어떻게 나와도 내 안에 변하지 않는 진리는 늘 존재하는 법이지. 잠깐 크게 흔들릴 뻔 한 내면을 추스리고, 혜성은 진정된 자의 미소를 안면에 틔웠다. 덕분에 왕처럼 넉살좋게 떠들던 히스가 반대로 겁에 질리는 순간이 닥친 것이다. “나에게도 테레사는 단 한 명이지. 그 자리를 네가 차지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히스. 그는 태양이고, 나는 대지다. 그는 물이고, 나는 공기야.” “--!” “그럴~싸한 말로 나를 가질 수 있다고 속단하지 말아라.” “어째서 넌- ” 혜성의 기똥찬 자신감에 화가 난 히스가, 말을 막으려 하자 혜성이 고개를 치켜세우며 또랑또랑한 투로 뜻을 전했다. “네가 존경하는 테레사도 나를 음악에 풀어 줬기 때문이지.” “!” “천하의 테레사가 음악을 선택한 나를 영원히 기다리겠다고 했어.” “!” “그 자리에 너는 없다. 너는 공기도, 수풀도, 물도, 대지도 될 수 없어. 태양이 둘 인 세상은 없으니까.” 뭐라고? 음악에 뭐를 풀어? 사랑과 그것은 같을 수가 없는 거야! 히스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이 귀여운 사람이 갑자기 밉고 야속해서 뺨이라도 쳐야 속이 시원해질 것 같았지만, 참기로 한다. 맙소사. 사랑하는데, 이토록이나 원하노라 읊고 외쳤는데 물거품으로 바꾸는 사람이 있다니! 나 히스클리프에게 이토록이나 치명타를 입히다니! 히스는 자신이 지금 순간부터 수 만 번의 키스를 해도 바뀌지 않고, 달콤한 말을 흘려 봤자 소용없을 게 뻔한 눈빛으로 변한 혜성이 야속했는지 긴 시간 노려보았다. 째깍- 오전 여섯시를 지나던 초침이 둘의 무시무시해진 분위기에 잠깐 걸음을 멈추는 듯싶었다. “나는 그래도 결정했어. 이건 변하지 않을거야.” 꽈악 주먹을 쥔 채 이것만큼은 포기 할 수 없노라 최후 마음을 꺼낼 때마저도, 혜성은 싱그럽게 웃으며 그를 비아냥거렸다. “이자벨을 차지하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썼을 때도 너는 마찬가지였겠지.” “달라!” 넌 대체 뭐야?! 식으로 한 마디 더 신경을 건드리는 소리를 하면 짐승처럼 달려들 기세인 히스가 언성을 높이자, 잠시 움찔 거렸던 혜성이 씨 익 입 꼬리를 올렸다. 둘의 상황이 반대로 변했다. 놀라는 쪽은 이제 히스의 것이다. 혜성은 자리에 일어서서 다리를 벌린 채 침대에 앉아있는 그의 앞에 섰다. 그리고 위로 가득한 눈빛을 머금은 채,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다리 사이에 더 가까이 섰다. 그가 했던 것 보다 부드럽게 속삭여 주기로 한다. “…내가 독일인이고, 독일의 평범한 학생이었고, 너의 수페리우스로 채택 되었었다면…….” “…….” “나는 틀림없이 너를 사랑했을 거야 히스. 장담 할 수 있다.” “!” 이번에는 혜성이 히스가 했던 것처럼 살짝 윙크를 했다. 움찔- 손바닥 아래 히스의 어깨가 떨린다. 혜성은 기분이 좋아졌다. 아주 나른한 평화가 수면을 취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영혼을 지탱해 준다. “이미 지나버린 시간을 되돌 릴 수 없지 않던 가… 나는 네가 어떤 노력을 해도 변하지 않아.” “내 사랑…….” 마침내 애원의 어절을 내뱉는 히스가 혜성의 전신을 와락 끌어안으며 세게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럴수록 향기롭게 퍼뜨리는 혜성의 언어는 멈출 줄을 몰랐다. 아이의 작은 손바닥이 히스의 파란 머리칼을 쓸어 준다. 광시곡이 지난 불같은 자리에 차갑지만 한결같은 바다의 솔베이지가 서서히 1주제에 들어섰다. “내 안의 테레사와, 음악을 너는 꺾을 수 없기 때문이지.” “…….” “너에게는 그 대신, 나의 육체를 주마.” “……!” 히스의 손힘이 말도 못 하게 세어진다. 혜성은 아찔해지는 숨을 고르며 히스의 머리를 가슴에 포근히 안아주었다. 그의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물론, 약간 둔한 감이 있어서 그가 시시콜콜 화를 낼 때 박자를 못 맞춰 준적은 있지만, 어떤 사람이 '이히 리베 디히'라는 고백에 무지할 수 있겠는가. 혜성은 전혀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히스의 지난 고백에 대한 제대로 된 대답을 이제 서야 꺼내는 것이다. “한국의 수페리우스 신혜성이, 독일의 히스클리프 폰 뤠겐부르크에게 마음과 음악을 던질 수 없는 대신, 네가 나에게 주었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나의 몸은 줄 수 있다. 그것 외에 줄 만한 재력도, 능력도 없으니…….” “…….” “보잘 것 없는 나에게 뭘 느꼈는지 나는 모르겠지만…….” “너는 스펀지와 같아.” “……?” “매력이 사실은 없을지도 모르지. 무의 상태와 같아. 하지만 다른 이의 매력을 말도 못하게 빠른 속도로 흡수해서, 더 멋지게 네 것으로 태어나게 한다. 너는 모든 이의 매력이 섞여있어. 사람을 빨아 당겨. 너는 이상해. 그저 신기하고 작은 소년인 줄 알았는데, 너는 나마저도 빨아 들였거든. 그리고 성장하지… 재프와 콩나무의 그 큰 줄기가 될 날이 머 잖았어. 나에게 있어서 너는 여자도, 남자도 아니야.” “…….” “너는 나에게 음악이고, 사랑일 뿐이다.” “…….” “몸을 준다고…?” “그래….” “내 사랑… 너는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을…?” “너는 나의 것이야…….” “쿡… 히스.” 혜성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불안함을 느끼는 용맹한 그의 손이 아이를 추스러 가며 세게 부여안는다. 그리고 작은 몸에 입술을 붙인 채 중얼거렸다. 온온한 아침의 햇살이 밀려오고 있다. “몇 번이고 속삭여 줄게.” “아…….” “이히… 리베… 디히… 네가 나의 속삭임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게 만들어 버릴 거다.” “…….” “곁에 있기만 할 거야….” “…바보구나 히스는…….” “…….” 가슴이 터질 것처럼 최선의 소리를 내뱉는 그의 입술이 문득 가여웠던 나머지 혜성이 포근한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히스의 양 뺨에 손바닥을 붙이고 자신을 올려보게 움직였다. 서글픔을 담은 녹색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혜성을 올려보며 몇 번이고 사랑의 푸른 물을 던지려 한다.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정혁이도 처음 모습은 너와 비슷했지. 하지만 변했어. 그 애는 날 소유하기 위해 무섭게….” “테레사는 어땠지?” “히스… 너는 나를 따라다니지 않고 너 만의 세상에서 홀로 살 수 있니?” “…아니. 그냥 지켜보기라도 해야 돼.” 녹색의 눈동자에 안개가 끼인다. 혜성은 그 안개에서 맺히는 물방울의 정체가 무엇인지 잘 알았다. 때문에 맺히기도 전에 아이의 작은 손바닥이 그의 눈동자 주변을 맴돌며 꺼내지지도 않은 눈물 자국을 닦았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고, 미안하다는 뜻을 담아 수페리우스가 슬프게 속삭인다. 아이의 머리가 약간 숙여져서 저 스스로 히스의 부드러운 이마를 스쳤다. “…그는 나를 음악에 자유롭게 풀어준 유일 한이야.” “!” “테레사 말고는 할 수 없어. 그 누구도 이 영역을 이해 못 하겠지. 나를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거야.” 히스는 이 순간, 자신을 내려보는 혜성의 시선에서 피로를 읽었다. 그러나 물러나자니 억울하고 분해서 견딜 수가 없는 질투심에 미칠 것도 같았다. 또, 오늘이 아니면 이 사람의 결심을 못 들을 듯싶다. 적어도 몸은 주겠다는 수페리우스의 선언이 히스의 내면에 파장을 일으켜서일까. 그는 불확실해진 눈동자를 혜성에게 맞추었다. “너랑 자고 싶어, 수페리우스.” “…그래. 잘됐다. 나도.” “…….” “왜?” “이건 악수처럼 간단한 게 아니야.” “너한테나 그렇지, 난 별로… 아,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과 자겠다는 뜻은 아니니까 오해 마.” “그럼… 뭐야?” “다시 설명하지만, 너는 나에게 평생이 될 수 없어.” “…….” 수페리우스의 눈동자가 총명하게 반짝인다. 아마 히스는 더더욱 애가 닲겠지만 정말로 지금 이 순간 육체를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대신 몸을 주마.” “!” 흐… 히스는 눈물을 참는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긴 탄식이 노여운 색 그대로 히스의 입 밖에 빠져나왔다. 혜성은 그럴수록 다정한 소리로 그의 모든 것을 이끌어 준다. “너의 영혼과 지혜와 시간을 나에게 주었으니…….” “!” “나는 그것을 주지.” “…….” “…내가 밉지?” “…….” “잉?” 오전 여섯시 반이 될 무렵, 히스는 혜성의 입에서 계속 나올 소리들이 두려웠는지 재빨리 아이의 허리를 한 팔에 당겨서 침대에 눕혔다. 꼬 옥 안은 채로 이불을 덮고, 그는 눈을 감고 졸리지도 않은 입술을 떠들었다. “자자. 자고 나서 밥 먹자.” “?” “…….” 지금 순간 혜성의 옷을 벗기지 않는 대신, 그를 품에 안고 차라리 잠을 자기로 한 히스가 연신 십칠 십칠 욕을 내뱉는다. 혜성은 조용히 자는 척 하다가 히스의 십칠… 이라는 소리가 지날 때 킥 하고 웃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히스가 번쩍 눈을 뜨고 혜성의 몸을 간지럽힌다. 까르르 웃음 소리가 다락방 곳곳에 미쳤다. 하긴. 어떻게 이 엄청난 대화가 오고 간 끝에 잠을 자겠는가? 당신이라면 잠이 오겠는가? 어쨌든, 영원히 평화로웠으면 좋겠을 새로운 날의 태양이 오늘도 떠올랐다. wgreene@naver.com 앞으로도... 계속 사랑 얘기만 있으면 오죽 좋겠느냐만.. 그럴수는 없겠지요? ^^ 이번 편은 올리고 보니 히스특집편; 같습니다. 도저히 뺄 게 없어서 다 너었으니 왜 사건이 없는게야? 라고 기대하셨던 천사씨 계시다면 조금만 기다려 주시기를...^_~ 저도 당신처럼 빨리 이놈의 수페리우스를 학교에 던지고 싶습니다.+_+ 근데 순서가 아직 남아 있어서...^^ 헤헤... 저의 댓글에 대한 댓글은 역시 댓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공지도 꼭 확인하시구요, 좋은 하루 되세요! ^^ 어제오늘 총 2편 올린 거니까 확인 잘 하세요. 참, 비밀 하나 알려줄까요? 아마데우스의 동완이가 심리학에 관심이 많잖습니까? 근데 초기에 아마데우스 인물 설정했던 노트를 우연히 펼쳐 봤는데... 음... 동완이가 원래는 요리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대사까지 다 정해져 있었더군요. 저도 긴시간 잊고 있었는데, 그는 요리학도가 꿈인 아마데우스 학생이 될 뻔 했습니다.^^ 그렇게 할 걸 그랬나요? 아니면 이참에 요리학도 한 명을 3악장쯤에 추가로 만들까...(중얼중얼..) * 음악 수정했습니다. 러브스토리 테마로요. wgreene 화이트그린 2악장 12편 올림. 060414 Love Story-Summer Of 4.. 덧글 13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12편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12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13편 ▼ 다음글 - 2악장 11편(섬세한 날의 시작)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13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4/15 18:17 http://blog.naver.com/wgreene/110003449267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415 13편 업데 060414 12편 업데 060413 11편 업데) Amadeus 음악 : 그대만이(Piano ver)(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그대만이 (Piano ver)-O.. 내가 밉지 않니…? 너를 밉게 볼 수 없는 내가 확실히 미친 게 분명해, 수페리우스……. 2악장 13편 2월의 함박눈이 세상을 덮었다. 다락방 창문을 활짝 열고 쌀쌀한 바람에 몸을 맡기지만 혜성은 등 뒤로 물씬 전해져오는 꽃의 향기가 더 가까이 느껴졌다. 문득 창틀에 고여 있는 흰 눈 덩어리 위에 꽃을 심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금방 얼어서 시들겠지만, 잠깐의 모양새는 아주 예쁠 것이 상상되었기 때문이다. 『 아름다움은 퇴색하기 마련이다. 화장을 지우는 여자처럼……. 』 눈을 감기 무섭게 지난 날, 아마데우스 C동 506호에서 강렬하게 읊어 주셨던 테레사의 음성이 귓전을 후려 찼다. 혜성은 나폴리는 소매 단추를 꼭 쥔 채로 자꾸 사라져가는 태양의 소리를 잡으려 애를 썼다. 『 나는 세월이 지나 돌이 될 진주에 값을 세기지 않아. 』 어떻게 해도 피해 달아나는 테레사의 뜨겁지만 만지면 차가웠던 그 음성이 겨울의 이삭이 되었나봐. 왜 나는 다른 사람의 고백을 두고, 다른 이의 사랑이 두드리면 항상 당신의 경우와 비교 하게 될 까요, 테레사. 『 귀를 닫아라. 저질은! 들을 가치도 없다. 』 “…….” 그의 세 번째 음성이 영혼에 미칠 때, 늘씬한 몸매의 테레사가 정복을 입고 위원회를 통솔하고 지나가는 모습이 아른거렸다. 호통을 치셔야지요, 테레사. 당신이 나를 악기로 보셨다가 사랑으로 시선을 바꾸셨던 그 때 처럼, 저에게 화를 내셔야지요. 또 다른 누군가가 사랑 이라는 이름으로 저를 흔들려 하지만, 소용 없는 걸요. 오늘 저는 유리라는 샤우트의 소녀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러 갑니다. 『 피아노를 ‘발전에의 수단’ 취급 하지 말아라. 』 그래요. 그렇게 말씀 해 주셔야지요. 사랑 이라는 감정에 흔들려 한 때의 제가 혹시라도 음악을 등한시 하게 되지 않을까 당신은 불안하셨던 거지요? 당신의 악기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테레사… 오 테레사. 당신이 느끼셨을 모순을 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네요. 귀를 닫을수록 가슴까지 파고들어오는 잔인하지만 멋진 음성이 있다. 혜성은 하나하나 스쳐가는 테레사의 말이 오늘따라 유난히 각인 되는 것을 어쩌지 못 한 채 내버려 두었다. 히스와 가까워질수록, 히스가 사랑의 열병에 걸려 환자처럼 변할수록 흔들림 없이 자신을 지탱했던 테레사가 그리워졌다. 혜성은 맹세할 수 있었다. 테레사와 같은 인물은 죽는 날까지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저 하얀 눈송이에, 천주께 피로 맹세하라면 할 수 있었다. 『 나는 혼자만의 나라에서 살고 있지. 국적이 없다. 나랑 살자. 나와, 내 나라에서 같이 살자. 아직은, 나라가 만들어지지 않았으니까, 네가 자라고, 또 내가 더 자란 먼 훗날, 우리 같이 살자. 』 당신은 어디 계시나요, 테레사. 너무 오랫동안 나의 생활에 바빠져서 선배를 추억하는 시간을 갖지 못했는데, 이런 제가 야속하지 않으신지요. 혜성의 눈가가 붉어질 무렵, 혁명의 마지막 새벽 날, 폐허에서 으스러져라 안아주며 조용히 읊어주던 테레사의 음성이 분명하게 스쳐 지나갔다. 『 보고 싶었어. 』 보고 싶어요. 『 꿈도 꿨다. 』 꿈을 꿔도 될까요. 『 매일매일 보고 싶었어. 』 매일매일 보고 싶었을 거예요. 당신을 생각하지 않는 시간조차, 그 어느 날 선배가 밉다고 소리쳤던 순간마저. 『 그래서, 네가 보고 싶어질 때 마다 연습하고, 하는 수 없이 밥 먹고, 네가 너무 보고 싶어지면 그냥 걸어 다녔어. 보고 싶어서 책도 봤다. 』 그 날 당신은 용맹한 두 눈에 튄 파편으로 상처를 입었었다. 몹쓸 붕대가 감히 당신의 총명한 눈을 가리고, 나는 울었지만 여지없이 웃어 주셨던 기억이 그리움으로, 책의 글자처럼 전설이 되어 갑니다. 기억 하시나요 테레사, 우리는 미쳐가고 있다며 그 때를 여겼지만 전혀 미치지 않았었어요. 『 할 수 있을 것 같다. 슈만이 되어서 클라라를 위한 연주를, 나도……. 』 정작 미치게 되는 건 서로 가 떨어져서 각자의 현실을 이겨내는, 지금입니다. 테레사. 선배가 보고 싶어져서 선배의 생각을 하는 척 하면서 저는 솔베이지를 연주했어요. 『 하프의 선율을 본 적이 있나, 신혜성? 』 하모니를 룸펜에 퍼뜨렸고, 바닥 청소도 가끔 해 봤지요. 아마 선배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질 때는 히스가 알려준 단어를 외우고 작곡 공부에 열중했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 당장 보고 싶어요. 갑자기 선배의 날카로운 시선과 예식 복을 입고 모두를 이끌어 주셨던 온화한 미소까지도… 확실해지는 음성과는 달리 모습은 생각이 나지 않아요. 변하지 않는 감성이 있다. 못된 흔적이 있다. 혜성은 스스로가 다시 보였다. 히스뿐만이 아니다. 자신은 잘 지내다가도 누군가의 지린 고백이 꽂히면 늘 죽은 듯이 물렀던 테레사로부터의 회상에 도취되어 그리움을 반복 시켰었다. 예전의 정혁이는 그 점을 아주 싫어했고 싫다는 감정을 낱낱이 표현했었지만, 히스는 오히려 반대로 굴지 않던가. “어…….” 눈이다… 혜성은 양 손을 쭉 내밀어서 그것들이 스쳐 내리도록 멍하니 서 보았다. “!” 그 때 예고 없이 닥친 따스한 무언가가 혜성의 등을 꼬 옥 감싸 주었다. 선량한 자의 움직임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밖으로 내밀어진 혜성의 팔을 저의 것으로 감싸더니 천천히 다락방 안 쪽으로 가져왔고, 조용히 창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 “…….” 지난 번, 사랑에의 확실한 대화 이후로 부쩍 서로에게 말 수가 줄었던 두 사람은 가만히 서서 막 내리는 함박눈을 응시하였다. 나란히 있는 둘을 위해 오후의 태양은 길고 아찔한 그림자를 선물해 주었다. 쭉 늘어난 두 사람의 하나 된 그림자가 다락방 바닥 곳곳에 펼쳐진 꽃을 스치고, 발아래 채일 법 한 악보들을 스친다. “감기 걸리면 안 돼…….” 화를 내고, 일부러 더 테레사에 대한 그리움을 쏟아냈지만, 히스는 변함없이 자상하기만 했다. 이제 그가 움직이는 동시에 사방에서 음표가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보다 아름답게, 보다 섬세하게 감미로운 선율을 그는 무의 공간에서 빚어낸다. 혜성은 테레사를 떠올리는 동시에 나타나서 자신의 등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히스를 위해 부드럽게 말문을 열었다. “…너도…….” 이 때,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전율에의 감각이 혜성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방금까지 떠올렸던 테레사의 절대적인 믿음이었다. 혜성은 온 몸이 꼬 옥 감싸인 채로 흐리멍텅한 투를 내뱉었다. “사랑할 수 없어…….” 혼잣말이나 다름없는 그것을 어찌 해석한 건지 모를 히스는, 아이의 가여운 음성에 미어지는 고통을 애써 감추며 상냥하게 대꾸해 주었다. 솔솔 한 히스의 입김이 혜성의 귓가에 날아간다. “괜찮아.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우리는 이어져 있는 거야.” 더더욱 흐릿하게 변하는 혜성의 동공은 마치 공상에 빠진 예닐곱의 아이처럼 색을 알 수 없는 빛이었다. 그는 더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해하지 않을 거야.” 혜성의 얇은 허리를 숨도 못 쉬게 하려는지 아주 잠깐 사이 꽉 힘을 주고 두른 히스가, 서서히 그것을 풀어주며 고통에 찬 숨을 공기 중에 퍼뜨렸다. “영화도 안 봤어? 사랑하는 사람한테 미안해 라는 말은 필요 없는 거야.” “내가 밉지 않니?” 뒤늦게 정신을 차린 혜성이 안긴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넓은 팔이 이제는 혜성과 마주 보자 작은 등을 부드럽게 감싸 준다. 햇빛에 반사되는 조각보다 섬세한 히스의 안면이 사람임을 증명하려는지 자잘한 근육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이다. 한 번 더, 내가 밉지 않니? 라고 혜성이 묻자 히스는 아이를 더 바짝 밀착시키더니 방금까지 수페리우스의 시선을 차지했던 질투 나는 창 밖을 향해 슬픈 음절을 토해냈다. “너를 밉게 볼 수 없는 내가 확실히 미친 게 분명해, 수페리우스…….” 오늘도 함박눈이 쉬지 않고 쏟아지려나 보다. “선생님은…….” “……?” 레슨 시간에는 혜성의 설명을 듣기만 하는 유리가 신중한 투로 말허리를 잘랐다. 기본기는 갖추고 있기 때문에 최근 소나티네를 가르치고 있던 혜성이 호기심 짙은 눈매로 피아노에 앉아있는 유리를 응시했다. “…아니에요.” “…….” 키가 작고 이름처럼 깨어질 것 마냥 투명한 소녀가 바로, 유리였다. 하 논과 소나티네만 줄 창 연주하게 하는 혜성의 최근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손힘을 미리부터 길러두기 위해서 유리에게 아직은 무리일 지도 모를 하 논 교본을 가져온 게 실수인가? 싫은 걸까? “…….” “!” 말없이 연습했던 부분을 건반에 누르는 유리를 보며 고민에 잠겼던 혜성은, 순간 알아차렸다. 그래. 레슨 하러 왔을 때, 늘 자신은 필요한 말만 했었다. 룸펜 식구들과 한스네 몇 명 친한 녀석들 이외의 낯선 사람들에게 대하듯이, 밑바닥의 자신이 정한 성격대로 그것을 유리에게 실천했었던 것이다. 가뜩이나 말없이 조용히 있으면 차가워 보인다는 소리도 종종 듣는 요즘인데, 유리는 선생님인 자신을 얼마나 어려워할까. 이태원 역에서 아주 가까운 편에 속한 샤우트는 낮은 건물인 것에 비해 주위 공기가 삼엄했다. 그 안에서 땅땅 울리는 피아노 선율은 모순이라 할 만치 어울리지 않았다. 혜성은 문득 이 평범한 소녀가 궁금해졌다. 한 달이 넘는 내내 이렇다 할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던 그는 그래서 주변에 있던 의자를 끌어 와서 유리의 옆에 앉았다. “선생님은… 본래 그렇게 차가우신 분인가요?” “…….” “말도 없으시고요?” “…….” 허나 이제 와서 살갑게 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던가. 혜성은 난처한 표정으로 묵묵히 유리의 하소연을 듣기만 했다. “그리고…….” “약하게 해야지! 피아노! 또 또, 페달!” “…….” 이크. 살갑게 대하기는커녕, 그녀가 방금 무의식중에 실수한 부분을 큰 소리로 지적해 버렸다. 표정이 싸악 굳어진 유리에게 미안하다고 말을 건네는 건 더 우스꽝스러울 걸 알았기에, 혜성은 억지로 악보를 펜으로 두드리며 지적했다. “이 부분하고… 또 여기. 동그랗게 표시한 부분들 지난번에도 틀렸었잖아. 다음 레슨 때까지 다시 연습 해.” “…네…….” 둘은 또 다시 조용해졌다. 규칙적으로 공간을 메우는 피아노의 건반 소리만이 어색한 곳곳에 돌아다녔다. 그러고 보니, 레슨을 맡아 주겠다고 했지만, 왜 유리가 자신에게 배우고 싶어 하는지 혜성은 아직도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아까처럼 유리라는 소녀의 마음에 호기심이 발동했지만 섣불리 묻기는 꺼려진다. 그래도 유리가 나를 많이 어려워하면 곤란한데… 대낮에는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조용한 샤우트의 곳곳에서 혜성을 아니꼽게 쳐다보는 사내놈들이 내내 신경 쓰이는 판이지만, 진심으로 사력을 다 해 레슨을 해 주었는가- 이 점을 돌이켜 봐야 한다. 그 생각 하나로도 진땀이 났는지 혜성은 연주를 마치고 소나티네 교본을 조용히 덮는 유리의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였다. “선생님.” “……?” 한 시간 가량 함께 했던 레슨타임이 끝나고, 혜성이 초조해 하는 것을 흘깃 눈치로 알아 낸 유리는 새초롬 한 입술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오후의 시작부터 세상을 덮던 함박눈은 모두 그쳐 있었다. 다 식은 홍차를 쭉 들이키는 혜성이 다리를 꼬아 앉은 채로 고개 짓을 하자 유리는 냉큼 앞에 서서 별안간 꽥 소리쳤다. 이크. 혜성은 놀란 나머지 홍차를 내뱉을 뻔 했다. “저도 소나타를 연주 하고 싶어요!” “…….” “안 되나요?” 오호라, 저게 궁금했던 건가? 비록 2악장 내지 4악장의 간단한 구성으로 짜여져 있긴 해도, 소나티네 역시 훌륭한 작품이라고 보는데… 혜성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차갑게 내뱉어지는 음성을 어쩔 수 없이 또 쏘아 붙였다. “같은 거야. 소나타나 지금 하는 클라우의 소나티네나… 어차피 작은 소나타라는 개념이니까. 물론 소나타 보다야 규모는 작지만 이것도 아름다운 예술 작품인데?” “하지만…….” 금방 울상을 짓고 입술을 깨무는 유리를 응시하는 내내 혜성은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멋진 곡을 연주하고 싶은 마음을 왜 모르겠냐마는, 개성 이라고는 눈곱 만치도 없이 배우는 속도가 아주 느린 이 학생에게 소나타는 아주 먼 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들어도 유리의 실력은 후한 점수를 준다고 쳐도 체르니 100 번 정도의 수준인 걸 알아 챌 것이다. 그러나 좌절에 빠진 유리에게 혜성은 잔인한 말을 냉큼 꺼낼 수 없었다. 선생님인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아직 멀었다는 말은 왠지 하기 싫었다. 하여, 혜성은 잠시 고민하더니 흔쾌히 소녀의 불만을 받아들여 준다. “그럼 모차르트부터 시작해 볼까? 그 대신, 방금 틀렸던 부분을 완벽하게 소화 하는 것을 다음 레슨 때 들려주면, 바로 모차르트로 넘어가지.” “정말요?” “…….” 바로 그 때, 불꽃같은 스파크가 머리 위에 스프링처럼 튕겨 갔다. 무엇일까, 무엇이지? 당장 눈을 빛내고 천하를 얻은 여왕처럼 화사하게 웃어주는 유리가 예뻐서? 좋아하는 소녀보다 혜성의 감성이 더 발작을 부려대는 현재, 그는 저도 모르는 사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진짜죠, 선생님?” “…….” “너무 신나요 선생님!” “?” 내가 잠시 잊은 중요한 게 있었나? 하며, 혜성이 슬슬 불안 해 할 때였다. 손뼉을 치면서 싱그러운 웃음으로 일관하던 유리가 지난날의 모든 고통이 사라졌음을 제대로 설명해 준다. 혜성의 눈이 말도 못 하게 커진 것은 그 때였다. “선생님 이라면 가르쳐 주실 줄 알았어요!” “그게 무슨 소리니?” “다른 학원에서는 아직 멀었다면서… 순차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하지만 저는 소나타라는 것을, 바 하 라는 것을 연주 해 보고 싶어서… 멀었다는 것은 알아요. 그래도 레슨 받으면서 지금 당장 배우고 싶었는걸요!” “!” 쩡- 얼어버린 내면이 몽땅 부서졌다. 혜성은 화끈거리는 볼을 감추기 위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자신 역시 유리의 수준을 염두 해 두었기 때문에 낮은 수준에서 차례대로 가르치려고만 했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은 다른 일반 학원들의 방식과 다를 게 없었다는 소리였다. 기대와 기쁨으로 상기된 유리를 보니 지난 날 자신의 모습이 또 한 번 겹쳐졌다. 혜성은 그리움 짙은 눈매를 망망대해에 빠뜨리듯 흐릿하게 바꾸며 과거 사비나 교수가 해 주셨던 말씀을 떠올려 보았다. 그 분의 말씀이 옳다. 온 몸이 전율로 들썩일 때, 사비나의 음성이 혜성을 스쳤다. 『 한국의 피아노 교육 방식은, 특히나 학원에서 가르치는 것은 형편없다. 과정? 그것은 배우는 자가 원하는 어려운 악보 하나만 제대로 알려 줘도 다 알게 되어 있거든. 』 나 역시, 오래 전에 관뒀던 피아노를 다시 하기 위해 어떻게 굴었던가. 손 감각을 되살리기 위한 수단으로 폐허에서 무작정 소나타 따위를 연주했었어! 그것도 내 한계 이상의 것들을! 『 칠 음계만 알려줘도 되는 거야. 본인의 의지만 있으면 되는 거지. 』 교수님… 혜성은 가까스로 건져 올린 눈매에 총기를 불어넣으며 유리를 마주봤다. 뇌에 울리는 사비나 교수의 음성이 지나치는 족족 혜성의 입 밖에 꺼내진다. 『 중요한 것은, 사람의 의지라는 것이다. 』 “너도 할 수 있을 거야. 중요한 것은, 사람의 의지이기 때문에…….” 『 그냥 좋아야 돼. 』 “그냥 네가 좋으면 되는 거야, 유리야…….” 테레사에 대한 그리움이 갑자기 밀려온 날 이라서 그럴까. 생각 없이 대충 있는 실력으로 가르치기만 했던 유리의 다른 면을 발견해서일까. 레슨을 마치고 샤우트 입구를 나오는 혜성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가슴이 뜨거워서 이 위에 눈이 내리면 비명을 지르며 죽을 것 같았다. “아……!” “눈을 어디 달고 다니는 거야?” “뭐?” 입구 밖으로 가볍게 나오던 혜성이 커다란 녀석에게 밀려서 가슴을 쥐고 한 걸음 물러선다. 별안간 튀어나온 샤우트의 놈이 되려 성화를 부리며 크게 소리치자, 주변에서 체스 따위를 하며 시간을 보내던 잔챙이 녀석들이 불같이 이 쪽을 쏘아본다. 한스 녀석들과 적대 관계라는 샤우트의 놈들이 혜성을 모를 리가 없다. 그들의 오싹한 눈초리에 화들짝 놀란 혜성이 일단은 물러나야겠다는 판단에 꾸벅 고개를 숙였다. “킬킬킬킬.” “조심 해, 룸펜. 또 걸리면 아예 죽여주지.” “하하하하하!” 박장대소를 터뜨리는 그들의 행동을 두고 속으로 욕을 삼키며 혜성은 재빨리 샤우트에서 먼 곳으로 빠르게 걸었다. 2월의 함박눈은 클래시컬한 룸펜의 외부에 멋지게 쌓였다. 변할 게 없는 하루다. 샤우트 녀석들이 레슨 갈 때마다 노려보고 시비 거는 것? 그게 무슨 변화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성은 자꾸만 초조해지는 내면이 이상하다 여겼는지 레슨을 마치고 돌아오는 즉시 손을 걷고 구석구석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초조하다는 감정 역시 생각의 하나니까, 몸을 혹사시킴으로 없애면 돼. 오늘은 정말 이상한 날인가보다. 테레사를 추억해서? 유리 때문에? 괜히 자신에게 시비를 걸었던 아까의 샤우트 잔챙이 때문에? 혜성은 재수 없는 날이라고 여기며 가볍게 넘어가려 했지만 갈수록 초조해지는 내면을 어쩌지 못했다. 그것은 룸펜 구석에 찌부러져 있는 주정뱅이 녀석에게 욕을 지껄이며 꺼지라고 할 때도 나아지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 없는 정갈하고 규칙적인 생활에 있어, 통 사라지지 않는 불유쾌한 감정이 혜성을 못 살게 군다. 청소를 해도 소용없고, 다른 웨이터 놈들을 대신해서 주정뱅이 몇 놈을 해치울 때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감정의 정체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채 2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유리에게 레슨 하러 가기 직전까지 나란히 다락방 창가에 서서 체온을 나누었던 히스가 시선에 잡히지 않는 것이 수상하다 여긴 혜성이, 자신이 서 있는 무대 주변을 시작으로 그를 찾으려 마음먹었던 때였다. 그를 궁금해 하지 말았어야 했나? 쾅- 룸펜의 도어가 세게 열리고 눈에 익은 두세 놈이 후다닥 들어왔다. 다들 눈이 휘둥그레져서 한스 패거리 놈들에게 인사를 건네려 손을 올렸으나 손은 허공에서 아예 굳어 버렸다. 오늘의 저 녀석들은 짐승처럼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입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는 늑대의 시선보다 두렵게 다가왔다. “한스 못 봤어?!” “……뭐?” 저녁이 질 때, 약간의 피를 묻힌 채 들이닥친 레이놀드와 두 놈은 혜성과 룸펜의 모두를 둘러보며 다짜고짜 큰 소리로 한스를 찾았다. “샤우트! 이 시궁창 새-끼들이-” “레이놀드!” 혜성이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레이놀드는 난생 처음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낯을 남기고 왔던 것보다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그를 따라 들어와서 룸펜 곳곳에서 '한스!' 라고 크게 불렀던 잔챙이 놈들도 나갔다. 멍청하게 서서 저 들에게 어떤 안 좋은 일이 생긴 건가? 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던 혜성과 다른 녀석들은 곧, 괜찮겠지- 하며 서로에게 억지로 농담 따위를 했다. 오늘은 참말로 이상한 하루임에 틀림없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두근… 두근. 세포를 찢고 튀어 나올 것처럼 덤벼대는 심장 쪽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혜성은 다시 히스를 찾기 시작했다. 늘 자신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졸졸 따라붙었던 그림자 같은 그가 룸펜 곳곳을 뒤져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상하다. 옳거니! 한 개비의 변화가, 1주제에 들어선다. 화려하고 난폭해야 할 2주제를 위한 폭풍전야와 진배없는 약간의 침체된 1주제가 바로 이 순간! 세상 이라는 건반을 쾅- 누른다. “뭐라고!?” 왜 기쁨은 하나씩 천천히 생기고, 고통과 불행 이라는 이름은 한꺼번에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걸까. 혜성은 때마침 다락방 계단에서 내려오는 정하에게서 믿을 수 없는 내용을 듣고 하얗게 질렸다. “다… 다시 말 해 줘, 뭐라고?” 기어이 못난 심장이 피부를 찢고 달아난 걸까? 박동의 숫자가 느껴지지 않아. “방금 연락이 왔는데… 이거 참… 히스… 어머니가 어제 돌아가셨대. 그래서 그의 독일 쪽 비서가 바로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나봐. 막 도착한 모양이야. 한 시간 후면…….” “!” 오 하느님 제발! 아이는 겁에 질려서 대답의 역할을 순간 상실해 버렸다. 어쩌면 히스가 혜성에게 사랑한다고 읊어줬을 그 시간에, 그의 어머니가 독일 땅에서 운명하셨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떨어졌던 탓이다. 모든 사물이 노랗게 번진다. 이 때 혜성은 공상에 빠지듯이 흐릿해진 시야로 생각했다. ‘히스는 분명히 다락방에 있었을 텐데… 그래… 맞아. 늘 그 곳에서 틈만 나면 우리는 있었는데… 왜 생각을 못했었지. 왜 아까까지, 나는 히스가 다락방에 당연히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하고 엉뚱한 주변만 찾았던 거지… 왜….’ “히-스-!” 정신없이 발을 헛디디며 겨우 다락방에 올라왔을 때, 혜성의 시선에 잡힌 것은 슬로우 모션으로 천천히 아이 쪽을 향해 등을 돌리는 히스의 창백해 진 표정이었다. 아주 낯선 사람처럼 멀게만 느껴지는, 엉망진창으로 짐을 꾸리고 있던 히스클리프 폰 뤠겐부르크 라는 이름이었다. 이렇듯 기묘한 박자를 뚫고, 어두운 곳을 아주 좋아하는 운명의 마차가 서서히 달려오고 있었다. 막 시작된 1주제를 지나며……. wgreene@naver.com 최근 총 3편 업데 했으니 잘 확인하세요. 방금 이렇게 한 편 더 업데 했습니다. ^^ 즐거운 주말 되세요. (히스; 미안해; 너의 괴로움도 이제 막 시작이구나.. 나는 이런 여자야.. -_) 저의 댓글에 대한 댓글은 그 편의 댓글에서 확인하시면 됩니다.(이상한 설명..) wgreene 화이트그린 2악장 13편 올림. 덧글 6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13편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13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14 -1 편 ▼ 다음글 - 2악장 12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14 -1 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4/17 15:16 http://blog.naver.com/wgreene/110003504271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417 14-1편 업데) Amadeus 음악 : sleepsong -secret garden (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Sleepsong-Secret Garde.. 울어야 할 때, 쉽게 눈물이 나오는 사람은 행복한 거야. 그만큼 인생에 있어 굴곡이 많지 않았다는 증거 일 테니……. 겪었던 고난의 크기가 너무 높아서 메마른 심장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죽은 자의 혼이 씌인 것처럼 무덤덤한 표정이거든. 나는, 이런 내가 무서워서 가끔은 도망치고 싶었어… 바로 지금처럼. -히 스- 2악장 14 - 1편 히스의 흐릿해진 녹색 눈동자는 여느 때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의 호수처럼 넓어진 눈동자 공간은 그의 젖은 표정을 공개하는 과오를 저질렀다. 그는 모르는 눈치이다. 자신이 어떤 표정으로 희미하게 웃고 있는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바보 같은 사람이다. 혜성이 자신을 불렀다는 것만 가까스로 인식했는지 마구잡이로 옷을 쑤셔 담던 히스는 아찔할 만큼 우수에 찬 눈으로, 웃어주고 있었다. “!” 그토록 옷을 좋아하는 사내가 자신의 블라우스가 구겨지는 것도 모르는 모양이다. 그런 히스가 충격에 차마 말문을 열지 못하는 혜성을 위해 부드러운 등을 아예 그를 위해 돌려주고 입술을 움직인 것은 10분이나 지나서였다. 그는 여전히 숲 속을 산책하며 명상에 취한 듯 한 시선이었다. 혜성은 태어나서 시인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시인을 만난다면 지금의 히스와 같은 자세와 표정일 것을 본능으로 알았다. 모든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걸까. 극에 달한 고통이 그로 하여금 상황을 포기하게 만든 건가. 그는 어미를 잃어도 슬퍼할 줄 모르는 사자처럼 고독에 맞서는 맹수의 눈을 하고 있었다. “적어도….” “…….” “눈이 오는 모습은 보고 가고 싶었는데…….” “!” 오, 히스! 혜성은 희미하게 웃어주는 그의 태도에 몇 갑절은 상처를 입었다. 가위로 오려내는 것처럼 시퍼래진 가슴은 아프고 또 아팠다. 당장 히스의 넓은 품을 뚫고 지날 것처럼 세게 안겼다. 팔을 펼치고 늘씬하고 탄탄한 등을 둘렀다. 그럴수록 채워지지 않은 마음은 차곡차곡 게이기도 전에 아래로 떨어지기만 한다. 잡아줘, 잡아야만 해 히스. 혜성은 붉어진 시선으로 다락방의 창문을 강하게 노려보았다. 깨끗한 저녁노을이 다홍의 빛깔을 으스대고 있었다. 함박눈이 쏟아졌는데, 분명히 오전나절 우리는 함박눈에 도취되어 나른한 어절을 오고 갔었는데 야속하여라. 언제 그쳤던가, 아름다운 세상마저 그를 등한시하다니! 울어도 괜찮은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는 혜성이 자발적으로 몸을 안겨오자, 더 힘을 주어 팔을 둘러 줄 뿐 별다른 말없이 우수수 떨어지는 한 숨 만 연신 내뱉었다. 자신이 어떤 말을 어떤 식으로 하는지 분간이 안 되는 게 틀림없었다. 이 순간 혜성은 자신마저 넋을 잃어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 갑작스런 판단은 아이를 강하게 붙들어 주었다. 다행한 일이다. “히스. 내가 챙겨줄게. 너는 어서….” “우리 단어 부르기 하자.” “…뭐?” “…하자. 수페리우스. 내 귀여운 사람…….” 한 방울의 눈물만이라도 흘려 봐, 히스… 혜성은 애간장이 녹을 지경이지만 그것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혜성의 볼에 입을 맞추면서도 여전히 투명한 녹색 눈동자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는 히스는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히스…….” “어서… 네가 엎드려 있는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내가 알려준 적 없지…?” 히스, 너희 어머님이 돌아가셨다잖아. 그러나 속으로 백 번은 외칠 수 있어도,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그것을 혜성은 삭히고 또 삭혀야 했다. 꺼내는 순간 그와 지냈던 모든 추억이 알갱이처럼 흩어지고 먼 곳에서 터져 자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의 오싹할 정도로 수평면에 뉘인 안정된 표정은 도리어 혜성을 다급하게 만들었다. ‘너… 등선이 참 예쁘다.’ 히스가 처음부터 탐냈던 자신의 늘씬한 등을 보이며, 혜성은 바닥에 배를 깔았다. 아름다운 히스의 눈이 휘어진다. 그리스 태양의 신전에나 있을 법한 조각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히스가 해 달라는 건 뭐든지 다 해 줄 수 있을 것처럼 조바심이 일었다. 어째서 평소에는 들지도 않던 동정심이 이제 서야 발휘되는 건가! 혜성은 미안하고 걱정되는 마음에 하얗게 질린 채로 그가 자신의 머리맡에 의자를 끌어오는 것을 인내하며 지켜보았다. “Ich…….” “…….” 의자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서 팔 장을 낀 탄탄한 그의 팔은 의자머리에 사뿐히 올려져 있다. 그런 그의 입술이 혜성을 지그시 내려보며 짙은 속눈썹이 그림자를 만들기도 전에 소리를 내뱉는다. “Ich habe ein Kind gesehen…….(나는 한 소년을 봤다…….)” “……?” “wer haette das gedacht Dass es einmal soweit kommt…….(그 누가 생각인들 했으랴. 단번에 이 지경까지 오게 될 줄을…….)” 스스로를 향해 중얼거리는 그가 몹시 슬픈 표정을 짓고 있다. 단어가 아닌 문장을 툭 내뱉는 히스가 어려웠던 혜성이 난처해하자, 그는 그제 서야 정신을 가다듬고 평소처럼 단어를 부르기 시작했다. 에게해의 아름다운 물결처럼, 혹은 그 위의 궁전 정원에 자라나는 백합 향기 마냥 들을수록 감질 맛 나는 히스의 독일어가 혜성의 귀에 파고들어왔다. “melancholisch…….” “…우울…하다…….” 툭- 눈물이 볼 아래 흐른다. 그것이 턱에 떨어진다. 길게 몸을 엎드린 혜성의 동그란 어깨가 눈에 보이게 떨린다. 서로를 응시하는 저 쪽 에게해의 거센 파도가 밀려오는지 이상한 파장이 감각에 미쳤다. 의자 머리를 혜성이 고개를 든 쪽으로 천천히 내리며, 히스는 바람과도 같은 어절을 아낌없이 내보냈다. “umher….” “움허….” “뜻도 말해야지 내 사랑…….” “방황…….” 심장이 또 한 번 욱신거릴 때, 혜성의 입 밖으로 의무감에 뒤섞인 말이 아무렇게나 내뱉어졌고, 이번에는 양 쪽 눈 밖으로 눈물이 비져 나왔다. 히스는 여전히 무표정인 상태에서 눈 꼬리만 휘었다. 겨울 저녁의 햇살이 창을 투과하여 정 면으로 그것과 마주한 히스의 전신에 산산이 부서졌다. 마치 새벽에야 볼 수 있는 하프의 선율처럼 찬란하게 반짝이는 그 햇살은, 그의 어머니가 안아주는 모양처럼 숭고했다. 혜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Sinken….” “징켄… 침몰….” 히스는 그런 식으로 스스로 마음을 다 잡는 모양이다. 그 만의 방식임에 틀림없다. 평소처럼 행동하는 것으로 안정을 찾고, 뒤늦은 슬픔에 스스로를 뉘인다. 어쩐지 그의 방식은 혜성과 닮아 있었지만, 아이는 그 이야기를 속으로 삼켰다. 많이 평온해져 보이는 히스가 앉았던 몸을 일으키며 등을 돌렸다. 서서히 변화를 보이며 떨리는 그의 등이 말한다. “내가 반드시 외우라고 했던 문장… ng macht den Meister.” “!”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어! 혜성은 재빨리 일어섰다. 그러나 그는 등을 쉬이 아까처럼 돌려주지 않았다. 독일의 여러 음악학교 학생들이 자주 사용하는 문장이라며 항시 외우게 했던 문장을 마지막으로 읊는 히스가, 등을 돌리지 않는다. 혜성은 울먹이는 소리로 대답하는 동시에 푹- 그의 넓은 등을 껴안았다. “…연습이 마이스터(어떤 분야의 전문가)를 만든다.” “…….” “히스…….” “Guten Tag…(Good day)” “!” 그가 걱정되는 마음에 받아주고, 해 달라는 대로 등을 보인 채로 단어 대답하기 까지 응해 줬지만 더 이상은 안 돼! 혜성은 그의 지금 표정을 봐야 했다. 안녕을 야기하는 그의 작아진 모습은 도저히 인내하기 어려웠다. 저 선량한 어깨가 떨고 있지 않던가! “히스!” “…….” “히스! 지금 나 안 보면 난 두 번 다시 너 안 볼 거야!” “!” 이렇게 말이 나와서 미안해- 아이의 내면은 찢어지고 있었다. 혜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냉큼 등을 돌려 아이의 뺨에 자신의 뺨을 문지르는 히스가 고통에 찬 숨을 내뱉는다. 오 하느님- 혜성은 히스의 옷깃을 쥐었다. 그가 떨고 있다. 그리고, 그의 뺨은 이미 젖어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사랑스러운 사람….” “…….” “이상해….” “…….” “그런데 왜 눈물이 나오지…….” “!” “나 좀 안아 줘 수페리우스….” “으… 으흐… 으. 으으. 어, 어어어. 아알았…….” “……으. ……후. ………흣.” 잠깐 경직되었던 혜성이 평온한 상태에서 눈물만 뚝 뚝 떨어뜨리는 히스를 냉큼 목을 당겨 안았다. 히스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혜성은 약간 허리를 숙여서 그가 자신의 가슴에 편하게 얼굴을 기대도록 도와주었다. 숨을 참고, 억지로 눈물과 고통을 이겨 내려는지, 눈물이 나오는 무시무시한 속도와 반비례하게 터지는 그의 지독한 숨은 넓은 텀 을 두고 있었다. 히스의 어깨를 여러 번 쓸어주며 혜성은 속삭였다. “더 울어도 돼, 히스.” “그럴 수 없어….”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히스… 오 히스….” 파란 머리칼에 뺨을 누르는 수페리우스 덕분에 그의 머리칼이 젖은 바다로 변해간다. “그럴 수 없어… 어머니 앞에서 울어야… 어… 어머니… 마…….” “!” 오 하느님… 천주여- 그가 고통 받지 않게 해 주세요! 아니, 지금은 고통을 쏟아내야 해요! 모르겠어, 뭐가 정답인지 나는 모르겠어. 단어는 평소보다 배는 더 큰 힘을 발휘한다. 현실에의 변화에 주제를 꺼내면 감성은 폭발하는 법이다. 히스는 그 순간 ‘어억 어억’ 하는 짙은 비음을 고통스레 뱉으며 부르르 떨었다. 그는 어머니라는 단어를, 마마라는 단어를 꺼내는 순간, 지독한 현실과 정 면으로 마주보게 된 것이다. 숨을 헐떡이면서까지 혜성의 앞에서 눈물을 참고, 자신의 고향에서 제대로 울어야 한다는 결심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미련한 이가 있다. 한 참을 그렇게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바닥에 무릎 꿇은 히스의 안면에 떨어지는 눈물을 닦고, 더 세게 안아주지만 위로는 멀어져만 간다. 한 시간 여 동안 미동 없이 있던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를 가깝게 응시하였다. 이대로 한 뼘만 움직이면 서로의 숨결을 마구 빨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서, 히스는 억지로 진정시킨 내면을 꺼냈다. 그의 붉어진 눈동자에게 당장 활력을 심어 달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천주여, 그러나 나의 죄는 영원히 용서치 마소서… 혜성이 툭 하고 저도 모르는 사이 눈물을 떨어뜨리자 아이를 올려보던 히스가 많이 괴로워하는 낯을 어쩌지 못 한 채 팔을 올리더니 젖은 손바닥으로 그것을 닦았다. “울어야 할 때, 쉽게 눈물이 나오는 사람은 행복한 거야.” “…맞아…….” 바로 이 때, 단 한 번도 공감되지 않았던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계기를 갖는다. 그들은 만난이래 다른 파장을 이뤘었다. 그런 두 사람 중 한 사람에게 아픔이 닥치자, 나머지 한 사람은 그의 표현 방식에 있어서 비로소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혜성은 이제 서야 조금 알 것 같은 그를 보내기 싫을 정도였다. 히스의 입술은 주저하지 않고 턱을 올려 혜성의 뺨을 돌아다녔고 언어를 흘렸다. “그만큼 인생에 있어 굴곡이 많지 않았다는 증거 일 테니…….” “…그래…….” “겪었던 고난의 크기가 너무 높아서 메마른 심장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죽은 자의 혼이 씌인 것처럼 무덤덤한 표정이거든.” “…그렇지…….” “수페리우스….” “…….” 혜성의 목을 애원하듯 촉촉히 적시던 입술이 천천히 떨어지며 눈을 마주친다. 동시에 바닥에 찍힌 무릎을 일으킨다. 그는 아이의 양 뺨을 감싸고 젖은 입술을 강하게 눌렀다. 두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강한 해일이 토네이도 형상으로 솟구쳤다. 그의 어머니를, 그는 독일에 도착하기 전 까지는 '현실'로 자각하지 않으려 함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의 시도에 따라야 한다. 그의 의지를 방해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가 슬퍼 할 때 하는 위로만이 값을 떨칠테니… 혜성은 입을 벌렸다. 그가 키스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키스는 너무도 짧게 끝이 났다. 딱 한 번 혀를 서로에게 감고, 보기 좋게 떨어졌다. 어머니라는 이름은 아무리 뒤로 순서를 미뤄놔도, 현실이 아니라고 당장은 부인해도 영 적인 힘을 발휘해서일까. 혜성의 감긴 눈이 마 악 떠질 때, 아이의 시선을 처음부터 걱정스레 내려보던 히스는 순간 눈을 뜬 혜성을 와락 품에 당겨 안았다. 영원히 너를 놓을 수 없다는 듯이, 지금 조차도 그는 약간의 오기를 부린다. “나는, 이런 내가 무서워서 가끔은 도망치고 싶었어… 바로 지금처럼. “ “…….” “금방 돌아 올 거야….” “…….” “내가 없이도 네가 잘 지내는 게 불안해서… 네가 나의 빈자리에 익숙해지기 전에 돌아 올 거야.” “!” “슬퍼하고, 돌아올게 내 귀여운 사람….” 너는 강한 사람이구나. 어쩌면 너는 지독하게 약한 사람이구나. 너는 슬퍼할 때의 나와 닮아 있구나. 그래서 나는 너를 위로조차 할 수 없구나……. 잔인한 겨울이라는 이름이여, 너는 어째서 눈을 감추려 드는가. 아픔과 고통을 덮고 강한 바람의 힘으로 절망을 얼려 주렴. 제발 소원이니, 이 사람이 걷는 길만이라도 너의 흔적을 내려주렴……. 히스를 찾아온 그의 독일 비서는 룸펜 밖에서 한 참 전부터 대기하고 있었다. 두 명의 비서는 약간의 대화를 나눈 뒤, 혜성의 어깨를 꽉 그러쥐고 있던 히스에게 뭐라고 독일어로 신중히 내뱉었다. 이에 히스는 혜성의 이마에 누가 쳐다보는 것에도 상관없이 입술을 누르더니, 아이의 손바닥에 작은 종이를 쥐어 주었다. 네 번 정도 접혀진 종이는 누런색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약간의 긴 시간 내내 히스와 함께 지냈음이 드러났다. “크리스마스 때, 주고 싶었던 거야. 선물로… 네가 자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적었던 건데… 내 빈자리가 느껴지면 읽어 봐 수페리우스… 그 전에 나는 돌아오겠지만…….” “!” “내 소중한…….” “히스!” “…….” 그는 스스로 말허리를 자르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히스는 그 말을 끝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 올랐다. 혜성이 차의 뒤꽁무니가 사라질 때 까지 서서 지켜봐도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냉정하게 변한 파란 머리칼만 간간히 차창 밖으로 보일 뿐, 혜성을 위해 수려한 콧날과 연약한 웃음을 돌려주지 않는 것이다. 손에 쥔 종이를 꽈 악 움켜쥐며 혜성은 다락방에 올랐다. 룸펜의 식구들도 혜성 못지않게 떠나가는 히스를 걱정했지만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다. 혜성은 조용히 다락방에서 히스가 그간 주었던 꽃을 창가 쪽에 옮겨 놔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도어를 열었다. 그리고 멈춰 섰다. “…….” “…….” 독일인 비서가 그를 차에 태우고 간 뒤, 그 비서와 대화를 나누었던 히스의 한국인 비서는 남아서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통성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름은 모른다. 하지만 알 필요가 없다. 혜성은 침대에 멍청하게 앉아서 그의 비서가 하는 모양을 먼 나라의 명화처럼 감상하기 시작했다. 박자가 느리다. 사물이 정지한 가운데 억지로 비틀어지는 공기는 사람의 호흡을 제 멋대로 휘두른다. 혜성은 눈을 잠깐 감았지만, 그것은 뜨고 있을 때와 별 반 차이가 없었다. 주먹을 쥐었다. 그 순간은 평소보다 배는 느려서 모든 사물은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임을 증명한다. 또 한 번의 공포와 맞닥뜨린 것일까. 혜성은 히스의 물건만 용케 찾아내서 꾸리는 그의 단정한 남자 비서의 곁에 섰다. 깔끔한 정장을 입은 비서가 히스의 물건을 만질 때마다 울컥 하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애써 감춰 본다. “그의 짐을 모두 가져가시려 구요…?” “예.” 그런 당연한 것을 왜 묻 냐는 듯 한 싸늘한 대답이 혜성을 잠깐이지만 위축시켰다. “하지만…….” “아마 그렇게 하실 겁니다. 저는 도련님을 잘 압니다.” “…….” 아예 고개도 돌리지 않고 혜성을 냉대하는 히스의 비서는 참을성 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사람인가보다. 순간 하늘이 노랗게 부서졌다. 혜성은 비로소 히스의 부재를 제대로 깨달았는지, 눈을 크게 뜨며 막 나가려는 비서의 앞에 양 팔을 벌리고 막아섰다. 두근. 두근. 철갑처럼 굳은 벽을 깨부수며 굉장한 힘으로 뛰어대는 심장이 있다. 혜성의 관자놀이 부근에 철철이 땀이 흘렀다. 그의 짐을 두고 가세요, 그는 돌아올 테니까요-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혜성은 최대한 당당하게 마음을 잡으며 현실적인 것을 물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왜 갑자기…….” “친한 분이라더니, 그것도 모르십니까?” “…….” 약간의 당당함 마저 사라진다. 팟- 혜성의 눈에 긴 줄이 그어졌다. 고락의 늪에 순식간에 빠진다. 비아냥거리는 비서의 말이 너무나도 정확해서였다. 나는 몰라. 히스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어. 알려고 물어보지도 않았어. 물어봐야 한다는 생각조차 한 적이 없어. 나는 이런 식이야. 뒤 돌아서면 나밖에 안중에 없었어… 나는… 죄인이야……. “지병이 있으셨습니다.” “!” “그래서, 작년에도 교환학생들을 이끌어야 하는 입장이셨기 때문에 한국에는 정확히 일주일만 체류 하실 계획 이셨구요.” “!” 맙소사. 오 하느님. 혜성은 가시처럼 찔리는 비서의 말이 지나가는 족족 온 몸을 움켜쥐며 가까스로 지탱했다. 불벼락이라도 맞은 꼴이 이러할까. 아이는 속사포처럼 희게 펼쳐지는 히스와의 만남부터 현재까지, 그것은 혹시 꿈이 아니었을까! 하는 공포와 맞서야 했다. 이윽고 비서는 히스의 가방을 양 손에 쥔 채로 비키라는 말 대신 혜성의 어깨를 밀었다. 가볍게 떨어져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는 혜성의 시선은 여전히 풀려 있었다. “그 일주일의 마지막 날, 느닷없이 모든 계획을 변경 하겠다고 연락을 주셨습니다. 덕분에, 거액으로 계약된 모든 콘서트와 기자 회견 등등의 스케줄을 무기한 연기 하셨지요.” “…….” 미안해 히스… “상당한 치명타를 입으셨습니다.” “…….” 미안해… “현재 영국 쪽 가십은 물론이고, 세계 굴지의 인쇄물은 도련님의 부재를 앞 다투어 보도하고 테레사처럼 망가진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 “아시겠습니까?” 싸늘하게 할 소릴 다 내뱉은 뒤, 비서는 치가 떨린다는 듯이 쿵쾅거리며 다락방 계단을 내려갔다. 뒤이어 올라온 정하가 저 새끼는 뭐 하는 놈인데 인사도 없이 재수 없냐고 따졌지만, 대답 없이 멍청하게 바닥에 있는 혜성을 묵묵히 지켜보고는 조용히 다락방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이 순간부터, 너의 짐이 된다.’ 그가 스스로를 짐이라 일컬으며 가방을 툭툭 쳤던 장난기 가득한 눈동자가 지금도 선명한데… 돌아오지 않을 거야… 돌아오면 안 되잖아. 붉어진 눈동자 밖으로 툭 눈물이 떨어지자 그것을 닦기 위해 쓱 쓱 주먹으로 비비던 혜성이 문득 손 안에 쥐어있는 종이를 펼쳐 보았다. 로맨틱했던, 어쩔 때는 유치하고 천박하다고까지 여겼던 그의 행적이 세세히 떠올랐다. 혜성의 땀과 눈물 덕분에 종이 안의 필체는 약간씩 번져 있었다. 글자가 울고 있다. ‘히스… 뭐 해?’ ‘오, 노. 노. 저리 가.’ 그가 평소 뭐에 열중해서 끄적이는 것을 지켜보려고 했던 기억이 살포시 스쳐간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다. 혜성이 참견하려고 하자, 히스는 두 번 다시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악상이 떠오른 건가? 하는 식으로 대충 넘어갔던 혜성이 깊은 잠에 빠져서야 적었던 무언가를 히스는 이제야 보여 주나보다. “쿡… 이게 뭐야….” < 오 사랑이여! 청춘의 또 하루가 지고 있다오. 그대의 한 숨과 눈물과 사랑을 나에게 주오. 오 사랑이여. 오늘의 태양이 지나기 전에 나는 그대와 호흡하고 싶소. 오 그대여. 아름다운 젊음! 순간을 당신과 함께하고 싶소. 찬란한 우리들이 사랑하기 좋은 날, 어서 나에게 주오. 내 모든 것은 이미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의 사랑만이 생명수가 되리다. Ich liebe dich…… > “정말… 이게 뭐야… 유치…하게…. 바보야…….” 긴 시간 내내 그가 지었다는 시를 읽고 또 읽으며 혜성이 두둑 눈물을 떨어뜨렸다. 글씨가 번지며 춤을 춘다. 어디론가 날아간다. 히스마저 사라진 오늘, 깊은 밤은 여지없이 다가왔다. 평소보다 격정적인 요소가 많았던 오늘이라서 그런 걸까. 혜성은 제발 오늘이 빨리 지나기를 빌었다. 하지만 이제 막 시작된 밤 인 것을… 그렇게, 이제 막 끝난 1주제를 지나 운명의 제 2주제가 시작되나보다. 옳지! 세상에 존재치 아니하는 찬란한 광시곡 2주제가 팡파레를 울린다. “선생님-! 계시나요?” 밤 열두시까지 조용히 종이를 쥐고 앉아있던 혜성이 청아하고 익숙한 소리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우득- 뼈마디가 피곤함에 부서지는 비명을 질렀다. “선생님!” “……유리?” 늦은 시각, 한 번도 혜성을 찾아 온 적이 없던 룸펜의 다락방에 별안간 나타난 사람은 그의 제자 유리였다. wgreene@naver.com 시간관계상 14-1을 올립니다. 안부게시판의 답글과 댓글의 댓글은 빠른 시일 내에 달게요. 좋은 하루 보내시기를! ^ㅅ^ "슬퍼하지 마 예쁜 사람..."->라고 파란 머리칼의 히스가 말했습니다. wgreene 화이트그린 2악장 14편 올림. 060417 오후 세시 덧글 7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14 -1 편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14 -1 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14-2편 예고 ▼ 다음글 - 2악장 13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14-2편 예고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4/18 18:34 http://blog.naver.com/wgreene/110003560555 Amadeus 음악 : nostradamus! (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Bonus Material) Nostr.. - 2악장 14-2 예고편 - “선생님!” “…….” “도망치세요.” “?!” “어서 도망치세요! 아버지가 이 곳으로 오실 거예요! 저는 방금 처음으로 아버지께 대들고 나왔단 말이에요!” “뭐라고!” “아버지가… 아버지가….” “유리야 진정하고 말 해 봐. 왜 그래, 무슨 일이니!” “서… 선생님을 죽인댔단 말이에요!” . . . “아버지가 곧 오실 거예요. 이제 곧… …선생님. 선생님. 무서워요.” “…….” “아버지가…….” 유리의 말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이려던 찰나, 3층 다락방 밑이 엄청난 비명을 지르며 흔들렸다. 룸펜의 모든 창문이란 창문은 강한 무언가의 힘에 의해 동시에 깨졌다. 온화롭기 짝이 없던 다락방의 창문까지 깨져서 날카로운 파편이 찌를 듯이 둘에게 덤볐다. 룸펜 건물 전체에 예고 없는 변화가 가장 끝부터 찾아들 때, 비명 없이 그 과정을 지켜보던 유리가 공포에 질린 채로 나직이 속삭였다. “…오셨나 봐요.” “!” - 오늘 이상하게 안 다듬어지네요. 다음 기회에 모두 보여드리겠습니다. ^^ - 이 포스트를.. 덧글 3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14-2편 예고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14-2편 예고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14 -2편 ▼ 다음글 - 2악장 14 -1 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14 -2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4/19 17:42 http://blog.naver.com/wgreene/110003586057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419 14-2편 업데) Amadeus 음악 : 바네사 메이 - Art of war (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Art Of War-Vanessa Mae 내 안의 신이여! 당신이 정말 계시다면, 미친개의 목을 분질러 주옵소서……. 2악장 14 - 2편 유리가 올라오는 모습에서 느닷없이 혁명의 밤에 보았던 붉은 화염이 혜성을 뿌옇게 스쳐 지났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이 자각하지 못 할 정도의 빠른 스피드를 지녔기에 혜성은 곧 점잖은 태도로 유리를 응시했다. 가녀린 몸에 코트를 걸친 유리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혜성을 보았다. “선생님… 울고 계셨나요?” “…….” “제가 다시 나갈 까요 선생님?” 혜성은 아니라는 대답 대신 머뭇거리는 유리의 가냘픈 팔목을 잡아 주었다. 그녀는 혜성이 이끄는 대로 조용히 따라와서 바닥의 방석 위에 앉았다. 그녀의 말은 물론 틀리지 않다. 혜성은 녹초가 될 지경으로 울었고, 가끔 히스가 준 시를 읽으며 웃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해 보면, 지금 자신이 슬퍼하는 이유는 히스가 가여워서 보다는 당장 자신의 곁에 그가 없다는 부재가 두려워서 일수도 있었다. 혜성은 자신의 짐이 되어 주겠다며 망망대해의 해적선 선장처럼 으스댔던 히스가 눈앞에 없는 것이 견딜 수 없었던 것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히스에게 미안해졌다. 혜성은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그래야지 어렵사리 이 곳 다락방까지 찾아온 유리가 무안하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뭐가 배우고 싶어서 온 거니?” “…….” “그렇다면 이론 수업을 해 볼까.” “…그러죠.” “?” 가볍고 즐거운 이야기를 꺼내기 직전의 농담 이었는데… 그녀는 필요 이상으로 진지해 있다. 혜성의 의아한 낯을 캐치 하면서도 다락방 문이 꼭 닫혀 있는지를 확인하는 유리가 낮에 봤던 모습과 확실히 다르다. 무엇일까, 무엇이? 그녀는 문고리를 확인한 뒤, 의무적으로 살짝 미소 짓더니 혜성의 앞자리에 냉큼 주저앉았다. “아니, 그것보다 선생님이 작곡 하셨다는 흔적을 구경하고 싶어요.”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그 때부터였다. 하여, 히스에 대한 걱정 이라던 지 자신의 현실에 미친 파장의 염려는 잠시 뒤로 밀리게 되었다. 혜성은 뚫어지게 쳐다보며 그녀를 관찰했다. 소녀는 지옥으로 떨어진 천사와도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감추려 할수록 혜성의 예리한 시선에는 자세히 보였다. “오… 이 악장은 계속 팔을 흔들어야겠네요.” “장난 반으로 했던 거야. 어떻게 셋잇단음표와 스타카토와 그것도 포르테로 하나의 악장을 지나치겠어. 게다가 음도 이음줄로 길게길게 늘어져 있지. 부드러움과 강렬함… 많이 미숙해. 언젠가는 그런 곡을 만들어 보고 싶다… 이거지.” “아마데우스에서는 작곡도 가르치나 봐요?” “…….” “제가 실수 했나요?” “아니.” “…….” “나도 직접 배워보진 않았지만, 히스가 알려줬지. 거의 모든 학생들은 자기만의 곡을 만들거든. 5학년이 되면 작곡을 깊이 있게 들어가서… 내가 아니라 아마데우스 학생들이 그렇다는 거야. 나는 4학년일 때 자퇴했거든.” “…….” “…….” “연주 하는 도중에 손가락이 부러지겠는걸요. 무서운 악보에요.” “나도 연주 할 수 없는 거라서 장난으로 그린 거야. 다른 거 보렴. 여기 편곡 한 것들… 그래봤자 히스가 거의 다 도와 준 거지만.” “틀림없이 손가락에 말도 못 할 경련을 일으키고 연주자를 미치게 할 거에요… 이 악보를 제대로 완성시켜 봐요, 선생님.” “?” “…저도 농담이에요.” 바닥에 너부러져 있던 악보들을 추겨내 건네고, 유리가 샅샅이 살피는 동안에도 그녀는 뭔가 불안해했다. 혜성에게 농담이라는 말을 하지만, 눈동자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소녀는 자신의 까름직한 초조함을 아닌 척 위장하고 있었다. 그 점을 깊이 파고들자니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불허지역을 밟는 기분이 들어서 혜성 역시 억지로 수평면 위의 대화를 유지해야 했다. “너는 악보는 쉽게 잘 해석하고 읽는구나.” 그건 진심이었다. 혜성은 늘 그녀의 연주 실력으로 모든 잣대를 판가름했기 때문에, 알면 알수록 다른 재능을 보이는 유리가 신기했다. 그녀는 자기만의 작은 비밀을 들킨 것 마냥 잠깐 눈을 크게 뜨더니 헤실헤실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마 그래서 해석이 되기 때문에 연주가 그려지기 때문에, 되지도 않는 솜씨로 어려운 것을 빨리 연주하고 싶어 하는 거겠지요. 악보를 보면 알거든요. 이 곡이 얼마나 근사할 지, 또 난해하지만 아름다울지.” “…….” “선생님, 근사하세요. 어떻게 이런 것을…….” “이런 얘기는 레슨 때 해도 괜찮을 텐데……?” “…….” “…….” 그녀는 마지막이라도 된 것 처럼 순간순간을 매우 초조해 한다. 혜성은 그 점이 수상하다 여겼으나 시각이 늦은 때이니 만큼 소녀의 감성이 불안한 것이라 판단했었다. 허나 그렇게 여겨도 유리의 관자놀이를 적신 땀만큼은 혜성의 날카로운 관찰을 피해가지 못했다. 그녀는 이제 악장을 쥔 손 마디마디 모두를 떨기 시작했다. 입은 의무적으로 떠들고, 머리는 죽었는지 표정을 쉬이 꺼내지 않는 가운데, 갑자기 유리의 눈물이 툭 떨어졌다. 제 2주자 광시곡이 변화의 장에 들어선다. 쾅- 강렬한 크레센도의 끝 부분에서 혜성은 파도가 휩쓸어가는 에게해의 백합처럼 의도하지 않아도 몸이 움찔거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룸펜은 평소와 같다. 그러나 오늘은 어제와 달랐다. 한스 패거리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납게 룸펜에 다녀갔질 않았는가. 게다가 히스의 어머니는 돌아가셨다는군. 또 유리가 찾아와서 생각과는 다른 말만 지껄이고 있어. 유리의 눈물이 터지는 것을 시작으로 변화의 2주제는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휙 휙 지나치기 시작한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쥐고 파랗게 질린 낯을 떠들었다. “아버지가 피아노를 심하게 반대 하세요 선생님.” 고개를 들어 보렴… 이라는 말을 해야겠지, 그렇다면 눈물부터 닦아 줘야 할까? 혜성은 팔을 내밀었지만, 도리어 움츠러든 채 고개를 더 숙이는 유리의 행동이 뒤따랐다. 더 많은 양의 눈물이 투두둑 혜성의 악보에 비를 내렸다. 제 2주제의 광시곡이 멀리서부터 날카로운 활을 장착한다. “아버지가… 정말 정말 반대하세요…….” “느닷없이 그게 무슨 소리니 유리야. 그건 나도 아는 거잖아.” “…….” 활이 날아온다. “그래… 여긴 어떻게 몰래 찾아왔지? 예전에 나의 공연을 봤던 때처럼 그런 식으로…?” “…….” “……?” “선생님.” “……그래.” 그리고 활이 꽂혔다. “꼭 노력해서 아마데우스에 입학 하겠어요.” “!” 마른침을 삼키던 혜성이 경직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채로 아주 중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리라. 젖은 바닥이 홍수를 일으킨다. 주먹을 쥔 채로 바르르 떨던 소녀가 더 큰 입술을 세상에 열었다. 사 계절의 고통이 모두 찾아왔는지 다락방 전체가 산산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선생님은 제가 입학하기 전에 학교로 돌아가실 테지만요.” “모를 일이지.” “돌아 가셔야 해요!” “!” 여전히 바닥을 향한 시선에 꽥 소리치는 유리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반대가 심해서? 그렇다고 해도 이건 정도 이상의 행동인데…. “선생님이 그 곳에서 계셨을 때, 저는 사람이 아닌 줄 알았어요. 아버지가 저를 반대하시는 걸 일반 부모들이 그러는 거라고 여기지 마세요. 그냥 싫으신 거예요. 사실 핑계죠. 별 것도 아닌 것에 스스로 없던 화를 돋우고 사건을 만들거든요.” “…….” “샤우트가 판을 펼치는 여기 이태원에서 음악을 한다는 건 미친 짓이에요. 아니, 재수 없게 걸려든 거죠. 건수가 없으니 내가 관심 있어 하는 분야로… 아버지는 미군기지 자식들의 지지를 받고 있어요. 개자식들.” “!” 작은 어깨를 떨며 쉼 없이 말을 빚던 그녀가 또 혜성을 놀라게 한다. 치를 떨며 어떤 말을 하는데, 이젠 욕도 섞는다. 그녀는 자신이 욕을 하는 것도 모르는 눈치이다. 이해는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 이야기를 듣자. 혜성이 번쩍 놀랄 만한 그녀의 말을 듣는 도중 콰광- 하는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옳지! 2월의 겨울비가 그들도 모르는 사이 벼락을 동반한 채 세상에 꽂혔다. 창이 내리는 것처럼 날카로운 물기가 꽂히는 족족 아파하는 땅의 비명이 어쩐지 지금 이 순간 혜성의 귀에는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경찰도 함부로 아버지를 터치 못 해요. 저는 아버지가 무서워요… 미친 짓이에요. 그 분은 사건을 찾고 계셨어요. 최근 몇 년 자신의 뜻대로 따라오고 조용하기만 한 이태원 풍경이 지겨우셨던 거지요. 음악은 아버지에게 기회에요. 그래서 음악을 깊이 있게 논하는 건 미친 짓이지요.” “…….” “그런데 저도 미치기로 했어요.” “…….” “선생님.” “…….” 이야기의 후반부가 되었을 때, 변화의 2주제는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간다. 현의 비명이 둘에게 똑똑히 들린다. 콰광- 벼락이 대지를 가르고, 어디선가 수풀이 죽어가는 비명을 질렀다. 사나운 비가 휘몰아치는 바람에 섞여 모든 것을 거스를 때, 다락방 창문이 심하게 덜컹거렸다. 유리가 번쩍- 고개를 들고 혜성의 불안한 눈동자를 마주친 것은, 바로 그 때 였다. “도망치세요.” “!” 캉- 건반 모두를 누르는 피아노가 2주제를 지휘한다. 세차게 내리꽂는 비 소리에 놀란 걸까. 감성이여, 너는 어느 곳에서 숨을 죽인 채 울고 나를 기다리는가? 소녀의 입술이 정확하게 발음할 때, 슬슬 고역의 바다에 빠지는 것은 혜성으로 체인지 된다. 유리는 보다 빠른 박자로 혜성을 부 축였다. 어느덧 그녀의 작은 손가락은 혜성의 셔츠를 쥐고 흔들고 있었다. “어서 도망치세요! 아버지가 이 곳으로 오실 거예요! 저는 방금 처음으로 아버지께 대들고 나왔단 말이에요!” “뭐라고!” 조금씩 그녀의 초점이 흐려질 때, 혜성은 정신 차려! 라고 스스로의 내면에 고함을 지른 뒤, 재빨리 유리의 양 뺨을 감쌌다. 그녀는 말도 못 하게 떨고 있었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유리야 진정하고 말 해 봐. 왜 그래, 무슨 일이니!” “서… 선생님을 죽인 댔단 말이에요!” 크캉- 변화 2주제의 클라이막스 박자가 마차의 말발굽 소리를 흉내 낸다. 슈베르트의 마왕처럼 규칙적인 리듬으로 닥치는 그 주제에 맞추어, 유리는 소리쳤고, 때마침 대지를 위협하는 천둥의 소리가 세상을 번쩍 들었다 놓았다. “뭐어? 말도 안 돼. 요즘 세상에 사람이 어떻게 죽여. 그게 무슨 희귀 망측한 소리냐. 너희 아버지는….” 둘이 서로에게 비명을 지를 때, 어디선가 그들을 비웃는 바이올린의 소리가 재빠른 솜씨로 팔목을 위 아래로 움직이며 비브라토를 창출했다. “저희 아버지를 정말 모르세요! 샤우트를 모르 세요 선생님은! 자신의 전문분야에 대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외의 것도 아셔야지요!” “!” 얼어버린 내면 저 쪽 불기운이 솟는다. 그녀의 올바른 지적에 넋이 빠지기도 전에, 혜성은 입술을 깨물며 놀란 기색을 재우기 위해 안 간 힘을 썼다. “한스네 쪽이 선생님을 좋아한다는 것을 미끼로 시시탐탐 노리다가, 아예 모두 없애기로 했는데, 계기가 선생님과 제가 된 거에요! 모르시겠어요? 저희 아버지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뿐, 암암리에 알 사람들은 다 아는 조직의 깡패에요! 사람을 죽여도 미군 정부가 막아 준다잖아요!” “그럼… 그럼 나는 이제 어떡해야 하지?” 노력해도 놀란 심장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다. 밖의 세상이 궁금했는지, 저 바닥 어딘가로 떼구르르 구르기까지 한다. 혜성의 창백한 문장에 도리어 제정신을 차린 유리가 소리쳤다. “도망가세요! 제발요!” “…여기가 도망의 끝이야.” “예?” 혜성은 흐릿해진 시야 끝에 서서 조용히 스스로에게 말을 하듯이 낮고도 분명한 투로 말하였다. 그는 흔들리지만, 흔들릴 수 없다는 듯이 마음을 다 잡았다. “여긴 나의 밑바닥이야. 더 이상 꺼질 자리가 없는데…….” “안되겠어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잠깐 이 동네 밖으로 나가 있어요.” “…….” “선생님?” “…….” “오늘 한스가 선수 친다고 했단 말이에요. 아버지가 계속 노리는 것에 질려버린 한스가 아마 먼저 공격했을 거예요. 그 사이에 어서…….” 한스를 찾았던 레이놀드 녀석들의 피 뭍은 아까의 모습이 번쩍 혜성의 뇌리에 떠올랐다. 그는 말을 더듬었다. “자… 잠깐. 난 이… 이 상황이 도통 나… 납득이 안 가… 어떻게 갑자기 이런…….” “쉽게 설명해 드릴까요?” “……?” 그녀는 무슨 생각인 걸까. 너는 누구지? 나는 그저 룸펜 이라는 곳에서 솔베이지 타령이나 하는 흔한 가수인데. 다락방 구석구석을 뒤지며 느닷없이 가방 따위를 찾던 유리가 다시 혜성의 근처에 뛰어오며 소리쳤다. “선생님과 제가, 그 두 파의 싸움에 미끼로 걸려든 거 라 구요! 계속 벼르고만 있던 그들에게 불씨를 던졌다구요!” “!” “아버지가 곧 오실 거예요. 이제 곧… …선생님. 선생님. 무서워요.” “…….” 긴 그림자가 둘의 주변에 어슬렁 거렸다. 달이 사라진 지역에서, 다락방의 낡은 조명만이 동그란 멋을 자랑했지만 그것은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저 스스로 두려움에 휩싸인 유리가 입술에 주먹을 붙이고 부르르 떨 때였다. “이제 늦었어요…….” “…….” “아버지가…….” 유리의 말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이려던 찰나, 3층 다락방 밑이 엄청난 비명을 지르며 흔들렸다. 룸펜의 모든 창문이란 창문은 강한 무언가의 힘에 의해 동시에 깨졌다. 온화롭기 짝이 없던 다락방의 창문까지 깨져서 날카로운 파편이 찌를 듯이 둘에게 덤볐다. 룸펜 건물 전체에 예고 없는 변화가 가장 끝부터 찾아들 때, 비명 없이 그 과정을 지켜보던 유리가 공포에 질린 채로 나직이 속삭였다. “…오셨나 봐요.” “!” 기야아악- 하는 누군가의 비명이 다락방 바닥으로 작게 들려올 때, 변화의 2주제는 모두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격정적인 감각만이 오선지에 적힌 채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제 3주제의 출발이다. 시작하자. “너는 가만히 있어.” “선생님… 미안해요… 미안해요…….” “…네가 뭐가 미안해.” “미안해요… 미안해요…….” 기약- 갸아악- 사람의 소리라고 믿기 어려운 비명도 아닌 것이 깨진 유리쪽으로 밀려들어온다. 혜성은 손목 여기저기 유리 파편에 상처 입은 소녀를 구석 침대에 앉히고는 상황에 맞지 않게 씨 익 웃었다. 어느새 비는 멎어있었다. 까만 구름을 치운 용감한 달이 떠올랐다. 미세하게 반짝이는 먼지 사이로, 혜성이 침대에 앉힌 유리를 내려보며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짓는다. 그는 상황이 닥쳐서야 제정신을 차린 전쟁의 신처럼 매끄럽게 웃으며 경직된 피부를 완화시켰다. 그의 변화에 놀란 유리가 뭐라고 묻기도 전에, 혜성은 가여운 소녀의 뺨을 살짝 쓸어주며 옆구리를 긁은 파편을 귀찮다는 듯이 치웠다. “이런 일이 언제고 터질 줄 알았어.” “…예?” 우두두두- 수 십 이라 추정되는 발소리가 룸펜 1층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혜성의 죽은 표정에 화색이 감돌았다. 그는 히스가 없어서야 벌어진 이 상황이 신기했고, 또 히스가 없기 때문에 독립적인 생각을 갖게 된 스스로가 기가 막혔다. 하지만 아직 그것을 내색하기엔 이르지. “불행의 원인은 나 때문이야. 괜찮아. 이런 일이 없는 게 이상한 거야.” “…선생님 지금 무슨 말씀을…….” “…….” “…선…생님?” 유리는 주먹으로 입을 가린 채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혜성이 깨진 다락방 밖을 쏘아보며 사납게 외쳤기 때문이다. “그래! 왜 닥치지 않느냐 물어보려고 했었다! 왜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냐고, 이 재미없는 세상 언제 나를 제물 대에 뉘일 거냐고 따지려고 했었다! 그래야지! 암 그래야지! 조용히 쉽게 지나가게 해서는 안 되겠지! 그래서 나타난 거지, 불행이라는 네 놈이!” “선…생님…? 선생님!” “이제 시작인거냐, 이제 제대로?” “!” 휙- 등을 돌린 혜성이, 요염하기까지 한 달빛을 온 몸으로 받으며, 그림자 진 입술로 유리를 위해 부드러운 투를 흘린다. 머리 꼭대기까지 솟은 무시무시한 전율이 혜성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는 지금 순간이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락방의 창이 깨진 걸로 미루어 볼 때, 또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여기까지 미친 걸로 유추해 보건데, 룸펜 내부는 엉망진창일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또 내가? 웃기지 마! 상황을 만들어 놓고, 뒤 집어 씌우기 만 바라는 어리석은 것들. 내가 또 당할 것 같은가? “네가 미안해 할 필요는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가만히 있어라.” “선생님!” 이것보다 더 한 것도 경험해 봤지 않던가. 또래의 죽음을 보았었고, 내 님의 눈이 실명하는 것도 똑똑히 목격했었다. 천 명이 넘는, 아예 모든 숫자가 나를 제물 대 위에 올렸었지. 그것은 목숨을 앗아가는 행위보다 두려운 것이었다. 죽음 이상으로 두려운 것을 경험했던 나에게 그보다 무서운 건 이제 없다. 아이처럼 두려워하며 그 당시는 처음으로 닥친 변화에 속수무책으로 울기만 했었지. 선생님! 하고 파랗게 외치는 유리를 다락방 침대에 앉히고 다시 경고 조를 내리꽂은 뒤, 혜성은 후다닥 낡은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 혜성이 보는 현재 2월 새벽의 룸펜은, 지옥으로 변해있었다. 그는 놀란 나머지 잠깐 계단의 하단 부분에서 걸음을 멈추고 상황을 목격해야 했다. 쓰레기들이 엉켜 있었다. 어떤 방식으로 동시에 모든 유리를 조각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샤우트는 '유리'를 깨뜨리는 것으로 출현했다. 백여 명 이 엉켜있는 모양새는, 혜성이 아마데우스 혁명 때 보았던 학생들의 싸움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사납고 난폭했다. “죽여!” “!” “그. 그야아아악!” “!” “하하하하하!” 한 놈이 레이놀드와 평소 친했던 조무래기 놈을 바닥에 엎어놓고, 구둣발로 등을 누른 상태에서 머리채를 쥐고 바닥에 쿵! 쿵! 방아처럼 찧어댔다. 붉은 피가 터지는 그의 이마는 안면 전체를 붉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혜성의 몸이 움찔 놀라서 한 계단 위로 뒷걸음질 칠 때, 미친 자들은 더더욱 서로에게 엉켜 들어갔다. 내면의 광시곡, 제 3주제의 북이 둥둥 울린다. 그만 해, 그만 해. 나도 들려! 혜성은 긴 호흡을 내쉬며 시끄럽기만 한 저 쪽에 나서기 전에 가슴에 십자가를 그렸다. 오, 천주여. 당신을 등한시 했던 못난 자식이 기도합니다. 혜성이 살포시 눈을 감고 까만 호흡을 내뱉는 동시에, 불협화음이 터져 나왔다. “룸-펜!” “!” 계단 벽 뒤에서 몰래 기도를 시작하려던 혜성의 눈이 '룸펜' 이라는 거대한 소리에 밀려 번쩍 뜨였다. “룸-펜-!” “…….” 숙였던 고개마저 서서히 올라간다. 두근, 두근, 사방을 에워쌓는 제 3주제의 고동보다 더 한 박자가 혜성을 부른다. 왜, 어째서? 너희들끼리 잘 싸워! 나는 무슨 상관이지? 지금이라도 보기 좋게 도망가야 한다는 내면과, 어서 나가서 상황을 수습하라는 또 다른 내면이 혜성의 안에서 전쟁이라도 일으킨 걸까. 꼼짝 않고 입술을 깨무는 혜성을 위협하는 소리는 거칠게 계속 들려왔다. ‘그 자식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나와는 다르거든, 룸펜.’ 크리스마스 때 경고 조를 내리꽂았던 한스의 음성이 심장의 발소리에 묻힐 때, 밖의 소란스러움을 뚫고 긴 글자가 혜성의 께에 뚫려 들어온다. “룸---펜!” “…흐… 흐… 흐…….” 툭- 두려움에 질린 눈물이 호흡 밖으로 빠져나왔다. 혜성은 생각했다. 도망갈걸 그랬어. 내가 뭘 잘못했지? 유리에게 괜히 레슨을 해 주겠다고 했어. 대체 이게 무슨 봉변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 짧은 생각마저 위협하려는지, 어디선가 귀에 익은 한스의 음성이 아이를 돌아 세웠다. “닥쳐! 샤우트! 나만 상대 해!” “!” 한스! 혜성은 그제 서야 다시 등을 돌려 계단을 모두 내려왔다. 제 3주제의 모든 악기가 화합을 이루며 그런 혜성을 조롱하고 있었다. 조롱의 박자는 매우 경쾌하고 즐겁다. 당하는 이만 괴로우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걸을수록 경악하게 되는 장면이 쉭 쉭 스쳐 지난다. 여기저기 쏟아진 쟁반들 위로 핏물이 고여 있었다. 깽판을 쳐대는 미친 자식들은 천주의 분노를 아는지 모르는지, 웨이터 녀석들은 물론이거니와 한스 쪽 놈들에게 칼과 둔기를 마구잡이로 사용하고 찔렀다. 이크! 혜성은 저도 모르는 재빠른 솜씨로 톡 튀어 올랐다. 막 옆구리를 찔린 놈이 아무렇게나 잭다니엘을 휘두르며 아슬아슬하게 혜성을 지나갔기 때문이다. 하마터면 가슴께를 북북 붉게 그을 뻔 했다. 제 3주제의 리듬이 더 빠르게 바뀌어 간다. 혜성의 몸이 긁히지 않은 것에 매우 아쉽다는 듯이, 그들은 더 센 음표로 위협하려 들었다. “악!” “!” 잭다니엘 놈을 피하자마자 쿵- 하고 커다란 몸이 밀린 샤우트 잔챙이 두 명이 혜성을 벽에 눌렀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엉겹결에 힘으로 몸이 눌린 혜성이 당황한 나머지 숨을 제대로 내쉬지 못한다. “…….” “이 개씨부랄-!” “…….” 반은 웃고, 또 반은 비명을 지른다. 자신의 등이 싸우던 도중 중심을 잃고 벽에 밀렸지만, 그 사이에 혜성을 누른 줄은 몰랐는지 다시 욕을 내뱉으며 샤우트 놈은 앞으로 달려갔다. “켁- 흐어. 흐어. 흐어.” 그제 서야 참았던 숨이 한꺼번에 밖으로 쏟아진 혜성은 가슴을 부여 쥔 채 아까보다 빠른 속도로 복잡한 내부를 뒤졌다. 한스가 보이는가 싶더니, 그의 머리털이 금새 꼬여있는 무리에 묻혀 사라졌다. “한스! 한스-!” 혜성의 부름을 전혀 듣지 못하는 한스가 다시 보이는가 싶더니 모습을 감추고 엉켜들어간다. 숫 적으로 우세한 샤우트 때문인지 한스 녀석들은 밀리고 있었다. 피를 튀기며 웃어대는 샤우트 녀석들은 여기저기 죽은 무덤을 만들기 때문이었다. 정신 차려! 혜성은 자꾸만 겁에 질리는 내면에 대고 소리쳤다. 그리고, 보았다. 그래서, 들었다. 결국 찾았다. “룸-펜!” 저 놈이다! “룸펜!” 붉은 먼지 뒤로 살며시 비춰지는 샤우트의 우두머리가 시야에 잡혔다. 빙고. 혜성의 겁은 그 때부터 감성에 굴복했다. 이상한 일이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목격하자니, 그 때 부터 두 갈래로 갈라졌던 마음은 아예 없어지고, 판단력을 부추기던 이성마저 깡그리 얼었기 때문이다. 혜성은 그 쪽을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갈 듯 뛰었다. “…….” “…….” “룸펜!” 그제 서야 혜성을 발견한 한스가 서둘러 그를 부르며 달려오려 했지만 이미 늦어있었다. 대표 격인 한스를 내버려 둘리 없는 샤우트 상위 녀석들은 그를 동그랗게 에워 쌓고 한꺼번에 덤볐기 때문이다. “씨 팔-!” 그 사이에서 한스는 다시 모습을 감추는가 싶더니 온 몸에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다 동원해서 하나씩, 혹은 둘 셋을 상대한다. 유리의 아버지, 그리고 샤우트의 우두머리는 한스 못지않게 키가 크고 우람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습기 찬 내부는 금방이라도 뻥 터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태원 주변은 그들의 싸움에 전혀 참견할 수 없다며 쥐 죽은 듯이 조용하기만 했다. 살아 움직이는 건 오직 룸펜 안에 엎치락뒤치락 중인 이들 뿐이었다. 혜성은 중년의 그 사내를 당차게 쏘아보았다. 그는 한스의 '룸펜!'이라는 부름 덕분에 혜성을 알아보았는지 자신의 코앞에 선 아이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피식 하고 웃는 걸로 보아, 예상 했던 것보다 작고 마른 혜성이 기가 막혔던 모양이다. 그는 말이 없었다. 혜성은 죽을 것처럼 뛰어대는 심장을 의식하면서도 지지 않으려고 눈을 사납게 치켜떴지만, 이 우두머리 자식은 무언으로 상대를 죽이려 든다. 말 많은 한스처럼 이런 저런 말로 위협하려 들면 뭐라고 맞대응이라도 하겠는데, 전혀 다른 위인인 샤우트 우두머리는 조롱조를 오직 눈빛으로 내보낸다. 오 하느님. “당신은 방랑자인가?” “…….” 부르튼 입술을 연다. 혜성은 도망갈 구석이 없어서야 이성적으로 터지는 자신의 입술에 치를 떨면서도 날카롭게 물었다. 그리고 다 죽어가는 이 상황에서도 예를 갖추며 비아냥거렸다. “이 곳은 방랑자만이 출입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들을 위해 공연을 하는 솔베이지 입니다.” “…….” 죽지만 않으면 돼, 그러나 죽을 수도 있어. 테레사의 모습이 쉭 스쳐 지나갔다. 아마데우스를 자퇴한 것이 처음으로 후회가 되었다. 테레사! 그 생각을 하자 그를 못 볼 수도 있겠다는 엄청난 두려움이 혜성을 도리어 바로 세웠다. 안 죽으면 돼! “니 놈이….” “…….” 굵은 우두머리의 음성이 서늘하게 터진다. 상대를 압도하는 숨결이 여기 있다. 혜성은 움찔 떨린 몸을 재빨리 추스르며 주먹을 쥐었다. 그가 또 한 번 피식 비웃는다. “룸펜이냐.” “…….” 샤우트의 고개가 약간 숙여진다. 그는 혜성을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별안간 허공에 손을 탁 내밀었다. 그가 내민 방향에서 대기 중이던 작은 놈이 즉각 달려와서 우두머리의 손바닥에 담배를 쥐어 주었고, 불을 붙여준다. 사방에서는 비명이 터지는 가운데, 샤우트는 여유로운 태도로 혜성을 샅샅이 훑으며 담배의 연기를 내보낸다. “후… 고작 너 하나가 분란 시킨 거냐.” “!” 그리고 비명을 지를 짬도 주지 않고, 그는 입에 담배를 문 채로 혜성의 멱살을 한 손에 쥐더니 높이 들었다. 힘들어하는 표정이라고는 전혀 없이 아이의 가벼운 몸을 허공에 번쩍 들고 칼 같은 표정으로 노려보는 우두머리가 긴 연기를 내보낸다. 순식간에 숨이 막혀오는 혜성이 허둥지둥 발을 구르자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이번에는 다른 손으로 교체해서 멱살을 들었다. 이 새끼가! 혜성은 몽롱해지는 내면을 억지로 부 축였다. 그리고 재빨리 그가 허공에 쥔 자신의 멱살에지지 않겠다는 뜻으로 손을 내밀었다. 쑥 내민 혜성의 힘없는 팔에 없는 힘이 들어가더니 억지로 우두머리의 멱살을 마주 잡았다. 부르르 떨리는 혜성의 팔이 우스웠던 우두머리 놈은 퉷- 하고 담배를 뱉었다. 체중의 힘을 우두머리의 멱살에 실자, 그 무모한 행동 덕분에 막혔던 숨이 뻥 뚫린다. 혜성은 겨우 겨우 숨을 내쉬며 아찔할 정도로 예쁘게 웃었다. 이미 미쳤어. 괜찮아. 상관없어. 혜성의 히스테리칼한 어조가 강하게 튀어나온다. “그래. 내가 그 애송이다!” “…….” 내 안의 신이여… 당신이 정말 계시다면……. “네가 어쩌려고.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한스는 내가 들려주는 노래가 좋대. 너도 좋아하면 되잖아. 싫으면 안 들으면 돼.” 미친개의 목을 분질러 주옵소서……. 물론 혜성은 알고 있었다. 유리 덕분에 알게 되었다. 이 싸움의 시발점은 아주 오래 전부터 쭉 이어져 왔다는 것을, 또 자신의 공연은 핑계 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알기 때문에 억울해서 배짱 좋게 소리친 것이다. 그 때, 몇 놈을 한꺼번에 던진 한스가 거친 숨을 내쉬며 이 쪽을 향해 버럭 외쳤다. “그만 둬! 저 놈은 전부터 날 노렸었어 빠져!” “그렇지. 그래서 두 패가 붙게 된 계기가 하필이면 내가 된 거겠지.” “!” 샤우트의 우두머리는, 같잖은 상황에서 비아냥거리는 그야말로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말을 기똥차게 실천하고 있는 혜성을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헉-!” 상대의 멱살을 쥐고 있던 혜성의 손이 힘없이 공중에 풀렸다. 우두머리 놈이 양 손으로 혜성의 멱살을 쥔 것으로도 모자라, 아이의 안면을 코앞으로 가까이 가져와서였다. 그는 안면을 바짝 밀착시킨 가운데, 고개를 왼 쪽으로 까딱 했다. 그의 지시 성 고개 짓 덕분에 샤우트의 공격이 순식간에 중단된다. 여기저기서 켁켁거리며 숨을 고르고 상대의 진역으로 흩어져서, 떨어진 둔기와 무기를 집고 노려보는 가운데, 중앙에 있게 된 우두머리는 낮은 소리로 부하들에게 알린다. “어떤 놈인지 봤으니 됐어.” “……?” 아… 이제 끝내려나 보다. 이제 괜찮아 졌나 봐.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이제는… 약하게 떨리는 혜성의 어깨와, 더 이상 공중에서 발을 구르지 않는 몸짓을 비웃는 소리는 그러나 이제 시작이라며 우렁차게 터졌다. 우두머리의 용광로마냥 뜨거운 눈동자에 십자가 빛이 새겨 질 때였다. 쾅- 무법자의 소리로 둔갑한 제 3주제의 스피디한 리듬이 룸펜을 휩쓸었다. “…쓸어버려-!” “!” 하느님! 채 시작조차 못 했던 기도의 구절이 테레사의 환한 미소가 보이는 것과 비슷한 속도로 혜성의 내부를 스쳤다. 아이의 가냘픈 몸은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모양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룸펜!” 한스의 처절한 비명이 들린다. 그러나 혜성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쓸어버려! 라는 말을 크게 내뱉은 동시에, 우두머리 자식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혜성을 여겼는지 굵은 장딴지를 들어 올려서 구둣발로 뻥- 차 버렸기 때문이다. 가슴 정 중앙을 직격으로 맞은 혜성이 비 잉 반원을 그리며 멀리 날아간 뒤, 쿠당- 테이블에 부딪혀 유리잔처럼 바닥에 쏟아졌다. “으아아아아!” “이 새끼들이 단체로 약 먹었나! 뭐 해! 맞대응 해 이 새끼들아!” 친분이 두터워진 혜성이 부들부들 떨면서 기절한 모양을 목격한 한스는 분노를 내질렀다. 그는 당장 주변 몇 놈을 상대하는 것을 그치고, 우드득 목운동을 하며 준비자세를 잡던 샤우트의 우두머리와 정 면으로 맞붙었다. 우람한 두 놈이 붙는 것을 희미하게 뜬 눈으로 보면서도 혜성은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자신이 이토록이나 약한 존재라는 게 답답하고 화가 나서 눈물이 쉬지 않고 쏟아졌다. “으욱-” 세게 밀친 가슴팍의 통증 덕분에 위액 따위가 푸걱- 입 밖으로 나올 뻔 한다. 혜성은 움직여지지 않는 팔을 가까스로 올려서 입을 막고 아기처럼 바닥에 누운다리를 가슴에 당겼다. 동그랗게 누운 그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기 바쁘다. 그들이 먼지내고 싸우는 장면은 유화의 장면처럼 아주 흐릿하고 거칠기만 하다. 머릿속을 지나는 테레사, 그리고 정혁, 민우, 다락방에서 울고 있을 유리… 그 때 엎어진 테이블 사이의 웅크리고 있는 혜성을 발견한 샤우트 녀석이 '룸펜이다!' 하며 미친 낯으로 크게 웃더니 뛰어온다. 미친놈… 혜성은 겨우 겨우 입 밖으로 욕을 내뱉으려 했으나 가쁜 숨소리만이 조용히 나올 뿐이었다. 그 놈의 손에 들린 것은 목재 둔기였다. 머리… 머리만 치지 마. 죽이지 마… 혜성은 눈을 감았다. 피하고 싶었지만 가슴팍의 통증 때문에 움직이기 조차 어려운 지금, 그는 차라리 두드려 맞는 것을 택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사람은 히스였다. 히스… 네가 여기 없어서 다행이다……. 혜성이 콜록거리며 바닥의 먼지를 힘겹게 삼키고 토해내고를 반복할 때, 샤우트의 놈이 아주 가까이로 달려왔다. 이제… 끝이다. 공포에 질리다 못 해, 체념하여 느려진 주변을 희한하다는 듯이 지켜보는 반 쯤 뜬 눈이 소르르 감긴다. “……?” 갑자기 제 3 주제가 또 한 번의 변화에 몸살을 앓는다. 이게 무슨 일이지? 혜성은 이미 자신을 반 죽였어야 할 둔기의 스침이 통 이뤄지질 않자, 의아한 낯으로 콜록거리며 눈을 떴다. 하지만, 눈을 뜨기도 전에 들리는 누군가의 비명은 사람의 이름을 토해내고 있었다. “큭… 쿨럭. 쿨럭. 으윽.” 여기저기서 누군가를 크게 외친다. 누구지, 누구일까. 다행이 나를 제대로 공격하려던 놈은 갑자기 방향이라도 바꾼 모양인데… 혜성이 가슴팍을 부여 쥔 채 꺼지는 정신을 옳게 세울 무렵이었다. 비수처럼 나타난 무언가가 자신의 주변을 휙 휙 스치는 것처럼 맴도는 게 아닌가. 그 때 눈앞으로 콰당- 쓰러지며 거대한 먼지를 일으키는 이가 보였다. “!” 방금 전, 자신을 발견하고 우악스레 달려오던 샤우트 놈이다! 혜성은 감기는 눈에 힘을 주려 했지만 자꾸 정신은 이탈하려 들었다. 그 때, 레이놀드의 목소리가 분명하게 인식되었다. “히스!” “!” 주방에서 일 하던 친한 계집의 비명도 들렸다. “아아아아악- 히스!” “안 돼! 히스-!” 정신이 이탈 할수록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는 믿을 수 없는 이름을 연속적으로 섞는다. 혜성은 쓰러진 자신 주변에서 떠나지 않는 이름을 환각이라 여기며 마침내 정신을 놓았다. “히스! 뒤!” “…….” “히스! 이 미친놈아! 여기가 어디라고! 이 새끼!” “…….” “히스! 룸펜 들고 토까지 않고 뭐 해! 저 병신이!” “…….” “이 놈은 내 상대라니까! 우두머리는 내가 제압… 히스!” 한스를 비롯한 여기저기서 한 낮의 큰 독수리라도 발견한 것처럼 놀란 비명을 지른다. 아득한 의식 저 쪽으로 혜성이 꿈틀거리며 희미하게 미소 짓는다. 히스라는 이름 하나가 들리지 않아도 그의 부분부분 들은 듣는 모양이었다. 히스… 히스… 히스……? 환청이 계속 들려… 그럴리가 없잖아… 히스… 그는 독일에……. 혜성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안락한 다락방에 있음을 깨달았다. 더 이상 사나운 소리들은 들리지 않았다. 무서울 정도의 고요함 만이 현란한 광시곡이 끝났음을 증명한다. 혜성은 가슴팍에 꽉 조여져 있는 붕대를 툭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억!” “만지지 마세요 선생님!” 엄청난 통증이 발끝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번졌다. 혜성이 지독한 통증이 비껴가기를 기다리는 도중 들린 소리는 유리의 것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나는 바닥에 뒹굴고 있었는데……. “괜찮으세요? 선생님… 선생님… 흐으… 선생님…….” “…….” 괜찮아… 라는 대답을 해야 하는데 잠긴 목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유리는 부리나케 냉수를 가져와 혜성의 목에 넘겨주었다. 그제 서야 숨 쉬는 게 편해진 혜성은 머리를 짚고 침대에 등을 기대앉았다. 으슬으슬한 통증이 환각에 미칠 것처럼 아프게 퍼져왔다. 그러나 참을 만 했다. 혜성의 옆에 진즉부터 의자를 놓고 앉아있었을 유리는 여러 가지를 이야기 해 주었다. 뒤늦게야 달려온 경찰은, 그저 의무적으로 사건을 끝내기 위해 왔을 뿐이며, 그들은 또 형식적인 절차를 밟기 위해 샤우트의 우두머리와 다친 한스를 대신하여 레이놀드를 연행 해 갔다고 한다. 난장판이 된 룸펜의 썰렁한 곳곳에 오전의 태양이 반사되어 잔인한 흔적을 공개 했을 테다. 다락방만 봐도 알 수 있다. 혜성이 침대에 앉아서 관찰하는 풍경은 날카로운 유리 파편과 어지럽게 널린 잔해 투성 이었기 때문이다. 혜성은 엉클어지는 시야와 두통 덕분에 이를 악 물어야 했다. 유리가 울고 있다. “이 일에 휘말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선생님.” “…넌 괜찮니, 유리….” 유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혜성은 변화가 휩쓸고 간 지역을 걱정해 주었다. 그녀의 이성은 나가서 말려야 한다고 없는 용기를 부축였지만, 무서워서 꼼짝도 못했을 테다. 소녀는 많이 미안해하고 있었다. 그녀의 죄의식은 상상 범위를 뛰어넘을 테다. 혜성은 어떻게 말을 해 줘야 좋을지를 몰라서 냉수만 들이켰다. 흐릿해지는 동공이 쉬이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 어지럽다.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어도 언젠가는 벌어질 싸움이었어요.” “…….” 혜성이 깨어나는 것에 안심했는지, 유리는 코트를 입기 시작했다. 그녀는 멍하니 앞을 응시하는 혜성의 모습에 후두둑 눈물을 떨어뜨리며 하기 싫은- 하면 안 될 것 같은 말을 여러 번 망설이더니 결국 꺼내버린다. “아버지는 저를 사랑하시거든요.” “…그야 당연하지.” “…….” “?” 머뭇거리는 소녀의 행동이 혜성에게도 느껴졌는지, 둘은 조용히 마주 보았다. 온 몸에 눈물밖에 없는 사람처럼 처절하게 울고, 입술을 깨물던 유리는 다락방 문고리를 쥐면서 그녀 자신처럼 연약한 어절을 괴롭게 내뱉었다. ‘아버지는 저를 사랑하시거든요.’ “…여자로서요.” “!” 쁘직- 내면의 잠잠한 평화가 칼에 찔리며 유리처럼 깨어진다. 혜성이 놀라서 냉수를 시트위로 떨어뜨린다. 물기가 이불 속에 흡수될 때, 등을 돌린 유리는 그래서 시선에 잡히지 않게 된 유리의 허망한 소리가 조용히 퍼져왔다. “그만 나가 볼게요. 이제 레슨은 오지 마세요.” “유리야!” 허둥지둥 그녀를 잡기 위해 몸을 움직이던 혜성이 으윽- 통증을 호소하며 가슴팍을 쥐고 다시 앉았다. “죄송합니다. 저희 아버지를 이해해 주시는 거… 바라지는 않아요. 건강하세요.” “!” 그렇게 방금 전까지 소녀의 눈으로 혜성을 지켜보던 유리는, 갑자기 여자로 변해서 나가버렸다. “그게 무슨…….” 오싹 한기가 점령해버린 육신을 쥐고, 혜성은 더듬더듬 시트 위를 분주히 더듬었다. 방금 전 물을 쏟은 것만 생각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도중, 눈에 띄게 어깨를 움츠리며 아이는 가슴에 다리를 당겨왔다. 경직된 몸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의 옆 자리에서 누군가가 긴 수면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불을 머리 꼭대기까지 덮고, 현란했던 광시곡에 속했던 인영 중 하나임을 자랑하듯 간간히 몸에 바른 약 냄새를 풍기는 이 사람은……. “!” 눈물이 맺힌다. 혜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머리 속이 온화로운 빛으로 가득 채워졌다. 상냥한 오전의 태양이 떠오른 것이다. 팔을 꼬집어보았다. 아프다. 현실이다. 혜성이 숨을 죽이고 있던 때, 옆에 누워 있었던 그 사람은 잠결에 몸을 살짝 뒤척인다. “으…음…….” 잠든 와중에도 곳곳에 육체를 아프게 하는 타박상으로 인한 신음을 내뱉는 그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혜성이 양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 위로 굵은 눈물이 지나간다. “…….” “!” 혜성이 앉은 쪽으로 몸을 뒤척이며 또 다시 신음을 내뱉는 그의 머리 위까지 덮여있던 이불이 살짝 내려갔다. 눈에 익은 파란색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그래서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히스의 아름다운 얼굴이 반 이상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는 혹시 독일일까! 아이가 어지러운 환각에 휩싸일 때, 그의 피딱지가 더덕더덕 붙여있는 입술마저 나타났다. 변화의 내면 광시곡, 제 3 주제마저 모두 끝났다. 내면의 지휘자가 격하게 숨을 고르며 땀을 닦고 있을 것이다. 바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처럼. wgreene@naver.com 댓글 여부에 따라 다음편 시일이 오락가락할 예정... 아트 옵 워~ 신나는 음악이지요? 좋은 하루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_~ 2악장 14-2 올림. 060419 오후 5시 40분. 덧글 8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14 -2편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14 -2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15편 예고 ▼ 다음글 - 2악장 14-2편 예고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15편 예고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4/20 19:53 http://blog.naver.com/wgreene/110003615681 Amadeus 음악 : 시크릿 가든 - elegie 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Elegie-Secret Garden - 2악장 15 예고편 - “다신 이런 짓 하지 마…….” “……싫어.” 성치 않은 몸으로, 한 쪽 팔은 부러진 상태에서 네가 나를 업고 병원으로 뛰었다니. 나는 그 말에 놀라서 죽었다. 하지만 지금 네가 있으니, 나는 또 살았나 보다. “히스, 안아줘…….” “…안 돼…….” “왜…….” “사랑해서…….” “바보야… 사랑하니까 안아 달라는 거야… 네가 나를 사랑하니까 안으라는 거야….” “…나는 영원히 너의 마음은 얻을 수 없는 거야……?” 그 말을 하면서도 히스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억 누르려는 지 입술을 깨물었다. 얕게 아물던 상처가 터져서 그의 입술을 눈물보다 진한 붉음으로 치장한다. 혜성은 고약한 저 달처럼 오히려 그를 이해 못 하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혜성은 그를 아예 이해 못 하는 게 아니었다. 이해하지 않는 척 할 뿐인 것을, 이 글을 지켜보는 당신처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히스에게 나오는 행동이며 말은 어떻게 나와도 상처가 될 것 마저 그는 알고 있었다. . . . 대답 없이 울기만 하는 혜성을 보며 채 1분을 참지 못하고, 맹렬한 기세로 히스는 덤볐다. 그도 바보가 아니었다. 혜성이 자신에게 좋은 말을 해도 상처를 주고, 나쁜 말을 해도 상처가 된다는 것을 그 역시 알았다. 둘은 알았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예쁜 여인이 백합을 들고 나타나서 히스를 유혹해도 거스를 수 없는 일이었으며, 수제 블라우스 백 벌이 눈앞에 넘실거려도 바뀔 수 없는 진리였다. 다락방 전체를 타고 약품 냄새가 돌아다녔다. 두 사람은 움직일 때 마다 고통이 엄습하는 것을 서로를 향한 시선으로 말미암아 이겨냈다. 그건 의무였다. 오, 그건 누군가의 사랑 이었다! 그건 그래야 한다는 내면 어딘가로 부 터의 강한 명령이었다. 지금이 없으면 미래에 후회할 것을 알았다. 히스의 쓰라린 손이 올라왔다. 부끄러움을 타는 달빛이 고개를 숙여 환한 어두움을 선물해 주었다. 덜덜 떨리는 그의 손이 자기 가슴에 엎드려 있는 혜성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주기 시작했다. 서로의 가슴에 꽉 조여 있는 붕대 위로 온통 눈물만이 내려서, 이젠 밖의 세상에 영원토록 비가 내리지 않아도 그들은 이 물기로서 살아갈 힘이 충만해질 지경이었다. 상아색 머리칼 사이사이를 소중하게 헤엄치던 부드럽되 다친 히스의 손 위로 또 한 번의 긴 눈물이 줄을 이뤘다. 이제는 그의 음성마저 떨려서 안쓰럽다. “바…보야… 이럴 때는 미안하다고 해도 돼…….” “!” “후…회 하지 않을 거지…….” “…응…….” “쉽게 멈추지 못 할 거야… 내가 너를 얼마나 갖고 싶었는지 너는 안기면서 깨닫고 후회 할지도 몰라…….” “괜찮아…….” “수페리우스…….” “…….” “사랑해… 사랑해 수페리우스…. 귀여운 마드모아젤…. 나의 신혜성…. 사랑스러운 사람…. 사랑해…. 사랑해에….” “…….” 마침내 히스는 파란 머리칼을 번쩍 세우더니 더 빠른 속도로 혜성의 위에 올랐다. wgreene@naver.com 그 언젠가.. 14-2편에 댓글이 넘치는 날.. 이 예고편이 올라오리라... 이러면 제가 너무 나쁜 사람인가요? ^^ 이번주에 워크샵을 다녀오고, 또 몸이 극도로 안좋아져서 시간조절차원으로 앞으로의 소설 시간을 대폭 줄였습니다. 뭘.. 그래도 반응 좋으면 기면서라도 쓰려고 했어... 진짜야.. 즐거운 주말 되세요. ^_~ ....피치못하게 잠수 타게 될거란 소리였습니다; * 오, 이 말을 빠뜨렸군요. 제가 없는 동안 리하의 배경음악은 최근 아마데우스 3편(예고편포함)에 깔았던 것들(바네사메이포함)이 좍 나올 겁니다. 즐기는 거야~ ^_~ 덧글 8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15편 예고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15편 예고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15편 ▼ 다음글 - 2악장 14 -2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15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4/29 18:39 http://blog.naver.com/wgreene/110003850846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429 15편 업데) Amadeus 음악 : Kevin Kern - Le Jardin (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Le Jardin (from Summer.. 수페리우스. 나와 독일 아마데우스로 가자. 뮌헨의 민들레꽃을 선물로 줄게. 2악장 15편 그와 눈이 마주치는 것이 두려워졌다. 파란 머리칼의 주인을 발견하기도 전에 그가 누구인 지 혜성의 영혼은 알아서였다. 어쩌면 그것은 영혼보다 빠른 속도였다. 하늘과 바다 사이에서 으스대는 땅이 갈라지는 것처럼 깨지고 부서지는 두려움이 그의 머리칼을 발견하는 것으로 지각변동을 시작하였다. “히…스……?” 영혼보다 빠른 것은 사람의 감각일까. 이 침대 옆 자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비록 이불을 머리 꼭대기까지 덮고 있었지만 혜성은 감각으로도 알았다. 굳이 그가 잠결에 머리칼을 내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람은 때론 이상하다. 왜 시야로 확인하기도 전에 가슴은 선수를 쳐서 알아챌까! 그래서 두려워졌다. “정말 히스…잖아. 왜 히스인 거야…….” 샤우트의 나무판자 같은 팔에 붙잡혀서 매달린 뒤, 거칠게 발로 차여서 약한 몸은 서서히 수면으로 정신을 이탈시켰었다. 어디선가 용맹한 사자 한 마리가 비수처럼 나타나서 주위를 뱅뱅 돌았었다. 그것 까지는 기억난다. 아니다. 많은 이들이 혜성이 쓰러지는 속도를 기다린 것처럼 동시에 질러대는 단 한 사람의 이름까지 기억한다. 히스, 히스. 히스! 많은 사람들은 마른 우물 속에 느닷없이 출현해 준 상쾌한 물을 건져 올리듯이 쉬지 않고 같은 이름을 외쳤었다. 히스 라는 두레박은 혜성의 사라지는 의식 속에 똑똑히 움직였었다. 그래… 그래. 그들은 차차 눈꺼풀을 내리는 혜성의 주변에서 단 하나의 이름을 쉬지 않고 불렀었다. 그 이름 하나에 어쩌면 혜성의 작은 몸은 정신을 이탈했는지도 모른다. “왜… 왜에….” 혜성은 자신과 나란히 침대에 누워서 단잠에 빠져있던 이 잘나고도 못난 인물이 히스 라는 것을 아는 즉시 닥치는 두려움이 낯설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회오리와도 같은 감각은 오래 전 테레사에게 기립박수를 받았던 것과 닮아있었다. 갑자기 그에게 파란 색으로 염색하라며 시건방진 말을 내뱉었던 지난날이 후회스러웠다. “잘생긴 얼굴이 이게 뭐야… 이 멍청아… 여기가 독일이야…? 여기가… 비행기…야?” 불편한 자세로 벌을 서는 것도 이런 고역을 주진 못 할 것이다. 삼천 명 앞에서 연주를 시작한다 한 들 이 정도의 공황은 없을 것임을 신께 맹세하리다. 혜성은 마른침을 삼키며 휙 고개를 돌렸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못했다. 오히려 고개를 돌린 시간마저 죄스러운 마음에 히스를 끊임없이 지켜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히스- 뒤!’ ‘히스!’ 어머니의 무덤에서 슬픔을 후련하게 내뱉은 뒤 돌아 오겠다던 멋진 사내가 나타나 준 것이 혜성은 사실 고마웠다.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곧 눈을 뜨고 태양과 직각으로 만난 녹색의 모든 것에 활력을 불어넣은 뒤 자신을 걱정할 것이 두려웠다. 그가 보여줄 앞으로의 웃음이 얼마나 가슴을 찢어뜨릴 지 알기 때문에 두려웠다. 성치 않은 몸으로 자신을 안아 줄 것이 두려웠으며, 진지하게 적어 준 시가 그의 진심 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두려움은 전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혜성이 고민하는 시간에도 태양은 거침없이 세상을 밟았다. 그는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로 결정했다. 히스를 이대로 쭉 내려 보는 시간이 길어지면 말도 못 하게 커진 두려움에 잡아먹힌 영혼은 그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태양은 오후의 빛을 앞 세워 가매 룸펜의 작은 다락방까지 쳐들어왔다! 도망 가, 도망 가 수페리우스. 작은 러시아 인형 같은 소년아! 어서, 그가 눈을 뜨고 너를 향해 웃어주기 전에 도망가야 해! 내면은 작은 몸에게 강렬한 음성을 전했다. 아이는 맨발로 바닥에 섰다. “!” 하느님! 천주여! 혜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눈을 감았지만 시야는 오히려 더 정확해져서 수페리우스의 감수성을 괴롭혔다. “가지 마…….” 그 순간 오래 전 성탄 전야제의 민우가 하늘나라로 완전히 올라가 주었다. 혜성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로였다. 하여, 그는 스스로의 생각을 위한 시간을 빌미로 다락방에서 벗어나려던 작전에서 완전히 실패하고야 말았다. ‘가지 마…….’ 그래. 그가 잠든 사이 빠져 나가려던 쉬운 작전은 어렵게 실패했다. 긴 수면에 빠진 줄로 보였던 히스가 조용히 침대 밖으로 벗어난 혜성의 팔목을 강하게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래 전, 다른 이의 입술이 내뱉었던 가슴 아픈 문장을 들려주었다. 혜성은 움직일 수 없었다. 만약 몸이 움직인다고 해도 이제 생각 이라는 건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이 이곳에 잡혀있지를 않던가. “오… 피가 나는군.” “뭐……!” 등 뒤로 얇은 팔이 잡혔던 혜성이 당장 뒤를 돌아보았다. 피가 난다고? 얼마나? 쿵 떨어진 심장이 데굴데굴 굴러서 히스의 모든 것을 감싼 모양이 그러할까. 혜성은 본디 빠른 사람도 아니거늘 재빨리 뒤를 돌았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히스클리프라는 백인 청년이 더 빨랐다. “히……!” 그는 표정을 보여주기도 전에 자신 쪽으로 돌아서는 혜성을 송두리째 품에 당겨 안았기 때문이다. 찌꺼기만 남아있던 겨울이 온통 부서지는 비명을 질렀다. 둘의 주변으로 퍼지는 송달한 바람이 서로를 마구 잡아당겼다. 그를 부르려던 작은 입술이 가슴께에 파묻힌다. 겨울의 오후는 이토록 뜨겁고 쓰리기만 했다. “이렇게 말 해야지 뒤를 돌아보잖아.” “!” “농담이야. 후후… 또 놀라네…….” “!” 그런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수페리우스에게 미쳤다. 평소와 다른 무언가가 폭포처럼 쏟아져서 아이를 떠밀리게 했다. 혜성은 불안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자신을 꼭 끌어안은 그의 몸을 천천히 음미했다. 히스에게서 외형적인 변화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엇일까, 무엇이? 바로 그 때, 아이의 물음표를 캐치한 즐거운 입술이 다정하게 소곤거렸다. “나는 괜찮아.” “!” 이번에도 혜성이 늦었고, 그가 빨랐다. 소스라치게 놀란 혜성이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지만 소용없는 노릇이었다. 히스는 옅게 웃으면서 슬픔이 가득한 녹색 눈동자에 벌써부터 힘을 주고 있던 탓이다. “나는 괜찮아.” “뭐가… 이게 뭐가 괜찮은 거야 이 바보야!” “나는 괜찮아…….” “놔-!” “…….” 늘 품에 안겼을 때면 느껴졌던 갑갑하되 풍성한 기운이 평소와 같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히스의 팔 한 쪽이 부러졌는지 두꺼운 붕대에 감겨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히스는 자신의 다친 모습을 조금이라도 늦게 보여주기 위해 자는 척을 하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또 지금처럼 눈을 마주치기도 전에 아예 가슴에 아이의 시야를 묻혔었나보다. 바보 같은 사람이다. 너는, 히스클리프는 아주 바보 같은 사람이다. “이거 놔 봐!” “…….” “너! 파… 팔이!” “…….” 아마데우스의 자랑, 현재는 추락에의 가십이 세상에 존재해도 어쨌든 헤르베르크 폰 카라얀 2세 라는 수식어가 있던 황제의 팔이! 아름답되 날카로운 지휘자이며 레퀴엠의 창시자인 혹평가의 팔이 온전치 않다. “너어… 너…….” “…….” 혜성의 고집에 못 이기는 척, 히스는 강한 한 쪽 팔의 힘을 풀었다. 껴안고 있던 둘의 사이에 약간의 틈이 생기자 혜성은 당장 소리부터 쳤다. 그러나 그것은 금새 사라졌다. 만약 지금 사라진 음성이 마법이라면,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마법일 것이다. 아이는 도저히 그에게 화를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눈동자는 처음부터 혜성을 걱정하다 못해 겁에 질려서 창백해진 낯을 억지로 유지하고 있었다. 오직 나 한 사람을 위해 걱정을 떠안은 자가 오래된 고목나무처럼 발가벗겨져 있다. 아이는 미칠 것 만 같았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만약 끊임없이 주려는 누군가의 씀씀이와 사랑을 겪은 이가 당신이라면, 알 것이다. 그 섬세한 표정 구석구석 쓰여 있는 걱정과 사랑이 뒤범벅이 된 이를 겪었다면, 모를 리가 없다. 만약 당신이 죽을 것처럼 운명을 움켜쥔 이의 사랑을 받아 봤다면 알 것이다. 나 보다 더 다친 주제에 걱정하느라 창백해진 낯은, 이리떼를 만난 것보다 겁에 질려있는 그것을 보았다면 알 것이다. 그런 그에게 제아무리 화가 나도 일올 표현조차 아니 된다는 것 역시, 당신은 알 것이다. 그 사람의 정열에 제대로 된 보답을 할 수 없는 미안함이 사지 육신을 찢는 고통을, 차라리 당신이 몰랐으면 좋겠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슬픈 눈으로 즐겁게 웃는다. 동완아, 인간은 이토록이나 위선으로 가득 찬 생물이었다. 나는 어머니를 버리고 나에게 돌아온 그가 반갑고 화가 난다. 동완아, 인간에게 감수성이란 것이 있어서는 안 될 노릇이었다. 그건, 자비로운 천주님의 벌이라는 것을 나는 이생을 겪으며 알고 또 안다. 혜성의 손이 그의 머리끝부터 천천히 쓸었다. 히스가 눈을 감았다. 어머니를 뒤로 미룬 그의 돌아온 일상은, 혜성에게 ‘사랑’ 의 진실을 일깨워 주었다. 그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다 못 해 겁에 질려 미쳐 있는지를 깨달았다. 겪고 나면 알기 마련이다. 혁명의 제물로 천주의 품에 돌아간 민우처럼, 사람은 겪어야지 깨닫는다. 차이가 있다면, 민우는 하늘로 돌아갔고, 히스는 여전히 살아있다는 점 그것밖에 없다. 오! 그는 나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다. 더더욱 두려워진다. “이게 너의 사랑이라면… 나는 강한 방패가 아니라 가장 두려운 것을 얻었구나…….” “…….” “네가 준 익숙함이 언제고 사라질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나는 묶이고야 말았으니….” “…….” “만약 이것이 우정이라고 해도 나는… 방패가 아닌 두려움을 얻었어…….” “……?” 혜성의 전체에 집중하고 있던 히스는 때문에, 방금 내뱉은 혜성의 진실 된 소리의 전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혜성을 끊임없이 확인하며 혹시라도 있을 생채기를 걱정하고 있었다. 백 번이 넘어도 천 번이 모자라다며 입맞춤을 반복했다. “히스….” “…….” “죽으면 안 돼…….” “!” “…알았지?” 히스의 몸을 꽉 껴안으며 혜성이 내뱉는 달콤한 소리에 그는 잠깐 경직되었지만 그건 기뻐서였다. 오히려 더 세게 마주 안아주고 머리칼과 뺨에 수 십 번의 입맞춤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죽으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 사랑스러운 사람의 속삭임에 그는 아이의 볼에 입술을 누른 채로 어깨를 들썩이며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하!” “죽으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어…….” “하하하하하! 뭐라고? 귀여운 내 사랑… 뭐라고? 하! 하하하하!” “죽으면…….” “하하하하! …나를 병자 보듯이 하는 군. 그런 약한 놈으로 보였나?” “…내 손에 죽을 줄 알어….” “네 손에 죽는다면 행복하겠는데…….” “야! 너는-” “…….” 히스는 ‘나는 강한 놈이야’ 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는지 꽥 소리치는 혜성을 한 쪽 팔로 침대에 쓰러뜨린 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렬한 키스를 퍼부었다. “팔 금방 붙여지는 거야?” “…응… 응….” “눈 좀 뜨고 말해! 으이그! 왜 이런대! 키스 못 해서 죽은 귀신이 붙은 건가!” “응… 응…….” 시트에 누워있는 혜성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성한 팔로 꽉 누른 뒤, 히스는 숨결을 빨아 올리려는지 선명한 눈동자를 닫고 정신없이 혀를 밀어 넣기만 한다. 팔베개를 해 준 작은 머리에도, 귀여운 코와 작은 입술에도 그는 눈을 감고 흥분한 사자처럼 여릿한 비음을 흘리며 달콤한 입맞춤을 하였다. “응… 응… 응… 입… 아…….” “잉? 입 말고 눈!” “아… 눈… 응… 응…….” “눈 떠 봐, 히스!” “!” 혜성의 짜증이 커지는 것을 그제 서야 알아 챈 히스는 아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번쩍 동공을 열었다. 녹색의 바다가 찰랑인다. 서로를 향한 길고 아득한 숨이 바로 앞에서 떠나가지 않음에 혜성은 안심했는지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 “이제 해도 돼. 아… 자, 이제 나에게 키스를 하라.” “?” “아~” “…….” “아아!” “……?” “…이런 바보를 봤나!” “어…? 하하하하!” 혜성이 알아서 입을 벌리는 것을 멍청하게 내려 보기만 하던 그가, 아이의 손이 자신의 목을 확 당겨오자 호탕하게 웃는다. 자석처럼 다시 달라붙게 된 둘은 서로의 눈동자를 지그시 응시했고, 길고 나른한 입맞춤을 하였다. 그렇게 또 하루의 달이 떠올랐다. 샤우트가 다녀간 뒤, 룸펜의 바닥은 아주 깨끗했다. 그러나 정도가 지나칠 정도로 투명했다. 벽에 걸려있던 거울을 비롯하여 모든 조각과 또 손바닥만한 창문까지 와장창 깨진 흔적이 지난 자리는 아주 썰렁하다. “확…….” “?” 굳이 자신이 먼저 계단 아래로 내려가겠다며 고집을 피웠던 히스는 고개를 돌렸다. 룸펜의 썰렁할 정도로 깨끗한 바닥을 서서히 목격하며 혜성이 뭐라고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소름이 끼쳤다. 비록 계단을 내려오는 중이라서 전부를 확인하지 못했지만, 두 사람이 잠들어 있던 짧은 사이에 더러운 흔적들이 사라진 것이 신기하다 못 해 무서울 정도였다. “확….” “확?” “…뚫렸네.” “?” “유리가 없어졌어.” “…….” 막힘없이 실려 들어오는 바람과 흩날리는 커튼의 춤 시위를 아련히 응시하던 혜성이 중얼거리자 히스는 미간을 좁혔다. 그는 기분이 나빠졌다. 혜성이 야기하는 유리라는 의미가, 저 유리창을 말 하는 건지 혹은 레슨 해 주던 유리를 뜻하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둘 다 일 수도 있지만 히스는 꼬치꼬치 캐물으려던 것을 관뒀다. 그 대신 건강한 팔을 뒤로 쑤욱 올리더니 멍청하게 룸펜을 쳐다보던 혜성의 목을 당겨왔다. “흐헉!” 무방비 상태로 혀를 쯧쯧 차던 혜성이 굴러 떨어지는 형상으로 엎어지려는 때, 비수처럼 날아오는 음성이 있다. “나만 봐….” 뒷목을 부드럽고 강하게 당겨온 뒤 중심을 잃은 혜성의 허리를 꽉 팔로 두르며 히스는 허스키한 음절을 내뱉었다. “야! 죽는 줄 알았잖아!” “…….” 주변으로는 아무도 없었다. 마법처럼 사라진 룸펜의 유리처럼, 어쩌면 청소하다가 휴식 할 겸 나갔을 수도 있는 웨이터 녀석들이지만,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녹색 눈동자가 지켜보는 이의 심금을 울릴 만치 떨리고 있다. 혜성은 허리를 감싼 그의 손 보다, 자신에게 집중하느라 독일의 중대한 일을 잊은 히스가 점점 더 두려워졌다. 혜성이 깨어난 순간부터는 잘 웃지도 않아서일까. 그래. 그는 혜성이 장난기 있는 행동을 취할 때만 가끔 제정신을 차린 사람처럼 크게 웃었다. 그 외의 시간에는 넋이 풀렸는지 아름다운 녹색의 동공이 침체한다. 아프다. “나만 봐… 수페리우스.” “…….” “나만 봐.” 나만 봐- 라는 말에 무슨 대답을 해야 하지? 라고 혜성이 작은 머리를 굴리는 사이에 연한 히스의 미소가 스쳐갔다. 그는 무섭게 노려봤던 시선을 아이를 위해 풀었고, 부지런한 입술을 촉 소리 내어 눌러 주었다. 그의 키스에 안심했는지 혜성이 씨 익 웃으며 그에게 붙잡힌 채로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너만 봐. 유리가 없어졌는데.” “…….” 오, 히스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즐거워진 혜성의 입술은 멈출 줄 모른다. 내가 샤우트의 유리를 얘기하는 걸로 보이는 걸까? “다들 어디 간 거지? …유리가 없어졌는데.” “!” 서서히 사납게 변한 히스의 낯이 왜 즐거울까. 혜성은 딴청을 피우는 척 심각한 투를 고수한다. 밤의 전류에 반짝이는 싱그러운 달빛이 둘이 몰래 숨어있는 다락방 통로 계단에까지 미친다.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둘의 영혼까지 반짝이게 될 영적인 빛이 목전까지 왔다. “유리가 없어져서 유리를 가지러 갔나…….” “수페리우스!” 쿵- 가슴의 박자가 크게 엇갈리며 두근거릴 때, 혜성이 눈을 크게 떴다. “왜… 잉?” “…….” “어헉! 히스! 히스!” “…….” 유리, 유리, 계속 유리! 이번에는 정말 화가 난 히스가 단 숨에 성한 한 쪽 팔로 아이를 허공에 들었다. 허리와 가슴이 그의 팔 힘에 조여지자 숨이 막혔던 혜성이 아슬아슬한 계단을 내려 보며 사색이 된 소리를 질렀다. “알았어! 알았어! 너만 볼게! 히스만 볼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정말이지?” “내려줘, 내려줘!” “…….” 혜성의 말을 못 듣는 척 하며 히스는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간다. 그가 걸을 때마다 마주치는 날카로운 계단의 시선에 소름이 끼쳤는지 혜성이 온 몸을 뒤흔들며 꽥 소리쳤다. “정말이야! 정말이란 말야!” “너는!” “내려줘! 빨리 내려!” “…….” 뻥 뚫린 룸펜의 넓은 창틀 곳곳에서 밀려오는 풍성한 바람과 달빛 그대로의 싱싱함이 단 둘이 서 있는 낮은 무대에서 그 빛을 뽐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주 선 두 사람의 둘레 둘레를 장식하더니 빠른 속도로 하나가 되어 위로 또 위로 솟구치며 말아 올라간다. “너는….” “…간지러워….” “…이렇게 해야지 대답하잖아. 아프게 해서 미안해, 귀여운 수페리우스.” 자꾸만 어색해지는 분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혜성이 머리를 굴릴 때였다. 챙- 룸펜의 도어가 열리더니 정하와 웨이터 녀석들이 청소하느라 더러워진 몰골로 시끄럽게 나타났다. 그들은 히스와 혜성에게 괜찮느냐 따위를 물었고, 아이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하게 서 있는 지금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 걸음 내딛었다. “나랑!” “헉-” 청소 하고 왔어? 라고 그들에게 물은 뒤, 자신도 뭔 갈 해야겠다고 여겼지만 혜성의 계획은 또 실패했다. 둘이 서 있는 깨진 조명 아래의 무대에서 나가려는 혜성의 팔목을 꽉 쥔 히스가 버럭 고함을 쳤기 때문이다. 덕분에 두 사람을 은밀한 시선으로 지켜보던 웨이터 녀석들은 못본 척 각자의 장소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한스는 괜찮대! 지금 병원에 있는데 4주 정도 후에 퇴원하면 되거든! 레이놀드도 내일 모레 쯤 이면 풀려날 거야!” “어… 어? 알았어! 잘… 잘됐네!” “…….” “히스……?” 빗자루를 들고 주방에 들어서며 소식을 전하는 정하에게 대충 대답을 하면서도, 혜성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심각한 낯으로 놓아 주지 않는 히스 때문이었다. 그의 갑작스런 출현에 대한 질문은 차마 할 단계가 아니라서 참고 또 참았었는데……. 스무 명 가량이 시끄럽게 떠들며 다시 쓸고 닦아대는 룸펜의 무대에서, 혜성은 히스의 눈치를 보며 한 참 동안 침묵하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다시 열린 것은 오래 서 있어서 다리가 아파올 때 즘이었다. 이미 정하와 다른 녀석들은 내일을 기약하려는지 각자의 숙소로 돌아가 버렸다. “나랑….” “…….” “수페리우스. 나와….” “…….” 지금 한 몸이 되자는 걸까? 여기서 하자는 걸까? 오, 나는 몸을 주겠다고는 했지만 이 장소는 별론데… 게다가 해 본 적도 없는데 여기서 옷을 벗어야 할까? 정하가 문을 잘 잠그고 간 게 맞겠지? 하지만 혜성의 추측과는 달리, 히스는 연민의 시선을 품은 채 보다 확실한 투를 내뱉었다. “나와 독일로 가자.” “……!” 독일! 이것저것을 추측하고 생각했던 혜성의 모든 것이 경직되었다. 갑자기 히스가 멀어 보인다. 낯설었던 그의 비서처럼 그 역시도 먼 거리의 불투명한 그림이 된다. “뮌헨의 민들레를 선물로 줄게.” “뭐…어….?” “너한테 민들레를 꺾어 주고, 샤우트가 있는 한국에서 많이 멀어진 게 그렇게 확인 되면 나는 곧 잊었던 슬픔을 꺼낼 테니….” “!” “가자. 뮌헨의 민들레꽃 다발을 만들어서 너에게 줄게.” “…….” 히스의 말은 거기서 잠깐 끊겼다. 그리고 둘은 말없이 주방에 들어가서 조용히 식사를 마쳤고, 또 의무적으로 서로의 손에 깍지를 끼인 채 다락방에 올라왔다. 차가운 새봄의 바람이 열린 창 안으로 쉭쉭 들어오고 있었다. 어느덧 새벽인가… 혜성이 세안을 마친 후 침대에 눕자 팔이 다친 상태에서 불편하게 몸을 씻은 히스가 천천히 걸어왔다. 달빛이 주는 음영 때문인지 침대에 누워서 이불을 꼬 옥 쥐고 있는 혜성을 내려 보는 그의 길고 늘씬한 몸과 진지한 표정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크고 무서운 마왕 같기도 하고, 또 선량한 림프처럼 등 뒤의 날개를 숨기는 것 같았다. 혜성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마침 칼바람이 불어 닥쳤다. 휘익- 스치는 동시에 히스의 파란 머리칼이 등 뒤 바람과 부딪혀 춤을 추듯 일어났다. 조각 같은 시선은 여전히 표정 변화가 없다. 오히려 표정에 변화가 생긴 것은 슬쩍 누웠던 몸을 약간 앉히며 서 있는 히스를 올려보던 혜성이었다. “왜… 왜 옷은 벗고 난리야!” “…….” 혜성을 정면으로 마주보며, 히스는 아이의 말마따나 자신의 블라우스를 벗었다. 천천히, 단추를 푸는 속도와 반비례하게 정확한 시선은 아이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본다. 지금의 히스는 간지러운 키스를 되풀이했던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다. “!” “…….” 사내의 눈이었다. 욕정의 끝에 선, 계집을 잡기 위해 창을 던지는 장군과도 같은 시선이었다. 혜성은 그제 서야 숨이 막혔는지 눈을 크게 뜨며 양 쪽 시트를 부여 쥐었다. 히스는 혜성이 자신의 뜻을 이해했다고 여겼는지 살짝 굳은 표정을 풀더니, 아까 끝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새삼 잇기 시작했다.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덕분에 머리 꼭대기까지 긴장했던 혜성이 긴 안도의 숨을 내쉰다. “나랑 독일에 가면…….” “?” “독일 아마데우스도 보여줄게.” “어? 아… 그거. 어…….” 왜… 왜 저런대! 혜성은 차라리 야밤 이어서 다행 이라는 생각을 했다. 달빛이 자신을 스치지 못하도록 분주히 뺨을 이리 저리 돌렸다. 히스는 싱그러운 투로 말을 하지만, 동시에 바지를 벗었기 때문이다. 그의 넓은 가슴과, 섬세하게 이어진 줄이 살아있는 근육 곳곳을 가름 짓는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의 팔과 함께 붕대로 감겨진 그의 가슴이다. 복부 위쪽은 온통 넓은 붕대로 칭칭 감아진 히스는 자신의 그런 점을 개의치 않았지만 혜성은 마음이 아플 뿐이었다. 물론 혜성 역시 붕대로 가슴팍을 조인 상황이었지만, 남의 것이 더 아파보이는 법이지 않던가. 하지만 곧, 이런 생각들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는지, 혜성은 다시 확인되는 히스의 멋진 몸을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달빛마저 고개를 숙이는 아름답고 탄탄한 허벅지와 늘씬한 종아리와… 이럴 수가! 혜성은 그를 노골적으로 관찰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휙 시선을 돌렸다. 히스는 자신을 응시하는 혜성의 시선에 감전이라도 당한 것 마냥 간간히 신음을 내뱉으며 멋진 몸에 마지막으로 걸쳐 있던 속옷을 제외하고 완전히 맨 몸으로 바꿨다. “한국 아마데우스는 장미문과 장미꽃이 사방에 퍼져 있지… 그러나 독일 뮌헨 아마데우스에 피어있는 민들레꽃밭 만은 못 할 거다.” “!” 왜 이런 때 저런 말을 하는 거람! 홍시처럼 붉어진 혜성이 불안해진 시선처럼 떨리는 양 손을 차라리 이불 속에 가린다. 부끄럽지도 않은 건가! 아니면 나도 같이 옷을 벗어야 하나! 내 빈약한 몸을 히스처럼 달빛에 등지고 쇼라도 한 판 벌여야 한다고! 게다가 왜 이 순간에 저런 중요한 말을 꺼내는 거지? “또 가야 할 이유가 있긴 하지만….” “……?” “그 이유 때문에 사실은 널 데려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 거의 맨 몸이 된 히스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한 태도로 혜성의 옆 자리에 쑤욱 들어왔다.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들키지 않으려고 아이는 등을 돌아누웠다. 그래. 갑자기 옷 벗고 자는 취미가 생겼나보다. 팔을 다쳐서 갑갑해서 그런가 보다. 혜성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억지로 끼워 맞추며 흥분한 나머지 콧김만 내보냈다. “…….” “…….” 하지만 긴장은 갑자기 찾아왔던 만큼 또 금 새 가셨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외치고, 표현하다 못 해, 어머니의 죽음까지 뒤로 미룬 그가 측은하게 여겨져서 이제는 스스로가 미웠다. 그 생각 하나로도 히스가 맨 몸으로 옆 자리에 있다는 점이 신경 쓰이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렇게라도 자신을 취하려는 그가 가여워서 마음이 아팠다. 혜성의 주변에 단도가 있다면 그것을 몸 곳곳에 찔러서라도 이 아픈 가슴이 가셔 주었으면 했다. 이제 곧 우리는 한 몸이 될 것이다… 라는 신의 계시와도 같은 문장이 번쩍 머릿속을 지나자, 혜성은 등을 히스 쪽으로 돌려 누웠다. “…울지 마… 마드모아젤.” “…….” 혜성이 자신을 돌아보기를 마냥 기다렸던 선량하되 강직한 이의 안면으로 정혁이 스쳐간다. 물거품처럼 번지는 투명한 눈물이 혜성의 베개를 적신다. 혜성이 입술을 깨물 때, 히스도 같이 깨물었다. 덕분에 거 진 아물어가던 그의 부르튼 입술이 갈라져서 피를 내린다. “울면 못생겨진다… 에이 울보…….” “…….” 하늘로 올라간 민우가 환하게 웃으며 엉뚱한 소리를 내뱉었던 장면이 히스의 안면에 스쳤다. 쉼 없이 떨어지는 혜성의 눈물을 어찌 해석하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그도 눈시울이 붉어져 있다. 저 고약한 달빛은 둘의 숭고한 지대를 시샘하는지 한결같은 빛을 과도하게 비춘다. 다락방 전체에 미친 칼바람 못지않게 퍼지는 달빛은 둘의 표정을 확실시 해 주었다. “…이히 리베 디히….” “…….” “사랑해….” “…….” 위원회 무리를 이끌고, 굳이 먼 길을 돌아와서 분수대 옆에 서 있는 혜성을 팔만 스치고 지나쳤던 멋진 테레사의 모습이 보인다. 테레사… 테레사! 오, 테레사라니! 그의 이름이 생각나자, 불현듯 죄의식이 밀려와서 혜성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거스를까 싶었지만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관두었다. 지금의 히스에게 더 한 형벌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장 혜성의 팔 한 쪽이 잘려 나가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귀를 닫아라. 저질은 들을 가치도 없다.’ 테레사. 당신의 나라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나요? 저는 배우고 있습니다. 삶을 알아 갑니다. ‘악기를 부셔! 너희들의 손으로 악기를 부셔라!’ 어느 곳에서건 사람이 일으키는 분란과 반항이 있다는 것을…. ‘정복자의 열의가 산 중턱에서 멈출 리가 없지.’ 그것은 전쟁과도 같지요. ‘정복자는 자신이 신던 고급 장화를 벗어 던졌다.’ 나의 평생은 이름 없는 전쟁과 어깨를 나란히 합니다. 아름다운 나의 태양 테레사, 아마데우스여. ‘보고 싶었어… 꿈도 꿨다.’ 당신의 나라에서 벗어나고 더 큰 태양의 사막을 밟는 현재에……. ‘나는 혼자만의 나라에서 살고 있지. 나랑 살자. 나랑 살자…….’ 왜 나는 당신의 나라가 문득 그리워지는 걸 까요……. ‘혜성아…….’ 저를 용서하지 않으면 안 돼요, 테레사… 이것마저 이해하라는 제가… 미안해요…. “다신 이런 짓 하지 마…….” 아이의 작은 팔이 큰 용기를 내어 깁스 된 팔을 문지른다. 상냥하고 조심스러운 움직임이 계속되자 히스는 피식 웃으며 아주 작고도 분명하게 대답했다. “……싫어.” 성치 않은 몸으로, 한 쪽 팔은 부러진 상태에서 네가 나를 업고 병원으로 뛰었다니. 나는 그 말에 놀라서 죽었었다. 하지만 지금 네가 있으니, 나는 또 살았나 보다. “히스, 안아줘…….” 옷을 벗었으니, 이제 나를 안는 것이 순서에 맞지 않느냐-를 함축한 혜성이 조심스레 말하자 히스는 도리어 침착해졌다. 그는 자신의 불같은 시선으로 혜성을 지켜보며, 옷을 벗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려는 것 같았다. 바보 같은 사람이다. “…안 돼…….” “왜…….” “사랑해서…….” “바보야… 사랑하니까 안아 달라는 거야… 네가 나를 사랑하니까 안으라는 거야….” “…나는 영원히 너의 마음은 얻을 수 없는 거야……?” 그 말을 하면서도 히스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억 누르려는 지 입술을 깨물었다. 얕게 아물던 상처가 터져서 그의 입술을 눈물보다 진한 붉음으로 치장한다. 혜성은 고약한 저 달처럼 오히려 그를 이해 못 하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혜성은 그를 아예 이해 못 하는 게 아니었다. 이해하지 않는 척 할 뿐인 것을, 이 글을 지켜보는 당신처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히스에게 나오는 행동이며 말은 어떻게 나와도 상처가 될 것 마저 그는 알고 있었다. “그 대신… 몸을 준다잖아.” “!” “으흐… 바보야… 히스야… 내가 널 어떡하면 좋니…….” “…….” 대답 없이 울기만 하는 혜성을 보며 채 1분을 참지 못하고, 맹렬한 기세로 히스는 덤볐다. 서로 마주본 상태에서 의무적이고 아픈 입맞춤의 시간이 길게 지난다. 그도 바보가 아니었다. 혜성이 자신에게 좋은 말을 해도 상처를 주고, 나쁜 말을 해도 상처가 된다는 것을 그 역시 알았다. 둘은 알았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예쁜 여인이 백합을 들고 나타나서 히스를 유혹해도 거스를 수 없는 일이었으며, 수제 블라우스 백 벌이 눈앞에 넘실거려도 바뀔 수 없는 진리였다. 다락방 전체를 타고 약품 냄새가 돌아다녔다. 두 사람은 움직일 때 마다 고통이 엄습하는 것을 서로를 향한 시선으로 말미암아 이겨냈다. 히스가 통 다가오질 않고 머뭇거리자, 혜성이 젖은 눈물인 상태에서 그의 맨 가슴에 머리를 뉘였다. 탄탄한 가슴 저 쪽으로 뛰는 심장이 더더욱 거센 동작을 일으켰다. 아이의 손바닥이 그의 다친 팔을 지나 매끄럽고 하얀 복부를 더듬자 히스는 긴 신음을 내뱉었다. 죄가 아니다. 그건 의무였다. 오, 그건 누군가의 사랑 이었다! 그건 그래야 한다는 내면 어딘가로 부 터의 강한 명령이었다. 지금이 없으면 미래에 후회할 것을 알았다. 히스의 쓰라린 손이 올라왔다. 부끄러움을 타는 달빛이 고개를 숙여 환한 어두움을 선물해 주었다. 덜덜 떨리는 그의 손이 자기 가슴에 엎드려 있는 혜성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주기 시작했다. 서로의 가슴에 꽉 조여 있는 붕대 위로 온통 눈물만이 내려서, 이젠 밖의 세상에 영원토록 비가 내리지 않아도 그들은 이 물기로서 살아갈 힘이 충만해질 지경이었다. 히스는 천천히 몸을 앉혔다. 덕분에 그의 가슴팍에 기댔던 혜성의 머리가 히스의 허벅지에 쏠렸다. 상아색 머리칼 사이사이를 소중하게 헤엄치던 부드럽되 다친 히스의 손 위로 또 한 번의 긴 눈물이 줄을 이뤘다. 이제는 그의 음성마저 떨려서 안쓰럽다. “바…보야… 이럴 때는 미안하다고 해도 돼…….” “!” “후…회 하지 않을 거지…….” “…응…….” 히스의 무릎을 꼬 옥 손바닥으로 감싸며 혜성이 떨리는 대답을 전한다. “쉽게 멈추지 못 할 거야… 내가 너를 얼마나 갖고 싶었는지 너는 안기면서 깨닫고 후회 할지도 몰라…….” “괜찮아…….” “수페리우스…….” “…….” 허벅지에 옆으로 뺨을 누른 채 있는 혜성의 귓가에 목을 숙인 뒤, 히스는 감미로운 어절을 음악처럼 내보냈다. “사랑해… 사랑해 수페리우스…. 귀여운 마드모아젤…. 나의 신혜성…. 사랑스러운 사람…. 사랑해…. 사랑해에….” “…….” 마침내 히스는 파란 머리칼을 번쩍 세우더니 더 빠른 속도로 혜성의 위에 올랐다. 그는 부드럽지만 견디기 힘든 욕정의 탓인지 가끔은 단추를 뽑아내며 혜성의 옷을 벗겼다. “예쁘다….” “그…만 쳐다 봐.” 이윽고 두 사람의 길고도 아득한 신음이 서로의 피부에 닿을 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번쩍 들린 허리 못지않게 팔과 다리가 얽매였다. “아파…? 아파…?” “으… 윽. 괘… 괜차… 허! 악!” “…….” 서로가 한 몸이 될 때, 히스는 눈을 감고 입을 벌린 채 헐떡이는 혜성을 위해 쉼 없이 터진 입술을 여린 피부에 눌렀다. 동그란 어깨가 경직 되는 것이 미안해서 그는 대신 눈물을 흘렸다. 한 몸이 되는 것만으로도 육체적인 쾌락은 사실 없어도 그만이었다. 혜성이 히스에게 자신을 주었다는 게 중요하듯이, 히스 역시 육체적인 쾌락 보다는 그를 가졌다는 정신적인 공유와 충만함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찢어지는 육체 보다 알알이 물드는 정신적인 충만함이 있으니 괜찮다. 두 사람은 이렇듯 서로에게 전하는 교감에 미쳐 아픔보다 먼저인 비명을 새벽 내내 외쳤다. 쌀쌀한 새봄의 바람이 천 번, 만 번 밀려와도, 그 이상 많은 숫자의 바람이 존재한다 한 들 달궈진 육체는 평생 식지 않을 것이다. 지금 저 쪽, 또 하나의 태양이 잠깐의 행복을 감사히 느꼈으니, 이제 자신은 영영 사라지겠노라 맹세한다. 태양이 둘 인 세상은 없기 때문에, 스스로를 감추겠노라 당신께 맹세한다. wgreene@naver.com 오랜만에 이 음악을 사용합니다. 2002년도 가난한 사람들 for 전진 편에 삽입했던 것이지요. 음악은 음악이고.. 지금 심정을 토로하자면.. 가장 적고 싶었던 부분 중 하나라서 그런지.. 정말 마음에 안 드는군요. 이거 어떡하지? 계속 뒤로 미루자니 이제 슬슬 테레사 움직이고 그걸 계기로 수페리우스 학교 가고 일어날 작용(?)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하지만 이히 리베 디히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겼던 부분인데 왜 적을수록 이 편은 마음에 안들어서 찢어버리고 싶고 리랄; 이야! ...그래서 열흘만에야 올리게 되었습니다. 부디 제가 화를 못참고 삭제하기 전에 읽으시기를...ㅜ_ㅜ (연재할 때 정말 미칠 것 같은 때 1. 가장 적고 싶은데 기다림 끝에 때가 되서 적었는데 가장 맘에 안들때... 돕니다.) 애정이 있기 때문에 성에 안차는 것임을 위안삼으며 용기내서 올린다는... 에잇....(((((((((((((((((((((ㅜ_ㅜ) 멋쟁이 영이랑 데이트나 하러 나가야겠다.... 댓글과 기타등등 여러가지 감사합니다. 또.. 전에도 꼬랑쥐에 적었듯이 1악장과 2악장은 교묘하게 다릅니다. ^^ 애 학교로 보내면 다시 룰(?)이 돌아올 거구요. 걱정하시는 분들이 계시는 것 같아서 오늘은 말이 길어지는군요.+_+ 여러분은 지금, 수페리우스가 돌아오기 위한 과정의 거의 끝의 출발(?)을 읽고 계십니다. ^_~ 즐거운 주말 되시기를 바랍니다! wgreene. 화이트그린 04/29 저녁 6시 36분. 2악장 15편 올림. Le Jardin (from Summer.. 덧글 7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15편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15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16-1 편 ▼ 다음글 - 2악장 15편 예고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16-1 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5/01 15:39 http://blog.naver.com/wgreene/110003896012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501 16-1 업데, 060429 15편 업데) Amadeus 음악 : 바이올린을 위한 탱고 Duo Orientango (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바이올린을 위한 탱고-D.. 2악장 16-1편 그 날 이태원 룸펜의 아침 창틀은 완연한 봄의 햇살이 대지를 억누르는 형상을 반한 눈동자로 지켜보았다. 추워도 추운대로 지낼 만하다며, 룸펜의 사람들은 3층 건물 모든 자리에 유리를 새로 달지 않았다. 물론 이 허황된 아이디어는 혜성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는 확 뚫린 룸펜의 넓은 창문들이 밖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혜성의 이 의견에 히스가 가장 먼저 찬성하는 것을 시작으로, 룸펜에는 더 이상 환한 유리창이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샤우트의 녀석들이 마술처럼 동시에 깨뜨린 유리, 그리고 나뭇가지처럼 틀만 길게 남아있는 곳곳에서 자연의 바람이 실려 들어왔다. 옳지! 혜성은 그 점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이제 룸펜은 하루 이틀이 지날 수록, '솔베이지를 부르는 소년' 의 소식과 '유리 없는 창살 만이 존재하는 재즈바'라는 희한한 정보가 속속들이 전해졌다. 이태원을 찾는 사람들은 새 봄처럼 닥친 창틀만이 있는 룸펜의 소식을 아주 좋아했다. 3월 중순이 되자 혜성은 지저분해진 겨울옷과 겨울 슈즈들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또 하나, 오늘 새벽에 있을 마지막 공연에서 쇼팽의 혁명을 연주하겠노라 스스로와 약속을 했다. 이 마지막 이라는 수식어를 결정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월 마지막 주에 있었던 히스와의 결합 때문도 아니다. 그는 슬슬 이 생활을 잠시 뒤로 미뤄야 할 때가 왔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서였다. 솔베이지가 오는 새벽에 쇼팽의 혁명을 연주할 거란 소식이 이태원 전역에 미쳤다. 사람들은 좋아했다. 그들은 시간이 지날 수록 혜성의 변주곡을 기다려 주었고, 여자의 가성보다 뛰어난 목소리에 눈을 감고 경청했었다. 그가 뛰어난 기교를 부리지 않아서 사람들은 더 좋아했다. 흔히들 말하듯, 혜성은 가슴이 시키는대로 연주 따위에 몰입했었기 때문에 그것은 인위적인 기교를 배제한 산물이기 마련이었다. 하여, 요 근래 퇴원한 한스는 휄체어를 타면서까지 혜성의 마지막 공연, 쇼팽의 혁명을 듣기 위해 찾아 오겠다고 했다. '마지막' 이라는 수식어는 잠깐의 헤어짐을 뜻 했다. 이 공연을 끝으로 약 한 달 가량 한국에서 벗어나 있는 탓이었다. 물론 알 사람들은 혜성이 한 달 가량만 자리를 비운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마지막' 이라는 누군가의 잘라 내는 듯 한 어절은, 도리어 그를 기억하는 이들을 한 데 모이게 하는 능력을 발휘 해 주었다. 새벽의 룸펜에는 앉을 자리는 커녕 입구쪽부터 꽉 막힐 것임을 다들 미리부터 알았기 때문이다. 룸펜 1층의 넓은 창틀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나른히 명상에 잠겼던 혜성이 부랴부랴 다락방에 올라왔다. 그러나 아이는 통 내부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뭐 해? 뭐 하는 거야?” “…….” “히이스?” “…….” 다락방 입구에 등을 보인 채 쭈그리고 앉은 히스가 신중한 태도로 바닥을 노려보고 있었다. 더 정확히는 혜성의 옷들을 바닥에 좍 펼쳐놓고, 신발들 역시 옷 옆에 짝을 맞추어 진열해 놨다. 그것들은 방금 전 혜성이 정리해야지- 라고 결심했던 겨울 용품 들이었고, 덕분에 다락방은 구석구석의 꽃들을 제외하면 도저히 틈을 비집고 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 “히스?” “쉿.” “?” 앉아있는 히스의 등을 뒤에 서서 무릎으로 콕콕 찍으며 혜성이 묻자, 냉큼 뒤로 손을 뻗어 작은 무릎을 꽉 잡은 행동이 뒤따랐다. 상쾌한 박하향의 바람이 뻥 뚫린 다락방 창틀 안 쪽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것들은 새벽에만 볼 수 있는 하프의 선율처럼 저마다의 음표를 자랑 하듯이 쉬지 않고 불어온다. 그 바람의 내음에 기분좋은 숨을 내쉬려던 찰나, 히스가 아주 진지한 투로 중얼거렸다. “…작아서 귀여워.” “!” 뭐라고?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눈 앞에 있는 혜성의 노란 장화를 톡 건드리는 히스의 행동에 놀란 아이의 모든 것이 붉게 물들었다. 펑! 펑! 펑! 손가락 끝의 죽은 감각이 터져서 오골오골한 긴장감이 덮였고,고고한 진동을 유지하던 심장 역시 팜파레가 울리는 것 처럼 난리였다. 작아서 귀엽다니! “어떻게 이렇게 조그만 게 들어가는 거지… 애기 신발 같은데…….” “야! 그만 봐!” “? …안 보여, 그러지 마 수페리우스.” “시… 시끄러!” “후후후….” 쭈그리고 앉아있는 히스의 눈을 양 팔을 내밀어 가린 뒤, 혜성이 씩 씩 거친 숨을 내쉬었다. 작아서 보태준 거 있어? 라고 따지자니 유치했다. 네가 너무 큰 거야! 라고 논리적으로 파고들자니, 더 촌스러웠다. 게다가 방금 히스가 지적한 노란 장화는 한스 패거리들이 잘 신고 다니는 장화가 멋있어 보여서 일부러 구입한 거였는데, 그걸 보고 애기 신발 같다며 도리어 히스는 감격하다니! 두 번 다시 안 신겠어! “우… 웃지 마!” “하하하하하!” “죽는다!” 시원하게 웃는 히스의 모습이 새삼 근사해서 그의 뒤통수만 보는 혜성이 일부러 손바닥으로 가린 그의 양 쪽 눈을 더 세게 눌렀다. 그럴수록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는 독일의 청년이 파란 머리칼을 푸스스 흔들거리며 잔잔한 결실을 터뜨린다. 하지만 아직 혜성은 몰랐다. 그의 지금 웃음과 예전의 것은 별 반 차이가 없기 때문에, 얼마나 슬픈 녹색의 눈동자를 띄우고 있는지를 아이는 그가 아닌 이상 알 수 없었다. 그가 자신으로 인해 웃을 때마다 기쁨과 슬픔에 밀려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숨을 고르고 있음을, 그가 아닌 이상 아이는 모르는 게 당연했다. “하하하하… 정말 귀여워서 계속 보고 싶은데…….” “멋있다고 정정 안 해? 안 해? 안 해?” “어디…….” 울그락푸르락한 혜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리어 자신의 눈을 가린 혜성의 가슴이 저의 등에 쏠릴 때를 놓치지 않고, 히스는 번쩍 몸을 일으켰다. “어어어어-” “…….” 그리고 깁스를 한 팔이 아닌 성한 오른팔로 아이를 등에 업었다. 지금의 히스는 매우 행복해서 이대로 두면 허공에 둥둥 떠 다닐지도 모를 일이었다. 혜성의 입에서 '독일로 함께 가자' 라는 대답을 쟁취한 히스는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었다. “사랑해 수페리우스…. 마리아여… 이 시간이 영원하기를… 사랑해 귀여운 사람….” “…옷 밟지 마!” “…손을 치워 줘. 그럼 안 밟을게. 나도 너의 귀여운 옷은 전혀 밟을 생각이 없는 걸.” “헉. 방금 내 구두 찼어!” “아… 그 애기 구두? 미안해. 어… 또 뭔가 발에 채 이는데….” “내 가디건! 야! 죽을래!” 다락방 곳곳을 제 멋대로 누비는 히스는 아예 뛰기 시작했다. 폴폴 한 먼지가 올라와서 혜성을 업고 있는 히스에게나, 이 와중에도 그의 눈을 가리고 있는 아이를 동그랗게 감쌌다. 이제는 두 사람 중, 한 명이 빠지면 이상해 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혜성은 시간이 길어지기 전에 독일로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 일 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방금 전의 '죽을래!' 라는 혜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씨익 웃던 히스는 눈을 감아도 훤한 다락방 구조를 꿰뚫고는 냉큼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는 사람의 키 만큼이나 커다랗게 뚫려 있는 다락방 창 앞에서 등에 업고 있는 혜성을 바깥 쪽으로 기울였다. “같이 죽을까?” “헉! …아니! 안 돼! 죽으면 안 돼!” “…….” 아이는 까마득한 이태원 거리를 목격하는 즉시 겁에 질려서 히스의 목에 달라붙었다. 그의 불안정한 팔 하나 덕분에 자칫하면 진짜 떨어질 것 같아서였다. 눈을 가렸던 팔이 그의 목을 감싼다. 이 때 히스는 혜성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깊은 신음 소리를 내뱉으려다가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뛰지 마! 내려줘! 무서워! 무서워!” “…….” 숱한 사람들을 취해 왔었고, 또 자기를 열렬히 사모하던 이들을 뿌리쳤던 지난 날이 히스에게는 거짓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한 사람에게 이토록이나 얽매이고 애가 닳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이 값진 마음이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겼는지 잠시동안 눈을 감고 천주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때를 놓치지 않고 엉덩이를 들썩이던 혜성이 확 소리쳤다. “히스! 우리 독일 가야지!” “…….” “죽으면 안 되에~!” “…농담이야. 하하… 놀랐구나 내 사랑… 미안해 놀라게 했어.” 이윽고 긴 창가 옆 바닥에 아이를 내려 준 뒤, 히스는 그가 자신을 쳐다보기도 전에 허리를 숙여 길고도 아득한 입맞춤을 하였다. 둘의 혀가 감기는 즉시 히스는 아득한 숨 소리를 내보내며 거칠게 당겼다. 혜성의 몸이 덕분에 휘청거릴 때, 그의 강직한 팔이 냉큼 얇은 아이의 허리를 잡아 주었다. 깁스 된 손으로는 어찌나 이 작고 보드라운 뺨을 쓸고 싶었던지, 히스는 아쉬운 마음에 아이가 숨이 막히다고 소리칠 때 까지 허리를 으스러져라 안았다. 노오란 봄의 햇살이 반짝이는 섬유옷을 입은 것 처럼 근사한 태를 자랑하며 길게 뻗어왔다. 두 사람의 사이를 가름 짓는 대신, 어두운 다락방의 창가에서 향긋한 입맞춤을 나누는 그들 전체를 동시에 투과하였다. 오후의 강렬한 햇살이 오직 둘 에게만 미치는 듯 싶었다. 뮌헨의 민들레 wgreene@naver.com 안녕하세요.^^ 저의 요즘 상황대로 나가자니 이번에는 시간이 더 지체될 것 같아서 일단 지난번에 정리했던 부분을 올려드립니다. 소제목 섬세한 날의 시작의 마지막 부분 - 내용상 혁명 연주 장면과 바로 뒤를 이어, 소제목 뮌헨의 민들레 부분은 그냥 바로 올려드리자니 너무 정리가 안 되어 있어서요. 크흑.. 소제목 까지는 올려보고 싶었어!(퍽;;) ㅜ_ㅜ 또.. 그냥 나중에 다 되면 올리자; 싶었는데 이번에는 또 열흘 더 걸릴 것 같아서; 음악은 교군님이 저번에 선물해 주셨던 바이올린을 위한 탱고 입니다. 음.. 혜성이의 마지막 공연 쇼팽의 혁명과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즐거운 한 주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답글은.. 꼭...;ㅁ;) 화이트그린 5월 1일 16-1 올림. 덧글 7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16-1 편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16-1 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16-2편 ▼ 다음글 - 2악장 15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16-2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5/05 16:38 http://blog.naver.com/wgreene/110004005842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505 16-2 업데) Amadeus 음악 : 쇼팽의 에튀드 제 12곡 c단조 알레그로, 혁명 (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연습곡 Op.10/12 In C M.. 바르샤바! 살려주세요! 감히 저 러시아 놈들이! “내 안의 신이시여… 이게 곧 끝이 아닌 언제나처럼 시작임을….” 2악장 16-2편 어김없이 새벽의 시간이 닥쳤다. 쇼팽의 에튀드 혁명을 연주 하는 룸펜의 소식 덕분에, 이백 명이 넘는 숫자가 이곳을 찾았다. 상당한 숫자가 집중하는 가운데, 혜성은 긴장되는 몸을 진정시키며 억지로 웃었다. 너무 많은 숫자의 탓에 룸펜의 곳곳에 활화산과 같은 열기가 가득 고였다. 마지막 콘서트의 시작을 위해, 혜성은 피아노 뚜껑을 열고 늘씬한 몸을 기대어 섰다. 새벽의 아스라한 달빛이 밤의 전류에 힘을 얻어서 룸펜의 곳곳을 반짝였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해 주신 나의 방랑자들께 들려 드리고자 하는 곡은…….” 그의 손가락은 강물 위의 얕은 바위를 디딤대 삼아 건너는 늘씬한 다리가 되었다. 혜성의 손가락이 깡충깡충 뛰는 모양새로 까만 건반을 스쳤다. “쇼팽…크지직. …명… 치지직.” “크히히히히. 그래서 아 그놈이-” “…….” 낡은 마이크가 지직 소음을 섞으며 혜성의 매끄러운 유도 성 문장을 방해했다. 때문에 그 틈을 타서 무대의 맨 앞에 앉아있는 한스와 레이놀드로부터 한 참 떨어져 있는 몇 명의 무리들이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저희들끼리의 푸념에 열을 올렸다. 그들은 간과하고 있는 점이 있었다. 무대와 음악, 뮤즈의 혼을 씌울 때의 수페리우스는 누구보다 예민해진다는 것을. 그는 지난날 두 거장의 콩 쿨이 있을 때 무대 밖의 자잘 자잘한 상황 변화에도 촉각을 곤두세웠던 저력이 있지 않던가! 자신의 리틀 콘서트의 시작에 앞서 감히 조잘대고 떠드는 건달 녀석들이 시선에 잡히자 수페리우스는 히스테리칼하게 소리쳤다. “시끄러워!” “!” 주변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혜성의 노골적인 시선이 꽂히자 이십 미터 떨어져서 맥주를 마시던 몇 명이 얼어붙었다. 아이는 바람을 일으키듯이 소리쳤던 것이다.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고, 한스의 굳은 표정변화에 맞추어 레이놀드가 자기 수하 몇 놈에게 지시를 내렸다. 레이놀들의 지시가 떨어지자 몇 놈이 방금 수페리우스의 심기를 건드렸던 그들을 밖으로 유인했다. 하지만 술에 얼큰하게 취해 있는 그 녀석들은 통 반항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수페리우스가 옅은 미소를 띠우더니 아까보다 자상한 투로 말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조용히 …잘 들어.” “…….” 곧 있으면 히스와 독일로 떠난다는 것, 또 정들었던 룸펜과 잠시 동안 이별이라는 게 아쉬웠던 혜성은 지금 자신이 많이 예민한 상태임을 알았다. 불현듯 스쳐가는 사계의 모습, 변하지 않을 것처럼 위엄을 앞세웠던 찬란한 나의 아마데우스! 그러나 시시각각 모여드는 소문처럼 칼같이 번쩍였던 가십은 나의 숨통을 막히게 했었다. 그 무엇도 평화라는 구절은 허락 치 아니한다며 으르렁거렸었다. 그것은 혜성에게 있어서 처음부터 혁명이었다. 자신이 몰고 온 파란, 즉 출현 자체가 아마데우스의 구조를 바꾸는 짓임을 그는 알았다. 그래서 쇼팽의 에튀드를 연주하자니 잊어도 삭혀도 자꾸만 예전 것들이 피부를 갉아 먹을 것처럼 아프게 떠오르는 것이다. “나 괜찮아 히스.” “……응.” 혜성이 소리를 지르는 것에 창백해진 몰골로 당장 뛰어 오려던 히스를 제지했다. 그는 다시 뒤로 물러났다. “나는 때때로 엉망으로 연주를 했고…….” 이백 여 명이 집중하고 있는 새벽 한 시의 룸펜은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혜성은 씨 익 웃으며 약간의 긴장감을 해소하기 위해 한스가 마시던 포도주를 병째로 들이켰다. 꿀꺽 꿀꺽- 그의 식도에 넘어가는 뜨거운 포도주의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흘렀다.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빛에 감싸인 것처럼 하얗게 출렁이는 수페리우스는 저희들이 조금만 떠들어도 신경질을 부리면서 사라질 것처럼 위태롭고 불안했던 탓이다. 그는 포도주 반병을 한 번에 들이키더니 입가에 묻은 자욱을 귀찮다는 듯이 훔치며 반 쯤 풀린 동공과 반짝이는 입술을 열었다. “나는 가끔 씩은 연주보다는 설명을 위주로 입을 떠들었는데…….” 갈수록 또렷해지는 정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번에는 레이놀드의 테이블에 있던 맥주 500cc를 쥐고 피아노 의자에 앉아서 벌컥 벌컥 들이켰다. 오, 이제 서야 약간의 더운 감각이 영혼에 미친다. “그러다가 다 싫증나면 말 한 마디 없이 변주곡 이란 것들을 혼신을 다 하여 연주했고….” 문득 안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혜성은 플라스틱 그릇에 시리얼을 붓는 놈에게 그것을 가져오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까득 까드득- 딱딱한 시리얼을 한 주먹에 털어 넣은 뒤 깨물었다. “페르를 매 번 기다리는 솔베이지가 되어서 목청을 높였었지.” 저 혼자 떠드는 것이지만 분명히 모두에게 하는 소리임을 증명하며, 수페리우스는 손목을 털었다. 팔 근육을 완화시키기 위해 굳은 어깨를 주물렀고 크게 모션을 취하며 허리부터 주 욱 잡아당기기도 했다. 그는 늘 이런 식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조용히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기대 이상의 것을 보여주기 위해, 수페리우스는 자신의 긴장을 저런 식으로 뽑아내는 것이다. “그게 너희들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고역으로 여겼었던 클래식이다. 알고 보면 별 거 없지. 난해 한 척 하며 자랑하고 자기 음악이 우수하다고 자부하는 것 들은 저희들끼리 살라고 하면 돼.” 약간의 웃음을 주기 위해, 별안간 앉았다 일어났다 체조를 하는 수페리우스의 엉뚱함이 이어졌다. 한스가 쿡! 하고 웃자, 여기저기서 부채질을 하며 그를 보고 웃었다. 사람들의 열기는 아주 뜨거웠지만, 뻥 뚫린 룸펜의 창틀 덕분에 아무도 더워하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앉을 자리가 없는 사람들은 아예 룸펜의 유리가 없는 창틀에 앉거나 서서 무대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여, 내가 지금 짧은 연주, 그것도 에튀드… 연습곡을 무대에서 펼쳐놓자니….” 마지막으로 목 운동까지 마친 혜성이 노련한 몸놀림으로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잘 듣고…….” 휙- 좌중을 돌아볼 때의 무시무시한 그의 시선은 아무런 색이 없었다. 색 이라는 것은 이제 곧 음악을 통해 나타날 테니 문제없다. 긴장이 완전히 풀린 혜성이 양 팔을 번쩍 허공에 올리더니 스르르 내리며 노란 머리칼을 마구 흔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 혁명의 룸펜을 영원히 기억하소서~” “하하하하!” 그를 지켜보는 모두의 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는 미친 사람 같았다. 아니 어떻게 보면 미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같았다. 무엇이든 정답이 없다. 그는 이 편한 무대의 마지막을, 그 마지막 이라는 글자를 아주 싫어했지만 최선을 다 하기 위해 저러는 것이다. 무대 왼 켠 에서 수페리우스를 지켜보는 히스의 눈가에 붉음이 차올랐다. 흰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수페리우스는 지금이라도 땅이 싫어졌다며 저 하늘로 날아갈 것처럼 멀어 보였다. “쇼팽의 에튀드라… 말이 어렵지?” 땅. 땅. 따당. 몇 개의 건반을 대충 손가락으로 누르며 혜성이 시큰둥한 어절을 내뱉자 사람들은 히죽히죽 웃으며 약간씩 목을 축였다. 그들은 느닷없는 전의로 불타올랐다. 자신들이 등한시하던 클래식을 그는 몇 개월에 걸쳐 쉽고 재미있게 알려줬었던 탓이다. 늘 기분이 좋았고 자꾸 생각나게 했었다. 그것이 저 룸펜의 성과였다. 물론 샤우트와 해결할 일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한스였지만, 그는 지끈지끈 아프던 머리도 혜성의 연주를 듣고 나면 괜찮아 졌었다. 무심하게 건반을 누르던 손가락이 뚝 멈추고, 혜성은 히스가 바꿔 준 새 마이크에 허스키한 음성을 열었다. 땅- 길게 플랫음을 누른 뒤, 아이는 소근 거리듯이 좌중을 언어로 감싸기 시작한다. “그냥 쇼팽이라는 놈이 있었어. 너희들처럼 방랑자였지. 그는 다만 음악에의 방랑자였던 거야. 사실 그 뿐만이 아니라 뮤즈는 통틀어 평생에 방랑자일 뿐이지만. 건반에서 정착 할 줄을 모르거든.” 따당- 따다다다당- 제 멋대로 낮은 건반에 트릴을 주며 혜성은 보다 낮은 저음으로 속삭였다. “쉽지?” “호오….” 한스의 기똥차 하는 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따당 따당- 어두운 자리에서 계속 트릴을 멈추지 않던 손이 말한다. “아 근데, 그놈이 만든 에튀드라는 게 연습곡 이라는 건데! 총 스물일곱 곡이 있다는 거야. 자. 내가 오늘 연주하려는 건 빌어먹을 제 12번, 혁명 이라는 놈이지.” “큭큭큭큭.” 몇 명의 웃음소리에 같이 기분이 좋아진 혜성이 뚝. 손가락을 멈추고 자신에게 집중한 열정의 눈빛들을 마주보았다. “혁명이라는 놈은 아주 못생겼지.” “하하하하!” 그들은 여전히 혜성을 좋아했다. 저 사람이 초창기 때 화장을 하고, 노래도 연주도 아닌 이상한 것을 꽥 꽥 소리치기만 했던 룸펜임을 사람들은 잊었다. 기억이란 그런 것이다. 현재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그의 과거조차 천사로 둔갑시킨다. 혁명은 못생겼다는 엉뚱한 혜성의 말에 히스는 멀쩡한 손으로 이마를 쳤다. 또 무슨 소릴 하려고? 히스의 불안한 시선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급하게 세상에 태어났거든. 쇼팽이라는 방랑자 녀석이 그래. 이렇게 생각하자. 그놈은 곡을 많이 만들었는데 그 짓이 여자보다 좋았대.” “읏하하하하!” 수페리우스, 그만해! 그게 무슨 소리니? 히스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가, 다시 뒤로 물러서고를 반복하며 불안한 심리를 그대로 드러냈다. 하지만 혜성에게 있어 지금의 히스가 눈에 들어 올 리가 없다. 아이는 모션을 크게 취하며 이리 저리 고개를 돌렸고 인상을 찌푸렸다. “바람둥이여서 이 곡 저곡이 많았던 거야. 따라서 뮤즈는 모두 카사노바라는 소리지? 그래… 그래. 어쨌든….” 또, 카사노바라는 구절에서는 비웃는 시선을 담아서 노골적으로 히스를 쏘아보았다. 그에 흠칫 놀란 히스는 자신은 절대 카사노바가 아니라는 듯이 혜성과 함께 자신을 쳐다보는 좌중을 향하여 고개를 세게 저었다. 수페리우스! 왜 이러는 거야! 히스는 야속한 아이를 향해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난감해 하는 히스와는 달리, 아이는 유창한 제 멋대로의 설명을 벌써 잇고 있었다. “1831년 이었어… 방랑자 쇼팽은 파리로 가는 중이었지. 그런데! 도중에 러시아군이 그의 조국 바르샤바를 침입했다는 소식을 들은 거야!” “…….” 너무 빠른 설명이었나? 피아노 의자에 편한 자세로 앉아있던 혜성이 짝! 박수를 치며 눈을 크게 떴다. 고개를 갸웃대던 많은 이들은 다시 그에게 집중했다. “조국의 개념이 모호한가? 너희들의 룸펜을 죽여 버리겠다면서 샤우트가 몰려온 꼴이지.” 그제 서야 한스는 이를 바드득 갈았고, 레이놀드는 맥주를 마시다가 그것을 허공에 던져서 깼다. 상당한 녀석들이 흥분해서 고래고래 악을 질렀다. “뭐야?” “그런 개새끼를 살려둬? 씨발 모가지를 뽑아!” 아무도 모르는 사이, 혜성이 흡족했다는 듯 씨 익 입꼬리를 올렸다. “하하하하- 그렇지? 그런데, 아 이 쇼팽이라는 놈은 또 그 순간에 여자를 만난거야.” 혜성의 추가 설명에 그들은 아예 쾅쾅 테이블을 치며 별 미친놈이 다 있다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 “뭐? 말이 돼? 그거 새끼 완전히 또라이 아니야? 지 조국이 당했다는데 미친놈 여자를 만나?” “그렇지. 조국의 운명을 슬퍼하는 상황! …이라는 그의 앞에 갑자기 여자가 나타난 거지.” “!” 모르겠는가? 말은 지어내기 나름이야. 여자의 이름이다! ‘조국의 운명이 꺼져간다! 당했다! 나는 슬프다!’ 이것은 쇼팽이 갑자기 만나게 된 여자의 이름이다! 놀라게 했으니, 진정도 시켜야지- 라는 생각이 수페리우스의 총명한 두뇌를 스쳤고, 아이는 자상한 솔베이지의 미소를 띠우며 부드럽고도 단호한 투를 흘렸다. “그래서 급하게 태어난 못생긴 놈이 ‘혁명’ 이라는 자식이다.” “!!” “그게, 내가 지금 연주 하게 될 ‘혁명’ 이다~ 이것들아.” “!!” “잘 봐. 이건 나의 왼 손이지.” “…….” 그의 설명이 끝났다! 다들 같은 표정으로 한 가지를 간절히 바란다. 자신들을 쉽게 좌지우지 시키는 수페리우스, 룸펜의 설명이 끝난 것이다! 이제 그는 그 이상한 쇼팽이라는 놈의 혁명 자식을 연주할 테다! 그 증거로 룸펜은 연약해 보이는 자신의 왼 쪽 팔을 좌중에게 내밀며 흔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파란 불꽃같은 투지의 눈동자가 자신의 왼 손을 높이 세우고 말한다. “…단 한 번도 쉬지 않을 것이다. 질주하는 거야. 콰광! 콰광! 나의 오른손이 바르샤바에 폭탄을 떨어뜨릴 때, 이 왼 손은 조국의 불안한 마음이 된다.” “!” 콰광! 콰광! 오른 손이 허공에서 무언가를 세게 짓누르듯이 몇 번의 텀 을 주며 동작을 취할 때, 그의 왼 손 역시 허공에서 오른손과는 달리 빠르게 빠르게 움직였다. 그 움직임은 마치 바르샤바에 떨어지는 폭탄을 피해 달아나는 초조한 사람의 발 모양을 연상시켰다. 이윽고 혜성은 반쯤 뜬 눈으로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마주치듯이 시선을 교차하더니 괴로운 어절을 내뱉었다. “콰광- 오른 손이 누르는 고통에 왼 손가락들은 …미치는 거야.” 펑- 내면의 감각이 모두 깨어났다. “오오!” “룸펜!” 사람들은 흥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서 ‘그냥 듣는 클래식, 그래서 뭐가 뭔지 알 수 없고 졸리고 재미없던 클래식’ 에서, ‘원리를 알았으니 똑똑한 척 재미있게 듣는 음악’ 으로 세련된 인식 이라는 놈이 저마다에 태어났다. “너희들은 쇼팽과! 혁명과! 러시아군과! 대치하기도 전에 당하는 바르샤바! 모두를 보고 듣는 거다. 어때.” “…….” “할 말을 잃은 건가? 이런… 감상 전부터 너희는 뜻을 알았으니까 똑똑한 척 하면서 놀라! 괜찮아! 콰광!!” “!” 바르샤바! 저기 러시아군이 보인다! 그래, 쇼팽은 ‘고뇌’라는 여자를 갑자기 만나서 ‘혁명’ 이라는 자식을 낳았어! 아주 못생긴 놈이지! 격정적이고 분노가 담긴 그 음악은 틀림없이, 틀림없이… 오, 이 이상은 안 되겠어. 들려 줘 룸펜. 네 설명을 증명 해 줘! 사람들은 격분하여 외쳤다. “룸펜-!” “우오오! 룸펜! 룸-펜!” 혜성의 등 뒤로 식은땀이 주 욱 내려갔다. 집중하게 했으니, 남은 것은 실천이다. ‘깜짝 놀라게 해 주겠다’ 따위의 선전포고 보다 위협적이고 강렬한 로망은 바로 이것이다. 지식의 전이. 보다 쉽고, 그들이 이해하고 공감하기만 하면 그럴싸한 것으로 포장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똑똑한 척 하면서 어려운 말만 지껄이는 것 들은 비슷한 놈들끼리 자랑하며 살라고 해! 여긴 자유로운 밑바닥의 세계가 아닌가? 오, 천주여! 혜성은 타는 듯한 전율을 이기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히스가 눈시울을 붉힌 채 생명수처럼 진한 꼬냑을 내밀었지만 그는 그것조차 보지 못했다. 아이의 소매는 모두 올라가 있었다. 그는 숙명을 맞이한 사람처럼 진지하게 건반을 누른다. 쇼팽의 에튀드 제 12곡 c단조 알레그로, 혁명.(Op.10-12 : Op.10 에서 12번째 곡) 이태원의 싸구려라 불리는 룸펜의 새벽, 터질 것처럼 붐비는 사람들의 호흡을 등에 업고, 아이는 에튀드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치 진지한 표정 자체를 건반에 쏟았다. 캉-! 별안간 튀어 나오는, 밑도 끝도 없이 강렬한 음절에 사람들은 숨을 참았다. ‘나의 왼 손은 단 한 번도 쉬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말은 전혀 실언이 아니었다. 사실 이었다! 시작과 동시에 미쳐버린 왼 쪽 손목과 가냘픈 손가락은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헛디딤 없이 건반을 눌렀기 때문이다. 악센트! 악센트! 초조하게 악센트를 속으로 지시하며 수페리우스를 지켜보던 히스마저 한 마디가 지나기도 전에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캉-! 선율이 진노한다. 형식만 따지자면 에튀드인 만큼 쇼팽의 혁명은 구조는 아주 단순하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감정들은 무엇보다 열정적이면서 뜨겁지 않던가! 혜성의 허리가 왼 쪽으로 쏠린다.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왼 쪽으로 같이 움직였다. 넋을 잃었는지 누군가는 입을 벌린 채로 침을 뚝 뚝 떨어뜨렸다. 캉-! 별안간 혜성의 몸이 하이 톤의 건반을 짓누르듯이 누른다. 그의 몸이 오른쪽에 올라오자, 당황하던 사람들은 초조해 하며 같이 움직였다. 지금의 상황은 아주 재미있었다. 1831년의 피아노와 선율로 상황은 바뀌었기 때문에, 다들 두려움에 떨었으며 분노하는 듯싶었기 때문이다. 평소 솔베이지와는 전혀 다른 음색이 왼 손의 힘과 함께 퍼지자, 그것을 지켜보는 자, 연주하는 자 할 것 없이 심장은 요지부동으로 뛰어대며 멈출 줄을 몰랐다. 별이 쏟아지듯이 퍼지는 울림이 허공에 붕 떠서 가라앉는 방법을 상실한다. 왼 손에 하강적인 움직임을 두고 시작하며, 기하급수적으로 감정을 고조시켜 가는 정석 그대로의 연주와, 또 혜성이 꽉 꽉 고집하는 악센트에 숨이 멎을 것처럼 창백해진 히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바르샤바! 살려주세요! 감히 저 러시아 놈들이! 음표가 찢어지며 저 세 줄에 목을 매고 있었다. 머리가 터져 나갈 것처럼 하얗게 바랠 때, 혜성은 아예 한 번 더 연주를 재생시키기까지 했다. 캉-! 두 번째 그의 혁명이 빚어지자 사람들은 부들부들 떨며 바르샤바를 소리쳐야만 했다. 악센트의 위치가 바뀌었다! 처음 부분부터 강렬하게 튀어나왔던 정석은 무효가 되고, 정 중앙에서, 혹은 가장 끝에서 미쳐버린 악센트가 그의 트릴과 함께 변주곡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히스는 무릎을 꿇었다. 예상 된 지점은 교묘히 비껴 간 채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대포를 쏘듯이 캉! 캉! 놀라게 누르는 혜성의 솜씨에 좌중은 흠칫 놀라며 그 때 마다 심장 주변을 부여 쥐고 거친 호흡을 내뱉어야 했다. 히스는 무릎에 성한 손을 짚은 채로 부들부들 떨며 최대한 정신을 집중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 했지만, 허사였다. 색이 없다! 테레사의 은어의 손놀림이나 기타 등등 다른 녀석들처럼 특징을 찾아야 하지만, 저 사람은 색이 없다! 너무 많은 색이 집합되어 있어서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숨을 쉴 수가 없다! 그 생각은 히스를 아예 미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너에게는 아직 색이 없어. 하지만…….’ 물론 히스의 그 생각이 혜성에게도 없을 거라 여긴다면, 그건 당신의 오산이다. 혜성은 스스로를 알고 있었다. 오래 전, 아마데우스에 입학 했을 때 자신을 두고 떠들었던 소리를 바로 오늘처럼 기억하듯이, 그는 알았다. ‘바크하우스를 칭송하던 못난 음악가마냥 애송이가 아닐까?’ 주체할 수 없는 지금의 분노마저 바르샤바의 땅에서 돌을 나르고 있는 여인이 된 양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열정에 열정을 더 하자 호흡조차 쉽지 않을 때, 건반을 파고드는 손을 투과하는 사비나 교수의 음성이 머릿속을 스쳤다. 온 몸에 전율이 인다. ‘네 작은 손가락이 건반 위를 움직이는 건 마치, 작은 꼬마아이가 전장의 한 가운데에 서서 대립된 군사들을 막는 것 만치 무모하지.’ 만약 이 순간을 샤우트가 함께 한다면? 나는 그들을 막을 수 있었을까? 심장의 박자조차 나에게서 질려 떨어진다. 도망친다. ‘하지만, …형식의 기적을 이룬다.’ 하느님! 아무도 숨을 내쉬려 들지 않는다! 이 음악에 자연은 없다! 파계된 모든 것을 열정의 힘을 빌어 분노 할 따름이다! 세 번째로 혁명이 시작되자, 그들은 아예 혼을 상실한 자가 되어 멍청하게 반복적인 내리누름을 경청해야 했다. 분노 뒤의 포기가 잇따르듯이, 사람들은 주먹에 쥐었던 힘마저 풀었다. 힘이 풀리자 눈물이 쏟아졌다. 억울해서 살 수 없다며, 바르샤바의 흙을 쥐고 최선의 힘을 다 해 러시아 병사들에게 던진다. 그런데 이상하다. 일개 흙만 던졌는데도 러시아 병사들이 물러나는 것처럼 희미한 착각이 번진다. 카강-! 네 번째로 재생되는 혜성의 혁명은 그런 기분에 들게 해 주었다. 분노와, 상실, 포기, 그 뒤의 저릿한 희망을 향한 서곡이 되어 주었다. 분명히 같은 음절이 반복되었지만 저마다의 가슴 속에 쌓였던 응분이 콸콸콸 쏟아지는 것이다. 그것은 저 룸펜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연주 기법 이었다. 끊어질 듯, 이어진다. 또 끊어질 듯, 건반은 활개 친다. 또 다시 끊어지려 할 때, 작은 손가락은 허공에 붕 띄우는 척 하더니 더 센 음표를 찍었다. “헉!” “!” 마침내 혁명의 중간 부분에서, 다시 말 해 네 번째의 혁명이 반 만 진행되었을 때 혜성이 양 손을 번쩍 허공에 들었다. “허억… 헉. 헉. 허억.” “…….” “…….” 그가 지친 걸까? 그가 왜? 갑자기 왜 양 손을 허공에 들었지? 사람들의 목이 앞으로 쭈 욱 나올 때, 어깨까지 들썩이며 거친 호흡을 내쉬던 혜성이 아주 행복해 하는 표정을 짓더니 입 꼬리를 올렸다. 그의 입 꼬리를 타고 진득한 땀이 쉬지 않고 흘렀다. 땀이 떨어질 때, 수페리우스는 양 손 가락 모두를 사용해서 악보의 마지막 부분을 쾅-! 하고 내리쳤다. “!” 끝난 건가? 정말로? 높은음 투 성이 인 오른쪽의 건반 부분에서 하이 톤을 내지른 혜성이 누른 상태에서 호흡을 거칠게 내쉬기만 하자, 몇 명의 좌중이 서투른 박수를 쳤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듯, 혜성은 또 번쩍 양 손을 올리더니 저음 부분의 묵직한 건반에 열 손가락을 모두 사용하여 완전한 끝의 음표를 눌렀다. “!” 쾅-! 콰과강-! 따다당. 언제 전쟁이 있었냐는 듯, 또는 분노조차 우리에겐 없어노라 비웃듯이 혜성의 마지막 세 마디에 사람들은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그가 금방이라도 다섯 번 째 혁명의 길에 들어설 것 같아서였다. “하악… 걱… 정… 하악… 하지 마… 하아악.” “!” “혁명은… 학… 끝…났… 하악… 다…….” “!” 그 순간, 숨을 죽였던 룸펜의 모든 것이 탄성과 함께 큰 소리로 브라보를 외쳤다. 땅이 울릴 정도의 하나가 된 소리는 똑 같은 이름을 부른다. “우오오오!” “룸-펜!” 이태원 전체가 불야성을 이룰 시각, 혜성의 힘겹고도 쾌락에 찬 음성이 겨우겨우 내뱉어지자 좌중은 룸펜을 크게 소리치며 감격에 겨운 몸짓을 부들부들 떨었다. 현재 혜성은 아무것도 느낄 수 가 없었다. 그저 전신에 휘몰아치는 강렬한 크레센도의 물결이 조금만 움직이면 몸 밖으로 터져 나올 것 만 같았다. 감각이 마비 될 정도로 연주하는 내내 느껴졌던 사람들의 시선과, 감동에서 감동으로 전이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리네의 표현! 오, 테레사! 혹은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혁명 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스쳐 갔었다. 그래, 그랬었다. “룸-펜!” “룸-펜! 룸펜!” “…….” 모든 사람들이 네 번이나 혁명을 연주 해 준 혜성을 외쳤지만 그는 필요 이상으로 집중했던 긴장이 끝나자 나른해지는 정신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느릿느릿 박자가 돌아다니고, 자신을 지켜보는 한스가 벌떡 일어섰다. 그가 무대 위 혜성에게 달려오려고 한다. 왜……? 혜성은 그러지 말라는 듯이 말을 하려고 했지만 어쩐지 몸과 입이 말을 들지 않아서 그럴 수 없었다. 자꾸 눈이 감겼다. 기분이 좋아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데, 천근만근 무거워진 몸은 피아노 의자에서 앞뒤로 또 옆으로 흔들리기만 했다. 한스가 껑충 뛰어올 때, 혜성이 푹 건반 쪽으로 몸을 기울였고, 누군가의 재빠른 팔 하나가 자신을 안았음을 알았다. “수페리우스!” 긴장감이 모두 풀려서 녹초가 된 탓에, 또 열정을 퍼붓는 이 백 명의 땀과 소리에 기절 하려던 찰나, 멋쟁이 히스가 나타나서 부축해준 것이다. 그는 아이를 걱정하다 못 해 겁에 질린 채로 자신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무리들을 전혀 눈치 채지 못 하고 있었다. 혜성은 희미하게 웃으며 자신을 꼭 껴안은 히스의 가슴에 젖은 뺨을 부비며 아기처럼 속삭였다. “…뮌헨의 민들레…….” “괜찮아? 괜찮은 거야?” 꿈을 꾸는 소년의 눈동자가 되어, 수페리우스는 양 팔을 내밀며 간헐적으로 속삭였다. 히스는 목이 터져라 그를 부르며, 뚝 뚝 떨어지는 눈물을 그의 이마에 적셨다. “…빨리… 보고 싶다…….” “!” “아름다운 아마데우스… 오… 뮌헨의 민들레가 감싸 안고 있을 너의 지대….”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부디 한국의 오르페우스 관을 압도하는 실력이기를… 드높은 하늘에게 지지 않겠다며… 각자 악기에 혼을 판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졸려… 움직일 수가 없…….” “! …그래. 그래!” “…….” “내 안의 신이시여… 이게 곧 끝이 아닌 언제나처럼 시작임을….” “수페리우스!” “졸려서….” “…아… 아…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아아… 넌… 넌…….” 나는 해냈어. 그들에게 주었어. 이 말을 하고 싶었지만 쏟아지는 잠에 백기를 들었는지 혜성은 방긋 웃는 표정으로 사뿐히 눈을 감고 편안한 숨을 규칙적으로 내보냈다. “아아아… 수페리우스… 아름다운 내 수페리우스… 아….” 그런 식으로 달콤한 잠에 빠진 혜성의 몸이 축 늘어지자 히스는 진즉부터 감동에 차올라서 흘렸던 자신의 눈물은 버려 둔 채, 사람들이 쳐다보거나 말거나 무대 구석에서 아이의 입술에 자신을 눌렀다. 땀에 젖은 그의 입술에서 짠 맛이 난다. 내 것이다. 아주 시끄러워진 룸펜의 구석까지, 더 정확히는 다락방 입구까지 혜성을 한 쪽 팔로 안고 온 히스는 소중하게 껴안으며 고통스럽게 속삭였다. “가자… 얼른 가자. 보여줄게. 그래. 그래. 너에게 줄게. 너에게 줄게, 수페리우스. 나의 수페리우스. 사랑스러운 내 사람. 어서 가자. 너에게 뮌헨의 민들레를 줄게. 사랑스런 나의 수페리우스…….” 언젠가 무대에서 죽는 게 소원이라고 했지, 히스클리프……? 나는 어쩐지 너의 그 말이 이해가 된 다……. wgreene@naver.com 안녕하세요 그린입니다. 음.. 앞으로는 꼬릿말 할 게 있으면 메모로그에 올릴테니 거기서 확인하세요. ^^ 또 조만간에 경민씨한테 받은 선물음악 올릴테니 기대해 주시라 개봉박두...+_+(고마워요 경민씨!) 항상 신화안에서 행복하세요 어린이파 여러분...♡ 음.. 이제 정말로 뮌헨에 가는군요. ^_~ wgreene. 화이트그린. 5월 5일 오후 4시 35분. 2악장 16-2 올림. 덧글 7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16-2편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16-2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17편(뮌헨의 민들레) ▼ 다음글 - 2악장 16-1 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17편(뮌헨의 민들레)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5/12 17:47 http://blog.naver.com/wgreene/110004202106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512 17 업데) Amadeus 음악 : 비탈리의 샤콘느 G단조 -볼륨 높이세요- (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비탈리 : 샤콘느-Sarah ..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너의 태양 이란다…….” 2악장 17편 히스는 혜성의 눈을 가리고 싶어 했다.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그는 프랑크푸루크의 국내선을 찾을 때부터 혜성의 눈을 종종 커다란 손바닥으로 가렸다. 왜 그랬을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는 룸펜에서 마지막 짐을 꾸릴 때부터 수상했다. 평소의 히스가 다정하고 편안한 사람이라면, 오전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 수속을 마칠 때까지의 히스는 변신이라도 했는지 다른 이름이 필요할 지경이었다. 그는 잘 웃지 않았다. 아주 긴장한 기색이었지만 그 근원을 혜성에게 토로하지 않았다. 서울 하늘에서 멀어질 때의 히스는 아예 혜성의 옆모습만 뚫어지게 관찰했다. 키스가 하고 싶은 걸까? 혜성은 히스의 지독한 시선에 싸늘한 한기와 더운 열정을 동시에 느꼈다. 그 감정은 온기와 냉기가 결합되어 쏟아지는 폭우처럼 강렬하기만 했다. 아이는 몇 번이나 히스에게 괜찮느냐 따위를 물었지만, 그는 그럴수록 입으로는 괜찮다고 대답하고 더 긴장한 낯을 보여주었다. 룸펜의 종주국 이라고 부르자니 우습지만, 어쨌든 두 사람은 각자 다르지만 비슷한 생각을 껴안고 뮌헨 공항에 도착했다. 저녁 일 곱 시까지 공항 주변 녹색의 푸른 풍광을 바라보니, 진즉부터 히스의 연락을 받았을 그의 비서가 리무진을 끌고 도착했다. “…….” “히스!” 내내 긴장했던 아이가 완전히 폭발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아이는 소리쳤다. 평범하게 부르는 것 치고 그의 소리는 화를 내는 톤에 가까웠다. 기내에서, 혹은 그의 비서를 기다리는 삼십분 동안 말 한 마디 없이 식은땀을 흘리던 히스가 혜성의 눈을 손바닥으로 가린 채 풀어주지 않아서였다. 깜깜한 시야보다 훤하게 느껴지는 히스의 손바닥과 땀에 하얗게 질린 혜성은 꽥 꽥 소리쳤다. 그의 비서는 조용히 둘의 짐을 차에 실었다. 히스는 아이가 차에 타서야 안심했는지 눈을 가렸던 행동에서 벗어났다. 그는 이상하다. 미친걸까? 오, 그렇지. 고향의 땅을 밟으니 물씬 당겨지는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 때문에? 그런데 왜 하루종일 나의 눈을 차단하고 싶어 했던 거지? 독일 아마데우스는 어떠니? 민들레가 피었을까? 오, 독일도 비슷하게 덥구나, 히스? 숱한 질문이 장거리 여행에 들뜬 수페리우스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지만 히스는 그럴싸한 대답을 단 한 번도 해 주지 못했다. 하다 못 해 뮌헨에 착륙할 때 즈음, 독일의 또래 청년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을 때도 뒷자리에 앉아있는 그들의 행위에 놀란 수페리우스가 바짝 달라붙었지만, 히스는 말 한 마디 없었다. “왜 나의 눈을 가리고 싶어하니, 히스?” “……그렇지는 않아.” “아직은 독일 이라는 게 크게 실감나지 않아.” “…….” “우리는 아마데우스에 가는 거야?” “…거긴… 내일.” “…….” 혜성의 종알거림은 거기서 끝났다. 무조건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히스에게서 완전히 질려서 이젠 혜성도 화가 났다. 그토록 혜성 자신과 함께 떠나기를 학수고대하더니, 막상 날이 밝아 함께 가자니, 그는 변하지 않았던가. 이유도 밝히지 않고 저 혼자 긴장해 버리는 히스는 실로 야속하기만 했다. 6월 중순의 저녁 햇살은 한국과 비슷했지만 또 달랐다. 씽씽 달리는 자동차의 속도에 맞추어 반쯤 열어놓은 차창 밖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은 현의 굵기보다 가늘고 상냥했다. 굵직굵직한 건물들은 오래 전의 향수를 불러일으켰고, 뮌헨 공항에서부터 보았던 드넓은 초원은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매력적이어서 혜성의 지친 영혼을 송두리째 사로잡았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히스가 흥에 겨워 함께 즐거워하지 않으니, 아이도 독일에 와 봤자 모든 것이 시큰둥해졌다. 누군가와 가까워진다는 것은 때론 슬프다. 이처럼 내가 좋아도 가까운 이의 흥이 함께하지 않을 때는 주변 풍광들마저 녹초가 된다. 살아있는 시선은 나눠 줄 수 없다. 나눠 주고 싶어도 각기 떨어져서 저의 육체에 박힌 눈동자는 엄연히 내가 아닌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 누군가의 기분이 풀리기를 기다리는 이 과정이 나의 즐거움을 앗아가도 어쩔 수 없다. 친한 관계는 그만큼 감수해야 할 몫이 따르기 때문이다. 친하다는 수식어가 나와 누군가에게 씌워졌을 때, 나는 혼자가 아니게 된다. 혜성은 히스와 비슷한 표정으로 시큰둥하게 읊조렸다. “너희 비서도 한국말을 할 줄 아니?” “…….” 어떤 말을 해도 대답이 없다. 아이는 화가 나다가 이젠 지쳐서 궁금해졌다. 그가 왜 이러지? “히스… 히스!”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무것도.” 왜 저런대! 여기가 룸펜인 줄 아나? 혜성을 쳐다보면서 열심히 딴생각을 했던 히스가 기가 막혔는지, 아이는 혀를 찼다. 어떻게 마주 보는 내내 명상에 취한 눈으로 시선을 띄우지? 문득 조용하고 평화로운 리무진의 내부가 썰렁해서 견딜 수가 없다. 혜성은 히스의 곁에서 좀 더 옆으로 물러났다. 지금은 그와 바짝 붙어 앉아 있기 때문에 차의 내부가 넓어 보였던 것 일 테다. 하지만 혜성이 왼 쪽의 차창으로 몸을 붙이다시피 도망치자, 오른쪽에 기대있던 히스가 엉덩이를 끌어서 따라오는 게 아닌가. “…….” “…….” 독일에 오자고 조른 게 누군데, 왜 이러는 거지? 딴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기어이 혜성의 곁에 붙어 앉아서 작은 손가락에 저의 것을 깍지 끼고야 마는 히스가 또다시 명상에 돌입했다. 서늘하고도 긴장감에 숨도 못 쉴 것 같은 표정으로 저 혼자 이상해졌다. 혜성은 자신의 곁에서 떨어지기 싫어하는 이 커다랗고 잘생긴 사람이 새삼 신기했다. 어쩌면 이곳이 룸펜이 아닌 뮌헨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시선이 복잡해지려던 찰나, 창밖으로부터 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혜성은 자신의 손을 휘어잡은 그의 손가락과 강인한 팔을 두루두루 살펴보았다. 오늘의 그는 다른 때 자주 입던 블라우스가 아닌, 독일 아마데우스 정복 차림새였다. 그래서 멀어 보인건가? 이유야 어쨌든 독일의 정복은 늘씬하고 탄탄한 그의 몸매를 돋보이게 했다. 한국 아마데우스의 미카엘 성가대 솔로에게나 입혀지는 은회색 성가복과 엇비슷한 섬유의 색상마저 히스에게 어울렸다. 독일 아마데우스 정복의 은회색 섬유 빛은 히스를 위해 재단된 것 마냥 빈틈이 없다. 그의 늘씬하고 긴 다리와 탄탄한 복부를 지나 터질 것처럼 힘이 들어가 있는 그의 팔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혜성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가파른 길을 지나는지 차가 살짝 덜렁일 때 마다 혜성의 동경어린 시선을 차지한 그의 팔 근육은 미세한 율동을 보였다. 은회색 정복에 감싸인 그의 팔은 어른의 팔 이었다. 어떻게 보면 오래 전 그토록 부러워했던 민우보다 훨씬 더 강해 보였다. 다른 쪽 팔이 비록 깁스되어 있다지만 그것조차 탐이 날 만큼 근사했다. 저 팔이 세상을 지휘하고… 나를 안고… 나를 안았었는데… 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혜성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이게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홍시가 된 혜성이 손부채질을 하며 난리를 피우자, 그제 서야 명상에 빠졌던 그의 녹색 눈이 현실로 돌아온다.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아…아냐. 저리 가.” “그런데 왜 나를 안 봐.” “내… 내가 언제 안봤어.” “지금.” “웃기고 있어. 너야말로 하루종일 이상했잖아.” “그랬던가… 하긴…….” 눈치가 빠른 히스는 그제 서야 사랑스럽기만 한 수페리우스의 시선을 캐치했다. 사실 그는 자신의 무뚝뚝한 하루 종일의 행동에 아이가 곤두세워져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은근히 기분이 좋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룸펜에서처럼 들뜨지는 않았다. 히스는 혜성과 나란히 한국에서 벗어나는 순간부터 턱없이 빠져들었던 밑바닥의 아늑한 세상이 두 번 다시없을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가 극도의 우울증에 잠시나마 빠져야 했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그는 너무 싫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독일로 가야 하는 이유가 분명했고 또 수페리우스와 동행하고 싶었지만, 그는 막상 그것이 현실에 주어지자 두 번 다시는 룸펜에서 전과 같이 지낼 수 없을 것을 알아서였다. 그 안에 있을 때는 이 아찔한 절망이 찾아오리란 걸 히스는 전혀 몰랐다. 그래서 그는 괴롭지만 참아야 했고, 감정의 정리가 거의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혜성의 풀죽은 시선을 향해 자비롭게 웃어 주기로 한다. 그는 스스로 웃을 때마다 심장의 혈관들이 찢어지는 듯한 괴로운 통증을 막연히 이겨내야 했다. 평범한 니트와 면바지 차림인 혜성은 그 어느 때 보다 작고 예뻤다. 히스는 부디 이 시선이 자신에게만 해당되기를 바랐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의 혜성은 그저 그런 별 볼일 없는 사내애였으면 좋겠다고 기도까지 했다. 히스는 씨 익 웃으며 수페리우스의 시선이 쭉 훑어간 자신의 튼튼한 팔을 우쭐거렸다. “나의 연주 스타일이란 건 날카롭지.” “…….” 혜성의 얇은 팔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자신의 팔과 번갈아 보며 히스는 차창에 흡수되는 햇살과 하나가 되어 속삭였다. 그는 자신이 무엇이든 연주 할 경우를 떠올리며 줄줄이 읊었다. 날카롭게 내리치는 건반이며 찢어 트릴 듯이 덤비는 현의 비명은 그의 수식어 중의 하나인 황제, 히틀러라는 것과 잘 어울린다는 것 까지도… 이윽고 히스는 혜성의 뺨에 가벼운 입맞춤을 해 주었다. “그래도 지휘 할 때는 상냥하고 부드러울 때가 많아.” “……?” “지휘 할 때 아주 많은 감정이 치밀어 오르거든.” “…….” “수페리우스… 그거 아니?” “무얼?” “나는 이 땅에 날아오는 순간 깨달았어.” “…그러니까 무엇을?” “너를 데려오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을.” “…왜?” 이 질문이 거듭 나올수록, 왜 라는 짧은 글자가 길어질수록 히스는 괴로움에 찌든 표정을 어쩌지 못 한 채 한 숨만 내쉬었다. 혜성이 일곱 번 째 '왜?'라고 물었을 때, 그는 자신의 비서가 운전을 하던 지 말던지 백미러를 통해 둘을 노려보는 것도 모르겠다며 아이처럼 고개를 갸웃대는 혜성을 송두리째 안아버렸다. 아이가 숨에 막혀서 양 팔을 버둥거리자 허스키한 어절로 미안해 라는 말만 내뱉을 뿐, 그는 더더욱 세게 끌어안고 숨이 막히도록 저릿한 입맞춤만 하였다. 키스, 키스라… 이 행동은 룸펜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혜성은 그의 스킨십이 시작되자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아무 행동도 없이 목각인형처럼 굳어서 절망에 빠진 사람처럼 굴었던 방금전까지의 히스는 그의 낯선 정복처럼 두려웠기 때문이다. 혜성은 손을 내밀었고 자신을 흠뻑 음미하는 그의 황금보다 멋진 파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보듬어 주었다. 히스는 격렬한 신음을 쏟아냈다. “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 우수수 떨어지는 가을의 낙엽처럼 히스는 필요 이상으로 긴장했다. 혜성은 그런 그가 화가 나고 이해 안 되다 못해 포기 한 것 까지 지나자 이젠 불쌍해졌다. 그가 왜 이러는지를 떠나서 이제는 자신도 독일에 괜히 왔다는 생각마저 든 것이다. “뺨도 만져줘… 그래… 그래… 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네가 원한다면 히스, 나는 한국에 지금이라도 돌아가도 돼. 상관없어.” “!” “나와 함께 인 것이 너에게 절망이라면, 나는 왔던 길을 홀로 돌아갈게.” “안 돼!” 그의 강렬한 녹색의 눈동자와 충혈 된 입술은 아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흥분해서 괴성을 지른다. 흠칫 놀란 혜성이 품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움직이자 히스는 부랴부랴 혜성을 자기 무릎에 앉힌다. 작은 몸이 넓은 가슴에 폭 안겼다. “그럼 말 해 봐. 뭐가 괴로워? 왜 나를 데려오면 안 된다는 거야?” “…우리가 지금 가는 곳이 있는데 수페리우스…….” 그의 흐릿해진 시선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내일 꼭 우리는 아마데우스…에 갈 거고…….” “그렇지.” “그 사이에 너는 나를 경멸할지도 몰라.” “…내가 왜?” 이곳은 네가 고대하던 고향의 땅이며, 네 창작과 열정의 근원인데도? “수페리우스.” “왜?” “나는 그토록 갈망하던 이곳에 너와 온 것이 진짜 '현실'인 것을 깨달았단다….” “…히스?” 네가 사랑하는 나와 함께 돌아와서 마냥 아이처럼 기뻐야 할 텐데도? “사랑스런 내 사람… 언제고 아쉬운 작별의 키스를 해 주고 나의 창을 열어줘야 할 의무가 있는 내 사람….” “히스… 히스…?” “이제 우리는 룸펜에 돌아가도, 현실이 될 수 없을 거라는 게, 나는 괴로워서 견딜 수 없었던 거야.” “?” 감수성의 변이 라는 못난이의 별칭은 나에게만 통용되었던 건데? “내 근육들과 영혼마저 '현실'을 일깨워주는 현재에… 네 말대로 근사한 밑바닥은 룸펜이 전부였는지도 모르지. 나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음악과, 내 터전인 이곳에서 현실을 느끼거든.” “…히스… 너는 나보다 한국말을 잘 하나봐.” “……?” 바람이 불어도 머리칼만 휘날린 채 영혼은 곧은 뿌리를 바닥에 내린다. 혜성 이라는 바람이 상냥한 입김을 천 만 번 불어준다 한 들 히스의 뿌리는 전혀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들의 행선지는 밝히지 않은 채 히스는 다가올 시련의 장 앞에서 혼자서 괴로워만 했다. 혜성은 차라리 이 땅을 밟지 말았어야 한다고 한 시간 내내 후회만 했다. 이유야 모르지만, 그가 이렇게 두려운 기색일 줄 알았다면 프랑크푸루트에서 서울로 돌아갔을 것이다. “너는 시를 읊는 거니? 나는 무슨 소릴 하는 건지 통 모르겠어.” “…….”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히스가 두려워하는 진짜 실체야 모르지만, 혜성은 딱 하나 정도는 알았다. 그는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순간부터 늘 혜성이 떠나갈 언젠가를 염려하지 않았던가. 붙잡지도, 매달리지도 않을 테지만 그는 슬퍼할 것임을 혜성은 알았다. 아이는 살며시 그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속삭였다. “히스… 이 독일에서조차 파란색 머리카락은 너 하나겠구나….” “오… 그렇지.” “바다와 하늘을 쥔 용맹한 사람은 천지를 둘러봐도 너 하나다….” “…….” “내가 너를 멀리 하게 될 그 날이 두려워 진 거구나… 히스. 그게 너의 현실인거니.” “…응…….” “그렇다면 너는 참말로 바보구나.” “…….” “내가 어떻게 너를 멀리 하거나 버릴 수가 있니.” “…….”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잃기 싫은 소중한 인연이… 바로 너인데…….” “…….” “차라리 사랑이 아닌 우정이 전부였다면, 그 끈을 풀기 싫다고 아둥거릴 사람은 바로 나인데…….” 한 때의 히스는 저 버르장머리 없이 제 멋대로 이고 감수성이 들 죽 날 죽인 수페리우스가 괘씸해서라도 자신에게 반드시 빠지게 하겠노라고 스스로에게 선언했었다. 그런 히스가 무색하다. 정작 정신 못 차리고 혜성에게 집중된 것은 히스,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독일로 날아오르는 순간부터 몇 번이나 하고 싶었던 말을 가까스로 참아내는 히스는, 강한 인내심의 끝에서 창백하게 질려가기만 한다. 혜성은 더 이상 왜 그러느냐 묻지 않았다. 뮌헨의 민들레 어느덧 두 시간 가량 쉬지 않고 달리던 차창 밖으로 드넓은 초원이 혜성을 반겨주기 시작했다. 큼직큼직한 성곽을 뺑그르르 돌면서 혜성의 시선을 즐겁게 해 주던 움직임은 최종 목적지에 다 달았음을 알리며 천천히 바퀴를 굴렸다. 히스는 이제 곧 오페라 하우스에 도착할 것이며, 유일무의 아름다운 아마데우스 홀 이라는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이렇게 한가로운 주변에… …오페라 하우스가 있다고?” “그렇단다 수페리우스… 마리엔 광장에서도 한 참은 떨어져 있지. 주변으로는 아무 것도 없어. 차를 타고 더 가야지 흔한 명소들이 줄을 이루지.” 무릎에 앉혔지만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혜성을 바짝 당겨 안으며 히스는 눈을 감고 속닥거렸다. 나른하고 풍부한 어절이 계속 들리지만 창밖의 빼어난 풍경에 넋이 달아났는지 혜성은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많은 사람들이 거닐어야 정상일 법 한 드넓은 지대에는 그러나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간간히 자신들과 비슷한 멋진 차가 느긋하게 지나다닐 따름이다. 혜성은 멋진 명소들이 응집한 지대에서 자꾸 벗어나기만 하는 자신들의 목적지가 왜 홀로 떨어져 있는지 그것이 궁금했다. “…왜 아마데우스 오페라 홀은 동떨어져 있니?” “가장 특별한 이름을 지녔으니까.” “!” 아이의 중대한 질문과는 달리, 히스의 대답은 짧고 간략했으며 그만큼 당연한 것으로 돌아왔다. “아마데우스니까.” “…….” ……아마데우스니까. 그 이름이니까. “관광객이 있다 한 들 그들 역시 초청장 없이는 이곳에 찾으면 안 되거든. 학교는 홀에서 삼십분 정도 걸어가면 넓은 지대로부터 시작된다. 성 미하일 성당보다 멋지고 성스러운 우리 아마데우스 성당도 함께 있단다….” “보고 싶다.” “내일이면 다 볼 수 있어.” 그들이 도착한 곳은 역사책 속에 언젠가 자리하게 될 뮌헨의 국립 오페라 하우스보다 세 배는 넓어 보이는 지대에 지어진 아마데우스 홀 이었다. 홀 이라는 이름조차 무색하다. 굵고 높은 기둥들이 찬란하게 팔을 뻗은 사이로 백 명은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을 듯 한 출입구가 열려있다. 홀 주변에 세워진 우람한 조각상은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이며 각자의 손에 쥐어진 악기를 연주할 것처럼 근사했다. 한국 아마데우스의 연주회장보다 훨씬 세련된 것이 뮌헨의 외곽에 위치한 아마데우스 홀 이었다. 자연 채광을 그대로 흡수하는 높은 창가는 그 위엄만으로도 사람의 넋을 빼앗아간다. 홀 주변에는 녹색의 물결이 줄을 이뤘다. 자연과 하나가 된 선율이 곧 혜성에게 들릴 것이다. 아이는 그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숙소에 가겠지 싶었던 예상과는 달리 도착한 아마데우스 홀의 전경은 근사한 궁전과 다를 것이 없어서 혜성은 히스가 방금 전까지 고뇌했던 부분마저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서야 자신이 독일의 땅에 도착한 게 실감이 났다. 아이는 차에서 내리는 동시에 달려가 건물 주변에서 정지하고는 홀의 근사함에 압도되어 얼어붙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멋있어! 아름다워!” 오, 이 느낌은 그 언젠가 아마데우스 성당을 처음 봤을 때와 비교했을 때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는 신이 나서 벽 줄기를 손바닥으로 쓸어 보았다. 무시무시한 전류가 소리를 내며 몸속에 스며드는 기분이 들어서 그 때마다 혜성은 어깨를 떨었다. 게다가 단 한 사람도 없을 법 한 조용한 지대를 한 시간 내내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아마데우스 홀에 도착하니 수백의 인파가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동양인을 비 롯 체통 있어 보이는 오만한 눈빛의 외국 사람들은 혜성의 곁에서 또박 또박 걸어가는 히스를 예의주시 했다. 각자 저의나라의 말로 히스를 떠들었지만 혜성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직감으로도 알았다. 히스의 다친 팔과, 그의 기나긴 부재를 떠들겠지. 지난 날 룸펜에 찾아왔던 그의 비서가 야기했듯이, 침몰하는 헤프베르크 폰 카라얀의 추락을 떠들 거야. 혹시 히스는 이들의 야멸찬 시선을 진즉부터 알았기에 그토록 긴장했던 걸까? “…가자.” “어? …어…어.” “역시 네 눈을 가렸어야 했어.” “……어?” “…….” 혜성의 생각과는 달리 히스는 사람들의 거북하고도 노골적인 시선에는 그 닥 신경을 쓰지 않는 듯싶었다. 한 예로, 그는 자신에게 가식적으로 웃으면서 말을 붙이는 근사한 중년의 신사에게 고개만 대충 끄덕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긴장하는 혜성의 어깨를 강하게 쥐고 이끌었다. 찬란하게 반짝이는 그의 독일 정복이 백 개의 칼집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것처럼 위압스러웠다. 주변을 압도하는 히스의 표정은 참옥 하고 실랄했다. 아마데우스 홀 주변을 살피느라 히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지 못 한 혜성은 그걸 몰랐다. 독일에서의 히스가 얼마나 과묵하고 확실시한 성품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지 알 리가 없었다. 혜성이 아는 히스는 바람둥이에 수재 블라우스를 좋아하고 주절주절 자랑하고 떠들어대는 멋쟁이 사내였을 뿐이니까. 사람들은 은연중에 히스의 카리스마 넘치는 보폭에 긴장하여 길을 열어주었다. 인사도 없이 쌀쌀맞게 지나치는 히스의 큰 키가 지나간 자리는 싹없는 사막의 흙보다 황량했다. 히스의 오만하고도 당연한 표정과 압도는 홀 내부에 들어설수록 더 해졌다. 사람들은 혜성이 누구인지 궁금해 하는 눈치였지만, 개중에는 그가 테레사의 수페리우스 라는 것을 알아채고 놀라서 굳었다. 두 사람은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타고, 히스의 비서가 진즉부터 예약해 놓은 5층 로얄 석의 중앙에 앉았다. 이 위로도 다섯 층 내지 여섯층은 더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앉은 자리는 말 그대로 최고의 좌석임이 분명했다. 두 사람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는 정갈하고 품위가 넘쳤다. 붉은 실크가 팔걸이에 걸려 있었으며, 망원경 역시 가지런하게 테이블 양 쪽에 놓여 있었다. “오…와…… 크다…….” “후… 이제 앉자.” “크다… 크다….” “……?” 한국 아마데우스의 연주회장이 세상에서 가장 넓은 곳인 줄 알았던 혜성은 오싹 할 정도로 높은 위치에서 감상하게 된 자리에 한 번 놀랐고, 엄청난 인원이 한 번에 수용되는 이 시설에 놀랐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꺼지지 않는 오만하고도 풍부한 내부 구조의 세련됨에 아예 기가 죽을 지경이었다. 멀리 무대는 달리기 경주를 벌여도 괜찮을 정도로 으리으리했기 때문에 혜성은 자신이 왜 여기에 왔는지 물어야겠다는 생각마저 할 수 없었다. “…이제 곧, 시작될 거야.” “크다… 정말 크다….” “아마데우스 주최… 뮌헨 콩 쿨.” “어…어?” 번쩍! 머리에 번개가 친다. 아마데우스 주최 뮌헨 콩 쿨? 여러 가지에 빼앗긴 시선이 그제 서야 히스에게 몽땅 돌아왔다. “영국 측에서 주최 한다는 결정에 지난 날 내가 열을 올렸었거든. 그래서 거의 2년? 1년? 만에서야 우리 측 주최로 뮌헨의 홀에서 열리는 거지. 나는 여기에 꼭 와야 했거든.” “아…!” 그렇다. 히스는 독일의 테레사라고 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히스에 대한 소식은 한국 아마데우스를 다니면서 종종 들었는데, 어떤 아이가 친절하게도 설명해 줬던 기억이 있다. 독일의 히스가 영국과의 주최 명단을 놓고 열을 올리고 있다는 소식을, 그 언젠가 찬란한 성탄절이 있기 직전 들었던 것 같다. 히스는 이 콩 쿨을 놓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노고가 스며들어가 있는 뮌헨의 콩 쿨을 그가 놓칠 이유가 없다. 이건 혜성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당연히 참관해야 할 문제이다. “눈을 감고 들으라고?” “그래… 수페리우스. 흔한 방식이지. 시야를 제외한 너의 모든 감각을 깨워서 지금 시범 연주를 감상 하렴….” 히스는 공항에서 그랬던 것처럼 혜성의 눈을 가리기 위해 손을 들었다가 조용히 팔을 제 자리에 놓았다. 그는 그 대신에 아이가 저 스스로 눈을 감을 것을 권유했다. 향기로운 그의 어절이 강하게 되풀이되자 아이도 어쩔 수 없이 어깨를 으쓱하며 살포시 양 쪽 눈을 감았다. 그 찰나의 사이에도 히스는 긴장한 입술을 아이의 눈꺼풀에 살짝 살짝 눌렀다. 이제 눈을 감은 혜성은 히스를 더 관찰 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손바닥을 적신 땀을 몰랐으며, 그의 입술이 얼마나 세게 깨물려 있는지를 몰랐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가 차차 붉음의 바다에 빠지는 것과 자신을 지켜보다가 몇 번이나 이마를 쥐고 고통에 찬 숨을 내뱉었는지도 몰랐다. “그것도 나쁘지 않은데? 히스… 누가 나왔구나. 사람들이 박수를 친다.” 콰쾅- 천둥 번개처럼 쏟아지는 우렁찬 박수 소리에 가슴이 튀어 나올 것처럼 격정적으로 변한 혜성이 실로 오랜만에 찾아든 이 감각을 반갑게 맞이한다. 아이는 룸펜에서 자신이 지냈던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한국의 아마데우스 연주회장에서 있었던 저릿한 감각이 이 순간 물밀듯이 밀려와서 눈앞에 피아노가 있다면 소나타를 연주해야 할 듯싶었다. 사람들의 긴 박수소리가 터지고 눈을 감은 수페리우스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감돌 때 히스는 옆 자리에서 조용히 떠들었다. “그래… 시범 연주가 시작되는 거다. 콩 쿨의 주최가 아마데우스일 경우에만 있는 독특한 전통이지. 아마데우스 소속의 연주자나 학생이 심사위원 중에 있거든… 그 사람은 콩 쿨 시작 전에 일반인들의 기를 죽인다는 명목으로 최고의 시범 연주를 선사 한단다….” “아… 그래서 한국에서도 그 때 나한테 시범 연주를 하라고 했던건가…….” “그렇지….” “그걸 민우가 대신 했었는데…….” 말을 흐리는 혜성에 반해 더더욱 긴장감이 맴도는 히스는 마음 그대로의 고통을 쏟아낸다. 저 쪽에서 망원경으로 자신들을 예의 주시하는 무리들 따위는 전혀 읽히지 않았다. 히스는 붉은 실크에 덜덜 떨리는 손을 가렸으며 혜성이 혹시라도 눈을 뜨지는 않을까 두려웠는지 무대와 아이를 번갈아 관찰하였다. “…시작됐다, 수페리우스. 눈을 절대로 뜨면 안 돼.” “그래…….” “어떠니…….” 시범 연주자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좌중은 없는 것처럼 조용해졌다. 눈을 감고 있는 혜성은 지금 이 넓고 뻥 뚫린 공간에 저 혼자만 있는 것 처럼 아찔한 감각이 미쳤다. 히스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다. 집중하느라 전신이 피곤해 질 지경이지 않던가. 비탈리의 샤콘느 도입부가 지나자 스 힉 스히힉- 낮은 현의 소리에 음표가 달렸다. 혜성은 숨을 참았고 온 몸의 감각과 영혼에까지 집중하기 시작했다. 무대 위의 시범 연주자는 그러나 혜성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아이의 집중되고 들뜬 표정이 차차 바다에 가라앉는 모래알처럼 쭉 미끄러졌기 때문이다. 의문을 참다 못 해 샤콘느를 경청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이상해 히스. 이건 그냥… 그냥… 평범한 연주야. 어떻게 보면 열 두 살짜리 평범한 아이가 긴장감을 미처 해소하지 못해서 무대의 공포 그대로를 실랄 하게 표현하는… 그런 건데…….” “…그리고…?” 천하의 독일, 뮌헨의 아마데우스 홀! 근사한 수재 연주자가 시범 연주를 한다! 그런데 기대 이상은커녕 상식 수준에도 미치지 않는 이 연주가 설마 독일식인가? 혜성은 기가 막혀서 몇 번이나 입을 벌린 채로 가만히 있었다. 단조라는 이름에 걸맞게 물론 선율은 슬프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마냥 슬프기만 해… 온 몸에 눈물밖에 없는 사람처럼… 하지만 비탈리의 샤콘느는 슬프기만 하면 안 되잖아. 어떤 곡이든지 땀이 있는 법인데… 숨은 열정과 인생의 오미가 담겨 있어야 하는데… 지금 이 사람은 전혀 비탈리를 타지 않았어. 자기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처럼 현이 찢어지는 것 같아….” “…그리고……?” “이음줄이 엉성해. 사시나무 떨듯이 계속 계속… 나는 슬프다고 울고 있어… 나는 바이올린을 잘 몰라. 그를 받쳐주는 반주마저 녹초가 된 게 나는 들려… 내 해석이 이상한 걸까? 내가 잘 몰라서 이렇게 들리는 거야?” “…그리고…?” 연주에 집중하며 느낌 그대로를 설명하는 혜성의 곁에서 히스는 젖은 소리로 그리고, 그리고? 라고 물었다. 눈을 감고 있는 아이는 연주에 집중하느라 히스의 목소리에 물기가 섞여 있음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겨우 발견한 이 점을 빼면 평범하고… …성의가 없어. 대충 사는 사람인가?” 길고 아찔한 숨을 내보내던 히스는 꽈 악 주먹을 쥐더니 턱에 맺혀있는 눈물을 떨어뜨렸다. 최대한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며 아무렇지 않은 듯이 고개를 갸웃대는 수페리우스를 향한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지금 연주자는 사실 흠모하는 거장이 따로 있단다… 그래서일까…?” “그건 전혀 말이 안 되잖아. 이건… 그냥 이상한데… 좋아하는 거장이 따로 있은 들 무슨 상관이니.” “…너의 미세한 발견은 오직 슬픔이 전부일까.” “…그걸 빼면 평범하고 흔해서 나조차도 평을 하자니 민망한데…….” 어쩐지 히스의 목소리에 습기가 배어 있음을 혜성은 이제 서야 알아 차렸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잠깐 깨달은 것이었기 때문에, 아이는 앞 쪽으로 몸을 숙여가며 더더욱 시범 연주자의 바이올린에 집중했다. 허나 그럴수록 형편없는 연주 실력에 미간이 좁아진다. 이게 뭐지? 고작 이게 대단한 연주라고? 한국 아마데우스에서 악마의 트릴을 선보였던 테레사가 여기서는 완전히 신 일 수밖에 없는데? 내가 바이올린은 잘 모르지만, 적어도 그 때 테레사의 기가 막힌 하모니를 떠올려 보면 얼추 비교가 가능하다. 아니, 지금 시범 연주자의 샤콘느는 테레사와 비교 할 가치조차 없어. “히스… 이 사람 정말 아마데우스의 수재가 맞니? 내 귀가 이상한 게 아니라면, 아니지… 오히려 눈을 감으니까 더 정확하게 음정이 들리는데? 이상해, 이상해. 이 연주자는 오히려 콩 쿨 당사자들의 사기를 높여주고 있어. 전혀 화려하지 않아. 색 이란 게 없어. 특징은커녕 가까스로 무대에서 지탱한다고 느껴질 정도인데…?” 혜성의 예리한 지적이 끝나자 히스는 네 말이 옳다며 수긍해 준다. “…그래… 수페리우스… 지금 맨 앞자리의 심사위원석이 부산스럽구나. 사람들은 동요하고 있네….” “그렇지? 시범 연주자의 컨디션이 아주 안 좋다고 해도 이건 좀 이상하다. 아… 끝나간다. 비탈리의 값이 무참히 깨지는데…….” “…그래… 네 말대로 연주가 끝났어.” “거 봐… 이상하댔잖아. 사람들의 박수소리조차 옅어. 나도 치기 싫을 정도인데? 뭐… 그 대신 무대 뒤의 대기자들은 사기가 올랐을 수도… 아… 그 반대일까?” “…….” 어디선가 끅. 끅. 끅. 눈물을 참는 목울대의 소리가 얕게 들려왔다. 눈을 감고 있는 혜성이라서 그런지 그것은 유령의 소리처럼 끔찍하게 세어 들어왔다. 벽이 가로막고 있다지만 옆 자리 로얄 석의 누군가가 울고 있는 게 아닐까? 쯧쯧 혀를 차며 혜성은 간간히 박수를 치는 사람들의 소리에 맞추어 히스에게 말을 걸었다. “눈을 떠도 되니, 히스?” “그래… 지금 저 사람이 무대에서 허리를 숙인다.” “허리를? 나 눈 뜬다?” “…어서 눈을 뜨고 보렴 내 사랑….” “…….” 처음 박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형편없는 비탈리를 선사한 무대 위의 사람을 확인하기 위해 혜성은 천천히 동공을 열었다. 연주에 집중하느라 꽉 감았던 눈은 그러나 한 번에 사물을 보여주지 않았다. 안개처럼 흐릿한 주변이 발랑 뒤집혀서야 옳게 게인다. 그렇지……. “평범한 연주를 마친 저 사람은… 수페리우스….” “……!” 히스가 울고 있었어? 은연중에 히스를 잠깐 확인 한 혜성이 히스! 하면서 소스라치게 놀라 팔을 내밀려던 때, 그는 도리어 한 쪽 팔에 힘을 주더니 자신에게 향한 혜성의 턱을 쥐고 무대 쪽으로 돌렸다. “저 사람은… 수페리우스…….” “히스. 왜 그래? 괜찮아? 히스.” “저 사람은….” “……?” 히스는 괴로운 듯이 눈을 감았다. 그러자 맺혀있던 굵은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쭈르르 흘렀다. 혜성은 답답한 심기 그대로 히스의 방향에 맞춰 무대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히스의 다 젖은 글자가 쉰 목울대 밖으로 터져 나왔다. “내가 보여주고 싶은 첫 번째의 민들레이며…….” “……!”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너의 태양 이란다…….” “!” 전신에 소름이 돋아나고 가까스로 유지되던 거짓 평화가 와장창 깨어진다. 바이올린을 쥐고, 선글라스를 착용한 채 멍청하게 서서 넓은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자는, 사람들의 수근거림에 영혼이 짓눌린 방금 전의 시범 연주자는 테레사였다. 창백하게 얼어붙은 혜성의 귓가로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해서 들었던 비탈리의 샤콘느, 아니. 테레사의 엉망진창인 샤콘느가 길게 퍼졌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너의 태양 이란다…….’ 하느님.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참옥한 선율이 되어……. wgreene@naver.com 어제 분명히 올린 줄 알았는데, 방금 블로그 살짝 와보고 혼자 당황했다는; 요새 너무 정신이 없군요. 메모로그에 소설 얘기 올린다고 치면 여기에는 급한대로 공지 올립니다. 1. 엠에센 안들어갑니다. 저 추가했다가 말 거신 분들 속상해 마세요. 기타등등 모두 다. 저를 경험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바쁘면 바쁘다고 대답 한 뒤에 일을 하면 했지 말없이 무시하는 사람 절대 아닙니다. ^_~ 제 아이디로 누가 꾸준히 접속하나 본데 무시하세요. 만약 제가 로긴하게 되면 말멀에 [화이트그린]이라고 할테니 그 때 인사합시다.(골치아프군요.) 2. 독일편이 모조리 다 날라간 뒤라서 그 실의가 통 사라지질 않기에 요새 잠깐 중단할까 고민중입니다.^^ (일종의 휴식.. 요새 너무 정신이 없어서.. 여기까지 신경을 못쓸 것 같아서요.) 여하튼 또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정신없는 그린 왈- 덧글 9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17편(뮌헨의 민들레)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17편(뮌헨의 민들레)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18편 ▼ 다음글 - 2악장 16-2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18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5/26 22:28 http://blog.naver.com/wgreene/110004611892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526 18편 업데) Amadeus 음악 : 내일은 비 (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내일은 비 (Classic)-미.. 모르는 사람이다. 2악장 18편 테레사는 사실 긴 머리카락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아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신혜성 이라는 소년이 자신의 첫 인상에 넋을 잃어 주었던 황홀한 지난날이 있다는 것 그것이다. 그는 그 때를 떠올릴 때면 늘 행복했고 뼈저린 상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감수성의 변이 라는 것이 전혀 없었던 테레사에게 있어 신혜성의 출현 자체가 폭풍 이었듯이, 그는 이제 긴 머리칼을 싹둑 잘라내고 싶지 않다. 행위는 곧 안식의 단절과 죄를 의미했다. 바쁜 생활을 이유로 대충 길어버린 머리카락을 내일이면 꼭 잘라내야지- 마음 먹었을 때, 성탄절의 기적을 체험했었고 오래 전 신혜성을 처음 만났었다. 아이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좋아했었다. 표현하진 않았지만 테레사는 그 점을 느낄 때마다 행복했다. 지금도 그 때와 별 반 다르지 않다. 테레사는 탁자 위를 더듬거리며 무언가를 소중히 쥐었다. 히스가 소포로 부쳐줬던 혜성의 솔베이지 악보였다. 아마데우스의 혁명과 반혁명 사건 이후 다친 눈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레사는 혜성의 작곡이며 편곡이 모두 들리는 기분이었다. “테오제네스…….” “정말 괜찮을까요?” “괜찮아.” 사람들은 너도 나도 테레사를 찾으려 맹수처럼 홀을 뒤지고 있었다. 그 소식을 전하면서도 테오제네스는 단 한 사람을 염두 해 두고 있었다. 테레사의 길어진 머리칼처럼 변했을지도 모르는 신혜성에 대한 소식이 아주 가까이에 있지 않던가. 엉망진창으로 샤콘느를 켠 뒤, 테레사는 아닌 척 하면서도 목이 빠지게 누군가를 기다렸다. 아마데우스 홀 8층의 높은 천정을 둘러주고 있는 화려한 아치무늬가 금 새 라도 둘의 머리에 꽂힐 것처럼 위협 스럽다. 참말이지 테레사는 제 멋 대로이다 못 해 형편없는 연주를 10 분 전에 마쳤었다. 아마데우스 주최 콩 쿨 이라는 이름이 무색해질 정도로 세계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테레사는 날이 갈수록 추락하기만 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을 즐기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혹시 그는 늘 상 화려하기만 했던 지난날에 염증을 느껴서 때마침 닥친 지금까지의 짧고도 긴 불행을 기쁘게 맞이하는 건 아닌가 하며 테오제네스를 놀라게 한다. 병원에서 누군가와 국제 전화를 마치는 즉시 달아나듯이 수술 일정을 뒤로 미루고 뮌헨에 날아 온 테레사를 전혀 이해 할 수 없었던 테오제네스는 그러나, 그를 쫒아온 현재 그가 왜 그랬는지 납득했다. 테오제네스도 보았다. 상냥한 신이 테오제네스와 테레사에게 위치를 친히 일러준 것처럼, 둘은 본능처럼 알았다. 기겁할 정도로 형편없는 무대매너와 연주를 펼친 테레사를 향한 수많은 시선 중에, 분명히 수페리우스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일치였으며 신의 장난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었다. “차이코프스키….” “…테레사?” 허공에 건반을 누르며 테레사는 세세히 들려오는 자신만의 음정에 도취되어 간다. “모차르트를 좋아했지만, 그와 동시대를 살지 못한 불운아가 아니던가… 그의 달콤한 녹턴은 모차르트의 귀에 들리지 않았겠지. 애석한 일이다.” “방금 시범 연주에 대한 건가요… 지금 말은….” “아니….” “…….” “그냥, 그 차이코프스키의 기분이 뭔 지 알 것 같아서, 그냥….” “…….” “테오제네스… 테오제네스…….” “…….” 진분홍 노을을 흠뻑 적신 육체가 말을 하고 있었다. 다정한 햇살에 뺨을 기댄 테레사가 실밥 자욱이 즐비한 눈가를 선글라스로 가리며 살며시 미소 지駭? “그 애를 데려와 줘.” “!” 쿵- 하고 육중한 돌덩어리가 정말로 테오제네스의 심장을 차고 깊이 떨어졌다. 시선이 흔들린다. 그러나 테레사의 태도는 마모되듯이 부드러워져만 간다. 그의 지금은 지는 태양의 마지막 웃음일 지도, 그래서 저렇게 온화한 듯 사람을 압도하는 미소를 짓는 건 아닐까- 테오제네스는 경직된 채 듣기만 한다. “수페리우스는, 지금 나보다 더 눈이 멀었을 테니.” “그게 무슨….” 허공의 연주는 쉬지 않고 반복되었다. 테레사는 가끔씩 옅은 신음 소리를 내며 어깨를 들썩였고, 한 순간에 조용히 혼자만의 연주를 끝냈다. 그의 팔이 탁자 위에 가지런히 올려진다. 아주 많은 힘이 그에게로 쏠릴 때, 세상의 빛이 굴절되어 천 개의 색을 오직 테레사에게만 펼치는 것 같았다. 테오제네스는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보다 눈이 부셨기 때문이다. “나를 찾고 있을 거다.” “하지만-” “잠깐 스치는 거야 나쁘지 않지.” “……?” 부쩍 말라가는 테레사는 자신의 여윈 손목이며 여러가지를 아름다운 정복에 가렸다. 희미한 햇살의 몸부림처럼 웃는 저 사람을 위하여 테오제네스는 조용히 8층의 넓은 대기실 방을 나갔다. 가십 기자들이 테오제네스를 알아보고 승냥이처럼 달려들었지만, 그는 노골적으로 그들을 적대하며 지나가기 바쁘다. ‘그가 나를 부르고 있다! 혜성은 방금 전의 테레사를 통해 저 한 줄만 느꼈다. 그 이상은 들리지도 해석 되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동요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 선 채로 혜성과 비슷하게 눈물을 흘렸다. 모세보다 비열한 낯으로 웃는 자도 꽤 많았다. 그들은 방금 전 무대에 나온 사람을 아직도 못 믿는 눈치였다. 그래, 그래. 테레사의 형편없는 연주에 놀랐고, 그의 선글라스를 통해 증명되는 장님에의 사실에 누구는 오열하기도 했지만 거의 다는 내색하지 않았다. 좌중의 동요는 쉬이 가라앉을 수 없음을 판단했는지 콩 쿨 진행 단 측에서 일정은 30분 후로 연기 되었다는 말을 전했다. 장내는 더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혜성은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가 없었다. 오직 단 한 줄의 문장만이 귀를 뚫었고 가슴을 찢었으며, 그렇게 찢어진 가슴을 살포시 여며 주기까지 했다. ‘그가 나를 부르고 있어!’ 슬픔 이상의 고통도, 희망도, 메시지도, 나락도 없이 그는 바이올린을 연주하지 않았던가. 마치 저 먼 세상의 길거리 방랑자처럼. 룸펜처럼, 룸펜처럼? “수페리우스!” “…….” 테레사! 테레사! 나를 불렀어. 그가 어떤 연주를 했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나는 알 수 있어. 테레사가 나를 불렀어. 그가 미워. 스스로를 추락시킨 그를 내가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확인해야 할 게 있어. 혜성의 눈물을 닦아주려던 히스는 몇 번이나 체통을 잃고 꽥 꽥 소리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복도로 빠져나와 뻥 뚫린 천정 사이를 걷는 수페리우스는 그러나 히스의 소음도 들리지 않는가 보다. 혜성은 자신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들을 헤치고 여기 저기를 뒤졌다. 오래 전, 성탄 미사의 날에 이자벨과 함께 있던 테레사를 찾아 뒤졌던 것처럼. ‘나를 부르고 있어.’ 그래서, 만난다면 어떡할 건데? 안길거니? 안아줄 거니? 히스를 대신하여 혜성의 내면 저 쪽의 강한 자아가 물어온다. 아이는 대답 없이 넓고 복잡한 틈을 뚫고 테레사를 찾기만 했다. 그가 있는 곳이라니, 외국인들이 뻔질나게 돌아다니는 뮌헨이라지만 이 장소만큼은 한국의 아마데우스와 다를 것이 없었다. “수페리우스!” “잘 들어, 히스.” “?” “그는 날 알아보지 않을 거다.” “…뭐?” “그의 나라가 망가졌거든…….” “?” 오, 하느님! 천주여! 나의 수페리우스가 테레사의 미친 연주를 보더니 같이 미쳤나 봐요! 히스는 자신을 훔쳐보는 여인들을 향해 예전처럼 윙크를 하지도, 웃어 주지도 않았다. 그는 혜성보다 더 많은 땀을 흘리며 안절부절 못했다. 히스의 머릿속은 현재 엉망이었다. 혼이 빠진 표정으로 넓은 아마데우스 홀을 뒤지는 수페리우스를 좆는 것도 그렇지만 이틀 전에 마지막으로 연락을 취했던 테레사가 마음에 걸렸던 탓이다. 원래 히스의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 아마데우스 홀을 보여 준 뒤, 수페리우스를 껴안고 마리엔 광장을 돌아다니다가 맥주를 마시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기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닥친 현실에 대처 방안을 준비할 틈이 없다. 하지만 히스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도 잘 아는 것을 부인했는 지도 모른다. 그게 정답일 것이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부터 쭉 우울증에 걸린 환자처럼 혜성에게 대했고, 확실하지 않지만 테레사가 아마데우스 홀에 왔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부인하고 또 부인하다 못 해 질렸던 것이다. ‘테레사… 뮌헨에 저는 가야 합니다.’ […….] ‘수페리우스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 히스는 자신이 뮌헨에 콩 쿨 때문에 갈 것이라는 소식을 의무적으로 전해 줬을 뿐인데, 수술 일정이 잡힌 테레사가 당도 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도한 것도 모자라 무대에서 선율로 난동을 부리다니! 히스는 가슴이 찢어질 것 만 같았다. 설마 설마 하던 것이 사실로 부각될 때, 히스는 괴리감에 그야말로 터지는 영혼을 속수 무책으로 내버려둔다. 그래도 그렇지. 테레사라니, 테레사라니! 앞서 설명했듯이 한국에서 출발하기 직전, 히스는 자신의 비서로부터 뜻하지 않은 전갈을 받았었다. 테레사, 테레사! 그가 콩 쿨의 시범 연주자로 나온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히스는 혜성을 데리고 가지 말아야겠다는 마음과, 두 사람을 어떤 식으로든 마주치게 해 줘야 한다는 것 사이에서 힘들게 싸웠었다. 결과는 이렇게 되었지만……. 둘은 5층 좌석에서 빠져나오는 즉시 6층 7층을 쉬지 않고 뛰어다녔다. 뭐에 홀린 눈으로 주변을 응시하는 수페리우스와, 그런 아이를 안타깝게 응시하는 히스의 발걸음이 꽤 한산한 8층 입구에 당도할 때였다. 멀리서부터 강렬한 지시가 떨어진 것처럼 둘의 걸음이 동시에 멈췄다. 엘리베이터에서 꽤 멀리 위치한 비상용 계단의 윗부분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오는 테오제네스가 보였기 때문이다. 다 지는 햇살을 뜨겁게 등에 진 채 찬란하게 반짝이는 저 사람은, 거의 1년만에 보는 테오제네스가 확실했다. “테오제네스?” “…….” 펄펄 넘치는 열기를 쉬이 가라앉히지 못 한 혜성이 반갑게 소리쳤다. 흥분 되서 터지는 바람에 억양은 제 멋 대로였지만 혜성이 그런 것을 판단 할 리 없다. 아이는 발아래 후두둑 떨어지는 땀방울도 모르는지 테오제네스의 손을 덥석 쥐었다. “테오제네스… 테오제네스….” “……따라 와.” 가슴에 철이 심어졌는지 급격한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다. 섣부른 기대 따위도 없었다. 희박한 가능성조차 예감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테오제네스와 테레사라니! 혜성은 자신의 뒤를 따르는 히스를 아는지 모르는지 정신없이 테오제네스의 뒤를 좆았다. 땀에 젖은 혜성의 손에 잡혔던 테오제네스의 손가락 주변에 젖은 물기가 자자하다. 복도 옆의 넓고 화려한 창문으로 지나치게 뜨거운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사람의 숨통을 조여 올 정도로 힘이 넘치는 진분홍빛이 뻥 뚫린 내부를 걷는 족족 달아오르기만 했다. 믿을 수 없어. 하지만 믿어야 할까. 이곳에 테오제네스가 있다니. 정말 그가 있나봐. 그 사람이 있나봐. 믿고 싶지 않고 믿을 수 없는 아까의 연주를 마친 그가 있는 거야. “저 안에 테레사가 있다고?” “그렇긴 한데… 오랜 만이다, 수페리우스.” “……!” 테오제네스가 멈춰 선 자리를 묵묵히 지켜보다가 조용히 도어의 문고리를 돌리던 혜성이 흠칫 놀랐다. “그래…… 오랜 만이다, 테오제네스.”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 왜 확인해야 하는지, 확인을 하면 세상이 아름다워 지는 것도 아니거늘, 굳이 이렇게 해야 하는지, 너는 더 두려움에 빠질 지도 모른다며 여러 가지가 위협하는 현재. 그저 이를 악 물었다. 달칵… 혜성의 젖은 등이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도어 안쪽으로 사라졌다. “후우… 조그만 게 발은 어찌나 빠른지….” “…….” “오랜만이야 테오제네스~ 예뻐 졌구나 귀공자여. 후후.” 적당히 친한 사람들과는 제법 살갑게 구는 히스가 레이스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씨 익 웃었다. 뮌헨의 첫 번째 민들레임에 틀림없을 그 사람, 테레사를 알려 준 뒤 부터는 히스 역시 정신없이 울고 뛰느라 혼이 빠질 지경이었다. 무엇에 놀랐는지, 무엇을 후회하는 지에 대한 순서는 수페리우스처럼 히스에게도 아직 멀었다. 손수건의 레이스를 나폴 거리며 꼼꼼하게 땀을 닦는 히스의 환한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흠칫 놀라던 테오제네스는 복도의 긴 쇼 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딱 한 마디를 건넨다. “…머리 꼴은 그게 뭔가…?” “!” 다시 땀이 분수처럼 솟기 시작한 히스가 자신의 파란 머리칼을 양 손 바닥으로 움켜쥐며 십칠 십칠 거린다. 강렬한 불꽃들로 수를 놓은 것도 아니거늘, 넓은 내부는 촘촘히 타들어가고 있었다. 혜성의 시선을 자극하는 붉음에의 물결은 춤을 추듯 일렁였다. 실상 내부의 모든 색은 적당한 브라운 톤 이었으나 반대 편 전체가 유리창이니 만큼 쏟아져 들어오는 화려한 저녁 노을은 내부의 모든 것을 붉게 태우기만 했다. 그 어떤 화려한 물체도 저 사람만은 못 할 것이다. 혜성은 금방이라도 나올 것처럼 글썽이는 눈물을 억지로 참았다. 한 걸음 걸을수록 가까워진다. 마음도 가까워지는 걸까. 믿어지지 않는다. 헤어진 지 오래인데 이런 식으로 만남을 주게 된 하늘의 누군가가 불현듯 원망스럽다. 슬픔의 샤콘느가 아직도 귓가에 잠식해 있기 때문에 혜성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 “…….” 테레사……. 그를 불러야 할까. 그에게 뛰어가서 덥석 안길까.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농담을 건네 볼까. 조용히 문을 닫고 다시 나갈까. 다른 사람인 척 실컷 구경하다가 돌아설까. “!” 천천히 그가 앉아있는 중앙의 넓은 쇼 파 쪽으로 걷던 혜성이 저도 모르게 굳었다. 기억 속의 테레사는 산산이 부서지고 마르고 수척해진 자가 오만한 턱을 어쩌지 못 한 채 이 쪽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백해진 테레사의 피부는 가까이에서 보면 실핏줄이 모두 보이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멀리서 보는 현재 그저 하얗게 묻어나기만 한다. “…테….” “…….” 혜성은 당장 양 손으로 입을 가렸다. 동시에 후두둑 굵은 눈물이 손등을 지났다. 평화로웠던 잠시간은 깨지고 세상에서 가장 아픈 창이 날아와 심장을 뚫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아이는 말이 꺼내지지 않는 대신에 연주로 인사를 대신하기로 결정했다. 불현듯 널널한 시간 앞에서 금방이라도 테레사는 사라질 것처럼 멀게 느껴져서 였다. 그의 아름답고 총명한 눈을 가린 잔인한 선글라스를 치우고 싶지만, 혜성 자신이 까무라칠 것이 두려웠다. 혜성의 손은 어느새 룸펜에서 수도 없이 연주했던 솔베이지 변주곡 중 제일 괜찮았던 것을 건반에 누르고 있었다. 까아만 그랜드 피아노 곳곳에 작은 빛이 사라라 움직거렸다. 방금 전 확인한 테레사에게 입이 열리지 않는 대신, 아이의 손은 슬픈 샤콘느를 마친 테레사를 위해 긴 인사를 대신한다. 건반 곳곳에 물이 올랐다. 미끄덩한 건반 때문인지 혜성은 수도 없이 실수를 하면서도 피아노의 선율에 자신의 흐느낌을 감췄다. 여린 피아니시모 부분에도 포르테를 줄곧 사용했지만 테레사는 석고상처럼 굳은 채로 미동이 없다. “!” 룸펜을 위한, 아니. 페르를 위한 솔베이지가 되어 연주를 하는 현재, 혜성은 갑작스런 절망에 부닥친다. 그것은 음표의 높낮이나 시시껄렁한 건반미스 때문이 아니었다. 테레사의 앞에서 실로 오랜만의 건반을 누르는 지금, 혜성은 처음으로 깨달아서였다. 덕분에 엇박자로 쭉 나가던 클라이막스가 무참히 깨어졌다. 변주곡은 어정쩡하게 끝이 났다. 혜성은 건반위에 양 손을 모두 펼친 채로 조용히 눈물을 떨어뜨린다. “…으윽… 흐으….” “…….” 룸펜에서의 긴 시간 동안, 유리에게 레슨을 하면서도, 새벽 공연, 독일에 날아온 방금 전 까지도 깨닫지 못했던 무시무시한 진실이, 테레사 앞에서 연주를 하던 도중 나타났기 때문이다. 혜성은 달아오른 뺨을 내버려둔 채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떨었다. 연주가 변했다. 손가락이 미친 걸까. 테레사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건반으로 대신한 혜성의 인사 앞에서, 그는 아까보다 더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혹독한 연습은커녕 일 년 내내 재즈와 변주곡 따위에 연연하며 대충 지냈던 탓에, 마음은 가벼워졌을지 몰라도 정직한 손가락은 연주 형식에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듣기 좋은 것만 연주하다 보면 연주자의 솜씨는 천박해지기 마련이다. 혜성은 테레사의 앞에서 연주하는 현재, 무섭게 깨달았고 그 사실이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 솔베이지를 마쳤는지 모르겠지만, 혜성은 거의 1년 만에 다시 보는 테레사를 위하여 젖은 건반에 긴 숨을 내보냈다. 싸구려가 되어버린 자신의 손가락과 영혼을 두고, 오랜 만에 만난 테레사의 입에서 어떤 말이 떨어질 지 두려운 나머지 혜성의 안면도 차츰 차츰 홍조기를 잃어간다. 흰 건반에 눈물을 뚝 떨어뜨리던 혜성이 자신의 나태해진 손가락을 아련히 응시하며 읊조린다. “…아…프죠…” “…응….” 테레사, 당신의 머리칼을 만질 수만 있다면…. 허나 그 망상은 사치인 것을…. 일 년만에 듣는 목소리에 감동이 일기도 전에, 나는 스스로에게 놀란 현재를 어쩌지 못합니다. “어떡…하죠….” “…괜찮다….” 그와 함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아마데우스가 된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치는 현재. 그래서 나는 알았습니다. 나의 연주 실력이 얼마나 형편없어졌는지를. “저도… 지금 알았어요….” “…괜찮아….” 그의 눈을 걱정하는 것은 사치에 불과하다는 것마저도. “…미안해요….” “…….” 그가 분명히 히스와 연락하고 지냈을 게 틀림없는데도, 나태해진 연주를 인사랍시고 꺼낸 지금을 경멸한다. 혜성의 떨리는 목소리는 차츰 죽은 새처럼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단지 사랑 때문에 아파하는 가슴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움이 쌓여 어느 순간에는 모든 것을 잃고 황량한 들판에 발가벗고 서 있는 기분이었는데… 철갑옷을 두른 것 마냥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게 단단해진 마음은 오로지 현실의 벽 앞에서 무너지지 바쁘다. “미안해요… 테레사.” 당신의 수페리우스가 형편없게 변한 솜씨로 인사를 대신 해서 미안해요. “…….” 혜성은 천천히 딸꾹질을 참아가며 진심을 다 해 속삭였다. 자신의 예상이 맞는다면, 오래 전 정복자 선언을 했던 테레사는 일부러 샤콘느를 엉망으로 연주했던 게 틀림없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자신을 빗대어 혜성의 현재를 일깨워준다. 자신이 가장 아끼던 악기를 부시라는 말로 아마데우스 학생들을 깨우쳤듯이. 그는 뮌헨의 성스러운 지역에서,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의 귀에 엉망진창인 샤콘느를 연주했다. 오직 자신의 연주를 듣고 지금처럼 깨달아 주길 바라는 신혜성을 위하여……. 일 년 내내 훈련을 등한시한 결과가 무엇인지 짜릿한 '현실'을 일깨워 준 것이다. 가슴이 터질 것 같다. 둘은 그렇게 한 참 이나 말없이 각자 앉은 자리에 있었다. 이윽고 진분홍 세례가 지나 적막한 그림자가 곳곳에 꿰어 앉자, 기다리다 못 해 밖의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땀은커녕 눈물 자욱조차 모두 증발해서 예뻐진 히스와, 피아노 앞에 있는 혜성과 멀찍이 떨어져 처음처럼 앉아있기만 하는 테레사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번갈아 확인하는 테오제네스는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일행 옆에 조용히 다가가서 인사는 했느냐- 지금 무엇을 하는 거냐- 따위를 물었지만 테레사와 혜성은 침묵으로 일관할 따름이다. 히스가 몇 마디 더 건네다가 대답 없는 혜성에 앞서, 자신이 테레사에게 인사조차 못 한 상황임을 인지할 무렵이었다. 정확히는 테레사의 자리로 몸을 돌리려던 때, 그런 히스의 발걸음을 잡는 소리가 매칼하게 퍼졌다. “누군가 했더니….” “수페리우스?” 그 누구도 볼 수 없도록 건반 쪽에 몸을 돌렸지만, 냉랭한 음성과는 달리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만연한 혜성이 어깨를 들썩인다. “나는 모르는 사람이다.” “뭐라고!” “가자, 히스. 이로서 모든 민들레를 다 본 거나 마찬가지니까.” “!” 딱딱하게 굳어진 테레사의 곁에 쏜살같이 달려간 히스가 꽥 소리친다. 그는 이런 상황을 절대 원하지 않았다. 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을 때 적어도 키스만은 하고 있지 않기를…. 하면서 기도까지 하질 않았던가! 그런 히스의 눈에 비치는 테레사와 혜성은, 남보다도 못 한 존재로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가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을 내뱉는다. “테레사! 당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수페리우스 입니다! 이것 봐 수페리우스! 당장 가서-” “나 역시…….” 혜성의 몸이 움찔 놀란다. 테레사의 부드럽되 단호한 음성이 실바람에 섞여 모두 모두 들려왔다. 이제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아주 정확하고도 실랄한 레슨을 마친 기분이 이러할까. 테오제네스와 히스가 당황해 하는 사이, 테레사는 아주 경쾌한 투로 끝 점을 찍는다. “모르는 사람이다! 누구냐 테오제네스. 콩 쿨을 준비하던 못난 애송이 놈이 여기까지 굴러 들어왔나 보다. 어서 치워라.” “!!!” “테, 테레사?” “연주 솜씨가 아주 엉망이더군. 애송이가 따로 없어.” “테, 테, 테레, 테레사!” 테오제네스마저 당황하여 히스 못지않게 서로를 번갈아 보는 사이에, 그 아찔한 둘 만의 교차점에서 테레사와 혜성은 살며시 입 꼬리를 올렸다. 각자의 일행과 각자의 곳으로 헤어지는 순간마저도, 두 사람은 희망 찬 낯으로 미소 짓고 있었다. 자신을 아끼지 않는 당신은, 계속 추락하는 당신을 나는 모른다. 혼자였지만 그래도 아름다웠던 당신의 나라가 이젠 황폐 해졌습니다 테레사. 방금 당신이 지적해 준 나의 추락한 솜씨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가장 반짝이던 시절을 기억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두려운 것은, 정말 짜릿한 것은. 상황을 만들어 버린 우리들이, 슬슬 꿈틀대며 극복하자 아우성치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요. 유럽의 여러해살이풀인 민들레의 꽃말은 '신의 뜻' 이라고 했어… 나는 수 천 가지의 민들레꽃을 목격 하더라도, 지금 같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 이 글을 지켜보는 당신보다도 훨씬, 많이……. 내 가슴의 불, 그리고 나와 비슷한 불을 동시대에 태우고 있는 사람과의 교감을. wgreene@naver.com 거 참.. 올리기 미안해지는구려.. 간만에 올린다는게 너무 짧고 여러저러해서...(먼산..) 궁금해 하실까봐 미리 말씀드리지만, 내용에서와 같이 테레사의 말도 안되는 샤콘느는 신혜성을 위한 거였습니다. 너한테 깨달음을 주기 위해 내가 연주 망칠게-_- 이런 거였죠..^^ 또 처음부터 나왔던 룸펜은 혜성이와 같은 입장(밑바돡)을 자처하게 되는 테레사를 의미하고자 한 복선.. ...이지만 이건 그냥 나 혼자만 인식하게 될 듯...^^ 예쁜 주말 보내세요... 댓글 감사합니다.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린스공녀- 내일은 비 (Classic)-미.. 덧글 4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18편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18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19편(운명의 교차) ▼ 다음글 - 2악장 17편(뮌헨의 민들레)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19편(운명의 교차)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5/28 18:40 http://blog.naver.com/wgreene/110004665695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528 19편 업데, 060526 18편 업데) Amadeus 음악 : cristofori's dream (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Cristofori's Drea.. “언제나 그랬지만 이별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거란다 수페리우스….” 2악장 19편 독일에서의 히스는 단 한 시도 혜성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는 테레사와 대면한 뒤 혜성이 잡생각을 하지 않도록 이끌어 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들은 거의 한 달가량을 체류하며 이것저것을 함께했다. 히스가 원하는 대로 마리엔 광장에서 대낮부터 맥주를 마셨었고, 저녁때는 근사하고 오래된 성을 차례대로 지났으며 가끔은 비서를 대동해서 리무진을 타고 하루 종일을 돌아다녔다. 리무진이 내키지 않는 날의 히스는 새벽부터 아이를 이끌고 중앙역을 찾았다. 번잡한 사이를 파고들어가며 평범한 사내처럼 옷을 차려 입은 히스는 혜성의 손을 꼭 쥐고 성큼 성큼 걸었다. 하물며 히스는 자신의 부러진 팔 때문에 정기적으로 병원에 갈 때 역시 혜성을 대동했다. 그는 한 시도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았다. 혜성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지 오래임으로 의심 없이 그의 의견에 따르기 일 수였다. 그 유명한 루브르가 독일에 있는 게 아니었냐는 혜성의 질문에 히스는 살며시 고개를 젓더니 하루 종일 미술관만 찾아다닌 날도 있었다. 히스의 일정에 맞추느라 혜성은 하루라도 피곤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는 무언가에 집착하는 것처럼 필요 이상으로 무리하고 있었지만 혜성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실컷 즐겼다. 참말이지 히스가 무엇을 준비하고 생각하는지 염두 할 틈조차 없었다. 하여, 가만히 있어도 흘러가는 시간을 알차게 보내는 것 뿐 이라고 여겼다. 그 파장이 어느 정도였냐면, 혜성은 늘 상 자신에게 유쾌하게 구는 히스에게서 약간의 어두움도 찾아 낼 수 없었다. 파장의 힘은 사람의 시선마저 갈취해 간다. 히스와 함께 지내는 내내 혜성은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해 단 한 시간도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나누지 않았음을 알지 못했다. 당장 눈앞에 있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리라. 사람은 때론 잔인하다. 그것은 착해서 그런 것 일 수도 있지만, 잔인한 것만큼은 사실이다. 망각의 샘에 수시로 빠지는데, 뒤늦게 샘 밖으로 걸어 나와서야 뼈저리게 깨닫고 후회하기 마련이다. 혜성은 누구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생각을 비운 상태- 라는 허울로 결국은 히스를 위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은 착하기 때문에 잔인한 것이다. 혜성이 히스와 함께 지내는 짧고도 긴 시간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체험은 바로, 아마데우스였다. 뮌헨 외곽에 위치한 아마데우스 홀에서 그닥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음악학교를 처음 보았을 때, 그 장엄함에 압도되어 한 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싸릿 눈이 내리지 않아도 한기가 느껴졌으며 물에 젖은 옷을 입은 것처럼 바람이 스칠 때마다 짜릿한 감각이 밀려왔었다. 뮌헨 아마데우스의 뒷부분을 주로 걸어 다녔던 그들은 간간이 히스를 알아보는 소수의 제복 입은 무리들과 마주쳤는데, 그들은 약속한 것처럼 히스에게 거수경례를 했었다. 머리를 비우고 생각 이란 작업을 하지 않는 혜성은 그 점을 묻지 않고 조용히 쳐다만 보았었다. 아이는 사람이 양 팔을 높이 쳐들은 것처럼 날카롭고 기다란 건물들이 더 시선에 잡혀서이기도 했다. 한국 아마데우스와 전체적인 건물 양식은 흡사했지만, 더 오래되고 기품 있는 것이 바로 독일의 아마데우스임을 혜성은 눈으로 확인하는 내내 깨달았다. 어떻게 보면 시설 면에서는 가장 나중에 생긴 한국 아마데우스가 우위 일지 모르지만, 오래 된 고해 실이나 벽에 귀를 붙이면 깊은 역사의 음성이 들릴 것처럼 감정을 풍부하게 하는 건물들은 한국에서는 따라잡을 수 없는 것들을 속속들이 자랑하고 있었다. 탐스럽게 피어난 민들레꽃이 성스러운 독일 아마데우스 둘레에 하얗게 이파리를 열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하얀 물감으로 나란히 채색한 것처럼 신비롭게 반짝이는 민들레의 향연! 굵직굵직한 건물들과, 일반인들이 쉴 수 있는 쉼터까지 친절하게 마련되어 있는 커다란 성지, 그것은 아마데우스였다. “오늘도 안 들어가게?” “응…….” “그래…….” 히스는 혜성에게 아마데우스를 구경시켜준 첫 날 부터 으리으리한 문을 활짝 열어주고 싶어 했다. 그러나 혜성은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것으로 족했기에 직접 안으로 들어가서 샅샅이 구경한 적은 없었다. 그것은 아이 내면이 정한 적정선 이었다. 한국의 아마데우스에 입학하기 위해 고생했던 지난날을 돌이켜 봤을 때, 히스를 대동하고 독일의 아마데우스를 마음껏 구경하는 것은 반칙을 하는 것 같아서였다. 그래. 그건 반칙이다. 테레사의 경우만 봐도 그는 혜성에게 아마데우스의 값을 아로 새겨주기 위해 무려 1년이나 자신을 갈고 닦으며 기다리게 하질 않았던가. 혜성은 그런 연유로 약 삼 주 가량 지난 현재까지도 함께 아마데우스 내부를 산책하자는 권유를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또 한 가지 이유를 덧붙이자면, 모든 격정이 시들해져서였다. 만약 테레사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이는 히스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독일의 아마데우스를 제 집처럼 드나들며 떠나지 않았을 테니… 호기심과 격정, 감정의 적정선과 현실에의 감각까지 독일에 온 첫 날 테레사와 마주침으로서 몽땅 사라졌다. 남은 것은, 이제 남은 것은……. “그런데 수페리우스….” “……?” “너는 테레사에 대해서는 그 때 이후로 단 한 마디 않는구나.” “…….” 아마데우스의 늘씬한 외벽을 감상하며 천천히 밖을 거닐던 히스가 자신을 앞서가던 혜성에게 기어이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그러나 혜성은 왜 이제 서야 이런 질문을 했냐는 듯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를….” “…….” 삼 주 내내 빼어난 풍광을 감상만 하던 혜성의 시선이 처음으로 측은하게 바뀌었다. 노오란 머리칼이 후두두 흩날린다. 혜성은 약간 슬프게 미소 짓더니 높다란 담벼락을 손바닥으로 스치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한 번 생각하고….” “.....?” 츄르르 츄르르 담벼락 안 쪽 어디선가 아마데우스 곳곳에 노니는 새들의 지저귐이 작게 들려왔다. 혜성의 속삭임이 그들에 섞이는 것처럼 아련해진다. 히스는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멍하니 혜성의 뒷모습과 테레사에 대한 아이의 대답을 경청했다. “두 번 말을 하면….” “…수페…리우스…?” “세 번째 라는 것은 없게 되거든….” “…?” “끊어질 수 없는 것을 몸에 감고, 마음에 끼우는 것은 아직 할 수 없어서 그래….” 어쩌면 마음먹기에 따라서 테레사는 수도 없이 만날 수 있었을 테다. 하지만 아이는 먼 길을 돌아서 간다. 히스에게 딱 한 번만 조른다면 그는 혜성의 말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기 마련이니 테레사를 업어서라도 데려 올 것이다. 혹은 테오제네스에게 칼을 들이밀며 협박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아이는 더 먼 길만 걷기로 한다. 그렇게 별 의미 없는 일주일이 더 지나면서 히스는 혜성을 여왕처럼 모시는 것도 모자라 작은 것에도 크게 놀랄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확실히 앞으로 닥칠 '무엇'을 아주 두려워 하고 있었지만 혜성에게는 들키지 않도록 항시 주의했다. 혜성은 히스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않은 채 정작 하고 싶은 말은 가까스로 참고 인내하고 있음을 진즉부터 눈치 채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묻지 않았고, 히스도 말을 하지 않았으며 둘은 그저 함께 지내기만 했다. 지켜보는 이가 숨이 막히도록……. “괜찮아?” “응…? 뭐가… 히스?” 한 번은 탁자에서 턱에 팔을 괴고 꾸벅꾸벅 졸던 혜성이 얼굴을 탁자에 떨어뜨렸었다. 멀리서 그것을 처음부터 지켜보던 히스가 창백해진 낯으로 후다닥 달려와서 제일 먼저 물어 본 게 저것이다. 괜찮아? 괜찮아? 오 하느님! 탁자에 그의 체중이 기울어지는 것 마저 염려스러워지다니. “…아니야.” “?” 히스는 편집증에 허덕이는 사람처럼 나날이 창백해져 갔다. 테레사와 만난 이후로 어떤 것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혜성이 히스의 변화를 알 리 만무하다. 둘의 아슬아슬한 상황은 급속도로 위태로워지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도록 마음의 문을 하나씩 태우며…… 아마데우스 홀을 찾아간 게 결국은 실수였을까? 그렇지 않다. 적어도 혜성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테레사를 통하여 자신이 추락한 '현재'를 깨달은 혜성에게는 나쁠 게 없는 경험이었다. 하지만 히스는? 히스는? “졸리면… 들어가서 자자. 내가 안아주고 싶지만 팔이 이러니….” “…그래.” “수페리우스….” “……?” “아니다. 아니야….” “…….” ……히스는? 어떤 목적이 있어서 나를 독일로 데려온 것처럼 보였던 히스는? 테레사와 만난 첫 날 이후로 뭐든지 시큰둥하게 굴지만 이런 나에게 줄곧 맞춰주고 전혀 자기 의견을 말해 주지 않고 부드럽기만 한 그는? 7월의 첫 째 날이 되자, 히스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던 최종 관문을 통과하기로 한다. 빼어난 풍광이 펼쳐진 성지 둘레에서 둘은 여느 때처럼 샌드위치를 싸 들고 나들이를 나왔다. 녹읍은 산허리부터 찬란한 태를 자랑했고 오랜 성벽은 틈이 많이 벌어져서 긴 역사를 쉬어 가고 있었다. 찌르레기가 날개를 퍼덕였으며 모처럼 환한 날씨가 광장에서부터 외곽까지 산산이 빛을 쬐어주었다. 이미 혜성과 히스가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은 맑은 날을 맞이하여 밖을 쏘다닌다. 초록 들풀이 넓은 초원의 형태를 이룬 지대에서 자리를 잡은 둘의 주변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한산한 주변으로는 가끔씩 관광객들이 돌아다녔고 내리쬐는 태양의 힘이 세어지는 오후 무렵이면 히스의 품에 파고들어가서 낮잠을 잤다. 한 달을 아무 생각 없이, 그야말로 그들 자신도 모르게 단 둘이 되어 지냈던 시간이 끝부분에 도착했다. 팔랑거리는 나비가 꽃을 찾아 헤매는 모양을 반쯤 뜬 눈으로 구경하던 혜성이 길게 하품을 하며 속삭였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다…. 룸펜에….” “…….” “그렇지… 히스?” “…….” “한 달 정도 오기로 했던 건데 시간이 참 빠르구나….” “…….” “……!” 한 달! 한 달? 혜성의 흐리멍텅한 눈이 별안간 크게 뜨인다. 바쁘게 돌아다니고, 테레사와의 신기루 같은 만남을 한국에 돌아가는 날까지 잊기 위해 히스의 일정에 따랐었던 지난 한 달이 쉭 스쳐 지나서였다. 혜성의 표정변화를 알 리 없는 히스는 자신의 다리를 베고 누워있는 혜성의 머리카락을 소중하게 쓸어주며 대답 없이 먼 곳을 응시한다. “히스!” “…….” 그의 어머니가 이제 서야 생각났다! 자신과 늘 상 함께 있어주던 히스의 웃음 덕분에 잊었던 중요한 것이 그를 위한 부분이 생각난 것이다! 아이의 가슴이 요동친다. 혜성은 경악하며 벌떡 몸을 앉았다. 엷은 미소를 띠던 히스가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너무 느려서 보는 이가 답답해 할 정도로 녹색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돌린다. “어… 어머니 무덤에는 갔다 왔었던 거지? 응? 그렇지?” “…….” “히스… 히스! 괜찮아? 바보야! 나한테 맞추기만 하면 어뜩해! 테레사? 그건 내 일인데 무슨 상관이야! 너… 너 정말 무덤에는 다녀왔지? 히스, 그렇지?” “…….” 히스의 아름다운 녹색의 세상은 더 할 나위 없이 상냥하게 웃어준다. 혜성은 속이 타서 죽을 것처럼 괴로운데, 히스는 모처럼 자신을 생각해주는 아이가 많이 고마운 모양이었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 “히스! 히스! 내가… 내가, 네가 소개해주는 너의 아마데우스에 들어가지 않았던 게 걸려서 계속 내 옆에 있었던 거야? 히스!” “…….” 늘씬하고 탄탄한 다리를 잔디바닥에 쭉 뻗어 앉은 히스의 위에 올라 탄 혜성이 그의 멱살을 쥐고 거칠게 물었다. 그럴수록 히스는 옅게 미소 지으며 혜성의 모습을 자신의 눈동자에 담기 바쁘다. 이상하다. 한 달 내내 뮌헨 관광을 하며 이런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었는데… 그가 우울증에 걸렸던 적이 있긴 했어도… 그래, 다른 때와 다르게 굴었던 날이 있긴 했었는데 그게 언제였냐면……. “히스… 왜 그래… 기분이 안 좋은 거니…? 오늘 너… 지금… 너… 히스… 히스… 나한테 화가 난 거니……?” “…….” 쑤우우우- 바람에 밀린 거대한 나무들이 초원 곳곳에서 몸부림을 친다. 혜성의 질문에 아주 행복하게 입 꼬리를 올리지만 슬픈 표정만큼은 어쩌지 못 하는 히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히스… 히스… 응…? 응…?” “…수페리우스… 혹시 알고 있니… 아… 모르겠구나…….” 그래, 그 때 였다. 그 날 이었다. 한 달 전, 독일에 처음 왔을 때. 테레사에게 혜성을 데려 간 날, 히스는 평소와 달랐었다. 하지만 그건 잠깐 이었는데… 지금에 오기까지 한 달이 더 지났지만 히스는 한국에서와 별 반 다를 것이 없지 않았던가! “히스으… 히스으… 왜 그래… 왜 그래….” “…한국의 아마데우스는 네가 자퇴한 이후로 가십동이 폐쇄 되었단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 야아… 히스… 나한테 화가 난 거니? 응…? 히스….” “…….” 어쩌면 하루, 혹은 이 주일, 빠르면 몇 시간 전에 깨달았으면 참 좋을 발견이 있다. 혜성은 너무 늦게 히스를 염려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 갑자기 모든 것이 급속도로 빨라졌다. 혜성은 당장이라도 그가 어디론가 사라질 것처럼 두려워졌다. 만약 혜성의 예상이 맞는다면, 히스는 지난번에 아마데우스 홀에 찾아간 것 못지않은 시련을 준비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히스으….” “…….” 그의 넓은 가슴에 안기는 것 보다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서, 아이는 그의 목에 양 팔을 두르고 꽉 껴안았다. 작은 몸이 느닷없이 불안한 표정으로 달려들자 얌전히 웃기만 하던 히스의 내려진 팔이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그러더니 강하게 자신의 머리를 감싼 혜성의 등을 튼튼한 한 손으로 꼬옥 감싸 주었다. “히스… 히스….” “…….”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사람에게는 직감 이라는 게 있어서 혜성은 오늘, 지금 이 순간의 히스가 걱정 되서 미칠 것 만 같았다. 깨달은 것 또 한 가지. 한 달 전, 테레사와 만난 다음부터 히스는 혜성에게 섹스를 하자는 말도, 키스를 하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뺨에 키스를 한 적 조차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혜성의 손을 잡아주는 게 전부였다. 그 점을 깨닫자 덜컥 놀란 혜성이 미안한 마음을 담아 히스의 푸른 머리카락에 입술을 눌러 주었다. 아이의 입술이 수차례 머리칼을 오가자 히스는 참았던 신음을 터뜨리며 괴로운 듯 말을 꺼냈다. 무려 한 달이나 참았던 최후의 결심을 꺼내는 게 틀림없었다. “히스… 히스… 내가 많이 신경 못 써줘서 미…….” “…돌아가…. 나의 수페리우스….” 하느님… 전혀 예상치 못 한 것이 열렸을 때 사람은 사람일 수 없어진다. “……응…?” “루가 거의 올 때가 되었는데….” “그게 무슨 소리니… 히스… 갑자기 너는….” “…사랑스러운 내 사람… 나의 수페리우스… 너는 오늘 한국에 돌아가는 거다….” “……!” “…나는 네가 여기까지 와 준 것 만으로도 눈물 나게 행복하단다….” “!”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의 한국인 비서 루가 도착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며 살며시 웃는 히스는 저 쪽 산허리를 물들이기 시작하는 노을보다 붉고 뜨거웠다. 그러나 차갑기도 하다. 혜성은 급작스러운 통보에 정신이 없다. “히스… 히스… 왜… 왜… 왜?” “…사랑해…….” “히스!” 그의 목에 두른 손의 힘이 세어진다. 울고 있는 거야? 히스, 너는 지금 울고 있는 거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너와 아무 생각 없이 한달 내내 관광 따위를 해서, 그렇게 너를 전혀 신경 써 주지 않아서 복수라도 하는 거니? 한국으로 돌아가라니? 지금 당장? 파르르 떨리는 혜성의 몸 전체를 어떻게든 진정시켜주고 싶다는 듯, 독일의 청년은 강하고도 부드럽게 속삭였다. “너를 좋아해.” “히스!” “사랑스러운 내 사람….” “왜그래, 히스 히스!” 그의 손에 잡힌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팠지만 혜성은 소리쳤다. 당장 히스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가 흘리고 있는 눈물과 함께 흘러내리는 스스로의 절망 역시 알았다. 히스는 혜성의 허리에 둘렀던 손을 들어서 여기저기를 매만져 주었다. 풀잎이 붙어있는 머리칼을 정돈해 주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작은 육체에 힘을 주기 위해 희미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정다운 이별조차도 사람에게는 슬픔과 파장을 일으키지….” “히스… 히스… 내가 잘못 했어 히스…. 네가 잘 해 줘서 내가 미쳤었나봐….” “…그렇지 않아….” “히스… 제발….” 히스의 눈물은 아주 천천히 그의 멋진 뺨을 적시고 있었다. 잔인한 그의 눈물이 혜성의 가슴을 찔렀다. 피가 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장 육부는 괴로움에 비명을 지른다. 미안해, 미안해 히스. 네가 독일에 온 이유는 나에게 맞춰주기 위함이 아니었을 텐데……. 갑자기 너무 많은 것들이 생각나서 혜성은 괴로웠다. 그의 비서가 지난번에 말해줬듯이 세상은 히스를 테레사 못지않게 추락했다고 그의 긴 부재를 빗대어 비아냥거렸다고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며, 그는 팔 한 쪽이 부러졌다. 그의 아름다웠던 블론드 역시 혜성이 제 멋대로 구는 바람에 푸르게 채색되었으며, 멋쟁이 청년이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혜성은 전혀 흔들림이 없어서 상처만 주었다. 그래. 상처만 주었다. 지금 이 순간 까지도… 히스, 히스, 히스! 혜성이 무어라 더 말을 꺼내려던 때, 히스는 더 빨리 아이의 뒷머리를 당겨 와서 예쁜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한 달 만의 입맞춤이었다. 지금 허리를 둘러 준 것 역시 한 달 만의 스킨십이다. 혜성은 그것조차 이제 서야 알았다. 히스, 히스, 히스! “언제나….” “히스….” “언제나 그랬지만 이별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거란다 수페리우스….” 히스! 아이의 내면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어… 어머니 일 때문에?” “…….” “어머니 일은 테레사를 만난 다음부터 솔직히 내가 잊었었어. 신경 써 주지 못 해서 정말 미안해 히스… 그러지 마… 그러지 마….”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만남은 천천히, 헤어짐은 종이를 오려내듯 거칠고도 짧게. 그가 없는 룸펜과, 그가 없는 생활? 혜성은 지금 당장 자신을 보내려는 히스가 야속한 것 보다 그가 이해되는 현재가 더 할 나위 없이 고통스러웠다. 그는 한 달 동안 오늘을 준비했던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관광 따위를 하고 마음을 비웠던 혜성에 반해 히스는 헤어지는 오늘을 위해 자신의 어머니조차 포기하고 혜성과 함께 했으리라. 오 주여. “히스… 룸펜에 나 혼자 어떻게 돌아가. 싫어… 싫어.” “…….” “너 없으면 누가 나를 지켜줘? 싫어… 싫어… 싫어… 같이 가자… 싫어….” “……네가 결국 돌아가는 곳은 룸펜이 아니라는 걸 너도 잘 알 텐데…?” “!” 테레사를 만나게 해 준 것을 시작으로 히스는 때가 되었음을 느낀 것이다. 그는 그래서 독일에 가는 것을 좋아 하면서도 싫어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혜성은 이제 서야 다 알 것 같은 히스의 정성에 그동안 눈이 멀고 귀가 멀었던 스스로가 미안해서 숨이 막혔다. 한 달 전, 아마데우스 홀에서 있었던 테레사의 슬픔뿐인 샤콘느가 끊임없이 메아리쳤다. “사랑해… 수페리우스. 알아줘… 너 보다 아름다운 건 이 세상에 없어.” “그런 말 하지 말고… 히스… 나도 여기 있을게. 내가 여기 있을게 히스! 내가 너를 따라다니고 내가 너만 계속 생각해 줄게! 싫어… 싫어….” 정다운 나의 벗이여, 너는 사랑을 주고 이별이라는 단도마저 스스로에게 찌른다. “한국에 먼저 돌아가 있어… 너에게 펼쳐진 세월 속에 나는 다시 나타날 거야 머지않아….” “너무 갑작스럽잖아.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어… 흐… 흐… 흐으으이….” “…….” “흐이 흐이이이….” 아니라고 부인해도, 결국 나로 인해 인연의 피는 검붉어진다. 아파한다. 아프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네가 보고 싶어서 숨도 쉴 수 없을 때가 돌아서는 순간 닥칠 테니….” “흐으으으….” “울지 마.” “…흐으으….” 네가 울지 말라고 해도 계속 울겠다며 끊임없이 억센 눈물을 떨어뜨리는 혜성의 뺨이 촉촉해진다. 히스는 상냥하게 웃어주면서도 눈물을 닦아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는 게 더 예쁘니까 지금 내 앞에서만 울고 내일부터는 어디서도, 딴 사람 앞이든 무슨 일이든지 울지 마. 알았지 마드모아젤?” “시… 시끄러… 흐이이….” “하하하하.” 멀리서 혜성의 짐을 모두 챙겨 온 루가 도착했는지 자동차 클랙션 소리가 들려온다. 독일의 시작은 히스였다. 그 강렬한 일정은 그러나, 첫 날 마주친 테레사로 인해 첫 날로서 끝이 났음을……. 운명의 交叉 혜성은 실로 오랜만에 룸펜 밖으로 나왔다. 벽시계는 밤 열 시 삼십분을 가리키고 있었으며, 한스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혜성에게 반가운 인사를 던졌다. 혜성은 웃는 듯 우는 듯 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에게 재미있게 놀라는 말을 남기고 유유히 사라졌다. “…….” 독일에서 돌아온 뒤 한 달이 넘는 시간동안 혜성은 그야말로 시체처럼 다락방에 박혀서 아무 것도 취하지 않고 지냈었다. 독일인을 피해 지내는 안네가 되어 룸펜의 다락 그림자에서만 숨어 지냈다. 무언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흠칫 흠칫 놀랐으며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멍하니 앉아서 히스가 사용했던 작은 의자를 불같이 노려보기만 했다. ‘너… 등선이 참 예쁘다.’ 그는 제 멋대로 혜성의 일상에 끼어들었었다. 여윈 등을 의자에 앉아 내려 보며 기가 막힌 말을 했었고, 마음을 열어 주었었다. 그가 그토록 고대하던 뮌헨의 민들레가 테레사 인 줄 알았다면-비록 첫 번째 민들레였으며 그 다음은 혜성이 생각을 거부하였으나- 혜성은 절대로 독일에 가겠다고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비서의 안내에 따라 독일을 벗어나 한국에 도착하면서까지 혜성은 금방이라도 히스가 따라 올 것만 같아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었다. 기내에서도, 공항에서 차를 갈아 타면서도 몇 번이나 그의 흔적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히스는 드넓은 초원에서 갑자기 이별통보를 했던 것처럼 쌀쌀맞게도 쫒아오지 않았다. 덩그러니 남은 현실만이 혜성을 와락 껴안을 뿐이었다. 이태원은 혜성이 없는 사이에도 여전했으나, 히스가 없는 이태원이며 룸펜은 이제 아이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조용히 다락방에서 8월이 되기까지 묵묵히 지내던 혜성은, 갑자기 찾아온 야밤에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히스는 혹시, 자신이 없어서야 내가 이태원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걸까. 오, 그게 정답일 것이다. 그리고 테레사와 내가 만난다면 극심한 자극을 받는다는 것 까지도…? “……택시!” 8월의 입사귀가 창창한 아름다움을 뽐낼 무렵, 혜성은 번쩍 손을 들고 택시에 올랐다. 독일의 민들레, 테레사의 샤콘느, 만남, 허황된 한 달 이라는 시간, 갑작스러운 이별. 그것들은 모두 타국에서 겪은 전부였고, 한국에 돌아와서 예전처럼 나태한 밑바닥 생활을 더 이상 영위 할 수 없게 했다. 혜성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택시의 뒷자리에 목을 기댄 채 뺨을 적시는 눈물을 내버려 두었다. 온 몸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뜨겁고 아파서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이젠 정말로 혼자였다. 이젠 정말로 밑바닥이 아니었다. 히스는 자신에게 ‘빈 공간’이 무엇인지 알게 했으며, 테레사라는 '자극'을 주었고, 다른 공간의 '아마데우스'를 시야로 확인하게 하는 것으로, 또 비행기를 타는 것으로서 밑바닥의 뿌리마저 뽑아 주었기 때문이다. “…….” 한 시간이 넘게 이동하던 택시가 도착한 곳은, 1년 만에 다시 보는 고귀한 장소였다. 택시 기사는 새벽 0시를 가리키는 시계와 혜성을 조용히 쳐다보더니 유유히 사라졌다. 아이는 한 걸음 내딛었다. 그동안 지냈던 모든 시간들이 거짓말 같았다. 사실이 아닌 꿈의 이야기, 혹은 그리스 신화처럼 뿌옇게 멀어져 간다. 새벽이 뜨거워진다. 눈을 감자 깊은 그리움의 향기가 물씬 코를 자극하였다. 8월의 문은 향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것은 눈을 뜨는 동시에 강렬한 색채를 자랑하며 사람을 희롱할 것처럼 탐스럽기만 했다. 혜성은 아무도 없는 텅 빈 공간 앞의 근엄하고도 화려한 장미 문을 천천히 손바닥으로 쓸어 보았다. 전율이 일었다. 살며시 눈을 뜨고 고개를 돌리니 자신의 등 뒤로 숨을 쉬는 아마데우스 성당이 뚫어져라 눈을 마주쳐 왔다. 온 몸에 비늘이 덮인 것처럼 탄탄한 기류가 느껴졌다. “…아마데우스….” 혜성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아이가 새벽녘 느닷없이 도착한 곳은 바로, 아마데우스였다. 히스와 헤어져서 한국에 돌아온 뒤 한 달 동안 안네 프랑크가 되어서 룸펜에서 지냈고, 강렬한 자석의 힘에 빨려 들어가듯이 불현듯 찾아 온 이 곳, 아마데우스 였다. 참으로 오랜 만의 수페리우스를 환영한다는 듯이, 꺾어진 나뭇가지들은 팔을 내리며 몸을 흔들었다. 파르르르 떨리는 그들의 동작과 함께 상당한 이파리들이 춤을 추듯 달빛을 받으며 휘날렸다. 초록의 싱그러움이 장미 문을 공기만으로도 감아올린다.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시계탑은 새벽 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열려 있어… 아주 많이…. 숨을 쉬고 있어….” 혜성은 반드시 잠겨 있어야 마땅할 아마데우스 장미 문이 십 여 명의 사람은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열려 있다는 점이 수상했지만, 그런들 무슨 상관이랴 싶어서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주 잠깐, 지금이라도 룸펜에 돌아가서 독일에 가기 전처럼 생활하며 세월을 보낼까- 싶었지만, 그건 헛된 망상이자 이미 끝난 시간을 되풀이하는 것 이상이 될 수 없음을 알았다. 거의 한 시간 가까이를 활짝 열린 장미 문 앞에서 미동 없이 서 있었다. 흐느끼듯 흘렀던 이마의 땀은 모두 식었으며, 혜성의 손에 살짝 잡혀있는 가벼운 가방조차 흔들림이 없었다. ‘…한국의 아마데우스는 네가 자퇴한 이후로 가십동이 폐쇄 되었단다…….’ 독일의 마지막 날, 히스가 슬프게 말 해 주었던 음성이 칼처럼 꽂힌다. 혜성은 그제 서야 그가 왜 그런 말을 해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어차피 자신은 어떻게든 이곳에 홀로 돌아올 것임을 그는 알았기 때문이다. 혜성의 입가에 가벼운 통증 같은 숨이 빠져나간다. ‘돌아가… 수페리우스…….’ 아마데우스로 돌아가는 거야. 수페리우스. 너는 돌아갈 곳이 정해져 있단다. ‘모르는 사람이다.’ 테레사의 날카로운 지적이 창이 되어 날아왔다. 혜성은 장미 문을 세게 쥐고 허공을 노려보았다. 붉어진 눈매 곳곳에 열이 오른다. ‘선생님은 학교에 돌아가실 건 가요…….’ 샤우트의 유리가 혜성이 지난 날 멋지게 열창한 솔로를 회상하는 장면이 스쳤다. 뭉클 달아오르는 무언가가 혜성의 발끝을 조금씩 자극한다. ‘두 번 다시 낙오자의 모임 따위 생기지 않게…….’ 희미한 미소와 함께 눈을 감으며 등을 돌린 민우의 흔적이 바람처럼 나부낀다. 혜성은 열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는 현재, 늘씬한 철창을 쥐고 뒤흔들었다. 캉- 카캉- 아무도 없이, 오직 다가올 하프의 선율 앞에서 혜성의 뺨이 젖어 들어간다. 가슴이 터질 것 만 같다. 바로 그 때, 멀리서부터 작은 빛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음이 보였다. 활짝 열린 장미 문을 쥐고 있는 혜성의 옆으로 헤드라이트를 켠 근사한 승용차 한 대가 쑤욱 빠져나갔다. “……?” 슬쩍 혜성과 지나친 그 차의 운전석을 보아하니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승용차 뒷자리에는 웬 남자가 길게 몸을 누운 상태였다. 별 의미 없이 아마데우스를 빠져나가는 차의 뒤꽁무니를 보며 혜성은 일그러진 표정을 천천히 완화시켰다. 이 시간에 나가는 차도 있구나……. 승용차는 아마데우스를 지휘하듯이 섬세하고도 날카로운 몸놀림으로 곳곳을 지나쳤다. 길의 끝 부분에서 열린 장미문 밖으로 사람이 보인다고 비서가 말을 했다. “…….” 하지만 대답이 없는 테레사 때문에, 비서는 조용히 장미 문을 빠져나가기로 한다. 아마데우스에서 멀어지기로 한다. 로제리오 교수에게 너무 긴 설명을 장황하게 한 건 아닐까. 테레사는 방금 전을 돌이켜 보았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오랜 만에 입은 아마데우스 예식 복이 땀에 젖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1년이 사라질 수 있게 까만 시야가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비서에게 출발하라 이르며, 테레사는 승용차 뒤 자리에서 아예 드러누웠다. 피식 피식 웃음이 세어 나온다. 새벽이 진해질 때 테레사는 선글라스를 귀찮다는 듯 빼서 바닥에 버린 뒤, 조용히 속삭였다. “나타나라… 신혜성. 움직여라… 수페… …리우스.” 부웅- 테레사가 누워있는 근사한 승용차가 막 열려있는 장미 문을 빠져나간다. 차의 뒤꽁무니를 응시하는 새벽녘의 누군가의 시선을 몽땅 받으며……. 웬 낯선 차가 빠져나간 뒤에도 활짝 열려있는 장미 문 앞에서 혜성은 무엇을 먼저 해야 좋을지 몰랐기에 멍청하게 서 있기만 했다. 그러나 등 뒤로 동이 터오는 것을 감각 모두가 천천히 느끼지를 않던가. 오래 전, 테레사가 야기해 준 하프의 선율이 세상을 덮고 있다. 세상을 지휘하며, 세상을 이끌고 있다. 오… 이토록 아름다운 새벽이, 내가 서 있는 장미 문, 그리고 아마데우스에게도. “…돌아왔어…. 이렇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거야… 알면서도 그렇게 했었어…. 그런데….” 혜성은 장미 문 앞에서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눈가에 맺힌 붉은 눈물은 보이기 싫었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열린 철창을 다시 한 번 손으로 꽉 쥐었다. 그 어느 때보다 숭고한 의식이 진행되는 신비로운 기분에 휩쓸린다. 등 뒤로 아찔하게 지켜보고 있는 아마데우스 성당 때문인지, 아이의 마음이 조급해지고 무거워지며 또 가볍고 경쾌하다. 무엇도 될 수 없는 기분이다. “돌아오는 데 1년이 걸렸어….” 비잉 반원을 그린 하프의 선율이 어깨에 닿았다. 1년 전 떠날 때 히스와 보았던 그 선율이다. 바로 그 하프였다. 툭- 혜성의 눈물이 성스러운 아마데우스 땅에 떨어진다. “그러니 이제 나는… 나는….” ‘나는 수페리우스가 아니야’ 라며 타인을 적대시 했던 그 날로부터 벌써 1년이 지난 것이다. 그토록 허무하고도 짧지만, 어찌 보면 숨이 막히도록 길었던. 결국 걸음은 나를 다시 이곳으로 인도한 것이다. “수페리우스는….” 차찰- 장미문 곳곳에 혜성이 흔드는 힘이 일어난다. 영혼과 영혼이 1년 전과 맞부닥쳐 파장을 일으킨다. 혁명의 밤이 스친다. 지상 최대로 공포를 주었던 그것들이 어쩐지 무감각하게 재생되어간다. 아무렇지 않은 스스로가 두려워 질 정도로…. “이 몸이 죽기 전까지는, 절대로.” 혜성의 고개가 천천히 올라간다. 갑갑했던 가슴이 조금씩 완화되고 있었다. “…절대로… 아마데우스를 벗어나지 않을 것을, 맹세… 한다.” 쏴아아- 멀리서 분수대의 물소리가 작게, 너무 작아서 숨을 쉬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먼 이 곳 까지 들려왔다. “내 안의 신과… 나를 지켜보는 공기… 저 태양… 테레사의 이름을 두고….” 혜성의 입 꼬리가 분수대의 박자에 맞춰 조금 씩 조금씩 올라간다. 아이는 너그러운 성자처럼 딱 한 번 자상하게 웃더니, 어쩐지 황폐해져 보이는 아마데우스의 분위기를 강렬하게 쏘아보며 끝 점을 찍기로 한다. “…절대 불멸의 의지를 선언… 한다.” 무엇을 겪었는지 나는 아직 몰라. 나태했던 시기였을지도 모르며 알찬 배움의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시간이 많이 지난 다음에도 해결이 안 될 것 같아. 그래도 나는 그래야만 했다는 것을 잘 알아. 어느덧 발걸음이 가벼워진 수페리우스는, 새벽의 인쇄 동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결심이 사라지기 전에 로제리오 교수를 만나야겠다는 것을 여러 번 상기시키며…. 하프의 선율이, 음성으로 변해가고 있다. 밑바닥은 모두 사라졌다. 사람에게 예고 없이 찾아오는 이별처럼. wgreene@naver.com 2악장 0 혹은 -1편을 기억하십니까. 테레사가 수페리우스의 자퇴를 철회해 달라며 로제리오 교수를 찾아왔었지요. 바로 그 때가, 당신이 보는 지금입니다. 이처럼 수페리우스는 수페리우스대로 학교에 왔던 거지요. 테레사의 부탁이 있던 바로 그 때. 지금 이 순간. 그들은 서로를 교차해 갔습니다. 바로, 장미 문에서요...^^ 수페리우스는, 테레사의 샤콘느 덕분에 추락하기 직전인 스스로의 현실을 깨달았으며, 히스의 부재 덕분에 아무것도 없이 아마데우스 뿐인 현실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지금이요. (...이렇게 설명을 또 적지 않으면 물어보실까봐...) 활기찬 한 주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wgreene 화이트그린 0528 2악장 19편 올림- 덧글 7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19편(운명의 교차)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19편(운명의 교차)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20편 ▼ 다음글 - 2악장 18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20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5/31 15:50 http://blog.naver.com/wgreene/110004756403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531 20편 업데) Amadeus 음악 : 조시 그로반 - oceano (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Oceano-Josh Groban 나는 가십이다. 2악장 20편(짧습니다) “아무도 없나? 아무도 없어? 이것 봐!” 탕! 탕탕! 두터운 목재 도어를 양 주먹으로 쳐 봤지만 소용없었다. 혜성은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사나운 말씨와 그의 몰상식한 행동과는 달리 입가에는 미소가 만연하다. 새벽이 끝날 무렵, 혜성은 막 도착한 테오제네스의 폐쇄된 인쇄 동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쳤고 몸으로 문을 두드렸다. “하하… 이럴 줄 알았지. 뭐… 기대를 안 했으니 실망할 것도 없다.” 소년은 늘씬한 팔을 제 몸에 가져온 뒤 사납게 두드렸던 방금 전이 미안했는지 목재 도어를 부드럽게 응시했다. 그 순간 혜성의 등에 그 만이 느낄 수 있는 가벼운 날개가 달렸다. 그는 인쇄 동에 오기 전 한 시간가량 아마데우스 곳곳을 거닐었고,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그 누구보다 아마데우스를 사랑했기 때문에, 영혼을 다 바쳐 사랑했던 자 만이 느낄 수 있는 변화가 소름 끼치도록 밀려왔다. 정혁이와 몇 번이나 추억을 그렸던 연못이라든가 다리 위를 건널 때도 그 감정의 변화는 정확한 그래프를 혜성에게 전했다. 오르페우스관은 출 입구부터 닫혀 있었다. 아무 소리도 없이 정적 투성 이었으며 새벽을 좋아했던 아이들이 거닐었음직한 두 갈래의 숲길조차 발자국이 없었다. 새벽안개가 희미하게 끼어 있는 사이를 뚫고 혜성은 곳곳의 벽에 손바닥을 붙이며 걸었다. 살아있는 자는 오직 저 자신뿐인 희귀한 곳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테레사가 아마데우스 공사 때부터 섬세하게 설계했다는 휴게실조차도 자물쇠로 닫혀져 있었으며, 근사한 벽화로 치장되었던 학생 식당 역시 지나치게 깔끔한 인테리어로 탈바꿈됐다. 혜성은 걷는 도중 몇 번이나 미간을 찌푸려야 했다. 그가 가장 큰 변화를 느낀 장소는 바로 분수대 옆의 게시 대였다. 모든 정보의 소식통이나 다름없었던 넓은 게시 대는 텅 비어서 존재 가치를 바닥에 떨어뜨린 상태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오고 가던 크고 작은 가십 들이 있어야 할 공간에는 사람의 입김이 스친 흔적조차 없었다. 수페리우스의 걸음이 빨라진다. 단 한 시간 동안 그가 느꼈던 본능에의 감각이 가만히 있지 말라며 스스로를 재촉였었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적도록 하지.” 아마데우스의 아름다운 오솔길을 지나 가장자리에 위치한 슬픈 인쇄 동에서 등을 돌린 혜성이 공기 중에 입맞춤을 하며 아주 부드러운 투를 흘렸다. 만 물이 솟아나듯이 바람을 일으키며 수페리우스의 다정한 인사를 몇 번이나 확인한다. 믿을 수 없는 그의 출현을 자연은 알아주는 것이다. 오, 해가 솟는다. 혜성의 걸음이 더욱 빨라지려던 찰나 그는 한 번 더 뒤를 돌아보더니 꽁꽁 닫혀있는 인쇄동의 두툼한 도어를 향해 작은 입술을 열었다. “내가 적으면 돼.” 푸르른 잎사귀에 맺힌 이슬이 낙하할 때 수페리우스는 씨 익 웃으며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 넣고 유유히 사라져간다. “나의 가십을.” 그는 자신이 일 년 전 무너져야 했던 가장 큰 고통의 덩어리와 정 면으로 마주치는 것으로 아마데우스의 생활을 다시 시작하려는 것이다. 수페리우스의 창백했던 볼이 아마데우스의 태양을 듬뿍 흡수하며 차차 밝아진다. 그의 눈이 더 할 나위 없이 빛나기 시작했다. 이게 잘 하는 짓인지는 나도 몰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밖에 모른다. 그래서 나는 움직이는 것이다. 나는 틀려도 일단 부딪히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이게 만약 병 이라면 영원히 고치지 않을 계획이니까. 게다가 시련으로부터 도망쳤던 1년의 휴가이자 나태기는 완전히 끝나 버렸다. 밖의 세상에서조차 폭력과 사랑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아마데우스의 오전은 이른 여섯시부터 시작된다. 오후 늦게나마 레슨이며 수업이 있는 학생들 까지도 로제리오가 정한 규칙에 따르기 마련인데, 저마다 길게 하품을 하며 일률적으로 행진하듯이 곳곳을 걸어 다닌다. 그들은 정해진 레슨 시간 이란 것이 몸에 배었는지 규칙적으로 움직였으며 표정 없이 자신들이 가야 할 장소를 찾아다녔다. 아마데우스가 일반 음악학교와 차이점을 둔 것 중 가장 큰 점이었던 획일화된 레슨의 파계조차 다른 학교들과 엇비슷해졌던 탓이다. 그들은 아름다운 분수대를 지나쳤지만 예전처럼 게시 대 앞으로 누가 먼저 뛰어 가나에 열을 올리지 않았다. 딱딱하게 디자인 된 하정 복 역시 그들의 오만한 콧대가 높아지게 도와 줄 뿐 하등 가치가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이라고 해서 어제와 달리 새로운 무언가가 생길 리 만무하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열 개 가량의 행사가 있었다면, 올 해에는 일반인을 위한 콩 쿨을 제외하고는 단 하나의 행사도 없었다. 로제리오 교수는 신입생 환영회조차 없앴으니까. 어쨌든 그들은 무언가에 쫒기 듯이 분수대 앞을 지나쳤다. 멀리 떨어져 있는 게시 대 앞에는 개미 한 마리도 지나다니지 않는다. 그 때였다. 관찰력이 남다른 3학년 녀석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게시 대에 부착되어 팔랑대는 커다란 종이를 발견한 것이다. 3학년 녀석은 당장 그 쪽으로 뛰어갔으며, 그와 친한 두 세 명이 그를 따랐다. 그들 3학년 신입생들은 아마데우스에 입학한 이래 단 한 번도 게시 대에 뭐가 부착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새로운 소식이 있다 한 들 교수님들이나 수녀님들이 과할 정도로 설명해 줬었던 탓이다. 게시 대가 평소랑 다르다! 1년 내내 이런 적이 없었는데? 3학년 신입생의 놀라워하는 표정이 게시 대 앞에서 길어질수록, 이제 그 곳에는 점점 사람의 숫자가 불어간다. 오전 여섯시 삼십분이면 기상해야 하는 4학년들과, 10분 간격으로 시간에 맞춰 기숙사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다른 선배들 역시 학생들이 응집한 곳에 모여들기 시작해서였다. “수페리우스!” 양 팔을 좍 벌린 간격보다 넓은 종이가 게시 대를 삼키듯이 펄럭이는 가운에, 4학년 누군가가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아침 인사도 없이 모였던 그들인지라 소리치는 족족 갈라진 음성이 마구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들은 충격 때문인지 자신들의 굵직굵직한 음성이 듣는 이가 괴로울 정도로 퍼부어지는 것을 몰랐다. 쉭- 바람이 크게 불어올 때 굵은 종이가 힘차게 펄럭이자 그들은 흠칫 놀라서 가장자리를 붙들었다. 하마터면 이 놀라운 종이가 게시 대가 아닌 다른 곳으로 허망하게 날아갈 뻔 했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다!” 푸드드드- 조용한 아침을 기대하고 날아왔던 새들이 사람의 환호성에 놀라 한꺼번에 창공으로 솟는다. 이번에는 5학년 키가 작은 소녀가 손을 길게 뻗고 자신의 친구에게 거듭 소리쳤다. 그들은 하나 둘 흥분하고 있었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다! 정말이다! 늘 규칙적으로 시간에 맞춰 지냈던 학생들은 온데간데없이, 오늘 아침의 게시 대와 분수대 부근은 터질 것처럼 발길이 분주하다. 침묵으로 일관했던 학생들의 소리가 높아갈 때 쯤, 멀리서 누군가가 달려왔다. 그는 잠에서 깬 지 얼마 안 된 게 틀림없는지 머리가 까치집이었지만 열심히 게시 대 인파를 헤쳤다. 게시 대 인파를 헤치다니! 이 짓마저도 거의 1년 만의 행위가 아닌가! 막 달려온 그는 여기저기서 ‘수페리우스다!’ 라고 소리치는 통에 정신이 없었으나 겨우 겨우 소매 단추 따위를 의무적으로 다듬으며 굵직한 글자들을 읽기 시작한다. “……!” 사람이 직접 쓴 글자가 틀림없는지 여기 저기 열정의 힘이 배어있다. 저것은, 저것은…! 까치집이 된 머리를 함께 달려온 선호가 조용히 만져줘도 몰랐는지, 눈물이 그렁그렁 차 오른 동완이 다시 게시 대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는 당장 쓰러질 것처럼 몇 번이나 넘어지면서도 기어이 분수대의 높은 곳까지 짚고 올라갔다. 이것은 당연히 규칙 사항 중 하면 안 될 것에 속해있지만 상관없었다. 현재 위치에서 시야가 그나마 높아지는 장소가 분수대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첨벙. 첨벙. 사람의 키보다 높은 분수대의 중간 장식 안 쪽에 발을 담근 채로, 동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고개가 돌아가는 족족 사나운 눈알이 빠져 나올 것 마냥 험악하기 짝이 없다. “동완아! 동완아! 얘가 지금 뭐 하는 거니! 동완아!” “…….” 멀리서 수페리우스다! 수페리우스다! 라고 꽥 꽥 소리치며 게시 대 앞을 떠날 줄 몰랐던 학생들이 이번엔 저 쪽 분수대에 발을 담가 버린 동완을 번갈아 확인한다. 장내가 떠들썩해진다. 확실히 지난 1년과 아주 다른 날이 태어났다. 그들은 어쨌든 변화의 앞에서 흥분하여 온 몸에 전율을 느꼈기 때문이다. 자신을 부르는 선호의 목소리를 들어도 대답할 수 없다는 듯, 동완은 뚝 뚝 떨어지는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붉어진 눈매와 함께 고함을 내지른다. “시… 신혜성---!!” “동완아! 넘어 지겠어 제발!” “혜성아! 신혜성--!” 방금 전 똑똑히 확인한 글자들을 믿을 수 없지만,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믿어야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 이것은 가십이다. 나는 글재주가 없는 사람이라서 뭘 어떻게 적는 게 옳은 것인 줄 모르는 애송이다. > 혜성의 필체를 잘 아는 사람이 여기 있다. 동완은 넓은 분수대의 물 곳곳을 방방 뛰며 자신의 친구를 속 시원하게 불렀다. 목소리가 잘 터지지 않는다. 충격 때문인지 급격한 추위가 한여름의 새벽에 말도 못하게 밀려왔지만 상관없다. “신혜서엉--!” < 하지만 걷는 순간 느낀 것이 있어서 문제점에 접근해 보고 싶었는데 가십 쪼가리도 찾을 수가 없었기에 나는 내가 가십의 덩어리로 되고자 한다. 나를 땅 끝으로 떨어뜨렸던 멋진 글재주를 썩히고 싶은가? 그렇다면 너는 아직 멀었다 모세. 내가 너였다면 어떻게든 테레사와 교수님의 의견은 무시하고 네가 정말 하고 싶었던 기자 일을 계속 했을 테니. > 게시 대에 막 나타난 모세가 자신을 따르는 두 세 명의 후배를 뒤에 세운 채 노여운 숨을 내쉬고 있었다. 동완은 그를 흘깃 확인하며 더 크게 외쳤다. “어딨어! 이 미친 놈아!!” < 1년 만에 돌아온 이 곳에서 나는 몇 걸음 채 걷기도 전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곳은 변했다. 새벽녘이면 들리던 희미한 선율의 박자조차 오르페이스 관은 알려주지 않은 채 입을 닫았다. 이 곳은 자유의 상징, 우리들이 하고 싶은 음악에 마음껏 취했던 아마데우스가 아니다. > 이러니저러니 해도 많은 학생들은 갑자기 닥친 '사건'에 신선함을 느꼈으리라. 정곡을 찌르는 글귀에 누구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갑자기 사라졌던 사람이, 이번에도 갑자기 나타난 지금을, 당신은 어찌 읽는가? “나는 아직 도망가지 않았다! 신혜성! 신혜성!” < 내가 한 시간 가량 걸었던 이 곳의 느낌은 마치 총을 들고 훈련하는 군대처럼 낯설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을 했으니, 나는 가십이고 이 글은 가십이다. > “신혜성--!! 수페리우스-!!” < 그러니 1년 전처럼 한 번 몰아 내 봐라, 이번에는 나의 가십으로. -과거의 수페리우스- > 이유야 어쨌든, 아마데우스는 모처럼만에 들썩이는 아침을 맞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 있다. 진정한 변혁이자 혁명은 바로 지금부터가 시작 이라는 것을……. wgreene@naver.com 19편의 뒤에 이어지는 부분이었으나 이 부분에는 조시 그로반을 사용해야 되었기에 그냥 20편 해 버렸습니다. 짧지만 어쩌겠어요. 이런 때도 있는거 아니겠습니까. ^_~ 덧글 9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20편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20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21~22편(백의 사막) ▼ 다음글 - 2악장 19편(운명의 교차)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21~22편(백의 사막)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6/04 17:04 http://blog.naver.com/wgreene/110004878011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604 21-22편 업데) Amadeus 음악 : justita - lesiem (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Justita (정의)-Lesiem 너는 정말 내 가슴의 별이 되었구나. 2악장 21~22편 한국 아마데우스 인쇄동이 1년 가까이 폐쇄된 실질적인 이유는 지국장 테오제네스가 휴학계를 제출해서였다. 그보다 더 큰 이유를 꼬집자면 사건에 있어 냉철하게 흑과 백을 조절하는 능력을 지닌 그를 대신하여 비꼬기에 능한 모세가 실권을 장악할 수는 없었던 탓이다. 물론 모세는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분명한 기사를 적는 사람이었지만 자기 식으로 비꼬기를 좋아하는 탓에 파벌주의 또한 강했다. 수페리우스의 돌연 자퇴 이후, 테오제네스의 휴학까지 이어지자 모세는 기자 일을 하고 싶어도 자신에게 모아지는 비난의 눈초리들 덕분에 그 일을 관둬야 했다. 모세가 실질적으로 인쇄 동 지국장 자리를 역임했던 시간은 따라서 1달도 채 되지 않았다는 소리다. 그 후로 오늘날까지 인쇄 동은 굵은 자물쇠로 채워져 있다. 아마데우스는 8월 초순에 나타난 수페리우스의 가십에 의해 약간씩 움틀대기 시작한다. 그가 어디에 있을까에 초점을 맞췄고, 가십을 통하여 스스로 돌아왔음을 시인했지만, '자퇴'를 한 그가 어떤 형식으로 돌아올 지 모두는 궁금해 했다. 용기있는 학생들은 로제리오 교수에게 수페리우스의 진위여부를 여쭤 보았지만 그는 대답을 피하기 일 수였다. 자, 이제 상황은 어떻게 돌아갈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긴 시간임을 다들 알아서일까? 수페리우스가 가십 이후로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저마다 '변화'를 예감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 '변화'를 기다리고 예상하는 것의 시작은 수페리우스의 가십이었다. 그 웅장하고도 거친 기운은 그가 직접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1주일이 흐른 오늘까지 숨이 막히도록 이어지고 있었다. 황량하기 짝이 없는 하얀 사막처럼 변한 아마데우스가 서서히 '어떤' 조짐을 기다리고 있다. 백(白)의 사막 8월의 장미 향은 가슴 아플 정도의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가을에 들어올 신입생들을 맞이하기 앞서 몸치장에 열심인 꽃들은 아무 생각 없이 아마데우스 외곽을 붉게 물들이기만 했다. 곧 있으면 닥칠 신입생들에 대비하기 위해서일까? 오후 세 시의 오르페우스 관은 거의 모든 연습실이 꽉 차 있었다. 그 중에서도 3학년 신입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8층은 가장 꼭대기에 있어서 그들은 다리의 통증을 호소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매일 찾아야 했다. 각 층 마다 학년 별로 이용에 있어 확실하게 구분해 놓은 로제리오 교수의 체제에 따라야 했기 때문이다. 천 개가 넘는 연습실 때문인지 넓은 오르페우스 관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처럼 위협스러웠다. 기계적으로 퍼지는 시끄러운 화음들은 가만히 있어도 지각 변동을 일으킬 것 처럼. 가장 시끄럽고 감정 변화가 들쑥 날쑥인 층은 근사한 오르페우스 관 중에서도 꼭대기 8층이었다. 신입생들은 각자의 연습실에 틀어박혀 진 땀을 빼고 있었다. 그들은 몸서리 칠 만큼 매혹적인 장미향이라던가, 근엄한 성당에 정신을 뺄 겨를이 없다. 곧있으면 '선배'가 된다는 게 영 탐탁치 않아서였다. 실력있는 사람들이 치고 올라오면, 자신들의 개성은 그만큼 죽게 될 것이다. 이대로 영영 어중이 떠중이로 묻히게 된다면? 이런 생각들은 그들을 연습실에 목을 매게 했다. 8층의 가장 끝에 있는 좁은 연습실은 더운 열기가 가득했다. 5평 남짓한 공간에서 같은 소절을 반복하며 바이올린을 켜던 한 아이가 부들부들 떨며 작게 욕을 지껄였다. 그리고는 피아노와 첼로를 연신 스치는 긴 커튼을 아련히 응시한다. 물결을 이루며 흐느적하게 움직이는 벨벳 커튼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아이의 땀을 식혀주었다. 다시 바이올린을 어깨에 놓고 의무적으로 연속 비브라토를 눌렀지만 아까와 똑같은 부분에서 실수하고야 말았다. 아이는 쾅 쾅 발을 찍으며 신경질을 부린다. 그 때였다. “현을….” “!” 아무도 없는 연습실 어디선가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 것이다! 놀란 학생은 깔끔한 정복을 움켜쥔 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목소리가 들리는 지점은 다름 아닌 방금 보았던 피아노와 첼로 쪽에 나부끼는 커튼 이었다. 목소리는 계속 해서 들려왔다. “현을 찢어 뜨릴 듯이 해 봐.” “누, 누구야!” “…여기 바람이 시원해서 창가에 턱을 괴고 있었는데, 네 멋대로 들어와서 연주를 한 거니까 신경쓰지 말도록.” “아….” 그러고 보니 긴 커튼이 스치는 사이사이로 잘만 관찰하면 사람의 실루엣이 비쳤다. 왜 몰랐을까? 한 가지에 몰입되는 바람에 이 좁은 방에 누가 있는 줄도 몰랐나보다. “현을 찢어 뜨릴 것 처럼 덤벼봐. 너는 지금 화가 난 상태니까.” “뭐? 그 정도로 힘을 주는 건 무모한데?” 별 괴상한 소리를 다 듣겠다며 이마의 땀을 닦아내던 아이가 창가 쪽에 있을 누군가에게 화를 내듯 말했다. 무감각하게 전해오는 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친구 녀석들의 장난인가 싶었지만 저렇게 오래오래 가만히 있을 리도 없고… 연습에 열중하던 신입생 소년이 머리를 굴릴 때, 커튼 안쪽의 실루엣이 또 말을 걸어왔다. “그래도 해 봐. 마음보다 줄이 먼저 끊어질 때 까지….” “마음보다 줄…?” “그래.” 약간 머뭇거리던 연습실의 소년이 조심스레 묻는다. “…너도 바이올린을 전공하니?” “아니.” 그 때, 휘익- 큰 바람이 불어와 실루엣만 잠깐 스쳤던 모양의 전체가 커튼 밖으로 드러났다. 머리카락의 부드러운 모양새와, 늘씬한 등, 자신이 입학하기 전에 입었다는 화려한 예식 복 차림새인 저 학생은 누구일까? 소년은 넋이 빠질 정도로 매혹적인 창가 쪽의 소년에게 한 걸음 다가가려 했지만, 가는 순간 사라질 것이 두려워서 가만히 있는다. “머리카락 염색은 금지인데….” “그래.” 분명히 보았다. 황금을 바른 것처럼 위태롭게 반짝이는 색체를. “너도 3학년이지?” “응.” “아니면… 4학년?” “…응.” “?” “울고 싶어질 때 다시 연습 해 봐.” “…뭐?” “그럼 네 가슴의 울림이 악기에 스며들겠지.” “!” 혹시 유령인가? 싶어서 계속 말을 붙여 보았지만, 사람의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3학년 소년은 자신의 연습실에 '당연히' 있어야 한다는 듯 커튼 사이에 존재하는 '저것'의 정체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궁금함은 잠깐 이었다. '저것'은 오히려 방금까지 있었던 소년 자신의 바이올린 연주를 꼬집어 주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주저하듯 바이올린을 어깨에 다시 올리고 뺨을 붙였다. 부드럽고 상냥한 대답이 다시 들린다. 이번에는 솔솔 불어오는 바람 사이에 달콤한 장미향을 동반한 채… “기교밖에 없는 음악은 재미없잖아.” “…역시, 바이올린을 전공하는구나?” “아니.” 그러고 보니 아마데우스에 만발한 장미의 향이 콧 전을 물씬 자극한다. 이제껏 몰랐는데, 그래. 학교에는 아름다운 꽃이 활짝 피어 있겠지. 소년의 입가에 천천히 안도의 숨이 내뱉어진다. “…그럼?” “그냥 들리는대로 솔직한 의견을 말 해 준 거다.” “좋아. 다시 들어 봐. 최대한 집중할 테니까.” “…집중하지 말고, 네가 얼마나 그 연주에 목이 말랐는지를 떠올리면서 해 봐.” “?” 소년은 다시 놀라서 창가의 실루엣을 쳐다보았다. 휘- 휘- 바람이 불어도 어쩐지 커튼은 더 이상 펄럭이지 않았다. 있을 듯 없을 듯한 대답만이 바람처럼 불어온다. 조각 조각 날아다니는 글자에 달린 음성은 자꾸 사라지기만 한다. “네 실력을 버리고 해 봐.” “?” “네가 처음 바이올린을 선물 받았던 어린 시절의 희열… 그걸 떠올려 보는거야.” “…아!” “세상을 껴안았던 그 때를….” “…맞아!” 세상을 껴안았던 그 시절을! 이제 연습에 짜증만 내던 소년은 천하를 손에 얻은 용맹한 장군처럼 기쁘게 웃을 수 있었다. 소년은 단순한 원리를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라는 듯이 신이 나서 악보를 휙 휙 넘겼다. 차차 작아지는 실루엣 소년의 목소리가 신이 나서 기쁘게 웃는 소년에게로 계속 전해졌다. “그 시작의 날을… 매일이 그 때의 시작과 같은 마음이라면 좋겠지만.” “그래!” “…그럼 다시 시이작.” “…? 아, 그래!” 소년은 기분 좋게 아까 실패했던 비브라토에 도전해 봤다. 마음을 비우고, 심호흡을 하자 다섯 살 때 선물 받았던 작은 바이올린이 머릿속에 스쳤다. 가슴이 두근거릴 때, 현은 정확하게 음을 떨리운다. 벅찬 희열이 머리 꼭대기까지 퍼지고 소년이 정신없이 쭉 쭉 악보를 진행한다. 한 참이 지나서 연습 분량을 모두 마친 소년이 “어때?” 하며 약간 감았던 눈을 활짝 열었다. 이렇게 감수성과 하나가 된 연주도 오랜만이었다. “…응?” 그러나 아까의 실루엣은 사라졌다. 꿈을 꾼 걸까? 소년은 멍청하게 서서 바이올린을 쥔 채로 한 참을 있더니, 후다닥 창가의 커튼을 치워보았다. 창가 밖으로 쭉 몸을 내밀었지만 그런다고 아까의 실루엣이 돌아 올 리 없다. “잉? 진짜 꿈을 꾼 건가….” 후덥지근한 날씨 때문에 꿈을 꾼 게 분명한 걸까. 노란 머리카락의 소년이 여기 있었는데…. 오르페우스관의 8층 보다야 덜 시끄럽지만, 어쨌든 5학년들이 열을 올리고 있는 3층도 만만치 않게 분주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다들 연습에 진땀을 빼는 가운데, 단 한 개의 도어가 유독 조용했다. 하프 연습실이 길게 나열되어 있는 곳 중에서도 중간에 위치한 별볼일 없는 여학생의 방이었다. 달칵, 슬픔 가득한 방 문이 열린다. 아까의 8층과 비슷한 구조로 되어있는 좁은 연습실 구석에서 딱딱한 정복을 입은 여학생이 훌쩍이고 있었다. “왜 울고 있지…?” “…….” 인기척을 전혀 눈치채지 못 했던 소녀는 흠칫 놀라서 고개를 올리기 위해 서둘러 눈물을 닦기 시작했다. 자상한 음성이 그럴 필요 없다며 부드러움을 열어 주었다. “고개 들 필요 없어. 계속 울어.” “…….” 한동안 침묵만이 벽을 치장하는 가운데, 소녀가 하프를 버리다시피 멀지 기 떨어져 앉아있음이 눈에 들어오자 그 누군가가 슬픈 어투로 입을 열었다. “너는 너 때문에 울지만….” “…?” “너의 하프는 오직 주인의 눈물이 안타까워서 가슴이 찢어지고 있을 거다.” “!” 흠칫 흠칫 놀라는 소녀가 고개 숙인 바닥으로 굵은 눈물이 연신 떨어뜨렸다. “악기를 뛰어 넘었다고 해서 점점 자기 자신에게 미쳐 갈 수록, 악기는 예전의 너를 그리워 하지 않을까.” “!” 끅 끅 거리며 울던 소녀는 강한 채찍질보다 더 한 소리에 소름이 끼쳤는지 당장 뒤를 돌아보았다. 눈물범벅인 채로 닦을 새도 없이 자신에게 찾아와 상냥하고도 냉철하게 말을 붙인 그 치는 그러나, 벌써 등을 돌린 상태였다. 늘씬하고 날렵한 뒷모습을 지닌 소년은 자신의 노오란 머리칼을 딱 한 번 반짝이더니 언제 왔냐는 듯이 문을 닫고 사라졌다. 5학년 소녀는 저도 모르게 하프를 껴안으며 하얗게 질린 채로 속삭였다. “이… 이민우?” 턱에 맺혀있던 소녀의 눈물이 하프의 줄에 떨어진다. 일주일이 지나자 오르페우스관을 시작으로 묘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떤 '소년'의 출현이 빈번해지고 있다는 것인데, 가히 현실성 있는 소문이었다. 노란 머리카락을 지닌 아름다운 소년이 연습실 곳곳에 나타난다! 라는 소문은 차차 짙어져 그 인물이 1년 전에 죽은 '이민우'라고도 누구는 떠들었다. 신입생들은 이민우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그저 아름다운 학생 이라고 저희들끼리 떠들었고, 고학년들은 이민우가 틀림없다며 만나기만 하면 열을 올렸다. 학교에 이민우의 유령이 나타난다는 그 소문 때문인지, 몇 몇 학생들은 오르페우스관에 가기를 두려워 했지만 거의 다는 자신들의 연주에 귀를 기울여 주는 자상한 소문의 실체를 기다렸다. 그 현실성있는 소문은 2주일 전에 부착되었던 수페리우스의 가십을 잊게 할 정도로 힘이 있고 대단한 것이었다. 가슴 아플 정도로 아름다운 향을 뿜어내는 장미 문은 더 할 나위없는 싱싱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환상적인 향기는 멀리 떨어진 오래되고 낡은데다 음침하기까지 한 지하 학생 감옥에도 불어왔다. 혜성은 모처럼만에 예전 대화가 떠올랐는지 기분 좋게 입 꼬리를 올린다. ‘마리아 칼라스.’ 서늘한 돌 기운이 전신을 차게 식혀 주었다. 회상은 깊어져간다. ‘마리아 칼라스? 그게 누구예요 테레사?’ 눈을 뜨면 테레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지도 몰라… 혜성은 좀 더 몸을 웅크렸다. ‘아름다운 오페라의 여신이지. 지금은 천주님의 품에 있는 소프라노란다.’ ‘지금은 없어요?’ 그 언제던가. 아마데우스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함께 산책했던 테레사가 장미문 앞에서 나른하게 해 주셨던 설명이 지금의 아이에게 힘을 주고 있었다. ‘이름과 음악만이 남아있지. 마리아 칼라스의 유골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에게해에 뿌려졌다고 해.’ ‘에게해….’ ‘아마데우스에도 그녀가 있어.’ ‘죽었다면서요.’ ‘네 눈앞에도 있다 혜성아.’ ‘…음… 장미꽃밖에 없잖아요. 여긴 장미 문 이잖아요 테레사 선배.’ ‘그게 그녀의 이름이다. 마리아 칼라스.’ ‘!’ 그 때는 한없이 높아 보였던 테레사가 두 눈을 반짝이며 혜성 자신을 내려 보았었다. 마리아 칼라스라며 멋대로 붙인 이름을 으스대었던 높은 어깨를 기억한다. 2주일가량 학생 감옥에서 은신했지만 테레사의 옛 기억에 추억 한 적은 없었는데… 긴장이 풀린 걸까. 계속 들려요, 선배의 향긋한 음성이 떠날까봐 겁이 날 정도로…. ‘장미의 이름이 마리아 칼라스야.’ ‘아… 이 붉은 장미꽃잎들이 전부요?’ ‘…아니. 그건 그냥 흔한 장미꽃이지.’ ‘?’ ‘말했잖니. 그녀의 '이름'이 후세에 남아있다고. 분홍의 마리아 칼라스에서 나는 이름을 가져왔을 뿐이다. 너는 나의 수페리우스이니만큼 사소한 비밀은 알려 줘도 나쁘지 않지. 나는 흔히들 장미꽃이라고 규정짓는 아름다운 아가씨들에게 마리아 칼라스라는 이름을 붙여 준 것 뿐이거든.’ “…….” 그 뒤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혜성은 하는 수 없이 눈을 떴다. 정오가 되어도 까만 그림자가 사방에 꿰어있는 학생 감옥은 늘 그렇듯이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한 참은 기다렸음직한 누군가가 혜성을 철창 밖에서 내려 보고 있었다. 혜성은 환하게 웃으며 몸을 앉혔다. “동완아….” “정말 괜찮겠어? 여기서 지내는 게….” “괜찮다니까. 넌 올 때마다 묻는구나. 네가 이것저것을 갖다 주고 해서 불편하지 않아.” 2주일 전, 동완은 다른 사람들이 수페리우스를 찾아 뒤질 때 제일 먼저 그를 찾아냈다. 자신의 예상은 과연 틀리지 않았다. 혜성은 그 어떤 근사한 곳이나 특실에 있지 않았다. 아이가 숨을 쉬고 모습을 나타낸 것은, 자신의 죽마고우에게 희미하게 웃으며 오랜만이라는 인사와 함께 팔을 내민 것은 지하 학생 감옥이었기 때문이다. 노란 머리카락과 함께 조금은 자란 듯한 모습으로 나타난 혜성은, 다시 만나는 현재까지도 믿어지지 않는다. 가십에서처럼 당장 무슨 짓이라도 할 것처럼 느껴졌던 혜성은 그러나, 음습한 감옥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는 눈치였다. 동완은 그 점이 이상했다. 떵떵거리며 가십을 올린 당사자가 왜 침묵하며 이곳에 있는걸까? 개선장군이 되어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내가 수페리우스다! 라고 떠들 것 같았는데… 역시 신혜성의 정신세계는 봐도 봐도 모르겠어. 동완은 당연히 아무도 없는 감옥 주변을 힐끔거리며 작게 속삭였다. “방금 로제리오 교수님을 만나고 왔어.” “…….” “일주일 전과 대답은 똑같다고 하신다, 혜성아.” “…그래….” 혜성은 희미하게 웃으며 동완이 내민 사과를 깨물어 먹기 시작했다. 지하 감옥만큼 편한 곳이 또 없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자신의 정다운 친구가 안쪽으로 들어올 수 있게 열쇠로 문을 열어 주었다. 지난 날 룸펜에 찾아왔던 사비나 교수가 민우가 죽기 직전 지녔던 감옥 열쇠를 돌려주지 않으셨던가. “로제리오 교수님을 직접 만나지 않을 거니?” “…만나야겠지.” “이주일이나 지났잖아. 너… 설마….” “…….” 로제리오는 혜성을 두려워했다. 아마도 가십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실체를 만나기 전까지 자기가 정한 환상에 갇혀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혜성이 학생 감옥에 있다고 동완이 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로제리오는 이처럼 단 한 번도 이곳에 찾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사비나 교수가 학생 감옥에 몰래 몰래 찾아 오셨었다. “단 한 시간 관찰한 걸로는 부족했거든.” “…….” “이제 거의 다 됐어.” “……?” “거의 다….” “혜성아. 혜성아. 사비나 교수님이 어제도 여기 오셨었지? 뭐라고 하시든?” “…….” 방금 이 질문을 끝으로 동완은 더 이상 사비나 교수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어떻게 물어 봐도 2주일 내내 다른 것은 대답 해 주면서 사비나 교수에 대한 것은 일언함구 했기 때문이다. 혜성은 그 점에 대해서 미안해하지도 않는다. 상당히 괘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동완은 이제 와서 혜성이 전처럼 또 사라지는 건 아닌지 걱정 되서 마음이 상했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수페리우스가 다시 학교생활을 할 수 있는 '계기' 라던가 보다 실질적인 '방법'을 사비나 교수가 제안했을 게 틀림없는데 혜성은 동완에게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어깨를 으쓱대며 동완은 말을 돌렸다. “그리고… 이제 곧 문정혁이 학교에 돌아 올 거야.” “…!” 사과를 다 먹고 이번에는 귤을 까던 혜성이 눈을 크게 뜨고 동완의 시선과 마주쳐왔다. 하마터면 귤을 떨어뜨릴 뻔 했다. 그러나 놀란 것은 잠시였다. 예전의 신혜성 이었으면 방방 뛰면서 감정대로 움직였을 게 틀림없는데, 지금의 혜성은 딱 한 번 동공을 확대했을 뿐 언제 그랬냐는 듯 평화롭게 귤을 삼키며 등을 기댔기 때문이다. “그의 휴학 기간도 끝나가거든. 어쩌면 너의 소식을 알지도 모르지.” “네가 말 한 건 아니고?” “…….” 이제는 꼬투리도 잡을 줄 안다. 동완이 변명거리를 궁리하는 사이에, 혜성은 환하게 웃으며 팔을 저었다. “그는 변했지? 나에게 1년 전 이렇게 말 했거든. 악한 자가 되어서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 “상관없어.” 느긋한 혜성의 태도에 마침내 성이 난 동완이 허리에 손을 얹고 꽥 소리쳤다. 이상하다. 예전에는 내가 말 빨이 더 셌는데…. “혜성아! 불행을 계속 인정하면, 정말 그런 상황으로밖에 가지 않는다는 걸 모르니?” “…그런 건 잘 모르겠습니다 심리학자여….” “이 놈이!” “윽!” 우당탕 몸을 섞으며 가벼운 주먹질을 하던 둘은 결국 신나게 웃으며 떨어져 앉았다. 불긋한 웃음이 둘에게서 떠나지 않는다. 진분홍 노을이 어두운 이곳에 미칠 때까지 둘은 한 참을 떠들었다. 혜성은 룸펜에서 지냈던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동완은 선호 선배 이야기를 비롯하여 쓸쓸해진 아마데우스의 모든 것을 실랄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혜성은 히스에 대한 절실한 그리움 이라든가 자신이 겪었던 유리라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할 수 없는 게 정답일 것이다. 동완 또한 로제리오에게서 들었던 테레사가 학교에 찾아 왔었다는 이야기는 혜성에게 할 수 없었다. 그 역시 내뱉지 못하는 게 정답일 것이다. 그래도 둘은 여전히 좋은 친구였으며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 이제 가 봐야겠다며 동완이 몸을 일으키자 혜성이 내일은 어떤 음식을 싸 오라며 길게 읊는다. 동완은 네가 직접 걸어 나와서 먹으라고 소리쳤지만, 혜성은 귀찮아서 그 짓은 못하겠노라 이상한 대답을 하며 그의 신경질을 부축이기만 했다. 철창 밖으로 나온 뒤 동완은 막 생각난 것이 있는지 다시 등을 돌렸다. “왜?” “빼먹은 게 있어서….” “……?” 부수수 흩날리는 짚더미를 차곡차곡 바닥에 깔던 혜성이 어서 말을 해 보라고 씨익 웃는다. 그리고 동완의 대답과 함께 그대로 굳어 버린다. “요 근래 이민우가 나타나고 있대. 그냥 소문인데… 아마데우스 곳곳에… 특히 오르페우스 관에.” “!” “신경 쓰지 마. 나는 한 번도 못 봤거든. 뜬소문이지… 쉬어라, 혜성아.” “…….” 동완은 청천 벽력같은 말만 지껄이고 홀연히 사라졌다. 딱딱하게 굳은 혜성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민우! 숨도 못 쉬 게 그리워지는 이름이 머리 꼭대기부터 짓눌러져 온 몸에 멍이 드는 것 같았다. 그 이름은 회오리와도 같았다. 뺨을 치고 약한 몸을 부비며 저 혼자 훌쩍 사라져간다. 혜성은 당장 동완이 몰래 마련해 놓은 술병 중 가장 늘씬하고 기다란 것을 쥐고 콸콸콸 입에 쏟아 부었다. 약간의 취기가 몰려오자 그는 일어섰다. 잠을 자야겠다는 욕구가 완전히 사라진 현재, 그는 밤이면 걸어 다녔던 조용한 지대를 찾아 감옥 밖으로 슬그머니 나오기에 이르렀다. “…….” 가냘픈 불빛들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근사한 달조차 구름에 끼어버린 차가운 여름날의 밤. 혜성은 평소보다 많은 양의 술을 마셔가며 흐느적하게 걷고 또 걸었다. 로제리오의 규칙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되는구나.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서글픈 아마데우스 주변에는 음악 소리도, 발자국 소리도 없는 잔인한 밤이 되어 넋을 죽인다. 민우의 웃음이 스쳐 지날 때 혜성은 두 갈래의 숲길에서 한 참은 정지하여 술을 들이켰다. 그럴수록 간절해지고 나약해지는 마음이 그를 유혹한다. 만약 정말로 이민우가 넓은 아마데우스 땅 어디선가 살아 있다면? 혜성은 쉼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번쩍이는 눈알을 날카롭게 돌렸다. “으윽.” 넘어지는 순간마저도 술병은 허공에 쥔 채로 혜성은 두리번거렸다. 어디 있어, 민우야? 넌 죽은 게 아니었니? 내가 돌아왔듯이, 너도 소문처럼 살아서 나타난 거니? 그런데 왜 내 앞에는 없어? 휘적 휘적 걷는 내내 민우는 나타나지 않았다. 동완의 말이 사실이라면 한 번쯤, 그래 2주일 동안 몰래 몰래 살폈던 아마데우스 곳곳에서 혜성의 눈에 띄었음직한데, 티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있긴 뭐가 있어….” 제 멋대로 넘어지고 실실 웃던 혜성은 하는 수 없이 긴 오솔길을 몇 번이나 거닐다가 감옥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이민우에 대한 소문을 들어서 제정신이 아니었나 보다. 왜 동완이는 이상한 말을 해서…. “민우야….” 이름을 부르자 눈시울이 붉어진다. 가슴이 옥죄어져 불화살에 쏘인 것처럼 한없이 뜨거워진다. 지하 감옥의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댄 혜성이 하염없이 그 이름을 속삭여 보았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지금이라도 나타날 것 같아서였다. “민우야….” 희미한 달빛 아래 노란 머리칼이 반짝인다. 장미향이 섞인 바람이 불어 올 때, 혜성은 희미하게 눈을 뜬 채 다시 술을 마셨다. 병째로 들이키는 그의 행동이 길어질 수록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의 자국도 깊어진다. “민우야… 소문이 사실이라면, 어서 나타나 봐… 나타나 봐….” 아마데우스에 돌아오는 순간 화를 참을 수 없어서 휘갈겼던 가십과, 그것을 보고 당연히 아이를 찾아냈던 사비나 교수님과 동완이 먼 과거처럼 스쳐 지난다. 혜성은 느릿느릿 술을 삼키며 연신 읊조렸다. “쿡… 쿡쿡… 어서 나타나 봐… 엄마 닭이잖아… 너는 엄마 닭이니까 얼른….”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사비나 교수님이 이곳에 돌아온 첫 날부터 권하셨던 '그것'을 정말로 해야 할까. 나는 겁이 많은 학생이고, 애송이인데 정말 어떡해야 할까. 민우야. 나는 이제 뭘 어떡하면 좋을까. “하하하하… 엄마 닭이 느리구나! 하하… 하….” 술주정이 길어질수록 새벽 또한 길어진다. 혜성은 조금씩 움터오는 하프의 선율이 느껴졌는지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민우에 대한 소문이 아마데우스 전역에 미쳤는지 알 수 없지만, 소문이란 근원이란 게 있기 마련이다. 그걸 먼저 알아내야 할까…. 아니면, 사비나 교수님이 권하셨던 ‘그것’을 먼저 해야 할까…. 나는 몸만 돌아온 것일까. 그 때였다. 평소처럼 아무도 없는 게 당연한 지하 학생 감옥 입구 쪽에서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 것이다. 혜성은 귀를 바짝 세우고 집중했다. 모처럼 긴장감으로 인해 식은땀이 난다. “?” 동완이인가? 아니면 진짜 이민우? 사방이 동그랗게 돌아가는 시야 때문인지 슬쩍 눈을 뜬 혜성이 이마를 부여 쥔 채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달빛 아래 반짝이는 스스로의 실루엣이 어떤 모양새인지 전혀 알 리 없는 혜성이 한 걸음 움직일 때였다. “으아아악!” “?” 별안간 비명 소리가 먼 곳에서부터 터진 것이다. 놀란 것은 혜성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누군가가 혜성의 실루엣을 확인하더니 비명부터 지르는 게 아닌가. 덕분에 취기에 밀린 몸이 한 번 휘청거린다. 바로 그 때, 달빛에 반짝이는 혜성의 실루엣을 멀리서 보고 입구 쪽에 모여 있던 몇 놈이 동시에 고함을 쳤다. “이민우다!” …뭐? 죽은 듯이 평화로웠던 내면이 와장창 깨어진다. 칼에 찔렸으나 피가 나지 않는 사람처럼 그저 가슴만 부여 쥐는 음성이 있다. 이민우? 정말이니? 민우야! 유령이라도 상관없어! 혜성은 억척스러울 정도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있는 것이라고는 술병을 쥐고 멍청하게 서 있는 혜성 자신뿐이었다. “진짜 이민우다!” “으아아악! 유령이다! 귀신이다!” “……!” 그들은 그렇게 소리를 지르더니 우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누가 더 빨리 뛰어가나 경주를 하는 것처럼 숨소리조차 참아가며 발 빠르게 벗어난다. “…내가…?” 툭. 혜성의 손에 쥐어져 있던 빈 술병이 지푸라기 바닥에 떨어진다. 그의 턱에 흐르던 눈물이 술병의 머리 부분에 또옥 물방울을 맺힌다. ‘요 근래 이민우가 나타나고 있대. 그냥 소문인데… 아마데우스 곳곳에… 특히 오르페우스 관에.’ 동완이 알려 준 진실이 깨어난다. 혜성은 허망한 표정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특히 오르페우스관에.’ 그제 서야 생각났다. 혜성이 툭하면 아무 연습실에 들어가서 지껄였던 기억들이 멀겋게 떠오른다. 2주일 내내 빈번히 찾아갔던 오르페우스 관이 그림처럼 뇌리에 박힌다. 게다가 혜성이 동완에게 얘기한 기억이 없었다. 만약 얘기했다면 소문은 달라졌을까. “…….” 쉼 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내 것이 아닌 타인의 것을 보듯 하염없이 응시하며 혜성은 어깨를 떨었다. 학생들은 혜성이 불쑥 불쑥 나타나는 실루엣을 향해 '이민우'라고 했던 것이다. “그래… 민우야… 너는 정말 내 가슴의 별이 되었구나….” 지푸라기를 손아귀에 움켜쥐며 혜성은 어깨를 들썩여 가며 속 시원히 울었다. 그렇게 오늘도 하프의 선율은 찾아왔다. 새벽의 끝이 사라질 때 까지, 엉뚱한 소문의 진실을 알아내는 것으로…. 하프의 선율이 모두 사라지고, 이젠 모두 정리가 되었는지 참으로 안정된 모습의 수페리우스는 감옥에 찾아올 누군가를 기다렸다. 이제 다 되었다. 이제 정말 다 되었다. 가십에 적은 망발이 진실임을 2주일 내내 눈으로 가슴으로 확인했으니 다 되었다. 게다가 은둔 생활은 끝내라며 이민우의 소문이 진실을 그리는 것으로 혜성을 붙잡아 주었다. “수페리우스…?” 세 시간여를 조용히 앉아있던 혜성이 오늘도 잊지 않고 오전부터 자신에게 찾아온 누군가를 희미하게 올려보았다. 앉은 자세에서 굳은 조각상처럼 하얗게 올려보는 가운데 약간 입 꼬리를 올리며 자신을 부른 상냥한 누군가에게 대답한다. “사비나 교수님….” “…….” 늘 이 시간이면 학생 감옥에 찾아오셨던 사비나 교수가 팔을 뻗어 정자세로 앉아있는 수페리우스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길고 나른한 오전의 햇살이 두 사람을 위해 쭈욱 밀려온다. 사비나 교수가 무슨 말을 더 꺼내려 할 때, 수페리우스는 마지막 눈물을 떨어뜨리며 자신이 정말은 두려워했던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마음과 언어를 열었다. “로제리오 교수님과의 학생재판에 서겠습니다.” “수페리우스!” 이곳에 돌아온 첫 날 부터 사비나 교수님이 알려 주셨던 ‘방법’을 위한 실천을. “그렇게 해서 인정을 받고 예전처럼 지낼 수 있다는 게 확실하다면….” “!” “저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쉬운 길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겠습니다.” “수페리우스….” “계속 기다렸거든요. 자퇴는 취소되었다… 예전처럼 그냥 다니면 된다… 라는 로제리오 교수님의 승인을… 2주일 내내 이곳저곳을 몰래 돌아다니면서… 하지만 그건 아니었나봐요.” “…….” 사비나 교수는 여리지만 당차게 자신의 결심을 내뱉는 수페리우스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녀의 눈에는 아직도 한 참은 작아 보이는 이 아이가 어떤 마음으로 돌아왔을지 2주일이나 지난 현재까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으리라. 정당한 방법이 하나쯤은 있다며 사비나는 2주일 전 학교로 돌아온 혜성에게 이런 말만 해 주었었다. '로제리오는 쉽게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란다. 그러나 규칙 이라는 것에 아주 약하지. 그의 ‘상업적인 면이 쉽게 꺾이고야 만다. 학생 재판에서 네 쪽으로 지지율이 상승하면 분명히 자퇴서를 없앨거야.’ 듣도 보지도 못 했던 학생 재판! 그것이야 말로 '휴학'도 아닌 '자퇴서'를 냈던 혜성이 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이었던 것이다. 사비나 교수는 어쩌면 그 이야기를 꺼낸 직후 후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의 말이란 물과 같아서 담을 수 없지 않던가. 증발하고 또 증발하여 수페리우스의 귓가를 떠날 줄 몰랐던 음성으로 자리했었다. 재판! 비옥한 학생 감옥을 아마데우스 학생 중 최초로 겪었던 혜성이 참으로 낯선 ‘재판’이라는 단어를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으리라. 늘 새로운 것은 미지의 공포를 인간에게 심어 주기 때문이다. 혜성은 당장 몸을 일으켰다. 자신을 안쓰럽게 지켜보는 사비나 교수님과 깊게 포옹한 뒤, 당차게 웃으며 2주일의 은둔 생활을 끝내기로 한다. “수페리우스!” 아마데우스가 또 한 번 발칵 뒤집혔다. 몇 명 여자 아이들이 소스라친 비명을 지르며 손바닥을 뺨에 붙였다. “수페리우…스? 정말 수페리우스다! 가십이 사실이었어!” 2주일 만에 진짜로 모습을 드러낸 것도 모자라 씩씩하게 분수대 부근을 지나치는 혜성을 발견하는 족족 많은 비명이 그를 스쳤다. 혜성의 걸음은 그럴수록 당당해져갔다. 뭐가 두렵다고 2주일이나 학생 감옥에서 로제리오를 기다렸는지 스스로가 한심해질 지경이다. 그냥 몸만 돌아온다고 해서 떳떳하게 학생이 될 리가 없다. 그건 당연한 논리다. 혜성이 다시 이 학교의 수페리우스로 있기 위해서는 '형식'이 필요했는데 하필이면 최종 승인이 로제리오를 거쳐야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를 만나러 가기를 꺼려했다. 혜성은 사비나 교수에게 들었던 '재판'이 두려웠고, 로제리오는 갑자기 나타나서 '가십'을 올린 수페리우스가 두려웠던 것이다. 상당한 아이들이 아마데우스의 아름다운 건물 곳곳을 지나치는 혜성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그 중에는 그의 노란 머리카락과 늘씬한 옆모습, 예전에 입었던 예식 복을 통하여 최근 퍼진 '이민우' 소문의 근원을 눈치 챈 이도 있었다. ‘정말 수페리우스다… 그가 돌아온 게 사실이었어.’ ‘하지만 2주일이나 안 보였는데…?’ ‘혹시 그 이민우에 대한 소문이 수페리우스가 아니었을까…?’ ‘!’ 혜성이 걷는 족족 환한 눈빛과 속삭임이 끊임없이 메아리친다. 그리고 학생들의 속삭임이 아마데우스 전체를 들썩일 때, 수페리우스의 걸음이 로제리오 교수의 집무실에 멈췄다. 발걸음이 차차 가벼워진다. 아마데우스! 피하려고 돌아온 곳이 아닌 이곳에서, 나는 잊었던 게 있다. 망각 이라는 어리석은 이름이 내가 어떻게 이 학교에 자리 잡았었는지의 '과정'을 상실케 했었다. 돌아오는 즉시 아마데우스의 학생으로서 이전처럼 소프라노까지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라도 망각의 늪에서 벗어나고자 하니, 내 안의 신이시여 굽어 살피소서. “로제리오 교수님!” “!” 쾅- 눈에 익은 도어를 여는 즉시, 혜성의 입 밖으로 경쾌함이 쏟아졌다. 누군가와 중요한 통화를 하고 있던 로제리오는 놀란 나머지 저도 모르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 “…….” 지난 1년이 모두 사라진 현재, 두 사람은 황량한 백의 사막에 서 있는 점표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그 틀을 깨뜨리며 과거의 수페리우스는 활짝 웃었다. 그리고 당당하게 소리쳤다. 1년 만의 첫 대화였다. “저도 해 본 적이 없어서 긴장되고 나태하게 잠시 피하긴 했지만, 결국 해 내면 교수님에게서 '인정'을 얻어낼 수 있다니, 하겠습니다!” “…수…페리우스…?” “교수님과의 단독 학생 재판을 해 보겠습니다!” “!” 후두두두- 장미의 향이 로제리오 집무실 창 안 쪽에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wgreene@naver.com 재미 여부를 떠나서 나름 힘들게 올리는건데 그냥 지나치지 마세요.. 맨 땅에 헤딩하는 기분.. 잠시 공백기를 갖겠습니다. 행복하세요. ^^ 덧글 8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21~22편(백의 사막)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21~22편(백의 사막)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23~24(학생재판) ▼ 다음글 - 2악장 20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23~24(학생재판)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6/08 23:17 http://blog.naver.com/wgreene/110005015824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608 23-24편 업데) Amadeus 음악 : 일디보 필링(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Feelings-Il Divo 학생 재판 2악장 23~24편 영혼으로 가십을 보여주는 사람이 생겼다. 그는 입으로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가 지나가는 것 만 봐도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그는 살아있는 가십 이었다. 이 파장이 어느 정도였냐면, 학생들은 자신들이 주목하는 가십 자체인 그의 영향력에 질투를 느낄 틈조차 없어서였다. 그는 쉬지 않고 움직이는 물레방아처럼 정갈하지만 단단한 인상을 준다. 그는 멀리서만 봐도 탄성이 나올 만큼 아름답고 맵시 있다. 그는 정지해 있는 게 더 이상할 것이다. 그런 그가 로제리오 교수와의 단독 대화로서 학생재판에 우뚝 선다고 한다. 소식은 물보다 빠르게 떨어져 땅 위에 살아있는 모든 것에게 기대를 안겼고 그 날짜만 기다리게 했다. 그래서 수페리우스는 살아있는 가십으로서 움직이지 않는 인쇄동이 만약에 움직인다 한 들 지금보다 더 빠를 수는 없게 되었다. 9월 첫째 날, 그의 가십은 더 할 나위 없이 부풀어져서 넓은 아마데우스 전체를 삼키고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붉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는 연 녹의 고호한 나뭇잎들은 때가 이르지만 우수수 떨어지며 학생들을 들뜨게 해 준다. 아마데우스 성당을 중심으로 쭉 뻗어있는 가지처럼 세워진 아름다운 건물들, 그리고 그 안의 모든 학생들은 오후 다섯 시가 되자 약속 한 것처럼 연주회장으로 향했다. 4학년 이상의 학생들은 1년 전 자신들을 돋보이게 해 주었던 은은한 예식 복을 꺼내 입었다. 이민우가 죽고, 수페리우스가 자퇴 한 이후 로제리오 교수는 그 예식 복 착용을 금지 시켰었다. 하지만 3학년 신입생들을 제외하고 거의 다는 옛날의 것을 맵시있게 차려입었다. 갑자기 모든 것에 싱싱한 활력이 심어졌다. 해가 떠서? 물이 깊어져서? 바람이 세어져서? 그것도 아니면, 암암리에 퍼진 '예식 복을 입어라 아름다운 학생들이여!' 라는 술에 취한 수페리우스의 소문 때문에? 어쨌든 9월의 첫째날은 어떤 짓을 벌여도 용서가 될 것처럼 풍요로운 감성을 선물한다. 마치 성탄 전야제처럼. 저마다 상기된 표정으로 학생들은 근엄한 연주회장에 들어섰다. 뻥 뚫린 공간에 들어서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넓은 연주회장 내부에서의 인간이란 좁쌀보다도 작게 느껴진다. 하얀 좁쌀들처럼 옹기종기 움직이지만 영원토록 채워지지 않는 크기! 그 웅장함! 세련된 조명등이 밝혀지고 각자 앉은 자리에서 정확히 무대를 응시한다. 그럴수록 아마데우스 연주회장은 우아한 내부 구조를 자랑할 뿐이었다. “이자벨도 왔어.” 한 아이가 옆자리 친구에게 속삭였다. 그렇잖아도 상당한 무리들이 모세와 함께 나타난 이자벨을 예의주시하던 차였다. “모세가 증인이라던데….” “하지만 일반 재판이 아닌 이상 그 애는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내려갈 텐데?” “모를 일이지.” 이자벨의 등 뒤에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모세가 좌중을 차갑게 둘러보더니 자신과 눈을 마주쳐오는 학생들은 모르는 척 하며 무대를 향해 걸었다. 이자벨은 자신의 친위대나 다름없는 수산나 무리와 함께 연주회장 우측을 차지하고 앉았다. 어쩐지 아름다운 이자벨의 주변에는 보이지 않는 막이 쳐진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그녀를 안 보는 척 하면서도 학생들은 쉬지 않고 입을 놀렸기 때문이다. 성스러운 아마데우스의 학생 재판이 시작 되었다. 학생 재판의 형식은 매우 단순하지만 정해진 시간 이라는 게 없다. 아마데우스의 학생 재판은 단 한 번도 시행된 적이 없었지만, 그 정도로 '전교생'을 한 자리에 불러야 할 '사건'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로제리오 교수와 수페리우스는 '대화'를 한다. 로제리오 교수의 집무실에서 해도 상관없는 이야기라지만, '자퇴' 건에 대한 자세한 과정을 전교생이 경청하는 것이다. 재판에서 있었던 과정은 가십으로 적을 수가 없다. 이 점은 로제리오 교수 체제 이전부터 있었던 금지 사항이었으며 학생들이 모두 한 자리에서 참고인이 되기 때문에 가십이란 사실상 있을 수가 없었다. 열린 자리에서의 '주제'를 놓고 벌이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대화. 그러나 전교생을 비롯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주시한다. 장소는 아이러니 하게도 화려한 연주가 터질 법 한 연주회장에서. 바로 이것이 아마데우스식 학생 재판인 것이다. 혜성은 이 자리에서 한 시간 안에 90%의 지지율을 얻어야지 승소 할 수 있다. 그래야지 그의 의견이 수용된다는 소리다. 이 즈음 되서 당신은 예감했을 것이다. 이 재판은 단순히 '자퇴 철회' 그 이상의 뜻을 지닌 수페리우스가 현재의 아마데우스에 반기를 든 일인 시위라는 것을. 그렇다면 지켜보자. “시작 하십시오.” 가볍게 기도를 마친 바오르 신부가 짧게 시작의 말을 남기고 제일 앞 자리로 돌아갔다. 두 개의 의자가 좌중을 향해 있다. 로제리오 교수와 혜성은 7미터 가량 떨어진 의자에 각자 앉았다. 삼천 여명의 눈동자가 갉아 먹을 것처럼 무대를 향해 있었다. 혜성이 긴장했듯이 로제리오도 경직된 상태였다. 어쩌면 이것은 연극과도 같았다. 그들은 토론을 하지만, 좌중을 향하여 소리쳐야 했기 때문이다. 낮게 조명이 깔리고 단 두 개의 환한 빛이 동그랗게 두 사람을 비쳤다. 공소장의 부본은 혜성이 며칠 전에 로제리오 교수에게 언급한 '재판을 하자'라는 것으로 송달 자격을 갖췄다. 피고인이란 없다. 그것은 결과가 나오는 대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심판관과 재판관 등 모든 법조인의 자격을 갖춘 아마데우스 학생들의 시선이 여기 있다. 최초로 시행된 아마데우스 학생 재판! 그것은 전체의 참여를 요하고 있었다. “신입생 연주회 및 환영회가 생략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긴 침묵을 깨고 수페리우스가 입꼬리를 올리며 여유 자적하게 말문을 열었다. 그러자 무대 가장자리에서 '증인' 이라는 형식의 이름표를 쥔 모세가 비열한 어투로 치고 들어온다. “지금 신혜성은 주제에서 빗나가는 말을 했습니다, 교수님.” 하지만 로제리오는 잘못을 들킨 아이처럼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는 교수라는 신분이 주는 품위를 따질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모세의 날카로운 조소도 듣지 못했는지 대뜸 되물었다. “…누가 그러지?” “3학년 학생들의 눈빛이 말 해 주었습니다.” “!” 자퇴를 철회 해 주세요- 라는 말부터 할 줄 알았던 수페리우스의 시작에 당황한 것은 로제리오 뿐만이 아니었다. 학생들마저 '저게 수페리우스와 개인적으로 무슨 상관이지?'라며 통 모르겠다는 표정이기 때문이다. 대답에 있어 준비가 덜 된 로제리오를 대신해서 모세가 가시처럼 쏘아댄다. 어쨌든 모세는 재판에 있어 모두진술의 과정을 대신하여 이 자리에 함께 선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착한 척 순진한 척 하며 학생들에게 올가미를 씌우더니, 청렴결백하게 떠나가는 척 할 땐 언제고 이제 돌아와서는- 교수님으로 따지자면, 가당치도 않은 월권을 휘두르려고 합니다. 주제를 선회 해 주십시오.” “하하하하하!” “?” 별안간 터지는 혜성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에 모세가 흠칫 놀란다. 한 참을 시원하게 배를 쥐고 웃던 혜성은 노란 머리칼을 크게 흔들더니 평온을 되찾는다. “…별 미친 참견을 다 들어보겠군, 모세.” “!” 그리고 숲의 정령보다 두려운 시선을 모세에게 강하게 찌른다. 수페리우스가 변했다. 예전의 그가 아니다. 4학년 이상의 학생들은 서서히 손에 땀을 쥐기 시작했다. 울며 불며 뭐라고 소리치고 테레사나 찾으려니 싶었던 기억 속의 신혜성은 어디에 있지? 눈을 씻으면 다시 나타날까? “지금의 너는 상황에 따른 중재자 이상의 역할이 못 된다. 증인 이라는 구실을 쥐었으면, 가끔 1년 전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기만 하면 된다. 물론, 그 설명이 필요할 때만.” “…….” 수페리우스의 비아냥에 모멸감을 느낀 모세가 뭐라고 한 마디 더 하기 위해 입술을 움찔 거렸지만, 가히 틀린 소리가 아니었기에 그는 참기로 한다. 멀리 앉아있는 이자벨의 안면이 창백해 져 갔지만 모세는 참아야 했다. “신입생 환영회를 거치면 이 학교에 소속감이 생겨서 1년 내내 거의 들뜨기 마련인데, 그들은- 전~혀요.” “끼워 맞추는 식이군, 수페리우스군?” 이제는 로제리오도 정신을 차렸는지 좌중을 향해 날카로운 지적을 퍼부었다. 하지만 이 때 마저 수페리우스가 더 빨랐다. 그는 오직 오늘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단 한 순간도 지지 않고 노련한 말솜씨로 좌중을 휘어잡았기 때문이다. “하하하하! 끼워 맞추다니요… 더 천박하게 표현하십시오. 저는 현재 밀어 붙이는 거지요, 로제리오 교수님.” “뭐…?” “저는 황량해진 아마데우스의 변화를 꼬집기 위해 유도 성 문장을 내뱉은 것뿐입니다.” “!” “혹시나 해서 꺼냈던 말이니까요, 방금의 신입생 환영회는.” “!”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3층의 그를 지지하는 학생들이 흥분하여 소리쳤다. 그들은 강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녹초가 되서 자포자기 식으로 될 때 수페리우스는 저렇게 말 해 준 것이다. 신입생 환영회가 '왜' 없어졌냐는 가벼운 질문으로 로제리오를 이끌며 그에 반응하는 교수에게 '당신은 아마데우스의 변화를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라는 비수까지 꽂아버렸다. 한 참 동안 침묵이 맴돌았다. 쥐죽은듯이 조용한 가운데 한 방 크게 맞은 것처럼 벙쪄 있던 로제리오가 가까스로 말을 잇는다. 그는 현재 어지럽고 구역질이 나올 것 만 같다. 연주라면 모를까, 삼 천 개의 시선을 받아내며 일상적인 '대화'를 유지할 능력을 신은 허락하지 않아서일까. 로제리오는 힘겨운 숨 소리를 언어에 섞어 내보냈다. “확실히 나의 갑작스러운 규율이….” “그것은 억압 이지요. 이곳은 일반 학교가 아니라는 걸 잘 아시잖습니까.” “…….” 허공에 커다란 십자가를 그리며 수페리우스가 정도의 선을 표현한다. 로제리오는 순간, 이 재판을 만만하게 여기고 아무런 준비 없이 찾았던 지난 시간들이 후회스러웠다. 1년 내내 자신의 말이라면 느낌표조차 달지 않았던 이 학교의 움직임에 너무 익숙해진 결과였다. 거침없이 할 말을 다 하고야 마는 수페리우스라니! 그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화살이 쏘이는 기분이었다. “여기는 아마데우스 입니다. 규율 보다는 본인들 스스로 찾고, 뛰어다녀서 쟁취해야 하는 곳이라고 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대다수의 학생들은 그게 아니었지요.” “대다수라고 하지만 수페리우스 그건!” 캉- 카캉- 로제리오의 큰 소리에 맞추어 혜성이 앉은 자리에서 날렵한 손잡이를 내려 쳤다. 로제리오는 다시 조용해졌다. 그는 현재의 수페리우스를 적응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주어진 자유 속에서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불안정해 합니다. 사투를 벌이지요. 무엇을 위한, 무엇을 향한 사투인 줄도 모르면서 막연히 주어진 자유로운 터전이 불안했던 겁니다.” “수페리우스!” 긴 목을 앞으로 빼며 쉬지 않고 입술을 놀리는 수페리우스. 힘이 들어간 그의 날씬한 양 쪽 팔은 의자 손잡이에 딱딱하게 쥐인 상태였다. 혜성을 몇 번이나 돌아보는 로제리오와 모세에 반해, 그는 단 한 번도 청중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의 가슴이 말한다. 나는 너희들을 대변해 주는 미친 자가 되어 소리치니, 너희는 남의 이야기처럼 들어도 좋다. 별안간 나타난 이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거든 '앞으로' 지켜보면 된다. “테레사를 흠모했던 아이들과, 막연히 음악이 아닌 자신들의 진짜 꿈을 찾아냈던 낙오자의 모임 아이들, 음악에의 한계 때문에 졸업 이후에 갈 길을 못잡는 사람들.” “수페리우스!” 로제리오의 격앙된 음성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수페리우스의 음성이 연주회장의 넓은 벽을 쩌렁쩌렁 울린다. 그의 연주는 악기가 없어도 실현되고 있다. 뮤즈! 3층의 누군가가 크게 소리쳤지만 안타깝게도 토론에 몰입한 수페리우스의 귀에는 안착되지 못한다. 그는 서서히 흥분하고 있었다. “물론 저는 잘 모릅니다. 저는 아마데우스의 모든 것을 사랑했고, 따랐으며, 외출 금지 사항이 있다는 것 조차 몰랐을 정도로 적응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왜 이런 말을 하는거지? 계속 잘 지내면 되는 게 아닌가!” “교수님!” “!” 뻥 뚫린 좌중의 모든 눈동자를 향하여 수페리우스는 '교수님!' 이라고 크게 외쳤다. 거의 모든 학생들과 교수들, 신부님들과 수녀님들까지도 수페리우스의 행동과 음성에 덜미가 잡힌 짐승처럼 몸부림을 치는 듯 싶었다. “제가 왜 이러는지, 왜 돌아왔는지 정말 모르겠습니까?” “……!” 하느님. 이것은 월권 이상의 것입니다. 자격 없는 자의 미친 외침이지요. 그러나 딱 한 사람 누군가가 해야 할 필요한 소리를, 제가 대신 합니다. 마지막이란 없는 시간의 출발을 위하여. 제발 닥치고 들어주소서. “이게 다 체계가 잡혀져 있지 않고, 어영부영 해외 아마데우스의 건물만 본따 왔기 때문입니다!” “!” 다른 생각 따위는 방해가 되니까 필요 없어! “모르시겠어요?” “!” “여긴 한국 이란 말입니다!” “!” 쏴아아- 큰 파도가 밀린 것처럼 넓어진 공간이 있다. 쩡- 얼어붙은 시선은 밑바닥부터 서서히 타오른다. 혜성의 당찬 외침이 공간 전체에 흩어질 때 3층의 거의 모든 학생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페리우스가 아무도 하지 않았던, 어쩌면 나태해서 대충 넘겼던 모든 것을 저 혼자 바꾸려 한다. 아니, 바꾸기 위해 '시작'의 기회를 얻고자 한다. 저것은 일인 시위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 이기에 할 수 있다. “독일 아마데우스를 아시지요? 그 곳에서 히스클리프는 학생들에게 거수경례를 받습니다! 그럼 우리도 그것을 따라해야 합니까? 독일에서 그러니까요?” “그건…. 그건….” “무엇을 고쳐야 한다는 위기의식은 물론 있으셨겠지만, 교수님은 자잘한 문제는 모두 덮어 놓은 채, 더 이상하고 딱딱한 규율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건 학생들을 위해서야! 혼란이 더 이상 없도록!” “그렇지요! 말씀 잘 하셨습니다! 저도 압니다! 혼란은 물론 없었습니다.” “…….” 흥분이 가라앉은 혜성이 찐득한 땀이 흐르도록 내버려 두며 긴 침묵보다 낮은 어절로 또박 또박 말을 잇는다. “죽은 영혼들의 침묵만이 존재했습니다.” “!” 오래 전의 레퀴엠보다 진한 표현으로 인하야 모두의 등에 소름이 돋게 할 만치 서늘하고도 분명한. “변혁의 이유에 대해서 더 고민하고! 더 생각하고! 더 움직였어야 합니다!” “건방지게!” “너는 자격이 없다 수페리우스!” 벙쪄있는 로제리오와 모세가 동시에 소리쳤다. 현재 혜성에게 들리지 않는다. 혹자는 궁금할 것이다. 저 미친 신혜성은 지금 이 기회마저 버리기 위해 저러는 걸까? 하지만 그의 열정에 찬 눈망울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기회를 잡기 위해 대화를 하는 것 뿐이라고. “학생들의 1년 전 시위는!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제대로 된 방법을 찾기 위한 구실이었으니까요! 그들 스스로도 모르는!” “뭐라고!”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상황이 '자유'라는 것을 몰랐다는 소립니다!” “!” “…어쩌면 깨달았을지도 모르지요. 지금의 1년 덕분에 그들은 예전에 주어졌던 풍부한 시간과 마음껏 취했던 연습에의 소중함을. 뮤즈에의 꿈을!” 뮤즈에의 꿈을! 그 풍부함을! 자유를 통한 자기 멋대로의 연습이 있어야지 혹독한 레슨의 값을 알듯이! 처절하게 퍼지는 혜성의 음성에 따라 학생들은 동요하고 있었다. 아니, 그들은 동요한 지 오래였다. 저마다 잊었던 꿈을 다시 찾은 표정을 짓는게 아닌가. 학생들은 저 신기한 수페리우스가 뭐라고 떠들수록 어깨를 들썩이며 앉은 자리에서 몇 번이나 움찔거렸다. 저런 말을 하다니! 하며 놀라면서도 조금만 더! 라고 자기도 모르게 수페리우스 쪽에 섰다는 소리다. 과반수 이상의 학생들은 벌써부터 힘차게 오른 손을 올렸다. 수페리우스를 지지 할 경우에 오른 손을 올리고, 만약 한 번 올린다면 그것은 취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과반수 이상의 학생들은 그렇게 했다. 그가 앞으로 차차 불어다 줄 기적을 간절히 기대하면서… 마침내 로제리오가 줄줄이 떨어지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체념한 듯 물었다. “원하는게 뭔가.” “…….” 가슴 속 환하게 퍼지는 북의 울림이 있다. 수페리우스는 간질거리는 입술을 억지로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좌중의 넓은 분포가 흐려진다. 시선에 물이 차오른다. 가슴의 박자가 어긋날 때, 내 눈가를 차지한 뜨거운 물기가 바닥에 떨어질 지도 모르겠다. “수페리우스. 네가 원하는 건 위원회의 자리인가…?” “…….” 수페리우스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록 물기의 힘이 세어진다. 좌중이 제대로 읽히지 않는다. 숨이 끊어질 것처럼 가슴이 뛰어서 어쩐지 연주 한 번 못 해 보고 죽을 것처럼. “아니면, 너는 현재 지난 날 낙오자의 모임 우두머리가 된 건가…?” 위원회와 낙오자의 모임. 두 가지를 정확하게 꼬집는 로제리오가 심신이 피로한 탓에 말 끝을 흐리자, 가만히 경청하던 모세가 나선다. 그는 방금 전 교수가 했던 문장을 보다 또박또박하게 다시 말 해 주었다. 이제 수페리우스는 고개를 젓는 것을 관두었다. 그 대신 기다렸다는 듯이 경쾌하고도 나른한 대답을 저 넓은 천장과 선량한 사람들에게 보낸다. 테레사의 위원회. 문정혁의 낙오자의 모임. 선량한 당신께서는 지금 나에게 둘 중 어느 편인가를 묻는가? 더 할 나위없이 침착한 대답이 수페리우스의 입이 아닌 영혼에서 퍼져 나왔다. 그 영 적인 기운은 그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 이었지만 상관없다. “…그 둘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게… 지금의 저 입니다.” “!” “저는 현재 '누군가가' 대신 해야 할 소리를 지껄인 것뿐입니다. 그들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저는 아직 '그들'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작은 사회 아마데우스를 이끌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학생회에게….” “!” 학생회! 숙연해졌던 장내가 또 한 번 들썩인다. 바오르 신부는 기가 막혔는지 허공에 십자가를 그었고 몇 명은 입을 벌린채로 가만히 있었다. 혜성과 비슷한 생각을 품고 살았던 소수의 몇 명이 불꽃보다 뜨거운 빛을 틔웠을 뿐이지만, 그것으로도 좋았다. 혜성은 이제 '자신도 모를 누군가'를 대신 해서 쏘아 붙였던 일인 시위를 슬슬 끝내려고 한다. 한 번 꺼낸 이상 언제고 재생될 가능성이 있다. 말 이란 그런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이 어려울 뿐, 무엇이든 '시작'이 어려울 뿐이지 열어준 길을 밟는 것은 쉽지 않던가. 이것은 여기까지 거론하기로 하자. “…….” 과거의 아름다운 수페리우스. 그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떠들썩하던 좌중의 소리가 죽는다. 그들이 집중하는 가운데, 혜성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진심으로 마음과 영혼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숙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진짜 재판이 시작된 현재, 모세와 로제리오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인다. 눈가에 붉은 눈물기가 자자한 혜성이 먼 허공에 불었음에도 돌아오지 않을 바람을 의식하지 않으려는지 조용하고도 분명한 투를 열었다. “저는 전혀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혜성아!” 하얗게 질린 동완이 멀리서 그를 불렀다. 자신의 친구가 무슨 소릴 꺼낼 지 그것이 두려워서였다. 모두를 대변하며 일인 시위를 펼칠 때는 당당했던 혜성이 '자기 이야기'를 꺼내며 혹시라도 무너질 게 두려워서 동완은 당장이라도 무대에 뛰어 갈 기세였다. 그를 잡아주는 선호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혜성은 보다 분명하지만 아까보다는 부드러운 투로 좌중을 향해 조금씩 고개를 숙인다. “아마데우스 안에서 가장 나약한 사람입니다. 그 증거로 저는 저에게로 몰린 가십을 참아내지 못하고 자퇴서를 제출했었으니까요. 제가 강했다고 기억하는 학생들이 더러 있지만 저는 그 점이 못내 부끄럽습니다.” 그렇게 영혼을 숙이고, “저는 나약했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 잡을 수 있는 것을 끈질기게 잡았던 것뿐이었습니다. 이게 저의 기억입니다.” 혼을 따라 다니는 진정한 마음이 함께 바닥으로 쏟아진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내 자신이 강하다고 느낍니다. 혁명을 통하여 내 발로 아마데우스를 벗어날 때는 홀가분한 마음 뒤에 찾아드는 '도망자'라는 수식어가 항시 뇌리에 차 있었습니다. 1년은 긴 시간이지만 짧은 시간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불같은 시선을 두고, 로제리오는 어쩌면 이제 서야 자신의 뜻대로 토론을 할 수 있겠노라 여기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마데우스의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가 진짜 강한 사람임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고, 발전하는 진짜를 찾고 싶으며, 그로 인해 진정으로 이 작은 사회 아마데우스가 변화되는 것을 지켜보고 싶습니다.” 하느님. 저에게 말을 할 수 있는 입술을 주시고, 음성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부디 저들의 마음이 약간이라도 저에게 향할 수 있도록…. “나약했던 저는 오직 저 자신밖에 몰라서 정작 사랑하는 아마데우스의 내부를 단 하나도 몰랐습니다. 그 점을 고개 숙여 반성합니다.” 수페리우스의 허리가 완전히 숙여질 때,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다. 아마데우스 성당의 솔로를 제 실력대로 멋지게 차지했던 사람이 허리를 숙인다. 비평가 히스클리프로부터 레퀴엠 평을 쟁취한 신비로운 자가 고개를 숙인다. 천하의 가십을 매 번 차지해서 모두의 질투를 샀던 무지한 자가 영혼을 숙인다. 교수님께 당당하게 대들고 감히 테레사의 두 눈을 멀게 했던 자가 언어 마저 숙인다. '고개를 숙일 줄 아는 벼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어디선가 들려오는 민우의 짙은 음성이 혜성의 작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율에 떨게 만든다. 그럴수록 당겨지는 민우의 당당한 문장들이 가슴 아플 만큼 이 순간, 함께한다. “제발 저를 받아 주십시오. 시험을 치르셔도 좋습니다.” '겸손한 눈으로 세상을 봐야 돼.' “…처음부터 다시 배우겠습니다.” '자기 잘났다고 떠드는 위인들은 고개를 숙일 줄 모르거든….' 삼천 명이 넘는 가운데, 그 누구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영혼까지 바닥에 내 친 자는 오직 혜성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자신이 이토록이나 자랑스러웠던 때가 있는지 되돌아 봐야 할 정도로 벅차오른다. '아름다운 벼가 되어줘 마드모아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혜성의 뺨을 타고 기어이 붉은 눈물이 흘렀다. 이자벨 무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오른 손을 들고 혜성을 응시하고 있어서였다. 당장 불화살에 심장이 찔려 죽어도 웃으며 하직할 수 있으리만큼 영혼은 한없이 기쁜 현재를 어쩌지 못한다. 혜성이 고개를 숙이는 것을 시작으로 그를 만만하게 보고 덤비려던 모세와 로제리오는 그러나, 좌중을 휘어잡은 수페리우스에게 입 한 번 벙긋 할 수 없었다. 틀림없이 만만치 않은 준비를 했을 수페리우스는 과연 멋드러진 솜씨로 삼천 명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실권은 로제리오에게 있었다. 그가 당장 '자퇴를 철회한다'라고 하는 게 당연한 순서일 것 같지만, '그렇다면 시험을 주마'라고 해도 토를 달 수 없는 상황이라는 소리다. 로제리오는 좌중의 편에 선 수페리우스에게 자존심이 상했는지 자신의 체제를 한 번에 무너뜨리려는 그가 괴씸해져서 '철회하겠다'라는 말을 도저히 꺼낼 수가 없었다. 자신의 이런 마음을 어쩌면 혜성도 아는 눈치였다. 실제로 그의 입에서 '시험을 치러도 괜찮다'라는 말을 듣지 않았는가. 재판의 시간이 길어지고, 그만큼 타는 듯한 긴장감에 허덕일 때, 좌중 어디선가 부드럽고도 경쾌한 소음이 비져나왔다. “제안을 하나 하는 게 어떻습니까, 냉정하지만 나보다 덜 한 멋쟁이인 로제리오 교수님이시여.” “!” 갑작스레 들리는 쾌활한 목소리에 혜성과 로제리오를 비 롯 모두의 시선이 휙 휙 돌아간다. 시원한 청량제처럼 공기 중에 기포를 터뜨리며 튀어나온 지점은 다름 아닌 이자벨과 반대쪽인 왼 쪽의 누군가로부터였다. 그 자는 일어서며 말을 했고, 동시에 모자를 벗었다. 주변으로부터 파도를 일으키듯이 많은 사람들이 경악하기 시작한다. “!” “히스클리프!” 이 답답한 공간에 시원한 바다와 하늘이 되어 주겠다며 돌연 나타난 사람은 히스였다! 슬픈 안녕 다음에 한동안은 못 볼 것 같았던 히스클리프가 한국 아마데우스에 아무도 모르는 사이 있었다니! 저마다 놀란 가슴을 버려둔 채 멍청하게 히스를 응시하였다. “히…스…?” 뒤 돌아서는 순간 네가 보고 싶을 거라던 히스의 저릿한 음성이 혜성의 전신에 달려들었다. 사납고도 경쾌한 박자를 띈 채, 전보다 더 새파래진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나타난 용감한 자는, 몇 번을 봐도 히스였다. 히스! 오, 세상에. 히스라니! 그는 혜성이 자신을 마주쳐 오자 더 없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근사한 입 꼬리를 올렸고 살짝 윙크 했다. 오래 전, 혜성의 입학시험 연주 날 이자벨에게 했던 윙크보다 멋지고 황홀하게. 덕분에 주변에 앉아있던 상당한 여 학우들이 비명을 참아내며 그를 확인하기 바쁘다. 히스는 당당하게 무대를 향해 소리쳤다. “독일의 땅을 밟았던 그에게 가장 치명적인 독을 뿜어내게 하는 것입니다.” “뭐….” 저게 무슨 소리일까? 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이번에는 히스가 아닌 다른 목소리가 뻥 뚫리듯이 터져 나왔다. “바로 레퀴엠 입니다.” 누구지? 어느 쪽? 무대 앞이다! 저마다 들뜨고 긴장된 감정이 뒤섞인 자들이 수선을 부리며 당장 목소리를 죽일 것처럼 찾아댄다. 그들의 박자가 채 끝나기도 전에, 정확한 음성이 칼처럼 불어 닥쳤다. “그가 또 한 번 레퀴엠을 창시하는 때, 그가 간절히 바라는 자퇴를 철회하십시오.” “!” 정신없이 돌아보기 바쁜 사람들이 방금의 목소리가 생긴 지점의 정확한 쪽에 시선을 돌린다. 그러고는 저마다 노여운 숨을, 짜릿한 감각을 참지 못하고 아예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테레사!” 하느님…. “오! 테레사! 테레사다!” 1년 만에 다시 나타난 수페리우스. 역시 1년 만에 다시 보는 독일의 히스. 그것도 모자라 미국 오하이오 주로 떠났던 오래 전의 테레사마저! 비록 무대 앞 쪽으로 휠체어에 탄 채 테오제네스가 이끄는 대로 나타나긴 했지만, 그의 용맹한 눈동자가 날렵한 선글라스에 가려지긴 했지만 당당한 음성은 모두가 기억하는 전 진, 테레사가 틀림없었다. “테…테레사. 테레사!” 참을 수 없던 비명이 꺼내지고, 혜성은 양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부들부들 떨었다. 손등 위로 쭉 쭉 떨어지는 눈물은 여지없이 바닥을 향했지만, 머리 위로 솟구친 희열은 그 몫을 알지 못한다. 혜성의 심장이 요지부동인 만큼 로제리오를 비롯 모든 인파는 갑자기 벌어진 이 상황에 적응이 힘들었다. “그의 현재 실력은 교수님의 예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형편없는 애송이거든요.” 환하게 웃으며 테오제네스가 밀어주는 휠체어에 타고 나타난 테레사가 장난기 짙은 어조로 연주회장 전체를 향해 말한다. 사방에 신기한 빛이 틔어오른다. 혜성이 테레사와 히스를 향해 저도 모르게 빚어지는 감탄사를 내뱉을 무렵, 또 한 번 좌중을 놀라게 하는 소리가 불거져 나온다. 웬 소녀가 벌떡 일어서서 소리쳤던 탓이다. “선생님은 애송이가 아니에요!” “이번에는 또 누구야?” 하며 저마다 번쩍 번쩍 뛰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막은 채 튀어나온 눈알을 굴린다. 히스의 옆 자리에 있던 낯선 소녀이다. 상당히 낯선 소녀이지만 그녀는 아마데우스 정복을 입고 있었으며 혜성을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다. 혜성은 저 낯선 소녀가 누군지 한 번에 알아내지 못했다. 자신과 잘 알고 지내는 여학생은 없는 거나 다름없었던 탓이다. 그러나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는 소녀는 세상에서 단 한 사람임을 곧 깨달았다. 눈물이 분수처럼 솟아난다. '유리!' 어떻게 온 걸까! 어떻게 정복을 입고 있지? 혜성이 금방이라도 손을 뻗을 것처럼 불안해 하자, 혜성의 그런 표정변화에 덜컥 겁을 먹은 히스가 유리를 앉히기 위해 안간 힘을 쓴다. 이 활화산 같은 상황에서 왜 웃음이 나오려는 걸까. 이 긴장감 속에! 히스, 너는 재주꾼이구나. 오, 테레사. 테레사까지. 혹시 이것은 꿈이 아닐까. 가장 혹독하고도 아름다운 꿈이 아닐까. 히스 덕분에 억지로 자리에 앉혀지는 유리의 타이밍에 잘 맞춰, 이번에는 유리의 바로 옆에 앉아있던 누군가가 숙였던 고개를 올리며 건방진 투를 내뱉었다. “나 원 얼마나 대단한 놈들이 바글거리나 했더니 이건 젖비린내 나는 새끼들 투성이잖아? 룸펜! 역시 널 따라잡을 새끼는 없다! 본 때를 보여 줘!” 레이놀드? 레이놀드다! 한스 패거리 중에 오른팔이나 다름없던 레이놀드가 어떻게 여기에? “우리는 분명히 생전 처음 듣는 클레식에 흡수됐었다. 지금 네가 없는 이태원이 재미없어서 견딜 수 없을만큼.” 아마데우스 정복이 꽉 조이는지 몸을 북북 긁으면서도 시원하게 소리치는 레이놀드는 당장 눈 앞에 맥주가 없어서 아쉽다는 듯 말을 하면서도 입맛을 다신다. 혜성의 벅찬 가슴을 증명하듯 뜻밖의 만남에 당황해 할 새도 없이 눈물은 한없이 흐른다. 무대 바로 밑에 있는 테레사의 시선이, 그의 눈이 없는 현재, 그 어느때보다 강하게 느껴진다. 영혼밖에 남지 않은 지금의 육신이 산산이 부서질 지경이야. 오, 내 안의 신이시여. 지금 이 장면이 꿈이시라면 영원히 깨지 않도록. 히스가 레이놀드 쪽으로 자리를 옮기려던 때, 이번에는 레이놀드 옆 자리의 녀석이 확 고개를 세우더니 굵은 장화를 손에 들고 외치는게 아닌가. 덕분에 주변에 있던 선량한 학생들이 겁에 질려 우당탕 넘어진다. “…룸펜이 제대로 못 하면 내가 장화를 던질 테니 일단 시켜만 봐. 뭐 이렇게 복잡해?” 한스! 한스다! 후렌존 하고 욕을 지껄이고, 그가 던진 장화에 맞았던 옛기억이 떠올라서 혜성은 잠깐이지만 웃을 수 있었다. 저들이 어떻게 이 자리에 왔는지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 당황한 교수들 못지않게 길길이 날뛰는 히스가 답을 제 입으로 떠들기 때문이었다. “야! 너희들! 내가 조용히 있으랬잖아!” 히스… 히스… 정말 네가 맞니… 나의 테레사마저 네가 데려온 거니…. 한동안 시끄럽게 떠들던 무리가 아예 무대로 걸어 나오려던 때, 히스가 답지 않게 무력을 사용하면서까지 그들을 억지로 이끌고 연주회장 밖으로 벗어난다. 십칠 십칠 욕을 지껄이는 히스의 음성이 먼 거리에 있는 혜성에게도 들리는 기분이다. 덕분에 장내는 잠시 시끄러워졌지만 아까의 숨 막힘은 약간 가셔주었다. 히스가 몰고 온 파장은 놀라운 힘을 발휘하였다. 교수님들의 옆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앉은 테레사가 봐도봐도 사라질 것처럼 멀게 느껴져서 혜성은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아이의 입술이 '테레사….'라고 간절한 음성을 터뜨리려던 때, 모처럼 냉정한 면을 되찾은 로제리오가 공포스럽기까지 한 재판 과정을 끝내려는지 최후의 대안을 제시한다. “Helia.” “…….” 잠시 꿈을 꾼 걸까. 히스, 유리, 한스, 레이놀드… 테레사. 오 테레사. 당신은 꿈이 아님을 아직까지 증명해 주시는군요. “그럼… 헬리아(Helia) … 그걸 네 시험 수단으로 삼겠다 수페리우스.” “…그건…?” 테레사가 나타난 바람에 집중력을 잃은 수페리우스가 로제리오가 전한 말 중 유일하게 인식한 '헬리아'가 단 번에 이해되지 않았는지 볼이 붉어졌다. 당황하면 안 돼. 흔들리면 안 돼. 그들은 힘을 주었으니, 더더욱 당당해져야 돼. 수페리우스는 모르는 것 일수록 물러서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재촉하였다. 로제리오의 명석한 두뇌는 뒤늦은 출발을 알렸지만, 좌중의 힘은 이미 혜성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렇다. 로제리오는 한 발 늦게 찾아든 자신의 침착한 태도를 발휘하여 이 상황을 어서 끝내고 싶어했다. “2중주지만 너의 반주를 맞춰주는 상대 역시 피로의 끝을 달리게 되지. 멈춰서는 안 된다. 몇 시간이고 각자 즉흥곡으로서 악장을 만들어서 연주하는 거다. 번갈아 가면서.” “!” 헬리아! 그것은 그리스어로서 '태양'을 뜻하는 단어이다. 아마데우스 안에서 '헬리아' 라는 지시는 형벌 이상을 의미함을 모두는 알고 있었다. 따라서 경악하던 학생들 중 연약한 소녀 몇 명은 하얗게 질려서 자신의 손가락을 감싸 안아야 했다. 손에 잡을 수 없고, 마구잡이로 높은 곳에 올라가서 잡아 버린다 한 들 손가락은 까맣게 타 버릴 힘을 지닌 '태양' 헬리아가 시험 종목이 되었다. 그만큼 난이도가 높아서 두 명의 연주자가 지칠 때까지 즉흥 연주 테마가 시작되면 그것을 끊임없이 변주곡으로 되풀이해야 하는 것을 뜻한다. 혹자는 반쯤 미쳐야지만 헬리아 연주가 끝이 날 거라고도 한다. “다만, 수페리우스. 너의 상대가 있을 때만 가능한…….” 로제리오의 설명과 동시에 야비한 미소를 띠고 있던 모세, 그리고 헬리아에 경악한 좌중을 비롯 모두는 또 한 번 순간을 정지시켜야 했다. 대화의 요점을 한 번에 인식하기도 힘든 수페리우스 앞에, 테레사가 분노를 참아내는 사이에 또 한 번 누군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제가 하겠습니다.” “!” “?” 헬리아! 그것도 1년의 공백기가 있던 수페리우스의 반주를 맞춰 줄 자가 과연 누구더냐. 아무도 없는게 당연한 이치이다. 제 아무리 좌중의 마음을 끌었다지만 헬리아 앞에서는 다들 손을 쓸 수 없을 텐데? 이것이 바로 로제리오의 비상한 계략 이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제가 하겠습니다' 라고 나타난 누군가로 인해 무산될 지경이다. 화가 솟은 로제리오는 도대체 누구냐는 듯 신경질적인 표정이 되어 중앙의 좌석을 쏘아보았다. “누구….” “그 사람의 미친 음악에 제대로 반주를 할 수 있는 자는 저 밖에 없습니다.” 설마… 설마… 로제리오와 모세, 또 혜성에게로 퍼지는 믿기지 않는 전율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벙 쪄 있는 그들을 대신해서, 방금 전 인물의 이름을 친절한 학생들이 너도나도 소리쳤다. “문정혁!” 기억 저 편 잃어버린 여름, 그 뒤 황홀한 가을마저 몽땅 부활하는 소리가 아마데우스 전역에 퍼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wgreene@naver.com 이번편은.. 감상의 기적(퍽;) 쨘.. 인물들이 다 등장했습니다.^^ (..아.. 잠수기에 이게 뭔짓이여.. 그러나 음악을 듣는 순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일디보 짱. 이제 아버지한테 맞아 죽으러 가는거다 화이트그린. 일하다 말고 너는 미친거다.) 오타 수정도 제대로 못해서 사태 장난 아닌데 일단 올리고 보는 무대뽀 정신 초대형 칼이으마. 이번엔 땡스투 달려고 했는데 그건 내일로 미뤄야 할 판입니다. 아.. 아버지한테 몰매만 안맞으면 성공하는거다.(중얼중얼) 행복하세요~ 맞을 때 맞더라도 이건 써야겠스므니다. 댓글 주신 안젤리스님, 알렌님, 데빌님, 연님, 가타카님, 주황애기, 별하님, 고맙습니다. 감상방(?)의 주황애기, 로아님 사랑합니다. 안부게시판에 감상주신 주황애기, 미니밍이님, 즛토마메님, 자자님, 로아님, 경민씨 감사합니다 메일 주신 러브요정님, 미스신님 고맙습니다. 덧글 13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23~24(학생재판)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23~24(학생재판)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25~26편(헬리아 I) ▼ 다음글 - 2악장 21~22편(백의 사막)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25~26편(헬리아 I)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6/12 17:46 http://blog.naver.com/wgreene/110005132056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612 25-26편 업데) Amadeus 음악 : Sei Parte Ormai Di Me(당신은 나의 일부분) - IL DIVO(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Sei Parte Ormai Di Me-.. 이 사람은 나의 아마데우스입니다…. 2악장 25~26편 헬리아의 탄생까지는 정확히 2주일 하고도 이틀이 남아있었다. 로제리오 교수는 곧 다가올 '입학식' 당일 날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던 야외 콘서트 장에서 시험을 보겠다고 선포했다. 학생들은 또 한 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야외 콘서트장이라니! 백옥처럼 하얗고 순결한 콘서트장의 무대에는 늘 징크스가 따르기 마련이라서 오래 전에 두어번 활용되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늘 장식용으로서 전락했기 때문이다. 하물며 야외 콘서트장이 어디 인 줄도 모르는 학생들이 태반이었다. 아마데우스 분수대를 지나 연못의 다리를 건너 오솔길에 들어서면 두 갈래 길과 만난다. 두 갈래 길 중, 사람의 인적이 드문 왼 쪽으로 쭉쭉 걸어가다 보면 수녀님들의 쉼터가 드러난다. 쉼터 건물에서 족히 5분은 더 걸어야지 나타나는 게 바로 ‘야외 콘서트 장’이었다. 처음 그 곳을 발견한 사람들은 아래로 푹 꺼지면서도 웅장한 넓이와 기품에 압도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훌륭한 장소가 기억 속에 사라진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아마데우스 외벽이 보일 정도로 가장 가장자리에 지어진 그 곳은 활용도가 떨어진 곳으로 유명하다. 푸르싱싱한 외벽의 붉은 장미가 아니었다면 그 값은 더 하락할 것이다. 밑으로 쭉 꺼진 계단 형태의 좌석은 위에서 내려 보면 전체적으로 동그란 원 형을 이룬다. 원의 끝 부분에 위치한 역시나 동그란 형태의 백색 무대는 쓸쓸한 먼지가 휘날리기 마련이다. 천 명이 한꺼번에 수용된다는 넓은 백색의 콘서트 장은 그러나 앞서 설명했듯이 ‘징크스’가 있었다. 연주회를 결정한 날이면 이상하게도 온갖 악천후가 뒤따랐기 때문이다. 연주자의 손가락에 이상이 생긴다던지, 갑자기 비가 내려서 악기에 습기가 찬적도 빈번했다. 수페리우스의 헬리아는 정확히 2주 이틀 후, 이 곳 야외의 넓은 콘서트장에서 태어날 것이다. 신입생들은 억지로 이 먼 곳까지 와야 한다. 넓고 웅장한 건 사실이지만 야외 콘서트 장에는 단 천 명만이 입장할 수가 있다. 과연 이게 무슨 뜻일까? 높은 기둥이 그리스 신전처럼 떠받들어진 연주회장이 아닌 야외 콘서트 장에서? 그렇다. 로제리오는 수페리우스를 잘 모르는 신입생들을 위주로 좌석을 배치한 뒤 헬리아를 펼치려는 것이다. 실력이 형편없어진 혜성이 낯선 후배들 앞에서 그것을 잘 해 낼 리가 없고, 신입생들 역시 혜성의 헬리아를 통해 ‘공포심’을 처음으로 배워서 아마데우스라는 학교를 어려워 할 것이다. 로제리오가 노리는 두 가지 효과는 바로 그것이었다. 로제리오와 수페리우스의 학생 재판이 끝난 직후, 그 뜨거운 열기가 식기도 전에 거의 모든 학생들은 뛰는 가슴을 안고 분수대와 게시 대 근처에서 비명을 질러야 했다. 그 근처의 시계탑 꼭대기에 매달린 채 하늘 높이 펄럭이는 아마데우스의 휘장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다. 화재 이후 복구 된 데블 관의 장식이 별안간 땅에 곤두박질해서? 그것도 아니다. 학생 재판이 끝난 다음날 새벽, 근 1년여 만에 게시판 전체에 '가십'이 부활해서였다. “가십이다!” 헬리아다! 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웅장한 박자로 누군가가 새벽을 열었다. 3학년 학생들은 자신들의 선배가 소리치는 통에 귀를 막아가며 우두두두 그 쪽으로 뛰어갔다. 과연 텅 빈 게시 대에 우아한 활자체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테오제네스! 테오제네스가 돌아온거야!” 제일 먼저 서명 란부터 확인한 소년이 희열에 들떠 허공에 큰 소리를 내뱉었다. 시간이 지나기 무섭게 쉭쉭 모여드는 학생들의 발걸음이 있다. 그들은 분주한 게시 대 앞에서 어떻게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몸싸움도 벌였다. 신입생들에게는 낯선 이 장면이 신선함으로, 선배들에게는 그리움 끝의 기쁨으로 자리하게 된다. “테오제네스! 가십이다!” 푸두두두- 분수대에 앉아있던 작은 새들이 학생들의 소란스러움에 놀랐는지 힘차게 날개 짓을 한다. “누가 읽어 줘! 보이지 않아!” “가십이다!” “거기 밀지 마세요! 본 사람은 어서 밖으로 나가면 되잖아요!” < 2주 후로 다가온 헬리아! 신성한 아마데우스에 등장부터 파장을 일으켰던 수페리우스의 제 2의 도약이 다가오고 있다. 3학년 신입생들에게는 물론 생소하겠지만, 로제리오 교수는 지난 날 학생 재판 이후 엄청난 결정을 내렸고 그것으로 하여금 인쇄동이 돌아가게 만들었다. 따라서 이 가십은 상당히 사실적이며 나 테오제네스의 사견이 뒷받침 된, 지극히 주관적일 지도 모름을 미리 밝히는 바다. > “테오제네스! 테오제네스!” 테오제네스의 글자는 분노를 참고 있었음을 학생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단 한 번도 기사 내용 중에 자신의 이름을 거론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유들 하게 핵심만을 집어 낸 뒤 가십 당사자를 위한 쪽으로 부드럽고도 확실하게 적는 유형이었다. 그런 그가 헬리아에 따른 로제리오의 부당한 처사에 진심으로 화를 내는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으로, 활자로서 인쇄 동을 갑작스레 부활시켰다. 따라서 그를 지지하고 좋아하던 학생들까지 순식간에 테오제네스 쪽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모세를 지지하는 아이들은 테오제네스도 한 물 갔다며 저희들끼리 비아냥거린다. 파장은 조용하던 아마데우스에 한없이 휘몰아치기만 할 뿐, 도통 물러서지 않는다. < 높은 기둥과 아치형의 난간이 천정까지 뻗어있는 연주회장은, 연주자에게 최상위의 컨디션을 선물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로제리오 교수는 전혀 사용되지 않는 외곽에서도 먼 ‘야외 콘서트 장’을 선택했다. 게다가 날짜는 아이러니하게도 9월의 입학식으로 정하는 오류를 범했다. 물론, 수페리우스가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그 날의 상황은 바뀔 것이다. 지옥의 헬리아! 이제 수페리우스의 어깨는 더더욱 무거워진다. 그는 장소마저 최악의 조건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입학식을 마친 갓 신입생들을 좌석의 곳곳에 배치한 뒤, 로제리오가 얻으려는 수확의 열매는 과연 어떤 맛일까. 달콤할지, 쓰고 매운 맛일 지는 수페리우스의 방향에 달려있다. 상식대로라면, 날짜로 봤을 때 입학식보다 일주일 전에 있는 졸업식 날 헬리아가 탄생되는 게 맞다. 92%의 지지율로서 승소한 수페리우스의 시험 결과 여부에 따라 그가 야기한 학생회가 탄생될 지, 아니면 그가 진정으로 자퇴 학생이 되어 우리를 떠날 지, 앞으로 2주 후를 지켜보자. 만약 후자의 상황이 벌어질 때, 아름다운 아마데우스는 전과 똑 같은 상황으로 돌아갈 것이다. -테오제네스- > 가십은 급하게 찍어 낸 만치 간결하고 짧은 내용으로 끝났다. 그러나 학생들은 연거푸 테오제네스의 글귀를 확인하기 바쁘다. “그의 중립이 사라졌다. 모세에게 딴지를 걸 수 없을거야 이젠.” 모세의 직설적인 가십을 지지하던 소년이 입을 내밀며 비아냥거린다. 그러자 테오제네스의 서명을 수십 번 읽던 제일 앞줄의 소년이 꽥 하고 소리쳤다. “이것이야 말로 테오제네스이기 때문에 절제하며 확실하게 적은 흔적이다 멍청아!” “만약 모세가 지금 내용을 적었다면, 글쎄? 모세야말로 지극히 주관적인 사람이지 아마?” “그는 늘 비꼬기만 하잖아.” “맞아. 오죽하면 인쇄 동을 닫았을까.” 모세 쪽의 아이들은 자기들이 숫 적으로 불리해지기 시작하자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학생 재판에서 승소한 수페리우스, 다시 출현한 테레사와 테오제네스. 그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현재 92%의 학생들에게 더 쓴 소리를 들을 수도 있어서였다. 뭔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과열되어 수페리우스를 지지하는 현재 아마데우스 학생들의 모습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오늘도 이렇게 시간이 흐른다. 헬리아(Helia) I 조용히 코코아를 들이키던 동완이 혜성을 보았다. 허공에 붕 뜬 표정인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평온하기 짝이 없는 혜성이 막 누군가와 인사를 마치고 돌아왔는지 싱글벙글이다. “조심해야 돼, 혜성아.” “코코아니? 향이 좋구나.” 아직 아무런 수업도 들을 수 없는 혜성이 또 어디를 쏘다니고 왔는지, 그의 좁은 기숙사 방에 와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그를 기다리던 동완이 기어이 혜성의 얇은 어깨를 눌러 앉히자 그제 서야 조용히 차를 들이킨다. 둘은 조용히 했던 이야기를 또 꺼내고 하며 반갑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학생 재판에 나타난 유리라는 소녀에 대해서는 혜성이 대답하지 않는 관계로 동완은 그 얘기만큼은 피했으며, 그 대신 레이놀드와 한스의 이야기는 아주 자세하게 경청할 수 있었다. “테레사를 만나고 온 거니?” “…아니. 나는 그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 별채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안 가봤거든.” 룸펜에서의 혜성이 어떻게 지냈었는지 듣는 내내 동완은 코코아를 한 모금도 마실 수가 없었다. 겨우 진정이 되어서 테레사 쪽으로 화제를 돌렸을 때 역시, 코코아는 손에 쥔 채로 식기 바쁘다. 동완은 혜성의 정신세계를 더더욱 읽을 수 없다고 여겼는지 자포자기식으로 숨을 내쉬었다. 테레사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좋아서 날 뛸 때는 언제고, 삼 일이 지난 현재까지 만나지 않았다니! 동완은 진정으로 자신의 친구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럼 혜성아. 정혁이를 혹시 만나 봤어?” “정혁이? 아니.” 생글생글 웃으면서 대답하는 모양에 마침내 코코아 컵을 탁자에 놓은 동완이 입을 떠억 벌린다. 그럼 누굴 만나러 다니는 거야? 라고 묻고 싶었지만, 계속 산책 했어- 라고 대답할 게 뻔 하기 때문에 그 점은 생략하고 동완은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정혁이가 수상해. 재판이 끝나자마자 사라진 것도 이상하고, 갑자기 나타난 것도 이상해. 너의 반주를 맞춰 주겠다면서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잖아.” “겨우 삼 일 나타나지 않은 거야.” “그러다가 당일날 쓱 나타나면 어떡하니.” “…….” “음… 일반 기숙사동에서 지내는 건 괜찮아? 여긴 특실이 아닌데….” “아…….” 정혁의 이야기가 나오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혜성을 기다리다 못 해 동완이 또 화제를 돌렸다. 그렇잖아도 묻고 싶었다. 로제리오 교수는 예전에 혜성이 지냈던 특실을 다시 사용해도 좋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성이 현재 지내는 방은 일반 기숙사동 중에서도 특히 말썽이 많은 학생들을 모아 둔 좁은 동이 아닌가. 걸걸한 사내놈들이 나태한 표정으로 복도에서 늘어져 있는 것을 몇 번이나 목격했던 동완은 진심으로 이런 곳에서 생활하려는 혜성이 염려스러웠다. 동완의 질문에 화사한 복사꽃처럼 웃어주며 혜성은 볕이 쏟아지는 창가에 섰다. 그러고는 가을의 향이 솔솔이 밀려오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근사한 빛이 와르르 밀려들어와 수페리우스의 전신에 반짝인다. 아이는 기쁘게 눈을 반짝이며 팔을 내밀었다. “봐.” “……?” “가장 후미진 곳에 위치한 기숙사동이라서 그런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풍광이 한 눈에 들어오거든. 근사하지?” “!” “정원사 아저씨들도 여긴 형편없다고 여겼는지 야생 꽃을 그냥 내버려 둬. 학생들이 가장 기피하는 높은 언덕의 서쪽 기숙사동 이라서 그런지 모든 것이 한 눈에 다 보이지.” “…이민우도 예전에 이 기숙사동 이었는데.” “그렇지!” “?” “민우의 향이 여기 저기 남아 있다, 동완아. 눈을 감고 후각에 집중해 봐. 라일락의 향이 물씬 풍길거다.” “너… 설마 여기… 여긴-!” 특실과 비교하기 힘들 만큼 평범하고도 스산한 환경이 불만이었던 동완이 경직되어 소리쳤다. 혜성은 햇살과 하나가 되어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맞았어. 여긴 예전에 민우의 방이다. 너는 한 번도 안 와봤지? 이리 와서 창밖을 봐. 동완아… 여기서는 누가 기숙사동으로 걸어오는지도 자세히 보인다.” “…….” “눈이 오면 미끄럼틀 타기에 딱 좋지. 높은 언덕처럼 지어져 있어서인지 인적이 많지는 않아. 어떻게 보면 자유롭기 까지 해.” “…….” 그만 말해도 돼, 동완은 몇 번이나 열린 입으로 외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움직여지지 않는다. “오르페우스관이 좀 멀긴 해도, 괜찮아. 연습은 방에서 해도 돼. 뭐… 두어 시간 하다 보면 옆 방 놈들이 시끄럽다면서 문을 두드리긴 하지만. 하하하하!” “…혜성아….” “아닌가… 세 시간 이었던가… 결국 옆 방 놈들하고 한바탕 싸우다가 내가 숨겨뒀던 술을 선물로 줬지. 같이 마시기도 했고… 취한 채로 건반을 누르니까 그놈들도 룸펜의 녀석들과 다를 게 없더군. 하하하….” “혜성아….” “…….” 동완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혜성의 외로운 등이 한없이 말라 보여서 가슴이 아팠다. '주목'당하는 것에 익숙해질수록 사람은 타는 듯한 외로움 역시 길들여지기 마련이다. 혼자만의 싸움이 되풀이되며, 자기만의 세상을 억지로라도 지어야 한다. 동완은 입술을 깨물었다. 노랗게 빛나는 자신의 친구에게 할 수 있는 말이란 이것 밖에 없었다. 예전의 동완이라면 결코 이런 말을 하지 않았겠지만, 그는 최선의 문장을 내뱉기로 한다. “혜성아….” “…….” 헬리아를 앞둔 너의 심정이 어떨지, 갑작스러운 기대를 한 몸에 받은 너의 마음이 어떨 지, 나는 알지만 그걸 아는 거라고 할 수 있을까. “넌… 괜찮아… 괜찮아….” “…….” 혜성의 등이 움찔 떨리는 것을 목격할 때 동완의 뺨을 타고 긴 자국이 떨어졌다. “혜성아. 혜성아… 넌 괜찮아… 넌 정말 괜찮아….” 아이의 얇아진 등이 부르르 떨리며 막 들어온 바람에 흔들리던 언어를 몽땅 실어 보낸다. “…그래… 나는 괜찮은 거야… 나는 하나도 두렵지 않은 거야… 나는 괜찮은 거야….” “그러엄. 너는 괜찮아… 신혜성은 괜찮아….” “…응….” 창틀을 쥐고 있던 혜성의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가을, 오후의 햇살이 온통 뜨겁기만 하다. 동완의 염려대로 혜성은 그 누구와도 만나지 않았다. 가끔 가다가 사비나 교수님께 공손히 인사를 하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눌 뿐, 아이는 자신이 사랑하던 아마데우스 성당조차 발길을 끊어버렸다. 그 매정한 결심이 있기까지 어떤 마음이 자리했을지는 수페리우스가 아닌 이상 동완 조차 예상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지! 그는 타인의 신분으로서 아마데우스에 기거하는 방랑자와도 같이 묘한 낯으로 생활을 꾸렸다. 오르페우스관은 커녕 곳곳에 즐비한, 하다못해 병동 창고에 대기 중인 피아노조차 건드리지 않았다. 그가 만지는 것은 오래 전 민우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아 있는 기숙사의 피아노뿐이었다. 아이는 밤이면 찾아오는 기다란 고통을 억지로 견딘 적도 허다했다. 민우의 건반은 사람의 손길이 분주하게 스친 흔적이 만연했기 때문이다. 조율한 지 오래 되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건반은 솔직함을 전달했다. 민우의 피아노를 만질 때마다 혜성은 하나 둘 씩 깨달았다. 낮의 학생들이 모두 기숙사 밖으로 빠져나가 수업에 열중할 때, 민우는 자신의 방에서 하염없이 피아노와 하나가 되었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은 거짓을 야기해도, 건반은 거짓을 진실로 표현한다. 사람은 거짓으로 감동을 말하여도, 건반은 오직 진짜 감동만을 표현해 준다. 천 번은, 만 번은 스쳤을 민우의 건반은 아주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누군가의 손가락에 오랜 시간동안 길들여진 흔적만이 세세히 남아 있을 따름이다. 이 방에 온 첫 날, 혜성은 건반에 입술을 누른 채로 한 참 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실 혜성은 자신이 틈 날 때마다 무엇을 연주하는지를 잘 몰랐다. 악보가 많은 것도 아니거니와 표현력을 지적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였다. 재판 직후 잠깐 스치기만 했던 히스는 아이의 보드라운 뺨에 키스를 해 주며 곧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만 했었다. 혜성은 이 많은 학생들이 존재하고 있는 아마데우스 안에서, 룸펜에서 보다 더 한 갈증과 외로움과 사투를 벌이는 중이리라. 학생 재판 덕분에 자신을 특별하게 인식하는 학생들의 시선이 던진 결과였다. 언제고 룸펜으로 돌아오라며 정답게 안녕을 해 준 레이놀드와 한스가 종종 떠오르는 것 만 봐도 잘 알 수 있었다. 그럴수록 아이는 건반에 매달렸다. 건반이 귀찮아지면 술을 마셨고, 걷고 싶어질 땐 하릴없이 숲길을 다녔다. 어느덧 로제리오가 제시한 2주일의 기한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늘 기숙사에서 지낸 혜성은 동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아마데우스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진정한 아마데우스 안의 방랑자가 되어 유유자적하게 시간을 보내는 듯싶었다. 문정혁과의 연습은 없다. 그는 마치 나타난 것 자체가 거짓인 것 마냥 단 한 번도 혜성을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마데우스의 어딜 가도 문정혁은 찾을 수 없었다. 마침내 헬리아를 연주하기까지 단 이틀 만이 남았을 때, 혜성은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기숙사 밖에 오고 가는 학생들에게 번쩍 손을 흔들며 멍청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문정혁에 대한 고민 따위도 없었다. 히스가 만나자고 전갈을 보내왔지만 혜성은 기숙사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후 무렵이 되자 침대 밑에 차례대로 세워진 술 병 중에 어떤 것을 마실까 순서를 매기던 혜성이, 마침 노크소리가 들리자 쭈그린 자세에서 귀를 바짝 세웠다. 동완이일까? “들어와.” 바닥 구석구석에 찰랑이는 술병들 중 멀리 위치한 것을 잡기 위해 팔을 뻗는 중이었다.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혜성의 방문을 밀고 들어왔다. “누군진 몰라도, 잠깐만 기다려.” 팔을 뻗어도 손에 잡히지 않는 술병 때문에 오기가 생긴 혜성이 기어이 바닥에 완전히 엎드려서 침대 밑에 기어들어간다. 기숙사에 찾아 온 누군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혜성이 침대 밑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성큼성큼 이쪽으로 걸어왔다. “잡았다! 이 놈… …응?” “…….” “으부- 윽! 내 술! 헉. 누, 누구야!” “…….” 침대 밑, 그 중에서도 가장 끝에서 대기 중이었던 술병을 쥐고 쾌거를 외치던 혜성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두운 침대 아래에서 자신의 몸이 질질질 끌려 나오고 있어서였다. 덕분에 술병을 손에 쥔 채로 아랫배가 크게 들썩여진다. “……!” “…….” 자신의 양 쪽 발목을 밖에서 쥐고 단 한 번에 확 잡아당긴 사람은, 그렇게 방금 전 노크를 하고 닥친 사람은, 정혁이었다. 2주 하고도 하루 전, 학생 재판의 막바지에 잠깐 보였던 꿈의 인영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오랜만이다, 정혁아. 잘 지냈니, 정혁아. 그간 준비해뒀던 근사한 인사말은 백지가 된 머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 현재 혜성은 자신이 바닥에 엎어진 상태인 것도 망각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바닥에 끌려 나와서 엎드린 상태의 수페리우스는 경직 되서 고개를 든 채로 크게 떠진 눈망울만 깜빡였다. 긴 침묵이 둘에게로 감싸여 오래오래 끊어지지 않았다. 후다닥 정신을 차린 혜성이 가슴까지 엎어져 있는 상황에서 바시시 웃으며 술병을 쥔 채로 '너 이거 마실래?'라는 질문을 던져 봤지만 꼿꼿하게 선 채로 바닥을 노려보는 정혁은 아무런 대답을 주지 않았다. “…정….” “일어 나.” “…어?” “…….” 정혁의 차가운 말문에 그제 서야 자신의 모양새를 알아차린 혜성이 후다닥 술병을 쥐고 일어섰다. 한웅큼은 더 자란 정혁의 높은 어깨가 닿을 락 말락 가까워졌다. 노여운 시선만 던지는 정혁은 흡사 오래 전, 자신을 적대시 하던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냉랭하기만 하다. 기가 죽은 혜성은 씁쓸하게 웃으며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 “…앉아.” “?” 자신에게 내밀어진 혜성의 오른 손을 본 척도 안 한 정혁은 피아노 뚜껑을 열고 매몰차게 말했다. 가슴이 아프다. 그동안 히스에게 너무 길들여졌던 걸까? 자기가 먼저 반주를 해 주겠다고 한 주제에, 이틀 전에 나타나서는 이토록 차갑게 굴다니! 혜성은 눈물이 핑 돌았지만 어려지는 스스로를 다 잡으며 피아노 의자에 앉은 정혁의 옆에 섰다. 만약 정혁의 지시대로 옆에 앉는다면 그의 어깨에 가려진 탓에 건반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정혁의 노려보는 시선에 놀라서 아이는 곧 의자를 끌어와서 그의 곁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정혀….” “첫 주제는 네가 어떤 형식으로 해도 상관 없지만, 헬리아 3주제 부터는 청중을 속이는 거다.” “!” “지휘권을 조금씩 조금씩 나한테 넘겨.” “…….” “대답을 안 하는 군. 좋다. 그게 싫다면 지금 내 즉흥곡을 듣고 고민 해 봐.” “…정혁아….” “조용히 해.” “…….” 1년 만에 만나는 다정한 사람이여. 그는 딱딱한 돌보다 차가워졌다. 혜성은 숨을 쉬기 싫을 정도의 노여움 앞에서 고통을 이기기 위해 안간 힘을 썼다. 가깝게 앉아있는 정혁의 어깨는 지난 1년을 합한 것보다도 멀게 느껴졌다. 그가 아닌 것 만 같았다. 그가 왜 이런 식으로 나타나서 차갑게 구는지 모를 일이었다. 숨 소리도 차단한 혜성을 확인하는 즉시, 정혁은 늘씬한 손가락을 뻗어 건반을 사정없이 누르기 시작했다. “……!” 달라! 아이의 내면에 첫 음절이 소화되기도 전, 뜻밖의 상황이 공간을 가른다. “…….” “!” 1년 내내 어디서 무얼 했는지 모르지만, 정혁의 실력은 훨씬 향상되어 있었다. 물 흐르듯 매끄럽게 퍼지는 소나타의 트릴이 계속 될수록 혜성은 저도 모르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2주 동안 자신이 하릴 없이 눌러댔던 소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청아하고도 힘이 넘치는 정혁의 연주에 넋이 빠질 지경이었다. 그는 지난 1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연주에만 미쳤던 게 틀림없었는지 보다 진한 격정을 누른다. 가을의 폭풍우가 사정없이 몰아쳤다. 캉- 내리치는 정혁의 힘에 놀랐는지 창밖으로 우수수 떨어지던 가을의 단풍잎이 만 갈래로 흩어졌고 얇은 장식 기둥이 덜커덩거렸다. 그의 격노가 지나 보드라운 수평선을 마주볼 때, 그 순간마저도 정혁의 음정은 섬세한 만치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의 연주는 미끄러워졌다. 이 단어 외에는 딱히 생각나는 게 없다. 테레사의 수식어를 쟁취 할 것처럼 연습 했었는지는 몰라도, 정혁의 손가락은 현재의 테라사가 지닌 ‘은어의 손놀림’마저 위협하는 솜씨였다. 그의 기량은 노력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혜성은 해일에 쏠려도 거뜬히 살아남을 것처럼 거침없이 움직이는 정혁의 솜씨에 압도되어 숨도 내쉴 수가 없었다. “…?” 간간히 상체가 음표에 섞여 흔들리던 정혁 덕분에 그의 머리카락이 짧아졌다는 것도, 그의 키가 커졌다는 것도 미처 몰랐던 혜성은, 별안간 건반 위에 후두두 떨어지는 물기를 낯설게 응시하였다. “!” 정혁의 손가락이 스친 자리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혜성은 냉큼 고개를 쳐들어 천정을 올려보았다. 당연히 막힌 천정으로는 물이 새지 않았으며, 창밖의 화창한 날씨도 여전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정혁아!” 정혁이 울고 있는 것이다. “문정혁! 정혁아!” 쾅- 혜성의 부름에 맞춰 정혁의 제 멋 대로인 변주곡, 미친 소나타가 전체 손가락을 중저음에 찔렀다. 세상에서 가장 강렬한 포르테가 되어 높낮이 따위 없이 온통 힘이 들어간 그것이 번쩍 번쩍 눌릴 때, 혜성의 눈시울도 붉어진다. 정혁의 눈물 때문에 미끄러워진 건반은 그러나 쉼 없이 새로운 음표를 만들어내기만 한다. 철썩- 파도가 밀려올 때마저도 정혁은 그것을 쉬어주지 않았다. 그의 가슴이 찢어지고 있다! 그래, 그래! 정혁아. 정혁아. 『원래 말을 아끼는 성향이니?』 홍시처럼 붉게 달아오른 추억이라는 이름아! 고약한 내가 너를 잠시 잊었었다. 『…네 앞에서는 말을 많이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추억을 주었던 온유였는지를 못난 내가 잊었었다. 『말을 많이 하고 싶을 때가 있기는 해. 요령이 부족해서 그렇지.』 “정혁아! 정혁아아… 정혁아… 미안해… 미안해… 정혁아… 미안해… 보고 싶었어… 나도 보고 싶었어….” “…….” 그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부드러운 도입부를 통하여, 네가 보고 싶었음을 표현하였다. 강렬한 파도와도 같은 겨울 주제를 빚으며, 자신을 떠난 너를 때때로 용서할 수 없었음을 표현하였다. 자신을 불러주는 음성을 들으며 떨리는 순간마저도 화를 참을 수 없음에 그의 격정은 줄어들 줄 몰랐던 것이다. 그래. 이것은 그의 음성이다. 건반을 통하여 그가 정말은 하고 싶었던 모든 말을 다 하는 것이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정혁아. 나도 네가 보고싶었다. 정혁아. 정혁아. 지금 네 모습이 두렵고 낯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음성이 낱낱이 들려오는 현재, 가슴이 찢어지고 있어. 황량한 대지 위에 비를 퍼붓고, 바다의 해일을 만들었던 그의 연주가 모두 끝나자 두 사람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오랫동안 말없이 피아노만 응시하던 정혁이 조각처럼 날카로운 턱을 올린다. 천정을 올려보며 붉어진 눈매를 감춘다. 붉은 눈매는 그러나 삼켰던 언어를 저도 모르게 공기 중에 흘린다. “나는….” “…….” “나는 아직 예전과 같아.” “…아…직?” “너를 향한 애증이 끝나지 않았거든, 마드모아젤.” “……!” 하느님… 혜성은 건반 위에 아직도 세워져 있는 그의 오른 손을 가만히 쥐었다. 아이의 작은 손가락이 파고들어오자 정혁의 경직된 몸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한다. “일단은 눈 앞에 있어야 하니까 반주를 해 주겠다고 한 거야.” “…….” 보고 싶었어 작은 인형 수페리우스…. 그에게 말을 하는 요령 따위는 없다. 알고 있다. 그는 현재 자신이 어떤 말을 하는지도 모르지 않던가. 혜성은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듣는 척을 했다. “모르지. 반주가 과연 어떻게 될 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 죽을 것 처럼 네가 보고 싶었단다, 나의 마드모아젤…. 차갑고 냉랭한 말 밖에 할 줄 모르지만, 그 안의 따스함은 누구보다 잘 아는 혜성이 조용히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차가웠던 그의 체온이 서서히 따뜻해짐을 느낀다. 하느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격정의 시간이 두 사람의 어깨에서 한 참 동안 떠나지 않았다. 휘잉- 가을의 짙은 바람이 둘의 전신이 마비될 때 쯤 가까스로 불어올 때까지. 차라리 너를 죽이는 게 낫지 않았을 까 싶을 정도로 네가 그리웠단다…. 나의 마드모아젤. 숨이 막히도록 전해지는 그의 격정이 건반을 통하여 음성으로 바뀌고, 연주가 끝나서도 멈출 줄을 모른다. 바야흐로 헬리아의 탄생일이 닥쳤다. 정혁이 다녀간 뒤, 혜성은 잊었던 생기를 되찾았다. 그가 반주를 맞춰준다는 게 완전히 현실로 인식되자 ‘못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마음의 의지가 되살아났다. 한 사람의 출현은 이토록이나 큰 힘이 된다. 이 넓은 세상에서 아직은 혼자가 아님이 확실해지자 혜성은 오후 다섯 시가 되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기 시작한다. 헬리아의 탄생일이기도 하지만, 오늘은 아마데우스의 새 얼굴들이 속속들이 입학하는 날이다. 물론 혜성은 입학식에도 참여하지 않을 계획이었다. 긴 시간동안 축사를 듣는 학생들 사이에서 앉는 것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아마데우스 성당에서 펼쳐지는 오만한 자의 축제에 아직은 참여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근사한 사람들이 자신들은 특별하다고 써붙이는 장이 바로 입학식이었다. 그것은 혜성 자신이 경험해 본 터라 분위기가 어떨 지는 잘 알았다. 아이는 그 대신 날을 잘 맞추어 자신과 만나기로 한 히스를 찾아 학생 식당으로 향했다. 거의 모든 학생들이 입학식 시간이 닥쳐 올 무렵, 아마데우스 성당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혜성을 알아보고는 용기 있게 “수페리우스!” 라고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입학식이 시작되기까지 삼십분 정도의 여유가 있어서인지 학생 식당은 배를 채우는 무리들로 시끄러운 분위기였다. 오후 두 시가 지나는 현재까지 점심 식사를 못 한 학생들이 시계를 확인하며 정신없이 식사를 하고 있다.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쉿. 쳐다보는 걸 들켰잖아.” 학생들은 먼 테이블에 앉아 다른 얘기를 하는 척 하면서도 학생 식당의 근사한 입구 쪽에 서 있는 두 사람을 확인하기 바쁘다. “히스가 아직까지 이자벨을 사랑하는 걸까.” “아마도 그렇겠지? 가여운 히스.” “헉!” “!” 히스와 이자벨이 나란히 서 있는 장면을 그림처럼 감상하던 여 학우들은 때마침 자신들이 앉은 자리를 돌아보는 히스 덕분에 똑같이 뺨이 붉어졌다. 게다가 자신들을 향하여 먼 거리에서도 보이게끔 윙크를 하는 히스라니! 식사를 하는 여 학우들의 손놀림이 말도 못하게 빨라진다. “역시 바람둥이로구나.” 자지러지게 좋아하는 여자 아이들을 향해 신사 적으로 웃어주고, 그것도 모자라 방금 윙크까지 하는 히스를 한심 하다는 듯 쳐다보며 이자벨이 비아냥거렸다. 도도한 표정의 그녀는 단정한 면장갑의 단추를 괜히 추스렸다. “하하하하.” “히스클리프. 너의 그 성향이 쉽게 변할 리가 없지.” 시원하게 웃는 히스의 잘 생긴 얼굴을 쏘아보며 이자벨은 혀를 찼다. 그녀는 직접 입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약간 자존심이 상한 상태였다. 우연히 학생 식당에 있던 히스와 마주하며, 이자벨은 그가 지난 날 자신을 사랑했던 표정을 지어 줄 줄 알았기 때문이다. 짝사랑에 미친 그 분홍 표정은 그러나 히스에게서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더더군다나 애송이를 기다리고 있다는 히스의 대답을 들었을 때의 이자벨은 실망하다 못 해 굳어지는 표정을 감추려고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이자벨에게 시원하게 웃어 준 뒤, 히스는 그녀의 뒷길을 수십 번 응시하며 혜성이 오는지 안 오는지를 살폈다. 통 자신의 앞에서 비킬 줄 모르는 예쁜 이자벨의 자존심이 다치는 것에 대한 염려는 뒷전인가보다. 예전의 히스라면 거짓 사랑 놀음이라도 했을 텐데, 지금의 그는 서둘러 그녀를 보내기 위해 빠르게 말을 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내가 바람둥이 인 줄 알았는데… 여왕님. 심장이 살아서 움직이는 걸 처음으로 경험한 걸로 보아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애송이를 기다리는 걸 보니… 너도 그에게 빠졌나 보군.” “예스.” 하마터면 이자벨은 가볍게 웃는 히스의 뺨에 손에 쥐고 있던 얇은 책자를 던질 뻔 했다. 테레사에 이어서 히스까지? 자신이 눈앞에 있는데도 감히 다른 곳을 응시하다니, 그녀는 더러운 기분을 참기 어려웠지만 가까스로 참아낸다. 현재 아마데우스는 갑자기 나타난 수페리우스 덕분에 그의 중심으로 꾸려지고 있어서였다. 모세의 말대로 때를 기다려야 하는 걸까. 그녀는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지 않은 투로 물었다. “…그래? 애송이의 어떤 점에 끌린 거지? 나보다 아름다운 점이 있던가?” “하하하하하. 이자벨… 가여운 이자벨….” “……?” “너는 정말로 테레사의 외형만 사랑하는 거구나. 가여운 이자벨…이자벨….” “그게 무슨 소리야!” 이자벨의 표정이 창백해지며 그녀의 보호막이 모두 으깨어진다. 자존심에 상처가 났고, 분수처럼 솟아나는 피가 바닥에 떨어지기만 한다. 상처는 여며질 줄 모른다. 히스클리프는 냉정한 독설가처럼 웃으면서 이자벨의 상처를 벌리기만 했다. “그건 네 심장이 제대로 뛰어도 소용 없다는 거지.” “……?” “아마데우스의 백합… 코스모스. 그 어떤 꽃을 네 옆에 세워놔도 너 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겠지. 그러나 이자벨, 아마데우스에서 반했다는 게 어떤 건 줄 정말 모르는 건가?” “!” 그녀의 평정심이 모두 깨졌을 때, 히스는 이만 가보겠다는 인사도 없이, 손등의 근사한 키스조차 생략한 채 날아갈 듯 이자벨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가 아차 싶었는지 딱 한 번 뒤를 돌아보며 중세의 기사처럼 늘씬한 허리를 우스꽝스럽게 숙이는 게 아닌가. 필시 이 장면을 멀리서 구경하는 학생들에게는 여전히 히스가 이자벨을 짝사랑하는 중이라고 여기게끔 보일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그게 아니다. 멀리서 혜성이 학생 식당 쪽으로 뛰어오는 걸 보는 순간부터 히스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하는 표정을 지어서였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돌진하다가 자신과 대화하던 이자벨이 생각난 것이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천천히 허리를 세우더니 마지막을 읊어주었다. “나는 평생토록 시들지 않을 뮤즈에게 영혼을 바쳤다. 반했다는 건 그런 겁니다 여왕님!” “!” 말이 끝나는 즉시 히스는 가볍게 뛰어갔다. 멀어지는 그의 전신이 푸른 머리칼처럼 싱그럽게 빛이 났다. 학생 식당에 거의 도착할 무렵의 혜성은 때마침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상냥한 무리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앞을 향했지만, 고개가 돌아가는 족족 히스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 입학식에 참여하려는 건가? 이 근처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혜성의 고개가 쉼 없이 주변을 살폈지만 파란 머리칼은 통 나타나지 않는다. 아이는 하는 수 없이 학생 식당에서 약간 떨어진 벤치에 앉아서 피곤한 다리를 쉬어 주었다. 어제 기숙사로 찾아온 정혁이 덕분에 들뜬 마음은 그의 수면까지 방해했던 터라 앉은 즉시 졸음이 밀려온다. 두 시간 후에 헬리아를 연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그 새 날아갔는지 혜성의 눈이 스르르 감긴다. 그 때였다. “누구…!” 커다랗고 시원한 손바닥이 벤치에 앉아있는 혜성의 뒤에 선 것도 모자라 양 쪽 눈을 가린 것이다. 시원한 느낌 때문인지 단 번에 졸음이 달아난 혜성이 손을 치우려고 허공에 팔을 올리자, 눈을 가린 그 사람은 아이의 팔을 허공에서 쥐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리고 아주 위협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움직이면… 쏜다.” “…쿡.” 히스? 히스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기분이 좋아진 혜성이 허공에 팔이 잡힌 채로 희미하게 웃었다. 아이의 입 꼬리가 올라가는 동시에 혜성의 눈을 가리고 있는 히스도 행복하게 웃었다. “암호를 대면 풀어주겠다.” “…히스… 히스… 하하하하하!” “히스 라는 이름 뒤에 ‘보고 싶었어’가 빠졌다.” 장난기 가득한 히스의 손가락이 움찔거린다. 그는 혜성 못지않게 터지려는 웃음을 참느라 억양이 아주 이상해졌다. “하하하하하! 하하! 히스! 보고싶었어! 하하하하하-” 수많은 학생들이 그들을 신기하게 쳐다보며 지나쳤다. 그러나 히스는 그들의 시선을 알지 못했고, 혜성은 그가 가린 손바닥 덕분에 알 수 없었다. 보고 싶었다고 소리치며 자지러지게 웃는 혜성을 넋을 잃고 내려다보던 히스가 뒤에서 고개를 숙이며 재빨리 혜성의 보드라운 뺨에 입술을 눌렀다. “!” 덕분에 그들을 힐끔거리던 학생들이 비명을 참아내며 입을 가렸다. 어떤 학생들은 철퍼덕 바닥에 주저앉았고, 히스를 사모하던 여 학우 중 한 명은 석고처럼 굳었다. 그러나 그들이 더 놀란 것은, “죽을래!” “억!” 퍽- 소리 내서 감히 히스의 머리통을 주먹으로 치는 수페리우스의 행동 때문이었다. 히스는 2주일 동안 못 만난 것에 대해 보상을 받으려는 건지, 으슥한 길로 겨우 빠져나가는 수페리우스를 쫒아 가면서 쉴 새 없이 스킨십을 시도했다. 누가 보던지 말던지 틈만 나면 껴안으려고 했으며, 그걸 거부하는 수페리우스가 귀여웠는지 맞을 것을 알면서도 뺨에 키스했다. 키스 하려고 할 때마다 조금씩 도망치던 혜성이 휙휙 주변을 살펴보더니 허리에 팔을 얹고 기가 막히다는 듯 소리쳤다. 주변으로는 개울만 흐르는 걸로 보아서 두 사람은 현재 인적이 없는 두 갈래의 숲길에 들어섰으리라. “히스!” “……?” 또 다시 포옹하려는 그를 재빨리 피한 뒤, 혜성이 이마를 차며 말을 잇는다. “넌 도대체 어떤 식으로 애인을 꼬시는 거지? 아니, 맘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마구 달려드는 거야?” “오, 노 노. 절대로!” 양 팔을 내밀고 달려들려던 히스가 그 자세 그대로 큰 모션을 취하며 'No'를 말했다. 의심 가득한 혜성의 시선마저도 사랑스러웠는지 히스가 풍부한 미소를 감은 채 어깨를 으쓱인다. “방법은 두 가지가 있지.” “…?” “바람둥이 철칙 리슨 원. 모성 본능을 자극한다. 리슨 투. 강하게 데쉬한다.” “…그게 뭐야.” “…이리 와 봐.” “싫어. 또 막 만질 거잖아.” “!” “변태.” “?” 변태라는 말을 이해 못 한 히스가 마냥 좋다며 다가오자 혜성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의 품에 폭 안긴다. 아이가 품에 들어오자 긴 안도의 숨을 내쉬며 히스는 행복한 듯 속삭였다. “하지만 수페리우스와 있다 보면, 어떤 방법도 생각나지 않아. 머리가 하얘져. 본능만이 나를 지배하지.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너는 자꾸 사라지니까.” “…!” 히스… 하며 그를 불러주고 부드럽게 다음 말을 이을 때였다. 후두두두- 가을의 이파리들이 몸부림을 치며 먼 거리의 인영을 알려주었다. “수페리우스?” “…….” 별안간 혜성의 눈이 번쩍 떠졌고, 금새 고개를 돌린다. 더 세게 안아주는 히스 덕분에 혜성의 고개는 그의 가슴팍에 묻힌 채로 떨어지지 않는다. 방금 전에 보았던 무언가를 잊기 위해 혜성은 안간 힘을 쓰기 시작했다. 히스가 장난스러운 어조로 속삭여주던 찰나, 괜스레 먼 곳을 응시하던 혜성의 눈에 스치듯이 정혁이 지나간 탓이었다. 문정혁? 놀란 가슴에 그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빼 보았으나, 히스와 포옹하는 것을 분명히 목격했던 정혁은 먼 거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두 갈래의 숲길에 어떤 일로 왔는지는 모르지만, 정혁은 틀림없이 히스와 혜성의 포옹을 보았을 것이다. “왜 그래… 수페리우스. 늑대라도 지나갔어? 후후….” “응….” “?” 정말 늑대가 지나갔는지 살펴보고 오겠다며 너스레를 피우는 히스 덕분에 웃으면서도 혜성은 께름직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기분은 곧 사라졌다. 아니,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벌써…?” “…….” 오늘, 이 순간의 히스는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아이를 불렀노라 고백했기 때문이다. 그 소릴 듣는 순간부터 침체된 기분을 어쩌지 못 한 혜성이 아쉬운 투로 헬리아가 곧 시작될텐데…라고 중얼거렸지만 히스는 그럴수록 고개를 저었다. “…….” “…….” 가슴 아프도록 아름다운 진분홍 색채 사이를 거닐며 히스는 꽉 쥐고 있는 혜성의 손을 더 세게 잡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예전에 했던 작별 인사의 쓴 맛을 경험해 봤기 때문인지 직접적으로 '안녕' 이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저 히스가 걷는 보폭에 맞춰 나란히 할 뿐이었다. 이별의 고통은 언제고 다가올 만남에 대비해서 달콤함을 주지만, 그것 보다는 아픔이 더 크다. 혜성은 헬리아가 실현될 수 있기까지 이끌어 준 히스가 당장 사라지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한없이 부드럽고 달콤한, 파랗게 영롱하기까지 한 히스의 부재가 닥치는 것이 싫었다. 그러나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독일의 아마데우스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으며, 그는 이미 혜성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잃은 것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그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면 혜성은 끊임없이 죄를 짓는 것 이상의 행동은 할 수 없을 것이다. “히스… 히스…?” “…….” 조용히 인사를 하고 헤어지겠거니 싶던 혜성은 그러나, 장미 문의 입구에 도착해서도 떨어질 줄 모르는 히스를 의아하게 올려보았다. 묵묵히 자신을 이끌고 정문까지 당도한 히스가 한 참 동안 무언가를 망설였던 탓이다. 그가 또 무엇을 준비하고 있다! 이 점을 예상하기까지 단 1분도 걸리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혜성의 예상대로 히스는 별다른 말없이 아이의 손을 이끌고 까아맣고 근사한 차 앞에 정지했다. “…타.” “어딜 가자는 거야.” 이대로 자신을 납치하려는 건가? 싶어진 수페리우스가 아무도 없는 주변을 살피며 히스에게 잡혔던 손을 빼 냈다. 그러나 히스가 더 빠르다. 그는 혜성의 작은 손을 세게 움켜쥐더니 행동과는 다르게 부드러운 투로 유도해서였다. 까맣게 선텐이 된 차창 안쪽을 가리키며 그는 슬프게 웃었다. “가는 게 아니야. 작별 인사를 하라는 거야, 내사랑….” “인사는 지금 하고 있잖아.” 초조해 하는 혜성과는 달리, 늘 그렇듯이 스스로에게 준비를 마친 히스는 담담하고도 서글픈 투로 조용히 읊조렸다. 진혼의 햇살이 그들께로 쏟아져 내릴 때, 히스는 차의 뒷문을 조용히 열어주었다. “…너의 태양이 이 안에 있단다.” “!” 반의무적으로 히스가 열어놓은 뒷 자석에 반 쯤 몸을 기울이던 혜성이 용수철마냥 고개를 세운다. 아이의 눈이 정신 없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히스는 희미하게 웃어줄 뿐이었다. “히스….” “…어서.” “…….” “괜찮아.” 태양 이라는 언어에 2시간 후 펼칠 ‘헬리아’가 불꽃과도 같은 섬광을 터뜨렸고, 동시에 테레사가 번쩍 지나쳤다. 눈시울이 붉어진 혜성이 타는 듯 한 그리움을 움켜 쥔 채 히스를 지켜보았다. '미안해'라는 말을 할 수 없어서 속이 탔다. 그의 사랑 크기를 가늠하기 힘들어서 눈물이 솟았지만 히스는 저 쪽 성당 입구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녀들에게로 유유히 사라졌다. “…….” 헬리아가 있기까지 이제 두 시간이 채 남지 않았다. 그리고 차 안에는 테레사가 있을 것이다. 히스가 저 쪽으로 사라졌다. 그에게 미안한 마음만큼이나 나는 지금의 테레사를, 그 날 재판에서 보았던 테레사를 확인해야 한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박자는 너무 느려서 수페리우스의 목이 혹시 부러진 게 아닐까 스스로가 느낄 정도였다. 혜성의 심장은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 “…….” 그리고 가슴이 산산히 무너졌다. 돌처럼 으깨어지기도 했고 폭우처럼 강렬한 소리를 내기도 했다. “많이… 아프시죠… 테레사….” 입술 밖으로 어떤 음절이 나오는지 인식이 어려울 때, 혜성의 음성에 맞춰 어두운 자리에서 허리를 펴고 앉아있던 테레사가 살며시 입 꼬리를 올렸다. 선글라스를 착용한 채 창백해진 낯으로 고개를 가로젓던 테레사는 혜성이 뒷자석에 들어오고 문을 닫자 천천히 옆으로 손을 내밀었다. 더듬거리는 그의 모양이 계속될수록 송곳으로 찔리는 듯한 아픔이 정말로 수페리우스의 목을 찔렀다. 히스는 마지막 인사와 함께 테레사 라는 선물을 또 한 번 준 것이다. 늘 나의 머릿속에 인식된 테레사는, 멋진 아마데우스였지. 소문에 따르자면 해외 가십은 그를 추락한 자라고 비웃음을 던진다고 해. 그래도 당당하기만 한 당신의 모습을 확인하며 안심하려 드는 나의 한심함이 저주스럽습니다. 어쩌면 기적처럼 닥친 지금의 만남에 혜성은 숨을 죽인 채로 눈물을 떨어뜨렸다. 혜성의 여윈 어깨가 손에 잡히자 테레사의 미간이 눈에 띄게 좁혀졌다. 자신 못지 않게 많이 마른 혜성이 안쓰러운 모양이었다. “오늘이라지….” “어…어흐. 어…어어어… 테.테레.어. 어으.” 허스키하되 절제된 테레사의 음성이 터지자 그 음성에 섞인 온갖 감정이 보이는 것 같아서 혜성은 결국 오열하기 시작했다. 헬리아! 히스! 테레사! 단 하루만에 닥친 이 모든것이 감수성이란 감수성은 모두 옥죄이는 기분이었다. 테레사의 당당하되 약간의 떨림을 지닌 음성은 가시처럼 퍼져나왔다. “수페리우스의 끊임없는 도약.” “으…흑. 으…으으흑.”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라.” “으… 으으. 으흡.” “…….” “으… 흐으으으….” 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테레사의 입술에 선혈이 맺힐 지경이다. 하지만 눈물이 멈춰지지 않는걸. 내가 이 학교로 왔던 처음의 이유가 눈앞에 있어서 나는 견딜 수 없는 걸. 한 참 동안 혜성의 울음소리를 듣던 테레사가 더 이상 시간을 지체 할 수 없었는지 다 잡은 마음을 실토한다. 히스가 떠나기 위해 인사를 건넨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테레사도 이 길로 아마데우스를 잠시 떠나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태어나서 가장 잘 한 일이 뭘 것 같니 아름다운 아이야.” “…….” 당신은 웃고 있을까. 아니면 울고 있을까. “뮤즈가 된 것? 아니면, 눈을 가리고 뮌헨에서 은어의 손놀림 이라는 별칭을 따 낸 것?” 혜성은 정신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이별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멀리서 입학식이 시작되는지 성스러운 종 소리가 들려온다. 둘의 곁에서 시간을 재는 사람은 없었거늘, 그래도 두 사람은 조급해졌는지 서로를 잡은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후두두둑- 근처에서 쉬어주던 새의 무리가 날아갈 때 테레사의 음성은 더 커진다. “그렇지 않다… 한 때의 나는 방금 말한 그것들이야 말로 인생의 성공이자, 가장 잘 한 일이라 믿었었지.” 혜성의 고개가 강하게 저어진다. 그게 아니에요. 당신은 정말 잘 한 일이었어요! 입으로 터지지 않는 음성을 삼키며 혜성은 끄윽 거리는 울음소리만 내뱉었다. 그런 혜성이 가여웠는지 작은 머리칼을 더듬더듬 매만지며 테레사는 당당하게 속삭였다. “내가 태어나서 가장 잘 한 짓은….” “…….” “너를 택한거다.” “!” 오 하느님. 그의 손길에 떨리기도 전에 영혼까지 사로잡는 음성에 밀려 모든 힘이 바닥으로 내려진다. “너를 만진거야.” 소스라치게 놀란 혜성이 눈물범벅인 상태로 양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흐느낌이 거세어진다.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주고, 음악에 욕심을 부리게 해 준 자극제… 너를 만나서… 놓치지 않고 잡은 거다.” “읍. 으읍.” “그리고… 네가 잘 한 것은….” 길게 숨을 내쉰 뒤, 테레사는 고통스럽지만 아주 기쁘다는 듯 후련한 투를 내뱉었다. 까만 창밖으로 그래도 밀려들어오는 온화한 햇살이 온통 테레사에게 향해 있었다. 가슴이 물결친다. “…나를 벗어나고, 네 힘으로 스스로를 단련시켰던 거다….” “!” 테레사! “나를 버리고 도망쳤던 거다….” 과거의 행동 하나 하나가 가시처럼 박혀오는 현재 마저도, 혜성은 울음을 어쩌지 못 한 채 내버려둔다. 감정이 움직이는 대로 행동했던 지난날들이 뼛속 깊이 각인될 때, 아마데우스 입학식의 중반부를 알리는 종소리와 성가의 화음이 미세하게 세어 들어왔다. 더더욱 촉박해진다. 마침내 아이는 테레사의 품에 와락 안겼다. 그의 입술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감히 그럴 수는 없었다. 갑자기 빨라진 시간 앞에서 작게만 느껴지는 테레사가 가여워서 가슴이 터질 것 만 같았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테레사… 테레사….” “나는 약해진 게 아니야.” “미안해요… 어… 어어어….” “계속 나를 버려야 해.” 쨍-- 오후 네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멀리 시계탑에서 들려왔다. 한 시간 후에 펼쳐질 헬리아를 앞에 두고, 그는 떠나려는 것이다. 다시 돌아올 이곳을 위하여 그는 비켜 가려는 것이다. 혜성은 고개를 세게 저어가며 테레사의 목에 매달려 아이처럼 속삭였다. “안돼요… 이젠 못 하겠어요… 안돼요… 테레사….” 혜성의 입에서 가쁜 숨이 나오자, 그 격정을 염려한 테레사가 강직한 손을 들어 혜성의 온 몸을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왜… 사람들의 시선이 힘드니…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가십에 흔들리면 안 돼. 너는 뮤즈다. 내가 널 어떻게…… 내가… 내가….” “!” “…….”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는 테레사가 기어이 붉어진 입술을 깨물었다. 입가에 옅게 번지는 붉음을 그는 느끼지 못했는지 서늘하게 떨기 시작한다. 덕분에 후다닥 정신을 차린 혜성이 억지로 웃어가며 그의 뺨에 입맞춤을 했다. 입학식이 끝나가는 지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성당의 종소리가 길게 울려왔다. 지옥의 헬리아가 가까워졌다. 헬리아의 향기가 물씬 맡아질 정도로! “미안해요… 미안해요… 테레사… 선배… 선배….” “세 번 만 더 버려라.” “싫어요… 싫어요….” “그럼 두 번.” “…….” 오, 하필이면 이 순간 왜 떠나시는 건가요? 혜성은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물음표를 억지로 삼키며 자신을 안는 그의 팔에 매달리기 바쁘다. “빨리 눈을 고쳐야겠다.” “테레사아….” 혜성의 양 쪽 뺨을 자상하게 쥔 테레사가 근사하게 웃어 주며 선글라스 안쪽의 눈을 감은 채로 속삭인다. 과거의 향긋함을 안은 채로 속삭이는 결정체는 아름답기만 했다. 스물스물 기어오는 지옥의 헬리아 라는 이름이 둘의 발끝에 다달았다. “그래야 네가 나를 예전처럼 멀리 보고 무서워도 하고, 좋아하기도 했다가, 싫어한다고 소리지르고, 도망갔다가, 제 발로 예쁘게 돌아오기도 하지.” “…….” 이 사람은… “혼자 식사하다가 학생식당에 내가 나타나 주는 것만으로도 좋아하지… 내가 빨리 눈이 나아야지 네가 신이 나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활개치지. 버팀목에 기스가 났으니 빨리 고쳐야겠지. 그래야 네가 마음껏 창공을 누비지….” “…….” 나의 태양입니다…. “나는 여전히 강하다.” “…….” 이 사람은… “너는 약하지만, 강하다.” 나의 아마데우스입니다…. “정말로 저의 헬리아를 목전에 두고 떠나시는 건 가요….” “아마도.” “왜….” 그 즈음, 테레사는 말을 아꼈다. 신입생들이 성당 밖으로 우루루 몰려 나오는지 밖이 소란스러워졌던 탓이다. 이만 나가 보라는 테레사의 박자에 맞추어 혜성이 천천히 문고리를 쥐었다. 하지만 혜성의 덜미를 쥔 음성이 그를 잡고 놓아주지 않으려 한다. “다시 돌아올 때, 나의 나라에 사람이 많아지겠구나.” “예…?” “이게 무슨 뜻일까. 잘 생각해 봐라.” “…….” “혼자인 나라에, 내가 너를 초대했지.” “!” 그 말을 끝으로 테레사는 정확하게 앞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을 안고 결국은 차 밖으로 나온 혜성은 아차! 싶어서 다시 뒷문을 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꽉 잠긴 뒷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밖에서 대기 중이었던 테레사의 비서가 혜성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재빨리 앞좌석에 올라탔다. “잠깐만요! 아직 대답 못 한게 있어요!” 시동을 걸기 무섭게 아마데우스를 빠져 나가는 차의 뒤꽁무니에서 혜성은 소리쳤다. 그럴 수록 작아지는 차를 아련히 응시하며, 혜성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지난 날, 테레사가 해 주었던 문장이 속속들이 떠오르던 탓이다. 『나는 혼자만의 나라에서 살고 있지.』 한국의 아마데우스에서 진정한 뮤즈는 테레사, 그 한 사람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랑 살자.』 그는 혜성이 자신과 같은 색을 지녔음을 알았기에 그런 말을 내뱉었던 것이다. 그러니 훗날, 혜성이 성장하고 또 성장할 때는 동시에 테레사 자신 역시 바뀔 것을 그는 방금 돌려서 얘기한 것이리라. “테레사….” 혜성의 떨리는 음성은 한 참 동안 장미 문 앞을 떠날 줄 몰랐다. 오후 네 시 반이 될 무렵, 분주히 혜성을 찾아 다녔음직한 동완과 선호 선배가 아이를 부르며 뛰어올 때 까지 아이는 먼 거리의 헬리아를 응시하듯 못이 박혀 있었다. 이제 남은것은, 당신이 기다리고 나도 기다리는 헬리아의 탄생이다. wgreene@naver.com 어떻게 적었는지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계속 숨을 참기만 했던 것만... 큰 용기를 주신, 나의 댓글님들..^^ 슬픈웃음님, 주황이, 로아님, 뒷집하루님, 자자님, 별하님, 박카스정님, 가타카님, 연님, 그리고 유령님들... 고맙습니다. -GREEN- Sei Parte Ormai Di Me-.. 덧글 7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25~26편(헬리아 I)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25~26편(헬리아 I)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27편 ▼ 다음글 - 2악장 23~24(학생재판)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27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6/14 15:03 http://blog.naver.com/wgreene/110005188295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614 27편 업데) Amadeus 음악 : Nostradamus - backing track Maksim (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Bonus Material) Nostr.. 나의 입술이 외친다. 오래전, 못난 수페리우스에 미친 너에게. 2악장 27편 “어서 뛰어가자 혜성아! 시간이 촉박해!” 장미 문 앞에 닥치는 즉시 동완은 혜성의 팔목부터 쥐었다. “이번 신입생들이 아주 쟁쟁하던데? 헥- 헥- 역대 신입생들 중 최강의 실력자들만 뽑았다더니, 헥- 표정들부터 굉장히, 헥- 살벌하다! 어서 가서 본떼를- 헥-” “선호 선배!” 동완을 뒤따라오던 선호가 하얗게 질려서 방금 전 참석했던 입학식을 설명해 준다. 그러나 괴롭게 숨을 내뱉는 때가 더 많아서 동완은 선호에게 천천히 걸어오라는 말을 건네야 했다. 선호는 알았다는 듯이 무릎에 손을 붙인 채 대답하면서도 고개 짓으로 혜성을 가리켰다. 선호의 염려대로 히스와 테레사를 동시에 떠나보낸 직후라서 그런지 멍청하게 따라오는 혜성의 눈동자는 완전히 풀린 상태였다. 동완은 선호에게 한 번 더 천천히 걸어오라고 당부 한 뒤, 혜성에게 거세게 소리쳤다. “혜성아! 너는 뛰어야지!” 후드드드- 시원한 바람과 함께 흩날리는 붉은 장미꽃잎 사이에서 혜성은 저도 모르게 희미한 대답을 건넨다. “…그래… 나는 뛰어야지….” “?” “나에게 걷는 건 어울리지 않지….” “?”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듯 대답을 건넨 혜성의 표정에 서서히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채찍질을 하는 듯싶었다. 먼 거리의 시계탑 초침을 확인하는 즉시 동완보다 더 빠르게 뛰기 시작해서였다. 5시가 되기까지는 정확히 25분이 남아 있었다. 갑작스러운 이별에 대한 통증은 잠시 잊어야 할 정도로 시급을 다투는 게 있지 않던가! “신혜성! 같이 가!” “…….”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라.’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나는 알고 있다. 그 음성이 통하였던 나의 귓가는 쓰리기만 해. 당신의 온기는 아직도 여전한데, 그리움에 목이 마르기도 전에 나는 움직여야 한다는 것 까지도. 쉬지 않고 뛰어 간다면 혜성의 빠른 발은 15분 안에 도착할 것이다. 혜성아! 하면서 그를 쫒아 가려고 안간 힘을 쓰던 동완이 멀어지는 것 만 봐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던가. 물론 혜성은 빠른 사람이 아니었다. 목적이 타당해 진 상황이 주어지면 없던 정신력이 발휘되는 탓이리라. “수페리우스!” 분수대 앞을 막 달려가는 수페리우스를 알아 본 상급생 무리들이 그를 힘차게 응원해 주는 소리가 들렸다. 혜성은 뛰는 도중에도 몇 번이나 그들을 돌아보았다. 걸음이 가벼워지고 있다. “우리들은 참석 할 수 없지만, 네가 잘 해 낼 것을 믿어!” “수페리우스! 이번 신입생들은 로제리오 교수가 직접 자기 식대로 뽑아서인지 예전과 다르더라. 그들에게 너의 헬리아를 꼭 들려줘!” “신입생들에게 본때를 보여 줘, 수페리우스!” 입학식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유독 이번 신입생들을 경계하는 아마데우스 학생들의 응원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혜성은 그 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늘 신입생은 선량하고 침착하되 배울 준비가 된 학생들 위주로 선발했기 때문이다. “그런 버르장머리 없게 생긴 것들은 눌러 줘! 수페리우스 잘 해!” 저렇게 혜성이 뛰는 자리마다 양 팔을 내밀고 환호하며 눈에 불을 켜다니? 혜성은 의아해 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40분!’ 시계탑의 초침이 또 한 번 움직일 때, 수페리우스는 두 갈래 숲길의 거의 끝에 다 달았다. 멀리 뛰어오는 동완은 잠깐 뒤를 돌아 봤을 때 아주 작은 점처럼 작아 보였다. 이따금씩 혜성을 부르지만 그는 아이를 찾아 이리 저리 진즉부터 뛰어다녔던 탓에 체력이 소진된 것이리라. 약간 미안한 마음을 갖고 혜성은 더 빨리 뛰었다. 숨이 턱까지 찼지만 촉박해진 시간이 걱정 되서 다리는 멈출 줄을 몰랐다. 땀으로 젖은 예식 복이 염려스러웠지만 연주로 승화시키면 된다. 자신이 어떤 연주를 시작 할 지, 그는 피아노 의자에 앉지 않은 이상 아직도 몰랐다. 준비란 건 없었다. 불가능한 상황에서 무엇부터 건드려야 좋을지 알려 주는 사람도 없다. 이것은 미친 짓이다. 정상인이라면 이런 짓은 할 수 없을 것이다. “헉- 헉- 헉-” 백색의 동그란 모양이 시선에 잡힐 때, 혜성은 잠시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시계탑의 초침은 오후 4시 4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혜성은 가장 외각에 지어졌지만 백색으로 화려함을 뽐내는 야외 콘서트 장의 입구까지 단 한 번에 뛰어갔다. 천 명을 수용할 수 있다더니, 로제리오 교수의 휘하 아래 입장 한 낯선 신입생들이 빼곡히 앉아있는 모양이 멀리서도 끔찍할 정도로 자세히 보였다. 반듯한 자세로 등을 펴고 앉아있는 학생들은 여유롭게 농담도 지껄이며 소수의 인원으로서 앉아있는 좌중의 선배들과는 상반되는 장면을 보여준다. 연주회장 밖으로는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백색의 야외 콘서트장의 동그랗고도 넓은 외각은 1층 건물의 높이만큼의 벽이 둘러 져 있다. 지하 2층에는 대기실들이 있으며 계단식으로 땅의 중앙에서부터 퍼지듯이 둘러진 좌석은 연주자에게 소름 끼칠 정도의 공포심, 혹은 긴장감을 선물하기 마련이다. 몇 몇 관계자들이 수페리우스를 알아보고는 길을 터 주었다. “정혁이가 있는 대기실이 어디지요?” “지하 2층의 첫 번째 문 입니다. 어서 내려가세요. 5분 전입니다.” “!” 이미 무대 앞에서 대기해도 모자랄 시간! 혜성은 자신처럼 촉박한 표정으로 안내 해 주는 그 치의 인사를 들을 새도 없이 후다닥 아래로 내려갔다. 웅장한 함성 소리가 백색의 건물 전체에 들썩였다. 바오르 신부님의 축사가 시작된 것이다! 드디어 몰입하기 시작한 학생들의 숙연함이 가슴까지 차오른다. ‘출입 금지’ 라는 푯말이 달려있는 도어를 확인하는 즉시 혜성은 노크도 없이 활짝 열고 들어갔다. 정혁은 늘 자신이 있는 대기실 앞에 출입금지 푯말을 부착했던 게 생각나서였다. 심장은 제 역할을 잃은 지 오래였다. 더 이상 뛸 수도, 죽을 수도 없는 가슴은 고동이며 박자를 잃고 아이를 거세게 밀어 붙이기만 했다. 연주 직전의 스릴, 경박스러울 정도로 천하게 뛰어대는 가슴의 고동소리, 손가락 끝에서부터 느껴지는 딱딱한 이질적 감각은 이 순간 휘몰아치는 긴장감을 대변한다. 혜성은 자신을 알아보고 희미하게 웃어주는 정혁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서서히 진정되는 내면에 자신감을 불어넣기로 한다. “나가자 정혁아!” “…….” “축사가 끝났을 거야!” “…….” “정혁…아…?” 그러나 정혁은 뭔가 이상했다. 1년 전과는 비교조차 힘들 정도로 수려해진 그의 외모가 이상한 걸까? 그것이 아니다. 깨끗한 예식 복에 흠이 생겨서? 아니다. 그는 말없이 어두운 자리를 털고 일어서더니 문을 박차고 튀어온 혜성을 따뜻한 의자에 앉혔다. 그러더니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어둡고 습한 지하 복도를 차단했다. 그렇게 문을 닫고 단 둘이 되어서 땀을 닦고 있는 혜성을 뚫어지게 응시한다. 그래서 이상했다. 지금쯤이면 왜 늦었냐고 타박한 뒤 당장 혜성을 이끌고 빠른 걸음으로 무대로 걸어가며 이것저것을 설명 했어야 하는데, 그는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정….” “옷이 젖었구나.” “아… 괜찮아. 어서 나가자. 이제 시작해야지!” “…무엇을?” “뭐…?” “어떻게…?” “!” 쩡- 얼어붙은 곳곳의 가시들이 자라기 시작한다. 혜성의 머리는 텅 비어진 상태였다. 그는 감각에 의지한 현재의 자신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혁은 혜성이 아니었다. 정혁은 테레사가 아니었으며, 그는 히스도 아니었다. 정혁은 그냥 정혁이었다. 그는 냉정하고도 매칼한 투를 침착하게 읊으며 흥분에 취한 혜성을 낯설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문정혁 이었다. 혜성이 앉은 의자의 양 쪽 손잡이를 강하게 쥐고 고개를 숙이는 정혁의 표정은 이제껏 봤던 것을 다 합한 것보다 살벌했다. 앉은 자가 이유 없이 목숨을 구걸해도 좋을 살인자와 같은 시선이었다. “수페리우스!” 지상의 1층에서 혜성을 기다리다 못 해 확성기로 찾는 음성이 벼락처럼 꽂혀왔다. “정혁아. 왜… 왜 그러니. 지금 나를 부르고 있어!”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무대에 나오세요!” “…….” “정혁아!” 목 재 의자의 등받이에 기댄 채로 혜성은 겁에 질려 소리쳤다. 전혀 흔들림 없는 정혁의 눈동자는 그러나 살벌함과 약간의 슬픔 이외에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문정혁!!” 머리가 터질 것 만 같다. 혜성은 정혁의 옷깃을 쥐고 간절히 소리쳤다. 수페리우스! 자신을 부르는 함성의 소리가 짙어질수록 혜성은 정체불명의 공포심에 사로잡혀 붉은 눈매를 떨었다. 정각 5시에서 5분이나 더 지나서야 정혁은 신음보다 침체된 어투를 열었다. “…1주일도, 6개월도 아닌, 일 년 이다.” “뭐…라고?” “나의 상식으로, 너는 그것을 채울 수 없어. 기적이란 없다.” “!” 기적이란, 없다. 메아리가 되어 퍼지는 음성의 색이 짙어질수록 위태로웠던 평화가 몽땅 유리처럼 깨어진다. 한 번 더, 수페리우스! 라는 확성기의 소리가 크게 울릴 때, 소란스러워진 장내의 웅웅거림까지 지하에 함께 스며들어온다. 땀에 젖은 가여운 수페리우스의 동공이 말도 못 하게 커진다. 정확한 말만 끄집어내는 능력을 지닌 정혁이 칼 같은 어투를 꽂았다. “1년의 공백이 단 2주 만에 채워질 수 있다면, 나는 너의 반주를 맞춰 주겠다고 한 첫 날 부터 잠도 자지 않고 연습했을 거다.” “정혁아!” 수페리우스의 가슴에 꽂힌 그의 언어는 피를 보일 것처럼 사납고 날카롭다. 순간 탁해진 혜성의 동공 저 쪽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지르르 퍼지는 음성이 있다. 며칠 전 기숙사에 찾아왔던 동완이 정확하게 지적 해 준 문장이 하필이면 이 순간에! ‘나는 정혁이가 수상해.’ 그 날 있었던 정혁의 행동은 결국, 오늘 이 순간을 예고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을. ‘재판이 끝나자마자 사라진 것도 이상하고, 갑자기 나타난 것도 이상해. 너의 반주를 맞춰 주겠다면서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잖아.’ 모든 것이 닥쳐서야 후회하고, 생각하며, 돌이킨다. 그것이 사람이다. “연습이라는 게 뭐 라고 생각하지?” “…….” “말 그대로! 노력이다!” “!” 비겁하지만 확실하게, 변명은 구차해지는 순간이 되어, 그는 당하는 자의 숨통을 조이기만 한다. 언어로 피를 흘리는 자에게 줄 수 있는 동정 따위는 없다며 그는 웃지도 울지도 않는다. 사람일까, 사람이 확실할까. “세상에 노력 없이 이뤄지는 건 없어. 테레사 같은 사람만이 존재한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잘 됐어. 네가 1년을 어떻게 지냈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마드모아젤.” “정혁아 너 설마!” 노력 없이 이뤄지는 게 세상이라면, 그건 가치가 없는 거야. 정혁은 혜성을 향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다시 말 해 룸펜에서의 혜성을 단 한 번도 스치지 못 했기 때문에 1년 공백기가 있었던 혜성을 완전히 '믿지 않는' 것이다. 분노가 솟아 오른 혜성이 턱을 덜덜 떨며 주먹을 쥐었다. 가슴에 꽂힌 언어라는 칼이 아프지 않다. “…그림자의 일 년은! 오직 음악과 연습과 노력밖에 없었거든.” “!” “지옥에 다녀올게. 너는 내가 이끌어낼 거다.” “안 돼!” 하느님! 말이 터지지 않습니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이미 이 모든 것을 준비한 그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나의 머리는 아무런 말도 논리적으로 꺼낼 수가 없습니다. 비겁한 당신이시여! 왜 나의 두뇌와 입술은 이토록 어리석은 겁니까! 그를 막기 위한 방법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 저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완전히 질려버린 혜성은 막연히 눈물을 쏟아낼 뿐이었다. 정혁은 잔인한 말만 내뱉고 혜성을 향해 딱 한 번 머뭇거리며 손을 내밀더니 다시 그 손을 가져갔다. 문정혁. 그는 지옥의 헬리아를 저 혼자 실현하려는 것이다. 그의 이유는 신혜성이다. 두 사람이 해도 소화하기 힘든 것을 '자기 주관'에 따른 '부족한 믿음' 이라는 결과에 따라 착착 시행하려고 한다. 지난 번 기숙사에서 들려줬던 정혁의 솜씨는 물론 향상되어 있었다. 그는 그것만으로 스스로를 심판대에 오르고 혜성을 이 학교에 다니게 하려고 한다. “안 돼… 안 돼….” “…….”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라.’ “안 돼!” “…….” 테레사의 음성이 순간 머릿속에 스친 혜성이 우당탕 의자에서 넘어진다. 말과 행동을 동시에 하기 위해 움직이다가 중심을 잃어서였다. 덕분에 문고리를 쥔 정혁이 멈칫 거리더니 이쪽을 돌아보았다. “읏!” “…….”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덤빌 것처럼 눈에 불을 켰지만, 충격으로 인해 힘이 풀린 다리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혜성은 바닥에서 질질 몸을 끌어오며 간절한 투로 소리쳤다. “내가… 내가 잘못 했어! 그리고 나를 믿어 정혁아. 정혁아! 정혁아!” “…….” 나의 입술이 외친다. 오래전, 못난 수페리우스에게 미친 너에게. “나… 연주 할 수 있어! 망쳐도 내가 망치고, 성공해도 내가 성공해야 돼! 정혁아 정혁아!! 우리 이런 얘기 할 시간조차 없어! 밖에서 나를 불러! 너를 부르는 게 아니잖아! 너는 미친 거야!” “…나도 내가 뭐에 미쳤는지는 잘 알지.” “정혁아 정혁아! 제발… 제발 내가 잘못했어!” “…….” 지상이 소란스러워진다. 우당탕 누군가가 급하게 움직이며 입으로는 수페리우스를 찾고 있었다. 상체가 부들부들 떨린다. 혜성은 자신의 다리를 주먹으로 쳐 가며 바닥에 엎어진 형상으로 후두둑 눈물을 떨어뜨렸다. 높아만 보이는 문정혁 이라는 산은 그러나 단 한 번도 허리를 숙여주지 않는다. 가장 믿고 안심했던 사람이라서 지금의 충격이 통 가시지 않는다. 오 하느님, 오 테레사. 테레사. 테레사! 실망시키지 말라고 했던 30분 전 테레사의 음성이 채 사라지지 않았는데! “안 돼! 안 돼! 테레사가 실망시키지 말라고 했단 말이야. 해야 돼! 너 말고! 내가 해야 돼!” “…그…래?” “그래 정혁아 나는… 나는!” 혜성의 머리맡에 쪼그리고 앉은 정혁이 가볍게 입 꼬리를 올린다. 그는 테레사를 언급하는 혜성에게 말도 못 할 분노를 느꼈지만 억지로 참는 눈치였다. 정신없는 혜성이 그런 것 까지 세세히 살필 리가 없다. 그의 강렬한 불꽃과도 같은 눈동자가 안면에 바짝 다가왔다. 혜성의 가는 목을 움켜쥐더니 가쁜 숨을 내쉬는 아이의 안면을 삼킬 것처럼 낮은 어투를 또박 또박 내뱉는다. “헉- 정….”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나는 이유를 알겠는데.” 천천히 숨이 빠져나가고, 돌아오는 바람이란 없이 죽어가는 육신이 있다. 정신이 혼미해지려던 찰나, 바닥에 천천히 기어 다니는 정신력을 있는 힘껏 당기며 혜성은 글자를 빚었다. “정혁아… 정혁아… 정혁아… 무서워… 너… 정혁아아….” “너의 지금 연주로 실망시키면 안 된다는 게 아닐까.” “!” 이대로 영원히 다리를 못 쓸 지도 몰라. 페달을 누르지 못 할 거야. 나의 손이 경직되었어. 텅 빈 머리로는 단 한 개의 악상도 떠오르지 않아. 히스와 테레사. 그들이 지금의 정혁을 예상하고, 혜성이 아닌 실력이 좋은 정혁이 대신 연주 할 것을 다 알았기 때문에 미리 떠났으며, 실망시키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지금 나에게 그런 궤변을 믿으라고? “그는 내가 너를 막을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학생 재판에서부터.”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 “수페리우스! 제발… 제발!”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누구 때문에, 뭣 때문에 이러는 지를 먼저 생각 해!” “그럴 리가 없어!” “제기랄!” 반주를 맞춰 주겠다고 했던 정혁이 단 이틀 전에 나타난 것을 한 번 이라도 의심했어야 한다. 그가 어떤 생각을 지녔는지 자세히 파고 들어봤어야 한다. 나는 걸려든 거야. 그가 말을 잘 할 줄 모르는 유형이라는 것을 감안해서 무조건 믿음으로 치장했던 나의 실수다. “그럴 리가 없어!” “…….” “문정혁! 네 멋대로 말을 지어내지 마! 지금 상황을-” “…….” “!” 수페리우스! 사람들의 소리가 10 분 내내 끊이지 않을 때, 그 소리의 정점에 다달을 때, 목을 움켜쥐고 사납게 내려 보던 정혁이 까맣게 사라졌다. 그 대신 분노 가득한 그의 입술이 혜성의 숨통을 막아버렸다. 그는 예전과 변한 게 없었다. 말을 하려면 저의 가슴으로, 음성은 입술로 막으며 고동 소리를 전한다. 그의 혀가 강함 힘으로 옭아질 때, 후다닥 정신을 차린 혜성이 죽었던 손에 힘을 주며 그의 안면을 밀어냈다. 1년 만에 혜성의 숨결을 빨아들였던 탓에 약간 혼미해졌던 정혁이 덕분에 뒤로 물러난다. 혜성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감각이 마비됐는지 충격으로 인한 다리는 아직도 움직여지지 않는다. “문정혁… 너… 무슨 생각으로….” “다른 놈은 다 필요 없어.” “뭐… 뭐?” “나는 너만 여기 있으면 되니까.” “!” “…헬리아는 내가! 이 내가! 성공시킨다. 불확실한 도전 따위는 더 이상 없다. 약속을 어긴 네가 질타를 받는다고 해도! 그래도! 상관없어. 나는! 문정혁이는! 너만 있으면 되니까. 너만 성공시키면 되니까!” 하느님……. 그 말을 끝으로 정혁은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잔인한 그의 흔적이 곳곳에 패여있다. 기둥이 흔들리고 있다. “정… -!” 딱딱하게 얼어붙은 혜성이 그를 부르기 위해 입술을 움직거릴 때, 도어에 열쇠를 걸었는지 쇳소리가 청각마저 서서히 마비시켜버렸다. “안 돼-!!” 안 돼-! 안 돼! 군중들의 진노가 서서히 식는지 찬바람이 뺨을 쳤다. 혜성의 주변으로는 단 한 사람이 없다. 테레사와 히스는 떠난 지 채 1시간도 되지 않았다. 하늘에 있는 민우가 이 문을 열어줄까? 우습구나, 잠깐이지만 이런 상상이 나의 머릿속에 맴돌다니! 하하하하, 혜성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바닥을 북북 긁었다. 바로 그 때, 우렁찬 좌중의 박수소리가 백색의 연주회장 전체에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문정혁--!! 멈춰--!!!” wgreene@naver.com 아마데우스와 마음이 통하는 날, 역시 다음편이 올라오리라..(프억..) 한국팀이 이긴 기념편이었으나 내용이 좀 올리면서도 어머나스럽군요.^^ 댓글 고맙습니다. 분명히 저는 여러분의 댓글을 통해 영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주황이, 자자님, 박카스정님, 안젤리스님, 로아님, 데빌님, 포근구름님! 고맙습니다! 헬리아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둥..둥..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wgreene- 덧글 10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27편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27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28~29(헬리아II + 로미오 워싱턴 조던) ▼ 다음글 - 2악장 25~26편(헬리아 I)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28~29(헬리아II + 로미오 워싱턴 조던)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6/16 06:14 http://blog.naver.com/wgreene/110005242256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616 28~29편 업데) Amadeus 음악 : Cristofori's Dream/David Lanz (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Cristofori's Drea.. 기적은, 받아들이는 자의 것이다. 2악장 28~29편 “귀를… 찢는다… 건반을 수놓는 너의 선율….” 속에서 쓴 물이 올라올 때 까지 “안 돼!”라는 말만 쉼 없이 내뱉던 혜성이 자포자기식으로 주저앉은 것은 소리친 지 오 분도 채 안 되었을 때였다. 멍청하게 풀린 두 눈으로는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차라리 들려야 하는데….” 헬리아는 이미 시작 되었을 것이다. 진노하는 정혁의 첫 음정을 혜성은 분명히 들었기 때문이다. 지상 어디선가 화려하게 펼쳐지는 그의 헬리아를! 그러나 첫 마디 이후, 혜성의 귀는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 하는 상태였다. 그것은 평정을 가까스로 유지하던 아이를 완전히 미치게 만들었다. “들리지 않아… 왜… 왜… 왜…?” 나의 가여운 양 쪽 귀에 달린 충격 이라는 이름이 이토록 무겁다. 백색의 건물에 갇힌 쓸모없는 육신은 역할을 잃었어. 만 천하에 공개 된 나의 헬리아가 다른 이의 손가락에 얽히니 나는 죽은 거나 다름없다. 어리석은 나의 혼은 멀리 달아났는지 듣고 싶어도 들리지가 않아! “여… 여, 열어. 열어 줘. 여… 여어… 열어-!!” 탕! 탕탕! 힘줄이 돋은 주먹을 다시 한 번 도어에 쳐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연약한 살결이 마침내 갈라질 때가 되어서야 혜성은 꼿꼿이 세웠던 상체마저 쓰러뜨린다. 상황이 극에 달할 때 감성은 완전히 죽어버린다. 생각하려 할수록 엉망진창이 된 내부는 폭우 속 에게해의 파도처럼 휩쓸리기에 바쁘다. 침착하게 상황을 보는 능력이란, 아이에게 없었다. 신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혜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해지는 마음보다, 충격으로 인해 제대로 들리지 않는 정혁의 헬리아가 두려웠다. 경박스러울 정도로 천한 분노가 찾아와, 영영 귀가 들리지 않으면 어찌하랴! 아이는 당장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는 것보다 그 점이 머리 꼭대기까지 두려웠다. 지하 2층이라고 해도 그의 연주는 안착되어야 하거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공기가 깨어지는 소리와 바람이 스치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테오제네스가 가십으로 보여줬던 혜성을 향한 절대 믿음과, 재판에서 손을 들어줬던 92% 학생들의 믿음, 우직한 겉모습은 송살한 내면과 아주 달랐던 히스의 달콤한 믿음, 오로지 혼자였던 예전과 상황이 180도로 틀려진 현재에서, 혜성은 무거운 어깨를 마구 짓누르는 자기의 영혼이 사실 가장 두려운 상태였다. 부인하려 했지만, 자신은 사실 전처럼 제 멋대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그 육중함에 짓눌려 있지 않던가. 두렵습니다. 이런 두려움을 주신 당신을 원망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이 저릿한 두려움 역시 당신이 주신 것임에 나는 부인하고 싶어도 내 안의 신이 허락치 않습니다. 나는 시선을 두려워했던 사람이지만 그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를 예전에 깨달았었습니다. 하지만 나를 향한 ‘믿음’은 떨어지지 않는 것을, 이건 어찌 하면 좋습니까. 내 안의 신이 분명히 계시다면, 부디 들어주길 바랍니다. 믿음에 믿음으로 증명할 수 있도록 인도 해 주소서. 연주를 망치는 건 두렵지 않습니다. 내가 미치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 하면 됩니다. 미친다는 것 역시 사람이 인지하는 의식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가까스로 쥔 믿음이 깨지는 것만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가장 높은 곳의 당신이 내 안에 계시는 게 확실하다면, 제발 그러하다면! “테레사… 으흐… 테레사아… 이 문을 열어주세요….” 잡아 주소서…! 내가 나를 버리지 않도록 잡아 주소서…! 혜성은 기도하듯 팔을 뻗어 문고리에 매달려서 통곡했다. 여러 번 흔들어 봤지만 철통같은 문은 미세한 율동도 없이 아이의 마음에 창을 찔렀다. 『 너도 할 수 있어. 네 영혼은 할 수 있다면서 울잖아…. 』 “민우야… 민우야… 도와 줘….” 아무도 없어. 혼자라고 여겼던 예전에는 항상 주변에 나를 위해주는 사람이 있었는데, ‘믿음’의 시선이 많아졌다고 자부하는 지금이야 말로, 나는 정말 혼자인 거야. 몇 번이고 민우를 간절히 불렀을 때였다. 거의 10분가량 미친 사람처럼 흐리멍텅한 동공으로 오열해도 깨우쳐 지지 않던 현실이 제대로 인식 된 것이다. 혜성은 생각했다. 자기가 정말로 혼자인 때가 닥쳤음을. 자세가 틀렸다며 교정해 주었던 민우는 없다. 섬세하게 요모조모를 가르쳐 주신 테레사와, 히스가 없다. 송곳처럼 푹푹 찔리는 저희들의 ‘믿음’만이 갈갈이 찢기는 현재 숨통을 조여 올 뿐이다. “…….” 그렇다면, 내가 나를 지키는 수밖에 없어. 내가 나를 지켜야 돼. “!” 바로 그 때, 가느다란 소리가 청각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혜성의 눈이 번쩍 뜨인다. 동시에 만 갈래로 분산되었던 감수성들이 똘똘 뭉쳐 하나가 되었다. 들린다! 작은 알갱이가 점점 불어나듯이, 융통성 없이 흩어졌던 음표들이 한 데 모아진다. 차츰 또렷해지는 나의 정신으로 정혁이의 헬리아가, 그 지옥의 부름이 들리고 있는 거야…! “…어떻게든 나가고 보자.” 완전히 ‘혼자’가 되었을 때의 인간이란 두 가지 경우로 치우치기 마련이다. 자아를 상실하여 완전히 자포자기 하거나, 혼란을 거두고 자기 현실을 직시한다. 혜성의 경우는 후자에 가까웠다. 그의 동공이 또렷해질수록 지상의 헬리아는 거센 바람을 일으키듯 청각에 세어왔다. 참 신기하게도 그 순간부터 혜성은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 귀가 뚫렸듯이 충격으로 마비 된 다리는 역할을 찾은 것이다. 대기실 구석에 달린 시계가 읽힌다. 5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짧은 슬픔의 곡예를 마치고, 혜성은 잠겨있는 방을 빠져나가기 위해 최대한 현실적으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독사처럼 날렵한 눈매는 아주 날카롭거나 사나운 것만 찾아대고 있었다. 칼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칼이 있었다면, 방금 전의 공황 상태에 못 이겨서 혜성은 손목을 북북 긋는 것도 모자라 저의 목을 찔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생각해보니 자신이 이토록 흥분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지금껏 겪었던 흥분이며 좌절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알았다. ‘믿음’이 주어진 상황에서의 불안정함이란 이토록이나 대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오! 믿음의 무게가 이 정도일 줄 알았다면, 나는 차라리 매달렸을 텐데. 시험 따위 없이 무조건 나를 받아들이라고 비명을 질렀을 텐데! “…!” 복도 쪽 유리창이 시선에 잡힌 것은 우연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혜성은 하느님을 외쳤다. 간절한 구원을 담아서 내면 곳곳에 하느님을 소리쳤다. 목제 의자가 눈에 띄었을 때는 마리아를 불렀다. 자상한 마리아의 미소가 뜨거운 공기를 머리 꼭대기부터 눌러주는 기분이 들었다. ‘마리아여, 마리아여!’ 혜성은 수십번 내면의 언어를 새기던 도중 있는 힘껏 목제 의자를 들어서 유리창에 던져버렸다. “으윽!” 와장창! 작은 목제 의자가 복도에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유리 파편이 쏟아져 들어왔다. 유리가 깨질 때,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불규칙한 감수성도 몽땅 없어졌다. 오 하느님! 그러나 분노와 충격이 빚어낸 격정은 그대로이다. 멍청하게 흐르는 눈물을 닦을 여유가 나에게 허락되지 않는 현재! “하. 하아.” 사람의 허리 정도 되는 높이의 유리창은 쉽게 깨졌다. 이 건물은 약한 유리재질을 선택했던 게 틀림없다. 환호성을 외치고 싶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우수수 떨어진 유리 조각들을 밟고, 혜성은 날카로운 파편이 오돌도돌 박혀있는 창틀에 손을 짚었다. 늘씬한 창틀 곳곳에 가시처럼 빛이 나는 유리 파편들은 혜성의 작은 손바닥과 손등, 그리고 몸 곳곳에 굵직굵직한 자국을 만들었다. “악!” 탕- 복도 바닥에 착지했을 때, 혜성의 무릎과 바닥을 짚은 손바닥에 꽤 굵은 유리 조각이 푹 쑤셔 들어왔다. “아아아. 아… 아아… 윽!” 낯선 유리 조각이 박힌 틈으로 철철이 흐르는 자신의 붉은 피를 낯설게 응시하던 혜성이 마침내 뽑아 던진다. 동시에 밖으로 퐁퐁 샘솟듯 터지는 피의 흐름을 보며 혜성은 아주 잠깐 걸음을 멈췄다. “…….” 피가 멈추지 않는다. 만약 이 상황에 민우가 있다면 나의 뺨을 쳤겠지. 그리고 지혈 해 줬겠지. “…….” 이 피는 영영 멈추지 않을 것 같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 몸을 빠져나간다. “!” 자신의 피가 아닌 것처럼 무릎과 손바닥 손등 밖으로 뚝 뚝뚝 떨어지는 모양을 넋을 잃고 쳐다보던 혜성의 동공이 좁아졌다. 이거다! 갑작스러운 발견에 뇌는 터질 것처럼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거다! 감각을 느낄 수 있는 몸의 모든 마디에서 대 혼란을 야기한다. 굵은 상처 밖으로 살을 벌리고 붉음을 토해내는 육체를 보며, 혜성은 그 피의 흐름에도 음표가 먼저 떠올랐던 것이다. 왜 그게 떠올랐는지 아이는 모른다. 하지만 절박한 상황을 벗어나고 보니 세상 모든 상황과 흐름이 음표로 뒤범벅이 되어 행진곡과 장송곡 사이를 오르내리기만 했다. 그래. 모든 흐름에는 작은 음표가 달려있다. 우리가 듣지 못하는 소리도 세상에는 있어. 피의 율동! 피의 좌절? 혹은 피의 역류! 으스스한 발견이지만 상관없었다. 광기에 사로잡힌 혜성의 눈망울이 더더욱 빛을 발한다. 부르튼 입술이 쉰 소리를 내뱉는다. “헬리아! 헬리아를!” 미친 자가 되어 소리쳤지만 긴 복도에는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혜성은 큰 소리로 웃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나중에 웃으면 된다. 오 제기랄! 방방 뛰며 좋아할 시간조차 없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스스로가 가엾지는 않다. 만약 그렇다 한 들 양 팔로 스스로를 감싸 안아주면 된다. 가엾다 불쌍하다는 동정표는 늘 타인에 의해 지배되기 마련이다. 스스로가 정당하고 매력 있게 상황을 읽으면, 그 굵은 뿌리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칭칭 뻗어있는 가지들이 동정이라는 이름을 달고 타인에게 베일 지언정 뿌리는 뽑지 못하기 때문이다. 혜성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환하게 웃어 가며 헬리아! 헬리아! 레퀴엠! 하고 소리쳤다. 외형과 상황은 그를 동정했지만 그는 지금이 차라리 잘 됐다는 판단마저 들어서 어깨가 들썩일 지경이다. 아프다며 호들갑을 떨어주는 사람이 당장 없었기에 피는 흐르지만 아프다는 감각이 당장 몰아치지 않았다. 아파도 그것은 적당한 고통이었다. 피의 색은 인간에게 공황과 너는 아프다는 자기 암시를 타인으로부터 양도받게 한다. 그리고 나는 타인의 비명이 없는 현재, 낯선 피를 통하여 낮은 선율을 느꼈다. 이 미친 감각이 당장 사라지기 전에 어서, 어서! “…….” 자신의 피를 뚝 뚝 떨어뜨리며 활기차게 뛰어가는 혜성은 스스로의 모습을 염두할 틈이 없었다. 부디 이 감성이 흐트러지기 전에, 나약해지기 전에 피아노를 만져야 했다. 뻥뻥 터지는 폭죽처럼 홍수를 일으키던 내면에 일직선으로 레퀴엠의 선이 그어졌기 때문이다. 이 감정은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저릿한 감각이었다. 어서, 어서! 혜성의 모습이 백색의 지하공간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아이가 갇혀있던 대기실 근처 어두운 부분에서 누군가가 홀연히 나타났다. 아마도 처음부터 대기실 옆에 세워진 우아한 기둥 뒤에 숨어있던 모양이다. “…헬리아를…?” 그렇게 나타난 모세는 몇 마디를 중얼거리며 자신의 수첩에 무언가를 쉬지 않고 적기 시작했다. 상당히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헬리아 II 삼십 분이나 지난 시각, 아직도 수페리우스를 부르는 소리가 멍멍하게 전해졌다. 걸음이 무대 뒤까지 다 달았을 때, 관계자들은 막 나타난 혜성을 보며 창백한 비명을 감추지 못했다. “수페리우스!” “누가 좀 지혈을! 어서 이쪽으로!” 땀방울과 피에 범벅이 된 혜성이 당당하게 나타났을 때, 무대 뒤의 사람들은 시체라도 만난 것처럼 겁에 질려 너도나도 소리쳤다. 혜성은 현재 그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 몇 명이 용기 있게 혜성의 옷깃을 쥐기도 했지만 그들은 사색이 되어 뒤로 물러나기 바쁘다. 혜성은 자신의 몸이 무언가에 의해 제지가 되는지도 모르는지 저벅저벅 걷기에 여념이 없어서였다. 두려울 정도로 굳은 표정은 단 한 번도 시선을 돌려주지 않았다. 상냥한 수페리우스의 기억이 와장창 깨어진다. “…….” 혜성은 지금의 자신이 아주 기가 막히고 신기했다.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이런 게 미친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휑하게 빈 머릿속으로 바람이 스쳐 지나는 기분이었다. 정혁의 연주가 들린다. 하지만 들리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저건 그냥 음표일 뿐이다. 건반의 속삭임일 뿐이다. 무감동으로서 단순한 선율의 반복으로 인식되는 저건 헬리아 일 수 없다. 저건 그냥 아름답고 최상위의 컨디션을 자랑하는 콘서트이다. 헬리아는 말 그대로 지옥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 그게 정답일 것 같다. 무대 쪽 커튼을 쥔 혜성이 마침내 그것을 밀고 나아갈 때였다. “수페리우스!” “…….” 테레사가 너의 이런 행동들을 모두 예상했기 때문에, 나에게 실망 시키지 말라는 말을 했었다고… 문정혁? 네가 틀렸다. “수페리우스!” “…….” 네가 틀린 것임을 내가 증명한다. “수페리우스!!” “…….” 툭. 투툭. 바닥으로 떨어지는 고결한 핏물. 백색의 깨끗한 건물 바닥을 적시는 그것들에 놀란 무대 뒤의 사람들.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모든 것을 차단한 채 무대로 돌진하려는 수페리우스. 그런 혜성을 가로 막은 자는 사비나 교수였다. 그녀는 미친 자와 마주보는 선량한 시민처럼 두려움 짙은 눈매로 거세게 가로막았다. 여러 번 아이를 불렀지만 흐릿한 동공은 교수를 인식하지 않는 상태였다. 헬리아. 레퀴엠. 레퀴엠. 헬리아. 이 피가 멎기 전에. 헬리아. 레퀴엠. 혜성의 내면 곳곳에 홍수를 일으키는 글귀는 오직 그 뿐이었다. “정신을 차려!” “!” 철썩- 젖은 뺨이 돌아간다. 아직도 무감각한 정혁의 연주가 자세히 스며들어 온다. 혜성은 크게 돌아간 고개를 천천히 돌리며, 자신을 때린 사비나를 낯설게 응시했다. “어디에 있다가 이제 나타나는 거니! 수페리우스!” “……교수님….” 헬리아. 레퀴엠. 레퀴엠. 레퀴엠… 헬리아. 헬리아. “틀려도 네가 연주해야지, 정혁이가 그러더구나. 연주 시작 직전에 나타나서는, 자기가 헬리아로 레퀴엠을 만들겠다고! 어차피 자기도 반주를 하겠다고 했으니, 반주는 반주일 뿐. 그렇다면 헬리아가 완성되면 되는 게 아니냐고, 결과만 맞으면 될 테니 신혜성을 인정하라고! 이게 무슨 일이냐!” “…….” 아이를 기다리다 못 해 참았던 진노를 모두 뿜어내는 사비나 교수의 음성이 떨리고 있다. 혜성은 희미하게 웃었다. 입 꼬리만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켜보는 상당한 사람들과 교수는 소름 끼치는 공포를 경험했다. 피를 닦으며 수선을 부릴 줄 알았는데, 전혀 당황해 하지 않는다. 흰 수증기 사이에 서 있는 것처럼 젖어있고, 달아올라 있다. 무엇이 이 아이를 이렇게 만든 건가? 사비나는 혜성의 피에 젖은 손을 쥐고 더더욱 소리쳤다. “이제 모든 게 끝났다, 작은 아이야. 하얗고 창백한 러시아 인형아.” “…….” 하느님…. “너의 학생 재판에서 보여 졌던 모든 당당함과 진실이 거짓으로 판명난 거나 마찬가지야. 도망자로서 피했다는 평을 듣게 될 것이다.” “…….” 마리아여……. “테레사가 오전 중에 나한테 뭐라고 했을 것 같니 어리석은 아이야.” “…….” “너의 레퀴엠을 방해 할 수 없어서 혹시라도 자기가 있어서 레퀴엠이 방해 될까봐 미리 떠난다고 까지 했다. 도대체 왜! 도대체 왜 그랬던 거니 수페리우스!” “……!” 테레사… 아름다운 테레사. 지옥의 레퀴엠. 레퀴엠, 피의 헬리아… 헬리아. “나는 너를 믿었다. 모두 너를 믿었어. 전처럼 네 멋대로 자유롭게 선택하고 자시고 할 게 아니었단 소리야. 지금 너는-” 총알이 스쳐도 아프지 않을 육체를 지배하는 영혼의 헬리아. 헬리아. 헬리아. “…비켜 주세요 교수님.” “!” 보이십니까. 뒤늦게 주신 당신의 평화 덕분에 나는 좋은데,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이토록 흥분하고 있습니다. 선량한 이들에게 안식을 주소서. 저들의 등골에 달아오른 소름조차 가시의 선율이 된 나의 머릿속에는 지옥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비키세요. 사비나 교수님.” “수…페리우스?” 희미하게 웃으며 또박또박 대답하는 혜성은, 차마 움직이지 못하는 가여운 사비나 교수를 대신하여 그녀의 손을 치워 주었다. 자신의 주먹을 덮은 그녀를 치워 주었으며, 돌처럼 굳은 그녀의 발을 움직여 주었다. “헬리아는 두 사람의 곡입니다.” “…!” 번쩍 빛이 감도는 혜성의 눈망울에 심장이 오그라들 법 한 사람들은 뒤통수라도 맞은 표정이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소리를 내뱉는 혜성의 침착한 대답에 응수할 답변이 없는 탓이다. 쩌렁쩌렁 눌리는 정혁의 건반 소리에도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노라며 혜성은 갓난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이제 곧 정혁의 파트가 끝나고… 제 차례가 될 것입니다. 저의 순서이니까요.” “!” 헬리아. 헬리아. 레퀴엠. 짙은 피의 선율…… 無. “그리고, 헬리아는 제가 끝낼 것입니다.” “수페리우스!” 광기에 사로잡힌 눈망울을 누가 막을소냐. 사비나 교수는 자신을 전혀 밀치지 않는 수페리우스임에도 불구하고 스르르 주저앉았다. 동시에 아이는 당당한 걸음으로 커튼을 쳤다. “…….” 백색의 건물이 한 눈에 들어오고, 휘양 찬란한 오후의 노을이 분수처럼 튀어나와 세상을 진분홍으로 탈색시켰다. 시선이 아플 정도로 따갑게 마주치는 우아한 학생들의 숫자는 족히 천 명이 넘게 추산된다. 혜성의 영혼에 침투한 전율은 이제 막 시작이었다. 테레사. 나는 실망 시키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실은 두렵지만 극복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나를 믿지 않음을 직시하니, 나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떠벌렸던 가십과, 나를 믿어준 92%의 손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 바로 그것이니까. 헬리아. 레퀴엠. 그 두 글자만이 산산이 메아리치는 현재, 사실 나는 ‘믿음’이라는 글자마저도 붕괴했는지 모르겠다. 두 대의 피아노 중 오른 쪽에서 정혁은 쉬지 않고 건반을 누르고 있었다. “수페리우스?” “꺄아아악!” 흠칫- 정혁의 어깨가 떨린다. 백색의 무대에 붉게 나타난 수페리우스의 모습에 경악한 학생들이 입을 가리고 비명을 질러서였다. 로제리오 교수와 바오르 신부는 벌떡 일어나서 달려올 기세였고, 신입생들은 저 사람이 수페리우스냐고 서로에게 물어보며 확인하기 바쁘다. 그러나 신입생들은 곧 평정을 되찾고 딱딱한 시선으로 자신의 선배를 죽일 것처럼 노려보기 시작했다. “…….” ‘수페리우스가 맞은편에 앉았어!’ ‘세상에, 저렇게 상처가 많은데 지혈도 않고! 미친 사람인가?’ ‘작고 형편없어 보이는데, 머리카락까지 샛노란데? 자기는 수페리우스니까 깔보지 말라는 심사인가? 웃기고 있군.’ ‘한 참이나 늦게 나타난 것 만 봐도 알 수 있지. 자기는 특별하다는 거야.’ ‘고작 저런 사람이 그 유명하다는 테레사의 수페리우스라니. 누군가 했더니 가관이군.’ 신입생들은 기가 막히다는 듯 저희들끼리 소곤거리며 혜성의 행동 하나하나를 쫒았다. 수페리우스와 신입생들의 첫 만남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며 생각은, 지난날 혜성이 처음 입학한 뒤 당했던 수모들보다 배는 능가하는 것이었다. 일단, 아마데우스의 그림자로서 유망주인 문정혁이 ‘반주’를 한다는 것 자체도 신입생들은 이해 할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이 이제 와서 혜성에게 독이 될 리가 없었다. 만약 문제가 된다고 한 들, 경험으로 미루어 본 바 천천히 해결해도 좋을 것이었다. 혜성은 광기 짙은 눈매로 맞은편의 정혁을 노려보았다. 그는 건반에 모든 힘을 기울이며 혜성이 무대에 나타난 순간부터 아이가 파고들어 올 수 없을 만치 강렬한 음표만 계속해서 만드는 중이었다. “…….” 문정혁. 나의 1년이 어땠는지, 네가 안 봐도 ‘믿음’을 줬을 거라고 여겼던 것은 나의 실수다. “…….” 학생 재판 때, 나를 향해 ‘룸펜’이라고 부르며 지지해 줬던 소리들은 어디로 흘려들은 건가. 필요한 말만 알아듣는 너를, 나는 완전히 이해 한 게 아니었나 보다. “…….” 테레사는 레퀴엠을 요구했어. 높으신 양반들의 기준으로 봤을 때, 실질적인 실력은 형편없어졌겠지. 내 손가락은 재즈와 가벼운 변주곡에 익숙해졌으니까. 그런데 너는 간과하는, 아예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 “…….” 기교를 부리고 있다지만 소나타의 기본 형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정혁의 소절에 바짝 귀를 기울이던 혜성이 씨익 웃는다. 그리고 번쩍 손을 허공에 올리더니, 콰광- 번개처럼 내리찍었다. 기적은, 받아들이는 자의 것이다. 적어도, 음악을 모르는 사람들은 나의 ‘혁명’을 듣고 진노했거든. 나는 실력의 우선순위, 평범한 평가 기준인 손가락 활용 기법이 원래부터 바닥이었다. 그런데 들뜨게 할 자신이 있다. 너처럼 저 학생들을 의식하지 않을 계획이니까. “수페리우스가 미쳤나봐! 아직 연주가… 연주가-” 한 학생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하얗게 질린 그 학생의 말마따나 제 아무리 헬리아라 할지라도 막무가내로 끼어들 수 있는 틈이 당장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혜성은 맞은편의 피아노에서 건반을 찍어버렸다. 기적은 있다. “말도 안 돼!” 다만 그것은, 받아들이는 자의 것이다. 물처럼 고고하던 곳곳에 거대한 덩어리가 패인다. 정혁의 유하되 단단한 연주에 몰입하던 좌중은 혜성의 침입을 이렇게 해석했다. 그건 누가 해석해주지 않아도 저절로 생성되는 글자였다. 정혁의 손놀림이 말도 못하게 빨라져서 하이톤을 넘나들 때, 그렇게 깡- 내려친 혜성의 낮은 선율을 피해 도망가자, 아이는 재빨리 중간 부분에서 아까 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거센 단조를 눌렀다. 장조에 약간의 플랫을 섞었던 밝은 분위기의 정혁의 연주는 그런 식으로 짓눌린다. “!” “…….” 따다당-! 따당! 맞은 편의 정혁이 어느 건반을 눌러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규칙적으로 템포를 막는 혜성의 반주 아닌 반주가 뒤따랐다. ‘음을 위협하고 있어….’ ‘마치 베토벤을 비웃는 모차르트처럼… 가벼운 손놀림으로 무겁고, 뜨겁게….’ ‘무…서워… 히익! 지금 또!’ ‘!’ 콰과광-! 또 한 번의 전율이 백색의 야외 연주회 장을 뒤흔들었다. 한 시간이 지나도록 혜성은 정혁이 바꾸는 변주곡에 지지 않고 거센 파도를 일으키듯이 장조를 단조로 단조는 다시 장조로, 플랫은 라플렛과 샵으로, 하이톤은 다시 저음으로, 모든 것은 반대로서 웅장하게 열 손가락 모두 눌러서였다. 색상으로 따지면 반대의 보색이 융화되는 과정이나 마찬가지인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G단조가 오열하고 있다. 그것은 점점 해일을 일으키듯 움직임을 보이더니 정혁의 화사한 음을 제 것처럼 차지한다. G단조의 영역은 정상적인 화음에 엇 박으로 침입하는 것으로 크기를 넓혀서 무대를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G단조의 주인공은 몇 번을 확인해도 신혜성, 수페리우스였다. 설마 저것이 헬리아?! 그럴 리가 없다. 저건 싸움이다. 연주에 파란을 일으키는 저것은, 어서 끝내 버리라고 대포를 던지는 전장의 장면이다! 자신의 차례가 됐으니 물러나라는 경고나 다름없어! 신입생들 거의 다가 도도한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쭉 앞으로 내밀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저건 광기에 미친 연주다! 아니, 그것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어! 어서, 어서! “…….” 마주보고 있는 두 대의 피아노에서 스파크가 일었다. 적어도 무대를 향한 좌중의 시선에는 그렇게 느껴졌다. 정혁의 시선이 처음으로 맞은편의 혜성과 마주친 것이다. 그 순간 정혁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그림자가!” “여…연주가 끝난 거야?” 광기에 짙은 혜성이 처음부터 쏘아보는 것을, 아이와 시선을 교차한 후에야 알아 차린 정혁이 큰 충격을 받았는지 저도 모르게 허공에 손을 올린 채로 굳어버린다. 지금이다! 혜성은 자신을 멍청하게 응시하는 정혁을 비웃으려는 취지인지 당장 시선을 건반으로 내렸다. “수페리우스!” 정혁의 헬리아 도입부를, 1시간이 넘도록 줄기차게 이어졌던 화려한 음색을 끝장내기까지 단 한 번도 건반을 내려 보지 않았던 혜성의 고개가 쭈 욱 밑으로 꺼진다. 선배들은 그의 표정을 확인하려는 욕심에 저희들도 모르게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격정적인 그의 선율들은, 오직 문정혁을 노려보며 그를 막기 위해 꽝 꽝 박자를 가로 막았던 것 이상이 아니었음을 이제 알아서였다. 그리고 믿기 어려워서였다. “…….” 왈츠? 아니다. 그렇다면 광시곡? 그것도 아니다. 소나타? 그래, 정혁이 시도했던 경쾌한 소나타의 형식과 흡사하지만, 그게 아주 정답도 아니다. 저건… 저건-! “…진짜 헬리아다.” “!” 누군가가 복잡해진 내면에 정답을 내뱉자 좌중 거의 다가 흥분하여 일어섰다. 그렇게 하면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짧은 판단 때문이었다. 무중력을 압도하는 블랙홀에 흡수되듯이, 그들은 자신들이 상체를 무대 쪽에 기울이는 것도 몰랐다. 정혁의 연주를 두고, 많은 이들은 화려한 기교와 음 색을 평가하는데 초점을 뒀었다. 그리고 혜성의 몰골이 나타났을 때, 이어서 그의 괴상한 반주가 뒤따랐을 때, 좌중은 평가의 방법을 잃었다. 솜씨 책정에의 길을 완전히 막아버린 무모한 자의 헬리아만 백색의 공간에 붉게 치장될 뿐이었다. 오래된 하프시코드를 연주하는 바흐처럼? 아니다. 그것도 정답이 아니다. 즐거운 탱고? 리듬의 경박함과 쉭 쉭 올라가는 그의 손이 과연? 아니, 그것이 아니다. 죽을 것처럼 가슴이 뛰어! 왜, 어째서? 무엇을 판단해야 하는 건가! 눈물의 토카타? 하지만 음색의 강렬함은 토카타에 어울리지 않는다. 아주 느리게 편곡된 폴로네이즈? 아니, 지금은 또 바뀌었어. 아니, 처음부터 폴로네이즈가 아니야! 카덴차! 카덴차다! 아니, 그것과 비슷한 듯하지만 또 아니야. 전쟁의 무엇이다. 그렇다, 전쟁의 ‘무엇’이다! 그렇다면, 에튀드 헬리아? 좌중은 똑똑한 머리를 굴리지만, 자신들의 지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혜성의 연주를 해석하지 못했다. 저것은 無의 상태이다! 라고 모두가 쩡 얼어붙은 가운데 공통으로 느꼈을 때, 그렇게 ‘해석’이라는 주관적인 감각을 모조리 묵살 시켰을 때마저 연주는 유수처럼 흘렀다. 텅 빈 좌중의 표정을 혜성은 전혀 읽을 수 없었다. 아이의 핏물이 건반에 적셔지고 미끄러지듯 연주하는 솜씨는 가시처럼 사방에 찔리기만 했다. 아프지 않아. 피가 떨어져도 아프지 않아. 아파하는 것은 나를 보는 좌중의 몫이다! 그들은 이미 해석의 범위를 잃었다.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으로 피 흘리는 뮤즈가 ‘연주한다는 것’ 그 자체에 범위를 상실한 것이다! “!” 라스트를 장식하려는지 혜성은 갑자기 모든 연주를 멈췄다. 막 떠들던 작은 무리들조차 입을 다물었다. 시퍼렇게 빛나는 혜성의 눈동자가 피의 색으로 물든 게 아닐까? 라고 1층의 누군가가 목을 길게 뺄 때, 수페리우스의 양 쪽 팔이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듯이 검은 건반과 흰 건반의 오른 쪽 끝에서부터 모든 음이 스치게 글리산도를 시도했다! 단 한 순간의 라스트! 근사하고 맵시 있는 기교가 아니라, 끝마무리는 통증에 울부짖었던 건반을 깔아뭉개듯이 글리산도(긴 건반을 미끄러지듯 한 번에 내려오는 것)를! 지금의 글리산도마저도 달라! 스타카토? 논게라토? 아니야, 아무 생각을 할 수 없다! 다만 할 수 있는 생각이 있다면, 혹시 수페리우스의 무지막지한 글리산도 덕분에 그의 엄지손톱이 부러지지 않았을까? 끝일까? 끝난 걸까? 저길 봐, 수페리우스의 손이 허공에 올라가 있어! 끝일 거야! 좌중이 넋을 잃고 한 참 동안 수페리우스의 손을 지켜본다. 뚝 뚝 떨어지는 아이의 핏물이 건반을 지나 바닥으로 떨어진다. 방금 전을 라스트라고 확신했는지 모두가 안도의 한 숨을 막 내쉬려던 때였다. 따라락따라락! 죽은 줄로 알았던 그의 오른손가락이 새벽의 창을 열듯이 쉼없는 트릴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막 호흡하려던 좌중의 숨이 가빠온다. 혜성의 트릴이 새처럼 가볍고 정겨운 것임을 뒤늦게 깨달아서야 겨우 호흡을 내쉬려고 하지만, 그 때 역시 그들의 숨은 어지럽게 막힌다. 쾅! 따라락! 막힘없이 가벼운 트릴로서 지옥의 새벽을 맞이하던 도중, 혜성이 중저음의 건반으로 스스로의 트릴을 방해하기 때문이었다. “!” 지옥은 눈속임이다. 피는 당하는 자가 아파야지 고통이란 감각이 찾아온다. 그렇다면, 헬리아 역시 ‘감성’으로 상대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다. 본인은 알 수 없는 고통이, 타인에게 죽을 것처럼 덤벼대는 것, 그게 헬리아였어. 나의 호흡은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다. 하지만 너는 죽어야 한다. 그게 헬리아니까! 바로 지금! “!!” 저것은 테크닉이 아니었다. 모차르트의 소나타를 감상하는 차원이라면 테크닉을 평가하기 쉽겠지만 음표가 서로에게 부닥치도록 주문을 내리는 게 아닌가! 창백해진 학생들은 파랗게 질리기만 할 뿐, 손에 땀을 쥐고 눈을 크게 떴다. 캉- 따라락! 몇 번이고 몇 십번이고 들어도 지치지 않는 수페리우스의 붉은 어깨에 완전히 질려버린 좌중의 시선이 죽은 자의 그것으로 바뀐다. 자포자기 한 듯 넋을 뺀 영혼들은 혜성이 부디 자비로운 연주, 테크닉 범위 해석이 가능한 연주로서 평범한 크라이막스를 잇겠거니- 기대하려던 찰나! “…하아아악-” 혜성의 손이 돌연 허공에 올라가고 숙였던 고개가 번쩍 세워졌다. 그렇게 연주가 동강난다. 포물선을 그리며 땀과 핏물이 후두두두 백색의 지대에 떨어진다. 기가 막힌 f단조에서 많이 들을 법한 섬세하고도 간지러운 트릴과 그것을 죽이는 중저음의 울림은 돌연 끝이 났다. 크라이막스란, 없다. “…….” “…….” 의무적인 감각마저 사람을 떠난 현재, 그 누구도 박수를 칠 생각을 못 한다. 無의 수평선 지대, 생각이 있는 게 이상하다. 붉은 화염만이 혀를 날름거리며 감각이 마비된 사람을 희롱한다. “히이힉- 힉- 쌔핵. 쌔핵. 힉-” 번식력을 지닌 無의 줄기는 빛보다 빠른 속도로 좌중의 혀를 잡아먹었다. 한 번에 참았던 숨을 몰아쉬느라 파랗게 질린 혜성의 소리만이 넓은 공간을 지나 뻥 뚫린 연주회장 근처 벽까지 치솟을 뿐이었다. “흐힉- 흐이힉-” 비록 자유롭게 연주를 저의 해석으로 끝냈을지라도, 무시무시했던 긴장감이 완전히 풀어지자 혜성은 숨을 조절하는 법을 상실했다. 괴롭게 내뱉고 가끔은 고개를 흔들었지만 3분이 지나도록 호흡은 나아지지 않는다. “히힉- 히힉- 씨힉-” 비로소 손가락 마디마디가 경련을 일으키듯 떨려온다. 째깍. 1분이 더 지났다. 박수 소리는 없다. 감히 사람인 주제에 지옥을 넘봤으니, 헬리아를 엿본 댓 가로 죽으라는 것일까! 텅 빈 사막처럼 뜨거운 레퀴엠의 창시? 신께서는 나의 숨결을 뽑아 가시려는가! “히익- 히이익- 힉-힉-” “…천…천히….” 피아노 건반에 닿지 않도록 머리를 숙인 혜성이 괴로운 듯 거친 숨을 내뱉는 시간만이 아까의 헬리아처럼 좌중을 고통스럽게 할 때, 누군가의 다정한 손길이 등에 닿았다. “히이이익-” “천천히 속으로 박자를 길게 세면서 숨을… 그렇지.” 혜성이 길게 숨을 내쉴 때, 좌중의 여러 곳에서 긴 숨이 함께 나왔다. “히이익- …후우우. 하아아아….” “…괴로워도 느릿느릿하게 길게… 숨을 내쉬어… 그래….” 정혁이었다. 어느새 곁에 서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는 혜성의 등을 쓸어주며 아이의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올 때 까지 속삭여 주었다. 천 명의 끔찍한 침묵 앞에서 머리 꼭대기까지 달아올랐던 혜성이 비틀거리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잘 봐라… 하아아아… 문…정혁….” “…….” 한 걸음 내딛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헤에 벌린 채로 정 중앙을 응시하는 좌중을 마주보며, 혜성이 반짝이는 입술을 열었다. 그는 여전히 혜성의 등을 고르게 문질러주는 중이다. “기적은….” “…….” 상당히 지쳐서인지 목소리 톤이 불규칙한 수페리우스의 허리가 천천히 좌중을 향해 숙여진다. “…있다.” “!” “와아아아-!” “수페-리우스!” “브라보! 브라보!” 그리고, 세상을 번쩍 들었다 놓을 법한 우렁찬 함성이 거세게 뒤따랐다. 저마다 손에 쥔 것을 마구 흔들며, 각자 자리에서 일어 난 천 여 명의 사람들이 갈채를 쏟아 붓기 시작한 것이다. 무려 5분 가까이 헬리아에 홀렸던 그들은, 혜성의 허리가 숙여지며 연주자의 끝을 알리자 번쩍 정신을 차렸으리라. “브라보!” 지상 최대의 콘서트, 두 번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형벌, 헬리아는 5분 침묵이라는 레퀴엠을 동시에 뽑아내며 막을 내린다. “봐…봤지…? 기…적은… 있다… 문정혁….”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이미 감성이란 없는지도 몰라. 분명히 숨이 막혔어. 나는 죽은 뒤, 떨어졌던 지옥에서 벗어난 거다. “봐…봐… 내가… 있….” 사방을 찢어 뜨리는 함성 소리에 짓눌리면서도 혜성은 허리를 올리지 않았다. 제대로 설 힘이 모두 사라져서인지, 아이는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떠듬 떠듬 희열에 찬 소리를 읊었다. 자신의 음성이 스스로에게 전달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술은 무언가를 전달하려 했다. “…그래….” 붉은 눈매 밖으로 투명한 것을 흘리며, 정혁이 대답한다. 그제 서야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지으며 수페리우스는 정혁의 품속에서 의식을 잃어 간다. 나의 아마데우스… 테레사… 수페리우스는 절대로 당신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습니다…. 백색의 야외 콘서트장 전체가 붉은 노을과 그 옆의 아름다운 장미에 물들 때, 투명한 초승달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로미오 워싱턴 조던? 혜성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다음날 정오 무렵이었다. 당연히 기숙사이겠거니 싶었지만 뭔가가 틀렸다. 때문에 손을 움직이고 머리를 돌려 보았지만 몽롱해진 기운이 더 할 뿐이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아니요….” “…?” 상당히 다정하고도 굵직한 음성이 들렸다. 혜성은 기분 좋게 고개를 저어가며 살포시 눈꺼풀을 내렸다. 아직도 온 몸이 저릿저릿하다. “여긴 병동입니다.” “…….” 그렇구나. 언젠가 맡아보았던 씁쓸한 소독약품의 냄새가 콧 전을 물씬 자극했어. “약기운 때문에 몽롱하실 거래요, 의사 선생님이…….” “…….” 어쩐지 고개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팔은 움직인다고 했지만 그건 마음이 움직인 거였다. “선배님… 저기… 다시 눈 떠 보시면 안 되나요?” “…….” 혹시 꿈을 꾸는 걸까. 누군가가 계속 달콤한 투로 속삭이는데, 당신은 천사인가. 나는 지옥의 헬리아에서 한 순간에 지상이 아닌 천국에 옮겨진 건가. “선배님… 저 몰래 들어온 건데 들키기 전에 나갈 계획인데 딱 한 번만….” “…?” 그 때 혜성의 시야가 다시 번쩍 뜨였다. 선배님? 닭살이 돋을 만큼 낯선 호칭 때문이었다. 약 기운마저도 순식간에 사라질 정도로 낯선 음성이 제대로 인식되자, 혜성은 마침 젖은 수건으로 팔목을 닦던 누군가를 부리나케 밀어냈다. “어…? 아, 눈 뜨셨네요?” “……?” 의식을 잃었던 것 까지는 기억난다. 정혁이 등을 쓸어주었고, 연주 직전에 사비나 교수님이 주저앉으셨지. 동완이는 콘서트 장 밖에서 요지부동 이었을 텐데, 그렇다면 이들 중 한 사람이 곁에 있어야지 이치에 맞지 않을까? 혜성의 의심 가득한 시선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전….” “…….” 꿀꺽 침을 삼키는 혜성을 가까이에서 봐도 봐도 신기한지 제법 키가 커 보이는 남학생이 씨 익 웃었다. “…신입생입니다.” “??” 뜻 모를 대답을 던지며 많이 당황해 하는 혜성의 뺨을 북북 수건으로 닦기까지 한다. 이게 누구지? 혹시 기억 상실이라도 걸린 건가? 아니면, 나는 정신 병동에 후송된 걸까? “…가벼운 농담이었는데, 안 웃으시네요.” “!” 농담? 처음 보는 사람이 던진 농담, 그것도 병동에서? 어안이 벙벙해진 혜성이 눈을 꿈뻑이자 신입생 이라는 녀석은 넓은 어깨를 가까이 가져오며 요모조모를 살피기 시작했다. “취미는 농구, 키가 190만 되면 그 길로 가려고 했으나 하필이면 아마데우스 신입생 나이에 185까지 자란 바람에 형의 뜻에 따라 여기에 입학한 비운아 에요.” “……??” “저희 형은 사실… 악마입니다.” “???” “애석한 일이죠….” “???” 정말 꿈을 꾸는 걸까. 혜성은 볼을 꼬집어보았다. 그런 혜성이 귀여웠는지 낯선 후배라는 놈이 환하게 웃는다. 정혁이 못지않게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참 잘 생긴 학생이다. 균형 잡힌 몸매는 그의 몸을 덮은 정복이 있어도 확실히 드러나는 그런 학생이다. 그런데, 왜? “여잔줄 알았습니다.” “…네?” “선배님 헬리아 연주하시는 거 진짜 가까이에서 봤는데, 여잔 줄 알았다구요.” “네?” 여보세요? 라는 말까지 할 뻔 했다. 이런, 정말 누구지? 작은 몸집의 혜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존댓말로 대답하자 박장대소를 하며 신입생은 저 혼자 좋아한다. 그 때였다. “야!” “!” “깨기 전에 나가랬지!” “…헉! 들켰다!” 일인용 병실의 문이 열리더니 화사한 장미꽃을 품에 안고 선호 선배가 들어온 것이다. 선호를 보자 그제야 안심한 혜성이 긴 숨을 내뱉는다. 씩씩하게 걸어오는 선호의 박자에 맞춰 후배라는 신입생 녀석이 벌떡 일어나서 대뜸 혜성의 손목을 움켜쥔다. 놀란 혜성의 등 뒤에 짜르르 솜털이 설 지경이다. “안 나갈래!” “나 수페리우스 손목 한 번 잡아보고!” “혼날래!” “아 형! 형! 잘못했어! 형! 으어억!” “따라 와! 손 안 풀어!” “아니 나느은 수페리우스가 진짜 러시아 인형이라는 소문이 있길… 어어억! 선배! 제 이름은- 악- 형!” “시끄러워!” “제 이름은 로미오에요 선… 아악!” 한 참을 선호 선배에게 두드려 맞던 잘생긴 후배 녀석이 급기야 귀가 잡힌 채 끌려 나간다. 나가면서도 딱딱하게 굳은 혜성을 돌아보며 저의 이름을 말하려 했지만 선호가 훨씬 막강했다. 체구는 훨씬 작으면서 끌고 나가는 힘을 보니 전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어쩐지 웃음이 터질 것 같아서 고개를 휙 돌리며 혜성이 조심조심 자신의 상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비 롯 거의 모든 곳에 자잘한 밴드와 붕대로 감겨 있었다. 약간씩 쑤시는 통증이 나른하게 퍼져왔고 혜성은 링 겔이 꽂혀있는 팔목을 신기하게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링 겔을 직접 맞아본 건 이번이 처음이어서 긴 줄을 툭 툭 건드리기도 했다. “로미오 같은 소리 하네.” “……?” “좀 괜찮아졌어?” “아… 동완아.” 링 겔 줄을 건드리는데 집중력을 발휘하던 혜성이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활짝 웃는다. 동완은 혜성의 침대 가장자리에 살짝 앉아서 몸 구석구석을 함께 살펴 주었다. 많이 걱정했다는 말과 함께 가장 고대했던 문장도 읊어준다. “헬리아와 레퀴엠의 동시 성공… 5분의 침묵을 끌어내는 게 쉬운 게 아니었을 텐데….” “!” “로제리오 교수님이 전하랬어. 다음 주 부터 스케줄을 짜도 좋다고.” “그게 정말이니?” “응. 그리고 스케줄 이외의 다른 말은 자기가 너한테 직접 한다는데, 통 무슨 소린지….”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마데우스에 지내는 동안 레슨과 수업 스케줄을 짜도 좋다는 말은 즉, 이번 시험은 합격이라는 통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모처럼 편안한 표정을 짓는 혜성과 마찬가지로 동완의 컨디션도 상당히 좋아 보였다. 둘은 잠깐 동안 가벼운 농담을 하며 시간을 죽이기로 한다. 혜성이 왜 다쳤는지 이유를 밝혔을 때 동완의 안면이 잠시 굳긴 했지만 아이는 가볍게 넘긴다. “가십이… 하나 떴는데….” “가십?” “별로 신경 쓰지 말자.” “…….” 가십, 가십이라… 사건 뒤에는 그것을 평가하는 기준 이란 것을 인쇄 동에서 늘 찍었었는데 잠시 그것을 망각했었다. 혜성은 신경 쓰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결국은 몰입하게 되는 가십에 스스로 혀를 내둘렀다. 어떤 가십을 누가 적었는지 동완에게 물어볼까 싶었지만, 어차피 눈으로 확인할 거 잠시 뒤로 미루자는 판단이 아이를 지배했다. 또 정혁이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야 한다고 내면은 강한 지시를 내렸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이름을 내뱉는 순간 말도 못 할 시련이 없는 것마저 빚어낼 것이 두려웠다. 혜성의 표정변화를 꼼꼼히 살펴보던 동완이 분위기 전환을 위해 말꼬리를 돌린다. “방금 나간 로미오라는 놈, 선호 선배 동생인데… 어제 입학했어.” “아!” “네가 궁금했나봐. 하긴. 다들 그렇지만….” “…….” “만나는 사람한테마다 이름을 다 다르게 불러달라는 이상한 놈이야. 선호 선배한테는 이런 말 하지 마 혜성아. 나한테는 자기 이름을 워싱턴 이라고 불러 달랐거든.” “뭐…? 워싱턴! 하하하하하!” “웃지 마. 심각한 일이지. 대체 이번 신입생들은 어떤 기준으로 선발했는지… 게다가 야외 콘서트 장에서 앉았을 때 옆자리에 로제리오 교수님이 계셨었나봐. 그래서 교수님한테는 글쎄 자기를 조단 이라고 불러 달랐지 뭐야.” “하하하하하하!” 동완이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고 중얼거릴 때, 하필이면 선호가 들이닥쳤다. “이미 들었다.”라는 말로서 동완의 표정을 구기더니, 선호는 변명에 여념이 없는 동완을 무시하는 동시에 혜성에게 안부를 물었다. 이윽고 “선호 선배의 동생 진짜 이름은 뭐에요?”라고 묻는 동완과 혜성에게 당장 대답해 주려던 선호는 그러나 뜸을 들이더니, “그냥 각자 알아서들 불러. 본명은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거든.” 이라는 대답을 툭 내뱉음으로서 둘의 엄청난 호기심을 극대화시키기만 했다. 어쨌든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한국 아마데우스에 수페리우스가 돌아온 것 이상으로 활력을 불어넣는 사건은 다름 아닌 새 얼굴들의 출현임을. 백색의 순결한 야외 콘서트 장, 그 먼 곳까지도 소식 이라는 바람은 불기 마련이다. 아마데우스 곳곳에 포진하고 있는 상당수의 학생들은 헬리아가 탄생한 뒤로도 무려 닷새 가량 게시 대 앞을 서성였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글귀에 치를 떨었고, 하나 둘 씩 현혹되어 간다. 입으로 전해지는 전설처럼, 글자의 위력은 실로 대단하기만 했다. 병동에서 혜성이 닷새 동안 쉬는 사이에 아마데우스는 야릇한 분위기를 통 가라앉히질 못한다. 요염한 몸놀림으로 세상을 거스르는 분수대의 물줄기를 빙 두른 학생들은 자신들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토론에 열을 올리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상당히 현실적인 글귀였어.” “소문이 사실이더군. 우리는 잠시 홀렸던 게 정답이겠지? 가십에 나와 있는 대로.” 게시 대 앞에서 오만한 표정으로 주변을 압도하는 무리들은, 다름 아닌 3학년 신입생들이었다. 그들은 벌써 친해졌는지, 혹은 친해지기 위해 안간 힘을 쓰는 건지 모르지만 각자 빠르게 의견을 내뱉기에 여념이 없었다. 눈에 띄어야지 서둘러 친해진다는 공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실력이 월등한 신입생이라면 저희들 사이에서 이미 알고 있을 텐데도 그들은 ‘화제’를 도마 위에 올린다. “모세 라는 선배는 자기 주관대로 적은 게 아닐까?” “전~혀.” 안경을 쓴 똑똑해 보이는 신입생의 의견에 어깨를 으쓱하며 덩치 좋은 다른 학생이 나섰다. “열 번이 넘게 읽어봤는데도 정확한 것만 전달하는 가십이었는데?” “글세….” 신입생들은 저마다 흥분했다. 작은 의견도 그들에겐 심각한 고민거리가 되었다. 그래, 그들은 ‘가십’이라는 걸 몸소 체험한 첫 번째에 흥분한 것이다. 입학하기 전에는 외부에서 전해 듣기만 했던 것을 아마데우스 땅에서 직접 눈으로 목격한다? 이것은 그들을 아주 들뜨게 했다. 게다가 가십은 각자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으로서 친구들의 성향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선배들은 딱 하루만 열중하고 마는 가십이지만, 앞서 거론했던 이유 때문에 신입생들은 계속 그 점을 토론해야만 했다. < 신입생들을 죽이는 헬리아! 그의 약속은 거짓이었다. > 모세의 가십 제목은 바로 저것이었다. 신입생들은 첫 줄 부터 혼란을 주는 글귀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군중을 몰아세우는 직설적인 모세의 글은 이상 하리만큼 거북스러웠지만 인정할 부분이 너무 많았다. < 9월의 자랑스러운 입학식 날 열린 헬리아! 연주회 날짜는 로제리오 교수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물론 선택받은 천 여 명의 좌중은 귀를 기울였고, 수페리우스가 약속을 제대로 지킬지, 자신을 증명할 지에 촉각을 곤두세웠었다. 이에 앞서 설명하기를, 수페리우스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자퇴했던 불길한 인물이다. 그는 언론에서 쉬쉬하는 혁명을 일으켰으며 그 혁명이 일어나기까지 선량한 학생들을 저의 쪽으로 이끌었다. 상황이 종료되고 1년 이라는 시간동안 은둔하더니 제 발로 다시 돌아왔다. 참으로 기가 막힌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학교 측에서는 그를 위해 학생 재판까지 열어 주었다. 과연 홀리는데 일가견이 있는지라 수페리우스는 92%의 지지율로서 재판에서 승소한다. 다만, 그가 헬리아 연주를 실현했을 때, 또 그것을 레퀴엠으로 승화 시켰을 때 자퇴가 철회된다는 조건이 붙여졌다. 물론 연주는 화려했고 레퀴엠과 헬리아 라는 이름에 걸맞았다. 순결한 아마데우스 학생들이여. 하지만 수페리우스는 약속을 모두 지키지 않았다. 그는 노력 없이 피를 흘리는 몰골을 하고 나타난 것으로 시선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판단력이 흐려진 좌중 앞에서 ‘제 멋대로’의 연주를 시작했다. 수페리우스는 연주 시작 직전, 자신의 서포터가 되어 줄 문정혁에게 자기 입으로 준비가 덜 되었음을 인정했다. 우리는 고작 그 연주를 약속이라 믿고 경청했음을 알아야 한다.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결과는 그의 승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결과 보다는 과정이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지만 그의 자퇴는 철회 되었으며 혁명을 일으켰던 수페리우스는 다시 아마데우스 땅을 밟게 되었다. 그의 귀추가 주목되는 바이다. - 모 세 - > 이 가십으로 인해 또 얼마나 많은 신입생들이 수페리우스를 적대시 할 지는 불 보듯 뻔 한 일이었다.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는 모세에게 백기를 든 테오제네스의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헬리아의 탄생 당일 붙여진 가십. 애석한 일이지만 이 가십은 또 한 번의 파란을 일으켰고 닷 새 만에 수페리우스의 편을 두 개로 갈리게 했다. 대다수의 신입생들은 딱 한 번 기적을 선사해 준 수페리우스를 지지하기는커녕 의심하는 쪽에 기울었기 때문이다. 로제리오 교수의 동의하에 10월 첫 째 주 금요일로 잡힌 신입생 연주회 소식이 아니었다면, 당사자는 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 가운데 모세의 가십은 쓸데없이 위협을 가 할 뻔 했다. “10월 첫 째 주 금요일이요?” “그래, 수페리우스. 이 점을 너한테 알려 줘야 할 것 같아서 따로 불렀지.” 하지만 정작 가십의 당사자인 혜성은 퇴원하는 즉시 로제리오 교수의 집무실로 향했다. 길을 스치다가 게시 대에 부착된 가십을 반 정도 읽었을 때, 안 봐도 훤히 들여다보이는 내용을 굳이 마지막까지 읽을 필요는 없어서 그는 다 읽지도 않았다. 이제 어떤 가십이 올라와도 수페리우스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로제리오 교수는 파스와 소독약 향을 풍기며 나타난 수페리우스를 앉히는 즉시 본론부터 꺼냈다. 경험해 본 바 테레사와 마찬가지로 수페리우스는 자신과 있을 때 쓸데없는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음악 이야기라면 모르지만…. “…적당한 시간이군요. 아무래도 선배를 정하고 호흡을 맞춰야 하니까….” “일주일 정도 더 기한을 늘려도 상관없지만….” “굳이 2중주가 아니더라도 개개인의 기량을 선보일 수 있다면 독주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음….” “어쨌든 늘린 날짜가 나쁘지 않네요. 아니, 차라리 그게 낫겠습니다.” “…….” 신입생 연주회 일정표를 휙휙 넘겨보며 대답하는 수페리우스에, 저도 모르게 그러냐는 대답을 하며 로제리오는 경직되었다. 이럴 수가. 1년이 이렇게 사라지는 건가? 그는 지금 테레사와 대화를 나누는 착각에 빠질 뻔 했다. 아니, 대화 내용만 보면 눈앞의 이 사람은 테레사였다. 기분이 저하된 로제리오는 시큰둥한 어절을 내뱉으며 수페리우스가 막 넘기던 종이들을 뺏었다. “아니. 첫 째 주 금요일로 하지.” “?” “…….” “촉박하긴 하지만, 좋으실 대로 하시지요. 저는 학생이니까요.” “!” 여유롭게 웃어가며 대답하는 수페리우스를 다시 확인하며 로제리오는 깊은 절망에 빠져들었다. 테레사가 뽑은 인재라서 그런 걸까? 예전의 테레사도 이와 비슷한 대답을 로제리오에게 했었다. 『 9월 마지막 주라… 학생인 저는 아무래도 교수님의 의견을 따라 야지요…? 』 제 작년 신입생 연주회 날짜를 고심하던 때, 로제리오에게 환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던 테레사가 지금 혜성에게 겹쳐졌다. 둘은 비슷한 대답을 거의 똑같은 모션을 취하면서 한 것이다. 로제리오는 테레사의 빈자리를 느끼기도 전에 그를 흉내 내는 것처럼 똑 닮게 응수하는 수페리우스가 자꾸 걸리적거렸다. 테레사의 의견에 하는 수 없이 따르기로 했던 로제리오는 막 문을 나서던 그에게 직격타로 이런 말도 들었었다. 『 바오르 신부님께는 제가 전달하겠습니다. 어차피 교수님이 전달 하셔도 신부님은 저를 또 찾으실 테니. 준비하는 과정에 필요한 것도 위원회에 직접 말씀하시거든요. 』 신입생 연주회에 총 지휘권을 부임 받았던 로제리오로선 실의에 빠질 만한 문장이었다. 회상에 빠졌던 로제리오가 가까스로 현실에 돌아오며 괘씸한 수페리우스에게 어서 나가보라고 이른다. 혜성은 왜 자신에게 별 것도 아닌 일에 열을 올리는지 로제리오 교수가 당장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렇잖아도 정혁과 연못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닥쳐서이기도 하다. 집무실 문고리를 쥐고 막 나서려던 혜성은 때마침 머릿속에 스친 인영 때문인지 잠시 머뭇거리며 쓴 홍차를 들이키던 로제리오에게 순진하게 물었다. “그런데 로제리오 교수님. 바오르 신부님께도 이 말을 전하시는 건가요? 아마데우스 총괄은 아무래도 바오르 신부님이실테니…….” “풉!” 예전의 테레사와 결국은 똑같은 말로 일침을 가하는 수페리우스 덕분에 로제리오는 입에 들어온 홍차를 모두 뱉었다. 진초록 수풀은 달콤한 향을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우수수 떨어지는 검붉은 색채는 땅에 곤두박질하는 청명한 계절이 지날수록 아마데우스는 전에 없던 기품이 베어졌다. 그것은 살아있는 역사였다. 움직이는 것처럼 생명력을 띠고 있었다. 가을이지만 여름옷을 입은 것처럼 어쩐지 발랄해 보이는 분위기는 중앙의 분수대를 중심으로 화사하게 퍼져나간다. 수페리우스의 가십, 다시 테오제네스의 진노, 학생 재판, 승소에 따른 헬리아, 헬리아와 레퀴엠의 접목, 그리고 또 신입생 연주회. 이 모든 것은 단 한 달 만에 빠르게 진전된 성과였으며 죽은 사막으로 변했던 아마데우스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계기로 자리 잡았다. 파란 모래알이 흩날리는 것처럼 싱싱해 보이는 연못 주변은 온통 따뜻한 빛이 그림처럼 번져나간다. 흡사 초원의 넝마가 된 기분으로 뛰는 게 나을 법 한 분위기에 몇 몇 학생들은 아름드리 정복 소매를 걷어 올리고 이리 저리 힘차게 돌아다녔다. 저기 올곧은 한 사람이 개중 시원한 그늘을 골라서 조용히 서 있다. 많은 이들은 바쁘게 움직이며 영롱한 빛을 발하는 데 반해 그는 어둡고 습한 지역을 편안해 한다. 연못의 다리위에 정지 한 혜성은 여전히 어두운 자락에서 스스로를 빛내는 정혁의 뒷 모습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그는 병동에 입원 중인 혜성을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를 대신하려는지 선호 선배의 동생 이라는 녀석만 불쑥 불쑥 나타나서 자기는 로미오라는 말만 시원하게 남기고 갔었다. 스르르- 바람에 밀린 정혁의 머리칼이 풍부하게 출렁였다. 가슴 저 쪽 죽어있던 심장이 파르르 찔리며 혜성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그 쪽으로 다가가니 가시덤불을 맨 발로 밟는 것처럼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 경쾌한 통증을 뒤로 하고, 적당한 거리감을 표정에 씌운 채 혜성은 연못을 응시하는 정혁의 옆에 섰다. 이대로 그림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푸릇한 상상에 빠져들 때, 별안간 혜성의 작은 손목이 세게 붙잡힌다. “…….” “…….” 첫 인사를 어떻게 건네야 좋을지 한 참은 망설였을 법한 정혁이 다짜고짜 혜성의 손목이며 팔 여기저기를 샅샅이 살피기 시작한다. 맹수처럼 돌변하다가도 붓기가 가라앉는 부분을 찾으면 슬픈 눈망울을 여실히 빛내는 사람, 너의 진짜는 무엇일까. “…놔.” “…….” 혜성은 당장 그의 손아귀에서 자신의 팔을 가져왔다. 순순히 놓아주는 정혁이 이번에는 혜성의 다른 쪽 팔을 잡아끌었다. “문정혁!” “…….” 연못의 다리 위를 지나다니는 학생들이 정혁과 혜성을 알아보고는 저마다 소곤거리기 시작한다. 불쾌해진 혜성은 잡힌 손을 빼기 위해 바둥거렸지만 그는 오히려 힘을 줄 따름이다. 하는 수 없이 그가 앉히는 대로 시원한 그늘에 주저앉았다. 수페리우스다. 문정혁, 그림자다. 혹은 헬리아다. 하며 저희들끼리 소곤거리며 주목하는 학생들의 시선에 갈증이 날 무렵, 혜성의 눈이 크게 뜨인다. “뭐, 뭐하는 거야!” “…….” 그러나 불같이 노려보는 그의 시선에 압도당해 혜성은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에 타들어 가는 못난 육신이며 마음은 어디로 돌려야 할까. “너 때문이잖아. 문정혁.” “…….” 정혁의 강인한 양 쪽 손은 혜성의 바지를 무릎까지 올린 상태였다. 이에 당황한 혜성이 소리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 “…….” 겉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무릎 쪽에 유리가 박혔던 상처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정혁은 그 점을 어떻게 알았는지 한 참 동안 혜성의 마른 다리며 무릎의 붕대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정혁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다리 위의 시선들도 짙어지는 건 당연지사, 혜성이 뭐라고 한 마디 하려던 찰나 그는 조심스레 바지의 깃을 내려준다. “…창문을 깨서 나올 줄은 몰랐어.” “…….” “그리고…….” wgreene@naver.com 그리고...헬리아 어떠셨나요..(퍽-) 밤새서 적으면 나도 좀 수페리우스처럼 미치는 기분에 사로잡힐 수 있을까 싶어서 무식한 방법을 동원해서 적어봤는데 재미있게 읽으셨기를...........툭.(여러분. 동창이 밝아옵니다. ㅜ_ㅜ 설레여요. 전 이제 일하러... 아 난 진짜 돌았는가? ㅜ_ㅜ) 사실 이번편 음악 각자 좋아하는거 들어가면서 격정적이게 읽으시면 됩니다.;ㅜ_ㅜ 뭘 틀어도 전 사실 안들렸어서 이번편엔 뭘 올려드려야 할지 몰라서 대강 잔잔한거 깔았거든요.ㅜ_ㅜ 죄송합니다.(퍽퍽-) 참.. 헬리아를 두개로 쪼갤 필요가 없었는데.. 뭐 나중에 제본낼땐 하나로 뭉치면 되니까 지금 보기편하면 되는거죠..(므흣) 미친 김에 미친 제안 좀 하겠습니다. 댓글 20개,스무개 채워지기 전까지는 다음편 없습니다. 부족하나마 열심히 적은 것입니다. 저에게 당신의 표현을, 영감을 부디 주시기를...(그냥 잘봤다는 인사 정도라도 좋아. 아.. 진짜 구차하다.ㅜㅜ 수학도 못하는게 왜이리 숫자욕심이 많은건지 진짜 내가 나에게 총쏴.ㅜ_ㅜ) 몇번씩 적어도 상관 없습니다.+_+(이렇게라도 다음편에 힘을 좀 내 보려는 나를 이해해죠 달링) 별하님, 박카스정님, 로아님, 주황이, 데빌님, 연님, 포근구름님, 군림님, 고맙습니다.^^ 힘내라 태극전사여어어... ..를 외치며 이시간 마치겠습니다.(?) -더블류지알이이엔이- 덧글 31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28~29(헬리아II + 로미오 워싱턴 조던)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28~29(헬리아II + 로미오 워싱턴 조던)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30~31편 ▼ 다음글 - 2악장 27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30~31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6/18 19:27 http://blog.naver.com/wgreene/110005324343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618 30~31편 업데) Amadeus 음악 : One World - Celtic Woman (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One World-Celtic Woman 큰 바위얼굴 2악장 30~31편 그는 많은 말을 하고 싶어 했지만 두서없이 열릴 자신의 입술이 두려운지 혜성의 시선과 똑 바로 마주치지를 못했다. “그리고….” 정혁의 ‘그리고’ 라는 말이 긴 텀을 주고 통 이어지지 않을 때도 연못의 푸릇한 주변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은 과거의 향기를 담고 있었다. 오래 전 민우의 체향이나 다름없던 라일락과, 성가대 연습실에서나 맡아지는 풋풋한 목제의 향, 그리고 지평선 끝에서 넘실대는 태양의 향기까지. 정혁의 문장을 기다리다 지친 혜성이 연못의 다리에서 마침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무리들에게 가볍게 목 인사를 한다. 그럴수록 과거의 짙은 바람은 정혁의 주변을 동그랗게 에워 쌓더니 토네이도처럼 거허하게 솟구치기만 했다. 그의 흐릿해진 눈망울은 헬리아의 탄생, 그 이틀 전을 회상하고 있었다. 바로 이 장소에서였다. 그래, 이틀 전 혜성의 기숙사에서 나오던 정혁은 쓸쓸한 연못의 다리 위에서 테레사를 만났다. 테오제네스를 통해 정혁의 위치를 파악한 테레사가 눈을 감고 밤이 되어도 반짝이는 연못 위에서 초생달처럼 서 있었다. 서쪽 기숙사동에서 가장 가까운 산책로나 다름없는 연못으로 정혁이 당연히 지나갈 것을 테레사는 알았던 것이다. 아마데우스의 건축부터 참여했던 그가 학생들의 행동패턴을 모르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당당한 테레사의 어깨는 밤의 전류를 흡수하듯 강직한 손은 난간을 쥐고, 닫은 시선으로는 더 많은 것을 감상하는 것처럼 신비로웠다. 다리의 중앙에 서 있는 테레사를 모르는 척 지나가려던 정혁의 발목을 쥐던 웅장한 입술을 기억한다. 짜르르르 소금쟁이가 왈츠를 추는 연못과 가장 잘 어울렸던 그는 정령과도 같았다. 『 두 번째 부탁이 있다. 』 『 ! 』 그는 언어로써 정혁의 길을 차단했다. 『 들어 줄 수 있겠나…. 』 『 ……. 』 쉬히이이- 밤을 알리는 수풀의 움직임이 청각을 자극했고 뺨과 다리를 스쳤었다. 정혁이 등 뒤에서 머뭇거림을 안 봐도 알겠다는 듯, 자상한 테레사는 냉정한 표정 위로 입 꼬리를 살짝 올렸었다. 하지만 그는 웃고 있어도 남에게 두려움을 더 많이 보여주는 사람이다. 절제된 음성이 생생히 전달되는 순간부터 정혁은 숨이 막힐 것처럼 가빠지는 고동에 어떤 대답도 제대로 건네지 못했었다. 『 단, 아직도 네가 나를 존경한다는 전제가 있다면 말이지.』 『 ……. 』 그렇게, 당신은 전혀 몰랐겠지만 헬리아의 이틀 전 신비로운 밤이 있었다. 과거의 아름다운 바람이 지니고 있는 것 중 신비로운 그 날이, 사방으로 흩날린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이 오직 사람을 스치기만 하는 잔해에 떠밀려 정혁의 회상은 통증보다 짙어진다. 테레사는 전보다 여유롭고 안정된 분위기를 자아냈었다. 그 만이 지닐 수 있는 품위는 시력이 없는 때에 제대로 빛을 발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혁을 압도했었다. 『 문정혁. 』 『 ……. 』 정혁이 그의 옆에 서는 것을 차분히 기다려주던 테레사는, 특유의 세련되고도 풍부한 어절로 정혁의 심장을 발끝까지 떨어뜨렸었다. 『 그 애를 몰아세워라. 』 『 ! 』 하느님! 정혁은 이대로 영혼마저 경직 되서 죽는 건 아닐까 싶었다. 거센 파도처럼 밀려오는 테레사의 음성은 그러나 그게 시작이었다. 『 그 애를 미치게 만들어라. 스스로 죽고 싶을 정도로 절박하게. 』 『 테레사! 』 다리 난간에 떨리는 손을 올린 정혁의 위에, 일순 따스한 것이 겹쳐졌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던 테레사가 팔을 내밀어 순결한 자신의 손바닥을 눌러줘서였다. 그의 몸짓은 콘서트 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은어의 손놀림이나 다름없었다. 움직일 수 없던 정혁의 귓가로 세찬 바람보다 빠른 언어가 들어온다. 『 부탁한다. 』 테레사! 정혁의 굳은 입술은 겨우 뜻을 전했었다. 『 제 정신이 아닙니다 당신은 무슨 말을 한 건지나 알고 계십니까 테레사! 』 『 알고 있어! 』 『 ……! 』 수페리우스를 몰아세우고 미치게 하라니요! 정혁은 샘솟는 분노가 타당함을 증명하려 소리쳤지만 테레사도 못지않았다. 둘의 사이에 천둥이 꽂혀도 날아가지 않을 강한 벽이 서로를 찔렀다. 감성은 극대화 되었던 수풀의 밤을, 연못의 물결마저 그들을 거슬렀던 그 때를 기억한다. 『 그러니까 부탁 한다, 미치게 해! 』 『 못- 』 그러나 칼 같은 그의 음성은 정혁의 작은 놀라움을 부드럽고도 강하게 단절시켰던 그 때를. 『 나는 그런 혜성이와 처음 만났었거든. 그게 그 애의 기량이다. 너는 모르겠지만. 』 『 ! 』 정확하고 확실시 되는 것을 유감없이 꺼내는 테레사는 긴 속눈썹에 일 올의 떨림도 비치지 않았다. 그의 손바닥 아래에 눌린 정혁의 왼 손등이 타들어가도, 테레사는 꽉 닫은 눈매를 열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당당했다. 『 속는 셈 치고 한 번 해 봐. 너는 버팀목이 되어선 안 된다. 나는 그림자라는 버팀목이 걸리적거려. 』 『 …그래도 당신이 계시다면……. 』 숨이 막히도록. 어차피 그는 듣는 이가 숨이 막혀도 확인하지 못한다. 그의 닫힌 시선은 잔인한 방패가 되지 않던가, 오 하느님. 『 나는 떠날 거야. 어차피 보스턴으로 가겠다고 로제리오 교수님과 합의를 본 상태니 상관없지. 』 『 떠나다니요! 』 자신의 뜻을 종이에 적힌 글자를 읽듯 순서 정확하게 읊었던 달밤의 음성을 기억한다. 그 때 정혁은 내면을 통제하는 능력을 상실해서 고함을 질렀었다. 테레사의 입 꼬리는 한 템포 진전해 급기야 안면을 통째로 웃었다. 『 내가 없고, 히스가 없으니, 너도 있어서 안 된다. 지금의 너는 수페리우스의 날개를 무겁게 하고 있으니까. 』 그 음성은 밤이 가릴 수 없는 태양과도 같이 뜨거웠다. 시야를 희롱하는 까만 밤은 정혁에게 무기가 될 수 없었다. 테레사라는 태양은 어차피 사물을 읽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현재는 뜨거운 정오나 다름없었던 것을! 정혁은 숨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불안정한 그의 언변에 토를 달았다. 『 …만약 실패한다면…. 』 하지만 이것마저 테레사가 한 수 위였다. 초승달이 기울어지듯, 떳떳하게 수평선 끝에서 달아오른 몸을 내미는 태양처럼 테레사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었다. 『 내 회색 눈알마저 뽑아 버리지. 』 『 ! 』 촤좌좌- 밤바람에 밀린 아름다운 연못이 테레사의 제안에 놀랐는지 힘차게 밀려갔다. 『 시력을 담보로 하고 계약을 맺을까 싶지만, 이미 없는 시력인걸! 하하하하! 』 『 …미쳤군요. 』 정혁의 손등에 누른 손에 더욱 힘을 주며 테레사는 천천히, 너무 느린 박자에 그를 지켜보는 꽃과 바람이 숨이 막힐 때가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 아마데우스는…. 』 『 ……. 』 사방이 사막의 모래처럼 흩어지고, 다시 모아져서 새와 풀을 어울리게 하는 순간이 수 십번은 바뀐 것처럼. 정혁은 그의 음성에 정신을 가눌 수가 없었다. 『 ……미쳐야 버틴다. 』 『 ! 』 푸두두두- 연못의 다리 양 쪽 끝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수려한 나뭇가지 위의 새들이 힘차게 날개를 퍼덕인다. 미쳐야 버틴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발끝에서부터 전율이 일었다. 가시처럼 돋은 소름이 저 밖을 치장하는 장미의 날카로움보다 아팠다. 『 아마데우스는…. 』 『 ……. 』 섬세한 음성은 오페라가 되어 좌중을 희롱합니다. 단 한 명의 좌중이 되어 견뎌야 합니다. 단단한 감성이 무뎌지도록, 상대가 방심할 때 창을 던지는 무인처럼 흔들림 없이 찔리는 음성. 『 움직이고, 도전하고, 쓰러질 줄 알아야 버티는 곳이다. 어차피 그게 세상이야. 』 『 ! 』 『 네 안의 아마데우스는 어떻지? 네 안의 세상은 어떤가. 』 『 ……. 』 정혁은 입술을 깨물었다. 테레사의 단호한 음성은 콘서트장의 클라이막스처럼 강해질 뿐이었다. 『 물론 너처럼 패배가 두려워서 안정된 방법으로 계속 주어진 것만 공부해도 상관없어. 』 『 …당신에게 있어서 수페리우스는 뭔가요. 』 『 ……. 』 이에 테레사는 한동안 입을 다물었었다. 긴 침묵이 아찔한 달 밤, 다가올 헬리아에 대비하듯 숨을 죽였던 때, 테레사도 침묵을 고수했었다. 영원히 그 자리에 못 박힐 것처럼 정혁을 애타게 했었다. 그리고 그는 이런 대답을 주었다. 『 …전부. 』 정복자로서 해야 하는 당연한 대답을. 『 그럼 옆에 계속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제가 불안하지 않습니까. 저 말고도 민우도 있었지요. 그 외에 더 숫자가 늘어가겠지요. 불안하지 않습니까 테레사? 』 『 …글쎄. 』 『 ……. 』 『 그 점에 있어서는, 혜성이가 나를 불안해하지 않는다. 하하하하! 그래서 나는 그게 질투나서 불안해 할 수가 없어. 』 『 ! 』 자유롭게 웃는 테레사의 입술을 그 누구도 막을 수는 없으리라. 정혁은 진짜 장님은 자신이 아닐까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시야가 없어서야 분위기를 저의 뜻대로 맞춘 테레사에게 끊임없는 열등감이 치솟아 괴로웠다. 그는 눈이 없어도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 사랑은 언제든지 할 수 있어. 그리고 나는 기다리고 있지. 』 『 무엇…을…? 설마…! 』 『 …시련을 극복하고 상황을 깨닫고 경험한 뒤, 나와 비슷해진 수페리우스가 최종 라스트로 나를 지목하고, 도전하기까지. 』 『 ! 』 『 나는 그 애를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그 날이 닥치기를 무서워 하면서도 가장 기다리고 있거든. 하지만 아직 멀었어. 』 『 …수페리우스의 진짜 적은 테레사, 당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 『 그런 건 적이 아니라 ‘목표’라고 하는 거야. 』 『 ! 』 테레사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수페리우스의 글자가 지나칠 때 마다 그의 어깨가 가볍게 들뜨는 것을 정혁은 똑똑히 확인했다. 가슴이 아프다. 어쩐지 자신이 끼일 자리가 저 둘에게는 없어 보였다. 몰아세우라니? 정혁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것을 뛰어 넘어 애증에 미치게 한 수페리우스를 몰아세우라는 테레사가 두렵기만 했다. 끔찍하고 서러웠다. 『 글쎄. 그 때의 신혜성은 과연 나를 능가할 수 있을까. 나를 뛰어 넘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도 쉬면 안 되는 거지. 그래서 보스턴에 간다. 』 『 …저는 못 갑니다. 』 『 ……. 』 정상인처럼 정확하게 걸어가는 테레사의 등에 대고 정혁은 이를 악 물고 응수했다. 『 그 어디도 안 갑니다. 테레사. 당신의 방식을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혜성이를 차지할 테니까요. 』 『 차지 해. 』 『 ? 』 잠깐 걸음을 멈춘 테레사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칼 같이 대답했다. 『 내가 이해 안 되는 걸 보니 너는 혜성이도 이해 못 할 테니까. 하하하하하. 』 『 ……. 』 뒤늦게 웃음을 주었지만 정혁의 무감각한 지대에서 작은 파장도 일으키지 못한다. 과거의 세찬 바람이 향기를 거둬간다. 몽롱하게 도취된 정혁의 시선이 차차 또렷해질 때, 혜성은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잔디 사이에 행진하는 개미떼와 벌레들을 툭 툭 건드리고 있었다. 아이는 ‘그리고’라는 문장의 뒷 말을 기다리는 것을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 무릎을 꿇고 바닥에 상체를 완전히 붙인 혜성이 열심히 흙을 파헤치며 놀던 것을 관두었다. 정복이 더러워졌지만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했는지 아까처럼 정혁의 앞에 다가왔다. 천천히 마주 선 두 사람의 옆으로 강렬한 오후의 태양이 노란 태를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네가 정말 성공할 것을 나는 믿는 척만 했던 거야….” “…그게 무슨 뜻이지?” “…….” 테레사의 말 대로 너를 몰아세우면서도, 사실은 네가 성공할 줄 몰랐거든. 정혁은 대답 대신 그렁그렁 차오른 눈매를 돌렸다. 1년, 1년 동안 무조건 연습에 박차를 가했었다. 테레사를 따라잡기 위해서, 혜성을 잠깐이라도 잊기 위해서, 그는 연습과 공부 외에 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 승리는 아직 멀었나 보다. 씁쓸한 어깨를 돌려서 걷던 도중 정혁은 딱 한 번 혜성을 돌아보았다. “문정혁. 무슨 뜻이냐고 물었어.” “…….”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 오후의 따가운 빛 때문에 눈을 반쯤 감았지만 오히려 더 환한 사람. 정혁은 옷에 묻은 흙을 털라는 듯 자신의 가슴팍을 툭 툭 치는 시늉을 했다. 그제 서야 후다닥 저의 옷의 지저분한 것들을 털어내면서도 혜성은 귀를 쫑긋 세우고 방방 뛰며 소리쳤다. “정혁아!” “…….” 테레사. “제대로 말을 안 해 주면, 나는 너를 원망하고 오해하고, 증오하게 될 거야!” “…….” 이번에는. “정말 그렇게 될 거야!” 당신이 이겼습니다. 당신이 옳았습니다. 그러나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정혁의 걷는 보폭이 빨라질수록, 혜성의 소리는 작아져 간다. 마침내 수페리우스의 음성이 완전히 없는 인적 드문 곳에 다 달았을 때, 그는 멈춰 섰다. ‘너를 증오하게 될 거야! 정말 그렇게 될 거야!’ 가장 어두운 자리에서, 정혁은 그런 스스로가 익숙하다는 듯 낮고 분명한 투를 흘린다. “…상관없어….” 그의 푸석해진 뺨을 타고 길고 슬픈 줄기가 떨어진다. 한국 아마데우스는 신입생 연주회라는 타이틀을 시작으로 여름보다 진한 가을을 펄럭이고 있었다. 신입생들은 쉴 새 없이 뛰어다니며 오르페우스 관에서 연습 중인 저의 선배들에게 반주를 부탁하고, 또 부탁했다. 제법 잘 생기고 예쁜 학생들은 외모를 이용해서 자신이 가슴에 품은 선배에게 다가갔으며, 귀여운 신입생의 반주를 맞춰 주고 싶은 선배 쪽에서 먼저 다가가는 경우도 허다했다. 인기가 좋은 선배들이며 후배들은 그런 면에서는 걱정이 없었지만 문제는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였다. 선배들의 입장에서는 신입생들이 자신에게 반주를 부탁하지 않는 것도 상당히 자존심에 금이 가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거절당했나봐!” “저런!” 선배들은 거의 다 후배들이 어렵게 반주를 부탁할 때 승낙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선배들도 분명히 있었다. 명문가의 자제들로 구성된 아마데우스에는 오만하고 자랑하기 좋아하는 유형이 훨씬 많아서였다. 저 쪽 오르페우스 관에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나오던 신입생 한 명을 목격하며 밖에서 대기 중이던 다른 무리들이 혀를 찼다. 남의 일 같지 않아서였다. “혹시 이자벨 선배한테 부탁한 게 아닐까? 아니면, 수산나 라던지… 이자벨 선배 주변에는 다들 예쁘고 실력도 괜찮 다잖아.” “아무래도 그렇겠지?” 연주회 날 자신의 반주를 도맡아 줄 선배를 구하는 건 손에 땀을 쥐는 일이었다. 하얗게 질려 가면서도 그 일은 어쨌든 아마데우스의 활력을 심어준다. 바이올린을 들고 대기 중인 한 학생이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이목을 끌었다. 옆에서 함께 발을 동동 구르던 키가 작은 학생도 첼로 케이스를 바닥에 질질 끌리던 것을 관두고 바짝 긴장한다. 둘은 서로의 준비 자세를 확인하는 즉시 흠칫 놀라더니 눈에 불을 켜고 싸우기 시작했다. “내 선배야!” “내가 먼저 찍었어!” 오르페우스 관 밖으로 유유히 걸어 나오던 선호는 자신을 찍은 두 명의 후배를 의아하게 응시하며 지나쳤다. 그러다가, “선배! 저의 반주를 맡아주세요!” “아니요! 저 해주세요!” “!” 양 쪽에서 동시에 소리치며 죄 없는 선호의 어깨와 손을 끌어당겼다. 놀란 소리 한 번 못 내고 우당탕 바닥에 엎어진 선호가 그들에게 질질 끌려간다. 이렇듯 한 명의 선배를 두고 두 명 세 명의 신입생들이 다투는 일도 비일 비재했다. “너도 반주를 하니?” “…글쎄….” 높푸른 하늘을 하염없이 응시하던 혜성이 묻는다. 오르페우스 관 창 밖으로 선호 선배가 낯선 신입생들에게 포위되어 끌려가는 모습을 목격한 직후였다. 선호선배가 끌려갔다는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던 혜성이 피아노를 조율하던 동완의 근처에 섰다. “어때 혜성아. 눌러 봐.” “?” “얼른.” 동완이 한 시간 전부터 끙끙대며 조율한 피아노 건반을 의심스레 응시하던 혜성이 넉살좋게 웃는 그에게 지는 척 건반을 눌렀다. 그리고 놀라서 가볍게 양 손으로 몇 가지 건반을 더 눌렀다. 푹 들어가는 무게감은 흡사 잡아당기는 것처럼 힘들기만 하다. “너무 무거운데? 왜 이렇게 해 놨어!” “가장 무겁게 건반을 만든다고 한 건데… 어때?” “미쳤구나. 이렇게 하면 손가락이 나마나질 않을 거야.” “이 정도에서 문정혁이 훈련 하는 걸로 아는데… 그렇게 힘들어?” “…….” 고개를 쭈욱 빼고 묻던 동완이 쪼로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자신이 진땀 빼며 조율한 건반을 무의식중에 몇 번 누르고는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파랗게 질린 동완은 자신의 손가락을 감싸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림자가 괜히 그림자가 아니었어!”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 “동완아. 네가 쓰기로 한 시간이 거의 다 됐으니까 어서 원래대로 건반 무게를 돌려 놔.” “윽.” 혜성의 당연한 대답에 할 말을 잃은 동완은 참담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피아노 곁에 다가갔다. 가벼운 건반에서 연주를 해도 콘서트 장에서 은어의 손놀림을 선보이는 테레사를 따라잡기 위해 문정혁이 이 정도로 무거운 건반에서 연습을 반복한다니. 잠깐 눌러봤지만 건반은 누르는 것이 아닌, 잡아당긴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어. 어쩌면 정혁이는 정말로 헬리아와 레퀴엠을 극복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아니 이럴수가!” “?” 하릴없이 의자에 앉아서 흐릿한 동공 저 쪽 테레사와 정혁을 교차하던 혜성이 후다닥 정신을 차렸다. 조율하기가 귀찮아졌는지 동완이 어느새 창문에 매달려서 분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 시간 동안 조율하느라 진땀을 흘렸던 표정 그대로 목을 길게 빼고 여러 번 화를 내더니, 혜성에게 어깨를 으쓱한다. “아니! 저것들이 감히! 미카엘선배를 뭘로 보고!” “아!” 아까 전 오르페우스 관 밖에서 신입생들에게 붙잡힌 선호 선배가 아직도 제자리 걸음인가보다. 혜성의 예상대로 창 아래 훤히 보이는 장면은 아까보다 심각해졌다. 만만해 보이는 선호 선배를 차지하기 위해 무려 다섯 명이 선배에게 덤비고 있기 때문이다. 동완이 화를 낼 만 했다. 어쨌든 그는 거의 입학과 동시에 낙오자의 모임에 있던 미카엘 선배에게 마음을 주었던 장본인이지 않던가. 또 동완의 반주를 맞춰 주던 천사가 선호였다. “가만 두지 않겠어!” “동완아!” “그럼! …조율은 다음 기회에….” “김동완!” 때를 잘 맞춰 핑계거리를 발견한 동완은 그 길로 연습실을 박차고 나갔다. 그가 나가는 동시에 창문 밖의 상황을 기다리던 혜성은, 두 눈을 크게 뜨고 기가 막히다는 듯 박장대소를 한다. “하하하하하! 김동완! 하하하하하!” 선호 선배를 구해야겠다며 뛰쳐나간 동완은, 그보다 몸집이 서너 배는 커다란 후배 놈들에게 붙잡혀서 질질질 끌려갔기 때문이다. 괴롭게 울부짖는 동완을 내려다보며 혜성이 자지러지게 웃는 시간이, 그 풍성한 평화가 진분홍 노을과 함께 지난다. “왜 그렇게 웃어요?” “…?” 대롱대롱 창가에 매달려서 동완에게 파이팅! 을 외치던 혜성이 자신의 등에 바싹 붙어있는 낯선 이의 음성에 놀라서 당장 뒤를 돌아보았다. 긴 노을처럼 아찔하게 다가오는 음성이 있다. 달아오른 노을의 붉은 향기를 제 것처럼 치장한 영혼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 감각은 아주 잠깐이어서 인간에게 허락된 시간보다 간격이 작다. 혜성은 잠깐 스친 그 감성을 그대로 보냈기 때문이다. “아… 동완 선배구나.” “넌-” “…….” “넌…….” 이럴 수가. 로미오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놈이 혜성과 껴안다시피 가깝게 밀착되어 마주보고 있었다. 혜성이 매달려 있는 뒤에 붙어 서서 아이의 양 쪽 창틀에 자신의 길고 단단한 팔을 벽처럼 막아낸 그는 다시 봐도 로미오였다. 아니, 로미오라고 불러달라는 이상하지만 잘생긴 녀석이었다. 너스레를 떨어가며 혜성이 아닌 창밖을 신나게 쳐다보는 그의 행동에 되려 민망해진 혜성이 머뭇머뭇 아까처럼 창가 쪽으로 돌아섰다. 킥- 하고 웃는 소리가 작게 들렸지만 그 소리는 강하게 밀려오는 바람 소리보다 작았다. 그래서 혜성은 못 들은 척 하고 팔꿈치로 뒤에 있는 그의 배를 슬슬 밀어내기 시작한다. “이름 불러 주시면 비킬게요, 선배님.” 이 녀석이! 키가 큰 것 자랑 하려고 작정을 한 건가! 혜성의 머리에 저의 턱을 얹고 옹알거리듯 말을 한다. “…여긴 신입생이 아직은 들어올 수 없는 층인데…….” “전…….” “?” “…희대의 반항아가 되어 보는 게 소원입니다.” “??” 여전히 모를 소리만 하는 그 녀석 덕분에 숨이 턱 막힐 것처럼 답답해진 혜성은 팔꿈치로 그를 밀어내는 것을 관두었다. 하염없이 평화로운 창밖을 응시하는 것도 재미없어졌다. 아이는 체념한 듯 그가 듣고 싶다는 이름을 불러주었다. “로미오야.” “…야… 자는 빼요.” “미오군.” “!” 미오군 이라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는지 본명을 감춘 로미오는 한 판 연극을 펼치듯이 휘청거리며 떨어져 나간다. 왜 이 녀석이 이 순간, 이 곳에 있는지 상당히 궁금했지만 혜성은 관심 없는 척 연극을 펼치는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슬금슬금 뒷걸음질로 나가려는데 이번에는 혜성에게 히스가 자주 했던 것처럼 귀엽게 윙크를 한다. 신기한 녀석이군. 혀를 쯧쯧 차며 혜성이 작은 몸을 거의 입구 쪽에 붙일 때였다. 문득 따사로운 오후의 햇살을 빨아들이듯 노랗게 반짝이는 로미오라는 녀석이 크고 높아 보이는 게 아닌가. 막 나가려던 자세 그대로 혜성은 뒷짐을 지고 선배답게 턱을 세우고 질문을 던진다. “로미오야.” “…미오야, 미오군, 로미오야…윽.” 혜성이 무슨 말만 하면 모션을 크게 취하는 녀석 덕분에 쿡 하고 웃음이 터진다. 혜성의 뒷걸음이 나아가려던 찰나, 간지러운 입술이 더 빠른 속도로 뱉어진다. “나 말고 너를 로미오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니?” “…아뇨.” “왜?” “선배는 줄리엣 이거든요.” “?” “전… 줄리엣이 많아지는 건 싫어서요.” “?” 천천히 피아노 쪽으로 걷는 로미오군은 해맑게 웃으며 매우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건반을 보면 자연스레 눌러보는 습관이 저마다 있듯이, 그는 무의식중에도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혜성에게 어서 이리 와 보라는 듯 건방지게 턱짓을 하지만, 수페리우스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럴 수가. 고개를 이런 식으로 저으면 후배가 만만하게 보지 않을까? “…이 얘기도 못 알아들으시는 선배는 혹시….” “혹시…?” 심각하게 표정을 짓는 로미오 군이 한 번 더 뒷걸음질 하는 혜성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혀를 찼다. “바…보…?” “!” 바보? 근사한 대답 까지는 아니지만, 장난만 반복하는 녀석에게 휘둘리는 기분이 들어서인지 혜성은 그 길로 당장 연습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불쾌해야 하지만 사실 기분은 나쁘지 않다. 이상한 녀석. 뒤이어 아악! 하고 쩌렁쩌렁 비명을 지르는 로미오군의 소음에 혜성을 비롯한 주변의 학생들이 흠칫 놀란다. 아무래도 동완이 가장 무겁게 했던 건반을 제대로 누른 모양이었다. 정의의 용사처럼 수려한 노을을 달고, 아마데우스에 이상한 녀석이 나타났다. 혜성이 정혁과 다시 마주친 것은 정혁의 의도에서 비롯됐다. 헬리아 이후 연못에서 마주친 것 외에 정혁은 혜성을 만날 수 없었다. 둘은 전혀 만나지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혜성이 정혁을 피해 다녀서였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정혁을 무시하는 혜성에 대한 소문이 상급생들에게 퍼지자, 별 것도 아닌 것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무리들은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며 저마다 추측성 의견을 내뱉는다. 그들의 소문이 말도 못하게 부풀어지던 어느 날, 혜성이 조용히 수업을 듣던 B동 강의실에 문정혁이 앞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이다. ‘문…정혁이다. 문정혁이다.’ ‘그림자가 여긴 왜 왔지?’ 강의 시간이 끝나기 30분 전에 귀신처럼 출현한 정혁은 큰 결심을 한 사람처럼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교수님께 무어라 언급하더니, 서로의 합의 하에 교단에 서는게 아닌가. ‘!’ ‘설마… 그건가 봐!’ ‘예전에 그가 휴학하기 전에 때때로 있었다던 수업!’ 흥분한 학생들이 내뱉는 소리는 과연 들이 맞았다. 정혁은 무섭도록 팽팽한 분위기로 주변을 압도하는 것도 모자라 교수를 내쫒고 당당하게 교단에 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빚어내는 특유의 낭만적이고도 자유로운 분위기는 없었다. 잔뜩 오그라든 긴장감만이 남은 30분 내내 지속되었던 탓이다. “…….” 유유히 수업을 진행하는 정혁의 앞에서 감히 떠들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학생들은 공포에 질려 창백해진 몰골로 조용히 경청한다. 하지만 혜성은 그가 교편을 쥔 순간부터 책을 읽지 않았다. 많은 학생들은 유수처럼 쏟아내는 그의 언어를 따라잡기 위해 이리 저리 펜대를 굴렸지만 혜성은 노골적으로 정혁을 노려보았다. 지금 무슨 짓을 벌이는 거지, 문정혁…? “까발렐리아 루스티까나의 차례로 넘어가서… 마스카니의 오렌지 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를 펼쳐. 247페이지 일곱 번째 줄.” “…….” 네가 어떤 말을 해도, 들리지 않아. 일목요연한 그의 설명은 가시처럼 학생들을 아프게 찔렀다. 낮은 저음은 낭만적이기는 커녕 들을수록 공포감이 맴돌았다. 겁에 질린 학생들은 책을 펼치지 않고도 정확한 페이지와 줄을 명령하는 정혁에게 거스르지 않도록 후다닥 까발렐리아 부분을 펼쳤다. 등을 펴고 앉았지만 빼곡한 책의 글씨 중에 일곱 번째 줄, 그것도 마스카니를 찾기 위해 분주하다. “합창곡이지. 그것도 부활절 아침에 부르는 합창곡.” “…….” 시선이 아프다. 파장에 파장을 더 해 가는 교차 뒤에는 죽음이 기다리지 않을까. 혜성은 피가 마를 것처럼 조여 오는 정혁의 시선을 정면으로 맞아가며, 입술로는 분노를 읊는 그를 들어야 했다. 그는 화를 내고 있었다. 그는 지난 번 헬리아에 대해 해명 할 부분이 있지만, 도저히 할 수 없음을 저런 식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그는 어쩌면 자기 자신에 대해 화를 내는지도 모르겠다. 오페라 이론 수업은 늘 화기애애하거늘, 오늘의 순간은 마왕과 관련된 음색이 짜 집기 된 것처럼 학생들은 힘들어 했다. 중앙의 맨 뒷자리에 앉아서 정확하게 정혁을 노려보는 혜성 역시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여성합창과 남성합창이 번갈아 나온다. 그러다가 여성 합창이 오렌지 꽃 향기에 신록은 짙어지고 종달새 지저귀네를 부르면!” “윽!” 제일 앞줄에서 경청하던 키 작은 학생이 박력과 힘에 넘치는 소리에 놀라 딸꾹질을 한다. “꿈을 꾸는 것처럼 지켜보던 모두는, 아름다운 환상에 도취되는 거다….” “…….” “…….” 봄 보다 산뜻하고 아름다운 오페라를 이런 식으로 설명하다니! 창백해진 학생들은 한참 후에야 정혁이 입으로는 진즉부터 외우고 있는 책을 설명하지만, 그의 진혼과도 같은 눈동자는 뒷자리의 수페리우스에 못 박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더더욱 숨을 죽이고, 서로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는 수페리우스와 그림자를 몸서리쳐지게 확인한다. ‘헬리아로서 맺어진 줄 알았던 둘이 왜… 왜 저러는 거야.’ ‘무서워… 정혁의 소문이 진짜 사실 인가봐… 그림자는 그림자 였어….’ 또 다른 소문이 퍼질 것을 이처럼 예고하면서도, 두 사람은 각자의 고집대로 불꽃같은 눈동자로 서로를 응시한다. 너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나는 이제 네가 직접 말 해 주기 전 까지는 멋대로 유추해 내지 않을 거야. 이런 식으로 위협해도 소용없어. “수업은… 끝.” “…….” “…….” 긴 종소리가 모두의 청각에 겨우 파고들어올 때가 되어서야, 한 숨 놓겠다는 듯 진한 햇살이 그들의 강의실에 몰려온다. 정혁의 늘씬한 뒷모습이 오늘따라 슬퍼 보인다는 이상한 생각을 하며 아이들은 빠르게 강의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눈가가 불그스레진 혜성 만이 텅 빈 강의실에 앉아서 주인 없는 교단을 세차게 응시한다. 영원히 그 자리에 못 박힐 것처럼…. 그에게도 이유가 있었겠지. 오, 선량한 아마데우스여. 무지한 나의 머리에는 한계가 있어서 그를 알아내기 어렵다. 한 때의 나는 선택된 자로서 그를 이해하고, 안아주는 사람이라 자부했다. 그러나 나 역시 미개한 사람이기 때문에 저런 식으로 밖에 행동하지 못하는 그를 미워한다. 그를 미워해야 하는 내가 슬프다. 아마데우스여, 선량한 당신께서 약간의 자비를 베푸신다면. 제발 그러한다면. “문정혁!” 뒤늦게야 정신을 차린 혜성이 자신을 만나기 위해 이런 식으로까지 무모하게 들이 닥친 정혁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 정혁아! 문정혁! 뻥 뚫린 B관 곳곳에서 그를 불렀지만 가장 어두운 곳에서도 그는 없었다. 혜성이 그를 피한 것에 벌을 주는 것처럼, 정혁은 한 순간에 바람보다 빨리 사라진 것이다. “정혁아! 문정혁!” 그를 세차게 부르는 수페리우스를 지켜보는 호기심 짙은 학생들의 숫자만 늘어갈 뿐이었다. 오후의 실바람이 연주하는 자연의 음색만이 쩡쩡 울리는 가운데, 결국 혜성은 쓸쓸하게 B관을 벗어난다. 그런 그를 처음부터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던 정혁을 모르는 채……. 혜성은 정혁을 찾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실의에 빠졌다. 예전 같았으면 연못으로 돌진했겠지만, B관에서 연못까지는 거리가 상당했다. 게다가 그가 휴학이 끝난 뒤 어디를 주로 가는지도 혜성은 몰랐다. 기숙사에 가는 시각은 늘 밤늦은 때였기 때문에 혜성은 정혁을 찾고 싶어도 넓은 아마데우스 땅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저녁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학생 식당으로 향하는 걸음이 천근만근이다. 혹시 정혁이도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가지 않았을까? 라는 약간의 희망만이 무거운 걸음에 날개 짓을 도울 뿐이었다. 로제리오 교수의 취향대로 내부 구조가 바뀐 학생 식당 주변에는 많은 숫자가 포진하고 있었다. 거의 다는 이미 식사를 마쳤는지 우루루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혜성을 알아보고 멀리서 ‘수페리우스다!’라고 소리치며 좋아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배짱 좋게 인사하는 학생도 있었다. 그러나 정혁은 보이지 않는다. 안타깝게 발을 동동 굴러 봐도 정혁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러면 오해는 커 질 뿐인데, 큰일이라는 생각을 거듭 하며 혜성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잠시도 쉬지 않고 고개 짓을 하며 식당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런 그의 앞에 당당하게 나타난 긴 그림자가 있었다. 문정혁? 때마침 오른쪽을 응시하던 혜성이 발끝에 닿는 훤칠한 그림자를 깨닫고 후다닥 앞을 보았다. 동시에 커다란 실망이 밀려와서 미간이 찌푸러든다. “선배님. 식사하러 가세요?” “…응.” “저도 또 먹을까요?” 로미오군 이다. 시도 때도 없이 혜성의 주변에 나타나던 요즘이 떠올랐는지 아이는 골치 아프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과 친한 무리들과 한바탕 식사를 마치고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나오는 중인가 보다. 녀석은 친구들에게 먼저 가 보라는 말을 하더니 제 멋대로 혜성의 앞을 가로막았다. 긴 그림자 때문일까. 그의 앞에서 신혜성은 너무 작아서 사람들의 말마따나 인형처럼 품에 쏙 들어올 것 같았다. 사실은 정혁이 아니었다는 실망감에 혜성은 그만 마음 그대로 퉁명스럽게 응수한다. “니가 왜.” “친해지게요.” 하지만 로미오군은 혜성의 그런 행동에도 아랑곳 하지 않는다. 마음을 다칠 줄 모르는 불사조인가. 기분이 나빠진 혜성은 저녁 식사를 거르기로 결심하고는, 긴 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다른 곳으로 걸음을 돌리자 쭐레 쭐레 따라오는 긴 그림자가 턱 끝까지 느껴진다. 휙- 뒤를 돌아보니, 5미터 정도 떨어져서 따라오던 로미오 녀석은 헤벌쭉 웃으며 똑 같이 멈춰 섰다. 노을이 짙어지고 있다. “…….” “…….” 저 놈을 어떻게 떼어내지? 라고 고심하던 혜성이 심각한 표정을 풀고는 더 할 나위 없이 놀란 낯으로 호들갑을 떨기 시작한다. 한 쪽 팔을 쭉 내밀고 로미오의 등 뒤를 정확히 가리키며 혜성은 부리나케 외쳤다. “어! 우주선이다!” “…예에?!” 로미오라는 녀석의 고개가 뒤로 돌아가는 즉시, 혜성은 왼 쪽 어두운 시계탑 입구로 쏜살같이 튀어 들어갔다. 덕분에 아이의 작은 몸이 한 번에 가려진다. 몸을 숨기는 즉시, 또 한 판 연극이 펼쳐졌는지 ‘줄리엣! 줄리엣!’ 하고 괴성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으으….” 몇 번이나 줄리엣을 외치며 지나가던 학생들의 시선을 차지하던 로미오는 그러나 자포자기 했는지 쓸쓸히 사라져갔다. 적어도 혜성이 느끼기엔 그러했다. 십 분 가량 시계탑 입구의 그림자에 기대서 내가 지금 뭘 하는 건가… 라고 스스로에게 묻던 아이가 조심스레 밖을 살피며 빠져나간다. 선배의 체통이 무너진 거야… 라는 자학적인 발상에 쓴 물을 삼킨 것처럼 괴로워하면서도 줄리엣을 부르던 로미오가 과연 진짜 사라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시계탑의 근엄한 벽돌에 달라붙어서 쭉 고개만 내밀었다. “!” 바로 그 때, 기다렸다는 듯 엄청난 속도로 혜성의 목이 누군가의 큼지막한 왼 쪽 팔에 쏘옥 들어간다. “헉!” 아둥 바둥 거리는 혜성을 질질 끌고 가는 누군가 때문에 정신이 없다. 누구지? 설마 정혁이인가? 정혁이라면 이런 이상한 짓을 할 리가 없는데! 라는 생각을 짜 집기 한 혜성의 속도에 맞춰 경쾌하고 즐거운 소리가 멀리 분수대 못지않게 터져 나온다. “잡았다.” “!” “언제 나오나 싶었는데, 빨리 나오네요.” “!!” 가 버린 줄 알았던 로미오 녀석이 감히 선배의 머리통을 쥐고 헤드락을 걸면서 통쾌하다는 듯 웃기까지 한다. 기가 막힌 혜성이 온 몸으로 반항하자 그제 서야 조용히 풀어준다. 한결같이 미소를 띠우는 용감한 후배 녀석에게 차마 손찌검은 할 수 없었던 혜성은 그 길로 그를 무시하고 척척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역시나 속을 알 수 없는 로미오군은 5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그를 따른다. 더더군다나 방정맞은 입술은 한 시도 쉬어주지 않는다. “저기요… 줄리엣?” “…선배.” 선호 선배는 안 저렇던데, 저 놈은 뭐지? 혜성은 신경질적으로 대답 하면서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예?” “선배님이라고 불러.” “…네….” 지평선 저 쪽 모든 것이 타오르는 종이처럼 붉고 요염한 춤을 추고 있었다. 노을은 빠른 속도로 아마데우스를 장악하여 길을 지나치는 인파에게도 색을 입히는 때, 혜성은 정신을 쏙 빼놓는 후배에게 졌다는 듯 긴 숨을 쉬며 등을 돌려주었다. 나에게서 뭔가를 얻어가고 싶은 걸까. 아니면, 소문과는 다른 나약한 진짜를 얻어 간 뒤 힘을 내고 싶은 걸까. 선호 선배가 아니라면, 혹시 모세의 측근은 아닐까. 친근한 척 달라붙은 뒤, 훗날 뒤통수를 때리려는 인물인가? 별의별 상상이 한 순간에 밀려와서 혜성은 이제 후배 녀석을 보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했다. 따라서 그에게 자상한 말 따위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혜성은 망각한 것이 하나 있었다. 자신이 정혁으로 인해 숨이 막히도록 고민했던 아까까지를 완전히 잊었다는 것을, 로미오 덕분에 훨훨 날려 보냈음을 몰랐다. 무서운 척 팔장을 껴고, 혜성은 자신을 재미있는 농구 게임 지켜보듯 마주하는 건방진 신입생을 정 면으로 노려보았다. 때마침 신입생을 약 올릴 만 한 좋은 아이디어가 번쩍 머릿속을 스쳐 지난다. “허~여 멀건한 게 너는 가만히 보니까 생긴 게 영락없구나.” “누구요? 배우 중에 누구 닮았어요?” “…아니.” “그럼 누구요? 설마 테레사? 으헤헤헤.” 입술이 근질근질해진 혜성은 화사한 봄볕처럼 웃으며 부드럽게 대답해 준다. “닭.” “다~악!?” “그래. 닭. 키 큰 닭.” 동시에 가뜩이나 하얀 이목구비의 로미오군의 전체가 파랗게 질린다. “…선배.” “왜.” 다시 길을 걷기 시작하는 수페리우스의 옆에 서서 당황한 그대로 장황한 포즈를 취하던 로미오군이 애걸복걸이다. 씩씩하게 걷는 혜성의 어깨는 말도 못 하게 들떠 있다. 역시 성공이다. 일전에 히스에게도 이 얘기를 했을 때, 그는 큰 충격을 받아서 당분간 닭요리는 입에 데지도 않았었기 때문이다. 키득키득 웃음소리가 밖으로 터질 것 같았는지 혜성은 입 속의 혀를 깨물어 가며 화가 난 척 계속 앞만 응시했다. “저 바보 취소할게요. 선배도 닭 취소 해 주세요.” “…봐서.” “선배.” “또 왜.” “그럼 저 닭 할 테니까 선배도 계속 바보 하세요.” “…좋아.” “음…….” “그 대신 너는 암컷 닭이야.” “!!!” 또 놀라고 있다. 누군가를 놀릴 때는 이런 기분인가? 그래서 예전에 민우도 틈만 나면 나를 놀렸던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슴 속이 후련해진다. 심각한 척 딱딱하게 대답하지만 혜성은 로미오군의 일그러진 인상을 마주치는 즉시 터져 나올 웃음이 민망할 것을 알기 때문에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피식 피식 세어 나오는 웃음은 포기하고 역시나 진지한 설명을 덧붙인다. “영계도 아니지. 엄마 닭이야.” “엄마! 엄마라니! 엄마라니! 싫어요! 싫어요!” 이상하게 재미있는 녀석이다. “…아빠 할래?” “예!” “…그래 그럼.” “헉. 아니요! 선배! 엄마도 아빠도 싫은데! 아니, 일단 닭 이라는 게 싫은데 어떡하죠!” “…닭이 아니라면 넌 나한테 필요 없어.” “…….” 아차. 필요 없는 것 까지는 아닌데……. 저도 모르게 민우가 떠오른 나머지 혜성의 입에서 없던 말이 내뱉어졌다. 이제 신중해지는 쪽은 혜성이 아니라 로미오군이 된다. 릴레이 경주를 하듯, 방금 전까지 당황하는 마음이 로미오군에서 혜성 쪽으로 넘겨졌다. 혜성은 끝까지 근사한 선배인 척 굴기 위해 서둘러 지금 대화를 끝내기로 한다. “줄리엣 할 게. 그러니까 너도 닭 해.” 도대체 내가 무슨 소릴 하는 걸까. 혜성은 틀림없이 기숙사에 돌아가는 즉시 방금의 대화를 잊기 위해 민망해진 육신으로 건반을 누를 것이다. 아니면 술병을 쥐고 죄 없는 목청에 콸콸콸 들이부을 것이다. “…왜 자꾸 닭 이러세요, 병아리도 있고 강아지도 있는데…….” “…병아리도 내가 할게. 강아지도 내가 할게. 그러니까 너는 닭 해.” 점점 뭐라는 걸까. 이제 한계다. 한가을 홍시처럼 붉어진 낯으로 혜성은 뛰는 것과 비슷하게 걸었다. 이런 식으로 편하게 대화를 유도하는 신입생 녀석이 아주 싫지는 않아서 그게 더 걱정이었다. 오히려 즐거운 나머지 콩닥콩닥 가슴이 뛰었다. 도대체 왜? 타인이 부드럽게 다가오는 것을 많이 경험해 보지 못 한 혜성은 지금의 자신이 낯설었다. “선배.” “왜.” “우리 대화… 너무….” “……?” 스스로 걸음을 멈춘 로미오군이 기특하다는 생각까지 들자 혜성은 처음으로 그를 위해 걸음을 멈춰 주었다. 진분홍 아마데우스 노을을 삼키듯 등에 이고, 훤칠한 그는 가슴을 움켜 쥔 채 이렇게 대답했다. “사랑하는 사람들 같습니다. 감동적이에요.” “!” 진짜 로미오처럼 울긋한 속내를 절절이 내뱉는 괴짜가 되어, 혜성을 또 한 번 놀라게 한다. 우수수- 떨어지는 아름다운 나뭇잎들이 그의 주변에서 파도를 일으키는 것처럼 묘한 생김새를 이뤘다. 다행인 것은 어느새 숲길에 다달은 그들 주변에는 단 한 사람도 지나다니지 않는 사실이었다. 혜성은 그의 코앞까지 주먹을 쥐고 걸어갔다. 여전히 한 판 연극을 펼치는 자가 저 혼자 감격해서 들떠한다. “역시 선배는 저의 줄리엣 자격이…헉!” “죽을래!” “전 아직 선배 손목밖에 안 잡아봐서 죽어도 다 만져보기 위해 부활해야 하는 기구한 운명… 헉! 잘못했어요!” “이리 안 올래!” 혜성이 내미는 주먹에 후다닥 도망가는 척 멀어졌던 로미오가 결국은 제 발로 다시 달려왔다. 기다렸다는 듯 혜성의 작은 주먹이 그의 가슴이며 복부를 마구 쳤지만, 버릇없는 후배 녀석은 도리어 안타깝다는 듯 걱정을 던진다. “선배! 제 몸 때리지 마세요! 딱딱해서 선배 손이 아플 거예요!” 퍽- 퍽- 넓은 가슴팍에 보기 좋게 조준해도 그의 말마따나 아픈 것은 혜성의 주먹이었다. 운동을 좋아하는 녀석이라 그런지 스펀지처럼 물컹한 살의 감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도리어 딱딱한 돌덩어리에 화풀이를 하며 피를 내는 것처럼 엄청난 통증이 얼얼하게 퍼져왔다. 하지만 남자로서 자존심이 있는지라 혜성은 주먹질을 멈추지 않았다. 선배의 체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분이 풀리지 않는 혜성을 염려하며 내려 보던 로미오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아이의 양 손을 허공에 쥐고 잘못했다며 꽥 소리쳤다. “선배를 놀리니!” 대롱대롱 높이 팔이 잡힌 혜성이 붉어진 채로 고래 성을 지르자 똑같이 흥분한 신입생 녀석도 손에 힘을 준다. “차라리 운동장을 돌라고 하세요!” “운동장이 어딨어!” “아, 없었나요?” 별안간 터진 운동장이 없다는 것에 힘이 빠진 로미오군은 혜성을 잡았던 팔을 풀어주었다. 운동장이 없다니. 로미오군의 표정은 말도 못 할 실의에 빠져 들어간다. 그가 그러던지 말던 지 별안간 생활에 방해가 될 만큼 자주 나타나는 게 못마땅한 혜성은 재빨리 가던 길을 마저 걷기 시작했다. “……닭 하지 마. 줄리엣 이라고 부르지도 마. 나 진짜 간다!” “!” 정말 화가 많이 났다는 것을 못 박으며, 그는 씨익 씨익 거친 숨소리까지 낸다. 퍼뜩 정신을 차린 로미오가 푸두두두 떨어지는 낙엽들을 엉망진창으로 밟아가며 달려온다. “엄마 닭 아빠 닭 다 할게요! 선배!” “…….” “삐졌어요?” “…….” “무슨 선배가 그럽니까! 무슨 수페리우스가 닭 하나에 삐지고 그럽니까! 누가 보면 바크하우스에 대해 토론하다가 의견이 빗나가서 틀어진 줄 알겠어요!” “…….” “선배!” “…….” “잘못했어요!” “…….” “선배! 정말 저의 줄리엣이 되어 주셔야 돼요!” “…….” 선호 선배에게 무조건 따져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도 그럴 듯이 혜성의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던 건방진 신입생이 또다시 혜성의 팔을 잡아서였다. 이렇게 무모한 녀석이 출현하다니. 그것도 내 옆에 나타나다니. 혜성은 조용했던 혼자만의 평화가 와장창 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유리가 깨지듯 투명했던 무언가가 내면에서 밟히기까지 한다. 이번에는 또 무슨 말로 속을 긁으려는 거지? 불유쾌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보는 혜성의 표정은 저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 “…….” 익숙치않은 인연과의 얽힘. 그것은 혜성에게 치명적이었다. 물론 모든 학생들과 잘 지내고 싶은 욕심은 예전과 같지만, 이런 방식을 원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혜성은 놀리듯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신입생이 싫어지려고 한다. 그러나 문득 그 생각이 얼마나 유치한 것인지를 스스로 깨달았다. 언어와는 달리 진지하기만 한 신입생의 눈동자로 미처 야기하지 못 한 진심이 맴돌아서였다. 올곧은 눈매는 혜성과 마주보고 있는 지금 마저도 들떠서, 믿기지 않아하고 있었다. 자신과 대화 하는 것 자체를 신기해한다. 그리고 혜성은 누군가에게 다가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곧 깨달았다. 농담을 던진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지 않던가. 게다가 진지한 눈망울을 지닌 이 학생은 혜성에게 진심으로 미안해하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선배가 귀여워서 계속 놀렸나 봅니다. 매일 농구에 미쳐서 살았기 때문에 저는 저랑 비슷한 놈들밖에 안 보고 살았었거든요.” 미안하다는 한 마디, 그 안에 보여 지는 짙은 진심에 밀려 크게 진노했던 혜성의 마음도 누그러진다. 어색하지만 옅게 미소를 띠우기 위해 노력하며 수페리우스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나도 좀 내가 유치했던 것 같아.” “안 유치해요. 선배는 귀여워요.” “…?” “선배. 부탁이 있어요.” “…말 해봐. 닭은 내가 취소 한닸잖아.” “하하하하… 닭 할게요. 사실은 아까 그런 얘기 진지하게 해 주시는 거 너무 좋았어요.” “그래?” “그럼요. 선배, 저의 진짜 줄리엣 되어 볼래요?” “…윽.” 다시 원점인가? 이 녀석, 사실은 모세의 측근이 아닐까? 어지럽게 뱅뱅 돌아다니는 추측들이 폭폭 부활하자 혜성이 인상을 있는 대로 일그러뜨렸다. 그 모습에 박장대소를 터뜨리던 신입생은, 다 진 노을을 대신하여 화사하게 미소 짓는다. 온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듯, 당당하고 세련된 어투로, 방금 전까지의 경박함을 버린다. “방법은 아주 쉽습니다. 저의 반주자가 되어 주세요.” “!” 부드럽게 혜성의 손을 풀어주고, 정중한 허리를 숙인다. 세상에 당당한 입술은 지지 않고 마음을 내뱉는다. 푸르르르- 푸르르르- 숲 길 주변에서 노닐던 작은 새의 울림이 그의 께로 스며든다. 변함없이 아름다운 아마데우스의 모든 바람과 노을이 한 데 거세어질 때, 반주자라는 글자만으로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 한 혜성에게 팡- 부딪혔다. “그러니까 하세요. 이 자격은 아무에게나 주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저의 줄리엣이 되는 거예요. 음악으로.” “…….” 저 한 마디를 하기 위해서, 저 한 줄을 내뱉고 싶어서 처음부터 혜성의 주변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알려주기 위해서 신입생 녀석은 머리를 굴렸던 것이다.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오는 자자한 전율이 혜성의 가슴을 뛰게 한다. 아무도 자신의 반주를 맡아주지 않았던 서러운 옛 기억이 떠올라 혜성의 눈시울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 “선호 형한테 물어봤었어요. 신입생 연주회 때 반주자 선배는 어떻게 고르는 거냐고. 그러니까 선호 형이 뭐라고 대답했을 것 같아요?” “모르지.” 별다른 이유 없이, 그의 가벼운 행동을 오해 했던 스스로를 반성하며 혜성은 부드러운 언어로 대답했다. 당당하게 ‘반주자의 자격을 주겠노라’ 으스대는 신입생 녀석은 전혀 건방진 게 아니었다. “큰 바위 얼굴을 찾으면 된댔어요.” “?” “헬리아가 바로 떠올랐어요. 선배를 다른 녀석들에게 뺏길 수 없어요. 저는 선배의 음악에 넋이 나갔어요. 미쳤어요. 농구를 뒤로 미룰 수 있었거든요.” “너…….” 설마… 하느님…. “저의 큰 바위얼굴은 선배님입니다.” “!” 가슴에 파도가 밀려온다. 약간 뜸을 들이던 신입생은 이제껏 보여주지 않았던 큰 빛을 눈망울에 심었다. 그 빛이 입술 밖으로 세어 나올 때, 잠깐이지만 혜성의 영혼은 저 하늘로 치솟았다. “선배는 저의 큰 바위얼굴이에요.” “…큰…얼굴….” 큰 바위 얼굴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붉은 눈매를 웃어가며, 혜성은 잠깐이지만 그의 어감 그대로의 것에 망연자실한 대답을 흘렸다. 혹시 얼굴이 커서 이런 얘기를 한 걸까? 라는 끼워 맞추기 식의 판단이 스친다. 내가 얼굴이 컸었나? 라는 잠깐의 유희는 그러나, 진지하게 말을 잇는 로미오의 앞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저는 사실 가난해요. 선호 형이 말을 안 했나 봐요? 우리 집은 부자가 아니에요. 어머니도 안 계십니다. 집에 돈도 없어서 숙부님한테 빌린 돈으로 학비를 충당하거든요. 아마데우스 학비라니 만만치 않잖아요.” “…….” 농담은 더 이상 없다며, 유희가 아닌 진실을 꺼내겠노라, 자신을 따라다닌 입술이 당당한 포물선을 그린다. 워싱턴, 조던, 혹은 로미오. 그는 자잘한 이야기를 모두 꺼내서라도 간절히 원하는 것이리라. 바로 혜성의 반주를, 자신의 이상임을 밝히며. “그래도 괜찮아요. 저한테는 희망과 꿈이 있어서… 사람들은 돈과 자기 자신에만 집착하기 마련이잖아요. 자기가 동경하는 큰 바위얼굴이 생기면 돈 보다는 꿈과 희망이 우선시 되어서 삶에 생기가 생긴다는 걸 알았어요.” “!” 테레사… 당신이 스쳤다. 이 학생의 음성은 당신을 떠오르게 한다. 당당하게 외쳤던 나를 보며, 혹시 지난날의 당신은 지금의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가슴이 미어질 것처럼, 떨려오는 훈풍을 바람은 앗아가지 못한다. “선배님 덕분에 저는 돈과 환경이라는 핑계를 대고 덮어두려고 했던 음악에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농구는 취미로 가끔 하면 되는 거죠. 고마워요….” “…….” 차마 대답할 거리가 없을 정도로, 나를 기쁘게 하고, 나를 들뜨게 하는 자가 있다. 천할 정도로 뛰어대는 심장마저 넋을 잃었다. 두 사람은 오래도록 대답 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낯선 인연의 두 줄기가 하나로 똘똘 뭉쳐지기 시작한다. 억척스러울 정도로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질 줄 모르는 줄기가 마침내 하나가 될 때, 마주보는 선후배의 안면에 서서히 평화라는 이름이 달처럼 떠올랐다. 혜성이 뭐라고 말을 하려던 때, 언제 진지했냐는 듯 로미오라는 녀석은 어깨를 으쓱였다. “…선배의 얼굴은 사실 작은데 설마 얼굴이 크다고 큰 바위 얼굴이라고 그랬겠어요?” “그래… 얼굴은 네가 크다.” “!!!” “그리고 마음도 네가 더 크다.” “!” 하지만 혜성은 부드럽게 대답하며 그를 도리어 당황하게 했다. 그의 장난이며 놀림에 반응하자니, 아까 전 그가 준 큰 바위얼굴 이라는 가슴지린 구절이 준 여운의 크기가 훨씬 컸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주는 행복은 이토록이나 큰 충격과 여운을 남기는 것이었다. 글자는 힘을 지녔다. 다만 언어일 뿐인데도 안식과 황홀함을 줄 수도 있어. 쉽게 반응하지 않고 유유히 돌아서는 혜성의 태도에 벙 쪄있던 로미오가 한 참이 지나서야 끝맺음을 하는 선배에게 손을 흔들기 시작한다. “…선배. 선배! 선배님!” “?” 혜성의 다부진 대답에 보석을 캔 보석 꾼처럼 기쁘게 방방 뛰면서 로미오는 먼 거리에서 쾌활하게 소리쳤다. “너무 그렇게 예뻐지지 마세요!” “…!” 멀리서 느닷없이 볼이 붉어진 혜성이 눈을 흘기자 그래도 좋다며 로미오가 들뜬다. 그의 연극, 그의 오페라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듯 다 진 노을을 등에 이고 양 팔을 활짝 벌린다. “왜요? 러시아 인형으로 밤마다 변하는 건 아닌지 걱정인데…….” “방금 한 말 취소다. 마음 크다고 한 거.” “!” 옳지! 혜성의 말 하나에 금세 풀이 죽어 괴로운 낯을 어쩌지 못하는 로미오를 뒤로 하고 걷는 수페리우스의 입가에 미소가 만연하다. 신선함 이상의 활력을 주는 인연의 탄생이었다. 하지만 혜성은 몰랐다. 자신과의 만남이 저 신입생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게 될 지, 앞으로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이 사람이다. wgreene@naver.com 보이십니까. 저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주고, 힘을 주고, 폭주하게 하는 것은(웃음) 바로 여러분이었습니다. 저 진짜 단순한 사람입니다. 손가락이 떨릴 정도로 좋아했거든요. 당분간 쉬자 했던거 너무 쓰고 싶어지게 만들어 주셨습니다.(급피로 급발작 쓰느라 죽을뻔................툭.) 고맙습니다. 댓글을 보고 저는 리하가 아닌 줄 알았어요. 원래의 단순하게 계획했던 30편에 즉흥적인 것들이 상당히 추가되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래서 고맙습니다. 이런 기운을 주셔서... 함께 해 주심을 표현해 주시는 정성에 저는 정말 많이 고마웠습니다... 부탁이 있다면, 아마데우스가 끝나는 그 날까지, 저의 화려한 마지막이 될 수 있도록 당신도 저처럼 미쳐 주십시오. 한 번쯤 미치는 거 나쁘지 않습니다. ^_~ 이 글이 당신에게 일탈이, 추억이, 희망이, 기쁨이 될 수 있다면 저는 더 바랄 게 없습니다.(그리고 전 댓글만 있다면... 이 한몸 기꺼이 불살라 버리겠습니다.^_~ 이미 요며칠 무리로 한쪽눈 붕대로 쳐감고 손에 경련일으키며 그래도 좋다고 실실 웃는 그린올림.ㅎㅎ) 홍쳉님, 로로님, 쥬노님, 이종수님, crayon, 버드키스님, 주앙, 소아님, 하루진님, 체샤님, gipbob님, Misky님, 박카스정님, 포근구름님, 데빌님, 비루향님, 연님, 안젤리스님, 경민씨, 유스티나님, 튬튬님, 자자님, 녹존성군님, 반님, 라가님, kdcom77님, lotus님, 고맙습니다. 이왕 나타나신거 계속 보고 살아 봅시다. 저도 영감 계속 얻어서 나머지 한쪽눈에 기스 내죠 뭐.^^ 그러고보니 벌써 2악장 30편 돌파입니다.+_+ 한국 화이팅! 을 외치며 이시간 마치겠습니다.............툭. 참. 헬리아를 비롯 레퀴엠 여러가지들은 무지한 제가 지어낸 겁니다. 검색해서 찾지 마세요.ㅜㅜ (궁금해 하시길래..............털썩) -화이트그린- 덧글 25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30~31편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30~31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32편(세 사람의 가십) ▼ 다음글 - 2악장 28~29(헬리아II + 로미오 워싱턴 조던)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32편(세 사람의 가십)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6/20 19:43 http://blog.naver.com/wgreene/110005379666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620 32편 업데) * 포토로그도 클릭하세요.^^ Amadeus 음악 : Prayer - 미상 (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Prayer 세 사람의 가십 2악장 32편 10월 첫 째 주 금요일로 확정된 신입생 환영회 때문인지 9월의 막바지에 다다르자 학생들은 저마다 들뜬 분위기를 감추지 못했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은 가슴이 뛸 만치 아름다워서 가만히 보고 있으면 눈시울을 자극 한다. 연못을 비 롯 분수대에서 잠시도 가만히 있을 줄 모르는 소란스러운 남학생들은 지나가는 여 학우들의 시선을 독차지하는 천금 같은 시간이 펄럭인다. 혹시 당신 눈에도 보이는가. 그들은 참말로 예쁘기만 했다. 종달새가 어여삐 지저귀는 속삭임도 그들을 따라 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뭉게구름이 사이좋게 오후의 지평선에 닿을 때에도, 아마데우스의 섬세한 휘장을 가슴에 달고 은회색 예식 복을 입은 단정한 학생들은 눈이 부시다. 누군가는 벌써부터 사랑에 따른 고통을 호소하며 가느다란 여학생이 하프보다 가볍게 지나가기를 학수고대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젊음이, 파랗고 싱싱한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탄력을 지녔는지 몰랐다. 어차피 정다운 지금에의 추억은 먼 훗날이 되어서야 가슴 아프도록 그리워지기 마련이다. 오, 슬프도록 빛나는 청춘이여. 그들의 시련조차도 다른 이에게는 부러움과 질투를 산다. 전교생의 걱정거리이자 설레임이 10월 첫 째 주인만큼 기분 좋은 통증은 한 데 짙어져 간다. 거의 모든 신입생들은 자신들의 반주를 맞춰 줄 선배들을 구했는지 오르페우스 관은 밤부터 새벽까지의 금지된 시간을 제외하면 단 한 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땅거미가 질 무렵이면 오르페우스 관은 아쉬움 역력한 화음의 소리가 하늘 끝까지 솟아오른다. 선율에의 천둥은 땅을 거슬러 저 하늘의 신을 위협하는 짜릿한 매일 매일이다. 보통 세 시간씩 나눠서 오르페우스 관 연습실을 사용하기 마련인데, 누군가는 한 시간을 더 하겠노라 고집을 부리기도 했다. 그럴 때는 늘 다툼이 일어났는데 옆 방 연습실의 누군가가 달려 와서 중재 해 준다. 그리고 다음날이면, 서로의 입장이 바뀌어서 어제의 중재인이 다투고, 싸웠던 이가 말리는 경우도 있었다. 시간이 다가올수록 예민해진 학생들은 자신들의 기량을 뽐 낼 신입생 연주회가 두렵기 시작했다. 상당한 학생들이 로제리오 교수의 규칙, 즉 새벽 시간에는 금지라는 항목을 원망하며 그들 자신도 깨닫지 못 한 열정에 미쳐간다. 그 모습은 마치 달콤한 솜사탕이 공기중에 찢어지는 모양과 비슷했다. 동그랗게 뭉쳐 있지만 달콤한 향을 찢어내며 누군가의 입술을 행복하게 하는 그것. 그렇게 여름옷을 입은 싱싱한 가을이 깃발처럼 펄럭인다. 슈베르트 동상이 세워져 있는 사비나 교수의 별 채도 예외는 아니었다. 화사한 장미꽃이 마리아 칼라스라는 이름을 뽐내며 시리도록 화려하되 소박한 색채를 자랑하고 있다. 그들은 사이좋게 5층 건물 사비나 교수의 외곽을 둘러싸고 있었다. 로제리오 교수의 싸늘한 집무실과는 한 눈에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는 사비나의 건물은 짜리몽땅한 슈베르트의 못 생긴 얼굴을 잘 생긴 미남으로 탈바꿈시키기 마련이다. 그녀의 서재에서 오래 전 슈만을 거론하며 테레사가 펼쳤던 책을 훑어보던 혜성이 조용히 거실로 나왔다. 정다운 장미의 향이 숨을 내쉬는 족족 힘껏 올라오고 있었다. 쌉싸름한 홍차의 향기가 곳곳에 뒤섞인다. 수페리우스는 화사하게 웃으며 교수님의 맞은편에 앉아 홍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 맛은 어쩐지 마리아 칼라스를 들이키는 것 만치 짜릿하고 영롱했다. “너의 감수성이 최고조가 되었구나, 수페리우스.”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오랜만이야…. 나는 두 번 다시 이런 즐거운 평화는 없으리라고 여겼거든.” “…….” “그래… 신입생 연주회가 끝나면 곧장 전공을 정해야 하는데, 너는 계속 피아노를 할 계획이니? 아니면, 다른 것에 도전할 거니.” “…….” 혜성은 한 번에 대답 할 수 없었다. 이 학교에 예전처럼 다니게 된 것 만으로도 감사하는 현재, 혜성은 조용히 홍차를 마시며 불그스레한 뺨을 떨리웠다. 푸스스- 바람에 날리는 붉은 잎사귀들이 사비나 교수의 열린 창 안 쪽에도 밀려 들어왔다. “다시 4학년인데, 오페라 쪽에 관심이 많은 거니.” “모든 게 다 좋아서… 어떤 것에 파고들어야 할 지 난감해요.” “…….” “그렇지만 기본기를 깨우쳐야 하는 게 우선이니까….” “넌 기본은 되어 있어.” 수페리우스의 눈동자가 치켜세워진다. 사비나 교수의 온화한 미소와 마주쳤다. “이번 1년은 피아노에 힘을 써 보렴, 작은 아이야.” “…….” “동시에 너의 성역을 넓히도록 목소리를 연습하렴.” “…음악은 모두 하나 인 가 봐요, 교수님. 미카엘 성가대에서 솔로를 할 때도, 지난번처럼 헬리아를 연주할 때도 그 느낌은 같았거든요. 보다 전문적으로 배우려면 뭘 해야 할 지, 조금 더 고민 한 후에 말씀드릴게요.” “그래.” “저는 혹시 반항기 일 까요, 교수님?” “재즈와 같은 가벼운 선율에 길들여져서 교정이 필요한 걸 보면 반항기 일 지도 모르지.” “…….” “머리색이 노란 것만 봐도.” “하하하하….” “수페리우스. 너는 정지하는 법이 없구나. 못 해도 하려고 하는데, 다른 애들은 안주하려고만 들어.” 이에 수페리우스는 아주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방금 전의 사비나 교수의 말은 동조할 수 없었다. 서서히 들뜨는 학생들의 표정을 사비나 교수가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변하고 있어요, 교수님.” “……?” “아마데우스가 정말로 변해요.” “!” 사비나 교수는 작은 러시아 인형 수페리우스가 불현듯 낯설게 느껴졌다. 마리아 칼라스의 향기 때문일까? 신비로운 틀이 그들 사이를 방해하는 것 만 같았다. 사비나 교수의 통통한 몸이 앞으로 쏠릴 정도로 수페리우스는 자비롭게 웃으며 똑 부러진 입술을 열었다. “낙오자의 모임도, 위원회도 없는 현재… 학생회가 생겨야 되요. 기반 이라는 게 있어야지 자력으로 학생들은 들뜨게 되거든요. 책임이 주어지면, 자신들이 밟고 있는 자유의 값어치에 더더욱 충실할 거예요.” “너는…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지? 수페리우스… 너는 어떻게….” “누가 예전에 알려 줬던 거예요. 제가 혼자서 생각하고 학생 재판에서 얘기 했을 리는 없지요.” “그게 누구니? 정혁이? 테레사?” “…….” “반 아마데우스?” 탁상시계의 초침을 확인한 뒤, 혜성은 대답을 기다리는 사비나 교수를 뒤로 하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는 답답해하는 사비나 교수에게 상큼한 청량제를 선물하듯 가벼운 투를 건넨다. “그 인물은 저의 가슴 속에 별이 되어 있어요.” “?” “다음에는 연주회에서나 뵙겠군요, 교수님 그럼 안녕히!” “수페리우스!” 정말은 해야 할 말을 못 꺼냈음을 알고, 사비나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하지만 언제 있었냐는 듯 수페리우스는 비호처럼 사라졌다. 노오란 잔해가 마리아 칼라스의 향기처럼 떠돌 뿐이었다. 신입생 연주회에 설마 참여하는 건 아니겠지? 그래. 아닐 거야. 사비나 교수는 자기 주관대로의 안일한 결론을 확신하며 다 식은 홍차를 마저 들이킨다. 자퇴 철회 이후, 혜성은 그러고 보니 단 한 번도 성당에 간 적이 없었다. 미사는커녕 그토록 사랑했던 미카엘 성가대 연습실조차 외면했었다. 어쩌면 피한 다는 것에 가까웠다. 아직은 들뜬 마음이 사그라들지 않았으며 혜성은 현재의 상황에 익숙해지는 게 순서에 맞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혜성의 불참을 매우 반가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비나 교수님의 별 채에서 한 참은 걸어 나오던 혜성의 표정이 굳는다. 동시에 저 쪽에서 마주 걸어오던 이자벨과, 그녀를 호위하듯 따라붙던 모세의 표정 역시 딱딱해졌다. 그들은 상냥하게 인사하는 주변 무리들에게 의무적으로 답을 하면서 점점 간격을 좁혔다. 둥. 둥. 정신없이 뛰기 시작하는 어리석은 심장의 박동. 그리고 혜성이 지나칠 때, 이자벨이 먼저 걸음을 멈췄다. 덕분에 혜성의 빠른 걸음도 자연스레 멈췄다. 그 둘이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많은 아이들이 분수대 근처에서 ‘수페리우스다!’ 혹은 ‘이자벨이다!’ 아니면 ‘접전이다!’ 라고 소리치며 인파를 부축였다. 하필이면 그들이 마주친 장소가 학생들이 가장 많이 오고 가는 분수대와 게시 대 사이 인 게 문제였다. 만약 장소가 외딴 지역이었으면 적당히 노려보기만 하고 지나쳐도 좋을 것을, 지켜보는 시선에 자극이 되었는지 그들은 머뭇거리며 결국은 적당히 서서 마주보게 되었다. “미리 경고하는데… 애송이.” “…….” 퉁- 삼박자로 뛰던 심장이 저 아래로 곤두박질이다. 오랜 만에 들어보는 이자벨의 음성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그녀는 마리아 칼라스의 절정기 때를 맞이한 것 보다 아름답게 변해있었다. 흰 면장갑은 그녀의 독특한 개성을 돋보이게 했으며, 출렁이는 갈색 머리칼은 살아 있는 인형처럼 숱이 많고 풍성했다. 그녀와 마주 선 혜성의 노란 머리칼이 천박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녀는 우아하고 도도하다. 그들을 동그랗게 에워싼 무리들을 의식해서인지 이자벨의 경직된 억양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성가대에 너의 자리는 없다.” “…그래?” 어떤 이야기를 할까 싶었는데 고작 이건가? 혜성은 그녀가 전보다 더 안 되게 느껴졌다. 적어도 테레사를 앞세워 가며 낭낭하게 소리쳤던 이자벨은 자신감이라는 방패가 지금보다는 단단했기 때문이다. 혜성은 측은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이자벨에게는 모멸감으로 다가왔음은 물론이다. “소프라노는 더 이상 너의 것이 아니다. 슈베르트의 가성은 없어.” “그럼 네가 해.” “!” 이제 수페리우스는 이자벨 장이 귀찮아졌다. 학교에 돌아오는 즉시 부딪혔던 게 많아서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자벨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망각해서 일 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지금 자신의 말로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 지 어쩌면 알면서도 부러 삐딱하게 대답했다. 이자벨의 상냥했던 눈망울이 독사와도 같이 변한다. 하지만 혜성은 그녀를 스쳐 지나며 피식 웃었다. “생각나게 해 줘서 고맙다 이자벨. 나는 당장 문제가 많아서 소프라노 까지는 생각 못 했거든. 네가 나를 불안해하고 있었다니, 몰랐어.” “감히!” 팍- 손을 올린 이자벨을 진작부터 알았노라며 수페리우스는 그녀의 팔을 재빨리 잡았다.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는 이자벨을 흐릿한 시선으로 응시하며 수페리우스는 천천히 허공에 쥐었던 그녀의 가느다란 팔을 풀어주었다. “…나는 네가 두렵지 않아. 너를 두려워하기에는 시간이 없어.” “!” “그것도 미안하다. 이자벨.” “!” 두 사람을 지켜보던 모세는 물론이거니와 학생들이 경악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이들은 흥분해서 주변에 들리는 것도 모르는 채 떠들었기 때문이다. ‘수페리우스가! 수페리우스가!’ ‘아니야. 그게 문제가 아니라, 예전처럼 이자벨 편을 들어줘야 그녀의 기가 살아나서 다시 뺨이라도 칠텐데…. 누가 좀 나서 봐.’ ‘이자벨 선배와 수페리우스가 앙숙 인가요, 선배? 저런 장면 처음 봐요.’ ‘예전엔 이런 일이 많았지. 신입생이라서 모르겠구나. 성가대 일만 해도….’ ‘이자벨이 흥분했어. 전세가 완전히 역전 된 거야.’ 우리는 파란 빛 아름다운 청춘. 그러나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그 영롱함을 서로가 시기하고 있다. 안아줄 여력이 없는 잔인한 시기에 눌려, 파란 빛이 사그라들 때를 기다려. 격정의 아마데우스여, 온화한 당신의 태양이 아직도 모자라다며 못난 우리들은 손을 내밀 수밖에 없다. 통증의 가을이 짙어져 오색찬란함은 눈을 시리게 하지만, 그것마저도 질투를 사니, 암담한 젊음은 끊어질 수 없는 거야. 테레사, 나는 벌써부터 당신의 빈자리에 영향력을 느끼는 나와 우리가 두렵습니다. 테레사, 당신 이라는 달콤한 열매가 주는 쓴 맛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후회하게 될 거다, 애송이.” 이자벨 장이 가시처럼 톡 쏘아도 혜성은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는 자신의 불리한 상황을 알고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어쩌면 눈물을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이자벨이 떠나는 즉시 주변에 포진하고 있던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가 정말 변한 거야!” “…….”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하나도 기쁘지 않다. 이렇게까지 대화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혜성은 지기 싫어했던 방금 전을 바로 후회했다. 한 번쯤 고개 숙이고 이자벨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아도 좋을 일이었다. 허나 물은 이미 엎어졌다. 이자벨은 자존심에 금이 갔으며 학생들 사이에서 야유를 받았기 때문이다. 멍하니 서 있는 혜성에게 이번에는 모세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는 이상한 것을 물었다. “너도 누군가의 반주를 맞춰 주는 건가?” “…신입생… 연주회?” “그래.” 이자벨을 사랑하는 비운아 모세. 그는 최대한 안정된 어투를 직설적으로 꽂았지만 수 적으로 우세한 혜성이 쉽게 밀리지는 않는다. 아니, 사실은 이런 상황이 혜성에게 더 큰 어려움을 준다. 그는 역경에서 일어나는 법은 진즉부터 깨우쳤지만, 남에게 상처를 주는 방법에서는 어린 아이보다 못 한 심성을 지녔음을 다시 알았기 때문이다. “…두고 보면 알겠지. 부탁이 오면 거절할 생각은 없거든. 내 길을 방해하지 말고 비켜라, 모세.” 로미오에 대한 이야기는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 하에 혜성은 거칠게 대답했다. “그…래? 쿡….” “?”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알겠지.” “…….” “지나가라, 비켜 드리리다.” “…….” 모세는 의미심장한 말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자신의 사랑에게로. 자신의 이슬에게로. 자신의 영원에게로. “신경쓰지 마 수페리우스.” “괜찮니, 수페리우스?” 많은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와서 혜성에게 캐물었지만 아이의 입술은 무거워지기만 했다. 이런 걸 원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비아냥거리며 우위를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원하는 것을 쟁취하면, 동시에 뜻하지 않은 상황도 받게 되나보다.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을 받을 수는 없겠지…. 그래, 그런 거겠지. 그리고 찾아 간 신입생들이 주로 찾는다는 데블관의 분위기는 으스스했다. 이자벨과 모세와의 만남에 느꼈던 떨떠름한 기분이 통 사라지지 않는 가운데, 혜성은 로제리오 집무실이 아닌 데블 관을 먼저 찾았다. 로제리오 교수를 찾으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동완에게서 이상한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오르페우스 관의 모든 악기를 교체한다는 그것이다. 그러나 더 큰 충격은 다음이었다. 『 뭘 어쩐다고? 』 『 몰랐나 보네? 악기는 다 폐기 처분 한다더라. 새로 교체되면서…. 』 『 왜? 』 어젯밤 사이좋게 만나서 대화를 나누던 중 동완이 했던 소리다. 여전히 코코아를 좋아하는 동완이 세 잔째 홀짝거리던 것을 중단하고, 자신의 친구를 위해 세세히 설명해 줬었다. 옅은 바람에 흩날리는 악보를 정돈하던 혜성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 글쎄다. 아마데우스 것은 절대 외부에서 함부로 활용 될 수 없다는 명목이 있어서 라던데…. 만약 낙오자의 모임이 있었다면 반대 했겠지. 아니, 위원회가 있었더라도 로제리오의 미친 의견에 반기를 들었을 거야. 근데 여지없이 시행하나 봐. 우리는 힘이 없는 학생이니까. 』 그건 말도 안 돼! 라고 소리치자니 지혜로운 두뇌는 순서에 맞는 다른 것을 입술로 전달했었다. 『 자선 단체나 그런데 에 기부 하지도 않고? 』 『 전~혀. 명목이 확실하다고 주장하는데, 그건 바오르 신부님과 테레사도 승인 한 거라서. 』 『 ……. 』 그래. 바로 그 부분에서 막혔어. 테레사까지 승인 한 부분이라니, 나는 대꾸 할 수가 없던 거야. 시력을 잃고 보스턴으로 떠난 테레사는 완전히 한국 아마데우스를 벗어난 것이다! 그의 권한 자체를 소멸시킨 채! 수페리우스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그렇지만 멀쩡한 새 악기들을 왜 교체하는 걸까. 꼭 그래야 할까. 게다가 왜 새 것이나 다름없는 악기들을 폐기 처분하는 거람. 틀림없이 혁명 이후로 거의 모든 악기가 교체 됐을 텐데. 『 물론 예전에도 이런 일이 한 번 있었대. 우리가 입학하기 전의 일인데, 그 때는 테레사가 굉장했나봐. 폐기 처분을 반대하면서 기스가 난 몇 개만 교체하라고 교수님들 앞에서 협박했었대. 』 『 ……. 』 『 결국 로제리오 교수님들은 테레사가 하자는 대로 의견을 굽힐 수밖에 없었겠지. 게다가 낙오자의 모임 쪽에서도 처음으로 단결해서 테레사 쪽에 손을 들었어. 희대의 사건이었다더라. 』 『 그럼… 그 때 교체된 악기들은 폐기 처분하지 않고, 어디에 남아있니? 』 『 직접 확인 해 보진 못했는데… 선호 선배 말로는 지하 병동에 일단 놔뒀대.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테레사는 악기를 버릴 수 없었던 거야. 쓸모없게 된 형편없는 것이라도. 』 『 ……. 』 지하 병동의 죽어가는 악기들! 예전의 민우가 병동 지하에서 베토벤을 연주해 줬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래. 굉장한 악기들이 푸대접을 받는 장소가 아이러니하게도 병동 지하였었다. 그 때는 왜 악기가 여기 있을까에 대해 의심할 겨를이 없었다지만, 지금은 달라. 『 어쨌든 지금은 테레사도, 위원회도, 낙오자의 모임도 없어. 우리들은 새 악기가 들어오면 길들이기만 하면 되거든. 』 한 때는 악기를 부시라고 명령했던 테레사의 슬픔이 가시처럼 찔린다. 목이 쓰리고, 마음이 붉게 물든다. 동완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린다. 혜성은 괴로웠다. 학생 재판을 해 봤자, 자신은 아직까지 일개 학생이며 배울 것이 더 많은 최하위의 학생이라는 게 속이 상했다. 누구든지 나서서-이왕이면 실력이 좋은 학생이- 로제리오에게 반기를 들어 주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혜성은 이 생각을 고치기로 했다. 누군가가 그리 해 줬으면… 이라는 발상은 누구나 다 있을 것이다. 문제는, 누가 그 점을 꼬집고 지적하고 바꾸려 노력하느냐, 그것이다. 로미오군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가온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 뒤, 혜성은 천천히 데블관 입구에서 벗어났다. 그리고는 시계탑을 지나, 아름드리 학생 식당을 훑어 본 뒤, 게시 대 쪽을 향했다. 어차피 로미오군과 만나기로 한 장소는 분수대였기 때문이다. 그래. 로제리오 교수님은 내일 뵙기로 하자. “?” 유난히 모여 있는 인파가 수상했던 혜성은 빠른 걸음으로 개시 대를 향했다. 모세와 헤어진 지 고작 1시간이 지난 지금, 따끈따끈한 가십이 부착 되었는지 많은 아이들은 “가십이다!” 를 쩌렁쩌렁 외치고 있었다. “가십이다!” “어! 수페리우스가 왔어!” “쉿!” “…….” 백 명은 거뜬하게 넘는 숫자를 헤치고 혜성은 제일 앞줄에 섰다. 단 하루 사이에 숱한 가십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혜성이 가까스로 글자를 확인하는 지역은 해외 가십을 번역해서 붙여놓는 장소였다. 한국 아마데우스 소식은 여기서 왼 쪽으로 더 밀고 들어가야지 보인다. 아이는 당장 눈앞에 있는 것부터 확인하기로 한다. “히스!” 웬만하면 가십을 읽을 때 소리 내지 않던 혜성이 꽥 하고 소리친다. 덕분에 숨을 죽이고 있던 주변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부활한 거야! 역시 히스클리프!” “독일 쪽이 시끄럽겠는데? 히스에게서 레퀴엠 혹평을 들은 사람 숫자만 해도 요 일주일 사이에 두 명이나 된대!” “!” 해외 가십, 그 중에서도 독일과 영국 쪽에 공동으로 내놓인 가십이 눈앞에서 펄럭인다. < 헤르베르크 폰 카라얀 2세, 파란 머리색을 지닌 독재자 히틀러의 부활! > 히스! 혜성은 가슴을 움켜쥐고 눈을 빛냈다. 당장 히스가 글자 밖으로 튀어 나올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그의 상냥함에 매료되었던 룸펜에서의 나날들, 그의 뜨거움 숨결과 가끔은 거칠었던 몸의 움직임에 발끝부터 아찔해지기 시작했다. 사랑을 속삭였던 그의 낭만과, 욕심 내지 않고 비켜 설 때는 신사가 되었던 깔끔한 매너가 혜성의 뇌리에 파고들었다. 사랑해 수페리우스, 귀여운 다람쥐. 나는 에이브러햄 링컨이다~! 다쳤어? 다… 다친 거 아니야? 괘…괜찮아? 넌 어깨가 작아. 손도 작아. 발도 작아. 머리도 작아. 하품 하는 건 나 밖에 안 봤어, 수페리우스. 귀여운 수페리우스,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어지러워, 히스. 너는 과연 살아 있구나. 룸펜에서의 너를 믿을 수가 없어. 독재자라니? 히틀러? 헤르베르크? 너는 달콤한 시럽처럼 상냥한데, 가십이 낯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그려져. < 그는 예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악명은 여전했다. 새롭게 부활하는가 싶던 일본의 유학생 유지의 지휘권을 단 이틀 만에 다시 찾았으며, 영국 주최 측에 의해 열린 뮌헨 콩 쿨을 뒤엎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신은 아직도 히스클리프 폰 뤠겐부르크의 편 이었다. 순순히 물러나 준 영국 아마데우스 덕분에 그는 단숨에 최고의 자리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 히스! 히스! 히스! 너는 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고 있구나! 왕자님처럼 바람둥이처럼 파란 머리칼을 휘날리며 여인들과 사내들의 마음을 훔치고 있겠지. 지금쯤 독일의 어느 쪽 하늘에 서 있을까. 지금은 새벽이겠구나. 웃고 있니. 울고 있니. 아니면 너도 나를 읽고 있니. < 유지가 구두로 맺은 협연을 취소한 뒤, 히스클리프는 보스턴에서 온 교환 학생들과의 협연을 다시 주최했다. 3일 전 아마데우스 홀에서 대 성황리에 끝난 오케스트라 협연에서 그는 두 개의 레퀴엠을 창조했으며 잔인하리만큼 직설적인 지휘로서 좌중을 압도했다. 신께서는 히스클리프를 다시 부활시키셨다. 사상 최초로 보스턴 아마데우스 협연 성공! 이로서 그가 지난 1년 동안 공백기를 가진 것에 대해 왈가왈부 하던 소문들은 한 순간에 태풍처럼 몰아냈다. 독일 아마데우스 신입생들은 곧잘 태풍 이라는 수식어를 히스클리프를 추앙하며 붙인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한 사람에게는 도대체 몇 개의 수식어가 있는 걸까? 앞으로 몇 개의 잔인하고 냉정한 수식어가 더 생길까. 1년 동안 평정했던 유지 신의 시대는 끝났다. 우리에게는 히스클리프 폰 뤠겐부르크, 그의 빈자리가 이만큼 컸음을 다시 깨닫는 것으로서. > “유지에 대한 부분은 너무 했어. 인종 차별성 구절인데? 백인이면 다야?” “하긴. 1년이나 공백을 둔 것에 대한 처사 치고는 너무 후하다 싶다. 만약 유지가 한국 학생이라면 우린 자존심이 상했을 거야.” “그래도 테레사가 있는 한, 음악의 중심은 한국이야. 그들은 우리를 못마땅해 하지. 인정 하면서도….” “음악의 도시 오스트리아 빈을 무너뜨린다는 취지로 아마데우스가 설립된 것부터가 영국과 독일의 실수였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수페리우스?” “…….” 열띤 토론을 벌이는 학생들과는 달리, 혜성은 그들에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히스! 히스! 그의 글자가 풍선처럼 부풀어져 터질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학생들이 토론하는 것 반의반도 혜성은 이해가 어려웠다. 그에게는 눈앞의 한국 아마데우스가 더 골치였기 때문이다. 로제리오 교수가 폐기 처분한다는 악기들을 비롯, 학생들이 자립할 수 있는 수단인 학생회 생성, 기본기부터 죽을 듯이 연습한 뒤 신입생 환영회가 끝나면 바로 결정해야 할 전공과목까지! 혜성은 정말이지 고민할 게 너무 많아서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어쨌든 이곳은 한국이다. 훗날 혜성이 다른 나라의 현재에 주어질 때가 아니라면, 지금은 눈앞의 것에 집중해야 한다. 유지 신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알아도 필요 없는 정보이다. 혜성은 히스에 대한 푸근한 감동은 뒤로 한 채 조심조심 옆쪽으로 걸었다. 이번에는 미국 쪽에서 번역된 가십이 원본과 함께 걸려있었다. 게시 대의 중간 부분에서 있던 학생들은 테레사에 대해 떠들던 중이었다. 그렇다. 테레사의 가십이 뜬 것이다! 쿵- 혜성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테레사! 테레사! < 죽은 도시 보스턴 아마데우스에 한국의 장미가 피었다! > 테레사의 가십은 방금 전 히스와는 달리 각국 아마데우스뿐만이 아닌, 굴지의 신문사들을 거친 흔적이 만연하다. 한국의 장미! 마리아 칼라스! 벌써부터 가슴 지리게 콧 전을 세게 치고 지나가는 그들의 향기 때문에 정신이 얼얼해. 테레사, 테레사. < 한국 아마데우스에 일등 공신, 천재이자 은어의 손놀림의 주인인 테레사가 보스턴을 장악하기 위해 기어이 뿌리를 내렸다. 일반 학교처럼 특수성이 사라진 거나 다름없는 보스턴은 테레사에게 많은 기대를 걸기 시작한다. 혹자는 시력을 잃고 지난번의 독일에서 있었던 뮌헨 아마데우스홀 콩 쿨에서 시범 연주를 엉망으로 한 테레사가 막무가내로 나가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물론 그 말이 정답 일 수도 있다. 그는 정말로 1년 동안 독일의 히스클리프와 마찬가지로 뚜렷한 행적을 일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변방의 국가, 이름도 생소한 한국을 세계 음악계에 최고로 자리 잡게 한 장본인이 아닌가. 한국 아마데우스 건립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테레사(전 진)가 이룬 성과는 무시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보스턴의 가장 기초 공사(시공사와 감리단 선정까지)부터 다시 들어간다는 현재, 각지의 음악인들은 시력이 없는 테레사가 어떤 식으로 보스턴을 세계 수준으로 이끌지 그를 주목하는 바이다. > 보스턴의 가십 담당자가 적었기 때문일까. 상당히 희망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글귀를 통해 게시 대의 학생들은 기쁨을 소리쳤다. “역시 테레사야!” “어차피 그는 눈을 가리고도 은어의 손놀림을 따 낸 인물이잖아!” “테레사! 테레사!” 학생들 사이에서 눈시울이 붉어진 혜성은 고동치는 심장을 꽉 막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양처럼 다부진 그의 이목구비가 글자 곳곳에 파도처럼 밀렸다. 마리아 칼라스의 붉은 향내가 종이에 펄럭인다. 혜성은 하마터면 가십의 유리판을 손바닥으로 누를 뻔 했다. 감동은 저마다에 홍수를 일으켰고, 가뜩이나 변화되고 있는 한국 아마데우스에 더 큰 것을 심어준다. 히스, 테레사. 그들은 움직이고 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끄집어내고, 뮤즈로서 혼을 불태우는 것이다! 오! 아마데우스의 심장은 어느 곳에서건 뛰고 있는 거야. 희망이 있으니 사랑을, 사랑이 있다면 용기를, 용기가 있기 때문에 실천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저것을 배워야 하는데, 과연 나는 언제쯤 그렇게 당당해 질 수 있을까. 혜성이 그렁그렁 차 오른 눈물을 쓱 손으로 비비며 자리를 옮길 때였다. 해외 가십 쪽에 서 있던 무리들과는 달리, 혜성이 한국 인쇄 동에서 발행한 것을 확인하려 들자 그 편의 아이들이 입을 싸악 다문 것이다. “?” 그들은 초조한 표정으로 숨을 죽이고 혜성을 살폈다. 설마… 설마. 아닐 것이다. 모세와 이자벨, 그들과 헤어진 지 고작 한 시간이야. 그 사이에 어떤 가십이 올랐으려고. 그럴 리가 없어. 모세가 나에 대해서 아는 건 없을 거야. 나는 로미오에 대한 이야기도 아무한테도 하지 않았는걸. “!” 그러나 혜성은 가십을 읽는 순간, 눈을 부릅뜨고 양 손으로 몸을 감싼 채 주변을 노려봐야만 했다. 하지만 그 시선은 두렵다는 쪽에 가까웠다. 나를 쫒아 다니고 있어? 나를 감시하는 거야? 혜성의 하얀 시선은 공포에 떨고 있었다. 오싹 달아오른 내면은 좁쌀보다도 작아져 있었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괘… 괜찮은 거니?” “식은 땀 좀 봐! 누… 누구 손수건 좀 줘!” 우왕좌왕 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혜성은 이를 닥닥 부딪히며 떨었다. 선량한 학생이 식은땀을 흘리는 혜성의 이마에 저의 손수건을 갖다 댔지만, 흠칫 놀란 혜성은 다람쥐처럼 웅크린 그대로 달음질치기 시작했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많은 아이들이 그를 불렀지만, 그 보다는 혜성을 고깝게 쳐다보는 시선이 훨씬 많았다. 되먹지않은 나의 심장이여, 너는 이렇게 나약하구나. 끝끝내 나를 떨게 한다. 혜성은 자신을 걱정 해 줬던 소수의 숫자보다, 방금 전의 가십으로 인해 싸늘하게 식어 내린 다수의 눈빛에 심장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두렵고, 무서웠다. 단 한 시간 안에 이런 가십이 올라오다니. 그런데, 어떻게? < 지나친 독식의 주자 수페리우스 > 모세의 야비한 미소가 스쳐 지난다. 그의 미소는 다시 말하고 있다. 이제 시작이다, 애송이. < 낙오자의 모임 일원이었던 미카엘의 친동생이 신입생으로 최근 입학했다. 알아 본 바로는, 그들의 집안은 재정 상태가 매우 빈약하다. 어떻게 입학 할 수 있었을지 모두의 의심을 사기 충분하다. 게다가 수페리우스는 선량한 건지, 악독한 건지, 이름조차 밝히지 않고 오만한 척 구는 신입생의 허리를 물었다. 바로, 곧 있으면 닥칠 신입생 환영회를 뜻한다. > 모--세! 비열한! < 헬리아로서 얼토당토않은 수법으로 순진한 학생들의 손을 차지한 수페리우스. 그런 그도 이용 값어치가 있는 게 틀림없다. 구원을 바라는 신입생은 어쨌든 수페리우스와 일종의 계략을 품었기 때문이다. 수페리우스는 연주자가 아닌, 청중과 심사로서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제 멋대로 월권을 휘둘렀으며, 미카엘의 동생은 신입생들 중 가장 눈에 띄는 행위를 벌이기로 한다. 그런다고 해서 그의 빈약한 뒷 배경이 사라질 수 있을까. 아니면, 비슷하게 비겁한 자들이 눈이 맞은 걸까. 또 하나의 눈엣 가시임에 틀림없지만, 정도에서 비껴가는 일탈의 행위를 모두는 참고 지켜봐야겠다. -모 세- > 모세! 먼 거리로 달려가던 혜성이 현기증이 났는지 분노로 쥔 주먹을 땅에 내려쳤다. 동시에 그의 몸이 약하게 쓰러졌다. 모세! 모세! 도대체 어떻게 알아 낸 거지? 지난번의 헬리아와 로미오에 대한 것까지! 이 가십은 혜성 뿐만이 아니라…. “그 로미오인지 하는 놈에게도 치명타가 될 거다.” “!” 바닥에 쓰러진 혜성의 앞에 긴 그림자가 닥쳤다. 정혁이? 라는 생각이 아주 잠깐 스쳤지만, 목소리가 들리는 즉시 생각은 죽는다. 혜성은 눈에 불을 켜고 독사와도 같이 소리쳤다. “무슨 짓이야!” 아이의 내면이 찢어진다. “모-세!” “…….” 그러나 흔들림 없이 유유히 나타난 모세는 씨익 웃으며 자기 앞에 쓰러진 수페리우스의 이마를 구둣발로 툭 툭 밀어내기 시작했다. 투툭- 혜성의 이마를 지나 바닥에 떨어지는 흙 알갱이들이 눈물에 섞인다. 분해서 몸 어느 곳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로미오, 죄 없는 신입생이 당할 수치가 떠올라서 괴로웠다. “나를, 밟아서! 나를, 쳐서! 네 분이 풀리겠어?” “…너는….” “헉! 아… 아악!” 순간 방심하고 있던 혜성의 뺨이 크게 돌아간다. 퍼걱- 이마를 쓱 쓱 구두로 누르고 있던 모세가 있는 힘껏 머리를 찼기 때문이다. 덕분에 혜성의 머리와 몸이 볼썽사납게 낙옆 위로 구른다. 다행이도 숲길 입구에는 인적이 없었다. 아마도 가십 때문에 우루루 그 곳에 몰려 있나 보다. “아… 아… 아아아….” 천주여… 돌보아 주소서…. 아직은 버리지 말아 주소서…. “너는, 내 손으로 직접 때릴 가치도 없다.” “아… 아아… 으읏….” 이리도 빨리 거두실 기쁨 이었습니까…! 가장 잔인한 당신이시여, 차라리 쾌락의 값을 알려 주지 말 것을…! “애송이.” “……흐으….” 들리지 않아. 어떤 말을 해도 상관없어. 나 혼자 당하는 거라면 너 까짓 거 두렵지도 않아. 하지만 죄 없는 선량한 신입생이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부어오른 뺨을 쥐고 흙투성이로 엎어진 혜성이 오열하는 모양을 시원하게 웃으며 구경하던 모세는 유유히 사라졌다. 자신의 사랑인 이자벨에게 모욕을 준 것을, 그는 비겁한 수단을 동원해서 복수한 것이리라. 이로서 증명되었다. 혜성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교묘하게 따라붙는 자가 있다는 것을. 그게 바로 모세라는 것을. “흐으… 흐으으으… 가, 가만… 끄윽. 두…끄익.” 지푸라기를 움켜쥐며 혜성은 거친 눈물을 쏟아냈다. 말을 하고 싶었지만 부어오른 뺨과 눈물, 호흡 덕분에 쉽지 않았다. “!” 로미오! 아이는 당장 몸을 일으켰다. 푹- 금세 곤두박질하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줬다. 비틀비틀 걸어가며, 혜성은 번개처럼 스친 가여운 인영을 찾기 위해 애를 썼다. 뺨의 상처가 점점 부풀어지는지, 입을 다물기가 힘들었다. 혜성은 미끄러지듯 양 갈래 숲길 사이의 개울에 첨벙 첨벙 들어가서 물을 적셨다. 상처에 물을 적실수록 소름 끼치는 아픔이 뼛속 까지 파고들었다. 모세의 분노는 가벼운 것이 아님을, 앞으로 또 마주친다면 쉽게 대하면 안 된다는 것을 새로이 깨달았음은, 물론이다. 한결 쉬워진 상황에서 방심한 결과, 와르르 무너졌던 긴장감에 채찍질을 해도 소용없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이처럼 갈기갈기 찢겨서! “…….” 움직일 때 마다 영혼은 아프다고 비명을 지른다. 혜성은 애써 괜찮다고, 나는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하며 서 쪽 기숙사동으로 걸음을 옮겼다. 만약 분수대에서 엇갈릴 경우에는, 자신의 기숙사로 찾아오라고 로미오와 약속했었기 때문이다. 상당히 지체된 시간으로 보아 로미오는 벌써 혜성의 방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을씨년스러운 서쪽 기숙사동 입구에서 혜성은 자신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오는 누군가를 희미하게 응시했다. 눈물을 흘리는 중이라서 그런지 상대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테레사와 히스의 소식 덕분에 들뜬 마음이 보기 좋게 사라졌다. 오히려 자신의 이런 소식이 그들에게 전해질까 두려웠다. “신혜성!” “아… 동완아….” “너-!” “!” 아이의 시선이 더더욱 창백해진다. 혜성의 뺨을 발견하자 멈칫 하던 동완이 다짜고짜 아이의 가벼운 멱살을 쥐고 허공에 매달았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분노가 동완에게서 처음으로 뿜어졌다. 걷잡을 수 없는 태풍 속 파도처럼, 마냥 흔들리는 조각배가 되어 혜성은 힘없이 매달려 있다. “너… 너! 니가 무슨 짓을 한 지는 알어!” “…….” “반주? 누구를 반주 해? 수페리우스가 어떤 자리인지, 본인이 더 잘 알아야 하잖아! 언제까지 가르쳐 줘야 돼!” “…….” 봤구나. 가십을 봤구나 동완아. 너의 미카엘 선배의 소중함을 내가 쓰라리게 했는데, 봤구나. 그런데 나는 몰랐어. 나도 선배니까 반주 정도는 쉽게 해도 된다고 여겼었어. 아니, 가벼운 대화 일 뿐인데 모세가 스치듯 목격하고 제 멋대로 가십에 붙일 줄은 전혀 몰랐어. “선호 선배 동생이라고! 딴 사람도 아니고! 선호 선배가 가난한데 그게 뭐 어떻다고?! 지금 다들 뭐라고 하는 줄이나 알어?” “…….” 동완의 평정심은 완전히 깨졌다. 다른 때 같았으면, 모세가 가십을 적었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분명히 사실이 아닐 거라며 두둔해 줬던 우정이 노래진다. 혜성의 눈 밖으로 거침없이 안개가 끼인다. 동완은 이성을 잃은 게 분명하다.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가십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은, 어쩔 수 없다. “선호 선배하고 선배 동생이 잘못 돼면! 이상한 소문에 휩쓸리면! 너 어떡할거야! 니가 뭔데-” “…….” “…니가….” “…….” 툭. 동완의 손에 힘이 풀린다. 뒤늦게야 제정신이 돌아왔는지 그는 하염없이 부은 뺨 위로 눈물을 흘리는 자신의 친구를 덜덜 떨리는 시선으로 내려 보았다. 바닥에 떨구어 진 혜성은 할 말이 없다. 그래. 오래 전 테레사는 신입생 환영회 날, 그 누구의 반주도 맡아 주지 않았었다. 그 점만 봐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문제인데, 혜성은 로미오라는 녀석에게 반주를 승낙 하지 않았던가. 아니, 직접적인 승낙은 아니었지만 혜성의 태도는 승낙이나 다름없었다. 그 점을 다른 누군가에게 말하기도 전에, 혜성을 몰래 목격한 모세가 이처럼 제 멋대로 주관적인 입장에서의 가십을 터뜨린 것이다. 단지 이자벨을 화나게 했다는 것만으로 단 한 시간 만에…. 아직은 경계해야 할 그들에게 쥔 고삐를 먼저 푼 것은 혜성 자신이었다. 누구를 탓 할 수도 없는 문제 앞에서 넋은 사라져 간다. 동완은 미안하다는 말없이 쓸쓸히 등을 돌렸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둘의 다툼은 풀어질 것이다. 격정을 이기지 못한 어린 젊음을 탓하며 파란 사과가 진해짐을 깨달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의 현실은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것을! “으…훅. 으으…훅. 으흐으…후우욱.” 휘잉- 저녁의 쌀쌀한 가을바람이 밀려 올 때 까지, 혜성은 서 쪽 기숙사동의 구석 부분에서 사람의 눈에 띄지 않도록 웅크리고 앉아 팔에 고개를 숙이고 한 참 동안 울었다. 어깨가 들썩이면, 들썩여지는대로, 내면이 떨어지면, 저 바닥 밑까지 빠지도록, 고통을 호소했다. “…….” “흐으…훅. 으으으…끅. 훅.” 쌀쌀한 몸이 일순 따스해진다. 혜성의 몸이 움칫 떨렸다. 바닥에 웅크린 작은 등을 감싸 준 것은 커다란 정복 상의였다. 혜성은 고개를 떨군 채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흡. 흑… 흐욱. 누, 누구…끅. 저… 저, 정혁이니… 끅.” “……아니요.” “!” 번쩍- 고개가 들린다. 지린 달밤은 많은 것을 감추려 든다. 혜성의 뺨도 어두움 사이로 가려져 상대에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사나운 눈동자만이 짐승의 그것처럼 번쩍거린다. 혜성은 눈물범벅인 상태에서 고개를 더 세게 올려보았다. 웅크린 자신의 앞에 긴 다리가 있었다. 그 다리의 주인은 무릎에 손을 얹은 채로 허리를 구십 도로 꺽은 채 혜성을 안쓰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울지 말아요….” “……끅. ……뜩.” 로미오다. 워싱턴이다. 조던이다. 아니, 사실은 이름이 없는 無의 누군가이다. 다정하지만 단호한 투로 화를 참아가며 내뱉는 슬픈 목소리가 있다. 혜성은 고개를 든 채로 구슬처럼 커다란 눈물을 줄줄이 쏟아냈다. 자신은 앉아서 올려보느라 사방이 까맣지만, 로미오는 미약한 달빛을 등에 지고 있기 때문에 혜성의 안면이 자세히 보이는 모양이었다. “옷이 그게 뭐에요.” “끄윽. 끅. …뜩.” “뺨은 왜 그래요…. 누가 그랬어요. 말 해 봐요, 선배가 보는 앞에서 죽여줄게요.” “끅. 뜩. 끅. 끅.” 진심을 담아 잔인한 광시곡 도입부에 들어선 자의 입술이 있다. “나는 알고 있었어요. 수페리우스는 경청하는 입장 이라는 거, 알면서도 부탁 한 거였어요. 그러니까 나한테는 미안해하면 안돼요.” “!” 로미오의 얼굴이 차츰 가까워진다. 어떻게 보면 늘씬한 체격의 그는 섬세한 여자처럼 예쁘장한 이목구비를 지녔다. 선호 선배의 동생이라서 그런가 보다. 많이 슬픈 눈동자로 혜성을 내려다보던 로미오는 흠칫 놀라는 혜성의 귓가에 안면을 드린 채 천천히 속삭여 준다. “이렇게까지 빠른 가십이 올라 올 줄은 몰랐지만….” “…….” “선배 힘들게 해서 미안하지만….” “…….” “저는 할 거에요. 제 반주자는 누가 뭐래도 선배 예요. 수페리우스예요.” “…….” “제가 말했잖아요.” “…….” “선배는 저의 큰 바위 얼굴 이라 구요.” wgreene@naver.com 사진은 감상방에 경민씨가 함께 올리신거에요. 백의 사막스럽다고 혼자 좋아하며 올려봅니다.^^ 또 포토로그에 가시면 소아님이 보여주신(그래서 제가 올린) 베토벤 민우씨가 있으니까 못 보신분 가서 보세요.^^ 요새 댓글에 즐거워서 저 폭주하는거 다들 눈치 채셨으리라고 봅니다. 이러다 진짜 올해 막판에 일내는거 아니야스카?(?) + 포토로그 업데 : 표지와 테레사 외전 편 예고(블로그 옆 포토로그 클릭) + 왼 쪽 카테고리 '아마데우스 외전편'생성 : 외전만 따로 모음 기린님, 몬타나님, 튬튬님, 쥬노님, 데빌님, 주황, 주황, kdcom77님, 소아님, ....님, gipbob님, lotus님, 미즈키님, 군림님, 박카스정님, 안젤리스님, 하루진님, 체샤님, 포근구름님, 연님, 슬픈웃음님, 별하님, 로로님, 그리고 유령님들. 고맙습니다. 항상 행복하세요.... 화이트그린 덧글 21개 엮인글 쓰기 /data17/2006/6/20/49/chokopink_4-wgreene_1-wgreene.gif@nhn@159763@nhn@1@nhn@505@nhn@434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32편(세 사람의 가십) /data17/2006/6/20/49/chokopink_4-wgreene_1-wgreene.gif@nhn@159763@nhn@1@nhn@505@nhn@434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32편(세 사람의 가십)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33-1편 ▼ 다음글 - 2악장 30~31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33-1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6/22 19:02 http://blog.naver.com/wgreene/110005442959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622 33-1편 업데) * 포토로그도 클릭하세요.^^ Amadeus 음악 : sound of music medley - acoustic cafe(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사운드 오브 뮤직 메들.. 2악장 33-1편(매우 너무 짧음) “왜 이렇게 눈물이 많~으 세요….” “…시끄러워.” “와이?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요. 무엇이 수페리우스를! 몰아세웠나요….” “? 조용히 해.” “…….” 혜성이 명령 하는 대로 곧이듣는 로미오 덕분에, 아이는 다시 무릎에 얹은 팔 안쪽으로 뺨을 숙이고 한 참 동안 울었다. 큰 바위 얼굴이 다 뭔가. 눈물이 나오는데 어떡하라는 거야. 모세 때문에 이젠 지긋지긋하고, 왜 잘 알지도 못하는 너를 염려해서 나는 걱정해야 하는지. 게다가 정작 상처 받았어야 할 너는 아무렇지 않아서 오히려 나를 걱정하는 거야. 왜 나는 이렇게 모르는 게 많지? “흐으. 흐으. …흐으이이이… 흐으이이이이.” “…….” 왜 나는 울음소리도 이상한 거지? 하지만 슬프답니다. 차이코프스키의 야상곡을 감상하는 것보다 더 슬프답니다. 무엇에 슬픈 걸까요. “…흐이,끅! …… …흐으이이이이이이.” “하하하하하!” “흐….” 혜성의 앞에서 다리를 구부리고 펴고를 반복하던 로미오군이 울면서 딸꾹질을 동시에 하는 소리에 그만 참았던 웃음을 시원하게 터뜨렸다. 수루루룩- 시원한 바람에 밀려 붉은 수풀이 춤을 추듯 일렁였다. “흐,끅! 흐이…끅! 꺽!” “…풋.” “히, 이끅! 흐이이깍! 특!” “하하하하하!” 어깨를 들썩이며 울면서도 혜성은 자기가 우는 것에 집중하느라 로미오가 웃는지도 모른다. 자존심이 상한다. 선배가 되어서 우는 꼴이나 보이다니. 그 때 천천히 혜성의 뺨이 올라간다. 침체된 영혼을 잡아당기듯이 들리는 음성 때문이다. “테레사를 왜 다들 존경하는 줄 아세요, 선배?” “……!” 눈물은 닦아요, 로미오군이 마음으로 지적하는 소리가 혜성에게는 들렸다. 테레사를 왜 존경하느냐고? “와… 테레사 라는 소리에 딸꾹질이 멈췄네요.” “…….” 그리고 달밤의 아름다운 콘서트가 펼쳐진다. 로미오군의 높은 키가 저 달을 가리고도 남을 만치 길어진다. 혜성은 눈을 비비며 털썩 풀 바닥에 주저앉았다. 작게 웅크렸던 몸이 기지개를 켜듯 장미의 향보다 진한 무엇을 꺼내는 후배를 응시한다. “테레사는요.” “…테레사는요?” 인적 드문 서쪽 기숙사동의 구석 잔디에서 로미오는 프허- 하고 입을 가리고 웃었다. 누가 후배이고, 누가 선배일까? 자신의 말과 똑같이 맞받아치는 혜성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의 말마따나 밤마다 러시아 인형으로 변한다는 소문은 사실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는 수페리우스를 지목할 수 있는 권한을 영국과 독일에서 부여받았어요. 이게 무슨 뜻 일 것 같아요?” “…….” 그는 무릎에 손을 짚고 날씬한 허리를 숙였지만 작게 웅크린 혜성의 몸과는 한 참 떨어져 있었다. 질문을 하는 동시에 하는 수 없이 검지손가락으로 자신을 올려보는 하얀 이마를 툭 건드린다. 혜성이 부리나케 눈을 크게 뜨고 양 손으로 때리지 말라는 듯이 저의 이마를 가렸다. 동시에 아까 전의 격정으로 고여 있던 왕방울만한 눈물이 또르르 타고 흘렀다. 로미오는 또 한 번 웃고 싶은 것을 참았다. “다들 倂뮈【?그의 수페리우스가 나타날 줄 알았던 겁니다. 아니면 대단한 실력을 지닌 한국 혼혈아나…….” “……!” 그 대신 자상한 아버지처럼 아까의 설명을 잇는다. 깨질 것처럼 투명한 달빛 아래, 밤의 이슬이 맺힐 무렵이었다. 혜성은 어쩐지 자신이 울었던 방금 전이 부끄러워졌다. 굳이 눈물을 보일 정도의 큰 일이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그 느낌은 마치 마법과도 같았다. 은은한 달의 전류 아래 달콤한 가루를 부여받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고작 신입생인데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게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그런데 그는 한국의 별 중에서도 가장 나약하게 반짝이는 걸 세상에 내놓았어요. 아직은 한국 아마데우스 뿐 이지만.” “!” 이번에는 로미오군의 검지손가락이 혜성의 이마를 가린 작은 손가락을 툭 밀었다.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아이는 그가 그러는 줄도 모른다. “다들 그 별이 되고 싶어 했지만, 진즉부터 포기하고 있었던 거예요. 선배는 그 자리가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들어온 거고요.” “…….” “어쨌든 테레사는… 한국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다들 알기 때문에, 그가 시력을 잃어도 아니라고 믿고 싶어 하고, 그가 어떤 짓을 해도 학생들은 그를 좋아하는 거예요.” “…….” 테레사! 그가 없어야지 그의 하나하나가 아로 새겨진다. 혜성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한 참 동안 로미오와 시선을 나눴다. 은은한 파장이 밀려와서 두근반 세근반 뛰는 심장의 소리와 잘 섞인다. 혜성의 눈물이 모두 말랐을 때 쯤, 로미오는 혜성이 쭈그려 앉은 것을 흉내 내려는지 똑 같은 자세로 마주 앉았다. 먼 하늘에서 내려 보면 작은 두 점 처럼 보이도록 둘은 조용히 서로를 보았다. “…….” “…….” 이윽고 끝맺음을 하려는지 로미오가 씨 익 웃으며 이마에 올려진 혜성의 팔을 조심스레 내려준다. 그러고 보니 팔이 아팠어. 이마를 왜 가리고 있었던 거지? “선배… 테레사는 그렇게 자신의 자리를 이용할 줄도 알았던 겁니다.” “무슨… 뜻이니.” “선배가 하고 싶으면 하세요. 제 반주의 자리가 사람들의 눈에 반항으로 비쳐진다고 해도, 하고 싶으면 하세요. 제가 그랬잖아요. 아무에게나 권하지 않는다고.” “!” “그새 잊었군요. 희대의 반항아가 되어 보고 싶은 게 저의 소원이라는 걸.” “!” 눈 깜짝 할 사이에 바람처럼 무언가가 혜성의 오른쪽 뺨을 스쳐 지났다. 어린 후배 녀석이 감히 넋을 잃은 혜성의 시선을 무기로 하여 뺨에 키스를 한 것이다. 이번에는 이마가 아닌 자신의 뺨을 양 손으로 막는 혜성이 재미있는지 로미오가 반대편 뺨에 쪽! 하고 입술을 부딪쳤다. 자동적으로 오른뺨을 가렸던 양 팔이 왼 쪽에 밀려왔다. “이제 일어나요.” “…….” 혜성의 양 팔을 쥐고 일으켜 세운 뒤 로미오군은 밤 인사를 하려는지 향기롭게 미소 지었다. 이상한 일이다. 느닷없이 출현해서 반주자가 될 자격을 주겠다며 으스대는 것도 이상하고, 수페리우스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테레사와 수페리우스에 대해 자세히 아는 듯한 여유도 수상하다. 로미오가 머뭇거리며 잘 자라는 글자를 꺼낼 때였다. 파라락! 둘의 주변 나뭇가지에 앉아있던 산새 두 마리가 놀라서 창공에 솟았다. 별안간 출현한 어두운 그림자의 탓이었다. “?” 누가 나타났나- 싶어서 등을 돌리는 혜성의 속도보다 빠르게, 강렬한 무언가가 시선을 치고 지났다. 그리고 상냥하게 혜성과 마주보던 로미오 군이 산짐승처럼 나타난 누구에게 주먹을 맞고 쓰러졌다. 놀란 혜성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서 눈을 비볐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지? “아헉!” “…….” 무방비 상태인 로미오는 까만 무언가에게 정통으로 맞았는지 배를 움켜쥐고 무릎을 꿇었다. 동시에 그의 턱이 돌아갔다. 굉장한 분노를 지닌 것처럼 보이는 까아만 그림자가 상대가 무릎을 꿇기도 전에 발로 찼기 때문이다. 괴한이 나타난 걸까? 공포에 질린 혜성이 뒤늦게야 낯선 이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비명을 질렀다. “정혁아!” wgreene@naver.com 짧아서 (박)지성.... 점점 줄어드는 댓글에 힘이 안나는구려... 오늘은 여기까지 반토막을. ...라기 보다는 어쩐지 지금 음악과 함께 여기까지 올리고 싶은 마음에...^^(그래 사실은 여기까지밖에 수정해놓은게 엄서요. 나머지는 대사하고 장면요약밖웨...) 예고 : 이 장면 지나고 33편 후반? 그정도부터 반아마데우스에 대한것도 나올겁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1. 수페리우스가 흔들린건 가십 때문이 아니라 자기 때문에 로미오가 피해를 입을 까봐 그게 두려워서 였습니다.(가십 때문에 아직도 흔들리는거냐 하시는 분들에게...) 2. 히스 2악장에 많이 나오면 3악장에 재미 없습니다. 3. 포토로그에 테레사 외전 예고편 있으니 클릭해서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밖에 궁금한게 있으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소아님, 별하님, lotus님, 비루향님, 데빌님, 주앙, 튬튬님, Petit님, sup님, 체리키위님, 포근구름님, 체샤님, 연님, kdcom77님, gipbob님, 안젤리스님, 고맙습니다.^^ -꿈에 사우론이 나와서 너무 무서웠던 화이트그린 올림- '샤이여어... 그린스... 샤이여어... 그린스...' -> 이러면서 계속 따라다녔다오. 무서워서 돌아버리는 줄알았다오... 덧글 25개 엮인글 쓰기 /data20/2006/6/22/257/cjmcic_19-wgreene-wgreene.jpg@nhn@188104@nhn@1@nhn@1024@nhn@768/data19/2006/6/22/239/cjmcic_19-wgreene_1-wgreene.jpg@nhn@32368@nhn@1@nhn@480@nhn@257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33-1편 /data20/2006/6/22/257/cjmcic_19-wgreene-wgreene.jpg@nhn@188104@nhn@1@nhn@1024@nhn@768/data19/2006/6/22/239/cjmcic_19-wgreene_1-wgreene.jpg@nhn@32368@nhn@1@nhn@480@nhn@257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33-1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33-2편(반아마데우스) ▼ 다음글 - 2악장 32편(세 사람의 가십)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33-2편(반아마데우스)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6/26 23:00 http://blog.naver.com/wgreene/110005629614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626 33-2편 업데) * 포토로그도 클릭하세요.^^ 경민씨가 메모로그에 올려주신 겁니다. 시험삼아 소개말로 올려봤어요. 고마워요 경민씨.^^ -wgreene- #1. this is Amadeus 그 첫번째 이야기 wrtten by 경민 글로써 탄생하는 레퀴엠이 존재하며 살아 숨쉬는 뮤즈의 혼이있다. 물과 같이 고요하며 격정적인 한글자 한글자 속에서 터져나오는 음표는 언제나와 같이 경이로움과 탄성을 자아내며 심장 가득 벅찬 고동을 듣게 한다. 글에만 존재하는 음악이라니. 누군가가 비웃기 시작했다. 세상에 그러한 것은 존재할 수 없다고 그렇게 말하며 비웃기 시작했다. 허나 여기에 발걸음한 당신이라면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아마데우스에 녹아있는 누군가의 번민과 고뇌가 그리고 살아 숨쉬는 뮤즈들의 열정과 그들의 향연이 매일매일 펼쳐지고 있음을 당신은 분명 안다. 소설 속 허구의 세계는 결코 질서 없이 형성된 세계가 아니다. 필연적 인과관계 속에 존재하는 질서의 세계이며 리얼리티(reality)다. 이 새로운 질서와 조화의 세계속에 실존하는 공간이 바로 아마데우스다. 소설이 소설이 되게하는 허구성과 소설의 허구성으로 인해 더욱 영롱히 빛을 내는 공간, 그곳이 바로 아마데우스다. 이러한 이유로 존재하며 꿈이고 환상이되 우리의 현실이며 온갖 열정과 낭만이 존재하는 아마데우스가 우리의 곁에 다가옴이다. Amadeus 음악 : Last Carnival - Acoustic Cafe (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Last Carnival - Norihi.. “나는 수페리우스 잖아.” 2악장 33-2편 붉은 밤은 역할을 잃었다. 그들은 가려도 좋을 것을 까아만 무기를 치워가며 혜성의 시야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수풀의 밤 역시 역할을 잃었다. 히히 낙락 떠들며 춤을 춰도 상관없을 이파리를 조용히 정지 시켰기 때문이다. 바람조차 스치지 않는 서 쪽 기숙사동의 붉은 잔디 위로 두 사람이 엉켜들어간다. 한없이 잔인한 밤이여, 그대는 먼 하프의 선율을 간절히 기다리지만 까마득한 어두움은 이제 시작인 것을. “정혁아! 정혁아!” 혜성은 부리나케 달려가 정혁의 허리춤을 안았다. 어떻게 그를 안았는지 텅 빈 머리속엔 솔솔한 생각 하나도 없다. 나도 모르게 달려간 걸음이 그를 막았을 뿐이다. 자비로운 내 안의 신이시여, 당신이 정말 계시다면 이 불쌍한 사람을 막아 주소서! 창백해진 혜성의 영혼은 폭발하듯 같은 것을 외쳤다. “왜, 왜 이러는 거니! 제발, 제발!” 그의 움직임은 웃어도 울어도 눈물이라는 것을 혜성은 알고 있었다. 그는 씁쓸한 위로와 향기로운 속삭임마저 눈물이었다. 눈물의 폭력은 잔인하기만 했다. 혜성은 그에게 맞아서 뒹구는 로미오 보다 갑자기 폭력을 휘두르는 정혁이 당황스러워서, 이 와중에도 진저리난 슬픔을 어쩌지 못한다. “!” “정혁아… 정혁아아….” 혜성의 체온이 감싸이자 흠칫 놀란 정혁은 짐승처럼 날뛰던 것을 중단했다. 자신의 등에 뺨을 붙이고 조용히 속삭이는 혜성의 음성 때문인지 그는 천천히 고개를 올리고 뜨거운 숨을 내보냈다. 하늘로 거슬러 오르는 정혁의 수증기가 높은 달마저 어그라뜨렸다. “퉷-” 흠씬 맞아주던 로미오는 재빨리 일어나 지저분한 것들을 털어내며 입가에 고여 있는 붉은 것을 뱉었다. “잊으셨군요.” 혜성의 손이 풀어지려던 때, 정혁은 자신의 허리를 두른 아이의 팔을 움켜쥐고 로미오를 노려보았다. 둘은 어쩐지 서로를 알고 있는 듯 싶었다. 바들바들 떨던 혜성이 둘의 표정을 확인하려고 몸을 빼기 위해 움직였지만 그럴 수록 정혁은 등 뒤의 혜성을 감추듯 잡은 팔에 힘을 줄 따름이다. 덕분에 혜성은 아이처럼 정혁의 등에 달라붙어서 사정없이 뛰어대는 그의 고동소리와 적막한 한기가 서려있는 로미오의 음성을 쥐 죽은듯 경청해야 했다. “정말 잊으셨군요… 우두머리여.” 우두머리? 우두머리? 혜성의 질끈 감겼던 눈이 뜨였다. 우두머리라는 단어는 예전 낙오자의 모임에서 빈번히 들었던 것이다. 벼락을 맞은 기분이 이러할까. 혜성은 통 알 수 없는 로미오라는 녀석의 문장에 넋을 상실할 지경이다. “제가 맷집 좋은 녀석이라는 걸 말입니다. 그-” “꺼져.” “…….” “…두 번 다시….” 신음처럼 내뱉는 음성에 놀란 것은 비단 혜성 뿐 만이 아니었다. 로미오는 짐승처럼 거칠게 나오는 정혁의 음성에 문장을 끊었기 때문이다. 밤이 슬프다. 덜덜 떠는 수페리우스의 가는 팔목을 움켜쥔 채 정혁은 고통스러운 내면이 너무 많지만 세세히 설명해 줄 수 없는 스스로를 탓 하는 자가 되어 읊조렸다. “…나타나지 마라.” “…….” 로미오는 긴 침묵으로 이것도 저것도 아닌 뜻을 보인다. 혜성은 상당한 궁금증에 앞서 윽박지르는 것 보다 냉칼한 그의 어절에 숨도 내쉬지 못했다. 두 번 다시 나타나지 말라는 의미는 바로 혜성에게 얼씬대지 말라는 것을 뜻했다. 이 상황에서 그 이상의 뜻은 없으리라. “저를 굳이 경계하실 필요가 없으실 텐데요… 어차피 일개 가십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잖습니까.” “…….” “…원하신다면.” 정혁의 우직한 언어에 전혀 밀릴 필요가 없지만, 그의 등 뒤에 청초로히 잡혀 있는 혜성을 의식해서인지 로미오는 순순히 그들을 비켜 갔다. 딱 한 번 로미오의 측은한 시선이 혜성에게 미치는 가 싶었지만 아이는 정혁의 등에 안면을 통째로 붙이고 있어서 모른다. “정혁아….” “…….” 혜성의 부름이 등을 타고 올라오자 그는 배 위에 얹은 아이의 손가락에 깍지를 낀다. 말도 못 할 만큼 힘을 주지만 아프지 않다. 무감각한 언어가 지배하는 내내 혜성의 음성은 여지없이 흘러나왔다. “…너… 나한테 이러면 안 돼….” “…….” 느릿느릿 8분의 6박자 왈츠를 추듯이 그에게 속삭이지만 무엇을 말 하는지, 왜 하는지조차 망각한 혜성은 하루 종일의 충격에서 백기를 들었는지 작은 떨림조차 사라졌다. 이제 가시에 찔리듯 아픈 통증에 반응하는 몫은 정혁이다. 그는 혜성의 불투명한 언어가 세어나올수록 미세하게 떨었기 때문이다. “정혁아… 정혁아… 그래도 다치지 마….” “…….” “그리고… 저 애한테 그러지 마… 그러면 안 돼….” 혜성의 손을 조용히 풀어주며 정혁은 쓰라린 언어, 그 심지를 고스란히 내뱉었다. “…싫어….” 이유를 묻자니 너무나 지친 밤이었다. 출현을 따지자니 그가 슬펐다. 둘 중 한 사람을 쫒아가자니 나머지가 가여웠다. 결국 혜성은 을씨년스러운 기숙사동 입구에 홀로 들어서며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달밤이 비명을 지르며 물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수려한 가을답지 않게 장대비가 쏟아졌다. 많은 학생들은 저마다의 색채에 젖어 들어간다. 비나 눈이 오는 날의 학생들은 거의 다 자기만의 음울하고도 센 치한 기분에 도취되기 마련인데 그것을 음표로 나타낸다. 오르페우스 관은 장송곡과 야상곡 범벅이가 되어 하늘의 선물에 화답하기 바쁘다. 절대음감을 지녔다고 으스대는 몇 몇 학생들은 수업 도중에 강의실 문을 박차고 나가 빗소리를 연주하고 싶어 했다. 그 간절한 소망 때문에 수업 도중에 몰래 몰래 오선지를 그리는 학생도 많았다. 아마데우스는 바로 다음 주면 있을 연주회 때문인지 체증을 지나 영혼까지 마비시킨 선율들에 각자의 넋을 기울인다. 그 짜릿한 감각들은 당연한 몫이라고 여겼는지 아직은 값의 소중함을 모른다. 상관없다. 몰라도 좋은 시절이기 때문이다. 혹시 당신은 아는가. 그들이 아름다운 이유는 젊음에의 값을 모르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수려한 무지의 값이 창창히 빛날 때, 그들은 더욱 화려해진다. 신입생 연주회라는 타이틀이 아니더라도 혜성은 이틀 째 방 안에서 나오지를 않고 있었다. 어차피 대지가 젖는 요즘 같은 날, 로제리오는 악기를 교체하지 않을 테니 그 점에 있어서는 다행이었다. 아이는 모르는 게 많았다. 그 중에서도 정혁이 왜 헬리아의 탄생일에 무모한 짓을 벌였는지 정확하게 파고들지 않아서 무지의 층은 깊어져간다. 그래도 아이는 예전과 달라진 게 훨씬 많았다. 내면은 층층이 쌓인 정화제의 중간 부분까지 걸러졌기 때문이다. 이제 노란 머리칼을 지닌 수페리우스는 자신의 이름에 대해 심도 있게 파고들어간다. 가십은 누구든지 오를 수 있지만, 주목 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알았다. 왜 자신이 그토록 미움과 추앙을, 분노와 관심을 받았는지 서서히 깨달았다는 것이다. 장대비는 심장을 두드리듯 아프게 쏟아졌다. 가을 낙엽은 그들의 힘에 못 이겨 자존심 강한 이파리를 떨어뜨렸다. 바닥에 채이는 붉은 이파리들이 젖은 얼굴로 비명을 지른다. “…ng macht den Meister.” 한층 더 어두운 분위기가 맴 도는 가운데, 혜성은 몇 번이나 같은 문장을 속삭였다. 기숙사 밖으로는 많은 양의 물이 샘처럼 고이고 있었다. 푸드득. 푸드득. 그것은 새가 창공을 향해 펄럭이는 날개의 소리와 아주 비슷했다. “ng macht…….” 유리 창을 열고 귀를 기울였다. 뺨을 내밀자 날개의 소리가 뺨에 떨어졌다. 보드라운 뺨이 패이도록 힘 있게 떨어지는 세찬 줄기들. 피부를 알알이 저미는 속도는 무시무시했다. “ng macht den Meister….(연습이 어떤 분야의 전문가를 만든다.)” 일전에 룸펜에서 히스가 알려줬던 중요한 문장을 내뱉자 이번에는 수페리우스의 붉은 입매에 굵은 줄기가 마구 떨어졌다. 아이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숱한 단어들 보다 그 문장을 소중히 여겼다. 연습, 오로지 연습만이 전문가를 능력 있는 샘을 빚는다는 문장은 입으로 뱉을 수록 숭고해져간다. 뒤를 돌아보니 밤마다 복습했던 히스와의 추억이 주변에 널려져 있었다. 독일어의 기본적인 구조와 상황표현까지 세세하게 적어 준 히스 덕분에 혜성은 매일 매일 그와 함께 하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게다가 히스는 룸펜에서 지낸 어느 날 어머니의 사망 소식 때문에 떠나기 직전 자신을 향해 야릇한 어절을 속삭였었다. 의자에서 혜성의 여윈 등을 내려 보며 그는 침몰해가는 배처럼 서서히 식어가는 어절을 읊었었다. 기억해, 기억하고 있어. 너의 음성이 폭우가 내리는 현재 몰아치는 거야. 『 Ich habe ein Kind gesehen. wer haette das gedacht Dass es einmal soweit kommt.(나는 한 소년을 봤다. 그 누가 생각인들 했으랴. 단번에 이 지경까지 오게 될 줄을.) 』 비가 와서 그런 걸까? 아니면, 으스스 한 기숙사 서동의 분위기가 룸펜 다락방과 닮아있어서? 어쨌든 혜성은 히스의 부드럽고도 서정적인 독일어 악센트를 떠올리느라 분주하다. 몸의 상처는 거의 다 나았다.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히스는 어쩌면, 혜성의 어긋난 실력을 눈치 채고 돌려서 부드럽게 독일어를 알려 준 것 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어쨌든 비상한 머리를 지닌 사람이니까. “수페~리우스!” “?” 창 밖에 머리를 내밀고 한 참을 있었던 탓에 젖은 혜성은 우렁찬 소리에 깜짝 놀라며 도어를 향했다. “웁!” “허억!” “?” 문을 열자 정복 가슴에 붉은 띠를 나폴리는 한 학생이 복도에 있었다. 그 애 뒤에는 두어 명이 함께 서서 잔뜩 젖은 혜성을 보고 기가 막힌 소리를 질렀다. 노랗고 창백하게 젖은 수페리우스라니! 그들은 요염하게 탈색된 방랑자를 마주한 것 마냥 억지로 입 꼬리를 올리며 긴장한 표정을 지우려 노력한다. “아, 안녕.” “?” 인사하려고 노크 한 건가? 혜성은 문가에 기댄 채로 눈을 접고 환하게 웃었다. 또 한 번 ‘웁!’ ‘헉!’ 하는 감탄사가 그들께로 빚어진다. 혜성이 왜 그러냐는 듯 어깨를 들썩이자 그들은 급기야 홍시처럼 붉어져서 침을 삼킨다. 왜 저러는 걸까. 수페리우스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붉은 띠를 착용한 학생이 용기 있게 나선다. “우, 우리는 기숙사 서동 대표인데…….” “야! 이름을 먼저 말 해야지!” “아 맞다! 내 이름은… …헉! 이름을 말해야 하나, 아니면 세례명을 말해야 되는 걸까?” “…글쎄. 뭐… 뭘 말해야 하지?” “?” 그들은 혜성이 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흥분했는지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저희들끼리 절망적이라는 듯 신속히 회의를 하면서도 들뜬 것을 감추지 못한다. 마침내 그들은 수페리우스에게 이름을 알려주는 것을 포기하고, 용건을 꺼낸다. “특실과는 달라서 여긴 일주일에 한 번씩 회의가 있거든. 참여하고 싶으면 신입생 환영회 끝나고 밤에 있으니까…와…와, 와와.” “!” “왜 와를 세 번이나 말 해!” “모, 몰라! 가자!” 그렇게 그들은 우당탕 발소리 요란하게 사라졌다. 혜성이 뭐라고 묻기도 전에 긴장한 기색 그대로 저희들끼리 사납게 소리치기만 한 것이다. 어안이 벙벙해진 혜성이 샐쭉이 웃으며 문을 닫았다. 재미있는 애들이 기숙사동에 많다는 생각을 하며……. 혜성은 당장 민우의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섬세하게 밀려오는 은은한 라일락의 향기가 있다. 사실상 그 향기는 없는 것과 다름없었지만 혜성은 이 피아노가 민우의 것 이라는 사실 하나로도 그의 체향을, 라일락을 맡을 수 있었다. 창문을 열어놓은 채로 분위기에 취해 건반을 누른다! 비싼 금 덩어리를 준다 한 들 지금과 바꿀 수는 없다. 혜성은 이 떨림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이 숭고한 전율이 계속되기를 역시 기도했다. 건반에게 잘 부탁한다는 뜻으로 입을 맞추자 경건한 기분마저 들었다. 아이는 피아노의 가장 기본인 하논을 펄럭였다. 날씨와 어울리도록 베토벤의 비창 1악장을 연주하려 했지만, 틀림없이 Allegro di molto e con brio에서 막힐 것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참 이상하게도 그 부분에서는 왼 손과 오른손이 분리 되서 제각각 돌아다니는 기분이다. 가장 기본적인 빠르기 조절마저 이 지경이라니! 얼마 전 비창을 무심코 연주하던 혜성이 느꼈던 상심을 무엇과 비유하랴. 아이는 거칠어진 자신의 손가락을 원망하기 바쁘다. 박자감과 리듬감이 떨어진 상태에서 정확한 음정이 무슨 소용일까. 현재 혜성 스스로가 느끼는 첫 번째 떨어진 테크닉은 왼 손이었다. 오른손잡이라면 누구나 다 그러겠지만 왼 손이 오른손의 빠름을 따라오기엔 턱 없이 부족하다. 오래 전 폐허에서, 오직 아마데우스에 입학하기를 학수고대하며 피가 나도록 연습했던 열정과 비교하자니 지금의 혜성은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그래. 왼 쪽 손목 트레몰로 기술이 상당히 뒤떨어졌다. 그 때와 비교하느니 서둘러 연습으로 메꿔야 한다. 아름다운 곡을 연습하고 싶지만 참아야 돼. 그래. 하논이야말로 오늘의 계절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여기면 되는 거야. 하논 56번과 57번의 왼 손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며 혜성은 방금 전 자신의 방에 찾아온 용감한 삼총사를 떠올렸다. 킥킥 거리는 경박한 웃음소리가 저의 입에서 나온다는 것에 놀랄 정도로 그들의 굳은 표정이 맴돌았다. “어디….” 한 시간 가량 왼 손에 집중공략을 하니 웬만큼 됐다 싶어진 혜성은 쉬어 둔 오른 손을 높이 쳐들었다. 섬섬한 건반에 올리고 호흡을 내쉰다. 57번 하논을 연주하기 직전, 꿀꺽 침이 삼켜지고 동시에 등줄기가 쭈욱 펴졌다. 안 되면 어떡하지? 될 거야. 될 거야. 마음가짐을 바로 하고 우아한 정자세를 잡은 뒤, 혜성은 양 손을 눌렀다. “!” 된다! 이제 된다! 아… 아직은 미스가 너무 많다. 그래도 처음 보다는 낫다. 되고 있어. 그래, 그래. 여기서 손목을 좀 더 느슨하게 한 뒤… 아니지. 손에 힘이 들어가야 손가락이 편하겠는데… 검정 건반의 새끼손가락을 불현듯 노려보며 혜성은 시시각각 변하는 테크닉 체크에 여념이 없다. 기본기는 되어 있다는 사비나 교수의 말 덕분에 사기가 충전되어서 연습에 무리는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붕붕 날아오르듯 한 57번 하논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룬 것을 확인 한 뒤, 혜성은 자신이 정말 연주하고 싶었던 것을 꺼내서 순서 없이 닥치는 대로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통쾌한 스릴이 번쩍 번쩍 천둥마냥 가슴에 빛을 냈다. 지루한 교정 이후의 연주는 마라토너가 승리 점에서 줄을 끊은 뒤 시원하게 들이키는 생수만큼이나 상쾌했다. 그 때였다. 똑. 똑똑. 가볍게 월광을 누르던 혜성이 낮은 선율 덕분에 세세히 전해지는 노크 소리를 동시에 확인한다. 똑똑똑. 노크 소리는 건반에서 손을 떼자 더 정확하게 전해졌다. 혜성은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켰다. 아까의 그 삼총사인가? 못 다한 말이 있어서 돌아온 걸까? “왜…….” 당연히 그들 일 줄 알고 화통하게 문을 열던 혜성이 돌연 경직해서 뒤로 물러난다. 연습에 파고들어야겠다고 이틀 내내 결심하게 한 장본인이 나타나서였다. “…….” “정혁아….” 휘이이이잉- 문을 열어서 맞바람에 부닥기는 바닥의 오선지들이 음표처럼 공간을 날아다녔다. 혜성은 조용히 그를 안으로 들였다. 맵시 있는 예식 복을 입고 나타난 정혁은 천천히 혜성의 방을 둘러보더니 다시 나가려고 한다. 깜짝 놀란 혜성이 그의 팔을 붙잡는다. “왜?” “…….” “왜 들어오자마자 다시 나가?” “…….” “할 말이 있지, 그렇지? 정혁아. 그렇지?” 정혁은 3일 전 로미오에게 함부로 대했던 것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온 것일 수도 있고, 또 아닐 지도 모른다. 헬리아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기 위해 온 것일 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혜성은 그가 자신의 방에 들어오는 즉시 다시 나가는 게 안타까웠다. 혜성의 손을 조용히 뺀 뒤, 그는 도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벽면 전체로 정혁의 음성이 뻗어 나간다. “헬리아는….” “…….”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 때 너만 생각하고 있었어.” “…….” 그리고 한 참 동안 침묵한다. 아마도 방금 전의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나 보다. 정혁은 긴 숨을 내쉬며 어쩐지 딱딱한 교정본을 읽는 것처럼 도어를 향해 다시 말했다. 그렇게 갑작스럽기만 한 언어를 남김없이 꺼낸다. “나의 부모님께서는 항상 이렇게 가르쳐 주셨지… 노력하고 배우면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얻을 수 있다고… 아마데우스에 입학하기 전 까지, 난 두려울 게 없었어.” “!” 눈물이 말을 한다. 혜성은 그가 말하는 내용보다 그가 빠른 속도로 내뱉는 어절이 나타내는 진실에 가슴이 에인다. 휘몰아치는 젊음이여, 보석보다 아름다운 진실은 훗날 늙어서야 알지라도. 그러 할지라도. “재혁이형은 내가 먼저 태어났어야 한다고 했지. 하지만 아마데우스는 너무 자유롭기만 했어. 나태한 자에게는 천국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규칙과 노력과 정석에 익숙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 정혁아. 정혁아. “…….” “…….” 그래… 정혁아. “특히나 테레사를 봤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설명 할 수 없지.” “…….” “…그래도 언젠가는 테레사를 극복 할 수 있을 거야.” “…….” “나는 노력하고 있으니까.” “…….” 너의 노력을 그 누가 모를까. 혜성은 그의 넓은 등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에인 와중에도 떨어지는 몹쓸 눈물이 있다. 그가 왜 이런 말을 자신의 앞에서 하는지, 이런 식으로 딱딱하고 빠르게 하는지 알기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나는 그림자니까.” “…….” 정혁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붉어진 눈매와 마주치는 즉시 쓰라린 통증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까봐 혜성은 자신의 입을 가렸다. 흔들리는 눈매에 총총히 새겨진 눈물의 씨앗이 보였다. 자신에게 말을 하기 위해 고민했던 흔적이 방금 전에 모두 보였다. 두 사람은 맞바람이 세차게 부는 중간에서 하염없이 서로를 보았다. 뜨거운 전류가 비에 젖어 스파크를 일었다. “하지만… 너를 보면, 부모님의 가르침은 거짓이라고 느껴져서 나는 괴로워, 마드모아젤….” “!” “너는 배우고 노력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잖아….” “정혁아….” “나는 힘들어….” 그는 헬리아를 넘어 서서 자신의 존재 가치와 슬픔의 전부를 고백하는 것이다. 이렇듯 갑작스럽게 과정이란 없이 결과를 꺼낸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다. “너의 손가락, 너의 음악, 너의 영혼. 너에게 미쳐서 나는 힘들어….” “정혁아….” “…지금 이 말을 하기 위해… 종이에 적고… 외워서 내뱉을 정도로…….” “!” 텅 빈 머리는 생각의 전달을 차단했다. 혜성은 그의 움직임만 좆을 뿐 아무런 대답을 꺼내지 못했다. 그는 지금의 갑작스런 문장을 위해 종이에 적고 외운 뒤 차례대로 꺼낸 것이다! 놀란 혜성을 대신하여 정혁이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는 창가에 저벅저벅 걸어간다. 그는 혜성의 몸을 때리는 빗줄기를 막아 주듯 창가에 섰다. 긴 그림자가 밀려와 혜성의 전신을 차지한다. 비도 바람도 그가 막아주니 혜성은 그림자 속에서 일순 따스해진다. “…….” “…….” 그림자라는 벽을 만든 사내가 여기 있다. 지난 날 연못에서 정복 상의로 햇살을 가려줬던 정혁이 스쳐 지난다. 그 때와 다르지 않다. 그는 자신을 움직여서 혜성을 감싸듯이 긴 그림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럴 듯 하지… 않나…?” “뭐….” 정혁이 처음으로 미소 지을 무렵, 혜성 역시 긴장감이 풀렸는지 실룩실룩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고 문장을 적어서 외운 뒤 찾아 올 줄이야!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려고 이렇게? “잘 외웠다고 생각하는데….” “뭐…뭐…? 하하하하하- 정혁아… 정혁아… 하하하하.” “…….” 어쩌면 너를 영영 미워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지도 몰라. 나는 그게 두려워. 반 아마데우스 정혁이 다녀간 다음날이 되자, 선명한 햇살이 아마데우스 전역에 파다하게 퍼졌다. 진초록 풀잎에 고여 있던 아름드리 물기가 증발하고, 너 나 할 것 없이 학생들은 바삐 움직인다. 하늘거리는 레이스 장식이 없어도 그들의 예식 복은 멋이 돋보였다. 동완이와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에 대해 골똘히 고민하던 혜성은 착찹 하지만 방법이 없다는 쪽에 정착했다. 정말 방법이 없다. 가십은 이미 퍼져서 많은 학생들이 혜성을 노골적으로 응시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선은 혜성의 곁에 로미오가 함께 서 있는 것처럼 날카롭고 잔인했다. 하지만 혜성은 그들의 시선에 안타깝기만 할 뿐 그 이상 가는 절망은 아직 없었다. 동완이에 대한 고민을 지나, 이번에는 로미오를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방향을 돌려보았다. 그것 마저도 방법이 없었다. 만남은 이루어지기 전 까지 숱한 생각을 만들지만 그것은 생각일 뿐이다. 접촉 없는 상상은 없어도 될 것 까지 망측하게 생성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이의 발걸음이 동완에게 향하려다가 로제리오 교수에게로, 로제리오 교수의 집무실 앞에서는 또 마음을 바꿔 로미오를 만나기로 한다. 정혁이와 만났을 때 로미오에 대한 이야기를 차마 묻지 못했기 때문에 아이는 자기 스스로 알아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만남은 상상이 빚어지기도 전에 뚜렷이 모습을 발한다. 혜성은 아마데우스 동산 입구에 발을 디디는 동시에 저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 그저 초원의 푸릇한 분위기에 도취되어 딱 한 번 몸을 돌렸을 뿐인데, 신의 선물처럼 만남이 닥친 것이다. 혜성은 계속 눈을 비비며 석고상처럼 서 있는 높은 이를 확인했다. 동산 위의 불긋한 지역에 서서 바람을 지휘하듯, 다가올 노을을 기다리듯 늘씬하고도 키가 큰 누군가가 홀로 서 있기 때문이다. 로미오였다. 그는 노을이 없어도 스스로를 붉게 물들이는 듯 한 착각을 준다. 혜성은 몽롱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천천히 언덕에 올랐다. 풀과 바람을 헤치고 중반부에 올랐을 때, 로미오는 혜성을 진즉부터 살펴 봤다는 듯 손을 내밀어 준다. “…….” “잘 올라오네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혜성이 희미하게 웃었다. 혜성은 로미오 보다는 미카엘 선배를 먼저 만나는 게 순서에 맞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그 생각을 없앴다. 순서란 없다. 그래서 생각은 때론 불필요하다. 만남이 이루어지는 대로 그게 순서가 된다. “그 때… 정혁이한테 맞고 다치진 않았니?” “다쳤어요.” “…….” “그리고 다 낫어요.” 역시 로제리오 교수님을 뵙고 선호 선배를 만났어야 하는데. 가볍게 응수하는 로미오가 하얗게 웃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혜성이 다짜고짜 본론을 꺼낸다. “넌 모르는게 없는 사람 같다.” “그래요?” “정혁이랑 어떻게 알고 있니.” “그러게요.” “……?” 시원하게 휘날리는 바람을 전혀 막아주지 않는 로미오는 노랗게 나부끼는 혜성의 머리칼을 재미있다는 듯 내려보았다. 씨익 웃는 개구진 미소가 문득 낯설었다. 혜성은 표정을 굳혔다. 아이는 본격적으로 따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두머리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내뱉었던 로미오가 기억 속에 생생했기 때문이다. 그런 혜성의 전부를 알고도 남는다는 듯, 로미오는 혜성이 아닌 창공을 올려다보며 푸릇한 어절을 흘린다. “선배….” “……?” 왜 네 쪽으로 웅장한 바람이 한 무더기일까? “희대의 반항아 …… 왜 희대의 라는 말이 붙을까요.” 뭐라고? 혜성은 의외의 것을 물어오는 로미오군 덕분에 또다시 말 할 기회를 놓쳤다. 희대의? 글쎄 그 단어가 뜻하는 진실은 무엇일까? 그는 날렵한 턱을 내리더니 어서 대답하라는 듯 혜성을 응시했다. “……글쎄. 로미오군. 너는 왜 그런 것 같니?”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내뱉는 달 풀 같은 음성이 있다. “그건 반항하는 자가 스스로는 반항 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 “반항아가 사라지는 날,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기억하는 겁니다.” “어…떻게?” 낙오자의 모임, 혹은 문정혁. 그 외의 모든 질문은 상실한 채 수페리우스의 눈동자가 초롱해진다. 로미오는 혜성의 코 앞까지 다가와서 친절한 검지 손가락으로 아이의 가슴팍을 톡톡 눌렀다. 낯설 정도로 진지한 음성과 표정이 한 데 섞여 가슴에 꿰어든다. “개혁자… 라고요.” “!” 희대의 반항아는 무엇일까요. 그건 반항하는 자가 반항 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뜻이지요. 반항아가 사라지는 날, 사람들은 다시 기억하게 됩니다. 개혁자라고요. 둘은 한 참 동안 서로를 응시한 채 가만히 정지했다. 혜성은 문득 눈앞의 신입생이 커다란 물음표와 겹쳐졌다. 그 만큼 아는 것이 많아 보이기에 함부로 터치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가십에 흔들리지 않는 신입생이라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신을 쥐고 흔드는 듯한 이 신입생이 괘씸해진다. 혜성은 로미오의 손을 치우며 꽥 소리쳤다. “너… 이 녀석! 내가… 반항아라는 거야?” “후훗.” 그런 선배가 귀여운지 로미오는 눈 꼬리를 휘어가며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럼, 희대의 반항아가 되고 싶다는 너는, 스스로가 반항적이라는 걸 인정하니까 반항아는 아니겠네?” “슬프지만, 예스.” “?” “그래서 동경하기만 하잖습니까. 진정한 개혁자가 될 누군가를.” “…….” 너를 모르겠어. 너는 예전의 민우보다 더 어려워. 내 가슴을 누르며 개혁자라고 모를 소리를 하고, 이제는 동경한다며 슬프게 웃어. 나는 알 수가 없어. 너는 누구니. 너는 정말 누구니. 이름조차 감추며 접근하다니, 너는 누구일까. “알고 보니까 순진하고 귀여워서 다른 매력에 빠지기도 하지만… …선배? 왜 그래요, 선배?” “나를…….” “…?” 네가 누군들 무슨 소용일까. 만약 너도 그러하다면, 아픔이고 슬픔을 담보로 맺은 인연일텐데. 진지하게 미소 짓는 로미오를 보면 볼수록 혜성은 허탈함을 감추지 못한다. 예전 같았으면 즐겁게 떠들고 말았을 일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수페리우스의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릴 때 흐릿해진 눈망울에 물기가 서린다. 이에 놀란 로미오가 왜 그러냐는 듯 수페리우스의 안면에 제 표정을 바짝 들이댔지만 그럴수록 흐린 표정은 탁해져간다. “나를….” “선배, 괜찮아요? 왜 그래요. 왜 그래요.” 네가 누군들 무슨 소용일까. “나를 좋아하지마.” “선…….” 만약 너도 그러하다면 정혁이 처럼 히스처럼, “나를 존경하지 마.” “…….” 테레사 못지 않은 아픔이고, “그럼… 슬퍼 질 거야… 다들… 슬퍼지더라고….” “…….” 민우처럼 슬픔을 담보로 맺은 인연일텐데. 그러나 짙은 슬픔에 젖어있는 것은 혜성 혼자였다. 흔들리는 동공 역시 혜성 혼자였다. 수페리우스의 어깨가 문득 무거워진다. 아이는 조용히 자신의 어깨에 올려진 늘씬하고도 단단한 팔을 낯설게 응시한다. “선배, 그거 알아요?” “…?” 한 박자 경쾌해진 로미오군의 팔 이었다. 그는 언제부터인지 혜성의 양 쪽 어깨를 가볍게 쥐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입을 맞추게 될 연인처럼 가깝게 응시하는 시선이 있다. 장난인지, 혹은 진심인지 도통 알 수 없는 인연의 바람이 세차게 분다. “그런 말 들으면 정말 좋아하고 싶어지는 거. 건드려 보고 싶어지는 거.” “…건방지구나. 신입생은.” “울리고 싶어지는 거….” 언덕은 한결같지만 시간과 낭만과 만남은 늘 다르듯, 지금 이 순간 인연의 바람이 가장 세게 불고 있다. “그만 해라, 정도를 벗어나는 것은 추태에 지나지 않아.” “선배야말로 희대의 반항아를 만만하게 보시면 큰 일 날 텐데요.” “…….” “확.” “…확?” “잡아 먹힐거에요.” “그으래?” “네.” 로미오가 누구인지 아직은 모른다. 다만 그가 가십에 휘둘리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잘 알겠다. 또 민우 못지않게 무언가를 가슴에 품은 인물이라는 게 느껴진다. 예전에는 필시 몰랐겠지만, 몇 차례 만남과 이별을 겪고 나니 그런 게 읽혀져. 언덕의 중반부분까지 홀로 내려가던 혜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서서히 찾아온 저녁노을 앞에 용맹한 장군처럼 서 있는 자가 있었다. 혜성은 로미오를 향해 심드렁한 투를 내뱉었다. “…잡아먹어 그럼.” “!” 뾰족한 어투라지만 아이의 입 꼬리는 부드럽게 올라가고 있었다. “잡히진 않겠지만.” “!” “어쨌든 경고 했으니 로미오는 큰 바위 얼굴 줄리엣을 넘보지 말도록.” “!” 가볍게 등을 돌리고 내려가는 내내 벙쪄 있던 로미오군의 웃음 소리가 등을 찔려왔다. 하하하하! 선배! 언젠가 사랑하게 될까봐 겁이 납니다! 박장대소 하는 소리가 차차 작아질 때 까지 어쩐지 로미오는 움직이지 않는 듯 싶었다. 이로서 두 사람은 무언의 합의를 본 것이다. 화해가 아닌 화해와 타협 아닌 타협으로서 신입생 연주회를 맞출 것임을. 동완을 찾는 방법은 생각보다 쉬웠다. 혜성은 동완의 연습실이 아닌, 선호 선배의 연습실을 찾았다. 예상대로 오르페우스 관에서 저녁 시간이면 연습실에 틀어박혀 있는 선호 선배가 혜성을 맞아 주었다. 그 옆의 동완이 유유히 들어오는 혜성에게 놀랐는지 경직되어 있었다. 혜성은 동완에 앞서 선호에게 진지하게 죄송하다는 말을 건넸다. 자기 때문에 가십에 오르내리게 되서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인사가 무르익자 저 쪽 모르는 척 창 밖을 응시하던 동완이 천천히 몸을 돌린다. “미안해 할 것 없어 수페리우스. 나는 괜찮다.” “…….” 자상하게 위로 까지 덧붙이려는 미카엘 선배의 태도에 화가 났는지 동완이 대뜸 나선다. “선배는 왜 수페리우스 한 테만 무르게 대하세요! …저한테는… 저한테는….” “너한테는 뭐.” “!” 미카엘 선배의 차가운 태도에 주눅 들었는지 동완이 혜성을 야속하다는 듯 응시한다. “로제리오 교수님이 폐기 처분한다는 오르페우스관의 악기들… 그 누구도 반발을 못 하고 있어.” “동완아!” “동완아… 뭐…?” 혜성의 의아해 하는 표정 못지않게 놀란 선호가 콧김을 크게 내뿜는 동완을 막아섰다. 갑자기 무슨 짓이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동완은 그 대로 화가 나서 본론부터 꺼내는 것이리라. “나는 너의 친구지만, 너처럼 정의로운 일에 끼어들지는 않는다. 애석한 일이지.” “동완아! 너 진짜!” “선배는 만날 왜 저한테만 뭐라고 그래요!” “김동완!” “선배도 인정 했잖아요! 혜성이가 나서면 이 점을 해결할 수 있지 않나? 이랬잖아요!” “혜성아! 나는 괜찮다. 고작 해야 가십 아니니? 나는 아마데우스에 입학 하기 전에는 돈이 없다는 이유로 더 한 것도 당해 봤다, 괜찮아. 그리고 방금 동완이가 말 한 것도 별것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라.” “…….” 쩡 얼어붙은 마음 위로 한 가닥 비가 내린다. 혜성의 내면은 홍수를 일으키고 있었다. 물론 로제리오 교수님은 곧 찾아가서 항의하겠다고 여겼지만 그에 앞서 선호 선배의 괜찮다는 소리가 마음 아팠기 때문이다. 더 심한 걸 당해 봤기 때문에, 가난 덕분에? 그래서 그보다 덜 한 통증은 묵과 할 수 있다며 나를 위로하다니! 그 문장 조차 지린 고통인 것을! 한 사람이 겨우 얻기도 힘들다는 가십에 얼토당토 않은 내용으로 올랐는데, 그래도 괜찮다며 위로하시다니! 모세… 모세! 너를 정말 이해 할 수 없다. 혜성은 자신이 사랑하는 두 사람이 저렇게 윽박지르게 된 이유가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괴롭고 미안했다. 게다가 선호 선배는 자신의 문제 보다는 오르페우스 관에서 사라질 악기를 걱정하고 있지 않던가. 로미오 보다 선호 선배를 먼저 찾아왔어야 한다는 후회가 물 밀 듯 밀려왔다. 그러나 후회가 길어져서는 안 된다. 늦었다고 여겼을 때가 가장 빠른 때 임을 아이는 겪어봐서 잘 알지 않던가. 아둥바둥 다투고 있는 동완과 선호 선배의 가운데에 서서 혜성은 단호한 투를 내리꽂기로 한다. 신입생 환영회가 코앞이니 만큼 로제리오 교수는 혜성의 말조차도 대강 들을 것이 분명하다. 숱한 난관을 겪어서인지 고난에서도 순서가 매겨진다. 수페리우스는 둘의 어깨를 강하게 쥐고 단호한 투를 꺼냈다. “그렇다면!” “?” “?” 한 참 싸우던 둘이 동시에 혜성을 응시한다. 아이는 씨익 웃으며 둘을 번갈아 보았다. “제가 제 이름을 걸고 로제리오 교수님께 건의 해 보겠습니다.” “뭐라고?” “…….” 그제 서야 조용해지는 동완에 반해 하얗게 질린 미카엘 선배는 볼썽 사나울 정도로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스런 투를 내뱉는다. “소용 없다, 수페리우스. 예전 낙오자의 모임 회원이었던 학생들이 도전해 봤지만 먹히지를 않아.” 그는 뭐라고 한 차례 더 심한 말을 덧붙이려 했지만 혜성은 도리어 환하게 웃으며 그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저는 수페리우스 잖아요.” “뭐….” 석회처럼 굳어있던 동완의 눈동자에 실오라기 빛이 반짝인다. 축 늘어져 있던 선호 선배의 어깨에 활력이 심어진다. 네 자리를 네가 알아야 할 것 아니냐며 윽박질렀던 동완이 아니던가. 그는 비로소 자신의 친구를 제대로 응시해 준다. 나는 수페리우스잖아. 실력의 여부를 떠나서 그 이름 하나로도 가십에 오르는 사람이잖아. 가십은 힘을 상징하잖아. 가십은 관심의 상징이잖아. 나는 그러고 보니 수페리우스잖아. “저도 자주 잊었지만, 선배님. 동완아. 나는 수페리우스잖아.” “!” “…….” 화해의 과정 따위는 필요 없다. 자신의 변화에 따라서 그 과정은 자연스레 매듭 질 테니. “신입생 연주회가 끝나는 즉시, 나는 온 몸으로 영혼으로 막을게, 막겠습니다.” “수페리우스!” “그럼, 전 이만 연주회 연습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물러나겠습니다, 갈게!” “신혜성!”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잠깐만!” 결정을 했으니 더 이상의 왈가왈부는 필요 없다며, 혜성은 날아갈 듯 오르페우스 관 밖으로 나갔다. 그를 부르는 동완의 애절한 소리와 미카엘 선배의 희망찬 언어가 쩌렁쩌렁 울렸다. 아마데우스 전역에 달빛이 비춰질 때, 자신의 기숙사로 향하는 수페리우스의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 무겁고도 가벼웠다. wgreene@naver.com 댓글 고맙습니다. 반아마데우스와 신입생 연주회편은 이제 시작이기 때문에 제목만 띡 나온겁니다.^^(물어보실까봐..) 아마 다음편 혹은 다다음편쯤 콰과광! 하는 배경음악 깔릴 거에요. 지금의 여유를 우리같이 즐깁시다.^^ lotus님, 튭튭튭님, 기린님, 쥬노님, 군림님, 반님, 몬타나님, 별하님, fan님, 안젤리스님, 녹존성군님, 체샤님, 슬픈웃음님, 소아님, 체리키위님, 자자님, 포근구름님, 주황, 별표씨, 연님, lotus님, 점네게님, kdcom77님, 영님, 그리고 유령님들, 고맙습니다. 행복하세요.^^ 음.. 재미는 있는 거죠? 그렇죠?; -그린- ps. 전 이번편 적는 내내 열 곡 넘게 들어서 배경음악 선정 못했습니다. 각자 좋아하는거 들으시면 돼요.^^ 덧글 11개 엮인글 쓰기 /data18/2006/6/26/123/ptmddus_103-wgreene_1-wgreene.jpg@nhn@90300@nhn@1@nhn@548@nhn@410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33-2편(반아마데우스) /data18/2006/6/26/123/ptmddus_103-wgreene_1-wgreene.jpg@nhn@90300@nhn@1@nhn@548@nhn@410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33-2편(반아마데우스)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34편 ▼ 다음글 - 2악장 33-1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34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6/27 18:40 http://blog.naver.com/wgreene/110005660769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627 34편 업데) * 포토로그도 클릭하세요.^^ Amadeus 음악 : Jim Brickman- Hear me (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Hear Me (Tears Into Wi.. Take these tears, put em in a bottle. Don’t let these tears I cry be in vain. Take these tears, keep them up in heaven. Water my life with tears like rain Hear me, hear my words unspoken, Restore my faith in hopin’ Hear me, I am feeling broken I am broken open. Take this life, turn it into something, I’m afraid it’s just wasting time. Turn this life the sun has ripened, grow it slowly on the vine. Turn my tears into wine Turn my tears into wine, turn these tears into wine All that’s left of me are traces. Make me stronger in my broken places. - Hear me 中 - 내 말을 들어 주세요. 난 아픔을 느끼고 있어요. 난 상처 받았어요. 이 삶을 가져가서 다른 것으로 바꿔 놔 주세요. 그저 삶을 낭비하는 것이 두려워요. 이 삶을 무르익은 태양처럼 바꿔주고 덩굴 위에 천천히 자라게 해 줘요. 내 부서진 공간들 상처 안에서도 날 더 강건하게 만들 수 있도록…. 2악장 34편 사랑은 아프다. 그러나 더 아픈 것은 청춘의 빛이다. 시간의 낭비는 그들에겐 죄악이었다. 그 점을 본능으로 알았던 걸까! 신입생 연주회가 이틀 전으로 다가올 때 즈음 동완과 혜성은 전보다 친해졌기 때문이다. 격정은 더 큰 격정 뒤의 평화를 그들에게 선물한다. 신은 언제나 믿음을 지닌 그들 편이었다. 더 구체적으로 파고들어 보면, 화해 하기까지 혜성에게 큰 소리를 친 동완을 미카엘 선배가 가만 뒀을 리가 없어서였다. 어쨌든 그들은 파란 사과를 나누었고 두 손 잡아 화해했다. 오늘 혜성은 다른 날보다 낭만적인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새벽녘 기숙사 창을 두드린 정혁이 이슬을 머금고 있는 장미 꽃 한 송이를 선물로 줬기 때문이다. 라일락 향이 즐비한 민우의 기숙사방은 이제 장미의 붉은 향이 맴돌았다. “장미꽃이 좋아?” 분수대를 지나는 길에 신이 나서 자랑하는 혜성을 유심히 살펴보던 동완이 시큰둥하게 물었다. “선물을 받았다는 게 중요한 거지.” “아니지, 수페리우스양. 선물을 주고 받는 것에 쾌락을 느끼는 자가 있는 가 하면, 그렇지 않는 유형도 반드시 있지.” “킥킥킥.” “왜 그러지, 수페리우스양?” 샐쭉해진 동완이 일부러 수페리우스양? 하면서 장미꽃 하나로 좋아하는 혜성을 흘겨 본다. 저 혼자 키들키들 웃던 혜성은 학생 식당 입구에 들어서며 축 늘어져 있는 친구의 등을 퍽- 쳤다. “힘 내, 동완 양. 미카엘 선배도 언젠가는 너의 선물을 받아 줄 거야.” “!” “그럼 난 이만 음식을 받으러…….” “동완양? 동완양! 동완 양!” “하하하하-” 졸지에 아가씨가 된 두 사람은 가볍게 주먹질을 하며 쾌활한 박자와 함께 학생 식당에 들어섰다. 솨아- 빛이 몰려오듯 노란 머리칼의 수페리우스가 들어서자 학생 식당은 떠들썩해진다. 몇 명 무리들은 여전히 혜성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좋아했다가 싫어졌다는 표현이 맞았다. 청춘의 시절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변하는 법이다. 그들은 모세의 가십 때문에 샘이 나서 혜성을 고깝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직은 혜성의 편이 더 많았다. 모세의 가십이 상당히 주관적인 면이 많다는 것을 대다수의 상급생들은 경험해 봐서 알기 때문이다. “어…. 선배…….” “식사 하러 왔니? 나는 나가는 길이야. 그럼.” “네…….” 우아한 아치형의 계단 장식이 시선을 사로잡는 지역에서 밥을 먹기로 한 동완과 혜성은 막 나가는 선호 선배를 아쉽게 쳐다보았다. 차갑고 무뚝뚝하게 인사만 하는 선호 선배 때문에 동완은 애가 닳는 모양이었다. 한 번 더 ‘동완양?’ 이라고 부르던 혜성이 괜스레 그의 화를 돋구어서 식판에 있던 방울토마토로 이마를 맞았다. “으씨.” “아깝게 먹을 걸 던지니?” “선배는 항상 저런 식이야. 나랑 단 둘이 있으면 거의 다정한데….” “거의?” “거의….…가끔… 때론….” “…….” 구구장창 선호 선배에 대해 열을 올리는 동완을 뒤로 하고 혜성은 수저를 들었다. 가끔씩은 선호 선배의 동생 이야기도 해 주지만, 이렇듯 선배와 직접 마주치고 난 직후의 동완이는 자기 사랑에 빠져 홍수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한 때는 도망가겠다고 선언한 동완과 지금의 동완이 같은 사람이 맞는지 조사해 봐야 할 정도로 그는 변했다. 선호 선배가 오르페우스 관의 악기를 걱정할 때 동완이 훨씬 열을 올리는 것 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변화가 아닌가. “히히히히히.” “?” “하하하하!” “동완양?” 학생 식당에서 수프를 국물처럼 들이키던 동완이 느닷없이 깔깔대며 웃기 시작한다. 막 들어와서 반대편 테이블에 앉은 모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서였다. 동완의 맞은편에서 방울 토마토 두 개를 테이블 위에 올린 뒤 동글동글 굴리던 혜성이 깜짝 놀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험악해진 모세를 발견했는지 저도 모르게 방울 토마토를 툭 쳐서 땅에 떨어뜨린다. “왜 웃어?” “큭큭큭큭큭큭큭.” “김동완!” “어? …큭큭큭큭큭.” 괴상하게 웃는 동완이 궁금해진 혜성이 위협하듯 낮은 소리로 물었다. 희번뜩 노려보는 모세의 시선이 찔릴듯 아팠지만 호기심이 먼저였다. 동완은 식판을 들고 일어나며 기어이 배를 쥐고 크게 웃었다. “으하하하하!” “?” 심리학을 공부하다가 미쳐 버린건가! 혜성은 동완의 식판을 대신 치워 준 뒤, 재빨리 그를 이끌고 상쾌한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렇잖아도 지나다니는 족족 자신들을 주목하는 시선에 골치가 아플 지경인데 이 애는 답지 않게 계속 웃기 때문이다. 모세의 칼 같은 시선이 쭉 느껴지자 식은땀이 난 혜성은 가을 바람 만연히 동산에 올랐다. 혜성이 가는 길을 따라오면서도 키들키들 웃기 바쁜 동완이 주변을 휙휙 둘러보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오색 찬란한 아마데우스 동산의 중간 부분에서는 드높은 햇살이 온누리에 뿌려지는 모양이 모두 보였다. 콸콸콸 솟구치는 분수대의 물은 햇빛과 키스 하는 동시에 환상적인 색채를 뽐내고 있었다. 여 학우가 달아나고 있고, 그녀를 쫒아가며 뭐라고 애원하는 남 학우도 보였다. 그러다가 악보를 중얼중얼 읽으며 걸어오던 모범생에게 부딪혀서 대판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길 곳곳에 일부러 쓰레기를 떨어뜨린 학생들을 지적하며 쓴 소리를 내뱉는 정원사 아저씨들도 눈에 띄었다. 그들은 상기된 얼굴로 다음날이면 성대하게 열릴 연주회에 집중하고 있었다. 단 하나의 공통점이 그들에게 묶여서 아마데우스는 그 어느때보다 찬란하게 빛을 발한다. “흐히히히히히.” “…….” 그러나 이 와중에도 언덕을 구르며 웃는 동완양이 있었다. 혜성은 풀밭을 구르던 동완의 옆구리를 발로 찼다. ‘억!’ 소리내며 자신의 옆구리를 쥐고 오두방정을 떨던 동완이 몸을 날리며 덤벼왔다. 우당탕! 가벼운 주먹질이 오고간 뒤, 두 사람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언덕에 나란히 앉았다. 시원한 가을의 바람이 진하게 밀려와 둘의 이마에 맺힌 땀을 얼려 주었다. “왜 자꾸 웃었어?” “모세를 보니까 웃겨서.” “왜?” 겨우 웃음을 멈춘 동완이거늘, 그는 또 다시 볼을 부풀리며 거한 박자를 터뜨릴 기세다. 짜증이 난 혜성이 동완을 툭툭 치며 재촉했다. “왜? 왜? 왜? 왜?” “미카엘 선배한테 들은건데… 아… 비밀 지키라고 했는데….” “그럼 말 하지 마.” 우리의 우정이 이 정도였냐는 둥 서운하다는 투를 내뱉으며 마침내 혜성이 등을 돌려 앉자 동완이 느물느물 다가왔다. “…사람을 잘 파악하는구나 신혜성?” “?” “하지 말라는 것에 없던 집착을 내보이게 되는 인간의 본능.” “…?” “선호 선배가 너의 반 만큼만 닮아도 나의 식욕이 돌아올텐데.” “…….” 방금 전 학생 식당에서 밥을 두그릇이나 해치운 동완에게 뭐라고 한 마디 잔소리 하려던 혜성이 입을 다물었다. 이야기가 샐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저 혼자서 풀잔디를 뒹굴거리며 모처럼 쾌활해졌던 동완이 지저분한 자푸라기를 떼어내며 다가왔다. 그동안 잔디에 엎드려서 아래쪽을 응시하던 혜성이 고개를 빼들었다. 그는 궁금해 하는 자신의 친구에게 거대한 비밀을 폭로하듯 즐겁고도 단호하게 속삭인다. “모세한테 최근에 우편물이 도착했대. 독일 쪽에 기가 막힌 가십이 붙여졌다는 거지.” “어떤 거? 왜 모세한테 따로 배달이 됐지?” “내용 때문이지.” “내용?” 이 즈음에서 동완은 한 번 더 웃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하지? 하며 혼잣말까지 했다. “독일 가십 기자에게, 히스가 명령했었나봐. 아니, 협박에 가까웠대. 너의 헬리아와, 그걸 비꼬는 모세의 가십 소식까지 다 듣고 나서의 일인데… 어쨌든 히스의 협박에 가까운 처사에 그만, 가여운 독일의 가십 기자는 그가 시키는대로 뭔가를 올린 거지.” “어떤 걸?”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라는 것에 침착해진 혜성이 바르게 앉아서 물었다. 동완이 맞은편에 앉더니 키득키득 웃으며 말을 잇는다. “가십은 단 한 줄 이었다더라.” “?” “그래서 나도 외웠는데….” “뭔데? 뭔데?” “큭큭큭큭.” “김동완!” “나는 이로서 히스클리프 폰 뤠겐부르크를 다시 보게 됐어.” “?” 눈이 빛나기 전에 가슴에서 빛이 난다. 무엇이 먼저인지 중요치 않다. 젊음은 그런 것이다. “수페리우스를 괴롭히면, 백마탄 왕자가 칼을 뽑고 달려가겠노라.” “!” 히스! 상냥한 목소리로 혜성을 안아주던 잔잔함이 머리 꼭대기에 꽂혔다. 전신을 사로잡는다. 동완의 모양이 순간 히스로 보였다. 당장 보이는 칼이 없어서 룸펜의 식칼을 뽑아 들고 앞치마를 두른 채 당당하게 외치는 히스가 그려졌다. 오 하느님. 그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딸랑 그 한 줄이 가십의 전부였대.” “!” “웃기지.” “하하하하하!” 히스, 히스. 너는 멀리 있지만 오히려 가까이에 나와 있구나. 이제 목청 높여 웃는 사람은 혜성으로 바뀌었다. 동완이 지루해 할 정도로 혜성은 배를 쥐고 히스를 떠올리며 웃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눈물을 흘려가며 기침을 쏟아낼 때가 되어서야 겨우 웃음을 멈춘 혜성이 거칠어진 호흡을 내쉰다. 상냥한 바람이 둘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아름다운 가을날, 시계탑의 초침은 하염없이 흐르는데, 둘의 낭만은 사그러들지 않는다. “참, 혜성아. 이것도 소문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는데…….” “?” 또 어떤 재미있는 소식을 전하려고? 눈을 반짝이며 안면을 들이대는 혜성의 태도에 씁쓸한 미소를 짓던 동완이 괜스레 바닥의 풀을 짓이긴다. “반아마데우스 단체의 대표가 너를 감시하려고 아마데우스에 입학했대. 뭐… 소문이지. 어떻게 그게 가능하겠어, 안 그래?” “…….” “그치?” 잠깐 바람이 멈췄다. 아솨솨 가라앉은 노란 머리칼 위로 나폴갱이 잔 풀이 엉겨붙는다. 혜성이 그것들을 떼어내며 불투명하게 읊조렸다. “……이상한 소문이다.” 반 아마데우스. 지난 날의 혁명이 소름 끼치도록 혜성을 훑어 지나갔다. 그러나 잠깐이라서 괜찮다. 아이는 다시 일어나서 동완과 한바탕 뒹굴며 그 단어 자체를 잠깐이라도 잊고자 한다. 하루에 두 시간씩 각자의 스케쥴을 조정해서 지정곡을 맞추기로 한 혜성과 로미오가 만난 것은 시계 탑이 밤 열시를 가리켜서였다. 신입생 주제에 뭐가 그리 바쁘다는 건지, 로미오는 약속 시간을 열 시로 잡았기 때문이다. 밤 열 두 시가 되면 오르페우스 관 연습실을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을 알면서도 그는 늦은 때를 택했다. 이상한 녀석이다. “우리 잠깐 로맨스 연주 할까요, 선배?” “…….” “네?” “…….” “네?” “시간 없어.” 악보 한 장이 넘어가기 무섭게 연인들처럼 로맨스를 연주하자고 조르는 로미오 때문에 두통이 밀려온 혜성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꽥꽥거리는 골치아픈 신입생 녀석! 혜성은 고래성을 지르려던 것을 가까스로 참아 낸 뒤 억지로 입 꼬리를 올렸다. 맞은 편 피아노에 앉아있는 로미오를 위해 목을 쭉 빼고 답지 않은 말 까지 한다. “착하지… 로미오워싱턴조던반항아 핏덩어리.” “…!” 쾅- 로미오가 건반을 팔뚝으로 내려쳤다. 혜성의 핏덩어리 소리에 화가 난 모양이었다. 쾅- 혜성 역시 화가 나서 건반을 양 쪽 팔로 내려쳤다. 깜짝 놀랐는지 로미오가 조용하다. 아까보다 거칠어진 음성으로 혜성이 활을 꽂았다. “내가 두 살 때, 넌 뱃 속 에서 핏덩어리였잖아.” “…선배, 화났어요?” “…….” “알았어요, 연습해요.” 그들은 지정곡의 전부를 다 맞춰보지도 못 한 상태였다. 따라서 혜성이 화가 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연주회장의 근엄함을 경험해 보지 못 한 무지한 신입생 때문에 자신의 이름에 먹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던가. 시간이 갈 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혜성이었다. 오래 전 정혁이도 그랬을까? 이건 반주를 맞춰주는 선배의 손해다.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혜성의 입학 시험 이후 약간의 변주 형식은 괜찮다고 허용해 준 로제리오 덕분에 혜성은 들쭉 날쭉한 로미오의 연주를 따라 가기 바쁘다. 혼자서 연습해 두었기에 망정이지 그것을 게을리 했다면 신입생 앞에서 민망해 질 뻔 했다. 무대 위의 경험은 대단한 능력 향상을 보이는 게 틀림없었다. 혜성은 타는 듯 한 긴장감을 쉽게 유추해 내고 건반에 몰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버르장머리 없는 신입생은 히히낙락 농담 따먹기만 하질 않던가. 따라서 로미오의 진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혜성은 코 앞으로 닥친 신입생 연주회이거늘 짐작 조차 하지 못 한다. 으스스한 달의 전류가 둘의 연습실에 미친다. 시간은 밤 열한시 사십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럴 수가. 당장 내일이면, 내일이면! 피가 마를 듯 한 기분에 사로잡힌 혜성이 딱 오분만 쉬자며 창가에 섰다. 쌀쌀한 밤 바람에 몸을 맡기자 두통이 약간 가라앉는다. “…….” “…….” 혜성이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나자 그제 서야 진지해 진 로미오가 황급히 건반을 누른다. 조용히 그의 선율을 들으며 혜성은 눈을 감아 보았다. “!” “…….” 음을 감춘다. 선율을 감춘다. 아니면 실력을 감춘다? 혜성은 미간을 찌푸린 채 최대한 귀를 기울여 보았다. 청각을 희롱하듯 오르내리는 건반의 소리가 제 멋대로 치장되고 있었다. 정확한 음반을 누름으로서 격정적이게 하지만, 알고 보면 도망치듯 실력을 감추고 있어. 로미오는 연주 스타일을 나에게 알려 주지 않은 채로 무대에 서려는 건가? 어째서? 귀를 기울일 수록 들쑥 날쑥한 선율의 농도는 짙어졌다. 바다에 빠진 표범이 연상될 정도로 무의미한 선율 때문에 녹초가 된 혜성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건반으로 놀림을 당하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오분이 다 지나도 혜성은 아까의 피아노에 앉지 않았다. 동완과 오후에 대화했던 마지막 구절이 내내 걸렸기 때문이다. 잊었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그 생각에 빠져들다 보니 로미오의 장난 반 진심 반이 마구 섞였던 음표마저 사라졌다. 혜성은 저도 모르게 나른히 속삭였다. “반 아마데우스라….” “…….” 동시에 로미오의 선율이 급속도로 느려졌다. 그 사실을 전혀 알 리 없는 혜성이 동완이 했던 말을 깊이 새기며 회상에 도취된다. 반 아마데우스. 물론 언젠가는 만나야 한다고 여겼고, 순서를 따지자면 정혁이와 상의 하는게 먼저겠지만, 당장 눈 앞의 일이 너무 많은 걸. 반 아마데우스… 반 아마데우스…. “반 아마데우스….” “…….” 로미오의 연주가 끝났다. 하지만 혜성의 귀에는 아직도 재생되고 있다. 작은 어깨를 이리 저리 들썩이며 수페리우스는 깊은 상념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한다. “반 아마데우스… 어떻게 해야 만날 수가 있을까….” “…….” “왜?” 어느새 혜성의 옆에 와 있는 로미오 덕분에 흠칫 놀란 아이가 한 걸음 물러선다. 아까의 장난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낯설 정도로 진지해진 로미오가 서슬퍼런 눈망울을 빛내고 있었다. 달밤의 이리처럼 파랗게 위협하는 자가 있다. “뭐라고 하셨나요.” “뭘?” 혜성이 또 한 걸음 물러나려는 때, 로미오가 혜성의 얇은 팔목을 움켜쥐었다. 진한 달그림자가 밀려와 둘을 하나로 묶었다. 팽팽해진 달의 전류가 은사시처럼 빛나지만 둘은 침묵보다 무거워진 분위기에 밀려 알 수 없다. “반 아마데우스를 만난다구요?” “왜 그러니, 표정이 무섭다 로미오군.” 그 언젠가, 지금을 돌이켜 보면 웃을지도 몰라. “왜 만나고 싶으신 거죠?” “그래봤자 만날 수도 없어.” “…….” 아직은 그 언젠가가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지. “놔라, 건방지구나.” “…….” 무중력 속에서도 얽히는 공기처럼, 서로에게 얽히는 파란 젊음이 아파도 어쩔 수 없는걸. “장난도 정도것 해라. 나는 오늘 너에게 화가 난 것도 참고 있는 중이니까. 내일 무대에 너와 선다는게 기가 막힌다.” “…….” 그 언젠가, 그럴 지라도. 혜성의 차가운 대답에 힘을 잃은 건지 로미오는 단 숨에 팔을 풀어주었다. 그것은 물건을 집어 던진다는 것과 가까웠다. 그의 힘에 밀려 몇 걸음이나 뒤로 밀려 난 혜성이 기가 막혔는지 떠억 입을 벌렸다. 적반 하장도 유분수지, 지금 선배에게 무슨 짓인가! 혜성이 뭐라고 한 마디 차게 쏘아 붙이려던 때, 골똘히 생각에 열중하던 로미오군이 선수를 쳤다. “…정말 만나고 싶은 겁니까.” 약간의 씁쓸한 기운이 음성에 섞여 있었다. 그래서 혜성은 또 다시 화를 낼 수 없었다. 은은한 달 빛 만이 얌체같이 둘의 주변에 어슬렁거린다. 혜성은 내일 보자는 말 대신 등을 돌리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래.” 오늘따라 서늘한 오르페우스 관의 복도를 걷는 발자국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신입생 연주회 날의 분위기는 새 생명의 탄생 만큼이나 숭고했다. 저돌적으로 덤비는 자가 있다 한 들 그는 이 분위기에 눌려 자해 해도 좋을 위엄이 멋을 뽐낸다. 초대 명사들을 비롯하여 해외 아마데우스 상당 수가 이 날을 맞이하여 찾아왔다. 연주회장은 최고의 호황을 누렸다. 팜플렛에 적힌 숱한 순서들을 모두 들으려면 장장 네 시간을 앉아 있어야 한다. 중간의 휴식 시간을 제외하고 언론에서도 집중하는 그들의 사건은 화려한 시작을 펼치고 있었다. 가십 기자들은 플래시를 터트릴 지역을 고르느라 분주했으며 넓은 대기실에 밀집한 학생들은 손에 땀을 쥐었다. “시작됐어!” “쉿.” “아아… 조명이 올라간다. 샹드리에가 번쩍거려… 어지럽다.” “축사, 축사는 언제 시작이지? 내가 다섯 번째인데!” “조용히 좀 해!” “너무 떨려서 토할 것 같은데, 누구 약 가진 거 없니?” 수루룩- 새로 단장한 조명과 샹드리에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천정을 향해 계속 솟았다. 많은 아이들은 탄식을 내질렀다. “또 조명이!” “아아… 그만큼 시간이 가까워지는 거야. 정말 오늘이 닥치고야 말았어.” “마리아여….” 많은 이들이 그 화려함에 반해서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촤촹- 모든 조명이 밝혀지자 보석보다 빛이 나는 주홍의 물결 아래 많은 이들이 차차 입을 다물었다. 엄숙하되 화려하고, 오만하되 품위를 잃지 않는 그들만의 행사가 시작된 것이다. 저 쪽 대형 트리에 장식된 글자가 번쩍거린다. 심벌을 울려라 아마데우스여. 세상 어느 곳을 둘러봐도 영화로운 곳 또 없을지니, 빛을 이겨라 아마데우스여. 젊음에는 젊음을, 뮤즈들이여 영혼을 깨워라! 많은 학생들이 아름드리 예식 복을 입고 우루루 몰려 다니고 있었다. 붉은 가을은 아마데우스를 찾은 인사들과 학생들에게 긴장감과 활력을 동시에 선물해 주었다. 똑똑한 학생들은 악보를 이미 외웠다며 의기 양양한 상태였고, 마지막까지 선배와의 반주가 잘 맞춰지지 않았는지 울상인 학생들도 많았다. “모두 엄숙해 주십시오. 축사가 있겠습니다.” 챙- 은은한 종 소리가 약하게 퍼지고 삼 천 여명은 축사를 시작하시는 바오르 신부님의 소리를 경청한다. 무대 제일 앞 줄에 앉아있는 이자벨을 실제로 보게 되서 신기하다는 듯 일반인의 자격으로 온 좌중 몇 명이 호들갑을 떨 때를 제외하면 축사는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테레사와 히스클리프가 이 자리에 없다는 점을 애석하게 여겼지만, 그것을 메꿀 만큼 화려한 연주회에 더 집중했다. 북적거리는 대기실 틈을 비집고 들어가던 도중 혜성의 어깨가 누군가에게 잡혔다. “으으…. 혜성아, 혜성아.” “아, 동완아.” 동완이었다. 구역질이 난다는 듯 한 표정으로 코를 움켜쥐고 창백해진 동완이 혜성의 어깨에 축 기대며 땀을 흘린다. 어디 아픈건가? 동완은 다 죽어가는 환자처럼 가슴을 움켜쥐고 중얼거렸다. “넌 순서가 어떻게 되니? 나는 큰일 났어. 1학년에 온누리 라는 놈 반주를 맞춰 주기로 했는데, 지금 토하고 있거든. 으….” “나는 아직 만나지도 못했는데… 토한다고? 왜? 넌 어디 가니?” “나는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았어. 그런데도 천주의 온누리는 긴장된다고 토하신다. 병동에 가서 약 좀 가져오려고. 으….” “으….” 으… 하면서 손을 흔드는 동완을 향해 똑같이 으… 라고 말하며 손을 흔든 뒤, 혜성은 다시 로미오를 찾기 시작했다. 선배들도 긴장하게 되는 무대인데, 아무래도 신입생들은 더 심하겠지. 게다가 4학년 중에서도 연주를 하는 학생이 많다고 한다. 지금의 4학년들은 신입생 연주회가 생략 되었기 때문에 신청자에 한해서 무대에 설 기회를 준다고 로제리오 교수가 발표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4학년들은 자신들이 신청했던 것을 후회하는 눈치이지만. “로- …….” 로미오! 라고 부르려던 혜성이 황급히 입을 닫았다. 로미오 라는 이름을 부른다는 것 자체가 진짜 줄리엣이 된 기분이기 때문이다. 혜성은 대기실 복도 2호실 앞에서 만나기로 한 로미오를 기다리다 지쳤는지 저 스스로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어딨는 거지? 어딨는 거야? 설마 어제 일로 화가 나서 제 멋대로 뛰쳐 나간건 아닐까? 조금 살살 대해 줄 걸 그랬어. 그래. 선배로서 잘 대해 줬어야 하는데, 똑같이 화를 낸 게 실수였어. 내가 잘못했다 로미오야. 제발 나타나 주렴. 줄리엣 여기 있다. “세 번째 파트 준비해 주세요!” “세 번째! 세 번째래!” “으아아아!” “신이시여! 제 차례가 너무 빨리 다가옵니다!” 어수선한 와중에도 순서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열 번째 순서인 혜성은 더더욱 다급해진 표정으로 로미오를 찾기 시작했다. 세 번째 차례인 신입생은 덜덜 떨고 있는 자신의 선배에게 붙잡힌 채로 무대 쪽을 걸어가고 있었다. 혜성은 혹시나 싶어서 그들과 함께 걸었다. 우렁찬 박수 소리가 지나고, 막 무대 커튼을 차고 나간 세 번째 주자 두 사람은 연주를 시작했다. 시간이 없어, 시간이 없어! 촉박해진 혜성이 넓은 무대 뒤를 뒤진다. 관계자들은 혜성을 보고 일반 학생인 줄 알고 제지 하려다가, 이내 수페리우스 라는 것을 확인하자 내버려 둔다. 덕분에 구석 구석을 뒤지기 시작하는 혜성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홉 번째 파트 준비하세요!” 아홉 번째? 벌써? 오 하느님. 식은땀 범벅이 된 혜성이 빠르게 닥친 순서를 원망하며 무대 뒤의 커튼을 쥐고 스르르 주저앉았다. 커튼에 귀를 기울이자 피아노의 소리가 생생히 전해졌다. 이 커튼을 젖히면 무대가 바로 보일 것이다. 어쨌든, 늦었어. 이제 틀렸어. 나한테 화가 난 건지 나타나지도 않잖아. 로미오. 로미오. 모든 것을 체념한 혜성이 슬슬 열 번째 파트 때 무대에 나가서 죄송하다고 인사 해야 겠다고 결심 하기에 이르렀다. 아홉 번째 순서인 둘의 연주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잠시 뒤, 연주자를 격려하는 환호성과 축복의 박수 소리가 귀를 찢을 듯이 연주회장 전체에 퍼졌고, 혜성은 절망적인 낯으로 일어났다. 그 때였다. “으윽!” “…….” 한 걸음 떼기 무섭게 아이의 손목을 누군가가 잡아 당긴 것이다. 덕분에 넘어지듯 누군가의 품에 꽉 잡힌 혜성이 푹푹 뛰어대는 심장을 뒤로 하고 거친 숨 소리를 낸다. 뚝. 땀이 떨어졌다. 자신을 끌어 안고 질질 끄는 누군가의 턱 밑으로 떨어진 땀이 혜성의 뺨에 안착한 것이다. “열 번째 파트, 나오세요-!” 자신을 부르는 관계자의 소리에 정신이 번쩍 난 혜성이 푸르르 고개를 흔들었다. 있는 힘껏 저항하며 팔을 빼 내려던 때, 아이를 끌어 안은 누군가가 쉭- 커튼을 살짝 열며 속삭인다. “쉿….” “누, 누구….” “쉿.” “…?” 그 누군가가 뒤에서 안은 채로 약간의 커튼을 젖히자 꽉 들이 찬 좌중의 오만한 표정들과, 거대한 피아노 두 대, 그리고 아프도록 빛나는 연주회장의 조명이 한 눈에 들어왔다. 청각이 멍멍해 질 정도의 박수소리는 거짓이 아니었나보다. 아이는 잠깐이지만 시간과 영혼이 정지 된 착각에 사로잡혀 딱딱하게 굳었다. 그 때, 부드러운 미성이, 익숙한 어제의 음성이 파고들어온다. “킥… 내가 왔소, 줄리엣.” “?” “아직은 나가면 안 되요, 선배.” “!” 이 목소리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로미오?” 입으로는 말을 하지만, 늑대처럼 시퍼렇게 빛나는 눈동자는 무대 밖의 상황을 응시하던 로미오는 초조한 듯 자신의 손목 시계를 확인했다. 그러더니 입 꼬리를 올리며 혜성이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로미오의 동공이 야릇하게 돌아간다. “스타~트. …발사!” “?” 그게 무슨 소리냐고 혜성이 반박하려던 때, 무대 밖으로부터 엄청난 함성이 물 밀듯 밀려왔다. “선물입니다, 선배. 반 아마데우스를 만나고 싶다면서요.” “!” wgreene@naver.com 댓글 감사합니다.(그러나 독촉은 금물... 특히 메일과 쪽지로 딸랑 소설올리라는 말만 보내면 가슴에 칼맞습니다.) 이 음악을 듣는 순간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때문에 크고 웅장한 것 보다 팝으로 찔러버리기로 했습니다.+_+(표현 참..) 다음편에서 또 만납시다 예쁜쟁이들.^^ 댓글 채워지기 전까지 저는 휴식의 별나라로.. 별하님, 소아(사진 고마워요^^)님, 안젤리스님, 귤님, 연님, fan님, 반님, 체리키위님, 하영님, 고맙습니다. 항상 행복하세요! 참... 비밀인데, 저는 히스를 하울과 겹쳐서 상상하고 로미오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혹은 하울투)와 겹쳐서 상상을 하며 적고 있다는 소문을 퍼트려 봅니다...(?) 또 참.. 웅장한 음악은 다음기훼웨.. -리하를 찾아주신 천사씨들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그린올림- 덧글 16개 엮인글 쓰기 /data17/2006/6/27/20/20060513114749493819215000_edited-wgreene_1-wgreene.jpg@nhn@79295@nhn@1@nhn@548@nhn@395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34편 /data17/2006/6/27/20/20060513114749493819215000_edited-wgreene_1-wgreene.jpg@nhn@79295@nhn@1@nhn@548@nhn@395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34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35편 ▼ 다음글 - 2악장 33-2편(반아마데우스)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35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6/29 19:54 http://blog.naver.com/wgreene/110005725935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629 35편 업데) * 포토로그도 클릭하세요.^^ Amadeus 음악 : I Surrender - Celine Dion (아래 오디오 플레이 버튼 클릭) I Surrender-Celine Dio.. Right here, right now! 내 안의 신께 영광을… 당신에게는 환희를. 그리고 나에게는, 지혜와 용기를. 2악장 35편 “하지만 저는 그들과 만날 기회만 줄 뿐, 그 이상은 선배의 몫입니다.” “뭐… 너 지금 이게 무슨…!” 눈앞에 닥친 상황을 빠릿하게 인지하는 능력이 혜성에게는 없었다. 오히려 아둔한 쪽에 가까웠기에 아이는 오래 전 혁명에서도 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혜성은 멍하게 흐려지는 동공, 침착이라는 글자를 전혀 모르는 무자비한 심장의 박동과 함께 폭죽처럼 터지기 바쁜 사람들의 동요를 다른 세상의 누군가처럼 응시했다. 선물이라고? 아니. 공포! 이것은 공포다. 잃었던 감각이 영혼을 후려 찼다. 회색 연기가 아슬아슬하게 천정까지 기둥을 타고 오른다. 그 각각, 그 홍수, 그 전율, 모든 것은 지난 날 낙오자의 모임과 위원회가 대립해서 피를 보였던 때와 닮았다. 그 때의 혜성은 어땠던가. 우왕좌왕 하며 살려달라고 소리만 질렀었다. 지금도 그렇게 하면 될까. 테레사를 부를까. 민우가 나타나서 나를 지켜줄 거야. “제가 할 수 있는 선물은 여기까지 입니다.” “…….” 혜성은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고 차갑고도 부드럽게 속삭이는 로미오를 낯설게 응시했다. 민우가 아니다. 정혁이도 아니며, 테레사는 더더욱 아니다. “…쿡. 선배… 괜찮아요?” “…….” 바로 그 때, '슈페-리어스!' 하고 거친 음성이 벼락처럼 꽂혀졌다. 바오르 신부와 로제리오 교수가 동시에 혜성을 부른 것이다. 커튼을 쥐고 있는 혜성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푸드득 정신을 차린 혜성이 멍하게 풀?동공에 힘을 주었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어. 정신을 차려! 혜성은 죽어버린 자신의 내면에 어거지성 생명을 불어넣는다. “!” 커튼을 조금 더 거둬 보았다. 연주회장 3층 좌석 전체 인원이 일제히 일어서서 무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혜성은 그들의 시선이 몸을 가리고 있는 자신에게 향한 것 만 같아서 마른침을 삼켰다. 2층과 1층 곳곳에서도 낯선 이들이 무표정으로 일어나서 노려보고 있다. 연주자가 나올 것에 대비해서 박수를 치던 좌중은 갑자기 살벌해진 분위기에 눌려 창백해져갔다. “어서 환영해 주십시오. 수페리우스….” “…….” “저들이 바로 당신이 만나고 싶으시다 던….” “…….” “반 아마데우스입니다.” “…….” 저들이? 혜성이 커튼 깃을 움켜쥐자 로미오가 고개를 끄덕인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자들은 당장이라도 아마데우스 연주회장에 불이라도 지를 것처럼 죽은 표정이었다. 아니, 그들은 특별한 대답을 기다리는 뉘앙스를 풍겼다. 아주 공격적이지 않은 기품을 날카롭게 눈치 챈 혜성은 그것을 시작으로 서서히 맑아지는 정신을 느꼈다. 예전이 아니다. 지금은, 지금이다. 경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따라서 같은 상황이 처해진다 한 들, 나는 다른 것이다. 삶의 앎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놔.” “예?” “손을 풀어.” “…….” 혜성의 날카로운 언어에 놀란 로미오가 허리를 두른 팔을 풀었다. 상쾌해진 머리 속은 물론이거니와 예전과는 다르게 냉정하게 읽히는 상황이 수페리우스를 부추겨 세운다. 바오르 신부를 비롯하여 교수들은 상당한 자리에 포진해 있는 반 아마데우스 인원이 몇 해 전부터 졸업한 인물임을 알았다. 개중에는 일반인도 여럿 섞여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지금 이 순간 그들이 같이 있는 거지? 게다가 왜 몰랐지? 초대장 없이는 이 곳에 입장할 수 없었을 텐데 관리가 소홀했던 건가? 그럴 리가 없어! 게다가 내 순서에 맞춰서? 다른 사람도 아닌 신입생 로미오가 그들을 알려 주다니? 그렇다면…! “…초대장은 위조했습니다. 모두 속기 좋지요.” “!” “선배님. 수페리우스. 대면할 기회를 드렸으니 무대에 나가 보세요.” “…….” “수페리우스?” “…….” “두려움에 떨고 계시는 건가요.” “…….” 기억하고 있어. 비슷해. 그 때 시작의 분위기와 아주 닮았어. 그 날의 혁명은 우리들만의 전쟁이었지. 나로 인하여 대립에의 강도가 세어졌던 위원회와 낙오자의 모임은 정도를 잃었었어. 그들은 왜 싸우는지 이유를 망각할 수위까지 달아올랐었지. 정혁이는 현명하게 대처하고 싶었을 거야. 반 아마데우스… 반 아마데우스라… 그 날 반 아마데우스는 채 뜻을 펼치지도 못 했어. 위원회와 낙오자의 모임, 나아가 테레사와 정혁이가 원초적인 것에 대립해 있어서였지. 지금 생각해 보면 반 아마데우스도 제대로 뜻을 밝히고 싶었을 텐데, 정혁이는 역으로 그들을 이용했었어. 무조건 테레사를 넘어 서기 위해, 나를 차지하기 위해서 정혁이는 자신의 사상에 반 아마데우스까지 거들먹거렸던 거야. 나는 다 기억하고 있어. 그래서 이제는 알 수 있어. 냉정한 지휘자 테레사가 통솔력을 잃어야 했던 이유를, 정혁이가 반 아마데우스와 어긋나면서까지 위원회와 대립해야 했던 이유를. 나 때문이었어. 그래, 나 때문에 그들은 냉정을 잃었었다. 그게 불행의 시초였다. 신혜성, 이성 잃지 마. 그러니까 냉정해져. 그 때 처럼 도망쳐서도 뒤로 물러나서 누군가에게 매달려서도 안 돼. 너는 혼자야. 너는 수페리우스야. 봐. 저기 반 아마데우스가 있어. 하지만 지금은 성스러운 연주회야. 뭐가 먼저지? 그래. 그거야. 핑- 두뇌의 모든 감각을 스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영혼 전체가 발작을 부리듯 희미한 전율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혜성은 이상했다. 점점 사물을 읽고 냉정하게 판단하려 드는 스스로가 이상했고 신기했다. 정작 혼자가 되어서야 지난 경험을 떠올리며 앎을 실천하다니. 알싸하게 퍼지던 두통마저 사라졌다. 이제 혜성의 눈동자에도 서슬 퍼런 무언가가 번쩍거린다. 로미오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건 대면이 아니다.” “그…래요?” 피식 웃으면서 무대 뒤에서 가지런히 허리를 편 수페리우스의 음성과는 반대로 로미오가 굳어져 간다. 아이는 까딱까딱 목을 움직이며 연주 직전 손을 풀어주듯 손가락에 깍지를 끼고 주물렀다. 또 한 번 수페리우스! 하고 그를 찾는 신부님의 소리가 들렸다. 그 음성은 지난 날 테레사! 라고 불렀던 것과 매우 흡사했다. 교수들과 신부님들은 몸을 사리는 것이다. 공포를 경험해 본 자들이니 이해 할 수 있다. 똑 같은 사람일 뿐인데도, 지난날의 상황에서 겪은 두려움이 시작된 줄로 오해해서 저들의 감각이 마비된 것이다. 혜성의 입가에 죽은 미소가 꽃처럼 피었다. 냉정이란 아주 쉽다. 상황을 읽는 것이 먼저이다. 그리고, ‘무엇이’ 중요한 지 순서를 매기면 된다. 연주회장에 불이 붙었으니 번지기 전에 꺼뜨리면 된다. 누구든지 물이 되어 회색의 화염을 꺼뜨리면 된다. 아무도 물이 되어주지 않는다면, 내가 물이 된다. 흥분을 참지 못 한 입술이 가까스로 평정을 유지하며 말문을 열었다. 한 걸음만 나가면 무대의 스포트라이트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화사한 샹들리에를 머리에 이고 수많은 시선과 마주보고, 물이 되어 꺼드린다. “로미오.” “…….” 혜성은 부드럽게 안면을 폈지만 독사처럼 날카로운 어절은 그대로 흘려버렸다. 무대 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지만 시끄러운 말소리들이 들려왔다. 반 아마데우스의 누군가와 힘겹게 대화를 시도하는지 난처해하는 소리들이었다. 혜성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여겼는지 말의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이건 너의 단순한 장난이지. 연주회를 망치려는 군. 시도는 재미있었다. 좋다. 반 아마데우스와 너의 관계는 지금 묻지 않으마. 정확한 이유는 알 듯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나를 시험하려는 군. 나를 혼란스럽게 하려고 별 미친 짓을 벌였구나.” “…….” 혜성은 피식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감당하기 힘들었는지 아주 잠깐 배를 쥐고 큰 소리 내서 웃었다. 귀가 째질 정도로 경박한 웃음소리에 소름이 끼친 로미오는 여전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그를 경청한다. “너는 나를 단순하고 만 만 한 놈으로 인식해서 이런 황당한 짓을 벌였지만, 어리석은 신입생은 모르는 게 너무 많구나.” “……?” “너는 모르는 게 많다.” “…….” 로미오의 창백해진 낯이 파리하게 질릴 때도 수페리우스의 동공은 차갑기만 했다. “나는.” “…….” “바로 이 무대에서, 레퀴엠을 탄생시켰고, 시험을 패스했으며, 학생 재판에서 승소했었다.” “!” 테레사. “네 의도에서 빗나가서 미안하지만, 나는 전혀 무섭지 않다.” “선…….” 테레사. 존경하는 나의 테레사. “나는 이 무대가 전혀 두렵지 않아.” “!” 제가 당신에게 배운 것은 음악만이 아니었나 봅니다. “네 의도가 어떤 것인지 몰라도, 실패라는 걸 증명해 주지.” “선배님!” “…….” 슬프게도 저는 당신의 냉정함을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저를 치셔야지요.” “……그 가치가 느껴지는 날 치도록 하지.” “!” 테레사. 제가 정말로 당신에게 배운 것은, 외로움 이었습니다. “내가 울며불며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매달릴 낯짝을 기대한 표정이군. 나중에 그 모습도 보여주지.” “…….” “지금은 저 불을 꺼야 하는 게 먼저니까.” “!” “뭐 해? 따라 나와.” “!” 이제 당신의 고통을 이해 할 것 같습니다. “어리석은 녀석.” “…….” “상황을 해결하는 법부터 너는 배워라. 같잖은 시위는 유치하고, 천박해서 봐 줄 수가 없으니.” “…….” “그래야 너는 우두머리 자격이 있으니까.” “! 전, 저 전 우두머리가 아니…….” “닥치고 나와!” 테레사. 당신에게서 배운 외로움 덕분에 이제는 눈물을 감추는 법도 알았습니다. 내 안의 신께 영광을… 당신에게는 환희를. 그리고 나에게는, 지혜와 용기를. 휙- 커튼을 열었다. 로미오와 혜성의 모습, 무대 뒤의 너저분한 풍경까지 몽땅 보일 정도로 세게 밀어젖힌 탓에 사람들은 잠깐 행동을 멈췄다. ‘수페리우스!’ 소수의 인파가 혜성을 알아보고 비명도 아닌 것을 질렀다. 그러나 곧 무대 앞 쪽에서 한 참 벌어지고 있는 반 아마데우스와 정혁의 대립에 귀를 기울였다. 혜성이 로미오와 무대 뒤에서 잠깐 있을 사이에 정혁이 뛰쳐나온 모양이었다. 혜성은 어깨를 으쓱대며 열 번째 차례인 자신의 연주를 준비하려는 듯 가볍게 한 걸음 떼었다. 가시에 찔리는 듯 한 날카로운 아픔이 발 아래쪽에서 퍼져왔다. 끈끈하고도 알싸한 무대 특유의 잔향이 풍겨졌다. 이 느낌은 아주 익숙하다. 혜성은 무대에 나오는 즉시 전신으로 퍼지는 고통을 넘어 희열과 가까운 통증에 못 이겨 옅은 신음을 내뱉었다. 로미오는 그런 혜성을 망연자실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이 인식하고 방심했던 신혜성이 아닌 것이다. 로미오의 시선은 강렬한 불꽃이 뜨거워서 다가가지 못 하는 절망적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틀렸다!” 낯선 누군가가 까만 띠를 손목에 두른 채 소리치고 있었다. 무대 코앞까지 다가온 반 아마데우스의 그는 지금 무리의 대표인 듯싶었다. 하지만 반 아마데우스 전체를 대표하는 자는 아니다. 그들은 무대 중앙 계단에 반쯤 올라서 있는 정혁에게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냉정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 로제리오 교수가 서 있었지만 교수와 늙은 바오르 신부는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 하는 실정이다. 테레사 라는 한 명의 힘이 일궈낸 아마데우스는 결국 능력 있는 자의 손에 휘둘리는 걸까. 어쨌든 반 아마데우스는 수페리우스를 대신 해서 나타난 듯 한 정혁을 상대로 입을 열었다. 잘 만 하면 예전처럼 폭력이 빚어질 것 같은 무시무시한 분위기에 질린 수많은 좌중은 얼어붙은 지 오래이다. 연주회장의 입구란 입구는 모조리 막아버린 반 아마데우스 때문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당장 중요하지 않다. 지금은 성스러운 신입생 연주회가 아닌가! “너의 판단은 그 때 틀렸었다. 게다가 소문에는 수페리우스에 흔들려서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제대로 알리지도 못했다는군.” “…지금은 신입생 연주회 중이다. 좌중의 눈앞에서 무슨 짓이지.” 성난 밤의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정혁의 지적에도 그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사람의 눈이 많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 거지.” “…….” 정혁은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그들을 최대한 구슬린 뒤 내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꼼짝 않고 연주회를 망치기만 하는 반 아마데우스 무리들은 석회처럼 흩어지고 뿌옇게 날아다닌다. 게다가 무조건 밀어 내려고 하는 냉정한 정혁의 어절에 감정이 상했는지 비꼬기까지 했다. 혜성은 잠자코 들으며 그들께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반 아마데우스와 정혁의 대립 파장 때문인지 거의 모든 사람들은 혜성의 출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물론, 준비는 아직 덜 됐어. 오늘은 우리의 우두머리가 수페리우스를 만나 보라고 해서 약속 장소에 나온 것뿐이니 그렇게 노여워 할 필요는 없다, 그림자.” “지금의 너희 대표는 누구지? 예전 대표는 탈퇴 한 걸로 아는데….” “기밀 사항이다.” “어쨌든 나가라. 지금은 연주회 중이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하하하하 그림자여… 그림자여. 당신이 지금 우리에게 음악을 논하는가?” “!” 정혁이 놀랐듯이 혜성 역시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다. 동공이 순간이지만 좁혀졌다. 음악이 전부가 아닌 사람들! 음악이 아닌 사람들! 뮤즈가 아닌 이들! 음악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사람들? 혜성은 자신의 뺨을 때려가며 가까스로 이성을 부여 쥔다. 비꼬듯 칼 같이 대답하던 반 아마데우스의 대표가 재빨리 독설을 퍼부었다. “그림자가, 반 아마데우스에게 연주회를 논해?” “…….” “우리에게 음악이란 없다. 자네도 잘 알지 않던가.” “…….” 사람들은 음악이란 구절이 지나자 비로소 공포를 절감했는지 바오르 신부님을 외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화를 냈고, 또 누군가는 테레사를 불렀다. 혜성은 침착하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들이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통로는 많다. 연주회를 맞이하여 성대하게 열린 길이 여기 저기 뚫려 있기 때문에 굳이 초대장이 아니어도 기습적으로 파고들기란 쉬웠을 것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교수님들과 바오르 신부님이 저 단체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 정혁이는 연주회를 계속 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나는 수페리우스라는 것, 그것이다. 수페리우스. 이 이름의 무게를 실감해야 돼.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나도 사람이라서 낯선 이의 외침 앞에서는 두려움이 밀려와. 홍해에 빠진 것처럼 붉어진 몸 여기저기 수분이 빠져나와.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내면 저 쪽에서 바람을 일으키듯 거하게 밀어닥치는 음성이 있다. 혜성의 붉어졌던 눈동자가 옳게 여며진다. 『 울지 마라 병아리. 네가 울어도 세상은 돌아간다. 너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 오래 전 민우의 음성이 하늘하늘 퍼져왔다. 혜성은 마음을 다 잡아 가며 마침내 마이크를 쥐고 섰다. 쩌렁쩌렁 외치고 싶은 마음은 한 가득인데 순한 양처럼 떨릴 음성이 두렵다. 멀리서 재미있다는 듯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는 로미오의 뺨을 칠까. 그는 상황을 만들기만 할 뿐, 정체가 모호한 채 모든 것을 혜성에게 떠넘기기만 했다. 어떻게 나오는 지 두고 보겠다는, 그러면서도 부드럽게 위로하려는 듯 자상한 시선도 겸비한 이중적인 로미오에게 느낀 배신감은 나중으로 미뤄야 한다. 붉게 차오른 눈매를 애써 감추며, 혜성은 삽시간에 주목하는 모든 이를 정면으로 마주보며 당당하게 고개를 세웠다. 쭈욱 허리를 펴자 쌩- 하고 머리를 뚫고 바람이 지나갔다. 유들 하면서도 차갑게, 테레사가 했던 것과 조금이라도 비슷하게. 혜성의 등장과 동시에 조용해진 반 아마데우스와 정혁, 좌중 모두는 그의 음성을 기다린다. 수페리우스는 자신의 뒤에 서 있는 후배에게 일침을 가하는 것으로 스타트 선을 넘었다. “죄송합니다.” “!” “수페리우스!” “제 후배의 장난이 심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지라, 감히 소문으로 접했던 반 아마데우스를 실제로 보고 싶은 욕심에 이 곳으로 제 이름을 팔아서 불렀나 봅니다.” “!” “뭐라고!” 영롱하게 발하던 로미오의 눈동자가 파랗게 얼어붙었다. 동시에 로제리오 교수는 기가 막힌다는 듯 고함을 쳤으며 정혁은 그 점이 더 이상하다는 듯 의심스런 시선으로 반 아마데우스를 노려보았다. 그들이 무어라 더 말을 하기 전에 혜성은 빠르게 스타트를 잇는다. “혼잣말 한 번 한 것으로, 이 따위 짓을 벌여서 순결한 연주회를 망치고 싶은 건가, 로미오군? 너의 장난은 지나쳤다.” “…….”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동요하던 사람들이 눈에 띌 만큼 서서히 안정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당하고 날카롭게 퍼붓는 혜성에게서 다른 누구를 발견한 것처럼, 혹은 그 누구로 착각한 것 마냥 그들은 팜플렛을 펄럭거리기도 했다. 좌중의 동요가 쉽게 가라앉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혜성은 싱긋 입 꼬리를 올리며 무대 바로 밑의 반 아마데우스 대표에게 말을 건넨다. “이왕 들어오셨으니, 당당하게 당신들의 자리에서 지금 나와 어리석은 신입생의 연주를 감상하고 돌아가십시오.” “!” “그리고, 여러분은 편안하게 계속 이 시간을 감상해 주십시오. 저의 신입생이 못된 장난을 했습니다. 가벼운 해프닝을 귀엽게 봐 주시기를 바랍니다.” “…….” “저는… 테레사의 수페리우스 입니다.” “!” 아름다운 벼가 되어줘, 마드모아젤… 꺼지지 않고 들려오는 내면의 음성이 있다. 혜성은 더더욱 음성에 힘을 주었다. “제 이름을 걸고,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신입생을 다스리겠습니다.” “!!” “당장, 피아노 의자에 앉아라, 어리석은 신입생.” 이렇게, 이렇게 해결되는 걸까? 정말 그런 걸까? 정혁의 불안해하는 시선은 혜성에게 그렇게 묻고 있었다. 그러나 혜성은 반 아마데우스 이외에는 단 하나도 읽히지 않는 실정이었다. 타는 듯 한 긴장감이 공기 중에 얽혀 누구 하나 반기를 빼들면 속수무책으로 함성이 뻗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 “…….” 로미오는 혜성의 말에 고분고분하게 왼 쪽 피아노에 앉았다. 그의 시선은 죽어 있었으며, 적막한 가운데 정혁과 혜성은 반 아마데우스가 만남에 있어서 아직은 때가 이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제발 사라져 주기를 기다렸다. “…….” 저벅. 저벅. 대표 격 청년이 등을 돌리자 그제 서야 한 숨을 내쉬는 혜성이 마이크에 쥔 손에서 힘을 빼려던 때 였다. “!” 연주회장을 나가는 줄로 굳게 믿었던 청년이 다시 등을 돌려서 혜성을 쏘아 보았기 때문이다. 등골이 와드득 얼어붙을 정도의 충격 때문인지 혜성은 어금니를 깨물어 가며 유들한 표정을 유지해야 했다. 반 아마데우스이자 현재 무리의 대표 청년은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혜성에게 삐딱하게 물었다. “네가… 지금 테레사를 대신 하는 건가?” “…….” 하느님… 조금만 더…제발. “우리는 문정혁과 협상을 해 왔었고, 지난 날 아마데우스 혁명 때 그가 우릴 이용한 뒤에는 테레사와 연락을 취했었다.” “!” 무너질 것 같다면, 그 때야 말로 일어설 시기이다. 자격은 누가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던가. 혜성은 직설적인 질문에 오히려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송곳처럼 푹푹 찔리는 강렬한 민우의 음성이 지난날보다 또렷하게 들린다. 들리고 있어. “그러나 테레사는 눈 수술을 이유로 1년 동안 오하이오 주로 떠났고, 지금은 보스턴 아마데우스로 갔지.” “…….” 고개 숙일 줄 아는 아름다운 벼가 되세요. “다시 물어보겠다.” “…….” 하지만, 땅에 떨어진 벼이삭을 위해 고개 숙이지는 마세요. “너는 지금 테레사를 대신 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 마드모아젤, 고개를 숙이는 순간 “잠깐이지만, 저는 테레사를 대신 해서 여러분을 설득합니다. 제 후배의 실수로 이렇게 찾아오게 한 점 죄송합니다. 만난다고 해도, 그것은 제가 직접 찾아가는 날, 그 때가 될 것입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 당장은 절대로.” “…….” 당신은 당신을 노리는 자들에게 잡아먹히니까요. “현재 아마데우스에는 낙오자의 모임이 없습니다. 그러나 반 아마데우스는 뜻이 있을 겁니다. 당장을 약속할 수는 없지만, 저는 테레사를 대신 해서 꼭 찾아 가겠습니다.” “…….” 당신을 노리는 자들에게 잡아먹히니까요. “…믿어 주십시오.” “…….” 숨을 죽이고 있는 삼 천 여명 모두는 더 이상 테레사를 마음으로 외치지 않았다. 불꽃처럼 번쩍이는 노란 머리칼의 소년이 스스로를 수페리우스라며 당당하게 학교를 대표해서 능력을 무기삼아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능력, 가십, 통솔력이 있다면 교수를 누르고 충분히 학교의 체제를 휘어잡을 수 있었던 테레사가 있는 건가? 아니다. 그가 아니다. 하지만 괜찮다. 좌중 모두는 손에 땀을 쥐고 자신들도 모르게 퍼지는 감동을 어쩌지 못한다. 한 참 동안 혜성과 정 면으로 스파크를 일었던 반 아마데우스 대표는 얼어있던 표정을 느릿느릿 풀기 시작한다. 그리고 전에 없던 자세로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수페리우스에게 뜻을 전했다. 고개를 숙이는 쪽은 오히려 반 아마데우스였다. 자신들의 무례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해프닝의 시초가 명령이었어도 침착하게 대응하는 수페리우스를 그들은, 인정하는 것이다. “…수페리우스, 현재의 테레사 대리인. 당신의 의견을 받아들이겠습니다.” 하느님… 자비로운 당신이시여……. “!” 대표는 대답과 동시에 3층 좌석에 포진하고 있던 반 아마데우스 사람들에게 손가락으로 지시를 내렸다. 하나 둘씩 빠져나가는 반 아마데우스 인원들 덕분에 전체 좌석 중 3분의 1이 비워지고 있었다. 감쪽같이 전체를 속인 그들의 능력에 놀라기도 잠시, 혜성은 정중하게 뜻을 전하는 반 아마데우스의 대표를 서늘하게 내려보았다. “연주는 듣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반 아마데우스 이기 때문입니다.” “…….” 언젠가는 검은 깃발이 펄럭이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나 봅니다. 반 아마데우스는 완전히 허리를 숙이고 사죄를 표한다. “언제고 찾아오실 때를 기다리겠습니다, 수페리우스.” “…….” 이윽고 반 아마데우스 인원이 모두 빠져나가자 전체 좌석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3분의 1이 텅 비어버린다. 더운 체증이 가신 것처럼 상쾌하게 부활하는 성스러운 연주회가 있다. 달칵. 달칵. 달칵. 모든 층의 문이 닫히고, 그들의 그림자조차 멀어졌을 때 기가 막힌 함성이 일반인들과 학생들의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우와 아아!”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믿음 가득한 열정적인 음성이 일반인과 학생들에 섞여 강렬한 바람처럼 불어왔다. 팡- 혜성의 몸에 부딪히는 순간 터지고야 마는 함성은 커다란 연주회장을 삼키고도 남을 것처럼 우렁찼다. 저마다 어깨를 들썩이며 사태를 진정시킨 수페리우스를 집중한다. “…….” 작은 수페리우스는 아무런 말없이, 냉정한 낯으로 환호성을 뒤로 하고 오른쪽 피아노에 착석했다. 쑤우우우우- 앞에서 위로, 아래에서 천정으로 달려가듯 조용해지는 음성이 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신입생 연주회 열 번째 순서를 진행하는 수페리우스의 노련한 태도에 사람들은 다시 바빠지기 시작한다. 스태프들은 수페리우스가 열었던 뒤의 커튼을 신속하게 정돈했으며, 사람들은 팜플렛의 순서를 일목요연하게 확인한다. 무대 뒤 통로에서 창백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동완을 비롯한 대기 학생들은 후다닥 정신을 차리고 처음보다 시끄러워졌다. 단 한 사람, 반 아마데우스가 닥치기 전과 다른 이는 정혁이었다. 그는 로미오에게 연주를 시작하라며 턱으로 신호를 보내는 혜성의 태도가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소름이 끼쳤는지 덜덜 떨리는 손을 주머니 속에 감췄다. 순간이지만, 수페리우스의 당당하고 세련된 말투에 테레사가 겹쳐졌다. 아마 다들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통증처럼 미세하게 퍼지는 신음을 억지로 참아내며, 정혁은 지난 날 모호한 말을 꺼내 주었던 테레사를 떠올려 보았다. 달 밤, 장님이어도 아마데우스를 누구보다 잘 읽는 테레사가 했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 …나는 기다리고 있다. 』 귀가 뜨겁다. 『 …시련을 극복하고 상황을 깨닫고 경험한 뒤, 나와 비슷해진 수페리우스가 최종 라스트로 나를 지목하고, 도전하기까지. 』 테레사. 당신의 말은 거짓이 아닐 수도 있겠다. 열 번째 파트, 신입생 로미오와 선배 수페리우스 신혜성의 연주가 물 흐르듯 진행되어 간다. 순서를 마쳤던 아홉 번째 까지의 학생들은 무대 입구에 다닥다닥 붙어 서서 신비로운 저들의 연주를 경청하며 쑥덕였다. “…건반을 뺏어가고 있어.” “수페리우스가….” “…가져가는 거야…?” 캉- 카캉- 진노할 뻔 한 로미오의 연주를 재빨리 수페리우스가 오른쪽 피아노에서 부드럽게 돌려주는 것을 그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해석하기 바쁘다. “워싱턴… 워싱턴은 무슨 연주를 하는 거지?” “지정곡이 아닌데?” “그럼 처음부터 변주곡? 아니면 작곡한 것? 어… 어떻게…!” “규칙 위반이다!” “!” 대기실 학생들의 말마따나 지금의 로미오는 방금 전의 충격으로 인해 지정곡 전부를 잊어버린 것이다. 제 아무리 반 아마데우스와 관련이 있다 한 들, 신입생에게 연주회장의 무대는 처음이지 않던가. 노련함이 결여된 로미오가 무엇을 예상했는지는 몰라도 혜성의 당당한 맞대응은 예상 범위에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충격 덕분에 지정곡의 악보를 생각해내지 못하는 과오를 저질렀다. 그런데도 연주는 진행된다. 자포자기식으로 음표를 마구 쳐대며 그럴싸한 소나타를 흉내 내는 로미오의 선율을 포장하는 수페리우스의 화음에 힘과 박자가 좌중을 휘어잡아서였다. “!” 바흐?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카덴차? 탱고? 소나타, 소나타? 무조건 페달을 밟아대는 로미오에 반해 단 한 번도 페달을 사용하지 않는 수페리우스지만, 그는 반주자 이상의 것을 실현하고 있었다. 단단한 바위를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산산 조각내듯 칼처럼 밀어 붙이는 반주는 냉정하고 차가웠다. 일정한 기본 형식을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서 정도를 벗어 난 로미오의 변주곡을 풀어주는 것이다. 어쩌면 로미오는 일부러 막무가내식의 변주곡을 누른 것 일 수도 있지만, 무대위에서 혜성은 처음부터 흔들림이 없었다. 수페리우스의 손놀림은 신입생보다 훨씬 훨씬 우위였기 때문이다. 감동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저돌적인 연주자의 솜씨에 자연스레 깔리는 반주로 맞춰주는 혜성은 지금의 로미오를 제대로 바쳐 주고 있다. 어떻게, 어떻게? 무대 앞 줄에 앉아서 반 아마데우스의 출현 때부터 손수건에 눈물을 적시고 계셨던 사비나 교수가 손에 땀을 쥔다. 그녀의 통통한 상체가 넘어질 듯 앞으로 쏠린다. 딱딱한 고체처럼 일률적으로 정확한 음정을 누르는 혜성의 태도만으로도 그녀는 북받치는 눈물과 통증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 과거의 수페리우스. 작은 아이야. 너는 러시아 인형처럼 하얗고 신비롭구나. 』 따당- 초원 위의 야생마처럼 뛰기 시작하는 로미오를 무겁게 짓누르는 혜성의 반주는 해일의 속력만큼 빠르고 웅장했다. 지난 날 사비나 교수가 어린 수페리우스에게 단호하게 지적했던 그것처럼, 그것처럼. 『 네 작은 손가락이 건반 위를 움직이는 건 마치, 작은 꼬마아이가 전장의 한 가운데에 서서 대립된 군사들을 막는 것 만치 무모하지. 세련된 맛은 한 참 부족하지만, 그런 형식의 기적을 이룬다. 』 『 어려워요. 』 『 어렵지. 물론 어려울 거야. 너는 무기가 없어도 전장을 막았노라- 알려주는 거다. 』 아이는 알고 있을 것이다. 사비나 교수가 어떤 뜻으로 그런 말을 했었는지, 수페리우스의 현재를 자각했음을 방금 전 반 아마데우스 앞에서 증명했듯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연주는 연주대로, 대립은 대립에서. 그 고통의 자리를 깨달았다는 뜻이다. 사비나 교수의 손수건 반 이상이 젖어 들 때, 연주는 바야흐로 클라이막스를 타고 있었다. 젖은 듯 울부짖는 선율 앞에서, 많은 이들은 탄식을 내뱉었다. 명마 시리우스가 드넓은 초원이 아닌, 가시밭길을 달리듯이 가벼운 변주곡에 차갑게 덮이는 음성은 거대한 속력으로 밀어붙여진다. 숨이 턱 막힌 좌중은 혼을 갈취한 저들의 음표가 변주곡 이라는 것마저도 상실했다. 하지만 좌중의 귀는 솔직하다. 그들은 로미오의 연주를 이상하게 여길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연하게 받쳐주는 반주자 혜성을 독특하게 기억할 게 틀림없었다. “하악-” 장장 17분의 연주가 끝났다. 다섯 악장으로 이루어진 짜임새 있는 변주곡 완성의 솜씨에 있어 공로는 혜성에게 돌아간다. 반주자는 그 역할을 정도 이상으로 수행했기 때문이다. 우렁찬 박수소리가 찢어지게 들려왔다. 레퀴엠은 아니지만, 몰입과 흥을 동시에 주었던 혜성의 연주에 좌중은 즉각 반응을 보인 것이다! “수페리우스!” “브라보!” 그들은 오직 혜성에게로 박수와 환호성을 쏟았다. 반주가 아닌 완벽한 2중주를 선보인 혜성이 아니었다면 로미오의 연주회는 엉망으로 흐지부지해졌을 것을 솔직한 좌중은 알았기 때문이다. 열한 번째 파트 두 명이 멈칫거리며 무대 뒤에서 대기하는 모양을 흘끔 쳐다 본 뒤, 혜성은 땀에 젖은 몸을 일으켜 무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영혼은 이탈한 지 오래였다. 무중력의 상태에서 걷는 걸음은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혜성은 자력으로 걷는 사람 같았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러했다. 쑤어억- 높다란 샹들리에의 불이 수페리우스의 위에 세워지며 번쩍이는 미를 자랑한다. 사람들은 스포트라이트의 자리에 선 그가 인사를 하는 줄 알았는지 미리부터 박수를 치기 시작했지만, 그는 오히려 그들의 소리가 작아질 때를 기다렸다. 쑤우우- 거품이 꺼지듯이 혜성의 반응에 사라지는 좌중의 반응이 있다. 그들은 숨을 죽인 채 혜성의 언어를 기다렸다. 잠깐 목을 숙여서 호흡을 정비하며 후드득 땀을 떨어뜨리던 혜성이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후드득- 상당한 양의 굵은 땀방울이 수페리우스가 고개를 올리는 동시에 무대 위로 떨어졌다. 어금니에 깨문 뒤, 그는 힘껏 배에 힘을 줬다. 프허- 영혼이 또 한 번 빠져나간다. 계절을 상실한 육체는 춥지도 덥지도 않다. “로제리오 교수님!” “!” 수페리우스는 제일 앞 줄, 사비나 교수와 많이 떨어져서 앉아있는 로제리오를 불렀다. 모두의 시선이 로제리오에게 집중되었고, 그는 우물쭈물 어깨를 으쓱했다. 혜성은 자신의 곁에 선 로미오를 더 바짝 끌어 오며 환하게 웃고 소리쳤다. “반 아마데우스와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잘못을 뉘우칠 기회를 주지. 로제리오 교수님!” 다시 언급되는 반 아마데우스! 잠시나마 황홀한 연주에 기억을 묻었던 인파들은 미간을 찌푸리며 동요했다. 그러나 동요는 잠깐이었다. 수페리우스는 앞자리 사비나 교수가 몸소 나와 건네준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호탕한 말과 함께 로미오의 등을 후려 찼기 때문이다. “이 학생을! 학생 감옥에서! 근신할 것을 부탁드립니다.” “!” “너무 잔혹한 처사입니다!” “반 아마데우스가 닥친 것과 저 학생이 무슨 상관이지요?” “수페리우스 역시 가벼운 해프닝이라고 인정했잖아!” 많은 학생들이 동요했고, 특히 일반인들은 불쾌한 표정을 그대로 나타냈지만 수페리우스의 단호함을 꺾지 못한다. 좌중은 모르는 게 많다. 그래서 사람은 단순하다. 일단 상황에서 벗어나면 그것에 안주해서 자신들이 겪었던 쓰라림을 금세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관자놀이 부근을 적시던 굵은 땀방울을 닦아내며, 혜성은 차가운 투로 쏘아붙였다. “해프닝을 포함, 방금 전의 연주 때문입니다. 이 학생은 레퀴엠도 아닌 이상한 것을 연주했습니다!” “!” “감옥에서 근신 한 뒤, 제가 개별적으로 지금의 연주를 심사 할 것을 요청합니다.” 로제리오는 마침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저 말은 분명히 테레사에게서 들어 봤던 것이다. 오직 수페리우스를 위해 시련과 행복을 동시에 펼쳤던 테레사가 했던 말을 잊을 리가 없다. 입학시험 날 레퀴엠을 창시한 수페리우스에게 징계를 내리려던 로제리오와는 달리, 테레사는 재빨리 학생 감옥행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지금 수페리우스는, 그 때와 똑같은 처분을 내리려고 한다. 과연 몇 명이나 수페리우스의 뜻을 눈치 챌까. 지금 저 처사는 결국 로미오의 실수를 완전히 잊게 하려는 취지라는 것을! 단순한 사람들은 역시나 학생 감옥은 너무하다고 꽥 꽥 소리쳤지만, 로제리오는 결국 수페리우스의 손을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 반 아마데우스 시민 단체를 간단하게 물리쳐 준 수페리우스의 공이 컸기 때문이다. “그럼.” “…….” 수페리우스는 유들 하게 좌중을 향해 허리를 숙인 뒤, 짤막한 인사를 마치고 로미오를 이끌고 무대 뒤로 걸어갔다. 이렇게 열 번째 순서가 끝나고, 막 나온 열한 번째 파트 주자들이 좌중의 박수를 한 몸에 받는다. 연주회는 기적처럼 계속 이어지게 된 것이다. “선…….” “…….” “…나중에 봬요.” “…….” 무대 관계자들에 의해 포박당한 로미오는 뭐라고 말을 꺼내려다가 순순히 그들께로 끌려가기 시작한다. 혜성은 학생 감옥으로 향하는 로미오를 차마 돌아볼 수 없어서 추욱 늘어진 채 바닥에 앉았다. 어둡고 습한 무대 뒤 구석에서 멘델스존이 흘러나왔다. 무대에 막 나온 학생들이 간지러운 선율로 수페리우스를 위로해 준다. 그래서일까. “으… 으흐! 으! 으흐! 으흑! 으훅.” 출렁이는 커튼에 등을 기대고, 관계자의 눈에 띄지 않는 어둡고 좁은 사이에서, 완전히 혼자가 되어서야 혜성은 무너진 것이다. 무릎은 진즉부터 풀렸었다. 정신력으로 버틴 걸지도 모르겠다. 어떤 연주를 한 것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반 아마데우스 단체 대표의 얼굴도 생각나지 않아. 가슴을 쓸어내리지만 손바닥은 내 체온을 전해주지 않잖아. “어. 어. 어흐으. 어허. 어허어, 어,”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 뒤로 잔잔한 선율만이 그에게 파고든다. 혼자가 되어서야 눈물을 쏟아내는 미련이 여기 있다. 처음부터 체념의 빛으로 누군가가 해결해 주는 모양을 간절히 지켜보며 흘렸어야 할 이것들이 지금에서야 마구 퍼부어졌다. 어깨는 경련을 일으켰는지 주먹 쥔 손을 뺨에 못 올 만치 떨어댄다. “어, 어마, 어허으, 어어, 으어어, 으어, 으버어어, 어, 어마, 어, 으. 으흐으으으. 으,”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로미오에게, 신입생에게 처분을 내려야 했던 스스로의 잔인함이 싫어서 혜성은 경련을 일으키며 마구 울었다. 허벅지가 들썩거리도록 흥분된 입술은 엉망이 된 울음소리를 터뜨렸다. “허, 허으으, 허, 허, 어끄, 끄,” 테레사. 어쩌면 이렇게 잔인한가요. 당신도 혹시 냉정한 말을 내뱉은 뒤, 홀로 눈물로 지새운 적 있으신가요. 악기를 부시라고 했던 당신의 입술은 얼마나 아팠을까요. 솔로의 자리는, 이토록 외롭고 잔인합니다. 당신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현재, 왜 제 옆에 계시지 않습니까. 나는 이제 당신을 마음으로 위로 할 수 있는데. 당신이 나를 위로 했던 것 보다 훨씬 많이 열린 가슴으로 포개 줄 수 있는데. 바로 그 때, 따스한 두 사람이 혜성의 앞에 앉았다. 눈물범벅인 선호와, 슬픈 표정의 동완이었다. 땀 범벅이인 걸로 보아 두 사람은 혜성을 한 참이나 밖에서 찾아 다녔던 게 틀림없었다. 그들은 당장 어린 아이처럼 울기만 하는 혜성을 보다 못 해 안아주었다. “어, 어어, 어흐으, 어, 어흐, 어흐,” “잘… 했어 혜성아….” “어, 어브, 어, 어허어, 어어, 어, 어, 어,” “괜찮아. 괜찮아… 이 바보 같은 녀석…아아…….” “어, 어허어, 허으, 허으으, 허,” 목소리가 함께 떨리기 시작하는 동완이 눈물을 삼키며 가여운 자신의 친구를 세게 안아주었다. 깡마른 어깨가 부서질게 두려워서 몇 번이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지만, 혜성의 동요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다. 삼천 명 앞에서, 난생 처음 보는 반 아마데우스의 출현에 이 친구가 얼마나 당황했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발을 마구 구르며 부들부들 떨던 혜성이 선호 선배의 자상한 음성도 들리자 서서히 진정하기 시작했다. “고맙다… 혜성아. 네가 아니었으면 내 동생은 퇴학당했을 지도…….” “…….” 그리고 신입생 연주회는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Right here, right now! I give my life to live again I'll break free, take me My everything, I surrender all to you Right now! I give my life to live again I'll break free, take me My everything, I surrender all to you wgreene@naver.com Right here, right now! 로미오군은 반 아마데우스 대표가 아니었습니다.^^ 자, 그럼 누구일까요? 힌트는 전부터 나왔습니다. 여하튼, 2악장 여정의 정확히 반에 도착했습니다. 지나왔던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볼까요? 밑바닥의 룸펜 -> 솔베이지 -> 샤우트의 유리, 충돌 -> 뮌헨의 민들레, 테레사의 샤콘느 -> 백의 사막 아마데우스로 컴백 혜성 -> 가십부활 -> 최초 학생재판 -> 피의 헬리아+레퀴엠(야외 콘서트장) -> 부활 아마데우스 분위기 -> 신입생 연주회(로미오) -> 반 아마데우스 맛배기(?) 여기까지가 2악장의 반 입니다. 나머지 반이 더 진행되면 2악장은 끝. 긴 휴식 뒤에 3악장. 그리고 저의 팬픽 집필은 끝입니다. 여러분이 저와 만나실 수 있는 때는 연재중의 댓글란이 전부입니다. 저 있을때 제발 만나십시오.^^ 아.. 나 매력없나? 나 꽤 괜찮은 녀석인데~ 쉴새 없이 요 몇달(3월~현재) 달려왔으니 당분간 재충전(?)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행복~하소서! 갑작스런 재충전 통보가 당황스럽지요? 뭘.. 원래 그런거야.^^ 문득.. 완결이 아닌 중간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참, 미남6총사 라는 팬행사의 신혜성 파트에 제 팬픽을 싩게 되었습니다. 멋진 행사에 참여하게 되서 행복합니다.(신혜성 파트에 저를 포함 작가는 세 명 이라고 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셩인에 가셔서 자세한 사항 확인하시고, 설문조사도 있던데 참여하세요.^^(재충전이 길어지면 책사서 읽어보시라고...+_+ 간만에 릭셩을 적어서 보내거든요. 많이 짧지만;) 피에스. 음악을 알려주신 귤님 고맙습니다. -잠시 이별(재충전)선언 화이트그린^^- 아마데우스 예고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8/23 15:21 http://blog.naver.com/wgreene/110007866759 Amadeus 음악 :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 예 고 편 그리고 반 아마데우스 등장 못지 않게 갖가지 일로 화려했던 신입생 연주회는 다음날 부착된 모세의 가십으로 총 정리 되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3학년 신입생 온누리는 창백해진 몰골로 자신을 알아보는 무리들에게 힘없이 손을 흔들었다. 선배인 동완이 반주를 맞춰 주었던 온누리는 평화로운 이름과는 정 반대의 행동을 보였었다. 그는 무대로 나가던 도중 구역질을 하더니 동완의 옷에 한바탕 토악질을 했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 뒤에는 우아한 건반에 토삿물을 쏟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가서는 그를 달래던 동완까지 나란히 무대 뒤에서 오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이제 자랑스러운 아마데우스 뱃지를 몇 십개 달아 봤자 온누리는 절망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것이다. 키득키득 웃는 상급생들과 마주치는 족족 붉게 달아오르는 뺨을 숙여가며 가여운 신입생은 결국 울음보를 터뜨렸다. 반 아마데우스에 대한 부분을 제외한 사사로운 것까지 몽땅 실린 모세의 가십은 신입생 환영회 라는 행사 덕분에 들떴던 분위기를 적당히 융화 시켜주기도 했다. 어쨌든 그의 가십은 정나미 떨어질 정도로 딱딱하고 재미없으니까. . . . "선배.. 알려주세요. 선배의 동생은 대체 누구지요?" "......" . . . "....." "....." 둘의 어색해진 태도는 함께 무대에 섰던 정다운 선후배 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어긋나기만 했다. 살랑이는 가을의 바람이 둘의 이마께에서 하염없이 싱글거렸지만, 둘은 겨울보다 차가워져 있었다. 그 두 사람을 지켜보는 주변인들이 답답해 할 정도로 날카로운 기류는 통 가시지를 않는다. . . . 서 쪽 기숙사동 대표 녀석의 말마따나 전체 회의실은 얼음연못처럼 벽 전체가 차가웠다. 혜성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 곳에 온 것을 후회했다. '수페리우스가 진짜 왔어.' '진짜다! 수페리우스다!' 강당과 비슷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서 쪽 기숙사 대회의실이 싫어서는 아니다. 아이를 보고 화색이 돌아서 떠드는 무리가 싫어서도 아니었다. 혜성은 그저 자신과 떨어진 자리에서 로미오 녀석과 마주쳐 있는 지금이 답답했던 것 뿐이다. "주.... 먹...." 주먹? "아, 아니.. 주... 목..." "?" "기... 숙.... 사... 회..의..를... 시작, 시작, 시작 하겠습니다." "?" 긴장하면 말을 더듬는지, 일전에 혜성의 방에 노크를 했던 눈에 익은 녀석이 더듬거리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뜨악 놀란 서 쪽 학생들은 낭패의 빛으로 긴 한 숨을 내쉬었다. '러시아 인형에게 반한거야.' 라며 소곤거리는 덩치 좋은 학생을 시작으로, 주변에서 기숙사장을 원망하는 질책이 하염없이 쏟아져 나왔다. '왜 말을 더듬는 거야!', '수페리우스는 이로서 우리들을 바보로 알겠지.' 제 멋대로인 학생들이 지내기로 유명한 서 쪽 기숙사동에서의 생활은 그들만의 규칙이 따랐고, 혜성은 그 점을 지키기로 했지만, 이 기숙사장 회의 만큼은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급기야 러시아 인형 운운하는 작은 소리들이 들려 올 때는, 괜히 민우 방에서 지내기로 했다며 자책했다. "최근에 로제리오 교수님이 또 한 번 악기 폐기에 대해... 승..인을..." "기숙사장님! 그것 말고 우리끼리 통하는 회의는 뭐 없을까요?" 식은땀을 흘리는 기숙사장의 말 문을 가로 막은 인물은 로미오였다. 로미오? 기분이 더더욱 불쾌해진 혜성은 때마침 자신과 눈을 마주쳐 오는 로미오를 무시하려는 취지로 홱- 고개를 틀었다. . . . "어딜 가는지만 알려 줘." "....." "문정혁-!!" . . .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거잖아요, 교수님. 저는 음악을 계속하면서 단 하나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도 이만한 가치의 예술 문화와 클래식이 있다는 것을요. 그러기에 앞서, 일단은 배워야 하잖아요." "그래서.. 너는 이 전공을 선택하기로 한 거니." 수페리우스는 기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wgreene@naver.com 예고편 이었습니다. 본편은 당신의 그리움의 표현이 짙어지는 언젠가... 반응 없는 글은 저도 재미없게 적힙니다. 미안.. 매일 외롭다고 해서... 그러니까 댓글로 표현좀 해줘. 쉬운말 있잖아요. 읽고 싶소 이런거. ㅠㅠ(퍽-) 행복한 주말 되세요.(수요일부터미리주말인사) -초록- 덧글 19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아마데우스 예고 화이트그린의 LEEHA 아마데우스 예고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36편(기숙사의 소문) ▼ 다음글 - 2악장 35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36편(기숙사의 소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8/25 18:31 http://blog.naver.com/wgreene/110007949753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825 36편 업데) * 포토로그도 클릭하세요.^^ Amadeus 음악 : 야니 - one man's dream (아래 플레이 버튼 클릭) One Man's Dream-Yanni 시련의 가을이 쏟아진다. 2악장 36편 아마데우스 언덕의 산새처럼 지지대는 청아한 선율과 현의 소리들이 하염없이 흘렀다. 지칠 줄 모르는 음표의 세기는 한 데 모아져서 무대 뒤 구석에 있는 세 사람에게 파도처럼 부딪혀 왔다. 눈물바다에서 익사한 것 마냥 창백해진 혜성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소름 끼치는 전율이 영원토록 달아나지 않을 것을 으스대며 자신의 몸 안에 붙박여 있다. 혜성은 침착하게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가며,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선호와 시선을 맞추었다. “선배… 알려주세요. 선배의 동생은 대체 누구지요?” “…….” “선-” 하지만 혜성은 자신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속 시원한 대답을 얻지 못했다. 수페리우스의 연약한 어깨를 꽉 잡아주는 동완의 눈물과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선호 선배의 참담한 표정이 짙어지자, 이제는 혜성 역시 묻고 싶은 것을 서서히 흐트린다. 그래. 지금은 나를 추스리자. 반 아마데우스를 만났고, 손가락이 꺾여도 일절 아쉬움 없는 연주를 마쳤으니, 그 연주의 정체를 생각하던가, 아무런 것도 생각하지 말자. 외로워도 그것을 자각하지 않으면 그 뿐이니까. 미쳐 버린 나의 마음은 또아리를 틀어 대며 테레사를 그리워 하지만, 그것마저도 망각의 샘에 적시자. 그러면 돼. 그러면 괜찮은 거야. 혜성은 눈물을 모두 닦았다. 떨림은 멈췄으며, 선호 선배는 여전히 이렇다 할 소리를 건네지 않았지만 혜성은 알 것도 같았다. 그래서 괜찮았다. 한층 성숙한 아이는 두 사람에게 다정한 인사를 건넨 뒤 등을 돌렸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화려한 박수 소리가 좌중으로부터 끊임없이 터져 나왔지만 멍멍해진 귓가에 세이는 바람 소리만 간신히 알아 들었기 때문이다. 동완이 온누리 라는 학생과 연주하는 것은 꼭 듣고 싶었지만, 혜성은 그럴 정신이 없었다. 자신이 지시한 대로 로미오가 학생 감옥에 갔기 때문에 우선은 그 녀석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멍청한 입술을 열어야 했다. 그래, 그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순서일 테지. 하지만 보고 싶어요. “괜찮겠니?” 보고 싶어요. 선호 선배는 혜성이 등을 돌려서야 안타까운 손을 내밀었다. 아이는 가볍게 걸음을 떼던 도중 살짝 고개를 틀어서 희미하게 웃었다. 여실한 연주회장 밖의 빛이 하프의 선율처럼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통증을 이겨내는 작은 입술이 말한다. “저는 언제나 괜찮았어요, 미카엘 선배. 나중에 봐요!” 잠시 음악과 시련 모두를 잊고, 보고 싶어요.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는 테레사를 보고 싶어요. 반 아마데우스, 신입생 연주회에서의 로미오, 당황했던 정혁의 모습, 테레사의 대변인이 되었던 아찔한 무대 위, 모든 것을 잠시 뒤로 미룬 뒤, 수페리우스는 늘씬한 등으로 끊임없이 인사를 하는 것처럼 조용히 뒷문으로 걸어갔다. 인적 없는 연주회장의 뒤쪽 복도를 걷고, 커다란 도어를 열자 그리스의 신전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밀려와서 아이의 넋을 위로했다. 넓은 지름을 자랑하는 흰 기둥이 암회색 바닥을 딛고 힘 있게 솟아 있었다. 양 쪽의 기둥을 아련히 응시하며 혜성은 다시 걸었다. 아주 오래 전, 자신이 신입생 연주회 날 테레사를 거역하고 헨델을 울려트렸던 때가 생각나서인지 아련함은 한 데 깊어졌다. ‘너를 저주한다고!’ 라고 소리소리 지르며 울부짖었던 옛 기억 때문인지, 그 당시 야속하기만 했던 정혁의 모습이 눈가에 밟힌다. 저 기둥의 그림자에서 숨어 있다가 나를 조롱했었는데… 그 때 정혁이는 그랬었는데… 우리의 시간이 참 많이 흐른 거야…. 바로 그 때, 몇 걸음 걷지 않아서 혜성은 눈을 비볐다. “문…정혁?” 덜컹- 가슴이 뛰었다. 그 당시, 정혁이 나타났던 기둥 쪽에서 사람의 윤곽이 천천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정혁이일까? 혜성은 약간 화색이 돌아오는 낯으로 재빨리 걸었다. 하지만 상상은 상상일 뿐, 기둥의 그림자에서 혜성을 기다리던 인물은 모세였다. 시련의 가을이 쏟아진다. 뜻밖의 인물을 만나서인지 혜성은 얼어붙은 채로 가만히 정지했다. 입술 사이사이 본드가 붙여진 것 마냥 쉬이 열리지 않는 가운데, 예상은커녕 의미조차 두지 않았던 모세가 저 자리에서 불쑥 나타난 것이다. “무슨 생각이지?” “…….” 여전히 자기 식대로 할 말을 꺼내는 모세의 커다란 몸을 쑥 훑어보며 수페리우스는 눈을 흐렸다. 반 아마데우스와의 대립에 비교하자니 모세는 오히려 반가울 지경이기 때문이다. “워싱턴인지 조단인지 알량한 신입생 놈을 학생감옥에 쳐 넣은 것도 다 이유가 있을 텐데?” “기자라면 네가 알아 내지 그래.” “…….” “…….” 다른 이들이 혜성을 테레사 못지않게 다른 눈으로 본다고 한 들, 모세는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혜성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등을 돌렸다. 그 행동이 모세를 자극했음은 물론이다. “기생이 따로 없군, 애송이.” “…뭐?” 아이의 덜미를 쥔 음성은 예상보다 날카롭게 찔렸다. “오죽 했으면, 히스클리프한테 매달릴까. 아이들은 네 주변인물이 네가 매달려서 이뤄낸 성과란 걸 알까?” “…….” 흐느끼는 음표가 보인다. 너에게도 뮤즈의 영혼이 있을까.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치운 선량한 자가 사실은 네가 아닐까. 혜성은 자꾸 공격해오는 모세를 무심하게 지켜보았다. 그럴수록 자극이 되었는지 모세는 격앙된 어절과 함께 코앞으로 다가온다. “몸이라도 팔았는가? 히스클리프는 남 여 가리지 않고 추앙한다지?” “…….” 얼마나 속이 꼬였으면 저런 생각을 할까. 일전에 동완이 얘기해 준 내용이 휙 스쳐 지났다. 단 한 줄의 가십이 모세에게 배달되었던 때가 떠올랐지만, 이야기를 들었던 첫 마음처럼 기쁠 수는 없다. “왜, 이번에는 히스클리프로도 부족해서? 아닐 텐데? 적어도 그는 낙오자는 아니잖아?” “!” 가슴이 뚫린다. 낙오자? 시퍼런 통증이 아물기도 전에, 용맹한 사수가 되어 그는 창과 활을 던졌다. 고름이 터지기 직 전, 그가 쏜 화살은 야비한 입술을 열었다. 설마 하던 이름이 겁에 질린 귀 마저 뚫자, 마비 된 청각은 없는 힘을 발휘하였다. “이민우 대용품으로 썩 괜찮… 읏!” 우당탕 몸을 날린 수페리우스는 머리에 체중을 실어서 무방비 상태의 모세를 자빠뜨렸다. 감각을 잃은 본능에의 청각은 더더욱 힘을 발휘하여 혜성을 모세의 배 위에 앉게 만들었다. 초점 잃은 아이의 눈동자는 모세의 당황해 하는 표정 위로 달콤하게 웃어 주는 민우를 읽었기 때문이다. 이글거리는 불꽃처럼 거대해진 작은 몸은 모세를 고체보다 딱딱하게 변화시켰다. 허리를 숙인 채 모세의 멱살을 쥔 혜성의 본능은 불길이 되어 타오르기만 했다. “입 닥쳐….” “!” 수페리우스의 입 밖으로 허스키한 어절이 나오자 움찔 놀란 모세는 기가 막혔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가을의 높고 수려한 하늘은 푸르르기만 했다. 휭휭대는 바람은 언덕에서부터 쏠리는 가을의 여러 가지들을 그들에게 던졌지만 혜성은 미동 없이 모세를 노려보았다. 히스테리칼한 아이의 어절은 음표처럼 모세의 귓가에 찔려 들어간다. “네가 어떻게- 니가 어떻게- 감히 네가 어떻게 민우를 그딴 식으로-” “…….” 흐릿해진 동공과는 별 개로 빠릿 한 어투가 모세를 위협한다. 거칠게 멱살을 쥐고 위 아래로 흔드는 바람에 모세는 몇 번이나 바닥에 머리를 부닥쳤지만, 난생 처음 보는 과격한 수페리우스에게 놀라서 가만히 지켜보기로 한다. “자… 자, 잘 들어라 모세. 앞으로 나를 어떻게 괴롭혀도 나는 상관 안 해.” “…….” 뚝- 투둑. 바닥에 누운 채 심드렁한 표정을 고수하던 모세의 안면 곳곳에 굵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짐승처럼 숨소리를 거칠게 내보내는 혜성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모세의 상체를 들어 올린 뒤 바닥에 쾅- 누르며 흐느끼듯 말했다. 미안해 민우야… 이런 소리 듣게 해서… “너 따위 나는 무섭지도 않아. 멋대로 상상해라! 하지만 지킬 건 지켜라. 내 앞에서 또 한 번 이딴 식으로 민우와 히스를 떠들면- …지금 만큼의 이성도 지탱하지 못 해서, 나는 너를 죽일 지도 몰라.” “글세 그…….” 테레사… 어디 있어요…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외로운 당신의 나라에서 둥지가 되어 드릴게요…. “너의 심장을 죽일 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아프게!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다가 성대가 나가도록!” “!” 나의 심장을? 설마 이자벨을! 나의 가여운 이자벨을? 모세의 눈빛이 그 제서야 무시무시하게 변했다. “너… 너 따위 거… 난 하나도 두렵지 않아. 너 따위….” “체-” 각자의 슬픈 이유를 달고, 젊은 둘은 성대를 떨리웠다. 각자의 이유 때문에 무거워진 넋을 방패삼아 아픔을 서로에게 찔렀다. “…너 따위… 난 신경 쓸 가치도 없어. 불러! 부르고 싶은 대로 애송이 머저리라고 불러!” “…….”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걱정하지 말고 당신의 외로운 나라에 수풀이 찬란하도록……. “나는 그럴수록 웃어 줄 테니….” “…….” 제가 도와 드릴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때를 잘 골랐구나 모세. 반 아마데우스는 둘 째 치고, 연주의 감각에 영혼이 마비 되서, 내 육신에는 본능만이 남아 있지. 이런 나에게 말을 걸다니, 너야말로 대단한 녀석이구나.” “하…….” 꽤 충격을 받았는지 모세는 작은 몸을 함부로 치지 못 했다. 아니, 그는 정말로 화가 나서 수페리우스의 가벼운 몸을 기둥에 집어 던지려 했지만 1차 휴식 시간을 맞이하여 우루루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과 관계자들 덕분에 기회를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재수 없는 자식. 너 같은 게 테레사 대리인이라니, 너야말로 아직 멀었다, 애송이.” “…….” 그는 싸늘하게 한 마디를 남기더니 홀연히 모습을 감췄다. 상당한 인파가 혜성을 알아봤는지 반갑게 달려오고 있다. 아이는 당장 힘없는 몸을 일으켜서 도망치듯 인파를 피해 달려갔다. 시련의 가을은 아직 끝나지 않은 거야……. 실로 오랜만에 찾는 학생 감옥 앞에서, 혜성은 기도를 드리듯 잠깐 동안 고개를 숙였다. 훈훈한 감정이 깨알처럼 몰려들어 발아래에서 간질거렸다. 민우의 피부와 호흡이, 덩달아 끔찍했던 혁명의 모습이 유화처럼 채색되었다. 그것들은 현재가 아니라지만, 때때로 그 당시보다 잔혹하게 재생되기 마련이다. 사람의 기억이란 그런 것이다. 혜성은 조용히 아래로 내려갔다. 뻥 뚫린 어두운 내부는 시원하다 못 해 춥게 느껴졌다. 어깨를 편 수페리우스는 아마데우스의 수려한 공간 중에서도 가장 안정감을 주는 학생 감옥이 외려 반가웠는지 편안하게 걸었다. 예전 같았으면 덩치 좋은 위원회 녀석들이 로미오를 데려갔겠지. 그럼 내가 테레사인가? 하하하. 속마음이 쾌활하게 웃자 입 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하얀 러시아 인형처럼 나타난 수페리우스가 천천히 두꺼운 철창을 쥐고 무릎을 굽혔다. “선배….” “…….” 가지런하게 앉아있던 로미오가 하얗게 반짝이는 혜성의 등장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 한다. 오래 전, 민우가 죽어가던 감옥은 좀 더 구석에 있었는데… 혜성은 희미하게 웃으며 표정과는 달리 날카롭게 쏘아 붙였다. “나는 너를 착각하며 지냈는지도 모르지….” “선…….” “연주는 형편없었다.” “…….” 감정은 일시적으로 정지했다. 혜성은 스스로의 이런 조절 능력이 신기할 정도였다. 거침없이 쏟아내는 입술은 반 아마데우스와 대립했을 때 보다 덜 아파서 괜찮았다. 상냥한 척 굴었지만 나는 너를 완전히 모르는 이상, 이렇게 대할 수밖에 없어. “반 아마데우스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마.” “…….” 부드러운 듯, 하지만 차가운 혜성의 목소리는 로미오와 철창을 사이에 두고 마주치는 족족 짙어졌다. 두 사람의 어두운 그림자가 길어져 가고 있었다. 로미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후에 연주를 재생할 필요조차 없다, 로미오.” “연주 할 수 있어요. 하게 해 주세요, 선배.” “아니.” “…….” “너의 가치가 올라가는 날에 들을 생각이다.” “감옥에서 나가면… 저랑 말도 안 할 건가 봅니다?” “그래.” 로미오는 잘 생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혜성의 침착한 말투와 행동이 도리어 소름 끼쳤는지 의아하게 속의 것을 묻는다. “무섭지 않으세요? 이렇게 침침하고 사나운 곳인데…….” “안 무서워.” 새삼 주변을 둘러보며 수페리우스는 엷게 웃었다. 러시아 인형으로 변하지 말아요… 라는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로미오와는 달리, 수페리우스는 감옥에 와서야 모든 안정을 되찾은 사람처럼 가볍게 대답해 주었다. “침대보다 편한 곳이거든.” “?” “잘 지내라. 앞으로 네가 뭘 하던지 나와는 관계없겠지만.” 싸늘하고도 정확한 마지막 문장을 내뱉은 뒤, 혜성은 일절 아쉬움 없이 몸을 일으켰다. 너무 많은 것이 한꺼번에 터져서 실제 감정은 무감각하기만 했다.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듯 예민한 세포들이 발작을 일으켜도, 진짜 감정은 평탄한 것이다. 여실한 빛이 창살 안쪽으로 투두두 밀려들어온다. 그 빛을 잠자코 지켜보던 것도 잠시, 혜성은 등을 돌렸다. 그러자 철창이 콱 움켜쥐는 소리가 들렸고, 약간의 격정을 지닌 로미오의 음성이 회오리처럼 쏠려왔다. “그런데 선배!” “…왜.” 흠칫 놀란 혜성이 등으로 대답한다. 로미오는 아예 일어섰는지 다급하게 물었다. “또 울었어요?” “…….” “왜 울었어요!” 피식 웃음이 세어 나온다. 네 정체나 먼저 밝히지 그래? 마음으로 읽힌 글귀가 입 밖으로 쏟아지려던 찰나, 혜성은 옅게 고개를 흔들며 비꼬듯이 차갑게 대답했다. “울지 않았습니다. 후배님은 그 딴 것에 신경 쓰지 마시지요.” 네가 그런 말 할 위치인가? 혜성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비록 혜성의 등만 보는 입장이라지만 아이의 서늘함은 로미오에게도 충분히 전달되었으리라. “나 때문에 울었을 리는 없고…….” “…….” “왜냐하면 아직 저는 선배에게 눈물이 아니니까요.” “?” “고마워요. 일을 이렇게 처리해 줘서.” 저벅 저벅 잘 걷던 혜성이, 뚝 하고 걸음을 멈추더니 내내 생각하던 것을 묻는다. “넌… 그들과 무슨 관계지, 로미오?” “…….” 짙어진 가을의 향기가 젊은 둘의 가슴에서 요동친다. 정처 없이 사람의 가슴을 뒤 흔드는 실락의 향기가 둘의 콧 전에 어른거린다. 학생 감옥에 가을의 내음과, 마리아 칼라스의 붉음이 살레 살레 뿌려질 때를 잘 맞춰서, 혜성은 등으로 다시 물었다. “그들의 대표가 누구지?” 냉정한 수페리우스의 귓가에 맥 빠진 소리만이 전달되었다. “…그건 저도 몰라요.” 또 한 번 닥친 실락의 가을이 젊음을 활활 태우기 시작했다. 기숙사의 소문? 아마데우스가 시끄러워 진 것은, 신입생 연주회가 있은 지 하루가 지나지 않아서였다. 선배와 함께 거대한 행사를 치룬 젊은 학생들은 열기가 채 식지 않았는지 아직까지도 연주회장의 대기실에서 꽥 꽥 소리치는 표정들이었다. 반면 현실적인 학생들은 저희들의 오만한 콧대와 지식을 앞세워 가며 수페리우스와 반 아마데우스에 대해 토론을 벌였지만, 결과는 오리무중이었다. 우아한 담 밖으로 농부의 이삭이 날아오는 계절이 아니던가. 아마데우스 정복을 입은 아름다운 학생들은 자신들의 젊음에 도취된 줄도 모르는지 신이 나서 곳곳을 활개 친다. 그리고 반 아마데우스 등장 못지않게 갖가지 일로 화려했던 신입생 연주회는 다음날 부착된 모세의 가십으로 총 정리 되었다. 로제리오 교수와 수페리우스, 그리고 인쇄동의 대표인 테오제네스의 합의로 적힌 모세의 글귀는 많은 이들을 한 데 모이게 했다. < 성대한 불꽃들의 활약 > “가십이다!” “누구야? 테오제네스? 아… 아니구나. 모세야, 모세다!” “거기 비켜 봐! 다 읽었으면 비키는 게 예의 아니니?” 커다란 제목은 움직이는 것처럼 힘이 느껴졌다. 많은 학생들이 몸을 부닥치며 게시 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를 썼다. 모세 특유의 필체는 적당히 즐겁고, 또 그만큼 확실시된 것만 밝히고 있었다. < 한국 아마데우스에 신입생 연주회가 다시 부활되었다. 초대 명사들을 비롯하여 많은 인쇄 매체에서 주목하는 가운데, 젊음의 글귀를 필두로 모인 학생들은 선후배가 하나 되어 음악회를 열었다. 총 4시간 30분 동안 진행 되는 가운데 예전과 달라진 점 몇 가지를 찾을 수 있었다. 연주회장의 위엄을 다시 찾은 샹드리에 장식은 기존의 것 보다 지름이 30cm가 넓어졌으며, 각 지에서 협찬을 받은 장식들과 구조가 황금색을 이루었다. 3학년 신입생들 중, 뛰어난 연주 실력을 보인 남 쪽 기숙사동의 몇 명은 그들과 호흡을 맞춘 선배들과 함께 몇 가지 특혜를 받을 예정이다. 로제리오 교수와 수페리우스의 휘하 아래 차분히 진행 되었지만, 재미있는 사건들도 많았던 신입생 환영회를 돌이켜 보자. 엄숙하고도 웅장한 분위기에 긴장한 3학년 온누리 학생의 실수라던 지, 건반 미스를 내는 4학년의 오세관 학생의 해프닝은 작은 웃음과 화제를 낳았다. 예전과 비교했을 때 실수가 잦았던 이번 연주회에서 신입생들은 아마데우스와 한결 가까워진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완벽해야 할 연주회에서의 실수는…… > 게시대의 중간 부분에서 누군가가 꽥 하고 소리쳤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온누리였다. 그와 친한 무리 몇 명이 약을 올리듯 그의 어깨를 툭 툭 쳤다. “온누리! 이야~ 네 이름이 가십에 실렸어!” “시끄러워!” “하하하하!” 그 때 동완과 잘 알고 지내는 몇 명이 온누리를 알아보고 아는 척을 해 왔다. “사람이 정말 많구나. 여기서 저 글자를 다 읽는 건 기적에 가깝겠다. 그렇지 온누리군?” “힉! 서, 선배님.” 3학년 신입생 온누리는 창백해진 몰골로 자신을 알아보는 무리들에게 힘없이 손을 흔들었다. 선배인 동완이 반주를 맞춰 주었던 온누리는 평화로운 이름과는 정 반대의 행동을 보였었다. 그는 무대로 나가던 도중 구역질을 하더니 동완의 옷에 한바탕 토악질을 했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 뒤에는 우아한 건반에 토사물을 쏟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가서는 그를 달래던 동완까지 나란히 무대 뒤에서 오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이제 속은 괜찮은 거니? 동완이는 속옷을 다섯 번이나 빨았다더라. 하하하하!” “선배니임… 선배님들….” “뭘~ 괜찮아! …큭큭.” “!” 이제 자랑스러운 아마데우스 브로치를 몇 십 개 달아 봤자 온누리는 절망에서 헤어 나올 수 없을 것이다. 키득키득 웃는 상급생들과 마주치는 족족 붉게 달아오르는 뺨을 숙여가며 가여운 신입생은 결국 울음보를 터뜨렸다. 반 아마데우스에 대한 부분을 제외한 사사로운 것까지 몽땅 실린 모세의 가십은 신입생 환영회라는 행사 덕분에 들떴던 분위기를 적당히 융화 시켜주기도 했다. 어쨌든 그의 가십은 정나미 떨어질 정도로 딱딱하고 재미없으니까. 대개 학생들이 가십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과는 달리 그것에 전혀 관심 없어하는 류도 있었다. 게시 대를 시큰둥하게 지나친 혜성은, 몇 명 아이들이 말을 걸어 올 때만 상냥하게 화답한 뒤 재빨리 기숙사로 돌아왔다. 어제부터 지끈거리는 두통 때문에 그는 무조건 피아노 연습에 박차를 가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작은 소원마저도 무산될 지경에 이르렀다. 혜성이 눈앞의 것에 몰두하고 나아가는 것에 반 해, 아이가 지내는 서 쪽 기숙사동에는 흉흉한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조용히 지내며 방에서는 잠을 자거나 피아노만 두드리던 혜성이 소문의 글귀를 눈치 챌 정도면 상당히 심각한 게 틀림없었다. “이게… 뭐지?” 방문을 열기 직전, 노란 종이가 문고리에 걸려 있음을 발견한 수페리우스는 약간 귀찮은 표정으로 내용을 확인했다. 확인할수록 귀찮은 감정이 밀려왔지만, 때로는 나 자신 이외의 것에도 관심을 줘야 하겠지. 노란 쪽지의 내용은, 일전에 안면을 튼 기숙사장이 큼지막한 글씨로 적은 ‘비상 회의 소집’에 관한 것이었다. “회의?” 혜성은 잠깐이지만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다. 조용히 연주만 하고 싶은데 욕심을 채우자니 많은 이들이 응집한 서 쪽 기숙사동의 단체 활동을 무시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특실에서 독단적으로 지냈을 때는, 그 누구의 터치도 받지 않아서 아이의 연주는 자신이 원하는 때 실컷 무르익을 수 있었다. 가끔 남 쪽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동완이 찾아오는 것을 제외하면 특실에서의 생활은 자유롭기만 했다. 레슨 받고, 수업을 들으면서 조용히 연주에 취중하며 지냈는데 단체로 옹기종기 모인 서 쪽 생활은 영 불편한 게 아닌데… 라고 느끼면서도 혜성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일주일 후로 예정된 회의가 어떤 형식으로 진행되는 가도 궁금하긴 했다. 혜성은 어쩔 수 없는 자신의 호기심에 혀를 내두르며 피아노와의 휴식시간을 오래 도록 가졌다. 가벼운 악보를 무겁게 누르면 누가 뭐라 할지라도 수페리우스에게는 장송곡이 된다. 향긋한 왈츠를 빠릿하게 누르고 페달을 사정없이 밟으면 삽시간에 행진곡이 된다. 사소한 것에 재미가 들린 혜성은 간혹 자신의 방문에 노크를 하고 달아나는 학생들을 가까스로 상대해 가며 온 종일 피아노 건반만 눌렀다. 사건이 많다 한 들, 어쨌든 아이는 음악과 떨어질 수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만간 사비나 교수님께 전공을 말씀 드려야 하지 않던가. 무겁게 짓눌렸던 연주회장에서의 사건들은 미약한 휴식으로 완치가 되었는지, 수페리우스는 보다 가벼운 기분으로 자신의 현실과 마주보게 되었다. 어쨌든 모두가 쉬쉬하는 가운데, 발이 달린 소문의 글귀는 아마데우스 전역에 퍼졌다. 이제는 수페리우스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는지 입술을 열었다. “소문?” “그래. 소문.” 식당에서 막 만난 동완에게 식판을 받는 즉시 혜성은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한동안 대답이 없는 동완을 기다리며 혜성은 시큰둥한 투로 중얼거렸다. “너희 남 쪽 기숙사도 그러니? 서 쪽 기숙사동에는 회의가 있어. 이제 곧… 동완아. 나는 특실에서 지내면서 얼마나 내 개인 위주로 잘 지내 왔는지 확실히 깨달았지.” “음…….” 우걱우걱 밥을 퍼 먹는 동완을 마주보며, 혜성이 긴 숨을 내쉬었다. 언제나 심도 있게 관찰한 뒤, 서슴없이 문장을 읊는 동완이 아니던가. 아이는 자신의 절친한 벗이 어떤 말을 꺼낼지 귀를 기울였다. “혹시 그게 아닐까? “뭐?” 옳지! 반갑게 목을 쑥 내밀며 혜성이 총명하게 눈을 빛냈다. 미래의 심리학자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그 소문 말이지…….” 그 때 오싹한 그림자가 툭 나타났다. “무슨 소문?” “…헉!” 아찔한 신음과 함께 동완의 신중한 태도며 말은 거기서 끝이 났다. 불쑥 나타나서 무슨 소문? 이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들의 옆 자리에 싸늘하게 앉는 미카엘 선배 덕분이다. “으엑! 김동완!” “!” “동완아!!” 뜻하지 않게 출현해 준 선호 선배의 단정함 때문에 놀랐는지, 동완은 입 안에 퍼 넣었던 밥과 국물을 줄줄 흘리고야 말았다. 그는 입을 닦을 새도 없이 수치심에 그만, 홍당무가 되어 식당 밖으로 부리나케 뛰쳐나가 버렸다. “동완아!!” “쯧쯧….”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 혜성이 난감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자, 조용히 수저를 든 선호가 고개를 저으며 앉으라는 말 대신 팔을 움직였다. 하는 수 없다는 듯 혜성이 제 자리에 앉자, 맞은편의 선호가 동완이 어질러 놓은 식판이며 땅에 떨어진 수저를 가지런히 정돈한다. “…….” “…….” 그리고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조용히 식사를 하는 게 아닌가! 동완이 치를 떨 정도로 샤프하고 단정하다 못 해 냉정한 게 미카엘 선배라는 것은 익히 들어 알았지만, 혜성은 실상을 마주보자 그에게 압도되어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동완이를 쫒아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선배한테 양해를 구해야 할까? 일명 모범생 분위기인 선배에게 가까스로 죄송하다는 인사를 건네려고 입술을 오므리는 혜성과는 달리, 침착하게 수저를 움직이던 선호가 또 불쑥 말을 꺼냈다. “동완이는 모를 거다 수페리우스.” “…예?” 마악 반찬을 입에 넣는 동시에 서늘한 눈동자를 치켜 올리며 선호가 계속 말을 잇는다. “저 애는 남쪽 기숙사에서 지내니까 우리 쪽 소문을 알 리가 없지.” “…….” “네가 궁금해 하는 게 소문 아니니? 그래서 우리 쪽 기숙사장이 긴급회의를 소집한 거겠지.” “…….” “기숙사 건물 뒷마당이 분위기가 스산하잖아.” “그랬나요? 조금 어두운 것만 느꼈는데….” 시무룩해진 혜성이 문득 귀엽게 보였는지, 보이지 않게 미소를 짓던 선호가 약간 목을 숙였다. 그리고는 훨씬 위협스러운 투로 의미심장하게 말을 꺼내는 것이다. 덩달아 심각해진 혜성이 그의 쪽에 바짝 상체를 숙이며 엉덩이를 뿔룩 뒤로 내밀었다. “나도 그렇게만 여겼지만, 여하튼 새벽 한 시 정각에 뒷마당에서 악기를 연주하면….” “…….” 꿀꺽 침이 삼켜지고, 손에는 땀이 축축하다. 혜성은 조심조심 주변을 살피며 선호를 재촉하듯이 바짝 올라간 귀를 끄덕였다. 풋! 하고 옅게 웃은 뒤, 선호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테레사를 만날 수 있대.” “예에?!” “…농담이야.” “!” 실로 허무해진 혜성이 붉어진 낯으로 제 자리에 주저앉자, 무심하기 짝이 없는 선호의 음성은 도리어 짙어져 간다. “소문은 파고들면 아주 많단다, 수페리우스. 놀랄 것 없어. 남쪽에서 지내는 애들은 실력파가 많거든. 그 애들은 악기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 게 고민이라지? …너도 그렇겠지만.” “…….” “어쨌든. 서쪽 애들은 악기의 한계를 거들먹거릴 정도로, 아니. 그 반만큼이라도 실력 향상이 되길 바라는 애들이 대다수거든. “ “아….” “그래서 소문이 많지. 현실적인 거로 예로 들자면… 그 외에도 뭐… 반 아마데우스가 서관 뒷문으로 몰래 들어와서 아마데우스를 활개치고 있다던 가…….” “정말요?” 토끼처럼 활짝 열린 표정으로 혜성은 금 새 방긋 웃었다. 신선한 감정이 깨알처럼 밀려들었다. 재미있는 전래 동화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이러할까? 어쨌든 소문 이라는 것은 사람의 관계에 있을 어색함을 싸그리 지워 주는 힘이 있었다. 주변의 몇 명 학생들이 수페리우스를 주시하는 게 뚜렷하게 느껴졌지만 아이는 익숙해져서 모른다. 도리어 선호에게 어서 많은 이야기를 해 달라는 듯 눈을 반짝이기만 한다. 정말요? 정말 이예요? 반 아마데우스가? “아니.” “?” 또 아니라고? “…그러니까 소문이랬잖아.” “…….” 김이 빠진 수페리우스의 변화를 신기하다는 듯 쭉 응시하던 선호는 다시 수저를 움직인다. 무표정으로 밥을 먹지만, 그 와중에도 나직이 음성을 흘린다. 그렇게, 그들의 가을은 다시 찾아오고 있었다. “소문 말고도, 남쪽 애들이랑 신경전 때문에 단합 겸 해서 회의 하려는 걸 거다.” “…신경전이요?” “…….” “…왜요?” 한 템포씩 늦춰가며 신중하게 묻는 혜성을 바로 보며, 선호는 숨을 내쉬었다. “수페리우스.” “…예?” 만약 상대가 동완 이었다면 대꾸조차 제대로 안 했을 미카엘 선배는, 인내심의 한계에 달했는지 억지로 입 꼬리를 올리며 상냥하게 마주보았다. 연약한 햇살이 수페리우스의 노오 란 머리칼에 달라붙어 있다. 연주회장에서 보여주던 눈물과 강인한 힘은 없던 것처럼 사라져 있지만, 그래서 수페리우스가 더더욱 신기하게 다가온다. 식사를 조용히 끝내고 싶었는지 미카엘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서 가라.” “?” “너를 봐서 반갑긴 하지만… 대답해 주느라 내가 밥을 전혀 못 먹고 있어.” “…네에….” “반가웠다, 수페리우스.” “네….” 언제 차갑게 말을 꺼냈냐는 듯 따뜻하게 웃어주며 인사말을 꺼내는 미카엘 선배는 오싹할 정도였다. 식당 밖으로 나서며 힐끔 힐끔 뒤를 돌아보았지만, 역시나- 등을 꼿꼿이 세운 미카엘 선배는 정갈한 모양새로 식사에 열중하는 중이다. 혜성은 저런 사람을 사랑하게 된 동완이 문득 측은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테레사를 사랑하는 자신이야 말로 남들 눈에는 측은해 보일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 누가 뭐래도 자기 마음이 중요한 거지. 아이는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서슴없이 닥친 가을이 아마데우스 전체를 붉게 치장하고 있었다. 저 아름다운 분수대의 물줄기도 뜨거운 겨울을 기다릴까. 이제 얼마 가지 않아서 멎을 거야…. 표지 : 하루진님이 메일로 주셨습니다. 정말 멋있어요. 고마워요 하루진님. wgreene@naver.com 1악장, 테레사가 수페리우스에게 하프의 선율을 알려주던 편에 깔았던 음악입니다. 야니의 음악은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이 음악을 듣고 많이 바뀌었지요. 어떻게 들으면 슬프고, 어떻게 들으면 기쁘고.. 그렇지요? 슬프기도 하지만, 기쁘기도 하고.... 눈물 나게도 하고.. 눈물을 멈추게도 하고.. 멈췄던 눈물을 다시 쏟아지게 하고.. 음악은 어떻게 보면 마법사의 지팡이 같습니다. 아마데우스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지금의 저를 도피시켜 줬거든요.. 이런 마음으로 적으면 안 되는데.. 하하..(그래서 후에 수정하게 될지도.. 안그럴 것 같지만..) 당신에게 늘 행복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뿐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wgreene- 덧글 18개 엮인글 쓰기 /data18/2006/8/25/117/h-9902-wgreene-wgreene.jpg@nhn@177829@nhn@1@nhn@550@nhn@778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36편(기숙사의 소문) /data18/2006/8/25/117/h-9902-wgreene-wgreene.jpg@nhn@177829@nhn@1@nhn@550@nhn@778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36편(기숙사의 소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37~38편 ▼ 다음글 - 아마데우스 예고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37~38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8/27 18:33 http://blog.naver.com/wgreene/110008035377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827 37~38편 업데) * 포토로그도 클릭하세요.^^ Amadeus 음악 : 12월 - 사랑과 야망ost 中 (아래 플레이버튼 클릭) 12월(December)[Instrum.. 나는 무엇을 먼저 해야 옳은 것일까. 지평면을 물들이는 진분홍의 노을처럼 마냥 넋을 잃고 싶을 때가 많은데. 무거운 유령이 양 쪽 어깨에 달라붙어 나를 따라다니는 기분인데. 나는 무엇을 먼저 해야 옳을까. 무엇은, ‘무엇’ 일까. 2악장 37~38편 서 쪽 기숙사에 흉흉한 소문이 들끓는다는 것으로부터 자극을 받은 남 쪽 기숙사에도 일부러 만든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문은 소문일 뿐, 현실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재의 아마데우스는 눈앞에 해결할 것이 너무 많아서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 ‘소문’이라는 단어를 얕보는 사람들이 훗날 땅을 치고 후회하는 일이 생길지라도, 소문은 말 그대로 소문이다. 바야흐로 추수의 계절이 끝나 간다. 이제 4학년 전원은 자신이 전공할 과목을 신청해야 한다. 많은 학생들은 자신이 잘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의 깊은 방황으로 여념이 없다. 혜성도 마찬가지였다. 반 아마데우스와 학생회, 기타 등등 수페리우스 라는 이름의 무게와는 별 개로 아이는 일반 학생으로서 마땅히 치러야 할 여러 가지들을 넘어야 했다. 분수대 근처를 서성이는 4학년 학생들은 밤낮으로 고민한 흔적을 각자 떠들기 일 수였다. 오늘도 다르지 않다. “하프 과는 바이올린과 애들하고 사이가 안 좋잖아. 그럼 취미로 남겨 둬야 할까?” “그래도 나는 2차 지망에 바이올린을 지원할 까 생각중인데…….” “보편적인 게 유리하지. 콩 쿨에서 입상을 자주 해야 다른 아마데우스의 교환 학생으로 뽑힐 확률이 높아지니까. 난 역시 피아노야.” “우리들은 큰일이구나. 3학년이나 5학년들은 좋겠어. 선택이 멀었고, 또 선택을 마친 상태니까.” “3차 지망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계절을 잊은 그들은 진심으로 걱정 된다는 듯이 만나기만 하면 같은 내용을 떠들었다. 그런다고 해결 될 일은 아니지만 그들은 대화만으로도 적잖이 안심이 되는 모양이다. 그들의 대화가 짙어질 때마다 혜성은 체증이 쌓인 것처럼 창백해졌다. “수페리우스!” 가끔 4학년 학생들 중 용기 있는 몇 명은 조용히 길을 걷는 수페리우스에게 말을 붙였다. 자신들과 같은 학년인 그가 반가운 모양이었다. “아… 정말 피아노밖에 없니? …수페리우슨데? 하긴…….” 그리고 혜성의 머쓱한 대답이 지나면, 그들은 한결같은 반응을 보였다. 너는 어떤 전공을 택할 거니? 아. 그렇지. 너는 수페리우스지만, 정말로 테레사의 ‘초대’에서 시작됐었지. 그렇다고 진짜 피아노밖에 없는 거니? “…….” 3차 지망까지 전공을 정하면 해당과의 교수들이 테스트 겸 간단한 시험을 치룬다. 그리고 각 과 교수들끼리 회의를 통해 학생들의 수순이 지정 되는 것이다. 이 점은 수페리우스 라는 이름이 하늘보다 높다 한 들 피해 갈 수 없는 관문이었다. 혜성은 자신의 연주 실력이 평소 보다 무대에서 발휘 된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아이는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악기가 피아노에 한정되어 있는 것 역시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될 문제였다. 대게 학생들이 세 네 가지 악기를 다룰 줄 아는 것에 비하면 혜성은 한 참 배우고 익혀야 할 입장인 것이다. 이에 혜성은 고민에 빠졌지만, 이제 와서 새로운 악기에 정을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슈베르트의 미성처럼 곱디고운 목소리를 이용하라고? 아니다. 합창을 사랑하지만 그것에 승부수를 걸자니 수페리우스는 답답하고 옥죄이는 느낌에 숨이 막혔다. 악기의 전부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지휘 과를 선택할까? 그것은 약간의 피아노 기본기만 갖추고 무작정 아마데우스에 입학했던 때 보다 무모한 선택이다. 실력은 한 참 먼 것들 천지라 할지라도, 혜성은 모두 해 보고 싶었다. 가능성을 의심했던 성가대에서 소프라노를 경험했듯이, 피 땀 흘려 노력한 피아노 실력을 무기로 해서 헬리아를 쟁취했듯이, 이제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라도 평생을 투자할 만 한 가치 가 찾고 싶어진 것이다. 그러나 여느 학생들처럼 전공에만 신경 쓰자니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전에 동완이 야기해 준 로제리오 교수의 악기 폐기 건을 곧 있으면 협상해야 하고, 말을 내뱉은 이상 언제고 반 아마데우스 일을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새털처럼 가볍게 날아다니며 잘 지내고 싶었는데, 확실히 테레사와 민우가 내 곁에 있을 때와 지금은 판이하게 달라. 나는 힘든 걸까. 사실 속은 많이 힘들어 하는데 겉으로는 자각하지 못 하는 게 아닐까. 연주회 이후 일주일이 지났지만, 수페리우스는 교수들이 호출하는 관계로 몇 번이나 수업을 빠뜨렸으며 윙윙 돌아다니는 걱정거리들 덕분에 오르페우스 관에 있어 봤자 제대로 된 연주를 마칠 수가 없었다. 옛 선인들의 말은 틀리지 않은 걸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엇을 갑자기 내가 맡는다는 건 이른 일일지도 몰라. 고풍스러운 담갈색 벽지에 기대어 앉은 로제리오 교수는 시선을 흐리는 수페리우스에게 약간 커진 소리로 다시 말했다. “…해서, 반 아마데우스의 위치는 네가 직접 알아보면 좋을 것 같다. 수페리우스.” “…….” “수페리우스?” “…….” 찾아오고야 말았어. 사람이 죽어도 잔인하리만치 아름다운 세상은 돌아가는 거야… 아까도 바람이 세차게 피부를 스쳤어. 살아 있다는 거지. 그런데도 나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할 지 막막하기만 해. 테레사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는 그래도 실력이 뒷받침 되어서 별다른 문제가 없었을 거야. 나는 항상 준비해야 한다고 하는데, 돌이켜보면 준비 없이 맞이한 상황이 많았는데, 이번에도 나를 차지하려고 덤비는 거야. 가을에 들뜬 아이들의 뒤에서 왜 나 혼자만이 미천한 감수성 때문에 벌써부터 시린 겨울을 원망할까. 올 해에도 어김없이 뜨거운 겨울은 그 심장을 감추고 우리들을 얼릴 테지. “수페리우스!” “…아, 예.” 수페리우스 라는 이름의 값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두려움과 갑갑함은 아이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위해 안 간 힘을 쓴다. 근 일주일 사이 수척해진 혜성은 희게 말라버린 러시아의 골동품처럼 변했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지요?” “죄송합니다, 로제리오 교수님.” 지난 번의 연주회 이후로 로제리오는 틈만 나면 수페리우스를 자신의 집무실로 호출했다. 학생들과 관련된 단체가 아마데우스 내부에 없는 이상 당연한 결과였다. 최근 수페리우스는 곧있으면 자신이 선택해야 할 전공과, 진이 빠질 정도로 엉성한 뮤즈에의 위치에 괴리를 느끼는 중이었다. 학교를 지휘하는 것과 별 개의 것이 육중하게 눌리는 현재, 수페리우스는 노력해도 로제리오의 문제에 집중할 수 없었으리라. 마냥 넋을 잃어도 좋을 시기는 끝난 거야……. “11월 중순이면 전공 테스트 때문에 번잡할 테니까, 지금 알아보는 게 낫겠다고 했지.” “…무엇을요?” “하~ 전혀 듣고 있질 않았구나, 수페리우스.” “…….”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아마데우스는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지. 헬리아와 소프라노 역시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노력하고 쟁취하는 것은 결국 내 머리와 발과 손, 그리고 감성이 직접 뛰어서였어. 그렇다면……. 현재 상황으로 쭉 가다가는 음악 보다 아마데우스의 전체적인 문제들에 취중 될 것이 확실하게 그려진 수페리우스는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황한 로제리오가 하마터면 함께 일어설 뻔 했는지 주춤했다. “교수님.” “?” “저는 당분간 반 아마데우스를 비롯한 모든 문제에서 벗어나 있어야 합니다.” “…뭐?” “11월 중순까지 저를 호출하지 마십시오. 전공과목을 정해야 하거든요. 게다가 벌써 네 번이나 수업을 빠졌지요.” “뭐라고 수페리우스?” 이 때 수페리우스는 보았다. 자신을 올려보는 로제리오의 눈망울에 적힌 테레사 라는 절실함을 본 것이다. 이럴 수가. 이제 보니 로제리오는 자신이 예전에 했던 방식 그대로를 혜성에게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이는 온 몸으로 퍼지는 소름을 느꼈다. 벅찬 현실이 그제 서야 인식이 되어서 수페리우스 라는 이름의 무게 때문에 주저앉고만 싶었다. 물론 테레사처럼 세상의 모든 악기와 감각에 천재 소리를 듣는 사람이라면, 이 까짓 학교 문제에 참여하는 건 일도 아니겠지만, 나는 그가 아니질 않던가. 기숙사에서의 피아노 휴식 이후로 완전히 현실을 읽게 된 혜성은 기가 막히다 는 듯 교수를 쳐다봤다. “교수님.” “그래. 수페리우스.” “테레사 취급 하지 마십시오.” “뭐… 뭐….” 로제리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망막에 쓰인 테레사라는 글씨가 가루처럼 부서졌다. 그의 절망이 스치자 아이는 화가 났다. 교수는 자신을 완전히 테레사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수가 이럴 진데, 다른 학생들은 더 심할 지도 모르겠다. 학교와 음악. 혜성의 번뇌는 지난 번 반 아마데우스와 대립한 이후 극심해졌다. 학생 재판 때 혜성은 물론 이 학교에는 낙오자의 모임도 규칙에만 매다는 위원회도 아닌 적정선의 학생회가 꼭 생겨야 한다고 의견을 피력했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최근 들어서 혜성은 로제리오 교수 휘하 아래 많은 교수진들이 테레사에게 얼마나 기대 왔었는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바른 모습이 아님을 혜성은 알았다. 그러니 그들도 알아야 한다. “물론 테레사를 대신해야 하는 중요한 때, 저는 수페리우스 라는 이름으로 그를 대신하여 분명히 책임을 다 할 것입니다. 과분한 몫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요.” “그럼, 앉아라.” 예민한 신경 줄이 끊어졌다. 로제리오의 단정한 표정은 아이의 감수성을 자꾸 부 축였다. “저는 테레사가 아닙니다. 저는 당장 전공과목을 결정해야 하는 실력을 키워야 하는 학생 이예요.” “!” 많이 성장했다지만 아직은 이성 조절에 완벽할 리 없는 수페리우스는 삽시간에 감정적으로 치우쳐져서 격앙된 어절로 소리쳤다.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해가 졌을 뿐이에요!” “-!” 피아노와 성악 말고는 정말 없을까. 그럴 리가 없어. 할 수 있는 게 분명히 있을 거야. 내가 아직 못 찾고 있는 거야. 반 아마데우스가 다 뭐야. 지금 이 순간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거야. 사고 회로가 엉망이 된 혜성은 뭐라고 말을 건네 오는 로제리오를 차갑게 돌아보았다. “태양이 솟아오를 때 까지, 긴 새벽을 못 견뎌 하며, 저 하늘의 달을 태양으로 착각하시는 겁니까!” “수페리우스!” “나를 테레사로 여기지 마세요!!” “하! 이게 무슨 짓이냐 어린애처럼!” “…….” 아이는 한계에 다 달은 것이다. 민우도, 히스도, 테레사도 없는 현재, 당연한 결과일 런지도 모른다. 다른 학생들은 평범하게 소문 따위에 촉각을 곤두세우는데 반 해 자신은 능력이 모자란 상태에서 얹혀 진 게 많아도 너무 많았다. 바로 그 때 서늘한 분위기를 지닌 인영이 집무실 도어를 열고 들어왔다. 멍한 상태로 집무실에 찾아왔던 수페리우스가 도어를 끝까지 닫지 않았던 지라 그는 소리 없이 나타났다. “반 아마데우스는….” “?” “정혁아…?” 로제리오와 수페리우스의 대화를 필시 도어 옆의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그들을 기다리며 엿들었을 인물은 정혁이었다. 그는 참말로 어두운 이미지였지만 때를 잘 맞추어 나타나 주었다. 그가 나타나서야 붉어진 노을이 창 밖 시선에 잡히고 울긋 한 가을의 향이 뺨에 달려들었다. 적 잔이 흥분했던 두 사람은 두툼한 서류를 들고 등장한 정혁을 기분 좋게 맞이했다. 그는 로제리오의 넓은 테이블 위에 서류를 내려놓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신경 쓰실 건이 아닌 것 같습니다, 교수님. 그들이 바스티유를 함락시키는 병사들도 아니고… 수페리우스를 몰아세우지 마십시오.” “…….” 뭐라고? 바스티유? 바스티유 감옥? 프랑스 혁명에 빗대어 또박또박한 투를 흘리는 정혁에게 이렇다 할 대답을 할 수 없었던 로제리오는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나가 보라고 일렀다. “내가 너무 예민해졌나봐 정혁아… 그렇지.” “…….” 밖으로 나오는 즉시 쏟아지는 눈물을 억지로 참아내며 혜성이 속삭였다. 추수 감사절 행사 때문인지 성당 쪽은 시끄러웠다. 혜성은 저 일로도 몇 번이나 사비나 교수진과 회의를 했었지만 예전처럼 기쁘지 않았다. 테레사 라는 기둥이 없는 현재, 앞으로 어떤 행사를 치러도 아이는 마냥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너는 추수 감사절인데 장미 문 쪽에 안 가니 정혁아…?” “…….” 그는 대답 대신 아이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천천히 걸어 주었다. 많은 아이들이 호산나를 외치고 그들을 지나 성당에 우루루 달려가고 있었다. 차라리 수페리우스 라는 이름, 테레사 대리인 이라는 절박한 위치를 실감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어……. “내 상태가 안정된 게 아니라는 게 최근 느껴져서 초조해져. 다른 애들은 전공과목을 고를 정도인데, 나는 피아노만 그나마 따라 잡는 수준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라.” “…….” “게다가… 어울리지 않아.” “?” 살며시 혜성의 손가락에 깍지를 낀 정혁이 따뜻하고도 상냥한 투로 중얼거렸다. 무거운 그림자의 입술은 이처럼 달콤하다. 정혁에게도 할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아이는 복잡한 내면 때문에 그에게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요 근래 밤마다 마신 술병의 개수만 세어도 다섯 병이 넘었다. 속이 미식거린다… 어지러워…. “마드모아젤, 아까처럼 소리치는 건 어울리지 않아.” “아… 하하하…….” “피아노를 전공해. 헬리아가 계속 될 수 있도록.” “…….” “…….” 정혁은 진심으로 독려를 아끼지 않았지만, 지금의 혜성에게는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아이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분수대까지 걸었다. 이윽고 헤어질 때가 되어서야 정혁의 수려한 표정과 마주보며 희미하게 입 꼬리를 올려 주었다. “고마워 정혁아… 네가 나타나줘서야 알았다. 내가 예민해져 있다는 걸 말이야. 나는 방금 나답지 않은 짓을 했어.” “괜찮아.” 그리고 등을 돌리려던 때, 아이의 연약한 어깨를 그러 쥔 정혁의 행동이 뒤따랐다. 덜컹- 숨어 있던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진 건 순식간이었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흠칫 놀라서 눈을 감았다. 그가 끌어안는 줄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불같이 강렬한 시선, 하지만 사파이어처럼 반짝이는 정혁의 영혼이 다른 때와 다르게만 보였다. 헬리아 이후로 두 사람이 마주칠 일은 적었고, 반 아마데우스 일로 서로에게 할 말이 많았지만, 마주치면 사라지는 언어가 있다. 한 참 동안 넋을 잃고 혜성을 내려 보던 정혁이 미약한 신음소리를 내며 아이의 정복 주머니에 쪽지를 넣었다. “이건… 뭐니, 정혁아?” 혜성은 홀린 것처럼 감미롭게 물었고, 살그레 웃는 정혁의 대답 역시 그들께로 부딪치는 가을바람처럼 힘 있고 달콤했다. “데이트 신청이다.” “그래… …뭐~어?!” 잠깐이라도 휴식이 되어 주는 시원한 그림자를 올려보며 혜성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약하게 웃었다. “1월에 있을 콩 쿨 건 때문에 외출해야 하거든. 일은 금방 끝내고 자투리 시간 동안 갈 곳이 있어.” “일반인의 콩 쿨?” “아니. 아마데우스의 콩 쿨. 어쨌든 날짜와 시간과 장소는 따로 적어 놨으니까 나중에 확인 해 봐.” “그런데 정혁아… 안색이 안 좋은데, 최근 무리 한 거 아니야?” 무의식중에 정혁의 안부를 물었을 때가 되어서야 그는 실로 고통스럽다는 낯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는 여러 번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자신의 일로도 바쁜 혜성은 그의 절망과 관련된 일상을, 그의 안녕과 관련된 계획을 모른다. “…어떤….” “…?” 그가 입을 열자 그림자를 전혀 모르는 한량 낙엽만이 우수수수 떨어져 발아래 붉게 차인다. “어떤 악장을 그려도 되지를 않아.” “뭐…?” 값을 모르는 젊은 영혼들은 애석해 할 미래를 기다리며 서로를 떠든다. “한계 그 이상은 없는 거였어….” “정혁아… 뭐…….” 그제 서야 꽤 신중한 내용임을 자각한 혜성이 거듭 물어 보려고 하자, 정혁은 더 빠르게 반대 방향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야속한 계절은 짙어져 간다. “그럼 그 때 보는 걸로 하자.” “나한테 감추는 게 있는 거 아니니? 정혁아!” “…….” 돌아서서 걷는 정혁의 등이 여느 때보다 무겁게 늘어져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혜성은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는 어쩌면 아이가 한 번쯤 자신을 따라와서 그림자와 관련된 일상을 염려해 줄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표현 없는 누군가로부터 구원을 예측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가 무거운 걸음과 함께 등을 돌려도 그의 말투는 변함없이, 아주 오래 전처럼 다정하게 돌아왔다고 여겨서 아이는 정지했다. 정혁이와 잘 지냈던, 혁명조차 없었던 시절의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아이는 스스로에게 결정을 내린 것이다. 눈앞의 것을 믿는 단순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혜성은 정혁에게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각자의 시간은 세월에 맡겨진다. 그것이 사람이다. 정혁의 쪽지는 반듯한 글씨체로 내일 저녁 장미 문 앞에서 만날 내용만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글씨만으로도 푸근해진 감성은 서둘러 학생 감옥으로 향한다. 바지 주머니에 있는 학생 감옥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혜성은 자신들의 일로 고민하거나, 추수 감사절 행사로 들떠있는 여러 무리들을 그리움 짙은 눈매로 지켜보았다. “어… 선….” “…….” 을씨년스러운 감옥은 방금 전의 정혁이와 마찬가지로 아이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어머니의 가슴처럼 부드럽고 포근한 감정이 밀려들어와서 두통은 잠시 가라앉았다. 혜성은 자신을 보는 순간 화색이 도는 로미오를 무미건조하게 마주보며, 말없이 쇠창살을 열어 주었다. “…….” “…….” 일주일이 벌써 지난 것이다. 추수 감사절과 반 아마데우스 사건, 전공 선택일 덕분에 로미오의 일화는 교수들과 학생들의 기억 속에 숨을 수 있었다. 이때를 노렸던 혜성은 일절 아쉬움 없이 그를 꺼내 준 것이다. 감옥의 좁은 복도로 나와서 옷을 탈탈 터는 로미오를 스쳐서 아이는 더 안 쪽 어두운 곳으로 걸었다. 오래 전 양 쪽 팔이 부러진 채 죽음을 말하였던 민우가 지냈던 구석의 감옥 문을 열쇠로 열었다. 그 점이 수상했는지 로미오가 뒤에서 따라오는 게 느껴졌고, 아이는 시큰둥하게 중얼거렸다. “여기 열쇠는 다 똑같은 거다.” “…….”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평선에 반듯하게 뉘인 것 마냥 출렁이는 안락의 시간에서 혜성은 방해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아이는 민우가 누웠음직한 오래 된 짚더미 위에 누웠다. 양 팔로 팔베개를 한 뒤 가만히 눈을 감았다. 별이 보이고, 민우가 보인다. 테레사가 은어의 손놀림으로 상냥하게 연주를 해 준다. 하프의 선율이 스친다. 그래… 학생 감옥은 안식이며 평화였다. “…….” “…….” 로미오가 걸어오는 소리, 이어서 혜성이 누워있는 안쪽에 조심스레 들어서는 것을 청각이 알렸지만 혜성은 무겁게 눌리는 육체에 백기를 들어올린다. 둘의 어색해진 태도는 함께 무대에 섰던 정다운 선후배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어긋나기만 했다. 살랑이는 가을의 바람이 둘의 이마께에서 하염없이 싱글거렸지만, 둘은 겨울보다 차가워져 있었다. 만약 그 두 사람을 지켜보는 주변인들이 있다면 답답해 할 정도로 날카로운 기류는 통 가시지를 않는다. “!” “…….” 로미오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며 단잠에 빠지려던 혜성의 나른한 육체가 곳곳의 세포에 반응을 부추긴다. 그도 그럴 듯이 아이가 눈을 감고 가지런히 누워 있는 것을 뚫어지게 지켜보던 로미오가 기습적으로 입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해일이 일어도, 폭우가 쏟아져도, 누군가에게는 벅차오르기만 할 입맞춤을. “…….” “…….” 혜성은 고체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감옥의 험악한 창살 밖으로 ‘호산나!’ 라고 외치는 동시에 까르르 웃는 여 학우들의 소리가 미약하게 전해졌지만, 바람이 세게 분다 한 들 혜성은 눈을 뜨지 않았다. 로미오의 뜨겁고 미끄러운 혀가 여러 번 입을 벌리라는 듯이 강하게 작은 입술을 돌아다녔지만, 혜성은 인형처럼 굳어 있었다. 한 참이나 혜성의 입술, 코, 이마, 뺨, 목, 여러 곳을 스친 뒤 로미오는 저의 못된 입술을 떼었다. 그의 숨결이 점점 멀어질 때가 되어서야 혜성은 천천히 눈을 떴다. 저녁노을로 가득했던 밤하늘은, 창살 안으로 따가운 별빛을 자랑하고 있었다. 어느새 밤이 닥친 것이다. 아이는 귀찮은 듯 옆으로 돌아누우며 허스키한 어절을 흘렸다. “다 했으면 나가라.” “…왜 그렇게 차가워요?” 몸을 일으킨 로미오는 의아한 낯으로 원망 가득한 물음표를 던졌지만, 혜성은 침몰해가는 수면에 아까부터 백기를 들지 않았던가. “너를 알 수 없으니까. 너를 모르니까. 나는 지금 복잡하니까. 조용히 쉬고 싶은데 기숙사에 가면 시끄럽거든. 회의도 있다고 하고….” “책자가 상당하네요. 이건… …텔레만 인가요? 느낌이 좋군요.” “…….” 혜성이 로제리오 교수의 방에 갈 때부터 옆구리에 끼이고 다녔던 얇은 책자 더미들을 괜스레 훑어보며 로미오가 질질 말을 끌었다. 무감각한 수평선에서 감동이란, 없다. 정체가 모호한 것에게 정을 줄 리가 없다. 정을 주었어도 로미오를 완전히 모르는 이상, 그에게 줬던 얕은 정까지도 나는 회수한다. 나는 그런 사람인가 보다. “…고민이 있나요?” “…….” 끈질기게 묻는 로미오를 무시하며 혜성은 다시 눈을 감았다. “선배는 뮤즈 그 자체예요. 큰 바위 얼굴도 고민을 하는군요.” “…….” 이제는 나가겠지… 싶던 로미오가 쇠창살 밖에서 애끓는 무언가를 쑥 감추는지 독특한 억양으로 다시 물어왔다. “제가 키스했는데 어떻습니까.” “…….”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이는 잠시 생각했다. 감정은 넘칠 대로 넘쳐서 폭발해 버렸지. 최근에는 오르페우스 관에서 연습조차 막힐 정도였어. 어깨가 무거워서 쉬고 싶었는데… 네 존재감조차 나에게는 없다. 키스. 그런데 이 순간에 키스라……. “…솔베이지 때문에 한스 한테는 길거리 한 복판에서 몸을 주려고도 했는데 이 까짓게 뭘….” “!” 철컹-! 문이 닫힌 뒤라 안으로 들어올 수 없던 로미오는 작은 등으로 싸늘하게 대답하기만 하는 혜성을 부리부리한 시선으로 노려보며 창살을 움켜쥐었다. 너는 누구일까. 글자가 느려지고 있어. 무거운 추가 달린 나의 입술은 떠들지만, 입술보다 느려진 귀는 네 소리를 멀게 해… 들리지 않아. “…가…라… 졸립다… 그리고… 말… 걸지 말고…….” “한스가 누구야!” 철컹! 철컹! 학생 감옥 곳곳에 사나운 음성, 그리고 쇠창살을 뒤 흔드는 소리가 울렸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몫의 시련을 떠안고, 비밀과 함께, 가을은 짙어진다. “…가세요….” “선배!” “…라고… 엄마 닭이 말 했습니다….” “…….” “…….” “신경전 인가요?” “…….” “제가 대답을 제대로 한 게 없어서? 미스테리 해서?” “…….” “…그렇다면, 기꺼이 줄리엣의 신경전을 받아들이지요.” “…….” “…라고 로미오가 말했습니다.” 깊은 잠에 빠져들기 시작하는 혜성을 싸늘하게 노려보던 기운이 점점 멀어져 간다. 입술을 깨물었다. 미약한 별빛 아래 눈을 감고 있는 혜성의 뺨을 타고 이유 없이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이튿날이 되자 혜성은 약속대로 정혁과 함께 그의 차에 탔다. 그러나 진즉에 예상했던 기대와는 달리 장미 문을 벗어나는 동시에 물씬 맡아지는 저녁 공기와 바람은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했다. 그냥 차를 타고 누군가와 함께 아마데우스 밖으로 나가는 것뿐이었다. 그의 비서가 몇 마디 물어 올 때를 제외하고는 정혁이 역시 미동 없이 차창에 시선을 고수한 채 조용히 있었다. 한 시간을 달린 뒤, 그의 차는 세련되고 높은 건물 앞에 정지했고 정혁은 이십분 가량 자리를 비웠다. 혜성에게는 의미 없는 시간의 진전은 멈추지 않았다. 둘을 태운 차는 이윽고 서울의 중심부에 새로 지어진 한국 아마데우스 홀에 도착했다. “오페라를 본 적 있니.” “…아니.” 두 사람의 대화는 그것이 전부였다. 입이 무거운 정혁은 자신을 잘 따라오는 혜성에게 로얄 석에 앉힌 뒤에도 팜플렛만 건넸을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페라 아이다는 화려한 막을 올렸다. 5층의 정 중앙에서 뻥 터질 만큼 힘찬 음색이 울려왔지만, 혜성은 그럴수록 무감각해지는 영혼에 넋을 뉘인다. “…….” “…….” 그가 일부러 보여준 시간이며 장면이라지만, 상념이 많은 탓에 아이는 관심을 기울일 수 없었다. 상념은 일상에서의 염증만 자극시킨다. 로제리오 교수님께 죄송하다는 말을 해야 된다는 현실마저도 짜증이 났다. 그래서 아이는 마지막까지 몰랐다. 옆에 앉아있는 정혁 역시 흐릿한 동공을 지닌 채 오페라 아이다에 전혀 집중하지 않았음을 몰랐다. 무미건조한 그들은 이름뿐인 데이트를 마친 뒤 처음보다 침체 된 채 아마데우스로 돌아왔다. 생각은 인간을 죽이는 걸까. 감정마저도? 그러나 별 수 없는 미약한 그들은 싱거운 인사말만 전한 채 아쉽게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피곤한 하루를 끝낸 뒤, 조용히 잠이 들려는 혜성의 계획과는 정 반대로 시끄러워진 서 쪽 기숙사는 문고리를 쥐고 당기는 아이를 바삐 부르는 무리들 덕분에 무산되었다. “회의?” “그래. 수페리우스. 지난번에 말 했던 거….” 마치 혜성을 기다렸던 것처럼 나타난 기숙사장은 진땀을 흘리며 억척스러울 만치 미소 지었다. 온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혜성은 그러냐며 어서 가자고 문고리에서 손을 뗐다. “괜찮겠어?” “그럼. 괜찮아. 회의실은…….” “아, 우리가 강당으로도 활용하는 곳인데, 지하 1층에 있어. 그래서 좀 추울 지도 모르겠는데…….” “괜찮아. 가자.” 영혼이 넋을 갈취해간 뒤,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진 육신은 미적미적 걷기만 했다. 그 유명한 오페라 아이다를 한국 아마데우스 홀에서 봤는데도 불구하고 지친 영혼은 엉겅퀴처럼 바닥에 붙어 있기만 했다. 아이는 극한을 향해 달려가는 스스로가 두려웠지만 이조차도 나중으로 미뤄야 할 판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조용히 쉬면서 생각을 정리 할 수 있었을텐데…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는 양보해야 할 게 분명히 있음을 다시 깨달으며 혜성은 앞서 사라진 기숙사장이 들어간 회의실에 입장했다. “!” 창백한 수페리우스의 표정이 비춰지자 들쑥날쑥 시끄럽게 떠들던 거대한 서 쪽 학생들의 입이 동시에 다물어졌다. 하얗고 노란 수페리우스는 그들의 시선을 몽땅 차지한 게 틀림없으리라. 넓은 내부는 캄캄했지만 중간에서 반짝이는 형광등 덕분에 모두를 알아 볼 수 있었다. 거대한 넓이의 원형 테이블은 강당 중앙에서 각 층 대표로 모인 백 여 명을 앉히고도 남은 공간을 으스댔다. 혜성 역시 대충 빈자리에 앉아서 긴 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 쪽 기숙사동 대표 녀석의 말마따나 전체 회의실은 얼음연못처럼 벽 전체가 차가웠다. 하지만 혜성은 방금 전,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곳에 온 것을 후회했다. ‘수페리우스가 진짜 왔어.’ ‘진짜다! 수페리우스다!’ 강당과 비슷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서 쪽 기숙사 대회의실이 싫어서는 아니다. 아이를 보고 화색이 돌아서 떠드는 무리가 싫어서도 아니었다. 혜성은 그저 자신과 떨어진 자리에서 로미오 녀석과 마주쳐 있는 지금이 답답했던 것뿐이다. “주… 먹….” 주먹? “아, 아니… 주… 목….” “?” “기… 숙… 사… 회…의…를… 시작, 시작, 시작 하겠습니다.” “?” 긴장하면 말을 더듬는지, 일전에 혜성의 방에 노크를 했던 눈에 익은 녀석이 더듬거리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뜨악 놀란 서 쪽 학생들은 낭패의 빛으로 긴 한 숨을 내쉬었다. ‘러시아 인형에게 반한거야.’ 라며 소곤거리는 덩치 좋은 학생을 시작으로, 주변에서 기숙사장을 원망하는 질책이 하염없이 쏟아져 나왔다. ‘왜 말을 더듬는 거야!’, ‘수페리우스는 이로서 우리들을 바보로 알겠지.’ 제 멋 대로인 학생들이 지내기로 유명한 서 쪽 기숙사동에서의 생활은 그들만의 규칙이 따랐고, 혜성은 그 점을 지키기로 했지만, 이 기숙사장 회의만큼은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급기야 러시아 인형 운운하는 작은 소리들이 들려 올 때는, 괜히 민우 방에서 지내기로 했다며 자책했다. “최근에 로제리오 교수님이 또 한 번 악기 폐기에 대해… 승…인을…….” “기숙사장님! 그것 말고 우리끼리 통하는 회의는 뭐 없을까요?” 식은땀을 흘리는 기숙사장의 말문을 가로 막은 인물은 로미오였다. 로미오? 기분이 더더욱 불쾌해진 혜성은 때마침 자신과 눈을 마주쳐 오는 로미오를 무시하려는 취지로 홱- 고개를 틀었다. 입술이 뜨겁다. 감옥에서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어째서 나의 못난 입술이 뜨거울까. 혜성이 앉은 반대편 테이블에 로미오가 착석해 있음을 제대로 알아서인지 아이는 일부러 기숙사장만 쳐다보았다. 고집을 부리는 어린 아이처럼 앙 다문 입술은 붉게 반짝였다. 로미오의 의견에 벙 쪄 버린 기숙사장이 떠듬거리며 무어라 회의를 지속했지만, 선호 선배의 말마따나 이 회의는 남쪽 학생들에게 보이기 위한 형식적인 것에 취중 되었음을 느꼈다. 선호 선배라… 그렇지. 선배도 서 쪽 기숙사동에서 지낼 텐데……. “!” 무의식중에 선호 선배를 찾기 위해 시선을 돌리는 순간, 혜성은 다시 고집을 부리며 앞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의견을 피력하는 중간에도 로미오는 잡아먹을 것처럼 이쪽을 쳐다봤기 때문이다. 이상한 녀석…. 상당히 지루하고, 시간 낭비라는 대목이 쓰일 정도였던 회의를 끝낸 시각은 밤 열한시 사십분 이었다. 완전히 녹초가 된 혜성은 질질 끌듯이 걸어서 자신의 방 문 앞에 섰다. 다행이도 로미오는 따라붙지 않았지만, 사실 따라붙어도 무시하면 그만인 문제였다. 생각… 생각조차 내일로 미뤄야겠다. 천근만근 무거워진 내 몸에 기력 이란 게 있다면 풍선처럼 다 빠져 나갔어……. 남쪽 아이들을 헌담하는 게 거의 다였던 회의에 꽤 실망해서인지 혜성의 굳은 표정은 쉽사리 풀리지를 않았다. 방 안에 막 들어서서 길게 호흡을 내쉴 때였다. 똑똑똑. 이크. 누가 또 방문에 노크를 한다. 혜성은 저도 모르게 욕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을 여는 동시에 굳었던 표정은 빠른 속도로 완치되기 시작한다. “가자. 수페리우스.” “…예?” “진짜 회의 하러.” “…회의요?” 혜성의 기숙사방문 앞에서는 싱긋 웃으며 인사하는 선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왠지 조심스러워 보이는 선호가 오늘따라 신비하게 느껴진다. 혜성은 반짝 정신이 돌아오는 걸 느꼈는지 그가 이끄는 대로 이번에는 강당이 아닌 그의 방으로 따라갔다. “선배 여긴…….” “쉿.” “…….” 그는 곧 자신의 방 문 앞에서 아무도 없는 주변을 샅샅이 노려보더니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서둘러 들어오라며 혜성을 재촉하는 게 아닌가. 문을 닫아서야 상당히 안심한 투로 선호는 중얼거렸다. “우리 기숙사동에는 기숙사장이 두 명이야. 한 놈은 아까 봤을 테고…….” “…….” “나머지 비공식적으로 몇 명만 알고 있는 한 사람은, 나다.” “!” 굉장한 다이아몬드를 캔 보석꾼 처럼 눈을 반짝이는 혜성을 마주보며 선호는 반듯하게 웃어 주었다. 고개를 끄덕일 때 마다 가지런한 분위기는 한층 돋보인다. 정신없이 닥친 현재의 상황에서 뭐라고 말을 하려던 때, 선호는 혜성에게 더 놀랄 장면을 주었다. “!” 아까 전의 우글대는 백 여 명에서 완전히 축소된 예닐곱 몇 명이 비밀리에 모여 앉아 있어서였다. 혜성은 괜스레 주변을 둘러보며 선호가 앉으라는 쪽에 바른 자세로 앉았다. 말을 더듬던 그 치 혼자만이 대표가 아니었다니…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실로 오랜만에 학생다운 호기심이 발동한 나머지 입이 간질거렸던 혜성이 엉덩이를 들썩인다. “가만히 좀 있어요.” “?” 누군가가 요리조리 구경하며 들 떠 하는 혜성의 어깨를 콱 눌렀다. “…선배.” “!” 로미오였다. 이곳에, 그것도 옆자리에 로미오가 있다니? 혜성은 아까처럼 토라진 척 냉정한 척 시선을 선호에게 돌리기 바빴지만, 이번에는 로미오의 행동이 판이하게 달랐다. 그는 더 이상 혜성을 뚫어지게 응시하지도, 괴상한 질문을 툭 던지지도 않은 채 신중하게 지금 회의에 임했기 때문이다. 그를 무시하고 회의에 집중하지 않는 혜성이 이상해 보일 지경이었다. “로제리오 교수가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선호를 필두로 동그랗게 앉은 그들은 혜성이 오기 전부터 했던 대화를 끈질기게 잇는 중이었다. 어서 오라는 인사조차 없이 시간을 아끼며 정확한 것을 떠드는 그들에게 집중하며, 혜성 역시 촉각을 곤두세웠다. 가을밤이 깊어질수록 그들의 내면은 넘치는 것이다. “병동의 악기가 하나씩 없어지고 있어, 수페리우스.” 친절한 누군가가 제일 늦게 온 수페리우스를 위해 다시 설명을 해 준다. 그의 옆 자리에 있던 낯선 학생 하나도 마침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혜성을 돌아보았다. “관리인의 눈을 속여가면서 정확하게 하나씩 없어지는데, 벌써 반 정도 되었을 거야.” “사실을 반증한 이 소문이 서쪽에서 먼저 시작되었는데…….” 물을 마시던 선호가 끼어들었다. “남쪽 녀석들은 그 도둑이 서쪽 애들 중 하나일 거라고 단정 지어서 다시 소문을 낸 거야.” “!” “그래서 내가 그 때 일부러 학생 식당에서 동완이 말을 막은 거였다. 동완이도 대충 소문으로만 알고 있는 점이니까, 너와 괜히 사이가 나빠질 수 있잖니.” “아…….” 얘기를 듣던 도중, 혜성은 새삼스러울 정도로 선호가 다시 보였다. 저 반듯한 내면 어딘가에는 후배들의 심리까지 챙겨주는 섬세함이 있는 것이다! 소문은 곧 사실임을 다시 증명하며 분위기는 빠르게 집중되었다. 정혁과 함께 했던 오페라 관람에서는 시큰둥하고 어지러웠던 감정이 잠깐이지만 다른 쪽에 관심을 둠으로써 치유가 된다. 그러나 이 조차도 사람이 맺는 사건이지 않던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혜성은 거의 멎어가던 두통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 참을 수 없었는지 몇 번이나 관자놀이를 꾹 꾹 누르며 입 속의 혀를 깨물었다. 집중해야 돼… 나를 부른 건 다 이유가 있을 거야… 그래. 적어도 내 말은 로제리오에게 이들보다 먹힐 확률이 있으니까……. “감히 우리들에게 그 딴 식으로 모함을…….” “자신들은 우리보다 위에 있다는 거지. 남쪽 애들은 자기들이 특별한 줄 알거든.” “우리 힘으로 범인을 찾아낸다고 치자. 만약 정말로 범인이 우리 쪽 애면 어떡하지?” “그러니까 일단 잡아내서…….” 서 쪽 기숙사동의 예닐곱 대표들은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쌓아 놨던 자기비하까지 거들먹거려진다. 그들은 남쪽 아이들의 소문에 분개했지만, 혜성은 이렇다 할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알게 모르게 혜성이 대단한 의견을 내놓을 걸 기대하는지 그들은 하나같이 말을 하면서도 혜성을 힐끔거렸다. 두통이 심해지고 있어. 토악질도 날 것 같이 답답하다. 연주가 뭐야. 결국 소문이라지만 이것 역시도 해결해야 할 ‘무엇’ 이잖아. 나는 어려워… 나는……. “수페리우스?”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 난 혜성의 몰골은 뼈마디가 비칠 정도로 창백해져 있었다. 아이들은 그가 학생 재판에서 그랬듯이, 헬리아를 보였듯이, 오래 전 자퇴를 용감하게 선언했듯이, 자신들에게 희망찬 조언을 강력하게 말하기를 기대한다는 표정이었다. 선호마저도 혜성의 어깨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는 점점 노랗게 채색되는 밤의 공간 속에서 정신을 부여 쥐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방 안에서도 별이 보이고, 달이 비친다. 음표와 사람의 글자가 말발굽 소리처럼 거대해져서 이 방 전체 벽에 달라붙어 있어. 아니, 이번에는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어. 저기, 저 쪽에서부터 무서운 속도로…! “…미안… 하지만… 나는 먼저 가 봐야…….” “수페리우스!” “!” 먼저 돌아갈게. 미안해… 라는 문장을 다 꺼내려 했지만 혜성은 핑-! 하고 끊어지는 뇌의 소리를 시작으로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과도한 스트레스가 근 일주일 새에 한꺼번에 쌓인 결과였다. 털썩- 얕은 먼지를 일으키며 가벼운 몸뚱아리는 인형처럼 옆으로 넘어진 채 정신을 잃었다. 고막을 두드리는 학생들의 비명이 윙윙거린다. 얕은 막 밖에서 자신을 부르지만, 그 베일을 뚫지 못 한 채 목소리들은 한 데 섞이기만 한다. ‘수페리우스! 누가 좀!’ ‘숨소리가 이상해! 워싱턴! 지금 뭐 하는 거니!’ 그렇게 혜성은 의식을 잃었다. 죽은 듯이 무너졌던 아이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쓰러지고 이틀이나 지나서였다. 꿈도 없이, 무조건 암흑의 세상에서 숨만 쉬었던 영혼은 가냘파진 손가락을 조금씩 움직였고, 무겁기만 한 눈꺼풀을 열었다. 죽은 걸까. 주변은 하얀 도화지처럼 깨끗하고 정갈했다. 시큼한 소독약 냄새에 미간을 찌푸리자니 그것마저도 힘이 들었다. 삽시간에 한계에 달한 자만이 느낄 수 있는 나른한 기운이 발끝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머리가 끊어진 것의 시작은 아마도 로제리오 교수와 만나기 직전, 그래… 그 때 부터였던 것 같다. 예전처럼 힘이 들면 아무 생각 없이 피아노만 두드렸던 과거를 그리워하며… 추수 감사절도 뒤로 미루는 게 아쉬웠던, 익숙치않은 상황이 억척스러울 만치 진행되었던 일주일이 나는 견딜 수 없었던 거야……. 살아 있어. 내면은 강한 것을 연신 메아리쳤다. 살아 있어. 너는 살아 있어. 혜성은 스스로에게 화답하려는지 살짝 고개를 움직였다. 턱을 오른 쪽으로 돌리자 파란 핏줄 위로 굵은 주사가 꽂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안쓰럽게 내려 보는 인영이 흐릿하게 안착되었다. 그 인영은 사람처럼 숨을 쉬었고, 무어라 말을 하며 떨리는 입술을 움직였지만 혜성은 한 번에 알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가슴은 알았다. 느낌만으로도 눈물을 보이는 심장은 꽉 조여져서 제대로 숨조차 내쉬지를 못했다. 그 인영의 윤곽이 파랗게 나타나기 시작 할 무렵, 혜성은 거침없이 흐르는 야속한 눈물을 내버려 두었다. 하얀 도화지 밖의 세상은 거친 밤이 지휘하고 있었다. 새벽일까. “히스…….” 새벽일까 히스. “어떻게….” 입술을 깨물었지만 눈물의 속도는 더 할 나위 없이 빨라진다. 그를 보는 순간 룸펜에서의 안식이 파도처럼 철썩였다. 혹시 룸펜은 아닐까 싶었지만 이곳은 민들레 향이 진동하던 다락방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을 안쓰럽게 내려 보는 인물은 다시 봐도 히스클리프, 그였다. 백마 탄 왕자는 꿈처럼 나타나서 오래오래 한 자리에서 자신을 본다. 히스가 있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는지 두통은 사라졌다. 혜성은 웃어 주고 싶었지만 마비 된 안면은 입술만 겨우 움직거릴 뿐이었다. 오른 쪽 안면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게 이상하다 싶었는지 덜컥 겁이 난 수페리우스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에, 잠깐 동안 오른쪽 볼이 굳었다고 해. 너는 이틀 동안 쓰러졌고…….” “아….” 혀를 굴리며 입 안에서 오른쪽을 찔렀지만, 히스의 말마따나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혜성은 기적처럼 나타난 이 사내가 마냥 반가워서 천진하게 웃고, 울었다. 파란 머리칼은 다시 염색을 했는지, 까만 밤이어도 하늘보다 푸르게 빛이 나고 있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백인의 청년이었다. 진초록 눈동자가 묽게 흩어지면서도 그 안의 힘은 잃지 않은 채 혜성에게 시선을 준다. 실로 오랜만에 가슴이 요동친다. 오랜 시간 마주보던 것을 끝내려는지 히스는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테레사가 보내서 왔단다, 나의 수페리우스.” “!” 테레사! 마음이 찢어지는 동시에 서러운 눈물이 두 뺨을 마구 적셨다. 아파서 그런지 힘없이 나약해진 내면은 혜성의 넋을 뒤 흔들었다. 아이는 곧 양 손을 올리더니 손바닥으로 눈과 뺨을 가린 채 흐느꼈다. 부들 부들 떠는 그대로 혜성의 팔에 매달려 있는 링거의 줄이 흔들렸다. 수페리우스의 모습에 고통은 고통으로, 가슴이 찢어질 것 만 같았던 히스는 저 역시 떨리는 손을 내밀었지만, 곧 멈추고야 말았다. 흐느끼는 아이의 어절이 슬퍼서, 혹은 기뻐서. “…그가… 보고 싶어….” 하느님. 가장 잔인한 당신이시여…. “!” 오, 수페리우스. 나의 가여운 수페리우스! 히스는 그 말이 하고 싶었는지 여러 번 입술을 열고 닫았지만 아이는 천정으로 팔꿈치를 올린 채 사정없이 흐느끼는 족족 손바닥 밖으로 눈물을 내보낸다. 둘의 턱이 동시에 떨리고 있다. “그가… 아마데우스에… 없어… 나의 아마데우스가 없어….” 눈물의 속삭임은 또 다른 눈물을 부축 인다. 히스는 마음을 진정 시켜가며 자비롭게 웃어 주었다. 손을 뻗었으나 만지기 힘든 사람이었다. 아름답지만 완전히 취할 수 없는 유일한이었다. 바람둥이에 자유롭기만 한 천하의 히스클리프를 송두리째 가져버린 사람이었다. 꽃보다 달콤한 꿀과 마리아 칼라스의 향기를 지녔지만 다가서는 족족 벌처럼 쏘이게 하는 사람이었다. 히스는 쓰러져 가는 내면과는 정 반대로 정확한 글자를 천천히 내보냈다. “그도… 힘든 상황 이란다 수페리우스.” “!” 덜덜 떨리던 혜성의 동작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아니, 그것은 굳었다는 것에 가까웠다. “보스턴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테레사는 예전의 자신을 버렸어.” “아… 아… 하아아아아…….” “…….” 양 쪽 손바닥 사이의 입술은 숨소리와 흐느낌을 천지에 뿜어내며 고통을 호소했다. 테레사! 괜찮아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엉망진창이 된 내면은 같은 것을 묻고 대답한다. 이윽고 혜성은 천천히 손을 내린 뒤, 눈물 투성이 인 채로 히스를 마주봤다. “왜… 테레사가 왜….” “!” 수페리우스! 그 표정과 안면을 차마 볼 수 없었던 히스는 붉어진 눈매로 당장 혜성의 상체를 당겨 안았다. 거센 힘으로 안는 동시에 그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얇은 몸에 놀랐는지 살살 팔을 둘러주기 시작했다. 히스의 짙은 숨결이 눈물에 채색될수록, 가쁜 숨을 쉬면서도 혜성은 주먹을 쥔 채 분노에 찬 내면을 보였다. 시트를 움켜 쥔 아이의 주먹이 부르르 떨린다. 먼 허공을 바라보던 입술이 겨우 열린다. “그래… 그래… 나는 또 도망치고 싶었던 거야… 나는 지금 그를 봐도 행복할 수 없어. 그래… 도망치면 안 돼. 행복의 댓 가는 누구나 다 치루는 거야. 그래….” 히스가 와 준 것에 놀랄 겨를도 없이, 와장창 뽑아진 내면은 황량해진 곳곳을 두리 번 거린다. 나를 잡아 주는 것은 내 자신이야. 고통의 끝을 완전히 경험했는지 혜성은 흐느낌 못지않게 가빠지는 숨을 내쉬며 히스의 가슴에 기대었다. 끝에 와서야 나는 깨닫는 거야. 나는 역시 애송이일까. 조심스레 머리칼을 만져주던 히스가 달콤하게 속삭인다. “나의 마드모아젤… 숨을 쉬어….” “…….”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걸 해.” “…….” “순서를 매기는 거야. 재미있겠지…?” “…….” 히스는 울고 있었다. 어떻게 연락이 닿았는지 모르겠지만 테레사에게 부탁을 받는 즉시 일정을 뒤로 미루고 날아온 이곳에서, 히스는 수페리우스와 오랜만의 해후로 반가워하기도 전에, 참았던 눈물을 모두 흘렸다. 뮌헨에서 이별을 얘기했을 때의 눈물보다 고통의 색이 짙어진 그것을 하염없이 쏟았다. 그러나 아이는 몰랐다. 자신을 끌어 안아주는 히스 덕분에 가려진 그의 눈물을 몰랐다. 도리어 자신에게 위로와 더불어 갈 길을 제시해 주는 신비한 이 사람에게 안정감만 가져간다. 순서를 매기라는 간단한 말조차도 테레사가 대신 속삭여주는 것 같아서 행복했다. 그는 독일의 테레사니까… 그래… 그는 독일의 테레사니까… 순서를 매기는 건 간단할 거야. 회의. 회의 중이었던 것 같은데… 범인. 그래. 범인을 잡아야 한다고 그들이 말했었지. 그리고… 그리고……. “테레사를 불러 줄까….” “아니… 아니… 이젠 정말 됐어.” “…….” 진정이 된 혜성은 엷게 웃으며 더더욱 히스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갔다. 세차게 뛰는 그의 심장 소리가 테레사의 것 같아서 행복했다. 손끝과 발끝에 사라진 감각이 돌아왔는지 이젠 왼 쪽 입술로 웃을 수도 있다. “널 봤으니까… 됐어….” “…….” 그 말을 끝으로 또 한 번의 수면을 취한 뒤, 상쾌한 다음날이 되었을 때 히스는 짧은 쪽지를 남겨두고 다시 독일로 돌아가 있었다. 보고 싶었다는 말 한 마디, 고맙다는 정다운 인사와 입맞춤조차 없이 그는 혜성을 위해 날아왔던 것 만치 금방 돌아갔다. 아이는 그의 숨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쪽지의 글씨를 확인하는 동시에 가슴에 세게 포개었다. [ Ich liebe dich…… superius. (사랑해 수페리우스) ] “히…스. 히스, 히스! 히스--!!” 짧았던 밤의 만남이 결코 환각이 아니었음을 저 짧은 내용의 쪽지로 증명하고 그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떠난 것이다. 꿈처럼, 혹은 바람의 정령처럼. 하루진님께서 주신 표지2. 정혁버젼입니다. 고마워요. wgreene@naver.com 그린입니다. 잘 지내나요...? 저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소문 해결이 나타나는 다음편... 반응이 없으면 안 쓰... ...쿨럭. 별하님, 포근구름님, 솨, 쥬노님, 다큰엔젤님, 연님, 안젤리스님, 슬픈웃음님, 피글렛냠님, 셂님, 호야님, 리에뜨님, 밀크티님, 린님, 슈콘느님, 박카스정님, 군림님, 그리고 이 글을 지켜보고 있는 당신.. 고맙습니다. 행복하세요. -그린- 추신. 선호 선배에 대한 소설꼬릿말은 메모로그에서 확인하세요. ^^* 덧글 18개 엮인글 쓰기 /data18/2006/8/27/281/js-wgreene.jpg@nhn@197393@nhn@1@nhn@350@nhn@503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37~38편 /data18/2006/8/27/281/js-wgreene.jpg@nhn@197393@nhn@1@nhn@350@nhn@503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37~38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39~40편 ▼ 다음글 - 2악장 36편(기숙사의 소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39~40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8/29 20:06 http://blog.naver.com/wgreene/110008120633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829 39~40편 업데) * 포토로그도 클릭하세요.^^ Amadeus 음악 : broken bow - josh groban (아래 플레이버튼 클릭) Broken Vow-Josh Groban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너희 안에 숨겨진 빛을 발할 때, 밤은 사라진다. 시련은 기회의 장, 시련은 준비의 시간, 시련은 고통과 과거의 기회! 시련의 독주는 시작되었다. 2악장 39~40편 하지만 그는 정령이 아니질 않던가. 혜성이 히스의 쪽지를 품에 안은 동시에, 반대편에서는 히스클리프가 홍두깨처럼 나타났었다는 으스스한 소문이 태어났다. 유령이어도 좋으니 그 소문만은 진실 이었으면 좋겠다는 학우들의 신음에 찬 기도가 깊게 퍼졌다. 히스클리프! 독일의 싱싱한 민들레꽃처럼 이름마저 향기로운 그가! 여 학우들은 히스가 나타났었다는 소문만큼은 사실로 인정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같은 교복이라 할지라도 저마다 재단사에게 부탁해서 약간의 장식을 첨부한 것에 한층 더 멋을 부렸기 때문이다. 히스의 이름은 가히 영향력을 발휘하여 불안함에 들끓고 있는 한국 아마데우스에 실오라기 바람을 일으켰다. 바람은 한 데 뭉치더니 펑 터지는 모양새가 되어서 어느덧 커다란 활력소로 자리한다. 가끔 기분 좋은 소문은 그렇게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히스, 히스, 히스! 그를 흠앙하는 소년 소녀들은 새침한 척 턱을 올리고 아마데우스 곳곳을 걸어 다녔다. 비록 그를 만날 수 없어도 소문이란 그들을 기쁘고 두근거리게 했다. 이틀간 병동에서 휴식을 더 취한 뒤 퇴원하려는 때, 사비나 교수가 수페리우스를 찾아왔다. 그녀는 독일에서 히스를 쭉 봐 왔던지라 소문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바야흐로 소문의 시간은 계속 되고 있었다. “소문이 정말 빠르네요.” “히스가 그냥 갔을 리가 없잖니. …설마 장난을 친 걸까?” “장난이요?” 히스가 적어 준 쪽지를 몰래 뒷주머니에 감추며 혜성이 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사비나는 아니겠지… 하면서도 그리움 짙은 눈매를 가늘게 떨었다. “히스는 테레사만큼의 재능 아란다. 절대 음감을 따라잡을 또래가 없었거든. 내가 그 애를 가르쳤을 때, 슈베르트는 테레사랑 비슷한 시기에 통달했지. 내가 오른쪽 시범을 끝내기도 전에, 그 애의 오른쪽 손가락이 건반에 치고 들어왔단다.” “와~” “놀랄 일도 아니었지. 왜냐면, 테레사는 내가 시범을 끝내기도 전에 아예 양 손으로 더 멋지게 연주했었거든. 게다가 하프시코드가 좋겠다면서 대뜸 건반을 다른 자리로 옮기더니 당시 그 애가 좋아하던 모차르트 소나타 1번과 함께 접목시켰단다. 신기하지?” “!” “그 때… 레슨을 먼저 마치고 대기 중이던 히스클리프는 그래서, 테레사한테 질투를 느꼈는지 바닥에 다리 벌리고 앉아서 엉엉 울기도 했지… …아, 비밀이다 수페리우스. 그 애들은 어렸을 때니까.” “하하하하.” “어쨌든, 게시 대에 붙여진 파란색 글씨는 히스가 아닌가 보구나.” “…글씨요?” 히스가 이곳에 왔던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는 정령처럼 잠깐 스치고 돌아갔었다. 아이 역시 그의 출현이 꿈인 줄로 오해했었지만 사랑해 라는 쪽지는 사실이지 않던가. 사비나는 나직이 한 숨을 내쉬며 가디 건을 걸쳤다. 수페리우스의 거듭되는 질문을 마주하니 정녕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나 보다. 막 병실을 나가려던 사비나가 어머니처럼 자상하게 미소 지으며 통통한 몸을 돌아본다. 오전의 햇살이 투명하게 반사되어 사비나를 반짝였다. “하늘과 바다를 지휘하는 독일의 멋쟁이가 다녀가노라.” “…?” “그 한 줄만 무려 백 장이 넘는 종이에 파란색 글씨로 삐뚤삐뚤하게 적힌 게… 게시 대에 붙여 있었거든.” “!” 히스! 정말 히스의 짓이다! 짐을 꾸리던 혜성의 동작이 일순 멈췄다. “한국말은 하지만, 글씨쓰기는 소질이 없거든. 어떤 글자는 틀려서 하늘을 하놀 이라고도 적혔었고… 그래서 분명히 히스였을텐데…….” 하놀? “하하하하하!” 하늘과 바다를 지휘하는 독일의 멋쟁이가 다녀가노라! “…수페리우스?” “아하하하하! 하하하하! 히스! …하하하하!” “괜찮니?” 두통이 모두 가셨다. 근심 걱정마저도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나니 없던 것처럼 증발했다. 아이는 배를 쥐고 웃다 못 해 지쳐서 눈물까지 흘렸다. 수페리우스의 발작 같은 웃음에 깜짝 놀랐는지 사비나는 한 걸음에 달려왔다. 아이는 곧, 비밀을 지켜달라는 말과 함께 그가 한국 아마데우스에 다녀간 게 사실이라는 말을 전했다. 사비나 역시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체통을 지키기 위해 안면을 일그러뜨리더니 격하게 숨을 내쉬었음은, 물론이다. 한 시간이 넘도록 웃음기가 통 사라지지 않는다. 혜성은 입술을 깨물며 어떻게든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아보려 애를 썼다. 자신이 울었듯이 그는 울었고, 자랑하기 좋아하고 뽐내기 좋아하는 멋쟁이인 그가 아무래도 혜성이 잠든 사이에 병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백 개가 넘는 같은 문장을 적었나 보다. ‘네 입술에 이름을 붙여주지. 히스를 달아오르게 하는 입술… 나는 에이브러햄 링컨 이다아~!’ ‘……괴롭히면 백마탄 왕자가 달려가겠노라.’ ‘……독일의 멋쟁이가 다녀갔노라!’ 여전히 엉뚱함은 잊지 않은 그가 계속 따라붙는 기분이다. 그는 나의 아픔마저도 가져간 거야…. 오, 히스. 너는 끊임없이 샘솟는 우물과도 같구나. 너의 녹색 눈동자와 잘 어울리는 파란 머리칼은 하늘과 바다를 출렁이겠지. 헤르베르크 폰 카라얀처럼 황제의 수식어로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손으로 나를 안아주기 위해 달려와 주었어. 정다운 너의 독일 글씨는 눈이 따가울 정도로 멋지던데, 한글은 그게 아니었구나. 그것도 너다워 서 즐거워. 나는 너를 먼저 닮아야 할까. 너 역시도 테레사의 하나일 테니……. 하늘가지들은 푸르른 잎사귀를 자랑하며 세상을 영위한다. 혜성은 연 이틀 동안 병동에 찾아 와 줬던 선호 선배와 동완을 만나기 위해 고픈 배를 문지르며 밖을 나섰다. 더 없이 수려한 아마데우스의 자연은 밤비처럼 시큼하고, 시리우스보다 우아한 태를 두르고 있었다. B동을 우연히 스쳐 지날 무렵, 여기저기서 달아오른 뺨을 찰싹 찰싹 두드리는 학생들이 보였다. 혜성은 그들이 궁금해서 B동을 찬찬히 걸어 다녔지만 뻥 뚫린 내부 어느 곳에서도 학생들이 홍조가 된 이유를 찾지 못했다. B동 뿐만이 아니었다. 분수대 옆의 C동과 저 멀리 닿지 않는 데블 관에서조차 상기된 표정들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힘들게 며칠 동안 아팠기 때문일까. 스트레스 덕분에 굳었던 오른쪽 안면이 정상으로 돌아와서일까. 사실 가장 행복한 상태는, 건강할 때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에? 혜성은 마치 아마데우스에 처음 입학했던 때처럼 신선한 감정에 휩싸였다. 무슨 일이니? 무슨 일이야? 연못의 다리를 걸어도, 언덕을 지나쳐서 다시 분수대 앞 광장에 도착해서도 혜성은 아마데우스 학생들의 젊은 기쁨의 이유를 몰랐다. 그러나 곧 게시 대 앞에 우글대는 학생들을 마주치며 나른히 미소 지었다. 저것이구나. 또 뭔가가 있구나. 나쁜 소식이 아니라 기쁨과 젊음에의 소식이구나. 그래서 다들 가는 곳마다 상기된 채 열을 올렸구나! 서쪽과 남쪽 기숙사 사건, 로제리오 교수님, 전공, 반 아마데우스. 여타 고민거리는 자신의 건강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님을 알았는지, 혜성은 숨 가쁘게 달려갔다. 작은 몸을 활용해서 재빨리 틈을 파고들어갔다. 많은 아이들이 목을 쭉 빼고 게시대의 높은 부분에 열광하고 있는 터라 그들 대다수는 혜성의 노란 머리칼이 등장했음을 눈치 채지 못했다. 맨 앞줄에 운이 좋게 도착한 뒤, 조용히 숨을 내쉬며 혜성은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붉고 강렬하면서도 게시대의 반을 차지하는 크기의 포스터가 부착되어 있었다. 이건 뭐지? 이것 때문인가? 혜성이 포스터의 상단을 읽기도 전에, 중간 부분에 서 있던 키 큰 학생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테레사의 독주회?! 보스턴에서?” “!” 오 하느님! 혜성은 양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장은 튀어 나올 것처럼 발광을 부렸다. 마른하늘로부터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당당하게 떨어지는 우박이 그려졌다. 투두두- 투두두- 그러나 바람을 일으키는 땅의 소리는 저 쪽 게시대 옆 산새들이 힘차게 땅을 딛는 설레임 이었다. 학생들은 저 쪽 분수대의 물줄기처럼 힘 있게 떠드는 중이었다. “자선기금 독주회야! 이럴 수가! 테레사는 아마데우스를 또 건축할 수 있을 만큼의 재력이 충분하고도 남을 텐데?” 혜성과 가까운 곳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통에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녀석이 씨 익 웃는다. 그러자 그 치와 친분이 두터워 보이는 옆의 누군가가 머리통을 치며 한심하다는 듯 더 크게 소리쳤다. “멍청아, 보스턴이잖아! 재단에서 쉬쉬하는 가운데 보스턴에는 달러를 주지 않는 거 모르니?” “그럼 테레사가 자기 돈으로 하면 되는 거 아닐까?” 그들은 그러나 서로를 윽박지르면서도 들뜬 것을 감추지 못한다. “답~답하기는. 그럼 학교 이름이 테레사도 아니고… 이상하잖아. 보스턴 이라는 명칭이 뒤로 밀리잖아.” 젊음은, 화를 내는 순간마저, 강렬한 것을 폭포처럼 쏟아내는 것이다. “가슴이… 이상하다. 뭔가… 나한테 하는 말 같이 끓어올라.” “나도… 그가 가엾다는 생각보다는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 “당연하지! 테레사잖아! 그는 눈을 잃어봤자 별 것 아닐 거야. 우리랑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지.” “맞아… 힘들기는 할까? 오히려 스포트라이트는 그의 것일 테지… 나아가 오페라 하우스도 그의 것이야.” “부러운데…….” 혜성은 문득 마음이 아파왔다. 그래서 포스터를 정 면으로 모두 볼 수도 없었다. 그가 눈을 잃은 것 보다, 오히려 더 자랑스러워하고 당연히 괜찮을 거라는 아이들의 음성이 슬펐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일어서기 위해 안간 힘을 쓸 것이다. 뮌헨에서 들었던 슬픔의 샤콘느가 그러했기 때문에, 혜성은 잠깐이지만 입술을 깨물며 괴로움을 참아야 했다. 하지만 고통은 잠시 뿐, 새로운 소문의 근원인 히스가 떠올라서 아이는 눈알을 굴렸지만 허사였다. 아, 히스의 종이는 모두 떨어져 나간 걸까. 한 장도 없는데……. 그나저나 너무 바짝 앞으로 붙어 있었나? 포스터의 하단 부분 색만 겨우 알아 볼 수 있겠는데… 혜성이 작은 머리를 굴리며 조금 뒤로 빠질 틈을 노리던 때, 예기치 않은 익숙한 음성이 불어왔다. “그이는 뮌헨에서의 일곱 살로 돌아간 거야… 나는 느낄 수 있어, 그이가 말하는 모든 것을…….” “이자벨…….” 슬픔과 격정에 흥분하는 이자벨의 흐느낌이 혜성의 바로 뒤에서 들린 것이다. 경직된 아이는 아예 허리를 숙인 채 조심조심 앞 쪽의 작은 틈새를 비집으며 게시 대를 빠져나갔다. 이자벨과 수산나의 음성은 작지만 계속 들려왔다. “보슬거리는 초록의 대자연이 한 눈에 펼쳐진 뮌헨이 그이와 함께 하는 걸… 아아… 가여운 나의 진… 열악한 보스턴의 환경은 그이를 말라 비틀게 할지도 몰라….” “이자벨… 정말이지….” 이자벨을 위시한 학생들 덕분에 혜성이 빠져나가는 즉시, 그녀 주변은 작은 원의 형상으로 공간이 넓어졌다. 만약 아까의 그 자리에 혜성이 서 있었다면 이자벨과 껴안을 정도로 가까워졌을지도 모르겠다. 끔찍한 일이다. 어쨌든 테레사의 독주회 포스터를 두고, 이자벨은 흐느꼈으며 그녀와 친한 수산나 역시 울먹거렸다. 혜성은 뒤로 빠져나와서, 다시 힘을 주어 중간까지 학생들 틈을 파고들어갔다. 몇 명이 혜성을 알아보고는 조용히 길을 터 주어서 이번에는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게시 대에서 펄럭이는 포스터에 적힌 글씨를 다 알아 볼 수 있게 되었다. “아….” 신음보다 진한 음성이 빠져나간다. 눈시울이 그렁그렁해진 혜성이 아까 전 아이들이 떠들었던 내용의 진짜를 확인하자 당겨지는 감동에 넋을 흐뜨렸다. 포스터 속의 테레사는 선글라스를 벗고 있었다. 그 대신 아름다운 눈동자를 눈꺼풀이 닫았다. 무엇을 해도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쑥 패인 마른 뺨은 오히려 더 강직하게 느껴졌으며, 꽉 닫힌 입술에는 생기가 돌았다. 클로즈업 된 상단의 테레사, 그리고 왼 쪽 하단 부근에는 테레사의 손가락이 보였다. 건반 위에 얹은 날씬하고 긴 그의 손가락이 은어의 손놀림을 과시하고 있다. 두통처럼 알싸한 무언가가 혜성의 영혼에 연신 스친다. 이윽고 아이는 보스턴의 테레사 피아노 독주회라는 커다란 글자 밑에 적혀있는 것을 보았다. 테레사가 직접 말을 해 주는 것처럼 겹낫표가 문장의 양 쪽 끝에 달려 있었다. 아마데우스의 아마데우스. 그가 잊지 않고 한국에게로 힘 있는 바람을 불어준다. 『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너희 안에 숨겨진 빛을 발할 때, 밤은 사라진다. 시련은 기회의 장, 시련은 준비의 시간, 시련은 고통과 과거의 기회! 시련의 독주는 시작되었다. 』 영원히 변치않을 그 바람을. 아픔 뒤의 행복은 서서히 말발굽의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쓰러졌던 혜성을 걱정했던 게 틀림없을 테오제네스가 선물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서쪽 기숙사동 관리인이 부르는 소리에 1층의 우편함을 열어보니 과연, 혜성의 앞으로 온 동그랗게 말린 무언가가 있었다. “!” 비록 쪽지 하나 없이 달랑 선물만 도착했지만 혜성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서둘러 방으로 올라갔다. 누가 볼까봐 두려운 나머지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 한 테오제네스의 선물은 바로, 게시 대에 부착되어 있는 테레사의 독주회 포스터였던 것이다. 천금을 얻은 귀인이 된 기분이 이러할까. 혜성은 소리소리 지르고 싶은 기분을 가까스로 참아대며 커다란 포스터를 침대 옆 벽에 붙였다. 민우의 라일락 향기와, 정혁이 선물해줬던 장미꽃의 향기, 이제는 테레사의 붉은 포스터와 글귀가 그들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혜성에게 존재감을 준다. 혜성의 키와 엇비슷할 정도로 커다란 포스터를 향해 히스가 그랬던 것처럼 우아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 뒤, 기분이 좋아진 아이는 조심스레 눈을 감고 있는 테레사에게 입을 맞추었다. 포스터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져서 손끝이 떨려온다. 물론, 이 자랑거리를 떠들고 싶었던 작은 입술은 학생 식당에서 마주치는 즉시 동완에게 방금 전까지의 일을 생생히 알렸다. “벽에 뽀뽀를 했다고?” 선호 선배가 바쁜 관계로 오늘 약속에 불참했기 때문에 심기가 불편했던 동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비아 냥 거렸다. “쉿! …그게 아니라 포스터에 있는 테레사에게 했다니깐.” “수페리우스양. 상태가 심각한데?” “차라리 병아리라고 불러. 수페리우스 양이라니!” “크크크큭. …병아리는 미카엘 선배지.” “…?” 숟가락을 팡- 치면서도 내심 혜성이 건강해진 것이 좋았던 터라 동완은 곧 웃어보였다. 게다가 그는 퇴원 선물도 내밀었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오른 동완이 내민 선물은 작고 소담해 보였다. 포장지를 뜯는 동시에 혜성은 비명을 참아야 했다. “너는 선물을 받는구나.” “동완아….” “테오제네스보다 내가 더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고마워….” 비명을 참자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이는 떨리는 가슴에 동완이 준 선물을 포개었다. 기쁨이 나락으로 떨어져도 영원토록 빛날 것 만 같았다. 죽음의 칼이 영혼을 찔러도 아이는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테레사의 독주회 포스터를 축소한 뒤, 액자로 제작해서 선물로 준 동완이 새삼 근사해 보였다. 필시 독주회 소식을 듣는 즉시 친구를 위해 끙끙대며 만들었을 흔적이 여기 저기 보였다. 혜성은 동완의 그을린 자국이 여기저기인 손을 포개었지만, 그는 곧 징그럽다며 테이블 밑으로 팔을 내렸다. 날아갈 듯 기뻐하면서도 혜성은 액자를 누가 볼 것이 두려웠는지 품안에 가린 채 숨만 내쉬었다. 밥을 먹으라고 호통을 치는 동완 역시 자신들을 누가 볼 새라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기쁨의 시간이 짙어진다. 색채가 있다면 가장 젊고 화려한 색채로, 그들 스스로도 모르는 영원이 계속되고 있었다. “너한테 하는 말 같았어, 혜성아.” 소년이여 야망을 갖으라는 테레사의 글귀를 직시하는 동완이 조근 조근 속삭였다. 혜성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그는 자기 자신에게 말 한 것일 수도 있고… 또 우리들 전부에게 메시지를 전한 거야.”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두 사람은 현재 한국의 아마데우스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기숙사의 소문과, 전공에 대한 이야기는 배제한 채 나머지를 떠들었다. 비록 영양가 없는 대화라 할지라도 그들은 좋기만 했다. 곳곳의 테이블 중앙에 마련된 후식용 사과를 깨물어 먹으며 혜성이 심드렁한 투로 입을 열었다. “대립은 언제나 있나 봐, 동완아….” “무슨 소리니?” 히스의 조언대로 첫 번째 정한 순서는 바로, 기숙사의 소문 건이었다. 나약함은 그 끝에 달려가니 사라졌다. 민우의 말은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며 혜성을 다시 세워 주었다. 언제나처럼 정다운 심리학자에게 이런저런 말을 쏟아내려는지 아이는 사과를 와작 깨물며 또박또박한 투로 말했다. “낙오자 모임과 위원회… 난 그것만 생각했었는데, 봐. 남쪽 서쪽 기숙사도 대립하고 있어.” “…그건 경우가 달라. 병와~리 수페리우스 양.” 병와리 수페리우스 양? 하루 종일 비꼬기로 작정한 건가? 실실 웃으면서도 굳이 양 자를 붙이는 동완이 싫지 않아서, 또 지금 내용이 더 중요하다고 느낀 혜성이 바짝 고개를 내밀었다. “그럴까?” “당연하지.” “어째서?” 자신의 쪽에 턱을 쭉 내민 혜성의 이마를 숟가락으로 치며 동완이 의자를 뒤로 쭉 빼는 시늉을 했다. 다시 제자리에 바른 자세로 앉은 혜성이 새침한 표정으로 액자를 만지 작 거리며 눈을 빛내자,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던 동완이 차분한 투로 말한다. “사상이 틀려.” “!” 쩡 얼어붙었던 내면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낙오자와 위원회는 말 그대로 ‘대립’이야. 하지만, 남쪽과 서쪽 기숙사 애들의 경우에는 같은 테두리로 공존하는 게 첫 번째니까… 굳이 따지자면 ‘경쟁’이라고 해야 맞지. 그게 정답이야.” “아~!” 언제나 정답은 가까운 곳에 있다. 과연, 정답은 무엇일까. 혜성은 실로 허탈하다는 표정으로 힘없이 사과를 떨어뜨렸다. 악! 하는 비명을 지르며 잠깐 동안 경직된 동완이 어떻게 먹을 것을 떨어뜨릴 수가 있느냐며 호통을 쳤다. 경쟁… 그래. 경쟁이 맞구나. 소문이 있다 한 들 같은 테두리에 있으니까 뿌리는 흔들리지 않아. 대립이 아닌 경쟁… 경쟁…. “경쟁은 나쁜 게 아니야. 때론 활력이 된다고 생각해. 뭐~ 심해지면 피곤하지만.” “하하하하….” “게다가 기숙사 경쟁은 넌 당연히 몰랐겠지만, 낙오자 모임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다구.” “오호~” 파란 사과가 붉어지기 위해서는 부딪혀야 한다. 그것은 경쟁이라는 이름표였어. 간단한 거야. “오호~가 아니야. 나의 미카엘 선배와 나는 따라서 영향력 있는 경쟁 상태라는 거지.” “에이. 그럼 지금 설명한 건 순전히 너의 주관이잖아 동완아.” 이야기를 듣던 도중 약을 올리듯이 혜성이 혀를 내밀자, 동완은 오히려 더 표정을 굳혔다. “약간의 주관과 객관성이 적절이 융합된 결론이라고나 할까.” “…….” “뭘! 원래 대개 의견이나 논문은 그런 거야!” “알았어, 동완 양. 밥 먹어.” 혜성이 떨어뜨렸던 사과를 막 주운 동완이, 불긋한 그것을 아이에게 던졌다. 그리고 아름다운 두 사람은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최근 보스턴에서 막 돌아온 테오제네스는 서 쪽 기숙사동 입구에서 한심하다는 투로 무거운 입을 열었다. “이 시간에 뭘 하자고?” “후레시는 가져왔어?” 그러나 초조한 표정의 혜성은 테오제네스가 주렁주렁 매달고 온 세 개의 손전등을 확인하기 바쁘다. 새벽 두 시에 만나기로 한 그들은 소문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혈안이 된 상태였다. 퇴원하는 즉시 선호에게 쓰러져서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는 것으로 오히려 그를 놀라게 했던 혜성은 직접 이 일에 파고들자는 의견을 제시했었다. 무조건 돌파라니. 그건 테레사와 다르지 않잖아! 라고 누군가가 절망적인 어절로 호소했지만, 혜성은 이렇게 하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며 떠들었었다. 서 쪽 기숙사동의 입구에는 새벽 두 시가 되자 세 사람이 옥신각신 하며 나직이 속삭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손전등을 챙겨서 나타난 테오제네스의 김빠진 표정과, 말을 더듬었던 서쪽 기숙사동 대표 프란체스코, 그리고 혜성. 이렇게 세 사람은 병동으로 갈 계획이다. 선호는 기숙사에서 대기하면서 이들을 기다릴 것이다. 친하지 않은 관계로 상당히 어색한 분위기의 세 사람은 곧 병동 쪽으로 몰래 몰래 걷기 시작했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한 분위기가 견딜 수 없었는지 프란체스코라는 세례명을 지닌 기숙사장이 입을 열었다. 이제 그는 수페리우스 앞에서도 말을 더듬지 않는다. “테레사랑 본 적 있느냐고?” 기숙사장의 물음에 혜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풀을 헤쳐 나아갔다. 그렇지. 사실은 혜성이 먼저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아이의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프란체스코는 의기양양하게 맞받아쳤다. “있지. 예전에도 악기 폐기 건이 있어서 테레사가 문정혁이랑 기숙사에 온 적 있었거든.” “…….” 그건 동완이 저번에 말 해 줬던 거다… 라고 혼자 생각하며 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나는 신입생 이었는데, 테레사가 서명 용지를 주면서 내 이름을 물어봤었어. 내가 성 프란체스코라고 하니까, 좋은 이름이라면서 화사하게 웃어주셨지.” “그랬구나….” 훈훈한 미소가 혜성의 입가를 떠나지 않는다. 그는 누구에게나 멋진 첫인상을 심어준다는 게 생각나서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실제로 테레사는 혜성과의 첫 만남에서도 부드럽고 자신 만만한 사내였기 때문이다. “저기 누가 있다, 수페리우스.” “! 정지.” “흡.” 맨 뒤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따라붙던 테오제네스가 심드렁한 투로 알리자, 혜성은 재빨리 프란체스코의 입을 틀어막고 허리를 숙였다. 서늘한 긴장감이 세 사람의 등줄기를 바짝 달아오르게 했다. 새벽 두시에 이게 뭐 하는 짓이냐며 테오제네스는 대낮에 다시 오자고 조용히 속삭였지만 혜성은 대답이 없었다. 정원사 두 명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게시 대 길을 지나치고 있었다.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리며 세 사람은 게시 대 뒤에서 마른침을 삼켰다. “됐다, 가자.”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작은 몸이 씩씩하게 나아가는 것을 보며 테오제네스는 낯 뜨거운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들은 곧 아무도 없는 병동 지하에 도착했다. 이 시간이면 관리인은커녕 쥐새끼조차 없을 때가 아니던가. 게다가 그간 병동 악기가 규칙적인 날짜의 흐름에 맞춰서 사라졌었다. 만약 그 규칙이 맞다 면 바로 오늘, 도둑이 닥칠 것이다. 시컴한 내부를 걷는 세 사람은 손전등을 밝혔고, 서로에게 맺혀있는 식은땀을 보고 흠칫 놀랐다. 누구라 할지라도 용서할 수 없어. 민우가 베토벤을 알려줬던 피아노가 이곳에 있는데, 나는 지킬 거야. 수페리우스는 한층 건강해진 몸으로 단호하게 표정을 굳히더니 지하 창고 도어를 세게 열었다. 쾅-! 문이 열리는 순간, 그를 조심스레 따라붙던 테오제네스와 프란체스코는 굳어서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그도 그럴 듯이 조용히 파고들 줄 알았던 아이가 무모한 힘으로 세게 문을 열어서였다. “수페리우스!” “…조용히 오면 뭐해. 내가 도둑이면 달아나겠어.” 어이가 없다며 중얼거리는 두 사람을 대신 해서 수페리우스는 용감하게도 쉭 쉭 악기들을 손전등으로 비쳤다. 아무도 없는 건가? 한산한 악기 주변에는 침침한 기운만이 가득이다. “거 봐라.” 기력이 다 빠져나간 듯한 테오제네스의 지적에 발끈하기도 잠시, 혜성은 이 계획이 정말 무모 했던 걸까… 라는 자책을 중얼거렸다. “…숨어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규칙에의 예상은 적중했다. 아무도 없는 게 당연한 넓은 창고 안쪽에서부터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숨지는 않습니다.” “!” “!” “!” 유령!? 악기 이외에 살아있는 것을 전혀 찾지 못했던 세 사람은 경직되었다. 사람의 목소리는 차츰 차츰 그들이 서 있는 도어 쪽에 가까워졌다. “유, 유령, 유, 유령인, 유.” “쉿.” 잔뜩 긴장한 프란체스코가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혜성의 관자놀이를 타고 끈적 한 땀이 흘렀으며, 그제 서야 진지한 자세로 돌입한 테오제네스는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손에 쥐었다. 그는 여차 하면 바로 내 칠 기세로 허공에 강목을 들어 올린 상태였다. “오히려 기다렸는걸요.” “!” 세 사람이 앞으로 가리키는 손전등빛 쪽에 불쑥 나타난 인영은 싱그레 웃었다. 놀란 셋은 동시에 바람 빠진 어절을 열었다. “로미오?” “워, 워, 워, 워, 워시, 시시싱.” “여기서 뭐 하는 건가, 조단.” 더러워진 면장갑을 탁탁 털어가며 인부 복 차림새로 나타난 사람은, 다시 봐도 로미오였다. 워싱턴이며, 조단이었다. 잠시간이 지나고, 나란히 지하 창고에 앉은 그들은 따지듯 로미오를 추궁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더 당당하고 침착하게 대답하기만 했다. “제가 그랬잖아요. 희대의 반항아가 되는 게 소원이라고.” “하….” 혜성의 머리에 묻은 가을 이파리를 떼어주며 로미오는 윙크까지 했다. 희대의 반항아? 그를 노려보기에 여념이 없던 테오제네스는 직업 정신이 발휘됐는지 그런 스스로에게 나직이 욕을 지껄이며 항상 지니고 다녔던 작은 펜과 수첩을 꺼냈다. 말을 더듬느라 제대로 질문을 할 수 없는 프란체스코를 대신 해서 혜성이 강하게 노려보았다. “…그래서, 하나씩 가져간 악기들로 뭘 하려는 거지? 로제리오 교수는 이 일을 오히려 더 좋아하고 있는 눈치다. 왜냐면, 그는 새 악기들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니까.” “그런 건 상관없어요. 저한테도 반가운 소식이죠.” “어째서?” 혜성과 로미오의 대화가 깊어질수록, 테오제네스의 손놀림도 빨라진다. 그들 사이에 손전등을 내려놓으며 프란체스코는 꿀꺽 침을 삼켰다. “제가 그랬지요. 저는 가난하다고요. 그래서 가난에서 오는 절망이 어떤 것인지 잘 알지요. 아마데우스의 생활은 꿈보다 화려해요.” “…그.래.서.” “하지만 음악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있는 집’ 녀석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잖습니까. 저는 그들과, 선량한 자선 단체들에게 악기를 공급해주고 있던 거예요. 비록 혼자여서 얼마 안 되지만… 하프와 바이올린은 한 개도 남아있지 않지요.” “!” 로미오의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빛이 난다. 자랑스러운 너의 후배란다…… 음침한 시각이기 때문일까. 어쩐지 민우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철렁- 심장이 내려앉았다. 더 큰 무언가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의 단호한 문장들은 단순한 것만 유추했던 세 사람의 위에서 군림하는 것이다. 오 하느님. 혜성은 노골적인 시선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만약 감동이라는 글자가 있다면 이 순간의 것일까. 수첩에 열심히 내용을 적는 테오제네스의 손이 눈에 보일 정도로 떨리고 있다. 품 안에 소중하게 안고 있는 호른의 곳곳에 난 기스를 쓰다듬으며 로미오는 단호한 투로 말했다. “기스가 나도 아마데우스의 악기는 세계 최고를 자랑합니다. 조금만 조율하고 수리하면 새 것 못지 않지요. 각자 길들이는 ‘자기 것’의 악기가 있는 이상 필요 없는 악기들이 사실 많기도 하고… …언젠가 입학하기 직전에 저희 동네에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어 하는 작은 여자아이를 본 적이 있었어요. 그게 어떤 것인 줄도 모르면서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다는 겁니다. 텔레비전에서 바이올린만 나오면 그 애는 자다가도 일어나서 정신없이 쳐다본대요.” “!” “…소문의 정체는 저였습니다. 남쪽 애들이 흘린 소문도 맞아요. 저는 서쪽 소속이니까요… 뭐… 남쪽 애들은 일부러 소문을 지었다지만, 저는 그 소문 듣는 순간 들킨 줄 알았으니까요.” 그의 진솔한 대답에 감명 받은 세 사람은 동시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로미오….” “워싱턴….” “조던….” “!” 그리고 각자 다른 이름을 불렀다는 게 기가 막히기도 하고, 새삼 우스워서 멍청하게 서로를 둘러보다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잔뜩 긴장했던 것의 결과가 허무해서 웃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너는 사실 빛이었구나. 아름다운 젊음 이었구나. 정체가 모호하지만 파란 사과임에는 틀림없구나. 새벽 다섯 시가 되어서야 진정이 된 그들은 수페리우스를 주시하며 마른침만 삼켰다. 아이는 그들이 자신의 결정에 따라 웃을 수도, 울 수도 있다는 점을 잘 알았다. 이제 어깨는 무겁지 않다. 병동에서 아팠을 때 시련의 끝이 떨어져 나간 게 틀림없었다. 새벽의 칼바람에 몸을 움츠리는 것도 잠시, 혜성은 기쁘게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시선과 쭉 마주쳤다. 아닌 척 해도 사실은 긴장하고 있던 로미오는 피곤한 기색이었다. “긴장하지 마라.” “…….” 아이는 ‘신경전’에서 휴전을 선언한다. 홀로 훌륭한 일을 해 왔던 로미오가 대견해서 선배 된 자격으로 그의 움츠린 어깨를 쓸어 주었다. 실오라기 새벽 하프의 선율이 옹기종기 앉아있는 그들의 머릿결에 부딪힌다. “이 일을 허가 하마.” “!” “하지만 수페리우스, 로제리오 교수는-” 수페리우스의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맞받아치는 예리한 질문이 테오제네스의 조급한 입 밖으로 쏟아졌다. 혜성은 편안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 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필요한 거지, 테오제네스.” “……?” “모르겠어? 당신은 인쇄 동의 대표인 걸!?” “!” “당신은 긍정적인 신념이 있는, 뭐든 적을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하나잖아!” “!” 테오제네스는 경외의 시선을 담아서 작은 수페리우스를 쳐다보았다. 아프다고 들었는데… 여전히 작은 애송이 정도로 여기고, 감히 테레사는 따라 잡을 수 없을 거라 여겼는데… 내가 보스턴에 다녀올 동안 신입생 연주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테오제네스의 떨리는 시선은 그렇게 말을 하는 듯 했다. 상냥한 하프의 선율이 퍼져 간다. 아마데우스는 발칵 뒤집혀졌다.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 때, 또 그 사실이 ‘소문’을 반영할 때 사람들은 있던 잠도 달아나게 한다. “수페리우스가!” “워싱턴이라면… 워싱턴이라면… 아, 그 녀석이잖아! 학생 감옥에 갔던!” 이른 아침부터 게시 대 앞으로 몰려든 무리들은 따끈따끈한 가십 용지를 읽으며 놀란 입을 떠들었다. 마 악 떨어지던 새벽이슬은 소리 없이 종적을 감췄고, 그들의 열기에 놀란 산 새 들마저 단 잠을 뿌리치고 창공에 날아갔다. “가십, 가십이다-!” “이번에는 테오제네스야! 역시 이 소문은 진짜 였나 봐!” “수페리우스가 해결했어! 역시!” 뜨거운 젊음에의 가십이 깃발처럼 펄럭인다. < 선량한 젊음의 불꽃이 타오른다! > 테오제네스의 가십은 늘 아마데우스 모두에게 활력을 심어주기 마련이다. 오전 아홉시 무렵의 분수대는 터져 나갈 것처럼 남쪽, 서쪽 학생들이 응집했다. 그들은 한결 같이 수페리우스와 테오제네스, 그리고 워싱턴을 외쳤다. 간혹 누군가는 로제리오 교수를 다시 봤다며 진심으로 존경의 뜻을 표했다. < 소문은 사실이라는 것과 가까운 쪽에 속한다. 그 둘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뗄 라야 뗄 수 없음을 밝힌다. 최근 한국 아마데우스 서쪽 기숙사에서는 흉흉한 소문이 일었었다. 지난 날 테레사와 문정혁의 합심 덕분에 로제리오 교수의 최종 승인이 난 오르페우스 관 악기들 상당수가 병동의 지하 창고에 안치되었었다. 소문은 이러하다. 병동의 악기가 하나씩 없어진다는 점인데, 이것을 두고 남쪽 학생들은 서쪽의 누군가가 범인 일 거라며 다른 소문을 흘렸다. 진실은 이러했다. 그는 범인이 아닌, 젊은 선구자로서 아마데우스 밖의 선량하되 가난한 이들에게 악기를 직접 공급해주는 자로서 외롭게 악기들을 날랐다고 한다. 그는 워싱턴, 혹은 조던이라 불리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신입생이다. 수페리우스는 그 학생의 선행을 두고 로제리오 교수가 최근 오르페우스 관 악기를 교체한다는 선언에 찬성의 손을 들었다. 병동의 악기를 모두 꺼낸 뒤, 텅 빈 공간에 현재 오르페우스 관 악기를 안치하거나 선량한 학생이 그러했듯이 자선 단체에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몇 년 전 테레사의 경우와 반대의 결과이지만 내용은 같다. 뮤즈의 뜻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아마데우스를 대표하는 로제리오 교수는 이로서 위상이 높여진 바, 그들 단체에서 고맙다는 뜻을 전할 예정이라고 한다. 아마데우스의 학생들이여! 너희들의 값진 악기들은 선량하되 가난한 모두에게 희망이 되어 줄 것이다. 이 모든 일을 홀로 계획했던 신입생 워싱턴의 행위는 물론 징계 감이지만, 그의 뜻과 수페리우스와 로제리오 교수, 자선 단체의 호소에 힘입어 그는 포상을 받을 예정이다. 희망과 나눔의 아마데우스가 탄생된 오늘, 모든 이들이 기뻐 할 것이다. -테오제네스- > 정확한 것을 간결하되 희망찬 문장으로 적은 테오제네스의 가십을 확인하며 학생들은 저가 뭐라도 된 양 기뻐했다. 간혹 오만한 학생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구절에 콧대를 높였고, 서 쪽 학생들 몇 명은 뭉클해지는 가슴을 움켜쥔 채 눈시울을 떨었다.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은 절망보다는 희망을, 슬픔보다는 기쁨과 행복이 충만한 결과가 빚어졌다는 것이다. 밤새도록 그들을 기다렸던 선호 선배는 범인이 로미오였다는 소식을 듣는 즉시 까무러칠 뻔 했다고 한다. 또 아닌 밤중의 홍두깨마냥 소식을 접한 로제리오 교수는 많은 교수들의 찬사를 받으며 잠이 덜 깨인 상태에서 샴페인을 터뜨렸다고 한다. “수페리우스!” 누군가가 막 걸어오는 혜성을 알아보고 기쁨에 찬 소리를 질렀다. 아이는 정답게 웃어주며 자신을 반기는 무리들 사이를 걸어갔다. 아직 배울 게 많다는 것도 알고, 이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지도 다 들어보지 못해서 두렵기도 해. 하지만 괜찮아. 아프고 나서, 나는 괜찮아. “다들 봤지? 이 가십을!” 혜성의 쩌렁쩌렁한 외침에 정말로 환해진 학생들은 저마다 그를 주시하며 화답했다. “그래! 소문이 있다는 것만 알았는데, 단 한 번에 해결될 줄은 정말 몰랐어! 대단해!” “워싱턴 그 녀석이 대단한 일을 했던 거구나! 역시 우리의 아마데우스야!” 혜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등장한 동완이 길게 하품을 하며 편안하게 물어 온다. “혜성아. 그런데… 이 짧은 시간 내에 정말로 교수님을 만난 거니?” “…아니.” “끅!” 당연하다는 듯 아니 라는 대답을 건네는 혜성에게 놀란 나머지 동완은 혀를 깨물었다. 한바탕 쾅쾅 바닥을 뛰며 따가운 혀를 내밀면서도 동완은 무식하다 싶을 만치 가십을 올린 테오제네스의 글과 혜성의 온화한 표정을 향해 물음표를 던진다. 친구의 등을 찬찬히 쓸어주며 수페리우스는 오전의 빛을 온전히 저의 것으로 흡수한다. “그는 상업적인 사람이니까 이 가십을 오히려 반길 거다.” “……! 안 만난 거야?” 순간 동완은 이대로 혜성이 사라질 것처럼 느껴졌는지 몇 번이나 황금색 아이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혜성은 왜 이러냐며 동완의 등을 쓸던 것을 중단하고 게시 대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테오제네스의 가십, 그리고 그 옆에 있는 테레사의 포스터가 혜성을 또렷이 마주쳤다. “만났어도 변함없어. 서로에게 좋은 결과일 테니… 교수님의 위상은 높아지고, 이로서 그 분에게 사과하는 계기도 되었거든… 나는 마음이 정말로 편안해졌어.” “하…하….” 선선한 가을바람이 어제보다 차가워졌다. 아니, 이제는 억세 풀처럼 단단해졌다. 뭉클대는 감정을 억누르며 혜성은 붉어진 눈매로 한 참이나 왁자지껄한 아이들의 모습과, 저 앞의 게시 대를 응시했다. 바로 그 때, 번쩍- 하고 죽어있던 생각이 스친다. 아이는 턱을 덜덜 떨었다. 이 놀라운 발상이 왜 이제 서야 자신에게 떵떵대며 나타나는 건 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테레사… 그의 포스터가 살아 있다. 눈을 감았지만 오히려 더 아름다운 그가… 그래서일까. “동완아….” “?” 게시 대를 올려보는 기쁨에 찬 입술이 목울대를 떨리 운다. 동완은 채 아물지 않은 혀를 입 안에 굴리며 혜성을 돌아보았다. “나… 정했어.” “?” 어떻게, 무엇을, 왜, 라는 계기는 사실 필요 없어. “전공을… 정했어.” “!” “갑자기… 갑자기 생각이 났어. 이상해… 근데, 그걸 하면 된다고 내 자신이 나에게 속삭여… 하염없이….” 테레사, 그의 손동작이 움직인다. 나는 보이는 거야… 나는 이렇게 자세히 보이는 거야… 한 줄기 눈물이 떨어질 양 콧 전이 시큼 거린다. 혜성은 손목을 훔치며 다시 말했다. 광활한 햇살이 조금 있으면 대지를 뜨겁게 달굴 것이라며 그들께로 위협을 가한다. “정혁이가 오페라를 보여줬는데… 나는 아무런 감동을 얻지 못했었지. 오페라 아이다는 식별만 겨우 될 정도였어. 나는 생각 했던 걸까. 나는 그를 생각했던 거지. 그래, 그를 생각했던 거야.” “혜…성아…….” “제 아무리 화려해도 눈으로 확인하지 못 하는 그를 은연중에 생각했던 게 틀림없어. 나는 나도 모르게 너무 슬펐던 거야. 그래서 아이다를 보면서도 감상은 쉽지 않았던 거야.” “넌 정말….” “처음에는 그가 연주하는 새로운 곡을 적기만 해도 행복할 거란 생각이 들었지… 그런데 내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음악으로 만들어 주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졌어….” “!” “나는, 그의 세상이 되어 주기로 했다. 그와 내가 정말로 헤어져 있어야 하는 이유로….” “너….” “그와 내가 정말로 헤어져서 껴안고 있는 음악으로….” “…….” “작곡으로….” “!” 결심은 결심으로, 언젠가 행동은 행동으로. 머릿속의 묽은 안개가 걷혀진다. 어쩌면 병동에서 퇴원하는 날 더러운 안개는 모두 사라졌는지도 몰라. 깨끗하고 투명한 물방울만이 세상에 맺혀서 나의 영혼에 떨어지는 거야. 혜성의 떨리는 입술과 영혼은 오로지 앞 쪽 게시 대에 목 박혀 있었다. “그의 은어의 손놀림은 영원할 거다… 나의 음악 역시 새롭게 창조될 거야….” “!” “그가 나를 어디에 풀어 줬는지 정작 내 자신은 잊고 지냈던 거지… 이젠 나도 그를 잠깐 놔 주기로 했어….” “…역시 잘 모르겠다.” “…그러니….” “작곡만 할 계획이야? 전공을?” “…아니.” “그럼?” “느낀 게 많거든.” “?” 자꾸 들이닥치는 학생들의 숫자에 숨이 막힌 걸까. 아니면 어딘가로 바삐 가야만 하는 걸까. 혜성은 싱그럽게 웃으며 동완의 어깨를 탁 탁 두드렸다. “나중에 보자, 동완아!” “무어? 혜성아! 혜성아! …혜성 양!!” 그리고는 새털보다 가벼운 스텝과 함께 쭉 달려가는 것이다. 마음이 가벼워졌어. 이상해. 이 일 역시 자연스럽게 내 힘이 아니라도 수순에 맞춰 운명처럼 해결 된 것 같아. 여인의 입술보다 붉은 가을의 잎은 거의 떨어졌다. 오솔길은 붉게 차이는 여러 가지들이 많았다. 두 갈래의 숲길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는 뛰는 것을 멈추고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하늘 가지들이 고개를 올리면 빼어난 몸을 자랑했다. 바삭 이는 햇살이 마지막 가을을 달고 홍시처럼 달콤하게 팔을 벌렸다. 양 팔을 벌린 채 혜성은 길을 걸었다. 질질 끌듯이 걸을 때는 발아래 여러 이파리가 채였다. 바삭대는 길은 자연의 향이 살아 있었다. “혹시 당신도 지금 하염없이 뛰어 대는 고동소리와 함께 길을 걷나요.” 내가 사랑하는 것을 잊어서 미안합니다… 아이는 작게 속삭이면서도 이제 됐어. 이제 된 거야. 이제 할 거야. 라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문장에 도취되었다. 이제는 됐어. 이제는 연주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머리와, 심장과, 영혼은 아마데우스를 사랑해요.” 두 갈래 숲길 저 편에서 오랜만에 마주치는 미카엘 성가대 아이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크게 소리친다. “수페리우스-! 몸은 어떠니?! 반가워-!” 아이는 크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숲길 옆에서 시작되는 언덕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하프의 선율을 알려준 테레사가 밟았던 그 길을 오랜만에 오르기로 한 것이다. “보이 시나요… 당신이라면 볼 수 있을 거예요….” 우거진 숲 길 곳곳에서 산새들의 지저귐이 청각을 두드렸다. 혜성은 조근 조근 속삭이면서도 떨어지는 구슬땀을 내버려 두었다. 이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언덕의 꼭대기다. “이렇게… 멋지게… 씩씩하게… 활기차게….” 그늘과, 흙, 바람과, 햇살, 나뭇 가지들, 이파리와 산 새, 모든 것을 한 번씩 스칠 때마다 내면은 전혀 들어 본 적 없는 선율을 빚었다. 손가락이 꿈틀거린다. 아이는 언덕을 오르는 내내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가벼운 건반을 두드리듯이 허공에 건반을 만들기도 했다. 테레사…. “당신의 아마데우스는… 당신이 변하듯이…….” 언덕의 꼭대기에 오르는 순간 뻥- 하고 터질 것처럼 커다란 바람이 작은 몸을 스쳤다. 활기찬 아마데우스의 모든 것이 언덕 꼭대기에서는 모두 보였다. 신음처럼 떨어지는 음성이 저 밖으로, 어쩌면 보스턴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혁명이라는 이름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생기가 돌아오는 아마데우스에서, 갑자기 닥쳤던 스트레스에 주저앉지 않은 스스로가 보였다. 그래서 테레사가 보인다. 혜성은 천천히 허리를 숙이더니 발아래의 흙을 한 줌 주웠다. 보드랍고도 차가운 알갱이들이 한 데 모이자 조용히 주먹을 펴 본다. “한 번 더 눈을 감고 세상을 봐요… 느껴지시나요….” 살포시 눈을 감는다. 그리고, 보스턴으로 정확하게 전달되기를 기도하며 흙에 입을 맞추었다. 혜성은 곧 센 바람이 밀려올 때를 잘 맞추어 손을 높게 쳐들었다. 쉬이이이- 파드드드- 수페리우스와 입을 맞춘 흙 알갱이들은 작은 염원과 기도를 안고 멀리로 날아가기 시작한다. 저희들끼리 몸을 부딪치기도 하며 갈색은 세상 밖 더 넓은 곳으로 날아간다. “당신의, 우리의, 가장 뜨겁고도 혹독하지만 그만큼 값으로 새길 수 없는 젊음의, 겨울이 오고 있습니다…….” 발바닥부터 올라오는 전율을 잊지 않겠습니다. 필시 앞으로 펼쳐질 감동과 고통을 예고하는 영혼은 세차게 떨리지만 잊지 않겠습니다. 텅 빈 손을 내리지 않은 채 자연에 몸을 맡긴 혜성의 뺨 위로 숭고한 눈물이 흘렀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처럼……. 하루진님께서 주신 표지 마지막 버젼, 테레사 입니다. 고마워요^^ wgreene@naver.com 벌써 2악장 40편 입니다.(왠지 뿌듯하다는... 돌파 기념 파티 할까요?) 안녕하세요 그린입니다.^^ 숨막혔던 지난번편보다 이번편은 적으면서도 엉덩이가 들썩이네요. 이번에는 정말로 마구 불러주십시오.(응?) 바빠질 것 같아서... 아니.. 혹시 보고싶다는 소리가 많아지면 자투리 시간을 더 마련하겠다고...☞☜...(나 땀) 저의 부족한 글이지만. 당신에게 행복과 희망이 되기를 소원하면서... 행복하세요... 박카스정님, 셂님, 린님, 하용님, 하루진님, 연님, 아기해달님, 별하님, 포근구름님, 솨, 주앙, 군림님, 피글렛냠님, 소카님, 그리고 이 글을 지켜보는 당신.. 고맙습니다. -그린- 덧. 안부게시판 댓글은 조만간 꼭... 쿨럭..(퍽;) 덧글 21개 엮인글 쓰기 /data20/2006/8/29/150/jj-wgreene.jpg@nhn@96589@nhn@1@nhn@400@nhn@575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39~40편 /data20/2006/8/29/150/jj-wgreene.jpg@nhn@96589@nhn@1@nhn@400@nhn@575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39~40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41편(이별의 아리아) ▼ 다음글 - 2악장 37~38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41편(이별의 아리아)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9/01 20:13 http://blog.naver.com/wgreene/110008258082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901 41편 업데) Amadeus 음악 : Greensleeves - Dreaming/Andre Rieu (아래 플레이버튼 클릭) Greensleeves-Andre Rie.. 자신이 흘린 돌덩어리가, 누군가에게는 보석이 된다. 2악장 41편 너희가 뛰어나다 한 들 만 개의 수려한 가지 끝에 내제된 나의 예민한 신경만큼은 못 하다. 붉은 수풀은 끊임없이 아마데우스 곳곳에서 옅은 파동을 일으키며 음색을 빚었다. 테레사의 말마따나 그 미세한 선율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붉은 띠를 벗고, 씩씩하게 두 팔 벌려 으리으리한 계절을 품에 안을 준비를 마쳤다. 11월 첫 째 주가 지날 무렵의 아마데우스는 4학년생들의 열기로 아주 뜨거워졌다. 새로이 교체된 오르페우스 관의 악기들은 딱딱하고 덜 익은 과일 같아서 그들은 마침 잘 되었다는 식으로 만지려 들었다. 먼저 길들이는 자 만이 그 악기의 주인이 된다는 의식이 있어서인지 그들은 자신들의 연습 시간을 열 시간에서 하루 종일로 늘이기 일 수였다. 피아노과를 지망하는 학생들이 상당수인 터라 4학년 대다수는 오르페우스 관 앞에서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새로운 것을 길들이고, 자기 것으로 취한다는 4학년들의 욕망은 전에 없던 것으로서 조용히 지내던 선후배들에게도 자극이 되었다. 슈베르트 동상이 세워진 사비나 교수의 별 채에는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젊은 욕망이 모두 전해졌다. 그녀는 반 쯤 비운 홍차를 테이블에 올린 뒤, 연주에 여념이 없는 수페리우스의 근처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는 수페리우스와의 약속 시간에서 무려 15분이나 지각한 상태였다. 수페리우스는 그러나 조용히 앉아서 기다리는 게 아닌, 그녀의 피아노와 호흡하고 있었다.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서인지 조용히 경청하려던 사비나의 의도와는 달리, 날씬하게 오고가는 아이의 손놀림 위로 힘 있는 음성이 전해졌다. “…늦으셨네요.” “수페리우스….” 그녀의 안면에 엷은 홍조가 피었다. “건반이 외로워하는 것 같아서요.” 쇼팽의 야상곡 20번을 연주하는 내내 수페리우스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은 상태에서 입 꼬리를 올렸다. 서늘한 바람과 햇살이 두 사람의 근처에서 머무르자 주변 모든 것은 금광처럼 반짝였다. 우아하게 팔을 움직이는 내내 아이는 전혀 힘들어 하지 않았다. 건반은 누르는 게 아니라 아이를 따라 다니지 못 해 안달 난 짝사랑의 소녀처럼 붉어 보였다.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저 슬프기만 했어요….” 트레몰로 부분에서 비스듬히 숙여진 뺨을 살짝 올리며 수페리우스는 침몰해가는 음표처럼 조용히 떠들었다. “정혁이한테 이 말을 하니까, 루빈스타인의 쇼팽 해석 집을 빌려 주더라 구요.” “오, 루빈스타인!” 혜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름답고 서정적인 야생의 선율에 흠뻑 도취되어갔다. “사랑과 탄식, 이 지리멸렬한 고독의 여운조차 빠르게 이해 할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이 곡을 언제 숙달했니?” “숙달이라… 그런 건 없었지요.” “?” 아쉽게 건반에서 손가락을 떼며 혜성은 호흡을 길게 내쉬었다. “무조건 천천히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주의력이 떨어질 때는 건반을 쳐다만 봤어요. 그러다가 박자와 테크닉이 너무 어렵다고 여겨지면 입으로 숫자를 세어 가면서 더 천천히 시작했지요.” “!” “다른 애들도 그렇게 하지 않나요? 저는 아마데우스에 입학하기 전, 폐허에서 연습할 때 필사적이었거든요. 터치가 매끄러워질 때 까지 백 번, 이백 번, 밤이 지나서 해가 뜨는 게 아쉬워 질 때까지… 요즘은 많이 둔해졌어요. 그 땐 한 곡 한 곡 그런 식으로 습득하는데만 정신이 팔렸었는데…….” “그래….” “원만한 이해보다는 조금씩 갉아 먹듯이 인내심을 갖고 연습했던 게 대다수예요. …이상한가요?” “…아니.” 아이의 작은 손등은 시퍼런 힘줄이 잔뜩 돋아나 있었다. 조금만 건드리면 파란 엉겅퀴들이 툭 튀어나와서 당장이라도 사비나 교수의 황금빛 주변을 옳아 맬 것처럼 힘이 넘쳤다. 사비나는 일어나라는 말 대신 아까 자신이 잠시 앉았던 쇼파의 상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요즘에는 뭘 주로 연습하고 있지?” 그녀를 조용히 따라오던 수페리우스는 싱그럽게 웃으며 화답했다. “연습이라기보다는 훈련을 계속하고 있어요.” “무엇을?” 사비나 교수의 테이블 주변에 널려진 악보와 행사 일정을 두루두루 훑어보며 아이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흑건보다도 어렵더라구요….” “?” 그리고 아차 싶었는지 사비나의 정다움과 시선을 교차하며 부드럽게 처음부터 설명했다. “쇼팽의 혁명이요. 손이 작고 제가 힘이 부족해서 그런지 악보만 봐도 힘이 들었어요. 제대로 된 연주는 사실 딱 한 번, 그것도 룸펜의 무대에서만 해 봤습니다. 이상하게 평소때 연습하려면 그 때처럼 주저 않고 쭉 쭉 나가지를 않아요.” “룸펜? …난이도가 상당할 텐데….” 사비나는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빠르게 나아가는 수페리우스의 레슨 속도와, 이 아이의 연습 스타일과 잘 어울리는 교수를 고심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일률적인 방식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날개를 달아줄 위인이 분명히 있을 텐데… 당장 생각나지는 않지만 떠오를 것도 같아…. 사비나 교수는 수페리우스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대강은 아는 위인이었다. 그녀는 같은 곡이라 할지라도, 혹여 아이보다 진도가 상당히 빠른 학생들과 비교해 볼 때, 흡입력이 남다른 수페리우스를 전부터 알아보질 않았던가. 매력은 곧 천부적인 능력이다. 백 번 노력해도 선천적으로 주어진 자 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을 뜻한다. 같은 곡이라도 듣는 이에게 주는 감동의 퍼센티지가 다를 때, 선천성과 후천성이 도드라진다. 수페리우스는 테레사가 목소리 하나만으로 알아 봤듯이 그 선천성 능력이 내제되어 있다. 이 아이에게 어떤 교수가 어울릴까… 사비나는 앞으로 두고두고 고민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듯 했다. “무모한가요?” “…아니.” “계속 되는 연습만이 전문가를 만든다고 히스가 그랬는데…….” “히스가?” “네.” “…내가 알려줬던 거다….” “히히힛.” “왜?” “…그냥… 갑자기 히스가 웃겨서요.” “어쨌든, 큰 무대가 너에게 도움이 많이 됐을 거다, 수페리우스.” “…….” “잘 하다가도 막상 무대에 서면 신경이 예민해져서 평소 실력의 반도 못 하는 애들이 있거든. 그럼 어쩔 수 없이 무대 행사를 많이 가져야 해. 너는 그 반대잖니.” “…그렇지도 않아요.” “게다가 너는 내 앞에서 아까 건반을 누를 때조차 편안해 보였어.” “…교수님이 편해 하시니까요.” “하….” “교수님.” “그래.” “…전공을 정했습니다.” 그렇지! 사비나는 순간 낯설게 느껴지는 수페리우스에게 미안한 감정이 치솟았다. 자신 역시 테레사를 보았던 예전의 느낌대로 아이를 대한 것을 부인할 수 없어서였다. 자신의 앞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웬만한 일에는 눈물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테레사로 느꼈던 걸까? 이 아이는 힘들 때 홀로 눈물을 훔치는 걸까. 아마데우스에서 시작부터 수월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혜성은 어쩐지 사비나가 머뭇거리는 게 당연하다고 느껴졌다. 겨울이 닥칠수록 시신경이 터져 나갈 것처럼 불안해하는 이파리들이 사비나의 창 문 쪽에 붙었다.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것 같아서 아이는 은연중에 잠깐 일어서더니 창문을 활짝 열었다. 매끄럽게 날아드는 푸석한 이파리들은 마치 나비의 날개 짓처럼 자유분방하다. 바닥에 떨어진 몇 가지 가을 이파리를 손에 쥐고 동글동글 돌리면서 혜성은 속이 다 시원하다는 투로 또박또박 답하였다. “오페라와 작곡을 복수전공할 거예요.” “…….” 그리고 천천히 사비나 교수를 돌아보았다. 멀리 사라질 것처럼 미동 없이 햇살에 빨려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 사비나는 눈을 흐리게 뜨면서도 혜성이 노란 머리칼처럼 금방 사라질 듯 보였는지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기숙사 소동이 있은 뒤, 한결 안정감을 찾은 아이는 가벼운 스텝과 함께 입을 열었다. “복수 전공이 가능할 수 있도록 도와 주셔야겠습니다.” “내가 어떤 도움이 될까.” 이윽고 사비나는 아까부터 궁금하던 것의 정체를 파악했다. 그녀는 아이가 모르도록 미간을 찌푸린 채 옅은 숨을 내쉬었다. 외로움의 등불이 빛나는 것이다. 예전의 테레사에게서 느꼈던 화려한 전율이 이름만 바꾸면 외로움의 파장 이었듯이, 전에 없던 쌀쌀한 흐느낌이 수페리우스에게 태어났다. 감수성이 지독하게 예민한 자에게만 간혹 나타나는 현상이 이제 사비나는 보이는 것 같았다. “글쎄요. 한국 아마데우스는 특출 난 전공이 아직 없습니다. 테레사가 제일 유명한 것 만 봐도 알 수 있지요. 한 가지 정도는 여느 아마데우스보다 한국이 뛰어나다는 걸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테레사를 그리워하고 있어! 아닌가, 단순히 그리워하는 것만은 아니야! 아이의 입술이 테레사 라는 글자를 대화중에 섞을 때마다 옅게 떨리는 것을 용케 관찰한 사비나는 다른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 보았다. 게다가 이 아이는 한국 아마데우스의 정확한 것을 파악하고 있다! 사비나의 놀란 표정은 그 말을 참고 있었다. “오페라는 성악이나 마찬가지지만, 좀 더 포괄적이지요. 때로는 연극에서의 상황 표현과, 동작, 그리고 새로운 것에서는 작곡이 도입됩니다. 가장 가능성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오페라야 말로 한국적인 것을 많이 만들어 내고 알릴 수 있는 최종 관문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정통 악기 한 부분에만 파고드는 게 낫지 않을까, 수페리우스?” “제 능력의 한계를 꼬집으시는군요.” “…….” “해 본 뒤에, 실패하겠습니다.” “!” “때로는 실패할 걸 알면서도 무모해지는 게 사람이잖아요.” 망설임이라는 못된 글자가 사비나 교수를 떠나지 않고 있음을 혜성은 알았다. 아이는 저의 무릎을 탁 치며 쾌활한 투로 그녀의 흐릿해진 눈동자를 잡아당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거잖아요, 교수님. 저는 음악을 계속하면서 단 하나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도 이만한 가치의 예술 문화와 클래식이 있다는 것을요. 그러기에 앞서, 일단은 배워야 하잖아요.” “그래서… 너는 이 전공을 선택하기로 한 거니.” 수페리우스는 기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수페리우스….” “…….” “너는 성공 할 거다.” “…….” “대게 아이들은 인내심이 부족하거든. 그래서 잘 하면서도 중도에서 손을 놔 버리거나 뒤로 밀리는 수가 허다하지. 히스가 왜 성공했을 것 같니?” “…….” “정혁이도 인내심이 강한 편에 속하지만… 히스는 내가 본 학생 중에서 가장 인내심이 뛰어났다.” “!” “그 애는 어떤 일을 해도, 굳이 음악이 아니더라도 다른 면에서도 인내심이 강할 거다.” “…네.” 혜성은 처음으로 사비나 교수의 의견에 모두 동의할 수가 없었다. 고개는 끄덕였지만, 그녀는 몰라서 그러는 거다. 정혁이에게 특출한 재능은 없다지만, 그 애가 히스만큼의 인내심이 없다니, 사비나 교수는 필시 자신이 직접 지도했던 히스클리프를 아끼는 마음에서 정혁이를 뒤로 미룬 것일 테지. 약간의 씁쓸한 감정을 어쩌지 못 한 채, 혜성은 그녀의 별 채에서 나왔다. 주말 마다 음악회를 열어서 무대의 기회를 많이 주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은 잠시 뒤로 미루는 게 좋겠어. 아직은 아니야. 내 자리가 확실해 진 다음에… 그래, 그 때에…. 이별의 아리아 밤 낮 없이 전공 시험을 준비하는 이 때, 수페리우스 앞으로 뜻밖의 편지가 도착했다. 발신인의 주소는 이태원인 걸로 보아서 룸펜 식구들일 게 틀림없었다. 바야흐로 이틀 후로 바짝 다가온 전공 시험에 대비하여 수페리우스는 특별히 준비한 게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듯이 시험 과목은 당일 날 게시 대에 부착되거나, 해당 교수들의 강의실 문 앞에 큼지막하게 쓰이기 때문이다. 혜성의 복수전공을 두고 고심하던 사비나 교수는 이례적인 일이지만 도와주겠노라 뜻을 전했다. 덕분에 각기 전공 시험 시간이 겹치지는 않을 테지… 피아노일까, 아니면 성악? 즉흥 연주? 그도 아니라면 단 시간 내에 주제 없는 작곡?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시험 날짜는 테레사의 독주회와 겹쳐졌지. 그는 해 낼 거야. 차디찬 눈망울에 생기를 불어넣고 은어의 손놀림을 과시하며 세계를 놀라게 할 거야. 그는 음악을 사랑해. 때때로 음악의 뺨을 치고 싶을 정도로… 그러면서도 나는 금방 그를 잊고 나의 세계에 몰두해 버리는데 그도 나의 세계를 질투해 주실까. 아! 우리의 삼각관계는 참으로 로맨틱하구나. 그렇게 여기지 않으면 쓸쓸하고 외로울 테니, 차라리 로맨틱하다고 여기는 게 낫겠어……. 피곤한 어깨를 두드려 가며 혜성은 기숙사 방에 들어서는 즉시 편지를 뜯었다. 정갈한 필체가 분홍색 편지지 위로 가득이었다. “어….” 이태원 샤우트의 유리가 보낸 것임을 알자, 저도 모르게 긴장했는지 수페리우스는 피아노 의자에 앉으려던 몸을 침대에 뉘였다. 하늘 높이 팔을 올리고 읽는 내내 유리가 뭐라고 떠드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어쨌든 그 애는 나의 첫 번째 제자이니까……. “으잉?” 더듬더듬 침대 밑의 술병을 쥐려던 손이 흠칫 놀라서 멈췄다. 아이는 벌떡 앉더니 편지지를 코앞에 붙여서 방금 읽었던 문장을 여러 번 확인했다. 동시에 고집을 피우며 머무르기를 간청하던 가을의 모든 것이 백기를 들어올린다. 그렇게 사라져 간다. “아마데우스에 입학한다고?” 이게 무슨 소리인가! < 내년 가을에 입학시험을 치룰 거예요, 선생님. 저는 작곡 부분으로 시험을 치룰 것입니다. 실기 테스트는 봄부터 있을 예정인데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 “작곡으로?” 흠칫- 어깨가 떨린다. 혜성은 열심히 과거 유리와 했던 대화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마땅히 스치는 기억이란 게 별로 없었다. 오히려 샤우트가 룸펜의 유리를 모조리 깨뜨렸던 때만이 강렬하게 다가와서 아이는 몇 번이나 호흡을 참아야 했다. 10분여가 지나서야 그녀의 진지했던 음성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 오… 이 악장은 계속 팔을 흔들어야겠네요. 』 유리를 기억하고 있어. 율동을 멈추지 않는 나의 기억들이, 그녀의 목소리를 재생시켜주잖아. 이애는 악보를 읽는 실력이 예사롭지가 않았는데……. 그래, 천부적이라고 할 만한 능력이었어. 『 장난 반으로 했던 거야. 어떻게 셋잇단음표와 스타카토와 그것도 포르테로 하나의 악장을 지나치겠어. 게다가 음도 이음줄로 길게 길게 늘어져 있지. 부드러움과 강렬함… 많이 미숙해. 언젠가는 그런 곡을 만들어 보고 싶다… 이거지. 』 룸펜의 다락방에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오선지에 음표를 적었던 그 때, 유리는 혜성의 한 악보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금방 유추해 낸 음색으로 인해 흥분했었다. 그녀는 봄의 종달새처럼 쉴 새 없이 떠들었었다. 『 아마데우스에서는 작곡도 가르치나 봐요? 』 혜성의 악보에서 무언가를 찾은 것처럼, 말도 못 하게 격앙된 어절을 흘렸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건데 혜성 자신은 그 당시 히스의 부재와 외딴 시각에 방문해 온 유리 때문에 그녀가 말 하는 전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었다. 『 나도 직접 배워보진 않았지만, 히스가 알려줬지. 거의 모든 학생들은 자기만의 곡을 만들거든. 5학년이 되면 작곡을 깊이 있게 들어가서… 내가 아니라 아마데우스 학생들이 그렇다는 거야. 나는 4학년일 때 자퇴했거든. 』 그녀는 내가 말하는 것의 전부를 알아듣지 않았었어. 눈동자와 영혼은 한량 악보에 취중 되어서 아주 잠깐 미쳤던 걸지도… 왜 지금에서야 그렇게 생각날까. 대수롭지 않은 대화 였을 텐데…? 『 연주 하는 도중에 손가락이 부러지겠는걸요. 무서운 악보에요. 』 독이 든 사과를 쥐고, 그것이 독인 줄 모르는 척 예쁜 마녀처럼 웃었던 것 같다. 왜 이제 와서 그런 사사로운 감정들이 새삼스러울까. 그 애는 단지 새로운 악보를 빠르게 습득하고 반가워했을 뿐인데……. 『 나도 연주 할 수 없는 거라서 장난으로 그린 거야. 다른 거 보렴. 여기 편곡 한 것들… 그래봤자 히스가 거의 다 도와 준 거지만. 』 『 틀림없이 손가락에 말도 못 할 경련을 일으키고 연주자를 미치게 할 거에요… 이 악보를 제대로 완성시켜 봐요, 선생님. 』 그 말에 놀란 혜성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유리는 천진한 표정으로 웃었었다. 『 …저도 농담이에요. 』 왜 그 땐 아무렇지도 않게 스쳤던 내용인데, 돌이켜보니 소름이 끼칠까. 그래. 유리는 당시에 독사처럼 눈을 빛내며 떠들었었다. 나의 악보를 보며… 나의 미친 흔적을 보며… 악보, 악보는 어디 있지? 그 때 유리가 탐내다시피 눈초리를 빛내던 그 악보가? 혜성은 술을 벌컥 벌컥 들이키며 자신의 방 곳곳을 뒤졌다. 그러나 그 당시 유리가 흥분했던 악보는 찾을 수 없었다. 자신에게 그 악보는 첫 번째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제껏 소중하게 지켜 오지 않았던 탓이다. 별 일이야 있겠는가 싶었는지 어깨를 으쓱하며, 혜성은 그 외의 시시콜콜한 안부 따위를 물어오는 유리의 상냥한 편지를 마저 읽기 시작했다. 읽는 족족 고향에의 향수처럼 흠씬 당겨지는 그리움이 짙어진다. 혜성은 귀중한 보석 상자를 열어 보는 표정을 고수하며 아까의 악보 건은 금 새 잊어버렸다. 자신이 흘린 돌덩어리가, 누군가에게는 보석이 된다. 그러나 그것 역시 훗날이 닥쳐서야 사람은 깨닫는다. 바로 그 때, 방문이 벌컥 열리며 성 프란체스코가 들이닥쳤다. 침대 위에서 빈둥거리던 아이가 꽥 호통을 치기도 전에 그는 진땀을 흘리며 두리번거리더니 이상한 것을 물어왔다. “그림자! …아니, 정혁이가 여기 없니, 수페리우스?” “…뭐?” 유리의 편지를 조심스레 서랍에 넣으며 혜성이 짜증스레 되물었다. “기숙사 대표들이 소집되어서 방금 다녀왔는데, 수페리우스….” “그런데?” 나는 내일 모레 중요한 심사가 있으니까 방해 하지 말아줘! 라고 퍼부을 양으로 팔 장을 낀 채, 노려봤지만 프란체스코는 거듭 당황하기만 했다. 무슨 일이지? “아 그런….” “없어?” 프란체스코가 무어라 더 말을 하기도 전에, 이번에는 로미오가 들이닥쳤다. 빠르게 회전하는 가을의 최후가 여기 있다. 죽음의 단도 앞에서 마른 잎사귀를 눈물처럼 부스러뜨리는 가을이 사라져 간다. 로미오는 심술궂은 표정으로 자신들을 노려보는 수페리우스가 돌연 반가웠는지 싱긋 웃었지만, 곧 휙휙 방을 둘러보며 바람 빠진 어절을 흘렸다. “아, 선배… 놀랐어요? 미안해요.” “로미오, 이게 무슨 짓이니.” 내가 만만한 건가? 당장 생각난 거라고는, 노크도 없이 찾아온 무례한 두 사람에 대한 감정이다. 혜성은 제대로 따져야겠다는 마음에 술병을 쥔 채로 손가락을 내밀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참, 모르셨어요?” “뭘.” 삿대질을 하려는 혜성의 손가락을 모르는 척 옆으로 치우며, 로미오가 묻는다. 이 녀석이! 지난번에 한 번 봐 줬다고 내가 만만한 건가? 단순히 상황에 집중하며 예민해진 수페리우스가 어서 나가! 라고 짜증을 내는 동시에 로미오는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우리의 그림자가, 자퇴서를 제출했답니다.” “!” 가을이 사라진 공간에, 쓸쓸한 초겨울의 바람이 밀려온다. 문득 춥다고 여겼는지 성 프란체스코는 활짝 열린 창문을 닫아주었다. “문정혁이 아마데우스에서 자퇴 한대요.” “그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어. 수페리우스, 너는 뭐 아는 거 없니?” “…열…어….” 욱신거리는 심장이 바닥으로, 저 밑으로, 정처 없이 내 몸을 떠난다. 닫힌 창문 밖으로 흐느끼는 듯 한 바람의 소리가 밤의 힘을 빌어 세어졌다. 아이는 그림자라는 단어를 시작으로 팽- 끊어지는 시신경을 막지 못했다. 도리어 화가 나서 주체할 수가 없다. 무엇이, 왜 라는 과정 없이 무조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열…라고….” “…뭐?” “?” 파랗게 질리는 혜성을 응시하는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눈치껏 창문을 다시 열어 주는 로미오 덕분에 시니컬한 바람은 향기 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자퇴! 글자만으로도 무너질 수 있는 게 사람이다. 아이는 그제 서야 정신을 차렸는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오페라를 보여주기 전 날, 허공을 향해 스스로를 답답해했던 정혁의 아련함이 스쳤다. 그 속도와 힘은 태풍보다 잔인했다. “그의 별채에 가 봤지만, 웬 종이만 달랑 책상 위에 있더라.” “뭐라고 적혀 있던데….” “나도 봤어!” 어느 새 혜성의 열린 방 문 입구 쪽에 모인 상당한 녀석들이 하나같이 떠들기 시작했다. 무엇을? 뭘 봤다는 거지? 몇 마디만 더 하면 그를 만나기도 전에 한 웅큼의 눈물이 떨어질 게 두려워서 아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왜 정혁이를 신경 쓰지 못했지? 그래, 내 일로도 벅차다고 느껴서… 하지만 정혁이인데? 나는 그를 생각할 때가 많았어. 일전에 사비나 교수님을 뵈었을 때도 히스 보다는 정혁이가 인내심이 강하다고 자신했는걸. 그러나 이 세세한 감정을 그에게 직접 표현하지 않은 이상, 그가 알까. 그가 과연 내 진심을 알까! 바로 그 때, 로미오가 등을 돌리며 엷게 속삭였다. “Loving sky without wings….” “……?” 천천히 돌아보는 혜성을 통 모르겠다는 듯이, 굳이 저렇게 놀랄 필요가 있느냐며 로미오는 어깨를 으쓱한다. “날개도 없는 주제에 하늘을 사랑했다….” “!” “…라고 적어 놓은 쪽지가 상당하던데… 뭐 짚이는 거 있어요, 선배?” 오 하느님! 가장 잔인한 당신이시여… 그럴 리가 없어, 아닐 거야, 아닐 거야! 아이는 그의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술병은 어느 새인가 바닥에서 깨어져 있었다. 나의 가여운 이여! 정혁아, 정혁아, 정혁아! 마음은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를 원망하며 같은 글자를 빚는다. 『 아름다운 나의 마드모아젤. 너는 나를 꺾었다. 그래서 네가 사랑스럽고, 두렵다…. 』 내 안의 잔인한 신이시여, 나를 껴안아 주던 훈풍! 그 목소리를! “저, 정혁, 정혁아-!!” 가을의 이파리가 모두 사라진 밤의 오후, 절퍽거리는 심장이 아이의 등을 쫒아오고 있었다. wgreene@naver.com 별하님, 다큰엔젤님, 하루하루님, 포근구름님, 리에뜨님, 로아님, 슬픈웃음님, 군림님, 셂님, 갱이님, 주황이, 아기해달님, 소아양, 박카스정님, 하용님, 그리고 유령님들, 고맙습니다. 댓글은.. 닳고 없어지리라 느껴질 만큼 생각날 때마다 봅니다.^^ 저에게 큰 힘이 되어주거든요. 방금도 그 행동을 하고 나서 새삼 고마워지는 마음에 꼬랑쥐 추가해 봤습니다. 멋진 주말 맞으시길 바랍니다... -그린- 덧글 23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41편(이별의 아리아)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41편(이별의 아리아)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42편 ▼ 다음글 - 2악장 39~40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42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9/04 18:34 http://blog.naver.com/wgreene/110008377070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904 42편 업데) Amadeus 음악 : 봄날ost 中 main title(classic ver.) (아래 플레이버튼 클릭) Main Title(Classic Ver.. “그의 가을이 사라졌어.” 2악장 42편 청승맞은 달 역시 수페리우스를 쫒았다. 가녀린 두 다리는 무중력 상태를 달리는 것처럼 감각을 깨우칠 수 없다. 호흡의 규칙 따위는 잊은 지 오래여서, 짧은 거리를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혜성은 몇 번이나 힘겨운 숨을 내쉬었다. 정혁의 별채는 작은 화음마저 소멸되어 있었다. 지지대는 산새의 날개 짓조차 들리지를 않는다. 하물며 몸 파는 여인들의 천박한 신음 소리라도 없느니 들리는 게 나을 정도로 끔찍한 무음은 까만 별채를 회오리처럼 감았다. “정혁아! 정혁아! 정혁아!” 쾅쾅쾅! 아이는 문을 두드렸다. 있는 힘껏 소리치며 가슴이 찢어지는 소리를 빚었다. 수풀이 흐느끼는 잔인한 음성만이 사방에서 파고들어왔다. 정혁아, 정혁아! 혜성은 두 주먹에 상처가 맺히는 것도 모르는 채 눈물범벅이 되어 사색이 된 비명을 질렀다. 그의 별채에서는 훤한 달도 수풀의 미명에 가려져 한 눈에 들어오지를 않는다. 정혁아, 정혁아! 이윽고 온 몸으로 밀칠 때가 되어서야 문이 열렸다. 아마도 학생들의 눈을 피해서 하루 종일 없어졌다가 그도 지금 막 자신의 별채로 돌아 온 모양이었다. 너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 학생들의 눈빛을 혹시 보았니. “…….” 오 하느님! 혜성은 무감각하게 자신을 마주보는 정혁을 망설임 없이 끌어안았다. 작은 팔을 벌려서 그의 모든 것을 안아주기 위해 애를 썼다. 가파른 호흡이 둘의 사이에서 방해했지만 혜성은 와들와들 떨리는 눈동자 밖으로 떨어지는 눈물 덕분에 괜찮았다. “정혁아, 정혁아, 정혁아… 으… 흐으, 흐, 흐, 흐으, 흐, 저, 정혁아. 정혁아? 저, 정혁아.” “…….” 딱딱한 기둥을 끌어안은 것 마냥 그는 반응이 없었다. 혜성이 애써 손을 두르고 보채 봤자 그는 정 자세인 상태에서 움직이지도, 숨을 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철렁 가슴이 내려앉은 혜성이 턱을 들어 올리며 발뒤꿈치를 세웠다. 정혁아, 정혁아! 입보다 빠른 속도로 심장은 그를 불렀다. “네가 나에게 해 준 것처럼, 네가 나에게 준 것처럼, 나도, 나도 말을 해 줘야 하는데, 정혁아.” “…….” 너의 날개를 달아줘야 하는데, 왜 텅 빈 머릿속에는 한량 바람조차 스미지를 않는 걸까! “오페라, 오페라의 어느 부분이라도 그래, 포… 퐁키졸라, 뭐, 뭐였지? 정혁아, 나는 너에게 무슨 말을 해 주고 싶은데, 네가 나에게 해 줬듯이 멋있게 멋지게, 정혁아!” “…….” 천둥 번개가 친다 한 들, 이보다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죄가 많다 한 들 이보다 클 수는 없을 것이다. “하, 할 수가 없어. 너를 위해 준비해 둔 음악과 싯 귀가 있어도 생각이 안 나. 없어, 있는데 없어. 정혁아… 정혁아… 왜 그래… 왜 그래….” “…나를….” “정혁아!” 정신없이 소리치는 혜성의 눈물과 호소를 표정 없이 내려 보던 정혁은 뒤늦게 무거운 저의 팔을 올렸다. 그리고 땀과 눈물에 젖어 달라붙은 아이의 노란 머리칼을 이마에서 떼어 주었다. 상냥한 그의 손가락은 그러나 목각보다 딱딱한 느낌이 가득해서 아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혜성의 양 뺨을 감싼 뒤 숨이 다 하려던 아슬아슬한 때, 정혁은 무감각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마지막이라고 여기는 걸까. 그는 다른 때와는 달리 속의 것을 아낌 없이 꺼낸다.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니….” “!” 비가 쏟아졌다면, 그의 소리를 막아 줬을 텐데! 우박이 내렸더라면, 번개가 땅에 꽂혔다면 그의 지린 음성을 못 들었을 텐데! 평온한 대지는 미동이 없다. 강풍이 실려 온 들 흔들림 없을 그림자의 입술이 다시 열린다.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니.” “…….” 그리고 그는 냉정하다 싶을 만치 멍하니 동공을 흐트리는 혜성에게서 등을 돌렸다. “너는 나를 단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 “정혁아….” 숨 가쁘게 너의 이름을 백 번 부르면 아닌 척 농담이었다고 혹시 웃어주지 않을까. 백 번이 부족하면 천 번, 아니면 만 번. 사랑에의 구절! 청천 벽력같은 네 음절 아닌 척 유도하려는 지금의 나를, 나 역시도 미워한다면. 혜성은 그를 따라 들어갔고, 까맣게 흩어지는 그의 영혼을 가로막으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잡히지가 않았다. 손을 뻗어 봤자 잡을 수 없는 게 정답일까. 정혁은 괴로운 듯 신음을 흘렸지만 혜성이 발견하지 못 하도록 인내심 강한 면을 활용하는 중이었다. 혜성은 별채 내부에 들어서는 동시에 발아래 차이는 큰 가방들을 통해 그가 곧 자퇴를 실행 할 것을 예감했다. 오 하느님 제발! 아이는 당장 뛰어가서 낯설어만 보이는 그의 등을 껴안았다. 안아줘, 안아줘, 다른 때처럼 너의 배에 깍지 끼인 내 손을 잡아! “단 한 번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어….” 그러나 그의 고통만이 지상에서 가장 슬픈 현의 선율이 되어 하염없이 쏟아진다. 만약 지금이 음악이라면 피보다 진한 눈물이 되어 악장에 떨어질 것이다. 만약 지금이 오페라라면 누군가는 악에 받친 절규를 무기 삼아 땅 아래로 곤두박질 칠 것이다. 슬픔 이상으로 아무것도 없는 음악을 통해 당신은 무엇을 느끼는가. 아이는 실로 미칠 것 만 같은 감성을 낱낱이 속삭이며 애절하게 매달렸다. 내 안의 신이 계신다면, 제발 이 사람만은, 이 가여운 사람만은…! “정혁아… 정혁아… 우리 얘기를 해 보자… 저 쪽에 의자에 앉아서 우리 마주보고 천천히 오래도록 너의 이야기를…….” 선량한 당신이시여, 제발 이 사람을 붙잡아 주소서. 나에게는 힘이 없습니다. 나에게는 끈이 없습니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음악은 하나의 수단이었는데, 나는 그것마저도 극복하지 못했지. 감동이 없어. 전율 이란 게 없기 때문에 기적 또한 없었지.” “아니야… 아니야….” 우리 아마데우스의 최고의 노력가이자 빛보다 진한 그림자가 안녕을 야기한다. 누구든지 막아주오, 나보다 힘이 있다고 자부하는 너희들은 제발. “음악은 정말로 수단에 불과했다… 낙오자의 모임까지도 없는 현재, 나는 정말로 혼자임을 실감했지.”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혼자가 편하지만, 예전과 같은 편안함은 아니었어. 나는 외로웠던 거야. ‘무엇’을 추진할 거리가 없는 지금이 싫은 거야…….” “괜찮아. 괜찮아. 정혁아, 내가 있잖아… 정혁아….” 그는 속의 이야기를 꺼내는 게 틀림없었는지 괴로운 턱을 올렸다. 차이코프스키의 야생곡이 되어서 흐느끼는 몸짓을 비올라처럼 떨리 운다. 이 순간마저 저주받은 나의 감수성의 변이는 그의 영혼에서 비올라의 슬픔을 보았어. 이 지린 순간마저! 아이의 노란 머리칼 위로 정혁의 땀방울이 떨어진다. 그의 턱이 솟구쳤기 때문에 흐느끼는 것은 머리칼이 대신 하나보다. 그의 파란 등에 뺨을 부비며 혜성은 영원히 붙어있을 양 속삭이고, 또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이제라도 알았으니 괜찮을 거야. “늘 높은 곳의 영향력 있는 ‘무엇’이 되는 게 나의 소원이었던 걸까. 그렇다면 음악은 정말로 수단에 불과할 테지….” “너는… 너는 뮤즈야… 너는 모르겠지만, 창공을 날아다니는 새야… 정혁아… 너의 아름다운 값을 그렇게 말하지 마… 말하지 마….” 누가 말 해 주오. 나의 어리석은 입술은 대체 그에게 주저리주저리 어떤 말을 떠드는 겐가. 슬픔의 비올라에게 도리어 지적을 가하는 차이코프스키가 되어서? 제발… 제발. 그러나 혜성이 잡아주기에는 정혁은 너무 멀리로 가 있었다. 잡아도 잡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영혼은 아마데우스 밖 먼 곳으로 나아가서 찾을 라야 찾을 수가 없었다. 벌써 그림자가 되어 숨어버렸다. “여느 인간들처럼 나는 외로웠던 거야. 그것도 가장 기본적인 이유로.” “내… 내가 있잖아, 정혁아. 내가 있잖아… 내가….” “네가 있었지… 내 마지막 구원인 네가 있었지….” “그래… 그래….” 정혁은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리고 눈물범벅이 되어 흐느끼는 혜성을 어두운 와중에도 내려 보며 한 참을 있었다. 서늘한 그림자의 양 손가락은 수페리우스의 마른 어깨 위에 놓였다. 숨이 막힐 것처럼 처절한 눈동자가 밀려올수록 혜성은 그를 용감하게 올려 보았다. 이윽고 그의 손가락이 아이의 눈과, 코, 입술을 차례대로 문지를 때가 되어서야 혜성은 더듬더듬 그의 등 뒤로 팔을 올려 쓸어 주기 시작했다. 괜찮을 거야. 정혁이가 나를 다시 봤으니까, 내가 구원 이랬으니까 괜찮은 거야. 하지만 얄팍한 안심이 가시기도 전에, 깨어지는 음성은 칼처럼 불어왔다. “그런데, 단 한 번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어.” “!” 가장 슬픈 비올라가 깨어진다. 그 아름다웠던 청춘을 버리려 한다. 어둠의 빛이 깨어진 나부랭이가 되어 조각조각 흩어진 갈색의 틈을 비집고 들어간다. 나는 어떻게 하고 있지. 목이 부러질 양 고개를 저어 봤지만 그는 울지도, 웃지도 않은 채 나를 내려 보는 거야. 이렇게 처절하게 끝을 미리 준비해둔 잔혹 한이 되어서-! “그림자는 그 점이 가장 괴롭습니다….” “정혁아… 정혁아….” “늦었습니다 나의 마드모아젤….” “그… 그런 소리는 하지 말고 우리 좋은 얘기 앞으로의 얘기를 나눠 보자. 너의 얘기를 들어야겠어. 나는 나는….” “걱정하지는 마… 너라는 못은 영원히 내 심장에 박힌 채 있을 테니…….” “!” 흩어진 청춘의 갈색 실오라기마저 스스로 잡아당기는 절망의 낯으로, 마지막까지 박힌 못을 빼 내지 않겠노라 저를 아프게 한다. 그는 곧 입술을 깨물더니 혜성에게서 다시 걸음을 돌렸다. 아이는 얼어붙은 채로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잡을 수가 없다. 무슨 수를 써도, 지금의 문정혁을 잡을 수가 없다. 너무 늦어 있다. 무엇이, 왜 라는 이유조차 없이 그를 잡을 수가 없어. 그를 위로하는 것조차 지금으로선 사치이다. 하지만 잡아야 돼. 잡아야 한다는 강렬한 위기의식 때문일까. 놀라움과 걱정에서 마구 발버둥 치던 영혼은 순식간에 화로 돌변했다. 붉어진 눈매에 힘이 들어간다. 혜성은 화가 치밀수록 이성이 돌아오는 게 느껴졌는지 꽈 악 주먹을 쥐었고, 다섯 걸음쯤 떨어져 간 정혁을 세게 노려보았다. 아이가 무어라 말을 하려던 때, 뒤통수를 얼얼하게 할 만한 그림자의 자학적인 음성이 비꼬듯이 터져 나왔다. “너에게는 테레사가 있지.” “…뭐….” 긴장감을 대변하는 현의 주자가 바뀐다. 비올라는 깨어져도 그들의 청각을 마비 시킬 만큼의 연주를 계속 하는 것이다. 테레사?! 그 이름은 주저하던 혜성의 감성을 송두리째 잡아먹었다. 테레사라니! 어지럽고 안타까워서 감정 조절마저 어려웠던 상황이 빠르게 제자리를 찾았다. 늘 한계 끝까지 가면 도리어 이성을 쥐었던 때가 지금 또 닥친 것이다. 혜성은 한결 평온해진 낯으로 정혁에게 되물었다. 테레사?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옅은 달빛이 조금씩 흘러 들어오는 지점에 서서 정혁은 차가운 등으로 대답했다. “테레사에게는 모든 걸 주겠지. 이미 줬을지도 모르지.” “…….” “순결한 너의 몸은 영혼의 이끌림에 따라서 옷을 벗었을 거다! 하하하하! 나는 평범한 사람이었어. 어떤 것에서도 극복! 이란 없었지. 한계는 모~든 상황에 적용 되었다. 나는 테레사와 네가 정말로 이해가 안 되고, 그러면서도 어느 부분은 이해가 된다는 게 견딜 수가 없습니다!” “…….” 쩌렁쩌렁 외치는 그는 잠시지만 정혁의 탈을 쓴 괴한처럼 낯설고 섬 짓 했다. 하지만 긴장감에 있어서 현의 주자가 바뀌었듯이 테레사라는 이름은 혜성에게 그의 변화마저 깨우치지 못하도록 둔하게 조정했다. 대답은커녕 흐느낌조차 없는 혜성이 의아했는지, 그제 서야 정혁은 시선을 마주쳐 왔다. “뭐가 이해되는 줄 아는가?” “…….” 그리고 힘을 주어 말을 잇는다. 테레사 라는 이름 때문에 표정이 차가워진 혜성을 노골적으로 비아냥대는 탓에, 둘은 갑자기 서로를 노려보게 되었다. 분노란 그런 것이다. “바로, 나와 다른 애들은 모르겠지만, 서로 떨어져 있는 너희 두 사람끼리는 뭔가 통하는 게 있겠지! …라는, 바로 이 얄팍한 추측과 허황된 망상! 여기서의 이해는 곧 나에게 절망이다… 절망이라고!” “문정혁.” “…….” 얼음보다 차가워진 혜성의 음성이 깨어질 때, 흠칫 놀랐는지 정혁은 그제 서야 격앙되었던 일침을 관두었다. 두 사람의 팽팽해진 긴장감은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아이는 천천히, 하지만 무겁고 정확하게 그의 께로 걸어가며 표정처럼 낯선 어절을 꺼냈다. “나를 안아.” “!” “나를 안으라고!” “!” 뭐라고? 경직된 정혁의 멱살을 쥐고, 그만큼 몸을 올려서 붉은 눈매에 힘을 준다. 아이는 그렇게 소리쳤다. 마음과는 다른 못된 나의 입술을 용서 해. 미안해 라고 백 번 천 번 소리칠 수 있는 시간이 아쉬워, 가여운 너의 심장에 패인 고름마저 터뜨리는 나를 용서 해, 아니 용서하지 마. 미안해. 이 순간마저 미안함과는 별개로 화를 내는 나를 용서하면 안 되는 거지. “옷을 벗겨! 핥아! 피부가 찢어질 때 까지 네 입술로 짓이겨!” “…….” “왜 몰라! 왜 너는 몰라!” “신혜성…!” 분노는 또 다른 분노를 부추긴다.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없는 상황에 미쳤을 때, 벼랑 끝의 두 사람은 잡아먹을 듯이 서로를 보며 김을 내뿜었다. “왜 너는-- 내가 너에게 이런 독 같은 말을 퍼붓는 것을 얼마나 후회할 지, 얼마나 미안해 할 지, 이렇게 쏘아대는 순간마저 안타까워서--” “!” 탕-! 누군가가 총을 쏜 것일까? 혹은, 비올라의 파편에 찔린 것일까? 비명조차 없도록? 둘의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순간 망설이는 듯싶던 정혁이 강한 힘으로 혜성의 어깨를 쥐고 송두리째 입술을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잔인하리만큼 정확한 입맞춤이 태어났을 때, 별채 주변을 휭휭 감고 있던 수풀이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며 바람을 몰아냈다. 깨어진 비올라의 파편이 으깨 들어올수록 피를 보이는 내면이 있다. 그간 달콤하고 향기로웠던 그와의 입맞춤은 온데간데없이, 혜성은 통증처럼 부딪혀오는 입술과 혀를 받아들이며 힘겹게 숨을 빨아들였다. 그의 혀는 혜성의 모든 것을 기억해두고 싶었는지 치아의 작은 곳까지 건드렸다. “하-! 흐- 으웁-” “흐으-” 하얗게 질린 볼 밖으로 한 방울의 침이 나오자, 그는 그것마저도 저의 입술로 빨아들였다. 소중하게 보듬어 주었던 노란 머리칼을 사납게 움켜쥔 손가락은 당장이라도 힘을 주어 작은 뇌를 산산조각 낼 것처럼 잔인했다. “하악-!” 활처럼 휘이는 목은 센 힘으로 머리칼을 움켜쥐는 정혁의 손가락에 놀라서 비명을 터뜨렸다. 야수의 이빨처럼 단단해진 인영은 거침없이 혜성의 입 안을 돌아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성은 정혁의 분개하는 입맞춤에 끝가지 응수했다. 아픔보다는 슬픔과 절망의 몫이 커서, 화가 나서, 아이는 다짜고짜 들이닥친 이 상황에의 한계에 직면한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이 치가 당장 내일이면 없을 거라는 걸 누군들 믿겠는가. 한 참이나 서로를 탐하였던 붉은 혀가 떨어졌다. 내면의 비올라는 모두 깨져서 가루가 되었다. 혜성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소중하게 껴안은 채 정혁은 뚝 뚝 떨어지는 눈물이 아이의 머리칼을 적시도록 내버려 두었다. 무릎의 힘이 풀린 수페리우스가 시체처럼 축 늘어지자 그는 강인한 팔로 옆구리와 허리를 지탱시켜 주었다. “너는 그러면 안 돼….” “…그래….” 멍하니 동공을 흐트러뜨리며 혜성은 속삭였다. 거대한 충격 앞에서 인간은 나약해진다. 그리고, 자아를 상실하기도 하며, 현재를 잃는다. 혜성은 반 의무적으로 입술을 떠들었지만 자신이 구체적으로 이성을 차렸는지는 오리무중이었다. 그저 한 꺼풀 꺾인 입술로 무중력을 떠다니듯 말을 할 뿐이었다. 감정이란 감정은 모두 방금 전의 입맞춤에서 증발했는지 심장은 더 이상 뛰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함부로 꺼내도 안 돼….” “…그래….” 붉은 벽돌의 가루처럼 비올라는 공기 중에 사라져간다. 그를 질책하는 나의 죄를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그 누구든지 나의 태양을 욕하는 자를 지나칠 수 없었기에, 못난 나를 채찍으로 벌하시오. 그래서 미안합니다. 영원히 미안하겠습니다. “태양이 솟아오르기도 전에, 내가 죽어 버리거든….” “…그래….” 지금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그에게 상처가 되어도, 감성과 이성을 잃어가는 나의 입술은 여지없이 떠드니까요. 무거운 눈꺼풀을 닫자 기다렸다는 듯 굵은 방울이 뺨 위에 선을 긋는다. “미안해 정혁아….” “…그런 말 하지 마….” “이런 날… 영원히 용서하지 마….” “…….” 힘없이 안겨있던 아이는 점점 더 딱딱해져가는 자신의 말투가 소름이 끼쳤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정혁이 끌어안는 힘이 세어진다. “미안해… 용서하지 마….” “…싫…어….” 오래 전, 그가 처음으로 웃어가며 해 주었던 말이 꿈처럼 스쳐 지난다. 싫어… 그 때도 너는 싫다고 그랬지. 지금 우리는 이별을 얘기하는 걸까. 그럴 리가 없어. 너는 내 눈 앞에 있는 걸. 그의 가슴에 안긴 채로 혜성은 옅게 미소 지었다. 왜 미소가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는 마음 가는대로 행동 가는대로 내버려둔 채 조용히 물었다. “악해 질 거야…?” “…아마도….” 세상이 느려진다. 그의 저음은 내일이 되면 생각나지 않을지도 몰라…. 혹시 너도 웃을까. 진정한 웃음이 아닌, 우리의 기가 막힌 현재에 눌린 자학의 웃음을. “그럼… 악해진 다음… 언제쯤 선한 모습으로 돌아올까…?” “…그건… 아직 모르겠어….” “내가 많이 미워할 수 있게 해 줘.” “…….” 눈물로 젖은 노란 머리칼에 정혁이 입을 맞춘다. 오래도록 뺨을 부비는 듯싶지만, 혼을 상실한 탓에 무엇에도 집중이 어렵다. 혜성은 꿈의 장면처럼 정혁이 그 뒤 행동하는 것을 구경꾼마냥 쳐다보았다. 혜성을 더 이상 돌아보지 않기로 결심했는지, 그는 몇 가지 서류를 챙기더니 밖에서 대기 중이던 비서에게 짐을 실으라고 일렀다. 딱 한 번 혜성이 아까와 같은 자세로 멍청하게 서 있는 것을 돌아본다. 그리고 천천히 등을 돌리고 걸어가는 게 아닌가. 별채 밖의 쌀쌀함으로, 꿈보다 확실하게 멀어진다. 멀어진다. 멀어 진다…. 순간 번쩍 정신을 차린 혜성은 막 차에 올라타려는 정혁의 팔을 붙잡고 소리쳤다. “어디 가는 건데! 어디로!” “…….” “어딜 가는지만 알려 줘.” “…….” 그러나 그는 아무 대답 없이 서늘한 차에 올라탄다. 짐짓 망설이는 비서에게 어서 출발하라 이르는지 차창을 통하여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게 보인다. 죽은 듯 위장했던 심장이 발작을 일으킨다. 그래서 비명이 터진다. “문정혁-!!” 그래서 밤은 사나워진다. 아주 빠른 속도로, 그의 차는 장미 문 쪽을 향해 사라져간다. 아이는 가슴을 부여 쥔 채 한 자리에 서서 정혁을 불렀다. 순식간에 일어난 지금이 믿어지지 않았다. 당장 내일이면, 그가 연못이나 다른 곳에서 불쑥 나타날 것 같은데……. “꿈을 꾼 걸까… 아주 생생하게…….” 바람은 여전히 아까와 비슷하게 불었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나뭇가지들은 벗은 몸에 약간의 율동을 더했으며, 거리의 잡풀조차 미약한 흔들림을 보였다. 꿈이 아니다. 꿈이 아니야. “이제… 정말로….”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혜성은 그의 차가 사라진 길을 하염없이 쳐다보며 몽롱한 투로 중얼거렸다. “낭만의 계절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거야….” 휘이이잉-- 이른 겨울의 바람이 젖은 머리칼을 빨아들인다. “그의 가을이 사라졌어.” 아마데우스의 모든 것이 얼어 버리도록 차디찬 기운은 순식간에 점령해 버렸다. 다음날이 되자 아마데우스는 거대한 폭동이 일어난 것처럼 여기저기서 시끄러웠다. 한 쪽에서는 전공 시험 하루 전 날, 통보 없이 수페리우스가 종적을 감췄다며 이 소식을 모세에게 전했으며 다른 쪽에서는 설마 했던 그림자가 완전히 자퇴 절차를 끝마쳤노라 입을 벌렸다. 두 가지 소식은 기숙사의 소문 건을 해결한 뒤 기분 좋고 평화로웠던 아마데우스를 그야말로 발칵 뒤집기에 충분한 사건으로 자리 잡는다. 소식을 접한 사비나 교수는 수페리우스의 벗인 동완을 불러서 추궁해 보았지만 동완이라 한 들 하룻밤 새 사라진 인영을 알 수는 없었으리라. 정혁의 자퇴는 낙오자의 모임이 하루아침에 생겼다가 사라졌다! 라는 거짓 소문이 생긴다 한 들 그것보다 더 한 상실과 충격을 안겨주었다. 테레사의 후광이나 다름없다고 굳건히 믿었던 인물에의 배신감은 연약한 학생들의 내면을 마구 부축이기만 했다. 그들은 만나기만 하면 정혁을 떠들었고, 선배들 중 심사가 뒤틀린 고약한 몇 명은 지난 날 혁명이 그랬듯이 수페리우스가 무슨 짓을 한 게 틀림없다며 없는 말을 빚었다. 그렇다면, 수페리우스는? 혁명의 중심으로서 분명히 그림자를 뒤 흔들었던 그는 어디 있지? 도피 한 게 틀림없다! 또 무슨 짓을 한 게 틀림없어! 갈대처럼 흔들리는 감성을 흔들려는 취지는 암암리에 존재했다. 오래 전 낙오자의 모임에 있었지만 쥐죽은 듯 조용히 지냈던 소수의 인파는 그런 식으로 죄 없는 학생들에게 ‘의심’ 이라는 죄를 빚도록 혀를 굴렸다. 숨겨두었던 검은 물을 던졌다. 때마침 율 성당에서 오랜 시간 내내 계시던 바오르 신부님이 아마데우스에 돌아왔다. 그는 불편한 소식이 아마데우스 전역에 미친 것을 서둘러 무마하기 위해, 로제리오와 사비나 교수진들을 불러 모았다. 하루 종일이 지나도록 수페리우스는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뜩이나 눈에 띄는 그의 지금 행동은 규칙 위반이다. 또한 그의 부재가 큰 잘못이 될 리는 없지만, 문제는 정혁이 자퇴를 하는 시점이라는 점이 큰 걸림돌이었다. 테오제네스의 지시 아래 인쇄 동은 모세의 가십을 막 찍으려던 것을 멈췄다. 아마데우스의 모든 교수진과 신부님들, 그리고 수녀님들까지 B동의 대회의실에 모였다. “뭐니 뭐니 해도 내일이면 4학년들의 중대한 시험이지 않습니까?” 로제리오 교수의 측근인 중후한 교수가 벌떡 일어났다. 바오르 신부는 그간 아마데우스의 정황을 보고 받은 터라 조용히 사태를 두고 보기로 한다. 로제리오 교수의 손에 땀이 고일 무렵, 사비나 교수의 측근들 역시 팽팽해진 신경을 터뜨렸다. “수페리우스 라는 이름을 어디까지 써 먹으려는 거지요? 사비나 교수님의 부탁이 있어서, 저는 시간표를 조절해서 두 개의 시험을 치루 도록 만들어 놨습니다. 그런데 부재라니요?” “두 개의 시험?” 성악과 쪽 교수가 사비나에게 역정을 내자, 눈에 띄게 당황하는 사비나를 노골적으로 응시하며 반대편 로제리오 측근 중 한 명이 불쾌하다는 듯 테이블을 쳤다. “설마 복수 전공을 하려는 겁니까, 수페리우스는?” “자신을 테레사로 착각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사실 그는 테레사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지요. 우리들은 테레사가 정한 사람이니까 묵묵히 지켜본다지만, 그렇지 않습니까?”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사나운 속의 것을 마구 꺼내기 시작했다. 로제리오와 사비나는 예상 밖의 모습들에 당황했다. 교수들이 테레사에게 위기의식을 느낀 지는 오래 됐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괜한 불똥이 수페리우스에게 튀기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들에게 정혁이의 자퇴 건은 수페리우스를 몰아세우기 위한 방편 밖에 되지 않는 거야! 조용히 잘 따라오는구나 싶은 사람들의 속이 사실은 갉고 부스러졌다니! 이렇게 삐딱하다니! 되도록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노력하는 로제리오가 뭐라고 언급하려던 찰나, 상석에서 침묵하던 바오르 신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로를 탓하며 흥분해가던 교수들의 시선이 한 데 모아져서 바오르 신부를 주목한다. 민우의 아버지이자 경제적인 면의 총괄자인 바오르 신부는 겸연쩍은 낯으로 교수들에게 단 한 마디를 건넸다. “내일, 수페리우스가 제 시간에 도착하지 않는다면, 오래 전에 회의 도중 나왔던 내용 대로 그의 시험을 치루겠습니다.” “!” 설마 뮌헨 건을?! 신부님 그건! 사비나 교수는 순식간에 창백해진 낯으로 일어섰다. 그러나 그녀가 잡기도 전에 바오르 신부는 엉망이 된 내부를 뒤로 한 채 밖으로 나가 버렸다. 쌀쌀한 계절은 이처럼 모두의 아성을 잡아먹으며 출현했다. 등을 돌린 가을을 탓할 새도 없이……. 잠에서 막 깬 혜성은 자신을 한 참 동안 흔들어 깨웠음직한 여자를 넋을 잃고 쳐다보는 것도 잠시, 후다닥 뛰어나갔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정신을 추스릴 새도 없이, 사람들이 가는 쪽으로 조심조심 나아갈 때 또 누군가가 상냥한 투로 아이를 붙잡았다. “May I see your passport please?” “?” 귀에 익지 않은 억양들 때문인지 머뭇거리는 탓에, 그녀는 한 번 더 같은 것을 물었다. 혜성은 잠시 작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묻는 이에게 내용을 보여주었다. “아, 패스포… 여권, 여기… 여기요. 히어… 히얼 잇…….” 또 한국 아마데우스 배지를 보여주며, 아마데우스 홀을 찾아 왔노라 기내에서 외웠던 문장을 열심히 떠들었다. 보스턴 공항의 친절한 그녀는 아까보다 긴 문장으로 다정하게 일러 주었지만 혜성은 대화의 전부를 알아듣지 못 한 채 희미하게 웃었다. 어쨌든 다행이다. 예전에 뮌헨으로 가기 위해 히스가 이것저것 쓸데없는 것까지 전부 챙겨줬던 탓에 혜성은 하루아침에 보스턴까지 직행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이것저것 떼어야 하며 또 적을 게 있다고 툴툴대던 히스가 귀찮았지만, 비자가 필요한 상황에 닥치고 보니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설마 히스는 앞으로 보스턴에 있을 테레사를 찾아갈 지도 모른다는 것 까지 계산했던 걸까. 그건 모르겠어… 그의 상냥함의 척도는 무시무시할 정도니까…. 눈물이 또 나올 것 같았는지 혜성은 쓰린 눈두덩 이를 애써 참아가며 걸었다. 가을도, 겨울도 없이 지난여름을 그리워하는 방랑자의 낯으로…. 낯설고 두려운 감정 보다는,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감정이 슬프게 맴돈다. 혜성은 숨 가쁘게 도착한 보스턴 공항 밖에 첫 발을 내딛는 동시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외국인들의 모양은 뮌헨에서와 크게 다를 게 없다. 그래… 그냥 히스가 옆에 없을 뿐이야. 도망치는 걸까. 그것도 모르겠어. 아이는 물론 정혁의 별채에서 그와 헤어진 직후 기숙사로 돌아왔었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정혁이 학교에 없을 거라는 현실감이 밀려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상상과 현실은 엄연히 다르질 않던가. 소름 끼치도록 매서운 감정들은 혜성을 이곳까지 이끌고야 말았다. “이… 익스큐즈 미!” 보스턴의 아마데우스 홀을 찾으면 된다는 식으로 무작정 결정하니 적어도 마음은 편해졌어. 그래, 그거면 돼. 손을 번쩍 올려서 쌩하니 지나가는 택시에 대고 익스큐즈미! 를 남발하는 한국의 수페리우스는 대체 무슨 생각을 지닌 걸까. “아, 땡큐. 땡큐.” 그를 가엾게 여긴 젊은 신사가 아이를 대신해서 택시를 잡아 주었고, 수페리우스는 허리를 숙여가며 재빨리 뒷 자석에 올랐다. 작은 손에는 크기가 딱 맞도록 땀 맺힌 액자가 잡혀 있었다. 동완이 선물해 준, 축소 된 테레사 독주회 포스터를 지그시 내려다보던 혜성은 자신에게 뭐라고 막 말을 하는 택시 기사에게 다급한 투로 말했다. “여기로 가면 돼요. 테레사 독주회… 아, 아마데우스 홀! 아마데우스 홀!” “what?” 수페리우스는 답답하다는 듯 택시 기사 쪽에 액자를 들이대며 얼기설기 영어 문장을 내뱉었다. “I'm looking for… Where is?” “Where to……?” “아… 이게 아니지. Take me…take me to Amadeus hall! Amadeus hall please.” “Aha~ Amadeus hall?” “예, 예스. 예스! 아마데우스 홀.” 한 밤 중이 되어서야 도착한 보스턴의 전경을 눈에 익힐 새도 없이, 구슬땀을 흘려가는 수페리우스의 노력이 통한 건지 택시는 출발했다. 메모로그에 슈콘느님이 주신 표지입니다. 고마워요^^ wgreene@naver.com 아리아는 아직 끝나지 않았지요. 과연, 수페리우스는 가을의 부재를 극복하고 한국에 제 시간에 도착해서 전공 시험을 치룰 것인가... 그에 앞서 테레사를 만날 것인가... 댓글 고맙습니다. 언제나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과연 읽는 분들에게 재미있을까, 흥미로울까. 편 수가 길어질수록 나약해지려는 내면을 단단하게 묶으며 저는 오늘도 당신께 이 글을 바칩니다... 행복하세요. 당신의 댓글은 닳고 사라지지 않을까 할 정도로 읽고 있습니다. 고마워요... 비루향님, 별하님, 솨, 안젤리스님, 박카스정님, 포근구름님, 류타님, 셂님, ...님, 주황, 아기해달님, 소카님, 군림님, 리에뜨님, 호야님, 연님, 밀크티님, 슬픈웃음님, 반님, 레이첼님, 하용님, 고맙습니다. 덧글 19개 엮인글 쓰기 /data17/2006/9/4/219/1-wgreene.jpg@nhn@58108@nhn@1@nhn@400@nhn@290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42편 /data17/2006/9/4/219/1-wgreene.jpg@nhn@58108@nhn@1@nhn@400@nhn@290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42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43편 ▼ 다음글 - 2악장 41편(이별의 아리아)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43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9/06 20:39 http://blog.naver.com/wgreene/110008460005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906 43편 업데) * 음악 잘못올려서 수정;;; Amadeus 음악 : the man you love - il divo (아래 플레이버튼 클릭) The Man You Love-Il Di.. 가벼운 대화만으로도 감정과, 사건과, 시간은 정해지는 것이다. 2악장 43편 리건 공항에서부터 한 참을 뱅뱅 돌기만 하던 택시가 정차한 것은 무려 두 시간 반 이나 지나서였다. 극심한 긴장감과 공허함 덕분에 꾸벅꾸벅 졸고 있는 혜성을 신기하게 쳐다보던 택시 기사는 곧 아이를 흔들어 깨웠다. 그리고 미터기를 가리키며 환하게 웃는 게 아닌가. 택시 요금은 아이가 달러로 환전 한 것 중의 반 이상을 차지했다. 초행길에 서툰 동양인을 얕잡아보는 기사를 만난 게 실수였다. “땡큐. 쌩큐.” 순진한 아이는 그러나 자신을 따뜻한 손길로 흔들어 깨워준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까지 했다. 만약 이 자리에 히스가 동행했다면 그는 자신의 리무진을 콜 하거나 공항에서 셔틀버스를 탄 뒤 1달러 30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지하철을 이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혼자였으며 보스턴은 문외한인 상태이지 않던가. 혜성이 충동적인 지금의 여행에서 알고 있는 지식이란 뮌헨에서 그랬듯이 보스턴에 갈 때도 맨 먼저 뉴욕에 도착한 뒤, 국내선으로 갈아타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간절한 욕구, 충동 그것이 없었다면 혜성은 이 일을 시작도 하지 않았을 테다. 길고 화려한 물줄기를 차창에서 은연중에 지나쳤던 것 같은데… 여기는 어디일까. 통 위치를 파악하기 어려웠던 혜성은 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이 내린 보도블록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혹시, 엉뚱한 곳에 나를 내려 준 게 아닐까? 그제 서야 덜컥 겁을 먹은 혜성은 창백해진 낯으로 높다란 건물들 사이를 쭉 올려보았다. 활기찬 분위기가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유도하고 있었다. 가만히 정지해 있는 혜성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보스턴 시내를 오고가는 이들은 아이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이러면 안 되지. 어서, 어서 아마데우스 홀을-! 혜성은 아까 전 택시기사에게 했던 그대로 친절해 보이는 신사를 붙들고 길을 물었다. 아마데우스 홀은 어디 있지요? 하지만 서투른데다 다급한 혜성의 질문은 악센트며 아마데우스의 억양 까지 이상하게 튀어나왔다. 잠시 고민하는가 싶던 중년의 신사는 아이의 팔에 꽉 쥐여있는 액자를 발견하고는 상냥한 투로 질문했다. “Can I check the address you have? oh, I'll draw you a map.” 아마도 그 치는 액자를 여러 번 쳐다보는 혜성의 행동 때문에 그것이 주소 인 줄로 알았나보다. 이크. 여기가 아마데우스 홀 입니다- 따위의 간단한 대답을 기다렸던 혜성은 동그랗게 눈을 뜬 채 큰 소리로 다시 물었다. “파, 파든?” 파든? 파든? 연거푸 파든 만 반복하는 혜성에게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 한 뒤, 친절한 신사는 등을 돌렸다. 안 돼! 덜컥 심장이 내려앉은 혜성은 있는 힘껏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최대한 혀를 굴려 소리쳤다. “A, Amadeus hall! amadeus!” “!” 내 말을 들어주세요. 천주님처럼 세상을 꾸미겠다는 것도 아니에요. 나는 아주 쉬운 것을 묻고 있어요. 내 반쪽이 숨을 쉬는 공간을 만지는 것 이상으로 욕심내지 않을 테니, 낯설다고 이상하다고 피하지 말아요. “네? 아마데우스요! 아마데우스!” “…….” 도로의 갓길에서 아이처럼 소리치는 통에 주변을 지나치던 키 큰 무리들이 흠칫 놀라서 쳐다본다. 중년의 신사는 그제 서야 정확한 내용을 알아듣고는, 허탈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는 곧 혜성의 손에 보물처럼 쥐어져 있는 액자를 빼앗았다. “이, 이게 무슨 짓 이예요! 여보세요?” “…….” 그러더니 호들갑스레 소리치는 아이의 팔을 질질 끌듯이 쥐고 걷는다. “야! 왜, 왜, 왜이래! 왜 이러는 거야! 왜-” “…Amadeus hall? Amadeus hall!” “응?” 세 걸음도 채 못 걸어서 그는 자신들의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을 가리키며 온화하게 웃어주었다. 혜성의 서투른 솜씨를 알아 본 그가 직접 검지로 가리켜 준 장소는 과연, 눈에 익은 아마데우스 휘장과 깃발이 입구에서부터 펄럭이는 홀 이었다. 아마데우스 홀! 지린 밤에도 뜨겁게 자신을 알리는 커다란 깃발과 성스러운 휘장! 이유 없이 방랑자가 되어 내 모든 것을 등한시한 장소! 테레사, 당신이 당장 내 뺨에 아득한 온기를 불어넣어주거나, 혹은 내 칠 것처럼 서슴없이 한 눈에 들어온 풍경! 그러나, 그 뒤로 서너 시간이 더 지났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지 않았다. 쌀쌀한 날씨는 새벽 한 시를 지나자 더 할 나위 없이 차가워졌다. 북적대던 인파는 온데간데없이 조용한 거리는 쌩하니 내달리는 차들밖에 보여주지 않았다. 기대와는 달리 보스턴의 아마데우스 홀은 혜성이 봤던 건물 중 가장 볼품없고 초라했다. 규모 면에서는 큼직한 다른 것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지만 격조 높은 우아함과 역사는 찾을 라야 찾아지지 않았다. 그저 발아래부터 뭉클하게 당겨지는 충만한 기운이 머리 꼭대기를 뚫어서 텅 비었을 뿐이다. 그을어진 벽이 군데군데 보인다. 아이는 틈새가 시선에 잡히는 족족 빠져나가는 신음을 공기 중에 터뜨렸다. 아마데우스 홀이 이 정도라면, 보스턴의 학교는 안 봐도 짐작이 가는 바이다. 금빛으로 치장된 내부 따위는 없을 거야… 그래도, 내일이면 테레사가 여기서 리사이틀을… 은어의 손놀림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며, 동경에의 향수를 뿌릴 거야. 자선 단체에서는 그에게 매료되어서 너도나도 큰돈을 주지 않을까. 오, 테레사. 그런데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는 걸까요. 당신의 ‘현실’로 도망쳐 온 들, 나는 무엇일까요. 이곳에서의 나는 ‘누구’도 아닌데……. 그런데도 슬퍼서 한국에서의 ‘내일’은 피해야 했습니다. 미친 감수성의 변이는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지만, 사실 정답이란 게 없어요. “…….” 입구로 통하는 2층 높이의 계단 구석에 쭈그려 앉은 혜성은 작은 점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홀의 관리자가 무작정 계단에 앉아있는 혜성에게 몇 번이나 달려와서 심한 말로 추궁했지만 아이는 고집을 부리며 절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경찰을 부르겠다는 말이 나와서야, 캅스? 와이 미? 라는 대답과 함께 겁을 집어먹은 혜성은 관리인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계단을 세 개 내려가서 다시 엉덩이를 앉혔다. 그런 혜성이 불쌍해 보였는지 새벽 두 시 이후부터는 관리인도 나타나지 않았다. “움직인다…….” 무릎을 모아 앉은 채 조용히 길가를 노려보는 혜성은 낯선 곳에서의 흥분을 엉뚱한 생각들로 치유하는 중이었다. 움직이고 있다. 그 어떤 곳이던지 세상은 각기 형태로 움직이고 있어. 가만히 있는 바람을 차이며 걷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 바람에 밀리고 있지. 이곳의 낙엽은 훨씬 붉다는 것을 주홍 불 아래에서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알겠어. 색의 변화마저 움직임인데… 생각은 천 길이 멀다 한 들 지칠 줄 모르는 채 쭉쭉 뻗어나간다. 작은 수페리우스는 동공을 흐트러뜨리며 스스로의 넋에 도취되어간다. 그런데 테레사가 나를 보면 기뻐할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판단이 아이를 괴롭혔고, 또 혼나더라도 그를 봐야겠다는 처음의 결심이 고집을 부렸다. 두 가지 생각과 싸움을 벌이다 보니 문득 문득 정혁의 안녕이 스쳐 지나가서 혜성의 눈시울과 감성을 자극한다. “흑….” 보스턴에서의 밤은, 혼자 버티기엔 너무 길었다. 아이는 하염없는 눈물이 옷을 적시도록 버려두었다. 내가 미친 걸까. 그렇다고 여기까지 날아오다니. 룸펜에서 모았던 돈도 거의 다 써 버렸어. 현실적인 문제와 환경에 부딪히자, 정혁 덕분에 감정을 들쑤시던 본질이 모조리 날아갔다. 그 점 하나만 두고 본다면 혜성에겐 다행한 일이겠지만……. 액자를 꼭 쥔 채로 수페리우스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무도 그를 위로하지 않는 가운데, 낯선 도시의 밤은 짙어져간다. 한국의 공항에서 출발하는 동시에 지금까지 파든? 이라는 말만 수 백 번을 한 기분이다. 그래도 이곳에서, 그가 연주를 할 거야. 그와 나의 하늘은 이처럼 좁아졌어. 만나지 않아도 괜찮아. 찢어졌던 어제의 감성은 편안해졌잖아. 그래… 아마 몇 시간 더 지나면 아주 좋아질 거야. 나는 점점 괜찮아지고 있는데 왜 눈물이 나올까. 무서운 걸까. 아닌 척 하지만 낯설고 두려운 외딴지가 무서운 걸까. “흐으… 흑… 흑….” 또 한 번 거대한 눈물이 뺨에 떨어지자 혜성은 얼굴을 팔에 묻은 채 어깨를 떨었다. 휘잉- 처음보다 강한 바람이 아이의 몸을 세게 치고 지나간다. 이상한 일이었다. 오히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낯선 곳에서 실컷 울자니 마음은 편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참았던 눈물은 하릴없이 흐른다. 그래서일까. 수페리우스는 자신의 곁에 오랜 시간 따라붙었음직한 까만 인영을 전혀 눈치 채지 못 했다. “흑…흑…흑….” 까만 인영은 살아있음을 증명하듯, 가까이에서 입을 열었다. “진~짜 못생겼다.” 환청이 들린다. 너무 많이 울어서 뇌가 이상해진 걸까. 혜성은 목울대를 더욱 심하게 떨리며 소리를 높였다. 오싹한 환청을 물리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진~짜 못생겼다. 라는 아까의 음성은 똑같이 들려왔다. 그 말이 한국말인줄도 몰랐는지 아이는 반사적으로 입술을 옹알거렸다. “흑… 파…파든…파…흑…든….” 파든. 파든. 파든. 혜성의 기가 막힌 대답에 한바탕 넘어질 번 한 까만 인영은 상당히 지친 투로 짜증스레 말을 내뱉는다. “…진짜 못생겼다… …우는 거.” “파… 우는…?” 한국말이네? 혜성은 천천히 웅크린 자세에서 턱을 올렸다. 서늘한 초겨울 달빛, 자신이 앉아있는 위치에서 한 계단 아래, 누군가가 서 있었다. 까만 인영은 삽시간에 정혁이를 떠올리게 했지만, 그저 심장이 한 번 덜컹인 게 전부였다.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어. 정혁이는 아니다. 그럼 누구지? 달빛을 가리고 있어서 쉽사리 알아보긴 어렵지만, 주머니에 손을 낀 채로 구십 도로 허리를 숙인 괴한이 막 올린 혜성의 안면을 잡아먹을 것처럼 바짝 노려보는 게 아닌가. “콧물까지… 아… 더러워.” “?” “추워서 기다릴 수가 있어야지. 난~ 또. 정말로 러시아 인형으로 변한 줄 알고 득달같이 달려왔네.” “!” 로미오? 로미오! 로미오다!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시각에, 아는 사람, 그것도 자신의 후배 로미오가 나타났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는지 혜성은 당장 울음을 멈췄다. 사소한 발견이지만 ‘기적’이라는 단어가 절로 그려졌다. 그리고 아주 반가워지는 감정에 다시 눈물을 흘렸다. 바보 같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이는 벌써부터 당겨지는 고향에의 향수로 축축해진 감성을 물수건처럼 짜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나타난 이가 모세라고 해도 아이는 반가워했을 것이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만남 때문일까. 웅크린 혜성과, 그런 혜성을 노골적으로 계단에 마주 서서 내려 보는 로미오는 긴 시간 침묵했다. 이윽고 로미오는 더더욱 불쾌하다는 투로 말했다. “저~쪽 가로등 옆에서 대놓고 쳐다보는데도 몰랐나 보네… 엄청 둔합니다. 정말 둔합니다.” “?” “게다가 지금은… 조랑말이 뽕잎 먹고 침 질~질 흘리다가, 히~ 웃는 것 같습니다.” “?” 방금 전, 로미오가 그래도 반가웠던 탓에 또르르 흘렀던 눈물을 지적하는 엄청난 소리가 쨍! 청각을 뚫었다. 미처 다 흘리지 못 한 나머지 눈물이 차곡차곡 뺨을 타고 흘렀다. “또 울어, 또 울어?” “뭐… 뭐야….” “아주 지겨워 죽겠어.” “로미오…?” “신경전의 대상이 없으면 아마데우스에서 지내기가 시큰둥해서요.” “어… 어떻게….” “…어제, 기숙사에서 조랑말처럼 뛰쳐나가는 선배를 쫒아 갔었거든요. 그 때부터… 지금까지.” “!” “대놓고 뒤에서 쫒아가도 모르던데요? 나는 비행기 표 끊고 기다릴 때도 뒤에서 있었는데…….” “!” “겁도 없네요, 수페리우스는~” “넌 어떻게….” 긴장감이 완전히 녹아든 수페리우스의 상황에 관계없이, 로미오는 떵떵거리며 신경전을 계속하자는 듯이 말투부터 버릇없어졌다. 그는 곧 옆에 털썩 주저앉더니 커다란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다. 이러쿵저러쿵 많은 말을 하며 선배인 혜성에게 감히 추궁하기도 했다. 택시를 그렇게 한심하게 타는 게 어디 있냐며 놀렸고, 아마데우스 홀 앞에 내려서 홀을 찾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힐책했다. 조금만 더 가면 다운타운의 이것저것을 즐길 수 있는데 왜 택시에서 시간을 허비했느냐 입을 내밀었다. 혜성은 그런 그가 신기하고 대단하게 느껴져서 어떤 말을 해도 조용히 듣기만 했다. 문득 혼자인 것 보다 건방지고 엉뚱하지만 이 녀석과 함께 있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 히죽히죽 웃음이 스쳤다. 둘의 대화는 신중한 쪽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팩팩 거리며 쏘아 붙여도 수페리우스는 홍조를 띠우며 아이처럼 웃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다. 로미오는 자신이 없어 봤자 아마데우스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겠지만, 수페리우스의 부재는 엄청날 것이라며 위협을 가했다. 그래도 혜성은 멍하니 앞만 응시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도저도 시큰둥해진 로미오는 진지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예전에 보스턴에 와 봤었어요. 그래서 아는 거지요.” “…응….” “한국 아마데우스가 안 되면, 보스턴으로 다니려고 예전에 홀에 다녀 간 적이 있었지요. 그래봤자 이삼 주라지만…….” “아….” 꿈을 꾸는 걸까. 로미오가, 정말 말을 하고 있다. 로미오가, 여기 있다. 그런데 왜…? “지금 보스턴 아마데우스는 보스턴 교향악단만큼의 위치도 안 됩니다. 아니지. 버클리만큼도 안 될걸요.” “버클리… 아마데우스 학교는 어디에 있니…? 여기서 버스로 가까울까.” “아니요. 보스턴 밖의 가까운 마을에 있어요. 입학 신청은 여기 홀에서 하기 때문에 저도 마을까지 직접 가 본 적은 없어요. 이름이 뉴… 뭐였는데… 뉴…….” “뉴욕?” “…….” 뉴욕이라니! 허무맹랑한 대답 덕분에 김이 샌 로미오는 피식 하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끈질기게 물어오는 수페리우스가 그로서도 신기하기만 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혼자 올 생각을 했을까. 사전 준비고 뭐고 아무것도 없이, 그저 슬프다는 이유로… 아니, 지금의 수페리우스는 슬프기는 할까? 로미오의 시선은 그 질문을 연거푸 반복하고 있었다. “뉴욕? 뉴욕? 뉴욕?” “…….” “뉴욕?” “누가 들으면 제 3자가 뉴욕? 뉴욕? 이러는 줄 알 겁니다. 정말이지! 뉴~욕일리가 없잖아요.” 로미오는 진심으로 낯 뜨거웠는지 안면을 붉히며 작게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기심 많은 수페리우스는 방정맞게 떠들었다. “그럼 뉴 무슨 마을? 어느 마을? 한국과 비슷한 곳이야? 한국처럼 서울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그런?”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여긴 으리으리한 교육의 도시 아니겠습니까? 그래서인지 몰라도… 아마데우스를 위한 자리는 없었던 겁니다.” “…….” “어쨌든, 울보 줄리엣 큰 바위 얼굴 양념 닭. 여긴 왜 온 거지요?” 졸지에 양념 닭이 된 혜성은 그제 서야 휙 로미오를 노려보았다. 보스턴의 11월은 한국보다 기온이 낮았기 때문인지 볼이 얼얼해졌지만, 노려보는 것만큼은 그만 둘 수 없 노라며 혜성은 끈질기게 후배를 보았다. 정신이 돌아오는 걸까. 이제 보니 이 녀석의 말투는 너무 건방졌어. 반가움은 온데간데없이 상심한 수페리우스는 계단을 두르고 있는 힘 있는 벽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테레사의 독주회를 느끼고 싶어서 왔다. 이 공간의 충만함을….” “…그게 다예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너는 여전히 이상한 녀석이구나, 로미오. 나는 더 이상 ‘정체가 모호한 자’는 받아들이지 않아. 상처는 예전의 한 번으로 충분했거든… 킥… 하기사… 닭의 정체는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였지만.” “닭…? 닭이 왜요?” “너는 그래서 너를 알려주지 않아도 돼. 나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문을 닫았거든. 마음의 문 이라는 것을…….” “…….” “그래도 여기까지 따라 왔으니 조금은 말 해 볼까….” “…….” “난… 아마데우스에서, 당장 내일을 맞기 가 무서웠다. 견딜 수가 없었어. 나는 애송이도 모자라서 나약한 자로 스스로를 찍겠지…….” “…그렇지는 않아요.” “…?” 한결 부드러워진 로미오의 음성이 저 쪽 새벽의 끝에서 달랑이는 태양처럼 따스하게 전해진다. “나약하고 무섭기만 한 사람이라면, 선배처럼 용감하게 타지로 날아오지는 못 하니까요.” “…….” “아마 본질은 강한 사람일 겁니다.” “…넌 정말 모를 녀석이구나.” “?” 그 때, 계단의 맨 윗부분에서 새벽 두시 경까지 혜성을 괴롭히던 관리인이 험상궂은 낯으로 나타나더니 뭐라고 소리쳤다. 아마도 혜성 혼자였다가 앉아있는 숫자가 둘로 늘어난 것에 화가 난 모양이었다. 홈리스 취급을 하는 걸까. “우리 다른 쪽에 앉아있을까.” “…….” “로미오야.” “…잠깐만 기다려요.” “?” 낙심한 수페리우스가 긴 숨을 내쉬며 일어서자, 순간 빠르게 뭔가를 생각하던 로미오는 제비처럼 날아서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로미오야! 차마 부르지도 못 한 채 얼얼한 볼을 두드려 가며 혜성이 멍청하게 서서 그를 응시한다. 흑인에다가 덩치도 로미오의 두 배쯤 되어 보이는 관리인은 팔 장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혜성은 공포감에 휩싸여서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로미오야, 로미오야. 그를 상대하는 로미오가 뭐라고 떠들때, 혜성은 발을 동동 굴리며 그가 어서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몇 마디를 더 주고받은 뒤, 관리인은 뭐라고 공격적인 표정으로 로미오에게 중얼거리더니 홀 안 쪽으로 돌아갔다. “미오야!” “예?” “괜찮니?” 후다닥- 계단의 끝까지 뛰어간 혜성이 로미오와 출입구 쪽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후배 로미오는 어깨를 펴며 활짝 웃었다. 그러더니 정복 안주머니에 넣어 놨던 한국행 비행기 표 두 장을 꺼내 흔들며 수페리우스의 작은 어깨를 휘어 감았다. “리사이틀이 연기 됐대요. 그러니까 어서 돌아갑시다, 줄리엣양.” “…뭐?” 비록 테레사를 못 만나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그것을 현실로 맞았을 때의 상실감은 수페리우스를 더더욱 작게 만들었다.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삼일 후로 연기 되었나 봐요.” “…왜?” “뭐… 내부 공사 때문이라나? 선배도 보시다시피 홀이 좀 으스스하잖습니까.” “…….” “그리고…….” “…?” “…아니에요.” 상실감에 떠다니는 수페리우스는 로미오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 것을, 또 그것을 관두는 것에 대해 깊이 고심하지 않았다. 보스턴은 이름만으로도 흡입력을 준다. 테레사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혁에 대한 상실 때문에 현실에서 도망쳤을 때, 그보다 더 한 현실이 잔인하게 보여 졌다. 문득, 아픔은 아픔 그대로 느끼라는 민우의 음성이 들려왔지만 혜성은 고개를 저었다. “본 것 같아.” “…본 것 같다구요?” 현실을 지켜야 할 때, 가끔은 아픔을 피해 가도 괜찮아… 그렇지…? “그래… 갑자기 여기까지 온 내 자신이 대단하게 느껴져서… 또, 테레사를 향한 내 안의 그리움을 다시 확인해서, 괜찮아. 건반 앞에서의 나는 때때로 그를 잊거든. 무서운 일이지. 어쨌든 보스턴의 아마데우스 홀을 밟고, 홀의 온기를 느껴서, 그를 보고 그의 연주를 들은 것 같다.” “…그래요….” 그림자의 상실로 인한 아픔은 훗날로 미루는 거야……. 아이는 왜 콘서트가 3일이나 연기 되었느냐 다시 묻지 않았다. 한 번만 더 물었더라면, 테레사가 이유 없이 최상의 컨디션인 상태에서 어제, 쓰러졌대요… 라는 대답을 로미오로부터 들었을 테지만, 아이는 그러지 않았다. 가벼운 대화만으로도 감정과, 사건과, 시간은 정해지는 것이다. 만약, 정말로 테레사 하나만을 생각하고 보스턴에 날아 온 경우라면 아이는 어떻게 서든 그를 만날 것이다. 그를 만나기 위해 3일이나 늦춰진 이유를 캐기 위해 무슨 짓이든지 다 할 것이다. 가시덤불을 밟아야지 그에게 안길 수 있다는 조건이 주어져도, 아이는 작은 몸에 상처를 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스스로가 도피의 한 부분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묻지 않는다. 그렇게 또 하나의 감정과 사건, 시간은 정해진 수순을 밟는다. 택시가 잡히지 않는 관계로 두 사람이 리건 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여섯시였다. 차에서 내린 혜성은 막 터오른 지평면 저 쪽의 태양에 시려오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속삭인다. “어디서든 그의 흔적이 있어….” “…?” “어디서든 하프의 선율은 세상에 존재하는 걸까. 아니면, 그가 있는 곳에, 그의 흔적이 스친 곳에만 유독 반짝이는 걸까.” “하프…?” 택시비를 지불한 뒤, 자신은 선호 형에게 죽었다는 둥 말이 많은 로미오가 희한하다는 투로 되묻자, 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씩씩하게 걷기 시작했다. 한국의 아마데우스에서 어떤 것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수페리우스는 한결 발랄해진 투로 말했다. “배가 고프다. 로미오야, 나는 햄버거를 좋아해.” “……사달라고요?” 로미오의 잘 생긴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렸다. “신경전은 한국에 도착할 때 까지 잠시 휴전이다. 그러니까 사 오렴, 사랑스러운 후배님.” “그런! 무슨 수페리우스가 후배의 돈을 뜯습니까!” “로미오야!” “왜요!” 고마워. “건방지다.” “뭐라구요.” 고맙다. 마지막 순간에는 어쩔 수 없이 정혁이에 대한 미안한 감정에 넋을 잃었을지도 모를 나에게 나타나 줘서. 이런저런 속의 불만을 솔직하게 꺼내면서도, 결국 시키는 대로 햄버거를 사러 훌쩍 자리를 비운 로미오를 잠시 지켜본다. 그의 등장 자체가 그를 지켜보는 현재까지도 거짓말 같다. 그리고, 왜 저 사람이었을까, 라는 의구심이 고개를 든다. 골치 아프게 생각이 많아 지려는 때, 혜성은 잠깐이라도 시름을 떨치려는지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눈시울이 그렁그렁해진 채 눈물보다 젖은 입술은 아주 작게 속삭였다. “당신의… 선율이다….” 보스턴의 밤을 물리치는 새벽의 힘이 대지와 물에 퍼지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하프의 선율은, 당신의 전체를 느끼게 한다. 으스러지게 껴안아주는 당신의 고동을 나는 분명히 느꼈습니다……. 슈콘느님이 주신 표지2, 흑백버젼입니다. 고마워요. ^^ wgreene@naver.com 포근구름님, 별하님, 유카동완님, 솨, 솨, 솨, 호야님, 안젤리스님, 좡, 박카스정님, 셂님, 점네개님, 피글렛냠님, 린님, 군림님, 그리고 당신, 고맙습니다. 언제나 행복하시기를.... -화이트그린- * 덧 :그가 왜 로미오인지, 그가 무엇인지, 당장 알려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지금처럼 흐르는 물과 같이 지켜봐 주세요. :) 아마데우스에 이유 없는 인물 설정이란 없습니다. ^^ * 참고 혹은 힌트 : 1악장의 이민우 캐릭터가 빛을 발하기 시작하도록 움직인 것은 중후반 무렵입니다. 그 전의 이민우는 괴상하고, 엉뚱한데다, 가끔 불쑥 튀어나오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캐릭터였으니까요.(실제로 그 당시 코멘들도 그랬던..) 이번에도 믿어 주시기를...^^ 덧글 19개 엮인글 쓰기 /data20/2006/9/6/93/2-wgreene.jpg@nhn@56106@nhn@1@nhn@400@nhn@290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43편 /data20/2006/9/6/93/2-wgreene.jpg@nhn@56106@nhn@1@nhn@400@nhn@290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43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44편(광기의 겨울) ▼ 다음글 - 2악장 42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44편(광기의 겨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9/13 17:41 http://blog.naver.com/wgreene/110008708747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913 44편 업데) Amadeus 음악 : Khatchaturian : Waltz From Masquerade Suite (아래 플레이 클릭) Khatchaturian: Waltz F.. 로린느는 슬픔의 상황에 직면하면 기다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모두에게 보였다. 혼자 있을 때도 물론 눈물은 흘렀다. 그녀는 슬펐다. 강아지를 봐도 슬프고 새벽이슬이 떨어지는 움직임에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름 모를 행인이 잘 걷다가 넘어지는 것 만 봐도 그녀는 소매를 훔쳤다. 슬픔은 곧 로린느, 그녀 자체였다. -동완이 만들어 낸 허상의 이야기, 로린느의 自己愛 이야기 中- 2악장 44편 사건이란, 내침 김에 만들자! 라고 누군가 소리치는 통에 부러 생기는 수도 있지만 대다수는 빛과 어두움의 순환처럼 교묘한 공식에 맞춰 나타난다. 대다수의 경우는 흑과 백이 되어 경우가 나뉘기 마련인데, 혜성은 두 가지가 모두 적용되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어떻게? 보스턴으로 떠난다! 그것은 자발적인 충동이며 실현이니 부러 만들어 낸 것이다. 반면, 수페리우스가 충동을 억제하지 못 하고 사라졌다! 이 점은 가만히 있던 아마데우스의 모두에게 예기치 못 한 의도 없는 사건으로 자리 잡기 때문이다. 그렇다. 두 가지 경우의 수가 모두 적용된 수페리우스는 자기의 편에서 보면 의도적이기 때문에 타당한 행위였을 런지 몰라도, 후자에 치우쳐지면 변론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아마데우스는 화가 났다. 아마데우스의 전체는 그의 어깨에 기대를 걸었던 것만큼 화가 나서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어쨌든 아이는 4학년들의 전공시험 둘 째 날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학교에 나타났다. 그가 나타나자 그의 부재에 별 반 관심 없었던 사람들마저 어제 떠들었던 무리들에 동화되어 사나운 입을 열기 시작했다. 군중은 제각각 떨어져 있을 때는 선량한 도인처럼 굴었지만 뭉치면 뇌의 한 쪽이 죽어버려서 같은 것만 서로에게 전달하나 보다. “분수대의 물이 멎었어!” 가여운 탄식을 내뱉는 누군가가 얼어붙은 대자연을 아쉬워하자, 분수대 근처의 다른 무리들은 그를 재촉하며 비아냥거렸다.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지!” 그리고 그들은 멀리서 유유히 나타나는 삼일 전의 수페리우스를 예리한 눈초리로 지켜보며 함께 수근 덕 댔다. 그들은 갑자기 철학자가 된 것일까? 아니다. 학생들은 비위가 상한 것이다. 물론 수페리우스 라는 이름이 걸려 있지만 그는 우리의 기억 속에 한 때 애송이였다. 그래, 그랬어! 맑아진 영혼 저 쪽 으스스하게 숨어 있던 검은 욕망은 질투라는 이름으로 때를 잘 맞추어 혜성을 떠들었다. “저길 봐라. 적을 무찌르고 온 시저와 같구나.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걷는다.” “뭐? 시이저? 우리들은 결코 부루터스가 아니야! 그래도, 그래도- 부러워하자니, 그의 제 멋대로의 행위가 걸린다. 그렇지?” “하지만 수페리우슨데!” 소심해 보이는 안경잡이 녀석이 혜성을 옹호하자, 잠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그들은 더 심하게 흥분해서 삐죽거린다. “수페리우스니까!” “수페리우슨데?” 누군가는 흥분해서 쌀쌀해진 11월의 바람을 질타하듯 소리쳤다. “그래! 수페리우스니까!” 그렇다. 수페리우스니까! 테레사가 아닌 이상, 그는 테레사처럼 멋대로 할 위치까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테레사의 경우와는 달리, 처음부터 질투를 샀던 수페리우스를 그들은 인정하고 아끼면서도, 이토록 무슨 일만 나면 인내했던 검은 물을 내면으로부터 역류하고 또 역류했다. 그건 감성을 지닌 평범한 사람인 이상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언제고 수페리우스에게서 멋진 일면을 발견한 뒤, 아마데우스의 학생들이 검은 물은 없었다는 듯 반하게 될 지라도. 사건이 반복되듯이 인간의 나약한 감성은 수십 수 백 번 되풀이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진리일까! 광기의 겨울 지금의 혜성은 보스턴에 다녀 온 것을 후회하면서도 안도하고 있었다. 현실과 상상의 공존이었다. 테레사의 흔적을 느껴서 기쁘고 아득하지만, 정혁으로 인해 내팽겨쳤던 현실에 막상 돌아오니 어마어마한 시름이 해일처럼 밀려들어서였다. 이제 정혁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정혁을 생각하면 굳이 보스턴까지 가야 했는가 스스로 자책할 정도가 되었으니 말이다. 아이는 겁이 났다. 아마데우스를 멋대로 벗어났다는 것, 자기 때문에 로미오가 징계를 받을 거라는 것, 전공 시험! 제대로 부닥친 현실 앞에서 감정적인 면은 싸그리 사라졌다. 보스턴의 차가운 밤과 새벽, 그 안에 정혁의 상념은 모조리 던지고 와서 그럴까? 그럴 지도 모르겠다. 3학년 학생들은 신이 나서 활개 치며 돌아다녔다. 그들의 시험은 많지 않다. 내년 봄이 되어야지 숨이 막히도록 서로 경주하듯 시험과 공부에 매진하겠지만, 혜성 자신도 경험해 봤던 바- 3학년 신입생 때의 겨울은 한가롭고 아름답기만 했다. 전야제가 있기 전까지 기본적인 레슨 외에는 수업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3학년들에게 한정된 혜택이다. 4학년은 전공 시험과 그 뒤 빡빡한 수업의 기초 시험을, 5학년부터 8학년의 졸업생들은 4학년보다 현실적인 것과 맞서 싸워야 했다. 겨울은 그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 점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교칙을 어긴 혜성은 과연 어떻게 될까! 로제리오 교수의 건물에 막 들어서려던 때, 두 사람이 아이를 가로막았다. 모세와 이자벨이었다. 두 사람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기대에 찬 눈빛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의기양양해진 이자벨은 여기까지 뛰어오느라 진땀을 뺀 수페리우스를 위 아래로 얄밉게 훑어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너의 시대는 끝났다 애송이.” “…뭐?” 그리고 이자벨의 볼은 눈에 띄게 창백함을 벗어던졌다. 발그레진 그녀의 볼은 열대의 과일보다 탐스러워서 누가 봐도 행복해 함을 눈치 챌 수 있었다. 혜성은 기분이 상했고, 반면 모세와 이자벨은 흥에 겨워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오~페라?” “?” “하하하하! 네가 오페라를 하고 싶어 했다니… 만에 하나 네 소원이 이뤄진다 한 들 나야 나쁠 게 없구나.” “…….” “그럴 리는 없겠지만, 언제고 오페라를 전공하게 되면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걸으렴.” “내가 너한테?” 혜성은 초조해졌다. 갑자기 나타난 이들이 귀찮아졌다. 교수님들과의 약속 시간이 다가올수록 모세와 이자벨이 평소보다 더 싫어졌다. 마침내 두 사람을 무시하고 입구에 들어 가야겠다 여길 때 즈음, 싸늘하게 식은 이자벨의 음성이 마침표를 찍었다. “나도 너를 심사하고 싶지는 않아.” “…!” 뭐라고? 혜성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이자벨에게 집중하려 했지만 이젠 그녀가 자신 있게 등을 돌리며 걸었다. 그녀를 대신해서 호위 기사나 다름없는 모세가 우람한 덩치로 혜성을 막아섰다. 실룩실룩 비웃던 그는 재수 없다는 듯 눈을 내리깔더니 저습하게 속삭였다. “각 심사는 해당과의 교수와, 선배들 중 수석으로 과에 들어온 사람들이 함께 하지.” “!” “너는 결국 마지막까지 애송이의 탈을 벗지 못하겠군. 시험을 볼 지 못 볼지도 관건이지만.” “…….” 그렇다! 이자벨이 오페라를! 게다가 예전에 수석으로! 실의에 빠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혜성은 그들의 등이 작아질 때까지 한 자리에서 망연자실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발을 동동 굴리며 입술을 깨물던 혜성은 퍼뜩 정신을 차린 뒤 로제리오의 집무실에 올라갔다. “안녕하세요.” “…….” “!” 고개를 들자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 한 멸시의 눈초리가 아득하게 펼쳐져 있음을 알았다. 보스턴에서 돌아오자마자 닥친 현실, 그리고 모세와 이자벨! 아이는 뻥 뚫린 것처럼 뇌가 빈 상태에서 눈동자를 내내 흐렸다. 이제는 교수들까지! 적당한 타협을 예상하고 온 수페리우스는 순식간에 절망에 빠졌다. 그들의 적나라한 눈빛이 서슴없이 찔려오자 혜성은 기계적으로 자신이 앉아야 할 곳에 엉덩이를 앉혔다. 멍멍해진 귓가로 숱한 말들이 쏟아졌지만 도대체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시험, 시험을 봐야 하는데?! 잠시 쉴 틈도 없이 움직이느라 뇌가 미친 걸까. “…….” 그리고 한 시간 가량 한 마디도 할 수 없도록 아이의 입술은 봉쇄되었다. 정확히는 교수들의 질책과 정교한 설명 방식이 틀리지 않아서 가르침을 받듯이 경청해야 했다. 아이는 숨을 죽인 채 로제리오의 집무실에 두루두루 앉아있는 많은 교수들을 상대하며 억척같이 식은땀을 흘렸다. 반면 예민한 감수성의 변이 때문인지 다른 한켠으로는 화가 치솟았다. 징계를 내리려면 어서 내리던 가 할 것이지, 고문이나 다름없는 이 시간을 얼마나 더 견뎌야 한단 말인가! 내면은 그렇게 수그러들면서도 꼿꼿이 일어나고 있었다. 순식간에 궁지로 몰려서였다. 애송이로 지냈던 때라면 아마도 혜성은 지금이 몇 시간이 되어도 인내심 있게 스스로를 탓하며 자책했을 것이다. 그러나 큰 변화를 겪고 난 뒤, 지금의 혜성은 약간 마음이 달라져 있었다. 굳이 이렇게 까지 나를 몰아세울 필요가 있을까? 라는 분노가 죄스러움 한켠에 몽알몽알 고개를 들었다. 그 때였다. “자기반성의 시간을 갖으려고 그랬다고?” “…예.” 만약 여기서 로제리오가 이런 말을 내뱉지 않았더라면 혜성은 틀림없이 자신을 변호하는 투로 교수들의 심기를 한층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때를 잘 맞춘 로제리오 덕분에 아이는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보스턴의 얘기는 함구한 채, 아이는 자기반성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는 변명을 꺼냈다. 그게 훨씬 현실적이라고 믿어서였다. 게다가 밖으로 나간 것을 누가 본 것도 아닌데 자신의 부재를 한 순간에 눈치 챌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감시 받는다고 느껴져서 소름이 끼쳤지만 그건 나중의 문제였다. 교수들이 수근 댈 때, 이번에는 바오르 신부가 예고 없이 들이닥쳤다. 집무실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해졌다. 이게 이렇게 큰 일 이었다니! 나는 몰랐어! 그래도 그렇지, 너무하는 구나. 나 한 사람에게 왜 이렇게 하는 걸까. 나는 잘못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아무 말씀 없이 상석에 앉는 바오르 신부를 보는 순간, 인내심이 바닥난- 정확히는 초조함의 끝까지 내달린 수페리우스는 확실한 투로 모든 교수들과 시선을 교차하며 말을 꺼냈다. “제 시험일은 마지막 날 이었습니다. 어제가 아니었습니다.” “!” “뭐라고? 지금 수페리우스는-” 아차. 그런데 마음이 급해서 결론이 먼저 나와 버렸다! 혜성은 창백해진 채 손에 땀을 쥐었다. 뚝- 바닥으로 굵은 방울이 떨어졌다. 아이는 다급히 서론을 꺼냈다. 아까의 침착함은 그래서 사라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먼저의 말에 화가 난 교수들은 수페리우스의 방금 말이 들리지 않았다. 들려도 글자만 전해질 뿐이었다. 덕분에 설득력이 없었다. “교칙 위반을 했습니다. 저의 행위는 징계 감인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제 시험일은 내일 입니다. 마지막 날로 잡혀 있습니다. 징계를 받더라도 시험을 치룬 뒤에 받게 해 주십시오.” 진즉에 이렇게 꺼내야 할 소리가 결론부터 나오니, 교수들은 아이를 버릇없다는 쪽에 점점 더 고정시켰다. 혜성은 간절한 투로 호소해나갔지만, 그럴수록 가식적으로 보인다는 편이 훨씬 많았다. “부디 자비로운 선처를…….” 혜성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바오르 신부를 정확히 응시했다. 사비나 교수의 납처럼 굳은 표정은 차마 볼 수 없어서, 긴장한 기색 역력한 채 입 안의 혀를 자근자근 깨물었다. 성급했어. 조용히 경청했어야 하는데 내가 방금 무슨 말을 꺼낸 거지. 지금의 나는 잘못한 게 있는 상황인데, 미친 거야. “1월의 뮌헨으로도 안 되겠군.” 바오르 신부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1월의 뮌헨이라는 말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누군가는 단번에 통쾌한 표정을 그렸지만 사비나 교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음성은 처량 맞게 죽어가는 겨울의 새처럼 싸늘하면서도 격앙되어 있었다. “안 되다니요! 신부님!” “반성의 여지가 없다면, 5월의 콩 쿨로 보내야지요.” “신부님! 콩 쿨 이란 게 경험상으로는 하자가 없다지만, 그래도 저 아이는-” 어리둥절해진 혜성은 자신을 두고 한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낯설기 짝이 없는 대화에 점점 더 집중할 수 없어졌다. 보스턴의 향기가 채 가시지 않아서, 혹은 현실을 등한시한 죄 값이 새삼 겁이 나서. 바오르 신부님에게 몇 번 더 큰 소리를 내던 사비나는 돌연 집무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녀로서도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토록 차가워진 겨울 한켠, 과연 따스한 열정을 지닌 자는 누구일까. 강인한 밤바람을 오히려 얼릴 힘은 누구일까. 바오르 신부? 순간 그의 중후한 안면에 민우의 슬픔이 스쳤다. 혜성은 그제 서야 천천히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피가 말랐지만, 그래도 민우의 아버지를 깊게 응시할수록 내면은 나아지는 것이다. 그는 곧 냉랭한 결론을 무덤덤하게 꺼냈다. “수페리우스.” “예.” “앞으로 통보가 있기 전 까지 자숙의 시간을 갖도록 하세요.” “아…….” 사르르- 내면의 긴장감이 녹았다. 혜성은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밀리는 안도감에 한 숨을 내쉬었다. 당장 결론을 듣지 않는 게 오히려 더 나았다. 피곤이 덕지덕지 쌓인 상태에서 결론을 들었다면, 혜성은 지금 핏대를 세운 채 고래 성을 질렀을 테니 말이다. 물론 자신을 변호하겠다는 당당한 의지 하에 그리했겠지만 교수들은 수페리우스가 생각하는 것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바오르 신부 역시 관대함과는 사뭇 거리가 멀었다. 그들과 현재 맞선다면 수페리우스는 남아있는 게 없을 것이다. “시험과 관련된 통보는 일주일 안에 주겠습니다.” “…….” “돌아가세요.” “…예. 신부님. 그리고 교수님들.” 완전히 지친 수페리우스는 넋이 나간 몰골로 집무실을 나갔다. 잔인한 초겨울의 바람이 어깨를 스쳤지만 아이는 흐느적대며 걷기만 했다. 두통이 심해지고 있어서 아이는 쉬어야 했다. 몸을 눕히던 가 술을 마시면 괜찮을 것 같았다. 보스턴에서 돌아오는 즉시 맞은 현실은 감성과 이성 모두를 녹초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림자의 부재는 감성을 괴롭히고, 죄로 인한 변화는 아이의 이성을 송두리째 잡아먹었다. 쉬면 괜찮아질 거야… 그래… 당장 시험을 본다 한 들 나는 미치기 밖에 더 하겠어. 하지만, 잘못했다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면 쉽게 넘어갈 줄 알았는데… 어떻게든 시험에의 기회는 주실 줄 알았는데… 지금 시험을 봐야 나는 앞으로 안심할 수 있을 텐데……. 서 쪽 기숙사에 돌아오는 순간, 혜성은 자신이 제대로 잘못했음을 인정했다. 교수들 앞에서는 감히 분노 성 내면을 흔들었던 주제에 이제는 잘못이 먼저였음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이다. 눈물이 나왔다. 미친 감수성의 변이 덕분에 나는 거대한 실수를 한 거야. 테레사를 느닷없이 느낀다는 핑계로 정혁이와 아마데우스를 피해 달아났잖아. 그런 주제에 뭐가 당당하다고 아까 큰 소리를 쳤던 걸까. 뮌헨, 뮌헨의 1월이라니. 또 6개월 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다는 걸까. 전공 시험 때문에 우루루 몰려다니는 학생들을 부러운 눈으로 지켜보며 수페리우스는 반의무적으로 조용히 이론 수업 따위를 들으러 다녔다. 요람에 뉘인 아기처럼 생각 없는 표정은 문득 문득 괴로움을 짜 냈다. 밤이 되자 걱정은 한데 짙어져서 수페리우스를 나약하게 만들었다. 아이는 로미오도 걱정이 되었다. 침대에 앉아서 잠을 자고 휴식을 취하려 했지만 시험을 못 본다는 아득함과, 자신의 돌출 행동 때문에 피해를 입을 로미오가 미안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는 것이다. 자책은 밤새도록 이어졌다. 아이는 결국 양 쪽 눈이 충혈 된 채로 새벽을 맞이했지만 늘 봐왔던 하프의 선율임에도 불구하고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반성의 시간이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더 지나자 수페리우스로 인해 발끈했던 학생들은 그 흥이 재미없어졌는지 여느 때처럼 제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별다른 결과가 없는 걸 보니 수페리우스는 괜찮은가보다- 이것이 학생들의 결론이었다. 교수들의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았음을 전혀 모르는 학생들은 여느 때처럼 수페리우스에게 인사를 했고 친근한 미소를 건네었다. 겨울은 발아래부터 서서히 꿈틀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겉으로 위장된 평화와 안녕은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까? 어쨌든 혜성은 지친 기색으로 동완과 이른 오전 식당에서 담소를 나눴다. 동완은 악보를 한 아름 품에 안고 뒤뚱뒤뚱 걸어오더니 혜성에게 눈이 빨갛다며 놀렸다. 혜성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말없이 수저만 휘저었다. 목에 가시가 걸린 듯 아무 것도 넘어가지가 않았다. 분수대의 물은 정지했다. 초겨울의 아마데우스는 잔인하리만치 아름다웠다. 사람의 넋을 갈취해 가는 매혹적인 연못의 물도 얕게 얼었다. 이번 겨울은 순식간에 사라진 가을 못지않게 상당히 빨리 오고 있었다. 식판을 두 그릇이나 비운 뒤 그것도 모자라 혜성의 반찬을 집어먹던 동완이 당장이라도 한 웅 큼 눈물을 쏟을 것처럼 위태로운 혜성을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왜 그러냐고 연신 추궁하자 아이는 동완에게 자신의 식판을 밀어주며 괴로움을 쥐어짰다. “힘들어서…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어. 나는 괜찮은데도, 힘들었어. 테레사를 보고 싶었어. 그런데 안 봐도 괜찮았어. 로미오가 와서 내 불쌍하고 초라해진 영혼을 위로해 줬어. 그 애도 나 때문에 지금쯤 징계를 받았겠지. 그런데 나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거야… 동완아, 나는 6개월 뒤에 차라리 전쟁이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거든.” “…….” 6개월 뒤에 무엇이? 바오르 신부는 아무런 힌트 없이 결과만 기다리라고 하질 않았던가. 이제 혜성은 자신에게 어떤 일이 있을 줄도 모르면서 무조건 6개월 뒤가 싫어졌다. 그게 어젯밤 내내 울고 걱정하고 피곤해 하면서 내린 결론이었다.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다! 라고 늘 예고를 먼저 받았던 게 생활화 되어서 그때처럼 열정으로 맞설 힘이 없었다. 자학의 화살이 점점 더 심장을 누르고 있다. 동완은 먹던 것을 관두고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눈물이 많다는 건, 결국 내면이 약하다는 걸까. 힘들지만 괜찮다는 것 마저 우유부단하고 쓸모없다는 걸까. 나는 내가 강하다고 믿고 싶은데, 아닐까. 혼자일 때가 더 많으니까, 현실이 불투명하다고 느껴질 때면, 그래. 지금 같이 때때로 생각이 뒤죽박죽이 돼.” “…….” “결론은, ‘모르겠다’인데 잡소리가 길어지는 거지.” “…….” “어리석은 눈물과 함께…….” 이 때 동완이 짝! 하고 박수를 치지 않았다면 혜성은 또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흠칫 놀란 아이가 왜 그러냐며 주변을 휙휙 둘러보자 한결 진지해진 동완은 부스럭대며 웬 노트를 펄럭였다. “잘 들어 봐.” “갑자기 그게 뭐니.” “내가 어디서 본 거야. 잘 들어봐.” “…….” 그러더니 혜성이 무슨 대답을 할 새도 없이 그는 자신의 노트에 적어 둔 이야기를 줄줄이 읽기 시작했다. < 자기애(自己愛)에 빠진 로린느! > 이상한 제목이 지나자 혜성은 휙 고개를 틀었고, 동완은 더 빠르고 진지하게 나머지를 읽었다. < 옛날 유럽의 작은 국가에 백성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아름다운 공주가 있었다. 공주의 이름은 로린느였다. 로린느의 아름다움은 주변 국가들을 통치하는 왕과 왕자들에게 흠앙을, 여인들에게는 질투와 부러움을 샀다. 아름다움이 주제일까? 그렇지 않다. 어쨌든 로린느는 아름답다는 것이다. 로린느는 아름다운 만큼 예쁜 마음씨를 지녔다. 적어도 백성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 자신도 자기의 마음에 도취되어갔다. 로린느는 슬픔의 상황에 직면하면 기다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모두에게 보였다. 혼자 있을 때도 물론 눈물은 흘렀다. 그녀는 슬펐다. 강아지를 봐도 슬프고 새벽이슬이 떨어지는 움직임에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름 모를 행인이 잘 걷다가 넘어지는 것 만 봐도 그녀는 소매를 훔쳤다. 슬픔은 곧 로린느, 그녀 자체였다. 백성들은 아름다운 아가씨로 자란 공주의 마음씀씀이가 눈물로 표현되는 족족 환호했다. 그렇다. 슬픔 자체인 로린느가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로린느는 자기 자신이 누구보다 따뜻하고 자애로운 사람이라 믿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녀를 추앙했다. 로린느는 자애롭고 슬펐기 때문이다. 슬픔의 표상인 로린느는 사람들의 말에 따라 자기 역시 슬픔임에 추호도 의심을 가하지 않았다. 그래. 나는 슬픔의 표상이다! 어느날이었다. 로린느와 가장 친한 벗인 센주가 부리나케 성을 찾았다. 센주는 로린느의 앞에 무릎을 굽혀 예를 갖추는 동시에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자신이 최근 겪은 슬프고 찢어지는 현실을 낱낱이 떠들었다. 센주의 지독한 아픔은 그 어떤 것과도 겨눌 수 없을 만치 참담해 보였다. 로린느는 가슴이 갈기갈기 뜯기는 통증을 느꼈다. 그녀는 지금이야말로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사랑하는 벗을 위해 천성을 꺼내 보일 때라 여겼다. 백성들이 추앙하고 또 슬픔 자체라 스스로 믿는 눈물을! 그러나 눈물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야속하여라! 단 한 방울도? 단 한 방울도! 다행이 센주는 아직 자기의 슬픔에 밀려 로린느가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음을 눈치 채지 못 했다. 센주가 그랬거나 말았거나 로린느는 큰일이었다. 그녀는 눈에 띄게 당황해서 굳었다. 슬픔 그 자체인 내가 왜? 어째서? 그리고 로린느는 곧 깨달았다. 센주의 머리칼을 쓸어주며 부들부들 떨리는 현재에! 이제껏 믿었던 슬픔과 눈물은 자기애(自己愛)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강아지의 처량함이 가엾다고 공상하는 스스로에게 도취되었던 눈물! 진실은 그것이었다. 새벽이슬의 처량함이 구슬프다 흐느끼는 스스로에게 빠졌던 눈물! 그것도 진실이었다. 남모르는 행인은? 그래. 그것마저도! 모르는 남이었기 때문에, 일개 백성들의 자잘한 것에 슬픔을 나누는 듯한 자기 자신에게 흠뻑 빠졌던 눈물이었다는 것이다. 자기애가 짙은 자는 자신보다 자기애가 깊은 자 앞에서는(적어도 로린느의 입장에서는) 눈물이 말라버린다는 것을! 센주는 틀림없이 깊은 슬픔에 빠져 있지만 로린느는 그럴 수가 없음을! 공주는 자기애라는 세상 속에서는 더없이 자애롭고, 상냥하지만, 그 외의 것에는 이처럼 무감동한 사람이었다. 로린느는 스스로가 자기애로 똘똘 뭉쳐있음을 자각하자 커다란 슬픔이 밀려왔다. 그 슬픔 역시 자기애(自己愛)였다. 실제로 타인의 슬픔 앞에서는 온전히 이렇다 할 눈물은 질투 덕분에 흘릴 수가 없었다! 오, 이럴 수가! 로린느는 결국 고대하던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진실을 알게 되자 그런 스스로가 처량 맞아서 자기애의 눈물이 또 터진 것이다. 결국 로린느는 자기애로 눈물을 보였지만 센주는 그녀가 영락없이 자애롭고 고마운 친구임을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 이야기가 끝이 나자 혜성은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동완은 이야기가 썩 괜찮다고 느껴졌는지 여러 번 종이를 펄럭였다. 사실 이 로린느의 얘기는 심리학에 흠뻑 빠져서 밤마다 뒤척이던 도중, 그가 직접 지어낸 이야기였다. 그는 스스로가 이런 쪽에 재능이 있는 줄은 몰랐다. 더욱이 책에서만 봤던 비유의 방법이 누군가에게는 효과적일지도 모르겠다는 판단마저 들었다. 그 때 혜성이 날카롭게 물어왔다. “이 얘기를 왜 하니?” “곧잘 우는 너 때문이지. 똑같지는 않지만 그냥 약간의 비유야.” “…….” 얘기는 잠시 뒤로 접고, 동완은 예민해진 혜성을 측은하게 응시하며 부드럽게 말을 잇는다. “이제 그 틀을 깰 때도 됐어, 혜성아.” “…알아.” “…….” 그러나 로린느 공주 얘기는 쉬이 넘어가자니 여간 찜찜한 게 아니었다. 우루루- 식당 안 쪽에 몰려 들어오는 학생들을 잠시 쳐다보던 혜성은 머리를 긁적이며 속의 것을 그대로 꺼냈다. 동완에게는 조금이라도 불편한 게 있으면 감추면 안 된다는 것 즈음은 알아서였다. 직설적으로 꽂는 동완을 싫어했다면 아마도 혜성은 아마데우스 입학 첫 날,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부담스러운 타입인가?” 눈을 크게 뜨는 쪽은 동완이었다.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목이 부러질 정도로 크게 저으며 부정의 뜻을 보였다. “…아니. 그 반대란다 수페리우스 양.” “…왜?” 그리고 진지해지는 쪽은 혜성에게 옮겨갔다. 초롱 해진 눈망울을 고수하면서도 질문은 참지 못하겠는지, 아이는 오른쪽으로 크게 고개를 꺾으면서 왜에? 라고 크게 물었다. 자신이 그런 행동을 취하는 줄도 모르나보다. 귀여운 행동에 동완은 물을 마시다가 푸웃- 하고 뱉어냈다. 물을 닦아낸 뒤 점잖은 척 가운을 입은 의사처럼 똑똑하게 말을 꺼낸다. “너는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훈훈해지게 만들어.” “…왜?” 또 왜? 이번에는 수페리우스의 고개가 반대 편, 왼 쪽으로 꺾였다. 파르르- 내려가는 노란 머리칼 때문인지 예쁘다. 그들을 지켜보는 주변의 눈빛들은 수페리우스의 행동이 신기했는지 안 보는 척- 모두 수근 대고 있었다. 동완은 약간 작게 떠들었다. “몰라. 그래서 저 사람이 나한테 기대 왔으면 좋겠다…라는, 이상야릇한 바람을 갖게 해.” “!” 혜성의 눈빛은 충혈 된 붉음을 서서히 지우기 시작했다. 맑은 기운이 돌아온다. 시원한 연못에 맨 발을 담근 것처럼 짜릿하게 퍼져오는 송달한 기운이 영혼까지 스쳤다. 동완은 늘 자신의 정답을 솔직하게 꺼내 주기 때문일까. 아니다. 로린느와 닮지 않았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좋은 얘기를 꺼내 줘서이다. 동완은 거짓을 진실인 척 꾸미는 사람은 적어도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말은 그래서 진실이다! “나만 해도 누구랑 친해지고, 친해지다 못 해 관찰욕을 일으키는 사람이 나타날 줄은 몰랐거든.” “선호 선배 있잖아.” 마음이 여유로워진 혜성은 히죽 웃으며 그의 안부나 다름없는 선호를 꺼냈다. 동완은 부리나케 대답했다. “너한테 대하듯이 꼬치꼬치 캐묻다가 상처만 받을까봐 그러지도 못 해.” “…난 그러는데.”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미카엘 선배가 아니니까.” “그렇지….” “사실 로린느 공주의 진짜 주인공은 딴 사람이지.” “누구?” “그건… 어. 로린느 공주님 오셨다.” “?” 두 사람에게서 상당히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동완의 말마따나 저 쪽 식당 입구로부터 이자벨이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채 등장하고 있었다. “공주님의 친구인 센주도 함께…….” “하하하하….” 이자벨의 옆에는 그녀를 시녀처럼 따라다니는 수산나와 모세까지 있었다. 둘은 배를 쥐고 웃었다. 자기애! 이것은 인간 누구에게나 해당사항 되겠지만, 때때로 이 쪽 저 쪽에 심하게 결부시키면 재미나는 법이다. 짜라라 쏟아지는 빛은 마치 여름처럼 출렁였다. 기분이 좋아진 혜성은 테이블에 고개를 숙이더니 은밀하게 속삭였다. “네가 지은거지, 김동완?” “뭐, 뭐, 뭐?” “재주가 상당하구나. 테오제네스한테 가져가 봐. 확실하게 지적도 해 줄 거야.” “무, 무, 무슨, 무슨 소릴!” 홍시처럼 붉어진 낯으로 동완은 고개를 틀어버렸다. 그 때 이자벨이 혜성을 발견하고는 우아하게 걸어왔다. 그녀가 오는 줄도 몰랐던 두 사람은 킬킬거리며 로린느 공주를 놀리는 중이었다. “뭐가 그리 즐겁지?” “!” “!” 싸늘한 목소리가 들리자 이자벨 특유의 꽃향기가 동시에 전해졌다. 입맛이 뚝 떨어질 만큼 매혹적인 향기였다. 자신을 놀린 걸로 오해했나 싶을 정도로 최근 당당해진 이자벨은 부러 주변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크게 얘기했다. “네 소원대로, 학생회는 곧 생길 거다. 애송이.” “…?” 수페리우스가 일전에 당당하게 제안했던 것을, 마치 제 것인 양, 그것도 별안간 느닷없이. 동완과 혜성이 눈을 꿈 뻑 이며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표정으로 되묻자, 그녀는 왔던 것보다 쌀쌀맞게 등을 돌렸다. “그러나 세상에 쉬운 일이란 없는 거지.” “…?” 지나치듯 작은 소리로, 그러나 더없이 분명한! 한 줄의 문장만 남긴 채……. 로제리오의 집무실, 혹은 바오르 신부님으로부터의 전령은 사흘이 지나도록 떨어지지 않았다. 혜성은 다시 조급해졌다. 동완이 건네 준 약효는 금 새 사라져서 아이는 침대 밑에 감춰두었던 술을 꺼냈다. 미카엘 선배로부터 전해 듣기를, 로미오는 학교에 돌아온 즉시 징계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바로, 감시인을 붙인 상태에서 13시간 동안 쉬지 않고 빠른 연주곡을 줄줄이 누르는 것, 그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혹독한 벌이 될 수 있을까? 혜성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사람마다 두려워하는 체벌의 정도는 달라서였다. 로미오는 자신이 원하는 때에만 즉흥적으로 가볍게 시간을 나누어서 체계적인 연습을 하는 유형임을 교수들은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혜성에게 이해가 안 되는 기분 좋은 징계가 로미오에게는 고통이었으리라. 어쨌든 수페리우스는 앞으로 닥칠 위기가 걱정되기도 하고 포기하고 싶어져서 하릴없이 술을 들이켰다. 넋이 사라진다. 아니면 내 안의 굶주린 넋이 빼어난 밤의 정경에 달라붙을 양 살아난다. 정답이란 늘 있으면서도 없다. 언제쯤 빈손에서 벗어날까! 그러나 빈손은 죽는 날까지 같은 자리일 지도 모른다. 빈손은 무거워질 수 없다. 그러나 혜성은 현실적인 문제를 두고 예전처럼 빈손 이니 가볍다는 위안을 삼을 수 없었다. ‘잘못’을 한 뒤의 상황은 전과 확실히 다르기 때문이다. 아이는 두 번째 술병 마개를 딴 뒤, 어제 동완에게서 빌려온 노트를 펄럭였다. 로린느 공주 얘기를 자신도 베끼겠노라 우겼지만 아직 옮기지는 못했다. 비실비실 몸이 기울어지면서도 글자는 춤을 추듯 뇌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래. 술을 마시니 아까보다 긴장감이 옅어진다. 민우도, 그래서 술을 마셨던 걸까. 테레사도 술을 마실까. 정혁이, 정혁이는? 열기가 치솟을 때 즈음, 아이는 밤의 창문을 모조리 열었다. 휭~ 큰 바람이 사정없이 몰려와서 아이를 뚫고 지날 것처럼 위협했다.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답답함과 스트레스는 바람이 가져가는지 아까보다 가벼워진 몸을 으스댄다. 뻥! 터질 것 같은 교향악이 머릿속에 출현했다. 흔들흔들 차창에 기대어 선 수페리우스는 머릿속 돋아난 음표를 음미하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뻥! 뻥! 오케스트라 구석의 북이 터진다. 그러나 곧 사라졌다. 아니지. 다시 시작된다! 그 때 혜성의 기숙사 방에 누군가가 불쑥 들어왔다. 술병을 쥔 채로 비틀거리던 혜성은 곧 자신에게 걸어오는 이가 로미오 라는 것을 알고 히죽히죽 웃었다. 사실 로제리오 교수님, 혹은 바오르 신부님의 전령자이길 바랬는데 그건 아닌가보다. 자학의 웃음이 짙어질수록 술은 늘어난다. “들어와 들어와.” 이미 들어와 있는 로미오를 재촉하며 혜성은 큰 모션을 취했다. 양 팔로 어서 오라는 듯 움직이며 털~썩! 발돋움을 하더니 침대에 푹 몸을 눌렀다. 찌릿한 전율이 술기운 덕분에 발 끝부터 가슴까지 치 닿았다. 로미오는 인상을 쓰는 건지 뭘 하는 건지 말이 없었다. 아이는 마침 잘 됐다는 식으로, 동완의 노트에 적힌 로린느 이야기를 읽어주기 시작했다. 술 한 모금 마시고 읽고, 또 술을 마시고 읽고, 때로는 딸꾹질을 하면서 아이는 시름에 젖은 입술을 떠들었다. 그 사이 창문을 닫은 로미오가 벌렁 누워있는 혜성의 옆에 살짝 앉았다. “어때… 딱 누가 생각나니?” “…….” 혀 꼬부라진 소리로 노트를 시트에 팡팡 쳐대며 혜성이 기분 좋게 물었다. 대답이 없다. “자기애라는 걸 나는 잘 몰랐는데, 너는 내 눈물이 선뜻 떠오르지 않든?” “!” 로미오의 차가워진 표정이 느껴졌다. 상관없었다. 술은 마법이었다. “아… 기분 좋게 취하는 구나… 이제 보니 정말 비슷하게 생기긴 했구나…아….” 그리고 엄청난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너 바보냐?!” “바……?” 비록 술은 취했어도 들릴 건 다 들렸는지라 혜성은 순간 움찔 하더니 아까보다 요염하게 입 꼬리를 올렸다. 그 움찔 이라는 찰나의 순간, 이성은 어서 정신을 차리라고 아이에게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술은 마법이라고 하질 않았던가. 아이는 현재 판단력이란 게 날아가고 없었다. “보스턴에 갔다 와서 머리가 어떻게 됐습니까 선배?” “…보… 바보… 아니. 애애송이다…….” “!” 뒤이어 혜성을 부르는 로미오의 함성이 크게 울렸다. 혜성은 점점 멀어지는 그의 소리를 뒤로 한 채 조용히 잠들었다. 급하게 술을 마셔서 그런지 잠은 한 시간가량 지나자 저절로 깼다. 약간의 술기운이 맴돌기는 했지만 아까와 같은 어지러움과 쾌락은 꿈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막 눈을 뜬 혜성의 시야에 잡힌 것은 자신이 누운 왼 쪽에 한 쪽 다리를 접어서 앉아있는 로미오였다. 그리고 그가 읽고 있는 동완의 노트였다. “어… 미오군. 왜 네가 여기에 있니. 그리고 그건….” “…….” 아니, 노트가 왜 로미오한테! 로미오는 왜 여기에! 순간 당황한 혜성이 벌떡 몸을 앉히더니 노트를 빼앗았다. 천천히 로미오가 왜 여기에 있는지 어렴풋이 기억날 무렵, 이번에는 커다란 힘이 아이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미오? 야! 로미오!” “…….” 제 아무리 크게 소리치고 뿌리쳐 봤자 체력 면에서 우세한 로미오에게 당할 재간이 없다. 혜성은 자신을 질질 끌고 나가는 로미오에게 이런 저런 말로 회유도 해 보고 겁도 줬지만 소용없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보스턴에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지금 또 왜 이러지! 지금 너를 고민할 시간조차 나에게는 없어! 11월 중순이 약간 지나서인지 노여운 초겨울은 온 세상을 제 것인 양 점령하고 있었다. 바람은 춤을 추는 것처럼 회오리를 일으켜서 작은 모래알마저 저의 것으로 쓸어갔다. 아이들은 밤늦은 시각을 이유로 각자 기숙사에 틀어박히거나 연습에 열을 올릴 때, 혜성은 알쏭달쏭한 후배에게 끌려간다. 아직 술도 다 깨지 않았는데, 이럴 수가. 로미오는 다짜고짜 혜성에게 마라톤을 시켰다. 특히 인적이 뜸한 곳만 골라서 혜성의 손을 이끌고 뱅뱅 돌며 달리기만 했다. 적당히 빠르고 또 적당히 느리게 말없이 비지땀을 흘려가며 야밤의 운동을 시키는 것이다. 이윽고 토할 것처럼 다급해진 혜성이 주루룩 땀을 흘리며 가쁜 숨을 내뱉자, 30분이나 달리던 로미오는 휙- 선배의 팔을 땅에 밀었다. 보기 좋게 나뒹굴며 혜성은 켁켁켁 침을 쏟아냈다. 그리고 바닥에 대 자로 누워서 흙을 묻히며 옅은 구름이 가린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뜨거운 열기가 섞인 땀방울이 턱은 물론이거니와 몸의 모든 부분에서 떨어졌다. “하악… 학… 하아아아아….” 뭘 걱정하고 있었는지조차 잊었다. 왜 이렇게 있는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냥, 덥고 힘들고 지금은 시원하다. 그것뿐이었다. “정신이 돌아옵니까?” “하아, 하….” 금방 숨을 고른 뒤, 로미오는 무감동한 투로 물어왔다. 혜성은 고개를 저었다. 흙이 머리칼에 차이는 게 느껴졌다. 아까보다 기분은 나아진 것 같은데… 저 녀석은 대체… 그 때, 기다려 주는 자상함 따위는 모를 거친 소리가 비집고 들려왔다. “오늘, 미뤄졌던 테레사의 리사이틀이 성황리에 열렸었다고 합니다.” “!” 혜성은 놀란 나머지 목만 살짝 올려서 눈앞의 로미오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별 것 아닐지도 모를 진실을 꺼내지 않았기에 로미오는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알 수도, 모를 수도 없었다. 한량 밤이 짙어진다. “그럼.” 어라. 그가 등을 돌린다. 아직 여기가 아마데우스의 어디 즘인지 분간이 안 되는데, 무작정 하늘같은 선배에게 마라톤을 시키더니 제 멋대로 돌아간다! 화가 나는 것도 아니요, 그저 어이가 없는 혜성은 바닥에 누운 채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되게도 딱딱한 척 구네! 그걸 네가 왜 알려주려고 하는 거냐!” “…….” “속의 말을 못 참고 액면 그대로 내뱉어 버리는군.” “…….” “비형이냐?” “……에이형.” 대답을 안 하는 것 같으면서도 필요할 땐 한다. 기분이 이상하다. 한켠으로는 땀을 흘려서 그런 걸까. 속이 시원해진 것도 같다. 6개월 뒤? 그게 무엇이든 어차피 닥칠 일을 미리부터 겁먹고 있을 필요는 없었을 텐데… 라는 이성에의 감각이 돌아와서 였다. 혜성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조용해진 로미오에게, 희미하게 남아있는 술기운의 힘을 빌어 놀리듯이 허공을 향해 또 소리쳤다. “미스테리 플러스 버릇없는 오리 녀석. 꽉 꽉 울어라! 꽉꽉꽉꽉! 날개 짓도 해야지? 꽉꽉꽉~” “쯧. 선배는 닭이잖습니까. 닭보단 오리가 낫습니다.” 닭과 오리는 서로 잘랐다고 떠들었다. “닭이 더 맛있어.” “오리가 더 샤프하니 잘생겼습니다.” 저런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 이라고 호통을 치고 싶지만 방금 전의 일로 기운이 빠져서 될 대로 되라 싶어졌다. 이상하게 자꾸 의미 없는 웃음이 빠져나간다. 공기처럼, 숨처럼 날아가는 웃음은 영혼에서부터 비롯된 걸까. 혜성은 조용히 읊조렸고, “…몹시 유치하다.” “유치합니다.” 지지 않고 목각처럼 대답하는 로미오가 왜 저러는지를 당장 알아냈다. “…신경전이냐.” 로미오의 등이 움찔 했지만 누워서 별을 헤이는 혜성의 시야는 그를 모른다. 아까보다 딱딱해진 음성이 푹 날아온다. “신경전 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 안 보는 사이 웃고 있었다. 이로서 모든 게 안정되어 가는 걸까. 낮의 칼칼함을 융화 시켜주는 밤이 왔으니까? 또, 아이는 숨이 막히도록 달렸으니까. 정다운 대화가 오고 갔으니까. 그러나 모를 일이다. 그들에게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게 있었다. 당신 눈에도 보이는가? 이럴 수가! 시야를 닫아라! 아니다, 귀를 닫는 게 어쩌면 빠르겠다. 광기의 겨울이 숨도 쉬지 말라며 저의 흉측함을 안면에 바~짝 들이대고 있다! 셂님이 메일로 주셨던 표지입니다. 고마워요! 멋있습니다.^^ wgreene@naver.com 우울의 계절인가 봅니다. 다들 환절기를 겪으면서 저처럼 우울증에 퐁당 빠지셨다면 기운 내시기를...^^ 약간의 잠수함 여행 뒤에 뵙겠습니다. 건강하소서! 린님, 체샤님, 셂님, 솨, 하용님, 포근구름님, 연님, 리에뜨님, 밀크티님, 좡, khshinae님, 점네개님, 슈콘느님, 박카스정님, 군림씨, 빵글이셩님, 슬픈웃음님, 별하님, 그리고 당신. 고맙습니다. 저는 다음편(과연 언제...)에서 뵙겠습니다. ps. 안부게시판에 신속하게 댓글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달릴 것이라는 예언을.. -화이트그린- 덧글 15개 엮인글 쓰기 /data19/2006/9/13/285/a-wgreene.jpg@nhn@48128@nhn@1@nhn@509@nhn@333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44편(광기의 겨울) /data19/2006/9/13/285/a-wgreene.jpg@nhn@48128@nhn@1@nhn@509@nhn@333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44편(광기의 겨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45편 ▼ 다음글 - 2악장 43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45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9/14 21:40 http://blog.naver.com/wgreene/110008744863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914 45편 업데) Amadeus 음악 : Khatchaturian : Waltz From Masquerade Suite (아래 플레이 클릭) Khatchaturian: Waltz F.. 그 때, 혜성의 안에서 살고 있던 로린느 공주가 죽어버렸다. 2악장 45편 건반! 건반이 필요해. 어떤 악보라도 상관없지만 되도록이면 격렬하되 익숙한 것으로. 아니다! 그게 아니야! 지금 같아서는 악마의 악보가 있다 한 들 무조건 치고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 “!” 오, 내 안의 잔인한 신은 무얼 하는가! 저길 봐, 건반이 사라진다! 누르는 순간 가루가 되서 부서지고 있어! 붉은 호흡을 힘들게 내뱉으며 아이는 당장 눈을 떴다. 억척같은 땀방울이 눈물에 섞여 흐르고 있는 현재, 기숙사 방으로 새벽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꿈… 그러나 꿈도 아닌 허무… 허무도 아닌 진실….” 일주일이 지나도록 바오르 신부님과 로제리오 교수는 이렇다 할 소식을 전해 주지 않았다. 피가 마른다. 동완의 로린느 공주 이야기, 로미오의 마라톤, 술, 그것들의 약효는 모조리 증발해 있었다. 간절히 원한다면 피아노를 연주하라고? 아이는 수 십 번 민우의 피아노에 앉아서 손가락을 움직였지만, 그것은 연주가 아니었다. 굳은 감각으로 하는 연주는 한 마디의 짧은 가락에 수 백 번의 도돌이표가 붙여져 그것만 연신 누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후회라는 단어는 영혼을 꿰어 차, 하루 이틀 지날수록 수페리우스를 시체보다 질리게 만들었다. 그냥 기다리면 되는 거라고? 물론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 이성 이라는 거겠지. 하지만 당신도 당해 보시라. ‘죄’를 지은 상태, 죄를 짓지 않은 상태 두 가지 중에서 어떤 것이 ‘기다림’이 편하겠는지를! 아이는 연주로서도 구원을 얻을 수가 없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싶다 한 들, 갈증 난 영혼은 혜성을 못 살게 구는 속도를 전혀 늦춰주지 않았다. 이렇게 잔인한 게 죄 값이었나! 책임이란게 이토록이나 목을 조인단 말인가! 아이는 치를 떨었다. 그렇다면, 로미오에게는 고작 13시간 벌을 내린 것에 반해 수페리우스는 왜 이런 곤욕을 치러야 할까? 답은 간단하다. 그의 이름이 문제였다. 그의 위치가 문제였으며, 그를 좋아하면서도 끝끝내 질투하던 무리들이 문제였다. 또 제 멋대로 의도적인 죄를 저지른 적이 없는 올바른 평소의 행실이 문제였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문제가 안 될 것도 없다. 테레사를 보듯 아이를 보던 시선들 역시 문제였다! 그래. 정말 문제는 그것이었다. 교수들은 테레사에게 못 했던 보복을 하는 것처럼 ‘단 하루’의 쉬이 지나칠 수 있는 수페리우스의 실수를 풍선보다 크게 부풀어버렸다! 단 하루, 수페리우스가 돌아오기까지 따지면 정확히는 이틀, 그 사이에 아마데우스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한 데 말아올라진 폭풍은 위장된 평화조차 없었다. 막무가내 식으로 밀어 붙여져서 교수들은 수페리우스의 부재에 각자의 정당함을 결부 시키더니 일을 저질렀다. 토론의 여세를 몰아 수페리우스가 없어진 둘째 날 오전, 교수들은 진즉에 물망에 올랐던 이자벨과 그 무리들을 학생회에 앉히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결심이 시행되기까지 보스턴에서 돌아온 수페리우스가 교수들에게 건방져 보였던 것이 가장 큰 몫을 했으리라! 학생회 건이 공식 발표된 것은 수페리우스가 무작정 기다림과 자숙을 반복하는 11월 마지막 주 수요일 오후였다. 4학년들의 입학시험은 모두 치르고도 시간이 많이 지나 있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찾듯이 우루루 게시 대와 식당으로 쏠려가는 학생들은 눈에 띄는 공고를 발견하고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자벨이? 역시 그렇구나.” “타의 추종을 받는 자가 학생회라… 게다가 학생회는 고상한 그녀에게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학생들은 이자벨을 의심하거나 시기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런 게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학생 식당과 게시 대는 마치 여름날 분수대의 물줄기처럼 힘찬 기운으로 들끓었다. “나머지 위원들은, 그 때 제일 먼저 일어서서 손을 들었던 애들이야! 이 일도 수페리우스가 정한 걸까?” “아무렴 어때. 수페리우스 보다야 사실 경력 면에서는 이들이 나을지도 몰라.” 왜 이런 대화가 오고 갈까.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쉽게 수긍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이상한 변화가 아니었다. 아마데우스 학생들은 미리 언급했듯이 수페리우스의 부재로 저희들이 분노 성 어절을 빚었음을 까마득히 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들 머리 위로 군림하려는 교수들이 문제였지, 학생들은 자신들의 생활에도 벅차서 수페리우스가 무기를 손에 쥐지 않는 이상 늘 그렇듯이 웃고 즐기기만 했다. 아름다운 아마데우스의 11월! 드디어 길고 아득한 그 시간은 마지막 주로 끝나가고 있었다. 바로, 이자벨을 학생회장으로 선발한 뒤 타의 모범이 될 만한 학생들 몇 명이 선출된 것을 발표함으로서. 빛나는 주자들 중에는, 아이러니 하게도 일전의 학생재판 때 혜성의 의견에 가장 먼저 손을 든 치들이 섞여 있었다. 어떤 형식으로든 그들의 정의는 실현 되었다. 여기서 의구심이 생기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수페리우스가 아닌 이자벨 장의 선출 소식에 뛸 뜻이 좋아하다니? 학생들은 수페리우스를 테레사 만큼 전혀 여기지 않는 걸까? 그렇지도 않다. 만약 그랬다면 헬리아란 한국 아마데우스 역사에 쓰이지 않았을 것이며, 학생 재판 때의 수페리우스는 승소할 수 없었을 테니. 학생들은 그가 헬리아를 이룩했듯이, 또 빛나는 감동을 주었듯이, 봉오리때 톡 쏘는 장미의 향을 지닌 뮤즈로서 머물러 주기를 은연중에 바랬던 것이다. 교수들의 시커먼 속마음과는 달리 학생들의 가벼운 기대는 뮤즈다운 뜻을 품고 있었다. 물론 학생들의 배려 심에 바다보다 깊다는 둥의 수식어는 붙일 수 없다. 그들은 ‘단순하게’ 상황을 받아들인 것뿐이니까. 어쨌든 느닷없이 출현한 학생회를 두고 교수들과 학생들은 똑같이 반겼지만, 각자 품은 뜻은 달랐다. “표정이 수상하구나, 혜성아.” “…내가?” 나란히 언덕에 오르며 동완과 혜성은 말을 아끼는 중이었다. 전에 없는 열기가 아마데우스 전체를 활활 타오르게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학생회가 선출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혜성은 어쩐지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단 하루, 그리고 돌아오기까지 합치면 이틀. 그 시간 벌였던 죄 값을 치룬 기분이 들어서일까? “학생들이 너를 버렸다고 생각하니?” “그럴 지도 모르지. 아닐 수도 있고. 내가 없는 동안 투표가 있었을지도 모르지.” 동완은 펄쩍 뛰었다. “투표는 없었어. 나도 처음 보는 소식인걸. 이자벨 장이 학생회 대표가 될 줄이야.” “모세가 그녀를 보좌하겠지?” “아무래도.” 언덕의 바람은 완연한 겨울의 힘을 자랑하고 있었다. 언 뺨은 녹일 새도 없이 칼바람에 스쳐 어그라지기만 했다. 혜성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자숙하며 죄 값을 치루는 도중 생긴 이 일이 자신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고민해 봤지만 답은 오리무중이었다. 동완의 말마따나 학생들이 수페리우스를 버린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언덕에 오르기까지 숱하게 마주친 학생들은 아이를 애송이라며 멸시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믿음으로 총명하게 빛나는 눈동자로 시선을 마주쳐 주었다. 그런 학생들을 무기로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교수들이었다. 전혀 호락호락하지 않은 로제리오의 측근이 특히나 더 그랬겠지. 혜성은 현실성 있는 추측을 되풀이하며 점점 홀가분해지는 기운이 신기했다. 이자벨 장 덕분에 별 일을 다 겪는군. “그래도… 너를 찾을걸.” “…뭐?” 희미한 눈초리로 중얼거리는 동완은 혜성이 회한에 잠기는 사이, 이를 갈고 있었다. 교수들이 수페리우스에게 일주일이 넘도록 통보를 주지 않고 무작정 무시한다는 점이 친구로서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게다가 학생회 건은 일전에 혜성이 당당하게 제안했던 건데, 아닌 밤중의 홍두깨 꼴로 이자벨이 그 자리에 앉질 않았던가! 동완은 짜증이 났다. 그러나 친구를 위해 억지로 웃어 보였다. “아주 다급한 순간에는, 혜성이 너를 찾을 거야.” 혜성은 옅게 웃으며 편안하게 깍지 끼어 누웠다. 어쩐지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있었다. 동완이는 화를 내지만, 정작 나는 어깨가 한층 가벼워진 기분이야. 육중한 무게가 이자벨에게 옮겨간 것 같은데, 왜 그런 걸까. “…과연 그럴까. 나조차도 나를 찾지 않을 것 같은데…….” 동완이 잠시 일어난 틈을 내서 혜성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제 연주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내 자신에게 앞으로 닥칠 바오르 신부의 통보에 대비하자는 취지로 축배의 잔을 올리리다. 약간의 평화가 닥치자 비겁한 마음 저 쪽, 그제 서야 정혁이가 흐릿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간사한 사람의 마음은 부정 할 라야 부정할 수 없는 건가봐, 그렇지……. 이자벨은 아마데우스 건물들 중 가장 돋보이는 것 중 하나인 B동의 뻥 뚫린 곳을 학생회실의 장소로 지정했다. 혜성은 그러거나 말거나 체념의 눈빛으로 편안하게 전체 수업을 찾아다녔다. 학생회는 단 한 번도 수페리우스를 찾지 않았다. 혜성은 도리어 잘 됐다는 식으로 12월 첫째 주가 되자 건반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전공 시험은커녕 통보조차 없었기 때문에 4학년 학생들이 지정된 전공과목에 열을 올리는 동안 수페리우스는 아직 유효한 이론 수업과 연주 연습만 꾸준히 했다. 지금이야 말로 마음이 불편하고 괴로워야 할 때라고 누군가는 입을 모으겠지만, 또 혜성 본인조차도 좌절에 빠져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쳤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잔잔한 평화를 이뤘다. 이름만 바꾸면 무기력한 상황을 혜성은 경쾌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만약 영원히 전공과목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기회조차 박탈 당한 채, 민우가 그랬듯이 얼기설기 아마데우스를 배회하며 지내겠지. 문득 이 생각도 나쁘지는 않다는 판단이 들어서 아이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12월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옷깃을 여미는 학생들은 자유롭게 아마데우스 곳곳을 유랑하는 혜성을 부러운 듯 쳐다보다가도 그가 뭘 하는지 궁금해 했다. 그 시선은 마치 오래 전 낙오자의 모임에 있던 민우를 보는 것과 닮아 있었다. 바야흐로 12월 둘 째 주가 되자 혜성은 전공과목이고 뭐고 이론 수업마저 빠뜨리더니 오르페우스 관으로 향했다. 도착하기 5분 전부터 하늘은 구름을 부서뜨리기 시작했다. 한 순간에 대지를 적시는 강인한 빗줄기가 검은 먹구름을 하염없이 쏟는 것이다. “으이~차!” 비명을 지르며 겨울의 장대비를 원망하는 무리들이 오들오들 떨었다. 혜성은 오르페우스 관 입구에서 비를 노려보는 학생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내부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우아한 아치형의 천정과 서늘한 내부는 날씨의 힘을 입어 위압감을 떵떵대고 있었다. 혜성은 무심코 바이올린 연습실 중의 한 도어를 박차고 들어갔다. 우중충한 날과 어울리지 않게 밝고 선명한 미뉴엣이 가냘프게 공간을 채우고 있다. 연주자는 붉은 바이올린에 몰두한지 오래되어서 아이가 들어온 줄도 모르는 눈치였다. 신입생들의 연습실은 복작이기 마련인데, 성탄 전야를 앞둔 탓에 많이도 한가했다. 약간 어깨를 흔들며 창가에 서서 현을 떨리 우고 있는 자는 로미오였다. 혜성은 쉬운 미뉴엣에 부러 힘을 주어 줄을 팽팽히 잡아당기는 로미오의 코믹한 연출을 내내 지켜보다가 무심코 웃음소리를 냈다. 그가 곧 혜성을 눈치 채고는 부드럽게 활을 내렸다. 푸르륵. 푸르르르륵. 창가에 부닥치는 비의 발자국은 음표를 비웃고 있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비의 전경에 흡수된 양 한없이 쳐다보았다. 방금 전의 바이올린 선율이 가득 차 있던 혜성은 약간의 홍조를 띠우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바이올린의 소리가 정말 맑고 깨끗하다….” “…이왕이면 천재라고 불러주세요.” 닭과 오리의 마라톤 이후 실로 오랜만에 다시 보는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로미오는 왜 여기에 갑자기 나타났느냐 묻지 않았다. 혜성 역시 우연히 들어온 연습실에 네가 있었노라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채 5분도 지나지 않아서 두 사람 중에 한 명이 밖으로 나가버렸으니까. 밤 열 시가 지날 무렵, 비는 멎었다. 혜성은 한가로이 아마데우스를 유령처럼 배회하며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몰래 술을 들이켰다. 기숙사 내부에서 마시는 것은 지금에 비하면 발톱의 때만큼도 못 미치는 것이었다. 차가운 밖에서 홀로 떨어진 채 신과 함께 나란히 술을! 정열적인 쾌락이 아이를 전율케 만들었다. 실상 마신 양으로 따지자면야 취한 게 아니었지만, 정신적인 은유는 수 만 가지 시어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늘씬한 술병으로 찰랑이는 액 채는 혜성이 지닌 유일무의 바다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먹구름이 치워지자 녹황색의 달이 발그레한 뺨을 내밀었다. 그 달은 혜성이 손에 쥐고 흔들어대는 병에도 반사되어 은은한 빛을 이뤘다. 테레사가 무대에서 보여주는 활기찬 은어의 손놀림마냥 하얀 배를 뒤집으며 은어는 달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연못의 다리 위를 건널 무렵, 혜성은 기분이 좋아져서 두 모금의 술을 더 마셨다. 알싸하게 퍼져가는 톡톡한 기운이 춤을 추는 것보다 화려하다. 혜성은 저 쪽에서부터 걸어오는 이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아무도 없는 적막한 와중, 다리를 건너려는지 묵지막한 누군가가 고급 수단을 매만지며 다가오는 것이다. 유령인가? “…….” “…….” 유령이 아니었다. 그는 바오르 신부였다. 혜성이 오래 전 민우가 그랬듯이 전공과목을 포기하고 제 멋에 취해 흐리멍텅하게 다리를 건너자, 그는 꼿꼿이 선 채 침묵으로 일관했다. 혜성을 통해 누군가를 관찰하듯, 바오르 신부의 육체와 영혼은 한없이 떨리는 듯 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스쳐 지났다. 왜 자신에게 기회를 주지 않느냐, 왜 학생회 건을 자기 모르게 시행했느냐 따지는 것 없이 혜성은 지나쳤고, 바오르 신부는 침묵한다. 그래. 그게 다였다. 여지없이 술과 함께 등장한 혜성을 맞이하며 동완은 혀를 찼고, 선호는 아이를 앉혔다. 다리를 건너는 즉시 혜성은 선호의 기숙사 방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대로 도착했을 뿐인데, 그들은 심려 가득한 표정으로 맞이할 건 또 뭔가! 아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진즉에 모여 있는 무리들 틈에 끼어 앉았다. “수페리우스. 괜찮니?” 눈치 보기 바쁜 프란체스코가 자기 옆에 앉은 수페리우스에게 염려 가득 질문을 건네자 발끈한 동완이 나섰다. “그런 건 묻지 마세요. 봐요. 저게 안 괜찮은 표정이에요?” “얘 동완아. 너무 그러지 마라.” “미카엘 선배는 매번 나한테만 뭐라 그래요?” 기숙사 회의라는 명분 아래 모인 이들은 위태로워 보이는 수페리우스를 걱정하는 것을 관두었다. 실상 수페리우스는 아무 생각이 없는 것처럼 방실방실 웃었기 때문이다. 그래. 조만간 다시 시험을 치루겠지. 늘 그랬듯이 말이야. 다들 이 생각에 추호도 의심을 않는 눈치였다. 명분과는 달리 그들은 친목도모나 다름없는 대화를 나누며 다과를 즐기기 시작했다. 제일 마지막에 도착한 테오제네스가 앉는 즉시 11월에 있었던 테레사의 피아노 리사이틀 건을 기쁘게 전해줄 무렵, 혜성은 마시던 술을 아예 옆으로 치워 버렸다. 처음부터 창가 쪽에 떨어져 사색에 잠긴 듯 관심 없이 굴던 로미오는 더더욱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내일 보스턴에서 받은 가십을 번역해서 올릴 거다.” “게시 대에?” “그렇지. 학생회 생성 건으로 시끄러웠었고… 또, 보스턴 리사이틀이 예상 외로 날짜가 길어져서 최근에서야 막을 내렸거든.” “대~단 하구나. 테레사는 역시…….” 테오제네스의 들뜬 신음은 테레사를 신임하고 있음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프란체스코와 동완이 테오제네스에게 달라붙어서 이것저것을 캐묻는 것에 반해, 혜성은 말이 없었다. 조용히 듣기만 했지만 아이의 작은 주먹은 바닥을 움켜쥐고 작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해 냈구나… 나는 이런데…… 이 생각이 스치자 수페리우스는 잠깐 치웠던 술병의 마개를 다시 열고 한 번에 몽땅 마셨다. 그리고 침통한 입술을 열었다. “…처음 예정된 날짜보다 연기 되었다더니…….” 아이의 질문을 누구보다 기다렸던 테오제네스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아마데우스 홀의 무대 구조를 바꾸고 싶었던 거겠지. 홀의 내부는 외형과는 달리 아주 근사했다는 평이 자자하거든. 물론, 그의 독창적이고 세련된 테크닉과 실력, 감성, 감동이 우위겠지만.” 우직한 그의 입술은 예상했던 것 보다 더 많은 내용을 자신 있게 전달했다. 그는 그만큼 테레사를 믿어서였다.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이는 혜성과는 달리 이번에는 선호마저 달려들어서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래? 어쩐지… 하지만, 테레사는 앞이 안 보이잖아?” “상상은 할 수 있지.” “아…! 역시 멋지구나.” “다섯 살에 유럽에서 데뷰할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는 빛을 잃지 않는다.” 여전히 로미오와 혜성을 제외한 그들은 열심히 테레사를 떠들며 기뻐한다. 로미오는 몇 번이나 주먹을 움켜쥔 채 떨어지지 않는 입을 원망하며 경청하기만 했다. 도저히 알 수 없는 미지의 인물 로미오는 그러나 혜성에게는 관심 밖의 대상이었다. 아이는 언제쯤 자신이 일어설 수 있는지 가능성을 유추해 보려 했지만, 그에 앞서 테오제네스의 질문이 훨씬 빨랐다. “그가 보고 싶지 않니?” 동완이처럼 똑같이 돌려서 말하는 법 없이 직설적으로 내리꽂는 질문에, 혜성은 잠시 망설였다. 스스로의 가능성 이라는 글자는 뒤로 미룬 채, 곧 대답했다. “건강하게 잘 계시는 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해.” 혜성의 무감동한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저 쪽에서 와작! 하고 종이컵 몇 개가 한꺼번에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처음부터 떨어져 있던 로미오였다. 그는 왜 그랬을까? 종이컵의 박자에 맞춰 공간은 삽시간에 없는 것보다 조용해졌다. 그들은 그제 서야 로미오를 주목하며 인상을 구겼다. “워싱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더 화가 난다는 듯이 굴며 로미오는 대뜸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리는 게 아닌가! 기가 막히다. 혜성은 그런 로미오가 익숙하다는 듯 빈 병을 바닥에 굴리기 시작했다. 로미오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의 형 선호는 시름에 잠긴 채 깊은 숨을 내쉬었다. “저 앤 다 좋은데 말을 안 해. 다른 말은 다 하는데, …말을 안 해.” “생긴 건 우유부단하고 쾌활한 것 같은데…….” 프란체스코가 천천히 대꾸해 오자, 선호는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쥐며 말을 잘랐다. “그래. 그 쪽 성향이 있어서 말은 하는데, …중요한 말은 안 해. 형인 나한테까지.” “워싱턴은 애들 사이에서는 발랄한 스포츠맨인데? 뭘 말을 안 한다는 거지? 오늘은 그냥 기분 나쁜 게 아닐까?” “원래는 그랬는데, 나는 알아. 형이니까. 뭔가 감추는 게 분명히 있는데, 몇 번을 진지하게 물어봐도 아니라면서 대답을 안 하는 거야.” 그 때 동완이 신중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저런 유형이 입이 무거워진다는 건, 스스로에게 독이 될 텐데…….” 비가 적신 대지는 얼어붙었다. 겨울의 잔인함은 얼어붙는 가운데 무거운 활을 현에 끼인다. 그렇게, 광기를 실은 마차는 겨울을 향해 원 없이 달려오고 있었다. 날씨는 요술을 부리는 걸까? 기가 막히게도 다음날에는 눈이 내렸다. 비로 얼어붙은 세상은 녹기도 전에 백색의 물결을 채우기 시작했다. 밥을 먹는 것을 비롯한 모든 생활은 연주를 제외하고는 수페리우스에게 있어 시들해졌다. 눈이 오자 아마데우스는 열을 올리며 기쁨을 소리쳤다. 호산나!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는 눈초리는 언 눈이 오히려 녹을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바오르 신부는 수페리우스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교수들은 입을 다물었다. 하물며 사비나 교수까지도! 유일한 수페리우스의 편이었던 사비나 교수는 바오르 신부와 몇 번의 회의를 진행하더니, 제일 먼저 겨울 휴가를 떠나셨다고 한다. 자의일지 타의일지는 그녀가 직접 말 해 주지 않는 이상 모를 일이지만.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 걸까… 아이는 오늘도 계획 없이 몇 개 남지 않은 기본 이론을 듣기 위해 곳곳의 건물을 배회하다가, 오후 무렵에는 그것마저 관두었다. 조용히 서 쪽 기숙사 방에 틀어박혀 테레사의 포스터를 노려보았다. 풍부한 감성을 실고 그를 쳐다보고 싶었지만 마음은 욕심을 따라주지 않았다. 그 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더니 프란체스코가 창백한 낯으로 수페리우스를 부르며 들어온 것은. 무슨 일이니? 하고 묻기도 전에, 프란체스코는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으며 와들와들 떨었다. “괜찮아.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말 해 봐.” “워, 워, 워시, 워시시시시싱-” “워싱턴? 로미오가? 그가 왜?” 힘겨워 보이는 그의 입술이 안됐는지, 아이는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물을 내밀었다. 벌컥벌컥 들이키면서도 프란체스코는 추운 날임에도 불구하고 억척같이 땀을 흘렸다. 무슨 일이지? “싸, 싸움이 일어났어. 싸, 싸우우움.” “…싸움?” “그, 그그그래. 하아….” “그래. 싸움이든 뭐든 우선 진정 해 봐.” 서늘하게 웃어주는 노란 수페리우스 덕분에 살짝 볼이 붉어진 프란체스코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위태로운 만큼, 무감각해 보이는 만큼 12월의 하얀 수페리우스는 아름다워지고 있었다. 가느다란 몸의 곡선은 마치 여인의 그것처럼 실루엣이 창백하면서도 유했다. 프란체스코가 진정되기를 기다리며 시큰둥한 낯으로 수페리우스는 악보를 뒤적거리기만 한다. 다시금 초조해진 프란체스코는 구태여 여기까지 올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일 먼저 생각난 사람이었던 수페리우스를 향해 비명을 질렀다. “워싱턴이 일부러 남쪽 애들이랑 시비를 붙어서 대판 싸움이 일어났어!” “…….” “워낙 쎈 애들이라 혼자 상대하면서도 마치 즐기는 것처럼 섬뜩해서 아무도 못 말리고 있어!” “…….” 감각이 없다. 평지는 전혀 으깨지지 않는다. 긴 지루함의 시간이 나의 넋을 결국 죽인 걸까. 열정의 영혼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대답 없이 악보를 넘기는 수페리우스가 애가 탔는지 프란체스코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이상하게 네가 먼저 생각났었어! 나는 잘 모르겠지만, 그 애는 네 말이라면 들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 “그, 그그그그애, 워어어, 워어시, 워시시시싱턴은!” “…….” 또 말을 더듬는군. 그가 측은해진 수페리우스는 참 안됐다는 식으로 시선을 마주쳐왔다. 프란체스코는 수페리우스의 악보를 아예 뺏어서 허공에 딱딱 돌리더니 답답하다는 듯 마지막 문장을 질렀다. “나야 모르지만, 네가 증발한 날, 너와 같이 사라졌었잖아!” “!” 그 때, 혜성의 안에서 살고 있던 로린느 공주가 죽어버렸다. 자기애로 흠뻑 빠져있던 로린느 공주가 자멸하자, 이번에는 호위하던 센주도 없어졌다. 아이는 고동 대는 가슴을 움켜쥔 채 파리해진 낯으로 그가 어디 있느냐 거듭 물었다. 이제껏 보여주지 않던 붉은 혈색은 아이의 이마를 태우고 있었다. 열기로, 힘으로, 박력과, 부활로서. 생활에의 포기는 로린느가 죽음으로서 다시 살았다. ‘나, 남쪽 기숙사 뜰.’ 프란체스코에게 대답할 사이도 없이 아이는 당장 뛰기 시작했다. 코트를 걸치지 않아서인지 냉정한 겨울바람은 물에 젖은 옷을 입은 것처럼 차갑게 달라붙었다. 스슥- 잔챙이들은 긴 바람에 섞여서 수페리우스를 치고 지났다. ‘저 앤 다 좋은데 말을 안 해. 다른 말은 다 하는데, …말을 안 해.’ ‘저런 유형이 입이 무거워진다는 건, 스스로에게 독이 될 텐데…….’ 로미오! 다른 것은 모르겠다. 나는 왜 구태여 피하려 했을까? 혜성은 진심으로 걱정되고 미안해지는 스스로가 저주스러웠다. 로미오! 비밀이 있다 한 들, 정말 해가 되는 사람이었다면 혜성을 쫒아서 보스턴으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로미오! 그가 사악하고 음모 따위를 즐기는 유형이라면 로린느와 자신을 결부시키는 혜성에게 마라톤을 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비밀은 누구나 있는 법, 그것을 밝히지 않는 것을 닦달 하고 노여워만 했던 감성은 잠시 죽었다. 혜성은 답답했다. 뛰면서도 남쪽 기숙사가 멀게만 느껴져서 사태를 방치해 둔 학생회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자신에게 이 소식이 전해질 정도면 도도한 이자벨 장에게도 소식은 전해졌을 터, 왜 사태를 관망하는 건가? “수페리우스?” 실로 오랜만에 열정의 낯으로 덤벼드는 수페리우스를 발견한 남쪽 무리들은 길을 터 주었다. 하얀 눈발 사이로 주먹을 날리며 한바탕 욕을 지껄이는 무리들은 수페리우스의 등장에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내내 소리치느라 목이 쉬어버린 학생회 임원 두 명이 이제야 안심했다는 식으로 혜성을 보고 뚝 눈물을 떨어뜨렸다. “수페리우스… 도와줘.” 도와주고 말 것도 없었다. 아이의 등장만으로도 싸움은 멎었기 때문이다. 그의 등장에 수군대는 학생들은 슬슬 각자 돌아갈 곳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그만 갈게….” 임원 녀석들은 그들에 섞여 조용히 수페리우스에게 인사하더니 사라졌다. 백여명의 인파가 사라진 가운데, 뻥 뚫린 뜰의 중앙에서 로미오는 열 명이 넘는 남쪽 학생들과 섞여서 짐승이 되어 있었다. 로미오! 아이는 측은해지는 한켠, 상황에 닥치면 오히려 냉정해지는 이성적인 면을 활용했다. 학생재판, 헬리아, 그리고 신입생 연주회에서 겪었던 기량은 가히 영향력을 행세하는 것이다. 수페리우스는 아직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알아서들 길을 터주고 싸움을 멈췄으며 사라졌다. 그냥 나타났을 뿐인데도 말이다. 혜성은 바닥에 퉤- 하고 피와 섞인 침을 내뱉는 로미오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로미오와 단 둘만이 남자, 남쪽의 우아한 뒤뜰은 밤의 기운이 서슴없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오후 다섯 시 반인데도 벌써 까묵한 기운이 남쪽을 덮었다. 짜악-! 혜성은 로미오가 자신의 곁에 마주서는 즉시, 있는 힘껏 뺨을 쳤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 산 경험자가 외친다. 감추었던 불벼락의 활을 쏘았다. 선배로서, 한 인간으로서, 최선으로 억누르던 감정을 낯설고 이질적인 그에게 꺼낸다. 소리쳤다. 여전히 모를 사람이지만, 그만큼 갑옷으로 위장해야 하는 그가 어쩐지 가여워서 혜성은 아낌없이 소리쳐야만 했다. “혼자서 다 해 내겠다는 것은 이기심이다!” “!” 아이의 벼락같은 외침에 로미오는 번쩍 고개를 내리더니 이글거리는 동공을 쏘아보았다. 그게 겁이 날 것이라 여기는가? 혜성은 겁이 나기엔 너무 많은 것을 경험한 사람이질 않던가! “왜. 나도 치고 싶은가?” “…….” “쳐 봐! 분노는 또 다른 분노를 낳는다는 것을 모르는 너는, 계속 질러 봐!” “…….” 나는 너를 잘 모른다. 하지만 뭔가를 감추고 있다는 선호 선배의 말마따나, 그게 사실이라면 괴로울 거라는 얄팍한 추측은 가능하지. 이건 네가 나에게 줬던 모호한 상냥함의 보답이다. 혜성은 실로 오랜만에 열정의 입술로 로미오를 윽박질렀다. “혼자 성공하는 영웅이란 것도 없다! 하물며 신도 외로워서 인간을 만들었어!” “!” 괴로워하는 후배를 위하여. 미스터리한 그의 부분을 배제한 채, 한 불꽃이 되어서 진심으로. 작은 일에도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크게 흥분할 줄 아는 수페리우스는, 자기애에 미쳐있던 로린느 공주를 마침내 버렸다! 이렇게나 늦게! 엉뚱한 상황이 되어서야! “협력과 공존이라는 단어가 왜 있다고 생각하지?” “선배는 혼자서 잘 해 왔었기 때문에, 선배는 수페리우스니까! 또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로미오는 처음 보는 기괴한 낯으로 크게 떠들었다. 그의 격노는 따가운 적진의 불침보다 뜨겁고 사나웠다. 울분을 참지 못 해 한계에 다 달은 야수와도 같았다. 혜성에게 처음 접근했던 유쾌 발랄한 로미오, 그에게 거리를 두자 신경전을 제안한 로미오, 이제는 화를 내는 로미오. 상대가 흥분하자 도리어 침착해진 혜성은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다구요?” “그래. 그렇지 않아.” “…….” 이른 시간의 달이 떠오른다. 둘 뿐인 공간에서 혜성은 비통한 어절을 아낌없이 꺼냈다. “히스 덕분에 룸펜에서의 나는 버텼다. 민우 덕분에 나는 아마데우스를 알았지. 테레사 덕분에 내 정신은 흔들리면서도 끊어지지 않았어. 정혁이는 처음으로 내 값을 이 지독한 아마데우스 학생들 사이에서 밝혀 주었지. 물론 테레사 다음이었지만… 그가 아니었으면 나는 입학시험도 치룰 수 없었을 테니. …그리고, 네 덕분에 나는 보스턴에서 눈물을 떨치고 돌아왔다.” “!” 로미오의 눈빛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놓치지 않은 혜성이 재빨리 말을 잇는다. “나에게 기회를 줘.” “…….”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도와주면 한결 나을 거다.” “선배는 할 수 없어요.” 그러나 베일에 싸인 로미오는 여느 때처럼 아리송한 인물로서 한 걸음 물러나려 한다. 왜, 어째서? “세상에 할 수 없는 일이란 건 없어. 안 하니까 못 하는 거다.” “과연 그럴까요.” “…그래.” 마음 속 로린느 공주가 죽은 것이 다시 확인되자 혜성은 철푸덕 눈 위에 앉았다. 여전히 추웠지만, 정신이 맑아져서 괜찮았다. 또 이와 같은 무기력함과 포기가 상승을 부릴 지도 모르겠지만, 위기는 극복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던가. 방금 한 말 역시 내가 나에게 하는 소리일 지도 몰라. 한동안 말이 없던 로미오는 혜성의 옆에 나란히 앉아서 체념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는 듯 피식 웃으며 허공을 올려본다. “쌓인 게 많습니다.” “…그런 것 같다.” “젊은 혈기를 욕하지 마세요.” “욕 할 거다.” “선배.” “…?” “아무리 생각해봐도, 백 번을 생각해봐도, 테레사는 높은 벽입니다.” 테레사? 느닷없이 그 얘기가 왜 나오는가? 혜성은 되도록 별 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지만 내면의 의구심은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 …어떤 면을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그렇게들 여기지.” “테레사의 속마음을 모르겠어요.” “글쎄… 나는 알 것도 같은데…….” “아니. 선배도 몰라요.” “왜 그런 얘기를 하지? 쌓인 게 많다는 건 그만큼 너 혼자 감당하는 뭔가가 있어서겠지.” “…….” “털어 놔.” “…….” “털어놓지 않으면 신경전조차 없…!” 열정의 입술을 닫는 야수의 움직임은 매우 빨랐다. 로린느 공주는 더 이상 자기애 따위로 울지 않는다. 죽었기 때문이다. 혜성이 진지하게 대화를 시도할 무렵, 스스로의 비밀과 격정에 못 이긴 사자는 수페리우스의 끌어안고 거친 저의 입술을 눌러버렸다. 그 순간 혜성은 신음하며 저도 모르게 마음으로 소리쳤다. 오! 나의 아마데우스여! 당신은 대체 어디에! 일전에 소아님이 준 테레사(스러운) 은어의 손놀림 사진입니다. 고마워요. wgreene@naver.com 이런.. 광기의 겨울이 반도 안왔는데 이번편이 끝났습니다.(개인 시간상..) 잠수함 타기 전에 이 음악과 함께 광기를 끝내고 싶었거든요.(끝나지는 않을지 몰라도.) 아쉬운 김에 예고의 한 줄 드리겠습니다. 다음편에는 정혁이가 나옵니다.(아.. 진짜 여기까지 확 써야지 내 맘이 내 맘인데...) 문정혁이 나와야지 광기의 겨울은 끝이 납니다. 그리고, 2악장은 전에도 언급했듯이 신혜성의 나태기 입니다. 언제나처럼 지켜봐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좡, 레이첼님, 솨, 포근구름님, khshinae님, 별하님, 연님, gipbob님, 셂님, 말희님, 기린아님, 빵글이셩님, 박카스정님, 그리고 당신. 고맙습니다. 우리 함께 힘차게 마지막까지 달려봅시다~(잠수함도 같이 즐기면서..) -화이트그린- 덧글 10개 엮인글 쓰기 /data17/2006/9/14/283/1-wgreene.jpg@nhn@33283@nhn@1@nhn@320@nhn@213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45편 /data17/2006/9/14/283/1-wgreene.jpg@nhn@33283@nhn@1@nhn@320@nhn@213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45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46편 ▼ 다음글 - 2악장 44편(광기의 겨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46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9/15 20:41 http://blog.naver.com/wgreene/110008772882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915 46편 업데) Amadeus 음악 : Forever Is Not Long Enough / Erkan Aki (아래 플레이 클릭) Forever Is Not Long En.. 너도 외로웠니…. 2악장 46편 여기 화려한 젊음이 겨울 불꽃처럼 타오른다. 적막한 어두움과 쌩쌩 달리는 바람을 방패삼아 거칠어진 세상에 혼자임을 자부하는 불꽃이 있다. 이처럼 젊음에는 ‘때’라는 것이 중요치 않다. 영원하리라 믿는 현재가 사라질 것이 오히려 두렵다. 그 시절의 혈기를 참지 못하고 주먹질을 한 직후라서 그런지 로미오의 몸은 뜨거웠다. 그는 다자고자 센 힘으로 껴안은 것도 모자라 혜성의 입 안을 저의 탐욕으로 헤집더니, 이윽고 아이의 정복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쉭- 찬바람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알량하니 저의 자리를 차지한다. “하… 선배… 선배… 조금만 더 입을…….” 누구일까. 그리고 무엇일까. “…….” 운명이 모두에게 있다면, 너는 이 젊음에게 대체 어떤 몫을 선사했는가! 그의 이성은 망각의 샘에 버려졌다. 아이는 그의 감성과 본능만이 느껴져서 사뭇 두려움이 밀려왔다. 바지에 끼인 블라우스를 밖으로 꺼낸 뒤 날렵하게 맨 허리를 더듬는 손바닥은 뜨겁고도 차가웠다. 그의 손바닥에 묻은 자잘한 핏자국이 아이의 하얀 속살에 묻자 소름이 끼쳤다. 오, 하느님. 지금 당장 내 영혼만한 우박이 천지에 내린들 이보다 놀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 선배… 나는….” “!” 로미오는 탁한 신음소리와 함께 혜성의 힘없는 상체를 바닥에 쓰러뜨렸다. 이런! 아이는 후다닥 이성을 부여 쥐고는 덜덜 떨리는 오른팔과 주먹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무방비상태로 달아오른 후배의 안면을 강타했다. “윽!” 그는 아이의 힘보다 아이의 돌출 행동에 놀라서 뺨을 돌렸다. 욕정의 눈빛이 사그러 들자 이번에는 피식 웃는다. 로미오는 바닥에 누운 채 방금 때린 주먹을 어루만지면서도 자신을 사납게 노려보는 혜성을 천천히 돌아봤다. 그 시간은 아주 느리기만 해서 혜성은 침이 말랐다. “이대로 덮칠 수도 있어.” 로미오는 이미 사라진 욕정을 있는 척 위장하며 읊조렸다. 그의 잘 생긴 눈망울은 이상하게 슬퍼보였다. 허스키한 그의 어절은 여차하면 수페리우스의 바지를 벗길 것임을 강조했다. 그가 으르렁댈수록 혜성의 시야에는 한 풀 꺾인 사내의 정욕이 읽혔다. “…나도 젊은 혈기 욱 하는 성질이 있어서 쳤다.” “…….” “정신 차려라.” “…….”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걸까? 흠칫 놀라는 수페리우스와는 달리, 그는 정신이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안면을 숙여왔다. 그리고는 아까와는 달리 상냥한 입맞춤을 시도 하려는 게 아닌가! 아이는 기가 막혔다. 그가 그럴수록 싸늘해진 어투는 깊어져간다. “나는 이제 너를 안 본다.” “…….” 아까와는 달리 가만히 정지한 채 쏘아붙이던 혜성은 곧이어 느슨한 투로 중얼거렸다. “…너를 이해하기엔… 너는 너무 닮아있어.” “?” 그러더니 고개를 휙 돌려서 땅에 고정시키는 게 아닌가. 로미오는 당황했다. “네가 싫어.” “!” “이젠 너를 미워해야겠어.” “!” 이럴 수가! 로미오는 미워할 거라는 단언이 끝나기도 전에 후다닥 일어섰다. 발끝까지 밀려오는 자릿한 쾌락의 기대보다 그것이 더 무서웠던 모양이다. 선배의 주먹과 훈계보다 싫다는 소리가 끔찍한 게 분명했다. “?” 자신이 무슨 대답을 하던 상관없이 공격해 올 것을 대비하던 혜성은 삽시간에 몸을 일으키더니 훌쩍 사라져가는 로미오를 의아한 낯으로 지켜보았다. 그는 단 한 번도 다시 돌아오거나 뒤 돌아보는 것 없이 네가 싫어- 라고 차갑게 내뱉은 혜성에게서 비켜 가 주었다. 푸득푸득 덜렁이는 블라우스 안쪽으로 강풍이 파고들어왔다. 옷깃을 움켜쥐자 그제 서야 얼마나 양 손이 떨리고 있었는지, 육체는 입술과 전혀 반대로 몸서리쳤는지를 깨달았다. 혜성은 한 시간 가량 넋을 잃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이 눈물은 로린느의 눈물이 아닌, 허무와 긴장의 다른 표현이라고 우겨본다. 첫 번째 로린느는 죽었지만, 내면에서 새로이 부활할 위험이 있는 다른 그녀들과 영원히 싸울 것을 대비하여 아이는 최대한 당당하게 기숙사로 돌아갔다. 그 뒤로 아주 이상한 일이 생겼다. 아침에 눈을 뜨고 무심코 기숙사방문을 열면 도어에 붙여있는 회색 종이가 아이를 반겼다. 그 종이를 떼고 한 참 동안 밖을 쏘다니고 오면 역시나 도어에는 다른 종이가 붙여 있었다. 식당에 다녀왔을 때도 새로운 종이가 있었으며, 언제나처럼 종이를 뗀 뒤 거한 낮잠을 취한 다음에도 문 앞에는 항상 종이가 달려 있었다. ‘잘못했습니다.’ 내용은 늘 저 한 줄이었다. 혜성은 신경질적으로 그것을 버렸다. 누가 볼까봐 민망해지는 감정에 밖으로 돌아다니다가도 후다닥 기숙사에 와서 여지없이 달려있는 종이를 떼 내기 일 수였다. 방 안에서 잠잠히 있다가도 혹시나 싶어서 문을 열면 잘못 했습니다 의 한 줄이 달려 있었다. 로미오! 너는 대체! 혜성은 화가 나던 것이 이젠 불안해졌다. 그러나 로미오가 어떤 사람이던가. 그는 엉뚱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미스터리였다. 건방진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 한 것은 쪽지를 매일 매일 붙이면서도 드러났다. 잘못 했습니다 라는 정중한 내용은 잘못 했어로 바뀌었고, 며칠이 지나자 ‘미안하다니까’ 로 또 달라졌다. 글자에는 로미오의 표정과 건방진 말씨가 고대로 드러났다. “뭘 하는 거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변함없이 붙여지는 종이를 떼어내는 혜성을 두고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아이는 깜짝 놀라서 종이를 북북 찢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상대를 확인했다. 간만에 만난 이 사람은 테오제네스였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진짜 매우 몹시 내가 잘못 했다’ 라고 적힌 종이를 한 번 더 찢으며 혜성이 억지로 입 꼬리를 올렸다. 테오제네스는 수상쩍다는 듯 눈초리를 빛내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받아라. 테레사가 전해 주랬어.” “!” 테레사! 뒤로 감춰 두었던 로미오의 찢어진 종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아이는 고동 대는 가슴을 애써 참아가며 그가 내민 것을 받았다. 그리고 놀라움에 영혼은 경련을 일으켰다. 테레사! 눈앞의 것을 보면서도 믿기지 않아서 아이는 여러 번 눈을 비벼야 했다. 아이의 반응에 흡족한 듯 테오제네스는 시원하게 웃으면서도 정확한 내용을 전달했다. “안에 편지도 있긴 하지만… 말은 따로 전하라더군. 직접 너한테 연락하거나 뭘 보내는 것 보단 이게 좋았나봐. 어쨌든 잘 들어봐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테레사의 음성이라 여기고….” “아아….” “미리 전하는 크리스마스 선물 입니다, 아름다운 나의 파랑새.” “!” 오! 테레사! 흥분한 혜성은 실수로 테오제네스를 덥썩 껴안았다. 또, 고마워요! 라는 말을 그의 가슴에 전했다. 테오제네스는 당황해서 아까 전 흡족해 하며 팔 장을 낀 상태에서 완전히 굳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는 아이는 히죽히죽 웃으며 잘 가라는 인사만 날름 전하더니 방에 들어가버렸다. 테오제네스의 팔 장 낀 자세가 전혀 풀리지 않았음을 모르는 채, 기쁨을 펼쳐보기 위하여. “편지… 편지… …!” 편지봉투를 뜯는 손이 말할 수 없이 떨린다. 섬세한 그의 감각이 속속 불어와서 가슴은 뜨거웠다. 혜성은 곧 감격에 겨워하는 눈동자로 그의 정성 가득한 필체를 읽었다. 비록 글자는 많이 삐뚤삐뚤했지만 혜성은 행복했다. 장님인 그가 최선을 다해 적었을 모습이 그려져서 몇 번이나 뭉클해졌다. 지독한 겨울의 기다림 속에, 그는 빛이 되어 행복을 일깨워 주셨다. < 바람 소리는 바람이 내는 게 아니라 세상을 스칠 때 나는 소리라고 한다. 너의 세상은 노력을 아끼지 말고 바람을 스쳐라. > 보고 싶어요. 아이는 편지에 뺨을 부볐다. 그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 같아서 달아오른 가슴은 쓰러짐을 반복했다. 그리워서 목이 말랐다. 그의 체온이 휘감기는 환상에 도취되어서 움직일 수 없었다. 오, 테레사. 테레사. 그가 보낸 선물은 다름 아닌 악보였다. 두둑한 것이 책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세상 단 하나뿐인 그 책의 제목은 ‘신혜성 에튜드’라고 적혀 있다. 그렇다. 작은 수페리우스를 위해 그간 작곡했던 테레사의 연습곡이 모아져서, 그의 불멸의 흔적이 생생히 살아있는! 오 하느님! 혜성은 편지와 함께 그 악보를 꽉 끌어안았다.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는 것처럼 나른한 쾌락이 들뜨게 만들었다. 천재의 악보가 내 손에! 그에 앞서 나를 위한 그의 배려가 이토록이나! 신혜성 에튜드를! 천재의 솜씨는 여전했다. 아니, 직접 눈으로 확인하자니 혜성은 짧은 편지 구절로 사실은 약간 실망했던 마음이 몽땅 사라졌다. 백 장의 편지가 있다 한 들, 그의 악보만큼은 되지 않는다. 그가 속삭이고 있어. 때로는 화를 내는걸. 천 마디로도 부족한 이야기를 음악으로 대신하려는 거야! 여기서는 웃고 있어. 나에게 웃음을 주는 그가 느껴져, 이 악장를 만들었을 그가 보여. 어떤 악장에서는 스켈과 분산 화음의 철저한 반복으로 질리게도 하지만 그것은 혜성이 좋아하는 속도와 전율을 담고 있었다. 그의 놀라운 바리에이션은 제각각 다른 효과를 악보에 그렸다! 환상적인 곡들을 확인하며 혜성은 깨달았다. 격조 높은 음률은 제 아무리 난해하다 한 들, 혜성에게 어울리고 또 아이가 좋아하는 취향이며 배워야 할 부분을 세심하게 메꿨음을 말이다. 그의 사랑의 표현은 진솔했다. 일백 퍼센트 느낄 수 있는 둘 만의 공감대는 서로에게 향해 있었다. 만약 이 연습곡을 다른 사람이 선물 받는다 한 들, 그자가 수페리우스만큼 해석하고 감격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가장 기뻐할 수 있는 선물은 두 사람만이 알 것이다. 이렇게 화려하면서도 슬프도록 행복하게! 문득, 혜성은 눈을 흐리며 골몰했다. 자신이 오페라와 작곡을 선택하려는 이유 중의 커다란 부분은 테레사가 차지하고 있음이 떠올라서였다. 자신의 곡을 감히 드리려고 했던 게 생각나자 양 뺨이 달아올랐다. 그는… 그는, 반대로 생각했구나. 자기의 곡을 비롯해서 더 많은 연주를 꾸준히 하라는 걸까. 아니면 이걸 토대로 나아가 스스로 작곡을 해 보라는 걸까. 모르겠어. 하지만 행복하게 해. 아이는 오랜만의 열정을 쥐고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당장 의자에 앉고 흥분되는 악보를 펼쳤지만 그 어느 것도 쉬이 건반에 누를 수 없었다. “…….” 몇 번이나 연주를 시도하려다가 아이는 팔을 허공에서 내렸다. 울컥 치솟는 마음 때문에 팔을 올리고, 다시 내린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와 가장 잘 어울리는 곳에서 당신의 선물을 받겠습니다. 나의 아마데우스여……. 다음날이 되자 동완이 폭팔했다. “계속 이렇게 지내면 어떡해! 교수님께 항의라도 해 봐! 사실 네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너는 수페리우스잖아?” “…….” “계속 기다리기만 할 거니?” “…….” 동완은 골백번도 더 했음직한 얘기를 하며 방방 뛰었다. 그리고 수페리우스는 매우 익숙하다는 듯 편안하게 술병 마개를 딴다. “야! 신혜성!” “…….” “테레사한테 선물 받은 거 있잖아! 그거 연주 안 들려 줄 거야? 뭐라도 해야지!” “…….” “말이나 되냐? 미사 후에 이자벨이 한 대! 그걸! 어떻게 그걸!” “…….” 결국 동완이는 뒤따라온 선호 선배에게 끌려 나갔다. 요즘의 혜성은 묘한 상태였다. 테레사의 에튜드 덕분에 기분이 좋기도 했지만, 마냥 좋아할 수 없는 속절없는 기다림에 이력이 났기 때문이다. 기다림은 밤마다 마시는 술의 양을 늘린다. 아이는 흥얼거리면서도 마음 한 쪽 무거움을 쥐고 푹 한 숨을 내쉬었다. 달밤이 깊어지자 며칠 뒤 화려한 전야제가 열린다는게 기가 막혔다. 동완이 화를 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번 해의 가시의 북(*가시의 북 : 성탄 미사 후, 전야제를 알리는 북의 명칭. 테레사가 북을 울리는 것으로 전야제는 시작. 테레사 외전 참고)은 학생회장으로 뽑힌 이자벨 장이 울릴 거라는 소식에 가슴이 미어졌다. 원래대로라면 수페리우스가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하거늘, 교수들은 만장일치로, 또 학생회 역시 만장일치로 이자벨에게 가시의 북 자리를 주었다. 혜성은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에게 배달된 악보만 꾸준히 떠올리려 노력했지만 종종 파고드는 가시의 북에 대한 미련이 아이를 괴롭혔다. 새벽 한 시가 지날 무렵, 혜성은 두 병의 술을 비운 것도 모자라 한 병을 더 꺼내는 중이었다. 그 때 한 학생이 부리나케 방으로 찾아왔다. “선배님!” “?” 수페리우스는 온화하게 웃어주며 창틀에 기댔다. 술병을 찰랑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학생회에 몸을 담고 있는 3학년 저 학생을 혜성은 알고 있었다. 서 쪽 기숙사동에서 유일하게 학생회에 소속된 저 아이는 일전에 기숙사 회의에서도 봤고, 무엇보다 수페리우스를 동경하는 인물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선배! 결정 났어요!” “!” 쾅-! 결정 이라는 단어가 들리자 내면은 폭풍우를 일으켰다. 그토록 갈망하던! 설마 그토록 기다리던? 마개가 열리지 않은 술병을 놓칠 번 한 혜성은 곧 평정을 되찾았다. 너무 긴 시간의 기다림이라서 그런지 정작 실제를 마주하자 예상과는 달리 평화롭기만 했다. 결정. 바오르 신부님의 결정은 일주일이 아닌 한 달이 지난 지금에서야 교수들과 학생회에 통보된 모양이다. 혜성을 좋아하는 저 후배가 내일보다 빠르게 전해주려는지 득달같이 달려온 게 분명했다. 어쨌든 신입생은 문을 박차고 들어오더니 술에 취한 혜성을 붙들고 고래고래 악을 썼다. 혜성은 희미하게 웃으며 그 아이의 볼을 부드럽게 감싸 주듯이 웃었다. 그것은 참 이상한 미소였지만 혜성이 아니면 지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신입생은 혜성의 늘씬한 팔목을 붙들더니 꽥 하고 소리쳤다. “하… 한 달 이래요. 한 달… 육 개월이 아니라, 단 일 개월 동안 선배가 여기서 곧 교수들이 예고할 시험을 치르고, 바로 5월 유럽의 콩 쿨로… 소문에 따르면, 그 때의 콩 쿨을 테레사가 한국으로 돌릴 수도 있다지만. 대회의 격은 변하지 않겠지요.” “!” 뭐라고? 역한 신음이 창밖으로 빠져나간다. 어금니를 깨물자 후배의 눈물이 시선에 잡혔다. 그래서 다시 평온해진다. “어떡해요. 선배… 선배는 이제 어떡해요.” 발을 동동 구르는 후배가 많이 귀여웠는지 혜성이 히죽히죽 웃으며 긴 술병의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는 웃음처럼 희미하게 속삭였는데, 아이는 위태로운 혜성의 대답이며 행동에 자신이 가져온 소식보다 더한 충격을 받았는지 잠시 휘청이기까지 했다. “…괜찮아.” “예에?” 잡힌 손목을 신경질적으로 뿌리치며 혜성은 등을 돌리더니 슬그머니 창가 앞에 섰다. 달이 기울고 있다. “어쩐지 이렇게 될 것 같았거든. 나는 시련 이라는 거대한 바위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선…배?” 손으로 꾹 꾹 누르는 혜성의 행동에 저 달이 아파한다. 그러지 말아요 선배… 신입생의 눈물에 공허한 웃음으로 대답하는 혜성의 목소리는 많이 갈라져 있었다. 늘 선전포고에 익숙해져서 이번 경우는 힘들었지. 뒤늦은 선언에 나는 이제야 편안해지고 있다. “살아 움직이는 그 바위에 창을 던지면 된다. 창이 부서지면, 온 몸으로 주먹으로, 영혼에 힘을 실어 부서뜨릴 거다. 그리고… 가루가 되어 백골처럼 나부끼고 비명을 지르는 모양을 보겠지.” “서…선배.” “그게 아니면, 완전한 실패라던가.” “선배!” 이윽고 혜성의 눈동자가 달을 물리치는 새벽의 태양처럼 빛이 날 때였을까. “…내 인생에 중간은 없었거든.” 그는 여지없이 휘청거리며 키들키들 웃고 묘연한 대답을 흘렸다. “이자벨이 나선 거예요. 틀림없어요. 모세의 움직임이 수상하다고 여겼었는데…….” “어서 가서 자라.” “선배에…….” “달이 사라지기 전에… 달이 너를 보호해 주지 않겠노라 도망가기 전에… 하프의 선율에 반해서 깨어날 수 있도록….” “선배….” 세 번째 술병이 모두 비었다. 신입생은 울면서 돌아갔다. 그리고, 혜성은 오랜만에 편한 잠자리에 들었고, 한 달 만에 하프의 선율로 감동할 수 있었다. 날이 밝자 혜성은 예식 복 중 가장 깨끗한 것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로제리오를 찾았다. 집무실에서 그를 기다렸으며, 오전 열시나 되서야 도착한 그에게 정중한 예를 갖추었다. 한 달 만에 제대로 보는 두 사람이었다. ‘죄’를 인정한 자는 마지막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리며 당당한 ‘오늘’을 맞이한 것이다! 제일 친한 동완이조차 화를 내며 혜성을 부축 여도 소용없었던 ‘오늘’을! “그래… 대다수의 교수들은 너의 잘못을 약점 삼아서 징계 대신에 다른 값으로 이용하려는 거지…….” “…….” 몇 번의 대화 끝에 로제리오는 그로서도 고통이었던 한 달을 회고하는 입술을 열었다. 그는 적어도 아마데우스에 있어 평등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상업적이기도 했다. 때문에 그의 주변에는 상업적인 정도가 지나친 류가 많았다. 로제리오는 어쩔 수 없었다. 바오르 신부님까지 찬성한 마당에 결정을 뒤바꿀 이유를 찾지 못했다. 힘들지만, 최선임을 어쩌란 소린가. 편안하게 차를 들이키는 혜성과는 달리 로제리오는 미안한 기색으로 딴 곳만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아는 테레사라면… 그는 그 때 즈음, 보스턴을 이미 일으키고도 남은 영향력을 세간에 발휘해서 콩 쿨 장소를 한국으로 돌릴 거다.” “…….” “내년 5월의 콩 쿨 장소는 유럽이 될 지, 아니면 한국일지 확실치 않지만… 우리들에게 확실한 결정은 이거지.” “…….” “그 콩 쿨에서 수페리우스, 너는 3위 안에 들어야 해.” “!” 자스민 차를 들이키던 몸이 멈췄다. 막 마시던 것은 입 안에서 넘어가지 않는다. 혜성은 그야말로 얼어붙어서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교수들의 조건은 아직 데뷰를 못 한 혜성에겐 치명적인 것 이었다! 그러나 아주 싫지만은 않은 감정이다. 그 증거로 동요해서 뛰는 심장은 전혀 절망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등의 날개가 당장 창공에서 펄럭일 것처럼 간지러웠다. 희미하게 떨리는 입술을 열면서도 혜성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만약 그게 안 된 다면요?” 독 같은 어절과 위장된 평온도 잃지 않았다. 긴장감에 허덕이는 몫은 로제리오 뿐이다. 그는 마치 학생재판 때로 돌아간 것처럼 많이 당황해 있었다. 혜성의 예리한 질문에 찔끔한 로제리오는 좀 더 부드러운 투로 말을 돌리기 시작했다. “실력의 한계 일 테니, 지금처럼 3학년 때 주로 다뤘던 피아노를 세부적으로 배우는 거지. 작곡보다는 테크닉과 감성을 말이야. 오페라 보다는 독주자로서 무대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을…….” “하하하하! 저를 제 2의 테레사로 만들고 싶습니까? 말을 돌리는 게 오히려 직격탄이군요?” “!” 교수의 언어를 가로막은 수페리우스는 두려움을 상실한 태풍처럼 거칠고 단호했다. 그리고 미친 사람처럼 즐거워한다. 아이는 교수가 쉬이 대답을 않자 컵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과’를 통보받은 이상, 속절없는 기다림에 지치지 않아도 된다. 진짜 절망은 無의 기다림, 그것이지 험난한 시험이 결코 아님을 왜 당신은 모르는가! 혜성은 속으로 혀를 차며 무감동한 음성을 꺼냈다. “우선은 인원이 가장 많이 몰린 피아노과에 저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5개월 뒤에 다른 이들이 기초를 뗄 무렵… 저는 그 때 제가 하고 싶은 전공을 시작해도 상관없으니까요.” “…과연 그럴까. 뒤쳐진 상태에서 따라잡고 그들과 똑같이 시험 보는 건 노동보다 힘들어.” “아니요.” 수페리우스는 딱 잘라 말했다. “그게 더 쉽습니다. 평생 후회하느니, 약간 늦게라도 하고 싶은 것을 시작 할 테니까요.” “…….” “기억해 보십 시오 교수님.” “뭘…?” 나조차도 이젠 잊을까봐 두려운 단어가 있습니다. 나는 빈손입니다. 빈손은 두려워하기보다 앞으로 채울 것이 많다는 걸 알아야 해요. 나는 이 점을 언젠가 당신처럼 잊어버릴까봐, 그것이 더 두렵습니다. “수페리우스는, 그 명예를 버리고 가장 늦게 입학시험을 치렀습니다. 잊으셨습니까.” “!” 아이의 등은 붉은 눈매 못지않게 열정으로 타올랐음을 로제리오는 몰랐다. 그러나 예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경악한다. 그랬었다. 수페리우스는 그랬었다! 뒤늦게야 로제리오가 안쓰러운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네려던 때, 아이는 일절 아쉬움 없이 싸늘하게 나가려 한다. “잘 못 건드리셨습니다.” “뭐…….” 당신은 내 가슴이 뛰는 이유와, 하늘을 휘젓는 영혼을 알면서도 때로는 모릅니다.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두려워만 했다면 저는 처음부터 아마데우스에 없었습니다.” “수페리우스!” 더 이상 모르는 척 마세요! 마음은 애원했다. 강인한 외형을 무기삼아 원 없이 질렀다. “저는! 위기에 강한 사람입니다.” “수페리우스!” 집무실 밖으로 뛰쳐나가니 함박눈이 아이를 반겼다. 멀뚱하게 서서 고스란히 눈을 쳐다보자 붉은 눈매 위로 물이 고였다. 어금니를 꽉 깨물며 혜성은 스스로를 다독였고, 주먹을 불끈 쥐었듯이 강해진 마음은 방금 전 못다 한 문장을 읊었다. 결국은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서둘러 닦으며 높은 허공을 향해 지린 기다림과 인내를 떨쳤다. “나는 잘 하고 있어… 괜찮아… 괜찮아… 이건 로린느 공주의 눈물이 아니야… 그녀는 죽었는걸. ‘그냥’ 눈물이 나오는 거야… 괜찮아서, 괜찮아서 그래….” 훌륭한 교수님들, 수페리우스는 그리고 보스턴에 계시는 테레사를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왜 아직도 모르십니까. 저는 그런 사람입니다. 아마데우스 학생들은 수페리우스를 어려워하기 시작했다. 우상을 바라보는 듯한 어려움이 아닌, 그들 역시 기다림에 지쳐 싸늘해진 감정을 어쩌지 못 해 어려워하는 그것이었다. 그가 뭔가를 해 낼 거다! 예전처럼! 이런 식으로 기다리던 군중은 아무 소식이 없는 수페리우스를 퇴폐한 자로 다시 보게 된 것을. 혜성은 학생들이 자신을 향한 시각이 어떤 형식으로 변해 가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전공과목을 5월로 미루고 당장 피아노과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수업과 간단한 레슨만 듣는 혜성을, 오래 전 낙오자를 보듯 그리 본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나 시선의 변화는 학생회가 자리 잡을수록 더 해 졌다. 상관없었다. 아이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그들 못지않게 성탄 전야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딱히 해가 되지 않는 안쓰러운 시선들 때문에 슬퍼할 여력이 혜성에게는 없었다. 그것은 낭비였다. 공포는 시간을 낭비시킨다. 혜성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릴없는 기다림 덕분에 겪었던 공포는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을 소비했기 때문이다. 동완과 선호, 하물며 테오제네스와 울컥 하기 좋아하는 프란체스코마저 혜성을 포기했다. 정확히는 수페리우스를 걱정하고 다독이는 것을 관두었다. 그 점도 혜성은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걱정하는 것이 더 안쓰러워서 차라리 잘 되었다는 식이었다. 나는 자유롭지 않은 현재에 오히려 자유롭다. 야릇한 발상 때문인지 이제는 술을 마실 때도 마음이 가벼웠다. 그러나 육중한 현실은 혜성의 감성을 괴롭힐 때도 있었다. 혼자일 때면 귓가에 달려들어 악마처럼 달콤하게 속삭이는 것이다. 너는 현재 너와 공감지대라 자부하는 자가 단 한 사람도 없어. 그래도 자유롭니? 악마는 늘 아이를 유혹했다. “…….” 성탄 전야의 오전에도 어김없이 문 앞에 ‘안 그럴게요’라는 메시지를 붙인 흔적을 떼어내며 혜성은 ‘공감’이라는 단어와 친밀해졌다. 공감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오늘 같은 날에는 혼자이고 싶지 않았기에 아이는 자신과의 공감이 누구인지 골몰했다. 저녁은 다른 날보다 일찍 왔다. 아마데우스의 아름다운 학생들은 성당으로 빠져나간 터라 학교는 잠시 텅 비었다. 혜성은 그 때 까지도 방에 틀어박혀 ‘공감’에 대해 추궁하는 중이었다. 미카엘 성가대의 성가가 들려온다는 환각에 나른해질 때 즈음 뭔가가 번쩍 생각났다. 그리고 희미하게 웃으며 누가 보면 물음표를 달 만한 짓을 저질렀다. 로미오가 붙인 종이를 떼어낸 자리에 바로 혜성이 직접 짧은 내용을 적어서 붙인 것이다. ‘내 방 안 쪽 창문으로 와라. 오리.’ 성탄 전야라서 그런 걸까. 여기저기서 기쁨에 찬 소리를 질러서일까. 산뜻해진 마음은 로미오를 용서했다. 간결하게 적은 필체를 문 앞에 써 붙인 뒤, 혜성은 기숙사동 뜨락을 걸었다. 그리고 자신의 방 창문 앞에 쭈그려 앉아서 쌓인 눈을 조심스레 치웠다. 조금 지나자 차가운 흙이 만져졌고, 동시에 방 안 쪽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메시지를 본 모양이군. 혜성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로미오가 불쑥 창밖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 “…….” 두 사람은 오래도록 시선을 교차했다. 서로를 미스터리 하다고 여기면서도 어쩔 수 없이 성탄 전야의 성스러움을 이런 식으로 나눴다. 너도 외로웠니. 혜성은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공감 이라는 단어는 이상한 쪽에서도 결부시킬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지금 아마데우스 안에서 가장 편한 사람은 누구일까를 고심한 뒤의 결론이 의외로 로미오였기 때문이다. 그 사람역시 자기만의 고민과 세상을 버거워 한다는 것을 일전에 확인하질 않았던가. “…….” “…….” 로미오의 서글서글한 눈매는 아주 총명해 보였다. 혜성이 용서해 준 것을 기뻐하고 있음이 표정에 써있었다. 그리고, 그도 자기만의 고독에 외로워하는 중임을 알았다. “뭐 해요?” 로미오가 참을성 없는 입술을 열자 혜성은 대답했다. “오리 기다렸다.” 졸지에 오리가 된 로미오는 헛기침을 하더니 기숙사 창틀에 좀 더 여유로운 자세로 기대왔다. 기숙사 밖 창문 바로 밑에는 얕은 화단이 있었는데, 혜성은 그 위에 쌓인 눈을 모조리 치운 상태였다. 두 사람은 하릴없이 대화를 나눴다. 밥은 먹었느냐, 저녁이라서 조금 춥다 따위의 평범한 것이었지만, 혜성에게는 이런 가벼움이 간절한 상황이었다. 잘 모르겠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로미오도 그래 보였다. 아무도 없는 가운데 넓은 아마데우스는 두 사람의 숨소리만 고요히 퍼져 나갔다. “어디… 가는 건가요?” 혜성의 옆에 가지런히 대기 중인 얇은 가방을 가리키며 로미오가 물었다. 테레사가 선물해 준 에튜드가 가방 속의 주인이었지만 혜성은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이 악보를 위해 오늘을 기다렸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크리스마스의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바람은 춥지 않은 대신에 평화를 강조했다. “…그래. 오늘 같은 날, 나한테 어울리는 곳으로. 할 게 있거든.” “…….” “흠…….” “……?” “따라오지 마라. 혼자 다녀오겠다고 로제리오 교수님께 일전에 말했으니까.” “안 따라가!” “…….”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대답에 당황한 로미오는 급히 정정했다. “안 따라가겠습니다.” “…….” “어디 가는데요?” “룸펜.” “후라이펜?” “썰렁하기는. …독일어지. 룸펜은 방랑자라는 뜻이거든.” “독일이라니. 난 절대 못 따라가요. 아마 독일까지 따라갔다가는 스물 네 시간 벌이 나를 기다릴 테니….” 그는 치를 떨면서도 신이 나서 씨 익 웃었다. 혜성은 그러냐며 옅게 마주 웃었다. 아이는 아까 전부터 뭔가를 자랑하려는 듯 준비했던 것을 번쩍 올렸다. 약간 다리가 저려올 무렵이었다. 조금 있으면 미사가 끝나고, 이자벨이 울리는 가시의 북과 함께 환호성이 터질 테지. “이것 봐라, 미오야. 흙 꽃이다. 예쁘지?” “…….” 이 겨울에 용케도 살아남은 것을 높이 쳐들며 혜성은 동공을 빛냈다. 신기한 것을 찾아내고 자랑하려는 어린 아이 같아서 로미오는 웃을 수도 대답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서글픈 감정이 서로에게 얽혀졌으나 그 정체를 알 수 없어서 마냥 미소 짓기만 했다. “예쁘다고 말 하고 싶어 한다는 거 다 안다.” “…….” “이게 왜 흙 꽃이냐면, 나는 이름을 모르거든.” “…….” “너는 아니?” “…….” “대답 안 하는 것 보니까 모르는구나?” “!” 장난으로 비아냥대는 혜성에게 발끈한 로미오의 뺨이 홍당무가 됐다. 로미오의 변화에 속으로 쾌거를 외치면서도 혜성은 아닌 척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너 거기 있으니까 마치 줄리엣 같다.” “!” “로미오?” 아이가 의아해 할 새도 없이 로미오는 울컥한 내면을 참지 못하고 당장 창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무방비 상태에서 흙 꽃을 쥐고 있는 혜성을 덥석 끌어안는 게 아닌가! 이게 왜 이러는 건가! 당황한 혜성이 뭐라고 하려던 찰나, 이번에는 작은 몸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이럴 수가. “으아아아아악!” 혜성의 열린 창 문 안에 농구공처럼 던져 버렸다. 우당탕- 요란한 소리가 혜성의 방 안에서 크게 들려왔다. 그 순간마저도 흙 꽃을 쥐고 있던 터라 얼결에 그것을 쥔 채로 창가에 달려온 수페리우스는 고래 성을 질렀다. 눈앞에 별이 뱅글뱅글 돌았다. “건방지게 선배한테 무슨 짓이냐! 집어 던지다니!” “…….” 말을 하면서도 어지럽고 부딪힌 곳이 아팠는지 오만 인상을 쓰며 혜성이 방방 뛰었다. 로미오 역시 아차 싶었는지 창백해져 있었다. 화해하자마자 다시 이 지경이라니! “로미오!” 하지만 건방진 후배는 용감했다. 그는 다른 것은 몰라도 사소한 일면에는 당당하게 굴었다. 수페리우스가 더 심한 말을 꺼내려 하자, 로미오는 더 크게 윽박질렀기 때문이다. “…갑자기 안고 싶고! 줄리엣 위치로 옮겨 놓고 싶고! 화는 나고! …어떡 하라구요!” “…뭐어?” 둘은 동시에 조용해졌다. 어느 샌가 함박눈이 차곡차곡 세상을 덮고 있었다. 혜성은 이 순간 어떤 말을 해 줘야 무사히 사태를 넘어갈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로미오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누가…….” “?” 건방진 후배는 또 지긋지긋한 메시지로 빌기를 해야 하는 기로에서 더더욱 당당하게 소리쳤다. 창문이 깨어지도록 쩌렁쩌렁하게 속의 것을 꺼낸다. “누…가 그렇게 귀여우래요?!” “그…그러니? 미안하다. …이럴 줄 알았니? 왜 화를 내!” 혜성이 집어 던진 흙 꽃이 창 밖에 마주 서 있던 로미오의 이마에 맞았다. 땅에 떨어진 흙 꽃을 줍고 주머니에 구겨 넣으며 로미오는 초조한 듯 물어왔다. “…또 화났어요?” “…….” “화났어요?” 이번에는 세상 종말이라도 날 것처럼 인상을 구기며 다시 묻는다. 혜성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화는 니가 냈잖아.” “…저는 1초 화냈어요.” 뭔 초? 고개를 젓다가 그만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하하!” “!” “하하하… 왜?” “오랜만에 봅니다.” “뭘?” “선배 웃는 거요.” “아…!” “…….” 찌르는 듯 섬세한 눈초리, 궁금함을 자아내게 하는 로미오가 진지해졌다. 그의 어깨와 머리 위로 근사하게 눈이 쌓여간다. 혜성은 밖에 있는 자신의 가방을 달라고 일렀고, 로미오는 그것마저 집어 던지는 대형 실수를 저질렀다. 두 사람은 곧 티격태격 하다가 멍하니 함박눈을 쳐다봤다. 상체를 바짝 내민 상태에서 턱을 올리자 로미오도 혜성을 따라서 턱을 올렸다. 두 사람의 안면에 소복소복 떨어지는 하얀 눈과 까만 밤, 주변의 우거진 나뭇가지들, 그리고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달빛이 반사되었다. 저토록 하얀 눈과 바람은, 올 해도 여지없이 아마데우스에 꽃이 되었어……. 자연이 주는 감동에 젖어 혜성은 작게 속삭였다. “메리 크리스마스, 로미오워싱턴조던 반항아 핏덩어리 미스터리 오리.” “…….” “왜?” 하늘을 쳐다본 채로 대답 없는 로미오를 묻자, 그는 웃는 건지 아닌지 모를 어절로 답을 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줄리엣 러시아인형 수페리우스 이상한 닭. …별일이네요. 나는 선배가 더 미스터리한데. … 조심해서 독일인지 후라이펜인지 잘 다녀오십시오.” 멀리서 가시의 북이 울렸다. 두 사람의 귓가에도 은은하게 스쳤다. 긴 침묵으로 밤하늘을 보는 현재, 전야제의 모든 것은 가시의 북 소리가 지날 때마다 똑같이 흔들리는 듯싶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테레사… 나를 정복하게 될 아름다운 사람…. 메리 크리스마스… 민우야… 나를 지켜주고 가슴의 별이 된 사람…….” 펑- 타드드드드드. 아이의 마지막 중얼거림은 화려하게 시작된 불꽃놀이 소리에 묻혀간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오랜 시간 침묵해 온 광기의 겨울이 코앞까지 달려와 있음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wgreene@naver.com 정혁을 기다리신 분들께. ...저도 오늘 순서에 정혁이가 나올 줄 알았습니다;(쿠다당) 여기까지 적는데 녹초가 되어서 뒷내용 요약 보면서도 도저히..도저히 적을수ㅏㄱ 버시ㅏㄶ.ㅠㅠ 근데 다음 편에서는 정말로 나와요. 순서를 보면. 그래야 광기의 겨울도..^^ 또.. 댓글은 감사하지만 간혹 테레사를 나타나게 하라는 식의 요청은 받아 들일 수 없습니다. gipbob님. 저는 정해진 내용들을 여러분께 펼쳐놓는 것이니까요.:) 사실 이렇게 말씀드리는 제 마음은 씁쓸하네요. 참. 2월인가 1월에 2악장 예고했던 부분들이 요즘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도요..(이런걸로 뿌듯해한다;) 린님, 안젤리스님, 리에뜨님, 셂님, 포근구름님, gipbob님, 아기해달님, 그리고 여러분 고맙습니다. 멋진 주말 되세요. 항상 행복하시기를... -화이트그린- 덧글 23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46편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46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아마데우스 예고편 ▼ 다음글 - 2악장 45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아마데우스 예고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9/18 16:40 http://blog.naver.com/wgreene/110008859451 음악 : Ever Dream/Nightwish Ever Dream-Nightwish "이 악보는 그야말로 천지개벽 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걸요." . . . "나의 아름다운 뮤즈여.... 변하지 말기를... 너만은 내가 반한 영혼 그대로이기를... 러시아 인형이 되어 가벼운 손놀림으로 지치지 않는 불꽃을 보여주기를... 미워하면서도 원망하면서도 결국은 나약한 기도를 한다..." . . . ".....추워." "안아줘요? 안아줄까요? 꼭 껴안아 줄게요!" "....잘 자라." "!" . . . "우리가 미치광이라고? 여왕이신 이자벨의 우아한 선언을 반아마데우스는 공격으로 받아 치리다." . . . "동~네 사람들~!" "서...선배?!" "여기 이 녀석도 같이 데려가세요~~!" "뭐, 뭐 하는 거야!" "아주 지겨워 죽겠습니다~ 지난번에 흐이 데려가셨듯이, 이번에는 이 비밀쟁이놈도 가져가~소서~" "비...! 야! 미쳤냐! 돌았냐!" "하하하하!" "하...." "....괴롭지. 로미오." "....지금 당장은 민망하고 환장하겠습니다." "계속 울어라." "?" "...동네 사람들이 넌 재미 없다고 안 데려간댄다. 넌 탈락이다." "!" . . . "너는 절대 대표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인정하는 자와 타협하겠다." . . . "반 아마데우스의 우두머리는 바로...." 75편 완결 예정인 아마데우스 극히 일부분 중에서도 약간의 대사 한두줄 예고편 입니다. 앞으로 완결날때까지 예고편은 없을 것입니다. 내용 관련 질문 또한 받지 않습니다. 편수는 예정보다 줄어들수도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즐거운 나날 되시기를 바랍니다. -wgreene- 덧글 13개 엮인글 쓰기 /data20/2006/9/18/293/fsf_1-wgreene.jpg@nhn@63805@nhn@1@nhn@548@nhn@686 화이트그린의 LEEHA 아마데우스 예고편 /data20/2006/9/18/293/fsf_1-wgreene.jpg@nhn@63805@nhn@1@nhn@548@nhn@686 화이트그린의 LEEHA 아마데우스 예고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47~48편 ▼ 다음글 - 2악장 46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47~48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9/22 19:43 http://blog.naver.com/wgreene/110008993471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922 47~48편 업데) Amadeus 음악 : Forever Tango (Luis Bravo) - Libertango (아래플레이클릭) Libertango - A. Piazzo.. 미친 클래식 2악장 47~48편 로미오와 헤어진 직후, 수페리우스는 조용히 학교를 빠져나가려 했지만 의도와는 달리 몇 번이나 멈춰 섰다. 그의 몸이 작다 한 들 가지처럼 엉켜서 들떠있는 학생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였다. 다른 날도 아닌 성탄 전야제가 아닌가! 가시의 북이 천지를 뒤 흔들고 별꽃이 하늘에서 반짝인다. 학생들은 노란 머릿결의 아름다운 수페리우스를 지나치는 족족 붙잡았다. 메리 크리스마스! 젊은 학생들은 마음껏 즐거워하며 인사를 건넸다. “왜 그러니, 수페리우스? 우리들 옷에 뭐가 묻었어?” “아니, 아니다.” 아마데우스 예식복은 여인의 살결보다 보드라운 빛깔을 지녀서 혜성은 저들과 같은 것을 착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홀린 듯이 쳐다봤다. 순결한 수녀님들은 수페리우스를 보면 살짝 고개를 숙였으며 지나가는 족족 자연스럽게 길을 터 주었다. 그들 모두를 물리친 뒤, 장미 문을 통과 하기까지 그래서 한 시간이나 걸렸다. 이자벨 장이 학생회장이라는 것과 별개로 학생들은 수페리우스를 사랑하고 있었다. 아이는 고맙고도 서운하다는 이상한 감정이 밀려와서 그들에게 같은 소리를 질러 줬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호산나! 영원한 기쁨을! 성탄전야의 밤은 세상의 고락과 시름을 한 데 담아서 기쁨으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누가 봐도 축복의 증거였다. 탐스럽게 쏟아지는 함박눈은 천사들의 합창이 들리는 것 마냥 정겹고 애틋했다. 눈의 정경은 봐도봐도 아쉬웠다. 그러나 가슴을 찌르는 섬세한 전율은 비단 아마데우스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어딜 봐도 함박눈은 세상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혜성은 시내로 빠져나오는 즉시 재혁을 찾았다. 그렇게 정혁의 행선지를 캐물었고, 그가 대답해 주기 전 까지는 움직이지 않겠노라 선언했다. 왜 정혁이 생각났을까? 그냥 룸펜으로 직행하면 좋을 것을? 아니다. 그게 아니다. 아름다운 날이기 때문에 애처로운 인물이 시리도록 박혀오는 것을. 시베리아의 얼음연못처럼 아름다워서 오히려 슬픈 인물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데 어쩌라는 건가. 아이는 정혁이 집에 있다면 그와 함께 룸펜에 가고 싶을 뿐이었다. 그게 전부였을까? 세부적인 마음은 어떨까? 당신이 예상하는 것과 비슷하게 아이는 약간의 희망사항을 지닌 상태였다. 그렇다. 정혁이가 테레사의 에튀드를 감상하면 적어도 결심했던 것이 흔들리지 않을까? 아이는 성스러운 날을 빌미로 쭉 그것을 노렸다. 그가 동요하고 쉬이 꺾이기를 바란다. 뮤즈의 혼을 다시 불태우기를 바라기 때문에 미적지근한 기도가 아닌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뿐이다. 지금의 혜성은 정혁을 찾지 못하면 주저앉을 것처럼 간절한 내면을 감추느라 분주했다.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데… 뭐라고?” “정혁이가 집에 있지? 아니야? 그를 불러줘!” “…….” 재혁은 순간 혜성의 모든 것에 압도되어 숨을 참았다. 아이는 지난 날 기억했던 연약하고 볼품없는 소년의 탈을 벗었다. 노란 머리칼 때문일까? 그건 아니다. 약간의 키가 자라서 날렵해진 몸매 때문에? 그것도 아니다. 오래 전과 비슷하게 반짝이는 눈동자에 꺽이지 않는 무엇이 숨어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지 않는 자유로운 날개가 있어서? 그래, 그거였다! 어린 날 재혁이 보았던 테레사의 눈빛이 바로 그러했다! 재혁은 테레사에게서 느꼈던 전율을 지금, 수페리우스를 마주보며 느낀 것이다. 그 전율은 끔찍할 정도로 세포 결결이 파고들어왔다. 뮤즈의 탈을 쓴 신혜성이란 자는 아름다운 반면 지켜보기만 해도 가슴이 저려왔다. 그런 아이가 소리친다. “형! 어서!” 기억하고 있어. 전부가 아니더라도 내 영혼은 그가 들려줬던 열정을 누구보다 잘 기억하고 있어. 테레사와의 크리스마스 콩 쿨 때 정혁이가 승리했던 진정한 힘을! 막 문을 닫으려는 재혁을 다급히 붙잡으며 혜성은 아까와 비슷한 것을 외쳤다. 정혁이가 어디 있어? 형! 알려 줘! 더 늦기 전에 나는 그에게 희망을 들려주고 싶어! “정혁이가 어디 있는지 나는 몰라.” “형!” 수페리우스는 도라 질을 쳤다. 상아빛 머리카락에 쌓여있던 눈이 주변에 떨어졌다. 재혁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알아도 말 할 수 없다.” “…….” “돌아가라 혜성아. 너와 잘 어울리는 너의 궁전으로.” 약간 삐딱한 재혁의 문장에 기분 상하자니 시간이 촉박했다. 아이는 하는 수 없다는 듯 묘한 말만 남기고 그에게 굿바이 인사를 건넸다. “…나는 지금 룸펜에 갈 거야.” “…….” 정혁이에게 전해 줘. 나는 지금 룸펜에 갈 거야. 마음은 수 없이 재혁의 차가운 시선에 같은 것을 전했다. “그냥, 형한테 이 말을 하고 싶을 뿐이었어.” “…….” “메리 크리스마스!” “…….” “호산나~ 형은 웃는게 더 멋있어. 알지?” “…하…….” 재혁은 마지막까지 대답이 없다. 아이는 당장이라도 집 안에 쳐들어가려던 몸을 아쉬움 없이 돌렸다. 바람은 처음보다 거세어져 마지막 점이라는 게 없는데도, 아이는 당당하게 멀리로 사라져간다. 재혁은 자신과 떨어져서 벽에 기대있던 누군가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쳐다봤다. “룸…펜….” 시선의 주인공인 그림자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그 역시 수페리우스가 지난 흔적을 지켜보았다. 세상을 끌어안는 눈발이 거세지고 있다. 조금 있으면 대지가 숨을 쉴 수 없도록 부드러운 흙 속의 뼈마디를 으스러뜨릴 것처럼 위협적으로, 숨 쉬는 모든 것들에게 차가운 겨울의 입맞춤을. 새벽과 동시에 도착한 이태원의 전경은 1년이 지났다고 해서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룸펜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샤우트의 공격 덕분에 깨어졌던 유리는 반 정도 복구되어 있었다. 나머지 반은 일부러 뚫어 놓은 것처럼 밖의 쌀쌀함이 원 없이 교차하는 중이었다. 혜성은 룸펜의 건물과 마주하는 순간 발아래부터 당겨지는 저릿한 흥분에 오래도록 쳐다만 보았다. 히스의 음성이 연이어 스쳐 지났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다정한 훈풍이 귓가를 때렸다. 『십칠! 뭐라고?』 『너는 몸이 작아. 손도 작고 발도 작지. 그렇다고 스프 양이 작다고 남기는 건 용서할 수 없어.』 『자크는 왜 내 입맞춤에 안색이 창백해질까? 역시 나의 입맞춤의 솜씨는 천주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인 거지?』 『사랑해 수페리우스. 귀여운 다람쥐. 이대로 영영 사랑스러운 너를 내 품에 안아주고 싶어. 어젠 별로 아프지 않았지? 남자랑 할 때는 더 잘 한다고 그랬잖아. 내 테크닉이 워낙 좋아서… 오! 아파 수페리우스. 나를 때리지 마.』 『정하! 내 블라우스가 찢어졌어! 내 인생에 절망이 찾아왔어! 수페리우스! 너는 왜 이 중요한 순간에 웃는 거지? 내 블라우스가 죽었는데!』 히스의 파란 머리칼이 뇌리에 스쳤으며, 지난 날 울고 웃었던 흔적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는 잘 있을까? 혹시 룸펜에 있지는 않을까? 아련한 향수에의 감각이 눈시울을 자극할 때, 룸펜의 도어가 열렸다. 산타 복장을 하고 있는 정하가 아이를 보더니 놀라서 얼떨결에 한스를 불렀다. “룸펜!” “어… 한스?” 붉게 달아오른 한스가 취기에 뒤뚱이며 정하를 밀치고 달려 나왔다. 그는 곧 지린 감성에 도취되어 시선을 흐리던 혜성을 번쩍 안더니 빙글빙글 돌렸다. 덕분에 학교에서 겪었던 소외감과, 룸펜을 다시 봤을 때의 애절한 감각은 겨울요정의 마법처럼 사라졌다. 축복이 없어도 환희의 축복을! 음악이 없어도 열정의 음악을! 마법이 없어도 요정의 가루는 휘날린다. 룸펜은 그런 곳이다. “한스! 한스! 무서워!” 룸펜 안에서 맥주를 마시며 콧노래를 부르던 무리들 역시 수페리우스의 등장에 환성을 내질렀다. “어지러워 한스! 으아아아!” 룸펜! 그들의 룸펜이다! 뒷골목에서 솔베이지를 부르며 엉뚱한 짓을 일삼던 룸펜이다! 샤우트와 한 판 승부를 벌일 때 묘한 미끼로 작용했던 그 룸펜이다! 쇼팽의 혁명 이라는 놈을 묘한 연극과 함께 알려주던, 그렇게 최선을 다 해 스스로를 빛내던 룸펜이다! 감동이란, 누구에게나 평등한 몫이라고 떵떵이던 귀여운 자식이다! “이봐들, 룸펜 좀 봐라! 까까옷 입었네? 저~어기 트리에 걸테니 잘 봐! 노~란게 물이 잘 들었다!” “하하하하!” 마법이 없어도 요정의 가루는 휘날리며 축복과 음악을! “트리? 트릿! 한스! 한!쓰! 크리스마스트리에 진짜 걸면! 죽인다!” 룸펜은 그런 곳이다. 눈물이 나올 것처럼 극적으로 반겨주는 무리들 덕분에 혜성은 깔깔대며 웃었다. 실로 오랜만의 자유로운 감각이 전신에 미쳐서 아마데우스에서의 시간은 거짓처럼 사라져갔다. 혜성은 룸펜의 가장 따스한 곳에 내려져서 당장 코앞에 나타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들은 그제 서야 진짜 룸펜이다! 라며 껄껄 웃었다. 아이는 술을 그들 못지않게 잘 마셨으며 분위기가 닥치면 누구보다 엉망진창으로 잘 섞였었다. 그 때의 룸펜이 돌아온 것이다! 미친 클래식이다! 룸펜은 모처럼만에 열기로 들끓었다. 혜성은 흥이 가시기 전에 유리를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한스와 만나자마자 잠깐 떨어지는 게 아쉽긴 해도 이태원에 온 이상 그녀를 만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룸펜이 룸펜에 나타났다! 라는 소문은 이태원의 좁은 골목에 금세 메아리로 퍼져서 많은 이들을 모이게 했다. 그 중에는 유리도 섞여 있었다. 샤우트의 눈을 피해 왔음직한 유리는 벙어리장갑을 벗기도 전에 와락 혜성의 품에 안겼다. “선생님!” “유리! 몰라보게 예뻐졌구나! 숙녀가 되었어!” “메리 크리스마스… 벌써 취하셨군요.” “취하지 않았다. 너를 찾아가려고 했는데 어떻게 왔니.” 제자의 앞에서는 순식간에 어른이 된다. 묘한 감정이지만 사실이다. 테레사도 나를 보며 그럴까! 혜성은 여유롭게 웃으며 그녀의 정다운 입술이 떠드는 소리를 경청했다. “…샤우트 놈들 중에서도 몰래 룸펜 근처에 서성이는 녀석들이 있거든요. 그들이 숨을 헐떡이면서 알려 줬어요.” 유리의 작은 몸은 일 년 사이 여인의 향기를 지녔다. 혜성은 자신을 반가워하며 눈물을 흘리는 제자의 등을 토닥이며 휘파람을 부는 무리들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었다. 진짜 룸펜이다! 그들은 혜성이 제 멋대로 구는 행동들을 통해 전에 느꼈던 쾌감을 다시 찾는 모양이다. 한 시간 가량 왁자지껄 떠들었을 무렵, 느닷없이 레이몬드가 나타나더니 상하이 클럽 쪽에 작은 싸움이 일었다며 고래 성을 질렀다. 그는 곧 테이블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던 도중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혜성을 알아보고는 놀란 눈이 되어 달려왔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싸움이 먼저였다. 한스와 레이몬드는 곧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더니 아쉽게 룸펜을 나갔다. 뚫린 곳곳에서 억척스러울 정도로 야멸찬 바람이 실려 왔다. 사람들은 그러나 전혀 추워하지 않았다. 살을 에이는 고통은 오히려 그들의 열기를 부축이기만 했다. 유리와 단 둘이 되는 즉시 혜성은 조심스레 테레사의 에튀드 집을 꺼냈다. 하릴없이 미소 짓던 유리의 눈이 순간 차갑게 식었다. 그러나 그녀 혼자만이 눈치 챌 만한 것이라서 둘은 곧 방긋 마주 웃었다. “요즘에도 피아노를 치니?” “그럼요. 특기 전형에 목숨 걸고 있는 형편이긴 하지만…….” “너의 재능은 확실히 뛰어나지. 악보를 읽고 해석하는 면이 남들과 다르거든. 그래… 작곡을 하겠다고?” 다섯 번째 술잔을 한 번에 들이킨 뒤 혜성이 자상하게 묻자 유리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혜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누가 이렇다 할 가르침을 전수할 리 만무한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벌써부터 아마데우스 학생이 된 것처럼 굴었다. “네. 저를 곧 아마데우스에서 보실 수 있을 거예요.” “그래야지.” 작곡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자 혜성은 문득, 자신이 다락방에서 만들었던 악보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혹시 유리에게 있지 않을까? 없어도 큰 문제가 될 리는 없지만… 신임으로 빛나는 눈동자는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악보가 너에게 있지 않느냐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유리의 동공에 순간 당혹감이 스쳐 지났다. 그녀는 곧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그녀 역시 아쉽다는 듯 묘한 투로 대답했다. “악보요? 글쎄요… 저야 모르지요. 선생님이 안 주셨잖아요. 저에겐 당연히 악보가 없어요.” “그래….” “그나저나 이 악보는 그야말로 천지개벽 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걸요.” “…그래?” 잠시 후에 연주해야지… 라고 마음먹고 꺼냈던 에튀드를 순식간에 훑어봤던 유리는 경련을 일으키듯 목울대부터 떨고 있었다. 혜성은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경련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 신선한 감정 중에는 약간의 불쾌함과 머뭇거림이 섞여 있었다. 어째서? “왜 천지개벽일까.” “제 손이 떨리는 게 안 보이시나요. 저는 이런 악보를 단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어요, 선생님. 지하의 모차르트가 당장 뛰쳐나올 지도 모르겠어요.” “…….” 그녀는 혜성이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구성까지 지적하며 진심으로 경악했다. 양 뺨을 찰싹 찰싹 치면서도 유리의 시선은 테레사의 악보에 못이 박혀 있었다. 혜성은 취기에 흔들리는 척, 용케 그녀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이질적인 감정이 둘 사이에 어른거렸지만 애써 무시한다. “베~토벤이라. 아니지. 모차르트라고? 지하에 계실 모차르트를 위해 건배.” 악보에 적힌 열정으로 쾌락을 느끼던 유리는 곧 혜성의 수상쩍은 시선을 눈치 챘는지 아닌 척 편안한 표정을 그렸다. 그러나 입 꼬리를 올리면서도 그녀는 부르르 떨지 않던가. “물론, 그만큼의 실력과 감성으로 피아노를 치고 들어가는 자가 있다면 좋겠지만. 이 악보는… 에튀드로 머무를 수 없는…….” “유리…?” “아, 아니에요. 어디까지 말 했지요? 아, 악보. 선생님의 악보를 혹시라도 찾게 되면 편지 보내드릴게요.” 혜성이 뭐라고 말을 하려던 찰나, 그 어느 때 보다 용감해진 유리는 서둘러 화제를 원 점으로 돌렸다. 또 보란 듯이 에튀드 집을 덮어버렸다. “…그래. 부탁한다.” 그녀가 악보를 덮자 순간 안도한 혜성 역시 스스로가 예민하게 굴었음을 반성하며 소탈하게 웃었다. 그렇게 한결같은 대화를 나누며 뮤즈의 기쁨을 전했다. 삶의 소소함을 캐묻던 두 사람은 곧 유리의 사랑으로 화제를 옮겼다. 여인으로 성숙한 그녀는 세상이 허락 치 않는 상황을 사랑으로 극복하는 중이었다. “아버지는 그 때, 룸펜에 쳐들어 올 수밖에 없었어요.” “…….” “저를 지키려고 그랬던 거니까 누구도 돌을 던질 수는 없어요.” “…….” 샤우트의 딸은 눈망울을 빛내며 사랑을 호소했다. 혜성은 그녀의 이야기 전부가 궁금했지만 지금은 때가 좋지 않았다. “저는 아버지에게 딸이 아닌 사랑에의 한 여자일 뿐이니까요. 언젠가 이 감정을 악보로 표현하고 싶어요. 그 날 겪었던 흥분과 절망, 그리고 기쁨까지도…….” “…그 때 얘기는 그만 하자.” “혹시 듣기 거북하신가요?” 창백해지는 유리 못지않게 당황한 혜성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제 아무리 뮤즈의 탈을 썼다지만 혜성 역시 사랑하는 사람이 남자였다. 아마도 아마데우스 밖으로 벗어나면 훗날 질타의 대상이 될 테지. “그런 건 아니야. 다른 날 진지하게 듣고 싶거든.” “…그래요.” 아예 다른 화제로 돌리기 위해 혜성은 에튀드 집을 휘리릭 넘기며 가볍게 대꾸했다. “한스가 오면… 이 악보들을 연주 할 계획이지.” “…네.” 여자의 속은 참으로 알 수 없다. 유리는 더 이상 에튀드 집을 두고 아까 전처럼 들뜨지 않았다. 오히려 별 것 아닌 양 응수했기 때문에 머쓱해진 혜성은 잠깐 머리를 식히고 오겠다며 일어섰다. 갑자기 퍼 마신 술 때문에 머릿속에서는 전쟁이 났다. 펑! 펑! 대포가 터졌고 윤곽이 그려지기도 전에 성이 무너졌으며 힘없는 대지는 지진을 일으켰다. 이마를 쥔 채 비틀거리는 혜성을 조용히 지켜보며 유리는 읊조렸다. “악보들은 저에게 없어요. 아무것도…….” 여기저기서 룸펜! 하면서 다락방 계단 쪽을 향하는 수페리우스를 열렬히 환영했다. 혜성은 그 때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혜성의 등이 점점 사라질수록 읊조리는 유리의 입술은 느려졌다. 조그맣게 속삭이는 음성은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고, 스스로를 맴돌았다. “…머릿속에 있을 뿐이지요. 전부 외워버렸으니까….” 그녀는 혜성이 반쯤 마신 술잔을 한 번에 들이키더니 더더욱 작게 속삭였다. “기가 막힌 칸타빌레가 모두의 청각을 마비시키게 될 거예요. 반드시….” 뻥 뚫린 룸펜의 곳곳에서 적진의 불촉처럼 유리를 향해 함박눈이 날아왔다. 어두운 계단을 오르는 즉시 혜성의 입가에 소박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하늘을 찌르던 그리움은 한 순간에 폭포수가 되어 떨어졌다. 아이는 가슴을 부둥켜안은 채로 조심스레 다락방 문을 열었다. 매 순간 함께 해 주던 히스가 유난히 각인 되어서 그가 없는 오늘이 아쉬웠다. 작은 꽃들은 완전히 시들다 못 해 가루가 되어 마룻바닥에 휘날렸다. 유리창 없는 창살에 쌓인 눈덩어리들은 달빛에 반사되어 신비로웠다. 히스가 앉아서 늘 자신을 내려 봤던 정겨운 의자가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혜성은 제일 먼저 그것을 바로 세운 뒤 천천히 다락방을 돌아봤다. 순간 호흡이 멈췄다. 통쾌한 박자가 지금까지의 전율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으스대며 떠나갔다. 혜성은 가슴을 쥐어짜던 양 손으로 입을 막았다. 에튀드집이 바닥에 나뒹구는 순간 아이의 눈동자는 아까 전 악보를 보며 경련을 일으키던 유리 보다 심하게 일렁였다. “!” 은은한 달빛 저 쪽, 먼지가 뒤숭숭하게 쌓인 침대에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쉬리리릭- 바람이 창틀 안쪽으로 쳐들어온 들 움직이지 않는다. 에튀드집이 사납게 펄럭였다. 달빛이 뜨겁게 쪼여도 구석에 앉은 인영은 그림자로부터 쉬이 모습을 나타나지 않았다. 혜성은 전율에 인 팔을 내민 채 뜨겁게 달아오른 입술을 열었다. “정혁아….” “…….” 오, 하느님! 아이는 당장 그의 앞에 뛰어갔다. 세 걸음 남짓한 거리가 천 년이 가로막은 듯 멀었다. 정혁의 앞에 서자 그 역시 침대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오래오래 쳐다봤다. 달밤에 춤을 추듯 먼지들은 한없이 일어서 주변을 둘러쌌다. 그가 언제 온 걸까! 내가 한스와 레이몬드, 정하를 상대할 때? 아니면 유리와 진지한 얘기를 나누느라 주변을 살피지 못 했을 때? 그래. 그 때 찾아왔나 봐. 그런데 다락방은 어떻게 알았을까? 가장 조용한 곳을 찾은 걸까?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그래, 그는 그랬을 거야. 혜성의 예상은 바로 맞았다. 두 사람이 소소한 대화를 주고받을 때 정혁은 혜성이 유리와 대화할 때 다락방에 올라왔음을 고백했기 때문이다. 그는 뮤즈의 열정을 없앤 대신 타오르는 불꽃같은 사랑을 시선에 담아서 아이를 쳐다봤다. 아마데우스 이야기는 도저히 꺼낼 수 없었기에 두 사람의 화젯거리는 곧 떨어졌다. 테레사와 모세, 테오제네스, 하물며 동완이의 농담이라던가 이자벨의 이야기조차 할 수 없었다. 분위기가 삭막해질 무렵,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은 둘은 다락방 주변을 하릴없이 살폈다. 잠시 잊었던 히스의 기억이 평화롭게 펼쳐졌다. 아이는 장소가 룸펜이니만큼 여기서 겪었던 이야기들을 정혁에게 들려주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여기서 엉망진창으로 음악을 했었어, 정혁아.” “후후…….” 아, 정혁이가 웃는다! 한결 마음이 놓인 아이는 그 때부터 죽죽 머릿속의 숨겨둔 이야기마저 빠르게 이었다. 어쩔 수 없이 맨 마지막에는 히스의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히스의 파란 머리칼의 유래, 그의 장난기, 그의 무지함 등등 이야기는 하면 할수록 원래의 의도에서 벗어나 그에 대한 그리움으로 채색되어갔다. 혜성은 더 이상 정혁의 눈치를 보지 않고 처음 룸펜에 도착하는 즉시 느꼈던 히스의 그리움과 추억을 낱낱이 떠들었다. 잠깐이나마 즐거웠던 정혁의 눈동자가 죽은 시체처럼 굳는 것을 전혀 모르는 채, 아이는 저의 음성에 도취되어간다. “매일 매일 꽃을 선물해 주면서도 히스는 소박한 행위를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지. 나는 그가 주는 싸구려 꽃 몇 송이가 좋았어. 재미있는 사람이었지.” “…….” 바닥에서 춤을 추는 먼지들이 온통 꽃의 잔해로 보여서 혜성은 시선을 여러 번 움찔거렸다. “한 번은 스프를 제대로 안 먹는다고 접시가 비워질 때 까지 노려보기만 하는 거야. 히스는 노려보느라 자기 스프가 식을 때까지 한 수저도 들지 않았어. 돌이켜 보면 하나같이 추억이지. 나는 추억 이라는 글자가 두려워서 엉망인 채로 울기도 많이 울었는데…….” “…….” 혜성이 우는 것을 아예 안 보려던 처음의 히스를 기억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신기하고 이상하다고 여겼었다. 아이의 목울대가 떨려온다. “그 때, 히스는 내가 울던지 말던 지 단장하고 자주 바뀌는 애인들에 열을 올렸었는데…….” “…….” 바야흐로 사랑 고백의 구절까지 넘어가자, 혜성은 독일에 다녀왔던 것도 꺼내리라 마음먹었다. 이 모든 것이 ‘사랑’이 아닌 룸펜에서의 추억임을 강조했지만 정혁에게는 오로지 히스의 이름밖에 들리지 않았으리라. “…그런 그가 막상 사랑을 표현할 때는 숨이 막힐 것 같았어. 히스는 독일의 테레사라지? 룸펜에서는 전혀 그것을 느낄 수가 없었지. 지휘자라고? 하하하… 히틀러? 폰 카라얀? 수식어는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어.” 쾌속전차를 탄 것처럼 히스라는 글자는 더더욱 빨라졌다. 새벽 두 시가 되면 피아노를 연주해도 좋다는 정하의 허락이 중간 중간 떠올랐지만 그것 보다는 히스의 개구 진 모양새가 그리워서 입술은 닫히지 않았다. 언 손을 비빌 때마다 히스가 저의 커다란 손바닥으로 비비고 입김으로 불어줬던 옛 일들이 가슴을 찔렀다. “…그래서, 보스턴에 다녀왔는데 나는 그를 안 봤어. 그런데 안 봐도 괜찮더라….” “…….” 숨도 쉬지 않는 걸까? 정혁은 고체처럼 굳은 채 대답이 없었다. 이야기는 어느새 최근 보스턴의 아마데우스 홀에 다녀온 것 까지 지났다. “아…!” “…….” 오, 이런! 그 순간이 되서야 심장은 바닥끝까지 굴러 떨어졌다. 철렁! 아이는 자신의 연약한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동시에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렇다. 의도하지 않아도 아마데우스의 이야기는 혜성의 입 밖으로 흐른 것이다. 아마데우스 홀이 어떤 모양새인지 자세히 설명하려던 혜성은, 그제 서야 소스라치게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 탈선, 혹은 여유? 가진 자의 여유? 어떤 단어라도 상관없다. 무거운 분위기를 피하려고 꺼낸 이야기들은 돌이켜보기 두려울 정도로 방대했다는 게 뒤늦게 생각나서 아이는 더 이상 떠들 수가 없었다. 기다렸다는 듯, 정혁은 죽은 입술을 열었다.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피하면서 지내지?” “뭐…?” 음성은 전체에 월계수 잎을 달았지만 끝부분은 날카로운 창이 되어 성탄 전야의 밤을 찌른다. 혜성은 주먹을 쥔 채로 어서 다른 화젯거리가 생각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허사였다. 아이가 떠들 때 오래도록 대화의 요점을 생각하고 꾸준히 기다렸던 정혁에 당할 재간이 없었다. 아이는 순식간에 정혁의 언어 앞에 무너졌다. “나는 이해 할 수 없다. 그것도 서로 사랑하는데 왜 피하면서 지내지?” “!” 할 수 있는 대답이라는 게 없어! 내면은 평화로운 곳곳 찔리는 아픔을 그저 내버려둔다. 달아난 심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서, 어서! 아이의 동공이 무차별하게 찔리는 아픔에 호소하듯이 좁아졌다. “그러면서 나에게, 이 문정혁에게! 그림자에게! 복잡한 너의 애정 사를 늘어놓는가?” “문정혁!” 질투는 광기를 낳는다. 아니다. 질투는 광기를 낳고야 말았다. 예고 없이 흥분한 정혁이 거친 언어 못지않게 강한 팔로 혜성의 양 어깨를 그러쥐었다. 그렇게 깊은 밤이 별처럼 두 사람에게로 쏟아진다. 지금이다! 겨울의 광기는 이성을 불에 태운 채 도착 지점에서 환호성을 질렀다. “그렇게 아프면!” “…내가 잘못했어! 분위기에 취해서 나도 모르게 내 얘기, 그것도 그런 쪽으로만 했는데-” “닥쳐!” “아!” 저기 광기로 변한 자가 스스로의 이성마저 씹어 먹었다. 아이의 상체는 순식간에 더러운 시트위로 넘어졌다. 정혁의 한 쪽 무릎은 굽혀진 채 혜성의 옆구리 옆 부분에 바짝 찔려 있었다. 양 손은 비록 연약한 어깨만 그러쥐었다지만 혜성은 갑작스러운 공포 때문에 팔을 움직일 수 없었다. 여전히 바닥을 지탱하고 있는 정혁의 늘씬한 다리는 금방이라도 흉폭 한 무기로 바뀔 것처럼 두려웠다. 그의 눈동자를 마주볼 수가 없어… 두려워. “…미안해… 정혁아….” “그를 피하지 마!” “…뭐…?” 공포로 질식하던 혜성의 눈이 순간 부릅뜨였다. 뭐라고? “왜 사랑하는 자를 피해서 지내지? 너의 사랑은 대체 뭐지? 미래가 뭐야? 떨어져 지내는 게 사랑? 보스턴에서 만나지도 않고 돌아오는 게 너의 사랑? 그게 사랑이라고!” “…아.프다.” 그는 정말은 불만이었던 것을 모조리 터뜨렸다. 동시에 혜성의 이성이 돌아왔다. 두려움이란 없다. 노골적으로 정혁을 올려 보면서도 혜성은 그가 분노하는 현재를 이해했다. 그래서 두렵지 않았다. 정혁은 곧 혜성의 어깨를 마구 흔들며 소리쳤다. “그를 사랑한다면! 버리지 마!” “…아파.” “도망치지 마라. 왜, 사랑한다면서 테레사를 피해 지내는 건가!” “물론… 그렇게 보이겠지.” 테레사! 그의 이름은 흔들리던 혜성의 동공마저 올곧이 일으켰다. 평평한 대지에 창을 던져 봤자 대지는 아파하지 않는다. 정혁이 자신의 주관으로 혜성을 이해 할 수 없는 것 뿐, 혜성은 이 순간이 어서 지나기를 기다린다. 잠시 숨을 고른 뒤, 낮게 욕을 지껄이며 정혁은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혜성의 안면 가까이에 입술을 붙인 채, 뺨을 돌린 아이의 입술 밖으로 흐르는 술의 향기를 맡았다. 자신이 이렇게 소리쳤는데도 반응이 없는 혜성이 이해되지 않아서, 그런데도 불과 같아서 정혁은 신음을 쏟아냈다. 테레사도 모자라서 독일의 히스까지! 또 한 번 이성이 날아 갈 것 같은 정혁은 애써 참아가며 혜성의 귓가에 입술을 누른 채로 다시 물었다. “위태로워서 봐 줄 수가 없군. 히스랑… …많은 일을 겪었다면 결국, 어떤 사이지?” “거 봐… 네가 궁금한 건 결국 그거잖아.” “!” 그러나 싸늘한 대답만이 날아 와 정혁의 아슬아슬한 이성의 줄을 끊었다. 혜성은 독사와 같은 시선으로 정혁을 점점 더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쳐라. 아니면, 한 판 붙을래?” “…….” “잘 모르는 것에 대한 추측은, 물론 너의 자유지만… 문정혁.” “…….” 휙-! 오히려 정혁의 멱살을 강하게 쥔 혜성이 상체를 약간 올리더니 허스키한 입술을 열었다. 긴장감 이라는 글자가 스타트 선을 완전히 넘어버렸다. 누구의 이성도 존재하지 않는 광기의 바람만이 두 뺨을 치고 달아난다. “네가 뭘 알아.” “!!” 비아냥대는 입술에 감정이란 없었다. 광기가 짙다 한 들, 미친 감수성의 변이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 정혁의 안면 가까이에 붉어진 눈동자를 들이대며 혜성은 시니컬하게 웃었다. 하하하, 하하하하하! 왜 웃음이 나올까. 그러나 한 번 터진 웃음은 서커스단의 피에로처럼 광기의 박자에 맞춰 미친 듯이 멈추지 않았다. 정혁의 멱살을 쥔 채로 노려보는 내내 눈이 아파서? 감정이 서로 달라서? 이윽고 웃음을 멈춘 혜성은, 무기력해진 정혁의 상체를 세게 밀며 소리쳤다. “네가 뭘 알아!” “…….” 테레사를 그렇게 멀리 떨어뜨려야 하는 나의 방식에 대해서 네가 뭘 알아! 하루에도 수 십 번, 수 백 번 그 태양에 말라죽는 나를 네가 어떻게 알아! 사실은 모두 원망하고 있다지. 아닌 척 해도 이자벨이 학생회장이 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나를 좋아하면서도 기만하는 눈동자가 ‘왜’ 인지를 나는 알지. 동완이조차 쉬쉬하려는 이유를! 테레사는 애송이를 키우기 위해 그토록 애를 썼는데, 은혜도 모르는 애송이는 제 멋대로 술과 퇴폐에 젖어 산다고. 너도, 그런 류 였나, 문정혁? 믿었던 너 마저도? “히스! 히스가 궁금한가! 그가 궁금해? 하. 하하하하!” “…….” 침대를 구르며 배를 쥐고 웃는 혜성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면서 정혁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혜성은 곧 웃음도 눈물도 아닌 자세로 시트를 움켜쥐었다. 격정은 끝나지 않은 걸까. “하아… 하….” “…….” 사랑만 했으면 좋겠어. 마음 편하게 쉽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너는 모른다. 너희들은 모른다. 멀리 떨어져도, 그리워하는 이 마음까지도 함께 하는 ‘사랑’의 하나라는 것을 너희는 모른다. 새로운 것은 질타하는 너희들은 사랑에도 정해진 선이 있다고 보이는 것만 믿는 너희들은! “나는… 또 말을 내뱉는 족족 후회할 것들을 꺼내고야 말았어….” “…….” 곧 진정이 된 혜성이 얌전해진 스스로의 감수성을 저주하는 언어를 빚었다. 정혁은 안아주기 위해 팔을 움직였다가 곧 멈췄다. “가여운 너를 안아주기 위해 다 잡은 마음을 내 멋대로 풀었어….” “돌아갈게. 이제… 끝이다.” “!” 끝! 달아난 심장은 그제 서야 돌아왔다! 벼락을 맞은 사람인 양 꼿꼿이 선 채 다시 흥분한 혜성은 정혁의 뒷모습을 끌어안았다. 정혁아! 내면은 수 십 번으로도 부족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많은 장면이 수페리우스의 안면에 스쳐 지났다. 우리들은 행복했었는데,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았는데. 화살이 되어 서로를 찌르는 때가 닥칠 줄 누가 알았던가. 나란히 로맨스를 연주하고 너의 싯 귀에 가슴이 뛰었던 때가 그려지는데, 무표정에 섞인 웃음이 나는 보였었는데, 누가 알았던가. 너의 정복이 나를 못살게 굴던 태양을 가려주고, 시원한 그림자가 되었으며 너에게 힘이 되었던 나 역시 책 속의 글귀처럼 뚜렷이 존재 했었는데, 누가 알았을까. 너와 나에게 오늘이 있을 줄은! 그가 자제력을 잃고 혁명의 불씨를 타오르게 했던 때가 서슴없이 뺨을 쳤다. 안 돼! 혜성은 정혁의 등을 와락 끌어안은 채로 애절하게 소리쳤다. “정혁아! 너… 지난번처럼 그러면 안 돼!” “…….” 냉정을 찾은 정혁에게 연이어 외친다. 지난번처럼, 혁명 때처럼 학교를 전쟁터로 만들면 안 돼! 두려움이 영혼을 위협했다. 혜성의 뺨을 타고 진솔한 눈물이 흘렀지만 뒤 돌아선 정혁에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부들부들 떠는 양 팔이 가엾지도 않을 걸까! 정혁은 피식 웃으며 배에 둘러진 혜성의 팔을 냉정하게 뿌리쳤다. “…어리석은 짓을 두 번 저지를 만큼 나는 못나지 않았다.” “그럼… 그럼….” 턱이 덜덜 떨릴 때, 강한 바람이 쳐들어왔다. 혜성은 본능적으로 추위에 몸을 움츠리며 자신의 손을 뿌리친 자를 봤다. 그는 표정은커녕 모습조차 뒤로 감춘 채 냉정한 입술을 떠들었다. “내 잘난 이성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너를 다시 보면 안 된다고, 내가 스스로 이룩할 때 까지 만나면 안 된다고 다그쳤어.” “…….” “그런데….” “…….” 약간 느슨해진 그의 언어 덕분에 한 걸음 나아가려던 혜성이 곧이어 터진 문장에 경직했다. “…어떻게 너를 안 봐….” “!” 하느님! 그가 울고 있어! 안아줘야 돼! 하지만 뿌리치면 어떡하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의 아픔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것이 죄다. 아이는 그를 만나려고 재혁의 집에 찾아간 스스로가 저주스러웠다. 한없이 미웠다. 그의 사랑을 알면서도 다른 말을 줄줄이 꺼낸 아까가 미안해서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이 고통은 정혁에게 비할 바가 못 됨을 알았기에 뭐라고 용서의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이토록이나 나를 미치게 하는 세상 오직 한 사람을!” “정혁아!” “걱정하지 마라. 나는 무기 없이 덤비는 자가 아니다. 지금의 나는 체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기에 너를 잡지 않아.” “…….” “분노와 애정. 예전에는 애정이 더 커서 혁명까지 갔지만…….” “…….” 아이가 미안해- 라고 말을 하려던 찰나, 정혁은 긴 신음 소리를 내뱉더니 다락방을 나가버렸다. 그가 다시 가 버렸어. 나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여기까지 와 주었는데, 어리석은 내 영혼은 그를 거칠고 난폭하게 내몰았어. 나는 어쩜 이다지도 이기적일까. 그를 울렸어. “…그래도 그럴 수밖에 없었어….” 푸르르륵- 바닥에 떨어져 있는 테레사의 에튀드집이 마구 펄럭였다. 혜성은 희미한 투로 중얼거리며 그것을 쳐다봤다. “테레사….” 휘익- 맞은편의 바람이 악보들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나는 당신의 이름밖에 들리지 않았거든요… 나를 미치게 만드는 유일한 게 아마데우스잖아요….” 악보는 대답이 없다. “밑바닥은 언제쯤 사라 질 까요… 안아주세요… 제가 안아드려야 하는데 오늘은 너무 추워요… 아름다운 날인데 밑바닥은 차갑기만 해요….” 그리고 이질적인 눈물이 한없이 떨어졌다. 한 번 더 악보가 펄럭일 때, 혜성은 그것을 소중하게 쥐고 룸펜으로 내려갔다. 많은 인파가 아까처럼 혜성을 반겼지만 아이는 웃음기를 싹 거둔 상태였다. 그들은 비로소 예감하는 눈치다. 룸펜이 뭔가를 하려는 거다! 음악은 귀족들에게 허락된 고고한 영역이 아니라, 누구든지 즐길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혜성은 정하에게 뭐라고 속삭이더니 주홍빛 조명이 찰랑이는 피아노에 다가갔다.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룸펜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던 레이놀드와 한스는 주렁주렁 상처를 단 채로 도착해 있었다. 분노와 애증, 그리움과 탄식, 지리멸렬한 야생의 기운이 철부지처럼 내면에 뛰었다. 그것들이 가시기 전에, 혜성은 정혁이 없는 이곳에서 갈망하던 악보를 연주하기로 한다. “!” 건반 위에 준비 자세를 취하는 동시에 아찔함이 전체에 미쳤다. 학교에서도, 하물며 유리가 경련을 일으켰을 때조차 몰랐던 악보가 제대로 읽혀서 였다. “이것 봐, 룸펜! 겁 먹은 건가?” “뭐라도 눌러 봐!” “하하하하!” 악보가 시선에 잡히는 순간 거짓말처럼 정혁에게 얽매였던 괴로움이 증발했다. 한스가 장난 스럽게 장화를 벗어 던졌을 때, 혜성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또 다른 3주제의 광기가 출현한 걸까? 아이는 손목 단추를 푸르고 팔목을 돌렸다. 깍지를 끼이고 주무르면서도 악보를 여러 번 노려보았다. 삼키고 삼켜도 모자란 것처럼 갈증이 일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섯. 다섯?” 에튀드의 반이 단 한 곡을 변주시킨 바리에이션이었다! 왜 그걸 몰랐을까. 제각각 비슷하지만 전혀 틀린 곡은 음표가 사납고도 정돈되었다. 유리는 이 바리에이션들을 보고 경악했던 거야! 원곡을 유추할 수 없는 다섯 개의 바리에이션은 제각각 단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혜성은 순간 경쾌하게 머리를 뚫는 발상에 놀랐다. 바리에이션의 원곡 역시 그가 작곡 한 게 아닐까? 왜 이 에튀드 집에는 원곡이 없을까? 그는 나중에 들려주려는 심산일까. 아니면, 내 스스로 이 바리에이션을 통합해서 훗날 그를 능가하는 원곡을 만들라는 것? 하지만, 내가 유추한다 한 들 그것마저 바리에이션 이라는 이름에서 벗어나지 않을 텐데. 게다가 다섯 번째 바리에이션은 아이도 들어 본 적이 있는 악보였다. 무대 위에서 아찔한 호흡을 내뱉던 정혁이, 서슴없이 주먹을 움켜쥐고 좌중의 환호를 받았던 그 곡이다! 테레사와 정혁의 콩 쿨에서 있었던! 혜성은 재차 그 때의 그 악보가 맞는지 읽어보았다. 틀림없었다. 정혁이 연주했던 테레사의 악보가 틀림없었다! 온 몸에 퍼져 나가는 전율이 오돌 도돌 소름을 일으켰다. 혜성은 다섯 개의 바리에이션 중에서도 마지막 것을 연주하기로 결심했다.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어. 정혁이는 대체 당일 날 받았던 이 악보를, 악마의 선율을 어떻게 승화시켰던 거지?! 오, 내가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것보다 쉽거나 간략한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질 않아! 한 참 동안 혜성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시끄러워!” “!” “?” 히스테리칼하게 변한 혜성의 음성이 마이크를 타고 사방을 찌르자, 그들은 다시 조용해졌다. 한스의 눈이 험해졌고, 레이놀드는 기분이 상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이는 피아노 옆에 부착된 마이크에 대고 그을어진 음성을 침착하게 속삭였다. “이제부터 재미있어질 거야… 이 악보를 알려 주지. 한 때 잘난 위인들을 놀라게 한 악보다. 악마의 선율이라고 나는 그 때 이름을 붙였는데, 너희들의 귀는 어떻게 해석할까. 공교롭게도 지금 연주하려는 건, 내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의 것이다.” 그 때였다. 히스를 기억하고 있는 앞자리의 누군가가 걸걸한 목소리로 존경하는 자가 히스클리프가 맞느냐며 물었다. 룸펜을 늘 보호해 주던 히스를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였다. 혜성은 깔깔깔 웃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히스는 아니다. 그러나 히스 마저 그의 매력에 사로잡혀 있지.” “!” 사방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혜성은 총명한 눈동자를 빛내며 두려움 없는 입술을 열었다. 덕지덕지 달라붙어있는 눈물 자국이 귀찮기만 하다. 하지만 귀찮다는 순간마저도 이유 없을 눈물이 자꾸 턱에 떨어졌다. 어서 발산해야 돼, 어서. 순결한 수페리우스여, 당신을 모조리 쏟아 부어요! 겨울은 아이를 자꾸만 몰아세웠다. “너희들은, 더! 발광 할 수 있어. 그들은 체통을 지키느라 격려의 박수만 쳤었거든.” 레이놀드가 박수를 유도했고, 룸펜에 소문을 듣고 모인 인파는 삽시간에 가득 차서 열기로 뜨거워졌다. “미친 클래식, 룸펜의 연주회에 오신 페르퀸트 동지들이여. 환영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나의 선물은 곧, 당신들의 선물입니다.” “!” 그들이 환호성을 터뜨리려던 찰나, 혜성은 기다렸다는 듯 악보를 치고 들어갔다! 입을 벌린 자세에서 많은 이들의 영혼은 쩍 얼어붙었다. F코드로 시작된다면, 그의 열정에 맞춰서 나 역시도! 하지만 연주는 시작과 동시에 무지한 이도 알아들을 수 있을 만치 연속 미스를 냈다. “하!” 혜성이 숨을 가다듬고, 천천히 건반에 손을 다시 올리자, 그를 지켜보는 좌중은 손에 땀을 쥐었다. 긴장감 역력한 혜성의 표정이 불안해서였다. 아이는 여덟 번이 넘게 미스를 낸 다음에야 제대로 된 음절을 누르기 시작했다. 휴우~ 안심한 모두는 긴 숨을 내쉬었다. un poco espressivo. 테레사가 휘갈겨서 적은 글자가 걸리적거려서 아이는 실수를 여덟 번이나 냈었다. 서두부터 연주자에게 ‘표현’을 요구하는 설명이라니! 하하하하! 내면이 마구 웃으며 중간의 건반을 양 손으로 눌렀다. 세게 누를수록 오래 전 정혁이 만들었던 강렬한 효과가 부각되었다. 연주에 완전히 흡수된 혜성은 급기야 어깨가 심하게 꺾이기 시작했다. 그 날의 정혁이와 같이, 테레사의 악보는 크고 강한 손이 전신을 으스러지게 안는 것처럼 몰아세웠기 때문이다. “!” 격렬한 선율이 돌연 튀어나왔다. 혜성은 그 부분에서 또 한 번 건반 미스를 냈다. 하지만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 한 탓에 떡 하니 입을 벌리기만 했다. 피아노는 거짓을 야기하지 않는다. 내면에 숨어있는 불안함과 겨우 호흡하는 평화와 아닌 척 굴었던 악을 까발리며 연주자의 입술이 되고 영혼이 된다. 혜성은 번쩍 양손을 들고 재빨리 다음의 해석을 읽었다. 그대로 까무러칠 번 한 혜성은 세게 누르던 단조를 불에 대인 듯 떼어내며 경쾌한 박자를 시작했다. 악마의 악보? 악마의 선율. 엇박은 리드미컬하면서도 경쾌했다. 하지만 음습하고 무서웠다. 낭랑한 선율이 하프처럼 연주되는 아르페지오에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전에 거친 낮은음이 치고 들어왔다. 단순히 기계적으로 음표를 부드럽게 따라가자니 어두운 마음의 외침을 표현하라는 테레사의 악보가 가로막았다. 그렇다. 그의 악보는 연주자의 본질을 모조리 까발리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악보를? 혜성은 청아한 맑은 음을 누르면서도 식은땀을 줄줄이 흘렀다. 제 2주제로 넘어가자 예전 정혁이 들려줬던 음악은 까맣게 사라져간다. 같은 악보라 할지라도 전혀 다르게 태어난다! 이것이 테레사의 힘, 그의 악보였다. 부드러운 아리아는 격정으로, 다시 아리아로. 그의 천재성에 경악하기도 전에 왼 손은 깡깡대며 같은 것으로 다음 소절을 예고한다. 오 하느님. 눈앞이 겨우 트이고, 비로소 악보를 이해했다고 여길 무렵, 혜성의 안도를 방해하는 3악장은 기다렸다는 듯 나타났다. 재빨리 악보를 넘긴 후, 혜성은 또 한 번 짧은 텀을 주며 건반에서 손을 뗐다. “!” estinto! 똑 같은 음률인데? 앞과 똑같은 구성인데도 불구하고 테레사는 분노하며 난폭하게 굴었던 것을 단숨에 바꾸기를 요했다. 거의 들을 수 없을 정도의 사라짐을! 혜성은 침착하게 건반에 손을 올렸고, 땀으로 미끄러지면서도 그의 것에 도취되어갔다. 나의 연주가 어떻게 미쳐가는 걸까. 음표는 광기에 찌들 린 현재를 반영한다!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면 지금의 연주는 틀림없이 솜사탕처럼 얇고 부드럽기만 했을 텐데! 페달을 떼어내며 혜성은 뭔가에 쫒기 듯이 상체를 구부렸다. 그의 호흡이 들릴 정도로 여리 한 박자가 나오자 룸펜 전체에는 긴장감이 선연했다. 그러나 내면이 그러하듯 아이의 연주는 가볍고 산뜻하게 들리는 게 아니라 폭풍전야처럼 무겁고 억눌려 있었다. 다음 장은 좀 더 리드미컬할까? 그가 좋아하는 광시곡처럼? 번쩍! 정혁이의 영상이 스쳤다. 그렇게 최후의 클라이막스가 분수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혜성은 더 이상 테레사의 악보의 진 뜻을 파헤치지 않는다. 카덴차! 카덴차! 무려 세 장이나 카덴차를 요구하는 악장이 불안해했던 모든 것을 싹 없애 주었기 때문이다. 카덴차! 악보에 적힌 숱한 음표 대신 즉흥적으로 연주해도 좋다며 테레사의 악보는 그를 억누른 것에서 완전히 풀어줬다! 얌전히 조용한 건반을 낮게 누르던 혜성의 상체가 번쩍 세워지자, 그를 지켜보던 이들도 놀라서 뒤로 넘어졌다. “!” 바로 이 부분이다! 두 사람의 콩 쿨에서, 정혁이는 이 카덴차에 적힌 기본적인 탱고의 박자를 무겁게 가라앉혀서 좌중의 환호를 샀지. 앞의 것이 마지막으로만 기억될 수 있도록, 그는 자신의 성격에 맞는 카덴차를 이루었다! 비호처럼 날렵해진 혜성의 양 손은 엇 박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선율은 자유자재로 돌아다니며 영혼에 휘몰아쳤다. “룸펜!” 감정이 격해진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아이의 귀는 닫힌 상태였다. 피아노에서 양 손을 교차하며 왼 손을 오른손 위로 올려 동시에 벼락같은 음에 트릴을 주자 그들은 신음했다. 혜성의 내면에서 전쟁 중이던 모든 것이 백기를 꽂았다. 춤을 추듯 부드러우면서도 독수리의 날개 짓처럼 날카로운 선율은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섞은 것처럼 교묘했다. 피아노가 사람을 빨아들이는지, 아니면 사람이 피아노를 지휘하는 지모를 광기가 사방에 미쳤다. 혜성은 턱을 떨며 신음했다. 내면은 비명을 터뜨린 지 오래였다. C코드! 그는 내가 이렇게 변형할 줄 알았을까! 지상에서 가장 쓰라린 소나타가 아닐까. 오 하느님, 저에게 이런 곡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미친 자가 당신께 경련을 일으킵니다. 건반을 유랑하는 혜성의 손 마디마디는 미친 자와 다를 게 없었다. 크게 몸이 꺾인다. 동시에 우두두둑 굵은 방울이 주변에 떨어졌다. 혜성의 안면에 미소가 그어질 때, 불벼락 같은 카덴차는 마치 지옥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 힘을 쓰듯 시끄러웠다. 거칠고 난폭했으며, 무거우면서도 청중을 놀리듯 발랄했다. 땅-! 따단! 따다닥! 따다닥! 따다닥! 최후의 트레몰로가 영혼을 조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차의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지나갔다. “하!” “!” 악보의 끝마무리 역시 연주자에게 모든 것을 양도하고 있었다. 혜성은 저속한 2분의 2박자를 몰아가던 도중, 사람들이 안도의 선율을 기다리는 것을 무시하고 연주를 끝내 버렸다. 느린 왈츠와도 같던 시작은 격렬한 2박자로 단숨에 몰아세워져서 끝낸 것이다! 혜성의 고개가 크게 꺾이며 무너질 듯 피아노에 팔을 기댔다. “…….” “…….” 숨소리조차 쉽지 않아. 의자에 앉힌 엉덩이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 머리가 터졌어. 아프지 않아. 감정이 완전히 돌아 버렸는데 그것이 그의 악보가 유도하는 대로 몽땅 표현되었어. 자, 너희들이 듣기에 나는 어떤 사람이었지? 고고한 수면처럼 평정을 유지하던 좌중은 한 번 더 긴 침묵을 유지했다. 혜성의 상체가 털썩- 피아노에 기대어 질 때가 되어서야, 제일먼저 한스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일어났다. “브라보!” “!” 그는 감격에 겨워 양 쪽 눈이 모두 붉어져 있었다. 비와 천둥, 세상의 모든 것이 한 순간에 폭풍처럼 휩쓸렸던 음악이 바로 그들의 룸펜이었다. 지난날 정혁이 보여준 고고한 음색이 같은 악보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는지 누군가는 되물어야 할 판이었다. “룸-펜! 브라보!” 좌중은 모두 일어나서 저희들이 느낀 격정을 모조리 실토했다. 목울대가 터질 정도의 고함과 팔이 아플 정도의 손뼉 소리가 혜성의 열기에 동화되어간다. “우와아아!” “미친 클래식!” “환상적이다! 나는 방금 꿈을 꿨어!” “지금껏 중 최고다!” 제 풀이 꺾인 광기는 아이의 연주에 기세가 눌려 달아났다. 그 증거로 혜성은 전신으로 떨려오는 기운이 뇌리에 윙윙 돌아다니는 걸 느꼈다. 작은 무대에서의 크리스마스 콘서트. 그리고 흥분! 쾌락! 열기!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성! 나를 진정 황홀하고 미치게 하는 본질! 그토록 추웠던 날씨인데 몸은 지옥처럼 불타고 있다. “테레사…….” 캉-! 건반에 뺨을 누른 채로, 혜성은 여전히 자신을 환호하는 사람들을 들으며 중얼거렸다. “…내 밑바닥의 소리를 이제야 나는 들었습니다….” 땀과 섞인 눈물이 건반을 적실 때, 아이는 진심으로 그를 속삭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장장 30분이나 됐던 연주에 사람들은 전혀 지루해 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친 클래식이라며 자신들이 섞인 것을 신기해한다. 혜성은 천천히 일어나서 희미하게 물었다. “어때?” “멋져! 너에게서 빛이 난다 룸펜! 정말이야!” 아이는 중세의 기사처럼 허리를 구부리더니 우아하게 팔을 올렸다. “메리 크리스마스~ 룸…펜… 드림.” “!” 또 한 번의 격정적인 환호가 룸펜을 휩쓸고 지났다. 혜성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달래며 걸어보았다. 비록 첫 부분과 중간에 미스가 많았지만 그의 것을 쟁취했다는 묘한 기쁨에 들떠서 이대로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정말이야. 이대로 죽어도 될 것 같다. 이 쾌락이 가시기 전에 누가 죽여주면 오히려 고마울 것 같아. 꽉 채워진 실내를 거닐며 혜성은 그들이 내미는 맥주를 받았다. 시원하게 한 모금 마시려던 때, 문득 왼쪽 가장자리의 빈자리가 거슬렸다. 언뜻 봤을 때, 분명히 단 한 자리도 비어있지 않았는데… 누가 막 나간 건가……. “!” 그리고 번쩍이는 생각이 떠나기 전에 그 자리로 달려갔다. 왜 여기까지 왔는지는 중요치 않다. 운명처럼 비켜 가려던 무엇이 번뜩였다는 사실만 인식할 뿐이다. 설마… 설마. 혜성은 주위의 인사를 뿌리치며 떨리는 몸을 빈 의자에 앉혔다. 방금 전 누가 앉았음직한 훈훈한 온기가 머리 꼭대기까지 미쳤다. 그렇다. 그의 의자위에 있던 쿠션과 나무재질은 사람이 막 나간 온기가 전해졌다. “이 봐, 룸펜!” “룸펜-!” 혜성은 그들의 환성을 뒤로 한 채 도어를 밀치고 튀어나갔다. 지독한 함박눈이 시야를 엄습해왔다. 밤하늘의 구름이 덮여져있던 달을 반쯤 드러냈다. 그렇게, 룸펜에서 멀어져가던 익숙한 인영을 확인한다. “문정혁-!!” “…….” 정혁이 확실했다. 혜성은 당장 그에게로 뛰어갔다. 중간에 나자빠지기도 했지만, 전혀 아프지 않았다. 에튀드 연주 덕분에 채 사라지지 않은 쾌락에의 전율이 온 몸에 들쑤셨지만 상관없었다. 정혁이가 계속 있었어! 그가 예전 자신이 했던 연주를 내가 다시 표현한 걸 들었어! 잔인한 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내 연주를 들은 거야! 함박눈이 태풍보다 진한 색으로 휘날릴 때, 아이는 정혁을 끌어안기 위해 팔을 벌렸다. 그러나 그가 더 빨랐다. 아이가 가까이로 달려오기까지 기다려 준 것을 증명하듯 당장 등을 돌리더니 정혁은 와락 끌어안아 버렸기 때문이다. 쾌락의 밤이 깊어간다. 광기는 또 다른 광기가 되어 서로를 죽였다. 혜성을 으스러지게 끌어안은 채로, 정혁은 몇 번이나 긴 숨을 내뱉었다. 방금 전의 연주가 그로서도 놀라웠던 모양이다. 그는 곧 품에 안은 혜성의 머리칼에 입을 맞추며 끈끈한 어절을 쏟아냈다. “나의 아름다운 뮤즈여…!” “……!” 달이 기울어지려던 때, 발광을 부리는 입술은 지지 않고 떠든다. “변하지 말기를… 너만은 내가 반한 영혼 그대로이기를… 러시아 인형이 되어 가벼운 손놀림으로 지치지 않는 불꽃이 보여주기를… 미워하면서도 원망하면서도 결국은 나약한 기도를 한다…….” “정혁아….” 두 사람의 뺨에 격정의 눈물이 마구 흘렀다. 정혁은 여전히 들뜬 목소리로 그러나 차분하게 운율을 띄웠다. 서글픈 함박눈이 그들을 뚫고 지날 것처럼 위협해도 소용없었다. “내가 반했던 너의 손, 감각, 뮤즈… 뮤즈… 나의 마드모아젤.” “…….” “점점 더 잔인해져가는 내 욕심이 정작 너를 보면 무뎌지는 게 사실이지만… 그래서 굳혀지는 욕심.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진실이다.” “그래…….” 그는 혜성이 연주한 모든 것에 인 감동을 애써 물리치려는 듯 힘겨워 보였다. 혜성은 그의 품에서 제대로 된 안식을 찾은 양 대답하면서 마주 안았다. “나는 강해지기 위해, 내 세상을 쟁취하기 위해, 그리고….” “…….” “정말로 너에게 떳떳해지기 위해, 나를 버린 너에게 복수하기 위해, 너를 두려움에 떨게 하기 위해, 긴 시간 없을 거다.” “…….” “몇 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인사는 다정해야겠지.” “정혁아….” 정혁의 차가운 손이 아이의 양 쪽 뺨을 보드랍게 감쌌다. 둘은 곧 짧게 입맞춤을 했다. 파도처럼 싸늘하면서도 위협적인 느낌이 아닌, 아까의 선율만이 계속 해서 들려왔다. 아름다운 뮤즈는 빛에 가려진 그의 얼굴을 여러 번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몇 년 동안의 문정혁은, 그림자는… 적어도 너와 아마데우스에는 뮤즈로 기억되겠지….” “그래….” 그리고 그는 조용히 혜성을 놓아주었다. 그는 안심하는 눈치였다. 자신이 반했던 뮤즈의 세상이 혜성과 함께 하고 있음을 기뻐했다. 그러나 그는 마냥 좋아할 수 없는 처지이지 않던가. 곧 격정을 떨어 낸 뒤, 정혁은 매섭게 등을 돌리며 포부를 내리꽂았다. “나는 훗날 돌아와서 그 기억을 산산이 조각 낼 거다.” “…알아….” “법과 악. 혹은 악과 법. 나는 둘 중 하나에서 최고가 된다….” “!” 그는 의외의 소리를 내뱉는데 일인자인가? 아니다. 혜성은 그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낙오자의 모임을 이끌던 우두머리였던 정혁의 기억이 쏜살같이 스쳤다. 그가 영향력 있는 그룹 총수가 되고 싶어 하는 뜻이 있다는 것 즈음은 오래 전에 민우가 얘기해 줘서 기억하고 있었다. 방금 전의 연주를, 그는 아마데우스로 돌아오라는 희망이 아닌 결심으로 승화시켰다. 혜성은 그의 뜻을 존중했다. 또 자기 때문에 어긋나야 하는 운명을 기다려 주기로 결심했다. 아이가 대답이 없자 그는 시니컬하게 웃으며 스스로에게 말 하듯 중얼거렸다. “이런 나야말로 진정한 반 아마데우스인가…….” “정혁아…….” 휙- 바람이 불 때를 잘 맞춰서 그는 등을 돌렸다. 엉망진창이 된 그의 표정은 억지로 입 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마지막 선물은…….” “……?” “네가 현명하리라 믿기 때문에 준다.” 많이 망설였음직한 종이를 코트 주머니에서 꺼낸 뒤, 그는 혜성에게 내밀었다. 무언의 암시일까? 그는 상당한 문장을 아끼느라 힘들어 보였다. “이건…?”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지.” “약도 같은데… 여기가 학교고….” “…….” 쉭-! 에튀드의 열기를 단 숨에 잠재우는 것이 혜성의 눈가에 스쳤다. 종이를 쥔 채로 부들부들 떨며 혜성은 소리쳤다. “서…설마!” “예스. 반 아마데우스.” “!” 메리 크리스마스. 정혁은 오로지 그 말만 남기고 없던 것처럼 완전히 떠나 버렸다. 메모로그에 슈콘느님이 주신 표지입니다. 고마워요! wgreene@naver.com 지금의 한 편을 위해서, 백 개가 넘는 곡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1악장에서 두 거장의 콩 쿨 편에 삽입했던 탱고처럼 어울리는 게 없었어요. 허무한 기분이지만, 그만큼 짜릿합니다. 가장 쓰고 싶을 때, 가장 미치고 싶을 때, 그래서 적고 나면 가장 후회가 많을 때를 기다린 게 오늘이었습니다. 부디 여러분도 즐거우셨기를 바라며…. 밀크티님, 로아님, 몬타나님, 동글이님, 안젤리스님, 빵글이셩님, 박카스정님, 셂님, 솨, 별하님, 린님, 리에뜨님, 혀니차니님, 아기해달님, 기린아님, 점네개님, 군림님, khshinae님, 곰탱이님, 류타님, 포근구름님, 좡, 슬픈웃음님, 그리고 당신, 고맙습니다. 미친 클래식 아마데우스와 함께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 편 에서 뵙겠습니다. ^^ -화이트그린 드림- 덧글 18개 엮인글 쓰기 /data20/2006/9/22/183/23_1-wgreene.jpg@nhn@84729@nhn@1@nhn@350@nhn@426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47~48편 /data20/2006/9/22/183/23_1-wgreene.jpg@nhn@84729@nhn@1@nhn@350@nhn@426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47~48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49편 ▼ 다음글 - 아마데우스 예고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49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9/25 19:36 http://blog.naver.com/wgreene/110009105502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925 49편 업데) Amadeus 음악 : locus iste(sanctus) - libera (아래 플레이클릭) Locus Iste (Sanctus)-L.. 진정한 ‘나’를 본 거야. 2악장 49편 다 다음날 오전이 되자 세상은 보석처럼 반짝였다. 하얀 모자를 쓴 것처럼 아마데우스의 건물들은 하얗게 칠해져 있었다. 감각으로 물드는 뼈마디는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에 놀라 저마다 신음을 내뱉었다. 겨울은 한 해의 휘날래로 자리매김 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서 쪽 기숙사동은 특히나 더 그랬다. 봄부터 가을까지 억누르기만 했던 어두운 기운이 겨울에는 침체를 벗어 던지고 아마데우스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젊음의 겨울은 옷을 벗은 여인의 곡선처럼 매혹적이기만 했다. “…….” 룸펜에서 돌아와서 지금껏 기숙사 방에서 나올 생각을 안 했던 수페리우스도 훤히 비춰지는 고풍스런 장면에 압도되어 조심조심 창가에 다가갔다. 비록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지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에 취했는지 아이의 눈망울은 젖어있었다. 혜성과 비슷한 감정을 지닌 위층의 누군가가 창가 쪽에서 첼로를 연주하고 있어서 한결 더 센티해졌다. 학교는 텅 비어 있다. 성탄절부터 8일 동안 겨울 휴가에 접어들어서였다. 그 덕분에 혜성이 전처럼 늦게 학교에 도착했다 한 들 그에게 뭐라고 언급 할 사람은 없었다. 반 아마데우스의 약도를 받은 뒤, 이틀이 지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을까? 수페리우스의 눈동자는 지금껏 모두를 합한 것보다도 깊어진 심연을 자랑했다. 어째서일까. 아이는 평화로운 오전의 햇살과 수려한 풍광에 압도되어 한동안 멍청하게 빛을 감상했다. 자연은 움직이지 않는 척 활발하게 대지를 밟고 있었다. 짜르륵- 소나무 이파리에 쌓였던 두툼한 눈 덩어리가 떨어질 때 혜성은 움찔 놀라서 주먹을 쥐었다. 그들은 굉장했다. 일개 음표보다 힘이 세었다. 아마데우스의 예식 복 보다도 아름다웠다. 가을의 대미를 장식했던 진분홍 코스모스보다 멋있었다. 여신처럼 떵떵 이는 마리아 칼라스보다 고귀했다. 그래서 아름다운 겨울은 오래 전 민우의 말마따나 잠시도 차가울 수 없었다. 어딜 봐도 열정의 기운이 저 찬란한 눈에 섞여서 감성을 자극했다. 혜성은 문득, 자신이 단 한 번도 미사에 나간 적이 없다는 게 이상하게 여겨졌다. 이틀 내내 기숙사에서 시체처럼 지낸 결과란 참 허무한 것만 떠오르게 했다. 근심걱정 때문에 뒤로 미뤄야 했던 자잘한 실생활들이 피부에 스치는 옷깃처럼 자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시원한 바람이 용감하게 쳐들어왔다. 그리고 서 쪽 기숙사동을 향해 부리나케 달려오는 반가운 사람이 눈에 띄었다. 동완이었다. 텅 빈 학교는 그의 움직임을 평소보다 자세히 보이게 했다. 그는 곧 창가에 서서 자신을 응시하는 수페리우스에게 손을 흔들었다. 동완은 숨을 헐떡이며 방에 들어오더니 덥다며 재킷을 벗었다. 함지박한 땀이 구슬처럼 그 애의 이마에 매달려 있어서 혜성은 웃음이 터졌다. 이틀 만의 제대로 된 웃음소리가 기숙사방 천정에 스며들었다. “무…물. 물! 물 좀 줘!” “이크! 물 없는데! 물 없는데?” “!” 평소부터 운동신경이 남보다 둔했던 동완은 당장 구역질을 할 기세로 물을 찾았다. 침대에 너부러진 그는 물이 없다는 대답에 창백해지더니 곧, 혜성의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이제 살 것 같다며 자신은 죽을 뻔 했다는 둥 갑자기 영웅이 된 양 떠들기 시작했다. 왜 뛰어왔느냐 아이가 다그치자 마주보면서 걸어오기가 머쓱해서 그랬다며 신경질을 부렸다. 이상한 녀석. 동완은 점점 더 혜성을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혜성아. 너… 이이~상하게 편안해 보인다.” 대 자로 누운 상태에서 휙 뺨을 돌리더니 동완이 능글맞게 웃었다. 이번에는 다시 추워졌다면서 창문을 닫으라고 신경질을 부린다. 정말 이상한 녀석! 혜성은 자기의 몸으로 바람을 막아 주겠다는 대답과 함께 동완을 또 한 번 절망적으로 만들었다. “근데 정말 편해 보인다. 같은 표정이라고 해도 예전하고 달라.” “그래? 네가 그렇다면 정말이겠지.” 혜성의 작은 몸이 막아 봤자 쌩쌩 들어오는 바람은 오히려 아까보다 크게 느껴졌다. 동완은 씩씩거리며 저가 직접 창문을 닫아버렸다. 그러고 아주 싸늘한 척 입을 열었다. “내가 말 돌려서 안 하는 건 너도 알지?” “예스.” “1월 콩 쿨 건이 5월로 연기 되었고, 숨 가쁘고 벅차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서 걱정 많이 했어. 괜찮아? 룸펜에서는 어땠니? 정혁이를 만났다는 말 외엔 하지 않았잖아. 너도 눈치 챘겠지만, 나는 이제 너에게 대하는 선이 거의 없어진 거나 다름없어. 조언 이상으로 위로와 약간의 참여 정도는 가능해졌거든. 뭐… 네가 1년 동안 아마데우스에 없을 때 내가 심심해서 고치기로 한 점일지는 몰라도.” 미리 작정을 한 듯 동완의 어투는 거칠고 분명했다. 혜성은 그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 대꾸도 안 했다. 그러자 조급해진 동완은 다시 창문을 열어주었다. 혜성의 작은 몸이 폴짝 뛰더니 창틀에 기대어 앉았다. 아이의 장난기 짙은 입술이 의외의 것을 묻는다. “코코아 가져왔어?” “…….” 동완의 표정이 또 창백해졌다. 혜성은 분하다는 듯 주먹을 그러쥐는 동완을 못 본 척 하며 양 다리를 끌어안았다. 오뚝이처럼 엉덩이를 살짝 움직이며 직선으로 꽂히는 태양의 빛을 원 없이 느꼈다. “가져오면 대화 스타트.” “네가 오늘 말 해 준다고 해서 이틀 내내 기다리느라 휴가 때 집에도 안 갔는데?! 네가 무슨 오페라의 유령이니? 왜 기다리게 하고 나타나게 하니?” “…….” 쾅!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치며 동완이 화를 내는데도 아이는 시큰둥했다. 이크. 동완은 내심 겁이 났지만 그럴수록 언성을 높였다. “신혜성! 길이 다 얼어서 뒤뚱거리면서 왔단 말이야! 나더러 또 펭귄 짓을 하라고? 남쪽 기숙사로 가자. 거기가 더 따뜻해! 길도 녹아 있단 말이야.” “…….” 역시 동완이는 저의 머리로 남을 편리하게 구스 릴 줄 아는구나. 혜성은 그의 말이 언제나처럼 모두 옳다고 여겼다. 좋은 생각이구나? 라는 말과 함께 창틀에서 내려오려 했지만, 동완은 급하게 뛰어왔듯이 참을성 없이 몸을 휙 틀어버리는 게 아닌가. 예전 같았으면 유유히 구슬리고 본 모습은 되도록 자제했을 동완이 많이 사라졌다. 그는 문을 열고 반쯤 나가더니 혜성을 원망스레 돌아보며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냐는 듯 중얼거렸다. “나아쁜 자식.” “…프림도 가져와. 쓰단 말이야.” “…정말 나아쁜 놈.” “기다릴게 에~” “흥!” 이번에 동완은 매우 천천히 남쪽 기숙사에서부터 여기까지 걸어왔다. 혜성이 쳐다보거나 말거나 홍시처럼 붉어진 낯으로 씩씩댈 뿐 한 걸음도 빠르게 굴지 않았다. 아이는 화났어? 화났어? 라고 물어봤지만 동완은 치사하게 눈 뭉치를 만들어서 던지기만 했다. 두 사람은 곧 마룻바닥 위의 카펫에 마주 앉아 음모를 꾸미는 모양새로 대화에 열을 올렸다. 로미오와의 이상야릇한 스토리는 모두 제긴 뒤, 혜성은 자신이 유리를 만난 것, 룸펜에서 한스가 크리스마스트리에 자기를 걸려던 것, 정혁이를 만난 것, 그리고 에튜드를 연주한 것을 떠들었다. 동완은 코코아를 세 잔이나 마셔가며 그 이야기를 모두 들어 주었다. 아이는 정작 중요한 반 아마데우스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아직은 때가 좋지 않았다. 그 대신 카운슬링을 좋아하는 동완이를 위해, 또 수페리우스 자신을 위한 화제를 도마 위에 올렸다. 룸펜에 다녀오니 걱정되었던 스스로를 말이다. “나는 늘 밑바닥이라는 것을 떨쳐 내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 참담하고도 아늑한 밑바닥까지 가면, 벗어나는 게 순서라고 여겼어.” “…….” 기억하고 있어. 지금도 손이 떨려 와. 감각 마디마디 테레사의 악장이 나를 잡아당기는 거야. 천주를 껴안은 들 이와 비슷할까. 나는 에튜드의 카덴차 부분을 연주하며 나를 봤어. 이건 어떤 기적일 것 같니. 나는 피아노를 통해서 진정한 ‘나’를 본 거야! 그 뒤의 ‘나’는 여기에서 그 때의 ‘나’를 떠들어. 코코아의 향기를 맡으며 혜성은 밑바닥의 정의를 다시 내렸다. 눈시울이 그렁그렁해진 채 하얀 섬광이 내부에 쳐들어오는 것을 아련히 응시했다. 갑자기 모든 장면이 민우로 보였다. 가슴에 알알이 맺힌 그리움의 열매가 붉게 터진다. “하지만… 민우가 살아 있었다면 이렇게 말 해 줬을 것 같다.” “…….” “밑바닥이란 벗어나는 게 아니라 평생 지녀도 괜찮은 또 하나의 보석이라고… 그것 역시 앎이라고….” “…….” 민우의 입술은 늘 새로운 것을, 그러나 현실과 관련된 것을 알려 줬었다. 그가 살아있다면, 그가 살아있다면. 아이는 도라 질을 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떨쳐내는 게 쉽지 않고, 늘 떨쳐 냈다고 여겼으면서도 그게 아니었는데…….” “…….” 기도와 같은 음성은 한 데 짙어진다. 동완은 내심 놀라는 눈치였다. “고통에의 추억과 무기력했던 모든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던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니까 편해졌거든. 나는 또 변하는 중이겠지… 좋은 것만 받아들인다고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니지 싶거든. 내 말이 정답이었으면 좋겠어.” 내면의 성숙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동완은 감동에 인 표정으로 다정하게 말문을 열었다. 두 사람의 코코아는 점점 식어가지만, 반대로 우정은 봄꽃처럼 만개한다. “…너는 고통을 이해했구나.” “뭐…라고?” 가장 따스한 계절의 꽃처럼 피어나는 언어가 있다. “고통이란 상황이 될 수 없어. 그 상황에서 갖는 두려움이 바로 고통인 거니까.” “!” 파란 사과의 색이 짙어진다. 둘의 붉어진 우정처럼 초록의 젊음은 더 멋진 옷을 입기 시작했다. 동완은 명확한 내용을 떠들며 흥분에 젖었다. 그는 자신의 분야가 나올 때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래, 그것은 마치… 테레사의 에튜드 집에 흥분했던 혜성의 눈망울과 닮아있었다. “그것과 맞서는 것, 그렇게 두려움을 수용하고 자연스럽게 대하는 게 방법 중에 하나거든. 나는 줄줄이 무슨 일이 생기면 지금처럼 떠드는 게 일상다반사니까, 이게 나의 두려움과 맞서는 방식이지. 내가 지금 말하는 건, 너는 고통을 이해했다는 것. 그거야.” “…….” 동완의 전체에 빛이 나왔다. 혜성의 시야에는 그의 근사함이 보였다. 믿어지지 않지만 보였다. “고통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되면, 정작 실제의 고통 보다는 ‘두려움’의 고통으로 끝난 다는 말이 있지.” “오! 너는 참말로 천재 같구나!” 수페리우스는 한 편의 기가 막힌 오페라를 감상한 것처럼 탄성을 질렀다. 네 말이 매우 멋지다는 말과 함께 박수를 쳤다. 덕분에 동완의 어깨가 실룩거렸다. “틀림없이 과거에는 유명한 주술사였을 거야!” “그래? 나는 어느 나라의 주술사였을 것 같니?” 순간 스치는 발상이 대답하기 곤란했는지 혜성은 멋쩍게 웃었다. “……글쎄.” “어디?” 슬금슬금 몸을 일으키며 혜성은 머리를 긁적였다. “다 네 피부가 검은 편에 속한 탓이겠지…….” “…어느 나라가 생각났는데?” 혜성을 따라 일어서며 동완은 아우성을 쳤다. 아이는 몸을 웅크리며 아주 작게 대답했다. “…적도기니.” “!!” 적도기니! 적도기니 주술사! 졸지에 적도기니의 오래 된 주술사로 전락한 동완이 아까의 평화로움은 온데간데없이 흥분해서 길길이 날뛰었다. 그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혜성이 마지막에 코코아에 타려던 프림을 홧김에 창밖으로 던졌다. “!” “!” 프림을 던지다니! 동완 못지않게 화가 난 혜성이 고래 성을 질렀다. 두 사람은 가볍게 주먹질을 하며 방 안을 어지럽혔다. 빈 술병들이 머리맡에 닿을 때가 되어서야 씩씩거리던 둘의 몸은 떨어졌다. 그러나 둘의 싸움은 칼로 물 베기나 다름없었다. 유치한 어린아이와 같아서 둘은 서로에게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일으켜 세워줬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완이는 새로운 프림을 가져오겠다며 세 번째로 남쪽 기숙사에 다녀오기까지 했다. 이제 동완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두 번 다시 프림을 창 밖에 던지지는 않을 것이다. 대화는 다시 진행되었다. 이번에는 동완이 주로 얘기를 꺼냈다. 선호 선배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이 요즘 공부하는 목록을 읊으며 그는 눈을 빛냈다. ‘이미지’라는 단어가 동완의 입에 자주 오르자 혜성은 순식간에 침울해졌다. 동완은 잠시 말을 멈추고 왜 그러냐며 신경질을 부렸다. 혜성은 침울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아이가 두려움에 대한 화제로 아까 전에 열을 올렸듯이, 어느새 자기의 이미지는 이상하게 인식된 게 아닌가 싶어서 걱정되었다. 마음 그대로를 담아 혜성은 동완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내 성격이 무겁게 변해 보이니, 동완아…? 미래의 심리학자가 될 지도 모르는 이여…….” 그러나 동완의 대답은 매우 명쾌했다. “성격의 변화만 묻는다면, 대답은 노야.” “…어째서? 나는 내가 술을 마시고, 룸펜에서 멋대로 구는 것을 보면 변한 것 같아서 씁쓸하다.” “성격이란 쉽게 바뀌는 게 아니니까.” “…….”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이지. 너는 네가 술을 마시고, 가끔 너도 모르는 모양새를 부린다며 성격 운운하지만 그것과 변화는 달라.” “…어떻게?” 순간 화색이 돌아온 혜성이 괜스레 동완의 어깨를 툭툭 쓸어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단편적인 경우만 들어서는 성향을 딱 잘라 판가름 할 수 없으니까. 네가 원래부터 공격적 성격이 있고 나태한 천성이 있어서 요즘의 행동이 유발된 건 아니잖니.” “아…!” 과거에는 적도기니의 주술사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누구보다 심리학에 열정을 보이는 자가 똑똑한 입술을 떠든다. “성격이 아니라, 상황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된 사건은 성격을 결정지을 수 없는 거야. 긴 시간 너와 함께 하면서 내가 판단하기를, 너의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성은 괴팍하지 않거든. 굳이 따진다면 약간의 이차적 특질이라고나 할까? 여기선 정돈된 애가 다른 데선 망나니가 된다면야… 그래도 뭐… 가끔 술을 마시거나 말을 쏟아낼 때는 이렇게 생각하지.” “어떤…?” “이민우랑 참 많이 친했었구나.” “!” 가슴에 모래가 떨어졌다. 혜성은 사무치는 그리움과 평화를 억지로 끌어안으며 한동안 눈동자를 흐렸다. 동완은 혜성이 다른 얘기를 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이야기는 전혀 바닥날 기미라는 게 없었다. 그만큼 영적으로 묶인 두 사람의 우정은 가볍고도 진하게, 무겁고도 상쾌하게 이어진다.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어, 학생 식당에 다녀오던 길에 혜성은 순간 번쩍 지난 것을 동완에게 물었다. “아! 동완아. 그럼 모세의 성격은 네가 봤을 때 어떠니?” “모세?” 그는 모세라는 이름이 나오자 방금 먹은 것을 토할 것 마냥 인상을 구겼다. 이렇게 한가롭고 좋은 분위기에 찬 물을 끼얹느냐며 분수대 주변을 동그랗게 걸었다. “내 표정만 봐도 알겠지. 너도 인상이 안 좋잖니. 왜 갑자기 모세니?!” “그러게.” 낑낑대며 분수대의 언 부분을 오르더니 상쾌한 바람을 쏘이며 동완이 가르치듯 말하였다. “생각해 봐. 모세가 사랑하는 게 이자벨인데, 이자벨은 테레사를 원하잖아.” “…….” 테레사. 그렇지! 동완의 옆에 함께 기어 올라간 뒤 약간 낮아진 주변을 응시하며 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몇 학생들이 두 사람을 알아보고는 자신들과 같이 휴가 때 머물러 있음을 반가워해 왔다. 잠시 대화가 끊긴 둘은 그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눴다. 해는 점점 기울어지고 있었다. 모세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나온 것은 두 사람이 혜성의 기숙사 방으로 돌아 와서 였다. “애당초 상대가 되지도 않는 거지. 열등감이라는 게 모세와 함께 할 거다. 우월성 추구를 향한 정상적인 과정에서 아예 빗나간 사람은 일종의 그…….” “그……?” “성격장애를 일으킨다던데, 모세가 그렇지. 한 참 자랄 시기에 그의 뇌는 억눌리기부터 했으니까. 열등 콤플렉스를 지닌 사람은 인생의 도전이니 극복이니 노력이니 이 따위 것을 몰라. 오히려 그것을 감추기 위해 자기를 무리해서 엉뚱한 걸 과시하려 들지.” “과시라…….” 모세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 동완이 기특했는지 뭐라고 대답을 해 주려고 했지만, 혜성은 떠오르는 게 없었다. 어깨가 으쓱해진 동완은 테레사를 흉내 내는 것처럼 샤프하게 웃더니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가십.” “!” 후식으로 나온 귤을 바리바리 싸 왔던 혜성은 귤 덩어리를 막 입에 넣은 채로 놀라서 굳었다. 가십! 그렇지! 모세의 힘은 가십에 쏠려있지! “테~오제네스도 그의 글재주는 인정한 형편이잖니. 독설가와 같아. 비판 능력이 남달라. 즉, 요점을 캐내고 정확한 것을 짚는 능력이 확실히 있지. 별자리는 혹시 처녀자리인가? 어쨌든, 그가 이자벨이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과묵하고 멋진 글만 적어낼 위인 이었을 텐데… 가십은 그의 무기이자 방패지.” “…그렇지. 애들도 모세의 가십에는 열을 올리니까. 테오제네스 것 못지않게.” “그래도…….” “……?” “아마 그 힘도 잃으면, 그는 어떻게 변할 지 나조차도 당장 예측 못 하겠다. 공격적인 성향이 발달하겠지만… 공부가 부족해.” “하하하하….” “혜성아. 그런데… 너… 전야제날에는 룸펜에 갔다고 치고… 나머지 이틀은 어디에서 뭘 한 거니? 애들은 축제에 들떠서 몰랐을 테지만… 난 눈치 챘지.” “축제에 들뜨기는. 겨울 휴가니까 들뜨고 애들이 없었는걸 뭐. 봐. 텅 비었잖아.” “음…….” “난 어디에도 가지 않았어.” “……?” “계~~에속, 학교에 있었다.” “으잉?” 동완은 이틀 동안 혜성이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궁금해 했다. 뭔가가 분명히 있을 거라 여겼는지 계속 추궁한다. 혜성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이 겪었던 이틀을 대답해 주려 했으나, 이번에는 프란체스코와 미카엘 선배가 들이닥쳤다. “선배!” 자신이 혜성에게 뭘 물었는지도 까먹은 동완은 화색이 돌아서 선호를 반겼다. 끌어안을 것처럼 팔을 벌렸다가 주변 눈치를 보며 스르르 내렸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겨울 휴가 중인 두 사람이 왔다는 게 반가워서 혜성은 가볍게 인사를 건넸고 동완은 오두방정을 떨었다. “휴가에서 벌써 돌아 온 거예요? 저를 위해서?” 서슴없는 질문에 기가 막혔는지 선호는 잠깐 굳었던 자세를 풀고 쌀쌀맞은 대답만 했다. “…감기로 앓아누웠다는 편지를 오늘 오전 받기는 했지.” “!”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다. 아프다는 놈이 편지를 제대로 보냈다는 게.” 순간 당황한 동완이 억지로 기침을 하더니 혜성의 침대에 아예 누워버렸다. 선호가 더 심한 소릴 내뱉으려던 찰나 덜덜 떨며 몸을 추스르던 프란체스코가 불쑥 끼어들었다. “오후 내내 창문을 열어놨다고? 그러니까 이렇게 냉랭하지. 테오제네스가 도와 달라고 해서 기숙사장들은 휴가가 이틀밖에 없었어. 원래. 동완아. 네가 편지로 닦달하지 않아도 선호는 돌아왔어야 돼.” “윽.” 이불을 덮고 있는 동완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한바탕 크게 웃은 뒤, 혜성은 궁금하다는 듯 막 코코아를 들이키는 프란체스코에게 다가갔다. “테오제네스가? 그가 왜?” “1월 콩 쿨 때 만들 팸플릿 때문이지. 그도 곤란한 입장인가 봐. 보스턴에서 테레사가 급하게 호출하는 바람에 기숙사장들이 발 벗고 나서서 인쇄 동을 도와야 하거든.” 테레사… 그의 이름에 넋을 잃을 번 한 혜성은 용케 다시 물었다. “인쇄 동에서는 가십만 만드는 게 아니었니?” “보수를 받는 일꾼들이 있긴 하지만, 가십을 비롯해서 학교 행사 관련 팸플릿도 거기서 나오니까. 테오제네스가 지시를 내려야 상황이 돌아가지.” “그래…….” 혜성이 대답을 흐리자 동완의 엉덩이 부분을 발로 차던 선호가 유유히 다가와서 끼어들었다. “모세는 이자벨을 따라서 프랑스로 가 버렸잖아. 핑계도 좋지. 프랑스에서 초연하는 뭐가 있다던데 거기에 예약이 되어 있어서 바오르 신부님한테까지 허락을 미리 받아놨대. 테오제네스가 상당히 열 받은 상태야.” “역시 모세답구나. 그는 기사잖아요.” 이 때 동완이 기침하는 연기를 하다 말고 걔가 기사면 나는 주술사다! 라고 소리 지르는 바람에 이유 없이 뺨이 달아오른 선호가 그의 머리통을 쳤다. 두 사람이 옥신각신 하는 사이 뜨거운 코코아를 다 마신 프란체스코가 나갈 채비를 꾸리며 다정하게 물어왔다. “아, 수페리우스. 너도 갈래? 인쇄 동 내부를 구경하는 기회일 텐데.” “아니. 나는 내일쯤 가서 도와줄게. 미안.” 그러자 두터운 코트를 걸친 선호가 냉랭한 채로 도어를 나서며 묘한 문장을 남겼다. “미안할 것까지야. 여기 남아도는 인력 하나 있으니까 괜찮다, 수페리우스. 감기는 다 나은 것 같으니.” “…….” “…….” “…….” 결국 동완이까지 신이 나서 선호를 따라 기숙사 방을 나갔다. 밤 여덟시가 되자 시계탑의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렸다. 그 소리는 꽃이 붉은 봉오리를 벌리는 것처럼 탐스럽게 느껴져서 혜성은 넋을 잃고 경청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잘 들리지 않았을 소리가, 텅 빈 공간을 원 없이 돌아다니는 것이다. 혜성은 언제 ‘그곳’을 다시 찾아가면 좋을지 골몰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로미오의 굳은 표정이 스쳐 지났다. 지난 이틀 내내 로미오를 떨쳐 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룸펜에서의 에튜드를 잠재울 정도의 힘이 지난 이틀 동안 수페리우스와 함께 했었다. 그 애도 알겠지. 내가 이틀 동안 ‘그곳’ 이후로 저를 피한 것을. 시계탑의 마지막 종소리가 지날 때,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 했다. 똑똑똑. 소리는 조심스러웠다. 만약 선호나 동완이었으면 ‘수페리우스!’라고 부를 게 틀림없었기에 아이는 괜스레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문 쪽으로 향했다. 혹시 인쇄 동으로 와서 일을 하라는 걸까? 오늘은 정말 그럴 기분이 아닌데. 혜성은 최대한 피곤한 낯으로 문을 열더니 살며시 얼굴만 내밀었다. “누구세요……?” “…….” “으잉?” 순간 시야가 가려졌다. 한 뼘만 도어를 열고 머리통을 내민 수페리우스의 이마에 턱~하니 종이가 붙어져서였다. 윽. 이게 뭐야! 당황한 혜성이 종이와 테이프를 떼어내 봤지만 종이에는 아무런 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설마… 아이는 천천히 문에 매달린 채 뺨을 올렸다. “…….” “…….” 로미오가 엄청난 시선으로 내려 보고 있었다. 아니다. 부리부리하면서도 어쩐지 안쓰러움을 담은 시선은 연회색 눈동자를 쉬이 유추할 수 없게끔 했다. 두 사람은 한 참 동안 서로를 마주쳤다. 이윽고 혜성이 꼼지락 거리며 엉덩이를 뒤로 빼고 문을 닫으려 하자, 로미오가 이상한 것을 말했다. “창문 열고 바람 좀 쐬요.” “……?” 하루 종일 창문을 열어놨었는데 또 바람을 쐬라니. 그 말만 들어도 으슬으슬 떨렸는지 수페리우스는 이마를 문지르며 침대에 들어갔다. 느닷없이 가슴이 뛰었다. ‘그곳’ 이후로 이틀이 지난 현재, 로미오가 예전의 로미오로 보이지 않아서였다. 바야흐로 밤 열 시가 되자 시계탑의 은은한 소리는 아까보다 진하게 들렸다. 혜성은 동완에게 찾아가 봐야겠다는 결심을 하며 두터 운 옷을 챙겨 입었다. 그 때, 뒤통수를 때리듯 알싸하게 스치는 생각덕분에 눈동자는 경련을 일으켰다. 혹시! 아이는 후다닥 창가로 뛰어서 양 손으로 창문을 활짝 열었다. 1층 기숙사 창 아래에는 언젠가부터 내렸는지 통 알 수 없는 눈을 맞아가며 눈사람이 된 자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미오야.” 혜성이 몇 번이나 미오야, 미오야, 라고 부르는데도 입이 얼었는지 그는 덜덜 떨면서 팔 장을 낀 채 노골적으로 노려봤다. 다시 창문을 닫으려고 문고리를 쥐자 그는 꽥 소리쳤다. “왜 이제 열어!?” “!” “머, 멍청아! 그렇게 못 알아 듣냐!” “하하하하…….” 함박눈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로미오는 오기를 부리듯 한 자리에서 아이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의 건방진 말투보다 그 점이 놀라웠던 수페리우스는 엷게 미소 지었다. 둘은 또 침묵했다. 별처럼 쏟아지는 함박눈은 크리스마스 전야제처럼 싱그러웠다. “거, 거, 걱정했잖아요. 이, 이틀 동안 나오, 나오지도 않고… 다시 ‘그곳’에 찾아 올 줄 아, 알았는데…….” “…….” 로미오는 이틀 내내 고민했던 흔적을 애써 참아가며 창백하게 떠들었다. 그의 입술은 추위에 밀려 파랗게 트여있었다. 혜성은 동완이 남기고 간 따뜻한 코코아를 데워서 그에게 내밀었다. 천천히 받은 뒤 로미오는 코를 훌쩍이며 마셨다. 약간 추위가 풀린 그는 다정한 시선을 담아 수페리우스를 올려보았다. “아무 말이나 해 봐요. 너무 놀라서 정신이 이상해진 건 아닌가요?” “…….” “가나다라마바사. 이런 말이라도 해 봐요 선배.” “…고노도로모보소.” “고……!” “후후후훗….” “진짜 괜찮은 거예요? 선배? 닭!” “…….” 둘이 또 조용해지자, 더 먼 곳에서 아주 작은 성가가 귓가로 파고들어왔다. 성가대 연습실에서 연습 중일 미카엘 성가대의 화음소리였다. 매우 아름답고 청량했지만 그 소리는 숨을 죽이고 바짝 귀를 기울일 때만 겨우 들렸다. 로미오도 그 소리를 눈치 챘는지 작게 물어왔다. “선배… 예전에 미카엘 성가대 소프라노였다는 게 사실 이예요?” “…….” “지금은 미사에도 나오지 않는다던데, 왜 그러는 거지요? 성가대 애들은 수페리우스의 목소리를 이젠 그리스 신화처럼 자랑하면서 떠들어요.” “…….” “신입생들은 어리다는 이유로 선배의 목소리도 모르잖아요. 듣자하니 과거의 슈베르트 미성을 능가할 정도로 소름끼치게 한다던데…….” “…….” “아무 말이나 해 봐요.” 로미오의 눈동자에 스스로가 겹친다. 수페리우스의 안면에 민우가 겹친다. 혜성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돌연 양 팔을 쭉 내밀고 미간을 찌푸린 채 웅변하듯 외쳤다. “오오 로~미오. 로~미오!” “?” 깜짝 놀란 로미오는 돌처럼 굳는 것도 모자라 반쯤 남은 코코아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로미오님! 당신 이름이 당신을 제 적으로 만드는군요. 몬타규가 뭔가요? 손이나 발도 아니고, 팔이나 얼굴도 아니고, 그 다른 어떤 몸의 부위도 아닌데, 이름이 바뀐다고 뭐 그렇게 틀려질게 있나요?” “…선배…?” “이름이 뭔가요? 우리가 장미를 그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장미 향기를 낼 텐데!” “미쳤어!” “로미오도 마찬가지잖아요! 당신을 뭐라고 부르든 당신의 완벽함은 바뀌지 않을 텐데! 이름을 버리세요. 로미오, 그리고 저와 함께 해요.” “선배… 술을 끊어 봐요. 미친 닭. 술을 끊어.” “…방금 한 말은 농담 이었어요 로미오, 오오 로미오~” “?!” 혜성의 장난에 그제 서야 화색이 돈 로미오는 진심으로 미소 지었다. 혜성은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관계없이 흥분해서 외쳤다. “모르셨군요! 당신의 이름이 사실 좋아요. 당신이 내 앞에서, 힘들게 이민우라는 이름을 버리고 싶어 했던 이유가 좋아져서.” “!” 로미오의 영혼이 얼어붙을 때가 되어서야 혜성은 웅변을 마쳤다. 그리고 다시 서로를 보았다.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혜성은 대롱대롱 창가에 매달린 채 작게 중얼거렸다. “…추워… 미오야…….” “안아줘요? 안아줄까요? 꼭 껴안아 줄게요!” “너 몸이 더 차가워 보여.” “그렇지 않아요! 이리 뛰어 내려요! 안아줄게요!” ‘그곳’ 이후로 둘은 이상해졌다.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랬다. 당장이라도 뛰어 오를 것처럼 열정적이게 된 로미오가 기쁨을 외치자 혜성은 도라 질을 쳤다. 아이는 먼 곳을 응시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하늘과… 천주께… 영광…….” “!” 로미오는 숨을 참았다. 기가 막힌 음성이 과거 슈베르트의 미성을 넘는 실력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저 멀리 성가대실의 작은 소리를 들으며, 혜성은 소프라노를 작게 부르기 시작했다. 아마데우스에 돌아온 뒤, 스스로에게 벌을 주듯 단 한 번도 성당에 찾아가거나 성가대를 찾은 적 없던 아이가 유일한 좌중인 로미오에게 첫 음성을 열어준 것이다. “Qui venit in nomine Benedictus in nomine Domini…….” “…….” 먹구름이 비켜갈 때, 눈이 그쳤다. 탐스러운 달이 떠올라 서 쪽 기숙사동을 배회했다. 아이의 청아한 음성이 짜릿하게 퍼져갈 때, 성가대의 거룩하시다 역시 절정을 달렸다. 수페리우스의 가성은 천사를 상상케 할 정도였다. 로미오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머리를 뚫고 하늘로 거스르는 박자가 있다. “하늘과 땅에 가득한 그 영광…….” “…….” 이윽고 아이의 상기된 뺨이 경련이라도 일으킬 양 떨리며 작은 입술을 크게 벌릴 때, “Sanctus…!” “!” 로미오는 저도 모르게 팔을 내밀었다. 수페리우스가 사라질 것처럼 보여서 였다. 그러나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사라지지는 않았다. 지난 날, 크리스마스 때 쟁취한 선율이 그대로 터져 나왔다. 비록 작게 속삭이는 수준이었지만 청아한 음성은 여전했다. 자연은 숨을 죽인 채 조용히 있다가 혜성이 천천히 눈을 떠서야 새의 날개 짓을 도왔다. 바람에 낙엽을 섞었으며 나뭇가지를 움직였다. 꿈을 꾼 듯 황홀해진 로미오를 내려 보며 혜성은 부드럽게 중얼거렸다. “…선물이다.” “…….” 혜성의 눈망울도 젖어 있었다. 아이는 편안하게 중얼거리며 창문을 닫기 시작했다. “이젠 눈물이 나와… …너무 아름다운 풍경들이 어느 때보다 자세히 보여….” 창문이 거의 닫히려 하자 밑의 로미오는 난리가 났다. 그는 껑충껑충 뛰면서 수페리우스를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운 다구요? 왜 울어요! 왜 울어요!” “…잘 자라.” “!” 잠깐 머뭇거리던 수페리우스는 샐쭉한 투로 툭 말을 내뱉더니 냉큼 창문을 닫았다. “…이민우.” “선배!” 로미오의 함성이 짙어져간다. 그리고 혜성은 내일을 기약하며 잠들었다. 도대체 무슨 스토리일까? 잠깐의 이틀 동안 수페리우스에겐 어떤 일이 있었던 건가! 당신을 위하여 이제, 시간은 잠깐 이틀 전으로 되돌아간다. 수페리우스가 반 아마데우스의 약도를 정혁이에게서 받았던 그 때로, 지금의 평화는 나중으로 미룬 채……. -광기의 겨울편 끝- 사진 : 경민씨가 예전에 메모로그에 올렸던 사진입니다. 독수리 형제들이여... wgreene@naver.com 잘 모르겠지요? 다음편 보시면 이해 되실 거예요. :D 다음편을 늦게늦게 적어서 올려버릴까 싶어지는 못된 이 마음.... 댓글 고맙습니다. 시간 날 때마다 1편부터 주신 흔적들을 읽으며 저는 행복해 합니다. 함께 해 주시는 분들, 그리고 새롭게 나타나시는 모든 분들께 바라는 일 모두 이뤄지기를 기도하며... 방울님, 포근구름님, khshinae님, 아기해달님, 로아님, 셂님, 리에뜨님, 솨, 빵글이셩님, 린님, 다큰엔젤님, 안젤리스님, 주황, 박카스정님, 혀니차니님, 기린아님, 그리고 이 글을 지켜보고 계시는 당신 역시.. 고맙습니다.^^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습니다. 멋진 날들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화이트그린 올림- 덧글 16개 엮인글 쓰기 /data18/2006/9/25/257/1324-wgreene.jpg@nhn@65116@nhn@1@nhn@480@nhn@360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49편 /data18/2006/9/25/257/1324-wgreene.jpg@nhn@65116@nhn@1@nhn@480@nhn@360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49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50편(천년의 이틀) ▼ 다음글 - 2악장 47~48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50편(천년의 이틀)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9/26 19:55 http://blog.naver.com/wgreene/110009138019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926 50편 업데) Amadeus 음악 : Earth Song / Michael Jackson (아래 플레이클릭) Earth Song-Michael Jac.. 쇼너 스타니 2악장 50편 성탄절 새벽, 혜성은 틀림없이 정혁으로부터 반 아마데우스의 약도를 받았었다. 당장 찾아가겠노라 그는 결심했다. 반면 정혁이가 떠난 뒤, 이태원은 물론이고 학교의 모든 인원을 붙여봤자 자신의 곁에는 아무도 없음이 피부에 와 닿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성은 두렵거나 부담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홀가분했다. 만약 자신이 학생회 임원이었거나 전보다 큰 기대를 안고 있었다면 약도가 손에 들어와도 무용지물 이었을 테니. 아이는 비장한 각오로 룸펜 식구들에게 굿바이 인사를 나눈 뒤, 왔던 것보다 빠르게 학교로 돌아갔다. 학교로 돌아갔다?! 이럴 수가. 정혁의 약도에 분명히 숨을 쉬는 반 아마데우스의 위치는 학교 안에서 시작되었다. 혜성은 몇 번이나 무릎이 풀려서 허둥댔다. 그만큼 눈동자는 멀건 죽을 쑨 것처럼 흐렸다. 그토록 고민하던 위치가 먼 곳도 아닌 아마데우스 안의 반 아마데우스라니! 아이는 그들에 대한 두려움보다 의외의 진실 앞의 경이로움으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뇌를 조이는 야릇한 감각이 전신에 명령을 내려서 몸은 기계처럼 움직였다. 자신은 숨을 쉬지도 않는 고체로 변한 것 같았다. 성탄절 오전 7시. 혜성은 남들 모르게 아마데우스 학교로 들어 올 수 있었다. 학생들은 새벽까지 이어졌던 전야제와, 채 흥분이 가시기도 전에 치러진 미사 덕분에 곯아떨어진 모양이었다. 그 중에는 벌써 휴가를 즐기기 위해 나간 사람도 상당했을 터, 학교는 건물만이 존재했다. “…….” 곧장 지도를 따라 가려던 혜성은 만약을 대비해 두기로 했다. 곧장 ‘그곳’에 가려던 걸음이 남쪽 기숙사로 향했다. 아이는 늘 익숙하고 정겨웠던 학교가 낯설고 두려웠다. 아니다. 두렵지는 않지만 평소대로의 감각을 지니며 거닐 수가 없었다. 어디서 누가 튀어 나와 자신을 끌고 가는듯한 착각에 얽매여 온 몸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아이는 로미오가 자신에게 했던 방법대로 곤히 잠들어 있는 동완의 기숙사방문 앞에 메시지를 부착했다. 이틀 후에 서쪽 기숙사로 찾아오라는 내용과 함께 추신으로 코코아를 꼭 가져오라고 적었다. 그 때 방문이 벌컥 열리며 부스스 한 동완이 얼굴을 내밀었다. 흠칫 놀란 혜성 못지않게 놀란 동완이가 웬일이냐며 실실 웃었다. “왜?” 이틀 뒤에 기숙사로 찾아오라며 부드럽게 말문을 여는 혜성이 수상쩍었는지 동완은 서서히 잠을 몰아내며 추궁했다. 아이는 조급해졌다. 그러나 지금의 긴장감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평소대로 굴었다. 10분 정도 동완의 방에서 여유롭게 웃으며 룸펜에서 정혁이를 만난 것만 살짝 언급했다. 동완이는 그제 서야 안심했는지 이틀 후에 찾아가겠다는 것에 고개를 끄덕였다. 메리 크리스마스! 남쪽 기숙사를 빠져나오는 길에 이른 잠에서 깬 소수의 무리들이 수페리우스를 보고는 환하게 말을 붙였다. 아이는 그들보다 자유분방한 태도로 대응했다. 잠시 후,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 한 뒤, 수페리우스는 바지 주머니에 구겨 넣었던 종이를 꺼냈다. 파란 햇살이 찰랑이고 있었다. 경건하게 호흡을 하고, 약간의 명상을 취하자 마음은 처음보다 안정되었다. 깊은 밤에 찾아가는 게 정석이겠지만, 수페리우스에게 시간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마음이 동했을 때 움직이는 게 버릇이 되어서 기다릴 수 없었다. 오전 여덟시 시계탑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명상에서 눈을 뜬 수페리우스는 비장한 각오와 함께 주먹을 불끈 쥐고 데블관의 커다란 문을 열었다. 까악- 기괴한 문소리와 함께 데블관을 치장하고 있는 낮에도 어두운 뒷산의 까마귀 몇 마리가 혼비백산 달아났다. 천년의 이틀 데블관은 으스스했다. 채 가시지 않은 습기가 연기처럼 자욱했다. 혁명 이후로 학생들이 데블관을 전보다 찾지 않았기 때문에, 멋진 건물은 위엄함을 뽐내며 사람 없는 공간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도록 변했다. 혜성은 차분히 내부에 들어섰다. 캉- 캉- 걷는 족족 필요 이상으로 울리는 구두 소리가 7층 높이의 뻥 뚫린 천정까지 크게 울렸다. 어두운 내부는 벽화로 이어져 있었다. 천국을 상징하는 신들의 벽화였지만 어두움에 가려지니 화염에 울부짖는 사형수처럼 시야에 비쳤다. 작은 호롱불이 섬섬히 밝혀져 수페리우스의 걸음을 인도했다. 혁명 이후로 복구된 데블관은 11층 높이였지만 이곳은 늘 조용했다. 가끔 유명 인사들이 아마데우스 연주회장을 찾을 때만 3층까지 개방하는 탓에 곳곳에 장식된 동상들이 사람처럼 느껴졌다. 계단을 오르자 구두 소리는 더 크게 번졌다. 혜성은 자신의 발소리에 놀라서 몇 번이나 호흡을 가다듬은 채 손바닥의 땀을 털어냈다. 열기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정혁이 좋아했던 곳, 위원회와 테레사가 계시던 곳, 그래서 스산함 보다는 고풍이 자리하던 곳, 그 곳이 이렇게나 사납게 바뀐 것이다. 아이의 입가에 자연스러운 탄식이 여러 번 쏟아졌다. 복구된 흔적은 창문에도 있었다. 창문은 모두 까만 벽화에서 이어지도록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곳에서는 하프의 선율도, 낮과 밤도 분별할 수 없도록 사람을 희롱했다. 혜성은 아마데우스에 돌아온 이래 단 한 번도 데블관 내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들의 트릭은 완벽해. 나조차도 들어오지 않았었잖아. 소문이란 게 무엇인지 경험하질 않았던가. 사람의 말은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킨다. 데블관의 소문은 어땠을까? 무서운 곳? 오히려 그랬다면 몇 몇 호기심 많은 아이들은 이곳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데블관은 소문이란 게 없었다. 아예 없는 곳, 무지한 곳, 그래서 굳이 찾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동완이를 데려올 걸 그랬나? 아니면 로미오라도! 그래. 로미오를 지금이라도 불러야 할까. 아이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해졌다. 그러면서도 계속 나아갔다. 지도에 적힌 정혁의 필체는 호롱불을 따라가도록 아이를 유도했다. 주홍색 호롱불은 층이 높아질수록 색이 짙어졌다. 수페리우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주변을 샅샅이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없어서 돌아보게 됐다. 지도의 중심부인 데블관 4층 복도의 끝 방에 도착했을 때, 혜성은 자신이 숨을 쉬는 시간과 공간이 멈춘 듯한 착각에 빠졌다. 지금이라도 벗어날까? 아니, 벗어날 수 있을까? 여기는 아마데우스가 아니라 또 다른 차원의 공간이 아닐까? 늦은 게 아닐까? 밖으로 나갔을 때 세상은 백 년, 이백년이 지나 있는 건 아닐까? 속절없는 두려움이 밀려와서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끼이이익. 아이는 끝 방의 문을 열었다. 돌아갈 수 없어. 어차피 다시 오게 될 길, 나는 돌아갈 수 없어. “…….” 끝 방에는 호롱불이 없었다. 정혁의 약도 역시 진즉에 그 설명을 붙였었다. 혜성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조용히 발끝을 세워 걸었다. 캉-! 방금 열었던 문이 닫혔다. 아이는 비명을 지르는 표정으로 문에 달려들었다.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쏟아지지 않았다. 덜컹, 덜컹! 여러 번 문을 흔들어 봤자 자력으로 닫힌 그 문은 절대 열리지 않았다. “하아. 하아…….” 숨이 막혀오는 현재, 관자놀이 부근에 땀이 주룩 흘렀다. 혜성은 도어를 열어 봤자 자신은 나가지 않을 것이었다며 스스로를 위안한 뒤, 아까보다 빠르게 책장에 다가갔다. 넓은 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벽 구석에 낡은 이끼처럼 까만 물체가 아른거리기만 했다. 그것이 약도에 적힌 책꽂이일 거라 여긴 혜성은 있는 힘껏 옆으로 밀어 보았다. “으윽.” 책꽂이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옮겨서 밀었다. 흔한 트릭인데도 불구하고, 이 책꽂이의 발상은 약도에 적힌 대로였다. 문이 열린 것이다! 아니, 책꽂이가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절대 무음이 청각을 죽이기 시작했다. 블랙홀처럼 까만 통로와 아래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돌계단이 아이를 반겼다. 얕은 호롱불이 다시 나타나서 아이는 그것만으로도 안심했는지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테레사… 테레사… 테레사….” 입술은 그를 찾았다. 한 번 시작된 그의 이름은 한 참 뒤 계단의 마지막을 밟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혜성은 절대무음의 공간에 있어 본 적이 없었다. 학교는 시끄러웠다. 음악이 있었으며, 음악이 없다 한 들 자연의 풍부한 소리가 늘 함께 했었다. 룸펜 역시 시끄러웠었다. 그러나 데블관과 지금 계단은 소리를 내는 자가 죄를 짓는 기분에 들게 했다. 절대무음, 여기는 지옥이었다. 계단 끝은 미로처럼 복잡했지만 길은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혜성은 문득 신기해졌다. 혁명 이후로 반쯤 붕괴되었던 이 건물을 복구할 때,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선동했을까. 누가 감히! 아마데우스의 서 쪽에 위치한 데블관의 지하. 그 길은 어둡고 습한데다가 추웠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시간과 공간을 잃은 수페리우스는 무감각하게 긴 시간 걸었다. 그리고 도착했다. 얕은 빛이 희미하게 이마에 미칠 때, 수페리우스는 기쁨으로 뛰는 심장을 붙들었다. 미카엘 성가대의 거룩하시다를 감상한 것보다도 심장이 기쁘게 뛰었다. 가까스로 쥔 빛은 다름 아닌, 도어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전구에서 비롯되었다. 혜성은 조심조심 막다른 곳의 도어를 열었다. “…….” 여전히 숨은 쉬어지지 않았다. 팽창된 긴장이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아찔했다. 한 걸음 안쪽으로 들어가려는 때, 낯선 뭔가가 수페리우스의 입을 틀어막았다. “!” 놀란 혜성이 발버둥치기도 전에, 그는 혜성의 허리를 끌어안고 질질 끌었다. 죽음! 순간 죽음이라는 글자가 휙 스쳤다. 그러자 살아야 한다는 욕망 역시 거칠게 솟구쳤다. 아이가 팔꿈치에 힘을 줄 무렵, 으슥한 어딘가에 선 괴한이 입을 열었다. “…여기가 룸펜인가요.” “?” 싸늘한 통증처럼 감각 마디마디에 소름이 돋았다. 워낙 긴장하고 있던 터라 혜성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인식하지 못했다. 그는 곧 벽의 무언가를 건드렸다. 틱- 백열등이 밝혀졌다. 혜성은 자신에게 말을 건 치를 확인했다. “여기가 룸펜 이냐 구요.” “로… 로…….” 잠깐이지만 시야가 까맣게 흩어졌다. 전신에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거대한 충격과 안도가 한꺼번에 피어난 바람에 혜성은 휘청 였다. 다시 봐도 좁은 공간의 백열등을 머리에 이고 내려 보는 이는 로미오였다. “너…!” 혜성은 떨리는 팔을 올렸지만 그보다 로미오가 빨랐다. 그는 날렵한 솜씨로 혜성의 팔목을 그러쥐더니 세게 노려봤다. “돌아가.” “…….” “어서.” “…….” 그는 진즉부터 룸펜에 가겠다는 혜성을 의심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아이는 정말로 룸펜에 다녀오질 않았던가. 너무 많은 것들이 하루 사이에 빚어져서 아이는 순간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에튜드의 카덴차, 카덴차. 정혁의 분노, 한스 와의 즐거움, 그리고…… 생각을 지탱할수록 영혼은 지쳐갔다. 단호하게 내비치는 로미오의 입술이 한 없이 원망스러웠다. 혜성은 이를 악 물고 천천히 읊조렸다. “역시 네가 대표였군.” “…….” 로미오는 더 세게 팔목을 쥐었다. 무기력해진 혜성의 입가에 아픈 신음이 나올 때도 힘을 풀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혜성을 문 밖으로 내 던질 것처럼 질질 끌면서 말했다. “…누군지 모른다고 거짓말을 하긴 했지만, 저는 아닙니다. 대리인일 뿐이지요.” “그럼 대표가 누구지? 너희의 우두머리는?” 뚝. 아까의 도어 앞에 걸음을 멈춘 로미오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 “…그건 말 할 수 없어요. 돌아가요. 우리의 우두머리는 아직 선배를 볼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어째서!?” 문을 열고 절대무음의 공간으로 미는 로미오를 뿌리치며 혜성이 발작하듯 물었다. “어째서! 나는 준비가 되었어! 준비라는 게 다 뭐야! 말 해! 이젠 지겨워! 지긋지긋해! 알아야 돼! 알면 해결 할 수 있어! 이 상태에서 나가면, 나는 음악이고 뭐고 아무것도 못 해!” 막 닫으려는 문을 그러쥐고 혜성은 호소했다. 로미오의 무미건조한 눈동자에 잠깐 섬광이 스쳤다. 그러나 혜성은 그것을 발견하지 못 한 채 끝끝내 발악했다. 로미오는 저도 어쩔 수 없다고 느꼈는지 차디찬 낯으로 대답했다. 그 음성은 긴 통로에까지 울리도록 무겁고 쓰라렸다. “반 아마데우스의 우두머리는 바로…….” “…….” “…테레사 입니다.” 쾅-! 내면의 수두룩한 많은 잔여가 한꺼번에 무너진다. 절대 무음인데, 절대 무음이라서? “…뭐….” “…….” 하느님. 가장 선량하되 잔인한 당신이시여……. “지금… 뭐…….” 가장 믿음직하리라 믿었던 내 안의 신이시여……. 그리고 혜성은 까무러쳤다. 정확하게는 정신적 공황과 맞물려서 신경계가 발작했다. 스트레스와 피로는 수면을 취하지 않고 곧장 룸펜에서 정혁을 만난 것, 또 에튜드 연주에 몰입한 것, 정서적으로 안정을 꾀하기도 전에 여기에 도착한 것, 따지자면 여러 가지 이유가 섞여 있었다. 그러나 테레사 라는 이름만큼은 아니었다. 그 절대적인 이름의 값이 빛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찰나의 순간에, 혜성은 쓰러진 것이다. 절대무음을 견디게 해 주었던 이름이 터질 때, 하프의 선율마저 사라진다. 사라진다. 수페리우스의 눈이 떠 진 것은 열 세 시간이 지나서였다. 아이는 무서운 꿈을 꿨노라 여기며 익숙한 상황을 기다렸다. 평소처럼 하프의 선율이 밀려오고, 바닥에 나뒹구는 악보와 술병이 차례대로 소리를 내겠지. 서 쪽 기숙사동 밖을 날아다니는 새는 겨울의 힘에 밀려 없을 지라도, 나뭇가지들은 쌓인 눈을 떨어뜨릴 거다. “…….” 절대무음. 꿈에서 느꼈던 절대 무음의 감각이 전신에 끔찍하게 밀려왔다. 동시에 혜성은 세게 눈을 감은 뒤 다시 떠 보았다. 꿈의 장면은 여전했다. 아까의 백열등은 아니었지만, 자연의 흐느낌은 아예 사라지고 없었다.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속사포가 너울거리듯 수 만 가지가 영혼에 출렁였다. 온 몸을 덥석 끌어안는 전율은 공포 본연의 감각이었다. 혜성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커다란 예식 복이 덮여져 있었다. 그리고 예식 복을 덮어 준 로미오가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도중 혜성과 마주치더니 조용히 다가왔다. “선배….” “…….” 그가 말을 걸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는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 “괜찮아요?” “…….” 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임시방편으로 만들어 놓은 침대는 삐걱거렸다. 난로가 좁은 통풍구 쪽에서 이글이글 굽혀지고 있었다. 초라한 테이블을 제외하고는 방 안에 가구란 이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약간 트인 곳이라 사려 된 수페리우스는 나지막한 숨을 내쉬었다. “선배 기숙사로 데려다 줄게요.” “…….” “일어나요.” “…….” “업어 줄까요?” “…….” 로미오와 대화중이었던 누군가가 슬쩍 왼 쪽 문을 열고 나갔다. 오른 쪽에도 문이 있었지만 혜성의 눈에는 아직 미치지 않았다. 방금 전의 그는 어두운 중에도 세련된 아름다움을 지닌 것처럼 외형이 멋졌다. 길게 출렁이는 암회색 머리칼은 굵은 웨이브로 출렁였다. 또각 대는 구두소리는 흡사 여자의 것처럼 늘씬하고 정확했다. 얼굴은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화장을 한 것 보다 진한 입술이었다. 혜성은 멍하니 왼 쪽 도어를 쳐다보는 중에, 자신을 업으려고 팔을 잡는 로미오의 옷깃을 조용히 그러쥐었다. 그리고 차분한 투로 묻는다. “로미오.” “…….” “너는 누구니.” “…….” “너는 뭐니.” “…….” 그는 대답이 없었다. 혜성은 예상 했다는 듯, 그가 예 혹은 아니오 라고 대답할 만한 질문을 찾았다. “로미오.” “…….”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무감각의 공간에 깊게 퍼졌다. “저번 날, 신입생 연주회 때도 저 통로로 반 아마데우스가 왔던 거니. 연주회장 입구에서 보여줘야 할 초대장만 위조한 채…?” “……예.” “로미오.” “…….” 양 손이 흐느끼는 버들가지처럼 휘청거렸다. 혜성은 억지로 힘을 주어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왜 이 질문이 떠올랐는지는 아이도 알 수 없었다. 눈앞에 있는 자가 로미오라서, 그 이기 때문이다. 로미오의 반응 역시 묘했다. 그는 말로는 혜성을 기숙사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지금이 된 것이 다행이라는 듯 몸을 앉혔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아이가 쓰러졌을 때 옮겨놔도 좋을 것을 반 아마데우스의 공간에 쉬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혜성은 이제 정확한 것을 전부 다 알 때 까지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로미오.” “…….” 다시 그를 부른 뒤, 시선을 맞추며 혜성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물었다. “너의 진짜 이름은 무엇이니.” “…….” “너는 나를 어떻게 알고, 나에게 왜 접근했니.” “…….” “나에게 왜 키스를 하며 따라다녔니.” “…….” 혜성의 눈동자에 물이 맺혔다. 그냥 질문을 할 뿐인데도 평소 비슷하다 여겼던 누군가의 윤각이 선연해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는 곧 이상한 투로 반문했다. “선배는 왜 저한테 닮았다고 했어요?” “…무엇을.” “가끔 닮았다는 말을 중얼거렸잖아요.” “몰라.” 두 사람은 조용해졌다. 뚝. 뚝. 습기로 가득 찬 공간 저 쪽 벽면에서는 난로가 없어서인지 고드름이 맺혔고 곧 물이 떨어졌다. 절대무음이 사라져간다. 로미오는 정확하게 시선을 맞추며 많이 참았음직한 입술을 열었다. 눈을 뜨면 테레사에 대한 것을 물어 올 줄 알았던 혜성이 의외였던 모양이다. “지난 혁명 때, 쇼너 스타니를 따라 왔었어요.” “쇼너 스타니?” 테레사에 대한 이야기는 현실로 인식조차 되지 않았다. 혜성은 눈앞의 것을 잡아야 했다. 쇼너 스타니 라는 이름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지만 백지화 된 뇌는 바람 소리만 전해졌다. “그는 프랑스 태생이지만 한국으로 버려졌어요. 튀기 취급을 받으면서 자라던 도중, 우연히 아마데우스를 알고 입학하려 했지만 재정이 좋지 않아서 포기했지요. 그는 그 대신 반 아마데우스를 선택했어요. 어쨌든 아마데우스라는 이름이 들어가니까.” “갑자기 그런 얘기를 왜 하니.” “방금 전에 왼 쪽 문으로 나간 사람이 쇼너 스타니예요. 기억 못하시겠지만, 신입생 연주회 날 선배와 대면했던 사람입니다.” “!” 혜성은 기억을 떠올리려 애를 썼다. 그러나 신입생 연주회 날, 무대 아래로 쳐다봤던 인상은 단정했던 것만 생각났다. 제법 잘 생겼다는 둥의 수식어를 붙일 수조차 없었다. 그 날은 극도의 긴장감에 허덕이느라 세상 제일의 인물이 있어도 생김새를 잊었을 테다. 혜성의 동공이 좁아지는 것을 지켜본 로미오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 땐 그가 가발을 쓴 거지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깔끔하거든요. 어쨌든… 쇼너 스타니는 반 아마데우스의 기둥이나 다름없어요. 저와는 인연이 깊 구요.” “어…어떻게?” “제가 말했잖아요. 저는 가난했지만 음악이 좋았다 구요. 숙부님은 형한테만 집중하셨어요. 만약, 형이 숙부님한테 부탁하지 않았더라면 저 역시도 쇼너 스타니처럼 반 아마데우스에만 존재했을 거예요.” “…….” 잠시 말을 멈춘 로미오는 테이블에 있는 생수를 혜성에게 내밀었다. 아이는 허겁지겁 마시며 마른 목을 달랬다. 상쾌한 것을 들이키자 어지럽던 시야가 맑아졌다. 로미오의 설명 역시 정확하게 들려왔다. “지난 혁명 때, 쇼너 스타니를 따라서 저도 아마데우스에 들어 왔었어요.” “!” 아이가 뭐라고 말을 꺼내려 하자, 그는 작은 입술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자신의 말을 끝까지 들은 뒤에 아무 말이라도 하라는 신호였다. 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꼭 쥔 주먹 안 쪽 고드름의 물처럼 차가운 것이 계속 맺혔다. “그 때, 선배를, 아마데우스를 구슬렸던 그림자와, 테레사를 봤습니다.” “…….” “그리고… 그를 봤어요.” “……?” “이민우 라는 자를.” “!” 혜성의 안면이 파리하게 질릴 때, 로미오는 동요치 않는 입술을 잘도 이어 나갔다. “그림자와 테레사가 서로를 공격할 때, 하필이면 중간에 선배가 있었지요.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 했어요. 수페리우스가 다치겠다! 라고 여긴 것은 나 뿐 만이 아니었을 거예요. 그 때 그 자가 몸을 날려서 선배를 지켜 줬지요. 그 자의 이름은 이민우였구요.” “…….” 아이의 좁아진 동공은 여러 장면을 그렸다. 그 날의 화염과 공포, 회색 기둥, 민우의 팔에 박혔던 거친 것들. 그것을 뽑아내자 분수처럼 튀었던 혈흔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까지도. 혜성의 볼이 덜덜 떨렸다. 눈물이 쉬지 않고 떨어졌지만 굳은 몸은 그것을 닦을 수 없었다. 로미오는 자신의 옷소매로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며 씁쓸하게 웃었다. 묘한 웃음이었다. “저의 이름도 흔한 민우 였어요. 이민우.” “!” 잠깐이지만 눈물이 멈췄다. “그 날, 선배가 민우야! 라고 부를 때마다 저는 충격으로 마비되어서 움직일 수 없었어요.” “…….” “수페리우스. 저는 그 이름에 호기심을 지녔었고, 그 격정의 날 강하게 이끌렸었는데…….” “…….” “선배는 민우야! 라고 부르면서 그 사람에게 달려갔거든요.” “!” 이제 창백해지는 쪽은, 과거를 씹으며 신음하는 쪽은 로미오로 옮겨간다. 아니, 이민우로 옮겨간다. “나는 그 때 겁에 질려서 포수를 피해 달아나듯이 아마데우스 밖으로 빠져나갔습니다.” “…….” “그 후에 알아봤어요. 흔한 이름일지도 모르지만 나와 같은, 그러나 다른, 이민우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를 존경하게 되었지요. 하지만.” “…….” “그런 자를 뒤 흔들게 한, 몸을 움직이게 하고, 베토벤이 되게 만든 수페리우스를 흠앙하는 것에는 비할 수가 없었지요.” “!” 정복자이지만, 역시나 정복자가 아닌 총명한 눈동자가 있다. 눈빛. 바로 그러했다. 혜성 스스로도 궁금해 했던 닮음의 정체는 두 사람의 눈빛 이었다. 같은 것을 품는 자에게만 똑 같아지는 눈빛이 이러했다. 혜성이 아는 이민우는 이제 둘이겠지만, 그들의 눈동자는 같은 소리를 외쳤던 것이다. 그는 곧 턱을 세우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밝힐 수 없었어요.” “!” “나는 그 흔한 이름이지만 우리에겐 흔하지 않은 이름을 선배에게 밝힐 수가 없었어요.” “…로…미오…….” 혜성은 저도 모르게 팔을 내밀었다. 그를 안아 줘야겠다는 강한 본능만이 뇌를 지배했다. 그러나 로미오는 벌떡 일어서더니 다른 쪽으로 걸었다. 오른 쪽 문고리를 쥔 그는 참담한 입술을 떠들었다. “혁명으로 붕괴된 것을 복구할 때, 테레사는 거액을 주고 인부들에게 입을 다물 것을 요구했지요. 그는 이 통로를 만들었습니다. 서 쪽 데블관의 지하에서 쭉 쭉 나아가 아마데우스 밖으로 통하는…….” “!” 이민우 라는 이름 때문에 감정적인 면이 우월해지려던 때, 로미오는 혜성을 위해 더 큰 것을 꺼내려는 것이다. 아이는 그의 뜻을 알면서도 말을 멈추라고 소리칠 수 없었다. 너무 많은 지식이 한꺼번에 꺼내져서 이것들이 달아날 것이 두려웠지만, 소리칠 수 없었다. 로미오가, 이민우 라는 이름을 버린 자가, 우는 것이 몽중의 장면인 양 멀게 다가와서 잡지 않았다. 수페리우스. 그 이름은 또 다른 이민우를 이렇게 만들었는데도 시간을 돌리거나 그를 위로할 방법이 없었다. 수페리우스. 그 이름은 그가 없는 곳에서도 사건을 빚었다. 사람의 감성 역시 빚었다. “밖으로 나가는 출구는 어디일 것 같나요.” “…이리… 이리 와서 앉아서 얘… 얘기 해… 로… 로미오….” 민우야 라고 불러줘야 한다고 마음은 꾸짖었다. 수페리우스는 그러나 연약했다. 감정적인 면이 적당 선을 넘으면 누구보다 약해서 눈물만 흘렸다. 감정이 폭발할 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었다. 아이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인 줄 몰랐다. 누구나 다 그럴 것이다. 로미오는, 그렇게 이민우는 고개를 저으며 마지막 문장들을 흘렸다. “최후 출구를 열면 밖이 보이지요.” “…….” 가지 마. 정처 없는 문장이 붉게 잉태되었다. 그러나 입 밖으로 터지지 않는다. “선배도 알 거예요.” “…….” “반 아마데우스가 외부로 빠져나가는 출구는 폐허 이니까.” “!” 가지 마. 가지 마! 마음은 그를 꾸짖었다. 애원했다. 속삭였다. 분노했다. “테레사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선배가 반 아마데우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저기 왼 쪽 문으로 들어가서 하면 됩니다.” “너… 너… 너는… 너… 너는…….” “나는 지금 선배를 볼 수 없어요.” 가지 마! 가지 마! 내면은 소스라치게 놀라 그를 붙잡으라며 찢어져라 피를 토했다. “그러지 마… 같이 가 줘… 아니… 그게 아니라… 미안해… 아니….” “미안해 할 것 없어요. 마음이 움직이는 건 스스로에게 죄이니까. 내 마음의 죄는 나의 것입니다.” “…….” “왼 쪽 문으로 가세요. 쇼너 스타니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이… 이… 이민우!” 오른 쪽 문이 닫히고 로미오가 사라져서야, 혜성은 그를 처음으로 불렀다. 다시금 절대무음이 천지에 휘날렸다. 지금은 밤일까, 혹은 낮일까. 어제일까, 내일일까. 몇 백 년이 지난 세상 속에 우리들만 갇힌 게 아닐까. 무감각한 수페리우스의 손에 잡혀있는 로미오의 예식 복 외투는 대답이 없었다. 메일로 표지를 주신 '나'님 고맙습니다. wgreene@naver.com 50편 입니다.^^ 나 역시도 기다렸던 오늘을 드립니다. 비록 지금이 시작일 지라도.... 정성스러운 댓글들 고맙습니다. 멋진 날들 되세요. ^^ sweet님, Misky님, 호야님, 박카스정님, 솨, 안젤리스님, 빵글이셩님, 좡, 기린아님, 포근구름님, 린님, 아기해달님, 그리고 지켜보시는 분들, 고맙습니다. 아마데우스는 당신의 것입니다... -화이트그린- 덧글 21개 엮인글 쓰기 /data17/2006/9/26/76/Burn_Piano_Burn-wgreene.jpg@nhn@508204@nhn@1@nhn@1167@nhn@1167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50편(천년의 이틀) /data17/2006/9/26/76/Burn_Piano_Burn-wgreene.jpg@nhn@508204@nhn@1@nhn@1167@nhn@1167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50편(천년의 이틀)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수페리우스 독백 ▼ 다음글 - 2악장 49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수페리우스 독백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9/27 15:27 http://blog.naver.com/wgreene/110009161348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927 독백 업데, 060926 50편 업데) Amadeus 음악 : Alessandro Safina - Notturno (플레이버튼클릭) Notturno-Alessandro Sa.. 음악이 없는 지옥에서 당신을 들었습니다. 죽어가는 한 영혼의 비명에게 귀를 기울여 주세요. 나는 울고 있잖아요. 당신은 악마일까 천사일까. 잔인하리만치 아름다운 나의 아마데우스여! 열여섯의 발길을 붙들었던 때를 기억하나요. 내가 아니었다면, 다른 이에게 붙여질 이름, 수페리우스는 성대가 없어져서 마음으로 외칩니다. 오, 우리의 청춘은 아찔한 멋이 채 가시지 않았는데! 파란 사과는 붉은 띠를 채 두르지도 않았는데! 흔적 없이 사라진 빛 아마데우스여. 조용하고 은밀하게 오늘의 나를 유인한 절대 신이여. 교묘히 낭자된 핏물이 피부를 찢기 전부터 썩히는 절대 무음의 지대. 나는 온 몸이 타는 것 보다 아팠는데! 그 공간이 당신에게서 비롯되었다니, 그렇다면 당신 역시 어두운 악마일까. 음악이 없어요. 나의 발소리와 호흡이 죄가 되는 곳. '그 곳'이 반 아마데우스라면, 우리는 함께 맞서야 하는데. 어디 계시나요. 호롱불을 밝혀주세요. 어디 계셨나요. 미안하지만 밝히지 말아 주세요. 수페리우스에게 배신을 말하지 말아요. 만약 믿음이 깨졌다면, 낭자된 그것들을 붙이려 노력하지 말아요. 깨진 줄기 자국을 평생 볼 자신이 없어요. 미안해요. 내 감수성의 변이란 이 정도로 끝과 끝 밖에 읽을 줄 모릅니다. 모르셨나요. 당신은 음성만으로도 나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인 것을. 왜 당신은 가장 높은 곳에서 지옥보다 처참한 곳까지 떨어 지셨나요. 무서워요! 두려움은 어리석은 눈물을 씹어 먹었어요! 영혼은 충격에 휘청 이며 나의 피를 무심하게 지켜봅니다. 테레사, 나의 아마데우스. 당신을 안아주려던 나의 손이 마비되었어요. 당신의 가르침에 들뜨던 청각이 닫혔어요. 당신에게 선물하고 싶던 입맞춤의 입술은 박제가 되었지요. 호롱불을 따라가면 지하 저 쪽 당신이 계실까요. 보스턴의 빛이 절대 무음으로 변할 때, 나는 없을 거예요. 나는 없을 거예요. - 천년의 이틀. 지옥에서의 독백. 수페리우스 - 덧글 9개 엮인글 쓰기 /data17/2006/9/27/279/22-wgreene.jpg@nhn@32769@nhn@1@nhn@548@nhn@411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수페리우스 독백 /data17/2006/9/27/279/22-wgreene.jpg@nhn@32769@nhn@1@nhn@548@nhn@411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수페리우스 독백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51편 ▼ 다음글 - 2악장 50편(천년의 이틀)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51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9/28 21:00 http://blog.naver.com/wgreene/110009201699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928 51편 업데) Amadeus 음악 : Alessandro Safina - Incanto (아래 플레이 클릭) Incanto-Alessandro Saf.. 잡아라! 절대로 나를 놓치지 말아라! 2악장 51편 『 나와 내 나라에서 같이 살자. 』 혼자가 되는 즉시 떠오르는 음성이 있다. 당신의 나라가 과연 어디일까. 『 네가 너무 보고 싶어지면 그냥 걸어 다녔어. 보고 싶어서 책도 봤다. 』 이곳이 당신의 나라일까요. 나는 고작 이런 곳에 초대되기 위해 당신을 정복자로 섬겼을까요. 『 나를 뛰어 넘어라. 그렇게 너만 보게 네가 해 봐! 』 이젠 다 필요 없어 졌어요. 로미오가 사라지자 그 때 부터 속수무책으로 떨어지는 음성이 있다. 정작 다 묻지도 못 했던 이름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혜성은 수차례 볼의 물기를 닦다가 그것을 관두었다. 어두움의 작은 분자들이 몽땅 테레사가 된다. 동시에 테레사 라는 이름이 멀어졌다. 그가 자신과 한국 아마데우스 모두를 속이고 움직였다는 사실, 그 배신감에 아이는 손가락도 까딱할 수 없었다. 무중력의 상태에서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뇌가 터져있었다. 『 귀를 닫아라. 저질은! 들을 가치도 없다. 』 동경이 멀어진다. 바람은 정지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다. 『 보고 싶었어. 꿈도 꿨다. 』 그가 믿음을 깼어. 자비로운 손으로 우리를 이끌고 나를 세워 주셨으면서, 그가 배신한 거야. 반 아마데우스라니! 혜성은 허탈하게 웃으며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버려두었다. 똑딱이는 시계초침의 소리마저 없는 이곳에서, 그는 무엇을 하는 건가. 왜? 어째서! 대표라니? 우두머리라니!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수페리우스는 도라 질을 쳤다. 환경이 주는 공포 때문인지 입이 열리지 않았다. 입을 여는 순간 성대가 영원히 달아날 것이 두려웠다. 그간 미사에 나가지 않은 벌을 받은 기분이라서 하느님도 찾을 수 없었다. 한 시간, 혹은 두 시간, 억 만분의 초침? 얼마나 숨을 죽인 채 덜덜 떨고 있었을까. 테레사에 대한 억측만으로 무너져서 절망하던 수페리우스는 희 번득 눈을 치켜세웠다. 달칵. 왼 쪽 문이 열리더니 그를 기다렸음직한 쇼너 스타니가 다시 나타났기 때문이다. 테레사. 테레사. 그 이름만이 메아리치는 가운데 뇌는 아무런 현명한 것도 꺼내지 못 한 실정이다. 또각. 또각. 구두소리가 유난히 날카로운 쇼너 스타니가 암회색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유유히 걸어왔다. 둘은 곧 마주쳤다. 시선을 교차하며 숨을 죽였다. 삐걱이는 침대에 앉아있던 수페리우스가 턱을 올리자 말없이 지그시 응시하는 쇼너 스타니의 안면이 까만 와중에도 보이는 듯 했다. 그 느낌은 매우 강렬했다. 산호를 역류시키는 불의 전차처럼 뜨거웠다. “아직은…….” “…….” 입을 열자 수페리우스의 안면에 또 다시 눈물이 떨어졌다. 쇼너 스타니의 매칼한 눈매에는 아이섀도우가 반짝거렸다. 허스키한 투로 말문을 열면서도 혜성의 시선은 불투명했다. “대화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 “…조금만 더 주시면…….” “…….” 시트에 주먹을 움켜쥐며 수페리우스는 말을 흐렸다. 그러나 말을 하면서도 확신할 수 없었다. 시간이 백만 년 주어 진 들, 지금의 억측을 무를 수 있을까? 배신감에 조여드는 심장이 완치 될 까? 그에게 제대로 된 이유를 캐물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 같다는 불투명함이 시선에 적힌다. 쑤욱- 상체를 내려서 수페리우스의 표정과 눈동자를 자세히 살피는 쇼너 스타니는 기계처럼 영혼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만 더…….” “…따라 와.” “?” 쇼너 스타니의 입가로 무감동하고 딱딱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청동조각에 금이 가는 소리와 비슷했다. 또 지독한 향수 냄새 때문에 코를 막아야 했다. 아이는 소름이 끼쳤다. 쇼너 스타니가 상체를 세웠다. 그는 곧 당황해 하는 혜성이 일어서기를 기다리더니 망설임 없이 오른 쪽 도어를 열었다. 아까 전 로미오가 나갔던 문을 연 것이다. “…….” “…….” 쇼너 스타니를 따라서 걸으면서도 혜성은 자신이 그를 잘 따라가는 지 확신할 수 없었다. 호롱불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움츠러든 내면을 더 세게 조이는 어두움은 잔인했다. 늘씬하지만 탄탄한 체격을 지닌 쇼너 스타니의 큰 키 덕분에 뒤따라가는 수페리우스는 스스로도 작게 느껴졌다. 아이는 스스로를 감싸면서 걸었다. 또각. 또각. 쇼너 스타니의 구두 소리 덕분에 그를 잃을 염려는 없었다. 아이는 한 참 걷던 도중 묘한 것을 생각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보다는 그래도 이 소리라도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것을. 이렇게 여기는 스스로가 가여웠다. 그가 나를 가두려는 건 아닐까. 지옥 불에 던지려는 걸까. 쇼너 스타니는 어디로 가는 걸까. 아까 오른 쪽 문을 열고 로미오가 나갔는데, 로미오를 만나게 하려는 걸까. 내가 너무 많이 울어서? 공포의 끝에서 머리칼까지 소름이 돋아난 혜성이 할 수 있는 생각이란 지극히 평범하고 어린 아이처럼 유치한 것이었다. 다리가 저려올 무렵 쇼너 스타니는 뚝 멈췄다. 덕분에 멍하니 그의 소리를 따라 걷던 혜성의 안면이 그의 등에 부딪혔다. 뭐라고 물으려던 찰나, 철컥철컥 하는 자물쇠 소리가 들렸다. 혜성의 시야로 실처럼 가느다란 빛줄기가 반사되었다. 아이는 눈을 흐렸다. “…나가라.” “!” 백열등보다 진한 밝음의 정체는 출구였다. 쇼너 스타니는 다자고자 출구로 인도한 것도 모자라 아이를 내 보내려는 것이다. 번쩍! 머리에 천둥이 울렸다. 혜성은 얇은 빛을 사이에 두고 쇼너 스타니를 처음으로 제대로 올려보았다. 시선이 옳게 박히자 그의 날카로운 외모가 얼마나 무표정한지, 또 자신을 쳐다보는 듯 뒤 쪽을 응시하는 것처럼 묘한 눈동자를 고수한 다는 게 다 보였다. 쌍커풀 없는 날렵한 눈매에 보라색 아이섀도가 짙게 칠해진 것 역시 그의 붉은 입술처럼 자세히 비쳤다. “…나가라.” “…….”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쇼너 스타니의 입술 끝에 매달린 두 개의 피어 싱이 그가 말을 할 때마다 짤랑거렸다. 무감동한 어투는 처음보다 단호해졌다. “준비란,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하는 것이다. 여긴 너의 목적지다. 그러나 부정했지. 준비란, 밑바닥에 떨어져서 벗어나려는 때 쓰는 말이다.” “!” 쿵-! 내면의 상념이 모조리 떨어졌다. 여기가 목적지다! 머리가 뚫렸다. 즉, 이곳에서의 준비란 회피일 뿐이다! 아이의 눈에 불꽃이 달린 양 뜨거워졌다. 신입생 연주회 날 무대 아래에서 자신을 올려봤던 그 사람이 지금의 쇼너 스타니가 확실하다는 걸 인정했다. 아이는 침착하게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 사실은 쇼너 스타니의 눈빛이 침착한 사람의 표정과 닮았다는 것이 다시 보였다. “네 눈빛은 그저 벗어나려고만 하는군.” “…….” “이 쪽도 저 쪽도 아닌 사람은 필요 없어.” “…….” 뭐라고? 정확한 어투가 지나자 혜성은 이상하게 긴장이 풀렸다. 겁에 질리거나 두려움의 끝에서 눈물을 보일 것을 스스로도 예상했는데, 쇼너 스타니의 차가운 말이 지나자 욱신대며 심장이 발작하는 것이다. 그의 말에 당장 아니라고 부정하라며 심장은 난리를 쳤다. 뇌는 명령을 내리다 못 해 쉰 목소리로 아이의 영혼마저 부실 것처럼 덤볐다. 수페리우스는 서서히 좁아진 동공을 넓혔다. 이쪽도 저 쪽도 아닌 사람. 어째서일까. 그의 말에 벙 찐 혜성이 다시 말 해 달라는 듯 고개를 쑥 내밀었다. 쇼너 스타니는 일개의 변화조차 없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눈을 뽑아 버리기 전에, 나가라.” “…쿡…….” “…….” 확실히 긴장이 풀렸다. 아이는 간질거리는 배를 움켜쥐고 돌연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하하-” 긴장이 풀려서 마음이 허탈해졌다.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자 무중력은 사라졌지. 산산이 무너진 뇌의 잔여를 뚫고 판단력이 되돌아왔다. 이 모든 것은 사나운 감정의 기복을 정지시키는 쇼너 스타니 때문이다. 한 참을 웃기만 하던 혜성은 겨우겨우 모양새를 추스리더니 그를 당당하게 올려보며 물었다. “…테레사가 알려줬나요.” “…….” “나를 몰아세우면 어찌 변하는지 그가 알려줬나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그가 시켰나요. 수페리우스의 눈매가 목소리만큼 매서워졌다. 쇼너 스타니는 그러거나 말거나 냉정하게 대답했다. “무슨 말인지 납득이 안 된다.” “…….” “쇼너스타니는 그 따위 걸 모른다.” “…….” 그러더니 새삼 귀찮고 짜증난다는 듯 실오라기만큼 열었던 문고리를 쥐고 흔들며 무서운 투로 입을 열었다. “눈이 뽑히고 싶은 건가.” “…돌아가요.” “…….” 이제 혜성은 무섭지 않았다. 원초적인 감정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가 어떤 말을 해도 두렵지 않았다. 호롱불이 있어도 없어도 상관없었다. 절대 무음이란 게 사실은 없다는 것을 이성은 알려줬다. “근거 없는 것들로 잔뜩 겁만 집어먹고 돌아갈 순 없으니까.” “흠…….” “…….” “그게 네 최종 결론인가?” “네.” “좋다. 따라 와라.” 끼익- 문이 다시 닫혔다. 실오라기 빛은 사라졌지만 혜성은 전혀 아쉽지 않았다. 무지한 것을 접할 때의 아찔한 쾌락과 기대감, 그리고 약간의 두려운 감정이 복잡하게 뛰놀았다. 그러나 아까의 속절없는 두려움과 근거 없는 억측에 대한 비상은 날개가 꺾이고 추락했다. 모든 것은, 마음이 결정하는 것에 달려있다. 같은 것이라도 시선을 바꾸면 상황은 다르게 읽힌다. 공포를 호기심으로 바꾸는 건 바로, 각자의 능력이다. 그 마법과도 같은 힘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있다.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모르고 지날 때가 많다. 잡아라! 절대로 나를 놓치지 말아라! 공포로 빨려 들어가려는 때, 다른 쪽에서 아우성치는 외침이 분명히 들릴 것이다. 혹자는 그 이름의 주인이 희망 이라고들 하지만, 개개인의 척도는 다를 것이다. 수페리우스는 평범한 그 후자의 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쇼너 스타니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혜성이 테레사를 추억하며 감성적인 면에 기대 울었던 방을 지났다. 왼 쪽 도어가 열리자 사방은 환해졌다. 혜성은 양 손으로 눈을 가렸다. 거대한 빛이 한꺼번에 터져서 자신이 또 출구로 나온 줄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천천히 손을 내린 뒤 기가 막힌 탄성이 입 밖에 터져 나왔다. 오래된 샹드리에가 높은 천정에서 반짝였다. 그러나 곧 꺼져서 어두워졌다. 수많은 이들이 가운데가 뚫린 커다란 모양의 원탁에 앉아있었다. 그들을 중심으로 퍼져있는 자리는 계단처럼 올라가 있었다. 그 곳 역시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수페리우스는 그들 모두가 자신을 기다렸음을 알았다. 또 자신이 있던 방에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넓은 공간에 수많은 숨소리가 있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오른쪽 문을 열었을 때 못지않은 터널이 자신을 반길 줄 알았던 수페리우스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오싹한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글대는 사람들의 시선은 실로 오묘했다. 웬디를 질투하는 팅커벨처럼 붉은 표정도 상당했다. 연령대도 다양했다. 젊은 또래부터 열 살은 많아 보이는 얼굴들이 수페리우스를 묘하게 주목했다. “지금… 뭘… 하는 거지요…?” 괜찮아. 괜찮아. 스스로에게 힘을 불어넣으며 수페리우스는 침착하게 물었다. 좌중이 밀집한 연주회장이다! 라고 상상하니 마음은 스스로 궁금해 할 정도로 편안해졌다. 상황이 닥치면 안정된다. 이것은 수페리우스의 본능이었다. 쇼너 스타니는 원탁의 중심에 뚫린 곳으로 아이를 이끌었다. 창-! 정 중앙의 높은 불빛이 켜지자 동그란 형태의 조명이 생겼다. 쇼너 스타니는 매혹적으로 입 꼬리를 올리며 수페리우스를 원 안에 세웠다. “네가 했던 것과 같은 상황이지. 장소만 다를 뿐.” “……?” “학생 재판과 같은 것이니 위축되지 말기를.” “!” 학생 재판! 혜성의 예상은 바로 맞았다. 아니다. 그것이 예상이라고 할 만 한 것일까? 어쨌든 좋다.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해 일부러 연주회장이라고 상상했듯이, 이젠 그것이 현실이라고 여기면 되는 것이다. 가시처럼 찔리는 시선을 쾌락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학생 재판이라니! 그 때 혜성이 어땠던가. 로제리오를 눌러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대화’에 초점을 맞춰서 설득의 열기로 입술은 떠들었었다. 혜성의 눈매가 어느 때보다 평온해졌다. 반 아마데우스를 대표하는 쇼너 스타니가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혜성을 지그시 내려 보던 그가 불현듯 오른손을 힘껏 쳐들었다. “!” 치려는 건가?! 움찔 놀란 혜성이 몸을 움츠리자, 원탁 어딘가로 부터 날렵한 것이 날아왔다. 그것은 사람처럼 말을 했다. 아니,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그가 치고 싶을 때, 나를 때리십시오. 쇼너 스타니.” “!” “…….” 로미오였다. 돌아간 줄 알았는데! 오른 쪽 문으로 나가서 다시 돌아왔다면 아까의 방을 지나쳤어야 되는 게 아닐까? 어쨌든 로미오가 여기에 있었다니! 그는 불숙 튀어나와 쇼너 스타니의 오른손목을 꽉 쥐고 쏘아보았다. 쇼너 스타니는 불쾌하다는 듯 뿌리치며 응수했다. “인형처럼 생겨서 확인 하려고 만 했을 뿐 때리지 않는다.” “…….” “…….” 사람들은 다시 둘을 주목했다. 로미오는 거칠게 씩씩대며 어디 론가로 돌아갔다. 혜성은 그가 함께 이 넓고 어둑한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적잖이 안심했는지 한결 더 침착해졌다. 연주회 날, 자신이 찾아가겠다고 했던 게 생생히 떠올랐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겠노라 약속했던 게 휙 스쳤다. 혜성은 늘씬하되 연주회 날과는 반대로 고약해 보이는 쇼너 스타니를 오래도록 마주쳤다. 그는 곧 입을 열었다. “아마데우스에서의 실패.” “…….” “그것은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음을 의미한다. 다른 나라가 어떤지는 모른다. 갑자기 생긴 아마데우스, 한국은 건물만 세웠을 뿐 뒤처리가 미흡했으니까.” “…….” “패배자에게 남은 건 추측과 엉망이 된 분노뿐이지.” “…….” “졸업한 뒤 괴리감에 허덕이는 자. 목표에서 떨어진 뒤 무기력해지는 자. 아마데우스가 성공의 척도였기 때문에 그 실체를 경험한 뒤 주변 기대에 못 미쳐 실패하는 자.” “…….” “그래서 뭘 해야 좋을지 통 알 수 없는 자들. 어쩌면 세상의 거의 모든 인구가 고민하는 것들이지만, 아마데우스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자.” “…….” “애정이 애증으로 남겨진 자들.” “!” 애정이 애증으로. 그 구절에서 혜성은 약간 흔들렸다. 정혁의 변화가 필름처럼 차례대로 스쳐서 였다. 그러나 곧 쇼너 스타니가 읊는 것을 경청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혜성은 그들의 말 전부를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더 거대한 것을 기대한 걸까. 아니다. 아이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진심으로 사회적인 현실에 부딪혀 진정한 낙오자가 된 것이었다. 수페리우스는 온갖 시련에 휩쓸린다고 해도 아마데우스의 학생이며 테레사의 넋을 독점하는 인물이질 않던가. 만약 이해한다고 해도 그것은 이해의 전부가 될 수 없다. 아마데우스라는 이름이 위대해서, 이름에서 벗어날 수는 있지만 사실은 그럴 수 없고, 한계 때문에 괴로워서 벗어날 수 없는 자들. 그들의 내면 전부를 이해 할 수는 없어도 수용은 가능했다. 그들 모두가 순간 문정혁으로 보여서 였다. 감정이란 마법보다 놀라운 힘을 지녔다. 지금 혜성은 그들이 애정을 애증으로 바꾸었듯이, 그들에게 지녔던 애증일 지도 모를 험악함이 애정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문정혁 이라는 사람이 빚었던 혼란이 그들에게 겹쳐져서 혜성은 쓰라렸다. 쇼너 스타니는 세부적으로 내용을 떠들기 위해 잠깐 말을 쉬었다. 방금 전의 간략한 설명을 깊게 나아가려는 모양이다. 그러나 아이는 기다릴 수 없었다. 들어도 똑 같은 소리라면 시간만 지체 될 뿐이니까. 지금 것 수페리우스는 그렇게 살아 왔다. “그만.” “…….”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임은, 물론이다. 수페리우스는 예식 복 중 겉의 외투를 벗었다. 발아래부터 치밀어 오르는 열기와 사람들의 시선이 맞물려서 온 몸은 뜨거운 물처럼 출렁였다. 쇼너 스타니가 다시 치밀한 투를 꺼내려는 때, 혜성은 안 들어도 알겠다는 듯 그의 코앞에 섰다. 잠시 주변을 쉭 둘러보았다. 주목하는 무리들의 숫자는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그들은 젊었다. 좋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다. 혜성은 방금 전 쇼너 스타니가 했던 반 아마데우스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연신 떠올리더니 큰 소리로 낭랑하게 외쳤다. “도망치지 말아요!” 『 도망치지 마. 겁먹지 마. 』 누가 누구에게 하는 소리일까. 베토벤을 알려줬던 민우의 음성이 뜨겁게 떠올라서 혜성의 가슴은 여러 번 뛰었다. 입은 내 것이지만 영혼은 민우가 된 기분이었다. 『 겁먹는 인생은 죽을 때까지 두려움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야. 』 짜릿한 음성이 뇌를 뚫을수록 민우의 음성은 짙어졌다. 혜성은 배에 힘을 주고 노래하는 것보다도 크게 성대를 울렸다. “겁먹는 인생은 죽을 때까지 두려움 속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가슴이 찢어졌다. 응어리 진 숱한 것들이 샅샅이 흩어졌다. 저 쪽 어디선가 로미오가 벌떡 일어났다. 아니다. 지금의 이민우가 일어서서 혜성이 하는 것처럼 성대를 떨리는 것 같았다. 아이는 힘을 주어 소리쳤다. “당신들도 할 수 있어요!” “…….” “늦지 않아요!” “…….” 그러나 여기는 아마데우스가 아니었다. 수페리우스 라는 이름에 기대어 쉽게 손을 들어주는 좌중 역시 없었다. 눈빛이 죽은 자들에게 호소력 짙은 음성은 지나가는 벌레의 자국 소리만도 못했다. 수페리우스는 당황했다. 변화 없이 돌처럼 굳은 그들로 하여금 소름이 끼쳤다. 그래서 다시 말했다. “당신들도 할 수 있어요!” 쇼너 스타니는 수페리우스가 원탁 주변과 계단으로 이어진 높은 곳에 앉아있는 치들을 설득하는 것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혜성이 스쳐 지나려 하자 탁- 어깨를 쥐더니 낮고 차분한 투로 되물었다. “…뭘 할 수 있다는 건가, 구체적으로?” “그건…!” 막 같은 말을 다시 하려던 혜성은 얼어붙었다. 섣부른 판단인 걸까. 그들에게 나는 무슨 말을 하려던 걸까. 그래도 이 말은 해야 했는데. 무미건조한 삶을 지탱하며 무조건적인 분노와 희생만을 요하는 반 아마데우스의 눈빛. 쇼너 스타니의 지리 한 설명은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를 않았는걸. 혜성이 강하게 반박하려는 때, 쇼너 스타니가 치고 들어왔다. “우리 나이는 그닥 젊지 않다. 진짜 절망을 모르는군.” “!” “…….” 무감동한 쇼너 스타니의 음성, 탁하게 깔린 주변의 시선들. 혜성의 분노가 그제서야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다. 정처 없이 떠도는 괴로움이 자신과 정 반대인 성향의 사람들을 보자 분노로 바뀐 것이다. 감정은 두려움의 티끌마저 증발시켰다. 혹시 고개를 숙이기를 기다리는가? 나는 절대로 숙이지 않는다. 혹시 매달리기를 기다리는가? 나는 절대로 매달리며 울부짖지 않는다. 무지한 나도 알아! 그건 가치 있는 것들에게만 행하는 것이다. “비겁한 사람들. 누굴 원망하는 것만큼 비겁한 건 없습니다.” “…그리고?” 주먹을 움켜 쥔 채 빛을 토해내는 수페리우스를 경청하며 쇼너 스타니는 팔 장을 끼었다.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난 혜성은 비명을 질렀다. “남에게서 이유를 찾는 것부터가 잘못 이라 구요!” “그래?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어.” 쇼너 스타니의 비아냥대는 소리에 구역질이 날 것 같은 혜성은 최대한 이성을 차리려 노력했다. 독사와 같은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며 그 역시 비아냥거렸다. 화가 넘쳐났기 때문에 아이는 쇼너 스타니의 시선이 봄처럼 녹아 간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그의 눈빛이 아까부터 심하게 흔들리는 것조차 알 수 없었다. “누가 가르쳐주는 게 아닙니다!” “…….” “…….”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가 지하 높은 곳까지 퍼졌다. 혜성은 격하게 숨을 내쉬며 파도치는 내면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입술이 덜덜 떨렸다. 반 아마데우스! 무기력한 집단! 그들의 전체는 열정으로 살아가던, 비록 그것이 밑바닥에 섞여 있어도 열정 자체였던 수페리우스를 분노하게끔 했다. 그들의 눈빛을 뽑아내고 싶은 건 오히려 이 쪽이었다. 참혹한 표정들은 슬픔을 나누기 싫을 정도였다. 혜성은 그 뒤로 입을 다물었다. 쇼너 스타니는 그런 혜성의 숨소리가 정상적으로 될 때까지 쭉 지켜보기만 했다. 그는 곧 생수를 내밀었다. 아이는 신경질적으로 뿌리쳤다. 당황한 그는 머뭇대더니 답지 않게 부드러운 투로 말을 걸어왔다. “우리는… 달라지려고 한다.” “……?” 독기가 풀린 쇼너 스타니의 음성은 친절하게 들렸다. 혜성은 그제 서야 그가 내민 것을 받아 한 번에 삼켰다. 시원한 청량수가 목을 뚫자 열기로 뜨거웠던 내면이 조용해졌다. 쇼너 스타니는 혜성이 다 마신 컵을 받아서 원탁에 내려놓더니 걸어오면서 입 꼬리를 올렸다. “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쌓이는 세월 속에 무기력해지지.” “…….” “나이는 일개 숫자일 뿐이라지만, 결코 그럴 수 없으니까. 가능성 이라는 믿음은 작은 숫자들에게만 동요를 주기 마련이다.” “…….” “너는 영원히 무기력의 공포를 모를 눈을 지니고 있군. 우리의 대표처럼.” “…….” 쇼너 스타니는 진심으로 감탄 했다는 듯 수페리우스의 모든 것을 넋을 잃고 응시했다. 그의 입에서 빠져나온 대표라는 구절이 창이 되어 날아왔다. 심장을 눌렀지만 아프지 않았다. 혜성은 이제 막 시작 된 것 같은 분위기를 틈타서 테레사를 묻기로 작정했다. 쇼너 스타니의 입에서 터진 대표라는 구절을 쭉 이어 나가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결심과는 달리 아이는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강철처럼 딱딱하고 독처럼 매서워만 보였던 쇼너 스타니가, 수페리우스가 화를 내도 무심하게 지켜봤던 쇼너 스타니가, 그들의 척추였던 쇼너 스타니가, 부드러운 암회색 머리칼이 모두 쏟아질 정도로 허리를 굽혔기 때문이다. 우아한 그의 자세에 벙 찌기도 전에, 노여움이 싹 가신 음성이 나폴 나폴 춤을 추듯 들려왔다. “…화를 내 줘서 고맙습니다, 수페리우스.” “?” 그는 천천히 허리를 올리며 자비롭게 말을 이었다. “당신의 관심과 믿음을 시험해 봤습니다. 물론 불쾌하셨겠지만 그만큼 기뻤습니다. 죄송하고 다행입니다.” “!” 오 하느님! 엄청난 발언에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동공이 좁아진다. 그럴수록 쇼너 스타니의 박자는 경쾌해졌다. “테레사가 우두머리라는 건 알지요?” “테레사…….” “…예스. 테레사.” 긴장이 풀린 혜성의 눈가에 순간 물이 차올랐다. 붉어진 눈매를 위로 올리며 혜성은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신음하면서도 약해 빠진 소리는 하지 않기로 했다. 수많은 눈동자가 사실은 부드러웠다는 게 다시 각인되었다. 마음이 얼어붙었던 처음에는, 편견에 가려져서 이들의 시선이 죽은 자처럼 보였었다는 걸 깨달았다. 부르튼 손바닥을 꽉 조이며 수페리우스는 음성을 짜냈다. “…나의 테레사여…….” 모두는 숨을 죽였다. 가운데의 동그란 불빛 아래에서 수페리우스는 쏟아질 것처럼 위태롭게 찰랑이는 눈물을 버티며 다시 말했다. 조금만 방심하면, 조금만 뺨을 돌리면, 조금만 눈꺼풀을 움직이면, 거대한 물기가 끊임없이 흐를 것이다. 대화가 불가능해지겠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아직은 안 돼. 혜성은 피가 세어 나오는 아랫입술을 더 세게 깨물었다. 주르륵- 턱을 타고 얄팍한 붉은 줄기가 그어졌다. 영혼이 소리치는 울림이 지하 곳곳에 뻗어 나간다. “그에 대해서… 말 해 주세요, 쇼너 스타니.” 쇼너 스타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혜성이 벗어 놓은 예식 복 외투를 집어서 털어 주더니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사실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혁명이 끝난 뒤…….” “…….” “그가 찾아왔습니다. 당시 우리들은 서울의 시내를 전전하는 나부랭이에 불과했지요.” “…….” 테레사… 그의 생각이 어디 까지 퍼져있는지 알 수 없다. 그를 안다고 자부하는 지금까지도. 지금이라서 더더욱. “그는 고름이 떨어지는 눈을 우리에게 보였습니다.” “!” 혜성의 턱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참을성 없는 왼 손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숨소리가 가빠진다. 그가 가여워서 미쳐 버릴 것 같다. 행위, 결실, 과정, 그 무엇도 필요 없이 사랑하는 자가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 자체가 미칠 것 같았기에 혜성의 내면은 마구 휘청거렸다. “무릎을 꿇은 채로 두 시간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 “그 당시의 대표님은 혁명에 이용당했다는 것에 책임지기 위해 탈퇴했지요. 저는 그 때 서기에 불과했습니다. 만약 테레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자연스럽게 반 아마데우스를 이끌었겠지만.” “…….” “그는 말했습니다.” “…….” “유비무환.” “…….” “제대로 된 준비를 마친 뒤에 의견을 떵떵 이라고. 그것을 도와주겠다고. 소리가 퍼질 수 있게 도와주겠다며 강직하게 떠들었습니다.” “!” “물론, 세 시간이 되어서야 그는 입을 열었습니다. 또 자신의 죄가 많다고…….” “!” 『 나는 죄가 많은 사람이다. 』 테레사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 쇼너 스타니가 얘기하는 족족 붕대를 풀고 핏기 가득한 눈매를 내밀며 자기를 바닥까지 낮춘 테레사가 가여운 나의 그가! 이토록 처절하게! 이토록이나 숨을 쉴 수 없게! 아프게! “죄를 갚을 기회를 달라며, 자신은 다시 시작이라고 말입니다.” “그게… 그게 정확히 언제… 어…….” 『 기회를 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 테레사… 미안해요… 마음은 그를 원망했던 아까의 시간을 사죄했다. 그의 평화를 의심했던 스스로가 저주스럽기만 했다. 출구를 열고 내보내려던 쇼너 스타니의 아까 음성이 휘몰아쳤다. 준비라는 것을 언급할 때의 쇼너 스타니는 지금의 대표인 테레사의 말을 대신 한 거였어. 뜨거워. 심장이 폭발할 것 같아. 혜성은 눈을 치켜 뜬 채로, 먼 천정을 올려보며, 그 뜨거움에 온 몸이 타 들어가는 한이 있어도 말을 해야겠다며 물었다. 그 정확한 시기를 묻자 쇼너 스타니는 애처로운 듯 묘한 한 숨을 내뱉었다. “혁명 이후, 그가 눈 수술을 위해 오하이오 주로 떠나기 직전일 것입니다.” “!” 테레사! 내면의 절규가 사납게 찢긴다. “그는 무기력을 떨치고 같이 시작하자며…….” “아아…….” “수페리우스. 아까의 당신처럼 소리쳤습니다.” “!” 이제는 쇼너 스타니의 음성 역시 격앙되었다. 그 역시 당시를 떠올리며 머리를 치는 충격과 감동을 삭히는 듯싶었다. “당신과 똑 같은 표정으로 말이지요.” “…….” 쇼너 스타니의 음성이 잠시 끊겼다. 혜성은 서서히 가라앉는 눈물이 완전히 마를 때를 기다렸다. 쇼너 스타니도 혜성의 동요를 아는 눈치였다. 좌중은 제대로 마주하는 수페리우스의 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테레사처럼 단호한 인물일 줄 알았던 수페리우스가 저토록 작고 연약하다니! 그러나 연약한 게 전부가 아니라니! 그들은 시선으로 강한 것을 전하는 중이었다. 잠시 후, 마주보게 된 둘은 혜성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시작으로 다시 출발했다. 쇼너 스타니의 신중한 표정은 표정만큼이나 정확한 내용을 꺼냈다. “그는 현재, 엄청난 계획을 세웠던 것을 사실로 입증하는 중입니다. 내년의 보스턴 아마데우스는 재단에 선언할 것입니다. 나이 제한을 없애고 지금의 우리들 중 그에게 감명 받은 동지들을 보스턴으로 재입학 시켜 줄 것을 그가 약속했기 때문이지요.” “!” 처음에는 그의 이름만이 감동이었다. 감동은 그러나 뒤에 남겨진 추측을 불거나 게 했다. 추측마저 감동의 또 하나라는 것을 증명하는 현재, 그의 모든 것이 감동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그는 현재 세계의 뮤즈드림의 척추나 다름없는 재단에 치고 들어가려는 중이지요. 전 재산을 걸기로 했습니다. 보스턴을 시작으로 독일까지. 기회의 폭을 넓히고 추락한 자들을 책임지겠다는 명목으로.” “어… 어째서 그렇게까지…….” “물론 당장 모든 게 실현 될 수는 없겠지만, 그는 자기 혼자만 안식하던 것에서 벗어나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재단에서 매장될 수도 있어요. 아시겠지만, 아마데우스 이상 가는 뮤즈드림은 세상에 없는 형편입니다. 그 곳에서 일류급 수준을 따라잡지 못하는 이들 중 20% 가량은 채 가시지 않는 열정을 원망하며 그래서, 반 아마데우스로 옮겨오는 것입니다. 물론, 단체는 아직 한국에서 밖에 발견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 “그래서 테레사는, 반 아마데우스이면서 아마데우스입니다.” “!” 반 아마데우스이면서 아마데우스입니다. 악마이지만 천사입니다. 악 이지만 선 입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기를… 그는 세상이 경악하는 천재입니다. 못 다루는 악기가 없을 뿐더러 누구든지 그의 음악을 들으면 반한다지요. 그는 영악한 만치 독선과 이기와 자비가 있는 리더 입니다. 그는 영향력이 상당한 인재입니다.” “…….” 오직 테레사 라는 이름만이 메아리치는 현재, 너무 많은 사실들을 받아들이기가 버거워 숨만 겨우 내쉴 때, 쇼너 스타니는 더 큰 것을 밝히며 치고 들어왔다. 대화만으로도 서로의 어깨를 찌르는 창과 방패가 된다. 그것이 그들의 재판 형식의 대화였다. 반 아마데우스, 그리고 아마데우스. 둘은 뗄 라야 뗄 수 없는 것을 다시 증명한다. “당신도 보스턴에 가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어째서…?” 수페리우스를 언급하는 쇼너 스타니의 음성은 다시 칼처럼 날카로워졌다. 혜성은 독기선 눈으로 그를 흘겼다. 흠칫 놀란 쇼너 스타니가 아닌 척 옆으로 뺨을 돌리더니 아쉬운 투로 말을 잇는다. “그는 로제리오 교수에게 당신의 재입학을 허가해 달라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 재입학이라니! 순간 혜성의 시야가 까맣게 분산되었다. 온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힘만으로, 호소만으로, 재판을 통해 아마데우스 땅을 다시 밟게 된 것으로 굳게 믿었던 현실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테레사! 그가 나를 위해, 보잘것없는 나 하나를 위해 로제리오를! 한탄의 숨이 깊게 퍼졌다. 로제리오의 앞에서 무릎을 꿇다니! 당신이라는 대단한 자가 고작 나 하나를 위해 총명한 머리를 쓰고, 아름다운 육신을 굽힌 채 고개를 조아렸다니! 나는 믿을 수 없습니다. 혜성의 참았던 눈물은 어쩔 수 없이 터지고야 말았다. 그의 희생의 값이 줄줄이 재생되어서 혜성은 산산이 조각나는 가운데 뉘인 기분이었다. 그럴수록 쇼너 스타니의 말은 명쾌하게 이어졌다. “그 뒤 오하이오 주에서 계획을 꾸리고, 눈 수술로 절망한 뒤, 그는 보스턴의 발전에 당신과 우리 반 아마데우스를 걸고 이를 악 물고 싸우는 것입니다.” “!” “우리에게 필요한 건 관심 이었습니다.” “…….” 입가의 굳어가는 핏물을 소매로 훔치며 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역시 테레사와 다를 것 없다는 뜻을 보이며 쉼 없이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가 그리워서, 그가 안돼서, 그를 향한 존경에의 빛이 도저히 멈출 날이 없어서, 많은 사실 중에 그의 이름이 섞인 게 기쁘면서도 참담해서 감정 선이 엉망진창이었다. 그러나 이성은 올곧이 살아 있지 않던가. 혜성을 자 뭇 안쓰럽게 쳐다보는가 싶던 쇼너 스타니는 다정한 투로 힘 있게 뜻을 전했다. “그는 그것을 해 냈습니다. 지금 여기까지 찾아 와서 소리친 수페리우스 당신처럼.” “…….” “그 외 나머지 상당수는 사실 예전과 다를 게 없습니다. 순차적인 정신과 치료와 노력이 필요한 인재도 많지요.” 피식 웃는 쇼너 스타니는 날카로웠다. 그러나 편견을 배제하고 다시 보면 부드러웠다. 그는 대화의 끝 점에 다 달은 걸 느꼈는지 로미오에게 가까이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혜성의 곁에 로미오가 서자 아이는 그의 옷깃을 꽈 악 잡은 채로 쇼너 스타니를 허망하게 쳐다봤다. “어째서… 어째서 그럴까요. 그냥 학교에서 졸업하면 그 뿐 인 것을.” 대수롭지 않은 가벼운 농담을 하듯 쇼너 스타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데우스니까요.” “!” “음악 도시의 최고에서 떨어지면 더 큰 것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 없는 게, 사람이니까요.” “!” “반 아마데우스는, 목표가 필요한 자들의 밑바닥 입니다.” “!” 꽈 악. 지금의 이민우의 옷깃을 더 세게 쥐며 혜성은 눈을 크게 떴다. 입이 쉬이 열리지 않았지만 머리는 쇼너 스타니의 술술 뱉어지는 것들을 흡수하기 바쁘다. 감성과 이성의 교차 길에서 수페리우스는 무던히도 버텼다. “테레사의 선택은 탁월했습니다. 그는 적을 완전히 이해한 뒤, 적과 선에 공존했으니까요.” “왜… 그가 하필이면 대표일까요.” 마지막 이성이 쏜살같이 물었다. “없애기 위해서지요.” “!” 테레사의 목소리를 쇼너 스타니가 내뱉는다. “어떤 단체든지 우두머리가 무너지면 단체는 흐지부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 “그는 이론적으로 우리들의 주장이 옳다고 수긍했습니다. 그리고 수페리우스, 당신을 알고부터 희생이 무엇인지 깨달았다는 말도 했습니다. 물론, 지금의 얘기는 술을 마시며 친해질 때 나온 것이지만.” “아…….” 쇼너 스타니일까. 테레사일까. 목소리의 증거는 테레사에서 비롯되었다. “반 아마데우스는 없어질 거다.” “?”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그가 보인다. 자신에게 정복자가 될 것을 분명히 선언했던 가시 달린 장미의 입술이 스쳤다. 흐려진 눈을 억지로 억지로 가다듬자, 쇼너 스타니는 약간 미소 지으며 부드럽게 끝 점을 찍었다. “그의 목표일 것입니다.” “…….” “우리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힘 있는 끝 점에 휘청 거리려던 때, 혜성을 붙잡아주는 것은 로미오였다. 이민우였다. 그리고 서서히 넓은 원탁 주변의 불이 밝혀지고 있었다. 그는 돌아올 것입니다. 아니, 돌아오게 하는 것 역시 당신께서 도와 주셔야겠습니다. 그의 자퇴를 철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애원하겠습니다. 매일 빌라면 빌겠습니다. 그에게 음악은, ‘전부’ 입니다. 과거의 저처럼, 그의 전부는 현재 음악 입니다. 그것을 알아챈 나의 능력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음악이 전부라는 그는, 나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놀라운 사람 덕분에 슈만이 되었습니다 - 2악장 0 혹은 -1편 中 테레사 - wgreene@naver.com 표지 : 메일로 '나'님 고맙습니다. 요즘의 아마데우스는 화이트그린의 정신력싸움의 산물입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지켜봐 주시는 분들께 고맙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고마워요.. 그리고 사랑해요... 얼마 남지 않은 길이지만 딱히 짧지도 않은 나머지를 함께 밟아요... 항상 행복하시기를 바라며... 솨, 별똥별이님, 혹은 빵글이셩님, 안젤리스님, 솨, 리에뜨님, 로아님, 셂님, 포근구름님, 좡, 좌앙, 비루향님, 린님, 아기해달님, 박카스정님, 세류지님, 다큰엔젤님, 그리고 당신. 고맙습니다... -화이트그린 올림- 덧글 14개 엮인글 쓰기 /data17/2006/9/28/180/piano_by_gelfling822_1-wgreene.jpg@nhn@77326@nhn@1@nhn@548@nhn@359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51편 /data17/2006/9/28/180/piano_by_gelfling822_1-wgreene.jpg@nhn@77326@nhn@1@nhn@548@nhn@359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51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52편 ▼ 다음글 - 2악장 수페리우스 독백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52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09/30 17:23 http://blog.naver.com/wgreene/110009258223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0930 52편 업데) Amadeus 음악 : Nightwish - Forever Yours (플레이 클릭) Forever Yours-Nightwis.. 너는 지금 행복하니. 너는 지금 편안하니. 2악장 52편 원탁의 불이 밝혀지자 꺼졌던 샹드리에가 동시에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비록 낡고 오래된 불빛들이지만 아까는 읽히지 않았던 열정과 끈기, 그리고 땀이 전해졌다. 편견이란 실로 무서운 것이었다. 그들이 이러할 것이다-라는 편견으로 살아 왔던 수페리우스는, 원탁 주변을 중심으로 쭉 퍼져 앉아있는 모두가 사실은 평범한 외모라는 게 경이로웠기 때문이다. 장소만 바꾸면 아마데우스 학교와 다를 게 전혀 없었다. 쇼너 스타니 는 그들에게 손짓을 했다. 정확한 각도로 공중에 무엇을 지시하자, 전체 인원은 질서 정연하게 공간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 발소리가 한 데 모이자 엄청난 소음이 규칙적으로 공간에 퍼졌다. 혜성은 그들이 자신과 시선을 마주치며 하나씩 빠져나가는 장면을 경건하게 지켜보았다. 테레사 라는 불에 대인 가슴은 철퍽 철퍽 뛰었지만, 평소보다 뜨거웠다. 입을 다문 그들은 이렇게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아니다. 그들의 시선은 분명히 말을 하고 있었다. 『 당신을 믿습니다. 』 혜성은 사방에서 불거지는 그 표정과 음성에 고개를 끄덕였다. 『 테레사를 믿었던 것처럼, 당신을 믿겠습니다. 』 테레사가 주었던 생명력을 그들의 눈빛을 통해 혜성은 확인했다. 오른쪽, 왼 쪽, 앞과 뒤, 모두를 골고루 돌아보면서 혜성은 잠시도 시선을 풀지 않았다. 성화의 가장 파란 불꽃처럼 쉼 없이 뜨거운 내면이 있다. 그들과 테레사의 목표가 깃발처럼 펄럭였다. 그의 자비로운 웃음과 힘 있는 행동, 그러나 음악에서는 황홀한 솜씨로 휘어잡는! 테레사에 대해 많은 것을 고민하겠지. 그러나 지금은 그의 이름만이 메아리처럼 울려서 나는 슬퍼할 수도, 놀랄 수도, 무너질 수도, 일어설 수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혜성은 현재 아마데우스의 학생회 대표가 아니다. 회장은 이자벨이었다. 그렇다면, 이자벨을 여기에 끌고 와야 한단 소린가? 막 그 고민에 빠져들 무렵 혜성은 뺨을 가볍게 치며 생각을 물렀다. 그녀에 대한 고민은 나중으로 미뤄야 한다. 지금은 반 정도 빠져나간 무리들이 마음으로 전하는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반 아마데우스 중에서도 학식이 풍부하고 목표가 다 세워지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테레사의 뜻에 동의하는 무리들만 모인 자리라고 쇼너 스타니 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래서 아이는 이자벨 장 따위로 고민하는 게 사치로 느껴졌다. 인원이 거의 다 빠져나간 자리는 매우 넓고 음침했다. 이윽고 비상구가 닫히자 절대 무음이 다시 찾아들었다. 먼 곳의 물이 무겁게 곤두박질하는 소리가 정확하게 청각에 미쳤다. 뚝. 뚝. 고드름의 끝에서 땅으로 쳐지는 물의 소리들은 아까의 발소리를 연상케 했다. 혜성은 쇼너 스타니가 자신을 어떻게 응시하는지에 상관없이 조심스레 원탁 외곽을 올라가 보았다. 계단식으로 쭉 올라가게 퍼진 자리는 날카롭고 사나웠다. 그러나 사람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혜성은 살짝 그 자리에 앉아서 원탁 안의 로미오와 쇼너 스타니를 쳐다보았다. 공간이 또 한 번 몸을 비틀어서 지금은 다른 차원으로 바뀐 것처럼 기분이 묘해졌다. 쇼너 스타니는 로미오에게 귓속말로 언급했다. 로미오가 킥킥 웃으며 괜찮다는 제스추어를 취하자, 쇼너 스타니는 곤란하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도 혜성의 작은 몸이 한 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언제 울었냐는 듯이 여기저기를 살피는 게 불안했던 모양이다. 바닥에는 진흙이 밟혔다. 부드러운 그것들 곳곳에 이끼가 뺨을 내밀었다. 혜성은 풀썩 쭈그리고 앉아서 이끼를 매만졌다. 덕분에 저 쪽 아래에 있는 쇼너 스타니와 로미오는 작은 몸이 아예 사라진 것으로 보여서 깜짝 놀랐다. “선배-!” “?” 차가운 이끼를 조심스레 쓰다듬던 혜성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놀라서 실수로 이끼가 묻은 돌을 쥔 채로 고개를 올렸다. 계단식으로 된 자리 중 비상구 앞부분은 얕은 단상으로 가려졌는데, 아이는 하필이면 그 뒤에서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혜성이 왜 부르냐고 표정을 갸웃거리자 로미오가 어서 내려오라며 손짓을 했다. 쇼너 스타니의 부드러웠던 표정 역시 단호해졌다. 이크. 아이는 돌을 쥔 채로 헐레벌떡 내려갔다. “엄마야~” “선배!” “…….” 돌을 쥔 채로 마지막 계단에서 대 자로 엎어진 혜성이 푸들 강아지처럼 얼굴을 흔들었다. 예쁜 예식 복과 뺨 여기저기에 진흙과 모래가 엉겨 붙었다. 탐스러운 머리칼에도 장신구처럼 매달린 진흙이 뚝 뚝 떨어졌다. “……?” 일어서야지- 라고 생각했을 때, 오싹한 무언가가 자신의 양 쪽 겨드랑이에 팔을 끼우고는 씩씩하게 일으켰다. 쇼너 스타니였다. 그는 더러워서 참을 수 없다는 낯으로 물건을 건네듯이 공중에서 혜성을 로미오에게 가볍게 넘겼다. 얼떨결에 돌을 쥔 혜성을 받은 로미오의 뺨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까의 박력과 체통, 신중함은 도대체 어디에 갔느냐 따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물론 겉으로는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였지만, 혜성의 내면은 누구보다 성숙해져 있었다. 감동을 주체할 수 없어서 폭발했던 심장도 그대로였다. 행위는 본능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에 혜성은 쇼너 스타니가 왜 겸허하게 굴지 않느냐고 따진다면 할 말이 없었다. 다행이도 쇼너 스타니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쇼너 스타니는 혜성을 주워서 로미오에게 옮기는 중에 자신의 머리칼에 살짝 묻은 진흙을 발견하고는 창백해졌다. 문득 히스가 번쩍 떠올랐던 혜성은 키득키득 혼자 웃었다. 히스. 그도 이곳을 알고 있을까. 어쨌든 묘한 것이 쇼너 스타니와 히스에게로 겹쳐져서 웃음이 터졌다. 정답을 알고 나서의 충격, 참다운 진실의 바다가 지나자 긴장감이 완화된 모양이다. 휙- 그런 혜성을 노려보던 쇼너 스타니가 아까처럼 로미오에게 뭐라고 귓속말로 중얼거렸다. 혜성에게 일상적인 대화는 일부러 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이상하게 구는 것이다. 혜성의 몸 여기저기를 함께 털던 로미오가 나가자며 오른쪽으로 목을 멋있게 꺾더니 윙크했다. 오른쪽의 출구를 가리키는 모양이다. 혜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내민 손을 잡자 쇼너 스타니는 그제 서야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숨을 모두 들이 마시기도 전에, 혜성이 냉큼 입을 열었다. “쇼너 스타니?” “!” 쇼너 스타니는 수페리우스가 테레사와 닮았다면 틀림없이 경건한 아까의 자세로 조용히 물러날 거라 믿었던 모양이다. 그는 경박하다 느껴질 정도로 발랄하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호흡을 참아가며 도대체 왜 부르느냐는 듯 쳐다봤다. 단순히 그와 몇 마디 더 나누고 싶었던 혜성은 머쓱하게 웃으며 가벼운 것을 물었다. “미안한데… 몇 시쯤 됐나요? 제가 아까는 얼마나 잤던 거지요? 혹시 며칠을…….” “…….” “?” 쇼너 스타니는 졌다는 듯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오백 년 동안 잠들었습니다.” “…?” 오백년? 설마 반 아마데우스는 정말로 차원이 다른 곳인가? 테레사에 대한 고민은 온데간데없이 본능적으로 창백해진 혜성이 다시 말해달라는 듯 움직이지 않았다. 쇼너 스타니는 아주 무서운 얼굴로 진지하게 대답했다. “몰랐습니까? 여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유토피아 입니다.” “!” 뭔 토피아? 혜성은 청산유수로 내뱉는 쇼너 스타니의 말이 진짜인 것 같아서 소름이 돋았다. 나가자고 잡아끄는 로미오를 오히려 세우며, 혜성은 침을 꿀꺽 삼켰다. 쇼너 스타니의 짙은 화장과 날카로운 외모, 그의 암회색 컬 때문에 사실인 것 같다. 또 아까의 진솔했던 대화 당시의 표정으로 해 주는 소리들은 지금이 장난으로 보이지 않게끔 만들었다. “또, 500년이 더 지났지요. 대화 하는 동안에.” “어… 어떻게…….” “마음의 시간은 때론, 현실을 초월합니다.” “?” 방금 말이 워낙 난해한지라 못 알아들은 혜성은 아까의 500년 구절에서 계속 창백해졌다. 그 때 답답하다는 듯 로미오가 와락 짜증스런 투로 나섰다. “또 이상한 농담을 하는군요!” “…내 맘이다.” 샐쭉해진 쇼너 스타니가 까만 정장을 추스르며 도도한 척 대답했다. 로미오는 뭐라고 한 마디 더 하려다가 신경질을 부리며 혜성의 어깨를 강하게 쥐었다. “선배! 나가요. 쇼너 스타니는 농담 한 거예요. 정확히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 더 지나서 지금은 밤 이거나 새벽이에요.” “유… 유토피아에서의 시간은?” “…….” “…….” 그 때의 쇼너 스타니는 테레사 앞에서도 보이지 않았던 웃음을 참느라 안면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보라색 아이섀도와 잘 어울리게 붉어진 무표정의 쇼너 스타니를 매섭게 노려보며 로미오는 속삭였다. “쇼너 스타니는 원래 기분 좋아지거나 자신의 뜻대로 굴러가면 농담을 해요.” “?” “혼자만 알아듣는 농담이라지만.” “?” 아리송해 하는 수페리우스가 질질 끌리듯 로미오에게 잡혀 나가는 도중에 막 생각난 것을 또 망설임 없이 외쳤다. “참. 쇼너 스타니! 말을 높이지 마세요!” “…?” “제가 더 어리잖아요!” “!” “또 놀러올게요! 잘 지내요!” “!!” 등을 돌린 채 근엄한 척 입 꼬리를 올리고 있던 쇼너 스타니의 안면이 싸악 굳었다. 움찔 놀라는 그가 멀어지면서도 훤히 보였다. 곧이어 킥킥대는 로미오의 웃음소리가 청각에 하늘 쳤다. 왜 이러는 걸까. 혜성이 통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자 로미오가 어서 나가자며 재촉했다. “로미오.” “…?” 얼마간 조용히 걷던 혜성이 정말로 마음이 편안해 졌는지 정다운 이름을 불렀다. 쇼너 스타니가 진즉에 지시한 덕분에 터널은 칙칙한 어두움으로 을씨년스럽거나 기괴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롱불이 찰랑이는 통에 은은한 멋이 감돌았다. 향기로운 표정으로 혜성을 지그시 내려 보는 로미오가 새삼 하얗게 잘 생겼다고 느끼면서 아이는 눈을 감고 도도한 투를 내뱉었다. “나를 업으라.” “…….” “당장 무릎을 굽히고 나를 업으렷다.” “…….” 이럴 수가. 다른 때라면 뭐라고 신경질을 부렸을 녀석이 군소리 없이 혜성의 농담에 무릎을 굽히더니 등을 내민다. 당황하는 쪽은 오히려 혜성이었다. “나도 농담이었어.” “…….” 주홍색 호롱불이 하늘거린다. 어두운 곳이지만, 그래서 아름답다. “진짜 농담이었는데….” “…….” 혜성은 못 이기는 척 로미오의 넓고 따뜻한 등에 매달렸다. 나른한 기운이 뭉게구름처럼 동그랗게 퍼졌다. 로미오는 단 한 번도 힘들어하지 않고 혜성을 가볍게 업고 일어났다. 그가 움직일 때 마다 엉덩이가 간지럽고 편안한 혜성이 살짝 살짝 몸을 흔들자 로미오가 그 때서야 그러지 말라며 버럭 소리를 쳤다. 한 참을 걸어도 나타나지 않는 출구가 새삼 고마워진 혜성은 로미오의 머리칼을 치우더니 그의 귓가에 조용조용 떠들기 시작했다. 흠칫 놀라는 로미오의 움직임 덕분에 혜성 역시 느닷없이 소름이 끼쳐서 발끝을 매달린 채 오그렸다. 아이는 쇼너 스타니에 대해서 캐물었다. 그가 자신이 별로였던 게 아니냐며 내내 걸렸던 것을 묻자 로미오는 시원하게 웃더니 도라 질을 쳤다. “쇼너 스타니는… 글쎄요… 사람들과 대화하는 걸 싫어 한 다기 보다는… 귀찮아해요.” “아까는 왜 웃었니.” “웃어요?” “쇼너 스타니한테 말을 놓으라는데 네가 웃었잖아.” “아… 큭큭. 그의 콤플렉스가 나이예요. 누가 자기한테 존댓말 하면 나이가 더 늘어난 기분이래요. 같이 존댓말 할 땐 괜찮지만.” “그는 몇 살인데?” “백 살.” “…….” “…….” 더 할 나위 없이 썰렁한 로미오의 대답에 둘은 조용해졌다. 긴 침묵은 그러나 어색하지 않았다. 혜성은 빳빳하게 쳐들었던 목을 천천히 수그리더니 아기처럼 로미오의 등에 눌렀다. 뺨을 기대자 그의 목을 둘렀던 손에 힘이 세어졌다. 로미오는 혜성을 업은 것을 한 번 추스르고 힘차게 다시 걷는다. “미오야.” “…….” 잠결의 언어처럼 은은하게 속삭이는 수페리우스의 음성이 있다. 로미오는 대답 없이 경청했다. “민우야…….” “…….” 뚝. 그의 걸음이 잠깐 멈췄다. 그러나 곧 다시 걷는다. “어느 쪽으로 불러줄까.” “…….” 둘의 가슴이 동시에 뛰었다. 혜성은 그의 등에서 퍼지는 심장의 율동을 들으며 눈을 감고 나른하게 속삭였다. “나는 이틀 내내 기숙사에 있었던 거다….” 수페리우스의 느닷없는 말에 잠시 골몰하던 그가 경쾌하게 받아쳤다. “…나는 계속 선배를 찾아가서 놀자고 졸랐고요….” 둘 만의 공감지대는 서슴없이 빚어졌다. 주황색 호롱불이 질투 할 정도로 정다운 그것들은 그동안 두 사람이 겪었던 고통마저 흡수하는 것처럼 신비로웠다. “…근데 나는 귀찮다고 틀어박혀서 예전처럼 대답도 안 했지….” “방문에 종이를 수 십 장 붙이면서 저는 화를 냈고요….” “너는 오해했겠지….” “선배가 나를 안 보려나 보다… 오해하다가, 혹시 ‘그 곳’ 반 아마데우스에 또 찾아오지는 않을까 의심하구요. 내일, 정말로 찾아가서 그렇게 물어볼 거예요. 재미있겠지요?” 키익 웃던 혜성이 뺨을 기댄 채로 살짝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의 이틀은 그랬던 거다….” 룸펜에서의 꿈같은 에튜드, 테레사에게 느꼈던 배신. 그보다 앞선 반 아마데우스의 놀라움. 하지만 그들을 사로잡은 테레사. 그에게 동화될수록 충격은 계속 되었지만… 결국 헤아릴 수 없었던 이틀의 시간은 정하기 나름인 것을. 혜성의 볼을 타고 내리던 뜨거운 눈물이 감동이라는 발자국을 따라 흩어지기 시작한다. 앞으로 어떤 아픔과 사건이 있을 지라도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겼다. 근원은 알 수 없다. 때로는 이유 없는 정답 이라는 게 숱한 세상이니까. 밑바닥은, 테레사의 에튜드를 통해 나를 내가 볼 수 있게 했지. 밑바닥은, 내가 떨쳐내야 할 고통이 아니라…. 그 역시 나의 소중한 일부분 이라는 걸 다시 깨달았거든…. 이건 어떤 기적일까. 그는 늘 나에게 기적만을 주었어. 처음부터 지금까지…. 밑바닥은 떨쳐내야 할 고통이 아니라, 그 역시 나의 소중한 일부분이겠지… 그렇지…? “…그렇지… 민우야….” 속으로 내내 생각하던 것을 무심결에 묻자 약간 걸음을 늦춘 그가 화들짝 놀란 투로 대답했다. “예? 뭐가요?” 혜성의 양 쪽 뺨이 모두 젖었다. 로미오의 목을 좀 더 세게 잡을 때 구슬 같은 눈물이 또 한 번 터져 나왔다. 그의 등이 축축해진다. “그렇지… 민우야….” “…….” “민우야….” “…….” “그렇지….” 허망하게 중얼거리는 혜성을 위해, 그는 산 사람이 되어서 대답해 준다. 언제나 속으로 끙끙 앓고 대답 없는 구원에 목을 매던 이를 가엾게 여기려는지 하늘을 선물을 준 것이다. “…그래요….” 대답이 긴 여운을 남기며 가슴에 울렸다. 혜성은 거칠어진 숨소리를 참아가며 억지로 입 꼬리를 올렸다. “민우야….” “…….” “흐으… 민…우야… 민우야….” “…….” “대답해줘서 고마워….” “…….” 이번에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터널의 끝 점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폐허와 직결된 또 다른 출구는, 아까 쇼너 스타니가 내보내려던 곳과는 다른 형태였다. 사람 하나가 빠져나갈 틈새가 교묘하게 나타난 것이다. 서슴없이 찔려오는 은은한 빛은 밖의 세상이 어두움에 깔려 있음을 알려 주었다. 혜성은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져서 그의 목을 세게 안은 채로 속삭였다. “민우야….” “…….” “다치지 마….” “…안 다칠 게요….” 하프의 선율일까. 어두움이 대지에 깔리고, 싱싱한 전율이 사방에 가느다란 빛으로 거스르는 장면이, 그 온유와 신비로움이 화사해지자 혜성은 더더욱 다급해져서 눈물뿐인 입술을 열었다. “민우야….” “…….” 가슴의 고동이 짙어진다. 아이는 입술을 깨물며 정말은 묻고 싶고, 정말은 듣고 싶었던 진짜를 물었다. 오늘만, 오늘만. “너는 지금….” “…….” “행복하니….” “…….” 너는 지금 행복하니. “편안하니….” 너는 지금 편안하니. “…예….” 탁 트이는 마음 저 쪽, 민우는 웃고 있었다. 로미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자신이 아닌 자신의 이름을 빌어 다른 이에게 하는 소리임을 눈치 챈 모양이다. 그런 그가 고마워서 혜성은 끅 끅 대며 작게 울었다. 빚 바란 소나타와 같이 대지를 빛내려는 하프의 선율이 몽땅 보여서 감정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문득, 쇼너 스타니의 의미심장한 투가 휙 스쳤다. 『 마음의 시간은 때론, 현실을 초월합니다. 』 아이는 발그레한 낯으로 더더욱 기대오며 기분 좋게 속삭였다. “알 것 같다….” “…?” “쇼너 스타니가 말 한 마음의 시간… 나는 알 것 같아.” “그래요…?” “응…….” 27일의 새벽은 태어나 처음 보는 빛처럼 눈이 부시고 아찔했다. 흔한 바람인데도 소중하게 느껴져서 혜성은 추워도 추운 게 아니었다. 만물이 약동할 때 마다 대지는 푸른 숨을 내쉬었다. 눈이 밟히는 바스락한 소리 역시 다른 때와는 달랐다. 머릿속은 온통 음표 천지였다. 지금의 감정을 악장에 적지 못하는 게 아쉬울 정도로 자연은 너무나도 경이로운 멋을 지녔던 것이다. 테레사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그토록 아름답고도 멋진 음색을 표현할 수 있었을까. 그럼, 나도 그럴 수 있을까. 폐허를 빠져나와 장미 문에 들어설 때 까지, 두 사람은 고고한 자연의 소리를 경청하며 만물에 감사의 인사를 수차례 전했다. Fare thee well, little broken heart Downcast eyes, lifetime loneliness Whatever walks in my heart will walk alone Constant longing for the perfect soul Unwashed scenery forever gone No love left in me No eyes to see the heaven beside me My time is yet to come So I'll be forever yours 나의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영원히 당신의 것입니다. 천년의 이틀 편 끝 메모로그. 경민씨가 올린 사진 中... wgreene@naver.com 천년의 이틀, 부제의 끝마무리 때문에 이번편은 짧습니다. 길게 다음 부제가 치고 들어오면 여운이 달아날게 싫어서요... 꿈을 꿨으니 현실에 부딪혀야지요? 그러나 꿈 마저도 현실인 것을.. 다음편은 테오제네스의 가십으로 시작됩니다.(예고인가? 긁적;)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이 작은 공간에서 우연히 찾았을지도 모를 소수의 숫자들에게 비명을 지르고 있노라고. 나의 전부를 읽어주세요. 읽어주세요... 라구요. 그냥.. 재미없는 생각이지요..^^ 린님, 로아님, 리에뜨님, 애플녹차님, 박카스정님, 포근구름님, 셂님, 혀니차니님, 아기해달님, 솨, 좡, 그리고 소리죽여 읽어주시는 님들.. 고맙습니다.(이젠 좀 나타날 때도..) 당분간 쉬고 돌아오겠습니다. 건강하세요... -화이트그린- 덧글 20개 엮인글 쓰기 /data18/2006/9/30/229/eom69_13-wgreene-wgreene.jpg@nhn@110180@nhn@1@nhn@1024@nhn@768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52편 /data18/2006/9/30/229/eom69_13-wgreene-wgreene.jpg@nhn@110180@nhn@1@nhn@1024@nhn@768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52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53~54편(발트슈타인) ▼ 다음글 - 2악장 51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53~54편(발트슈타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10/03 22:01 http://blog.naver.com/wgreene/110009364626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1003 53~54편 업데) Amadeus 음악 : The Prayer / Celine Dion (아래 플레이 클릭) The Prayer-Celine Dion 그러나 젊음은 그것들을 물리칠 만 한 가능성이 있는 것을. 2악장 53~54편 28일 오후 무렵, 수페리우스는 인쇄 동을 찾아갔다. 길목마다 쌓인 눈은 얼어서 미끄러웠다. 인쇄 동 앞부분은 그러나 깨끗하게 치워져 있어서 수페리우스는 신나게 달려갈 수 있었다. 테오제네스의 부재 때문인지 그 곳은 아주 시끄럽고 번잡했다. 팸플릿 끝에 부수적으로 달려 나온 매듭을 가위로 오려내던 동완이 조심스레 들어서는 혜성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와!” 그러나 곧 선호 선배로부터 딴 짓을 하지 말라는 지적을 받고 울상이 되었다. 혜성은 키득거리며 이른 시간부터 일에 열중하고 있는 소수의 무리들과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탁카탁. 카탁카탁. 기계는 무언가를 느릿한 속도로 찍어냈다. 몸집이 커다란 기기는 넓은 인쇄 동 가장자리에 즐비했다. 뻥 뚫린 가운데에는 많은 책자와 테이블이, 벽 전체가 유리창으로 만들어진 오른 귀퉁이는 고급스러운 소파가 있었다. 허리 높이의 낮은 벽이 미로처럼 군데군데 세워져 있었는데, 그 위에는 테오제네스가 붙인 메모용지가 팔락였다. 꼭지 점으로부터 동그랗게 퍼진 천정무니는 기둥까지 우아하게 이어져 있었다. 일반 건물의 두 층에 달하는 천정은 메아리가 울릴 듯 매우 높았다. 약간은 더러운 주변이지만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인 흔적이라서 오히려 단정해 보였다. 혜성은 긴 테이블에 앉아서 팸플릿을 점검하는 무리들 틈에 끼었다. “좋아.” 프란체스코가 팸플릿의 전체 규격이 마음에 들었는지 한 시름 놓더니 테오제네스가 돌아오기 전에 찍으라던 가십용지를 쥐었다. 혜성은 침을 꿀꺽 삼켰다. 가십! 딸랑이는 종소리가 경쾌하게 스쳤다. 프란체스코는 편안하게 가십 용지를 쥘 때서야 혜성이 온 것을 알았는지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와, 왔니, 수페리우스? 열중하느라 네가 온 것도 몰랐어.” “가십이야?” “그렇지. 이 따끈한 건 앞으로 있을 학생회 주체 연주회 등등 자잘한 소식이 많지만, 무엇보다도…….” “…….” 약간 뜸을 들이며 수페리우스의 표정변화를 살피는 프란체스코가 히죽히죽 웃었다. 그의 나머지 대답은 아주 명쾌했다. “테레사의 소식이 필두지. 테오제네스가 적은 것 하고 비교해서 제대로 나왔나 검사하기만 하면 돼.” “!” 테레사의 소식이 필두지. 그 이외의 글자는 사실 혜성에게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대포가 터졌다. 그의 이름이 전해졌을 뿐인데, 억만 가지의 줄기가 뿌리 채 뽑혔다. 반 아마데우스이자 아마데우스인 그가 이름만으로도 전율케 했다. 말을 잇지 못하는 혜성과 마찬가지로 벙 쪄 있는 나머지들은 벌떡 일어서더니 기기 주변의 인부들에게 너도나도 가십 용지를 달라고 졸랐다. 교수들과 학생회에만 개인적으로 전해지는 가십 용지를 먼저 보는 특권이 그들에게는 당연히 있었다. 일을 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인쇄 동에 출입할 수 있는 현재, 휴가 덕분에 학교는 텅 비었다. 그들은 그것만으로도 신이 났는지 자신들의 아까운 시간을 할애 했다는 점 따위는 까맣게 잊었다. “으악! 진짜다!” “동완아. 조용히 읽으렴.” 환호성을 지르는 동완을 예의주시하던 선호가 역시나 한 마디 거들자 그는 곧 투덜대며 빠른 속도로 내용을 읽었다. 혜성은 검열을 끝낸 프란체스코가 용지를 건네 줄 때가 되어서야 부들거리는 팔을 내밀었다. 까막눈이 된 양 글자는 한 번에 읽히지 않았다. 도공 대는 심장이 원망스러웠다. 글자만으로도 그는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힘이 넘쳤다. 오, 테레사. 아찔한 감탄사가 혜성의 입 밖에 쏟아졌다. 젊은 그들은 하나같이 들뜨는 현재를 즐기는 것이다. < 한국의 영광, 전 진 혹은 테레사의 독점 계약 > 독점 계약? 혜성은 용지를 쥔 채로 오래 전 테레사가 테오제네스와 담소를 나눌 때 이용했음직한 소파에 푹 눌러앉았다. 아무도 자기를 볼 수 없도록 꼭꼭 감추듯이 목을 숙인 채 열중했다. < 테레사의 성공가도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예고 없이 운명처럼 움직였다. 신은 항상 그의 편이다. 그런 테레사에게도 치명적인 독을 찾아보면 무엇이 있을까. 바로 연주 이상 가는 황홀함을 감추는 데서 비롯된다. 뮌헨에서 명성을 높일 때 그는 은어의 손놀림에 국한되었다. 한국 아마데우스 건축 이후로 별다른 것 없이 유럽을 전전하던 테레사는 변하고 있다. 수많은 지식층은 그의 사고변화에 있어서 시력저하를 꼬집었다. 어쨌든 테레사의 변화를 살펴보자. 11월, 보스턴의 아마데우스 증축에 있어 필요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그는 아마데우스 홀에서 장시간 리사이틀을 가졌다. 그의 이름이 걸린 최초의 자선 활동이었다. 경이로운 쾌거를 거둔 것은 당연지사, 각 지의 타임지는 비판 보다는 격려로 그의 성과를 보도했다. 보스턴의 아마데우스는 한국에서와 같이 테레사의 땀으로 다시 휘장을 휘날리게 될까. 보스턴의 다운타운에서 가까운 홀을 시작으로 테레사는 외곽의 학교에 열 개의 건물을 신설했다. 한국과 독일의 양식과 흡사하지만, 보스턴 특유가 돋보이도록 그는 바꿨다고 인터뷰 때 밝혔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음악인에게 줄 수 있는 뿌리 깊은 영감 이었노라 답하는 동시에 내년 2월 중, 직접 학교 안에서 회견장을 마련한 뒤 다시 설명해 주겠다는 뜻을 약속함으로서 그는 각국 기자들에게도 환심을 샀다. 또한, 리사이틀을 찾은 명사 중 대형 음악 관련 출판사의 관계자를 직접 자신의 집에 초대한 테레사는 그를 설득한 뒤 독점 계약을 추진했다. 그가 눈이 먼 이후 좌절을 딛고 작곡한 것과 어려서부터 만들었던 수많은 에튜드 발간을 두고 출판사는 당장 계약에 손을 잡았다. 테레사는 이제껏 자신의 곡을 함부로 유출 시키거나 단 한 번도 출판 한 적이 없었다. 그의 콘서트에서나 가끔 보여 지는 아쉬운 곡들은 즉흥 변주에서 그쳤지만, 이제는 전 세계의 뮤즈에게 연습곡 혹은 목표가 되어 줄 것이다. 특히나 그가 눈이 악화 된 이후 완성한 악장은 예약 판수만 해도 천문학적인 액수를 자랑하고 있다. 유명한 클래식 일간지들은 앞으로 출간될 그의 곡들을 해석 분석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은어의 손놀림에 대한 비밀까지 캐지 않을까 많은 이들은 기대하고 있다. 테레사의 나이는 고작 20대 초반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한 사람이 평생에 다 해도 이루지 못 할 많은 것들을 다섯 살 때부터 지금 것 실천하고 뽐내고 있다. 그의 귀추가 주목되는 바이다. -테오제네스- > 중간의 여러 생략된 부분을 배재한 뒤, 혜성은 리사이틀과 자선기금의 쾌거, 독점 계약을 쉼 없이 읽었다. 낭독하듯 입술은 여러 번 움찔거렸다. 다른 나라도 아닌 영국의 대형 음악 출판사라니! 게다가 그의 에튜드! 혜성의 온 몸과 영혼에까지 소름이 쫙 퍼졌다. 천문학적인 액수, 그것은 그가 먼 훗날 죽은 다음에는 더더욱 불거지겠지. 이런 생각은 아직 할 게 못 되지만. 어쨌든 그가, 그가! 지난 번, 크리스마스 선물로 신혜성 에튜드 집을 선물해 준 테레사는 혹시, 이런 가십을 예고한 게 아니었을까! 혜성은 문득 이 사실을 좋아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듯이 테레사의 소식에 뛸 듯이 좋아하다가도 정작 에튜드 집 부분에 있어서는 모두들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다. “…….” “…….” 아이는 답답해졌다. 그 닥 좋아할 일이 아니었을까? 이런 행위를 일삼던 그가 아니기 때문에 좀 더 두고 봐야 할까? 확실히 테레사의 계약 채결 소식은 무언가 빼앗기는 듯 한 아련함도 함께 선물했다. 혜성은 하는 수 없이 가십 용지를 복사 한 뒤 기숙사로 챙겨오는 것 이상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인쇄 동의 동완과 프란체스코가 묵묵히 있듯이. 잠시 후 누군가가 눈이 온다며 소리쳤다. 백색의 세상이 밝혀지자 침묵했던 그들은 다른 화제에 서둘러 동화 되고 싶다는 것처럼 뛰어나갔다. 발트슈타인 휴가가 끝나는 날, 많은 학생들은 역시나 게시 대에 몰려들었다. 바글거리는 그들의 머리는 단 하나를 읽었다. 이자벨이 예고한 학생회 주체 연주회에 대한 것일까? 그게 아니다. 테레사 라는 글자 때문에 학생들은 열을 올리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혼자의 머리로 도저히 정답이 나오지 않을 때는, 다수의 의견을 듣는 게 도움이 된다. 지금이 그러했다. 혜성이 우물쭈물 그들 사이에 끼어서 듣는 소리들은 다시금 심장에 활력을 주었기 때문이다. “테레사는 악보를 파는 사람이 아닌데…!” 덜컹. 활력으로 뛰던 심장이 곤두박질한다. 혜성의 근처에서 안쓰러운 투로 묘하게 중얼거린 꺽다리 녀석 때문이다. 혜성은 조금 더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래. 그런데… 그런데…….” “좋아해야 할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르겠어.” “악보의 고유 영역이 우리들에게 한정되어 있다는 것도 말이 안 되긴 하지만…….” 아이의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추운 날씨 따위는 아무런 방패도 무기도 될 수 없다. 혜성은 그들이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라 이제는 귀에서도 땀이 맺힐 것 같았다. 오른 쪽에서 저의 친구와 쑥덕이던 한 녀석이 긍정적인 발언을 툭 내던진 건 그 때였다. “그럴 리가 없잖아. 한국의 테레사. 그의 에튜드에 이만큼이나 주목하는 것만 봐도… 그는 또 성공한 거야!” “!” “!” 그렇지! 혜성의 동공이 번쩍 뜨였다. 그의 소식을 두고 기쁨과 무감동 중 어느 것을 선택할 지 참으로 난감했던 수페리우스는 실수로 박수를 치며 그의 말을 거들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줍음 많은 소녀가 왼 쪽 언저리에서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그가 조금은 가까워진 것 같아… 이상해….” “그냥 악보를 출판하는 것뿐인데… 워낙 가려졌던 것들이라, 그만큼 생각지도 못 한 것이라서 그런지… 한층 더 가까워진 것 같다….” “테레사 같지만… 테레사 같지 않고… 그래서 이상하다.” 테레사 같지만, 그 같지 않은 행위. 아마데우스 학생들은 그의 출판 소식에 나쁘지 않은 결론을 내렸다. 휴가 마지막 날까지 피아노와 씨름하며 조용히 고민하던 혜성의 것들이 한 방에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아이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을 참느라 입이 바짝 말랐다. 혼자서 정답이 없을 때는, 많은 이의 소리가 정답이 되어 준다. 혜성은 환희에 찬 내면을 쥐고 로제리오의 집무실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학생들은 분명히 말했다. 그와 조금은 가까워 진 것 같다며, 왜 그것이 이상한 지 당황해 했지. 그것은 즉, 그의 아름답지만 황량했던 혼자만의 나라가, 문이 열렸다는 것이다! 이 환희와 감격을 누구에게 설명해야 좋을까. 가십을 읽은 직후부터 지금까지 쭉 나를 따라다녔던 모호한 의구심은 바로 이거였어. 그 답지 않지만 그이기에 해 내는 사건들. 그의 넓고 황량한 나라에, 사막이 사라질 거야. 붉은 숲이 영원토록 우거질 수 있도록. 녹읍이 반짝일 때 젊은 우리들은 그의 세상에 취해 향기가 없어도 향기를 맡을 것이다. 오오, 그가 정식 출판으로서 그의 세계를 모두에게 펼쳐 보인다! 기분 좋게 로제리오의 집무실에 당도한 수페리우스는 그러나, 뜻하지 않은 소식을 들어야 했다. 휴가 이후 다시 보는 로제리오는 다른 날보다 신중하고 무뚝뚝해 보였기 때문이다. 조용히 그의 집무실 안쪽에 앉은 혜성은 그의 처분을 기다렸다. 그렇다. 지난번에 그는 기다리라고만 하질 않았던가. 한 달 안에 교수들이 수페리우스를 심사하고, 또 다가올 봄에 있을 콩 쿨에서는 3위 안에 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콩 쿨에 앞서 교수 평가를 설명해주기 위해 로제리오는 수페리우스를 따로 불렀다. 제대로 된 수업 없이 혼자서 피아노에 열중하던 수페리우스의 낯은 눈에 띄게 말라 있었다. 그러나 로제리오의 다음 말을 듣기 전 까지는 테레사의 소식과 아이들의 반응에 가벼운 홍조를 달고 있었다. 로제리오는 그 홍조마저 가져가려는가 보다. “휴가는 잘 보냈니, 수페리우스.” “…….” 무거운 입을 억지로 열면서 그는 부러 말을 돌리기만 했다. 휴가에 대한 질문만 연이어 내뱉는 로제리오를 막으며 수페리우스는 분명하게 물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교수들의 평가가 무엇이냐고 두 번이나 강조해서 묻자, 로제리오는 시선을 회피하며 어렵게 대답했다. “서른 두 개의 베토벤 소나타 중, 교수들이 추첨을 했지.” “…!” 베토벤! 다른 것도 아닌 베토벤이라니. 아이는 이유 없이 시큰대는 손목을 어루만지며 침을 삼켰다. 베토벤의 악장들이 한꺼번에 머릿속에 터졌다. 각각의 음표들이 사납게 달려들어서 엉망인 현재, 로제리오는 약간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추첨에서 사비나 교수는 독일로 잠시 보내졌기 때문에 제외되었어.” “…….” “만장일치로 나온 결과는 소나타 21번, 발트슈타인 이다.” “!” 발트슈타인! 그 말을 끝으로 혜성은 잠시 공황 상태에서 넋을 놓았다. 시야가 까맣게 흩어졌다. 요 며칠 반 아마데우스를 회상하며 허상을 쥐듯 테레사를 떠올리던 나날이 사라졌다. 발트슈타인! 그 중에서도 3악장은 혜성이 예전부터 자신 없어 하던 것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노랗게 질린 혜성을 전혀 기다려주지 않는 로제리오의 음성마저도 목각처럼 딱딱해진다. “알다시피… 전공자들도 발트슈타인을 어려워하지. 쉽게 쳤다고 생각하던 사람도 나중에는 그게 아니었다며 혀를 내두르기도 하고. 가벼운 듯 그러나 전혀 가볍지 않아. 부드럽지만도 않고, 강한 것만도 아니지.” “…….” “총 3악장을 모두 연습하고 있어 봐라. 원래는 발트슈타인에 대한 것도 당일날 발표하자는 걸 내가 가까스로 말렸지.” “…….” “1악장, 2악장, 3악장 중 어떤 것을 시킬 지는 평가 때 알게 될 거다. 그건 지금의 나도 모르거든.” “…….” 전체적으로 가벼운 1악장, 그리고 2악장은 당장 떠오르지도 않는다. 꾸밈 음과 기교 덕분에 연습 도중 악보를 치울 뻔 했던 3악장, 그 중에서도 왼 손에서 느꼈던 부족함이 발끝까지 저리게 했다. 혜성의 숨이 불규칙적으로 빠져나간다. “수페리우스?” “…날짜는… 정확히 언제…….” 그간 연습했던 것 중에 베토벤은 없었다. 아이는 리스트보다도 베토벤이 싫었다. 싫다 기 보다는 혜성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쇼팽의 에튜드가 아이는 늘 좋았었다. 그런 수페리우스에게 뜬금없이 21번 발트슈타인이라니! 혜성은 체념의 빛으로 집무실의 도어를 당기며 물었다. 로제리오는 1월 첫째 주 토요일이라고 대답 하면서도 걱정이 되었는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수페리우스!” “…?” “나에게 사비나 교수처럼 개개인의 감성을 부축 이는 방법은 없다!” “…….” 로제리오의 안타까운 본능은 수페리우스를 걱정하고 있음이, 학생을 염려하는 마음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그는 다수 교수들에게 쏠려가는 현재, 스스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계속 외쳤다. “사비나 교수는 1월 둘 째 주나 되어야지 돌아 올 거야!” “…….” 아무도 나를 제대로 레슨 해 주지 않을 거다. 발트슈타인의 고뇌는 결국 수페리우스 혼자의 것이다. “베토벤은 베토벤다워야 한다! 모차르트는 모차르트다워야 하듯이! 다른 것들도 다 그렇듯이!” “…….” “만약 사비나 교수가 있다면, 너에게 이렇게 설명했을 거다. 베토벤, 그를 먼저 이해하라고 말이지. 나는 사비나 교수가 수업하는 것을 몇 번 보면서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거든.” “!” 사비나 교수님. 그녀의 이름이 절실하다. 그 마음을 로제리오도 아는 걸까. 아이는 혼란스럽지만 되도록 그의 이야기를 전부 알아듣도록 귀를 기울였다. 그럴수록 사비나 교수 특유의 겨울 나그네 연주가 슈베르트의 선율만이 아프게 파고들어왔다. “너라면 이 말을 이해 할 것 같다. 베토벤은 그의 아버지가 돈을 벌기 위해 맹훈련을 시켰었지. 너도 알겠지만 귓병까지 안 위인이다. 너에겐 그런 것들의 이해가 먼저 일 것 같다. 사비나의 스타일에 익숙하다면 말이지.” “…….” “베토벤만의 무언가를 음악에서 찾아봐라.” “!” “흐름이 파악 될 거다. 그게 사비나의 방식이니까. 나는 더 이상 알려 줄 게 없다. 기교에 있어서 어려운 점이 있을 땐 나를 찾아와도 좋아.” “…나가 보겠습니다.” 아이의 목울대가 떨렸다. 로제리오는 모르는 눈치다. “왼 손의 트레몰로와 16분 음표들을-!” “…….” 왼 손. 트레몰로. 사비나 교수. 감성. 그것만으로도 수페리우스는 충분했다. 테레사가 선택했다는 로제리오 교수, 처음에는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혜성은 자신을 신임하는 눈빛을 그에게서 역시나 읽었기 때문이다. 다른 교수들이 가로막고 있지만, 정말로 21번 발트슈타인이 난해해 질 땐 자신을 찾아오라는 음성은 적 잔이 위로가 되었다. 과연 사비나 교수 없이 발트슈타인을 제대로 연습할 수 있을까! 다른 교수들은 형식적으로 아이를 몇 번 레슨하고 그칠 것이다. 전공이 없는 현재, 수페리우스는 기댈 곳이 아무것에도 없었다. 전공이 주어져야 학과 교수들이나 학생들과 친해질 명분이 세워지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은 힘이 없었다. 수페리우스는 기숙사에 돌아오는 즉시 약 하루에 걸쳐 쉬지 않고 건반과 함께했다. 아주 오래 전, 애송이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잠깐 잠깐 쉴 때를 제외하고는 같은 음절만 쉼 없이 몰아붙였다. 그것은 매우 지루한 작업이었다. 인내심이 바닥나면 없는 것이라도 끌어내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시간이었다. 발트슈타인! 그 이름은 너무 멀었다. 차라리 곡명이 주어지지 않는 편이 나을 뻔 했다. 동완과 선호, 로미오와 프란체스코, 하물며 보스턴에서 귀국한 테오제네스까지 혜성의 기숙사를 찾았지만 아이는 방문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건반을 누르면서도 혜성은 스스로를 알았다. 지금의 자신은 비록 건반과 함께 하지만 예전처럼 ‘미친 상태’는 결코 아니라는 것을. 오직 피아노만 원하고, 그것만 있으면 영혼마저 향기롭다는 믿음에 휩쓸리는 게 아님을. 나태한 지난 시간들과 적 잔이 자란 교만이 성숙한 수페리우스를 야금야금 유혹했다. 무작정 연습 이라는 건 행위만 지속될 뿐 내면은 제자리였다. 발트슈타인! 발트슈타인! 그를 외치다가도 문득 문득 생각나는 테레사의 에튜드가 마음에 사무쳤고, 쇼너 스타니의 음성이 꿈처럼 메아리쳤다. 반 아마데우스를 떠올리면 이자벨의 영악한 미소가 스쳤으며, 나아가 테레사와 정혁이 교차하며 지났다. 완벽한 몰입 이라는 건 불가능했다. 하루가 더 지나자, 하논으로 팔을 움직여주던 혜성은 자기 자신에게 백기를 꽂았다. 오후 무렵이 되자 땅거미가 짙게 깔렸다. 많은 학생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전공과목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게 피부로 와 닿았다. 레슨, 레슨이 필요해. 수페리우스는 불안해졌다. 발트슈타인 이라는 시험 앞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코치해야 만이 자신감이 생길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전공과목과 평가라는 게 걸려 있어서였다. 예전처럼 테레사나 사비나 교수가 코치해 줄 수 없는 현재, 혜성은 스스로 연습 해 보기도 전에 질린 것이다. 피폐한 몰골로 세수를 마친 혜성은 오늘도 함께 밥을 먹지 않으면 절교하겠다는 동완의 선언에 알았다는 대답 대신, 학생 식당으로 향했다. 마음이 무거워서 바닥 아래로 끊임없이 추락할 것 만 같았다. 피아노의자에 앉아도 발트슈타인, 다른 곳에서도 발트슈타인. 그 글자만이 산산이 울려왔다. “수페리우스?” “…예?” 눈가가 흐릿해진 혜성을 수차례 불렀던 선호가 마침내 박수를 치자 아이는 푸드득 정신을 차렸다. 국이 전부 식어서 동완이 화를 내는 중이었다. 그런 동완을 완강하게 째려보며 미카엘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수업을 전혀 안 들어도 괜찮겠니?” 아… 수업. 소박한 탄식이 불거졌다. 수업 때문인가. 결국, 제대로 된 수업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불안했던 걸까. “임기응변에 뛰어난 건 다행이지만, 꾸준한 연습과 교육지도 없이 실력이 향상되기는 힘들어, 수페리우스.” “알아요. …알고 있어.” “…아닌 듯 위태롭구나?” “시험에는 어떤 곡을 연주 할 거니? 아니, 교수님들이 알려 주지 않았어?” “발트슈타인.” “…….” “…….” 혜성의 대답에 잠시 놀란 선호는 무슨 말을 꺼낼까 고심하는 눈치였다. 그러자 동완이 콕콕 찌르는 말로 치고 들어왔다. “나아가 봄의 콩 쿨에서는 3위 안에 들어야 한다면서. 그 때의 지정곡 1번이야 연습하면 어떻게 되겠지만… 보통 콩 쿨에서는 에튜드 라던가 바리에이션이 추가 되니까… 어깨가 무겁겠어.” “글쎄…….” “……?” “다른 건 모르겠어. 나는 학생회가 생겨서 참 다행이라는 것 밖에.” “수업이 없는데도?” “그들은 널 인정해주지 않고 교수님들께 목을 매는데도?” “…지금은 다 필요 없어. 나는 건반만 생각하기로 했고, 그게 좋거든.” “…….” 수페리우스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지금 말 한 것이 정답임을 스스로에게 강조하듯이 대답했다. 건반만 생각한다. 그것은 정답이었다. 하지만 잘 되지는 않는다. 듣는 귀가 저명한 솜씨인 누군가가 없어서 그럴까. 힘없이 수저를 국에 휘젓는 혜성을 한 참이나 뚫어지게 살피던 선호가 마음을 꿰뚫어 봤는지 믿음직한 입술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 “너는 터치가 좋아, 수페리우스. 연주회장에서는 좀… 자의적인 느낌이 많긴 하지만.” “터치…….” 강한 울림이 머릿속에 퍼졌다. 그 울림은 가시의 북처럼 온 몸을 간지럽게 했다. “체르니 몇 번이 사실 무슨 소용이니. 나도 사비나 교수님의 말씀이 모두 옳다고 보는 사람 중의 하나란다. 너는 너의 터치를 믿기 때문에 음악 감이 성숙한 거겠지.” 그리고 흔들림 없는 미카엘의 시선과 교차하며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바로 현재에. 굳이 사비나 교수님이나 테레사처럼 대단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자신을 평가해 주는 이들은 천지에 널려 있다는 것을. 그들 역시 아마데우스의 사람인 이상 대단하다는 것을. 혜성은 그제 서야 없던 식욕이 되살아났는지 몇 차례 밥을 퍼 넣더니 활짝 웃었다. 나의 터치를 얘기해주고 있는 거야. 내가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 선배는 알고 있어. 왜냐면, 그도 뮤즈이니까. “내가 방금 말 한 것을 이해 할 수 있겠니?” 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숙사에서 내내 건반과 씨름하면서 열리지 않던 총명한 것이 발하였다. “터치라… 같은 곡이라고 해도 사람의 생각이 다 다르듯이, 사람에 따라서 전부 다르게 연주되는 것 밖에는…….” 아이의 대답이 지나자 미카엘은 그러냐면서 살며시 웃어주었다. 동완은 질투가 났는지 뭐라고 끼어들었지만 수페리우스와 미카엘은 둘 만의 대화에 여념이 없다. 지금의 혜성은 레슨 때의 총명함과 똑같았다. 다른 것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전부 다르게 연주를? 그렇지. 누가 제일 처음 그것을 가르쳐줬니?” “…가르쳐주지는 않았어요. 소프라노 시절에 이자벨 장과 저는 같은 악보를 두고 각기 다른 효과를 빚었지요. 또 제가 연습할 때랑, 오르페우스 관에서 다른 애들이 연습할 때… 같은 곡이라도 느낌이 아주 달라서 신선했던 적이 있거든요. 입학 초기 때지만… 그래서 알았어요.” “…….” “음악적인 해설을 중시하시고, 기본적인 박자개념에 충실하신 사비나 교수님의 방식이 저는 맞았어요. 다른 교수님들은 잘 모르겠어요. 레슨을 제대로 받은 교수님은 사비나 교수님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왠지 로제리오 교수님은 제 터치를 그리 좋아하지 않을 것 같지만…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다듬어지는 중이겠지. 그렇다고 평범하지는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네….” “발트슈타인을 교수님이 어떻게 레슨 할지는 너도 알 거야. 박자! 박자! 박자!” “!” 목재 피아노를 두드리듯 테이블을 캉캉 내려치며 선호가 사비나를 흉내 냈다. 깜짝 놀란 수페리우스의 안면에 경쾌함이 스칠 때, 선호는 공감할 만한 최후의 것 까지 꺼냈다. “사비나 교수님은 악보를 제대로 누를 때가 되서야 해설을 줄줄줄…….” “하하 하하하! 맞아요!” “그렇지?” 혜성은 시원하게 웃으며 선호를 차분히 마주했다. 그가 다시 보였다. 지금 것 알던 미카엘 선배는 겉모습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각인되었다. 음악에로 질겁할 때는 같은 상황에 처한 이들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도 알았다. 그동안은 수페리우스 혼자만의 고뇌였던 것이 이제 보니 다른 이들도 비슷한 것이었음을. 아이는 이제 기숙사 방에 돌아가면 어제처럼 푸념하며 건반을 회피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다시금 피아노가 그리워졌다. “표정이 밝아졌구나. 보기 좋다. 볼이 말라서 뼈의 생김새가 보일 지경이야. 내 말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을 텐데… 너의 아까 표정은 피아노를 회피하는 것처럼 멀었거든. 지금은…….” 유난히 오늘따라 말이 많은 미카엘 선배에게 한없이 고마워진 혜성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 “아직은 피아노를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 더 크거든요.” “…그래.” “팔목이 얇고 터치가 사실은 많이 약해서 보강해야 할 게 넘치지만…….” “하하하….” 그러고 보니 둘이 대화에 열중하는 사이, 화가 난 동완이 나가 버렸다. 텅 빈 동완의 자리를 씁쓸하게 지켜보던 미카엘은 함께 산책하자며 수페리우스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두 사람은 몇 번 더 발트슈타인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심각한 것을 나누었다. 그러나 언덕의 정상에 도착할 무렵에는 그것마저도 동강나서 다른 화제를 꺼내야 했다. 혜성은 미카엘의 눈치를 보며 차가운 바람에 온 몸을 맡겼다. 강한 바람이 어디서 그런 힘이 솟는지 맹렬히 부딪혀왔다. 아리따운 학생들이 젊음을 발하며 곳곳에 뛰어다니고 있었다. 저 아래 분수대 쪽에서는 눈싸움을 하는 무리들도 보였다. 그리고, 혜성의 곁에 나란히 서서 시선을 흐리는 미카엘 선배는 그 닥 좋아 보이지 않았다. 혜성은 자신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자 이번에는 그가 걱정이 되었다. 반 아마데우스와 로미오, 쇼너 스타니, 지난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미카엘 선배에 있어서는 쉽게 상처받기를 자처하는 동완이의 윤곽이 저 아래의 시계탑처럼 자세하게 그려졌다. 아이는 조심스레 물었다. “동완이를 아끼시지요?” “…….” 약간 움찔하는 미카엘 선배의 표정이 창백해진다. 혜성은 이상했다. 자신의 눈에는 그들의 감정이 훤히 보이는데 당사자들은 아닌 척 구는 것이 신기했다. 혹시 자신이 테레사를 향한 마음도 이들이 보기엔 훤할까. “동완이가 좋으신 거죠?” “…….” “동완이에게 익숙해지신 거지요?” “…….” 아랫입술을 깨무는 선호의 모습에 한결 푸근해진 혜성이 좀 더 확실한 것을 물었다. “동완이의 편지가 사실은 반가우셨지요?” “…그래.” 그는 신음하듯 말을 내뱉고는 곧 후회하는 기색이었다. 그의 눈빛에 순간 혜성 자신이 스쳤다. 똑 같지는 않지만 사랑에 있어 번뇌하는 영혼은 비슷한 걸까. 그것의 공감을 증명하기 위해 수페리우스는 뮤즈로서 아까 전 힘을 심어준 미카엘에게 평소와 다른 강한 것을 속삭이기로 했다. “선배…….” “그 애의 당당함이 나는 두려워. 겁이 나.” 그러나 감성에 치우쳐진 미카엘이 훨씬 빨랐다. 훨씬 뜨겁고 사나웠다. 그 자신 문제로 화제가 옮겨지자 미카엘은 아까의 단정함은 온데간데없이 괴로워했다. 침착해지는 쪽은 오히려 혜성 이었다. 아이는 진심으로 당신을 이해하고 싶다는 눈빛으로 다정하게 물었다. “…어째서요.” “나는 가난하잖아. 그 애는 부자이고.” “!” 불안해하는 젊음의 목소리여. 너무나 솔직하고 당연한 것을 내뱉을 때도 몸서리치는 현실이 있다. 감각은 결국 현실 앞에서는 무용지물일까. 그렇지 않다. 적어도 혜성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애송이인 자신은 테레사를 흠앙하질 않던가! 미카엘과의 공감이 생성된 현재, 사랑에의 구절이 숨 가빠지기 전에 혜성은 솔직한 그의 말을 조용히 경청했다. “나는 자신감이 사실 많지 않아서 그것을 감추기 위해 철갑으로 위장하는 편이지. 동완이는 안 그러잖아. 원래 그렇잖아.” “선배….” 젊음. 그것은 불붙는 자아를 죽일 수도 있는 힘. 젊음. 영원히 약동하고 숨을 쉴 것만 같은 찬란함의 계절. 젊음. 가장 매혹적으로 이끌리면서도 어쭙잖은 힘에 굴복해서 이별의 곡을 이루는 잔인함. 그러나 젊음은 그것들을 물리칠 만 한 가능성이 있는 것을. “동완이는 낙오자의 모임에서도 참으로 떳떳하게 자기주장을 펼쳤었지. 지금도 그러지만.” “…….” “갑자기 왜 그런 것을 묻지, 수페리우스?” 순간 이성이 돌아온 미카엘이 표정을 싸악 굳히며 되물어왔다. 혜성은 그러나 당황하지 않았다. 딱딱한 척 굴어도 지금의 선호의 표정에는 사랑에의 갈증과 서러움이 부스럼처럼 남아 있었다. 테레사와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들려던 혜성은 그것 보다는 훨씬 미카엘과 가까운 쪽을 꺼냈다. “…저도 로미오가 답답했었거든요.” “?” 과연, 로미오 라는 구절에서 흠칫 놀란 미카엘은 더더욱 몰입해왔다. 혜성은 쾌할 한 투로 그러나 진솔하게 말을 이었다. “로미오의 본명을 저에게 알려주지 않아서 고마워요, 선배.” “!” “…….”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니. 설마… 다 알고 있는 거니?” “…예.” “데블관에도 혹시 다녀온 거니?” “…….” 반 아마데우스에 대한 얘기를 가볍게 꺼내는 둘은 서로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혜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다녀온 일을 짧게 설명했다. 이제 두 사람은 예전과는 다른 절대적 공감대가 나아갈 일만 남은 것이다. 둘은 다시 사랑에의 화제와 발트슈타인에 대한 것으로 떠들었다. 저녁이 끝날 무렵, 가시처럼 돋친 바람이 견딜 수 없었는지 선호가 몸을 일으켰다. 아이는 짜릿한 바람의 기운을 좀 더 느끼고 싶다는 말로 선호를 먼저 보냈다. 의례적인 인사를 마친 선호가 등을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페리우스는 입을 열었다. “선배도 동완이에게 비밀을 말 해 봐요.” “…….” 깨알 같은 심연을 담아 언어를 흘린다. 잘 걷는 척 하면서도 미카엘 선배의 뒤태는 눈물처럼 진하게 변했다. “분명히 동완이는 선배를 감싸 줄 거예요.” “…….” 마음이 몽글 친다. 휙- 고개를 돌린 선호의 옆구리에 청명한 초생 달이 매달려 있었다. 그가 참말로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것을 아이는 새삼 깨달았다. 동완이가 정말 그럴까. 선호의 방패는 서서히 찢기며 같은 것을 물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트슈타인에 대한 보답이라고 해도 좋을 풍부한 어절이 다시 지난다. “그 애는 도망가지 않아요. 만약 도망갈 사람이었다면, 처음부터 아마데우스에 있지 않을 거예요. 선배는 동완이에게… 그 애가 선택한 심리학과 같아요.” “!” 수페리우스 앞에서 끝끝내 눈물을 참고 돌아서는 미카엘의 동공은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젊음. 그것은 불붙는 자아를 죽일 수도 있는 힘. 젊음. 영원히 약동하고 숨을 쉴 것만 같은 찬란함의 계절. 젊음. 가장 매혹적으로 이끌리면서도 어쭙잖은 힘에 굴복해서 이별의 곡을 이루는 잔인함. 그러나 젊음은 그것들을 물리칠 만 한 가능성이 있는 것을. 고맙다는 말 대신 천천히 등을 돌린 미카엘은 멀어져갔다. 초생 달이 날씬한 그를 좆는 것처럼 신비로웠다. 혜성은 한 참 동안 넋을 잃고 미카엘과, 마치 그와 함께 있는 것처럼 그려지는 동완을 내려 보았다. 등 뒤의 어두움과 당장 수페리우스를 끌어안을 것처럼 날카로운 나뭇가지들을 위시하며 혜성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나와라.” “…….” “숨어 있는 거 다 안다. 따라오려면 정확히 숨었어야지.” “…….” 이럴 수가. 언제부터 숨어 있었던 걸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뭇가지 뒤에서 숨을 죽이던 로미오가 불쑥 나타났다. 아이는 처음부터 느꼈던 익숙한 감각을 알았던 모양이다. 보스턴까지 따라왔던 그가 아니던가. 아이는 자신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오는 로미오를 지켜보았다. 그가 언제부턴가 흘리고 있던 뜨거운 눈물이 초생 달 아래 반짝인다. “형이 불쌍해요.” “…….” 아마데우스의 반짝이는 건물이 훤하게 보이는 자리에 앉은 혜성이 나란히 서 있던 로미오를 잡아 당겼다. “형이 불쌍해요….” “…….” 그는 앉는 동시에 아까 와 똑 같이 중얼거리며 주르륵 뜨거운 것을 내렸다. 가슴이 뛴다. 사무친다는 표현처럼 가지들이 내면에 엉켰다. 이민우가 울고 있다. 아니다. 로미오가 울고 있다. 평소처럼 장난기 많은 그가 혜성을 따라다니다가 미카엘과의 대화를 엿듣고 가슴아파한다. 젊기 때문에 눈물은 쉽게 흐르나 보다. 상대방의 가슴에 때로는 감정이 전이 될 수 있도록 맑고 투명하게 속상한 것을 털어놓는다. “가난이 싫습니다.” “…….” 혜성은 그의 넓은 어깨에 머리칼을 기댔다. 그들을 추근 대는 사나운 겨울밤의 모든 것이 가려졌다. 세상은 그래서 아직 아름다웠다. 밤바람에 실린 자푸라기가 겨울 요정처럼 신비로웠다. 기숙사 방으로 돌아가서 연주에 골몰하려던 것을 뒤로 미룬 현재, 수페리우스의 마음은 열려 있었다. 테레사의 가십을 통해 느꼈던 짜릿함도 여전했다. 가난이 싫다는 민우의 음성은 슬프면서도 솔직했다. “아마데우스의 생활은 천국과도 같아서, 저도 데블 관에 규칙적으로 찾아가는 것을 빼면 거의 매일 들뜨지요.” “…….” 아이의 손이 그의 등을 쓸어줄 때, 로미오의 음성은 한결 거칠어졌다. 그의 응어리가 예기치 않은 때 꺼내져서 스스로도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혜성은 괜찮다는 말 대신 그를 자상하게 어루었다. 바람에 차가워진 손이 부르터도 아프지 않았다. 그의 마음이 더 아파서 혜성의 손은 부르튼 들 미온수에 녹이면 그만이었다. “형은 오히려 반대예요. 미래가 부담 되나 봐요. 아무 곳에서도 자기를 써 주지 않을까봐.” “…….” “보통 형과 나. 우리가 불쌍하다가, 생각은 형에게로 맞춰집니다.” “…….” “그런 형이 지금은 사랑을 고민하고 있네요. 나는 몰랐어요. 나는 늘 형에게 부탁하기만 했거든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형이지만 나를 모르겠다는 듯이 굴어 달라는 둥의…….” “…….” “형이 불쌍해서 눈물이 나와요. 나는 아직 어리다는 증거처럼….” “…….” 눈물이 나오면 너는 성장하는 거지… 혜성은 마음으로 힘껏 그를 끌어안은 상태였다. 자신이 예전에 민우에게서 받았던 모든 것을 갚을 기회라고, 신의 뜻이라고 여겼다. 그러자 착찹 했던 찌끄러기의 마음조차 가셨다. 자신에게 기대오는 듬직한 로미오가 고마웠다. 혜성은 무의식중의 언어처럼 나른한 투로 입을 열었다. 밤바람이 쌀쌀해질 때, 이번에는 그가 혜성의 작은 어깨를 감싸주었다. 둘은 따뜻해졌다. “너의 형은 아주 행복한 사람이구나.” “…….”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는 사람은 많지 않거든.” “…….” “보통의 눈물들은 자기애로부터 비롯되니까…….” “…….” “미카엘 선배는 행복한 사람이니까 괜찮아.” “…….” “선배는 너를 가엾게 여기면서 눈물을 보이겠지.” “!” 덜컥 놀란 그를 더 바짝 쓸어주며 혜성은 천천히 시선을 맞췄다. 음성은 밤의 요정처럼 신비롭고 다정하지만 분명한 것을 꺼내려는지 침착했다. 로미오의 젖은 눈망울은 송아지의 투명한 시선보다도 아름다웠다. 같은 젊음인데도 그의 젊음에 눈이 부셨다. “그러면 너도 괜찮은 거다.” “…….” 분위기에 취한 그가 키스할 것처럼 턱을 숙여 올 때, 혜성은 후다닥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그제 서야 자기 쪽으로 먼지를 털지 말라며 신경질을 부리는 로미오가 기특하다. 눈가는 여전히 촉촉한 덩치 큰 놈이 이민우 라는 이름표를 달고 나를 본다. 가슴이 뛴다. 내가 살아있다는 걸 네 이름이 증명해준다. “계속 울어 봐.” “…?” “…어디까지 우나 궁금해진다.” 한 걸음 내딛은 혜성은 양 팔을 천천히 올렸다. 수페리우스의 팔 안에 초생 달이 잡혔다. 미끄럽게 굴러들어온 노란 빛은 수페리우스의 머리칼처럼 출렁였다. 곧 팔 끝에 쥐었던 주먹을 스르르 풀며 수페리우스는 눈을 감고 읊조렸다. 저 달과 하늘을 향해 가슴으로 움직이는 입술이 있다. “가슴이 미어지겠지….” “……?” “숨을 쉴 때마다 날카로운 창이 영혼을 찌르면, 그것은 생살을 후비는 것 보다 아프지….” “…….” “그러다가 눈물은 결국 끝에 다 달으니까.” “!” “이상하게 점점 속이 시원해지거나… 그러다가 다시 눈물이 나오는 거지. 도돌이표가 붙여지는 경우가 꽤 되니까….” “음…….” “그렇게 해서라도 일어나면 너는 보게 될 거다.” “…뭘… 말 이지요….” 로미오의 질문에 눈을 감은채로 눈썹을 찡그리던 혜성이 약간 홍조를 띤 채로 번쩍 동공을 열었다. 밤이라서 그럴까. 신비로운 온유가 바람을 치워서일까. 사파이어처럼 반짝이는 아마데우스 주변이 좋아서일까. 공감은 공감으로. 혜성은 주변 곳곳을 넓게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서 너의 눈물에 놀란 사람들을.” “?” “…왜. 계속 울어.” “무슨 사람들을 말하는 거지요?” 로미오는 망연자실 앉은 채로 물었다. 그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추운 날씨도 그렇거니와 밤의 언덕은 을씨년스러웠다. 혜성은 기다렸다는 듯 받아쳤다. 음성이 떨린다. 아니다. 영혼이 떨린다. 과거의 그가 해 주었던 마법을 지금의 그에게 펼친다. 나는 마법사가 되어 진정 그를 이해한다. “흙과 바람, 초록의 풀… 그 외 여러 가지.” “?” “…그것들은 모두 사람이 변신한 거야. 몰랐니.” “!” 아리송해 하는 로미오가 반문하려던 찰나, 혜성은 양 손을 입가에 모으고 크게 소리쳤다. “동~네 사람들~!” 가슴이 뻥 뚫린다. 머리가 뚫렸다. 그가 내가 된다. 내가 그가 된다. “서…선배?!” “여기 이 녀석도 같이 데려 가세요~~!” “뭐, 뭐 하는 거야!” 수페리우스의 눈가에 붉은 물이 차오를 때, 역시나 꽥꽥대며 난리를 치는 로미오가 뒤따랐다. “아주 지겨워 죽겠습니다~ 지난번에 흐이 데려가셨듯이, 이번에는 이 비밀 쟁이 놈도 가져가~소서~” “비…! 야! 미쳤냐! 돌았냐!” “하하하하!” 이제는, 그 때 네가 왜 웃었는지 나는 알 것 같다 민우야. 보이니. 내 영혼에 돋치는 소름이 너는 보이니. 그럼 여기의 또 다른 너의 이름에게도 전해질까. 지금이 아니라 훗날이 될지라도. 한 참을 장난스레 떠들던 혜성이 잠잠해진 것은, 아이가 미친 걸로 오해한 로미오가 일어선 뒤 꽉 끌어안아서였다. 아이의 품 안에 사로잡혔던 초생 달이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갔다. “하… 정신 좀 차려 봐요.” “…괴롭지. 로미오.” “…지금 당장은 민망하고 환장하겠습니다.” 로미오의 따스한 내 음에 기분이 푸근해진 혜성이 덩달아 팔을 둘러주며 킥킥 웃었다. “계속 울어라.” “?” 곧 팔을 풀러 낸 뒤, 혜성은 팔목을 돌려가며 등을 돌렸다. 지금 이 순간처럼 발트슈타인이 그리울 때가 없었다. 마음이 동했을 땐? 하면 된다. 발트슈타인! 그가 나를 부른다. 1악장, 혹은 2악장, 또는 내가 피했던 3악장! 발트슈타인의 음률이 나를 바짝 쫒는다. 몇 걸음을 걷던 혜성은 자신을 따라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뒤의 로미오를 향해 최종 낙찰된 문장을 줄줄이 내뱉었다. “…동네 사람들이 넌 재미없다고 안 데려간 댄다. 넌 탈락이다.” “!” 언제 울었냐는 듯 버럭버럭 소리치며 뛰어오는 로미오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겨울의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wgreene@naver.com 류보님, 레이첼님, 린님, 빵글이셩님, ries님, 솨, 좡, 군림님, 안젤리스님, 포근구름님, 아기해달님, 셂님, 다큰엔젤님, 박카스정님, 슬픈웃음님, 슬픈웃음님, 기린아님, 리에뜨님, 리님, 류타님. 고맙습니다. 안부게시판의 소중한 글 역시 고맙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전부 댓글 달게요. ^^ -화이트그린- 덧글 10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53~54편(발트슈타인)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53~54편(발트슈타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55-1편 ▼ 다음글 - 2악장 52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55-1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10/04 17:44 http://blog.naver.com/wgreene/110009390863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1004 55-1편 업데) Amadeus 음악 : Maksim - Croatian Rhapsody (아래플레이 클릭) Croatian Rhapsody-Maks.. 2악장 55-1편 문득 문득 이유 없이 마음이 아플 때가 있다. 그 순간 감정은 눈에 보이듯이 분해되어 이리 저리 날아다닌다. 사람에게 죽음은 정답 없는 법칙 이듯이, 감정 또한 그랬다. 숨을 쉬는 게 오히려 고통으로 다가올 때가 있는 것이다. 그 날은 밥알을 삼킨들 시체만도 못 한 기분에 사로잡혀서 내일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내일이면 괜찮아 지겠지,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는 내일도 비슷할 것을 안다. 모두 혼자라지만 유독 나만이 혼자라는 게 절실해지고 불공평하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바람이 부는 것도 서럽고, 눈이나 비가 대지에 떨어지면 청승맞아진다. 현재보다 과거를, 과거보다 먼 미래를 애타게 찾으며 현재를 망각할 때, 우울증은 짙어질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감정의 추가 떨어진 그것이 우울증 이라는 것을 모른다. 부정하기 때문에 실패자에게나 어울리는 단어를 회피한다. 지금의 수페리우스는 혼자 일 때면 때때로 찾아오는 우울한 감정을 떨치기 위해 술을 마신다. 술의 효과는 어떨까. 로미오와 헤어진 직후 기숙사에 돌아와서 발트슈타인을 찾았다. 그리고 방 안에 베토벤 소나타집이 없다는 게 생각나서 다른 방 녀석에게 소나타를 빌려왔다. 수페리우스는 피아노에 앉아서 건반에 입을 맞추었다. 이 순간만큼은 제대로 몰입할 수 있었다. 민우의 피아노에서 베토벤을 누를 때는 정말이지 그가 된 것처럼 기분이 야릇했다. 하지만 연습만으로는 턱 없이 부족하다. 미카엘 선배의 충고와 관심은 고마웠지만 정말은 혼자라는 게 지루한 연습을 하다가 문득 문득 생각나서 여린 감수성을 찔렀다. 피가 나는 것보다 그것은 더 아팠다. 화살이 생살을 찢는 것 보다, 감정이 감정을 찌르는 게 더 슬프고 괴로웠다. 네 시간이나 같은 부분에서 틀렸다는 걸 알았을 때, 혜성은 술을 찾았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괜찮아. 수페리우스는 고집을 부렸다.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처럼 굴면서 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트레몰로가 도저히 안 될 것 같으면, 특히나 강약의 조 절은 커녕 음의 이해마저도 쉽지 않을 때는 술을 들이켰다. 성대가 타들어갈 정도의 고약한 술이 힘을 발휘 할 때, 수페리우스는 미카엘 선배와 동완, 그리고 로미오를 떠올렸다. 테오제네스와 프란체스코도 있었다. 자신의 주변에는 아직 좋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각인시키고 술이 들어가니 슬픈 감성이 조금 나아졌다. 아니, 그런 것 같았다. 감수성의 변이는 이제 시작이었다. 로제리오 교수가 열심히 소리쳐 준 16분 음표들과 트레몰로를 한꺼번에 누를 때, 그 부분만 한 시간 이상 반복하고 또 반복해도 터치가 미진하다고 느끼자 혜성은 울음을 터뜨렸다. 왜 안 되는 걸까. 왜. 왜! 이건 누가 자상하게 설명해 준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연습만이 전문가를 만들고, 연습만이 승리의 월계관을 씌어준다. 오직 연습만이! 수페리우스는 결국 울면서 몇 번이나 실패했던 발트슈타인을 치고 들어갔다. 지금은 감정 보다 익숙하게 건반을 유유히 돌아다니는 게 먼저였기 때문이다. 그 뒤가 곡의 이해와 해설이었다. 그 뒤가 리듬이나 붓점 연습이었다. 그 때가 되면 연습은 적잖이 편안해진다. 누구나 그렇듯이. 새벽이 지나 시계탑은 오전 아홉시를 가리켰다. 그 때 까지 건반을 누르는 채 오른 손과 왼 손을 따로 눌렀던 혜성은 나직이 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하프의 선율을 못 봤다. 그 대신 지겹도록 인내심을 갖고 연습했던 발트슈타인 만이 그 미친 자태를 떵떵 이고 있었다. 발트슈타인. 극복이 가능할까. 혜성은 오후 두 시가 될 때 까지 술을 들이켜고, 피아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쉬어도 피아노에서 쉬는 게 마음이 편했다. 건반 외의 것은 생각할 가치도 없다고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왜 내가 이렇게까지 피아노를 연주해야 하는가! 라는 괴리감이 밀려올 때가 있었다. 지루한 연습과 훈련은 몸보다 영혼을 지치게 만들어서였다. 하루 종일 끼니를 거른 채 발트슈타인 악보만 노려보던 혜성이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킨 것은, 다시 새벽이 찾아와서였다. 개인 시간이란 없다. 연습 앞에서 사람은 피아노의 노예가 되어 그것을 주인으로 섬겨야 한다. 뇌를 지배하는 문장이 짜증에서 쾌락으로 느껴질 때도 많았다. 쌀쌀한 바람에 온 몸을 맡기자 피곤함에 저릿해졌다. 나는 괜찮아. 또 나는 보통 아이들과는 다르게 전문적인 학교에서 피아노를 연주해. 잘 되든 안 되든 연습을 열심히 했어. 피곤하지만 괜찮아… 울고 웃고, 짜증내고, 열중하고, 긴 시간 연습한 뒤 하프의 선율을 맞이할 때의 수페리우스는 나직이 미소 짓고 있었다. 지평선 저 쪽 솟아오르는 태양에 눈이 부셨다. 1월 첫째 주 토요일이 오기까지 수페리우스는 기숙사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은 매우 외롭고 잔인했다. 아무도 응원해주지 않는 것 같았다. 나중에는 술도 싫었다. 동완이와 미카엘 선배가 수도 없이 찾아와서 혜성을 불렀지만 아이는 대답조차 없었다. 들어도 들리는 게 아니었다. 가끔 배가 고파지면 멍한 몰골로 저녁나절 밖으로 나갔다. 걸어도 걷는 것이 아니었다. 로미오의 쪽지가 열 장 넘게 붙여 있었지만 아이는 그것을 떼지도 않았다. 읽어도 읽는 것이 아니었다. 발트슈타인. 베토벤. 소나타 21번. 첫째 주 토요일. 발트슈타인. 발트슈타인. 21번 소나타. 그래. 거기… 그 부분. 두 번째 마디에서 3번째 16분 음표까진 왼손하고 똑같이 친다고 해도, 마지막에 남는 4개의 16분 음표는… 그렇지! 꾸밈음 도와 레의 샾을 그대로 오른손 16분 음표 두 개랑 맞추면……. 발트슈타인. 베토벤. 발트슈타인. 발트슈타인……. 무엇을 봐도 같은 소리만이 전해졌다. 열 시간을 연습해야 끙끙 앓던 부분이 약간 나아졌다. 터치가 부드러워졌다고 좋아하기도 전에 2악장이, 짧은 2악장 뒤의 3악장이 머리가 터질 것처럼 괴롭혀왔다. 헬리아는 어땠을까. 그야말로 지옥의 연주이며 즉흥 세레나데, 즉흥 칸타빌레였다. 그것은 당시의 기분대로 움직이면서 승리를 쟁취하면 그만이었다. 수페리우스는 갑자기 헬리아가 그리워졌다. 발트슈타인에게서 도망갈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은 아주 빠르게 나아갔다. 시간이란 녀석은 가끔 쉬어주는 법이 없었다. 얌체처럼 굴면서 수페리우스를 놀렸다. 특히 잠을 잘 때면 시간이란 놈의 걸음이 가장 빨라졌다. 못된 녀석이었다. 당신이 지켜보시기를, 밑바닥을 털어내고 편안하던 수페리우스가 왜 이렇게 발작하듯 발트슈타인에 미치는가 궁금할 것이다. 그는 뮤즈이다. 그는 오페라와 작곡을 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수들의 평가와 다가올 봄의 콩쿨을 대비해야 했다. 연습만이 살 길이다. 편한 길을 찾으려 해도 연습밖에 없다. 발트슈타인. 어느 악장이 되어도 상관없이, 혜성은 그것을 꼭 쟁취해야 했다. 평가일이 닥쳤다. 수페리우스는 조용히 피아노 뚜껑을 닫았다. 긴 신음이 입 밖으로 빠져나갔다. 손목은 괜찮았다. 제대로 씻지 않아서 청결하게 준비를 마치자 시간은 웬일인지 속도가 느려졌다. 연습할 때는 불규칙하던 것이 이젠 느리다. 덕분에 밥을 먹었고, 악보를 검토한 뒤, 수페리우스는 멋 부리기 좋아하는 서 쪽 기숙사동의 녀석들을 찾아가서 염색약을 빌려왔다. “…….” 거울로 비치는 노란 머리칼에게 굿바이 인사를 오랜 시간 나누었다. 수페리우스는 일절 아쉬움 없이, 경건한 마음으로 평가에 대비하여 노란 머리칼을 지웠다. 그렇게 까맣게 빛나는 머리칼이 돌아왔다. 오늘의 수페리우스는 누구보다 비장한 표정으로 예식 복을 입었다. 컨디션은 썩 괜찮았다. 가자. 평가를 받자.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마음은 그를 위로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 한 창일땐 질리던 것이 이젠 위로를 건넨다. 아이는 오후 세 시로 예정된 평가를 앞두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시원한 공기가 제대로 느껴졌다. 봄의 연못물보다 가지런한 아마데우스의 정경은 눈물이 날 것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길을 걷는 족족 마주치는 학생들은 어여쁜 새와 같았다. 그들이 지저귈 때 마다 수페리우스는 그들과 같은 공간에 있음이 고마워졌다. 분수대를 지날 무렵, 그렇게 B동이 가까워지자 성당의 종소리가 은은하게 퍼져왔다. 오, 성당이라니!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수페리우스의 가슴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아이는 눈을 크게 뜨고 하늘을 올려 본 채로 마음의 기도를 크게 읊었다. 학생회와 이자벨 장. 생각하지 말자. 반 아마데우스. 생각하지 말자. 미카엘 선배와 동완이. 생각하지 말자. 로미오. 생각하지 말자. 사비나 교수님. 생각하지 말자. 테레사. 생각하지 말자. 문정혁. 생각하지 말자. 내가 나에게 있어야 그들을 생각할 수 있을 테니, 지금은 나만 생각하자. 도와주소서! 당신을 믿지만 찾아가지 않은 발걸음 부디 용서하시고, 미련한 자의 넋을 위로해 주소서. 부디 시험의 결과를 누구 탓으로 돌리지 않도록 올곧은 마음을 주소서. 수페리우스 라는 이름에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평가 때 연습한 것의 반만이라도 나올 수 있게 나의 감성을 마구 뒤 흔들어 주시옵소서. 나의 눈과 귀, 나의 교만한 머리에 가득했던 상념을 잠시 당신 곁에 머물게 하소서. 루트비히 반 베토벤, 그가 되게 하소서. 『 베토벤만의 무언가를 음악에서 찾아봐라. 』 끊이지 않는 로제리오의 음성, 그 뜻을 건반에 앉는 순간 명쾌하게 떠올리게 하소서. 모차르트를 방문하고 즉흥연주를 했던 루트비히가 되게 하소서. 퀼른에서 데뷰할 때의 그 처럼 비장한 이 각오가 영원하게 하소서. 청각을 거의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장엄미사곡을 초연했던 그가 되게 하소서. 무엇보다도, 지금의 나를 당신께 감사할 줄 아는 내가 되게 하소서. “수페리우스?” “어머, 수페리우스!” “…?” 오늘따라 유난히 아이를 부르는 소리들은 들 떠 있었다. 기도를 마친 혜성은 반갑게 쳐다보며 왜 놀라고 그러냐며 머쩍어했다. “머리색이 원래대로 돌아왔구나! 전보다 더 짙은 까만빛이지만…….” “!” 원래대로 돌아왔구나! 그들은 입을 모아 감탄을 터뜨렸다. 고작 머리카락의 변화였지만 혜성은 그들의 소리가 다르게 들렸다. 혁명 이후로 지금까지의 모든 게 한 번에 통쾌하게 사라졌다는 이상한 착각에 빠질 뻔 했다. 수페리우스! 그의 머리칼이 짙은 블랙이 되었어! 그들은 아이가 지나가는 족족 아는 척을 하며 신기해했다. 그들은 요염하게 찰랑이는 까만빛에 반하여 그가 어디를 왜 급히 가는지 궁금해 했던 것을 잊은 모양이었다. 차라리 다행이다. 혜성은 기분 전환 겸 염색했다는 대답을 열다섯 번이나 해서야 B동에 도착하였다. 그의 늘씬한 뒷모습은 테레사처럼 당당하고 멋졌다. 연약하고 청순한 면도 보였다. 그림자가 길게 뻗고 우울한 느낌이 묻어나올 때는 정혁과 비슷해 보였다. 멋대로 염색한 머리칼은 오히려 그를 자유롭게 변화시켰음을 추측케 한다. 그래서 뒷모습 하나에 학생들은 오래 전의 민우마저 떠올렸다. 그런 그가 베토벤 소나타를 쥐고 뻥 뚫린 내부에 들어가고 있다. B동은 한산했다. 학생회 층이 어디 즘일까 잠깐 추측하던 혜성은 곧 머리를 흔들었다. 다른 것을 생각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겁이 날 지경이었다. 연주회장의 풍부한 느낌이 없을 것이다. 좌중은커녕 평가하는 교수들만이 싸늘하게 지켜보겠지. 우아한 아치형의 난간을 쥐고 막 계단에 오를 때였다. “…예뻐졌네요.” “?” B관 가운데, 양 쪽에서 시작되는 계단은 2층으로 모아져 있었다. 그 꼭대기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계단 뒤에는 멋진 창이 빛을 들이고 있었다. 빛에 가린 어두움 때문에 눈을 흐릿하게 뜬 혜성은 곧 그가 누구인지 알았다. “연습은 많이 했습니까.” “쿡… 그렇습니다.” 혜성이 한 계단씩 오를 때, 그 역시 천천히 내려오며 웃었다. 로미오였다. 한결 성숙해진 표정이 반사되었고 그의 탄탄한 몸매가 아래에서도 잘 보였다. 둘은 곧 같은 계단에서 마주쳤다. 혜성은 그와 잠시 시선을 교차한 뒤 스쳐 올라가기 시작했다. “수페리우스.” “…….” “승리하고 오십시오.” “…알았다.” “쇼너 스타니가 전해 달래요.” “…….” “연주회 때처럼만 해.” “…….” “형이랑 동완 선배가 전해 달랐습니다.” “…….” “선배.” “…….” “…못 해도 괜찮아요.” “!” 불현듯 터진 문장에 걸음을 멈춘 혜성이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뜨겁게 뒤를 돌았다. 계단의 하단 부분을 내려가는 로미오의 등이 예전보다 가깝게 느껴졌다. 그는 등으로 시원하게 소리쳤다. “브라보~!” “…….” “연주가 끝나면 지금의 브라보~! 를 떠올리시기를…….” “…….” “넋이 달아날 정도로 아름다워진 수페리우스께 후배 로미오 드림.” “…….” 못 해도 괜찮아요. 긴 여운이 오래도록 남아서 수페리우스의 시선에 안개가 끼게 했다. 그 문장을 사실은 기다린 걸까. 괜찮아. 할 수 있어 라는 말과, 나의 터치가 괜찮다는 미카엘 선배의 말보다도 훨씬 도움이 된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는……. 3층의 중앙에 위치한 도서실 문을 지나자 아주 긴 복도가 나타났다. 뚜벅. 뚜벅. 구두소리가 울릴 때마다 수페리우스는 공중에 뜨는 환각에 사로잡혔다. 복도의 우아한 벽의 줄기들은 사람의 팔처럼 강직하면서도 유했다. 한 번 더 심호흡을 한 뒤, 혜성은 약속의 장소에서 노크를 했다. 곧이어 들어오라는 누군가의 중후한 음성이 찔렸다. 심장이 말도 못 하게 뛸 때, 아이는 식은땀이 뚝 뚝 떨어지는 손으로 고리를 비틀었다. “안녕하…….” “베토벤 소나타 21번, 1악장.” “…….” 발트슈타인 1악장. 여섯 명의 교수들 중에는 로제리오도 섞여 있었다. 그들은 인사 없이 바로 지정된 곡을 발표했다. 긴장감은 더욱 팽팽해졌다. 120평 남짓한 내부는 밝은데도 불구하고 칙칙함이 감돌았다. 기분 탓이겠지. 혜성은 고개를 끄덕인 뒤 피아노의자에 앉았다. 냉정해 보이는 교수들의 눈빛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악보를 펼치자 불안함은 더 해 졌다. 그 때 누군가가 경쾌한 노크소리를 내더니 안으로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 설마…! 아이는 목소리를 의심할 힘을 잃었다. 의심하기도 전에 사실로 각인하는 스스로가 짜증났다. 이럴 수가. 적당히 기분 좋은 긴장감은 온데 간데없이 불안함에 들끓는 내면이 왔구나! 박수를 쳤다. 무릎에 양 주먹을 꽉 쥔 채로 혜성은 고개를 숙였다. 부리부리해진 눈은 정확한 청각을 원망했다. 방금 도착한 그녀는 자신에게 친절한 교수들께 몇 마디 인사를 건네더니 앉는 소리를 냈다. 이자벨-! 암흑이 사방을 도배하기 시작한다. 분명히 이자벨이다. 그녀가 왜 여기에 있는가! 혜성이 어렵게 턱을 올린 뒤 뺨을 돌려서 그녀를 확인했다. 그러자 진한 현실에의 절망이 옭죄여왔다. 그녀는 가녀린 몸에 우아한 것을 걸치고 있었다. 코트도 벗지 않은 채, 재미있는 장난감을 지켜보는 표정으로 혜성의 당황하는 모양을 쭉 노려보고 있었다. “학생회 회장인 이자벨 장의 의견이 반영 될 것이다.” “!” 교수들의 설명이 지날 때, 이자벨은 무언의 암시를 건네었다. 그녀의 암시가 교수들의 중후한 음성보다 자세히 전해졌다. ‘이제야말로 너는, 끝이다. 애송이.’ 오 하느님. 하필이면, 하필이면 왜 이자벨이! 혜성이 죽일 듯이 노려본 들 상황은 거스를 수 없었다. 그녀는 곧 예쁜 입 꼬리를 올리더니 매서운 투로 말을 했다. “발트슈타인. 3악장 론도.” “!” “시작해라.” 교수님들이 처음 지시한 1악장이 아닌, 가장 치를 떨었던 3악장을 당장 연주하라는 이자벨의 눈동자는 전쟁에서 승리한 여신처럼 빛이 났다. wgreene@naver.com 덧글 12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55-1편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55-1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55-2편 ▼ 다음글 - 2악장 53~54편(발트슈타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55-2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10/05 23:00 http://blog.naver.com/wgreene/110009428364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1005 55-2편 업데 061004 55-1편 업데) Amadeus 음악 : Maksim - Croatian Rhapsody (아래 플레이클릭) Croatian Rhapsody-Maks.. 2악장 55-2편 악보가 시선에 잡히자 쌉싸름한 감정이 밀려왔다. 이자벨이 함께 있다는 충격이 진공 상태에서처럼 웅 웅 울렸고 쉬이 꺼지지 않았다. 이자벨의 목소리만이 끊임없이 재생되는 현재, 시선은 나락으로 떨어졌는지 발트슈타인을 읽지 못했다. 이상하다. 기억상실증에 까막눈이 된 걸까! 루트비히가 되게 해 달라고 빌었던 교만한 기도는 고작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 신이 계시다면, 당신은 나를 버리려는 거다. “시작 하십시오.” “!” 건반 위에 손을 올린 수페리우스의 전체가 움찔 떨렸다. 낭랑한 그녀의 음성은 해일을 일으키는 포세이돈처럼 카리스마가 넘쳤다. 갑자기 그녀가 무서워졌다. 단두대 앞에 선 사형수의 기분이었다. 홍해 속 진주보다 고운 그녀의 손가락이 악보를 건드릴 때, 나락으로 떨어지는 심장을 내버려둔다. 하루만 더 미루면, 아니 한 시간만 더 주면 지금의 복잡한 긴장감이 완화 될 것 같은데. 수페리우스는 머뭇거렸다. “포기인가…?” “…….” 이자벨의 ‘포기’라는 구절에서 발끈한 혜성은 3악장의 첫 음정을 눌렀다. 누르지 않느니만 못 한 결과가 바로 튀어나왔다. 오, 제기랄! 첫 번 부터 건반 미스가 연이었다. 언뜻 들으면 리스트의 곡이라고 해도 믿을 법 한 부드럽되 강한 이음줄은 순간, 사라졌다. 에게해의 파도처럼 하얗게 부서지고 미끄러지는 건반, 그것은 행복한 상상일 뿐 현실일 수 없었다. 수페리우스는 자신의 손이 누르는 마디마디를 진짜로 믿으려 하지 않았다. 톡 쏘는 붉은 장미처럼 쉽게 봉오리가 열릴 줄 알았다. 그러나 처음 실수에서부터 지금까지 3악장은 원래의 음색에서 벗어나 있었다. 수페리우스는 있는 힘껏 페달을 밟고 악보대로 건반을 쳤지만 그럴수록 감정은 죽었다. 왼 손의 힘이 부족하다! 식은땀이 흘렀다. 캉! 캉! 왼 손에 신경이 쏠리자 어리석은 오른손이 따로 놀았다. 은은하게 이어지는 선율은 대지를 박차고 흙먼지를 일으키듯이 세다가도 부드러웠고, 부드럽다가도 강했으며 따가웠다. 가장 준비가 미흡했던 3악장을 1악장과 2악장의 과정 없이 밟기란 적어도 혜성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감정이 준비되기 전에 시작된 선율, 비옥한 토양처럼 갈라지는 그것은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았다. 이것은 나의 음악이 아니다! 술을 마신 뒤 다시 쳐도 이보다는 나을 것이다. 팔 힘 전체를 쓰는 도중에 엉뚱한 부분까지 페달로 밟았음을 알면서도 발을 떼지 못했다. 시야가 까맣게 죽는다. 옆에서 악보를 넘겨주는 이자벨의 독기서린 시선이 자세하게 느껴졌다. 그 느낌은 몰입해야 마땅할 발트슈타인 보다도 세었다. 그 느낌이 오히려 발트슈타인이며 베토벤이었다. 건반 미스가 무려 세 번이나 나서야 원래보다 길어져서 11분을 차지했던 3악장 연주가 끝났다. 혜성이 겨우겨우 숨을 고르려던 찰나, 가시 돋친 이자벨의 음성이 바로 옆에서 들렸다. “이번에는 1악장부터 3악장까지.” “!” 그녀의 말에 놀란 것은 비단 혜성 뿐 만이 아니었다. 뒤의 교수들 역시 놀랐다. 그러나 누구도 분위기를 틈타서 입을 열지 못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의 이자벨은 교수들에겐 테레사와 같은 존재였나 보다. 혜성은 1악장을 펼친 이자벨을 딱 한 번 쳐다본 뒤, 꿀꺽 침을 삼키고 건반에 양 손을 다시 올렸다. 베토벤? 발트슈타인? 베토벤의 이해? 베토벤다워야 한다? 기교? 감성? 그 어느 것도 현재의 아이를 지탱해주지 못했다. 이끌어주기는 커녕 제대로 연주가 가능할지도 의문이었다. 이자벨 장의 등장, 그녀가 넘겨주는 악보, 긴장은 없는 편이 오히려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10분 40초의 1악장을 지나는 즉시, 그녀는 1악장의 격렬한 폭우와도 같은 느낌이 이어지도록 2악장을 넘겼다. 오 하느님. 피아노를 쥔 그녀가 신경 쓰여서 몰입이 불가능하다! 혜성은 애가 탔다. 연주를 처음부터 다시 한다는 말 따위는 생각나지도 않았다. 2악장의 아다지오가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연주하면서도 기억을 잃는다. 무덤에 뉘인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전율과 쾌락이라는 단어를 잊었다. 이자벨이 옆에서 독사처럼 간사한 혀를 나불거리는 게 싫었다. 3악장 까지 다시 연주한 뒤, 수페리우스는 기계처럼 움직였던 방금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자신은 좌중 앞에서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연주를 한 적이 없었다. 지금 연주는 내가 아니었다. 시키는 대로 건반을 누르는, 개만도 못한 기계였다. 그 때, 이자벨이 교수들과 몇 마디를 나누더니 되돌아왔다. 끝난 걸까. 어찌 됐든 좋아. 벗어나야 돼. 진정시켜야 돼. 내가 미친 걸까. 살려 줘. “연습을 아예 안 했습니까, 수페리우스?” “…….” “5분 휴식 후, 방금 했던 순서대로 다시 하십시오.” “!” 이자벨-! 마음의 줄이 또 한 번 거칠게 끊겼다. “왜 그러지요? 그대가 좋아하는 뻔질 나는 ‘기회’라는 걸 주지 않습니까.” “…….” “자비로운 교수님들, 제 의견이 어떠신지요.” “좋아요, 이자벨의 의견에 따릅시다.” 다시 연주하라고? 지금의 이상한 것을, 마냥 빠르게 누르려다가 오히려 미스만 남발했던 것을? 혜성의 가파른 시선은 그렇게 말을 했지만 이자벨은 상냥하게 웃어주었다. 목을 조르고 있어! 아이는 대꾸할 거리를 찾지 못했다. 하늘하늘한 그녀의 몸은 3악장의 불규칙한 느낌의 강렬한 포르테처럼 보였다. 가면을 벗고 포르테로 찌를 것 같았다. 5분 동안 피아노 의자에 앉아서 멍하니 시선을 흐리기만 했던 그의 앞으로 이자벨이 다시 나타났다. “발트슈타인. 1악장.” “…….”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혜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수페리우스의 까만 머리칼이 건반에 곤두박질 할 모양새로 떨구어 질 때 이자벨은 혹시 어디 아픈 게 아니냐며 가식적인 미소를 보였다. 테레사도, 그 누구도 떠오르지 않는다. 베토벤? 그의 진정한 내면은커녕 고통스런 지금 때문에 숨 쉬기에도 벅차! “다시 해 보십시오.” “…….” 처음보다 점점 더 이상해지는 리듬은 그나마 괜찮았던 터치마저 분해시켰다. 피아니스틱한 기교 또한 없다. 시선을 흐린 채로 연주하는 내내 혜성은 등이 구부정해진 것도 몰랐기 때문이다. 오 제발. 방금 것도 이상했어. 제대로 눌러주지 않은 걸까! 화음이 고르게 나오지 않는다. 연습 때처럼 되지 않는다. 그저 악보만 읽고 틀리지 않도록 나아갈 뿐, 감히 루트비히가 될 수 없다. 손목을 약간 흔들면서 두 개의 손가락이 도 와 미를 번갈아 눌러 봤자 건반에 닿는 힘이 예상했던 게 아니다. 연습했던 것과 비슷한 게 없다! 단 한 마디도! 내면이 소스라칠 때, 1시간 24분이나 지속되었던 평가연주는 끝이 났다. 안색이 창백해진 수페리우스의 시선은 줄곧 흐리멍텅한 채 아픈 입술만 세게 깨무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는 페달에서 어느 순간부터 발을 떼지도 않았었다. 미카엘 선배는 나의 터치가 괜찮다고 했는데… 그런게 무슨 소용이랴, 막상 당일 날에는 평소의 반도 나오지 않았는데. 실수도 했어. 자연의 향기는커녕 베토벤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연주자로서 승리의 쾌감은 없다. 유령처럼 변한 수페리우스를 지그시 살펴보던 이자벨이 교수님들을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연주 하는 본인도 느꼈을 것입니다.” “…….” “피아니스트가 주 목표가 아니라니, 오히려 다행이군요. 안 그렇습니까, 교수님들.” “…….” “평가는 끝났습니다. 통보가 따로 필요 없을 것 같으니, 다음 콩쿨이나 준비하십시오.” “…….” “나가십시오, 수페리우스.” 꿈의 장면처럼 멀게만 느껴졌던 그녀의 음성이 나가라고 한다. 나가라고? 퍼뜩 정신을 차린 혜성이 없는 힘을 쥐어짜며 가까스로 뒤 쪽 교수들에게 물었다. 오만한 그들의 표정은 방금 전의 발트슈타인 때문인지 상당히 불쾌한 감정을 바르고 있었다. 눈물이 터질 것 같아서 수페리우스는 주먹 쥔 손바닥 안으로 손톱을 깊게 찔렀다. “제… 연주가 전체적으로 어땠는지…….” “…….” 수페리우스의 위태로운 질문이 전부 끝나기도 전에, 최근 영국에서 온 중후한 교수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 알프레드 브렌델을 혹시 아는가? 바흐에서 쇤베르크까지 폭이 넓지만, 가장 베토벤다우면서도 정석으로 친다고 평가받았던 피아니스트를 말일세. 이미 세상에는 없지만.” “…….” 알프레드 브렌델. 들어 봤는데 당장은 기억나지 않는다.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뇌는 아프지 않다. 아파야 하는데, 메마른 그것들은 비명조차 없다. “현재 아마데우스에서는 이민우가 알프레드 브렌델과 연주기법이 흡사해. 비록 데뷰하기도 전에 그 또한 죽었지만. 이민우의 연주를 들어 봤으니 알 걸세. 그 느낌을.” “…예….” 이민우 라는 구절에서 크게 몸을 떤 수페리우스를 그들은 싸늘하게 훑기만 했다. 단 한 번도, 이런 식의 연주를 펼친 적이 없어서 벙 찐 공황은 사라지지 않았다. “수페리우스. 자네는 겉핥기 식으로 베토벤과 흡사한 알프레드 브렌델을, 알프레드 브렌델을 연상시키는 이민우를, 그저 흉내내는 척 건반을 누르는 거로 밖에 안 보였어.” “!” “자의적일 수가 없었겠지. 이건 헬리아가 아니니까. 얼만큼 베토벤을 표현하느냐가 관건이며, 개성을 살려서 자기 스타일대로 밀고 나가야 하는데, 수페리우스. 자네는 흐지부지했어. 그냥 음표를 따라서 누르는 것 이상이 없어.” “…….” “터치가 나쁘지는 않지만, 시일 내에 자기 스타일을 찾는 게 관건이겠어. 감성적인 면만 우월해도 좋은 게 아니니까. 아니, 이번에는 감성 면으로 치고 들어왔어도 괜찮았을 텐데. 자네는 목소리가 좋다지? 어쨌든, 미스가 많았으며… 터치가 이어질 때만 괜찮았어.” “…지적… 감사합니다.” 아이는 비틀대며 일어났다. 그러나 곧 고꾸라졌다. 교수들은 그가 일어서는 것을 무심하게 쳐다봤다. 그들의 얼어붙은 눈동자와 수페리우스의 몸짓은 닮아 있었다. 마음은 이자벨이 닥쳤던 때부터 눈물을 뿌렸다. 그 마음을 쥐어짜며 수페리우스는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아이가 막 허리를 세울 무렵, 이자벨이 팔짱을 찌더니 주변을 천천히 걸어 다니며 조롱조를 내뱉었다. “평소대로 감정적인 것에 기대지 그랬습니까, 수페리우스?” “…?” “발트슈타인에 대한 지식이 정말 부족하군요? 발트슈타인은, 보통 곡의 난이도 보단 자신의 감정 등으로 평가합니다.” “!” 제대로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빚은 결과였다.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연주만 무사히 끝내려던 욕심이 빚은 결과였다. 아니다. 사실은 저 여자를 의식한 결과다! 박제가 된 입술은 열리지 않는다. 흐릿한 동공은 크게 떠지는 이상의 힘이 없었다. 발트슈타인에 대한 지식! 자신을 찾아오라던 로제리오가 번쩍 떠올라서 그를 응시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로제리오는 왜 진즉에 자기를 찾아오지 않았느냐 원망하듯 수페리우스를 쭉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늦었다. 모든것이 늦어 있어서 수페리우스는 인사하는 것 외에는 할 게 없었다. 이자벨, 그녀가 옳았다. 그러나 그녀의 평가 코스는 잔인했다. 오늘의 치욕을 절대로, 절대로 잊지 않겠다. 혜성은 여러 번 입술을 깨물며 결심했다. 비틀대는 몸을 벽에 기댄 채 송장의 낯으로 걸었다. 심장의 고동소리가 느껴지지 않아서 살아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었다. 방금 전의 일은 꿈만 같았다. 다시 기숙사에 돌아가면 노란 머리칼로 돌아오고, 자신은 발트슈타인을 연습할 것 같았다. 그러나 B관의 장엄한 문을 열고 나서자 쌀쌀한 바람이 뺨을 치며 너는 살아있노라 소리치는 것이다. 물에 젖은 옷을 입은 것처럼 으슬으슬 떨려 왔다. 긴장이 살짝 풀리니 뼛속까지 쳐들어오는 맹렬한 바람에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이자벨, 아름다운 그녀는 마지막까지 웃고 있었다. 그녀의 웃음이 떠나가지 않는 거야! 몇 걸음을 떼자 저 쪽, 익숙한 인영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로미오였다. 그는 약간 키를 낮추더니 수페리우스의 노란 낯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수페리우스가 B관에 들어설 때와 판이하게 달라졌음을 누가 봐도 알 만치 아이는 창백했다. 로미오는 부러 밝은 표정으로 웃어가며 부드러운 투를 흘렸다. “못 해도 괜찮다고 했잖아요.” “…그…래. 고맙다.” 대답을 해도 그건 대답이 아니었다. 죽은 감정이 둥둥 떠다녀서 아이는 발트슈타인에 대한 실패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아까 외친 브라보~! 는 들었어요?” “…….” “들었어요?” “그래. 큰 힘이 되었다. 고마워.” “표정이 왜 그래요? 긴장이 아직 안 풀렸습니까.” “그래….” “…….” “…따라오지 마.” “…….” 어쩌면 베토벤은 영원히 불가침영역이 되어, 데자뷰만 기다리면서 살지 않을까. wgreene@naver.com 덧글 12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55-2편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55-2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55-3편 ▼ 다음글 - 2악장 55-1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55-3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10/07 17:47 http://blog.naver.com/wgreene/110009469279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1007 55-3편 업데 061005 55-2편 업데 061004 55-1편 업데) Amadeus 음악 : Maksim - Croatian Rhapsody (아래 플레이 클릭) Croatian Rhapsody-Maks.. 2악장 55-3편 생각이 없어지자 아이는 걸음걸이에 숫자를 매겼다. 기숙사에 도착하기까지 자신을 스치며 반갑게 인사하는 무리들이 귀찮았다. 아니다. 귀찮음이 아니라 일종의 무의식이었다. 그들의 정다운 웃음은 코를 간질이는 봄의 새털만큼도 감동이 없었다. 수페리우스의 빠져나간 넋은 돌아올 기미가 없어 보였다. 아이는 자신의 머리칼이 노란색에서 까만색으로 변해서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잠깐 의심했다. 다시 노랗게 염색할까? 아니면 머리칼을 모두 자를까? …이런 생각을 하다니. 기숙사 방문을 열 때의 수페리우스는 변명은 않기로 했던 아까의 기도가 왜 필요했는지 제대로 깨달았다. 탓을 누구에게 돌리지 않고서는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였다. 탓을 돌린다는 것부터가 스스로는 자기 잘못임을 알고 있다. 알기 때문에 도망갈 건덕 지를 어떻게든 후비려는 것이다. “…….” 문을 닫고 벽에 기대자 온 몸을 흡수당하는 착각에 사로잡혀 수페리우스는 천천히 주저앉았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식은땀이 흘러 예식 복이 젖었다. “…….” 긴 시간 참아왔던 뭔가가 내면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을 파괴하고 싶지만, 정체가 무엇인줄도 모르는 현재 어쩔 도리가 없었다. 로미오는 착하게도 따라오지 않았다. 아니다. 녀석이 따라와서 괜찮아요? 괜찮아요. 라는 입에 발린 소리를 해 주길 기대했을까. 나의 탓을 남이 위로해주길 기대한 건 아닐까. 그게 사람일 테니. 피아노는 사람의 인생을 근사하게 표현한다. 음악은 인생의 오미를 그 어떤 매체보다 자세히 알려준다. 승리와 패배가 저 요망한 피아노와 악보에는 있었다. 주저앉은 채로 천천히 숙인 고개를 올리자 배은망덕하게만 여겨지는 피아노가 검은 자태를 뽐내는 게 한 눈에 들어왔다. 서서히 참았던 무엇이 불꽃을 피웠다. 수페리우스의 무릎이 모아지고 주먹에 힘이 세어졌을 때, 피아노는 놀리듯이 뒤를 돌아서 웃고 있었다. “!” 아이는 당장 일어나서 발트슈타인의 악보를 쥐었다. 베토벤 소나타 집을 빌려온 게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돌아오는 즉시 찢었겠지. 왜 하필이면 베토벤이었을까! 왜 하필이면 발트슈타인 이었을까! 민우의 피아노에서 연습해서 그런 걸까? “…….” 천천히 테이블에 있던 빈 플라스틱 컵을 쥐었다. 아이는 우아한 피아노에 컵을 던졌다. 카캉! 피아노면에 맞은 플라스틱 컵이 다른 쪽으로 날아갔다. 아이는 나머지 컵들도 모두 던졌다. 동시에 죽은 듯 호흡하던 심장이 그 때마다 거칠게 뛰었다. 던질 것이 없어지자 이번에는 바닥으로 너저분하게 흐트러져있는 악보집들을 있는 힘껏 집어 던졌다. 마구 던질 수 록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동공이 야릇하게 바뀌는 것처럼 스스로가 느껴졌다. 제 정신인가! 두 편으로 나뉜 마음은 아이에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시끄러워-!” 테이블 옆의 작은 의자를 번쩍 들어 올린 수페리우스는, 저 괘씸한 피아노를 향해 씩씩거리며 주저 없이 집어 던졌다. 크당! 피아노의 곳곳에 상처를 낸 뒤, 의자는 바닥을 뒹굴었다. 내가 오늘을 위해 얼마나 연습했는데! 너에게 홀려서 지겨우면서도 인내하고 막판에는 언제나처럼 괜찮았다고 여겼는데! 안 하느니만 못 한 결과를 나에게 주다니! 이런 실패 감을 주다니! 지금껏 쌓아왔던 것이 몽땅 사라질 만큼의 절망을 주다니! 다음번 콩 쿨을 준비하라고? 정말 잔인한 당신이다! 차라리 나에게 처음부터 지금까지 실패만을 주어서, 그것에 익숙해지도록 하면 좋을 것을! 참으로 지독한 당신 역시 저 피아노와 비슷하게 하늘에서 웃고 있는가?! 내가 울 것을 기다리는가? 아니면, 내가 이성을 잃기를 기다렸는가? 그렇다면, 성공이다. 발길에 차이는 악보가 살려달라고 빌어도 지금의 아이는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이성이 끊어진 지는 오래되었다. 로미오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한 번 화가 나니 아주 오래 전 자신이 애송이 라고 불렸던 것 마저 화가 났다. 눈앞에 이자벨이 없다는 게 한탄스러웠다. 그녀가 함께 있다면 저 피아노에 던져 버릴 것이다. 하아아악! 크게 고함을 친 뒤, 혜성은 씩씩거리며 지저분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양 쪽 볼이 흥분으로 인해 붉어졌다. “하악, 하악, 하아, 하아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터지지 않았다. 정말 괴로운 것은 그것이었다. 눈물이 터지지 않으니 이상한 행동으로 내면이 발산되질 않던가. ‘차라리, 죽여라. 수페리우스.’ “…….” 생채기로 그을린 피아노가 아예 자신을 죽여 버리라는 듯 수페리우스를 향해 입 꼬리를 올리고는 노려봤다. 아이의 동공이 또 한 번 야릇하게 돌아간다. 배은망덕한 자식! 약간 숨을 고르며 생각을 정리하던 수페리우스는 죄 없는 피아노에게 다시 화가 치솟아 방금 손에 쥐어진 두툼한 악보집을 던졌다. 그러나 던지는 순간, 번쩍 떠오르는 생각 때문에 아이는 후다닥 일어나서 엉망진창으로 달려갔다. 풀~썩. 차르르륵. 피아노에 한 번 부딪히고 바닥에 떨어져 마구 펄럭이는 그것은 다름 아닌 테레사의 에튜드집 이었던 것이다. 오, 하느님. 혜성은 입술을 깨물며 내가 미친 걸까, 내가 정말 미친 걸까, 스스로에게 물었다. 에튜드 집을 쥐려던 때, 그것은 반항하듯 세차게 들이친 바람과 맞물려 마구 휘날렸다. 피드득. 피드드드득. 펼쳐진 악보는 춤을 추듯, 혹은 말을 하듯 바람과 함께 여러 장이 밀렸다. 테레사의 에튜드가 칼이 되어, 민우의 피아노를 찔렀다. 저릿한 환각이 스치자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 다섯 시간 후, 완전히 진정이 된 수페리우스는 피아노 뚜껑을 열고 엉망이 된 베토벤 소나타 집을 펼쳤다. 제대로 히스테리를 부리고 나서인지, 실패 이후로 달아난 넋이 돌아왔다. 마음을 죽이던 동요와 흥분은 고인 물처럼 식어서 첨벙였다. 발트슈타인을 다시 쳐봤다. 치고 들어가는 건 웬일인지 어렵지 않았다. 아이는 방 금의 연주가 믿을 수 없어서 다시 1악장부터 3악장을 고루 섞어서 치고 들어갔다. “…….” 또 한 시간이 지났을 때, 혜성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건반 위에 엎드렸다. 차차창- 아이가 엎드리자 요란한 건반 소리가 육중하게 울렸다. 조금만 몸을 움직이면 뭐라고 말을 하는 것처럼 귓가에 파고들었다. “야… …지금 되면 어뜩하냐….” 중얼거리면서도 팔에 뺨을 누르자, 딴-! 검은 건반의 낮은 부분이 또 들렸다. 환각 상태의 몸부림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아이는 생각하며 지그시 페달을 밟았다. “바…보같이….” 화를 낸 뒤, 다섯 시간이 지났을 때 발트슈타인이 이제껏 중 가장 멋지게 연주됐다. 건반 미스는커녕, 물 흐르듯 고고하고 우아하게, 과감할 때는 강하면서도 세련되게, 청각을 잃은 루트비히가 번쩍 놀랄 정도로 스스로 만족할 만한 것이 이제 서야 튀어 나온 것이다. 아무도 없는 가운데, 치고 들어간 연주는 가장 발트슈타인다웠다. “그래… 단기간 내에 한 곡을 완벽하게 마스터 할 수는 없었겠지… 그게 아니라면, 내 마음가짐이 서툴러서 그런 거겠지….” 연주 하면서도 느낄 수 있는 감각이 모두 열려서 쳤던 방금은, 재생하면 할수록 근사하기만 했다. “그래도 그렇지…….” 이자벨의 심리 술에 걸려든 걸지도 모른다고 동완이가 조언 할 모습이 그려지자 아이는 피식 피식 웃었다. “이건 너무하는 거 아니냐…….” 뼈저리게 후회하는 상황이 너무 많았다. 눈물은, 결국 마지막까지 흐르지 않았다. 테레사의 에튜드 집이 바닥에 펄럭이며 무어라 말을 하는 것처럼 슬퍼 보였다. wgreene@naver.com 덧글 10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55-3편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55-3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56~57편 ▼ 다음글 - 2악장 55-2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56~57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10/08 21:11 http://blog.naver.com/wgreene/110009507881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1008 56~57편 업데) Amadeus 음악 : 비탈리의 샤콘느 G단조 (아래플레이클릭) 비탈리 : 샤콘느-Sarah .. A단조. 신혜성을 위한 눈물의 세레나데. 2악장 56~57편 1월 둘째 주 월요일 새벽부터 웅장한 비가 내렸다. 맹렬한 바람을 잠재우며 대지를 뚫는 힘이 곳곳을 시끄럽게 했다. 언 바닥마저 갈리는 물이 통쾌함을 선물하자 아마데우스의 인파들은 속절없는 추위로부터 약간 벗어날 수 있었다. 난데없이 떨어지는 겨울비는 지금의 계절마저 망각하게 했다. 또, 수페리우스의 발트슈타인 발표 소식이 학생들의 화두에 올랐다. 다른 이야깃거리가 있다 한 들 열정적인 눈빛들은 수페리우스의 소식에 쉬이 동화되었고, 곧 기가 막힌 탄성을 내질렀다. 어딜 가도 수페리우스의 발트슈타인! 발트슈타인? 발트슈타인. 그 소리들만이 아마데우스를 채웠다. 오전 7시부터 실기수업에 한 창인 C동 역시 시끄러웠다. 분수대와 가장 가까워서일까? 아니면, 뜨겁게 내리는 하늘의 눈물이 주는 감동에 속이 후련해져서? 오펜바흐의 자클린의 눈물을 연주하던 학생들은 담당 교수들에게 궁금증을 참지 못해서 활을 움직이며 수 십 번 물었다. 교수님! 수페리우스의 발트슈타인은 어땠나요? 오, 그럴 리가요! 수페리우스의 존재는 이상하리만치 그가 조용히 있을수록, 나서지 않을수록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오후가 되자 각자 놀랐던 의견들은 비슷한 결론을 추려내기에 이르렀다. 하늘의 눈물은 수페리우스의 편이었다. 발트슈타인의 실패. 알프레드 브렌델을 흉내 냈다는 악평을 지껄인 영국의 교수 이야기와, 하필이면 이자벨이 수페리우스의 악보를 넘겨줬다는 사실은 학생들을 짜증나게 했다. 누가 봐도 공평한 상황이 절대 아니었다. 학생들은 분노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빚은 결과에 따라 정식으로 근신 처분을 받게 된 혜성이 다음 번 콩쿨에 대비해서 범위와 상관없이 작곡을 해야 한다는 점 역시 학생들을 분노케 했다. 왜 그들은 화가 났을까? 예전처럼 애송이라며 싸잡아 그를 비웃어야 마땅할 텐데? 이자벨을 더 좋아했던 그들이 왜 지금은 그를 위할까. 답은 간단했다. 오래 전으로 거슬러가 학생들은 수페리우스가 제대로 된 절차 없이 학교에 입학 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가 하나 둘 이룩하는 것들에서 감명 받았었다. 그래서 지금의 수페리우스는 앞으로 더 대단한 것을 하리라는 믿음의 인물로 자리 잡았다. 반면 이자벨은 그게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녀를 흠앙했던 학생들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단숨에 학생회장까지 차지한 점을 은근히 씁쓸해 했던 것이다. 당연히 그녀가 회장을 맡아야지, 라고 하면서도 씁쓸한 감정이 빙빙 맴돌 무렵, 앞서 믿음을 준 수페리우스를 그녀가 함부로 대한 것이 학생들은 논리에 맞지 않다고 여긴 것뿐이다. 학생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이자벨과 수페리우스가 어떤 관계인지 즘은 아마데우스에서 사는 이상 알고 있었다. 그들은 흥분했다. 수페리우스가 그럴 리가 없어! 라며 발트슈타인의 연주를 믿지 않는 무리들은 흥분했다. 이자벨이 왜 거기에 참여하느냐고 발끈하는 무리들 역시 상황을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수페리우스를 비난하는 무리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건 소수에 불과했다. 그리고, 수페리우스는? 당사자는 어땠을까. 까만 머리칼로 변한 수페리우스는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또 자신을 달리 보는 시선들과 마주치며 그들이 하고자 한 소리들을 모두 알아들었다. 전부는 아니어도 분위기 유추 정도는 가능했다. 학생들은 이자벨이 중요한 평가에 멋대로 참여해서 저가 교수인 양 저가 테레사인 양 굴었던 것을 비판한다는 것을. 혜성은 자신을 지지해주는 뜨거운 학생들의 입술이 고마웠다. 미안함이 뒤섞였지만 벅찬 감동이 먼저였다. 하지만 뒷말이 많다 한 들 발트슈타인은 이미 끝 난 일이었다. 발트슈타인에 대한 이야기를 백 번 천 번 한 들, 수페리우스에게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는 그들이 떠드는 것에 크게 동요되지 않는 스스로가 신기했다. 피아노에 그어진 생채기를 아련히 응시할 때면 과거의 민우가 자신을 지켜줬던 장면이 떠올라서 가슴을 움켜쥐었다. 많은 인파가 수페리우스의 방문을 노크했지만 아이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그래도 수페리우스를 좋아했다. 참 이상한 노릇이다. 지금까지의 과정으로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저녁 무렵의 혜성은 신입생 때처럼 돌연 생기로 넘쳤다. 이번 주에 돌아온다는 사비나 교수의 일정이 훨씬 뒤로 밀렸다는 소식을 게시 대에서 읽는 즉시 혜성은 우산을 챙겼다. 비는 조금도 멎지 않았다. 겨울이 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봄을 거쳐서 여름으로 변한 기분이다. 사비나 교수님. 아닌 척 굴어도 수페리우스의 유일한 편이었던 그녀가 독일에 가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발트슈타인을 망치지 않았을 거라는 후회가 찌꺼기처럼 남아 있었다. 교수님이 언제 돌아오실까. 사비나 교수님, 그녀의 빈자리가 아련하다. 발트슈타인의 시간을 되돌릴 수 없어도 그것과 별개로 나는 교수님의 당당한 설명이 그리워. 사비나 교수가 한국으로 오는 정확한 날짜를 묻기 위해 밖을 나선 수페리우스는, 장대한 빗줄기를 마주하는 순간 번쩍! 하고 명쾌한 것이 머릿속이 스쳤다. 룸펜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이 근신 처분이라는 명목으로 수업을 들을 수 없는 입장임이 새록해졌다. 다시 말 해, 말만 바꾸면 그것은 자유의 몸이라는 뜻도 된다. 수업을 듣지 않는 자가 이 학교에서 무얼 하겠는가. 술을 마시라고? 이젠 그것도 지겹다. 룸펜으로 갈까. 그러나 도망치고 싶지는 않다. 룸펜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어느덧 손에 꼬옥 쥐고 있던 우산은 저 멀리 나동그라졌다. 수페리우스는 잠깐이라도 쉬는 텀이 아쉬웠는지 빠르게 뛰었다. 사비나 교수님! 내가 그녀를 찾아가면 된다! 실로 오래간만의 전율이 아이의 온 몸을 달구었다. 어서, 어서! 흥분으로 터질 것 같은 머리는 앞으로의 기대에 대한 쾌락 천지였다. 순식간에 로제리오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뭐라고, 수페리우스?” 로제리오는 수페리우스의 젖은 몰골에 놀라서 허둥지둥 달려오다가 입가에 걸린 파이프를 떨어뜨렸다. “독일에 다녀오겠습니다. 뮌헨 아마데우스….” “!” “사비나 교수님이 계시는 곳으로요.” “하….” 그렇다. 독일에 갈게요 교수님! 바로 이 말과 함께 수페리우스는 들이닥쳤다. 그 돌출 발언은 당연히 평화롭던 로제리오를 완전히 놀라게 만들었다. 카펫에 눌은 자국이 생긴 것을 구둣발로 지지며 로제리오는 담배 파이프를 테이블 위로 올렸다. 그의 이마에 자잘한 땀방울이 맺혔다. “승인해 주세요!” “…….” 로제리오는 그러나 지금의 수페리우스를 적잖이 예감한 눈치였다. 수페리우스가 근신하라고 해서 가만히 있을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로제리오는 경험해 봤기 때문이다. 아니, 아마데우스 전체는 경험 해 봤다. 보스턴에 가고 싶을 때, 아이는 보스턴으로 갔었다. 그 때의 교훈 때문인지 지금은 자신에게 먼저 허락을 구하려는 것 뿐, 만약 로제리오가 허락하지 않아도 수페리우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틀림없이 독일로 날아갈 것이다. 하. 로제리오는 벙 찐 채로 한 참 동안 창밖을 응시했다. 투들 하게 내리는 비의 소리들은 웅장했다. 여느 악장과 겨룬 들 빗소리의 승리임이 자명했다. 로제리오는 자신도 모르게 지나온 세월동안 수페리우스가 좋아졌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또, 자신이 봐도 발트슈타인 건은 교수들과 이자벨이 지나친 면이 없잖아 있었다. 그는 그러나 상업적인 사람이지 않던가. 열정으로 맞서서 싸워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마음으로는 수페리우스의 당찬 의견에 동했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권한을 바오르 신부님께 미루기로 했다. “뭐 좀 마시지 않겠니, 수페리우스?” “…….” 수페리우스의 마음은 이미 뮌헨의 성지를 밟고 있었다. 마리엔 광장에서 히스와 맥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아름드리 펼쳐진 민들레 꽃밭! 비록 겨울의 꽃은 모두 시들었을 지라도 향기는 유추할 수 있다. 성지를 지나 뮌헨 외각에서 떵떵 이는 아마데우스 홀! 근사한 그 곳에서 20분 정도 쭉 따라 걸어가면 나타나는 뮌헨 아마데우스! 수페리우스의 눈동자는 벌써부터 지난날의 뮌헨 아마데우스 뜰을 거닐었다. “아마데우스 밖을 정당하게 나가는 방법은 하나 있지.” “바오르 신부님이요?” “!” “겨울 휴가 때, 인쇄 동의 일손이 필요한 적이 있었지요. 그 때 모세가 당당하게 프랑스에서 지냈다더군요. 바오르 신부님의 허락이 떨어져서요. 그러니까, 바오르 신부님을 말씀하시는 거지요, 로제리오 교수님?” “…그래.” 아마데우스에 관한 것이라면 작은 것이라도 꿰뚫는 총명한 눈동자! 로제리오가 할 일은 네 말이 옳다며 고개를 끄덕여주는 게 전부였다. 혜성은 그것만으로도 고마웠는지 씩씩하게 인사를 한 뒤 등을 돌렸다. 일절 아쉬움 없어 보이는 늘씬한 수페리우스의 등은 여느 때보다 세련 되 보였다. 발트슈타인에 대한 실패로 한동안 넋이 나가 있을 줄 알았는데……. “참, 로제리오 교수님.” “…?” 막 나가려던 수페리우스가 활짝 웃으며 파이프를 입에 문 로제리오를 불렀다. 그 역시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발트슈타인을 완벽하게 연주 했습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지만, 저는 이제 괜찮습니다.” “…!” 로제리오의 생각마저 꿰뚫는 걸까?! 아이가 후다닥 뛰어 나가는 순간, 로제리오의 담배 파이프가 또 다시 바닥에 떨어졌다. 바오르 신부님을 알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수녀님을 만나야 했다. 백색의 야외 콘서트장과 가까운 곳이 수녀님들의 쉼터였다. 중앙의 분수대에서 비를 맞으며 수페리우스는 고민했다. 장미 문 쪽의 성당으로 가야 할까, 아니면 오솔길을 지나서 정 반대인 쉼터를 찾아야 할까. 아이는 두 군데를 모두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숨이 턱까지 차도록 달리기로 정한 첫 번째 장소는 쉼터였다. 오솔길 바닥은 차가운 진흙이 엉켜 있었다. 타닥. 타닥. 달려갈수록 예식복 바지는 흙탕물이 튀어서 더러워졌다. 거세게 밀리는 옆의 강물은 평소보다 위협적인 몸놀림을 자랑했다. 그것을 흘깃 볼 때마다 소름이 끼쳤던 수페리우스는 약간 달리는 속도를 늦췄다. “…?” 굵은 빗줄기 사이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으슬으슬 떨리는 턱 밖으로 기침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수페리우스는 코를 훌쩍이며 팔짱을 끼었다. 달리던 것을 멈춰서일까. 하얗게 질린 그의 몸 밖으로 더운 수증기가 올라왔다. 다시 달려야 할까. 슬슬 다리에 힘이 풀리는데… 나는 왜 이럴 때마다 무모해질까. “……!” 수페리우스는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췄다. 마주오던 바오르 신부도 수페리우스의 코앞에서 멈췄다. 두 사람은 묘한 시선을 교차했다. “…….” “…….” 덜덜 떨리는 와중에도 혜성은 이상한 감정에 쏠렸다. 민우의 아버지인 바오르 신부. 중후한 그의 인상은 천주님의 품에 있는 민우를 연상케 했다. 오, 이럴 수가. 번쩍이는 민우의 베토벤 선율이 속절없는 그리움이 되어 자꾸만 메아리쳤다. 바오르 신부는 자신이 쓰고 있던 우산을 혜성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나 덜덜 떨기만 하는 혜성은 곧 우산을 놓쳤다. 장대비 속에서 두 사람은 한없이 서로를 보았다. “신,부,님.” “…….” 아버지. 저도 모르게 내뱉을 번 한 말을 삼키며 수페리우스는 덜덜 떨리는 턱으로 웃었다. 가능한 한 정확한 글자를 말하기 위해 노력했다. 알싸한 두통과도 같은 신음이 신부님의 입 밖으로 빠져나갔다. 수페리우스의 떨리는 목소리는 그러나 정확한 내용을 전했다. 로제리오에게 보였던 강함보다 더 한 색채로 바오르 신부를 부서져라 응시했다. 하릴없는 아이의 눈동자는 바오르 신부의 마음을 움직인 걸까. 바오르 신부는 대답했다. “정확히 일주일을 주겠습니다.” “!” “그 뒤, 지금처럼 자숙한 후, 5월 리허설을 준비하십시오. 콩쿨 결과에 따라서 4학년의 전공기초시험을 통과한 것으로 치겠습니다.” “!” 오, 이런! 방금 환청을 들은 게 아닐까? 수페리우스는 추위마저 달아난 기분이었다. 운명이 빚은 우연이 그를 만나려던 길에 오히려 그를 나타나게 했고, 이제는 독일 건을 허락해 주다니! 수페리우스는 자신을 스쳐 지나는 바오르 신부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 까지도 당황한 나머지 까맣게 잊었다. 그 때, 바오르 신부가 약간 걸음을 늦추며 등으로 말을 했다. “염색을 했군요, 수페리우스.” “…아.” 비를 헤친 음성은 고독하면서도 어쩐지 슬펐다. “단정한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 그리고 그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멀리로 사라져갔다. 단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니? 아련한 그 말이 떠나지 않는 관계로 혜성은 내내 울리는 그 문장을 곱씹었다. 수페리우스의 노란 머리칼에서 지난 날 민우의 방황이 보였던 걸까. 그래서 안타까웠을까. 혹시나 그런 이유로 지금의 혜성이 반듯한 색채로 돌아옴이 반가웠을까. 그가 정답을 말하지 않는 이상 추측은 여러 가지를 빚었다. 상관없다. 혜성은 10분이 넘도록 같은 자리에서 멍~하니 일주일 구절을 연상하다가, 소스라친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입이 귀밑까지 찢어진다는 게 없는 소리는 아니리라. 아이는 신이 나서 한 순간 벌어진 이 일이 고맙기만 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이자벨이 발트슈타인 평가에 함부로 대한 것 마저 고마워졌다. 기숙사에 돌아온 수페리우스는 자신을 기다렸음직한 로미오에게 다짜고짜 끌어 안겼다. 숨이 막힐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따뜻한 그의 몸이 좋아서 아이는 안긴 채로 질질 끌려가서 침대에 눕혀졌다. 긴장이 풀린데다가 따뜻한 곳으로 옮기자 솔직한 몸은 반응을 보이며 수페리우스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열꽃이 핀 곳곳에 그래도 홍조가 남아있었다. 가파른 숨을 쉬지만 마음은 편안하고 통쾌했다. 빗소리는 아름다웠다. 그래서 아이는 지금도 살아 있음을 절실히 깨닫는다. “미…오…야.” “…….” 더러워진 것도 모자라 수증기를 뿜어내며 들어온 수페리우스의 몸은 불덩어리였다. 로미오는 그의 몸을 따뜻한 타월로 닦아주면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옷을 모두 벗겼는데도 수페리우스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아니, 부끄러워해야 함을 잊은 눈치였다. 지금의 수페리우스는 먼 허공을 아련하게 응시하며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들부들 떨리는 양 팔을 가까스로 올리며 몸을 닦아주는 로미오에게 말을 했지만 아이의 시선은 먼 창공을 날아다니는 새와 같았다. 그 모습은 우는 것 만 못했다. 이유 없이 슬퍼서 보는 이의 가슴을 움켜쥐게 했다. 눈시울이 붉어진 로미오는 수페리우스의 몸을 다 닦은 뒤 편한 옷을 입혀줬다. 축축 늘어진 그의 몸은 로미오가 움직이는 대로 아기처럼 따라왔다. 불덩어리 몸을 끌어안아 주고 싶지만 그가 부서질 게 두려웠다. “미오야… 미…오야….” “…….” 말하지 말아요. 그냥 숨만 쉬어요. 로미오의 눈동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렇게 말을 했다. 한결 기분이 좋아진 수페리우스는 크게 기침하면서도 기쁨을 표현했다. “하아, 하, 나… 휴가 받았다.” “!” 무슨 휴가일까. 그게 무슨 상관이랴. 다들 수페리우스의 발트슈타인 결과에 경악하는 현재, 그는 무엇이 기쁘기에 저렇게 웃는 걸까. 왜 울지 않을까. 어제는 따라오지 말라며 웃어도 우는 것 만 못하더니, 오늘은 더 심하잖아. 온 몸이 불덩어리면서 아플 텐데도 웃는 입술은 적어도 로미오에겐 웃음이 아니었다. “쌔핵… 쌕… 울지 마라. 안 예쁘다 핏덩어리.” “…….” 응어리진 숨소리를 거칠게 내보내며 수페리우스가 지적했다. 그 와중에도 로미오의 험한 표정이 보였던 모양이다. 아름다운 수페리우스는 느닷없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온 몸을 활처럼 휘이며 크게 기침을 토했다. 덕분에 속앓이에 한창인 위액이 울컥 튀어나와서 시트를 더럽혔다. 로미오는 묵묵히 입술을 깨물며 시트를 갈아 주었다. 수페리우스는 들뜨고 벅찬 와중에도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고, 결국은 건장한 사내를 울렸다. 수페리우스는 울지 말라는 말을 하며 천천히 잠에 취해갔다. 로미오는 열 시간 내내 수페리우스를 간병했다. 그가 죽을 것처럼 연약해 보여서 몇 번이나 도어를 박차고 뛰어나갈 뻔 했다. 그러나 푹 잠을 잔 뒤 약간 열이 가신 수페리우스가 눈을 뜨자 로미오는 아이를 와락 끌어안으며 천주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가 계속 살게 해 주어서 고맙다는, 스스로도 낯선 기도를 힘차게 영혼으로 외쳤다. 그는 절대로 떠나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며, 혜성이 조근조근 떠드는 즐거운 모양을 넋을 잃고 쳐다봤다. 실로폰처럼 청아하게 맺히는 음성은 대지에 퍼붓는 물줄기만큼이나 상냥하고 정확했다. “밑바닥에서의 첫 번째 준비 작업이다.” “…?” “수페리우스의 도약.” “!” 기운을 차린 혜성은 잠들기 직전에 언급한 휴가에 대한 자세한 것을 떠들었다. 미음을 먹다가도 눈을 빛냈다. 뭔가를 해 내려는 때의 눈빛, 그것은 보는 이를 아찔하게 했다. 로미오는 반도 비우지 않은 미음을 치워주며 손과 얼굴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안쓰러운 뭔가가 수페리우스에게는 있었다. 그는 자꾸만 사람을 움직이게 했다. “증거를 만들러 가야지.” “…….” 독일로 간다는 청천 벽력같은 선언을, 로미오는 막을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수페리우스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테레사라고 해도 아이를 막을 수 없다. 실제로 아이는 테레사를 거역하고 입학시험을 치른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수페리우스의 눈동자는 다뉴브 강에 맺힌 저녁노을을 응시하는 그것처럼 황홀함에 도취되어 있었다. 눈동자 안에 쓰인 여러 음악이 그가 뮤즈임을 증명했다. 아이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배워 질 수는 없잖아. 단 하루라도 허락된다면 나는 독일로 가서 사비나 교수님을 만날 거다. 만약 하루가 안 되는 반나절이라도, 나는 독일로 갈 거다. 반나절도 아깝다고 한 시간만 준 들, 걷다가 한 시간이 다 되는 한이 있어도 나는 공항으로 갈 거야.” “…….” 말을 마친 수페리우스는 자신을 간호해 준 기특한 로미오를 가까이 끌어당기더니 고마움의 표시로 뺨에 입을 맞춰주었다. 짧은 순간이지만 로미오의 입 밖으로 아찔한 신음 소리가 빠져나갔다. “내가 돌아올 때 까지 반항하지 말고 쇼너 스타니와 잘 지내도록.” “언제까지 어린애 취급 할 건가요.” “…….” 푸석하게 마른 로미오의 뺨을 쓸어주는 혜성의 손은 작았다. 그러나 크게 다가왔다. 로미오는 애써 부정하며 머쓱하게 웃었다. 자신 역시 살아 있어줘서 고맙다는 표시로 수페리우스의 마른 볼에 입술을 눌렀다. 아직은 차가운 기운으로 맺힌 볼이 상쾌했다. “제가 키도 더 크고 손도 발도 다 큰데.” “큰 바위 얼굴에게 반항이 심하구나.” “…….” 그리고 둘은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장대비는 여전했다. 이례적인 겨울비에 많은 이들은 들떠 있었다. 함박눈을 몰아세우는 힘 때문인지 그 박력에 반한 뮤즈의 연주가 오르페우스 관으로부터 하염없이 흘렀다. 오늘 밤 짐을 꾸릴 것을 계획하는 수페리우스의 방에 오후 무렵, 동완이 찾아왔다. 그는 자신의 친구가 홀로 고독함을 이겨냈던 요즈음이 서운했던 모양이다. “울지도 않는 거니? 다시 건반이라도 눌러 봐.” 혜성의 몸이 많이 수척해 있다는 걸 아는 동완이 부러 퉁명스런 투로 쏴붙였다. 동완이 내민 코코아를 마시는 혜성은, 그의 진짜 마음이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동완은 실제 예측하는 것 이상으로 자기 사람들에 대한 관용이 넘쳤다. 코코아가 쓰다는 혜성의 말에 서둘러 프림을 꺼내주는 동완이가 고마워서 아이는 소리 없이 웃었다. “지금은 피아노가 꼴도 보기 싫어.” “…….” 발트슈타인을 배신한 피아노가 당장은 좋을 수가 없다. 혜성의 말에 뭔가 다른 얘기를 꺼내려는 동완이 입술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아이가 더 빨랐다. “술도 필요 없어.” “차라리 울지 그래.” 연주를 해 낸 순간에도, 아픈 때에도 결국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동완이 지적해 주지 않아도 혜성은 스스로가 궁금한 차였다. 왜 눈물이 나오지 않을까? 나는 성숙한 걸까? 성숙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혜성이 시큰둥하게 받아쳤다. “눈물이 아까운 걸까. 어디선가 이자벨이 비웃을 것 같다. 나는 내 자신에게 진 건데도 말이지.” “예전엔 잘 울었잖아. 울면 속이 시원해지잖아.” “…그러게…….” “…….” “나는 내가 컸다는 걸 알지만, 때로는 그게 싫다.” “…….” 먼 곳을 회상하는 추억의 눈망울이 흐릿해져간다. 두 사람의 코코아가 방 곳곳에 향기를 빚을 때마다 흐릿해지는 속도는 빨라졌다. 혜성의 입술 역시 눈망울과 비슷하게 흐릿해졌다. “예고 없이 눈물을 흘릴 때가 좋았지. 여전히 청춘인데도 빛이 바래질 때는 늙은 노파가 된 양 눈물이 나오려다가 멈추지. 일이 잘 되면 신이 내 손을 잡아줬다고 좋아하고, 조금만 틀어지면 신이 나를 버렸다며 원망하는 나날들… 만약 신이 있다면, 그는 내가 우는 모습을 좋아하는가 보다. 사람들이 우는 모양을 원하는 거지.” “…….” “신은 그렇게 자비로우면서도 때론 잔인해. 마음에 쏘이는 화살은 생채기가 깊어서 영원히 딱지가 떨어지지 않을 텐데… 다정하게 안아 주고 손을 잡아 주다가도, 결국은 눈물을 보이게 한다.” “…….” “만약 정말 그렇다면, 나는 그 뜻을 거역하려는가 보다. 눈물을 원해도 내 안에 다시 감추려드니까…….” “…….” “그것도 아니라면…….” “…….” “눈물이 말랐나봐 동완아. 눈물이 이젠 내가 싫어졌나봐. 만약 내 안의 눈물이 나를 부정하는 거라면, 이것 역시 신의 뜻이라면, 그는 평소 베풀어준 자비를 망각할 정도로 잔인한 거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서, 그저 딱하다는 말 밖에 안 나온다. 네 감성 체계가 전과 다르게 감정적인 면에 의미를 부여하고 인내심이 많아졌다는 건 알겠지만.” “미카엘 선배랑은 어떠니. 잘 지내니.” 서둘러 화제를 돌리는 혜성 덕분에 화들짝 놀란 동완이 입안에 고인 코코아를 실수로 질질 흘렸다. 두 사람은 더럽다고 꽥 소리치는 것으로 흐릿한 공감에서 벗어났다. 호들갑을 떨어대는 쪽은 오히려 동완이었다. 자기 코코아를 저가 쏟아내고 심술이라니, 이상한 녀석. 한동안 자잘한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다시, 미카엘 선배에 대한 화제로 돌아왔다. 동완의 표정이 말도 못 하게 풍부해졌다. 표정은 마음을 대변했고, 음성 역시 그랬다. 사랑에 빠진 동완의 눈동자는 혜성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마법보다 찬란한 영적인 것이 미카엘 선배와 동완이에게 드디어……. 잠깐 뜸을 들이던 동완이 설레는 입술을 열었다. “…너 그거 아니, 혜성아.” “무얼…?” “나는 아마데우스를 졸업한 뒤에, 꼭 심리학을 하면서 선배랑 결혼할거다.” “…….” 순결한 두 사람의 영혼은, 2중주의 각기 다른 악기가 하나의 음률을 이루듯이 뭉친 것이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신음이 터지게 하는 사랑, 그것은 유일무의 마법이었다. “어제 오후 다섯 시에 만났는데… 선배가 다른 때와는 달리 시선을 쉽게 맞추지를 못했어. 탁자 위에 있던 종이로 학을 접으면서 머뭇거렸지. 다른 말로 빙빙 돌리기만 하는 미카엘 선배가 왜 그러는지 나야 알았지. 불안한 내면이 보였거든. 그럴 때는 내가 심리학도 라는 게 씁쓸하지만…….” “…….” “선배가 나한테 여러 가지를 고백했어. 선배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나는 떨렸는데… 이제 미카엘 선배는 나에게 조금씩 다정해지고 있어.” “…….” 선배가 고백 했구나… 혜성은 속으로 생각하며 감동으로 푸근해진 내면을 달래었다. 선배의 눈물은 아름다운 만큼 진솔했지…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들 두 사람은 은밀한 자신들만의 추억을 만들어 갈 일만 남은 것이다. 벌써 숱하게 만들었을지라도, 마음이 통했을 때의 그것에 비할 수는 없을 테니. “원래는 차갑게 굴었던 사람이 조금만 다정한 투를 내뱉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너는 모를 거야. 나는 당연한 그 심리를 알면서도 좋아했어. 사람이기에…….” “…그래. 나는 모르겠다. 그 감정은 너 만의 것이니까 너의 가치이니까.” “신혼여행은 어디가 좋을까.” “…….” “…그렇게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 어차피 세상 밖에 나가면 질타의 대상이 되겠지만.” “…….” “나는 선배랑 있으면 여러 곳에서 데자뷰를 경험해.” “…….” 동완은 자신이 같은 말을 내뱉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 해 달라는 듯 표정으로 애원했다. 혜성은 지그시 웃으며 미카엘 선배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와 오후 다섯 시에 만난 동완의 이야기는 몇 번이나 약간 다른 형식으로 반복되었다. 사랑이 깊어져간다. 청춘, 불 벼락같은 꽃을 피운 그들의 세상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선배는 웃으면서 여느 때처럼 앉아 있었지. 다만 테이블에 있는 종이로 학을 접는 것뿐이었어. 내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선배가 혹시 나에게 학을 접어주지 않을까? 라는 기대에 부풀었을 거다. 그런데 나는 반대였어. 선배한테 무슨 일이 있구나. 혹은, 선배가 꺼내기 어려운 말이 있구나. 표정 변화 없이, 손짓과 발짓 평소와 같을 수도 있는 행동의 진행인데도 파악이 먼저 될 때의 괴리. 나는 선배의 자잘한 것을 살피기 위해 심리학을 선택한 것처럼 딱 한 눈에 스며들어오는 거야.”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그럴 거야.” “…그렇겠지.” “어쨌든, 오후 다섯 시에 비가 어~찌나 세게 내렸던지…….” 동완이 또 한 번 미카엘 선배와 어제 만났던 추억을 꺼낼 때, 수페리우스는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귀를 바짝 세워야 했다. 저녁 무렵, 혜성은 관리 사무소에 가서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 바오르 신부님의 허가증을 제시하자 사무실 사람들은 인증 도장을 찍어 주었다. 상황이 확실해지자 이젠 시간이 촉박해졌다. 수페리우스는 약간의 미열기가 귀찮기만 했다. 여기서 아픈 것은 걸림돌이다. 아프면 나약해지고, 귀찮으며, 나아지길 기다려야 한다. 그럴 수는 없지. 수페리우스는 옷을 단단히 여민 채로 고역 같은 밥과 약을 챙겨 먹었다. 창문을 꼭꼭 닫은 상태에서 가방을 꾸리기 시작했다. 테레사의 에튜드 집을 제일 먼저 가방에 넣다가도 그게 보고 싶어서 몇 번이나 다시 꺼내고를 반복했다. 옷가지를 거의 다 챙겼을 무렵, 어디선가 은은한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다. 서 쪽 기숙사동의 누군가가 연주하는 모양이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서… 조금씩 경청하려던 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음색이 정확해졌다. 아이가 옷을 쑤셔 넣던 도중 뭔가 이상하다 여겼는지 무의식중에 등을 돌렸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어느새 방문을 열고 들어온 로미오가 난생 처음 들어보는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고 있었다. 콘트라베이스가 훨씬 어울릴 것 같은 건장한 그의 체격은 갑자기 날렵해져서 바이올린을 턱에 받치고 있었다. 바이올린 보다는 차라리 콘트라베이스클라리넷이 낫지 않을까? 아니다. 바이올린도 어울린다. 혜성이 팔짱을 낀 채 길게 휘파람을 불자 로미오가 슬쩍 한 쪽 눈을 감았다. 오전 나절 불안한 시선과 함께 레슨과 이론수업을 들으러 나갔던 그가 떠올라서 웃음의 색이 짙어졌다. 혜성은 자꾸만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로미오가 귀여운 마음에 푸훗 웃으며 말을 걸었다. “너….” “쉿.” “…?” “선배를 위해 만든 곡입니다.” “…쿡.” 대 연주자에게 말을 걸지 말라는 듯, 오만한 표정으로 로미오는 눈을 감고 속삭였다. 그는 삽시간에 바이올린의 귀재가 되었다. 활을 쥔 그의 팔이 자연스레 왼 쪽으로 올라가자, 그의 턱도 함께 왼 쪽으로 돌아갔다. “A단조. 신혜성을 위한 눈물의 세레나데.” “…….” 눈물의 세레나데. 눈물이 터지지 않는 신혜성을 위한 세레나데. 바이올린의 눈물. 쩡 얼어붙었던 내면의 무언가가 깨졌다. 혜성의 흐릿해진 시선은 곧 정신을 차리는가 싶더니 방 한복판에서 미니 콘서트를 펼친 로미오를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음색은 서정적이면서도 슬펐다. 하지만 아름다운 이 계절과 낭만에 어울렸다. 온 힘을 기울이고 몰입하는 로미오의 자세는 흔들림이 없었다. 지판에 올려진 첫 번째 그의 손가락을 가만히 응시하는 혜성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자잘한 비브라토 중에서도 로미오는 유독 첫 번째 손가락을 많이 사용해서였다. 마치 그의 첫 번째 손가락 역시 바이올린의 팽팽한 줄이 된 것처럼.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이올린의 몸체는 전혀 떨리지 않는다. 그에게 익숙한 손놀림이 펼쳐지니 더 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현의 소리가 줄기처럼 얽혀왔다. 무광의 짙은 바이올린은 까만 밤을 몽땅 끌어안는 것처럼 흡입력이 대단했다. 수려한 장대비를 몰아내는 힘은 다름 아닌 선율이었다. 음률은 슬프면서도 가늘었다. 서서히 밀려오는 폭풍처럼 대지를 조금씩 흔드는 아련함이 섞여 있었다. 오, 왼 쪽으로 활이 올라갈 때마다 그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아이는 저도 모르게 로미오의 활이 올라갈 때면 왼 뺨을 움찔거렸다. 반대로 오른쪽으로 활이 내려짐과 동시에 얕은 트릴을 빚을 땐, 근사한 로미오의 자태에 빠져서 혜성의 몸이 앞으로 모아졌다. “…?” 로미오의 입술이 뭐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음악에 취한 와중 무의식중에 뱉어지는 것이었다. 혜성 자신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는 줄로 잠깐 오해했던 아이는 그의 입 모양새를 자세히 살폈다. 슬러… 슬러… 느린 단조의 왈츠처럼 부드럽게 흐르는 선율을 따라가는 내내 로미오의 입술은 저도 모르게 슬러… 슬러… 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혜성의 입가에 작은 홍조가 맺혔다. 레슨 때, 혹은 연습할 때의 로미오의 습관이 보여서 새삼 반가웠다. 음은 한 순간 격렬한 파도와도 같이 거칠었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울어주세요… 눈물을 흘리세요… 아픈 선율은 그렇게 부탁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도 감동하는 한편 눈물이 고이지는 않았다. 10분여간의 연주는 천천히 매듭지었다. 빗소리를 망각할 정도의 바이올린 선율은 매혹적이면서도 깔끔했다. 천천히 눈을 뜬 뒤, 로미오는 옅게 숨을 내쉬더니 턱에서 바이올린을 떼었다. 근사한 그의 자태가 평소보다 훨씬 멋있어졌다. 그는 발로 질질 끌어왔던 바이올린 케이스에 바이올린을 담으며 피식 웃었다. “송진이 그동안 쌓여 있어서 잠깐 거칠었었어요… 뭐… 어제까지 그런 거지만… 방금은 또 튜닝한 뒤라서 소리가 완전히 깨끗했는데… 어땠어요?” “…좋다. 멋지구나.” “나는 피아노보다 바이올린이 훨씬 좋아요.” “…….” “까다롭고 예민하거든요.” “…너처럼?” “푸하!” “…….” 바이올린 케이스를 닫던 로미오가 으잉? 하고 추임새를 넣기도 전에 깜짝 놀란 채로 웃었다. “예… 뭐… 저처럼요.” “…….” 그리고는 곧 혜성과 마주섰다. 진솔한 눈동자는 푸른 안개가 낀 것처럼 서늘했다. 그가 연주했던 슬픔의 세레나데는 그의 전체로 변해 있었다. 아무래도 혜성이 아픈 것을 목격한 뒤 그의 내면에 거대한 결심이 선 모양이었다. 아이는 그 대단한 게 읽혔다. 방금 전의 세레나데처럼 슬픈 그의 앞으로가 처절하게 읽혔다. 로미오의 눈동자에 비친 그것에 설마- 하는 의심을 품기도 전에, 그는 반쯤 눈을 내리깔더니 혜성의 양 쪽 어깨를 쥐고 고개를 숙였다. 오, 하느님. 선율에의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마음의 입맞춤을 하려는 거다. 슬픔의 세레나데가 나에게 키스를…! 진짜 마음을 담은 키스를 하려는 거야…! 혜성은 입술이 닿기 직전 고개를 휙 틀었다. 가쁜 숨이 빠져나갔다. 몽중의 장면처럼 발아래부터 당겨지는 저릿한 감각이 심장을 눌렀다. 늪처럼 퍼지는 자잘한 고통의 추가 기우뚱 거리며 마구 흩어졌다. 곧이어 로미오의 담담한 목소리가 슬프게 들려왔다. “…안 돼요?” “안 돼.” 묵묵히 서 있는 로미오를 차마 볼 수 없었던 혜성은 침대로 되돌아와서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아닌 척 짐을 마저 꾸리기 시작했다. 등 뒤의 로미오가 어떤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지 안 봐도 보였다. 혜성은 자신의 죄가 추가되는 게 싫었지만, 그에 앞서 누군가에게 아픔을 주는 지독한 현실을 매듭지기로 했다. 자신이 매듭지지 않으면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아이는 경험해 봐서 알기 때문이다. 한동안 죽은 듯이 있던 로미오가 시니컬한 투로 질문을 던졌다. “내가 별로예요? 처음 만났던 때처럼 어른인 척 굴까요? 우리 다시 신경전 할래요?” “아니.” 송곳처럼 찔리는 너의 아픔을 모르는 척 하련다. 그래야 해. 혜성은 입술을 깨물며 최대한 가볍게 대꾸했다. 로미오의 음성은 한층 애절해졌다. “많은 사람이 섞여 있어도, 선배만 제대로 보여요. 시력이 없어도 잡을 수 있을 만큼.” “안 돼.” 오 제발, 아이는 신음했다. “눈물을 보인 뒤로, 나는 가면을 쓰지 않아요.” “그래. 좋아 보인다.” 그럴 수 없어, 신음하는 중간 중간 아까의 바이올린 소리가 연이어 퍼져왔다. “그…냥 편…한 …선후배는 어때요…?” “…네가 그럴 수 있다면.” 마지막으로 던지는 이 창에 네 심장이 피를 보여도, 나는 닦아주는 것 외엔 할 수 없음을. “!” “…….” 이윽고 로미오는 빠르게 다가오더니 처음보다 강하게 혜성의 어깨를 쥐고 마주보게 했다. 욕망의 눈동자는 거칠게 이글거렸다. 혜성은 그러나 회피하지 않았다. 차라리 회피하는 게 상대에게 덜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안다. 알기 때문에 아이는 확실히 거절하려는 것이다. “못 해요.” “…….” “편한 선후배로 있다가 내 마음은 찢어질 거예요.” “…너는… 누구보다 평범한 사람 중에 하나임을 알았다. 돌이켜보면 그래. 가면을 쓰기도 하고, 비밀도 갖고, 싸움도 하고, 화를 내고, 장난도 잘 치고… …나를 뒤흔든 과거의 민우를 신경 쓰기도 하고… 어른인 척 굴고… 하지만 생각은 정말 성숙하고… 평범한 선이 너의 성격이겠지.” “…내 음악은 그렇지 않다는 거 알잖아요.” “네 바이올린 소리는 맑고 깨끗해. 그 누구보다도.” “…내가 싫어요?” “…….” “음악이 나 인대도요?” “…….” “…내가 싫어요?” “아니. 하지만 앞으로 계속 이러면 싫어하려고.” “…….” “지금은 싫어하는 게 아니야.” 혜성은 이 가여운 자신의 후배를, 누구보다 소중하면서도 아끼고픈 사람을 어떻게 물려야 할 지 난감해졌다. 그러나 곧 작은 미소를 보이며 그의 경직된 뺨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붉어진 로미오의 눈동자에서 수차례 눈물이 떨어져도 올곧은 마음은 흔들리지 않을 테니. “근데 왜 그래요? 나는 테레사를 지금도 모르겠어요.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건 사랑이잖아요.” “사랑이지.” 한층 격앙된 로미오의 음성은 슬펐다. 홍해에 빠진 바이올린처럼 슬퍼서 깊이 가라앉기만 했다. 그의 떨림의 농도가 짙어질 때, 혜성은 매몰차게 마음을 잡았다. 그래야 한다. 사랑이지. 물론 사랑이지. “그런데 왜…?” “사랑만 갖고는 세상을 살 수 없어.” “…….” 혜성의 눈빛이 처음으로 단호해진다. 로미오가 뭐라고 받아 치려던 때, 혜성이 한 걸음 물러나며 팔 장을 꼈다. “그와 나는 그래.” “!” 확실하게 선을 긋는 혜성의 태도는 로미오의 화를 샀다. 그는 바닥에 거치적거리던 바이올린 케이스를 콱 짓밟더니 주먹을 쥐었다. 로미오의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의 분노가 조금씩 꿈틀댔다. 혜성은 그러나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미안해서. “우리는 어쩌면… 우리만 그것을 서로 이해하지… 언젠가는 사랑만 갖고 살 거야. 지금은 아니야.” “현재에 충실해야 되잖습니까!” 와락 소리치는 비명의 여운이 벽에 스미기도 전에, 수페리우스는 로미오를 노려보며 외쳤다. “누구보다 충실해!” “…….” 탕-! 두 사람 사이로 가파른 무언가가 스쳤다. 둘의 긴장감은 한 순간에 높아졌다가도 점점 가라앉는다. 정확하게 선을 긋는 혜성에겐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로미오는 푹 고개를 숙였다. 뚝- 투둑. 그의 진한 눈물이 방바닥에 떨어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혜성은 마지막까지 확실한 것을 떠들었다. 로미오를 아프게 할수록 자신의 심장 역시 갈기갈기 찢겼다. “나는 숨을 쉴 때 마다, 밥을 먹을 때, 잘 때, 내 몸짓과 생각 모든 것에서 그를 떠올려.” “사랑은 음악이 아니 예요.” “…가치관이 다른 사람과 대화를 지속해야 할까.” 미안해… 내면은 로미오에게 수 십 수 백 번 미안하다고 애원했다. “…테레사는요?” “그도, 그래.” “…….” 투두둑. 로미오의 턱을 지나 떨어지는 물기는 그의 아름다운 얼굴처럼 슬펐다. 그의 날씬하면서도 건장한 몸처럼 슬펐다. 혜성은 이를 악 물었다. “사랑만 갖고는 살 수 없지만, 사랑을 품고, 믿는 상태에서는 살 수 있다.” 혜성의 대답에 눈물을 떨어뜨리면서도 피식 피식 웃던 로미오는 자조적인 입술을 열었다. 희망을 말소당한 슬픔이 힘없이 열린다. “내 이름을 밝히면 기대 올 줄 알았어요…….” “나도.” “?” 이민우. 그 이름을 내 앞에서 숨기고 당당하게 과거의 그와 비슷한 척 접근했던 너를 왜 모를까. 오, 나를 지켜보려는 뜨거움을 왜 모를까. 혜성은 노기 띤 표정을 부드럽게 풀더니 로미오를 끌어안아 주었다. 처음에는 뿌리치려던 로미오가 싫지 않았는지 조용히 경직되어 있다. “네가 나에게 기댔으면 좋겠어.” “어 째 서요…….” 혜성이 아직 아픈 상태임이 떠올랐던 로미오는 한 발 물러서기로 한다. 혹은, 혜성의 뜻을 존중하고 포기하려는 걸까. 그가 아닌 이상 누구도 정답을 모른다. 어쨌든 로미오는 세레나데를 연주했던 아까처럼 온화로운 투로 혜성의 대답을 기다렸고, 매끄럽게 받아쳤다. “도움이 되면 기쁠 것 같거든.” “대화를 원점으로 돌리시네요, 수페리우스…….” “네 나이가 백 살이 되어도 지금의 시선은 변하지 않아.” “…….” “너는 나에게 독특하면서도 귀여운 후배이니까. 가끔씩 과거의 민우를 생각하게 하면 떨리지… 그게 다야. 너는 너니까.” “왜 이렇게 잔인하게 거절해요…?” 길게 한 숨을 내쉰 뒤, 로미오는 쓰라린 문장을 내뱉었다. 그러면서도 알았다는 대답 대신에 수페리우스의 작은 몸을 차분히 둘러 주었다. 바라만 봐도 아름다운 사람, 그래서 거절하는 순간조차 아름다워 화를 잃게 하는 사람. 로미오의 품에 안긴 채로 혜성은 조용히 읊조렸다. “친절이 오히려 악이었거든.” “?” “너의 이름은 민우지만… 아까 행동은 마치….” “?” “아니다…….” 아까 전, 잠깐 화냈을 때의 너는… 정혁이와 비슷하구나… 그래서 그래… 나의 친절은 곧 그에게 파멸이었거든……. 두 사람은 곧 머쓱하게 밤 인사를 나눈 뒤 헤어졌다. 시간이 지나 약간은 물러질 때를 기다리기로 무언의 약속을 맺은 채……. 세상을 바다로 만들려던 빗줄기는 그러고 보니 멎어 있었다. 다음날은 화창했다. 언 바람은 비 오기 전과 닮은 속도로 대지 위를 군림했다. 혜성은 따뜻하게 옷을 입고 오전의 비행기를 탔다. 로미오 때문에 복잡했던 마음은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는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차차 누그러졌다. 비행기 밖의 구름이 스칠 때마다 아련함이 진해진다. 마지막까지 터지지 않은 눈물, 혜성은 스스로가 왜 이렇게 잔인해졌는지 무서웠다. 이자벨이 싫은 걸까. 그럴 리가 없어. 이자벨은 사실 생각도 나지 않았어. 세레나데가 그 닥 슬프지 않았던 걸까. 아니야. 로미오의 세레나데에 묻어나는 진솔함과 열정의 파도는 나를 휩쓸리게 했는걸. 동완이와 미카엘 선배의 사랑의 속삭임이 감동적이지 않았던 걸까. 그것도 아니야. 나는 기쁘고 사무쳤어. 발트슈타인에 대한 학생들의 의견이 별로 반갑지 않았던 걸까. 나는 그들이 고마웠는데? 발트슈타인 평가에서 실패한 넋이 채 사라지지 않아서? 그럴 리가. 독일 행을 결정했을 때의 나는, 오히려 실패를 고마워했는걸. 왜 눈물이 사라졌을까. 왜 눈물은 나에게 스트레스를 줄까. 혜성은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해서도 기분은 약간 누그러졌을 뿐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모든 상황에 스스로가 미안해졌다. 마침내 기분이 우울해지려던 찰나, 스카이 레인에 올라서 뮌헨 행으로 갈아타려던 혜성은 대합실로 빠져나갔다. 다시 수속을 밟고 신청하는 귀찮은 작업 따위는 나중에 하면 되는 것이다. 제시간에 갈아타지 않으면 뮌헨 공항에 짐이 먼저 도착해 있겠지만… 우선은 조용히 앉아서 생각에 잠기고 싶었다. 복잡한 절차를 치룬 뒤 가벼운 짐과 함께 혼자가 되자 여러 가지 생각이 들끓었다. 짐 따위는 몽땅 버리고 이대로 하우스반호프로… 키득키득 웃음이 터질 번한 혜성은 나른히 앉아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공항은 매우 넓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이 공항은 혜성이 봤던 곳 중에서도 제일 으리으리한 규모를 자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낯선 외국인들은 까만 머리의 수페리우스를 유독 관찰하는 눈치였다. 동양인이지만 아마데우스 예식 복을 입고 있어서 알아보는 걸까. 시큰둥해진 혜성은 1층의 대합실에서 자신을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사람이 있으면 앉은 채로 톡 쏴주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흠칫 놀라거나 방그레 웃어주는 게 아닌가. 한국만큼 춥지 않다는 것에 약간은 기분이 나아진 혜성이 멀리서부터 유독 자신을 쏘아보며 달려오는 누군가에게 흠칫 놀라서 뺨을 돌렸다. 자기네 사람들 쏘아 본다고 설마 나를 치려는 걸까. 웬 젊은 놈이 파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달려오는 것이다. “…….” 파란 머리카락… 파란 머리카락? “!” 운명처럼 그 순간 떨어지는 심장이 바닥을 구른다. 오 하느님, 설마! 아이의 상기된 낯에 붉은 화염의 기체가 가라앉은 듯 뜨거워졌다. 국내선을 갈아타지 않은 것은 신의 뜻일까. 아니면, 그가 알았던 걸까. 뒤죽박죽으로 엉켰던 머리가 뻥 뚫렸다. 혜성은 의자 위로 올라가서 출구를 미는 순간부터 자신을 발견하고 달려오는 이를 하염없이 쳐다봤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나를 알아봤다니. 혜성이 저도 모르게 양 팔을 휘저었다. 뒤늦게야 터지는 목청이 경쾌하게 나갔다. “히--스! 히스!” 이 순간 성대가 사라진다 해도 죽을 듯이 부를 수 있는 이름! “!”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추억의 이름, 과거의 그림보다 진한 형체로 달려오는 사람이 있다. 신이시여, 영혼 전체가 지금 이 순간 떨리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으리다. 그가 왜 이 시간에 맞춰서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그것도 1층 입구 쪽에!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나타나다니! 혜성은 눈을 비볐다. 다시 봐도 히스였다. 그는 뭐라고 소리쳤지만 많은 사람들과 안내방송 덕분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의 모습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전체에 쓰인 테레사 라는 글자가 알려주었다. 동완이가 테오제네스에게 말했겠지. 테오제네스는 테레사에게… 그는 또 한 번 나를 히스에게 부탁한 걸까. 그게 아니라면 지금 순간은 기적과 다름없다. 히스는 코앞에 달려온 즉시 혜성을 번쩍 들고 껴안았다. 의자에 서 있던 것에서 약간 낮아진 수페리우스가 히스의 품에 꽉 안긴 채로 버둥거렸다. 생각이 끊겼다. 숨이 턱 막히는 때를 잘 맞추어 자상한 그는 약간 팔을 풀어주었다. 오래 전부터 기억하던 감미로운 훈풍이, 독일의 정복을 입은 수려한 그가, 멋진 머리칼을 휘날리며 달려온 그가, 가슴 아플 만치 절절한 내용을 떠들었다. “아아.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영원토록 그 이름만을 소리치고 싶다는 듯 그의 음성은 움켜쥔 팔 만큼이나 세었다. 내 이름이 아닌 양, 울림이 전혀 가시지 않는다. 그의 음성은 여전히 황홀했다. 격렬한 지휘를 할 때마저 냉정하다는 폰 카라얀은 사라지고 없다. 그는 그저 히스클리프 폰 뤠겐부르크였다. 그의 잊었던 향기가 파고들어온다. 들꽃처럼 싱싱하면서도 강렬한 그 만의 체향이! “오, 작은 사람. 여기 온 이상 당분간 나의 것이야. 놔 주지 않을 거야. 숲을 헤치고 날아 온 걸까! 너무 예뻐서 숨이 막혔어.” 히스! 낯선 타지에서 방어적으로 돌변했던 아까의 마음이 눈 녹듯 가셨다. 혜성은 그가 반가워서 그가 안는 대로 목에 팔을 두르며 기분 좋게 속삭였다. 사람들이 쳐다봐도 보이지 않았다. 히스가 기적처럼 다가온 현재가 반가웠다. 또다시 왕자님이 된 그가 좋았다. “…에이… 거짓말쟁이. 머리카락 염색한 것뿐인데.”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아… 수페리우스. 정말이야. 방금 죽을 뻔 했어.” “하하하하, 히스…….” 녹아들어갈 법 한 키스가 이어졌다. 그의 전체를 살피기도 전에, 히스는 아이의 머리칼과 뺨에 수도 없이 입을 맞추며 즐거워했다. 꾸준히 그를 기다리던 혜성이 히스의 뺨을 손바닥으로 밀어 낼 때가 되어서야 둘은 약간 떨어졌다. 그러나 다시 그의 품에 꼬옥 안기게 됐다. “진짜야. 그저께 차이코프스키의 야상곡을 지휘하는데도 음악이 너라서 슬프면서도 좋았어.” “??” 아이를 안은 채로 싱글싱글 웃으며 파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사람. 아름다운 백인의 청년은 혜성을 오른쪽 왼 쪽으로 적당히 움직이며 떠들었다. 이번에는 귓속말로 은밀한 것까지 당장 내뱉는다. “속도 변한 건 아닌지 이따가 옷 벗기고 검사해야겠는데….” “!” “오, 오, 그러지 마. 수페리우스. 하하하하, 귀여운 사람. 나를 때리지 마. 나는 아파.” “엄살쟁이…….” “짙은 밤을 연상시키는 블랙… 컬이 아름다워. 귀여운 다람쥐, 네 작은 몸이 오기까지 기다릴 수가 있어야지… 기다리다가 나는 그리움에 지쳐서 슬픔과 싸워야 했어….” “…히스….” “내가 돌봐줄 거야. 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그는 룸펜에서처럼 저의 식대로 낱낱이 뜨거움을 표현하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히스를 만난 순간부터 도공 대는 가슴보다 빠르게, 혜성의 뺨이 젖어들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에도 결코 흐르지 않던 야속한 눈물은 거침없이 떨어졌다. 히스… 이자벨 장이 나를 아프게 했어… 마음은 어린 아이처럼 떠들기도 했다. 히스는 아직 수페리우스의 눈물을 발견하지 못 한 눈치였다. 끌어안느라 바쁜 그는 세상을 다 얻은 왕자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하루만 머물다가 갈까? 예쁜 아가씨. 저기 마차를 준비했습니다.” “히스… 히스으….” “…!” 그런데 히스… 그녀의 이름은 단지 변명일 뿐이야…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던 혜성이 그의 친절함과 변함없는 그리움을 지켜보는 도중 눈물처럼 성대를 떨었다. 뒤늦게야 혜성이 엉망으로 울고 있음을 알아 챈 히스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그는 아이가 걱정되다 못 해 겁에 질렸다. “으흐… 으흐으으… 히스… 히스…….” “왜, 왜, 왜, 왜 울어! 누, 누구야! 누가 다치게 했어?” 나는 발트슈타인에 완전히 몰입하지 못했거든. 결국 내 탓이야. 마음은 정확한 것을 설명했지만 입술은 그의 이름만 연이어 떠들었다. 히스는 경련을 일으키듯 손을 떨며 아름다운 녹색의 눈동자를 분노했다. 그의 망막에 거침없이 화가 솟구쳤음을 누가 봐도 알았다. 그러나 혜성의 눈물이 걱정되어서 겁에 질린 면이 훨씬 컸다. “히스으… 으흑. 으흑. 히, 으흑. 히스으. 끼윽.” “기다려 수페리우스. 내가 어떤 놈들이 탑승했었는지 목록 표를…!” “아니야, 아, 니이, 야아. 으흑.” “!” “여, 기이, 있, 어어, 으흐으흑.” “내 가여운 수페리우스. 울지 마. 울지 마. 괘, 괜찮아? 어디 싫어?” 어디 싫어?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그는 당황하지 않는 척 굴었지만 혜성은 그가 내뱉는 이상한 문장들이 고마웠다. 프랑크푸르트까지 온 마당에, 사비나 교수님에 앞서 의외의 인물을 만난 마당에 찬 물을 끼얹기는 싫었다. 눈물 콧물 범벅이가 된 상태에서 수페리우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많은 눈물을 흘려 본 지도 오래되었다. “으흐, 으흐, 으흐, 바, 반가, 워, 서, 으흐으윽.” “흐바반가?” “…….” 히스가 답답하다는 듯, 발을 동동 굴리며 독일어로 뭐라고 지껄였다. 그러더니 총명한 눈을 빛내며 자상하게 웃어준다. 그리고는 더 할 나위 없이 멋진 미소를 지으며 손수건으로 코를 닦아 주었다. “아, 반가워서? 내가? 히스클리프가?” “…….” “바보구나.” “…….” 아이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흩뜨리던 그는 곧 눈물범벅인 입술에 짧은 입맞춤을 하더니, 강직한 팔을 어깨에 둘러 주었다. 전에는 익숙하기만 하던 이 팔이, 나는 그리웠던 거야……. “사랑스러워서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 그런데 보고 싶었다니. 나를 즐겁게 하고 또 괴롭히는 말을 하네.” “…….” “뮌헨이 도착지였다고? 뮌헨으로 우선 가자. 네 짐을 찾아야 하니까. …안아줄까?” “…아니. 네 머리카락이 이상해서 싫어.” “!” 그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정작 궁금한 것은 묻지도 못 한 혜성이 팩 토라진 척 굴자 히스가 다시 창백해졌다. 정말 이상해? 뭐라고? 그는 혜성을 껴안은 상태에서 걷는 내내 자기 머리카락을 들이대며 진지하게 계속 물었다. 그는 여전히 많은 이들을 열광케 하는 멋쟁이 사내였다. 혜성의 머리칼이 까맣게 돌아왔듯이, 히스의 파란 머리카락 역시 층층이 그러데이션을 이루도록 바뀌어서 찰랑였다. 매혹적인 그의 모든 것에 세상 모두가 반하도록 그 역시 변했다. 히스는 도망가려는 혜성을 단 숨에 허리 째 끌어안고 번쩍 올리더니 멋있다고 정정하라며 애걸복걸했다. 혜성은 모처럼만에 시원하게 웃으며 멋있다고 대답해 주었다. 발트슈타인, 그리고 감정, 터지지 않았던 눈물. 그러나 히스와 재회하는 순간 믿을 수 없을 만큼 지금도 나오는 눈물. “그래. 테레사가 부탁했고, 사비나 교수님도 너를 데려 오라더군. 나는 프랑크푸르트로 알았었는데?” 조각 같은 인상이 휘어지게 웃으며 대답하는 모습이 반가워서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아이의 도착지가 프랑크푸르트인줄로 오해하여 몇시간 먼저 도착해 있을라던 그가 믿기지 않는다. 히스는 곧 심각한 투로 눈물이 멈추는 약이 혹시 팔지도 모른다며 뒤따라온 비서에게 그것을 사오라고 지시했다. 비서가 당황하기도 전에 눈물을 뚝 그친 혜성이 파란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엉뚱한 그를 다그쳤다. 히스가 왜 편안한지 혜성은 그의 입에서 방금 전 거론된 테레사를 들으며 깨달았다. 그는 괜찮아. 평화의 글귀가 내면 곳곳에 정착한다. 사랑을 배제하고 봤을 때의 히스는, 음악적인 면에서 보면 테레사와 닮아 있었던 거야. 그래서 괜찮은 거야……. 히스, 네가 내 눈물의 정답이었구나. 히스, 너는 나의 룸펜이구나. “히스….” “?” “보고 싶었어….” “…….” “마…….” 많이 보고 싶었어… 라는 다음 말은 눈물멈추기약을 사오라고 비서와 실랑이를 하던 히스의 장난기 짙은 입술에 눌려서 할 수 없었다. 1월의 독일, 바람은 춥지 않고 서늘한 정도였다. 혜성은 조용히 눈을 감고 그가 소중하게 안는 대로 가만히 기대었다. 독일에 온 것이 비로소 실감났다. 배우기 위해 왔으니, 룸펜에서의 시간과는 다르겠지……. -발트슈타인 편 끝- Ich habe ein Kind gesehen…. 나는 한 소년을 봤다. wer haette das gedacht Dass es einmal soweit kommt……. 그 누가 생각인들 했으랴. 단번에 이 지경까지 오게 될 줄을……. 2악장 14편 룸펜에서 수페리우스를 보며 중얼거리던 히스. 표지 : 메일로 '나'님이 보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wgreene@naver.com 나의 세상에 공감해 주시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항상 앞으로도 영원히 행복하세요……. -화이트그린- 덧글 17개 엮인글 쓰기 /data17/2006/10/8/204/am-wgreene.jpg@nhn@29603@nhn@1@nhn@200@nhn@299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56~57편 /data17/2006/10/8/204/am-wgreene.jpg@nhn@29603@nhn@1@nhn@200@nhn@299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56~57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58편(유지 신, 또는 하데스) ▼ 다음글 - 2악장 55-3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58편(유지 신, 또는 하데스) 아마데우스 2악장 2006/10/10 16:07 http://blog.naver.com/wgreene/110009564659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1010 58편 업데) Amadeus 음악 : Maksim - Tonci Huljic - LeeLoos tune (하단 플레이클릭) Tonci Huljic: LeeLoos .. 2악장 58편 뮌헨의 성지를 지날 무렵, 밤하늘을 수놓았던 구름은 산산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달콤한 솜사탕처럼 향기가 맡아질 법 한 싸리 눈이 차창에 부딪혔다. 혜성은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차에 타는 때부터 쭉 잠들었던 자신을 소중하게 안아준 히스의 따스함이 느껴졌다. 아이는 반쯤 눈을 뜬 채로 창밖의 알싸한 것들을 지켜보았다. 긴 가로등불과 하얗게 날리는 가루들은 아름다웠다. 히터를 작동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밖의 쌀쌀함이 만져지는 것 같았다. 오, 너무나 아름다워서 가만히 있어도 이젠 고일 것 같은 눈물이 감수성을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히스는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알트 산?” 히스의 가슴에 등을 기댄 채로 반문하는 덕분에, 아이가 깬 것을 알았는지 그는 양 팔로 더 세게 껴안아준다. 희미한 웃음소리가 지났다. “오, 아니야.” “히스야. 방금 알트 산이랬잖아.” 히스야? 그는 자기 이름은 히스야가 아니라며 음습하게 위협했지만 그만큼 좋아하고 있었다. 그림 같은 풍경이 수차례 지날 때 히스는 독일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듯 녹색의 눈을 감더니 아이의 머리칼에 아름다운 입술을 누르며 대답했다. “수페리우스. 알트가 아니야. 하르츠, 하르츠 산.” “할츠? 왈츠?” “하하하하! 그래. 왈츠라고 하자. 하르츠는 알프스처럼 상업적인 분위기가 없는 곳이야, 수페리우스.” “……?” “네가 자는 동안, 나는 여러 이야기를 했는데… 하르츠 구절에서 깨어났구나.” “그랬어?” “그래… 수페리우스. 관광객들을 피해서 지내고 싶을 때면 가는 곳이지.” 히스는 기쁘게 자신의 이야기를 떠들어 주었다. 이야기 하는 중간중간 아이의 뺨에 입을 맞추었고 저의 뺨을 부벼왔다. 유럽 남자들은 원래 이렇게 스킨십이 대단한 걸까? 혜성은 견디다 못 해 일부러 기침소리를 여러 번 냈다. 히스는 혜성이 낯 뜨거워 하는 줄도 전혀 모르는 채, 스칸디나비아 반도 사람들과 독일인에게만 알려져 있다는 그 산맥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그는 수페리우스에게 하르츠 산맥에서 자신의 크로스컨트리 스키 실력을 보면 분명히 반할 것이라며 강조했다. 혜성은 그의 말을 못 들은 척 하며 자신은 눈썰매가 타고 싶다고 우겼다. 이에 발끈한 히스는 눈썰매 보다는 자신의 스키에 반하는 게 먼저라며 화를 냈다. 왜 여전히 너는 나의 가치에 대해서 무정하냐며 이럴 수는 없노라 줄줄이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독일 아마데우스로 향하는 이상 이제 곧 너는 나에게 반하게 될 거라며 자신했다. 둘이 옥신각신 하는 도중, 히스가 별안간 비서에게 차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허허벌판에서 차를 세우라니? 수페리우스가 춥다며 신경질을 부리자 히스는 자시의 코트를 걸쳐 주고는 훌쩍 차에서 내렸다. 순간 혜성의 눈이 흐려졌다. 한국의 아마데우스에서 겪었던 잠깐의 환희, 쾌락, 절망, 좌절, 분노, 이 모든것이 지금 내리는 눈처럼 하얗게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하룻밤의 꿈만 같아서 히스와 함께하는 현재, 여기는 룸펜이었다. “왜?” 약간 눈이 쌓인 한적한 도로 갓길에서 히스는 아이와 마주섰다. 둘의 사이에는 근사한 가로등이 반짝여서 그 부분만 대낮처럼 밝았다. 히스는 또랑또랑한 눈매로 자신을 치켜 올려보는 수페리우스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감미로운 투를 흘렸다. “너를 찬찬히 살피고 싶어.” “아…!” 맙소사. 가슴에 폭죽이 터진 양, 그의 한 마디에 볼이 달아올랐다. 뜨거운 그의 눈동자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제대로 보고 싶은 욕심에 잠깐 차를 세워야 했던 히스가 그다워서 좋았다. 히스는 자신의 마음이 찰 때 까지 오래도록 혜성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예쁜 눈, 귀여운 코… 모든 것을 다… 자세히 보고 싶어서.” “…….” 뮌헨의 겨울은 아름다웠다. 눈앞의 히스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혜성은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실로 오래간만의 투정이 기뻤다. 그들이 다시 차에 오르자 비서는 히스의 지시에 따라서 뮌헨 주변을 돌았다. 밤을 가르는 그들의 리무진은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수페리우스는 사비나 교수님께 가자고 졸랐다. 히스는 알았다고 대답해주는 대신 자상하게 웃으며 비서에게 아마데우스 별채로 서둘러 가라고 날카롭게 지시했다. 그와 오래 전 한 달 내내 체류했던 기억이 알싸하게 스쳤다. 보헤미안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슈바빙의 커다란 화이트 맨 동상을 지날 때, 히스는 저것이 곧 너를 잡아먹을 거라며 위협했었다. 그 때의 히스는 한 쪽 팔이 다쳤었다. 지금처럼 두 팔로 으스러지게 안아 주지 못했지만 그는 오히려 미안해했다. 슈바빙에서 가까웠던 영국정원, 따스한 햇살 아래 숨을 쉴 때 2층에서 들려오던 현악기들의 2중주 화음. 짜릿했던 봄은 이제 없지만, 칼칼한 겨울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한국만큼 춥지 않은 기분이어서 혜성은 애틋한 추억과 현재를 교차하는 게 쉬웠다. 궁전처럼 지어진 으리으리한 뮌헨 아마데우스가 나타났다. 숨이 막히도록 사람을 매료시키는 장엄함에 수페리우스는 마음이 경건해졌다. 장미 문보다 두 배는 넓은 지름의 원형 출구가 열렸다. 차는 미끄러지듯 들어갔고, 출구 다음으로 열린 민들레문 안으로 쭉 나아갔다. 혜성의 눈이 휘둥그레지기 무섭게 히스는 옆에서 이것저것을 참견했다. 저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동상이야. 한국 아마데우스로 치자면 분수대의 역할을 하지. 저 길로 쭉 빠지면 성당이 나와. 울보 수페리우스. 이쪽으로 고개를 돌려봐. 보이니, 나의 뮌헨 아마데우스가 자랑하는 오르페우스 관이. 저 곳은 불이 꺼질 때가 없단다. 레퀴엠이 하루에도 수 십 수 백 번씩 터져 나오지. 나의 사무실은 지금 가는 길에서 완전히 돌아야 돼.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자꾸만 부르고 싶은 귀여운 사람. 네가 오는 걸 환영한다며 하늘에서는 눈이 내린다. 그러지 마. 그렇다고 창 밖에 네 작은 손을 흔들어 주지 마. 나는 이상한 것에도 질투하잖아. 언제고 정식으로 찾아오겠다며 고집스레 들어서지 않았던 내부는 눈이 부셨다. 한국과 비슷하지만 달랐다. 바오르 신부님과 정당한 타협을 통해 밟는 지대는 꿈결 같았다. 길목마다 반짝이는 촛대 장식에서 노란 빛이 동그랗게 밤을 치장했다. 눈을 돌리는 족족 감탄에의 신음이 빠져나갔다. 수페리우스의 반응에 만족했는지 히스는 신나게 곳곳을 설명하며 어린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들의 차는 별채를 향하는 중이었다. 한국에 두 갈래 숲길이 있다면, 뮌헨에는 얼음연못이 길게 이어진 넓은 산책로가 있었다. 영롱한 연못은 팅커벨의 슈즈가 곳곳에 지난 것처럼 가는 줄이 우아하게 이어져 있었다. 연못에 비칠 정도로 가까운 건물들은 바로크 양식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지만 그래서 고귀한 멋이 돋보였다. “히스…….” “왜. 나쁜 다람쥐.” 가슴이 뜨겁다. 히스. 너는 나의 응어리 진 마음을 혹시 아니. 애송이였던 내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여기까지 와 있어. 신부님께 딱 한 번 화음을 경청하게 해 달라던 내가, 이자벨에게 가스펠송을 빼앗기고 시궁창 취급을 받던 내가, 감히 내가, 아플 정도로 아름다운 것을 눈으로 영혼으로 확인하는 거야. 내가 수페리우스라는 거야. 이 감동을 너는 이해 할 수 있겠니. 내 뜨거운 감각 마디마디를 껴안은 너는 혹시 알지 않을까. 독일의 테레사라 불리는 너와 친해져서 이곳을 지나다니. 나는 믿을 수 없어. “뮌헨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상… 얼음연못에 반사되는 하얀 달… 여긴… 천국일까. 너무나도… 멋진 곳이구나… 나는 꿈을 꾸는 기분이야…….” “그렇지? 그렇지? 그렇지?” “응. 그래서 눈물이 나와. 흐으…….” “!” 뭐라고! 흐으? 또 눈물이 나온다고! 약을 먹였는데도! 엄청난 말로 히스를 놀라게 한 혜성은 그가 소리치는 것에 상관없이 감동의 눈물을 조심스레 닦았다. 유지 신, 또는 하데스 사비나 교수님의 별채 응접실에서 히스는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그의 비서는 수페리우스의 짐을 찾아오기 위해 벌써 뮌헨 공항으로 출발해 있었다. 스페인의 페스티벌에 참고인으로서 반드시 가야 한다는 히스클리프가 아쉬워하는 혜성을 꽉 안아 주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속삭여 주었다. 이틀 후면 돌아 올 거라는 그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만 같아서 아이는 두려웠다. 슬펐다. 자신을 잠깐이라도 만나기 위해 그가 무리해서 프랑크푸르트에 온 걸 다시 깨달았다. 뭉클하니 가슴이 달아올랐지만 아이는 아닌 척 벽을 쳐다봤다. “여기서 기다리면 곧 교수님이 나오실 거다. 20분 정도 걸리신댔어.” “…….” “?” “히스. 꼭 가야 되는 거지?” “그럼.” 히스는 솔직하게 대답하며 자신을 이틀만 기다리라고 분명하게 설명했다. 왜 이런 때는 확실하게 구는 걸까. 사시사철 낭만으로 뒤덮일 줄 알았는데 나의 착각일까. 그래. 여긴 독일이지만 한국의 룸펜이 아니야. 예전처럼 나랑 하루 종일 함께 유유자적 지내던 히스는 이제 바쁜 몸인 걸. 그걸 알면서도 왜 서운하고 아쉬울까. 그가 다시 없어지려하자 이곳이 낯선 타지임이 새삼 느껴졌다. 무조건 옆에 있으면 든든하던 히스가 완전히 함께 일 수 없음이 확실시되었다. 동시에 자신이 관광 따위로 온 게 아님을 퍼뜩 생각해냈다. 그래. 사비나 교수님을 만난 뒤, 그녀에게서 배우고, 다가올 5월 콩 쿨을 대비해야지. 재회에서 싹 튼 애절한 감정을 겨우 물리며 수페리우스는 잘 가라고 인사를 건넸다. 히스는 활짝 편 꽃처럼 웃는 수페리우스의 굿바이에 큰 상처를 받았는지 쓸쓸하게 등을 돌렸다. “저렇게 웃으면서 인사하다니… 못된 다람쥐… 나는 벌써 보고싶은데…….” “빨리 가, 히스. 스페인인지 어딘지 가야 된다면서.” “!” 지금 갈 거라고 붙잡지나 말라며 발끈하던 히스는 결국 20분 뒤 나타나신 교수님께 인사를 여쭐 때까지 혜성과 함께 있었다. 수페리우스와 다정하게 껴안은 뒤 사비나는 히스에게 팔은 괜찮아졌는지 안부를 물었다. “팔?” 팔 이라는 것에 유독 민감해진 수페리우스가 히스를 노려보며 째진 소리로 묻자, 그는 곧 양 손을 저으며 눈을 크게 떴다. “오, 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팔?!”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팔!” 진땀을 흘리는 히스와 표독스레 구는 수페리우스가 귀여웠던 사비나는 포복절도했다. 그녀는 따뜻한 코코아를 건네며 부드럽게 설명을 덧붙였다. “히스가 얘기하지 않든? 얼마 전, 겨울 휴가 때 하르츠 산으로 스키 타러 갔다가 팔이 어긋날 뻔 했는데…….” “!” “…….” 스키 타는 모습에 반하지나 말라며 호언장담하던 아까 전의 히스가 휙 스쳤다. 히스는 그 길로 스페인 일정이 늦었다는 둥, 페스티벌 팸플릿을 두고 왔다는 둥, 여러 변명 거리를 내뱉으며 두 사람에게 급하게 작별 인사를 했다. 히스가 나가자 시끄러웠던 분위기는 얌전해졌다. 수페리우스는 정말은 찾아와야 했던 이유, 사비나 교수님을 보는 순간 자신이 한국에 그대로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통통한 사비나의 몸이 약간 마르게 변해 있었다. 수심 가득한 눈매는 전처럼 온화로웠다. 그녀는 곧 수페리우스를 이끌고 피아노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피아노가 있으니, 마음이 편해지지?” “…네…….” “낯선 곳에서도 너의 추억을 찾으면 얼마든지 있거든. 그러면 안심이 돼.” “맞아요!” “그렇지. 테레사가 출판한 책은 봤니?” “벌써 나왔나요?” “아니. 그 애가 소포를 부쳤어. 출판 직전에 나에게 자문을 구하려고 저가 모은 것들을 몇 개 보냈거든.” “아…….” 두 사람은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었다. 피아노 반대편의 모닥불 장작이 기분 좋게 타들어갔다. 발트슈타인을 실패했다는 것 즈음이야 사비나는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수페리우스가 진지하게 설명하는 그 때의 이야기를 처음처럼 경청했다. 사비나 역시 독일 아마데우스에서 레슨을 봐 주는 몇 명 인재를 알려 주었다. 그 중에서도 유독 한 인물만이 되풀이 될 때, 수페리우스는 궁금증을 못 이기고 자세히 물었다. “유지 신이요?” “그래. 히스가 계속 너와 룸펜에서 지냈다면… 지금쯤 히스의 자리는 유지 신이 차지했을 거야.” “…….” 사비나가 꽤 아끼는 듯한 이 곳 제자의 이름은 낯설지가 않았다. 혜성은 신속하게 머리를 굴려봤다. 히스의 이름만이 메아리치는 가운데, 그렇지! 정확한 기억력이 되살아났다. 그래. 그 독특한 이름을 가십에서 한 번 봤었다. 일본인 혹은 중국인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그 가십을 보고 동양인이라서 차별했다는 둥 말이 많았었는데… 그 외에는 기억에 없어. “이틀 후에 뮌헨 아마데우스의 미니 음악회에서 유지 신이 연주하는 피아노를 잘 들어보렴. 도움이 될 거다. 때가 좋구나. 유지신은 미니 음악회에 잘 나오지 않아. 따라서 그 애가 나올 때의 음악회는 리사이틀이나 다름없지. 음… 당장은 알려주지 않겠지만, 그에게도 테레사처럼 수식어가 붙으니까 음악을 들으면서 잘 생각해 보렴.” “은어의 손놀림과 같은… 그런 게 있는 사람이군요? 자기 스타일이 뚜렷해서…….” “그렇지.” 유지신에 대한 궁금증은 금 새 가셨다. 독일의 제자들에 대해 떠드는 사비나의 즐거운 마디마디가 문득 아파서였다. 행복해 하는 그녀를 보자 약간씩 조급해지는 감정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녀는 독일에 누구보다 잘 어울렸다. 독일 아마데우스 출신이라서 그럴까. 밧줄로 묶어서라도 그녀를 한국에 다시 모셔가고 싶다는 욕망이 번쩍였다. 한 참의 시간이 지나자 사비나는 수페리우스에게 진지한 제안을 꺼냈다. 바로, 독일의 아마데우스에서 몇 달 간 지내보는 게 어떠냐는 것이다. 이에 놀란 수페리우스는 곧바로 사양했다. “어째서?” 사비나는 독일 아마데우스에 온 것만으로도 흥분하는 혜성의 심리를 꿰뚫었지만, 모르는 척 물었다. 짐짓 망설이던 혜성은 두 번째 코코아를 들이키며 조용히 대답했다. “여기 학생이 아닌걸요. 저는 교수님께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요. 바오르 신부님은 기한을 고작 일주일 밖에 주지 않으셨지만, 그게 어디에요.” “…그리고?” “당당하게 들어가지 않을 바에야, 저는 다닐 수 없습니다. 한국 아마데우스를 선택했을 때도 같았어요. 물론, 내부를 구경한 지금의 저는 황홀하지만… 관광객에 불과하지요.” “…….” 수페리우스의 의견은 분명했다. 그러나 아이의 눈동자에 스치는 아쉬운 감정을 사비나는 보았다. 십 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녀는 학생들을 상대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피아노 앞에서 거짓을 말하는 학생과, 앞으로의 포부를 읊는데 스스로를 감추는 유형을 쉽게 분별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유능한 교수라며 여러 사람들이 흠앙하는 게 아닐까. 사비나는 수페리우스의 이야기를 모두 이해한다며 어머니와 같은 미소를 지었다. “너는 관광객이 아니다, 수페리우스.” “…….” “네 말대로 너는 너의 교수인 나를 만나러 이곳까지 왔으니, 아마데우스 학생이다. 이곳도 아마데우스니까.” “!” “당당하다는 말은 즉, 정식으로 절차를 밟으면 괜찮다는 거 아니겠니?” “네… 네!” 수페리우스의 영혼이 희망으로 펄럭일 무렵, 사비나는 정곡을 찌르며 아이의 사슬을 풀어 주었다. “그럼, 다녀라.” “어… 하지만 어떻게…….” “구실은 얼마든지 있어. 교환 학생이면 당당한 구실 아니더냐. 일주일 동안 네가 독일에 머무는 것을 한국에서는 필시 교환 학생이라고 사유를 적을 것이다. 그 기간을 두 달로 늘리는 거야.” “!” 교환 학생! 전혀 생각지도 못 한 단어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혜성은 이곳에 오길 잘 했다는 생각에 앞서 그녀의 음성이 믿기지 않았다. 여기에 온 것만으로도, 당신을 만난 것만으로도 나는 황홀합니다. 표정은 솔직한 마음을 전했지만 사비나 교수는 더 큰 것을 확실하게 해 주려는 거다. 수페리우스의 볼을 타고 기쁨의 눈물이 흘렀다. 5월 콩 쿨, 이제는 그것이 처음처럼 막연하고 두렵지만은 않다. 사비나와의 대화가 거의 끝날 무렵, 걸어서라도 스페인으로 갈 것처럼 굴었던 히스가 창백한 낯으로 돌아왔다.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그는 문턱에 기댄 채 수페리우스를 여러 번 톡 쏘아보았다. 시선은 천천히 풀어졌는데, 마치 여기에 수페리우스가 계속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듯 묘했다. 별안간 닥친 히스 덕분에 놀란 사비나와 혜성은 그가 묵묵히 그들의 옆 자리에 앉는 것을 기이하게 응시했다. 히스가 왜 돌아왔지? 혜성이 뭐라고 말을 하려던 찰나, 그는 피아노 뚜껑을 열더니 괜스레 건반을 누르며 딴청을 부렸다. 딴. 딴. 딴. 히스의 야생마와 같은 행동에 혀를 차면서도 지그시 웃는 사비나는 정곡을 찌르는 문장을 읊는다. “수페리우스가 여기 온 게 믿기지 않지, 히스클리프?” “!” 따단- 건반을 누르던 히스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서 확인하러 다시 왔구나?” “…….” 히스의 안면이 이제껏 봤던 것을 다 합쳐도 좋을 만큼 붉어졌다. 펑! 하고 폭발할 것처럼 그의 전체가 붉은 폭탄이 되었다. 동시에 혜성의 볼도 붉어져서 히스와 비슷해졌다. 교환 학생으로 있게 해 준다는 사비나의 약속은 거짓이 아니었다. 주말의 음악회가 끝난 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정식으로 수업이며 레슨을 받으라는 통보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주말 까지는 사비나의 별채에서 지내기로 한 수페리우스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방방 뛰었다. 아이는 반듯한 예식 복을 입고 조심스레 밖으로 나갔다. 밤 새 도록 내렸던 눈이 거의 녹아 있었다. 웅덩이처럼 곳곳에 물이 고인 흔적은 보는 것만으로도 추웠다. 뮌헨 아마데우스 내부에는 여러 동상들이 즐비했다. 역사가 숨을 쉬는 가운데 기품 있는 건물들은 층이 아주 높았는데, 길을 지나다니는 학생들과 아주 잘 어울렸다. 뮌헨의 학생들은 한국 학생들보다 키가 조금씩 다 크고 호리호리했다. 그들은 혜성을 알아보는 눈치였지만 대다수는 모르는 척 스윽 지나치기 마련이었다. 한국 학생들이 처음 혜성을 무시했듯이 시건방진 투를 내뱉거나, 부러 사나운 투로 지껄이지도 않았다. 부드럽게 다가와서 인사를 건네지도 않았다. 그들은 혜성이 있는 줄도 모르겠다는 듯 바쁘게 움직이며 무시했다. 만약 무시가 아니라 할지라도 낯선 곳의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혜성에게는 차갑게 느껴질 뿐이었다. 히스가 만들어준 약도를 따라서 빙글빙글 돌아다니던 혜성은 순간, 길을 잊어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럴 수가. 여기가 저기 같고, 저기가 여기 같다. 그림 실력이 없는 히스가 삐뚤삐뚤하게 적어 놓은 한국어와 약도는 없느니만 못하다. 독일어로 적혀 있는 이정표를 한 참 이나 뚫어지게 살펴보던 혜성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바로 옆에 있는 복도 길을 걸었다. 어디가 어딘 줄 알아야 제대로 감상할 텐데……. 그래도 음악은 어느 건물을 지나쳐도 들리는 구나……. 수페리우스는 다른 공간이라 할지라도 음악이 있으면 안심이 되었다. 눈부신 태양과, 옅게 지지대는 현의 소리들이 아름다웠다. 건물과 건물을 이어주는 밖의 복도는 힘 있는 기둥들이 받치고 있었다. 동그란 천정 지붕이 덮인 1층의 외부 복도를 하염없이 걸어 다니며 혜성은 자신을 힐끔대는 외국 학생들에게 살며시 웃어보였다. 몇 명은 같이 웃어주지만, 또 몇 명은 휙 하고 지나친다. 도도한 콧대는 어딜 가나 비슷하구나. 복도 끝에 다 달을 무렵, 현관으로 이어진 곳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오, 이럴 수가! 아이는 향수처럼 당겨오는 반가움에 막 나타난 까만 머리의 옷깃을 쥐었다. 자신처럼 까만 머리칼, 그리고 동양인 특유의 분위기와 피부색을 지닌 사람이어서 저도 모르게 잡은 것이다. “아…….” “…….” 유일하게 발견한 동양인이기에 반갑긴 했지만, 수페리우스는 순간 그가 한국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서서 머뭇거렸다. 일본인일지도 몰라. 혹시 중국 애는 아닐까? 나도 동양 사람인데 왜 반가워하는 표정이 아니지? “…….” “…….” 서늘하게 응시하는 표정은 메말라 있었다. 신경질을 부리거나 자신처럼 감동하는 무엇도 없이 절대적으로 메마른 표정이 맞은편에 있었다. 키는 이 쪽 동양인이 훨씬 컸지만 고압적인 분위기는 독일 애들보다 심했다. 아, 괜히 잡았나보다- 라고 자책하면서도 혜성은 어색하게 말문을 열었다. “아, 안녕.” “…….” 이크. 한국애가 아닌가보다! 낭패다. 너무 어색한 인사였는지 혜성의 안녕 이라는 말에 더더욱 메마른 표정으로 변한 그는 유령처럼 스윽 지나쳤다. 이럴 수가. 별채 위치를 물어보려고 했는데 엉뚱한 녀석에게 안녕 이라는 말만 건네고 끝이라니. 종이를 움켜쥐며 콩콩 뛰는 가슴을 붙들고 있는 혜성의 앞으로 방금 지나쳤던 그가 다시 나타났다. “韓?の しゅぺ りうす?(한국의 수페리우스?)” 그리고, 사실은 나 사람이야- 하듯 얼어붙었던 입을 여는 것이다. 한국말이 아니라는 것에 당황한 혜성이 보스턴에서 그랬던 것처럼 파든? 파든? 하고 묻자, 그는 한동안 아이를 쭉 쳐다만 봤다. 그리고 이상하다 느낄 만치 상기되어 진지한 투로 물어 왔다. “Nimmst Du Klavierunterricht?(피아노 수업을 듣는가?)” “…….” 이번에는 독일 말이다. 뭐라고 물어보는 것 같은데… 그래. 지금 말이 난해해서 아까 전 게 생각났다. 슈뻬리우스? 수페리우스. 발음을 그 닥 굴리지 않아서 나를 물어 보는 것 같긴 한데… 모르겠어. 혜성이 참으로 난감하면서도 미안하다는 듯 한 발 뒤로 물러나자, 그는 느닷없이 아이의 팔을 휙 잡아당겼다. “으헉!” “…….” “왜, 왜 이러세요!” “…….” 진심으로 당황한 혜성이 양 팔을 파닥거리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팔목을 놔 주지 않았다. 진중한 그의 두 눈은 혜성의 양 손가락 모두를 샅샅이 훑으며 골몰했다. 그러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참담한 낯이 되었다가, 처음처럼 메마르게 표정이 돌아갔다. 이상한 사람이다. 동양인이라고 반가워했던 아까 전으로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의 옷을 잡지 않았을 텐데……. 내가 한국의, 테레사의 수페리우스임을 한 번에 알았나봐. 아니, 여기 학생들이 전부다 아는 눈치인데… 예식 복과 생김새 때문이겠지. 근데 얘는 왜 이러는 걸까. 무섭게 생겨가지고……. “…….” “…….” 묵묵히 혜성의 손가락을, 특히 지문 쪽을 살펴보던 그는 곧 팔을 놔 주었다. 화도 웃음도 아닌 메마른 표정이 다시금 무감동한 입을 열었다. “たこがあまりないね.(굳은살이 별로 없군.)” “…?” 일본말이다! 적어도 이때의 혜성이 알 만한 정보는 그것이 다였다. 무심한 어투는 연이어 터졌다. “ピアニストの手ではない.(피아니스트의 손이 아니야.)” “??” “それとも, 整える中か….(아니면, 다듬는 중인가…)” “저기… 파든?” “呼吸するのが惜しくなる位に練習して見た手と握手するように出?ると思った.(숨 쉬는 게 아까워질 정도로 연습 해 본 손과 악수 할 줄 알았다.)” “아… 뭐라는 거람… 저기요. 저기요!” “…….” 그는 매우 상심한 눈치였다. 메마른 표정으로 위장해도 당황한 수페리우스에게는 그것이 보였다. 자신의 손바닥을 면밀히 살피다가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멋대로 낙심하면 어쩌자는 걸까. 혜성이 참으로 답답하다는 듯 손짓 발짓으로 동동거리자 그것을 지그시 내려 보던 동양의 그는, 인위적으로 딱 한 번 싱긋 웃더니 언제 말을 걸었냐는 듯 쌀쌀맞게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사람이 사비나가 얘기한 유지 신 이었음을 아이는 다음날 연주회에서 벼락에 꽂히듯, 알았다. 뮌헨의 뜨거운 겨울, 그것은 이제 막 펼쳐지고 있었다. 메일로 '나'님이 주신 멋진 표지. 고맙습니다.(감동적...) 한국의 수페리우스? 피아니스트의 손이 아니야. 숨 쉬는 게 아까워질 정도로 연습해 본 손과 악수 할 줄 알았다. - 유지 신 - wgreene@naver.com 유지신에 대한 것은 아마데우스 가십에 언급된 적 있습니다. ^^ 75편 완결이라더니 느닷없이 뮌헨? 이러시는건 아닌지요. 자연스럽게 정해진 순서를 타는 중이니 걱정 마시기를..^^ 아마데우스에 주시는 댓글, 언제나처럼 고맙습니다.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화이트그린- 덧글 16개 엮인글 쓰기 /data20/2006/10/10/79/1-wgreene.jpg@nhn@127049@nhn@1@nhn@333@nhn@500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58편(유지 신, 또는 하데스) /data20/2006/10/10/79/1-wgreene.jpg@nhn@127049@nhn@1@nhn@333@nhn@500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58편(유지 신, 또는 하데스) 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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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없기 때문에 혜성은 저 혼자 별세계에 왔다는 착각에 빠져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히스의 별채는 그의 눈동자색인 진녹과 암회색이 어우러지게 칠해 있었다. 다시 말 해, 주변 별채들 중 저의 것만 멋있는 척 튀었다. 그 다운 짓이었다. 아이는 테레사의 별채를 몰래 구경했던 시절이 떠올라서 잠시 미소 지었다. 응접실이 한 눈에 비치는 테라스에 껑충 오르자 눈꽃이 맺힌 창이 호흡에 닿았다. 눈꽃은 호흡이 닿는 순간 이파리를 떨리웠다. 섬세한 물줄기로 변한 과거의 눈꽃이 주르륵 미끄러질 때 혜성이 방향을 따라가려는지 점점 허리를 숙였다. 용감한 물줄기는 창의 중간에 맺힌 채 떨어지지 않았다. 혜성은 입김으로 줄기를 건드렸다. 톡! 하는 소리가 아이에게는 분명히 스쳤다. 처음보다 빠른 속도로 물기는 유리창에 미끄러졌다. 얼어붙은 눈 꽃 중에서 유일하게 녹은 녀석이다. 혜성이 그 장면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을 때, 조심조심 누군가가 뒤로 다가오더니 덥석 껴안았다. 이크! 사색이 된 혜성이 발버둥을 치자 감미로운 음성이 예쁜 다람쥐… 라며 속삭여왔다. “히스?” 그에게 사로잡힌 바람에 숨이 막힌 혜성이 가까스로 이름을 불렀다. 서늘한 바람이 그들 주변에 맴돌았지만 결국은 따뜻하게 터졌다. 스페인에서 페스티벌 개막을 치루는 즉시 돌아온 히스의 음성은 약간 갈라져 있었다. 피곤한 그였지만 수페리우스가 있다는 현재가 행복했는지 갈라진 소리는 활력이 넘쳤다. “사비나 교수님이 그러시더군. 히스가 보고 싶어서 밤 새 시름하던 네가 여기 있다고.” 웃기지 마! 라고 반박하려던 혜성은 파리하게 질린 채 애원했다. 몸을 사리는 순결한 처녀처럼 가녀리게 호흡했다. 그의 앞에서는 어려진다. “…내려줘.” “…….” 그는 혜성의 자그마한 뒤통수에 입을 맞추며 고개를 젓더니 아름다운 눈을 감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어… 그는 달콤하게 속삭였지만 혜성은 숨이 막혔다. 뒤에서 허리를 안아 들어서 저의 품에 꽉 조인 히스 때문에 혜성의 두 발은 공중에서 대롱거렸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찬란한 오후의 빛이 부끄러워 할 만치 쭉 뻗어나가 하나로 뭉쳐 있었다. 수페리우스의 입가로 가쁜 숨이 빠져나간다. “내려줘 히스… 아파….” “!” 한없이 상냥할 줄 알았던 히스의 눈이 무섭게 번쩍 뜨였다. “아….” “오, 그래. 미안해 수페리우스. 아파? 아파?” 히스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곧 힘들어하는 아이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약간 창백해진 그의 안면은 수페리우스를 걱정하면서도 반가움에 상기되어 있었다. 작은 입술이 뭐라고 떠들기 전에 그는 정면으로 푹 껴안았다. 그의 아파? 라는 빠른 발음은 프랑스어처럼 거칠면서도 공처럼 동그랬다. 아파? 수페리우스. 하하하, 안아줘서 아파? 조금만 다른 생각에 빠지면 부드러운 불어로 들리는 음성이 있다. 히스는 혜성을 품에 안은 채로 행복하게 속삭였다. “샤워한 뒤에 너를 찾아갈까 했는데, 귀여운 다람쥐가 내 집에 있었구나.” “샤워?” 저런 농담조를 아무렇지 않게, 매우 당연하다는 듯 내뱉는 히스에게 도라 질을 치며 혜성이 냉큼 턱을 치켜 올렸다. 바로 히스의 입맞춤이 이어졌다. “키스 해 달라는 거 아니었어?” 신경질을 부리는 혜성이 도리어 궁금하다며, 히스는 시무룩하게 물었다. 둘은 곧 응접실로 들어갔다. 입맞춤을 하는 히스의 턱은 평소와 다르게 가실 가실하고 따가웠다. 혜성은 입 주변을 문지르며 히스에게 따졌다. 네 얼굴에 오늘 가시가 생겼노라 놀리듯이 따졌다. 그러자 히스는 순간 창백해지더니 거울 앞으로 달려가서 한 참 동안 뚫어지게 응시했다. “거울이 참 많네…….” 아이가 중얼거리며 뒤따라가자 히스는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샤프하게 뒤를 돌았다. “면도를 생략해서 그런 거야. 샤워하면서 하려고 했지.” “…….” “수페리우스는 열 살도 안 된 꼬마처럼 수염이 잘 나지 않는구나?” “…털 쟁이….” “응? 그게 뭔데?” “…응… 좋은 뜻이야.” 털 쟁이의 뜻을 고민하던 히스는 곧 그것을 유추하더니 펄펄 뛰었다. 자기는 털쟁이가 아니라면서 그런 소릴 들어 본 게 처음이라며 화를 냈다. 멋쟁이의 이미지에 금이 가는 걸까? 히스는 일부러 면도와 샤워를 뒤로 미루더니 고집스레 수페리우스와 쌀쌀한 밖으로 나갔다. 왜 면도를 안 하느냐 혜성이 묻자, 시큰둥한 표정으로 운전석에 탄 히스는, 자기는 면도를 안 해도 멋있다는 대답을 하며 차를 후진시켰다. 두 사람은 저녁에 있을 음악회를 대비해서 잠깐의 스릴있는 데이트를 즐겼다. 꼭 나가야 돼? 라고 혜성이 귀찮은 듯 묻자 히스는 당당하게 받아쳤었다. 현재를 즐겨야 돼. 현재에 충실해야 돼 수페리우스. 그래야지 미래가 아름다운 거야. 그는 단호하면서도 상냥했다. 민들레문을 빠져나간 히스의 차는 슈바빙으로 향했다. 둘은 주변을 걸어다니며 관광객들 사이에서 열심인 화가들을 구경했다. 프랑스의 몽마르뜨 언덕에 즐비한 화가들 처럼 자유로운 사상과 철학을 지닌 이들이 붓을 놀리고 있었다. 가끔 거리의 바이올린 악사가 휙 스쳐 지나갔다. 혜성은 신이 나서 히스의 손에 끌려 다니면서도 쉴 새 없이 고개를 돌렸다. “수페리우스? 이제 돌아가야지.” “왜? 조금 더 있자.” 다른 화백들과는 달리, 홀로 동떨어진 늙은 노파의 이젤 도화지에는 크로키가 펼쳐지고 있었다. 혜성은 그의 것을 열심히 지켜보며 그가 손을 움직이는대로 휙휙 동공을 움직였다. 화백의 연필은 슈바빙의 사람들을 표현하는 중이었다. 때로는 엉엉 우는 꼬마 아이를 그렸고, 그 아이를 스쳐 지나는 삐에로를 그렸다. 그림이 완성되기도 전에 다른 것을 치고 들어간다. 그림 전체가 크로키라는 것에 적잖이 감명받은 혜성이 자꾸 돌아가자고 조르는 히스를 휙 노려봤다. “왜 자꾸 가자고 그래? 온 지 얼마 안됐잖아.” “이런, 수페리우스.” “?” “얼른 돌아가서 음악회에 갈 준비를 해야지.” “준비? 너도 무대에서 뭘 하니?” 아차 싶어진 혜성이 미안한 기색으로 묻자, 그는 엄지 손가락으로 당연하다는 듯 자기 가슴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하늘이 질투할 만치 출렁이는 바다색의 머리칼, 이미 숱한 사람들이 그를 반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살아서 움직이는 그는, 거리의 레퀴엠이었다. 노파의 크로키였다. “아니. 샤워도 해야 되고, 무엇보다도 나를 치장하고 준비시켜야 되잖아. 원래 어딜 가든 멋지게 하고 다녀야 되는 거야.” “…….” 아이의 작은 손을 부드럽게 쥐고 당기면서 그는 살짝 윙크했다. “그래야지 행운의 여신이 따라 다니는 거다. 후줄근한 사람한테는 여신이 반하지 않는 법이거든.” “!” 화가보다 더 인상적인 말을 하는 히스에게 백기를 든 혜성은 가볍게 웃었다. 그는 어린 아이를 돌보는 아버지처럼, 저의 자상한 손을 단 한 번도 혜성에게서 풀지 않았다. 오히려 놓칠까봐 잠깐만 끊어지면 길길이 날뛰었다. 돌아가는 길은 처음보다 빨랐다. 핸들을 한 팔로 휙- 돌리는 히스의 운전은 거칠면서도 쿨 했다. 나머지 팔은 역시나 수페리우스의 손에 깍지를 끼인 상태였다. 그는 차선 위반 따위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혜성은 방금 생각난 이상한 것을 물었다. “스페인에서는 어땠어?” “아… 별로. 수페리우스만 계속 생각나서 재미 없었어.” 그들의 앞에 불쑥 끼어든 차 때문에 급브레이크를 밟으면서도 히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유유히 대답했다. “예쁜 사람들 많이 봤겠다. 근사한 사람들도.” “그랬던가…?” 그랬던가? 그랬던가 라니. 다들 너를 반한 눈으로 쳐다보잖아. 음악에 반하고, 지휘에 반하고, 너에게 반하잖아. 그건 당연하잖아. 어떻게 그런 무심한 대답을 하니? 아니, 나는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지? 혜성은 그 뒤로 꾸욱 입을 다물었다. 히스는 페스티벌에서 치러진 음악행사를 떠들며 몹시 즐거워했다. 그들은 다시 처음의 별채로 돌아왔다. 혜성은 그 때 까지도 말이 없었지만 히스는 춥다고 호들갑을 떨며 구두를 벗어던졌다. 그러나 응접실에서 벗는 건 구두만이 아니었다. 아이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전혀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훌러덩 훌러덩 옷을 벗었기 때문이다. 왜 저런대! 낯 뜨거운 쪽은 오히려 혜성이었다. 아이는 그가 벗어서 응접실 바닥에 흐트린 옷가지를 발로 차며 혀를 날름 내밀었다. “네 머리카락 보고 신기하다면서 다가온 사람도 많았지?” “…머리카락이? 왜?” 아까의 화재를 다시 꺼내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요상한 마음은 입술을 떠들게 했다. 혜성은 도라 질을 치더니 다시 혀를 내밀고 삐죽거렸다. “아니야.” “…….” “!” 웃옷을 막 벗어낸 뒤 혜성을 내려 보던 히스는 싱긋 웃더니, 아이가 놀리듯이 내민 혀를 엄지와 검지로 살짝 꼬집었다. 화들짝 놀란 혜성의 볼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후후후….” “히스! 죽을래!” 샤워실로 달아나는 히스를 얼떨결에 따라가면서 혜성은 생각했다. 방금 질문들을 되돌아보니, 수페리우스 다운 짓이 아니었다는 게 걸렸다. 역시. 질문이 너무 힐문조였나? 혜성은 더 이상 스페인 페스티벌에 대한 것을 따지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샤워부스의 유리문을 마악 닫는 히스는 혜성의 소소한 질문들이 기뻤던 게 틀림없었다. 그는 킥킥대고 웃더니 불쑥 얼굴을 내밀고 마음 그대로 중얼거렸기 때문이다. “기쁘다. 수페리우스가 드디어 나에게 질투…윽. 수페리우스. 화내지 마. 예쁜 사람. 귀여운 이마에 줄이 생겼… 왜,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야? 잘못 했어. 잘못 했어.” 찰싹! 찰싹! 부스 밖으로 드러난 히스의 팔을 때리는 수페리우스를 가볍게 막으면서 히스가 봐달라는 듯 애원했다. 촉촉하게 젖어 들어가는 푸른 머리칼 위로 수증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확 뺨이 달아오른 혜성은 샤워 잘 하라는 이상한 안부를 남기더니 응접실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옆에 있으라고 오두방정을 떠는 히스 때문에 아이는 부스 밖에 쭈그려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움직이면 어떻게 안 히스가 벌컥 부스 도어를 박차고 젖은 채로 뛰어 나왔기 때문이다. 바보, 바보 같은 히스! 탄탄하고 늘씬한 그의 맨 살에 놀란 혜성이 주변의 비누 따위를 던지며 다시 들어가라고 고함을 칠 때마다, 그는 한 번 만 더 새 비누를 던지면 물을 끼얹을 거라며 되려 성질을 부렸다. 샤워를 하는 건지 전쟁을 치루는지 모를 시간이 약간 잠잠해지자 혜성이 슈바빙 에서 보았던 크로키 화가를 중얼거렸다. 순간, 번쩍이는 뭔가가 아이의 내면에 스쳤다. 수증기로 붉어진 양 쪽 뺨을 치면서 수페리우스는 그 생각이 떠나기 전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한국에서 전체적인 내 상태는 돌이켜보면, 크로키와 같아.” “크로키?” 머리칼에 샴푸를 골고루 묻히던 히스가 크게 묻자 혜성 역시 고함을 치며 대답했다. 물줄기가 자자해진 상황이라서 그런지 혜성의 작은 소리들마저 히스에게는 모두 전해졌다. 슈바빙의 크로키, 그것을 통해 연상해 낸 것은 한국의 자기 자신이었다. 수페리우스의 목울대가 약간 떨리기 시작했다. 총명하게 눈이 빛날 때, 밤하늘이 없어도 별이 반짝인다. “완성되기 전에 움직이고, 또 움직이는 것… 화백이 급하게 따라붙으며… 기다려! 라고 소리치는 기분이었지.” “하하하하… 독일은 어떤데?” “글쎄에… 독일은… 휴식이 아닐까.” “월요일부터 바쁠 텐데 어떻게 휴식이야? 아. 아. 수페리우스! 입에 샴푸가 들어갔어! 얼른 키스해 줘! 이리 들어 와!” “윽.” 호시탐탐 혜성을 노리던 히스는 돌연 오두방정을 떨었다. 혜성은 열 번 째의 새 비누를 그에게 던지고 휙 나가버렸다. “나쁜 다람쥐….” 삼십분이 넘도록 샤워를 했던 히스는 온 몸이 오골 거리는 상태에서 서운한 투를 중얼거리며 나타났다. 응접실 소파에 앉아있는 혜성을 강하게 노려보면서 그는 약간 떨어진 위치에 섰다. 저게 또 왜 저러지. 불안해진 혜성이 히스처럼 똑같이 노려볼 때, 그는 피식 웃더니 머리카락을 탈탈탈 털기 시작했다. 아, 다행이다. 난 또… 금 새 붉어진 볼 못지않게 덜컹 뛰었던 심장을 추스르며 수페리우스는 약간 시선을 풀었다. 히스의 허리에는 흰 타월이 둘러져 있었다. 물기가 고여 있는 몸 주변 주변은 붉은 사과처럼 탐스러웠다. 그의 농밀한 시선에 몸 둘 바를 모르는 쪽은 여전히 혜성이었다. “…….” “…….” 혜성이 안절부절 못 하는 표정을 몽땅 빨아들이듯 쳐다보며 히스는 머리를 말렸다. 탁! 타탁! 큰 손놀림으로 길게 젖어있는 파란 머리칼을 친 뒤, 푸드드- 야생의 망아지마냥 목을 휘두른다. 그 때 마다 그의 팔과 가슴의 근육은 움찔거렸다. 시선은 정확하게 혜성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 꿀꺽 침을 삼킨 혜성은, 샤워 실에서 했던 대화를, 크로키로 시작했던 것을 마저 잇기로 결심했다. 이크. 히스가 허리에 두른 타올을 풀려고 하자 혜성은 서둘러 중요한 척 입을 열었다. “우리 나이 때는 움직이고 배우는 게 휴식이야….” “…….” 다행이다. 히스가 겨우 시선을 다른 쪽에 돌린다. 다른 쪽 이라봤자 옆에 있는 거울 보면서 머리에 뭘 바르는 게 다였지만. “잘 모르겠는데, 그런 것 같아. 정작 가만히 쉴 때는 뒤쳐질까봐 곧잘 초조해지거든. 그렇다면, 그건 휴식이 아니지. 속도! 그 속에서 상념은 사라져. 따라서, 휴식은 움직일 때 동시 발생 돼.” “?” 알몸으로 이곳저곳을 걸어 다니며 옷을 챙겨 입던 히스는 깔끔한 예식 복을 다 걸치고서도 키 거울 앞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딱 한 번, 속도가 왜 휴식이냐면서 혜성을 향해 턱짓을 하며 물었을 뿐이었다. 아이는 옅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히스. 훗날 죽으면 지겹도록 잠만 자잖아?” “…….” “…왜?” 어깨를 으쓱하는 혜성에 반 해, 히스는 방금 구절에 진중한 뭔가를 느꼈는지 성큼성큼 걸어왔다. 이크. 이번엔 또 뭐지? 발마사지라도 하는 건가! 그가 소파 옆자리에 앉는 즉시 불에 대인 듯 벌떡 일어난 혜성은 자동적으로 멀리 떨어져서 섰다. 벽에 등을 기댈 때, 근사한 그의 전체가 믿어지지 않아서 꿀~꺽 침이 또 삼켜졌다. “……?” 쟤가 정말 왜 저럴까. 여긴 룸펜의 다락방이 아닌데…? 히스는 혜성이 서 있는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조각상의 움직임처럼 기묘하게 다가오는 느낌이 있다. 히스는 눈을 접으며 활짝 웃더니 달콤하게 속삭였다. “네 이론이 맞다면, 나는 지금 휴식이 필요해.” “…?” “이리 와.” “…….” 두근. 철갑으로 위장하려던 심장은 결국 바닥을 뒹굴었다. 실로 매혹적인 히스의 움직임과 목소리는 당기지 않아도 블랙홀처럼 힘이 세었다. 목석처럼 굳은 채 어찌 할 바 몰라 하는 혜성이 귀여웠던 히스는 시원하게 웃더니 다시 팔을 내밀고 오라는 시늉을 했다. 정갈하게 입은 뮌헨의 예식 복은 벗었던 아까 와 겹쳐져서 그를 더 야성적으로 끌리게 했다. “이리 와, 나쁜 다람쥐.” “…….” 리드미컬한 목소리는 강인한 팔놀림으로 지휘하는 것과 같아서 결국은 그가 원하는 대로 하게 된다. 목소리에 줄이 달린 걸까. 감미로워서, 거부하기 힘든 매력의 줄이 온 몸에 감겨있다. 자연스럽게 이끌려 걸어가는 혜성의 표정은 술에 취한 것처럼 풀려 있었다. 혜성이 곧 다리를 벌린 채 소파에 앉아있는 그의 앞에 서자, 그는 살포시 아이를 껴안았다. 긴 팔을 두르고 혜성을 다리 사이로 좀 더 당기는 히스의 몸은 뜨거웠다. 그의 뜨거운 마음 때문에 옷 아래의 가려진 세포가 얼마나 열정적인지, 혜성은 느꼈다. 수페리우스의 납작한 가슴에 뺨을 기댄 히스는 긴 숨을 내쉬더니 감미로운 투를 흘렸다. “네가 없으면 나는 불안해. 너를 향한 속도를 체험할 때, 나는 짐승처럼 본능으로 으르렁대지.” “!” 속도. 방금 전에 했던 나의 말을 곧바로 인용하는 거야…! 혜성의 낯이 금 새 달아올랐다. 세상 전체를 지휘하는 입술이 있다. 그 어떤 악기도 그의 지휘에서는 결국 솔직한 화음을 터뜨린다. “너를 만지면 상념이 사라져, 나쁜 다람쥐. 네가 또 숲으로 도망 갈까봐 나는 불안해.” “…….” 당연하게 뒤따르는 심장의 변화. 추락하다가도 날개를 다는 심장은 여러 곳에서 크게 울림을 반복한다. 혜성의 무릎이 그의 음성에 풀려서 휘청 이자, 히스는 더 세게 껴안았다. “히스클리프에게 이런 소릴 듣다니, 네가 처음이고 마지막이다. 나쁜 다람쥐는 밀림의 왕 보다 힘이 세지. 그래서 네 앞에서는 순한 양이지만, 지금처럼 휴식이 필요할 땐 야생마가 된다.” “…….” 그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사람도 있을까. 혜성은 이 순간마저도 궁금해졌다. “어때. 수페리우스. 너는 나의 휴식이 맞지? 주장 해 봐. 이론을 펼쳐 봐. 네 사랑스러운 머리로 생각해서 아까처럼 펼쳐 봐. 나는 또 지금처럼 받아 칠 테니…….” “에이… 엉터리.”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혜성은 히스의 머리카락을 심술궂게 잡아당기며 몸을 움직였다. 아이의 반응이 만족스러웠던 히스는 승리자의 눈동자로서 당당하게 그윽한 내용을 꺼냈다. 그의 팔이 벌써부터 혜성의 얇은 블라우스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따뜻한 손바닥이 얇은 등과 허리를 감싸자 수페리우스는 숨을 참아야 했다. “수페리우스. 우리… 할까…? 내 사랑스러운…….” “!” 할까?! 번쩍 고개를 치켜든 혜성은 양 손바닥으로 히스의 얼굴 전체를 마구 뭉게더니 밀기 시작했다. “윽. 수페리우스?” 그의 숨 소리가 느끼기에도 거칠다 싶어질 때, 혜성은 히스가 아프다고 소리칠 정도로 있는 힘껏 안면을 눌렀다.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상황이 닥치자 당황한 히스는 아이를 풀어줬다. 히스의 코와 뺨, 그리고 이마가 혜성의 손바닥 자국 때문에 붉고 희었다. 그에게서 훌쩍 떨어진 혜성은 신경질적으로 꽥 소리쳤다. “하, 하긴 뭘 해! 가서 빵이나 가져 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귀여운 사람…….” 이제 시작인데? 라는 듯, 아예 일어선 히스가 다가오려 하자 혜성이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배, 배고파! 배고파 죽을 것 같아!” “!” 뭐라고? 죽을 것 같다고?! 야릇하게 풀렸던 히스의 시선 역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룸펜에서 안았던 수페리우스의 피부를 연상하던 히스였기 때문에, 지금의 그는 당황한 나머지 죽을 것 같다는 문장밖에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죽을병에 걸렸다고?” 수페리우스를 걱정하다 못 해 겁에 질린 히스가 낯이 하얗게 변한 채로 물었다. 아, 이제 됐다. 그가 평소대로 돌아왔다. 안심이 된 혜성은 배를 움켜쥐며 비틀거리는 시늉을 했다. “배고파… 히스… 빵 가져다 줘.” “? 죽을 것 같다고 했잖아.” “응… 배고파서….” “!” “왜?” 히스의 눈이 이제껏 봤던 것 중 가장 험악해졌고, 혜성은 의기양양하게 배를 움켜 쥐면서 물었다. “너… 넌 정말! 넌 정말! 바본가 봐 수페리우스는!” “내가 왜 바보야! 넌 십칠이잖아!” “수페리우스!” “…왜.” “나랑 자고 싶지 않은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러게.” 그는 이해 할 수 없다며 휙 뺨을 돌렸다. 그리고 한 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히스가 다시 말을 붙여 온 것은 정말로 혜성의 배에서 꾸루룩 하는 소리가 날 때였다. “수페리우스.” “또 왜.” 진짜 화가 많이 난 걸까. 약간 미안해진 혜성이 시무룩해지려던 때, 히스는 가볍게 한 숨을 내쉬더니 일렁이는 눈동자로 다시 부딪혀왔다. 그는 이 말을 먼저 했어야 되는데 잊고 있었노라- 이상한 낯으로 언어를 흘린다. “사랑해.” “히스….” 사랑해. 수페리우스. 귀여운 다람쥐. 나쁜 다람쥐. 너를 사랑해. 그의 전체가 진실로 다가올 때, 바람처럼 스치는 음성은 한동안 혜성의 귓가에 메아리처럼 울렸다. 히스는 방금 의 일로 마음이 아팠는지 거듭 속삭였다. 팡! 또 한 번의 히스 라는 달콤한 바람의 음성이 귓가를 때린다. “아픈 표정 짓지 마. 뮤즈 수페리우스. 나는 너와 숨을 쉬는 지금을 사랑해. 헤어져 있어도 너는 숨을 쉬고 있다는 걸 사랑해.” “…….” 하느님. 이 사람은……. “장난 좀 치려던 거였는데, 화를 나게 했어. 네가 몸을 준다고 해도 너를 소중히 여기는 나는, 너를 안지 않아. 이런 식으로는 더더욱. 내가 잘못했어. 비록 가벼운 장난이었지만 슬프게 해서 미안해, 내 가여운 수페리우스. 나를 미워하면 안 돼. 나는 네 말에 정말로 놀랐단 말이야.” “……?” “그러니까 죽을 것 같다는 말은 하면 안 되는 거야, 수페리우스.” “…아….” “알았지?” “…으응….” 눈가가 흐릿해지는 혜성은 자신이 왜 히스로부터 안식을 얻어가는 지 새삼 깨달았다. 편안한 눈물이 왜 있는지도 알았다. 그의 배려는 상상 이상의 것이다. 눈물을 멈추게 해 주겠다며 눈물멈추기약 이라는 것을 찾는 사람이다. 그의 생활에서 보이는 삶의 방식 역시 자유롭기만 하다. 혜성은 그가 자신에게 전혀 해가 되지 않는 다는 걸 알았다. 눈물이 난다. “울보 수페리우스. 룸펜에서 만들어줬던 것처럼 스프 끓여 줄까?” “으응….” “조금만 기다려. 최고로 맛있게 해서 줄게.” “응….” 그는 혜성을 다정하게 꼭 끌어안아 준 뒤, 가볍게 뺨에 입을 맞추었다. 툭. 눈물이 떨어지려던 찰나, 다행이도 그는 알아채지 못하고 주방 쪽으로 휘파람을 불며 걸어갔다. 다행이다. 아이는 볼을 닦으며 양 팔을 기도하듯이 모았다. 희미하게 떨리는 심장처럼 손이 흔들린다. 너는 내 거라고 나만 보라며 강요하지 않는다…. 너도 나를 사랑해야 한다며 억울해 않는다…. 가벼운 척 굴지만 경솔하지 않다. 말 한 마디 행동 한 마디가 전부 진심이다…. 속박과 억압, 분노가 없다. 그의 존재는 상냥한 사랑, 그 자체이다……. 살아서 움직이는 그리스 조각상보다 훨씬 아름다운 사람이다…. 가슴 아플 정도의 매력을 지녀서 눈을 비비게 하는 사람이다…. 정도를 알고 인내심이 누구보다 뛰어나다…. 사랑에도 그럴까…. 테레사처럼 나와 떨어져 지내도 상관없다는 주의이다…. 현재에 충실하며 열정적으로 지내는, 뮤즈를 사랑하는, 뮤즈인 사람이다…. 무대에서 지휘 할 때는 밀림의 사자가 되어, 잔인하게 단원들 위로 군림한다. 냉정한 헤르베르크 폰 카라얀. 네오나치즘을 경멸하는 이상한 히틀러. 그러나 사랑에 있어서는 큐피트의 질투를 산다. 만약 저 사람에게 모든 것을 허락한다면…. 그는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나에게 헌신하지 않을까. 아니, 그 때 부터 그에게도 속박이 생길까. 모르겠다. 히스…. 자유로운 그의 연애주의는 그런 걸까. 아니면 정말 내가 좋아서 소중한 것뿐일까. 테레사가 그랬듯이, 그도 사랑과 우위를 가릴 수 없을 만치 음악에의 매력에 빠져 있는 걸까. 그게 정답인 것 같다. 저녁 여덟시에 열리는 뮌헨 아마데우스 미니 음악회 때문인지 학교는 시끄러웠다. 이렇게 추운 날인데도 불구하고, 백색의 야외 콘서트 장에서 치러진다는 소식에 히스는 뛸 뜻이 좋아했다. 그리고, 그가 왜 좋아하는지를 아이는 두 눈으로 확인하며 이해했다. 한국의 야외 콘서트장과는 달리, 뮌헨의 백색 콘서트 장에는 얕은 돔의 형상으로 동그란 지붕이 투명하게 얹혀 져 있어서였다. 이용 빈도가 가장 높은 곳 중 하나라는 이곳을 찾아갈 때, 숱한 제복의 학생들이 히스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바람의 향기가 났다. 히스에게서 들꽃을 스칠 때 풍기는 강인한 바람의 향이 혜성에게 퍼졌다. 그는 당당하게 학생들의 정중한 인사를 받아가며 히틀러처럼 걸었다. 그 와중에도 생각나는 족족 손을 잡고 있는 수페리우스를 껴안거나 뺨을 부볐다. 많은 학생들이 주변을 지나다니는데도 그는 전혀 의식하지 않아서 혜성은 당황했다. 그러나 여기 학생들은 혜성이 염려하는 것과는 달리 각자의 애정 행위를 존중하는 게 당연시 되어 있었다. 그러고보니 저 쪽 오르페우스 동상 앞에서 첼로를 무겁게 들고 있던 블론드의 누군가도 자신을 향해 막 달려온 학생과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저 쪽에도. 또 다른 쪽에서도. 이곳에서는 낭만을 감추지 않고 고스란히 표현한다. 그것만으로도 감동이 밀려왔던 혜성은 새삼스럽게 히스의 허리에 팔을 두르더니 품으로 파고들었다. 히스는 그런 혜성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주면서 백색의 연주회장으로 이끌었다. 천오백 명 수용 가능한 야외 콘서트 장은 사람들로 꽉 채워져 있었다. 유지신이 나오는 날이기 때문에 평소의 리틀 회간이 아닌 야외 콘서트 장으로 장소를 정했다는 관계자의 말을 히스가 통역해 주자 아이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돔의 형상은 우주를 연상시켰다. 밤의 마법이었다. 독일 학생들의 예식 복은 재단사와 따로 맞춘 것처럼 저마다의 멋이 돋보였다. 중앙의 동그란 백색 무대에는 달랑 피아노만 있었지만 다들 기대에 찬 표정이었다. 히스와 혜성은 연주자가 가장 잘 보이는 1층의 다섯 번째 줄에 앉았다. 연주자도 그들의 자리가 바로 보이는 자리였다. 사비나 교수님은 제일 앞줄에 앉아 계셨다가 두 사람이 들어오는 걸 보고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다들 숨을 죽이며 유지신을 기다리는 때에, 히스가 혜성의 허리를 팔로 두르며 조심스레 귓가에 훈풍을 전했다. 간지럽다고 비비꼬는 혜성에게 그는 묘한 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데스?” “그래. 하이데스. 그에 대해서 너는 무얼 알고 있니 수페리우스?” “하데스라면… 지옥에서 사는 신… 아닌가?” “그리고?” 번쩍! 순간 천정의 불빛이 켜지더니 빛은, 바닥에 흡수되듯 아래로 서서히 미끄러졌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영롱한 장면이 펼쳐지자 모두는 더 조용해졌다. 히스의 속삭이는 소리는 다시 이어졌다. 더 작고, 투명하면서도 달콤하게. “하이데스에 대해 아는 게 있니, 수페리우스.” “누구 딸을 납치했던 것 같은데…….” 지옥의 신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 신화에 대한 희박한 지식을 열심히 떠올리며 혜성이 대답했다. 오래 전 솔베이지를 설명해 줬던 그대로, 히스는 정확한 내용을 떠들었다. “지하의 신 하이데스는 수줍음이 많았지.” “……?” “남들과 교제하는 것을 꺼렸어. 더 할 나위 없이 차가운데다가 전~혀 예쁘지 않게 생겼거든. 나랑 반대로.” “…….” 무슨 얘기를 하나 싶더니… 결국 그게 단가? 혜성이 혀를 차려고 하자, 그는 이제 막 이야기는 시작 되었다며 눈을 음습하게 깔았다. “그는 잘생기지 않았으니까 여신들도 결혼하려 들지 않았지. 하이데스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의 반려를 훔쳐야 했는데…….” “거 봐. 딸을 훔친 신.” “하하하하… 자기랑 똑 같이 못생긴 여인을 훔쳤지. 바로, 대지의 여신 데미테르의 딸을.” “오, 정말이니? 하데스의 여자가 못생겼다는 건 처음 들어봐.” “그녀의 이름은 페르세포네였어. 수선화 꽃을 따고 있던 그녀를 하이데스는 납치했어. 페르세포네는 도망치고 싶었겠지? 납치된 이상 좋아할 수 없잖아.” “그러게. 그러게.” 카앙-! 콘서트장의 대형 문이 완전히 닫혔다. 두근. 심장이 동요하기 시작할 때, 히스의 말은 갑자기 빨라졌다. 그러면서도 정확하다. “그래서 하이데스는 페르세포네에게 지하의 석류를 먹였어.” “아…….” “…?” “석류는 맛있을까, 히스?” “…….” “왜?” “스프랑 빵을 그렇게 많이 먹였는데도 배가 고픈 거구나. 먹고 싶니?” “응.” “사줄게.” “지금?” “있다가.” “신난다!” “수페리우스. 귀여운 사람… 내 얘기는 이제 시작인걸.” “그래. 너도 석류 같이 먹자.” “석류를 먹지 않아도 먹은 것처럼 이제 곧 느낄 거야.” “?” “어쨌든, 하이데스는 석류의 씨를 자신의 반려 페르세포네에게 먹였단다. 그걸 먹으면 지하에서 보내야 하거든. 지하의 것을 먹으면 하늘에만 속할 수 없는 입장으로 바뀌니까.” “씨를? 음…….” 그의 이야기에 완전히 심취한 혜성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악회 직전에 심심할까봐 이런 얘기를 해 주는가 보다. 새삼 그의 자상함이 고마워서인지 흡입력 있는 하데스 이야기는 즐겁게 들렸다. 히스는 목소리 톤까지 조절해 가며 설명해 나아갔다. “석류 덕분에 지하에도 속하게 된 그녀는 일 년의 3분의 1 가량을 죽은 자들을 통치하며 지내게 되지. 1년 의 절반이나 되는 기간 동안. 그건 페르세포네를 다시 데려가려는 어머니 데미테르 덕분에 빚어진 그들의 계약이란다.” “아…….” “페르세포네가 1년 중 지하에서 하이데스와 시간을 보내는 때, 대지의 신 데미테르는 딸이 그립고 화가 나서 그 기간 동안에는 세상을 겨울로 만들어 버리는 거야.” “!” “이 모든 일은 하이데스의 탓이겠지? 제우스와의 음모론이니 하는 여러 가지를 빼고 단순하게 보면 그렇지.” “와~ 재미있는 이야기다, 히스.” “…….” “왜?” 재미있는 얘기였다며 박수까지 치는 혜성을 진지하게만 쳐다보는 히스가 조금 이상했다. 수페리우스가 손가락으로 그의 눈앞에서 왔다갔다 거리며 장난을 치자, 그는 손가락을 다시 내리며 무거운 입을 열었다. 히스가 필요 이상으로 진지하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하이데스의 행동이 세상에 겨울을 출현시키게 됐지. 지옥에서는 뜨거운 힘을. 대지의 여신의 딸을 차지함으로서 세상에는 겨울을. 그 두 가지가 음악으로 묶어질 때, 듣는 모두는 하이데스의 석류를 먹은 페르세포네처럼 그에게 속한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을까. 수페리우스?” “!” 그 때, 지면이 흔들릴 정도로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깜짝 놀란 혜성이 휙 뺨을 앞으로 돌리자 좌중의 박수를 뚫고 유지신이 나타나고 있었다. 혜성의 몸을 꽉 끌어안아주며, 히스는 녹색의 푸른 눈동자를 빛냈다. 마왕처럼, 히틀러처럼 강압적인 뮤즈의 색으로 그의 영혼이 펄럭였다. 나란히 앞을 응시하는 가운데, 히스의 마지막 설명이 경쾌하게 이어졌다. “그와 몸을 섞는 것처럼 짜릿하지만, 무감동한 하이데스는 그저 지하에 반려가 필요할 뿐이었다며 굴지.” “!” 아이의 양 쪽 볼에 손바닥을 붙인 히스는 무대 위의 유지신이 움직이는 대로 혜성의 머리를 움직이게 했다. 두근. 두근. 철벽을 완전히 뚫어버린 심장은 돔의 천정까지 치솟는 듯 발작을 부렷다. “느껴봐라.” “?” 허스키해진 히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한 번 귀청이 얼얼할 정도의 함성과 갈채가 터졌다. 서늘해진 히스의 부드러운 입술이 아이의 뺨을 잠깐 스치며 언어를 다시 꺼냈다. “수페리우스. 하이데스의 석류를 먹어보렴… 유지신의 수식어는 바로, 하이데스 이니까.” “!” 피아노에 앉은 유지 신, 또는 하데스. 그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겨울, 하데스에게 납치당한 당신의 입을 벌리세요. 그리고, 그가 내미는 붉은 석류를 삼키세요. 바로 지금! 번쩍이는 1악장의 출현, 혜성의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유지신의 리사이틀이나 다름없는 정기 음악회, 피아노의 건반은 발트슈타인 1악장을 누르고 있었다. 발트슈타인! 아이의 입 밖으로 자연스러운 신음이 빠져나갔다. 발트슈타인! 그것을 실패하자마자 가르침을 받듯, 가장 완벽하고 잔인하게 놀리는 건반의 솜씨! 히스가 쭉 자신을 관찰하고 있음을 망각한 혜성은 붉게 충혈 된 눈을 떨었다. 두 손은 입가에서 떠날 줄 몰랐다. 일렁이는 영혼이 칼에 맞은 방랑자처럼 휘 청 였다. 겨울, 겨울이었다. 그의 발트슈타인은 짙은 밤하늘을 보면 땅으로 꺼질 것처럼 위협적인 겨울이었다. 낭랑한 음표조차 그의 손을 거치면, 거친 와중에도 세련된 기운이 풍긴다. 그는 하데스다! 혜성의 감성이 꼭대기에 치솟으려던 때, 3악장의 16분 음표, 그것도 아이가 힘들어 했던 부분을 그의 식대로 날카롭게 치고 들어가는 하데스가 있었다. 감성이 바닥에 떨어질 때, 론도의 박자는 죽은 자를 통치하는 지하의 왕처럼 좌중의 머리 위에 군림했다. 오, 하느님. 뮤즈! 그는 뮤즈다! 진정한 하데스! 대지를 가른 뒤, 땅 끝의 불더미를 달리는 마차에 서 있어. 저 박자! 저 느낌! 그러나 열정적이면서도 재주껏 구사하는 테크닉은 마치 하데스의 냉혈한 표정과 같다! 같은 베토벤이지만 그 누구와도 닮아 있지 않다. 무겁거나 청승맞기는커녕, 원 곡 소나타의 이해 수준을 넘어 섰다. 알프레드 브렌델? 이민우? 그들과도 다르다. 같은 곡이지만 그가 내뿜는 테크닉의 수준은 전혀 다른 쪽이다. 저것이 바로, 지옥일까! 팔이 움직일 때마다 건반이 독특하게 그 만의 것으로 눌릴 때마다, 혜성의 눈에는 그가 눈썹을 움직이는 자세한 것까지 모두 보였다. 그의 전체가 유지신이 아니라 음악으로 보인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음악. 움직이는 악보일까. 숨을 쉬는 선율! 정확한 음률은 강인한 팔 힘을 비웃을 정도였다. 고른 솜씨는 소름이 돋을 지경이야. 저렇게 연주하기까지 저 사람은 얼마나 손을 혹사했을까! 단련시켰을까! 만져보고 싶어. 그와 악수라도……. “!” 지금까지 들어봤던 것 중 가장 빨리 끝난 3악장의 발트슈타인. 유지신이 격렬한 땀을 흘리며 일어서는 순간, 팡파래가 터지듯 사람들은 너도나도 브라보를 외쳤다. “하이데스!” 하이데스! 백색의 야외 콘서트 장은 뿌리 채 뽑힐 정도로 함성에 흔들렸다. “하이데스!” 하이데스! 하이데스! 하이데스! 땅이 진노한다. 퉁! 퉁! 퉁! 동시에 심장의 발걸음도 장화 신은 군인처럼 뛰었다. 하이데스! 하이데스! 지하의 불이 외쳤다. 하이데스! 하이데스! 하이데스! 천 오백명의 사람들은 유지신의 이름이 아닌 하이데스를 규칙적으로 소리쳤다. 쩌렁쩌렁한 그들의 목소리마저 행진곡의 클라이막스처럼 진하게 번쩍였다. 학생들은 자랑스러운 유지신에게 반해 석류를 베어 문 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하이데스! 하이데스! 지하에 속한 하데스의 그녀처럼 학생들의 박수소리는 영원히 멈추지 않을 듯이 우람했다. 악수라는 것을 연상하다가 완전히 경직해버린 혜성의 뺨으로 눈물이 흘렀다. 히스는 기다렸다는 듯 닦아주었지만, 경련하는 몸짓은 히스마저 망각했다. 저것이었어. 다른 게 아니었어. 뮤즈의 손. 뾰족한 창마저 녹일 수 있는 불의 전차를 이끄는 하데스. 그의 연주 솜씨는 최상급이야. 나는 저런 연주를 본 적이 없어. 늘 내 연주에 빠져 있기만 해서 고민은 제자리였지. 그는, 대단해. 그는, 그는…! 노력 없이 저런 멋들어 진 걸 탄생시킬 수는 없는 거야. 자신이 노력한 만큼 다른 이의 손이 궁금했던 거야. 지금의 내가 그의 손과 악수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듯이! 오, 제발 하루 전으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발트슈타인을 끝낸 뒤, 유지는 무대 아래의 관계자에게 몇 마디를 건네었다. 유지는 유창한 독일어로 자신을 지켜보는 뜨거운 관객에게 ‘하데스의 마차’를 들어 보라며 딱 한 번 입 꼬리를 올렸다. 기가 막힌 갈채가 터져 나왔다. 열기가 식기도 전에 좌중의 숨소리는 다시 거칠어졌다. 유지신이 자신의 수식어를 두고 최근에 작곡했다는 ‘하데스의 마차’는 바이올린 2중주로 이루어진 곡이다. 히스는 거기까지 설명하는 도중 피식 웃더니 묘하게 동공을 반짝였다. “하이데스의 마차라니… 저 녀석이 오늘 각오가 대단하군.” “?” “너를 의식하는 거다, 수페리우스.” “!” 부끄러운 심장은 바닥에서 전혀 올라오지 않았다. 굳은살이 거의 없는 내 손을 만지며 유지 신이 뭐라고 했을지 이제야 파악이 되었다. 확 뺨이 달아오른 혜성은 무대 위에서 히스와 자신을 정확하게 올려보는 그를 차마 마주 할 수 없었다. “유지가 계속 이 쪽을 노려보는 게 다 이유가 있었군. 하하하하.” “…….” 히스의 품에 파고들어가려던 때, 한없이 자상하던 히스는 사라졌다. 히스…? 아이가 살려달라는 듯 그를 올려보는데도, 히스는 냉랭하게 눈빛을 바꾸더니 일어났다. 잔인한 황제, 혹은 히틀러. 그의 전체에도 발트슈타인을 연주했던 유지신과 같이 뮤즈로 뒤덮여 있었다. 건드릴 수 없다. 감히 그를 소유할 수 없는 유일한 순간! 아이는 신음하며 등을 뒤로 뺐다. 그렇다. 유지신은 2중주 바이올린의 나머지 한 명을 히스로 지목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시선이 다섯 번째 줄 히스에게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바이올린을 쥐고 있는 유지 신의 시선이 혜성이 아닌 오직 히스만 응시하고 있었음을 깨닫자, 혜성은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더더욱 뺨이 붉어졌다. 히스가 일어서자 백색의 연주회장은 돔의 천정이 펑! 터질 만치 사람들의 기대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숙덕이는 학생들의 눈동자는 히스와 유지. 그들의 눈부심에 대한 기대로 넘쳐흘렀다. “자, 그럼 나도 불지옥에 떨어져 볼까.” “뭐… 어딜… 히스….” 그제 서야 혜성을 안쓰럽게 내려 보며 히스는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러나 아까의 달콤함이 아닌, 독기와 열정이 베인 죽음과도 같은 시선이며 음성이다. 폰 카라얀, 히틀러. 주옥같은 그의 음성이 탁하게 스친다. “내 사랑… 여기서 숨 쉬기 힘들면 귀를 막아도 좋아.” “!” “농담이야. 귀여운 사람. 이런 기회는 흔치 않을 테니, 유지 신과 나의 2중주를 경청하세요.” “!” 쪽! 하고 볼에 입맞춤을 한 뒤, 히스는 날개를 단 야생의 사자처럼 단번에 무대 위로 달려갔다. 연주는 그 즉시 출발했다. 발트슈타인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하데스의 마차가 불규칙한 호흡을 뚫고 들어왔다. 격렬한 키스와도 같은 느낌. 혜성은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히스의 현란한 활이 바이올린 줄을 스칠 때마다 혜성은 음악이 시작되었는지의 여부를 계속 의심했다. 히스는 거창한 인사 없이, 음악이 하고 싶어 몸이 근지럽다는 듯 바로 바이올린을 받고 자신에게 맞도록 조율하는 과정 없이 치고 들어간 것이다. 어떤 악기라도 상관 없어. 그의 영혼이 좌중을 이해시키며 유지신의 첫 악장의 중반 부분부터 날렵하게 받아 치기 시작했다. “!” 스파크! 절묘한 때, 돔의 빛줄기가 그들에게 놀라서 달아나는 것처럼 번쩍였다. 아니다. 이음줄이 서로 엉키는 것이었다. 지판에 올려진 그들의 손가락은 동시에 약속한 것처럼 깔끔한 비브라토를 소화하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노련한 솜씨는 감탄의 신음소리를 내뱉는 게 아까울 정도로 리드미컬하게 이어졌다. 좌중은 숨을 죽이고 손에 땀을 쥐었다. 마차의 말발굽 소리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마치, 히틀러와 하데스의 경합처럼 벌여진 장면과 선율. 광풍처럼 가속도가 붙여지는 가운데, 혜성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스힉- 스힉스힉스힉! 히스의 팔이 앞과 뒤로 마구 움직일 때, 바이올린은 팽팽한 줄을 떨리며 가시에 찔리는 듯 한 소리를 질렀다. 귀를 막으라던 히스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 생 살이 찢기는 아픔, 그것은 하데스의 마차가 짓밟을 때의 통증이나 다름없다. 마차에 달린 가시가 살을 찢고 있는 거야! 스힉! 스힉스힉스힉! 둘이 동시에 클라이막스에 오를 때, 천오백 명의 눈동자가 좁혀진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뮤즈들의 2중주는 빈틈이 없어서였다.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팔을 쉬어 주기까지 하며 히스는 망아지처럼 바이올린에서 뛰놀았다. 냉혈 할 정도로 낮은 음절에서 휙 스치는 표현을 할 때의 유지는 메마른 안면에 약간의 활력을 붙였을 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것이 직격타가 되어, 감미로우면서도 우울하다가 또 도려내는 아픔과 웅장함에 반한 좌중을 희롱했다. 어째서 유지신은 저 토록이나 무덤덤한 척 자유자재로 움직일까! 진정한 바이올린의 귀재? 하지만 피아니스트의 하데스도 못지않다! 레퀴엠! 혜성은 주저앉았다. 레퀴엠. 둘의 2중주는 그야말로 레퀴엠이었다. 독일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레퀴엠이 터져 나온다는 히스의 말은 사실로서 증명된 셈이다. 레퀴엠. 그러나 한국에서는 놀랄 일이지만 뮌헨에서는 실로 자연스럽기만 한 레퀴엠. 죽은 듯 살아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받아들이기 수월한 그것이다. 함부로 박수를 치는 자가 오히려 죽어야 하는 음악. 저들의 음악은 명실 공히 레퀴엠이었다. 오, 하느님. 내 안의 신이시여. 내 인생에 이런 음악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에게, 이 못난 저에게 청각을 허락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수페리우스의 양 쪽 볼에 진한 감동의 눈물이 떨어졌다. 아이는 그것을 내버려 둔 채 막 연주를 끝내고 멋있게 활을 올린 유지신과 히스를 멍하니 내려 봤다. 연주는 끝난 게 아니었다. 숨을 쉬는 것 같지도 않은 팽팽한 1분 여 간의 여운, 이것 역시 연주였다. 온 몸에 소름이 다 가시기도 전에, 약간의 숨소리로 시간을 죽였던 청중은 기립 박수를 쳤다. “와아아아!” “하이데스!” “폰 카라얀! 히틀러! 히틀러!” 콘서트장이 또다시 들썩였다. 앉은 자리에서도 느껴지는 파동에 그만 겁이 난 혜성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슴이 사무쳤다. 심장이 어디론가 도망갔는데도 뛰는 게 느껴졌다. 거칠었다. 모든 게 거칠면서 자유분방하고 무거웠다. 머리가 터졌다. 아프지 않다. 아니다, 아프다. 그 때, 바이올린을 쥔 채로 혜성을 가리키는 히스의 행동이 이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수페리우스에게 모였다. 주목당하면서도 전기에 감전된 영혼은 꿈을 꾸는 것 만 못했다. 히스…? 불투명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볼 때, 히스는 살짝 윙크를 하더니 마이크에 대고 힘을 주어 말했다. “수페리우스. 뮌헨 아마데우스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 처음의 말이 한국어인 관계로 알아듣는 이는 혜성을 비롯해서 몇 없었다. 히스는 독일어로 처음보다 크게 외쳤다. 「수페리우스. 뮌헨 아마데우스에 온 것을 모두를 대표해서 환영합니다!」 “!” 우우우- 학생들의 음성이 한꺼번에 들려서 그것은 마치 칼바람이 뭉칠 때 나는 소리 같았다. 히스는 그렇게 수페리우스의 등장에 대한 정식 통보를 모두에게 한 것이다. 이럴 수가. 그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의 학생들은 시선부터 다정하게 바뀌어서 혜성에게 독일어로 뭐라고 말을 붙여왔다. “아… 고… 고마워….” 얼떨떨한 대답을 하면서도 혜성은 히스를 쳐다봤다. 그의 상냥한 눈매는 이제 보니 히틀러였다. 지휘자였다. 학생들이 왜 그를 따르는지 혜성은 온 몸으로, 상황으로 다시 깨달았다. 이 학생들은 정식으로 자신들의 지휘자가 나를 소개해 주기를 기다렸던 거야. 그게 그들의 방식인거야. 그래서 이때를 기다리느라 어제는 나에게 제대로 된 인사를 하지 않고…! 월요일 오전, 혜성은 지정된 기숙사로 짐을 옮기려다가 히스의 주장에 못이겨 그의 별채로 옮겼다. 어제의 연주 이후로 히스가 다시 보여서이기도 했다. 그를 더 관찰하고 싶은 욕심이 전에 없이 생겼다. 오전 일곱 시. 그 때 까지도 유지신의 연주는 끝난 게 아니었다. 발트슈타인, 그리고 하데스의 마차. 학생들의 악수와 포옹. 가벼운 입맞춤의 인사. 이른 시각부터 조깅 따위를 하는 별채 주변의 학생들은 수페리우스를 만나면 손을 흔들며 뭐라고 인사를 했다. 뮌헨, 뮌헨! 마음은 그 때마다 발작을 부리며 사랑을 키웠다. 아마데우스! 장소가 바뀌어도 영롱한 그의 이름이 깃발처럼 펄럭인다. 히스는 오전 중에 산책을 하자며 짐을 풀기도 전에 혜성을 이끌고 아마데우스 주변을 돌았다. 일곱 시 반이 되자 상당한 학생들이 그들을 스쳐 지났다. 한여름의 태양처럼 뜨거운 그들의 시선은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약간 쉬어주기 위해 건물의 구석에서 걸음을 멈춘 그들은 저 쪽에서 막 어디론가 향하는 유지신을 발견했다. 히스는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혜성의 볼이 어제처럼 붉어졌다. 머릿속이 엉망이 되었는데도, 자신과는 달리 유지신은 메마른 표정 그대로였다. 이럴 수가. 어제의 레퀴엠이 당신의 것인데도, 전혀 아무렇지 않은 거야? 아이는 답답했다. 그가 걸어올수록 그의 전체가 음악으로 보여서 벌컥벌컥 문이 열리듯 심장이 뛰었다. 히스는 한 발짝 물러서며 혜성의 등을 유지 신에게로 밀었다. “그와 대화 해 봐, 다람쥐.” “뭐… 뭐… 히스?” 히스는 엄청난 말을 남기더니 휘파람을 불며 어디론가 로 사라졌다. 심장의 속도가 빨라진다. 뮤즈, 뮤즈. 과거의 거장과 만나는 것 마냥 온 몸이 그에게로 떨렸다. 이것은 뮤즈에게 느끼는 존경에의 감정이었다. 그와 차마 마주보기 힘들었던 혜성은 엊저녁과 같은 눈물을 흘렸다. 유지신은 혜성이 훌쩍이는 모양새를 거리낌 없이 지켜보면서 무감동한 투로 말을 했다. 「왜 우는 거지. 내 연주가 어땠는지 묻고 싶지만, 너는 알아듣지 못하고 나도 못 알아 들을 테니 관둬야겠지.」 “흐으… 흡….” 유지의 독일어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지만, 괜찮았다. 혜성은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세찬 바람이 건물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러나 그 바람은 전혀 다른 두 사람을 꽁꽁 묶어주는 것처럼 친절했다. 뮤즈로서 느낄 수 있는 소박한 공감이 둘에게선 분명히 느껴졌다. 아니다. 적어도 혜성에게는 느껴졌다. 유지신은 한동안 혜성의 눈물이 마르기를 기다려주더니 메마른 입술을 열었다. 「너는 눈물이 많군.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다.」 “……?” 그가 다음 구절을 독일어로 떠든 것은, 혜성이 완전히 눈물을 멈춘 것도 모자라 원래 얼굴로 돌아와서 였다. 아이는 자신이 울면 유지신이 말을 안 한다는 걸 직감해서 눈물을 억지로 참았다. 유지신은 유창한 독일어를 빠르게 이었다. 「내 관찰력이 틀림없다면, 너는 눈물을 많이 흘려본 사람이다. 네가 나와 같은 손가락일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어. 그런데도 이상한 동질감이 느껴졌지.」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걸 알면서도 잘 떠드는구나.” 혜성은 그 점이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는지 한국어로 받아쳤다. 유지신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생각을 쉬이 전하기만 했다. 「음악은 여전히 모르겠다.」 “너는… 내 말을 알아듣니?” 「…하지만, 네 표정만 봐도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그건 알겠어.」 둘은 다시 침묵했다. 혜성의 엉망이었던 감성은 완전히 녹았다. 평정을 되찾자 그가 좋게만 느껴져서 메마른 표정이 다정해 보였다. 수페리우스는 한 걸음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동시에 유지신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묘한 상황에 기분이 나빠진 수페리우스는 미간을 좁히며 검지손가락으로 그의 입술과 코 따위를 지적하며 줄줄이 떠들었다. “넌 표정이 진짜 고체야. 무더위 때 갈라진 농토 같아. 건드리면 가루가 될 것처럼 메말라 있어. 분위기만 봐도 그래. 정혁이도 그림자였지만 그 앤 낭만과 열정이 있었는데, 너는 그런 것도 아니야. 기쁘거나 화를 낸 적이 혹시 있을까. 참… 너는 내 말을 못 알아듣지. 근데 우리 지금 이게 대화니?” 히스가 언제 오는 거지? 혜성은 난해한 상황이 어렵기만 했다. 유지신은 참을성 있게 혜성의 긴 한국말을 경청하더니, 끝나는 즉시 복수라도 하려는지 독일말로 긴 문장을 읊었다. 「상처가 많은 사람은 사소한 것에도 곧잘 눈물을 보인다. 어른이 될 수록 눈물이 흔해지는 것과 같은 이유지. 어른이 훨씬 눈물이 많아. 아닌 척 감추는 것 뿐.」 “?” 뭔가 걱정기가 묻은 음성 같은데… 혜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약, 내 말이 정답이라면… 너는 나처럼 메마를 때 까지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음…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음…….” 「연습을 소홀히 하지 말아 라, 수페리우스. 마지막으로 충고 하나 하자면, 감정적인 면에서 경쟁자를 찾지 말아 라. 그것에 휘둘리지 말 아. 나처럼 메마른 사람이 되고 마니까.」 “음… 여전히 알 수 없다… 흠….” 「한국말을 약간 이해 할 수는 있어도 납득 시켜 줄 수 없는 게 답답하군.」 “답답하다….” 「…….」 “내가 독일 말을 더 많이 빨리 배워야 할 텐데.” 결국은 두 사람 다 서로에게 답답하다는 말을 했지만, 언어는 이해되지 않았다. 분위기가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졌다고 느낀 혜성이, 아무래도 장소를 좀 더 화사한 곳으로 옮겨야겠다는 판단에 그의 옷깃을 쥘 때였다. 유지신은 정중하게 수페리우스의 팔을 제 자리로 돌려놓으며 친절한 문장을 떠들었다. 「진정한 경쟁자를 많이 만들어라. 그런 것들에게 자극을 받도록 해 봐. 더불어 내가 너를 경쟁자로 삼기 위해 노력 해 봐라. 감정 말고 음악으로. 이 말을 해 주고 싶었어. 못 알아듣겠지만.」 “?” 「테레사를 존경하긴 하지만 그의 어떤 부분이 너에게서 영감을 받았는지 진심으로 궁금하다.」 “?” 「…….」 뭐라고 열심히 떠들어 준 그가 새삼 고마웠던 혜성은, 될 대로 되라 식으로 마음을 잡았다. 이젠 히스가 안 와도 상관없다. 그는 독일어로, 나는 한국어로 떠들면 이상한 대화는 끊이지 않으니까 어떻게 보면 편한 상황이기도 했다. 혜성은 화사하게 웃으며 건물 밖의 아무 곳이나 가리켰다. “아, 우리 목마른데 뭐 마시러 갈래?” 「…수페리우스.」 “응?” 수페리우스 라는 물음에 대답하면서 혜성은 확신했다. 그래. 대화가 통하지 않아도 느낌이 통하니까 괜찮아. 유지신은 수페리우스가 웃을수록 진지한 낯을 굳혔다. 그는 다시금 진솔한 내용을 떠들었고, 어떤 형식으로든 혜성이 이해하길 바란다며 눈을 빛냈다. 「테레사는 반드시 5월 콩 쿨 주최와 경연 지를 한국으로 돌릴 거다. 그의 힘이다. 세계가 주목할 때, 너 역시 데뷔 한다고 들었다. 출판사에서는 찾고 있다더군. 테레사의 에튜드 집 중 가장 뛰어난 곡이 하나 있는데, 그가 그 곡을 변형한 바리에이션들이 빠져 있다고. 혹시 너는 알지 않을까? 너한테 있지 않을까? 너는 수페리우스니까. …그런 생각을 해 봤다.」 “음… 뭔가 방금 말을 많이 했는데… 테레사 얘기도 한 것 같고… 테레사가 좋아하는 음료수 얘기 한 건가…? 내가 뭐 가져올까? 코코아 좋아하니?” 혜성이 음료를 들이키는 시늉을 하자, 유지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그 때, 콩 쿨에 참가할 계획이다. 테레사를 보는 게 처음 목적이었지만, 이제는 너의 실력이 어떤 식인지 궁금해졌거든. 정확히는 너를 택한 테레사가 궁금해졌어. 뭐… 같은 뜻인가.」 “아… 네가 가져오게? 그럼 내가 여기서 기다릴게.” 「다시 말 하지만 연습 똑 바로 해 둬라, 수페리우스. 종종 마주치긴 하겠지만 오늘처럼의 대화는 없겠지.」 “…음… 계속 무슨 말을 한다….” 식은땀이 나는 혜성을 전혀 아쉬워하지 않는 유지신의 메마른 문장들. 그것들의 세기는 점점 짙어질 뿐 나아지지 않았다. 유지신과 대화하는 건 좋지만, 이건 곤란한데……. 「참. 네오나치즘에 빠져서 그들을 흉내 내는 놈 하나가 아마데우스에 있다. 대외적으로는 극우파(히틀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 게르만 민족주의자들. 인종차별주의자들)를 따라 해서 교수들이 골치아파하지. 히스는 신경 쓸 가치가 없다고 여기고. 어쨌든, 골칫덩이 녀석인데, 그 녀석만 조심하면 너를 나쁘게 하는 녀석은 없을 거다. 오히려 다들 아주 친절하거든. 여기 애들은 친절이 자존심이니까. 하긴. 차별은 영국이 심하지…….」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음…….” 「수페리우스. …5월 콩 쿨, 그 때 무대에서 보자.」 “어? 가는 거니?” 할 말을 다 한 유지신은 슬쩍 뒤를 돌아봤다. 건물 벽 곳곳에 담처럼 솟아난 장식들이 있었고, 그 사이로부터 종종 바람에 날리는 파란 머리칼이 보였다. 히스가 숨어서 듣고 있다는 점을 전혀 모르는 수페리우스는 방향을 트는 유지신이 아쉬웠는지 시무룩해졌다. 그와의 얘기 중에 알아들은 거라고는 수페리우스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유지신이 등을 돌리고 쌀쌀맞게 걸어간다… 라고 마음속 문장을 생각하던 혜성은 번쩍! 입을 열었다. “ng macht den Meister!(연습이 마이스터-전문가를 만든다!)” 「!」 그 누가 알았을까. 지금의 문장이 이제껏 중 가장 강하게 둘을 묶어주리 란 것을. 그 누가 알았을까. 공감에의 찬란함이 마지막에야 빛을 발했음을. “미안해. 나는 당장 생각나는 게 이것밖에 없어. ng macht den Meister…….” 히스가 룸펜에서 알려줬고, 늘 생활 속에 외웠던 정다운 문장이 떠올랐던 혜성은 무작정 그것을 외쳤다.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유지가 경직하듯 멈춰 서서 뒤를 돌았다. 그의 메마른 표정은 처음으로 화사한 꽃처럼 피어 있었다. 오, 제대로 된 말을 그에게 한 건가? 어쨌든 웃다니, 다행이다. 연습만이, 오직 연습만이 전문가를 만든다. 그 문장은 돌보다 딱딱했던 유지신을 딱 한 번 수페리우스에게로 움직이게 했다. 비록 미약한 정도였지만 괜찮았다. 활짝 웃는 수페리우스 못지않게 약간의 화사함을 담아서, 유지신은 오른 손을 내밀더니 강직하게 말했다. 「연습이 전문가를 만든다.」 뮤즈의 손! 어제부터 그토록 만지고 싶었던 굳은살이 촘촘히 박혀있는 하데스의 손이 나에게로! 또 다시 떨어지는 눈물을 내버려둔 채, 혜성 역시 진지하게 대답했다. “ng macht den Meister…….” 두 사람이 서로에게 이해한 두 번째 문장이었다. 유지신의 모습이 완전히 없어져서야 거짓말처럼 나타난 히스는, 훌쩍이는 혜성의 몸을 소중하게 껴안아주었다. 따스한 품이 그대로 박제가 되는 한이 있어도 그의 따스함은 풀리지 않을 것이다. - 유지 신 또는 하데스 편 끝 - 나 님이 메일로 주신 표지입니다. 고맙습니다. wgreene@naver.com 60편. 가슴이 떨리는 숫자에 왔습니다. 이번에는 정말로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 다시 뵙겠습니다.(늘 말만하고 실천하지 못했;) 마음이 담긴 당신의 댓글이 단 한 줄이라도 나는 언제나 고맙습니다. 그런건 걱정하지 마세요.^^ (근데 확실히 댓글들 솜씨가 장난 아니라는..♡) 항상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화이트그린- 덧글 22개 엮인글 쓰기 /data18/2006/10/12/172/3-wgreene.jpg@nhn@505379@nhn@1@nhn@1120@nhn@840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59~60편 /data18/2006/10/12/172/3-wgreene.jpg@nhn@505379@nhn@1@nhn@1120@nhn@840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59~60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61편(파란 피) ▼ 다음글 - 2악장 58편(유지 신, 또는 하데스)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61편(파란 피) 아마데우스 2악장 2006/10/18 19:52 http://blog.naver.com/wgreene/110009850433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1017 61편 업데) Amadeus 음악 : 시실리안느 - 포레 - 장한나 연주(재생버튼클릭) 시실리안느 - 포레-장한.. 오… 죽이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사람……. 2악장 61편 억눌린 것이 많아야 한다. 그에 못지않은 기쁨에의 환희도 누릴 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살필 줄 알아야 한다. 히스가 통역해주는 음악심리학 강의를 통해 혜성은 많은 점을 배웠다. 이 자리에 동완이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라고 아이는 여러 번 그를 떠올렸다. 밖에는 눈이 내렸다. 소담하게 쌓이는 흰 정경들은 음악심리치료 과정과 어울리지 않았지만 마음을 바꾸자니 무엇보다 잘 어울렸다. 고학년이 주로 듣는다는 선택 과목인 음악심리학 중에서도 음악치료술은 마법처럼 진귀하게 다가왔다. 음악은 사람의 마음에 동요와 한숨을, 나아가 짜릿한 쾌락과 감동을 준다. 가벼운 곡 하나만 쳐도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는 중후한 노년 부부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을 것이다. 도미닉 키르혜아이젠 교수는 젊은 날 심리학을 전공한 뒤, 마흔 살이 되어서야 자신의 취미 생활이었던 음악으로 석사과정까지 밟은 중년의 사내였다. 히스클리프는 그 교수에게 월요일 첫 강의를 수페리우스에게 통역해주겠노라 양해를 구한 터였다. 학생들은 키르혜아이젠 교수를 두고 질버른! 이라며 곧잘 떠들었다. 그 음성을 예의주시하던 혜성은 히스에게 이론 강의 휴식 시간을 맞이하여 의미를 물었다. 나이에 맞게 은빛 머리칼로 찰랑이는 교수의 이미지를 본 따서 학생들은 질버른 이라고 부른다며 그는 다정한 투로 설명해 주었다. 물론 질버른은 은빛이란 단어의 독일어였다. 음악 추구도 중요하지만, 그에 따른 마법과도 같은 멋진 효과들을 그는 가르쳐 주노라 키르혜아이젠 교수의 여러 가지 설명을 덧붙였다. 월요일의 강의는 이론 수업 밖에 없었다. 히스가 따라와 주어서 나쁠 건 없지만 혜성은 문득 궁금해졌다. 뮌헨을 떠나는 그 날 까지 히스가 함께 해 주지 않는다면 자신은 이론 수업을 안 듣느니만 못하기 때문이다. “목도리가 풀렸어, 수페리우스.” 코코아를 마시며 하얀 길을 산책하자니 초록색 눈동자를 빛내며 히스는 곧잘 수페리우스를 챙겼다. 그는 피식 웃으면서 흰 눈 아래 꽃처럼 피어난 혜성을 지그시 내려 보았다. 명화를 감상하는 시선마냥 흐트리던 동공을 바로 세우며 그는 수페리우스의 노란 털목도리를 꽁꽁 묶어 주었다. “너무 세게 했나…?” 약간 느슨하게 목도리를 당겨 주더니, 몇 번이고 관찰한다. 히스는 이제 됐다 싶었는지 노란 털 사이로 없어질 것처럼 작아 보이는 수페리우스의 허리를 감싸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살짝 흘겨보는 히스의 옆선은 강직한 아름다움으로 눈이 부셨다. 만약 이집트란 나라에 사시사철 눈이 내린다면, 너는 그 나라를 통치하는 왕처럼 하얗게 아름답구나, 히스… 용맹하지만 부드러움까지 갖춘 너는 독일의 테레사임에 틀림없구나. 사물을 금 새 꿰뚫어보는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녹색 눈동자, 그 시선이 자신에게 못 박혀 있음을 수페리우스는 믿을 수 없었다. “질버른 교수. 아니지… 키르혜아이젠 교수의 음악 심리 수업은 그냥 맛 베기라고 여기면 돼. 이틀 내내 너와 함께 뮌헨의 이론 수업을 들을 거야. 너의 수업 표는 나와 사비나 교수님이 짠 거야, 수페리우스.” 아, 그렇구나. 수페리우스는 자신을 감싸 주는듯한 그의 자상한 여러 가지가 마음에 들었다. 보호자처럼 구는 히스가 사실은 어리광쟁이에 멋에 푹 빠진 사내임을 알면서도 좋았다.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자신감 있게 걷는 히스는, 많은 학생들의 추앙과 인사를 받으면서도 전혀 어색해 하지 않았다. “오, 그렇지.” 별채 동 입구에 들어설 때 히스는 돌연 방향을 틀었다. “눈이 내리면, 이쪽이 굉장히 예뻐진다. 걸을까?” 혜성은 발그레 웃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히스는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지으며 혜성의 이마를 콩! 하고 아프지 않게 때렸다. “나에게 반하는 건 좋지만, 말은 해야지. 나쁜 다람쥐?” 아이의 벙어리장갑이 이마를 문지르자 그가 우악스럽게 냉큼 껴안더니 느릿느릿 걷기 시작했다. “봄의 민들레를 네가 보면 참 좋을 텐데… 이 산책로는 거의 다가 노란 민들레거든. 하지만 겨울의 눈꽃도 상당히 예쁜 편이지… 오, 눈이 굵어지는군. 춥지 않니, 수페리우스?” 혜성이 이번에도 말없이 살짝 미소만 짓자 히스는 쾌활하게 웃더니 차가워진 뺨에 입을 맞추었다. 수페리우스가 언제고 또 화를 낼 것을 그 역시 알았지만, 지금처럼의 정적과 여유로움도 나쁘지 않았나 보다. 둘은 인적 없는 산책로의 낮은 디딤대와 그곳에 쌓여가는 겨울의 눈들을 구경하며 걸었다. 하이데스의 마차 연주 이후로, 정확히는 음악회 이후로 히스를 달리 보게 된 혜성은 조용히 그를 따라서 걷기만 했다. 히스는 혜성의 그러한 변화가 내심 마음에 들었는지 걸핏하면 다른 쪽을 보며 웃었다. “이론 수업은 함께 들어 주고 통역해 주겠지만… 수페리우스. 나는 며칠 동안 연주회 일정이 있어서 뮌헨에서 떠나 있어….” “……!” 쿵- 마음의 추가 떨어졌다. 따사로웠던 기분이 내려앉자 늑대의 이빨보다 날카로운 겨울이 느껴졌다. 혜성의 눈동자가 커지기 무섭게 히스는 씁쓸하면서도 미스터리한 미소를 띠우며, 마치 혜성을 시험하듯 이상한 것을 물어왔다. “너는 내가 보고 싶을까, 수페리우스?” “…….” “실기 수업은 악센트 위주로 시범 연주와 함께 되도록 쉬운 쪽으로 설명해 줄 훌륭한 교수님을 뽑아 놨단다. 도움이 될 거야.” “…….” 한 번 입을 열지 않자 정말로 아무런 대답도 하기 싫어졌다. 음악 심리 수업을 들어서 그런 걸까? 혜성은 시큰둥한 낯으로 휙 몸을 틀었다. 히스는 따라오는 것 같지도 않았다. 뭐야. 연주회 일정이 당연히 있을 텐데 나는 왜 서운해 하지? 혜성은 그를 야속해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무너지는 마음을 이겨낼 수 없었다. 그를 떨치자니 그는 너무나도 다정했다. 푹 한 숨을 쉰 뒤, 혜성은 무겁게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채 한 걸음 내딛기도 전에 단단한 벽 같은 것이 안면에 부딪혔다. 히스의 가슴팍이었음을, 아이는 그가 끌어안는 것을 통해 겨우 깨달았다. “히스….” “…예엡…?” “아니야…….” 오랜 시간 껴안으면서도 히스는 자꾸 달콤한 것을 물어왔다. 내가 보고 싶을 거지? 그렇지? 그 다운 식으로 파란 향을 흩뿌리며 속삭인다. 혜성은 자꾸만 기분이 낮아지는 스스로가 이상했다. 다른 때처럼 잘 다녀와, 라고 말 하면 좋을 것을. 속절없이 불안해지는 기분이 두려웠다. 무슨 일이 생길 것 만 같아서 그를 보내기가 싫어졌다. 히스 역시 일부러 달콤한 말을 많이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왜 느닷없이 불안해질까. 유지신과의 대화를 히스가 번역해 줄 때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파란 피 실기 수업의 첫 날, 공교롭게도 도미닉 키르혜아이젠 교수가 오르페우스 관 4층 연습실에서 수페리우스를 맞아 주었다. 심리 이론만 가르치는 게 아니었나?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수페리우스는 어렵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은빛 머리칼의 중후한 교수는 여유로운 낯으로 싯 다운, 이라는 대답을 해 주었다. 혜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촉촉이 젖어드는 손바닥의 땀 때문에 아이는 코트를 벗은 것을 후회했다. 코트에 달린 털로 땀을 닦으면 좋을 텐데……. “아, 고맙습니다.” 손바닥을 쥐어짜는 도중, 키르혜아이젠 교수는 붉은 손수건을 건네었다. 혜성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서둘러 땀을 닦아냈다. 「…수페리우스.」 “예?” 「일부러 건반을 무겁게 해 놨으니까 두려워 말고 연주하세요.」 “…….” 독일어를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워낙 인자한 설명이었던지라 아이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건반을 누르는 동시에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대충 눈치 챘다. 정혁이가 사용했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그가 조율한 피아노의 건반은 잡아당기듯이 무거웠기 때문이다. 수페리우스의 놀라워하는 표정을 보며 천천히 독일어 단어를 내뱉는 교수 덕분에 아이는 곧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알았다. 건반이 무겁구나. 이토록 무거운 건반에서 가볍게 뛰놀듯 손을 놀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지. 「즐거운 것으로 시작하는 게 좋겠지요?」 “…….” 악보를 팔락이는 키르혜아이젠 교수의 행동이 꽤 오랜 시간 이어지자 혜성은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수페리우스 라는 이름의 값을 그는 모르는 척 구는 걸까. 「쇼팽의 녹턴 1번.」 “아… 쇼팽.”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음악은 통하는 게 뮤즈의 세상이었다. 혜성은 자신이 좋아하는 악보를 펼쳐주는 교수가 내심 고마웠다. 건반이 무거워서 그런지 겨울날의 녹턴은 구색에 맞았다. 수페리우스의 작은 손가락이 여린 1번을 시작하며 감미로운 선율에 취해 갈 때, 키르혜아이젠 교수는 그것을 묵묵히 지켜보며 무언가를 골몰했다. 「좋아요. 거기서부터는 오른 손만 눌러요, 수페리우스.」 “?” 「계속, 계속.」 “아…….” 그는 별다른 말없이 혜성의 왼 쪽 자리에 앉더니 녹턴의 중간 부분부터 저의 왼 손을 건반에 누르기 시작했다. 연주를 멈칫하던 수페리우스는 별 수 없이 오른손으로 죽죽 나아갔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생기는 것이다. 「오른손을 받쳐준다고 해서 힘없이 따라가기만 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딴.」 “!” 평소부터 문제였던 왼 손 연주를 부드럽게 펼치는 교수님 덕분에, 수페리우스는 그의 독일어를 전부 알아듣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여리지만 힘 있게, 오른손을 충분히 받쳐 줄 만한 정확한 음계를 누르는 그의 자세는 매우 흡입력 있었다. 듣기만 해도 아하, 라는 말이 튀어나올 만치 학생의 연주법을 따라해 주되 자신이 지시 하는 대로 따라오게끔 하는 레슨 방식은 깔끔했다. 교수님의 손가락 마디마디는 굵은 힘줄이 팽팽했다. 그가 얼마나 음악을 사랑하는지, 피아노를 아끼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손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놀랍게도 수페리우스는, 그의 연주를 통해 자신에게 진짜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도 쉽게 알았다. 손목으로 쿵쿵대며 누르는 힘을 그는 지적했기 때문이다. 「딴. 딴. 딴. 따당! 딴.」 “…….” 최대한 왼 손에 집중하면서 오른 손을 놀리자 쇼팽의 녹턴 1번은 누가 들어도 완벽하다 느껴질 만큼 풍부하게 완성됐다. 1번이 끝나자, 잠시 생각하던 그는 자리를 바꾸어 아까 자신이 했던 것처럼 손의 자세를 수페리우스가 만들도록 하나하나 손가락을 동그랗게 만져 주었다. 이번에는 그가 오른쪽 건반을 맡았다. 수페리우스는 부드러우면서도 강약에 충실했던 은빛 교수의 왼 박자를 열심히 눌렀다. “!” 잠깐의 설명과 시범인데도 분명히 소리가 달라졌어! 아이의 눈빛에 설레임이 스쳤다. 왼 손을 누르는 중간 중간, 그는 혜성의 왼 손에 저의 왼 손으로 치고 들어와서 그 부분은 이렇게 연주해야 한다며 몇 번이고 도돌이표를 달아서 눌러 주었다. 그의 기교는 수페리우스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향상하게끔 앞서 있었다. 그의 레슨은 수페리우스 혼자의 것이 아니라 교수님과 둘이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최대한 집중해서 친절하게, 설명보다는 행동의 이해로서 곡을 받아들일 때, 수페리우스는 막 태어난 지식에 대한 전율로 들떴다. 녹턴 3번까지 연주한 뒤, 은빛 교수는 쇼팽의 녹턴 14번 까지 펼치며 무어라 말을 했다. 혜성이 쉽사리 알아듣지 못하자 그는 놀랍게도 14번까지 간단간단하게 누르며 수페리우스의 손가락을 톡톡 찔렀다. “아, 연습 하라 구요? 연습?” 혜성이 그가 했던 대로 녹턴 14번까지의 부분들을 자기 가슴에 검지로 가리키자 그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슨이 끝났다. 두 시간동안의 레슨이었지만, 사실은 한 시간도 채 안되게 여겨졌다. 슈베르트와 베토벤을 가르쳐 주는 사비나의 레슨까지 모두 듣고 난 뒤, 히스의 별채로 돌아왔을 때의 시간은 저녁 일곱 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아이는 자동적으로 히스의 두 대의 피아노 중 건반이 무거운 것에 앉아서 녹턴부터 차분히 연습하기 시작했다. 다음날이 되자 아이는 전날, 저녁밥을 먹은 것을 후회했다. 이럴 수가. 녹턴 14번 까지 연습을 꾸준히 했는데도 시간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연습 할 때는 비록 그것이 잘 되지 않을 지라도 잡생각이 사라져서 좋았다. 그러나 시간이 문제였다. 키르혜아이젠 교수의 쇼팽 레슨은 당장 내일이었기 때문이다. 첫 날처럼 조용히 가르쳐 주는 것 이외에도 연습 여하를 따지실 텐데……. 아이는 걱정하면서도 사뭇 즐겁게 식당으로 향했다. 독일의 학생 식당은 한국처럼 어수선하지 않았다. 정갈하고 차분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낭만이 배어 있는 장소였다. 지난 주말의 음악회 때문인지 뮌헨 아마데우스 학생들은 수페리우스에게 상냥했다. 그저께 밤, 히스가 떠나면서 해 준 키스가 전혀 아쉽지 않을 만치 학생들은 다정했다. 그들은 한국의 수페리우스가 히틀러의 중요한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이리라. 가볍게 스프를 먹은 뒤, 수페리우스는 어제에 이어서 베토벤을 설명해 줄 사비나 교수님을 퍼뜩 생각했다. 악보를 정확하게 챙겨 왔는지 다시 확인하기 위해 두꺼운 악보들을 차례대로 테이블 위에 펼쳤다. “!” 희고 정갈한 악보 위에 난데없이 뜨거운 야채 스프가 떨어졌다. 이게 무슨 일이지? 내가 먹은 스프는 크림 스프였는데? 그것보다도 나는 스프를 다 먹었으며 주변의 밥 먹는 학생들은 널찍이 떨어져 있었는데…? 쿵- 불안해진 내면이 휘청 일 때, 뚝 뚝 떨어지는 야채 스프 위로 까만 그림자가 머리 위에 있었음을 알았다. 누군가의 까칠한 숨소리가 들렸다. 오싹 소름이 끼친 수페리우스는 차마 고개를 들고 스프를 떨어뜨린 몰상식한 치를 확인할 용기가 없어서 악보만 노려봤다. “!” 수페리우스가 반응이 없자, 이번에는 빈 야채 스프 접시가 악보 위에 쿵 하고 떨어졌다. 상당한 학생들이 불쾌하다는 듯 주변으로부터 자리를 털고 일어서고 있었다. 나도, 나도 같이 일어서면 괜찮을까? 두려움에 이를 악 물며 수페리우스는 떨리는 손으로 악보를 쥐었다. 그러자 녀석이 베토벤 악보를 뻥하니 발로 차 버리는 게 아닌가. “이게 무슨 지…!” 화가 나서 그를 올려보는 동시에, 숨이 멎어 버릴 것처럼 아찔한 공포가 영혼을 후려 찼다. 수페리우스의 동공이 좁아진다. 입과 코, 그것도 모자라 뺨까지 피어싱을 하고, 붉은 수탁의 머리처럼 날렵한 누군가가 세게 마주쳤다. 오 하느님. 혜성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네 시골로 꺼져. 키익.」 “뭐…라고 하는…거야….” 「너 같은 노란 동양 새끼는 어울리지 않아.」 숨이 멎을 정도로 갈라진 목소리가 들린다. 내용이 무언 줄 몰라도 혜성은 저 말이 얼마나 나쁜 뜻을 담았는지 쉽게 유추했다. 빈정대는 말투의 뜻을 차라리 몰랐으면 싶을 정도였다. 그 때, 멀리서 학생 식당 입구를 지나치시던 중후한 교수님 몇 분이 수페리우스에게 뭐라고 험악한 말을 지껄이며 부리부리하게 노려보는 수탉 녀석을 알아보고는 황급히 달려왔다. 「크리스티안!」 크리스티안! 크리스티안! 혜성이 알아들은 것은 이름이 전부였다. 처음에는 그것이 이름인 줄도 몰랐으나, 창백한 혜성을 위로하는 숫자들은 뭐라고 열심히 독일어와 영어로 설명해 주었다. 아이는 그 중에서도 영어의 몇 문장만 가까스로 알아들었다. 크리스티안, 그가 피식 웃으며 자신을 훈계하는 교수들과 섞여 나간다. 친절한 독일 학생들은 혜성의 더러워진 악보를 깨끗하게 닦아 주기까지 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더러웠다. 마음마저 그들이 닦아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적당한 친절로 혜성에게 악보를 건네 준 뒤, 학생들은 자신들의 위치로 돌아갔다. 상냥하지만 정도가 있는 그들에게 저 녀석이 누구냐고 물어 본 들 소용없다는 점을 나도 알아. 수페리우스는 벙 찐 낯으로 조용히 학생 식당을 나왔다. 놀란 심장은 여전히 쿵쿵 뛰어대고 있었다. 죽여도 시원찮다는, 나를 가증스럽게 쏘아보고 비웃던 눈빛. 살쾡이 같던 시선과 행동. 유지신이 말해준 네오나치즘에 빠져서 교수들이 골치 아파한다는 그 녀석일까. 그렇다면, 대체 어떤 사상을 배우 길래 나에게 이런 행동을…? 바보 같아. 놀랄 것 없어 신혜성. 억지로 입 꼬리를 올리며 수페리우스는 걸었다. 괜찮아. 별 일 아니잖아? 하지만 웬일인지 사비나 교수님과 약속한 뮌헨의 C동에 들어서는 순간,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눈물이 왜 나오는 걸까? 바보 같이. 별 일 아니잖아? 괜찮아. 바보 같아, 왜 이까짓 일로 놀라서 눈물이 나오니. 혜성은 다부지게 마음을 잡으며 자꾸만 새어나오려는 눈물을 참았다. 악보를 세게 쥔 탓에 손끝은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때마침 사비나 교수님도 십 분 가량 늦게 나타나셔서 수페리우스는 안심 할 수 있었다. 이까짓 일로 주절주절 떠드는 게 낭비라는 것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수페리우스는 알았다. 히스가 있다 한 들 마찬가지이다. 아이는 그 누구에게도 크리스티안 이라는 괴팍한 녀석에 대해 떠들지 않기로 결심했다. “오, 단 이틀 사이에 많이 향상되었구나, 수페리우스?” “정말요?” 열심히 치고 들어가는 때, 사비나 교수는 진정 놀라는 표정으로 수페리우스를 칭찬해 주었다. 그 때문에 아까의 더러웠던 기분은 상당히 치유되었다. 사비나는 자연에 비유하는 식으로 슈베르트를 설명해 주었고, 수페리우스는 그녀의 시 적 감각에 누가 되지 않도록 악보에 받아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중하자. 마음은 아이를 단 한 줄로 몰아세웠다. 독일에서 배워갈 게 많아. 여기서 다른 일로 빠지면 안 돼. 감정적인 일로 울컥 해서 모든 일을 그르칠 수 없어. “안 좋은 일이 있었니?” “!” 레슨이 거의 끝날 때 즈음, 사비나가 집요하게 물어왔다. 수페리우스는 정색하며 웃었다. “음계가 정확해진 것은 좋은 일이지만, 뭐랄까… 건반에 기운이 없구나. 피아노가 힘들어 하잖니.”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다, 수페리우스. 뮌헨의 생활이 불편한 거니?” “아니요!” “수페리우스.” “…….” 그녀는 혜성의 손을 포근히 잡아주며 피아노 의자에 같이 앉았다. 자상한 어머니와 같은 시선으로 그녀는 확실한 내용을 전해 주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참지 말고 말해라. 알았지?” “…….” 다른 교수님들에게 혹시 들으신 걸까. 아까 학생 식당에서 있었던 일을…? 더러워진 악보는 다행이도 오늘 레슨 부분이 아니라서 잘 감췄는데…? “너의 음악을 걱정하는 거란다. 실력 향상은 좋지만, 감정 조절이 잘 안 되면 연주는 실수가 많아지거든. 딱딱하고 재미없어지거나… 음악 심리 강의를 들었으니, 너도 조금은 알겠지?” “네… 교수님….” 사비나는 함께 식사를 하자고 제안했지만 수페리우스는 한시라도 빨리 연습에 집중하고 싶었기에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녀는 아이가 나가는 마지막까지 뭔가를 열심히 걱정하는 눈치였다. 입에 담기 어려운 내용, 아마데우스에는 전혀 없을 것처럼 보이는 신 나치 주의이자 차별론에 들떠 있는 크리스티안. 그녀는 그 말을 해 주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수페리우스도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라서 두 사람은 적당한 농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으로 대화를 마쳤다. 한결같이 퍼붓는 눈의 세레나데. 아이는 별채 주변을 걸어 다니며 자신을 빨아들이는 듯한 눈의 향연에 양 팔을 벌렸다. 품에 안을 것처럼 굴었지만 야속한 눈은 쌓이는 족족 시들어갔다. 며칠 뒤면 히스가 돌아올 테지……. 그 생각은 상당한 기대와 위로가 되어준다. 아이는 용감한 군인처럼 씩씩하게 걸어서 별채의 문을 열었다. 잡생각이 없도록 밤 새 연습했음은 물론이다. 목요일 오전에는 눈이 그쳐 있었다. 뮌헨의 겨울에 이렇게나 많은 눈이 내린 것은 기록적이라며 가십은 떠들었다. 게시대가 따로 없는 뮌헨 아마데우스는 민들레 문 입구에 지어진 사무동 복도에 자잘한 소식들이 부착되어 있었다. 학생들은 연일 바뀌는 소식들에 열을 올리며 툭하면 그곳에서 시간약속을 정했다. 비록 독일어와 영어뿐이었지만, 활력이 생생한 장소라는 게 기분 좋아서 수페리우스도 하루에 한 번씩은 사무동의 복도를 찾았다. 지난 주 이후로 딱 한 번 마주친 유지신도 그 곳에서 뭔가를 읽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가벼운 목례만 나눈 뒤 헤어졌다. 플루트를 연주하는 학생들이 아마데우스 동상 주변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저들이 왜 길 한복판에서 있을까를 골몰하던 수페리우스는 곧 깨달았다. 아마데우스 홀 외각에 진을 치기 일 수라는 거리의 악사들을 흉내 내며 플루트 과 학생들은 저희들끼리 미니 음악회를 펼친 것이었다. 그 학생들 주변에서 구경하는 무리들만 봐도 충분히 유추할 만한 장면이었다. 눈이 그친 것을 기념하는 뜻으로 그들은 멋대로 이유를 붙인 채 향기가 맡아질 법 한 미뉴엣을 연주했다. 언 손을 비비며 수페리우스도 그들 사이에 끼었다. 지금 것은 4분의 3박자의 민요풍인데…? 아, 내가 여기 앉은 것 때문에 곡을 바꿨구나. 멋지다. 그러나 음악회는 몇 분 지나지 않아 엉망으로 끝났다. 학생들 중 몇 명은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 달아났다. 등장만으로도 겁을 주는 붉은 머리의 크리스티안이 다시 나타나서였다. 이틀 동안 학생 감옥에서 근신했다는 그는 처음보다 사나워진 몰골로 등장하더니 아름다운 연주에 넋이 빠져있는 수페리우스의 등을 구둣발로 걷어찼다. “아헉!” 히스를 흉내 내려는지 일렬로 서 있던 연주자 중에서도 파란 머리칼을 지닌 백인의 학생이 자신에게 넘어진 수페리우스와 함께 나동그라졌다. 플루트는 멀리로 날아갔으며 그 학생은 당장 일어나서 수페리우스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었다. 그 아이로서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으리라. 등이 너무 아파서 아이는 일어서자마자 다시 바닥에 뒹굴었다. “왜, 왜이래!” 한국말로 공포에 찬 소리를 지르기 무섭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잔인한 발자국은 뭐라고 천박한 투를 떠들었다. 「더러운 바나나가 섞여 있네? 이런 놈에게 음악이라니, 너의 시골로 가서 놀아라.」 여기저기서 크리스티안! 하며 그를 말리는 외침이 들렸지만, 학생들 역시 겁에 질려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등을 오그리며 바닥에서 벌벌 떨며 통증을 호소하던 혜성은 삽시간에 머리채가 휘어 잡혀서 질질 끌려가기 시작했다. 선량한 학생들은 저마다 어디론가 달려가서 이 일을 알리기 위해 뭐라고 소리쳤지만 정작 크리스티안 이라는 붉은 녀석을 막지 못했다. “아, 아악! 아아아악!” 「싫다고?」 “까아아악!” 혜성의 입 밖으로 스스로도 자신의 것이라 믿기지 않는 본능에 가까운 비명이 터졌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지? 나치즘에 단단히 빠진 녀석은 자신이 흐린 물은 생각지도 않고 혜성을 질질 끌고 가더니 어두운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길에서 무작정 짓밟기 시작했다. 비명조차 쉽지 않은 현재, 혜성은 교묘하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부분만 골라서 패는 녀석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멀리서 교수들이 수페리우스와 크리스티안을 크게 외치며 달려올 때가 되어서야 그는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가래침을 내뱉더니 훌쩍 사라졌다. “수페리우스!” 사비나 교수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이는 멍하니 흐트러진 시선인 채로 천천히 팔꿈치에 힘을 주었다. 그것에 몸을 지탱하는 동시에 푹 쓰러졌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몇 몇 장정한 교수들은 크리스티안을 쫒아갔고, 창백하게 질린 사비나 교수는 엉망인 채로 나뒹구는 수페리우스의 신음을 들어야 했다. 그 뒤로 하루가 지나서야 몸은 원래 상태와 비슷하게 돌아왔다. 사비나 교수는 무거운 입을 열고 수페리우스에게 이런 저런 말로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히스가 연주회 때문에 사라지는 동시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그녀는 여러 번 그 말을 하며 탄식했다. 소수의 무리들이 인종차별주의에 물들어 있다는 극우파를 알려주며 사비나는 희미하게 떨었다. 아마데우스의 학생인 크리스티안 역시 제멋대로의 멋과 사상에 심취해서 동양 애들이 뮌헨에 오기만 하면 굉장한 타격을 입힌다는 것을 말 할 때 사비나는 괴로운 듯 시선을 떨구었다. 유지신이 뮌헨에 와서 초반에 겪었던 일들을 알려줄 때가 되어서야 혜성은 조금 위로가 되었는지 억지로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더불어 크리스티안의 가문이 아마데우스, 나아가 영국에로까지 재정적인 면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설명하며 그녀는 위로도 설명도 아닌 말을 어렵게 꺼냈다. 블라우스를 벗기가 두려울 만큼 흠씬 맞은 흔적들이 보라색으로 부풀어져 있었다. 혜성은 자신을 소중하게 껴안아 주는 사비나 교수님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히스의 피아노 방에 가서 아무 것이나 연주하기 시작했다. 괜스레 눈물이 떨어질 때면 턱을 쳐들고 이를 악물었다. 몸의 멍 자국을 보는 게 두려워. 건반도 흐느끼고 있어. 나는 들려. 왜 당하고 있느냐며 억울해하는 건반의 움직임이 뜨겁게 귀를 태우는 거야……. 그렇다면, 뮌헨 아마데우스의 일면에 실망한 수페리우스는 한국이 그리워졌을까? 그렇지 않다. 악화된 상태는 오히려 작은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만들었다. 피부색 때문에 그런 이유로 우월스레 구는 크리스티안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겁이 나고 두려웠지만, 이대로 풀이 죽어 한국에 돌아간 뒤의 상황이 훨씬 아찔했다. 혜성은 억지로 힘을 주어 건반을 두드렸다. 건반을 누를 때마다 몸 곳곳의 멍 자국 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 아픔을 이기기 위해서 식은땀이 쉬지 않고 흘렀지만 견뎌야 한다. 교수님들은 수페리우스의 상처를 염려해서 레슨을 하루 연기해 주셨다. 하루, 하루라니. 안타까운 마음에 또 다시 눈물이 차오르려던 때, 느닷없이 피아노방 도어가 활짝 열렸다. 특유의 편안한 느낌을 의심하기도 전에 열리는 음성이 있다. “귀여운 다람쥐… 나를 환영해주는구나?” “!” 히스! 그가 돌아오는 날은 내일로 알고 있었는데…? 그의 정다운 목소리가 스치기 무섭게, 굵은 눈물이 사정없이 떨어졌다. 심장이 해일 속 바다처럼 출렁일 때, 아이는 피아노 의자위로 올라갔다. 자신이 무엇을 연주했는지도 몰랐던 손을 들어 막 들이닥친 히스를 껴안았다. 히스! 히스! 히스! 안아줘! 안아줘! 차마 입 밖으로 터지지 않는 음성을 대신해서 작은 팔로 그의 목을 꽉 안고 부르르 떨자, 그는 잠깐 놀랐는지 경직되었다. “내가… 반가운거니…?” “으… 으응… 응….” 격정적인 반응에 오히려 차게 식은 히스의 음성이 슬프게 들려왔다. 혜성은 어린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뺨에 입맞춤을 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지만, 그런 것을 따질 수조차 없이 그가 반갑고 반가워서 야속하기까지 했다. 쿵덕대며 뛰는 심장의 소리가 분명히 히스에게도 들렸을 터, 그는 수수께끼의 미소를 지으며 보드랍게 아이를 감싸 주었다. 움찔! 혜성의 몸에 긁힌 상처로 히스의 팔이 둘러지는 순간 아이는 굳었다. 히스가 눈치 채지 않았으면… 제발… 아이는 더 세게 히스에게 안기며 몸을 떨었다. “…정말이니…?” 약간 수상쩍다는 목소리에 도라 질을 치면서 혜성은 쉼 없이 눈물을 떨어뜨렸다. “흐으… 흐으… 흐으… 으응… 보… 보고싶었…….” “…….” 아이의 양 쪽 겨드랑이에 손을 끼운 뒤, 히스는 훌쩍이는 수페리우스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투명한 녹색의 눈동자가 뭔가를 열심히 고민하고 있었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아,니,야아. 아,니이,야아. 으, 흐으, 히,스으,가아, 보, 고오, 흐윽, 싶, 어, 서어어. 으흐.” “!” “으흐…….” 까만 피로가 히스의 얼굴에 가득했다. 그는 쉬지 않고 이곳까지 당장 날아왔음을 증명하듯 까칠하게 자란 수염으로 수페리우스의 뺨을 누르며 으르렁 대는 짐승처럼 힘겹게 중얼거렸다. “오… 죽이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사람…….” “히스… 보고…….” 혜성이 먼저 매달린 것에 적잖이 충격과 감동을 받은 히스는 괴로운 듯 숨을 참더니, 단숨에 입술을 부딪혀왔다. 뜨겁고 격렬한 입맞춤에 온 몸과 영혼이 산산이 부서지도록, 그는 수페리우스를 껴안고 혀를 움직였다. 히스, 그가 돌아왔다. 이제 괜찮을 거야. 이제 괜찮아. 무슨 일이 또 있을 지도 모르지만, 괜찮아. 괜찮아. 어쩐지 평소보다 일그러진 통증이 숨어 있는 듯한 히스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강한 입맞춤으로 오래도록 인사했다. “아…!” “…….” 피아노 의자 위에서 자신의 목을 껴안기만 하는 혜성을 번쩍 안아 든 히스는 별안간 의아한 낯으로 톡 쏘아보았다. 안긴 채로 침실을 가던 도중, 혜성이 몸부림을 치면서 반항했기 때문이다. 이상하다. 이 정도면 조용히 안아 달라는 걸로 이해했는데…? 히스가 평소와 다르다고 느낀 수페리우스 못지않게, 히스 역시 수페리우스의 행동이 수상하기만 했다. 그는 곧 혜성을 응접실 소파에 내려주었고, 자신은 아이의 앞에 등을 펴고 양반 자세로 앉았다. “…….” “…몸을 만져서, 싫어?” 소중하게 안고 가는 도중 히스가 혜성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기 시작했었다. 아이는 그 때, 발작하듯 몸부림을 친 것이었다. 몸 안의 희귀한 상처와 보라색 멍, 그것이 번쩍 떠올라서 혜성은 히스의 스킨십을 피해야 했다. “…시…싫어….” “…….” “…….” 두 사람은 오래도록 시선을 피한 채 가만히 숨만 내쉬었다. 혜성의 작은 발을 조심조심 매만지던 히스는 긴 한 숨을 내쉬더니 일어섰다. 그로서도 갑자기 안으려던 스스로가 반성이 되었나 보다. 블라우스를 움켜 쥔 채 엉뚱한 벽을 사정없이 노려보기만 하는 수페리우스가 가여웠던 히스는 저의 외투를 벗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알았어. 안 만질게… 네가 싫으면, 그것도 하자는 말 안 할게. 아무것도 안 할게. 나를 피하지 마, 수페리우스. 나는 네가 나를 안 보면 아파서 괴로워.” “…….” 히스… 미안해……. 차마 입 밖으로 터지지 않는 음성이 있다. 혜성은 왼 쪽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꾹 꾹 닦아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의 방에 들어가서 침대에 파묻혀 한 참 동안 가슴을 부여 쥔 채 쉬어빠진 소리를 빚었다. 히스를 슬프게 했어…! 여린 감수성이 마구 휘몰아친다. 달이 보이지 않는 겨울의 밤이 짙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아픈 겨울이 있었다니, 뮌헨은 영원히 찬란하게 빛을 발할 줄 알았는데…! 어딜 가나 고통은 함께 존재하다니…! 다음날이 되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두 사람은 서로에게 행동했다. 혜성은 자신이 얼마나 많이 실력이 향상되었는지 자랑했다. 히스 역시 연주회 때 있었던 소박한 일화를 떠들며 수페리우스가 잠시라도 웃음을 멈추지 않게 대화를 이끌었다. 참으로 멋진 사람. 내일이면 주말 음악회가 또 열리겠지. 그 생각 하나로도 충분히 편안해진 마음을 안고 혜성은 막 입맞춤을 하려던 히스를 피해 달아나듯 별채를 빠져나갔다. 스킨십을 자꾸 피하면 그가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까… 그러나 그의 손이 닿으면 본능적으로 내 몸을 가리게 되는 것을. 멍이 사라지면 그 때 히스를 껴안아 주면 돼. 아이는 조용히 아마데우스 곳곳을 거닐며 생각에 잠겼다. 레슨 시간은 오후로 조정되어 있었다. 테레사의 에튜드 집을 품에 껴안고 걷는 길은 온통 그의 바리에이션 들의 연주가 들리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아마데우스 동상을 막 지날 때, 혜성의 눈이 반쯤 감겼다. 플루트 과 학생들의 아름다운 민요를 감상했던 게 떠올라서 씁쓸한 감정이 휙 스쳐 지났다. 나치즘에 물들어 있던 그 놈은 또 학생 감옥에 간 걸까. 왜 교수님들은 그런 학생을 내버려두지…? 아, 학생 감옥에 보냈다면 내버려 두는 게 아니지만……. 넋이 약간 풀어진 혜성이 몇 걸음 걷다가 실수로 에튜드 집을 떨어뜨렸다. 이크. 삽시간에 창백해진 혜성이 서둘러 그것을 줍기 위해 상체를 낮추었다. 숱한 학생들이 멋지게 길을 걸어 다니는 그 곳에서, 별안간 반갑지 않은 무언가가 나타났다. “…!” 아이는 본능으로 직감했다. 그 녀석이 또 나타났어…! 크리스티안! 여기저기서 그를 말리는 소리가 크게 일었다. 혜성의 몸이 움찔 떨릴 때, 지난 상처들이 더더욱 아프다며 겁에 질렸다. 주위를 빼곡하게 채운 학생들은 경악한 채로 감히 나서지 못 한 상태에서 크리스티안의 붉은 행동을 보았다. 테레사의 에튜드 집을 발로 짓밟고 으적 으적 찢는 몰상식한 크리스티안의 행동을! 에튜드 집을! 테레사의 에튜드 집을?! 순간 번쩍 정신을 차린 혜성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우람한 체구를 지닌 크리스티안에게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이 후렌존 자식!!” 네가 뭔데 갑자기 나타나서 나에게 이런 짓을? 게다가 에튜드 집을! 피투성이로 변한 가슴은 아파도 너무 아파서 이건 숨을 쉬는 게 아니었다. 세상이 블랙홀처럼 까맣게 뒤덮여서 에튜드의 아픔을 호소했다. 오, 테레사! 「오호, 덤비시겠다?」 더러운 농담을 지껄이던 크리스티안도 수페리우스의 돌출 행동에 당황했는지 잠깐 한 발 뒤로 물러서더니 한 손으로 아이의 멱살을 쥐고 허공에서 마구 흔들었다. “컥! 케켁! 켁! 칵!” 여러 아이들이 수페리우스의 백지장 같은 낯에 놀라서 그들 역시 한꺼번에 크리스티안에게 달려들었다. 그만둬 크리스티안! 수페리우스를 놔 줘! 조용하고 한가로웠던 광장에서 삽시간에 싸움이 크게 일어났다. 크리스티안과 그를 좋아하는 패거리들, 그들을 상대하는 선량하고 힘없는 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품에 악기를 껴안기 시작했다. 내가 나 혼자만 죽을 것 같아? 악보가 찢어졌잖아! 혜성은 바닥에 떨어지는 즉시 그에게 뭐라도 하리라 결심하며 허공에서 마구 흔들린 채 쉰 소리를 내질렀다. 숨이 거의 막힐 때 즈음, 아이의 동공이 희게 뒤집혔고 여기저기서 수페리우스! 하며 비명을 질렀다. “……?” 그리고,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질 때 즈음 별안간 혜성의 가벼운 몸이 바닥에 떨어졌다. 둔탁한 싸움 소리는 여전한데, 크리스티안 이라는 붉은 벼슬 자식이 이제 됐다고 여긴 걸까…? 희미해져가는 소음을 들어가며 엉망인 독일어 사이에서 아이는 비척비척 팔꿈치에 힘을 주려 노력했다. 그 때, 귀가 번쩍 뜨이더니 웬 여 학우의 엄청난 비명이 벼락처럼 꽂혔다. 「히스-! 안 돼!」 겨울이 휘몰아치며 피를 부축일 때, 다시 한 번 정확한 음성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또 어디선가 파란 피가 붉게 튀기는 착각이 메아리처럼 넓게 울렸다. 슬픔의 광시곡, 그것은 지휘자의 아름다운 손을 갉아 먹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히틀러! 그만 둬! 크리스티안!」 「히틀러! 히스-!!」 네오나치즘을 경멸하는 이상한 히틀러, 항시 단정하고 모두를 자상하게 이끌었던 그들의 아름다운 히틀러, 오, 지켜보기만 해도 아름다워 감동을 자아내는 우리의 히틀러! 그를 향한 학생들의 찢어지는 음성은 헐벗긴 겨울처럼 으스스하게 울려 퍼졌다. wgreene@naver.com 스킨을 겨울로 바꾼 기념으로 문득 한편을 올렸습니다. 항상 행복하시기를 바라며.... 덧글 22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61편(파란 피)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61편(파란 피)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62~63편 ▼ 다음글 - 2악장 59~60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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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턱을 강타하는 크리스티안의 안면을 왼 쪽 주먹으로 날렸다. 몸집이 큰 크리스티안이 제법 방어하는가 싶더니 방 금의 주먹에 쓰러졌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얼얼해진 볼을 무의식중에 훔치더니 퉤 하고 붉은 피를 뱉었다. 둘은 다시 엉켜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자처럼 으르렁거렸다. 「히틀러! 히스-!!」 히스는 현재 아무것도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스페인에서 돌아오기까지 잠 한 숨 못잔 그의 피부는 푸석푸석했고 눈은 퀭했다. 그래서 그런 걸까. 테레사의 찢어진 에튜드 집을 천천히 품에 안고 멍하니 시선을 흐리는 혜성을 딱 한 번 휙 돌아본 뒤, 히스는 이를 악 물고 크리스티안의 사지 육신을 비틀어 버릴 듯이 덤볐다. 누가 밟고 밟히는 건지 모를 정도로 둘은 거의 동시에 비슷한 곳을 찌르고 엉켰다. 히스의 내면은 방금 전의 장면 하나로 흥분한 게 아니었다. 그는 인내심이 하느님만큼 높은 위인이었다. 그는 기다린 것이다. 바로 눈으로 목격하게 될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수페리우스의 뒤를 쫒았다. 뒤를 쫒다니? 어떻게 된 노릇일까. “히스! 싸우지 마, 싸우지 마! 히스! 히스!” 처음으로 정신을 차린 혜성이 악보를 품에 안은 채로 달려와서 소리쳤다. 히스는 무릎으로 놈의 아구를 흠씬 찍는 중이었다. 히스의 관자놀이 부근에 주룩 피가 흘렀다. 아무래도 아이가 달려오기 직전에는 히스가 맞는 중이었나 보다. 혜성이 히스를 부르자 무의식중에 아이를 돌아보는 통에, 이번에는 크리스티안이 히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오, 안 돼! 아이는 찢어진 악보를 쥔 채로 다시 소리쳤다. “히스를 때리면 안 돼! 안 돼! 히스는 안 돼!” 제발 도와주소서! 연약한 마음은 무능력한 하늘에 화살을 꽂았다. 수페리우스는 감히 얼씬하기 두려워하는 둘의 험악한 지대에 들어서서 몸으로 막으려 했다. 그러나 둘의 싸움은 작은 한 사람이 막기에는 너무 거칠었다. 「크하학!」 욕 한마디 내뱉을 찰 라도 없이, 그저 주먹으로 부딪히는 장면은 불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그 누구도 뛰어들 수 없었다. 혜성은 차차 흐려지는 이성을 마침내 포기하고 털썩 꿇어앉았다. 과연 히스는 왜 자기를 잃고 이렇게까지 날뛰는 걸까. 답은 간단했다. 답은 누가 물어보는 게 이상할 정도로 쉬웠다. 문제라는 게 없는 게 속이 편했다. 시간을 잠시 돌려보자. 어제가 좋겠다. 옳지! 그는 스페인에서 돌아오는 즉시 자신에게 인사하는 무리들의 시선이 겁에 질려 있다는 것을 수상하게 여겼었다. 오, 그는 리더였다. 그는 히틀러였다. 그는 지휘자였다. 그의 눈썰미는 정확하고 예리하다. 자신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뮌헨의 아마데우스에서 학생들의 표정 변화 즈음은 문제도 아닌 것이다. 학생들의 시선은, 아주 오래 전 크리스티안이 유지신을 한참 괴롭힐 시절 두려워하던 것과 똑같았던 것이다! 히스는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있는데! 억지로 평정을 유지하며 엊저녁 자신을 지나친 다른 무리들을 붙잡고 캐물었다. 「크리스티안이… 수페리우스를….」 「!」 그 이상은 듣지 않아도 된다. 돌처럼 굳은 안면으로 어떻게 웃어줬는지 히스는 어제가 기억나지도 않았다. 그는 쌓인 피로 따위는 잠깐 잊은 채 당장 사비나 교수님이 계시는 휴게실로 갔었다. 그곳에서 히스의 졸음기 가득했던 눈은 번쩍 뜨였다. 「수페리우스는 괜찮다. 괜찮아, 히스. 너도 알다시피 크리스티안은 생각이 어리고 철이 없… 히스! 무모해지면 안 된다! 히스!」 「…….」 그 때 히스의 마음이 백색의 도화지처럼 납작해졌다가 북 찢어졌다. 크리스티안! 히스는 그 때 까지도 별 일 없을 거라 믿으려 했다. 아니, 믿었었다. 하지만 믿음에 금이 가는 것은 밥을 먹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별채에서 자신을 반겨주는 건지 매달려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수페리우스의 행동과 맞닥뜨리는 순간, 히스의 내면에 겨우겨우 숨을 내쉬던 평정은 완전히 가루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금은, 사라졌다. 그러나 그는 인내심이 강한 사내가 아니던가. 수페리우스가 잠들기를 기다린 뒤, 히스는 조용히 아이의 침실로 들어갔었다. 혜성이 좋아하는 색은 자신의 머리칼이 차지했으니, 대신 방 안은 노랗게 도배한 침실에서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불을 켜도 숨소리는 여전했다. 히스는 떨리는 손으로 수페리우스의 옷을 모두 벗겼다. 「!」 그리고 수페리우스의 작은 몸 여기저기에 패인 보라색 멍과 상처들을 보았다. 평정심이 완전히 사라진 히스의 눈동자에 분노만이 솟아서 강하게 펄럭였다. 그의 떨리는 손이 천천히 혜성의 옷을 다시 입혀줄 때, 투둑- 하고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분명히 가루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때 도화지로 변했던 히스의 마음은 또 부 욱- 찢어졌다. 아름다운 히틀러는 여실한 달이 쳐들어오는 침실에서 쭉 다리를 펴고 바닥에 앉았다. 침대 위로 팔을 들어서 왼쪽으로 돌아누운 수페리우스의 뺨을 조심조심 만지며 그는 신음했다. 휙 목을 쳐들자 거칠게 내뱉는 호흡 곁으로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콰직. 하이네켄 맥주가 그의 손에서 찌그러졌다. 히스는 그렇게 밤이 새도록 쉰 소리를 내며 수페리우스의 옆에서 울었던 것이다. 뭔가를 감추는데 급급한 수페리우스는 다음날이 되어도 여전했다. 히스가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채 순진무구한 낯은 바삐 밖으로 빠져나갔다. 다정하게 웃어주는 척 연기했던 히스는, 수페리우스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거짓말처럼 표정을 굳혔다. 그는 혜성을 몰래 따라갔지만, 그것은 대놓고 쫒는 것과 다름없었다. 수페리우스는 자신이 대놓고 쫒아가는 것도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히스는 그가 가여워서 숨 쉬는 것조차 어려웠다. 「칵! 카칵! 칵칵! 칵!」 「죽어….」 그리고, 지금 반쯤 눈꺼풀을 내린 상태에서 히스는, 명화를 감상하듯 바닥에서 목이 지겅 지겅 밟히고 있는 크리스티안을 쳐다봤다. 칵! 죽을 듯이 괴로워하는 크리스티안의 몰골이 파리하게 질려도 히스의 안면에는 일 올의 변화가 없었다. 「죽으라고.」 무감동한 음성은 과거의 히틀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비나 교수가 멀리서 경악한 채 소리쳤다. 「히스!」 「케켁! 케엑. 케엑. 키켁!」 정말로 숨이 끊어질 것처럼 보였던 크리스티안의 사지가 바닥에서 움찔움찔 경련을 일으키고 흰자위를 보일 때가 되어서야 히스는 천천히 구둣발을 목에서 치웠다. 피와 섞인 거품이 와르르 그의 입 밖으로 터졌다. 싸움이 멈춰서야 발을 동동 구르기만 했던 많은 이들이 한꺼번에 달려왔다. 크리스티안은 개처럼 질질 끌려갔으며, 수녀님들과 신부님들은 그가 죽을 것처럼 보였는지 당장 쫒아갔다. 교수님들은 히스에게 뭐라고 한 마디 하려다가 침만 삼키더니 안절부절 하였다. 믿기지 않겠지만 히스의 눈은 현재 너그럽게 풀려 있었다. 언제 이성을 잃었냐는 듯 여유롭게 어깨를 편 상태였다. 물론 덩치 좋은 놈과 상대하는 바람에 히스의 상태도 썩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는 입가에 묻은 핏자국을 훔치기만 했다. 곳곳에 핏자국이 튀어 있었다. 그의 파란 머리카락에는 파란 피가 흐르는 것처럼 평소보다 색이 진해졌다. 이윽고 그는 주먹을 꽉 쥐더니 허스키한 투로 묘한 것을 중얼거렸다. 「…마실 가치가 없다고 여겼던 고인 물이… 정말로 썩었군. 방치해 둔 내 죄다.」 많은 이들이 그가 지나는 곳마다 길을 터 주었다. 인파는 반으로 갈려서 파란 히틀러가 쉽게 지나가도록 길을 만들었다. 방 금의 싸늘한 한 마디만 남긴 히틀러는 멀리서 동공을 푼 채로 바닥에 기우뚱대는 혜성을 쓱 한 번 쳐다보고는 냉정하게 돌아섰다. 「수페리우스!」 「…….」 중간부터 싸움의 현장에 섞여 있었던 유지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치자 히스는 딱 한 번 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보니 막 이성을 잃고 발작하려는 혜성의 뺨을 세게 치는 유지가 보였다. 히스의 동공이 또 한 번 좁아졌고, 그는 단걸음에 유지에게 달려갔다. 혜성을 위해 일부러 뺨을 친 자가 유지였다는 것을, 히스는 그의 멱살을 허공에 쥐어 올리고 주먹을 치기 직전에 깨달았다. 까악! 주변 학생들이 비명을 질러서이기도 했다. 히스는 천천히 유지의 멱살을 풀어주더니 처음처럼 등을 돌리고 작게 속삭였다. 「나의… 아니, 수페리우스를 부탁한다.」 슬픈 바람이 주변을 맴돌았다. 이윽고 가장 센 놈이 하늘을 뚫자 푸근해 보이지만 사실은 차가운 함박눈이 하나 둘 대지 위로 휘날렸다. 순식간에 뮌헨의 아마데우스는 흰 목화밭으로 변했다. 모든 것을 덮어주려는 자상한 솜씨로 자연은 모르는 척 대지를 누른다. 히틀러의 피. 파란 싸움. 믿기지 않는 히스클리프의 행위! 가십은 한 시간이 지난 즉시 찍혔다. 교내 소식란에 부착되는 동시에 학생들은 사실을 재확인하며 신음을 터뜨렸다. 함박눈의 세기는 더욱 진해졌다. 유지에게 뺨을 맞고 잠깐 정신을 차렸다가, 스르르 기절해버린 혜성이 눈을 뜬 것은 다음날이 되어서였다. 오후 다섯 시 경 눈을 뜨자 평소와 다름없는 히스의 별채 침실이 시선에 잡혔다. 수페리우스는 지독한 꿈을 꿨노라 중얼거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머리맡 테이블에 뉘인 찢어진 에튜드 집과 마주치는 순간, 부들부들 떨며 주저앉았다. 누가 훔쳐가는 것도 아닌데 저절로 손이 뻗쳐서 에튜드 집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히스의 망아지 같았던 모양새가 퍼뜩 떠올라서 다시 일어섰다. 무엇을 먼저 해야 좋을까.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일까. 볼을 타고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사비나 교수가 히스의 별채에 찾아온 시각은 밤 아홉시였다. 그 때 수페리우스는 방안에서 꼼짝 않고 테이프로 악보를 붙이고 있었다. 사비나 교수님… 이라는 말을 해 봤지만 음성은 쉬이 터지지 않고 입술만 움직였다. 그녀는 쭈그려 앉아있는 수페리우스의 곁에 앉아서 아이를 품에 껴안아주었다. 그러자 눈물이 잠시 멎었다. 밤 아홉시가 될 때 까지 쉬지 않고 울었다는 것을, 아이는 그제 서야 알았다. “히스는… 히스는… 어디 있나요… 돌아오질 않네요… 다시 스페인으로 갔나 봐요….” “…….” 꿈을 꾸듯 중얼거렸다. 차창 밖으로 매서운 칼바람의 음성이 들렸다. 밤이 되자 함박눈은 어마어마해졌다. 사비나는 천천히 되도록 진정된 투로 아이의 머리칼을 쓸어주며 설명해주었다. “히스는… 그 애는… 자기 스스로 학생 감옥에 갔단다, 수페리우스….” “!” 오, 하느님. 가장 잔인한 당신이시여. 그녀의 품속에서 수페리우스의 몸과 영혼이 경직되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히스는 반성할 게 있으면 곧잘 그러거든. 학교 안에서 싸움을 한 건 처음이라서 스스로도 놀랐을 거야…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거야….” “…….” 한결같이 부드러운 음성, 그러나 숨을 거둔 심장은 떨그럭. 바닥에 떨어졌다. “수페리우스…?” “교수님….” “…응…?” 사비나 교수의 품에 파고들며 수페리우스는 최대한 안정된 톤으로 위장하여 물었다. “…학생 감옥은 어디에 있나요….” 챙-! 창 밖에 걸어놨던 은색의 종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밤은 사나웠다. 오르페우스 관을 지날 때 짙은 회호리가 아이를 납치할 것처럼 크게 스쳤다. 안면에 부딪히는 눈의 크기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실눈을 뜬 채로 수페리우스는 걷고 또 걸었다. 은빛 호수 길을 지나자 거대한 입구와 포장 무늬가 다른 길이 나타났고, 조금 더 걷자 모차르트 동상이 양 팔을 벌려 아이를 맞이했다. 내 눈으로 확인할거야. 괜찮다는 말 따위는 믿지 않아. 내 손으로 만지고 느끼지 않는 이상 확인되지 않아. 히스, 히스… 미안해. 미안해. 민우가 생각났었다. 온 몸으로 막아주는 장면에서 혜성은 그래서 까무러쳤다. 심장이 죽었다. 학생 감옥에 자발적으로 갔다는 사비나의 음성은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주었기 때문이다. 고통을 초월하니 지루한 평화지대가 사막처럼 고요히 흐느꼈다. 내면은 그래서 죽은 듯 거친 숨소리만 흘렀다. 휘이이이- 휘이이- 바람에 흩날리는 지푸라기들은 초연한 자세로 수페리우스를 인도했다. 마른 가지들 사이로 은색의 방울종이 마구 흔들렸고, 지하 학생 감옥은 뮌헨 아마데우스의 가장 외각에서 불쑥 나타났다. 학생 감옥의 구조는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딱딱하고 차가운 돌바닥은 울퉁불퉁했다. 주홍색 전구는 호롱불 모양이었으며 지하에 내려갈수록 빛이 발했다. 뻥 뚫린 원형의 천정은 당장 내려앉을 것처럼 위협스러웠다. 휭휭 대는 밖의 바람소리만이 세어 들어오는 가운데, 수페리우스는 인적을 찾아 천천히 걸었다. 멀리서 사람의 훈풍이 가늘게 전해졌다. 흐트러진 동공이 옳게 박힌다. 수페리우스는 단걸음에 그 쪽으로 뛰어갔다. 챙-! 철창을 쥐었다. 창창 차차창! 그것을 흔들었다. 멎었던 눈물이 폭포수처럼 다시 터져 나왔다. 뺨이 뜨겁다. 그리고 차가워진다. “히스, 히스!” 쉭- 섬광이 스쳤다. 그렇게 멀리 도망갔던 밤의 미진한 달빛이 걸음마를 시작했다. 눈이 멎어서 서슴없이 빛을 발하는 노란 달이 감옥의 좁은 창에도 쏟아졌다. 히스의 윤곽이 보일 때, 혜성은 비로소 안심했다는 듯 긴 숨을 내쉬었다. 가장 끝에 위치한 감옥에서 히스는 양반다리를 한 채 바르게 등을 펴고 앉아있는 중이었다. 그는 수페리우스가 자신을 크게 부르는데도 불구하고 천천히 다가왔을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수페리우스는 겸허해 보이는 그와 비슷하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히스… 아프지… 괜찮아…?” “…….” “히스… 입이 얼은 거 아니니? 이리 와… 이리 와… 히스… 이리 와….” “…….” “히스… 내가 잘못 했어… 내가 잘못 했어… 이리 와… 이리 와….” “…….” “히스… 히스… 네가 닿지 않아… 이리 와… 이리 와….” 야속한 철창이 미웠다. 하는 수 없이 아이는 팔을 뻗어 철창 안쪽으로 내밀었다. 팔을 더 이상 뻗을 수 없어지자 뺨이 철창에 부딪쳤다. 아프지 않다. 히스는 아이를 골똘히 지켜보더니 조용히 저의 손에 깍지 껴 주었다. 행동만 봐도 알 수 있어. 히스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거야. 어제의 폭력을 전혀 후회하지 않아. 자책하지 않는데다가 오히려 당당하게 나를 서늘한 시선으로 쳐다보잖아. “히스클리프는 아프지 않아.” “히스….” “다람쥐가 더 아프잖아.” “!” 봇물처럼 터지는 눈물을 그 누가 막으랴. 우는 것은 수페리우스의 몫이었다. 띄엄띄엄 말을 하는 히스 덕분에 애간장이 다 녹을 지경인 수페리우스는 그가 입을 열자 정신없이 그의 이름만 불렀다. “어차피 한 번은 겪을 일이었어.” “히스…….” 그가 입술을 깨문다. 피가 고였던 것이 다시 터져서 그의 아름다운 턱에 흐른다. 혜성의 안색이 창백해지자 히스는 스윽 소매로 피를 닦은 뒤, 말을 잇는다. “아마데우스에 감히 나치가 있다니. 곧 뿌리 채 뽑을 거다.” “…히스….” 깍지 끼인 손에 힘을 주며, 히스는 자상하게 웃어 주었다. 죽었던 심장이 철퍽철퍽 뛰기 시작했다. “걱정 마, 다람쥐. 이 일은 네가 한국에 돌아간 뒤 시행할 거니까.” “…조심해야 돼… 히스… 알았지?” “…….” “히스… 다치지 마…아?” “…….” 그는 대답 대신 철창 안으로 들어온 아이의 작은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추위로 갈라진 그의 입술은 까칠했지만 웬일인지 따스했다. 손을 놓아줄 것처럼 보였던 히스는 그러나 긴 입맞춤을 반복하더니 밖에서 헐떡이는 수페리우스를 잠깐 마주치다가 곧 아이의 손등에 뺨을 기댔다. 뜨거운 물기가 느껴져서 수페리우스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의 눈물이 손등에 떨어져서였다. “사랑해 수페리우스. 어제를 기억해 줘… 너를 사랑하는 나를 알면서도, 그것은 상상 이상의 크기였던 것에 나 역시도 놀란 어제를 기억해 줘….” “히스… 히스… 울지 마… 울지 마….” 아이가 양 손을 어렵게 휘두르며 뺨을 철창에 세게 기댈 때, 히스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가까이로 다가왔다. 처음처럼 양반 자세로 앉은 히스는 혜성의 얼얼해진 볼을 떼어주며 좀 더 편안하게 손을 깍지 끼었다. 그의 나머지 한 손은 철창 밖으로 나와서 혜성의 까만 머리카락을 쓸어 주기 시작했다. 행위는 더없이 부드러웠지만 음성은 매몰찬 히틀러의 분노를 담고 있었다.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지금의 마음 상태 그대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또다시 녀석을 으깰 거야.” “!” 살쾡이처럼 덤비던 크리스티안과 히스. 두 사람간의 아니, 유지신까지 섞였던 곪은 역사가 쉬이 그려졌다. 수페리우스는 그들에게 쌓인 체증을 어렴풋이 예상해 봤지만 쉽게 가늠하기 어려웠다. 무시하던 고름을 히스는 서서히 짜 내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제의 일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게 아닐까. 혜성은 그가 겁이 났다. “눈을 뽑아내도 시원찮을 녀석, 손가락뼈를 갈아 버려도 아쉽지 않은 놈 따위,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히스….” “두려워하지 마, 수페리우스. 나의 다람쥐. 나를 무서워하지 마.” “…!” 혜성의 시선 변화를 용케 알아 챈 히스는 정답게 웃어주었다. 그의 등 뒤로 반짝이는 붉은 달빛이 그의 전체에 출렁였다. 섬세한 그의 윤곽이 하얗게 반사될 때, 히틀러의 전체에 압도당한 혜성은 가파른 숨을 내쉬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시간은 돌릴 수 없는 것이지. 지금은 지금이야. 나의 현재는 무모하지 않단다… 귀여운 내 사랑… 네가 걱정할까봐, 나는 그게 후회돼.” “…!” “또… 뮌헨의 학생들이 입었을 상처가 후회돼.” “!” “그것을 빼면,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설령 또 지금처럼 후회해도, 시간이 돌아간다면 몸을 날릴 테니….” 입이 붙은 걸까. 언어는 뇌 속에 바람처럼 휭휭 거릴 뿐 쉬이 터지지 않았다. 걷잡을 수 없는 눈물만이 히스의 손바닥을 타고 있을 뿐, 몸과 마음 영혼까지 무용지물이다. 아이는 그에게 자신도 들어가게 해 달라며 겨우 말을 꺼냈다. 히스는 그러나 다정하되 약간의 서늘함을 담은 미소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야속한 사람, 혜성은 몇 번이나 그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그 때마다 히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상처가 깊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찢어진 내면의 상처를 꿰매 주고 싶었지만 그가 거부한다. 그는 오히려 나를 걱정하기 때문에…! 한 참의 시간동안 마주치던 두 사람은 동시에 웃었다. 뚫어지게 쳐다보기만 하니, 이상하게 폭소가 터졌다. 누가 먼저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둘은 배를 쥐고 큰 소리로 한 참이나 웃었다. 높은 돌 천정이 쩡쩡 울리도록 웃자 웬일인지 속이 후련해졌다. 히스는 민우가 아니다. 그는 히스클리프일 뿐이다. 정확한 문장이 혜성을 올곧이 세워주었다. 그래도 불안했던 아이는 철창에 바짝 다가온 히스의 뺨을 문지르며 애절하게 속삭였다. “……음악 계속 하는 거지? 히스, 죽는 거 아니지?” “뭐라고? 죽어? 하하하… 안 죽는다. 걱정하지 마….” 웃음기가 남아있던 히스는 추위도 잊은 채 붉어진 낯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녹색 눈동자는 확신으로 반짝였다. “지휘도 계속 할 수 있는 거지? …정말 안 죽을 거지?” 자꾸만 같은 것을 묻는 수페리우스가 걱정되다 못해 겁이 난 히스는 겸연쩍은 낯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가벼운 주먹질 이었는걸. 고작 그런 걸로 죽음 운운하는 게 더 나쁜 거야. 감정적인 면에서는 전혀 후회하지 않지만, 주먹질을 했다는 걸 이성적으로 돌이켜 보면 경솔했다… 이 정도로 인식하는 거지. 죽음이라니? 주먹질 좀 했다고 해서? 하하하하… 귀여운 사람. 세상 남자들은 그럼 몇 백번씩 죽었어야 하는 걸?” “그… 그런 가…? 그렇구나. 하긴… 그래도….” “……네 앞에서는 싸우는 꼴을 너무 많이 보였군. 이제 안 그럴 거다.” 서로의 새끼손가락을 깍지 끼인 다음에도 광대의 한판 극을 본 것 마냥 수탈한 웃음이 터졌다. 둘은 다시 서로를 보며 크게 웃다가 잠잠히 마주보았다. 히스의 손아귀에 양 쪽 팔이 잡힌 상태에서 혜성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새삼 목을 낮추더니 속삭였다. “…여긴… 정말 조용하구나. 으스스해… 아무 소리도 없어.” “…그렇지 않아.” “피… 우기지 마. 감옥이라서 아무 소리도 안 들리고 춥고 으스스스 하잖아.” “후후후… 귀여운 수페리우스. …그런데 으스스가 춥다는 건가…? 무섭다는 거지?” “…….” 으스스의 뜻을 어떻게 설명해야 히스를 골려줄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사이, 그는 처음처럼 명상 자세를 취하더니 느닷없이 아름다운 눈꺼풀을 닫았다. 히스? 그를 부르자, 히스는 고고한 수면 위를 떠다니는 잎 새처럼 바른 투로 대답했다. “나의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항상 그러셨지. 인생은 바람과 같은 거라고…….” “…바람?” 인생 한 편을 스스럼없이 내보이며 그는 별안간 자연을 지휘하는 바람이 되었다. “그래.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일 뿐이지. 수페리우스 라는 바람만큼 강렬한 게 아직은 없지만… 다람쥐에게도 갖가지 바람이 있었겠지? 나처럼 멋진 바람도 있을 테고….” “오, 그거 멋지구나.” 그 때, 히스의 눈이 번쩍 뜨이며 짓궂은 표정이 바짝 다가왔다. “그렇지? 내가 멋있지?” “…….” 혜성이 못 들은 척 딴 쪽을 쳐다보자, 히스는 별 수 없이 정자세로 앉아서 조용히 호흡했다. “눈을 감고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아주 많은 바람의 소리가 들려.” “잘 모르겠는데…?” 그런 히스를 구경하며 신기하다는 듯 작은 수페리우스는 뿔룩 뒤로 내민 엉덩이를 좌우로 살짝살짝 흔들며 대답했다. 히스가 뭘 하는 걸까. 달에 반사되는 파란 머리카락은 낮과 밤이 합쳐진 것처럼 신기하기만 한데……. “인연은 바람이라고 하셨지. 나도 그것을 공감한단다… 작은 수페리우스. 만약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에 있다고 해도 겁 낼 건 없어. 어차피 바람은 자기 혼자서도 만들 수 있는 마법이니까.” “!” 그의 음성은 하늘의 별처럼 영롱했다. 반짝이는 순간순간 많은 것을 터뜨렸다. 휙 스치는 음성에 섞여서 혜성의 동작이 정지했다. 절대 무음의 지대, 반 아마데우스의 지하가 퍼뜩 떠올라서 아이는 일순 숨도 쉬지 않았다. 그 때, 짝! 하고 히스는 박수를 쳤다. 깜짝 놀란 수페리우스가 흘겨보기 무섭게 그는 당당한 투로 설명을 지속했다. 히스의 별빛 눈동자는 어느새 굳건히 닫혀 있었다. “박수를 쳐도 그것은 리듬을 타는 음악이지.” “…….” 지휘자의 음성을 잡으세요. 바람을 맞으세요. 온 몸으로. 누구의 음성일까. 테레사, 테레사는 아닐까. “말을 하는 것도 음악이야.” “…….” 세상이 당신을 스칠 수 있도록, 바람이 당신을 스칠 수 있도록. 멀리서 분명히 들려오는 내면의 음성이 뜨겁게 퍼져온다. “숨을 쉬는 것이 음악이며,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은 바람이 스치는 것과 다를 게 없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니까.” “흐음…….” “돌고 도는 바람처럼 헤어져도 다시 만나게 되어 있는 거니까 싫어해서도 안 돼.” “…….” “조금 이상한데… 이렇게 말을 하니까 마치….” “마치?” 약간 고민하는지 텀을 준 뒤, 히스는 눈을 떴다. 아리송해 하는 수페리우스가 양 쪽 철창을 쥐고 바짝 다가와서 어서 대답하라며 몸을 조금씩 흔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웠던지 히스는 다른 쪽을 쳐다보며 괜히 한 번 웃었다. 히스! 라고 혜성이 짜증스레 외쳐서야 그는 싱긋 웃으며 말을 잇는다. “그렇게 말을 하니까 마치… 아버지가 된 기분이군. 수페리우스. 아들 할래? 미래의 내 아들 이름을 정해 놓은 게 몇 개 있는데… 골라 봐. 야니, 아이헨, 페테, 미하엘.” “!” 뭐라고? 어이가 없는 혜성이 쩌 억 입을 벌리는 것 역시 사랑스럽다며 히스가 중얼거리더니 진지하게 나머지를 떠들었다. “후훗… 딸도 괜찮지. 마리앙느, 젤다, 하넬로레. …젤다. 젤다가 좋겠는데?” “…파란 머리카락을 지닌 아버지는 싫어.” “오, 오, 안 돼. 멋진 아버지를 질투하면 안 돼요.” “하하하하….” 너와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룸펜이구나. 한결 푸근해진 마음 저 쪽 룸펜의 다락방 창문이 활짝 열린다. 히스도 그것을 눈치 채고 있을까. 느끼고 있을까. 똑똑한 박사처럼 검지로 빙빙 돌리며 여러 이름을 마저 떠들던 그가 해벌 쭉 웃으며 진지하게 문장을 끝낸다. “나의 음악, 나의 지휘… 그래서 나의 사랑 수페리우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야.” “…감옥에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무슨 히틀러니. 거업쟁이.” “겁쟁이?” “…….” 그는 방금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순식간에 붉어져서 턱을 쳐들었다. “하하 하하하! 겁쟁이? 아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 아름다운 히틀러. 이상한 히틀러. 약간씩 그의 진정한 세상을 보여주는 자상한 히틀러. 파란 머리카락을 흩뜨리며 그가 목청 높여 웃었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멋진 젊음이 파도친다. 혜성이 왜 웃느냐며 지적하자 히스는 팔을 뻗어 수페리우스의 작은 얼굴과 머리카락을 더듬었다. 또 다시 웃음이 터지는지 그는 쾌활하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귀여운 사람! 하하하하! 나 히스클리프 폰 뤼겐부르크는 진정으로!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본다! 하하하하!” “…….” “하아… 사랑하는 자를 마냥 지켜보는 사람은 겁쟁이가 아니야.” “그럼?” 수페리우스의 눈동자가 반짝 빛날 때, 녹색의 호수처럼 찰랑이는 히스의 것도 같이 반짝였다. “용감하고 인내심이 뛰어난 거지.” “정말 그러니?” 감옥은 잠시 사라졌다. 낙원의 지대에서, 추위를 잊은 두 사람은 별 것 아닌 대화에도 열을 올리며 골몰했다. 수페리우스에게 뺨을 철창에 붙이라고 말한 뒤, 히스는 작고 보들보들한 볼에 입술을 누르며 대답했다. “그럼. 진짜 겁쟁이는 속마음을 보여주기 두려워해서 무력으로 쟁취하는 자야. 힘이 센 것이 전부인 줄 알고 마음보다 몸을 움직이는 사람이야.” “오호… 오호?” “…어때.” “응? 뭐가?” 자꾸 입을 맞추는 히스 덕분에 철창에 뺨을 기댄 채로 아이가 몸을 비비꼬며 물었다. “또 나한테 푹 빠졌지? 반했지?” “…….” 철렁! 솔직하기 짝이 없는 심장이 수풀을 가로지르듯 무시무시하게 뛰었다. 혜성은 밤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벌떡 일어섰다. “수페리우스?” “…갈래.” “어딜!” “힉!” 그러나 약간의 방심도 허용치 않는다는 히틀러의 용맹한 팔이 철창 밖에서 아이의 팔목을 꽉 쥐고 놓아주지 않는다. “왜~ 왜에.” “키스 해 주고 가야지, 귀여운 다람쥐.” 어떻게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다는 듯이 할까! 실제로 히스는 자신의 생활방식, 사랑방식을 낯설어하는 혜성을 더 신기해하고 있었다. 헤어질 때 키스하는 게 어째서 이상한 일이냐며 히스는 벌떡 일어서서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탁해진 음성 만치 혜성의 숨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빠져나갔다. 휙 고개를 돌리며 최대한 붉어진 뺨을 감춘 수페리우스는 순간 떠오른 문장이 마음에 들었는지 부리나케 내보냈다. “싫어. 감옥에 있는 꼬지지한 사람한테는 키스 하고 싶지 않아.” “음… 꼬지지가 뭐지? 꼬집고 싶다는 건가…?” “지저분하고 더러워서 못생겨 보여.” “!!” 거짓말처럼 히스의 팔이 쑥 빠져나갔다. 그는 습관처럼 주머니를 뒤져서 거울을 찾더니, 비명을 질렀다. 거울이 깨졌어! 언제 깨진 거지? 수페리우스! 이것 좀 봐! 어쩌지? 그는 삽시간에 어린애가 되어서 창백해졌다. “에이… 드러….” “!!” 뭐라고! 더럽다고? 내가? 히스클리프가! 양 뺨이 파리해진 히스에게 최후 직격탄을 날린 뒤, 아이는 유유히 감옥에서 멀어져갔다. 감옥에서 나와서 몇 걸음 걷기까지 히스의 꽥꽥 외치는 소리는 끊임없이 전해졌다. 다음에 올 때는 꼭 거울 가져오라고 신신당부하는 울림이 기분 좋게 퍼져올 때, 수페리우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이 미소 지었다. 그 뒤 삼일이 지날 때까지 히스는 몇 번이나 더럽다고 한 들 감옥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와 약속한 시간은 나흘이었나 보다. 그 사이 뮌헨 아마데우스는 뜨거운 열기로 출렁였다. 내용은 히스와 크리스티안의 앞으로 행로에 관한 것이었다. 이번 일이 히스에게 타격이 있을까에 대한 여론이 팽배해져서 학생들은 쉬쉬하면서도 그것을 떠들었다. 왜 사건이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늘 힘을 발휘할까. 혜성은 더없이 아름다운 곳에서도 싸움과 슬픔이 있다는 점이 측은했다. 감옥에 자발적으로 들어간 뒤 닷새째 오전이 되자, 뮌헨은 또 다시 들썩였다. 감옥에서 나온 히스가 별채에서 잠깐 휴식을 취한 뒤, 곧바로 크리스티안의 부모를 호출했기 때문이다. 재력가인 그들을 감히 호출하다니! 학생들은 히틀러의 지위에 새삼 놀라며, 단 하루 만에 학교로 찾아온 그들 부모를 수근 거렸다. 오르페우스 관의 악기 소리들마저 평소와 틀렸다. 확실시된 소식이 사무동 복도 게시 대에 붙여진 것은 크리스티안의 부모님이 다녀간 다음날이었다. 그 날은 가십을 확인하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사무동은 장사진을 이뤘다. 히스와 크리스티안. 그들에 대한 앞으로의 소식을 수페리우스는 진즉부터 알고 있을 거라며 교수들과 학생들은 예상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게시물을 제일 늦게 확인한 혜성은 그들이 아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나흘 내내 감옥에 음식을 싸들고 찾아가 봤자 히스는 가벼운 농담조로 혜성을 웃기기에만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흘간의 감옥에서 히스를 돌이켜 보며 혜성은 그의 뜨거운 열정을 다시 확인했다. 민우처럼 나를 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신중하게 처신하고 앞일을 계획하면서 지금의 대화를 불편하지 않게 이끈다. 히틀러, 그는 예상보다 훨씬 더 눈부신 인재였다. 감옥에서의 대화를 돌이켜 본 들, 혜성은 가벼운 일화밖에 떠올리질 못했다. 가령 스프와 빵을 가져왔더니 철창 쪽에 입을 벌리더니 먹여달라는 히스, 나가려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일어서기 무섭게 팔을 잡아당기고 한 시간만 더 있다가 나가라는 히스. 정말이지 크리스티안에 대한 것은 전혀 생각할 틈이 없었다. 따라서 혜성은 히스가 감옥 밖으로 나온다 한 들, 전과 다를 것 없는 생활이 쭉 이어질 거라고 예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상은 빗겨가기 위해 존재함을 또다시 증명했다. 가십을 번역해준 사비나 교수님에게 몇 번이나 다시 읽어달라고 하며 수페리우스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병동에 입원중인 크리스티안이 완치되기도 전에, 히스는 그를 데리고 보스턴으로 가기로 그의 부모님과 합의를 봤다는 소식만이 줄줄이 써있었기 때문이다. 온 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데도 불구하고 글자들은 약을 올리듯 계속 메아리를 울렸다. 이럴 수가. 독일에 왔는데도 불구하고 그와 헤어져야 하다니. 걷잡을 수 없는 서운한 감정은 결국 비통함까지 통달했다. 아이는 얼마 안 가서 히스와 헤어진다는 걸 사실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피아노와 씨름하는 낮 동안에는 히스에 대한 궁금증을 자연스레 잊을 수 있었지만, 밤이 되면 사정은 달라졌다. 히스는 갑자기 바쁜 사람이 되어서 혜성이 잠이 들어서야 별채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한 번은 히스를 기다리다가 제 풀에 꺾여서 응접실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다음날 눈을 뜨니, 히스는 없고 혜성은 자신의 방 침대에 편안하게 뉘여 있었다. 히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지? 기가 막힌 혜성은 별 수 없이 혀를 차며 예정된 레슨을 받기 위해 잘 되지 않는 연습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마음은 이미 히스라는 배를 타고 유유히 출항한 터였다. 히스, 차라리 감옥에 있을 때는 마음편이 만나기라도 했는데, 같은 공간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은 그를 볼 수 없다. 별안간 우울증이 밀려오려는 때, 혜성은 여지없이 베토벤 집을 품에 안고 아마데우스 건물들을 배회하고 있었다. 히스를 못 본지 며칠이나 지난 건지 숫자를 세는 것을 시작으로 우울증이 도진 것이다. 바람을 봐도 슬프고,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지점은 피해 가는 게 마음이 편했다. 사물은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이면서 시야를 희롱했다. 마음의 추가 지평선 끝의 땅거미처럼 퍼졌다. 이럴 때 연습과 레슨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국 아마데우스 같았으면 하루쯤 수업을 빼먹고 그를 찾아보거나 기다렸겠지만, 상황이 달랐다. 교수들과의 약속은 금과 같았다. 지각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답답함이 참을 수 없어질 지경에 놓일 때가 되어서야, 바닷물이 빠지듯이 히스클리프는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혜성은 멀 찌 감치에 서서 저 사람이 히스가 맞는지 다시 확인했다. 히스, 히스다! 당장 달려가서 보스턴에 간다는 게 무슨 일인지 따지려던 혜성은 순간 걸음을 멈췄다. 별채 동 입구와 아주 가까운 헐벗은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이럴 때는 몸이 외소하고 작은 게 용이한걸. 아이는 숨을 죽이며 자신과 가까운 거리에서 있는 히스와, 낯선 블론드의 남학생을 조용히 쳐다봤다. “!” 그리고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양 손으로 입을 막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취해 대화에 열을 올리던 중, 별안간 히스가 자신보다 작은 블론드의 아름다운 남학생에게 입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키스, 키스를 한다! 쿵.쿵.쿵. 쿵쿵쿵쿵. 심장이 거침없이 뛰었다. 놀란 나머지 그 소리는 밖으로 튀어 나올 것처럼 드세었다. 혜성은 입을 가린 채로 뒷걸음질을 쳤다. 푸스슥- 주변의 잔챙이 나뭇가지에 쌓여있던 눈덩어리를 건드리는 바람에 한바탕 눈덩이가 떨어졌다. 조용히 장면에서 빠져나가려던 수페리우스는 불같이 자신을 쳐다보는 히스와 마주쳐야 했다. “다람쥐?” “!” 요 며칠간 히스에게 좋은 사람이 생긴 거라면, 당연히 축복해 줘야 한다. 그런데 왜 도망치려고 하지? 마음은 멈춰야 한다고 강한 지시를 내렸지만, 몸은 그게 아니었다. 혜성은 충혈 된 눈을 감추며 부리나케 그 자리를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수페리우스!” 나무 뒤에서 놀란 혜성을 발견한 히스 역시 누가 봐도 창백할 만치 변해 있었다. “이, 이건 오해야. 다람쥐. 그러니까…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화가 났나보다! 어쩌지? 수페리우스는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상당히 긴장하고 지켜본 탓에, 돌아서는 즉시 들리는 히스의 음성들은 한데 섞여서 제대로 이해되지도 않았다. 수페리우스! 라는 부름만이 그나마 이해 될 뿐, 아이는 악보를 흘렸다는 것도 모르는 채 쏜살같이 뛰었다. 마음이 거칠어지자 영혼까지 휘어졌다. 바람은 슬펐다. 모든 게 암흑으로 도배된 세상은 올빼미의 울음소리처럼 음산했다. 히스가 다른 사람과 키스를 한다. 한다… 이건 놀랄 일이 아니잖아? 새삼스럽기는! 전혀 그럴 거 없어. 나는 어차피 그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잖아. 받아 줄 수 없잖아. 스스로 위안을 삼으려 노력했지만 이상하게 눈물이 자꾸 흘렀다. 그가 완전히 나의 것이라고 착각했던 걸까. 나는 위선으로 똘똘 뭉쳐 있나봐. 어쩔 수 없나 봐. 수페리우스는 짙은 밤 별채에 돌아오는 즉시 피아노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페달을 세게 밟고 뭔가를 열심히 쳤지만 건반의 소리는 교묘하게 청각을 피해 도망쳤다. 아무것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달칵. 별채의 정문이 열리는 소리가 분명하게 스쳤다. 그 소리는 건반 소리보다 정확했다. 온 몸이 경직된 상태에서 이번에는 벌컥벌컥 방문들을 죄다 열어보는 소리가 들렸다. 두근, 두근, 두근. 죄를 지은 사람처럼 혜성이 피아노 밑으로 숨듯이 내려가서 앉았다. 벌컥- 최종 관문인 양 열리는 피아노 방 도어 소리에 수페리우스는 저도 모르게 양 쪽 눈을 질끈 감았다. 히스가 들어오는 소리가 정확하게 들렸다. 그의 긴 한 숨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자신을 피아노 밑에서 잡아 뺀다거나 화를 내는 것도 아닌, 이상한 정적만이 고고히 퍼졌다.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 호기심에 못 이겨 수페리우스는 살짝 눈을 떴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화사하게 벌어지는 입을 어쩌지 못 한다. “아까 그건-” “…….” 심장의 박력은 옅은 속도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달아오른 볼 만큼은 어쩔 수 없다. 혜성이 눈을 뜨기를 꾹 참고 기다렸던 히스는, 아이가 자신을 쳐다보기 무섭게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수페리우스의 눈에 제일 처음 보인 것은 히스가 아니라 화려한 붉은 장미꽃다발이었다. 그는 온종일 뮌헨 시가지를 돌아다니며 저 꽃을 사 온 게 분명했다. 향긋하고 매혹적인 내 음이 좁은 피아노방 전체에 퍼지자 이곳은 한국 아마데우스와 크게 다를 게 없어졌다. “그건 오해야, 다람쥐. 그 자식이 크리스티안 부하나 마찬가지인 놈이라서 겁주다가….” “꽃이네?” 조심스레 그가 내민 꽃을 받으며 일어선 뒤, 혜성이 기분 좋게 속삭였다. 빠르게 말을 잇던 히스도 순간 안심이 되었는지 자기가 꽃을 사왔다는 것에 으쓱해져서 멋있게 입 꼬리를 올렸다. “어? …훗… 예스. 좋아?” “응. 히스. 예쁘다.” “네가 더 예뻐.” “…….”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하다는 투로 말하면서, 그는 혜성의 뺨에 살짝 키스를 하더니 등을 돌렸다. 혜성의 반응이 매우 만족스러웠나보다. 방금 것은 키스라기보다는 만나고 헤어질 때의 인사에 가까웠다. 그만큼 자연스러운 입맞춤이었음이 각인되자 혜성은 품에 안고 있는 커다란 장미다발이 서글퍼졌다. 히스는 불쑥 꺼냈던 처음의 말을, 장미다발을 자랑하는 찰나에 놓친 게 분명한지 주방에서 우유를 마시며 뭐라고 자꾸 떠들고 있었다. 우유를 다 마신 뒤, 그는 별안간 코를 팽- 하고 푼 뒤, 자상하게 이쪽을 쳐다보며 표정처럼 부드러운 투로 입을 열었다. “뭐 했어?” “히스 기다렸어.” “…….” “왜?” 응접실 소파에 앉아서 장미꽃의 향기를 맡고 있는데 그제 서야 번쩍! 뭔가가 생각났는지 파리해진 히스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양 쪽 허리에 강직한 팔을 얹고, 약간은 두려움이 찬 소리로 그는 떠듬떠듬 물었다. “아까 것 오해 한 거 아니지?” “아… 너 또 애인 생긴 거니?” “!” “…왜?” “그게 아니야 수페리우스. 귀여운 사람… 하하하… 정말 나를 아직도 모르다니… 아니면, 모르는 척 하려는 건가? 수페리우스. 나랑은 신경전이니 이따위 걸 할 필요도 없어. 너를 사랑하잖아.” “무, 무슨 소리야 난데없이!” 휙! 꽃다발에 섞인 안개꽃을 뽑아 던지며 혜성이 낯을 붉혔다. 히스는 그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더니 혜성을 소중하게 껴안고 귓가에 입술을 부딪혀왔다. 살금살금 귓불을 누르던 입술은 이윽고 허스키한 투로 음성을 흘린다. “그 녀석은 겁주려고 그랬던 건데…….” “…….” “…키스해 주면 안 그러겠다고 하는 바람에….” “!” 새치름해 있던 혜성의 표정이 거짓말처럼 만개한다. 그렇구나! 마음은 작은 종을 매단 것처럼 은은하게 울렸다. 히스는 크리스티안만큼은 못 되어도 나를 괴롭힐 만한 녀석들이 있는지 하나하나 찾아 다녔던 거구나…! 지난 며칠 동안 히스를 왜 볼 수 없었는지 제대로 이해 한 혜성은 벙 찐 상태에서 한참동안 장미꽃에 뺨을 문질렀다. 혜성이 이해한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더 세게 끌어안으며 춥다고 되려 안아달라는 히스가 그다워서 좋았다. 그러나 고작 그런 일 때문에 며칠 동안 자신을 홀로 버려둔 것이 미웠다. 마음의 정체란 무엇일까. 혜성은 저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리송한 마음의 변화가 신기했다. 목덜미를 시작으로 차츰차츰 입술을 위쪽으로 옮겨오는 히스의 안면을 양 손으로 밀어내며 수페리우스는 휙 몸을 틀어 앉았다. “왜…왜, 오, 수페리우스?” “넌… 정말 십칠이야!” “!” 수페리우스는 장미꽃을 바닥에 내려놓고, 서둘러 커튼 속에 숨었다. 자꾸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감추기 위해 혜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평소 같았으면 기분을 풀어주겠다며 별의별 짓을 다 했을 히스도, 오늘만큼은 묵묵히 혜성을 지켜보다가 자신의 방으로 멀어졌다.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서로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가십은 직설적으로 알려주지 않았던가. 보스턴으로 곧 떠날 거라는 며칠 전의 가십을 혜성은 바보가 아닌 이상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히스 역시 수페리우스가 가십을 보았으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굳이 아픈 말은 지껄이지 않아도 좋았다. 한참 후, 가방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덜컹. 심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호흡이 거칠어지는 바람에 수페리우스는 작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커튼 전체가 부들부들 떨리는 게 육안으로도 훤히 보였다. 히스가, 이제 가는구나… 이렇게 갑자기, 떠나는구나…. 그 생각 하나로도 눈물이 뺨을 적셨다. 가방 끄는 소리가 현관 쪽에 멈추는 듯싶더니, 곧이어 정확한 발소리가 이쪽으로 커져왔다. 히스… 그를 부르려던 순간, 아이는 숨을 참았다. “마음에 없는 행위였어. 귀여운 사람…….” “저리 가!” 커튼에 감겨있는 수페리우스를 커튼채로 푹 껴안은 히스의 행위 때문이었다. “오, 수페리우스. 그 누구도 이제 너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그런 걸 믿어?” “…….” 히스의 음성이 떨리고 있다. 혜성의 영혼처럼 그의 것도 우박이 되어 바닥을 뚫었다. 사나운 음성과는 달리 애처로운 눈물이 커튼을 적시고, 그의 품 안의 모든 것을 적셨다. 따뜻하고 정겨운 품과, 히스만의 상쾌한 체향이 내일이면 없을 것이다. 어쩌면 커튼 밖으로 나가면 당장 없을지도 모른다. 왜 하필이면 보스턴일까. 내가 주의했어야 하는 일을, 왜 그는 단번에 해결하려고 덤빌까. 유유자적 모르는 체 지냈던 전과 같으면 좋으련만. 학생들 협박할 시간에 나랑 슈바빙이나 한 번 더 다녀올 것이지, 정말 너는! 답답해진 혜성이 또다시 꽥 소리쳤다. “바보야?” 커튼 채 안아주던 손의 힘이 더 세어졌다. 으스러져라 끌어안으며 히스 역시 괴로움을 참는 입술을 떠들었다.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바보가 된단다….” “…….” “수페리우스. 그거 아니…?” “……?” “나는 테레사가 왜 너랑 떨어져 지내는지, 그 고역을 견디는지 조금씩 이해하고 있단다….” “?” “내 마음도 그와 같거든.” “!” 그 용맹한 음성 훌쩍 남기고, 너는 무얼 하려고. “뮤즈 수페리우스…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귀여운 사람… 네 맘속의 음악이 더 세어져야 돼.” “히…스…?” 그 저릿한 어절 쏟아낸 뒤, 너는 어딜 가려고. “이히 리베 디히….” “!” 그리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지막 문장을 끝으로, 그 벼락같은 음성을 바닥에 깐 채 체온은 멀어져갔다. 커튼 위의 머리칼 부근에 부드럽게 입술을 누른 것만 기억되는 현재, 서늘해지는 주변 못지않게 쿵덕 이는 심장은 몇 번이나 그를 잡으라고 소리쳤다. 혜성은 이상하게 움직여지지 않는 몸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흐리멍덩해진 뇌에는 아무런 것도 전해지지 않았다. 그가 떠났을까? 아까 가방을 끄는 소리가 났는데… 이히 리베 디히를 남기고? 그 이상의 소리들은 충격 때문에 감지하지도 못했는데, 나갔을까? “…….” 커튼 밖으로 나오는 즉시, 응접실에 혼자일 게 두려워서 아이는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이렇게 쉽게 헤어질 수도 있는 걸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보스턴에 간다면 간다고 말을 하고 가겠지. 하지만 나는 묻지 않았고, 그도 오늘까지 얘기하지 않았어. 가십은 사실대로 떠들었으며…! “!” 안 돼! 폭풍우가 몰아치는 내면이 마침내 몸을 일으키게 했다. 혜성은 당장 커튼을 젖히고 튀어나왔다. 썰렁한 거실 바닥에 아까의 장미꽃다발이 끈끈이처럼 붙어 있었다. 영원히 그 자리에 못이 되어 박힐 것처럼 꽃은 움직이지 않았다. “히스!” 내면 곳곳에 추억이라는 파도가 벌써부터 치기 시작했다. 오, 안 돼! 아이는 당장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발에 차였던 장미꽃다발에서 몇 개의 붉은 잎이 출렁이더니 근처에 휘날렸다. “히스!” 마음이 터져서 분해되어도 속 시원히 부르고 싶은 이름이 있다. 가슴을 움켜 쥔 채, 현관 도어를 열자 맹렬한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읏….” 거센 눈발의 향연이 빠른 박자로 세상을 군림했다. 팔을 들어 눈을 가리던 혜성이 가까스로 실눈을 뜨며 눈발 사이의 형체를 알아봤다. “히스!” 별채 앞을 차마 떠날 수가 없었던 히스가, 그 역시 얇은 차림으로 뛰쳐나온 혜성에게 놀랐는지 팔을 벌렸다. 일그러진 그의 표정은 그가 아까 전, 얼마나 괴로웠는지 대변해 주었다. 그 와중에도 가까스로 짓는 미소는 슬퍼서 차마 마주보기 힘들었다. 아이는 날아가듯 발돋움 하며 그에게 안겼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오… 수페리우스….” “…….” 그는 자신의 코트 단추를 재빨리 풀더니 따뜻한 품속에 아이를 감춰주었다. 그의 턱이 신음하며 연방 같은 이름을 끊임없이 외쳤다. 그의 주변으로 휘날리는 파란 눈의 결정체가 아름다웠다. 그의 턱 주변에 남아있는 붉은 자국들마저 아름다웠다. 그의 몸이 떨리고 있다. 아니다. 사실은 내 몸이 떨리고 있다. “히스… 히스….” “왜… 귀여운 사람. 내가 보고 싶구나?” “으흐… 히스… 히스….” 사랑한다는 말도, 좋아한다는 말도, 미워한다는 말도, 그 어떤 말도 해 줄 수 없는 아름다운 히틀러. 용맹한 폰 카라얀. 그러니 너의 이름만이 한량 읊어지는 현재, 눈물이 구색에 맞게 흐른다. “잘 배우고 돌아가는 거야, 알았지? 키르혜아이젠 교수님 측근들은 내가 와인으로 매수했으니까 잘 가르쳐 주실 거야. 후후후… 다람쥐는 이제 편하게 배우기만 하면 돼.” “으… 으응. 흐으…흐으…흑…흑….” “울지 말고 알았지? 좋지?” “흑…흑…으…응…흑….” “…….” 수페리우스의 작은 몸을 누구에게 빼앗길 새라 소중하게 껴안아주며 그는 힘 있는 투로 속삭였다. 그것은 그와의 약속이다. 혜성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자신이 제대로 대답을 하는지 살필 겨를이 없었다. 미안하고 고마운 이 사람을 보내기가 싫었다. “5월 콩 쿨 때, 우리는 모두 다 한국에서 보는 거야. 알았지?” “흑…흑… 응…응….”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말자. 두 사람은 서로에게 그렇게 다짐하는 것 같았다. “나를 깜짝 놀라게 해야 돼, 수페리우스?” “으…으응…흐윽….” 감미로운 바이올린 선율처럼, 혹은 하아프의 흐느낌처럼, 그러나 폰 카라얀의 지휘 못지않게 강렬한 음성이 부드럽게 퍼져온다. 한 참 동안 혜성을 보듬어 주던 히스는 천천히 아이의 턱을 자신의 쪽으로 올렸다. 둘의 시선이 부딪힐 때 거대한 함박눈은 잠시 멎는 듯 한 착각을 빚었다. “키스도 안 해 줄 거야? 감히 무서운 히틀러를 매달리게 하는 거야?” “흑… 아까부터… 사시일… 흑… 해 주구… 흑… 싶…은데… 흑… 누운물이랑… 흑… 흑… 코옷물이… 흑….” “…….” “지…지저분…흑….” “…상관없어… 너는 그래도 예…….” 너는 그래도 예쁜 사람이야… 허스키한 히스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끝맺음조차 없이, 그들의 첫 키스 때처럼 부드럽게 감기는 음성은 입 안에서, 서로의 혀끝에서 달콤하면서도 쓰디쓴 마침표를 찍었다. 목소리 끝으로 감미롭게 빨려 들어가는 서로의 호흡은 그것으로도 충분히 굿바이 인사를 대신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겨울의 목화 눈송이가 둘 사이에 파랗게 쌓여간다. 웬일인지 오늘 밤에는 바람이 불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은 바람이 스치는 것과 다를 게 없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니까. 돌고 도는 바람처럼 헤어져도 다시 만나게 되어 있는 거니까 싫어해서도 안 돼. 파란 피 편 끝. 메모로그에 경민씨가 올린 사진입니다. wgreene@naver.com 추워요...? 덧글 21개 엮인글 쓰기 /data18/2006/10/23/131/1234567-wgreene-wgreene.jpg@nhn@95338@nhn@1@nhn@630@nhn@409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62~63편 /data18/2006/10/23/131/1234567-wgreene-wgreene.jpg@nhn@95338@nhn@1@nhn@630@nhn@409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62~63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64편(아뉴스데이I) ▼ 다음글 - 2악장 61편(파란 피)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64편(아뉴스데이I) 아마데우스 2악장 2006/10/25 19:27 http://blog.naver.com/wgreene/110010100846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1025 64편 업데) * 조용한걸로 음악을 처음에 깔았다가, 이 글을 적으면서 들었던 걸로 그냥 바꿨습니다. 시끄러우면 음악 끄고 읽으세요.^^ Amadeus 음악 : Over The Hills And Far Away - Nightwish (재생버튼클릭) Over The Hills And Far.. 피아노 오브 시베리아 VS 미완성 작품 1번 다뉴브의 밤. 2악장 64편 사람의 선량한 입술이, 너는 참으로 독하다며 지적하고 화를 냈지만 그에 아랑곳 않는 목화 눈송이는 힘을 줄이지 않았다. 러시아의 겨울에 뒤질 새라 서리마저 얼어붙은 북유럽을 흉내 내듯이 뮌헨은 차가워졌다. 아마데우스의 얼음 연못 빙판 위로 가시처럼 자란 눈송이가 뭉쳐서 곳곳에 동상처럼 군림했다. 붉은 모자에 십자가를 달고 있는 니콜라우스와 그의 부하 루프레이트가 선물 보따리를 들고 나타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독일의 뮌헨은 작년 12월 1일 보다 센 바람으로 뒤숭숭했다. 오히려 요즈음이 성탄절 이라는 이름과 어울렸다. 바야흐로 2월의 넷째 날. 이례적인 폭설에 한국과 뮌헨의 항공편도 속속들이 결항 안내를 내보냈다. 평년과 차이를 보이는 기온은 마치 어떤 거대한 것을 예고하는 것처럼 많은 이들을 예언자, 혹은 몽상가로 탈바꿈시켰다. 한국도 비슷한 추위가 기승을 부렸다. 가을이 잊혀 질 만큼 참담한 눈이 그야말로 퍼부어 내렸다. 삽을 쥔 하느님이 작정을 하고 구름을 쏟아내는 게 아닐까? 신이 나서 던지려는 게 아닐까? 지하의 신 하이데스는 결국 페르세포네를 죽여서 대지의 신을 분노케 했나! 한국 아마데우스 학생들은 기숙사 방에서 쌓여가는 풍경을 낯설게 응시하며 기도했다. 자연 앞에서 작아지는 사람들은 초연해지면서도 선량했다. 혹자는 이런 때야말로 움직여야 한다! 라는 낭설을 지면에 터뜨리며 가만히 있어도 추워하는 이들을 꾸짖었다. 가십은 계절에 대한 염려를 음악으로 채워라! 라며 조용히 지내는 학생들의 감성을 부추겼다. 적당한 눈은 포근한 솜이불을 덮는 느낌을 주었지만, 정도를 넘어서니 이것은 불안함과 초조함을 건드리는 것이다. 뒤숭숭해진 저 쪽, 그래서 한국 아마데우스에도 이례 없는 사건이라는 게 움틀 대고 있었다. 헐벗은 나뭇가지들은 급기야 짜증을 동반했다. 폭설은 멎을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혹시 당신은 아는가. 나약한 사람의 일개 감성이라는 놈은 자연의 원초적 이끌림에 굴복하는 것을 시작으로 사건을 빚는다는 것을. 그 증거가 출현하기까지의 스타트 다운은 시작되었다. 오르페우스 관에서 막 빠져나온 로미오는 자신과 만나기로 된 동완과 선호, 프란체스코를 보는 즉시 주절주절 떠들었다. “선배도 봤어요? 형. 형도 예약 한 거야?” 분수대 앞에서 동동거리며 로미오를 기다리는 모두는 숨을 쉴 때마다 뿜어지는 입김 때문에 곤란한 상태였다. 그들은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로미오의 커다란 키를 이끌고 부랴부랴 식당으로 들어갔다. 춥다며 손을 비비는 선호가 안 되었는지 동완은 대뜸 저의 주머니에 그의 것을 넣어주었다. 프란체스코와 로미오는 그들의 행위를 똑똑히 보았지만 못 본 척 아까의 화제를 연이어 터뜨렸다. “예약이야 했지. 기본 에튀드 집은 테레사가 전교생에게 선물로 보내줬잖아. 출판된 것들 중에서 없는 악기본이 없더라. 난 콘트라바스 연습곡을 예약했어.” 첼로를 전공하는 프란체스코가 막 받아온 스프를 그야말로 주스처럼 삼키며 신이 나서 떠들었다. 테레사의 에튀드 집 출간! 지난주에 한국과 영국에 출판된 것을 시작으로 세계 음악인들은 너도나도 예약했다. 각지 아마데우스 가십은 테레사의 에튀드 집에 대한 소식이 끊이지 않았다. 한국의 학생들에게는 두툼한 연습곡 한 권이 선물된다는 것 때문인지 아마데우스의 모두는 기승을 부리던 추위로부터 잠시 벗어나서 들떠 있었다. “테레사의 에튀드 집은 차가워도 따끈따끈해 보여. 그렇지?” 동완에게 잡힌 손을 빼 내며 선호가 불쑥 끼어들었다. “선배!” “밥은 먹어야 할 게 아니냐.” “아, 그렇지.” 그런 선호에게 신경질을 부리는 동완의 낯이 홍당무가 되었다. 프란체스코와 로미오는 모르는 척 하고 싶어도 대놓고 선호를 좋아하는 동완이 때문에 지금처럼 곤란한 적이 많았는지 헛기침을 했다. “혜성이 소식도 만만치 않던데…….” 그들의 자리에 테오제네스가 찾아와서 앉으며 불쑥 말을 걸어왔다. 혜성이? 수페리우스? 테레사의 에튀드 집에 열을 올리던 그들은 눈을 빛내며 당장 테오제네스를 집중했다. “또 찍혔나요?” “응.” “어떤 것? 이번에도 실패일까?” “아니.” 테오제네스는 말을 아끼며 느긋하게 빵을 찢었다. 뮌헨의 자잘한 가십까지 직역해서 게시 대에 올려주는 테오제네스 덕분에 한국에서 수페리우스는 함께 지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 수페리우스와 친하다는 특권을 지닌 그들에게 테오제네스는 일부러 복사본을 전달해 줬었다. 가십으로 읽는 수페리우스는 매우 흥미로웠다. 지지난 주, 히스가 난생 처음 들어보는 크리스티안 이라는 놈과 보스턴에 갔다는 소식을 가십으로 접했을 때 한국 아마데우스에는 온갖 추측이 난무했었다. 크리스티안 이라니? 이름 한 번 근사하다. 혹시 히스의 수페리우스가 아닐까? 라며 히스를 은근히 짝사랑하던 학생들은 예민하게 굴었었다. “지난 주 목요일에는 히스가 테레사의 에튀드 1집을 뮌헨 전교생들에게 선물로 배달시켰다던데…….” “히스가 또 테레사를 따라했네?” “…아마도 히스클리프는 절대 아니라고 우길 텐데….” “하하하하.” 식사가 거의 끝날 때 즈음 테오제네스가 반듯한 자세로 앉아있는 미카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수페리우스한테 있는 테레사의 에튀드 중에 ‘피아노 오브 시베리아’ 라는 게 있는데…. 1번은 라르게토 였나 봐. 분위기는 라르게토만으로 대충 상상해 봐… 물론 상상도 안 되겠지만…….” “라르게토? 음… 그렇다면 이번에는…….” “영 시원찮게 평가했대. 그 쪽 교수들이 원래 좀 깐깐한 구석이 있잖아.” “평가를 완벽하게 수료해야지 수페리우스가 한국에 돌아오는 건가요?” 미카엘의 질문이 조용히 나오자 테오제네스의 쌍꺼풀 없는 깊은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 강직하게 반짝였다. 유독 미카엘의 앞에서는 많은 얘기를 꺼내 주는 테오제네스 때문에 기분이 나빠진 동완이 최대한 내용에 집중하기 위해 꽉 입을 다물었다. 테오제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럴걸? 피아노 오브 시베리아가 평가의 전부일 리는 없지만… 작곡과 연주의 기본 평가에서 합격점을 받는 게 수페리우스의 목표라고… …뮌헨의 가십에는 나와 있던데?” “수페리우스가 보고 싶어요, 테오제네스. 우리 다 같이 독일에 갈까요?” “…….” 절대 금기나 다름없었던 문장을 꺼낸 프란체스코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저 혼자 창백해졌다. 그러자 동완이 심술궂은 표정으로 받아쳤다. “관둬요. 우리가 보고 싶기나 하겠어? 걘 지금 자기 음악에 미쳐있어. 가봤자 방해만 될 걸.” “그래. 프란체스코. 5월 콩 쿨 전에 시범 평가가 있다는 건 너도 알 텐데…?” “그게 전부가 아니지. 내일 모레야, 내일 모레… 쇼펜하우어 필기시험…….” “윽….” “그럼, 난 이만.” 테오제네스가 나간 뒤, 선호의 시범 평가라는 구절이 내내 걸렸던 그들은 그 점에 대해서 긴 숨을 내쉬며 떠들기 시작했다. 시험 뒤에는 평가, 평가 뒤에는 시험. 이름만 다를 뿐 내용은 같은 그것들 때문에 골치 아픈 상급생들은 대화만으로도 그래서 기진맥진하기 마련이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사상에 반해있는 몇 몇 교수들이 펼친 이론 수업의 시험이 당장 코앞이었다. 왜 이론수업은 빡빡한 실기와 섞여 있을까? 충족이유율의 네 가지 근원에 관하여 라는 쇼펜하우어의 논문을 줄줄이 읽을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팠는지 프란체스코와 선호는 시체처럼 축 늘어져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심리 론을 좋아하는 동완이만이 최근 쇼펜하우어에 푹 빠진 교수들을 옹호한다는 뜻으로 싱글벙글 웃을 뿐, 테레사의 가십으로 출발했던 대화는 현실에서 보기 좋게 멈췄다. 쇼펜하우어? 음악과 전혀 관계도 없을 텐데! 그들은 웅크린 채 노여운 숨을 내쉬며 각자 기숙사로 흩어졌다. 거하게 저녁식사를 마친 로미오는 순수하게 짓던 표정을 싹 굳혔다. 그는 심기가 불편한 상태로 조용히 데블 관에 들어갔다. 자신을 따라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신중을 기하기 위해 로미오는 이따금씩 주도면밀하게 주변을 살폈다. 반 아마데우스의 지하 장소에 도착하자 쇼너 스타니가 맞아 주었다. 마리아 칼라스 향수를 지독할 만큼 뿌린 탓에 쇼너 스타니의 맵시 있는 옷이며 장화는 향기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코를 움켜쥔 뒤, 로미오가 내내 궁금했던 것을 빠르게 물었다. “왜 독일로 가려고 그래요? 죄다 결항이라던데… 눈이 저렇게 많이 오는데 비행기를 탄다는 건, 죽고 싶다고 하느님한테 편지 쓰는 것과 같아요.” “…….” 몇 몇 동지들이 책을 읽는 조용한 공간에서 로미오가 불평스레 말을 꺼내자 저마다 웃겼는지 피식피식 웃었다. 에튀드 집을 출간한 테레사 덕분에 반 아마데우스는 현재 우두머리 자리가 빈 상태나 다름없었다. 로미오의 불평에 웃음을 억지로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던 쇼너 스타니가 어깨를 으쓱 하며 대답했다. “별 수 없잖아. 테레사는 바쁘니까 이런 일을 우리끼리 왈가왈부 할 수는 없어. 수페리우스가 한국에 언제 올지 모르니까 내가 가서 만나는 게 빠르지.” “…저도 가면 안 될까요?” 이번에도 곳곳에서 후훗! 하며 로미오의 투정을 반가워하는 소리들이 작게 들렸다. 쇼너 스타니는 미간을 찌푸리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안 돼.” “…….” “이자벨이 이렇게나 비협조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지만… 수페리우스가 있으니 상관없겠지. 우리가 실수했어. 테레사의 말대로 학생회와는 연락을 시도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 이게 무슨 소리일까? 쇼너 스타니를 비롯한 모두는 이자벨 이라는 구절이 꺼내지는 즉시 노여운 숨을 내쉬었다. 로미오는 분개했다. “수페리우스가 계속 한국에 있었더라도, 상황은 같았을 겁니다.” “…….” 이번에는 쇼너 스타니가 긴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정말 무슨 일일까? 수페리우스가 약 한 달가량 뮌헨에 있는 동안 반 아마데우스는 어떻게 움직였기에? “허튼 짓은 하지 말고 조용히 기다려라, 이민우. 내가 수페리우스를 만나고 돌아오기 전 까지는.” “…….” 쇼너 스타니는 수페리우스와 만나며 경계를 느슨하게 풀었었다. 그의 첫 번째 실수였다. 그는 로미오를 이용해서 모세에게 접촉을 시도했으며, 모세를 통해 이자벨에게 그들을 알렸었다. 그들은 틀림없이 학생회를 이끄는 이자벨이 자신들의 뜻을 알아주고 테레사의 주관을 믿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현실은 매정했으며 반 아마데우스를 천박한 자로 단숨에 몰리게 했다. 이자벨은 반 아마데우스의 입구로 통하는 데블 관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도중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독을 품은 꽃처럼 한없이 아름답기만 한 그녀는 반 아마데우스를 무참히 거절했다. 겨울의 폭설처럼 굴었다. 그 때 그들은 후회했다. 왜 이자벨에게 반 아마데우스를 알려 줬을까! 수페리우스에서 그쳤어야 하는데! 정당한 정의 구현 따위도 없는 소수의 우리들의 인상이 모든 사람에게 긍정적일 수는 없는데! 순수하게 자신들을 알리려던 반 아마데우스는 자신들의 진정한 뜻과 정보를 그녀에게 알리기도 전에 속수무책으로 무시당한 현재를 테레사에게 보고하려 했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영국의 대형 음악 출판사와의 협의로 보스턴에 없는 테레사와 시간 약속을 잡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의 기둥이나 다름없는 쇼너 스타니는 내일 오전, 독일의 수페리우스를 만나기 위해 한국을 떠난다. 설명하기 힘든 긴장감이 반 아마데우스와 학생회에 팽팽한 줄처럼 당겨졌다. 다음날이 되자 쇼너 스타니는 공항으로 떠나 있었다. 수업과 레슨, 오후의 바이올린 연습까지 모두 마친 로미오가 반 아마데우스 기지에 찾아가기 직전, 마지막이다- 결심하고 모세와 이자벨을 찾아갔다. 이례적인 눈 시위에 푹푹 빠지는 발을 힘차게 걸었다. 이자벨이 사실은 착하고 선량한 사람일거야. 로미오는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학생회가 있는 B동 건물은 이상하리만치 따뜻했다. 다른 건물들보다 훨씬 난방이 잘 되어 있는 건물은 후끈후끈했다. 로미오는 무거운 손을 들어 학생회실 도어를 열었다. 영혼에 가시를 단 것처럼 이자벨은 차갑게 맞아 주었다. 긴 테이블 상석에 앉아서 무언가를 체크하며 모세에게 지시하던 이자벨은 그 외 나머지 학생회 인원들에게는 나가 보라고 고개 짓을 했다. 그 뒤, 10분도 지나지 않아 파랗게 질린 로미오가 조심스레 열었던 처음의 문을 걷어차더니 씩씩대며 나왔다. 그는 당장 반 아마데우스의 기지로 달려가서 방금 들었던 것들을 떠들며 화를 냈다. 잠잠했던 석유 불에 거대한 기름을 던진 꼴이었다. ‘뭐가 나의 진의 뜻이라는 건가? 나의 진은 그런 몰상식한 일을 주도할 인물이 아니지. 그는 현재 영국에서 에튀드 집 출간으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어. 감히 그의 이름을 입에 담고 이용하려 들다니… 반 아마데우스의 한계인가? 하하하하. 가엾은 워싱턴군…. 병약한 네 다리로 썩 사라지지 않으련?’ 이자벨! 그런 인물이었나? 그녀의 음성을 듣는 내내 로미오의 영혼은 말라버렸다. 불처럼 다시 살아나는 것은 창창한 미래가 아닌, 불같은 열정과 상처받은 젊음이었다. ‘교수님들과 회의를 했단다. 가여운 신입생이여… 네가 홀린 그 썩은 단체는 없애기로 했지. 기다려라… 학생회장으로서 그 정도는 구제해 주지.’ 뭐라고? 없앤다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반 아마데우스를 무작정? ‘그들은 미치광이라고 들었다. 가여운 순례자의 넋을 구해 줄 테니… 그대는 미친 단체가 없어질 때를 조용히 기다려 주면 돼.’ 쇼너 스타니, 테레사, 수페리우스까지 없는 현재, 로미오는 감정적으로 불거진 현재를 능수능란하게 처신할 능력 이라는 게 없었다. 그러기에 그는 너무 젊었다. 근 한 달 사이 학생회와 접촉을 시도하려다가 실패했던 일, 모세의 비아냥거림, 이자벨의 폭언, 나아가 반 아마데우스를 간단하게 없애기로 교수들과 합의를 봤다는 소식은 이성적으로 버텨왔던 로미오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찌꺼기의 모양새로 소리치며 반 아마데우스를 지휘하던 이성은, 겨울이 마비시켰다. 지하의 동지들은 로미오의 소식에 경악하며 크게 품었던 뜻을 어그러트리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테레사를 처음부터 믿지 않은 무리들은 도리어 잘 됐다는 식으로 비아냥대며 분노했다. 로미오는 쇼너 스타니가 앉던 빈자리에 서서 이글대는 눈에 힘을 주어 소리쳤다. “우리가 미치광이라고?” 한꺼번에 터진 여러 복잡한 감정이 로미오를 유혹했다. 괴롭혔다. 어린 시절부터 받았던 가난에의 형벌마저 지금 이 순간 들쑤셨다. 때마침 지하에 모인 소수의 동지들은 테레사의 사상에 동화되어가는 반 아마데우스의 인파들을 썩 달가워하지 않는 무리들이었다. “여왕이신 이자벨의 우아한 선언을 반 아마데우스는 공격으로 받아 치리다.” 자신을 추켜세우는 반 아마데우스의 또래 무리들 앞에서 로미오는 불끈 쥔 주먹으로 테이블을 치며 격하게 포부를 내리꽂았다. 그렇게 잔인한 겨울이 짙어져간다. 진정한 정의란 과연 무엇일까? 아뉴스데이 I 시련 속에 피어난 꽃이 가장 향기롭고 튼튼한 뿌리를 지닐 수 있다지만, 시련 이라는 이름 자체는 힘들었다. 수페리우스는 자신의 연약한 가지에 쌓이는 폭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크리스타인 덕분에 너덜너덜해진 에튀드 집 중 4번, 피아노 오브 시베리아 1악장을 연주할 때면 특히나 더 눈이 오는 기분이었다. 피아노 오브 시베리아. 테크닉 요구 수준이 다른 바리에이션 만큼이나 상당했다. 멋진 음계와 악곡명이 있는 이상 이것은 에튀드라는 이름이 무색한 정열의 악장이다. 따라서 연주를 독파했을 때의 쾌감은 테레사와 입맞춤을 한 것만큼이나 짜릿했다. “아, 사비나 교수님. 함께 가 주시는 건가요?” “그래. 평가 때는 같이 가 주기로 했으니까.” “고맙습니다.” 오후 네 시, 별채에 찾아주신 사비나 교수님께 공손히 인사하며 수페리우스는 악보들을 챙겼다. 오늘은 세 번째 치러지는 평가 일이었기 때문에 다른 때보다 많이 긴장되었다. 히스가 떠나간 뒤, 이틀 가량 시름시름 앓는 모양새로 지냈던 수페리우스가 번쩍 정신을 차린 것은 계기가 없었다. 그냥이었다. 시간의 속도와 경쟁하는 현실이 번쩍 떠오른 게 전부였다. 그 때부터 이상하리만치 몸은 기계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매정한 테레사와 마찬가지로 자잘한 소식은 일체 끊어버리는 히스의 방식은 탁월했다. 아이는 뮌헨의 아마데우스를 정벌하려는 장군처럼 오직 한 가지에 열을 올렸기 때문이다. 살을 에이는 추위 즈음이야, 헐벗은 채로 뛰놀아도 축축한 땀이 전혀 마를 새 없는 뮤즈의 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리라. 키르혜아이젠 교수와 히스가 부탁한 네 명의 교수님이 함께 참석하는 평가 시험은 난이도가 상당했다. 음악 향상 연주기법 시험은 일주일에 두 번 꼴로 치러졌는데, 최종 관문은 작곡으로 평가된다. 수페리우스는 그것을 통달해야지 뮌헨 아마데우스에서 완벽한 교환학생 수료증을 받게 된다. 독일어를 통역해주기 위해 사비나 교수는 평가 때마다 늘 함께 해 주었다. 룸펜에서 연주한 이후로 공식적인 자리에서 단 한 번도 누른 적 없던 테레사의 에튀드 집은 독일 교수들에게 호평을 샀다. 다른 것들보다 훨씬 난이도가 세련되고 웅장한 테레사의 것을 수페리우스가 단독으로 지녔다는 것에 독일 교수들은 큰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실력 면에서 그들 눈에 단순하게 비쳐지는 수페리우스는 개인 성향 기교라는 게 아직 없었다. 은어의 손놀림까지는 필요치 않아. 나만의 격정이, 스타일이 분명히 있을 거야. 수페리우스는 연습으로 까칠해진 손 마디마디를 주무르며 오르페우스 관의 지하 평가 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섯 명의 교수님들께 허리 숙여 인사했다. 사비나가 착석하는 즉시, 수페리우스는 경건한 마음으로 피아노 오브 시베리아 4번을 치고 들어갔다. 비바체의 4번은 이름만큼이나 빨랐으며, 물기를 머금은 새벽 풀잎처럼 싱그러웠다. 최대한 건반에 집중하던 혜성이 약간 미스를 낼 때를 제외하고, 연주는 연습 때보다 향상된 실력을 보였다. “!” 휙! 꺾어지는 음 부분에 저 스스로가 동화된 수페리우스가 팔을 쳐들자 그의 목이 따라서 올라왔고, 그를 지켜보던 교수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건반의 움직임은 아주 깔끔한 편에 속했다. 낭랑하고 리드미컬한 선율은 지난 번 1번 라르게토와 견주어도 좋을 만큼 세련되었다. 셋잇단음표와 8분의 3박자 단조 부분을 건드릴 때는 테레사가 어떻게 이런 경쾌함을 순식간에 악장에 적었는지 감탄할 정도였다. 훅- 숨을 내쉰 수페리우스가 2분 45초의 시베리아 4번을 끝내며 턱을 쳐들었다. 약한 숨소리와 발랄한 심장 소리가 공간을 넓게 채웠다. 손목에 경련이 일어날 만치 방금 전의 연주가 스며들어가서 피아노 오브 시베리아는 계속 되는 기분이었다. 평가 연주가 끝난 뒤, 독일 교수들은 사비나에게 뭐라고 진중한 투로 설명해 주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수페리우스는 긴장했다. 이번에는, 이번에는 괜찮지 않을까? 히스가 떠난 뒤로 오로지 연습과 맹훈련을 계속해 왔어. 질버른 교수는 이제 내 왼 손의 힘이 많이 좋아졌다며 베토벤을 시도해 보라고 할 정도인데…? “수페리우스.” “예.” “…다음 주에 다시 한 번 라르게토를 연주 해 보렴.” “…….” 지난주에 홀대 받았던 1번 라르게토를? 그것은 좋은 평가일까, 나쁜 평가일까. 알 수 없다. 싸늘해 보이는 교수들의 인상은 그 이상 부연설명을 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번쩍! 수페리우스의 뇌리에 지난주 실패했던 1번 라르게토의 음률이 메아리쳤다. 평가가 끝날 때마다 뮌헨의 인쇄 동은 수페리우스에게 관심을 보였다가 있는 그대로의 혹평을 적었었다. 늘 실패였는데, 이번에는 지난주의 것을 다시 연주하라고 했으니까 나아졌다는 걸까? 아리송해진 기분으로 수페리우스는 예의바르게 인사를 한 뒤 사비나 교수와 오르페우스 관을 벗어났다. 지독한 눈이 어김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학생의 레슨을 봐 주기 위해 수페리우스에게 손 관리를 잘 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부드럽게 다른 쪽으로 사라졌다. “손 관리라…….” 허공에 오른손을 치켜 올리며 수페리우스는 골몰했다. 가슴이 뛰었다. 여기서는 실패해도 괜찮았다. 그들은 질타하는 게 아니라, 향상을 위해 언제나 지적하는 게 습관화되어 있으니까. 그들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 물론 히스가 떠난 뒤, 제일 처음 갖았던 평가 시험 때는 많이 긴장한 탓에 싸늘한 혹평에 밤이 새도록 울었었다. 그러나 익숙함 이란 실로 좋은 단어였다. 혹평에 익숙해지니 작은 말의 변화에도 가슴은 샘솟듯 뛰었기 때문이다. 짧은 서주를 지났을 때, 분명히 지난주보다 향상된 실력을 증명시켰어. 4번 연주곡은 지난 번 평가 때보다 훨씬 어려운 곡이었는데… 질버른 교수는 나에게 베토벤을 연주해도 괜찮을 거라며 왼 손이 향상된 것을 알려줬고… 그럼 괜찮을 거야. 이틀 후, 최종시험 관문인 작곡을 앞두고 수페리우스는 묘한 통지를 받았다. 이따금씩 같이 식사를 해 주는 유지가 건네 준 종이는 사비나의 필체가 가지런히 적혀 있었다. “이걸 사비나 교수님이 전해 주랬어?” 사비나 라는 이름만 알아들은 유지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히스가 떠난 뒤, 유지신은 아이가 뭐라고 말을 않아도 곧잘 식사를 함께 해 주었다. 비록 각자 나라의 말로 떠드는 게 전부였지만 이상하게 공감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수페리우스는 사비나가 적어준 쪽지를 읽는 즉시 오르페우스 관의 피아노 연습실에 들어갔다. 자신이 예약한 시간에서 15분가량이 지체되어서 남은 시간은 3시간 45분밖에 되지 않았다. 여기서의 시간은 금과 같기 때문에 절대로 어겨서는 안 된다. 아이는 서둘러 연습곡들을 두루두루 치던 도중,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 1차 작곡 평가가 함께 있을 거란다, 수페리우스. 긴 악장은 필요 없어. 네가 할 수 있는 만큼 해 봐라. 작곡 부분을 자세히 배우지 않았다는 걸 여기 교수들도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염려할 건 없어요. 네 기량을 알아보려는 취지니까. - 작곡이라는 부분은 그나마도 없던 시간을 잡아먹기 충분했다. 연습하기에도 턱없이 모자란 시간인데 어떻게 작곡을 할까. 오르페우스 관에서 연습이 잘 되지 않아서 은근히 짜증이 나던 찰나, 번개처럼 스쳐가는 영상이 아이를 피아노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게 했다. “유리가 말했던 그 악보!” 『 연주 하는 도중에 손가락이 부러지겠는걸요. 무서운 악보에요. 』 전부 다는 아니지만, 분명히 히스의 도움으로 룸펜에서 작곡했던 기억이 태양처럼 번쩍였다. 아이는 자신에게 예정된 나머지 연습시간이 아까웠지만, 서둘러 오르페우스 관을 나왔다. 몇 몇 학생들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수페리우스에게 인사했다. 아이는 그 때마다 활짝 마주 웃었다. 『 틀림없이 손가락에 말도 못 할 경련을 일으키고 연주자를 미치게 할 거에요… 이 악보를 제대로 완성시켜 봐요, 선생님. 』 정다운 종달새처럼 감미로운 유리의 음성이 떠나지 않는다. 왜 생각을 못했지? 뮌헨에 오는 때부터 워낙 정신없이 지내서 히스에게 그 악보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어. 이럴 수가. 그 악보를 찾지 못해도 기억해 보면 비슷하게 완성할 수 있을 거야. 기간은 짧지만 사비나 교수님은 짧게라도 부분적으로 완성된 곡을 치면 된댔으니까…! 히스의 흔적이 만연한 별채에 돌아오는 즉시 수페리우스는 자신이 가져왔던 짐 꾸러미를 모두 풀어헤쳤다. 산처럼 높이 쌓여진 악보들을 마구 뒤지며 동동 발을 굴렸다. 뭔가 끼적인 것들은 상당한데 이 중에서 어떻게 찾지? “으…….” 식사도 거른 채 몇 시간이나 악보들을 뒤지던 혜성이 마침내 포기했다는 취지로 피아노 방에 드러누웠다. 휙~ 흩날리는 악보들이 수페리우스의 리듬에 밀려 옅게 날아갔다. 무의식중에 저 쪽에 날아가는 악보를 누운 채로 잡은 수페리우스는 무감동한 낯으로 그것을 무심히 쳐다봤다. “!” 그리고 벌떡 일어나 앉아서 눈을 크게 떴다. 아이는 맘속에 크게 소리쳤다. 찾았다! 찾았다! 금을 캐 낸 보석 꾼처럼 수페리우스는 단숨에 쟁취한 활력을 무기삼아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유리에게 찾아달라고 부탁했던 악보를 아이러니하게도 너저분하게 널린 것들 틈에서 우연히 찾아낸 것이다. 쿵쿵쿵. 쿵쿵쿵. 불벼락을 피해 달아나는 마차처럼 심장이 뛰었다. 『 연주 하는 도중에 손가락이 부러지겠는걸요. 무서운 악보에요. 』 유리의 음성이 휙 스쳤다. 그 당시에는 유리의 말이 지나친 상상이라며 가볍게 지나쳤지만, 현재에 다시 읽는 악보는 그녀가 옳았다며 승리의 기를 펄럭였다. 뮌헨에서 한 달 내내 피아노와 씨름한 보람이 있는 걸까? 테레사의 에튀드, 특히나 최근 연습했던 피아노 오브 시베리아를 통해 악보를 가늠하는 정도가 향상 된 걸까? 어쨌든 좋다. 자신이 작곡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치해 보였던 지난날의 흔적이 지금은 아주 다르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깨달았다. 작곡이야말로, 작은 마디라도 자신의 스타일을 표출할 수 있는 기회임을! 키르혜아이젠 교수의 레슨에서 받았던 영감과, 건반을 놀리는 테크닉의 구성을 간간히 떠올리며 수페리우스는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겠는걸.” 악보의 작은 부분을 고치려던 수페리우스는 원곡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학교를 자퇴한 뒤 절망의 밑바닥에서 만들었던 이 곡은 그야말로 짙게 찰랑이는 지옥의 물처럼 고통을 호소하고 있어. 바꾸면 안 돼. 현재의 충만함과 결합될 거야. 테레사의 에튀드 집의 끝부분에 있는 라르게토. 피아노 오브 시베리아 1번 곡, 그리고 룸펜에서 만들었던 자신의 피아노곡을 꾸준히 연습하며 수페리우스는 1주일을 보냈다. 시간은 화살에 쏘여 도망치듯 순식간에 지났다. 일주일 내내 거의 잠을 못 잔 수페리우스의 눈 밑은 다크 서클로 칭칭 감겨 있었다. 사비나 교수는 수페리우스의 안색을 보는 즉시 깜짝 놀라서 대뜸 아이의 손목과 손가락을 확인했다. 그녀는 상기된 낯으로 기쁘게 말했다. “살이… 단단해 졌구나? 수페리우스. 뼈마디는 하얗게 가늘어졌어.” “…….” “작곡 이라는 게 부담 되었던 거니? 네 수준을 평가하려는 것 이상 아무 의미가 없는 거야.” “…….” 수페리우스는 멍하게 걸었다. 평가일이 되었지만, 그래서 사비나 교수와 동행하는 현재이지만, 이상하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기분이었다. 시큼한 식초를 삼킨 것처럼 뇌는 저릿저릿했고 만물은 추위로 감아버렸지만 손바닥의 흥건한 땀은 오히려 양이 많아졌다. “…….” “…….” 아이가 말이 없자 사비나 교수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아는 것이다. 자신의 창조물을 세상에 보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녀 역시 학생시절 겪었기 때문에 아이를 이해하고 있었다. 수페리우스는 얼떨결에 밀어붙여진 형식으로나마 자신의 창조 곡을 독일 교수들에게 들려줘야 했기 때문이다. 사비나의 예상은 바로 맞았다. 여느 때처럼 공손하게 인사하는 것조차 생략한 수페리우스는 키르혜아이젠 교수들이 지시하기도 전에 피아노 건반을 눌렀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뮤즈 세상을 타인에게 펼칠 때의 짜릿함은, 설령 패배가 기다린 들 식욕보다 왕성해진 상태로 영혼을 뒤흔들었다. 제일 처음 시작된 것은 그들이 지난주에 지시한 피아노 오브 시베리아 1번 이었다. 느린 장송곡과도 같은 웅장하면서도 세밀한 곡이 차차 퍼지자 교수들은 집중하기 시작했다. 건반의 느린 속도는 피아노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있는 수페리우스의 어깨 리듬과 똑같았다. 손가락을 놀리는 테크닉도 확실히 향상되었다. 단기간 내의 완벽한 집중과 스피드 적 기교 향상. 테레사의 수페리우스가 어떤 인물인지 그들은 보면서도 딱 부러진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예측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초기 평가 때는 분명히 미진하고 평범하게 다가왔던 수페리우스의 피아노 실력은 또래 클래스 학생들의 향상 면보다 월등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청각은 정확한 것만 속속들이 받아들였다. 땅-! 낮은 단조 음이 모두 눌러지는 느린 박자에서 수페리우스의 온 몸이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는지 키르혜아이젠은 몸을 움찔했다. “…후욱…후~” 피아노 오브 시베리아 1번이 끝나는 즉시, 수페리우스는 작게 호흡한 것을 들이 마시기도 전에 자신이 작곡한 곡명을 알려 주었다. “미완성 작품 1번. 다뉴브의 밤. 짧은 부분 소나타 입니다.” “!” “!” 다뉴브의 밤. 우아한 강물이 노을을 훔친 뒤 밤을 맞아 출렁일 때의 느낌. 곡명은 신기하리만치 혜성의 창조곡과 어울렸다. 사비나 교수가 제목을 통역해 주는 즉시, 수페리우스는 가지런히 정자세를 취한 뒤 다뉴브의 밤중에서도 2악장 비바체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 그 때, 한 교수가 벌떡 일어나서 수페리우스가 앉아있는 피아노 쪽으로 단숨에 걸어왔다. 고고한 턱의 수염을 만지작거리던 다른 교수 한 명도 같이 달려왔다. 그들의 체통은 완전히 사라졌다. 키르혜아이젠 교수의 손가락이 수페리우스의 피아노 속도와 비슷하게 허공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세상은 겨울이지만 다뉴브 강의 밤은 봄으로 출렁였다. 탁한 밤의 강물은 약하게 오른손으로 치고 들어가고, 곧이어 왼손이 똑같이 오른 손 부분에 맞춰 주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유리가 언급했던 연주자의 손을 갉아 먹는다는 부분은 배제한 뒤, 되도록 쉽고 발랄한 악장을 연주하는 내내 혜성은 눈을 감았다. 악보는 벌써 외웠으며 자신이 만든 창조 곡은 안 봐도 어떤 느낌인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 교수들 전원이 수페리우스가 연주하는 곁에 나란히 서서 심각하게 지켜보았다. 눈을 감고 연주에 심취한 아이는 그것들을 몰랐는지 노련한 솜씨로 건반 위를 놀았다. 1분가량 되는 짧은 부분이었지만 비바체의 연주는 상냥하고 귀여웠다. 아니다. 다르게 해석하면 앞의 폭풍과 뒤의 잔해를 감추려는 듯 교묘했다. 교수들의 시선은 이 상냥해 보이는 악장의 앞과 뒤에 있을 잔인한 곡을 유추하느라 분주했다. “끝났습니다.” 연주를 마친 뒤, 혜성이 기분 좋게 웃자 교수들은 그제 서야 약간 머쓱한 낯으로 제자리에 돌아갔다. 사비나 교수님은 감정조절이 되지 않았는지 흐느끼듯 웃어주며 수페리우스를 껴안아 주었다. “교수…님…?” “테크닉이 말도 못하게 진지하면서도 향상되었어….” “…….” “…최근에 작곡한 게 아니구나….” “……!” 어떻게 아셨지요? 라고 반문하기도 전에, 사비나는 다정하게 속삭였다. “일부러 감춘 듯 한 열정이, 비아냥거리듯 악장에 쓰여 있어. 표현 되었어. 그래서 발랄하고 가벼운 음악이었지만 이상하게 서늘하고 두려웠지. 다뉴브의 밤… 그것의 전체 악장이 기대 된다.” “아….” 사비나 교수는 그 말을 끝으로 토론 중인 교수들에 섞였다. 다른 때처럼 짧은 통보를 기다리기 위해 수페리우스는 가지런하게 서서 그들을 마주 봤다. 그러나 오늘의 통보는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수페리우스는 덜컥이는 심장을 추스르기 위해 몇 번이나 주먹에 힘을 주었다. 사비나 교수 역시 혹독한 그들의 빠른 말들을 통역해 주느라 잠시도 입을 쉬지 못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어쩐 일인지 공포에 칭칭 감겨있다 라고 느낄 때 즈음, 기가 막힌 결과가 휙휙 날아왔다. “테레사가 최근 출간한 에튀드 중, 피아노를 위한 연습곡 5권에 있는 소나타와 흡사하다.” “!” 철렁- 심장이 떨어졌다. 기대로 충만했던 눈동자는 삽시간에 분노로 역류했다. “작곡에 문외한인 걸로 알지만, 방금 곡은 썩 괜찮았다. 하지만 테레사의 5권 바리에이션 9번을 흉내 낸 것으로 해석된다. 그를 흉내 낸 건가, 수페리우스?” “!” 교수님들의 빠른 독일어를 통역해주는 사비나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멋진 연주였지만 어디선가 들어본 비슷한 곡이라는 소리다. “테레사가 장님이 된 후, 밑바닥의 절망에서 만든 곡 중 소나타의 부분 칸타빌레와 흡사해.” 악평은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수페리우스의 온 몸이 덜덜 떨렸다. 이것은 그들이 평상시 냉정했던 태도에 상처받은 것과는 비교 할 수도 없는 분노였다. 아이는 소리쳤다. “나의 곡이예요!” 이럴 때는 어떻게 처신해야 현명할까요. 테레사, 테레사! “이건 나의 곡입니다! 테레사의 출판물은 저도 아직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테레사가 절망 속에서 만들어 낸 소나타의 부분 칸타빌레. 그리고 수페리우스 역시 절망 속에서 만들어낸 다뉴브의 밤 중 비바체의 짧은 소나타. 둘은 거의 똑같다는 것으로 결론이 모아졌다. 이럴 수가! 혜성은 자신의 말을 믿으려 않는 교수들에게 진심으로 크게 소리치며 분개했다. “나의 창작곡 입니다! 정말 이예요! 제가 룸펜에서 만들었던 곡입니다!” 사비나의 젖은 눈 밖으로 짙은 물기가 떨어졌다. 그에 흠칫 놀란 교수들은 어떻게 결과를 내려야 좋을지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수페리우스와 사비나를 지켜보았다. 결론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수페리우스는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사비나 교수와 함께 오르페우스 관을 나왔다. 이번 주의 평가는 끝났다. 평소 때와 아주 다른 결과와 부닥쳤으며, 최종 결과는 추후 통보라는 매정한 글자만이 날아들었다.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내 곡이 어째서 테레사의 것과 비슷할까? 나의 순수 창작곡을! 그가 장님이 되어서 절망하던 때, 나 역시도 절망을 이기며 그 시기에 만들어 낸 것인데? 이성을 얼어붙게 하는 폭설의 계절. 이례적인 날씨처럼 날아오는 뜨거운 사건들은 사람처럼 예쁜 미소를 지었다. 그 날 밤, 뮌헨 아마데우스 가십 란에 수페리우스의 평가 결과가 부착되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에 쇼너 스타니가 뮌헨 아마데우스로 찾아왔다. 폭설로 뒤덮였던 세상은 거대한 회오리의 형상으로 뭉치고 있었다. 메일로 '나'님이 주신 표지입니다. 고맙습니다. wgreene@naver.com 아마데우스 2악장 협주곡 제 18번 아뉴스데이. 빠져 보시겠습니까? 덧글 16개 엮인글 쓰기 /data18/2006/10/28/69/1-wgreene.gif@nhn@192229@nhn@1@nhn@720@nhn@541/data19/2006/10/28/156/1-wgreene.gif@nhn@192229@nhn@1@nhn@720@nhn@541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64편(아뉴스데이I) /data18/2006/10/28/69/1-wgreene.gif@nhn@192229@nhn@1@nhn@720@nhn@541/data19/2006/10/28/156/1-wgreene.gif@nhn@192229@nhn@1@nhn@720@nhn@541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64편(아뉴스데이I)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65편 ▼ 다음글 - 2악장 62~63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65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10/28 19:33 http://blog.naver.com/wgreene/110010216861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1028 65편 업데) Amadeus 음악 : Rhapsody (Single)/트랙스 (Trax) (재생버튼클릭) Rhapsody-트랙스 (Trax) 아뉴스데이 2악장 65편 별채의 창문은 밤바람이 아프다며 비명을 질렀다. 그것들과 섞인 뇌는 똑같이 갈라진 소리를 내면에 쏟았다. 들어라, 나의 음악이다! 나의 멜로디야! 나의 악장이 살아서 숨을 쉬고 있어! 룸펜에서 느꼈던 고독과 용수철처럼 튀었던 향긋한 그리움의 세상이 묻은 칸타빌레! 나의 영혼, 나의 증명, 나의 것이다! 격분한 심장이 명령을 내렸다. 아이는 시종일관 가쁜 숨을 내쉬며 명령대로 건반을 마구 눌렀다. 사비나 교수님이 찾아 온 건 그 때였다. 그녀는 수페리우스에게 손님이 찾아왔다는 말로 깜짝 놀라 켜 주었으나 아이는 작은 반응조차 없었다. 그래서 사비나는 내일까지 참으려던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수페리우스.” “…….” 아이는 대답 없이 아무렇게나 건반을 누르며 취한 것처럼 몸을 움직였다. 건반이 살려달라며 비명을 지른 들 마비 된 청각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창작물이 다른 이의 것을 따라했다는 평은 상상 이상의 괴로움을 동반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대가 다름 아닌 테레사라는 것, 그의 고통의 산물이라는 것을 아이는 이성적으로 버티며 고민할 수조차 없었다. 그가 원망스럽고, 그를 원망해야 하는 스스로가 힘들었다. “네 평가 결과 가십이 막 붙여졌다고 한다.” “!” 번쩍! 고개를 쳐들고 수페리우스는 굳었다. 사비나는 그의 턱이 얼마나 떨리는지 목격하며 손을 내밀었다. 경직된 아이의 손가락은 건반을 누른 상태에서 영혼을 이탈시킨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내일 오전 확인하면 되지만… 가자, 수페리우스. 너에게 내가 직접 확인해 주마.” “…….” 아이는 천천히 사비나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시키는 대로 코트를 걸친 뒤 별채 동을 나섰다. 사무동에 거의 도착할 때 즈음에서야 수페리우스는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손님이 찾아 왔다 구요…? 이 밤중에…? 누가 찾아 왔나요…?” 음성에는 색이 없었다. 시선은 까만 회오리의 밤보다도 격한 암흑밖에 볼 줄 몰랐다. 눈물을 흘려야 할까? 나는 아프답니다- 또 다른 악장을 만들까? 자연의 꾸짖음 속에서 미약한 인간의 뇌는 어리석어 한 가지밖에 읽을 수 없는 걸. 어떤 말을 해도 음성이란 못난 자식은 기쁨과 쾌활함, 분노와 호기심조차 없이 뱉어지는 글자일 뿐이었다. 질문을 던지는 수페리우스나 대답할 거리가 없는 사비나 역시 손님에 대한 것은 관심 없는 상태였다. 의례적인 질문을 마친 뒤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다뉴브의 밤만이 끊임없이 울렸기 때문이다. 잔인하리만치 용맹한 아마데우스여! 네 뜨락을 밟고, 너를 안다고 자부하는 지금까지도 무지의 늪은 여전했다. 상처 입은 내 발은 너로부터 나아갈 수 없다. 은종이 울린 들 분노로 일렁이는 내면은 너를 원망하는 속도를 줄일 수 없다. 화려한 눈 시위는 너의 웃음처럼 차갑고 아프기만 하다. 아마데우스, 그 누구의 것이던가! 나는 이렇게 억울하고 고통스러워서 늪에 빠진 채로 팔을 벌리는데! 너는 저 하늘 위에서 웃고 있다. 아름다워서 숨도 못 쉴 정도로 처절하게! 신이 계시다면, 공평하시다면! 실 낙의 늪에서 영원토록 안식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 나는 늪을 이해하는 대지이고 싶습니다. 결코 태양이 되고자 욕심 낸 적이 없습니다! 혹시 아십니까? 그 어떤 것이라도 태양을 사랑하는 이 못난 심지는 뽑을 수 없다는 것을. 쇼너 스타니는 뮌헨 아마데우스 사무동으로 자신을 맞으러 온 혜성을 비롯하여 그와 나란히 걸어오는 사비나 교수를 보더니 흠칫 놀랐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늘 정갈한 그였지만 워낙 급한 시안이기 때문에 요란한 차림새였다. 사비나 교수님은 그러나 쇼너 스타니의 정중한 인사를 받으며 자비롭게 웃어주었다. 그녀의 따뜻한 말투는 한국에서부터 뮌헨 아마데우스까지 한걸음에 달려오느라 피로한 심신을 염려해 주었다. 쇼너 스타니는 멋쩍게 웃으며 자신은 전혀 피곤하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수페리우스는 환하게 웃으며 맞아 주었지만 웬일인지 그 안의 비장한 표정까지는 감추지 못 한 실정이었다. “잠깐만 기다려요, 쇼너 스타니. 방금 올라온 가십을 확인해야 하거든요. 내일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사비나 교수님과 사무동에 왔는데 당신이 왔다니 뜻밖입니다.” “…그래. 기다릴게.” 오래된 골동품처럼 변한 수페리우스의 모습은 하얗게 윤이 났다. 쇼너 스타니는 그가 살아서 움직이는 인형으로 비쳐져서 여러 번 눈을 깜빡여야 했다. 주인의 정성스러운 보살핌 속에 꽃처럼 자란 독을 지닌 러시아 인형이나 진배없었다. 수페리우스의 하얀 미소는 마치 누군가가 웃어라! 라고 명령을 내린 것 만치 살벌했다. “교수님. 뭐라고 적혀있나요…?” “!” “…….” “오… 수페리우스.” 사비나는 차가운 복도 벽에 부착된 가십을 읽는 도중 눈물을 흘렸다. 혜성의 마음은 더 할 나위 없이 초조해졌다. 안 그런 척 내색하는 중이지만 그것이 언제 폭발할 지 모를 노릇이었다. 테레사의 악장을 내가 따라했다고? 천만에! 나는 결백 한다. 나는 증명할 수 있다. 증명할 길이 있을 거야. 마음은 억척스러울 만치 단단한 기둥으로 자라 있었다. 쌀쌀한 날씨와는 달리 손목은 후끈한 열기와 긴장감으로 축축했다. “교수…님…?” 별안간 그녀는 자신의 옆에 있는 수페리우스를 꼭 끌어안았다. 평소 때와는 달리 진한 포옹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실패, 실패인가? 그녀의 품속에서 두 눈을 꼭 감은 수페리우스의 입가에 탄식의 숨이 빠져나갔다. 고독해진 마음은 스펀지처럼 구멍이 뚫려서 휑한 바람이 스쳤다. 지독한 혹평이 기다리고 있을까? 괜찮아. 혹평 따위는 많이 겪었어. 지난 한 달간 내내 들었던 소리들 따위는 괜찮아. 내가 바라는 건, 내가 기다리는 건, 테레사의 절망과 나의 절망은 각자 따로 라는…! “이제 평가는 없을 거다, 마법의 러시아 인형아….” “……?” 그녀의 억양은 아주 엉망이었다. 짙은 밤의 추위마저 그녀의 흥분한 상태를 이기지 못했다. 쇼너 스타니가 가까이에 있다는 것 마저 상실한 사비나는 흐느끼며 품속에 경직해 있는 수페리우스의 등을 쓸어주었다. “다뉴브의 밤 전체 악장을 5월 콩 쿨 때 들어 본 뒤, 너에게 최종 수료증을 주겠다고 키르혜아이젠 교수측이 발표했어!” “!” 오, 하느님. 아이는 번쩍 눈을 떴다. 그녀에게 안긴 채로 혜성의 온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 말은 즉, 너의 작곡 실력 기본 평가를 인정했다는 뜻이다. 무지한 상태에서는 따라 할 수 조차 없는 음계였으니까.” “!” “믿어지지 않는다! 아까의 악평 이후로 후한 처사는 없는 게 교수들의 당연한 관례였는데! 웃어도 괜찮아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너는 5월까지 증명하면 되는 거야….” 그녀는 그런 식으로 판도라의 상자 중 마지막 희망을 담아 주었다. 힘없이 허공에서 방황하던 수페리우스의 양 팔이 사비나의 등에 둘러졌다. 여전히 떨리는 팔처럼 덜덜 떨리는 음성을 열었다. “그를….” “…….” 기회의 창이 열렸다. 아이의 뺨을 타고 주르륵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기쁨과 설렘은 그런 식으로 표현되기 마련이다. “그분을….” “수페리우스…?” 혹평에 능한 독일 교수들의 뜻을 모를 리가 없다. 그들 역시 테레사와 수페리우스의 곡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믿겠노라 가십은 말하고 있었다. “뛰어 넘을 수 있는… 첫 번째 기회이자 관문 이예요….” 하느님, 감사합니다. 마음은 봄의 창공을 노니는 새처럼 펄럭였다. 이제 남은 것은, 앞으로의 ‘증명’이라는 거대한 불꽃이다. 창공은 날아다니라고 있는 것이다. 날개가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저 하늘을 휘젓고야 말겠어. 증명해 보이겠어. 내 날개의 거칠고도 용맹한 비상을 만들어 보이겠다. 반드시. 정체가 모호한 수페리우스의 감정변화를 묵묵히 지켜보던 쇼너 스타니는 다음날 오전이 되어서야 자신이 뮌헨에 온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이자벨처럼 무시하면서 화를 내거나, 테레사처럼 당장 지시하는 것 따위도 없이 수페리우스는 별채 응접실에서 조용히 코코아를 들이키기만 했다. “아,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설명해 주세요, 쇼너 스타니. 듣고 있습니다.” 가끔 하는 말은 저것이 전부였다. 사비나 교수님이 별채에서 레슨해 주기로 한 오전 아홉시 까지 수페리우스는 잠자코 앉아서 듣기만 했다. 반 아마데우스가 겪었던 한 달 동안의 어려움을 낱낱이 떠들던 도중, 쇼너 스타니의 머릿속에 경쾌한 울림이 스쳤다. 그는 쭉 이야기하던 것을 저도 모르게 중단한 채 진정 놀랐다는 표정으로 수페리우스를 응시했다. “…왜요. 목이 마른 건가요?” “…아니….” 쇼너 스타니가 말을 중단한 이유는 두 가지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진심으로 감탄한 것이다. 상대의 말을 차분하게 들어주는 수페리우스의 자세, 이 때 화자는 내용을 얘기하면서 저도 모르게 방법을 생각해내기 마련이다. 쇼너 스타니가 바로 그러했다. 수페리우스의 경청하는 자세, 그리고 말을 하는 도중 화자가 깨닫는 무엇. 쇼너 스타니는 이 두 가지에서 얼어붙었다. 이자벨 장이 감정적으로 자신들에게 나왔다면, 반 아마데우스 역시 그녀를 감정적으로만 보았다는 게 딱 느껴져서 였다. 이럴 수가. 이민우를 탓할게 아니었어. 여기까지 날아 올 필요도 없었어. 반 아마데우스가 이성적이라고 우겼듯이 이자벨 장 역시 저가 이성적으로 판단한 거라며 우겼던 것뿐인데. 결국 양쪽 모두는 감정적으로 서로를 봤다는 건가? 쇼너 스타니는 수페리우스에게 차례대로 떠들던 도중 꽃처럼 핀 저의 결론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괜찮아요?” “…수페리우스.” “예.” “당신은 정말 테레사처럼 리더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 “잉? …그게 무슨 소리지요?” 수페리우스가 그를 부축하여 의자에 앉혀 준 뒤, 상냥하게 말을 붙여 주었다. 할 얘기가 있으면 끝까지 하라는 신호였다. 쇼너 스타니는 팔을 휘저으며 소탈하게 웃었다. “리더는 상대의 얘기를 인내심 있게 들어 줄 줄 알아야 하거든. 그러면 말을 하던 자는 자신의 말 속에서 정답을 찾기 마련이다. 내가 그걸 경험할 줄이야….” “하하 하하하.” “……?” 방금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수페리우스는 목을 젖혀가며 시원하게 웃었다. 지난밤의 통증이 말끔히 씻어져서인지 웃음소리는 경쾌했다. 아이는 정확하게 설명해준 쇼너 스타니의 이러한 발상이 되레 신선하게 느껴졌다. 눈가에 웃음으로 맺힌 눈물을 슥 닦은 뒤, 수페리우스는 바른 자세로 마주 앉아서 부드럽고도 강직하게 말하였다. “뭔가 오해를 했 군요, 쇼너 스타니. 저는 그다지 똑똑하지 못해서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 준 게 전부였는걸요.” “…….” 크게 반박하기 위해 입을 벌리던 쇼너 스타니는 그러나 곧 입을 다물었다. 수페리우스의 뒤로 쏟아지는 눈부신 오전의 햇살이 아이를 겁탈한 것처럼 포장하고 있었다. 수페리우스, 뮌헨이라서 그런 걸까. 반 아마데우스의 지하 장소에서 봤던 어린 몸짓이 거짓으로 느껴진다. 그는 영롱하게 발하는 꽃잎처럼 아름다웠다. 이윽고 몸을 일으킨 수페리우스는 날카롭게 물었다. “쇼너 스타니. 그렇다면.” “……?” “당신의 말 속에서 정답을 찾았습니까?” “…….” “정답이 무엇이지요?” 마치 테레사와 함께 있는 것처럼 경직된 태도를 고수하며 쇼너 스타니는 조심스레 대답했다. “정답은 없다… 다만, 이자벨만이 감정적으로 우리를 봤던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뿐…….” “…얘기는 끝입니까.” “…그래.” “같이 돌아가요 쇼너 스타니.” “?” 수페리우스는 기지개를 켜며 길게 하품을 하더니, 유유히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초연한 아이의 태도는 지난 세월의 역경을 되돌아보게 했다. 그는 놀라지 않는다. 그는 당황하지 않는다. 수페리우스의 한계,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쇼너 스타니는 마법에 홀린 사람처럼 향수 내 음을 곳곳에 뿌려가며 히스의 별채 중 혜성의 노란 방에 따라 들어갔다. “방이 멋있지요? 히스가 꾸며 준 건데… 잠깐 굿바이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히스? 히스클리프를 말하는 건가?” “네. 히스랑 쇼너가 만나면 둘이 비슷한 데가 있어서 재미있을 것 같은데 아쉽네요.” “비슷하다고? 그 지휘자랑 내가?” “하하하. 비슷해요. 둘 다 멋쟁이잖아요.” “나의 개성을 그 흔한 지휘자와 비교하지 말아라!” “하하하… 네.” “뭐… 무슨 집에 거울이 이렇게 많나 싶기는 했다.” “큭큭…….” “…지금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거지?” “네. 이자벨을 제가 만나보고 눈으로 확인한 뒤, 같이 다시 토의해 봐요.” “!” 지나칠 만큼 정확하고 초연하다. 별 일 아니라는 것처럼 실제를 마주치지 않는 이상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다. 어젯밤 가십을 읽을 때 울면서 사비나 교수와 포옹했던 것은 단지 음악 때문에? 쇼너 스타니는 단정하게 대꾸하는 수페리우스가 봐도 봐도 신기했던지 연방 숨을 내쉬었다. “아! 그렇지!” “음? 왜. 뭔가 중요한 게 떠오른 건가?” 순간 짐을 꾸리던 수페리우스가 심각한 낯으로 쇼너 스타니를 마주쳤다. 아이는 박수까지 치면서 중요한 일이라고 대꾸했다. 적잖이 안심한 쇼너 스타니는 반 아마데우스에게 뭔가 중대한 것을 부탁하는 게 아닌지 싶어서 긴장하기 시작했다. 후다닥 짐을 마저 싼 뒤, 수페리우스가 쇼너 스타니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의 손톱에 칠해진 갖가지 매니큐어를 보고 흠칫 놀란 아이는 곧 싱긋 웃더니 어디론가 잡아끌었다. 쇼너 스타니는 확신했다. 뭔가 중요한 것을 마저 대화하기 위해 자리를 옮기는군. 그러나 쇼너 스타니의 생각은 완전히 어긋나 있었다. “배고프지 않아요? 쇼너 스타니. 아침 식사는 뭘 할까요?” “!” 커튼을 젖히며 햇살에 두 팔을 벌리는 식물처럼 화사한 수페리우스는, 아주 의외의 것에 열중했기 때문이다. “…왜요?” “…밥… 밥이… 그것이… 중요하다면서 떠오른 너의 최종 결론인가.” “밥 먹는 것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어요? 가요.” “…….” 오전 아홉시, 식사를 마친 그들의 별채에 나타난 사비나에게, 수페리우스는 한국에 잠시 다녀오겠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을 꺼냈다. 수페리우스를 대신해서 긴장하던 쇼너 스타니가 보라색 마스카라를 칠하다가 놀란 나머지 마스카라를 놓친 것은 수페리우스의 태도에 익숙하게 대꾸하며 알았다고 웃어주는 사비나 덕분이었다. 긴 비행을 마친 뒤 한국의 땅을 밟을 때까지 수페리우스는 가벼운 농담 따위를 하며 쇼너 스타니가 최대한 편한 자세를 취하도록 유도해 주었다. 그의 습관처럼 보였다. 타인에게 자상하게 구는 수페리우스가 더더욱 마음에 들었는지 쇼너 스타니는 그가 사달라는 과자 따위를 묵묵히 사주며 택시에 올랐다. 뮌헨 못지않게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국은 쌀쌀했다. 수페리우스가 내미는 초콜릿을 억지로 씹어 삼키던 쇼너 스타니는 기묘한 아이의 표정 변화를 힐끔거렸다. 택시가 출발할 때에는 어린 아이처럼 방글방글 웃던 혜성이 차츰 표정을 굳혔기 때문이다. 이 때 터지는 웃음은 쇼너 스타니를 위해 일부러 짓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웠다. 밤 구름이 밀려올 때가 되어서야 택시는 장미 문에 도착했다. 쇼너 스타니는 수페리우스에게 어색한 작별 인사를 한 뒤, 곧 반 아마데우스를 찾아가겠다는 약속을 얻어냈다. 그로서는 나쁘지 않는 결과였다. 적어도 수페리우스와 함께 한국에 돌아왔다는 건 뮌헨에 날아갔던 게 허튼 짓이 아니었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잘 가요 쇼너 스타니~! 양 손을 허공에 휘두르며 수페리우스는 크게 소리쳤다. 우아하게 등을 돌리고 폐허 방향으로 걷던 쇼너 스타니가 흠칫 놀라서 넘어질 뻔 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가 뒤를 돌아봤을 때, 수페리우스는 장미문 안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다!” “거짓말! 내 눈을 믿을 수 없어! 정말이니?” 상당한 인파가 드글 거리는 통에 수페리우스가 불현듯 출현했다는 소식이 삽시간에 아마데우스 전체에 퍼졌다. 환각을 본 것처럼 굴던 아름다운 학생들은 자신들이 다가가면 사라질 것처럼 환해 보이는 수페리우스를 멀리서 확인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장미 문에서 가까운 B관 입구에 서서 가벼운 짐을 한 번 힘을 주어 어깨에 멘 뒤, 아이는 그제 서야 생각났다는 듯 자신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학생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 이러할까. 뮌헨과 비슷하지만 많이 다른 한국의 정겨운 풍경들과 바람. 모든 것이 마음을 푸근하게 했다. 수페리우스! 라는 정확한 한국말이 들려서 심장이 덜컥였다. 잠시만 마음을 놓으면 그들의 향기에 취하여 눈물을 흘려도 좋을 만한 장면들이 즐비했다. 공항에 와서도 느낄 수 없었던 현실이,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고 저희들끼리 환성을 지르는 까만 머리칼의 학생들을 통해 피부에 와 닿았다. 사뭇 경건해진 마음으로 수페리우스는 B동 내부에 천천히 들어섰다. 쿠궁… 난방이 잘 되어있는 B동의 거대한 문이 저절로 닫혔다. 찬바람과 수페리우스를 보며 환호하던 소리가 몽땅 사라졌다. 정갈하고 후끈한 내부와 높다란 천정만이 아찔한 멋을 뽐낼 뿐이었다. 학생회가 생긴 뒤 B관을 출입하는 인파는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수페리우스는 갑자기 혼자가 된 양 씩씩하게 걸었다. 동완이, 로미오, 미카엘 선배, 테오제네스, 프란체스코, 로제리오 교수님… 정다운 사람들이 계단을 오를 때마다 자신을 부르는 것처럼 애절하게 떠올랐다. 물론 그들과 인사하며 신나게 떠들고 싶은 욕심에 흔들리긴 했지만, 수페리우스는 그러려고 돌아온 게 아니었다. 학생회실의 도어 앞에 선 뒤, 아이는 경건하게 호흡을 하고 노크를 했다. 테레사… 중력에 끌려 떨어지는 나뭇가지처럼 나는 반 아마데우스와 아마데우스라는 이름에 떨어졌습니다. 돌아 왔습니다. 혹시 아시나요. 테레사, 오 테레사. 이곳 아마데우스에서는 당신의 향기와 힘이 느껴져요. 뮌헨에 다녀오기 전에는 몰랐던 당신의 줄기와 뿌리가 비로소 느껴집니다. 당신의 미소가 보입니다. “들어와.” “…….” 이자벨의 낭랑한 음성이 문 밖으로 전해졌다. 두근, 두근, 가슴이 뛰어서 무의식중에 코트 깃을 쥐자 손안에 맺혀있던 식은땀이 느껴졌다. “!” 밤의 꽃처럼 아름다운 이자벨의 표정이 굳어졌다. 곁의 모세 역시 험악해진 낯을 더더욱 사납게 했다. 혜성이 걸어 들어갈수록 넓은 내부에 단 둘 뿐인 그들은 말없이 노려보기만 했다. 캉-! 뒤의 문이 닫힐 때가 되어서야 너희는 살아 있는 사람이라며 빈정거리듯 소음이 들려왔다. 필시 밖에서는 내가 왔다는 소식으로 들끓겠지. 꿀~꺽. 침을 삼킨 뒤 수페리우스는 짐을 바닥에 내려놓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긴 둘레의 테이블을 걸을 때마다 발바닥에 없는 가시들이 찔리는 착각이 빚어졌다. 혜성이 긴장하는 만큼 이자벨 역시 표독스러운 시선을 감추지 못했다. “애송이의 귀환인가? 장소가 틀렸다.” “…….” “환영의 꽃가루가 없는 곳은 그만큼의 이유가 있다는 걸 본인도 알 텐데…?” 이자벨의 비아냥거림이 한결같다는 것마저도 이상하게 반가웠다. 한국에 돌아왔어! 하필이면 이자벨의 태도를 통해 그 마음은 더욱 단단하게 발했다. 혜성은 피식 웃음이 나오는 것을 고스란히 내보이며 두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멀리 시계탑에서 밤 열한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은은하게 퍼졌다. 이자벨은 반듯하게 앉은 채로 등을 더욱 꼿꼿이 폈다. 그녀의 앞에 우뚝 선 수페리우스의 등으로는 굵은 땀이 주룩 흘렀다. 팔 장을 끼고 이자벨의 뒤에서 사납게 노려보는 모세의 시선은 굶주린 늑대처럼 시퍼렜다. “반 아마데우스를, 만나라.” “!” 가벼운 인사조차 없이 내뱉는 혜성의 음성은 무감동하고 딱딱했다. 반쯤 내리깔고 이자벨을 응시하는 시선에는 작은 빛도 없었다. 그녀는 당장 일어서서 혜성을 불같이 쏘아보았다. 이에 아랑곳 않은 수페리우스의 당찬 음성은 한결같이 터졌다. “반 아마데우스의 소리를, 제대로 들어라.” “뭐…라고? 하하하하! 이제는 각국을 오가며 몽유병이라도 걸린 건가?” “…….” 팽팽한 줄처럼 당겨진 두 사람의 분위기를 보면 주변에 선량한 자가 없는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숨 막혀 이생의 끈을 놓을 것처럼 험악한 장면은 버티기 어려웠다. 그러나 혜성은 흔들리지 않았으며 이자벨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기반성의 시간이 필요하겠구나, 애송이.” 백장미처럼 순결해 보이는 그녀의 양 쪽 뺨은 긴장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수페리우스와 상대적으로 이자벨은 매우 거칠어졌다. 아닌 척 위장해도 학생회장이라는 직책은 그녀의 음성을 속마음을 보이게 했다. 혜성은 약간 누그러진 음성으로 조용히 말문을 다시 열었다. “이자벨. 반 아마데우스에 대해서 너도…….” “네가 왈가왈부 할 게 못 된다.” “…….” 그녀는 거침없었다. 쿨 한 척 굴기 위해 애쓰는 게 수페리우스에게는 보였다. 네 아름다운 입술과 머리는 과연 어떤 생각을 지닌 걸까. 수페리우스는 양 팔을 사용하며 상대를 설득하기로 했다. “아직도 모르겠니.” “…….” 그러나 아이가 입을 열며 제스추어를 활용하기도 전에 그녀는 파고들어왔다. 장미의 가시처럼 뾰족하게 돋은 음성은 슬픔보다 못 하게 들렸다. “더 이상, 아마데우스에는 수페리우스가 필요치 않다. 썩 꺼지지 않으련?” 수페리우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드럽게 하지만 강직하게 대답했다. 아이의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총명하게 반짝였다. “…교수님들도 어른의 탈을 썼을 뿐 생각하는 인간임에는 우리들과 같아, 이자벨. 생각해 본 뒤 쇼너 스타니나 나를 불러줘. 그들을 무시하지 말아라. 존재에는 반드시 이유가 붙는 법이야.” “존~재의 이유… 존재의 이유? 요즘 철학과 음악을 연결시키는 교수들이 있는데 너는 그것을 들은 건가? 하하하… 하! 하하 하하하하!” “…….” 미친 사람처럼 배를 쥐고 웃으면서 저 쪽 창가로 걸어간 뒤, 이자벨은 자신을 따라와서 뭐라고 중얼거린 모세의 가슴을 밀었다. 화려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그녀의 레이스 장식 원피스가 크게 출렁였다. 그렇게 수페리우스를 정면으로 돌아보며 그녀는 칼칼해진 음성을 소리쳤다. “어디서 훈계야!” “!” 차디찬 방패로 막는 것은 누구일까. 그녀가 큰 소리를 낼수록 이상하리만치 평온해지는 마음이 있다. 수페리우스는 잠깐 눈을 크게 떴을 뿐 별다른 대답 없이 그녀가 흥분하는 것을 조용히 쳐다봤다. 아이의 눈동자가 흐릿해진다. 붉은 습기가 닥쳤지만 꽉 쥔 주먹은 그것을 이겨낸다. “감히… 애송이 주제에 그따위 것들에 홀려서 뭐라고? 너는 네 신이라 이름 하는 테레사를 욕되게 하는데 그걸 믿는가?!” 저 느낌을 안다. “그를 눈으로 확인했는가? 입으로 들었어? 도대체가 정신이 썩어 있는 자와 내가 무슨 타협이며 대화를 시도해!” 큰 산을 넘어보지 못 한 자의 절망이다. “썩은 고목은 뿌리 채 뽑는 게 내 철칙이다. …그런 면에서 너도 다를 게 없지만… 나의 진의 유일한 실수로구나.” 그 눈동자를 겪었기에 나는 이해한다. 그러나 방법을 모르겠다. 너는 내가 아니니까. “이자벨.” “…….” 이자벨. 눈앞의 거대한 산을 맨 발로 밟아서 넘어가. 지금이 아니면 너는 평생 산을 지고 살아야 해. “네 무거운 어깨를 나도 이해해. 그러나 네 주관으로만 처리할 게 못 돼.” “!” 이자벨. 제발. “내가 싫다는 것도 알아. 쇼너 스타니와 대화를 본격적으로 해 봐.” “…나가….” 바락바락 소리 지르며 분개하던 그녀는 창틀에 팔을 올리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등으로 말을 하는 그녀는 조금만 건드리면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 보였다. “이자벨… 지금의 너는 너무 감정적이야. 주관적이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보면…” “나를… 나를 어디까지 몰아세우려는 거야!” “뭐…라고…? 이자벨, 나는 너를 몰아세운 적이 없…….” “나가! 나가--!!!” “이자벨!” “내가 다 처리 할 수 있어!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라니, 감히! 나가… 나가--!!!” “!” 급기야 그녀는 소리치는 걸로도 모자랐는지 주변의 것들을 마구 던져대기 시작했다. 깔끔한 주변에 있는 것이라고는 종이 더미밖에 없었지만 그녀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여 수페리우스에게 쉼 없이 던졌다. 아이는 씁쓸한 표정으로 등을 돌리던 도중 뭐라고 한 마디 하려다가 이내 가방을 쥐고 학생회 실을 나갔다. 이자벨의 거칠어진 숨소리가 아련히 전해졌다. 도어 밖에서 등을 잠시 기댄 뒤, 천천히 발을 떼고 B동 입구로 나가려는 때, 참았던 눈물이 수페리우스의 뺨을 서서히 적시기 시작했다. 억눌렸던 긴장이 한꺼번에 풀어져서 꿈속을 걸어 다니는 것처럼 발이 가볍고 저렸다. 수페리우스가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도 쉽사리 진정하지 못 했던 이자벨은, 자신의 어깨를 세게 쥐어 주는 모세를 가까스로 확인했다. 그녀는 연약하지만 날카로운 몸을 천천히 앉혔다. 양 쪽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누르며 테이블을 노려보았지만 혜성의 무미건조한 표정들이 맴돌았다. “어디서 감히… 감히… 감…히….” “…….” 이자벨의 격분에 침통해진 낯으로 변한 모세는 묵묵히 바닥에 휘날리는 종이 더미를 차례대로 줍기 시작했다. 모세의 행동을 한동안 지켜보던 이자벨은 꽉 주먹을 쥐며 죄 없는 종이를 구기더니 표창처럼 날렵한 음성을 흘렸다. “진이… 말하는 거랑 똑같잖아… 진이… 진이… 나의 진이….” “…….” “모세…….” “…….” “규율로서… 완전히 처단 하겠어….” “…….” “바오르 신부님이 입을 다물고 계신다. 하지만 로제리오는 알았다고 하셨지. 그가 보다 상업적으로 안목이 넓은 사람이라서 다행이다. 정확하지 않은 것은 싫어하는 사람이거든. 그의 승인이 붙은 이상 …시행하자.” “…….” 남 앞에서는 흘려본 적 없는 이자벨의 눈물이 떨어졌다. 아름다운 그녀의 흔적이 가시가 되어 테이블에 박혔다. 그러나 여기서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학생회실의 캐비닛 안쪽에서도 사람의 숨결이 들려왔음을 누구도 알 수 없었으리라. “시행이라….” 수페리우스와 이자벨의 격분 장면을 모두 엿들은 뒤, 밤 열두시가 지나서야 로미오는 캐비닛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의 충혈 된 눈동자 역시 지독한 습기로 칭칭 감겨 있었다. 그렇게 각자의 젊음과 열정의 색은 엉겅퀴처럼 엉켜 있는 와중에도 쭉쭉 나아간다. 다음날이 되자 아마데우스는 모처럼 만의 소식으로 화사해졌다. 학생들은 눈을 비비며 서쪽 기숙사에서 빠져나오는 수페리우스를, 조용히 산책하는 두 갈래의 숲길에서의 수페리우스를, 분수대를 자꾸 뱅글뱅글 도는 수페리우스를, 식당에서 밥을 먹는 수페리우스를 확인했다. 뮌헨의 가십으로만 읽었던 수페리우스가 왜 한국에 있지? 라며 그들은 서로 의견을 모아 봤지만 그에게서 직접 듣지 않는 이상 시원찮은 것들만 맴돌 뿐이었다. 게다가 수페리우스는 학생들이 건네는 뮌헨과 관계된 질문으로부터 교묘히 빠져나가 되레 엉뚱한 질문을 던져서 낭패를 보게 만들었다. 영악한 수페리우스! 순수한 멋으로 도배했던 수페리우스의 이미지는 점심시간이 지나자 영악한 이미지로 불쑥 바뀌었다. 오전나절 이미 동완이와 미카엘 선배를 비롯한 모두를 만난 수페리우스는 밤새도록 고민했던 무언가를 안고 쇼너 스타니를 찾아갔다. 다들 수페리우스에게 이것저것을 캐물었지만 아이는 야속할 만치 입을 다물었다. 아이가 제대로 내용을 떠들며 무거운 입을 움직인 것은 쇼너 스타니와 다시 만나서였다. 지하의 호롱불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미약하게 들렸다. 심장은 그것에 타죽는 것처럼 내면으로부터 고약한 숨을 내쉬었다. 수페리우스는 오늘따라 화장기가 짙은 쇼너 스타니와 마주치는 즉시 미간을 찌푸리면서 조용하고 작은 방 구석에 있는 흔들의자에 웅크리고 앉았다. “이자벨과의 대화는 앞으로도 시도하지 않는 게 낫겠습니다.” “음…….” “그녀는 흥분해 있어요. 내 존재 만으로도 그녀는 어차피 흥분하지만… 쇼너.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신에게 해 줄 말이 없어요.” “…그래.” “미안합니다. 도움이 못 되는군요.” “아니. 그렇지 않아.” 쇼너 스타니는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진심으로 수페리우스를 위해 서슴없이 대답하고 대화를 이끌었다. 그는 이렇게까지 행동해 준 수페리우스의 침착한 모든 것에 감탄하는 중이었다. 자신의 선에서 끝내면 좋을 것을 굳이 수페리우스를 데려온 점에 미안해하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페리우스는 저가 미안하다며 떠드는 게 아닌가. 쇼너 스타니는 자신들을 모르는 척 하며 조용히 앉아있는 로미오를 힐끔 쳐다본 뒤 수페리우스에게 살짝 웃어 주었다. “두고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녀가 함부로 움직일 사람은 아닐 테니… 말만 사납게 하는 위인인 것 같다.” “…….” “수페리우스. 당신은 별 일 없을 것 같으니 뮌헨으로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 “이민우, 네가 발광하며 좋아하는 수페리우스인데 인사도 안 하나?” “……잘 가요.” “…….” 수페리우스는 알았다는 대답 대신 뭔가 석연찮다는 표정을 고수한 채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자신을 보면 반가워 할 줄 알았던 로미오가 심각한 척 구는 게 수상하긴 했지만 쇼너 스타니와 수페리우스는 그의 사소한 부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쇼너 스타니의 두 번째 실수로 곧 밝혀지기까지는 멀지 않았다. 안부게시판에 엔젤님이 올려주신 사진입니다. wgreene@naver.com I LOVE U.... 덧글 18개 엮인글 쓰기 /data17/2006/10/28/92/thflwpdls_7-wgreene-wgreene.jpg@nhn@129192@nhn@1@nhn@1024@nhn@768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65편 /data17/2006/10/28/92/thflwpdls_7-wgreene-wgreene.jpg@nhn@129192@nhn@1@nhn@1024@nhn@768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65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66편 ▼ 다음글 - 2악장 64편(아뉴스데이I)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66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10/31 17:06 http://blog.naver.com/wgreene/110010325106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1031 66편 업데) Amadeus 음악 : Isabel - il divo (재생버튼클릭) Isabel-Il Divo 아뉴스데이 심포니 中 신의 광시곡 2악장 66편 목이 아프다는 착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아니다. 기분과 착각 이라는 단어의 교차점에 사로잡히다- 그게 정답이겠다. 뇌의 초점은 목으로 맞춰져서 목을 중심으로 하루가 돌아가고 움직여진다. 그것은 단지 느낌인데도 불구하고 급기야 통증을 참지 못 해 음료를 찾도록 명령을 내린다. 당장 무엇을 들이키지 않으면 성대가 도려 나갈 것처럼 타액마저 넘어가지 않을 때 목은 더욱 아파온다.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아픈 것은 목이 아니라 있지도 않은 두려움에 의한 망상이었다. 현재의 상황이 지나치리만치 수월할 때 누군가는 머리가 아프며 다른 누군가는 입술에 뭐가 난 것 같다며 작은 화를 부른다. 절망의 그림자가 행복이며 희망이듯이 행복의 그림자가 절망이라는 것을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따라서 현재 누리는 평화로움으로부터의 당위성을 찾으려고 대다수는 아프지 않아도 아파야 한다. 수페리우스는 목이 아픔으로서 지금 상황이 평화롭지만은 않다고 그림자 공식을 맞췄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한국 아마데우스는 폭풍의 눈에 세워진 것처럼 바람조차 불지 않았다. 일사천리 진행되는 웃음과 낭만, 행복추구와 연습, 자잘한 다툼, 레슨과 새로이 도입된 철학수업, 이론시험,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그래서 수페리우스는 서쪽 기숙사동에서 지내는 이틀 내내 목이 아팠다. “선배는 목이 아니라 이럴 땐 눈이 아플 까요…?” 멋지게 눈을 감고 있는 액자는 말이 없었다. “차가워…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저는 히스와 바람을 피우겠어요. …히히.” 그래도 대답이 없군. 당연한 거지만… 액자를 노려보기도 하고 화가 난 척 굴던 도중, 혜성은 자신의 이런 모습을 누가 뜨악스런 눈초리로 숨어서 지켜보는 건 아닌지 갑자기 등골이 쭈뼛 섰다. “정신이 이상해진 사람인 줄 알겠다. 그만하자.” 테레사의 독주회 포스터를 만지작거리면 통증은 나아질 줄 알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는 목이 아플수록 먼 타인처럼 잡을 수 없게 다가왔다. 감수성의 변이는 세상이 조용할 때면 유독 심술을 부린다. 왜 가만히 있지? 고통과 사건에 익숙해진 감성은 사소한 것에 의미를 불어넣어야 속이 시원하다는 걸까. 그 흔한 눈조차 쏟아지지 않을 때, 찬란한 태양은 대지에 멋을 뽐내기 시작했다. 한국의 2월은 가을추수가 끝날 무렵처럼 풍요로웠다. 농부의 향내와 익다 못해 부러진 이삭이 날아 올 법한 넉넉함이 도배되어 있었다. 이자벨 장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다. 그녀와 대화다운 대화를 했던가? 나중으로 미루자고 결심해서 더더욱 불거지는 평화로움에의 당위성 추구. 목이 아파서 침을 삼키기 어렵다. 이번 겨울은 이상해. 스무 살이 되기 전의 최종 관문이 아닐까? 니콜라우스의 붉은 십자가처럼 유난히 각인되는 서리의 나날들. 보스턴은 괜찮을까? 뮌헨과 한국에만 이례적인 함박눈이 대지를 덮었다는 것도 말이 안 돼. 러시아를 흉내 내는 북유럽의 겨울. 그 겨울을 흉내 냈던 뮌헨과 한국… 그리도 또 다른 곳에서도 기습적인 추위에 몸살을 앓았겠지. 오! 여기서 뭔가가 번쩍 스쳤어! 러시아를 흉내 내는 북유럽의 겨울. 그것을 탐낸 뮌헨과 한국. 그 구절은 별처럼 쏟아지는 몇 마디를 번쩍 번쩍 떠올리게 했다. 때는 잠깐 이라는 단어가 아닌 그야말로 찰나이며 순식간이었지만 이때만큼은 온 몸에 전율이 미쳐서 누가 흠씬 쥐어 팬 들 아프지 않다. 혜성은 숱한 빈 악보들을 움켜쥐고 그 발상이 가시기 전에 마구 음표를 그렸다. 십육분음표와 팔분음표의 정확한 표시 따위는 음계를 확실히 적은 뒤에 수정하면 된다. 아이의 눈동자가 모처럼만에 아픈 목을 잊고 크게 뜨였다. 쉭 쉭 익숙하게 손을 움직이고 난 뒤 반쯤 만들어진 한 장의 악보를 되돌아보며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썩 괜찮은 부분이 그려졌다. 나중에 이 부분을 어느 곳에 끼울지가 관건이었다. 어디가 좋을까. 3악장의 라르고… 그래, 그 부분이 좋겠어. 다뉴브의 클라이맥스. “딴 따다~ 딴! 딴 따다~ 딴! 단 단 따란… 흠~ 음흠흠~ 흠~ ……이상한 사람 같지요, 테레사? 후후….” 허공에 검지를 움직이며 방금 적은 마디를 흥얼거리던 도중 혜성이 휙 뺨을 돌리며 웃었다. 테레사의 독주회 포스터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아이는 기지개를 켜며 나른하게 하품을 했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고통이 혹시 있다면… 그럴 리가 없어. 5월 콩 쿨만 기다리면 되는 거야. 오전의 기숙사동은 풍요로웠다. 그것을 뚫고 불쑥 도어가 열렸다. “하여간 이유를 만들어요. 고민할 게 없으니까 고민을 만들어요.” “아! 동완아!” “웩! 웩! 이게 뭐니? 어떻게 들어가라고? 웩! 악보? 다시 나갈 테다!” 마룻바닥 전체를 뒤덮은 악보더미에 놀란 동완의 상냥했던 두 눈이 험해졌다. 침대 위로 지저분하게 펼쳐진 작곡과 관련된 지식 서들에도 틈틈이 쪽지와 연필 따위가 끼어져 있었다. 지가 이런다고 슈베르트야, 베토벤이야? 동완이 쾅쾅 바닥을 치며 꽥 소리쳤다. “수페리우스가 미쳤구나!” “하하하하… 동완아….” “지정곡이 나올 때까지 완성하려는 건 알겠지만 이건 심하잖니?” “그냥 밟아도 돼. 침대에 널려진 게 뽑힌 애들이고, 바닥에 있는 애들은 버린 자식들이야.” “?” 심각한 표정으로 목을 움켜쥔 채 침대 위에 둥글게 앉아있던 혜성의 안면에 화색이 돌았다. 엊저녁 목이 아프다고 중얼거렸던 친구를 위해 손수 따뜻한 우유를 보온병에 챙겨온 동완이 방을 찾아왔다. 그는 상당히 피곤한 기색으로 나타나서 슥 보온병만 건네주는 게 아닌가. “코코아 분말은?” 그냥 우유는 마시는 족족 설사 따위를 했던 기억이 스쳤는지 혜성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동완이 심술궂게 안 가져왔다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정다운 음성이 다른 쪽에서 들려왔다. “숙부님이 근래에 보내주신게 있는데, 타 먹어 볼래?” “선배!” “우리 민우도 그냥 우유는 싫어하는데 취향이 똑같구나.” “역시 대천사 미카엘 선배! 선배!” 동완의 뒤에서 불쑥 나타난 인영은 미카엘 선배였다. 하얀 털모자를 쓴 미카엘 선배는 순결해 보였다. 그걸 왜 가져왔느냐며 화를 내는 동완에게서 냉큼 보온병을 빼앗은 뒤, 수페리우스는 언제 목이 아팠냐는 듯 미카엘이 상냥하게 건네는 코코아 분말 봉지를 받았다. 그것을 보니 목이 싹 다 나은 것처럼 기분이 상쾌해졌다. 아이는 당장 코코아 분말 전부를 보온병에 부어버렸다. 그제 서야 생각났다는 듯 처음 느꼈던 것을 기분 좋게 떠들었다. “어… 동완아.” “?” “너… 키가 자랐구나.” 키가 컸다는 대도 시큰둥해 하는 동완이가 대수롭지 않았는지 혜성이 기특하다며 씩 웃었다. 그는 한 달 안본 사이 한 뼘은 자라 있었다. 이제 주먹질을 하면 혜성이 틀림없이 불리하리라. “목이 왜 아플까… 수페리우스. 혹시 감기 아니니? 병동에 가 보자.” “…….” 미카엘은 이름처럼 상냥해 보이는 음성으로 하필이면 정확한 것만 떠들었다. 혜성이 머쓱하게 웃으며 도라 질을 치자 동완이 주변에 널려진 적다 만 악장을 짜증스레 쳐다보며 소리쳤다. “계속 이 짓만 한 거야? 온 김에 쉬지 않고? 내일 오전 비행기로 돌아간다면서!” “동완아, 작게 말해도 여기서 네 말을 못 알아들을 사람은 없다.” “선배는 또 저한테만 뭐라고 그래요? 나랑 둘이 있을 땐-” “김동완!” “…….” “철학 수업이 도입되었다더니… 동완아 네가 참 열심이구나? 턱 주변이 삐죽삐죽하다… 게다가 밤새서 공부했는지 피곤해 보여.” “야 신혜성. 너 목 아프다며!” 동완은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평정심을 잃은 말투로 윽박질렀다. 예전처럼 정답게 농담 따먹기를 하지도 않는 친구가 많이 야속한 모양이었다. 그의 불똥 같은 모습이야 전혀 놀랄 거리가 안 되었는지 수페리우스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저것도 변명이라니! 얌체같이 코코아우유만 마시며 샐쭉 웃는 수페리우스의 입가에 음료 자국이 동그랗게 묻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미카엘은 자신을 올려보는 수페리우스의 입 주변 자국을 휴지로 천천히 닦아주었다. 거의 다 닦았을 무렵 이번에는 미카엘 역시 뭔가가 떠올랐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혜성을 죽 응시했다. “밥은 먹었니?” “…….” 철렁- 가벼운 인사인데도 불구하고 그 말 하나에 작은 심장이 내려앉았다. “왜?” “밥을 언제 마지막으로 먹었는지 생각해보려고요.” “!” 코코아를 빼앗길 새라 등을 돌려가며 조그맣게 말하는 수페리우스 덕분에 놀란 미카엘은 저의 이마를 쳤다. 쇼너 스타니와 뮌헨에서 거한 아침 식사를 한 뒤, 기내식 한 번, 택시에서 과자와 초콜릿 먹은 것, 그리고 도착한 학교에서는 지금 코코아를 들이키기까지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다. 수페리우스는 이상하게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래서 목이 아팠던 걸까? “동완아.” “예, 선배.” “오른쪽 잡아라.” “예.” “?” 코코아를 다 마시지도 못했는데! 멀뚱하게 앉아있던 수페리우스의 가벼운 몸이 침대 밖으로 질질 끌려나온다. 오, 몸 움직여지기 마법인가? 라며 슬슬 웃던 수페리우스가 끄악! 하며 비명을 지른 것은 거친 손놀림으로 외투와 목도리를 입혀주는 동완이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먹여야지.” “배 안 고파요! 그럼 저 보온병을 가져가면 안 돼요?” “동완아. 수페리우스 밥 먹이고 병동에도 가 보자. 정신착란 증세도 있나 보다.” “킥킥… 그래요, 선배. 찬성입니다.” “!” 오른쪽에는 동완이, 왼쪽에는 미카엘이 꽉 쥐고 질질 끌 고가는 통에 수페리우스가 할 수 있는 말이란 괜찮아요! 밖에 없었다. 때마침 분수대 옆을 지나가던 테오제네스와 프란체스코가 그들을 발견하고는 그곳까지 끌고 오느라 힘들었던 미카엘과 동완으로부터 혜성을 넘겨받아서 다시 질질 끌고 갔다. 결국 수페리우스는 못이기는 척 따듯한 식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2월 둘째 주 금요일은 오전부터 밤까지 어두컴컴했다. 로제리오의 집무실을 찾아온 수페리우스는 썩 내키지는 않지만 예의바르게 그와 차를 마시며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이자벨에 대한 것은 왜 말씀해주지 않으세요?” “학생회와 관련된 것은 기밀사항이야. 네가 수페리우스라고 해도 말 해 줄 수 없다.” “…….” 오늘 밤에는 룸펜에 들렸다가 내일 오전 곧바로 공항으로 가려던 혜성이 누차 강조하는 로제리오를 못마땅하게 응시했다. 테레사가 한국에 없는 동안 모든 권한에서 손을 떼었듯이 너도 그러는 게 옳지 않느냐는 뉘앙스가 로제리오의 말투에 충분히 배어있었다. 아이는 그 점을 용납할 수 없었다. 자신은 곧 돌아오는 교환학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바오르 신부님과 대화를 하겠습니다.” “율 성당의 수녀님들과 사랑의 자선기금 회에 가셨다, 수페리우스. 며칠 뒤에 돌아 오실거야.” 그러나 수페리우스가 무슨 말을 해도 이유 있게 받아치는 행동이 이어졌다. 바오르 신부님도 안 계시다니? 별안간 자신의 편처럼 느껴지는 그가 없다는 게 답답해졌다. 수페리우스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기로 했다. 사흘 가량 한국에 머물렀지만 시간을 죽이는 것 이외엔 한 일이 없었다. 로제리오와 대화하느니 사흘 내내 못 봤던 로미오를 만나는 게 훨씬 가치 있는 일일 지도 모르겠다. 아, 그러고 보니 로미오 녀석은 뭐가 그렇게 바쁘다고 나를 찾지 않았을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지, 수페리우스?” “아, 아닙니다. 교수님. 저는 그럼…….” “수페리우스.” “예?” “다뉴브의 밤을 키르혜아이젠 교수가 받아줬다는 소식을 봤다. 독일에서 그런 가십을 얻어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히스클리프와 관계된 것들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냉랭하고 혹독하게 적어내거든. 대단한 일을 하고 있어.” 막 몸을 일으킨 수페리우스에게 로제리오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띄엄띄엄 말 해 주었다. 그러나 방금까지의 차가웠던 로제리오의 모습 때문인지 수페리우스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주며 다가오지 않았다. 아이는 밤인데도 시커먼 구름떼가 훤히 보이는 창문을 슥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그럼.” “…….” 로제리오는 수페리우스에게 이자벨 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는 수페리우스가 도어를 닫고 나가는 때 까지 무겁게 입을 닫았다. “읏….” 집무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히스테리칼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피부가 얼얼해질 만치 잔인한 바람이 새삼 아마데우스 건물들에까지 소리를 빚게 만들었다. 수페리우스는 사흘 뒤에야 다시 찾아온 기습적인 추위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어서 학교 밖으로 나가라며 바람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한 걸음 걷기 무섭게 강풍에 휘날리는 자국들이 휭휭 길 위에 춤을 추었다. 을씨년스럽게 변한 밤의 모습들은 수페리우스에게 가지 말라고 애원하면서도, 동시에 어서 사라지라며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조금 있으면 흠씬 대지를 두들기듯 눈이 쏟아질 것이다. 출렁이는 구름떼는 하늘의 장면을 저의 몸으로 가린지 오래였다. 수페리우스는 장갑을 꼈음에도 손끝이 차가워서 몸을 움츠렸다. 어서 나가요! 수페리우스, 나가지 말아요! 감성은 바람에도 음성이 있노라 저런 말들을 자꾸 메아리치게 했다. 아이의 걸음이 빨라졌다. 밤 열한시가 지날 때 즈음, 벌을 내리듯 추워진 탓에 학교 내부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가 장미 문 뒤의 사무동을 지나칠 때, 늦게 퇴근하는 누군가가 몸을 움츠린 채 나왔다. 그는 수페리우스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서 막 자물쇠로 채운 사무동 문을 열고 후다닥 튀어 들어갔다. 왜 저러지…? 의례적으로 목 인사를 하던 수페리우스가 대수롭지 않게 사무동 건물을 거의 다 지나칠 무렵, 아까의 그 치가 또 후다닥 뛰어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신혜성 학생!” “……?” 오래 전, 외출 허가 건으로 대충 안면을 텄던 지라 수페리우스는 사무동 사람들의 얼굴 윤곽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중 부장 뻘로 보이는 중후한 신사가 득달같이 달려와서 발길을 막는 것이다. “수페리우스. 신혜성 학생!” “…예…?” “뮌헨에서 돌아올 때가 아니라서 학생이 와 있는 줄 몰랐습니다.” “…아… 예….” 친근한 척 말을 붙이는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그가 사무적인 일로 수페리우스를 불렀다는 것은 그의 적당한 말투와 그의 손에 쥐어진 편지봉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아이는 머쓱하게 웃으며 걸음을 멈췄다. 그는 수페리우스에게 편지봉투를 내밀었다. “이틀 전에, 속달로 편지가 왔습니다.” “이틀 전….” 이틀 전이라면, 쇼너 스타니와 만났을 때를 말하는 건가? 로미오 녀석이 지하 기지에서 잘 가요~라는 인사만 건넸던 날인데. 이따금씩 떠오르는 로미오의 괘씸한 행동이 지금 또 생각나서 수페리우스가 억지로 미소를 짓는다. “돌아오는 날까지 보관해 두라고 관리인들에게 시켰던 바람에… 여하튼 돌아와 있는 줄 알았으면 진즉에 줬을 텐데, 지금이라도 가져가세요.” “아… 고맙습니다.” 사무동의 신사는 곧 사라졌다. 늦게까지 일하느라 그의 눈 밑 주변은 거무튀튀했다. 수페리우스를 우연히 만나서 참 다행이라는 듯 마지막 인사 때도 웃어주는 그 덕분에 아이도 함께 고개를 숙였다. “읏~ 추워….” 학교 밖을 조용히 걷는 도중 편지를 읽어보려고 했지만 그 때마다 강풍이 말도 못하게 스쳤다. 아이는 편지를 읽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 여겼는지 시내까지 걸어오며 몸을 사리기만 했다. 가까스로 택시에 올라서 이태원에 가 달라는 말을 할 때가 되어서야 숨통이 트였다. 지독한 추위였다. 한스와 레이놀드가 반가워 할 모습이 떠올라서 기분은 한 결 더 푸근해졌다. 따뜻한 택시의 히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룸펜… 룸펜. 다락방에 올라가면 분명히 히스가 생각날 거야. 히스. 그는 크리스티안과 보스턴에서 무엇을 할까. 듣자하니 테레사는 출판 건 때문에 런던에서 바쁘다던데… 보스턴의 왕자처럼 이것저것 테레사인 양 굴면서 참견하겠지? 보스턴. 보스턴에 가고 싶어. 보스턴의 아마데우스는 얼마나 멋들어질까. 시공사와 감리 단 선정까지 저 혼자 해냈다는 테레사의 용맹함이 가슴에 스쳤고, 히스의 자상한 웃음과 히틀러의 무분별한 바이올린 선율이 심장을 시종일간 떨게 만들었다. “…!” 이태원의 입구가 보일 때가 되어서야 혜성은 품안에 무의식중에 쥐고 있던 편지를 생각해냈다. 택시 안의 불을 켠 뒤, 아이는 느긋하게 등을 기대고는 봉투를 뜯었다. 발신인은 유리였다. 그녀가 음악으로 또 뭔가를 발견한 게 아닐까. 제자를 추억하느라 바쁜 머릿속은 춤을 추듯 가볍고 즐거웠다. “!” 그러나 행복은 곧 사라졌다. 편지를 읽던 아이의 손이 덥석 목을 움켜쥐었다. 숨도 못 쉴 만큼 거칠어진 성대가 찢어지는 것같이 아팠다. 폭풍의 눈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바람조차 일순 정지되었다. 목이 아파요, 테레사. 마음은 비명을 질렀다. 유리의 글씨는 평소의 가지런함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글자체가 뒤죽박죽이었다. 급하게 적은 흔적이 역력했다. 그래서 목이 아팠다. “아… 아저씨. 다시… 다시….” “…예?” 밤 열한시 오십분이 막 지나고 있었다. “다시… 다시… 아… 아마데우스… 학교… 아마데우스….” “거의 다 왔습니다 손님.” “아니… 아니… 하… 학교… 학교… 학교로 돌아가 주세요… 아까 왔던… 아마데우스… 아마데우스….” “예?” 목을 움켜쥔 채 수페리우스는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아마데우스 학교로 가 주세요!!” <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늘의 편지는 가벼운 인사말을 적지 못합니다. 본론만 적겠습니다. 무기와 폭약을 샤우트로부터 구입해간 사람이 오늘 새벽에 있었어요. 그들이 하는 소릴 엿들었는데, 아마데우스의 오르페우스 관이란 곳을 터뜨릴 거라고 했습니다. 주로 말을 하고 무기를 구입해 가는 사람은 아마데우스 학생이었습니다. 급하게 온 것처럼 보여서 위장은 없었습니다. 정복을 입고 있는 사내의 키는 꽤 컸으며 핸섬 했고요. 대단한 결심을 한 사람처럼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습니다. 분명히 들었어요. 그들은 반 아마데우스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엿들었습니다. 설사 반 아마데우스가 아니더라도 아마데우스라는 명칭 앞에 다른 글자가 있었어요. 제 정보에 확신을 심은 것은, 거래를 한 자식들이 저희 샤우트 였기 때문입니다. 샤우트와 직거래를 한 사람이 누구냐고 그들이 나간 뒤 물어봤거든요. 저는 아버지 몰래 편지를 바로 적어서 속달로 부칩니다. 선생님. 그들이 누구지요? 어쨌든, 꼭 조심하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들이 뭔가를 계획하고 시행하기로 한 날짜는 2월 둘째 주 금요일 밤 열두시 삼십분이었습니다. - 제자 유리 - > 편지를 다 읽고 난 뒤, 아팠던 목은 씻은 듯이 나았다. 머릿속에 폭탄이 터졌기 때문이다. 목을 대신할 진짜가 편지로서 출현해서였다. 행복과의 당위성 추구라며 발 벗고 나타난 절망과 고통의 늪은 목의 아픔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택시가 다시 학교로 돌아올 때 까지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그 무엇도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그 무엇도 끈질기게 생각이 끝까지 나아가지 않았다. 번쩍 번쩍 이름이 생각나면 이번에는 다른 이름이 휙 스쳤다. 장미 문 앞에 다시 돌아온 때는 열두시 이십분을 막 지나고 있었다. 수페리우스는 잔돈을 받을 새도 없이 짐을 품에 안고 내렸다. “아니야… 아니야… 아, 아니야….” 붉은 눈매 밖으로 거침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다시 도착한 학교는 혁명 때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았다. 무서워서 함부로 발을 디딜 수도 없었다. 학생들이 데블 관 기둥에 깔리는 것 같았다. 테레사가 눈을 잃고, 모세가 폭약을 터뜨릴 것 같았다. 자신은 베토벤을 연주한 뒤 또 도망쳐야 할 것 같았다. 민우가 판자와 불에 깔려 죽을 것 같았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은 죽을병에 걸렸다. 발걸음보다 빨리 뛰는 탓에 호흡은 거칠었다. 편지를 주머니에 쑤셔 넣은 채로 걷고 뛰었다. 전신이 후들거리는 가운데 동공이 자꾸 좁아졌다. 쇼너 스타니… 쇼너 스타니가 샤우트에 간 걸까? 그는 아니야.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누구, 누구지? 반 아마데우스. 편지에 뭐라고 적혀 있었지. 그래. 편지에…. 유일하게 교복을 입은 사람이라고 했어. 누구, 누구지? 전체 학생들… 아니야. 반 아마데우스인데 교복을 입은 사람. 그렇다면 선호 선배와 로미오…. “!” 키가 꽤 크다고 했어… 그렇다면…! “로… 로미오…?” 하느님. 가장 잔인한 당신이시여. B관을 지날 때, 번쩍 로미오가 생각났다. 그리고 지난 사흘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그가 다시 생각났다. 테레사와 견줄 악장에 심취하느라, 또 뮌헨에 돌아갈 것만 생각했던 나머지 미처 돌보지 못했던 자신의 두 번째 이민우가 한꺼번에 떠올라서 뇌는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아이는 시체처럼 굳은 채로 달리기 시작했다. 턱이 얼얼해져서 숨결만으로도 바닥에 떨어질 것 같았다. 무의식중에 시계탑을 쳐다보았다. 째깍, 째깍. 없는 소리도 빚어지는 현재, 초침은 새벽 열두시 삼십분을 막 가리키고 있었다. 수페리우스는 목을 움켜쥔 채 내달리던 도중 그을어진 비명을 질렀다. “로… 로미… 이민우--!!! 안 돼!!!!” 꽈꽝-! 그리고 저 쪽 어디선가 한 번은 들어본 적 있는 폭발음이 들렸다. 하프의 선율처럼 부드럽고 슬픈 아마데우스여. 고통과 추억의 산물 나의 아마데우스여. 지독한 한파가 온들 너의 멋은 찬란하다. 아름다운 아마데우스여. 1차 폭발이라 사려 되는 지점은 오르페우스 관이 분명했다. 아이는 품안에 쥐었던 가방을 질질 끌면서 걸었다. 푹석 내려앉은 오른쪽 뒷벽의 잔해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더불어 그 즈음에 있을 고풍스런 악기들이 떠올랐다. 약속의 시간에 모인 반 아마데우스의 인파들, 그리고 폭발 소리를 듣고 기숙사에서 뛰쳐나오기 시작하는 학생들. 우르르 무너진 오른쪽의 비범한 장식들과 하늘로 승천하는 매케 한 회색 연기들. 그 까만 연기들은 건물 한 채를 삼키고도 남을 듯이 크고 웅장했다. 이것은 꿈이 아닐까. 오르페우스 관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혜성의 어깨에 납이 떨어졌다. 장미의 향이 죽었다. 몽중의 장면처럼 멀고도 가깝게, 시큼한 폭약 내 음에 기침을 하면서도 서서히 연기 사이로 출현하는 기괴한 건물 모양이 정신을 이탈하게끔 유도하기 시작했다. 잠옷 차림의 학생들은 하나같이 성대를 울리고 있었다. 개중에는 눈에 익은 샤우트 녀석들까지 보였다. 학생들과 비슷한 표정으로 경악하며 나타난 교수들은 겨우겨우 뒤로 물러나라는 말만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다. 꿈일까. 지옥 불에 쌓이는 꿈이 아닐까. 그 때 건물 내부가 훤히 보이도록 뚫린 오른쪽 곳곳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투두둑. 투두두두둑- 세찬 바람에 응당 반응하며 잔챙이 덩어리가, 한때는 나도 우아한 벽이었노라 아프게 신음하며 떨어졌다. “까아아악!” “콜록! 콜록! 거기! 거기 누구!” 아름다운 아마데우스여. “마리아가 아까 악보를 두고 왔다고 다시 나갔었는데! 쿨럭! 누가 제발 그 애를 찾아 봐!” “십자가가 떨어진다! 뒤로 물러나!” 태양처럼 빛나라. “누가 이런 짓… 아아악!” 물처럼 흐르고, 꽃처럼 피어라. 크당- 쿠구구구구. 오른쪽 잔해에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서 있던 웅장한 십자가 장식이 몹쓸 판자 나부랭이처럼 바닥에 대자로 떨어졌다. 크게 한 번 들썩이는 과정조차 없이 대지에 박히듯이 떨어지는 바람에 몇 몇 주변 인파가 몸을 사렸다. 다행이도 그것에 스친 너 다섯 명만이 죽을 듯이 신음하며 몸을 비틀었다. 혁명의 날. 그 때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 때 누군가가 시작해! 라고 소리치며 십자가로 인해 귀를 막았던 청각을 깨웠다. 혜성의 죽어가던 이성이 번쩍 세워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신이 난 샤우트 녀석들이 시시하다는 표정으로 난장판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조용히 잠복하려던 반 아마데우스 녀석들은 엉겁결에 분위기에 취해 멋대로 학생들에게 주먹을 날리는 샤우트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별안간 이게 무슨 일일까. 로미오는 그 와중에도 보이지 않았다. 걸음이 무거워. 저기까지 간다 한 들 뭐가 해결될까. 하느님. 내 안의 신이시여. 나는 가장 잔인한 꿈을 꾸고 있습니다. 오르페우스 관 근처에 당도할 무렵, 몇 몇 학생들이 수페리우스를 알아보고는 탄성을 질렀다. “수페리우스! 오 하느님!”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공포와 화염에 질식하고 있는 그들의 눈동자는 수페리우스를 반가워했다. 아니, 매달리려고 했다. 혜성은 자신을 보며 안도하는 학생들의 눈빛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그때 멀리서부터 째진 외침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저 새끼들을 막아!” “!” 쇼너 스타니! 아이는 넋을 잃은 채로 그가 자신을 스쳐 우루루 떼를 이끌고 나아가는 것을 보았다. 꿈일까. 이 모든 것은 꿈이 아닐까. 긴 블론드를 출렁이며 화장기 짙은 그가 뭐라고 소리치는 거지. 사방이 몽롱해서 제대로 들리지 않아. “수페리우스!” “……?” 느려. 모든 것이 너무 느려. 세상이 죽어가는 게 아닐까. “정신 차려!” “쇼…너…?” 윽박지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용케 정지해 있는 수페리우스를 알아본 쇼너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그는 누군가를 흠씬 팬 뒤였는지 사자처럼 으르렁거렸다. 그에게 남아있는 건 한줄기 이성과 영혼까지 차지한 본능밖에 없어보였다. 충혈 된 그의 눈동자는 독일에서 보았던 젠틀함과 한국으로 오기까지의 상냥함 따위를 씹어 삼켰는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즉흥 광시곡, 음악은 살아서 움직였다. 신의 형별, 신의 음악. 그 역시 뮤즈였다. “민우가 불었어! 그 새끼는 제정신이 아니라서 가뒀다! 망할 학생회장 이자벨이 규율로서 반 아마데우스를 없애겠다고 말을 했었나봐!” “뭐…라 구요…?” 아이의 어깨를 움켜 쥔 채 고함을 지르는 쇼너 스타니의 뒤 쪽으로 잿더미에서 살아난 불씨가 춤을 추기 시작하는 게 훤히 보였다. 밤바람은 그것들에 활력의 숨결을 마구 불어넣었다. “그 잘난 이자벨은 어디 있나! 교수들은 대체 뭘 하는 거지? 경찰은?” “…샤우트….” “뭐라고?” 쇼너가 흔드는 대로 힘없이 움직이던 수페리우스는 흐릿해진 시선으로 멍청하게 대답했다. 느릿느릿한 광시곡의 출현이 머지않았어… 아름다운 나의 아마데우스… 나의 아마데우스… 그러나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신의 광시곡…. “이것 봐! 수페리우스!” “샤우트는… 미군의 보호를 받고… 그래서… 아마… 경찰은 오지 않을…….” “……제기랄!” 쇼너 스타니가 싸움판에 끼어 들어갈 때, 학생들은 세 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불을 끄려는 학생들과, 잔챙이가 된 악기를 쥐고 오열하며 정신을 놓으며 벌벌 떠는 학생들, 그리고 반 아마데우스와 섞여 이유도 모르는 채 싸움질에 몸을 날리는 학생들. 여기는 지옥의 광시곡이 끊임없이 펼쳐지는 겨울 사막이었다. “수페리우스!” 쇼너 스타니의 음성이 멀리서 스멀스멀 전해졌다. 수페리우스는 혼자 정지한 채 번잡한 틈에서 멍하니 눈물만 흘렸다. 그 때 쇼너 스타니와 수페리우스를 노리고 둔기를 쥐고 달려오는 샤우트의 거대한 몸집이 보였다. 순식간에 아이를 품에 안은 채로 보호하듯 감싸더니 쇼너 스타니는 구둣발로 놈의 안면을 후려 갈겼다. 그러나 이때마저도 수페리우스의 동공은 풀려있었다. 쇼너 스타니는 실로 답답하다며 세게 소리쳤다. “2차 폭발은 막았어! 오르페우스 관은 괜찮아! 그리고 여기 학생…….” “!” 오르페우스 관은 괜찮아! 그 뒤의 말들은 들리지 않았다. 번쩍! 수페리우스의 죽었던 눈매에 불화살이 당겨졌다. 이성의 찌꺼기가 부활했다. 아이는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그만 둬! 멈춰!” 익숙한 음성이 또 발견되었다. 이자벨 장이, 무너진 더미 중 발이 빠진 피아노 위에 올라가서 엉망이 된 머리칼을 휘날리며 정신없이 소리치고 있었다. 싸움꾼의 기질이 타고난 쇼너 스타니는 솜씨가 좋았다. 그는 알고 보니 열 명 가량밖에 되지 않는 샤우트 녀석들을 정리했기 때문이다. 그 소수의 숫자들 때문에 불거 난 학생들의 크기는 어마어마했다. 야생마처럼 흥분해서 몸을 날리는 선량한 학생들의 숨소리는 거대한 폭포수처럼 잔인했다. 휘잉-! 큰 바람 소리가 겨우 들릴 때가 되어서야 오른쪽이 벗겨진 오르페우스 관 입구의 부러진 피아노 위에 올라간 이자벨이 모두에게 보였다. 그녀는 목이 쉬어 있었으며, 교수들은 학생들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괜찮아… 기숙사로 돌아가… 괜찮아….” 아이는 매케 하게 흩날리는 회색 잔해 사이로 그을어져 울기 바쁜 학생들에게 자상한 투로 어울러 주었다. 이자벨. 이 모든 일의 시발점이 그녀였다. 무책임한 그녀였다. 이렇게 될 것을 필시 예상 했을 그녀였다. 한심한, 그녀였다. “니가… 미쳤구나… 이자벨….” 수페리우스의 등장만으로도 안심하는 학생들에게 미안해서 아이는 숨을 쉬어도 사는 게 아니었다. 걸어도 가시밭길이었다. 어깨의 무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 샤우트 놈들을 장미 문 밖으로 쫒아 낸 다음 다시 오르페우스 관 입구 쪽에 달려온 쇼너 스타니의 몰골도 엉망이었다. 까만 재가 그의 꾸민 얼굴과 몸 주변에 달라붙어 있었다. 미안해요 쇼너 스타니… 아이는 가까스로 냉정해진 이성을 붙들고 피아노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이자벨을 지켜보았다. 육백 여명의 학생들은 으득으득 턱을 떨면서도 용케 피하지 않고 수페리우스를, 이자벨을, 쇼너 스타니를, 자신들에게 돌아가라 명령하는 교수들을, 모두 숨을 죽인 채 쳐다봤다. “…….” “…….” 싸움은 끝났지만, 난장판이었던 아까 와 비교도 안 될 만큼의 공포스러운 긴장감이 맴돌았다. 시계탑의 초침이 새벽 두 시를 크게 알리며 몸부림쳤다. 눈물은 멎었다. 상황이 극에 달하고 수세에 몰려서야 제 것이 펼쳐지는 이상한 본능을 지닌 수페리우스 만이 한심하다는 듯 이자벨과 마주섰다. 말없이 노려보는 수페리우스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 그녀는 냉담한 투로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말했듯이, 이제 아마데우스에 애송이는 필요 없…….” “닥쳐….” “뭐….” 차악-!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반문하기도 전에, 수페리우스의 강한 손찌검이 그녀의 뺨을 쳤다. 학생들과 모두는 기겁해서 입가에 손을 모았다. 곧이어 모세가 불같이 나타났지만 그는 쇼너 스타니에게 잡혀서 걷어차이기만 했다. “!” “!” “히익. 히이힉… 히익. 히이힉.” “…시끄러워.” 바닥에 엎어진 이자벨이 모멸감으로 빚어진 묘한 숨소리를 내며 어깨를 크게 움직였다. 뚝. 두둑. 그녀의 아름다운 눈망울 밖으로 거침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살벌한 혜성의 말투는 난생 처음 접해보는 그것이었다. 크리스티안을 짓밟을 때의 히틀러와 같이 지금의 수페리우스는 냉정하고 잔인해 보였다. 이자벨은 단번에 기가 죽었다. 그러나 그녀가 누구던가. 따귀 한 대로 쓰러질 위인은 아니었다. 그녀는 곧 일어서더니 학생회 인원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저것들을 학생 감옥에… 으윽!” “…뭐…라고…?” 그러나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괴로운 듯 숨을 참으며 양 팔을 버둥거려야 했다. 날렵하게 이자벨의 멱살을 쥔 수페리우스의 행동 때문이었다. 기겁하는 좌중 모두는 어찌할 바를 몰라서 석고처럼 제자리에서 굳었다. 아름다운 나의 아마데우스여… 혜성의 뺨을 타고 진솔하고도 뜨거운 자국이 그림처럼 쭉 흘렀다. “니가….” “히익. 히이힉. 놔, 놔!” “니가… 단단히… 미쳤구나….” 이게 무슨 짓이냐며 빽빽 소리치는 이자벨은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수페리우스의 마음속에는 분노만이 살아서 숨을 쉬었다. 이 미친년을 죽여 버리라고 검은 물은 출렁이기만 했다. 살쾡이처럼 빛나는 눈동자는 이대로 그녀의 목을 비틀라고 부추겼다. 하지만 다른 쪽에서 냉정하게 살아있는 이성의 실이 아이를 이끌었다. 수페리우스는 헐떡이는 이자벨을 바짝 당겨 와서 안면을 맞댄 채 이글대는 동공으로 노려보았다. 그녀도 지지 않고 수페리우스를 쳐다봤다. 둘은 동시에 눈물을 흘렸지만 그들의 색은 각기 다른 방향을 따라가고 있었다. 한참이나 그녀를 노려보던 중, 수페리우스는 내던지듯이 이자벨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나는!” “…….” 상당한 학생들의 시선을 의식한 탓에 이자벨은 가슴을 움켜쥔 채로 비틀비틀 일어나서 호소하듯이 소리쳤다. 공중에 돌아다니는 회색 잔해들이 그녀를 감싸듯 나폴 거렸다. “규율대로 하는 것이다. 세상의 정의는 법이 판가름 하거든! 잘 모르는 애송이가 뭘 안다고 이러는 거지?” 저 년의 목을 비틀어버려! 검은 물은 수페리우스의 순결한 손에 힘이 들어가게 했다. “내 말을 들어! 너희들은 똑똑히 알아들어라. 정의는! 법과 규율로 판가름 난다!” 이자벨… 이자벨! 저 년의 혀를 뽑아 버려! 급기야 이성까지 총동원되어 수페리우스의 영혼을 후려 찼다. 혜성은 뺨을 한 대 더 치려는 것을 대신해서 크게 외쳤다. “네가 말한 그 잘난 법과 규율이라는 놈도 사람이 만든 거야!” 한없이 떠들던 이자벨의 전체가 경직되었다. “!” 세상 모든 것은 자연을 따라하는 사람이 만든 거야! 사람이 만든 거야! 그리고 이자벨은 무너졌다. 신기한 노릇이다. 2차 폭발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규율이란 사람이 만든 거라는 수페리우스의 구절이 마지막까지 버티던 이자벨을 무너지게 한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떠들지 않았다. 본능으로 떠들었던, 감정에의 입술은 그제 서야 이자벨을 꾸짖은 모양이다. 그녀는 옳게 개인 정신으로 막판에 몰려서야 다급하게 주변을 살폈다. 내가, 내가 무슨 소리를 했지? 나의 별것 아닌 말들이 화를 부른 건가? 그녀의 겁에 질린 눈동자는 늦은 후회로 질려 있었다. 그녀는 지금에서야 쇼너 스타니를 알아보고는 당황한 기색으로 다가왔다. 모세를 단단히 쥐고 있는 쇼너 스타니의 눈동자는 그러나 차게 식어서 감정이란 찾아 볼 수 없었다. “일단은….” “…….” 쇼너 스타니의 앞에 선 이자벨이 학생회장으로서, 또 교수들의 신임을 어깨에 쥔 채로 뭐라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제가 대표로서 분명하게….” “하하 하하하!” “……?” 모세를 풀어주며 쇼너는 날카롭게 웃었다. 방정맞을 정도로 호탕한 소리가 하늘을 거스르듯 힘차게 울렸다. 샤우트와 쇼너 스타니. 반 아마데우스. 폭발. 정신없이 벌어진 사건들과 인물들이 낯설었던 학생들과 교수들은 입술을 깨물며 주목하고 있었다. 이윽고 뚝 웃음을 멈춘 쇼너 스타니가 반질반질하게 입술을 혀로 훔친 뒤, 째진 소리로 반문했다. “네가, 대표라고?” 흠칫 놀란 이자벨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면서 차분한 척 대답했다. “그렇…다.” “…….” 쇼너 스타니는 입을 다물었다. 학생들은 숨을 죽였다. 교수들 역시 학생들에게 돌아가라고 지시하는 것을 포기했는지 멍청하게 서있었다. 수페리우스 앞으로 모세가 다가와서 위협하듯 노려봤다. 이자벨이 천천히 무어라 입을 열려던 때, 갑자기 멀리서 비명 소리가 터졌다. “!” 먼 곳에서부터 비명소리는 서서히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또 무슨 일이지? 샤우트는 보냈는데! 조용하던 와중, 바다가 갈리듯이 인파가 둘로 나뉘어 길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서서히 누가 나타나는 것이다. 살아 움직이는 모양새는 멀리서 봐도 호흡이 멎을 정도로 카리스마가 넘쳤다. 테오제네스의 윤곽이 보이고… 혜성은 다시 저의 목을 움켜쥔 채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옷을 적시는 여름의 흥건한 땀을 흉내 내듯 지독한 겨울의 새벽, 온 몸이 식은땀과 눈물로 젖어 들어간다. “너는, 대표가 아니다.”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나타난 인물은 시니컬한 투로 오르페우스 관 입구에 서는 즉시 던지듯 말하였다. 테오제네스가 밀어주는 휠체어에 타고 유유자적 나타나서 감은 눈으로 음성을 던지는 그는, 테레사였다. 아름다운 아마데우스여. 태양처럼 빛나라. 물처럼 흐르고, 꽃처럼 피어라. wgreene@naver.com 그러나 이것은 끝의 시작일 뿐. 만족하셨는지요. 저는 순수의 시대를 완성한 뒤 돌아오겠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만남, 증거.. 정성 가득한 댓글 언제나 고맙게 읽고 또 읽습니다. 늘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덧글 25개 엮인글 쓰기 /data17/2006/10/31/281/4-wgreene.jpg@nhn@28361@nhn@1@nhn@520@nhn@195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66편 /data17/2006/10/31/281/4-wgreene.jpg@nhn@28361@nhn@1@nhn@520@nhn@195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66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67-1편 ▼ 다음글 - 2악장 65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67-1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11/02 17:33 http://blog.naver.com/wgreene/110010410549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1102 67-1편 업데) Amadeus 음악 : Scorpions - Hurricane 2000 (재생버튼클릭) Hurricane 2000-Scorpio.. 야누스의 두 얼굴? 2악장 67-1편 “정말 테레사!” “맙소사!” 테레사 라는 이름은 모두를 두근거리게 하는 하늘의 심장이었다. 재력과 힘의 상징이었다. 지상 최대의 칸타빌레, 아마데우스의 제왕이었다. 그는 보스턴이며 뮌헨이었다. 런던의 대형 음악 출판계마저 손안에 쥔 음악의 신이었다. 또는 계절의 시초를 주관하는 절대신 야누스였다. 그의 이미지는 꺼내는 족족 천지개벽의 음계와 시를 창조시켰다. 그는 글자였다. 가십이었으며 살아있지만 숨을 쉬는지에 대한 여부가 늘 궁금한 별세계인물이었다. 그 인물이 아닌 밤중의 홍두깨 격으로 출현했다니? 밤의 회오리가 그에게로 밀리는걸까, 경악하던 모두는 테레사를 중심으로 터지는 신음을 같은 방향에 쏟았다. “오, 테레사!” 그가 눈을 감은 모습은 리사이틀 포스터에서의 것보다 훨씬 흡입력있게 다가왔다. 잠옷 차림의 신입생들은 먼지로 콜록거리고 추위에 몸을 웅크리면서도 자신들을 스쳐 나아가는 테레사를 확인하기 바빴다. 신입생들은 선망의 대상 테레사를 실제로 본 적이 이제껏 없었기 때문이다. 테레사! 테레사! 테레사! 저마다 뛰는 심장들은 그의 이름을 소리쳤다. 그가 등장하자 이제껏 있었던 폭발과 다툼, 엉망이 되었던 언어는 몽땅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오른쪽 벽이 완전히 사라진 오르페우스 관 입구에 도착한 테레사는 시력이 없어도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근엄하게 휠체어에서 일어났다. 오, 하느님! 그를 지켜보던 교수들과 학생들은 숨을 죽였다.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맵시있고 단정한 예식복은 어느때보다 날씬하고 탄탄한 그의 전체에 잘 어울렸다. 번쩍! 테레사의 회색 동공이 뜨였다. 야누스의 두 얼굴중 가장 까칠하면서도 날카로운 것을 꺼낸 테레사는 마치 모두를 지켜보듯이 뺨을 쉭 돌리더니 힘을 주어 말했다. “대표란.” 그다지 큰 억양도 아니었거늘, 그 소리는 바람처럼 변화되어 모두의 머리칼 위를 쉭 스치는 기분이었다. 그의 뺨이 신기하리만치 정확한 곳을 응시할 때, 왼 켠에 서 있는 이자벨의 낯이 더더욱 창백해졌다. 그는 감정기 따위는 없이 표정 만으로도 압도하며 이자벨을 가리키고 있었다. “대표란, 나무보다 산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이해와 타협이 공존해야 하며, 자기가 무너지더라도 이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게 음악보다 중요한 것이다.” 아마데우스! 누군가의 마음이 깃발처럼 펄럭이며 그의 존재를 확실시했다. “!” 맞은편의 쇼너 스타니가 처음으로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때가 되면 자신의 우두머리를 위해 충성스러움을 보일 준비가 되었노라 자신있게 웃는 것이다. 테레사, 테레사? 혜성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자신과 상당히 가까운 자리에 서서 모두를 잡아당기듯 말을 하는 그를 경이로운 시선을 담아 올려보았다. 아무도, 그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한다. 종이에 적힌 정의라는 글자도 살아 숨 쉬는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가슴이 터질 것 같아요, 테레사. 어떻게, 어떻게 당신이…! “너는 절대 대표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인정하는 자와 타협하겠다!” 군중은 한 번 더 출렁였다. 우리? 테레사는 틀림없이 우리 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타협은 즉 반아마데우스를 뜻할텐데, 우리라니? 로제리오 교수가 무어라 말을 할 모양새로 걸어왔지만 테오제네스가 로제리오에게 귓속말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로제리오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은 태양처럼 번쩍이는 테레사에게 못밖은채 뒤로 물러났다. 그는 여전히 밤의 태양이었다. 향기로 중독시키는 가시달린 마리아 칼라스였다. 등장 만으로도 상황이 조용해졌어. 정리 되었어. 이럴 수가. 절도있는 억양과 손놀림, 그는 마지막 타협 구절에서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어. 분명히 섬뜩하리만치 아름다운 미소가 스쳤어. 나는 봤어. 그는 눈이 없어도 저토록 아름답고 용맹해. 두려움이란 전혀 없다는 말투에 소름이 끼쳐. 그에게도 두려움이 있을까! 혜성은 목을 움켜쥔 채 바들바들 떨었다. 하나 둘, 밤의 이삭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깊은 밤, 끔찍한 적막을 깨부수겠노라 위협하듯 컴컴한 하늘은 조심스레 눈덩어리를 대지에 던졌다. 어디선가 하이데스의 마차가 빚는 바이올린의 얇지만 굵직한 음표가 화살처럼 청각에 쏘였다. 지금의 테레사가 던진 구절을 알아듣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반 아마데우스의 인파들, 그리고 교수들과 학생회, 수페리우스. 이 밖의 인물들에게 테레사는 어떤 형식으로 반 아마데우스를 납득시킬까? 혜성의 작은 머릿속에는 수많은 글귀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테레사를 관찰하느라 쉴틈이 없었다. 반대편의 이자벨은 넋이 빠진 채로 모세에게 부축 따위를 받으며 간절한 표정을 짓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녀는 경악했다. 물증 따위는 이제 없어도 좋다. 테레사의 등장과 그의 입술은 아닐 거라고 부정했던 모든 억측이 사실임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나의 진이 진실로 그들의 우두머리였다니! 선구자였다니! 이자벨의 아름다운 입술이 파랗게 트이며 원망도 절망도 아닌 묘한 글자에 섞일 때, 마치 그녀의 변화를 모두 지켜봤다는 듯 테레사는 그녀의 앞으로 걸어갔다. 걷는 속도는 조심스러웠지만 그만큼 정확했다. “!” 모두는 다시 숨을 죽이고 눈앞의 장면을 보았다. 테레사가 이자벨을 껴안으려는 게 아닐까. 누가 봐도 상황이 그러했다. 약간 화색이 돌아온 이자벨의 눈망울에 스친 승리자의 그것은 연인과의 포옹 직전에만 발견할 만한 것이었다. 테레사를 주목하던 쇼너 스타니는 미간을 찌푸렸고, 혜성은 천천히 무릎을 펴며 일어났다. 폭풍의 눈처럼 고요하던 아마데우스에 소리없이 함박눈이 내렸다. 이 눈이 저들의 포옹이 있다면 제발 가려주기를. 아이는 일그러진 마음처럼 갈라진 입술을 깨물었다. “!” 그리고 군중은 다시 입을 벌리며 놀라워했다. 테레사는 막 팔을 벌리고 달려오려는 어린 아이와도 같은 이자벨을 기다렸다는 듯 지나쳤기 때문이다. 그는 이자벨을 지나치며 무미건조한 투를 그녀만 알아 들을 수 있도록 내뱉었다. “진…….” 피식- 잔인하리만치 영악한 비웃음이 테레사의 입가를 짧게 스쳤다. “괜찮다. 너는 너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었던 거다. 그것을 벗으면 돼.” 폭포수처럼 떨어진 강렬한 음성이 있다. 그녀는 팔을 벌린 채로 굳었다. 모세의 인상이 그 어느때보다 험악해졌지만 이자벨이 흐느끼는 통에 아무도 그의 인상 따위에 관심을 두지 못했다. 아무리 화가 나도 늘 다정하게 얘기해 줬잖아, 진? 과거의 연인은 뼈아픈 마디마디를 억누르며 마음으로 크게 소리치는 것 같았다. “수페리우스.” “……?” 이자벨의 심리 따위를 자연스레 추적하던 마음이 삽시간에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덜컥- 내려앉은 심장을 부여쥐며 혜성은 마른침을 삼켰다. 뻥! 머리가 터질듯 울리는 음성은, 그의 존재가 현실임을 증명하듯 다시 들려왔다. “수페리우스!” 단호하고 분명한 음성으로, 그가 나를 부른다. 바들바들 떨며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던 혜성이 무너지듯 그에게로 걸어갔다. 바닥이 함께 걷는 것처럼 몇 걸음 안되는 거리가 아주 멀게 느껴졌다. 혜성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테레사의 히스테리칼한 음성은 다시 들려왔다. “내 앞으로 와.” “…….” 흠칫 놀란 수페리우스가 테레사의 앞에 서서 좌중을 뒤로 한 채 푹 고개를 숙였다. 마주 선 것 만으로도 오금이 저려왔다. 야누스의 험상궂음이 영혼까지 꽉 조여서 숨을 쉬어도 쉬는게 아니었다. 오, 테레사. 아이는 순간 마음이 풀렸는지 연약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도 그럴듯이 테레사가 더듬더듬 오른팔을 내밀더니 혜성이 제대로 자신의 앞에 섰는지 뺨 주변을 만지작거리며 확인했기 때문이다. 테레사, 테레사!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껴안고 다른 것따위는 다 집어치우고 싶은 저질스러운 욕망이 거칠게 뛰놀았다. 그러나 테레사는 혜성의 예상과는 달리 순식간에 오른손을 허공에 올리더니 수페리우스의 작고 보드라운 뺨을 쳤다. 차악! 손찌검의 방향대로 몸이 돌아간 수페리우스가 단숨에 쓰러졌다. “까악!” 앞주변에 포진하고 있던 무리들이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수페리우스! 히익!” 그러나 그 누구도 수페리우스에게 달려오거나 테레사! 라며 책망하는 말 따위는 감히 내뱉을 수 없었다. 테레사는 아이가 일어서는 즉시 기다렸다는 듯, 다시 뺨을 쳤다. 주먹으로 치는 것과 비슷한 힘을 실어서 이번에는 아이의 입가가 픽! 터지더니 줄줄이 붉은 덩어리를 내뱉었다. 수페리우스가 일어나면, 테레사가 친다. 그리고 또, 다시 또. 입이 터졌다는 것을 테레사 역시 저의 주먹에 묻은 피로 알았는지 이번에는 배를, 곧 일어서지 못하는 혜성의 몸을 구둣발로 걷어 찬다. 이자벨 앞에서는 보이지 않던 분노를 오직 수페리우스에게만? 믿을 수 없는 장면이 연이어 터지자 수차례 비명을 지르던 좌중의 함성도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수페리우스가 신음을 참아내며 온 몸을 움켜 쥘 때, 좌중은 자신들의 몸이 아픈것처럼 느껴졌는지 숨을 헐떡였다. “으…으흐… 으흐으…으응… 아… 아아아. 아….” “…….” “아흑….” “…….” 일어나. 아이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요구하고 있는게 느껴졌다. 얼얼한 뺨과 고통으로 찰랑대는 몸을 내버려둔 채 수페리우스는 벌떡 일어나서 다시 그의 앞에 섰다. 참 이상한 심적 변화가 가지런하게 정돈되었다. 이럴수가. 그가 때리는 순간, 아이는 깨달았다. 아까 전 자신이 이자벨을 때렸던 이유와 '같은' 이유로 그는 나를 친 것이다. 화가 난 것이다. 내가 로미오가 아니라 이자벨에게 근본적인 분노를 느꼈듯이, 그는 더 큰 화를 나에게 느낀 거야! 몸이 아픈 만큼 발바닥부터 치밀어오르는 감동이 자꾸만 빠져나갈양 머리 꼭대기에서 우걱거렸다. 양 쪽 주먹을 움켜쥔 채 수페리우스는 똑똑히 앞을 응시했다. 그의 정갈한 예식 복과 미미한 체향이 조용히 밀려와서 이대로 눈만 감으면 그와 단 둘 밖에 없노라 가슴은 그리 느낄 것 같았다. “…네 위치를 이제 제대로 깨달았는가, 수페리우스.” “!” 테레사! 번쩍 아이의 턱이 올라갔다. 강직하지만 색이 없는 테레사의 동공은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힘있는 그의 표정과 조각같은 인상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음성은 음악처럼 감미로우면서도 자연을 이끄는 태양만치 뜨거웠다. 그가 인정하는 유일한은 수페리우스 였던 것이다. 오 하느님. 지켜보던 육백 여명과 뒤늦게 오르페우스 관에 당도한 무리들은 신음을 참아내며 더더욱 숨을 죽였다. 얼얼해진 뺨을 무의식중에 매만지며 혜성은 비로소 깨달음의 눈물을 주륵 흘렸다. 가슴에 비가 내렸다. 하늘이 던지는 함박눈에 비는 얼었다. 곧있으면 박제로 변해서 영원토록 내 안에 함께할테지. 그가 나를, 그가 나를 인정한다. 그래서, 모두의 앞에서 그가 나를, 이자벨이 아닌 나를 꾸짖는 것이다.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이렇게 나를 대놓고 때릴 정도로 그는 최악으로 화가 난 거야. 내가 현재의 아마데우스니까. 가슴이 부서질 것 같다. 이미 터지고 없어졌는지도 몰라. “저는…….” 당장 꼿꼿이 선 채 말을 하려던 수페리우스는 허리를 숙였다. 맑게 스치는 민우의 음성이 지금 이 순간만큼 절실한 적이 또 없었다. 천천히 허리를 숙이자 뜨거운 눈물이 턱에서 미끄러지더니 바닥에 툭 떨어졌다. 눈물처럼 진한 음성이 가슴으로부터 빚어진다. “죄송합니다, 테레사.” “!” 이제서야 사태를 파악한 이자벨의 안면에 분노가 싹텄다. 그러나 테레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특유의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수페리우스의 연약한듯 강인한 대답이 곧 이어졌다. “제 불찰이었습니다.” “네가 나를 대신해서 한국 아마데우스를 짊어 진 무거운 어깨의 주인인가?” “……그렇습니다.” 지금의 테레사는 야누스의 거친 면만 내놓고 있었다. 아마데우스이자 반 아마데우스였다. 반 아마데우스의 진짜 우두머리였다. 그렇다면 질 수 없다. 혜성은 당장 허리를 펴고 고개를 끄덕였다. 눈매가 다부진 마음처럼 또렷하게 반짝였다. 입 안으로 눈물이 세어들어왔지만 상관 없었다. 터진 가슴은 아무런 맛도 느끼지 못하도록 단단한 방패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는게 좋다고 보는가, 나의 후임이나 다름없는 한국의 수페리우스.” “그것은…….” “…….” “당장 말씀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들을 지켜보던 이자벨이 수치심으로 붉어진 낯을 어쩌지 못하더니 모세를 끌고 사라져간다. 혜성에게는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비롯한 모두를 관찰하자니 눈앞에 번쩍이는 테레사의 존재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만치 대단했다. 잠시 골몰하던 혜성은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말한다. “미래는, 움직이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섣부른 말로 쉽게 결정 지을 수 없을 때는 현재 벌어진 일을 수습하는게 먼저일 것입니다.” “…그리고?” “…….” “그리고?” 반 아마데우스이자 아마데우스. 그러나 현재에는 반 아마데우스의 쪽이 확실한 테레사를 높이 쏘아보며 혜성은 유들하면서도 정확한 투로 대답했다. 당신은 반 아마데우스이다. 나는 반드시 설득할 것이다. 아까의 당신이 아마데우스를 사랑하는 마음을 대신하여 나를 분노했듯이, 나 또한 진심을 증명할 수 있다. 나는 당신의 수페리우스니까. “오르페우스 관의 악기가 아니라, 전부를 새롭게 새우는 계기로 이름을 바꾸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당신이 만든 터전이 결코 바래지지 않도록…….” “…….” “학생들이 훨씬 사랑할 수 있도록 주인이 되겠습니다.” “…….” “그리고, 반 아마데우스의 우두머리여.” “…….” “또한 아마데우스이신 당신께 나는 드릴 실망 이라는 게 없습니다.” “…….” 그들의 음성이 짙어진다. 혜성은 당당하게 팔을 내밀었다. 혜성의 움직임을 청각으로 눈치 챈 테레사가 기다렸다는 듯 오른팔을 내밀었다. 두 사람의 손이 꽉 쥐어져서 짧게 악수할 때가 되어서야 좌중의 눈동자는 속수무책으로 다가왔던 두려움에서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지금 저들의 대화가 뜻하는 바가 무엇이지? 반 아마데우스? 그리고, 어째서 아마데우스? 조용한 가운데 몇 몇이 술렁이기 시작하자 음성은 밤을 찢어뜨릴 것처럼 높아졌다. 혜성은 이 즈음 되어서야 아차 싶어졌는지 학생들의 무표정을 돌아봤지만, 그보다 테레사가 훨씬 빨랐다. “그러다가 감기 걸리겠어.” “?” 야누스의 죽음과도 같은 시선이 사라지고, 부드러움이 나타났다. 테레사는 시력이 없는 것처럼 굴면서 의구심으로 갈팡질팡하는 좌중의 무리들을 향해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귀여운 토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딱 하나다!” 토끼? 졸지에 토끼로 변한 학생들은 술렁이던 속삭임을 중단하고는 몸을 움츠린채 테레사의 다음말을 기다렸다. 그는 당연히 지금 있었던 대화의 의미를 납득시켜줄 것이다. 왜냐면, 그는 늘 그래왔으니까. 그리고 학생들의 귀여운 기대는 맞아 떨어졌다. 온화롭게 웃어주는 아름다운 테레사의 입술은 은은하게 이어졌다. “내일 가십에서 나를 읽어라! 사상자가 없어서 다행이군. 병약한 자가 못난 손으로 폭죽놀이를 했다고 여기면 돼.” 가십? 늘 가십의 글자로 올려보던 인물이, 귀찮다는 듯이 내일 가십으로 확인하라고 소리친다. 학생들은 잠시 굳어서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내일까지 참으라고? 지금까지 있었던 어마어마한 순간을? 그건 자지 말고 무조건 참으라는 거랑 뭐가 다르지요? 조바심이 난 군중은 발을 동동 굴렀다. 개중 용기가 가상한 덩치 좋은 몇 놈이 우락부락한 투로 내일까지 못 기다리겠다는 말을 하려던 때, 테레사가 싹 웃음을 거두더니 히스테리칼하면서도 확실하게 소리쳤다. “돌아가!” 그 와중에도 약간의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테레사는 희미한 웃음소리를 내며 굳은 표정으로 직격탄을 날렸다. “지금 돌아가지 않는 토끼들은 바오르 신부님의 자선회에 보내주마.” “!” 흠칫 놀란 학생들은 여기서 더 얻을건 없노라 판단했는지 하나 둘 기숙사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쇼너!” 학생들이 반 이상 사라졌을 무렵, 혜성이 그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입을 모았지만 이번에도 테레사가 빨랐다. 그의 인상이 매우 진지해졌다. 군중이 사라졌으니 남은 시간을 활용해서 진즉에 예상해둔 다른 것을 해결하려는, 그런 표정이었다. 혜성은 저 표정을 알았다. 자신 역시 몇 번이나 남들 앞에서 지었던 갈증나는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잡을 수 없어, 눈앞에 있는데도 그를 잡을 수 없어. “어디에 가뒀다고? ……뭐? 하하하. 괴물 취급을 하셨구만. 좋다. 지하로 가자.” 쇼너가 즉각 달려왔고, 테레사는 그로부터 이민우에 대한 몇 가지를 전해 듣더니 관자놀이를 꾹 꾹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테레사. 나는 보이지 않아요? 내가 느껴지지 않아요? 방금 전 대화했던 내가? 당신의 분노로 쓰러졌었던 내가 안 보여요? 수페리우스는 쇼너와 테오제네스에 둘러 쌓여 자리를 빠져 나가는 테레사의 뒷모습을 망연자실 응시했다. 테레사. 내가 보이지 않는 거예요? 수페리우스의 여린 피부에 굳어가는 핏자국이 눈물로 젖기 시작했다. Here I am! wgreene@naver.com 그대 혹시 아는가.. 사실은 여기까지가 지나번편이었는데... 댓글 20 개 채워지면 마저 올려야지 라고 마음먹었던 나의 검은마음을...^^ 행복한 주말 맞으시길 바랍니다. 덧글 18개 엮인글 쓰기 /data20/2006/11/2/128/343-wgreene.jpg@nhn@17857@nhn@1@nhn@400@nhn@300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67-1편 /data20/2006/11/2/128/343-wgreene.jpg@nhn@17857@nhn@1@nhn@400@nhn@300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67-1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67-2편 ▼ 다음글 - 2악장 66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67-2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11/03 16:33 http://blog.naver.com/wgreene/110010451602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1103 67-2편 업데) Amadeus 음악 : 이수영 - 얼마나 좋을까 (재생버튼클릭) 얼마나 좋을까(Orchestr.. 하느님, 하느님. 저는 어쩌면 좋지요. 때로는 야속한 이 사람을 사랑합니다…. 2악장 67-2편 정처 없이 새벽길을 걸었다. 낙엽처럼 미끄러지는 몸짓으로 따라오는 연약한 달빛이 오늘따라 안쓰러웠다. 혜성은 연신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눈물을 닦았다. 시력이 없어도 아름답고 용맹한 테레사의 모습이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바람보다 세게 스쳤다. 수십 번 죽어도 모자란 심장은 펑 소리 나며 터졌다. 그의 전체가 야상곡으로, 또는 밤의 지휘자가 되어서 곳곳에 치고 들어간 오르페우스 관에서의 음표. 처절한 감수성은 완전히 무너지고야 말았다. 누가 세워줄까, 내 감성 죽이고 살리는 것은 처음부터 이 날까지 그대 하나였는데. 선배를 이해해야 돼. 이성은 그를 추켜세웠다. 내 마음이지만 참으로 야속한 감정이었다. 허나 감성은 그를 원망해도 좋다며 아이를 자꾸 유혹했다. 퉁퉁 부은 눈처럼 볼은 부어 있었다. 조금만 인상을 찡그리면 뼈마디까지 침범하는 고통이 볼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자상했던 손바닥은 지금당장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가 나를 버린 게 아니지만 버려진 기분. 이러한 모순을 떠안고 내일을 기다리라니. 내일의 태양을, 내일의 당신을 맞이하라니. 쇼너 스타니와 테레사의 뒷모습이 이제껏 봐 왔던 것을 모두 합쳐도 모자랄 만치 멀어 보였었다. 아이는 그래서 데블 관에도 찾아갈 수 없었다. 병동은 십자가에 스치고 폭발 때의 파편에 튄 상처를 치료하는 학생들로 만원이었다. 큰 사상자가 없어서 이번일은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 폭발 장면이 번개처럼 스칠 때, 수페리우스의 걸음이 정지했다. 죽은 듯 고요했던 심장이 첨벙였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천천히 옆과 앞을, 자연이 살아 숨 쉬는 새벽의 두 갈래 길과 강물은 아름다웠다. 은은하게 빛나는 강물의 자태는 시베리아의 혹한과 겨루어도 좋을 만치 슬프도록 아리따웠다. 오르페우스 관 역시 매혹적인 곳이었다. 오른손이 절단 난 오르페우스 관을 앞으로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그러나 생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테레사에 맴돌았다. 아이는 자신의 못난 감성과 이성의 결계를 꾸짖었다. 테레사의 반만큼 만 닮아봐. 그는 지금 냉정하게 일을 수습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잖아. 너는 수페리우스잖아. 왜 울고 있는 거야 바보같이. “애송이니까… 그래서 그런가봐….” 씩씩한 바람이 언 볼을 스칠 때, 아이는 다시 걸었다. 중얼거리는 음성을 누가 들어도 지금 마음으로는 개의치 않으리라. 처음 찢어졌던 마음은 전혀 꿰매어지지 않았다. 그 사이로 잔인하게 스치는 바람은 가시가 달린 것처럼 아팠다. 숨을 쉴 때마다 찢긴 자국은 너덜너덜 흔들렸다. 그래서 솔직한 감정에의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진다. 저 미약한 달빛에 기대어 반짝인다. 지금이라도 기숙사에 돌아갈까. 마음의 여러 방문들이 쉬지 않고 열리며 갖가지 의견을 내놓았다. 어떤 방은 이쪽이 좋다고 유혹했고, 또 다른 방은 동완이의 남쪽 기숙사로 달려가자며 소리쳤다. 그러나 주인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기계처럼 몸은 일직선으로 땅을 밟았다. 목적지가 나타나는 순간, 혜성은 무너지듯 음성을 내뱉었다. “테레사….” 한산한 그의 별채 주변으로는 함박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다. “…….” 아이는 저도 모르게 여러 번 눈을 비볐다. 믿을 수 없을 만치 단정한 별채 전체가 테레사로 보였기 때문이다. 환각일까. 그래도 좋다. 시시각각 아이를 유혹했던 방문이 모두 닫혔다. 이제 수페리우스는 한 가지만 생각할 수 있었다. 그를 기다리는 거야. 그를 확인하는 거야. 나는 늘 그래왔잖아. 확인하기 전에는 믿지 않아! 그도 나를 알 거야. 이런 나를. 새삼스러울 만치 온 몸에 기운이 솟았다. 수페리우스는 더욱 빨리 별채로 걸어갔다. 하지만, 이런 나를 그가 좋아할까? 나는 그를 원망하는 게 옳을까? 그가 나 보다는 아마데우스와 반 아마데우스를 우선시 하듯이 나도 그러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무엇이 정답일까. 무엇에 결부시켜도 겁에 질린 영혼은 그가 화를 내는 모습만 연거푸 비쳐주는데……. 조용히 한숨을 내쉰 뒤, 혜성은 별채 정문에 들어섰다. 현관까지의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차가운 현관 도어를 쥐고 비틀자 예상 외로 쉽게 열렸다. 밖에서 확인했을 때 응접실 불이 켜져 있었음이 퍼뜩 생각났다. 적어도 따뜻한 공간에서 그를 기다릴 수 있다는 게 적잖이 위로가 되었는지 수페리우스는 긴 숨을 내쉬며 천천히 안으로 내딛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아이는 한심하게 느껴지는 스스로가 답답했는지 꼬옥 눈을 감았다. “……?” 그리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아주 단단한 벽 같은 게 현관 앞에 세워져서 한 걸음도 채 못 들어간 수페리우스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 현관에 벽이 만들어진 걸까. 그런가 보다. 그런데 왜 현관 입구에 만들었을까. 누가 몰래 기습적으로 닥칠 것을 대비해서? 테레사의 발상을 누가 쫒아가겠는가. 작은 머리통이 다짜고짜 벽에 부딪혔다는 것 때문에 기가 죽은 혜성이 슬그머니 몸을 뒤로 뺐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 벽이 움직였다. 벽은 사람처럼 따스한 내음을 풍겼다. 벽은 사람처럼 두 팔을 지녔다. “테레…사…?” 부를 때마다 무너지는 이름이 있다. 방 금의 것은 벽이 아니라 현관 앞에 서 있던 테레사였음을, 아이는 그의 이름을 전부 내뱉기도 전에 깨달았다. 온 몸을 으스러져라 끌어안는 그가 믿기지 않아서 눈물은 거침없이 볼을 적셨다. 그리움 짙은 음성은 마법처럼 고요히 청각에 스며들어왔다. “혜성이가 맞구나…….” 철렁- 심장이 바닥에 떨어져 몸을 굴린다. 그러나 믿을 수 없다. 혜성의 여린 몸을 소중하지만 세게 껴안아준 테레사의 음성이 진짜라는 걸 알면서도 감성은 자꾸 그를 확인하라며 비명을 질렀다. 오르페우스 관 앞에서 들었던 딱딱하고 무심한 음성은 꿈처럼 사라졌다. 달콤하고 누구보다 자상한 그의 음성이 파도처럼 스쳤다. “네가 여기로 올 줄 알았지.” 약간의 웃음기를 지닌 테레사의 음성은 또 한 번 들렸다. 싸아 해진 내면을 치고 들어왔다. 혜성은 덜덜 떨리는 팔을 겨우 들어서 테레사의 등에 둘렀다. 두 사람의 몸이 한결 더 밀착되었다. “…….” “…….”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들어야 할 말이 많았다. 해 줄 말 역시 넘쳤다. 가벼운 안부를 먼저 여쭤야 할까. 무엇이 먼저일까! 속수무책으로 당겨지는 연인의 품 속 에서 생각은 무용지물인 것을. 둘은 믿기지 않는 현재에 충실하고 싶었는지 말없이 오래도록 껴안은 채 있었다. 혜성을 안는 도중 테레사가 조용히 팔을 내밀어 현관문을 닫을 때를 제외하고는 박제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 둘의 몸은 떨어질 줄 몰랐다. 이 품이었어. 이 품이었어……. 묘한 문장만이 메아리가 되어 넓게 울렸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따스한 응접실을 지나 테레사의 피아노 방으로 갔다. 시력이 없는 건 그인데도 불구하고 끌려가듯 그에게 손이 잡힌 채 걷는 것은 혜성이었다. 타닥, 타닥 타들어가는 벽난로의 장작불이 단정한 인테리어와 묘하게 잘 어울렸다. 불 앞에 마주앉은 두 사람은 사이좋게 담요를 덮었다. 대화는 한 마디도 없었지만 괜찮았다. 서로가 분명하게 느껴지는 현재가 주는 충족은 백만 가지 시어가 있다 한 들 바꿀 수 없었다. 신이 지금을 빼앗아간다면 온 몸으로 싸워서 다시 앗아 올 만치 소중하고 감사했다. 바닥에서 약간 떨어져 앉은 혜성은 테레사의 행동을 조용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는 잠자코 골몰하더니 곧 더듬더듬 혜성의 몸 여기저기를 만졌다. 혹시라도 어디가 부러진 게 아닌지 염려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아이는 모르는 척 숨도 쉬지 않았다. 이윽고 팔과 다리를 주무르던 그의 아름다운 팔이 붉게 익은 혜성의 안면에 다가오자 트허- 하고 아이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그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긴장된 몸이 반응을 보인 것이다. 침을 삼킬 때마다 목구멍에 타액이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 나왔다. 그러나 테레사는 그런 것 따위에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나보다. 그는 몸을 확인할 때 보다 훨씬 부드러운 손동작과 함께 혜성의 볼 주변을 조심스레 확인하기 시작했다. 별다른 말없이 이번에는 바닥에 진즉부터 준비해 둔 약상자를 열었다. 그가 왜 저러는 거지? 라고 고민하려던 아이는 순간 알았다. 자신의 상처를 전부다 확인하려는 테레사를, 그래서 인사보다 그것을 먼저 해결하려는 그를. 괜찮아요- 라고 그를 안심시키라며 마음은 수페리우스를 꾸짖었다. 그러나 입 밖으로는 그 어떤 가벼운 말도 감히 내뱉어지지 않았다. 하느님, 하느님. 저는 어쩌면 좋지요. 때로는 야속한 이 사람을 사랑합니다…. 열정으로 숨을 쉬는 내면은 차마 터지지 않는 음성을 속으로 삼키게 했다. 수페리우스는 그가 시력이 없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가 약품을 발라준다. 최대한 정확한 지점에 발라주려 하지만 그의 시력은 엉뚱한 곳에 거스를 누르게 했다. 그래도 아이는 말없이 잠자코 있었다. 그가 몇 개의 밴드를 뺨 곳곳에 붙여줄 때, 테레사의 이마와 관자놀이는 땀으로 흠뻑 젖었다. 아이는 자기가 하겠다고 말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에도 가만히 있었다. 테레사는 엉뚱한 곳에 밴드를 붙이기도 하고, 혹은 붙였던 자리에 또 밴드를 붙이기도 하며 거듭 실수를 연발했지만 결국은 상처로 아파하는 부분을 모두 치료해 주었다. “로미오… 아니… 이민우를 만나러 간 것 아니었어요?” 오랜 시간 밖에서 정처 없이 걷기만 했던 수페리우스가,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테레사에게 겨우 입을 열었다. “날이 밝으면 찾아갈 거다.” “…….” 있지도 않은 상처를 만들어야 할까. 차라리 상처가 있었더라면. 이 가여운 사람이 당당한 표정을 고수하며 대답해준다. 그러나 강인한 입술과는 달리 멀쩡한 이마에 마지막 밴드를 붙여준다. 다시 입을 다문 혜성을 기다리려는지 똑같이 조용히 있던 테레사가 탁! 하고 양반 자세에서 허벅지를 치며 경쾌한 소리를 빚었다. “이리 와.” 편안하게 웃는 모습은 용맹한 아까보다 오히려 슬퍼 보였다. 이것은 사랑하는 죄 값이다. 사랑하는 자에게는 연인의 강한 모습에도 산산이 무너지는 다른 쪽의 슬픔이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 남들 눈에는 야누스의 용맹함만이 번쩍이겠지만 혜성은 그게 아니었다. 사랑에의 값은, 형벌의 값은 달콤한 만큼 슬프고 아팠다. 그가 웃어도 웃음으로 전부가 읽히지 않는 못난 감수성의 변이가 지금처럼 싫을 때가 또 없었다. 그가 또 한 번 저의 무릎을 칠 때, 혜성은 몸을 웅크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뭐라고? 테레사는 방금 말을 믿을 수 없었는지 크게 호통 쳤다. “안 와?” “안 가.” 질 수 없지. 아이는 팩 토라진 척 쌀쌀맞게 대답했다. 그러나 기쁨으로 떨리는 턱은 도저히 감출 수가 없었다. “…….” “…….” 한참이 지나도 자신의 곁에 오지 않는 아이를 두고 또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테레사가 번쩍 눈을 떴다. 덩달아 놀란 혜성이 그의 불투명한 회색 동공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저렇게 치사한 방법을 쓰다니. 유화처럼 묽은 동공이 공허한 빛을 찰랑이는데, 어떻게든 내가 앉은 자리를 노려보고 있노라 자랑하는데, 안 갈 수가 없잖아. 슥 슥 고인 눈물을 소매로 닦은 뒤, 혜성이 무릎발로 기었다. 혹시 시키는 대로 안했다고 아까처럼 때리는 건 아니겠지? 지레 겁을 먹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의 회색 동공 속의 떳떳한 슬픔이 마음에 와 닿았다. 혜성이 테레사의 근처에 오는 즉시 그는 아이의 양 쪽 팔을 쭉 잡아당기더니 기다렸다는 듯 저의 다리에 앉혔다. 누가 보는 게 아닐까? 괜스레 낯이 뜨거워진 혜성이 쉭쉭 주변을 둘러보며 몸을 움츠리자 전혀 개의치 않는 테레사의 팔이 전신에 쭉 퍼졌다. 온 몸을 꼭 두른 그가 긴 한 숨을 내쉰다. “하아-” “…….” 간절히 소원하던 것을 쟁취한 사냥꾼처럼 깊고도 진한 숨이 혜성의 안면으로 훅 퍼졌다. 두근, 두근 뛰는 심장을 무시하려고 노력할 때 이번에도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만지고 싶어서 참느라 죽을 뻔했다….” “…….” “아까 이렇게 안아주고 싶었어….” “…거짓말….” 이품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야속한 당신은 모르십니다. 입술을 깨물어도 눈물은 주륵 흘렀다. 그의 가슴에 손바닥을 가볍게 붙인 채, 혜성은 파고들어갔다. 아이의 몸을 두른 손에 힘이 세어진다. “정말이야… 근데 너를 그 때 안아버리면 조금이라도 수페리우스를 낮게, 쉽게 볼 놈들이 생길지도 몰라서 그런 거 였어… 바보 녀석.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 잠깐 경직된 테레사의 음성 때문에 흠칫 놀랐는지 혜성이 몸을 빼려하자, 어림없다는 듯 테레사가 꼭 꼭 팔을 둘렀다. 믿어지지 않는 달콤한 음성이 자꾸만 귓가에 바람을 불었다. “혜성아. 보고 싶었어….” “…흑…….” 젖은 뺨을 부빈다. 그의 그리움과 그의 분노, 그의 모든 마음이 아닐 거라 믿었던 아까를 깨뜨리며 한꺼번에 쏟아진다. “진짜야….” “흐으… 거어…짓말….” 아이의 울음소리에 더더욱 행복해진 음성은 솜사탕을 찢듯이 부드럽고도 정답게 이어졌다. “아니야. 혜성이만 보고 싶었어. 매일 꿈꿨어.” “흐으… 만날 똑같은 소리….” “하하하하.” “흐으으….” “…….” 이 웃음소리가 그리웠나 봅니다. 오르페우스 관 앞에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지금이 그리워서 살을 도려낸 들 그 따위 것은 아픔도 아니었나 봅니다. “흐으, 흐으.” “…혜성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 돌아버리는 줄 알았어….” “흑…흑…흑….” 울음소리가 점점 커질수록 그의 상냥함은 짙어졌다. 혜성은 어깨를 들썩이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목의 각도가 그의 입술과 가까워지자 그는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아이의 보드라운 피부에 묵묵히 입을 맞춰주었다. 아찔한 쾌감이 짧게 머리 위를 스쳤다. 내면으로는 폭풍의 소리를 지닌 자잘한 폭죽이 마구 터지는 중이었다. “……아팠어?” “흑….” 가까스로 욕망을 통제하는 테레사의 음성은 허스키하게 갈라져 있었다. 자신이 붙여준 반창고 부분은 어떻게든 피해 가기 위해 아름다운 입술은 살결만 찾아서 방황했다. 조심스러운 손놀림이 갈비뼈와 종아리, 동그란 발목부분 모두를 매만졌다. 눈물은 홍수로 넘친 지 오래였다. “혜성이가 많이 아팠구나.” “흑… 안… 아팠어…요… 흑….” “그랬어?” “흑… 네… 흑.” “히스랑 나란히 적힌 가십 보면 막 질투도 했어… 진짜야….” “흑. 흑. 그으…겅… 흑….” “……웃어.” “흑… …모…?” 별안간 차갑게 식은 테레사의 음성이 튀어나왔다. 더불어 다정했던 입맞춤과 포옹도 풀어졌다. 테레사? 삽시간에 절망으로 치솟은 심장이 철렁 떨어지며 낮은 곳에서 세게 뛰었다. “쯧. 계속 애기처럼 울기만 하면 안 볼 거다.” “!” “…….” 벌떡 일어나기까지 한 테레사는 옆의 피아노 의자에 발을 꼬고 앉더니 시니컬한 투로 그 말만 내뱉고는 야속한 입을 다물었다. 번쩍! 이성이 돌아왔다.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다정하게 안아 줄 때는 언제고?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음악 외에는 전혀 무지한 혜성이 머리를 굴려 봤자 답은 멀어질 뿐이었다. 결국 수페리우스는 들썩이는 어깨를 참기 위해 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얼굴을 만져보고 싶었는데, 아랫입술보다 얇은 윗입술도, 세련된 콧날도. 피부의 느낌도 기억나지 않는데……! “끅. ……끅. ……끅.” “흠…….” 억지로 울음을 끝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혜성의 패턴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테레사는 야속하게도 다리에 올린 팔로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눈물이 완전히 멎기를 기다리는 걸까? 그런데 왜 이렇게 안 멈추는 걸까. 멈춰라 눈물아, 명령이다. 이게 뭐야. 오히려 멈추려니까 많은 양이 한꺼번에 터지잖아. “끅! ……끅! ……켁! ……읍… 끅!” “…….” 눈물을 참으려 하자 더 큰 기침 소리가 아닌 척 위장하며 마구 터졌다. 하는 수 없이 혜성은 자신의 몸인데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게 화가 나서 웅크린 채 끅끅 흐느끼기 시작했다. “끅! …큭! …끅! …흐으…….” “풋….” 반짝- 귀가 세워지는 기분이다. 방금 전에 분명히 테레사의 작은 웃음소리가 스쳤기 때문이다. 아이가 웅크린 자세에서 살짝 뺨을 올리며 일그러져 있는 그의 안면을 확인했다. “끅……?” 그 역시 입술을 깨물며 뭐라고 중얼중얼 거리더니 다정하게 물어왔다. “…혜성아. 또 화났지?” “!” “하하하하.” 뭐라고!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아프다는 건 이런 때 쓰는 말일까? 그의 장난에 걸려들었다는 걸 비로소 깨달은 혜성이 순간 멈칫하더니 정말 서럽다며 대놓고 울기 시작했다.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얼마나 무서웠는데, 그리웠는데, 당신이 가여웠는데, 이런 짓을 하다니! “어… 어엉… 엉… 허엉….” 깔끔하게 울고 싶어도 제어가 되지 않았다. 잘 보이고 싶은 욕심이야 가득하지만, 결국 혜성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서럽게 엉엉 우는 것밖에 없었다. “하하하! 잘못 했다. 혜성아. 울보 애기야. 테레사가 잘못 했어!” “어허어엉-!” “하하하, 혜성아. 혜성아?”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웃느라 눈물이 빠져나오는 통에 그 역시 엉망인 표정으로 다가와서 혜성을 일으켜 세워주었다. 품에 폭 껴안아주며 자상한 아버지처럼 등을 어루어 준다. “엉~ 엉~ 엉~” “이런 꼬마를 앞으로 어떻게 키우지?” “야!! 어엉. 나, 흑. 저, 끅. 꼬, 흑. 어엉. 아, 니이, 끅.” “그래그래. 근데, 야아? 하하 하하하~ 내가 다~ 잘못 했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제대로 인식되지 않아서, 혜성은 지난날의 서러움과 절망, 그리움, 기쁨, 환희, 안심, 모든 감정을 떠드는 것처럼 울었다. 이렇게 울어 본 지도 오랜만이었다. 아니, 이렇게까지 정신없이 무너지듯 울어 본 적이 과연 있었을까? “무서웠지?” “아… 앙무…끅. 써! 끄극. 단…닝까! 끅!” 그가 재차 확인하듯 으름장을 던진 들, 재회고 뭐고 폭포수에 떨어진 혜성은 감정대로 움직이며 급기야 소리 질렀다. “그래… 내가 무서웠었으니까 됐네… 하하하….” “흐으…끅!” 둘의 입술이 부딪히는 것은 그야말로 찰라 였다. 테레사가 마지막으로 꺼낸 문장은 머리가 아플 정도로 울었던 탓에 들리지도 않았다. 혜성이 기억하는 것은, 잠들기 전에 짜릿하게 이어졌던 그의 입맞춤이었기 때문이다. 온갖 추측으로 긴장했던 몸이 한꺼번에 녹아서인지 혜성은 테레사의 품에서 쉽게 잠이 들어 버렸다. 그가 어떤 얘기를 쉼 없이 하는 것 같았는데……. 이렇게 엉망으로 재회를 할 줄이야… 좋기도 하지만 싫기도 한 현재가 썩 나쁘지는 않다는 결론이 빚어져서인지 씩- 씩-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잠든 혜성의 안면은 꽃처럼 고운 미소로 가득했다. 자신의 침대에서 고요히 잠에 취한 혜성을 여러 번 매만지던 테레사가 먼 허공을 향해 번쩍 눈을 떴다. 그의 안면은 긴 시간 억누른 여러 가지가 한꺼번에 풀린 것처럼 피로해 보였지만 그만큼의 행복으로 충족되어 있었다. 그는 수페리우스가 신기했다. 만지면서도 이상했다. 왜 수페리우스였을까. 왜 신혜성일까.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진심으로 안정된 숨이 길게 빠져나갔던 아까 전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테레사는 더듬더듬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작은 코와 입술에도 여러 번 입술을 눌렀다. 잠자코 숨을 내쉬던 혜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옹알이를 하는 아기처럼 입을 중얼거렸다. 작은 반응에도 철렁 심장이 떨어질 만치 테레사를 설레게 했다. 테레사는 최대한 조용히 응접실로 걸어 나왔다. 집안 구석구석에 스며있는 테레사의 흔적이 살아서 움직이듯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는 응접실에 나오는 즉시 부드러웠던 입 꼬리를 묵직하게 당기더니 냉정한 투로 입을 열었다. “다 된 건가?” “예. 게시 대에 올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를 기다린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상당한 피곤으로 절어 있던 테오제네스가 벌떡 일어나서 다가왔다. 두 사람은 곧 테이블에 마주 앉아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다. 가십으로 자신을 확인하라며 뜨악 스런 말을 전교생에게 지껄인 테레사 덕분에 고생하는 자는 테오제네스였다. 그는 그 뒤로 지금까지 인쇄 동에서 작업하는 바람에 양 쪽 눈이 몽땅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하지만 멀쩡하다는 목소리로 테레사가 묻는 말에 대답하는 테오제네스 역시 그가 한국에 있어서 든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몇 시나 됐지?” 타이를 귀찮다는 듯 풀면서 테레사가 물었다. 그는 사람임을 증명하듯 테오제네스 못지않게 피곤해 하는 중이었다. 테오제네스는 조금 자 두는 게 낫지 않겠느냐 권유하려다가 관두었다. 그는 태양이 군림하는 시간에 자는 것을 아까워하는 인물임이 생각나서였다. 의무적으로 테레사의 질문에 대답하려던 테오제네스가 눈초리를 가늘게 뜨며 반문했다. “이제 곧 새벽 다섯…… 테레사, 설마 전자시계가 또 고장 났습니까?” 길게 하품을 한 뒤 기지개를 켜며 테레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들 한 그의 대답이 당연하다는 투로 이어졌다. “꺼놨어. 혜성이가 깰까봐.” “아…….” “한 시간 뒤에 보자. 겨울이라서 다행이군. 해가 늦게 뜨거든.” “!” “자네도 옆방에서 잠깐 자 두게, 테오제네스.” 테레사가 변한 걸까? 비록 짧은 문장이었지만 예전 같았으면 잠을 자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차갑게 대답했을 텐데……. 벙 찐 테오제네스가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우물쭈물하는 틈을 비집고 테레사의 늘씬한 음성이 또 한 번 들려왔다. “참. 테오제네스군. 내 시력이 10퍼센트 회복되었다는 건 혜성이한테 비밀이다.” “어째서요? 좋아할 텐데……?” 한 시간 후 지평선 너머로부터 찰랑일 하프의 선율을 상상하는 테레사의 회색 눈망울은 유난히 강직해 보였다. 테레사는 이에 잠시 골몰하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휘파람을 불었다. “어. 혜성이한테 불쌍해 보이려고.” “예에?” “재밌잖아.” “예에에?” 망연자실한 테오제네스의 입이 떡 벌어질 때, 테레사는 더 이상의 질문은 사양이라는 말 대신 혜성이 잠들어있는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아뉴스데이 I 끝 wgreene@naver.com 아뉴스데이 II 로 찾아뵙겠습니다... 테레사가 왜 한국에 왔는지도 담편에.. 아뉴스데이는 끝나지 않았다는 거슬.. 조건 댓글 30 걸면 너무 치사한걸까... 마무리를 확실히 짓고 싶어서 반탱이 올립니다.^^ 정말로 행복한 주말 맞으시기를 바랍니다... -화이트그린- 덧글 32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67-2편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67-2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68편(아뉴스데이II) ▼ 다음글 - 2악장 67-1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68편(아뉴스데이II) 아마데우스 2악장 2006/11/07 17:18 http://blog.naver.com/wgreene/110010612986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1107 68편 업데) Amadeus 음악 : Oboe Concerto In G Minor RV460 (재생버튼클릭) Oboe Concerto In G Min.. 공평한 신의 칸타빌레를 향하여 2악장 68편 2월 둘째 주 토요일은 월요일만치 활력으로 넘쳤다. 아마데우스 곳곳에 쌓인 눈덩어리는 성녀 마리아의 피부처럼 순결하기 짝이 없었다. 깊 푸른 옹달샘처럼 정답고 훈훈한 광경이 이른 오전부터 걸어 다니는 학생들의 예식 복 만큼이나 빛으로 아른거렸다. 지평선 끝에서 움트는 태양마냥 일렁이는 젊음이 아마데우스 대지를 일으키듯이 파도쳤다. 젊음! 그들은 움직이고 외치는 것으로 자기를 증명했다. 병동에서 신음하는 인파들 역시 토요일 오전이 닥치기를 소원했는지 그들은 씻지도 않고 병동 복도까지 전달 될 소식을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그 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가십이다!” 철렁. 병동에서 죽은 듯이 숨만 쉬던 여럿 인파가 고개를 빼들며 환성을 내질렀다. “가십? 가십?” “어디어디? 이리 와 줘! 나는 환자잖아!” 선호가 내민 죽을 먹는 둥 마는 둥 복도 의자에서 엉덩이를 들썩이던 동완이 꽥 소리쳤다. 그러나 가십이다! 라며 소리치며 들어왔던 녀석은 저와 친한 무리들 틈에 끼어서 멀리 사라졌다. 이럴 수가. 아마데우스의 토요일은 월요일보다 청명한 푸르름으로 들떠 있었다. 어젯밤 오르페우스 관의 십자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운이 안 좋았던 동완이 파편으로 다리를 긁힌 것을 책망하며 주저앉았다. 가십이다, 가십! 테오제네스! 테레사! 수페리우스! 우루루 몰려다니는 병동 학생들을 비롯하여 분수대 근처에도 저와 비슷한 함성이 메아리 칠 게 자명한 일이었다. 함성은 군중의 마음을 휩쓸었다. 때문에 엊저녁의 일을 전혀 모르는 자가 있다 한 들 히번뜩 놀라며 가십! 가십! 소리쳤으니 말이다. 동완은 자신을 보며 혀를 끌끌 차는 선호에게 분하다는 표정으로 휙 돌아봤다. “병실에 돌아가자.” “선배! 저도 읽고 싶어요!” “……나머지 다리 한 쪽도 금이 가고 싶은 거니.” “윽.” “흥.” 순결한 미카엘의 웃음기가 싹 가신 것을 보자 동완이 헐레벌떡 굴던 방금까지를 없앴다. 자신을 걱정하느라 밤이 새도록 엉엉 울었던 미카엘 선배의 가련함이 쉭 스쳤기 때문이다. 살짝 피부를 다친 것뿐인데도 미카엘 선배는 하얗게 질려서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었다. 그 뒤는 기억나지 않는다. 병동으로 가는 길에 누군가가 테레사라는 이름을 외쳤었는데……. 동완은 궁금증은 잠시 뒤로 미룬 채 선호의 부축을 받으며 2층 자신의 병실로 돌아갔다. 많은 이들이 가십을 소리치며 두 사람을 마구 스쳐 지났다. “선배… 삐졌어요?” “……흥.” 그가 삐졌도다. 정말 삐져버렸도다. 완전히 삐지셨도다. 동완이 식은땀을 흘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선배.” “흥.” 병실 문을 여는 선호의 뒤통수가 오늘따라 말도 못하게 사랑스러웠던 동완이 겨울 내 훌쩍 자란 키를 방패삼아 심드렁한 투로 말을 걸었다. “사랑해요.” “!” 삐지지 말아요, 라는 말을 하려고 준비까지 했거늘 전혀 엉뚱한 말이 불쑥 튀어나와서 막 문을 연 선호나 그것을 내뱉은 동완이나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볼이 붉어졌다. 가십 때문에 마음이 들떠서 사랑한다는 말이 튀어나왔나보다. 이런 망할. 선배 뒤통수에 대고 전혀 무르익지 않은 분위기에서 터질 게 뭐람. 동완이 미카엘의 뒤에서 침을 꿀꺽 삼키며 머쓱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새초롬히 눈꺼풀을 내리고 그가 들어오기를 조용히 기다리던 미카엘이 온 몸이 붉어진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용히 병실 도어를 닫았다. 그리고는 동완이 뭐라고 변명 거리를 꺼내려던 찰나, 미카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저의 안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동완의 코앞에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테오제네스가 복사본을 새벽에 줬었어.” “!” “네가 그렇게 목빠지게 그리워하던 가십이다.” “미카엘!” “…….” “정말 사랑합니다!” “응? 헉! 도…도….” 눈이 휘둥그레진 동완이 떠듬떠듬 용지를 내미는 미카엘이 한없이 예뻐 보였는지 마음 그대로를 또 한 번 실천했다. 그는 가십을 쥔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미카엘을 와락 끌어안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다리를 절뚝이던 동완이 힘 있게 서서 사랑하는 이의 뺨을 쓸어주며 입을 맞출 때, 가느다란 미카엘의 손가락에 끼어 있던 가십 용지가 슬그머니 바닥에 떨어졌다. 아뉴스데이 II 깃발처럼 펄럭이는 글귀는 오후가 되도록 게시대의 인파를 들뜨게 했다. 토론의 장을 빚겠노라 숱한 미니연주회장은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로 크게 울렸다. < 공평한 신의 칸타빌레를 향하여 > 테오제네스의 제목은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공평한 신의 칸타빌레! 잠이 덜 깨었던 학생들은 마구 두근대는 가슴을 움켜쥐기 마련이다. 글자만으로도 젊은 뮤즈들은 호흡이 어려워서 연거푸 눈을 비비고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바이올린 케이스와 첼로 케이스를 쥔 채 달려왔던 이들은 급기야 그것을 발판삼아서 허둥지둥 인파를 헤치고 어렵사리 글자를 읽었다. < 글에 앞서 지금의 가십은 테레사의 주관과 테오제네스의 객관이라 주장하는 것들을 면밀히 살핀 뒤 나열하고 있음을 알린다. 한국 아마데우스에 쇼펜하우어를 시작으로 철학 수업이 도입되고 있다. 극소수 교수들에 의해 앎이 실천되는 현재, 천주교와 상극이라는 심리학을 교묘히 피해 갈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그러나 바오르 신부는 공식 자리에서 쇼펜하우어 이상 가는 철학은 아마데우스에 없을 거라며 못을 박았다. 2월 둘째 주 금요일 밤에 있었던 오르페우스 관 폭파 사건을 두고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는 가운데 글의 서론에 굳이 쇼펜하우어의 입술을 빌리자면, 각 개인은 타인 속에 자기를 비추는 거울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모두가 쉬쉬하는 가운데 넓게 퍼진 반 아마데우스를 이제 모른 척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사상은 아이러니하게도 고귀한 인물은 쉽게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지 않는다는, 여러 윤리적 덕목들 중 ‘동정심’ 만이 ‘맹목적인 의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참된 가치라고 주장했던 쇼펜하우어와 닮아 있다는 것을 혹시 아는가. 물론 여기서 동정심이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를 뜻하는 것이다. 이 글이 끝날 때까지 반 아마데우스를 이해 할 수 없는 자들은 모처럼 도입된 철학 수업 교과를 열심히 공부해보기를 권하는 바이다. 타인 속에 자기를 비추는 거울, 동정심, 모든 존재에 대한 윤리적 고려, 이것들이 과연 무엇을 뜻하겠는가? 반 아마데우스는 곧 아마데우스의 중요한 부분임을 의미한다. 자신과 다르다고 섣불리 배척하려 들 때 앎은 사정거리 안에서도 가장 좁은 지역에 머무를 것이다. 혁명을 기억하는가? 이해가 없는 상황에서 무조건적인 배척이 나은 결과였다. 반 아마데우스는 나아가 현존하는 아마데우스 학생들이 겪을지도 모를 미래의 고통이다. 음악을 배척한다는 몰상식한 시선으로만 봤던 우리를 먼저 알아야 한다. 이해는 역지사지에서 비롯된다. 음악과 미래로부터 버림받은 그들의 소리에 조금씩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들은 무기를 쥔 사자가 아니라 선량한 아마데우스의 진짜 낙오자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작년, 오하이오 주로 떠나기 직전 테레사는 그래서 이들과 협상을 벌였고 자랑스러운 빛과 어두움을 동시에 이끌기로 결심하였다. 상당한 반 아마데우스 인파가 5월 콩 쿨 이후 보스턴 아마데우스로 옮겨 갈 것이다. 그 외의 소수들에게도 정신과적 치료를 받게 할 거라며 테레사는 약속의 도장을 찍은 지 오래이다. 변한 것은 없다. 테레사가 말하기를, 자랑스러운 한국 아마데우스 학생들이여, 넓은 아량으로 이해의 폭을 넓히기를 바랄 뿐이다. 테레사 역시 행동에 옮긴 것 중 하나가 자신만의 세상으로 규정해 두었던 찬란한 작곡들을 출판계에 건넸기 때문이다. 그를 믿는다면 우리가 한 번 쯤 손을 잡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5월 넷째 주 금요일로 잡힌 각국 왕실과 음악원 초청 대 아마데우스 콩 쿨 음악회가 머지않았다. 그에 앞서 4월 각국 인재들이 심사를 거친 뒤 당당하게 5월 무대에 서기를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소프라노 에스더 에빈게와 카운터테너 피터 드 그루트 초청을 비 롯 런던 합창단과 뮌헨의 히틀러 히스클리프 폰 뤼겐부르크와 하데스라 불리 우는 유지 신의 참가는 확정된 사실이라 전해진다. 변방의 국가였던 한국에서 그 대회가 열리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최근 한국에 온 테레사는 재단으로부터 당당히 초청 권과 주최 권을 획득했다! 재단의 협찬과 후원, 한국의 주최 권을 따 내는 조건은 바로 보스턴 리사이틀의 성공 여부에 달려 있었다. 테레사의 보스턴 리사이틀의 성공, 보스턴 아마데우스 건축의 진행, 영국 출판계와의 계약들은 결국 런던으로 확실시 되었던 주최 지를 한국으로 돌리게 하였다. 그는 공식적인 승인만 바오르 신부에게 받으면 된다. 콩 쿨 승인 겸 테레사가 한국에 온 것과 오르페우스 관의 폭발이 시기가 맞물렸지만 비로소 반 아마데우스까지 밝히게 되었으니 비온 뒤의 땅을 굳히는 것만 모두에게 숙제로 남아있다. 5월 콩 쿨에 대비하여 한국 아마데우스에 미니 음악회와 평가회가 빈번해질 계획이다. 각국의 아름다운 멜로디가 한국을 시작으로 넓게 울려 퍼질 그 날이 머지않았다. 또한, 한국에 있는 당분간 이자벨 장의 지휘권은 테레사와 수페리우스에게 넘어갔으며 인쇄 동의 가십 기자였던 모세는 그 자격을 박탈당했다. 냉정하게 사실만을 보도하는 기자를 잃어서 인쇄 동으로서는 손실이 많겠지만, 모세와 이자벨의 권한 박탈은 금요일의 피해에 대한 책임에서 비롯되었다. 지금까지처럼 건의함은 B동에 마련되어 있으니 의견을 투고할 것이며, 오르페우스 관이 복구되기까지 사용이 거의 없었던 A동과 모든 미니 연주회장을 개방한다고 하였으니 학생들은 그곳에서 연습을 계속하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국의 음악 출판계와 손을 잡은 테레사는 현재, 콩 쿨 뒤에 있을 아마데우스 재단과 맞서기 위해 회의를 준비하고 있다. 반 아마데우스를 대표하는 그가 어떻게 움직일지 귀추가 주목되는 바이다. -한국 아마데우스 인쇄 동 지국장 테오제네스- > 분수대 근처에서 바이올린을 켜던 학생이 복잡한 머리를 감싸 안으며 소리쳤다. “워싱턴에 대한 것은 안 나왔어!” 일전에 로미오와 남쪽 기숙사동 뒤뜰에서 싸움을 벌였던 녀석이었다. 가장 궁금했던 소식이니만치 그는 기분 나쁘다며 추운 나절 광시곡을 연주하며 표정을 굳혔다. 즉흥 광시곡이 으스스하게 울리는데도 하나같이 반 아마데우스와 테레사, 그리고 콩 쿨 기타 등등 여러 가지에 열을 올리는 학생들은 차마 로미오 까지는 신경 쓰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으이 씨!” 결국 그 학생은 뻥~하니 바이올린 케이스를 걷어차며 신경질을 부렸다. 그와 친한 졸개 녀석이 허둥지둥 케이스를 가져다주자 씁쓸한 광시곡은 끝이 났다. “쟤 말이 틀린건 아니야. 테오제네스와 테레사의 소식은 기쁘고 납득이 되지만, 난데 없이 사라진 워싱턴은 어떻게 된거지? 학생 감옥에도 없던데?” 안경잡이 녀석이 학생 감옥에 다녀온 것을 떵떵대며 의견을 앞세우자 그를 중심으로 여러 인파가 몰려들었다. “워싱턴이 사실은 대단한 위인이 아니었을까? 그 때 내가 수페리우스 옆에 있어서 아는데…….” “나도 들었어. 수페리우스한테 말을 걸려고 하는데, 향수 냄새가 지독한 자가 수페리우스한테 그랬어. 누굴 가뒀다고… 혹시 워싱턴 아니야?” 쇼너 스타니가 수페리우스에게 교묘히 전했다고 여긴 내용을 용케 알아 챈 두어 명이 진실이지만 그들에겐 억측임에 분명한 것을 마구 떠들었다. 하지만 학생들에게는 지나친 억측이었다. “어디서 퍼질러 자고 있겠지. 푸쉬업 따위를 하거나… 별 희귀한 상상이구나.” “맞어. 그럼, 요아나가 며칠동안 나랑 놀다가 안보였는데 걔도 끌려간거니?” “하하하하.” 결국 학생들은 진실이지만 억측이었던 의견을 가볍게 치부하고는 다시 가십으로 떠들기 시작하였다. A동은 거의 사용이 되지 않았던 건물이었다. 그도 그럴 듯이 미니 연주회장이 지하에 다섯 곳이나 마련된 이 건물보다는 밖의 대형 연주회장이 훨씬 이용 빈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B동과 C동의 좌측 사이에 지어진 대형 A동 건물은 유난히 인파로 복작거렸다. 오르페우스 관을 완벽히 복구하기까지 연습과 레슨, 리허설 겸용으로 사용하라는 테레사와 바오르 신부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기숙사 안에서 악기 연습으로 분주하던 학생들이 거의 다 찾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화려한 샹드리에와 황금빛 의자와 벽지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소리치는 족족 뻥 터진 높은 천정 벽화에까지 스며드는 통에 학생들은 분위기에 압도되어서 나비처럼 사뿐사뿐한 걸음걸이로 오 다니기 일 수였다. 그 곳이 개방되고 이틀이 지나지 않아서 A동은 그 어느 건물보다 초만원을 이루고 열기와 열정으로 인해 주가가 상승해 있었다. 파가니니에 심취한 이들이 사투를 벌인 뒤 쟁취한 지하 1관 음악실에서 근엄한 연주를 펼칠 때, 간략한 좌중의 자리에는 편안한 표정의 인부들과 교수들이 눈을 감고 앉아있기 마련이었다. 이럴 수가. A동은 갑자기 뮤즈의 고향처럼 향기로운 음색과 웃음으로 가득 차서 안식과 안위라는 글자의 주인이 되었다. “마르첼로! 마르첼로의 오보에 협주곡 이래!” “어디? 어디!” A동의 지상 리틀 연주회관은 지하의 연주장 보다 규보가 약간 더 컸는데 불현듯 거기서 뛰쳐나온 몇 명이 기쁘게 소리치고 있었다. 각자 따로 연습한 뒤 즉흥 오케스트라를 이룬 고학년 학생들이 그럴싸하게 무대에 나와서 마르첼로 오보에 협주곡을 연주할 거라는 소식이 A동 전체에 퍼졌다. “마르첼로 오보에 협주곡?” 귀가 번쩍 뜨인 것은 복도에서 코코아를 마시며 걸어가던 수페리우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수페리우스! D단조래! 6학년들이 지금 막 시작할 건가봐!” “으오!” “오르페우스 관에서는 가려져서 잘 몰랐던 거였는데 그럴~싸 하게 미니 콘서트를 펼친다니까 너도 가 보자 수페리우스!” “그래!” 6학년이라면 무대 커뮤니케이션을 완전히 숙지했으니만큼 연주력이 상당할 터! 아이는 기쁘게 대답하며 자신을 스쳐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소식을 알리는 인파를 멍하니 지켜보았다. 이럴 때가 아니지. 바짝 정신을 차린 뒤 수페리우스는 A동 7층의 휴게실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레사를 찾아갔다. “테레사, 테레사!” “……왜?” “아악!” “?” 허둥지둥 뛰어가는 통에 코코아를 몽땅 엎지른 수페리우스가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가더니 구둣발로 슥 슥 그것을 닦기 시작했다. 혜성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뭔가를 닦기 위해 분주한 모양은 눈을 감고서도 유추할 만한 것이어서 테레사는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는 조용히 근처의 티슈를 내밀며 미간을 찌푸렸다. 코를 막고 싶었지만 참으며 중얼거렸다. “코코아 엎지른걸 자랑하려고 부른거냐.” 주변으로 퍼지는 코코아 향기는 쇼너 스타니의 지독한 향수 내 음과 견주어도 전혀 부족하지 않으리라. 테레사는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아뇨, 그건 아닌데…… 히히.” “?” A동의 햇살이 가장 찬란하게 미치는 방을 누구보다 잘 아는 테레사는 오전 일곱 시 부터 졸려 워 하는 수페리우스를 이끌고 와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는지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은 채 햇살 아래에서 단잠에 빠져 있었다. 물론, 별안간 코코아를 마셔야겠다며 수선을 부리는 수페리우스가 아니었다면 명상의 시간은 더 길어졌을 테지만. 테레사와의 금쪽같은 시간은 평소보다 빨리 스쳐 지났다. 잡으려 해도 소용없다는 건 알지만 이상하리만치 초침은 순식간에 지나기 마련이다. 혜성은 옷을 탁탁 털며 일어났다. 가십이 터진 뒤 이틀이 지나기까지 테레사 외에 만난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의 몸에 붙지 못해 안달 난 자석처럼 수페리우스는 영혼까지 끈끈이가 되어서 테레사에게 붙어 있었다. 테레사가 자리를 비울 때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으며 그만 떠올렸다. 그래도 시간은 야속하리만치 빨리 지났다. 그 시간이 원망스러워서 혼자서 그를 기다리다가 울어 본 적도 몇 번 있었다. 테레사도 그런 혜성이 아주 싫지는 않았는지 조금만 두고 보자는 취지로 자신에게 따라붙는 아이를 내버려 두는 중이었다. 이틀의 달콤함이 그렇게 지난 것이다. 그의 별채에서 짙은 밤 피아노를 연주해 주는 테레사의 피아노 의자 밑바닥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기특하다는 듯 자상한 그의 손이 머릿결을 쓰다듬어 주셨지. 아, 돌아올 수 없는 그 시간이 아쉬워서 견딜 수 없는 거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래서 놓치는 게 많다는 점을 아이는 몰랐다. 로미오, 이민우가 지하에 갇혀 있다는 점,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까지 몰랐다. 생각조차 못했다. 이상하리만치 소식이 없는 동완이 병동에서 아픈 다리를 고치고 있다는 점도 전혀 몰랐다. 사랑에 눈 먼 자는 뒤늦게 후회할 거리가 많다는 것마저도 몰랐다. 늘 가십으로 읽던 테레사가 옆에 있다는 것, 그것 외에는 중요한 게 없었다. 햇살 속 의자로 다시 걸어가려는 테레사의 옷깃을 쥐고 수페리우스가 아이처럼 보채기 시작했다. “어딜 가자고?” “마르첼로 오보에 협주곡이 벌써 시작되었을 거예요, 테레사!” “…….” “어서 가요, 예?” “가고… 싶은 건가?” “네!” “하하하…….” 테레사는 혜성의 머리칼을 강아지마냥 크게 쓸어 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얇은 윗입술이 가려질 만치 자상한 미소가 멋지게 그려졌다.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어서 뺨이 계집처럼 붉어진 혜성은 그가 시력이 없어서 참말로 다행이라는 생각만 했다. A동의 즉흥 마르첼로 미니 오케스트라 연주회장은 벌써부터 많은 학생들이 연습하던 것을 중단하고 모여 있었다. 6학년 중에서도 실력이 뛰어나서 다가올 콩 쿨에서 기량을 펼칠 인재들이 무대에 선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상기된 표정들은 저마다 행복을 당당하게 표현하는 중이었다. “테레사다!” “테레사!” “수페리우스!” 그들은 작게 속삭이고 때로는 크게 환성을 내지르며 무대 뒤의 계단 형 좌석에 나타난 테레사와 수페리우스를 반겼다. 이에 긴장하는 쪽은 6학년 즉흥 오케스트라 단원이었다. “테레사가 왔다고? 수페리우스까지? 이럴 수가. 같이 모여서 맞춰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윽. 정말 잘 해야겠다. 왜 이렇게 애들이 많이 온 거야? 다들 연습을 쉬어 주는 건가?” “잘됐어. 본 떼를 보여주자고.” 6학년들은 테레사의 등장만으로도 긴장이 되었는지 덜덜 떨면서 파이팅을 외쳤다. 무대 뒤에서 외치는 파이팅 소리가 좌중과 마주볼 수 있는 무대 뒤의 계단 형 좌석까지 훤히 들렸다. 이곳에서는 연주자의 뒷모습이 자세히 보여서 마음에 들었는지 혜성이 저와 나란히 앉은 테레사에게 신이 난다며 연신 속삭였다. “테레사. 테레사. 내일은 우리 같이 오르페우스 관 신축…….” “안 돼.” “네?” 방금 헛것을 들었을까? 자잘한 박수소리가 터졌고 즉흥 연주회를 펼치기 위해 단원들이 무대 위로 나왔다. 박수 소리가 한데 커졌다. 조바심이 난 수페리우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아예 테레사 쪽으로 돌아앉아서 엉덩이를 들썩였다. “안 돼요? 겨우 이틀만 같이 있었는데…….” “안 돼.” “안 돼요?” 이판사판이다. 성스러운 1악장의 협주곡 선율이 흐르는 가운데 딱 잘라 대답하는 테레사의 야속한 음성이 덜컹 덜컹 심장을 뛰게 했다. 수페리우스는 뭔지 몰라도 안 된다고 하는 테레사의 뺨에 입을 맞추며 안 돼요? 라고 자꾸 물었다. 근 이틀 동안 이런 식으로 굴면 테레사가 알았다. 라고 다시 대답을 바꿔 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대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 좌석에 앉은 학생들이 수페리우스와 테레사의 모양을 모두 쳐다보고 있다는 점은 까맣게 잊은 지 오래였다. 그의 안 된다는 소리만이 점점 시야를 좁히게 했다. “안 돼.” 어라? 그런데 대답은 아까보다 진해졌다. 테레사가 왜 그러지? 그러나 그가 내뱉는 다음 어절로 하여금 놀란 수페리우스는 잠깐 동안 벙 쪄 있었다. “조만간 너는 뮌헨으로 돌아가야지.” “!” “동완이가 살짝 다쳐서 병동에 있다는데, 그것도 몰랐지?” “!” “민우가 오늘 오전에 근신 처분으로 지하에서 풀린 것도 몰랐지?” “!” 둘에게는 오보에 협주곡의 유려한 선율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데도 방금 말이 너무 뜻밖이라서 혜성은 침조차 삼켜지지 않았다. 뭐라 구요? 동완이가? 민우가? 참. 나는 뮌헨에서 잠깐 온 거였지? 그럼, 쇼너 스타니는? 이틀 내내 잊었던 현실이 완전한 불꽃으로 살아나서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러나 눈앞의 테레사 보다는 여전히 못한 것들이었다. 테레사도 혜성의 그러한 심적 변화를 다 아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듯이 쌀쌀맞게 현실을 알려주면서도 그의 입술은 웃음을 참는 그것처럼 개구 졌기 때문이다. “레슨이 상당히 밀려 있을 텐데? 키르혜아이젠 교수님께 뭐라고 변명할 셈이냐.” “…….” 입맞춤으로 안 될 때는, 두 번째 방법이 눈물이었다. 이것 역시 테레사와 별채에서 향기로운 나날을 보내는 중에 터득한 수법이었다. 좀 치사하지만 안 되겠다. 그의 자상함을 다시 끌어내기 위해 나는 눈물을 흘리리. 수페리우스가 굳게 결심하고 혀를 깨물며 눈물에의 주문을 외우는 순간, 테레사가 반대쪽을 보며 피식 웃더니 차갑게 대꾸했다. “울어도 소용없습니다.” “!” 그러나 혜성의 허리를 꼭 둘러준 팔은 풀지 않았다. 그것으로도 안심이 되었는지 수페리우스는 입을 다문 채 연주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런, 테레사의 안 돼. 라는 말에 집중한 나머지 1악장은 벌써 넘어가 있었다. 2악장의 알레그로는 놓치지 말아야지. 혜성이 아무 말 없이 앞만 보며 조용히 있자 2악장의 끝부분에서 별안간 테레사가 목을 숙이며 다가왔다. 철렁, 그가 귓가에 입술을 붙였을 뿐인데도 죽을 듯이 뛰는 못난 심장이 있다. 오, 아름다운 사람. 혜성은 눈을 지그시 감고 황홀한 오보에 협주곡 선율과 낭랑하면서도 부드러운 그의 음성을 기다렸다. “혜성아….” “…….” 화났지? 라고 물어보려는 거겠지? 혜성은 대답 없이 앞만 쳐다보았다. 그러자 한결 더 허스키한 테레사의 음성이 귓속에 파고들어왔다. “넌 무슨 수페리우스가 옆구리에 살이 잡히는 거냐.” “!” 이럴 수가! 온 몸이 완전히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가 팔을 두른 채로 혜성의 옆구리 살을 살짝 꼬집고 있었다는 게 인식되었다. 혜성이 몸부림을 치며 테레사의 손을 빼 냈다. 그러나 잠시 팔을 빼 내는 척만 할 뿐 그가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처음보다 진하게 밀착했다. 지금의 평화가 영원하지는 않겠지만 우리 둘이서 조금만 더 즐기자는 듯, 그는 킥킥 웃기까지 했다. “농담이다.” “!” 바보, 바보 같으니라고! 바보라는 말을 실수로 내뱉을 번한 혜성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입술을 깨물자 여전히 작게 웃는 그의 소리가 전해졌다. 이상한 일이다. 그의 장난기 짙은 행동 때문에 화를 내면서도 진짜는 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그에게 했던 얘기는 진실이었다. 당신에게 화를 내는 순간마저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거예요. 그 얘기는 전설처럼 오래 묵은 느낌인데, 살면서 공기와 더 친해질수록 오히려 진실로 깨우쳐진다. A동의 아름다운 미니 연주회장, 그리고 마르첼로의 오보에 협주곡 D단조가 바야흐로 3악장에 들어설 때 많은 이들이 용감한 6학년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갈채를 퍼부었다. 좌석의 가장 어두운 끝부분에서 눈물을 삼키는 단 한 명만 제외하고는……. 이자벨이 실수로 흘렸음직한 손수건을 쥔 채 주먹을 그러쥔 모세의 시선은 살인자의 붉음으로 도배되어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홍시처럼 붉어진 수페리우스가 무대 뒤의 좌석에서 길길이 날뛰며 테레사와 행복해 하는 모습을 처음부터 쭉 지켜보는 모세의 영혼은 차게 식어 있었다. 메모로그에 엠피님이 올려주신 아뉴스데이 장면 中. 고맙습니다. wgreene@naver.com 덧글 15개 엮인글 쓰기 /data20/2006/11/7/172/1-wgreene.jpg@nhn@67448@nhn@1@nhn@500@nhn@542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68편(아뉴스데이II) /data20/2006/11/7/172/1-wgreene.jpg@nhn@67448@nhn@1@nhn@500@nhn@542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68편(아뉴스데이II)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69편 ▼ 다음글 - 2악장 67-2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69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11/09 17:50 http://blog.naver.com/wgreene/110010689701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1109 69편 업데) Amadeus 음악 : Chopin`s Revolutionary Etude In C Minor - maksim(재생버튼클릭) Chopin's Revolutionary.. 우리를, 용서해 주소서…. 『 생각해 봐. 모세가 사랑하는 게 이자벨인데, 이자벨은 테레사를 원하잖아. 애당초 상대가 되지도 않는 거지. 열등감이라는 게 모세와 함께 할 거다. 우월성 추구를 향한 정상적인 과정에서 아예 빗나간 사람은 일종의 성격장애를 일으킨다던데, 모세가 그렇지. 한 참 자랄 시기에 그의 뇌는 억눌리기부터 했으니까. 열등 콤플렉스를 지닌 사람은 인생의 도전이니 극복이니 노력이니 이 따위 것을 몰라. 오히려 그것을 감추기 위해 자기를 무리해서 엉뚱한 걸 과시하려 들지. 모세의 유일한 능력이자 힘은 …가십. 독설가와 같아. 비판 능력이 남달라. 즉, 요점을 캐내고 정확한 것을 짚는 능력이 확실히 있지. 어쨌든, 그가 이자벨이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과묵하고 멋진 글만 적어낼 위인 이었을 텐데… 가십은 그의 무기이자 방패지. 아마 그 힘도 잃으면, 그는 어떻게 변할 지 나조차도 당장 예측 못 하겠다. 공격적인 성향이 발달하겠지만… 공부가 부족해.』 아마데우스 2악장 49편 中 동완의 말 2악장 69편 돌이켜보면 아마데우스에서 둘이 만날 때의 테레사는 화를 낸 적 보다 무시한 적이 많았다. 세상 유일한 낭만으로 둘러싸인 사람일 거라 믿었던 첫인상은 그를 알아가며 바뀌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정치적으로 사람들을 홀려서 까딱하면 혜성 역시 그의 그런 행위를 전부라 믿을 뻔했었다. 그런 그가 오래 전과 같이 수페리우스를 차갑게 대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오보에 협주곡을 나란히 감상할 때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짧은 하루가 지나기 무섭게 테레사는 별채에 단 한 번도 혜성을 위해 자신의 공간인데도 불구하고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제 서야 내가 생각났니?” “응.” 혜성의 고민을 들어주며 코코아를 들이키던 동완이 심각한 척 고개를 끄덕이는 수페리우스 덕분에 사레에 걸렸다. “얘 동완아!” “쿨럭 쿨럭 쿨럭!” “민우도 나를 피해. 분명히 내 주변에서 서성이는 건 알겠는데, 찾으려면 없어.” “쿨럭! 그건, 네가 너무 테레사에게만 빠져서 헬렐레~ 지냈으니까 그렇지! 쿨럭!” “안 그랬어, 내가?” 수페리우스는 억울했다. 병동에 찾아올 때 약간 미안한 감정은 있었지만 테레사와 지냈던 이틀의 시간은 전혀 아쉽지 않아서였다. 이 부분을 이해해주지 않는 동완이가 오히려 서운했다. 수페리우스는 휙 뺨을 돌리며 창밖의 눈 오는 풍경을 응시했다. 사랑으로 눈이 먼 게 죄라면 죄다. 그 풍요로움이 내면에 잠식할 때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때로는 몸무게보다 무거워진다. 영혼이 깨알 같은 신경 변화에도 수축을 반복할 때, 세상은 무채색의 그림이 되거나 석고처럼 굳는다. 존재자는 테레사 하나밖에 없어질 때, 가끔은 음악마저 선율을 가늘 게 가늘게 없애 뜨린다. 사랑은 마법인 동시에 죄가 죄인 줄도 모르도록 감각을 마비시키는 무서운 글자이다. 사랑은 시력부터 차례대로 묶어버리는 강인한 사슬이었어. 혜성은 눈을 감아도 선명한 테레사의 품이 새삼 그리워졌다. 오, 그가 없던 시절에는 대체 어떻게 지냈을까? 단 이틀인데도 짜릿한 현재가 당연하게 느껴지는걸. 만지고 싶고, 안고 싶으면서 안기고 싶은 본능에의 욕구가 이틀 내내 가시지를 않는 거야. “수페리우스. 우리 민우는 너 뿐만이 아니라 다른 누구와도 접촉을 하지 않고 있어.” 함박눈 사이로 혹시 테레사가 지나가지 않을까? 라는 사랑하는 자만이 지닐 수 있는 상상을 무럭무럭 키울 때, 수페리우스의 팔을 툭 치며 미카엘이 말을 걸어왔다. 수페리우스는 당장 그를 쳐다보며 휘둥그레 눈을 크게 떴다. 뭐라 구요? “그 애는 너를 여전히 존경하고, 좋아해. 나는 알 수 있어. 하지만 자신이 무슨 짓을 했었는지 알기 때문에 약간의 텀을 두는 걸 거야.” “…….” 이럴 수가. 수페리우스는 이 대목에 와서야 지금까지의 이틀이 크게 잘못 되었음을 알았다. 테레사도 내가 이렇게 죄의식을 느낄 것을 알지 않았을까? 아니지. 하도 모르니까 어제부터 쌀쌀맞게 구는 걸지도 몰라. 한때는 내가 그를 피하면서 음악에 파고들었는데, 근래의 이틀처럼 내내 지낸다면 그이는 점점 멀어지기만 하겠지. 하지만 그가 좋아서 견딜 수 없어. 마주치면 뇌가 비워져서 그만 담게 돼. “괜찮니, 수페리우스? 이자벨이 아까 전에 병동에 왔다 갔는데…….” “이자벨이요?” “응. 테레사와 함께 다녀갔어. 몰랐니?” “!” 음악이 없다. 아마데우스, 그러나 아마데우스. 지금 내 안에 숨을 쉬는 아마데우스라는 글자는 테레사밖에 없기 때문이다. 혜성은 이자벨이 테레사와 함께 병동에 다녀갔다는 구절이 스치는 순간 무너지는 마음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누가 뺨을 친다 한 들 그만큼의 충격은 주지 못 할 것이다. 별것도 아닌 그녀의 글자로 인에 닥친 질투심은 한없이 아름다웠던 무채색의 세상을 깡그리 망가뜨리기에 충분했다. “어, 가는 거니?” “네. 동완아 또 올게. 선배, 또 올게요.” 다른 생각으로 쭉 쭉 나아가는 것이 수페리우스의 표정에 훤히 보였다. 아이가 병실 밖으로 나간 뒤, 동완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떨어져서 지냈었기 때문에, 같이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건지 최근에야 깨달았나 봐요. 이자벨 얘기는 일부러 꺼내신 거죠?” 미카엘은 그러나 뭔가 탐탁찮다는 표정으로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 네가 다쳤는데 수페리우스가 아까 무심하게 대한 게 괜히 속상해서… 그런데, 이자벨 뒤에는 항상 모세가 있었는데 보이지 않더라….” “!” 뒤의 말이 앞의 말로 인해 가려져서 들리지 않았던 동완은 당장 미카엘을 당겨 안았다. 두 사람은 곧 행복한 입맞춤으로 서로의 영혼을 확인했다. 창밖의 함박눈 세기가 짙어지고 있었다. 사랑에 눈이 멀어서 주변을 살피지 못하는 자를 한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수페리우스는 자신의 행동력에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 왔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깨닫는 여러 가지들이 목을 조였다. 사랑 없는 세상이 얼마나 메마르고 재미없는지를 알았다. 사랑이 없는 곳에서의 음악은 귀를 도려낸 자의 오페라나 리사이틀 연주와 똑같았다. 혼자 걸어도 함께 걷는 향긋한 상상에 도취될 때 음악에로의 상승욕구도 꾸준히 자란다. 수페리우스는 사막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테레사라는 오하시스를 껴안는 순간 입 밖으로 빠져나갈 안도의 한 숨이 절실했다. 지금까지 중 최악으로 이자벨에게 질투심이 일어서 이런 스스로가 저주스러웠다. 그의 가벼운 행동에도 상처받는 스스로가 미웠다. 학생회장에서 밀려난 이자벨 역시 절망의 늪에 빠진 다리를 빼 내지 못하고 있음을 충분히 유추하면서도 그녀를 당장 질투하는 자기 자신이 못나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테레사가 보고 싶어서 뛰는 가슴은 부정할 수 없었다. 사랑, 그것을 처음 겪는 애송이는 이제 막 알을 깨부수는 걸까. 하지만 아이는 자존심 때문인지 A동 7층 피아노 방에서 만난 테레사에게 평소처럼 인사하고 껴안는 것 외에는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예전의 이자벨이 된 기분이었다. 그를 닦달 하고 안아달라고 보채는 이자벨이 된 기분 또한 사랑 만치 부정할 수 없는 몫이어서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없었다. 테레사는 언제나처럼 아름답고 용맹해 보였다. 그는 살짝 미소 짓기만 할 뿐 재회 때처럼 안아주거나 향기로운 어절을 흩뜨리지 않았다. 그는 갈수록 얇았던 벽을 다시 세우고 있었다. 아이는 조바심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음… 그 부분이 자꾸 걸리는데? 나와 봐라.” “…….” 사랑해요 테레사. 별안간 마음은 어울리지 않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그를 향하게 만들었다. 그의 앞에서 모차르트 소나타 14번을 가볍게 연주하던 혜성이 조용히 뒤로 나왔다. 테레사는 피아노를 더듬거리는 과정조차 없이 우아하게 의자에 앉더니 늘씬한 등을 쭉 폈다. 피아노와 한 몸이 된 것처럼 자신만만한 자세마저도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뭐 해?” “네?” “옆에 앉아.” “아… 네.” 그의 옆에 나란히 앉는 순간 물처럼 투명한 소나타가 테레사의 손으로 빚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귀가 멀었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혜성이 가볍게 누르며 대충 지났던 부분에 감정을 읽는 테레사가 살짝 어깨를 움직이며 어서 보고 배우라는 듯 묵묵히 연주 해 나아갔다. 건반에 미끄러지는 우아한 은어의 손놀림이 있다. 살짝 살짝 팔을 올릴 때마다 표현되는 그만의 테크닉은 화려하면서도 정확했다. 혜성은 그러나 그의 연주가 유하게 진행될수록 숨이 막히고 식은땀이 베어서 자꾸만 눈을 감았다. 그 때였다. 훌륭하게 연주를 뽐내던 그가 별안간 뚝 하고 손을 정지했기 때문이다. 번쩍 혜성의 눈도 같이 뜨였다. 살짝 옆을 돌아보니 차갑게 식은 테레사의 표정이 가슴에 찔려왔다. 그는 가시처럼 음성을 쏘았다. “제대로 듣지 않는군.” “!” “음악에 심취할 때의 네 호흡은 이렇지 않았는데…….” “!” “…….” 호흡, 나의 호흡마저도 그는 알고 있는 건가. 음악에 몰두할 때의 내 호흡이 어떠한지 나조차도 모르는 것을? “테레사 그건…….” 혜성이 조심스레 팔을 내밀어 건반위로 굳어있는 그의 손가락에 닿으려 하자, 테레사는 쌀쌀맞게 벌떡 일어서더니 반대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혜성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등으로 말을 붙인다. “당장 짐을 싸고 뮌헨으로 돌아 가.” “!” 뭐라 구요? 쩌 억 뇌가 갈리는 음성이 스쳤다. 혜성 역시 벌떡 일어나서 그의 앞으로 뛰어갔다. 뮌헨으로 돌아가라니. 그건 아이 스스로 인지하던 과정이었다. 당연히 할 것을 다른 이로부터 지적받았을 때의 수치심이 발끝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충격이라는 글자가 되어 올라왔다. 잠시 질투심으로 눈이 멀었던 자가 기괴한 눈동자를 서슴없이 번쩍인다. “선배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돌아갈 것입니다!” 수페리우스의 말투도 딱딱해졌다. 이에 테레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의 수치심과 질투가 폭발한 수페리우스는 저도 모르게 속의 말을 거칠게 꺼내버렸다. “제가 돌아가면, 이자벨을 위로해 주려구요?” “!” 무서우리만치 정확한 시선이 이쪽으로 꽂힌다. 시력이 없다는 게 거짓으로 느껴질 만치 분노로 일렁이는 회색 동공이 수페리우스를 잡아먹을 것처럼 내려 본다. 아이는 주춤거리며 한 걸음 뒤로 걸었으나 곧 더 얘기해 보라는 듯 사나워진 그의 팔이 왼 쪽 팔을 잡아챘다. “아…….” “이자벨?” “…….” “그게 무슨 소리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테레사는 팔목을 꺾을 듯이 힘을 주며 그 역시 격앙된 어절로 화를 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재회의 기쁨이 평생이기를 바라는 건가? 네 머릿속엔 이제 음악이 없어?” “그런 게 아니에요! 테레사는… 테레사는… 저한테 질투 같은 것도 느낀 적 없잖아요!” “…….” 청승맞은 눈물이 흘렀다.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데 꺼내고야 말았어. 그가 반 아마데우스와 보스턴의 일로, 또 출판 일로 정신이 없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 고작 나에게 질투를 느끼지 않았다는 둥, 나답지 않게 지금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야. “선배는… 선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했다는 말이 쉽사리 터지지 않았다. 너는 청렴결백하다며 저 쪽의 마음이 사납게 유혹했다. 혜성이 말이 없자 기가 막혀서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난 테레사가 버럭 소리 쳤다. “5월 콩쿨을 왜 한국으로 돌렸을 것 같나!” “그…….” 움찔 어깨를 떤 뒤 혜성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위로 주룩 눈물이 지났다. “그런데 너는 고작 뭐라고? 이자벨?” “고작이 아녜요!” “…….” 그의 한 마디에 북 하고 종이처럼 마음은 찢겨나갔다. “…고작이 아니 예요… 내가 지금 얘기하는 건 ‘우리’ 잖아요… 흐으….” “…….” “테레사….” 감수성의 변이는 쓸데없는 것을 한 번에 터뜨렸다. 전혀 이럴 상황이 아니었는데 화를 부추겼다. 가벼운 일화에 오해를 샀으며 자잘한 한 마디에 큰 화를 불렀다. 이윽고 테레사는 냉정하게 등을 돌리더니, 오래 전 이자벨에게 그랬던 것처럼 쌀쌀맞게 대답했다. “당장 나가라.” “!” “…….” “…….” 이제 내가 싫어진 거예요? 와르르 무너진 이틀간의 행복이 있다. 혜성은 믿기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그를 줄곧 응시했으나 그는 의자에 앉아서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그제 서야 마구잡이로 뛰었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수페리우스는 두 말 않고 부르르 떨리는 주먹을 움켜쥐더니 A동 밖으로 뛰쳐나갔다. 기가 막힌 함박눈의 칸타빌레가 밖의 세상을 제 것으로 지휘하고 있었다. 까만 도화지처럼 펼쳐진 밤하늘은 별 그림자도 없이 하얀 눈의 칸타빌레뿐이었다. 슥 뒤를 돌아보았지만 자신을 따라오는 테레사는 흔적조차 없었다. “?” 그 대신 누군가가 스슥 하고 몸을 숨기는 것이 포착되었다. 혜성은 조용히 눈물을 닦으며 그곳으로 가 볼까 싶었지만 곧 발길을 돌렸다. 최근 자신을 몰래 따라붙는 로미오가 틀림없었다. 그가 대화하고 싶을 때, 그의 방식으로 나타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로미오는 대화가 필요하면 기숙사 방 문 앞에 종이를 붙이거나 무작정 창 밖에서 꽥 꽥 소리칠 위인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테레사 때문에 엉망이 된 감정을 무엇으로든 치료하는 게 먼저였다. “흡… 흡… 끅.” 눈물은 멈추려 할 때마다 억수같이 쏟아져서 피부를 적셨다. 그러고 보니 2월의 마른하늘에 침범한 겨울의 하모니는 전혀 따뜻하지 않았다. 눈은 무시무시한 힘으로 대지를 포옹하는 것이었다. 기숙사로 돌아갈까. 동완이에게 한 번 더 찾아갈까. 그러나 기숙사에 돌아가면 자신을 맞이할 테레사의 리사이틀 포스터가 마음에 걸렸고, 동완이에게 가자니 미카엘 선배와 사이좋게 있을 그에게 괜히 지금 일로 언짢게 할 게 염려되었다. 혜성은 하는 수 없이 데블 관 주변을 서성이다가 쭉 걸어 나와서 장미 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기승을 부리는 추위 탓에 조용한 아마데우스의 시계탑에서 밤 열한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리고 있었다. 아마데우스 사무동 인파들을 비 롯 관리자들은 수페리우스를 알아보고는 그가 장미 문 밖으로 벗어나는 것에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수페리우스를 지켜보고 뒤를 따르는 로미오 역시 일행으로 간주했는지 별다른 뒤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아이는 실로 오랜만의 참담한 기분을 안고 폐허로 향했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로 기억했던 폐허는 소복하게 쌓인 눈 덕분인지 그리스 신전처럼 평화롭고 산뜻하게 다가왔다. “…….” 언제나처럼 같은 자리에 덩그러니 세워진 피아노의 건반을 살짝 눌러 보았다. 꽉 얼어있는 손가락처럼 건반은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아이는 모든 건반을 차례대로 눌러 보았다. 모든 건반에서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마음이 서글퍼지면서 확 풀렸다. 다시 건반을 눌러보았다. 미약하지만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조금씩 죽어가는 건반의 소리가 몇 개씩 전해졌다. 아이는 주변의 지푸라기에서 눈을 털어낸 뒤 조용히 피아노 위에 덮어 주었다. 이러면 눈을 피할 수 있겠지. 작은 행동이지만 그것이라도 하고 나니 한결 센티했던 기분이 나아졌다. 깊은 숨을 내쉰 뒤, 문득 혼자인 게 싫어진 수페리우스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따라왔을 기특한 후배 민우를 불렀다. “이제 나와라… 따라 온 거 다 안다….” “…….” 옳지. 폐허의 허름하게 뚫린 문 밖으로 부스럭 하는 인적이 들렸다. 혜성이 따뜻하게 웃으며 그 쪽으로 등을 완전히 돌렸다. 발목까지 쌓인 눈 덕분에 발이 시렸지만 로미오와 대화하고 가볍게 농담 따위를 하면 따뜻하게 피로마저도 풀릴 것 같았다. “그래, 숨어서 따라온 거 다 알고 있…….” “…….” “!” “…….” 세세하게 반짝이던 상념과 그리움, 용수철처럼 튀었던 음악에의 반성과 자학, 사라진 별 만큼이나 흐릿해진 뮌헨의 장면, 그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마법처럼 얼어붙었다. 아이는 그 자리에 못이 박힌 채로 굳었다. 입술마저 박제가 되는 게 아닐까. 잠깐이지만 호흡이 멎었다. 로미오의 키가 줄어들었나? 라는 가벼운 예상조차 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제까지 혜성을 뒤따르던 음습한 그림자의 주인은 바로, 모세였기 때문이다. “…….” “…….” 사건이란, 닥쳐서야 나타나는 법이다. 운명이란, 사건이 지나서야 글자로 빚어지는 법이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모세 역시 적을 만난 호랑이처럼 수페리우스를 가만히 노려보기만 했다. 두 사람의 험악한 호흡과 별처럼 찬란해진 눈망울만이 이 밤을 가까스로 반짝였다. “…….” “…….” 그가 왜 따라왔을까. 아니다. 그가 왜 나타나란다고 단번에 모습을 보였을까. 이 생각만으로도 혜성의 등줄기에 그토록 바라던 따스한 땀이 뜨겁게 뜨겁게 등줄기를 훑었다. 뱀처럼 교묘하게 내려가는 땀의 속도마저 긴장으로 피가 뭉칠 것 같은 현재, 자세하게 느껴졌다. “…….” “…….” 팽팽한 시선의 줄이 서로에게 감겨있는 가운데, 먼저 움직이는 자가 즉사할 것처럼 분위기가 그려졌다. 혜성은 최대한 정신을 차리며 유들 한 척 등을 돌렸다. 다행이도 모세는 입구 쪽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는 상태였다. 아이는 그를 무시하기로 했다. 대화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때로는 대화가 되지 않는 자는 먼저 피해주는 게 상책이기 때문이다. 딱딱하게 얼었던 손바닥이 마그마에 대인 것처럼 땀과 화염으로 넘쳐났다. “…….” 아이는 세게 뛰는 자신의 심장에게 계속 마음으로 명령을 내렸다. 제발, 제발. 심장아 진정해라. 괜찮아, 괜찮아. 모세의 눈이 조금 풀려있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괜찮아, 그가 기자라서 나한테 알아갈 건덕지를 찾으러 온 걸 거야. 괜찮아. “…….” 수페리우스는 덜덜 떨리는 손을 아닌 척 위장하며 제대로 소리가 나지 않는 건반 위를 돌아다녔다. 건반을 영위하는 손놀림은 사형수의 울음처럼 기괴해 보였다. 최대한 연주에 집중하기 위해 수페리우스는 노력했다. 테레사, 테레사. 그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당겨져서 미안함과 그리움이 지금처럼 절실한 적이 또 없었다. 오 하느님 제발. “…….” 약간이 지나자 수페리우스의 지속적인 연주 덕분에 삐걱 이던 건반 소리가 나아지기 시작했다. 비로소 안심이 된 수페리우스는 최대한 안정적인 연주에 몰입하며 모세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엉망이 된 머릿속은 자꾸만 여러 음성과 상황을 되풀이 시키는 태엽 인형으로 변해 있었다. 연주에 집중하자. 집중하면 다 괜찮아. 괜찮아. 모세는 나에게 뭔가 얻어갈 기삿거리가 있는지 찾기 위해 따라 온 걸 거야……. “!” 그 때 강인한 문장이 머리를 스쳤다. 망치로 맞은 것 보다 더한 글자로의 충격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었다. 잔인한 사실이 휘날리는 눈발 사이로 번개같이 스쳤다. 테오제네스의 가십! 그의 가십에서 말하기를, 모세는 기자 자격을 박탈당했다고 했어! 그제 서야 현실을 완전히 깨우친 혜성이 연주를 멈추고 모세를 다시 보려던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엄청난 통증이 옆구리로 푹 찔려왔다. “!” 입 밖으로는 비명조차 터지지 않았다. 시야가 죽은 자처럼 까맣게 분산되었다. 뇌의 망상은 모조리 사라져서 티끌조차 남지 않았다. 망막까지 뒤덮은 공포는 일상을 앗아갔다. 차갑고 딱딱한 무언가가 손으로 만지는 것보다 자세하게 피부에 느껴졌다. “아…하아아악!” “…….” 연주에 몰입하고 있던 혜성의 등을 노리던 모세가 자신 쪽으로 몸을 돌리는 아이의 박자에 맞춰서 약간 비껴간 옆구리를 품에 준비해 둔 과도로 무작정 찌른 것이었다. 푸억- 내 것 같지 않은 살과 과도의 마찰음은 음표보다도 정확하게 청각에 스쳤다. 칼에 꽂힌 몸을 눈동자로 내려 보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호흡이 공포를 꺼내기 시작했다. “으… 윽… 으… 으흐흐… 으…흑…읏….” “…….” 모세, 모세,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지독한 통증은 언어를 상실케 했다. 다리의 힘이 자꾸만 풀렸다. 아이는 덜덜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고통을 참기 위해 깨문 탓에 입술은 금 새 터져서 줄줄이 피가 떨어졌다. 그러나 입술의 고통은 오른쪽 옆구리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것이었다.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살인 행위를 모세가 하다니? 아까 전 그의 눈동자가 풀려 있다는 걸 제대로 의심하지 않은 실수였다. 기습적으로 수페리우스의 오른쪽 옆구리를 찌른 뒤에도 몽롱한 시선을 풀지 않은 모세의 입 밖으로 엄청난 술 냄새가 풍겨 나왔다. 그러나 공포로 뒤덮인 혜성의 좁아진 동공이나 피의 입술은 술 냄새 따위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이윽고 모세는 무표정인 상태에서 조금 발을 떼더니 슥 혜성의 위아래를 쳐다보았다. 이제, 모세가 돌아가려는 걸까. 그렇다면 다행이다. 어떻게든 걸어서 병동까지 혼자 힘으로 갈 수 있을 거야. 무서워요 테레사. 어떡하면 좋아요. 그러나 혜성의 얄팍한 예상을 뒤엎으려는지 모세는 피식 웃더니 기습적이었던 방금처럼 비틀대는 수페리우스의 안면을 정확히 노려보며 순식간에 옆구리에 찔려있는 과도를 빼 냈다. “!” “…….” 공포로 질린 동공이 크게 흔들리더니 입 밖으로는 엄청난 음성이 빠져나간다. “아, 아, 아, 아아, 아, 아아! 아, 아-!” “…….” 처음 몸을 돌렸던 수페리우스 덕분에 과도의 전체가 아닌 살에 파고든 5 센티의 지름이 쑤욱 뽑히는 순간 엄청난 속도로 예식 복이 뜨거운 피로 젖어들기 시작했다. 비명을 질러야 한다고 뇌는 소리쳤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혹감과 공포는 뇌의 명령마저 무시한 채 인간의 말 같지도 않은 백치의 음성만을 내뱉게 했다. 본능적으로 흐르는 굵은 눈물이 충혈 된 눈 밖으로 똑같이 떨어졌다. 입가에 고인 타액이 피와 섞여서 마구 흘렀다. “아, 아아, 아!” “…….” 그리고 본능은 수페리우스에게 강한 지시를 내렸다. 도망쳐! 피해! 피해야 돼! 목석처럼 굳어서 붙은 다리를 움직여야 한다고 처음부터 생각했지만 공포로 오그라든 뇌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본능이 움직였다. 찔린 것을 빼 낸 뒤, 피가 묻은 과도를 뒤로 슬쩍 빼는 모세의 행동은 다음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아이는 다시 칼을 휘두르려는 모세로부터 가까스로 벗어났다. 겁에 질린 걸음이 뒤로 물러날 때, 모세의 술 향이 후각에 찔려왔다. “…….” 후각을 시작으로 제일 먼저 달아났던 이성이 돌아왔다. 혜성은 옆구리를 움켜 쥔 채로 줄줄이 식은땀을 흘리며 모세를 노려보았다. 한 걸음. 그러면 그도 한 걸음. 두 걸음. 그러면 그도 두 걸음. 푹푹푹. 푹푹푹. 증기 기관차처럼 뛰는 심장 덕분에 이성은 수페리우스를 막다른 곳에서 내려주기 시작했다. 제일 마지막까지 달아올랐을 때야 이성이 돌아오는 현재는 헬리아와 다를 게 없었다. 피의 헬리아는 현실이었다. “모…세….” “…….” 아이의 입술이 제대로 언어를 뱉을 때, 모세는 저의 이름이 수페리우스의 입으로 빚어졌다는 것을 알고는 단숨에 허공에 과도를 올리더니 빛처럼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 “히힉. 히힉-!” 이번에는 술기운 덕분에 느려진 모세의 움직임이 수페리우스의 시선에 훤히 비쳤다. 덕분에 몸을 숙인 아이는 그가 노린 몸 대신 과도로 뺨이 그어졌다. “하악, 하악, 하악.” 뚝. 뚜둑. 왼 쪽 뺨의 피부가 입을 벌리자 길게 그을린 대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아픔은 현재의 공포가 잡아먹었는지 제대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철철이 넘치는 지금의 피로 헬리아 속에서 자신은 죽을 지도 모른다는 본능과 마지막 이성만이 수페리우스를 움직이게 했다. 살려줘, 살려줘! 그 이성은 자지러지는 비명까지 내면에 마구 질렀다. 오른쪽 옆구리 통증 덕분에 더 이상 다리로 걸을 수가 없어진 수페리우스가 폐허 벽에 기대어 앉은 채로 주변의 흙과 지푸라기 따위를 모세 쪽으로 던졌다. 본능은 무작정 그를 피하라며 마구 주변의 것을 던지게 했다.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몸은 어떻게든 방어적으로 움직였다. 호흡이 가파러 진다. 하느님, 하느님 제발-! “!” “!” 그 때, 혜성의 코앞까지 느릿하게 걸어왔던 모세의 눈동자에 기적처럼 아이가 던진 한 무더기의 흙이 들어갔는지 모세가 잠깐이지만 저의 손을 눈에 옮겨갔다. 이 때다! 삶의 본능은 수페리우스의 몸에 마지막으로 힘을 주었다. 가파른 숨을 내쉬는 것마저도 중단한 수페리우스는 기회를 활용하여 모세의 육중한 다리를 끌어안고 잡아 당겼다. “이힉!” “!” 너는 나에게 죽으라고 하지. 표정으로 죽으라고 하지. 글자로도 죽으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살아야겠다. 아니, 죽을 수 없으니 나를 죽이지 않는다. 크당-! 방심했던 모세가 눈을 만지다 말고 뒤로 크게 넘어졌다. 푸스스- 그가 넘어진 주변으로 쌓였던 먼지들과 흙, 그리고 눈이 마구 흩어졌다. 본능은 두 사람 모두를 지휘했다. 그러나 수페리우스가 이번에는 빨랐다. 아이는 당장 모세의 배 위에 올라타서 칼을 빼앗으려고 했다. “아악!” “…….” 그러나 힘껏 그를 제압하기에는 힘이 부족했다. 수페리우스가 그의 팔을 잡기도 전에 벌써 손을 올린 모세가 홧김에 자신의 것을 쥐려던 아이의 팔목을 휙 그었기 때문이다. 모세 역시 자신을 위협하는 수페리우스를 방어하기 위해 갑자기 팔을 올려서인지 덕분에 손가락 끝에서 중심을 잃은 과도는 수페리우스를 스친 방향대로 쉭 날아가 버렸다. “파… 팔! 아… 아악!” “…….” “히익, 히익, 히익.” “…….”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무기를 잃었으니 다시 일어나서 덤비리라 예상했던 모세가 처음처럼 멍한 동공인 채로 바닥에 누워서 멍청하게 뚫린 천정을 응시했기 때문이다. 아이는 덜덜 떨리는 손에 겨우 힘을 주기 시작하였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는 눈이었다. 모세는 그런 식으로 손에서 과도가 빠지자 돌연 숨을 헐떡였기 때문이다. 거대한 그의 몸이 헐떡일 때마다 그의 배를 깔고 앉아있는 혜성의 몸도 같이 흔들렸다. 그가 미칠수록 수페리우스의 시신경과 이성은 빠르게 정상으로 돌아왔다. “!” 발작하던 모세의 동공이 완전히 뒤집히는 것을 보고서야 상황 파악이 된 혜성이 힘을 주었던 팔을 들어 세게 그의 뺨을 쳤다. 이대로 팔과 몸이 분해되어 죽을 것처럼 고통이 침범했지만 숨은 쉬어지니 자신은 아직 죽은 게 아니라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정신 차려!” “-씩- 씨힉- 쌕- 쌔핵-!” “이 빌어먹을 새끼야-!” 눈물로 엉망이 된 내면처럼 수페리우스의 얼굴은 반 이상이 피로 뒤덮여 있었다. 아이는 처절한 현재를 뒤로 한 채 다시 한 번 죽을 것처럼 정신을 이탈하는 모세의 뺨을 쳤다. 철썩- 그의 턱이 크게 돌아갔고, 조금이 지나자 호흡이 제자리를 찾는지 동공이 옳게 돌아왔다. “야… 이… 빌어먹을 새끼야… 흐으….” “하…아… 하아… 하아….” 누가 누구를 죽이려는 걸까. 수페리우스는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 허리를 숙인 뒤, 허스키하고 지친 음성을 귓가에 속삭였다. 매운 음성이 스칠 때마다 모세의 호흡이 느껴졌다. “야… 이… 미친놈아아… 으… 흐으….” “…….” “…진정해….” “이…자벨… 이자벨….” “…….” 하느님. 가장 잔인한 당신이시여. 모세의 뺨을 타고 이자벨을 향한 눈물이 흘렀다. 아이는 억눌린 그의 감정이 지금처럼 자세히 보인 적이 있었나 의심했다. 없다. 단 한 번도 없다. 그는 미친 것이다. 그 증거로 아까의 행동과 지금의 입술이 있다. 모세는 가지런히 누운 상태에서 자신을 껴안다시피 억누른 수페리우스의 귓가에 대고 허망한 음성을 중얼거렸다. “그녀가 무너졌다… 그녀가… 그녀가….” “…….” 모세와 이자벨. 그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을까. 무엇이 모세를 미치게 한 걸까.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너….” “날… 죽이고 싶지… 모…세….” “너…때…….” “성공… 일지도 모르겠…다….” “!” 함박눈이 겨우 멎어갈 때 즈음, 혜성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툭, 모세의 배 위에서 정신을 잃었다. 오늘은 이상한 날이야. 내가 이자벨을 질투했거든. 내가 테레사를 집착했거든. 내가 친구들을 멀리했거든. 내가 음악의 키스를 거부했거든. 그래서 벌을 받는 거야…. 우리를, 용서해 주소서…. 『 가십은 그의 무기이자 방패지. 아마 그 힘도 잃으면, 그는 어떻게 변할 지 나조차도 당장 예측 못 하겠다. 공격적인 성향이 발달하겠지만… 』 아마데우스 2악장 49편 中 동완의 말 일전에 메모로그에 해달이가 올려준 이자벨 그림.^^ wgreene@naver.com 우아하게 쇼팽을 깔았지만, 사실 메탈 들으면서 이번편 적었습니다.^^ 차마 그 메탈을 올릴 수가 없어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만 쇼팽 괜찮지요? 아마데우스를 몽땅 완결내버린 꿈을 간밤에 꿨습니다. 그게 악몽이었다는 것을 지금 올리면서 생생하게 느낍니다. 당신이 지금이 소중하듯이, 저도 지금이 소중합니다.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WGREENE 덧글 27개 엮인글 쓰기 /data20/2006/11/9/96/이자벨-wgreene.jpg@nhn@162566@nhn@1@nhn@500@nhn@552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69편 /data20/2006/11/9/96/이자벨-wgreene.jpg@nhn@162566@nhn@1@nhn@500@nhn@552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69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70~71편 ▼ 다음글 - 2악장 68편(아뉴스데이II)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70~71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11/12 14:49 http://blog.naver.com/wgreene/110010798573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1112 70~71편 업데) Amadeus 음악 : Notturno - Alessandro Safina(재생버튼클릭) Notturno-Alessandro Sa.. 아뉴스데이 2악장 70~71편 모세는 어려서부터 수줍음 많은 자신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못생기고 덩치 큰 외모는 나이들 수록 그를 외골수적으로 만들어서 더 이상 그를 보고 사람들은 수줍음 많다느니 얌전하다느니 따위의 소리를 지껄이지 않았다. 모세는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게다가 그는 또래보다 나이 들어 보였다. 모세는 그 점도 불만이었다. 하여, 늘 상 책을 끼고 살았던 그가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배웠던 클래식 음악 덕분에 아마데우스에 입학한 뒤, 인쇄 동에서 가십 기자로 지낸 것은 당연한 과정이었다. 하지만 모세는 자기가 인쇄 동에 머물러 있는 것도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여신처럼 등장한 이자벨 장과 그녀를 위한 가십을 적을 때뿐이었다. 친구도 없는 그가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사랑을 키운다는 것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이상 제대로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사랑의 방법역시 책에서 배웠다. 하지만 책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 즈음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자벨은 사랑보다는 여신으로 우러러보겠다며 모세는 스스로에게 맹세했었다. 못생긴 외모 때문일지도 모르는 이 맹세 역시 모세는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함박눈이 폐허를 뚫고 내리는 현재, 모세는 처음으로 타인과의 행위에 있어서 싫다는 감정을 갖지 않았다. 그는 당당했다. 시체처럼 검푸르게 번쩍이던 눈동자에는 나름대로의 확신으로 차올라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잠깐 정신이 나가서 미쳤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성공적으로 마친 기분이었다. 감수성의 체계가 다 자라지 못한 청춘이 모두에게 있었다. 모세는 그 중에서도 유별난 감성을 내보이지 않고 늘 필기하는 것으로 표현했었다. 그리고, 필기로서도 감성이 채워지지 않을 때는 도리가 없었다. 그는 성인군자가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술을 마셨다. 그러자 감성은 글자 이외의 것으로 표현하라며 가십 기자 모세를 부추겼다. 모세는 수페리우스의 덜미를 잡을 만한 것을 여러 가지 유추했으나 곧 펜을 놓았었다. 자신의 글을 더 이상 기계로 찍을 수 없다는 참담함이 떠올라서였다. 감성은 더더욱 모세를 부추겼다. 이자벨의 눈물이 생각나서 모세의 마음은 찢어졌다. 그녀가 모세의 머릿속에 앉아서 비명을 지르며 살려달라고 매달릴 때, 모세는 이미 수페리우스의 옆구리를 찔렀다. 아름다운 이자벨이 테레사에게 미쳤다는 시선 따위를 받으며 고통을 감수하는 모습이 아프도록 모세에게 찔릴 때, 그는 수페리우스의 뺨을 그었다. 그것을 세상 기준으로 봤을 때 미쳤다고 한다면 모세는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미친 자는 스스로를 미쳤다고 긍정으로 대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이 이자벨에게 미쳤다는 것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은 할 일을 했다는 싫지 않은 그답지 않은 감정이 차올라서 온 몸이 떨렸다. 수페리우스가 죽은 걸까? 모세는 호흡이 멎은 듯 웅크린 채 있는 수페리우스를 아련히 응시했다. 한 번 더 찌르는 게 낫지 않을까? 야릇한 쾌감이 모세의 자아를 부드럽게 건드렸다. 그의 세포 마디마디는 쾌락으로 들뜬 상태였다. 이자벨이 기뻐할 거야. 이 모든 일은 이자벨을 위한 거야. 하지만 정말 죽은 걸까? 모세는 덜컥 겁이 났다. 왜 겁이 났는지 이상할 정도였다. 자신은 굉장한 일을 해치운 뒤라서 들뜬 상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숱한 소설책으로 익숙해진 자아는 모세 스스로가 왜 단숨에 겁에 질렸는지 쉽게 답을 내놓았다. “…….” 모세는 비로소 자신의 양 쪽 손바닥을 천천히 내려 보았다. 수페리우스 한 번, 손바닥 한 번, 그리고 폐허 속에 쌓이는 눈덩이 한 번.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현실이었다. 모세는 신음했다. 기뻐할 줄 알았던 내면의 상상속의 이자벨은 의외로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자벨, 이자벨, 나의 아름다운 이자벨. 그녀가 왜 우는 걸까. “…….” 짙어지는 달 밤, 동그랗게 말리는 거대한 회오리의 음성이 쉭 스쳤다. 언 머리칼과 입김이 회오리에 스치듯이 부스스 흩날렸다. 모세는 조용히 수페리우스의 몸에 저의 코트를 벗어서 걸쳐 주었다. 그리고 가볍게 아이를 등에 업고 멀리 나동그라진 피 뭍은 단도를 안주머니에 감췄다. 그는 말없이 밤길을 걷기 시작했다. “…….”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쉬지 않고 흘렀다. 이자벨, 그녀가 울어서였다. 그녀가 기뻐할 거라는 것은 일종의 환각이며 상상일 뿐이다. 모세는 바보가 아니었다. 테레사가 분노하겠지. 이자벨은 더더욱 테레사의 눈 밖으로 날 것이다. 모세는 그 부분에서 겁이 났으며 수페리우스의 몸에 코트를 벗어 준 것이었다. 그 생각이 차츰 눈덩어리처럼 불어날 때, 마침내 모세의 거대한 두 다리는 뒤뚱대며 눈길을 달리고 있었다. “으, 으훅, 으훅, 으, 으으, 으훅.” 가빠진 숨결과 함께 떨어지는 눈물이 있다. 이자벨,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면 그녀가 더더욱 생생해졌다. 모세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기괴한 몰골로 수페리우스를 업고 뛰었다. 그의 등이 새빨간 혈유로 젖었지만 모세는 몽롱한 시선으로 가쁘게 숨을 내쉬기만 했다. 모세, 모세… 세찬 밤바람의 음성이 모두 자신을 부드럽게 부르는 이자벨로 들려서 모세는 마침내 웃었다. ‘모세, 오늘은 나의 진이 어디에 있다고? 그래. 그에게 주려고 사과 잼을 만들었어. 볼래?’ ‘모세, 모세… 나는 기사를 원하지 않아. 어리석구나.’ ‘네가 감히 나와 상대가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네가 어떤 말을 해도 괜찮아. 너도 외로우니까 나의 이름을 어쨌든 불러줬던 거잖아. 나는 네가 이름만 불러줘도 행복해. 모세는 그렇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족했고, 행복했다. 장미 문의 화려한 장식이 별안간 모두 켜졌다. 인쇄 동 인파를 비 롯, 사무동의 측근들과 관리자들까지 테레사 앞에서 쩔쩔매며 입을 다무는 중이었다. 테레사는 그들을 추궁하지 않았다. 자신의 별채와 기숙사, 그 어느 곳에서도 찾지 못한 수페리우스를 최종 목격한 자가 사무동의 부장이라는 것에 오히려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수페리우스를 분명히 쫒아갔다는 구절에서 테레사는 완벽하게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의 곁에는 쇼너 스타니와 이민우, 그리고 테오제네스도 있었지만 그들 역시 테레사에게 이렇다 할 희소식을 전해 주지 못했다. “십분 후에…….” “?” 동상처럼 서서 아마데우스의 장미 문을 밝히던 테레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의 강직한 마디마디는 살얼음보다 차고 시렸다. 테오제네스들은 흠칫 놀라며 테레사를 주목했다. “모두 동원해서 찾아라.” “예.” 그 말만 한 뒤, 테레사는 입술을 깨물고 꼿꼿하게 앞을 응시했다. 자신이 A동 밖으로 겨우 쫒아 나갔을 때, 테레사는 수페리우스를 찾을 수 없었다. 10 퍼센트 회복되었다 한 들, 그의 시력은 밤이 되면 무용지물이었다. 수페리우스가 십 미터 앞을 걸어간 들 그는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참을성 있는 자세로 다시금 동상이 되어 장미 문 앞을 지켰다. 그때 사무동의 부장이 번쩍 소리쳤다. “저기 누가 옵니다!” “테레사!” 쇼너 스타니는 당장 테레사를 불렀다. 멀리서 봐도 아마데우스 정복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뒤의 깃이 좀 더 긴 정복이 밤하늘을 뚫고 정확히 장미 문 쪽을 향하고 있었다. 테레사는 비로소 안심했다는 듯이 긴 숨을 내쉬며 평온한 척 위장하며 물었다. “수페리우스…인가?” 하지만 경악하는 모두는 테레사에게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저벅, 저벅. 이쪽으로 빠르게 걷는 발소리는 상당히 묵직했다. 테레사의 시선이 날카로워지더니 최대한 청각에 집중하려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옆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던 테오제네스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모세!” “?” 모세, 모세라니? 테레사의 등이 쭈뼛 서며 설마 설마 하는 감정이 영혼까지 휘몰아쳤다. 그는 모세가 자신의 코앞에 설 때까지도 앞만 응시하였다. “꺄아악!” 사무동의 여직원이 피로 범벅이가 된 수페리우스를 보는 순간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부장의 뒤로 숨었다. “수페리우스! 꺄아아악!” “맙소사! 하느님, 하느님!” 때마침 새벽녘까지 고되게 연습했던 미카엘 성가대와 바오르 신부님이 막 성당 뒷문으로 나와서 그들을 보았다. 선량한 미카엘 성가대원들은 자신들의 오래 전 소프라노가 피로 범벅이가 되어 있는 것을 보더니 파랗게 질리며 비명을 소리쳤다. 그들의 비명은 수페리우스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굳이 묻지 않아도 대번에 알게 했다. 무엇보다도 아이의 맑은 음성이 전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 테레사의 모든 감각은 사라졌다. 철저한 리더의 이성만이 야속하리만치 남아서 그는 숨 쉬는 기계처럼 모세의 움직임을 기다렸다. “테레사….” “…….” 과연, 테오제네스의 말마따나 모세의 묵직한 음성이 코앞에서 들렸다. 테레사는 옅게 의무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세가 등에 업고 있는 수페리우스를 내밀 때, 테레사는 본능적으로 양 팔을 내밀었다. 커다란 모세의 외투로 감싸인 수페리우스는 막 태어난 아기처럼 하얗게 윤이 났다. 러시아 인형처럼 딱딱해 보였다. 얼굴의 반이 피로 굳어 있었지만 숨을 쉬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수페리우스를 테레사의 팔에 옮겨주며 모세는 여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의 정담함은 하늘을 찔렀다. 테레사 역시 아기처럼 소중하게 수페리우스를 받아 안으며 긴 숨을 내쉬었다. “…….” “…….” 수페리우스를 품에 꼭 껴안은 채로 테레사는 굳었다. 잠깐의 정적이 그들 사이 오묘하게 흘렀다. 이윽고 껴안은 채로 가만히 있다가 테레사는 마음을 잡고 읊조렸다. 예기치 않은 충격이 터져서 지금의 테레사는 기계와도 같았다. “죽이려 했던 건가… 아니면 죽여서 시체를 건넨 건가.” “…….” 테레사! 그이기에 던질 수 있는 질문이지만 지켜보는 모두는 이 순간마저도 절도 있게 말을 하는 테레사의 모습에 소름이 끼쳤는지 눈을 크게 뜨고 경악했다. 그러나 아무도 테레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의 진정한 속은 알 수 없으리라. “뮤즈를, 죽였나.” “…….” 배를 뒤집은 은어의 하얀 피부와 같던 테레사는 죽고 없었다. 그의 음성은 밤의 야수처럼 험악했지만, 모세는 여전히 당당했다. 그의 자존심과 평화에의 감정에 포물선이란 없었다. 테레사는 대답 없이 한발자국 떨어져 있는 모세에게 이상하리만치 아무런 감정이 당장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다는 품안에서 돌처럼 굳어 있는 수페리우스가 먼저였다. 오, 하느님. 테레사는 잠깐이지만 숨을 헐떡였다. 살아야 한다는 강한 욕망이 바닷물처럼 첨벙였다. 수페리우스가 죽는 건가. 그럼 나도 죽는다. 그래서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묘한 감각이 영혼마저 차지하고 앉았다. “나의 수페리우스… 나의 러시아 인형… 나의 전…부… 이…유….” 죽은 걸까. 내가 죽은 걸까. 덜덜 떨리던 테레사의 턱이 별안간 움찔 하더니 우레와 같은 함성을 내지른다. “아… 하아아아악--!!!” “!” “!” 그는 수페리우스를 껴안은 채로 짧은 시간, 긴 소음을 빚었다. 아마데우스 전체가 우르르 움직이고 있다는 묘한 환각이 스쳐서 그 누구도 그를 막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테레사는 쉭 턱을 올리더니 최대한 이성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쇼너… …쇼너!” 테레사의 부름에 즉각 달려온 쇼너 스타니는 방금 전의 끔찍한 고함 때문인지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 한 실정이었다. 멀리서 울음바다가 된 성가대원들, 목석처럼 굳어서 팔만 내밀고 있는 바오르 신부님. “앞이… 보이지 않는다. 병동까지 나를 안내해라.” “…….” 이를 악 문 채로 테레사는 쇼너에게 서두를 것을 요구했다. 쇼너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페리우스를 보물처럼 꼭 안고 있는 테레사와 사라졌다. 그 누구도 준비해 둔 휠체어에 앉아서 병동까지 가라는 의견을 테레사에게 내놓지 못했다. 수페리우스를 껴안고 두 다리로 걷는 장면은 마치 한 사람이 걸어가는 그림처럼 보여서 감히 침범할 수 없었다. 테레사가 사라지는 즉시 테오제네스는 멍청하게 서 있는 모세의 안면을 후려 갈겼다. 보기 좋게 뒤로 날아간 모세가 나자빠지자 테오제네스는 저벅저벅 걸어와서 그대로 짓밟기 시작했다. 방금 전 테레사와 수페리우스로부터 받았던 충격 때문인지 인파는 죽은 듯이 가만히 정지한 상태였다. 바오르 신부님과 수녀님들조차도 테오제네스를 말리지 않았다. 이윽고 입이 터진 모세가 가파른 숨을 내쉬며 속의 것을 모조리 뱉어낼 때가 되어서야 테오제네스는 그를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숨소리가 약간 돌아올 무렵 무시무시한 힘으로 모세를 세우는 행동이 이어졌다. “나는.” “후걱-!” 빠악-! 테오제네스의 주먹이 다시 모세의 복부를 강타하자 멀건 죽처럼 보이는 것이 그의 입 밖으로 울컥울컥 튀어나왔다. “테레사가.” “하악-!” “저렇게 냉정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우흑-!” 강인한 발로 그를 후려갈길 때, 모세는 몸의 곳곳이 어긋났는지 본능적으로 신음을 쏟아내며 움츠렸다. “정말로, 화가 나서 초월한 모습을, 단 한 번도.” “히익-!” “본 적이, 없다.” “학-!” 모세의 멱살을 쥐고 일으킨 뒤 테오제네스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멀리 던져버렸다. 육중한 그의 몸이 고결한 성당 뒷문 앞에 풀썩 엎어졌다. 아무도 그의 곁에 다가서지 않았다. 눈송이조차 그의 주변에는 내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가 시력이 거의 없다는 것에 감사 기도라도 올려라. 어리석은 자식.” “하악… 학… 헉….” “?” “헉… 헉… 헉….” 테오제네스는 정말로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는지 그를 학생 감옥까지 끌고 갔다. 단 한 번도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본 적이 없던 모세인데, 평소처럼 변명이나 반항조차 없이 순순히 맞더니 당당하다는 시선으로 테오제네스를 올려봤기 때문이다. 이상한 노릇이었다. 수페리우스를 저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이 청렴결백한 눈동자를 지닌 것에 소름이 끼쳤는지 테오제네스는 딱딱한 지하 학생 감옥에 그를 가둔 뒤에도 뭔가 석연찮은 감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젊은 피는 또 다른 피를 부추기고 터뜨린다. 파란 사과의 젊음은 어느 세대보다 사납고 저돌적이며 저마다의 정담함을 쥐고 있음을, 그들 스스로는 알면서도 결국은 이렇게 된다. 수페리우스를 응급 시술실로 보낸 뒤, 테레사는 자신을 따라온 쇼너 스타니와 이민우에게 수고했다는 이상한 말을 건넸다. 평정을 잃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는 모습은 슬퍼 보이기까지 했다. 그의 감정은 이미 터지고 없을 것이다. 감히 예상조차 하기 힘든 테레사의 감정을 따라서 쇼너와 민우는 묻지 않기로 했다. 역시 테레사는 제왕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어. 대단해. 어쩌면 이런 식의 생각을 둘이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생각은 잠깐의 착각에 지나지 않았음을 곧 알 수 있었다. “뭐…라고?” 혈액이 부족하다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간호사들을 통해 수페리우스가 위급한 상태라는 것을 전해 듣는 즉시 착각은 완전히 부서졌다. 테레사는 가까스로 유지하던 지금의 자세를 버렸다. 꿋꿋하게 기도 따위를 하리라 예상하며 테레사를 주목하던 쇼너와 민우는 별안간 응급실에서 아예 밖으로 나가려는 듯 움직이는 그를 막아섰다. 정확히는 이때까지 침착하게 상황을 살피던 민우가 마침내 폭발해버린 테레사를 막았다. “비켜.” “…테레사.” 그래도 죽지 않을 거라 믿었던 희망이, 차라리 없는 시력 덕분에 수페리우스가 얼마나 참혹한 상태였는지 몰라서 괜찮았던 안도가 깡그리 사라졌을 때의 절망이 테레사를 미치게 했다. 테레사는 멋진 입 꼬리를 올리더니 가시처럼 음성을 쏘았다. “비켜라 이민우.” “……어디 가시는 건가요.” 히스테리칼한 테레사의 음성은 한데 커졌다. 그의 위협은 표정만으로도 충분하거늘 테레사는 상대가 움찔할 정도로 성대를 떨었다. “그 새끼를 죽이러 간다.” “!” 피의 헬리아, 밑바닥의 절망. 이곳은 룸펜보다도 못한 지옥이었다. “그리고 나도 죽는다.” “테레사!” 이번에는 쇼너 스타니가 테레사의 뒤에서 소리쳤다. 약품의 향이 진동하는 가운데 테레사는 이럴 줄 알았으면 장미 문 앞에서 놈을 죽였어야 한다는 후회로 괴로웠다. 가슴이 미어진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했다. 숨이 막히고 시야는 자꾸만 죽었다. 암흑 중에 들리는 소리들이라고는 수페리우스가 곧 죽을 거라는 것과 자신을 막는 가련함뿐이었다. 테레사는 민우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무서운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안 됩니다!” 벙 쪄있는 쇼너 스타니를 대신해서 이번에도 민우가 달려와서 앞을 막았다. 양 팔을 벌리더니 한 걸음도 못 가게 하려는지 서슬 퍼런 눈으로 제왕을 노려본다.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막아라. 이 순간 유일하게 한가해 보이는 함박눈만이 병동을 차갑게 덮고 있었다. “비켜라.” “…싫습니다.” 암회색 벽처럼 단단했던 테레사의 눈 밖으로 금방이라도 거침없이 쏟아질 듯 붉은 물기가 출렁였다. “비켜!” “안 됩니다!” 민우의 푸른 눈동자 곳곳에도 붉은 습기가 젊은 감성을 억제하며 피어올랐다. 그는 테레사의 허리에 매달려서 온 몸으로 안 된다고 소리쳤다. “내 전부를 죽이려고 했어! 없애려고 했단 말이다! 비켜!” “!” “비켜라 이민우, 내가 시력만 있었으면 너도 지금 나의 광기에 저세상으로 갔을 테니!” “더 이상 살인은 안 됩니다!” 쉬고 갈라진 언어처럼 푸석해진 민우의 뺨으로 구슬 같은 눈물이 흘렀다. 그는 소리쳤다. 모든 마음을 다하여, 어쩌면 자신은 이 순간을 위해 수페리우스를, 테레사를 지켜봤던 거라 믿으며 마음을 다해 호소력 짙은 음성을 떨쳤다. “테레사. 혁명 때 죽었던 이민우 선배를 기억하십니까!” 도저히 내가 될 수 없는 나와 같은 이름을 아십니까! “수페리우스를 지켜 주다가 그렇게 되셨지요? 그럼, 수페리우스는 기뻐했을까요?” 수페리우스를 흔들었던 그 이름의 힘을 아십니까! “저는 이민우 선배와 이름이 같다는 걸 굳이 감출 필요가 없는데도 긴 시간 감추면서 그 사람을 잠깐 흉내 내 봤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수페리우스는 힘들어 했습니다. 테레사, 죽음은 그런 것입니다!” 죽음은 그런 것입니다! 죽음은 죽음보다 더 한 고통을 다른 이에게 전이 시키는 것입니다! 젊은 영혼의 소리가 병동 복도에 쩌렁쩌렁 울렸다. 온 몸으로 영혼으로 막았던 슬픈 로미오의, 현재의 아름다운 로미오의 목소리가 바직 갈리며 참담함마저 꺼냈다. 그는 테레사 앞에서 털썩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수페리우스가 슬퍼 할 것입니다. 죄인이 되지 마십시오….” “!” “죄인의 몸으로 자신을 죽이지도 마십시오.” “…….” “이 세상에 테레사 라는 이름은 많겠지만, 그 누구도 선배를 수페리우스 앞에서 대신 할 수는 없습니다. 정말로… 그렇게는 안 됩니다. 제가 이민우 선배가 될 수 없었듯이…….” “…….” “수페리우스가 슬퍼하는 모습을 저는 볼 수 없습니다. 제발…….” “…….” “제발…….” 테레사는 가만히 정지한 채 당당하게 올린 턱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보는 것 같았다. 암흑뿐인 그의 시선 옆으로는 숱한 간호사들과 의사가 지나쳤다. 온 세상이 움직이는데 테레사 자신만이 죽은 듯이 정지하는 것이다. 테레사는 별안간 높이 턱을 쳐들었다. 그의 머리칼이 크게 출렁이더니 막 눈에 고인 눈물처럼 반짝인다. 가늘게 턱을 떨며 테레사는 읊조렸다. “나는… 방금 한 번 죽었다.” “…….” “너는 이 기분을 아는가….” “…….” “내가 다시 살았으니, 혜성이도 살겠지.” “…….” “그런데… 너도… 그런 건가… 너도… 혜성이를….” “…….” 양 쪽 주먹을 움켜쥔 테레사의 옆모습은 한없이 슬프기만 했다. 분노가 가신 뒤의 참담한 현재가 그에게 또다시 인내심을 요구하는 것이다. 테레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미칠 것 같은 사람은 나 일 텐데 저마다 자기가 미쳤다며 우기는군…? 하… 하… 하! 하하하하.” “…….” 적막한 가운데 테레사의 허망한 웃음소리가 오래도록 울려 퍼졌다. 두 시간이 지난 뒤 응급 시술 실 밖으로 수술 중이었던 닥터 한 명이 나와서 그들에게 고비를 겨우 넘겼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도 민우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그대로였다. 테레사는 조용히 그를 일으키며 닥터에게 고개 짓으로 알았다는 뜻을 전했다. 닥터는 곧 시술실로 돌아갔다. 남은 것은 까칠해진 적막뿐인 현재, 테레사는 허스키한 어절로 민우의 등을 두어 번 두드리며 인내심 짙은 어절로 짧게 뜻을 전했다. “이성을 잡아줘서 고맙다 이민우군. 전혀 틀리다고 생각했는데 네 선배 이민우와 이상하게 닮은 느낌이 있군.” “…….” “수페리우스가 성치 않을 때는… …….” 그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이 모든 일이 자신의 탓이라 여겨져서 괴롭기만 했다. 쇼너 스타니와 이민우에게 돌아가라고 이른 뒤, 홀로 복도에 남은 테레사는 그제 서야 큰 소리로 어린 아이처럼 오랜 시간 울었다. 그리고 그 뒷날, 학생 감옥에 갇혔던 모세는 시신으로 변해 있었다. 테오제네스의 지시에 따라 인부들에게 들려서 학생들의 눈을 피해 병동으로 후송된 모세는 어쩐지 웃는 낯이었다. 수페리우스를 찔렀던 단도로 자신의 심장을 찌르고 싸늘하게 죽은 모세는 그럴싸한 유언조차 없이 조용히 세상과 안녕을 고했다. 아마데우스는 발칵 뒤집혔다. 혁명을 똑똑히 겪었으며 기억하는 선배들은 모세의 죽음을 통해 이민우를 떠올렸다. 시종일관 성당으로부터 울리는 레퀴엠의 선율은 모세의 글귀처럼 날카로우면서도 씁쓸한 기운이 가득했다. 혁명을 모르는 신입생들 역시 오르페우스 관 폭파를 비롯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믿을 수 없는 일화들을 접하며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젊은 그들에게 죽음과 참담한 사건은 너무나도 낯선 것이라서 그들과 관계없는 숱한 학생들조차 목을 놓아 울었다. “프란체스코. 결국 그는…….” “…….” 동완의 병실에서 모여 있던 미카엘과 프란체스코는 모세의 이름이 나오려는 때만 되면 말끝을 흐리거나 입을 다물었다. 하룻밤 사이 벌어진 일은 차마 입에 담기 무서울 정도의 것이었다. “선배… 괜찮아요… 괜찮아요….” “…….” 젊은 피의 흔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상상 만으로도 상황은 끔찍했거늘, 수페리우스의 아픔은 감히 예상할 수조차 없었다. 결국 미카엘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 동완과, 벌써부터 눈시울이 그렁그렁한 프란체스코와 함께 긴 시간 눈물을 보였다. 인쇄 동은 잠시 닫혔다. 모세의 장례가 끝나고 수일 내로 다시 기계를 돌리겠지만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적어도 그의 글을 존중한다는 취지로 인쇄 동은 닫힌 것이다. 수페리우스가 일반 병실로 옮겨진 뒤 이틀이 더 지났지만 아이는 깨어나지 않았다. 모세의 죽음으로 커진 슬픔은 아이가 깨어나야지만 휘날래를 장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잔인한 2월의 겨울이 언제쯤 그칠까. 모세의 사랑과 증오가 낳은 이번 결과를 두고 많은 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죄악처럼 느껴져서 그들은 함부로 지껄이거나 그를 욕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그들 역시 누구를 죽이지 않았을 뿐이지 저마다 죄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수페리우스가 깨어난 것은 모세가 죽은 뒤 나흘이 지나서였다. 수척해진 그의 피부가 눈을 뚫고 약동하는 봄을 찾는 새싹처럼 미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깨어났구나.” “……?” 수녀님인가…? 그렇다면 여기는 천국일까. 수페리우스는 기분 좋게 속삭이는 여인의 음성 때문인지 편안해졌다. 눈을 뜨고 싶지 않을 정도로 기분 좋은 목소리였다. 곧 눈을 뜬 수페리우스는 공허한 천정과 백지장처럼 하얀 주변을 차례대로 둘러보았다. “으윽.” 뺨만 움직이는 대도 발끝부터 구석구석까지 통증이 밀려왔다. 뇌가 파괴될 것처럼 온 몸이 번쩍! 들렸다. 통증이 겨우 가시자 수페리우스는 왼 쪽으로 돌렸던 뺨을 햇살이 미치는 오른쪽으로 천천히 돌렸다. 욱신대는 아픔은 마치 피부 껍질을 가위로 오려낸 것처럼 느껴져서 아이는 연신 미간을 찌푸렸다. “!” “놀라지 말아라.” 어째서…? 라는 물음표가 아이의 눈동자에 휙 스쳤다. 나흘 만에 눈을 뜬 수페리우스의 머리맡에서 자상하게 말을 건네는 자는 바로, 이자벨이었다. 경각심 때문인지 몸을 움츠리는 혜성을 내려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짓던 이자벨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듯 수페리우스의 이마에 베인 땀을 손수건으로 차분하게 닦기 시작했다. “테레사에게 양해를 구한 뒤에 온 거야. 그이가 기뻐하겠어… 삼일 밤낮을 여기에서 너를 지켰는데… 봐라. 여기 바닥에 보면 그럴싸한 둔기들이 있지. 그에게 이런 단순한 면이 있다는 것에 꽤 놀랐지만…….” “…….” 지금의 이자벨은 당장이라도 저 창가 햇살에 밀려서 산산이 부서질 것처럼 연약해 보였다. 청초로운 겨울의 꽃이었다. 평화로운 표정이지만 텅 빈 공허함이 연신 그녀에게 맴돌았다. “그를…….” “…….” 어렵사리 입술을 떼는 그녀는 아주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그 고통조차도 그녀답게 아닌 척 위장하는 게 훤했다. 수페리우스는 가만히 그녀의 밤바다처럼 고요한 음성을 경청했다. “모세를…….” “…!” 움찔. 수페리우스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폐허에서 있었던 악몽 같은 사건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잠깐이지만 발작 비슷하게 온 몸을 움직이는 수페리우스를 거의 껴안다시피 잡아주며 이자벨은 속삭였다. 진정해, 진정해라. 괜찮아. 괜찮다. 어머니의 음성처럼 편안한 그것이 아니었다면 아이는 모세라는 이름만으로도 발작했을지도 모른다. 둘은 곧 처음처럼 편하게 그러나 의아하게 서로를 올려보고 내려다보았다. 이자벨은 수페리우스의 이마와 뺨에 돋은 땀을 다시 닦아주며 조용히, 그리고 간절히 속삭였다. “그를 용서해라…….” “…….” 그녀의 음성이 모든 것에서 초탈한 것과 같이 초연하면서도 슬프게 전해진다. 이상한 일이다. 이자벨이 아닌 걸까. 눈물을 보이지 않아도 눈물처럼 들리는 음성이 있다. “…너무 바보 같고 멍청해서, 태어나 천주님께 받은 심장을 단 한 여자에게만 바치기로 했으니까… 그게 그의 죄다….” “…….” 별안간 고개를 휙 쳐들은 이자벨이 이야기에 잠시 텀을 주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수페리우스의 단아한 이마를 닦아주던 손을 부르르 떨며 무언가를 강하게 참는 듯했다. 아이는 괜찮냐고 물어보려다가 관두었다. 곧 마음이 정리 되었는지 이자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기준으로 나는 선이고, 너는 악이었어.” “…….” “제발 그를 용서해라. 나는 그가 지금도 필요치 않지만, 그는 나를 봐야 산 다는 것 즘은 알거든.” “…….” 모세… 모세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자벨이 차라리 우는 게 나을 법 한 표정으로 최선을 다 해 속삭이는 모습은 낯설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지난 번 수페리우스가 학생회 실에서 이자벨에게 마음으로 부탁하던 행위가 오늘에서야, 지금에서야 꽃처럼 발한다. 눈앞의 큰 산을 넘어야 돼 이자벨, 이자벨. 그 때의 부탁을 비로소 받아들였는지 이자벨은 자신을 숙인다. “나는 얻을 수 없어도 지켜보며 실 낙의 희망을 쥐며 끝끝내 살아 움직인다는 게, 어떤 것인 줄 알기 때문에 그를 이해한다.” “…….” “너는 나와 모세의 애증을 이해 할 수 없어도, …적어도 이해하는 시늉은 가능하지 않을까.” 이자벨의 이야기는 거기서 잠시 끊겼다. 그녀는 스스로도 억제할 수 없는 무언가와 열심히 싸우다가 지쳤는지 굉장히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수페리우스는 텅 빈 마음으로부터 들리는 여러 소리를 들었다. 내면의 소리들은 엄청난 것들을 마구 지껄이는 중이었다. 그녀를 용서하지 마, 모세를 죽여야 돼. 그리고 다른 편에서는 용서만이 구원이다 수페리우스. 죄는 또 다른 죄를 낳는다는 말씀을 명심해라는 빛의 속삭임이 감미롭게 들려왔다. 몇 십 분이 지나도록 둘의 입술은 쉬이 트이지 않았다. 결국 수페리우스는 몸을 축 늘어뜨리더니 힘없이, 그러나 눈망울만큼은 강한 뜻을 품고 대답했다. “…나는 폐허에서…… 오직…….” “…….” 죽을 뻔했지만 나는 살았으니 괜찮은 거야. 용서하기 힘들지만 할 수 있어. 할 수 있을 거야. 숨을 고른 뒤 수페리우스는 쏟아내듯 나머지 말을 내뱉었다. “헬리아를… 음악만을 연주했을 뿐… 그것은 밤바다처럼 고요하다가 돌연 태풍을 맞이했지….” “!” “음악 이외에 숨을 쉬는 것은 없었어.” “…….” 잠시 놀라는 것처럼 보였던 이자벨이 크게 뜨였던 눈을 처음처럼 가라앉히더니 긴 숨을 내쉬었다. 수페리우스에게 지금의 이자벨이 의외였듯이, 이자벨 역시 지금의 수페리우스가 의외인 모양이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빈 허공을 응시하며 착잡한 기분을 달랬다. 곧 다른 방향으로 몸을 비튼 이자벨이 얇은 등을 떨리며 여리게 속삭였다. “내가 미웠니… 내가 얼마나 많이 미웠을까. 하지만 나는 네가 날 미워하는 걸 좋아했다.” “…….” “네가 나를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지내는 게 더 무서웠으니까.” “이자벨…!” 아이가 부정하려는 듯 강하게 그녀를 부르자, 그것보다 빠르게 이자벨이 치고 들어왔다. “나는 왜 너를 미워하고 원망하는지 본질적인 것을 망각하는 수준에까지 다 달았었지.” “…….” “항상 슬프고 괴로워서 원망과 분노는 약해지질 않았어. 숨이 가쁘고 행복이란 단어 자체를 잊고 살았으니까.” “아…….” “너는 죽는 날까지 나에게는 애송이겠지만, 정작 애송이는 나를 의식하지 않을 때의 절망이란….” “…….” “너는 혹시 아니.” “…무엇을….” “증오란, 증오하는 자에게만 괴로운 거다. 증오하고 분노하는 자를 오히려 더 아프게 하는 거다. 증오를 받는 사람은 오히려 행복한 거야. 누군가를 죽도록 증오해 본 적 있니.” “…….” 사랑에서 시작된 증오라는 이름. 그것은 무차별한 오늘을 낳았다. 증오라는 단어에서 먹먹해진 심장을 억누르며 둘은 또 입을 다물었다. 흐느끼는 음성은 여인의 힘과 삶을 부서뜨리는가, 혹은 꿋꿋하게 세우려는가. 정답은 없다. 긍정도 부정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내뱉는 두 사람에게 비치는 색은 맑고 투명했다. 연신 마음을 추스르며 이자벨은 말을 이었다. “내 이름을 말 하겠지. 혹은 모세를 언급할 테지. 그러나 그건 진정한 증오가 아니다.” “…….”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열기가 영혼을 끔찍하게 달군 것, 인생의 목표마저 증오가 잡아먹는다… 그래서 내가 뭘 해야 할지 방향키마저 잊어버리지. 증오란, 당사자를 미치게 한다. 증오란, 무릎을 꿇게 만들어.” “…….” “그런데 정말 괴로운 건, 알면서도 멈출 수 없다는 거다.” “!” 이자벨, 차라리 울어. 그게 속이 편할 거야. 혜성은 자신이 진짜로 화가 났던 모든 것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보였다. 속으로 쥐어짜는 이자벨의 눈물이 보였다. 저것은 변명의 입술이 아니다. 진실의 입술이 뒤늦게 서야 발하는 것이다. 이자벨은 곧 몸을 일으키더니 살짝 미소 지었다. “반 아마데우스의 심정이 나는 이해가 돼. 나는 나와 닮은 그들을 참을 수가 없었다.” “…….” 병실의 양 쪽 커튼을 단정하게 묶은 뒤 그녀는 켜켜 묵은 마음을 모두 버리고 싶다는 듯 묘한 시선으로 잠깐이지만 밖을 응시했다. “돌이켜보면.” 그녀는 커튼을 부드럽게 쓸던 도중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등을 돌렸다. 햇살 전체가 그녀를 포옹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수녀가 되고 싶었어. 인생 전체가 무기력했거든.” “…….” “테레사… 나의 진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프랑스의 수도원에서 수녀 복을 입고 있을 거야.” “…….” “그런데 지금은 그 때와 다른 진이, 반 아마데우스를 일으켰듯이, 지금의 나를 다시 잡아주는 것 같다….” “…….” “목적이 사라졌어.” “뭐…?” “그를 잡아야 한다는 모든 것이 무너졌어.” “…….” “내 감정을 너는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마. 불쾌하다.” “…그래….” “낱낱이 떠들면서도 지금 너에게 떠드는 내 입술이 싫고 원망스럽다. 견딜 수가 없어.” “…….” “…정작 증오한 것은 네가 아니라 이렇게 살아와야 했던 나 자신일 지도 모른다는 게 슬프다.” “이자벨….” “아직은 너를 볼 수 없다. 네가 밉거든.” “…….” “어쩌면 영원히 그럴지도… 걱정하지는 마. 적의는 완전히 증발했다. 목적이 무너졌으니까. 화해의 손은 잡지 않을 테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 평등한 선까지 위치는 가능하겠지. 당장이 아니더라도…….” “……기다릴게.” “기다리지 마라.” “…그래도 기다릴게, 이자벨.” “후후… 그래서 너를 싫어했었는데… 그래서 너를 증오했었는데….” “?” 적당한 부분에서 대화를 끊은 뒤, 이자벨은 여윈 몸에 코트를 걸쳤다. 그녀가 이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혜성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이자벨이 사라진 것 같지만 또 그런 것만도 아닌 현재야말로 꿈과 비슷했다. 이자벨은 사뿐한 걸음걸이로 나아가 도어를 쥐더니 등으로 마지막 속내를 꺼냈다. 그래서 평소처럼 날카롭고 이지적이며 이자벨 다운 톡 쏘는 언어가 휙 날아왔다. “…나의 진을 실망시키거나 다치게 하면, 나는 너를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 갈 거다.” “!” 차갑되 진실을 담아서 슬픈 언어가 있다. 혜성은 잠시 놀랐던 표정을 천천히 풀면서 그녀가 못 볼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 인생의 전부나 다름없었으니, 그를 다치게 하면 나는 죽는 것이고, 그에 앞서 너 역시 세상에 없다.” “…응…….” 이윽고 문을 열고 한 걸음 나간 이자벨이 문을 닫기 위해 병실 안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처음이자 마지막인 말을 수페리우스와 시선을 맞추는 동시에 내뱉었다. “…고맙다.” “…….” “……수페…리우스.” “!” 마음에서 우러난 그녀의 끝은 애송이가 아니라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였다. 이에 놀란 혜성이 그녀를 잡기 위해 손을 막 뻗으려는 때, 야속하게도 병실 도어가 닫혔다. 아마데우스의 길목마다 학생들은 젊은 죽음을 추모하는 뜻에서 악기를 켜고 있었다. 바이올린의 선율은 저 멀리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오르간의 레퀴엠과 한데 어울렸다. 곳곳에서 학생들은 언 손을 비벼가며 악기를 연주했다. 비올라, 첼로, A동에서의 갖가지 화음들, 길가의 연주회, 이 모든 것이 단단하게 하나로 묶여서 넓은 아마데우스의 목을 숙이게 했다. 그들은 이자벨이 지나는 족족 흠칫 놀라서 연주를 멈추기는 했지만 곧, 못 본 척 하고 마저 악기를 켰다. 누군가는 귓속말로 그녀를 수군거렸다. 아마데우스의 여왕으로 군림하던 이자벨의 주가는 완전히 추락하다 못해 바닥에서 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자벨은 지금처럼 산뜻했던 적이 또 있을까 스스로도 이상할 정도로 몸과 마음이 가벼웠다. “……?” 그녀는 잘 걷다가 종종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 바람이 갈라질 때를 잘 맞추어 모세가 언제나처럼 자신을 따라오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아주 자세히 모세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과 스치는 학생들을 붙들고 모세는 죽지 않고 나를 따라오고 있지 않느냐, 봐라, 여기 있다-라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몇 번이나 참았다. 모세가 따라오고 있어. 이자벨은 이유 없이 든든해지는 묘한 기분을 안고 인적 드문 두 갈래 길에 들어섰다. 서쪽으로 향하는 길은 특히나 더 을씨년스러워서 사람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자벨은 가녀리게 호흡하며 슬쩍 곁눈질로 뒤를 확인했다. 모세, 모세가 여전히 자신을 따라오고 있었다. 이자벨은 그래서 평소의 도도한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앙큼한 내용을 떠들려던 것을 관두고 잠시 미안한 투로 읊조렸다. “…내 열정이 오직 그 한 사람에게만 미쳐서 미안하다.” 자신이 멈칫 거렸듯이 십 미터 가량 떨어져 있는 모세도 걸음을 멈췄으리라. “죽는 날까지 내 안의 신은 그만 바라보기를 원해. 미련해서 미안하다. 나조차도 내 안에 이 정도의 열정이 사랑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을 줄은 몰랐거든. 나는 지금도 은근히 그가 나를 찾지 않을까 기다리고 있어.” 언제나처럼 모세는 대답이 없었다. 이자벨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곧 자신이 나아갈 길을 평소대로 확실하게 떠들었다. “나를 잊어라, 모세. 수녀가 아닌 지금, 나는 그녀들과 다를 게 없어.” 『 …그럴 수 없어. 』 이것 봐. 모세가 대답하잖아. 그는 죽지 않았어. 이자벨은 신이 났지만 교양 있는 평소의 모습을 지키기 위해 허공에 턱을 치켜들며 느릿하게 걷기 시작했다. “애송이를 괴롭히지 마. 지금에야 깨달았지… 애송이를 괴롭히고 싶었어. 나는 그가 간혹 지금도 저주스럽다.” 『 ……. 』 “그런데… 그런데… 애송이가 괴로워지면, 나의 진이 아파하겠지.” 『 ! 』 “나는 이제껏 내 살을 도려내며 살아왔어.” 『 이자벨… 이자벨…. 』 내가 괴롭다는 말을 내뱉으면 언제나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음성을 뒤에서 들려준다. 모세는 살아 있어. 방금도 나의 이름을 불렀잖아. 이자벨은 그 앞에서 화를 내고 미치기도 했던 지난날이 떠올랐는지 씁쓸하게 웃더니 가슴을 펴고 대답했다. “죽고 싶지만 죽을 수도 없어. 그만큼 사랑하니까. 죽으면 그를 못 봐. 아파도 지켜보는 게 낫다는 게 내 결론이다.” 『 ……. 』 “이왕이면 진이 웃는 모습을 봤으면 좋겠어… 나도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 ……. 』 모세는 대답이 없었다. 아마 내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는 중이겠지. 이자벨의 걸음걸이에 힘이 생기고 오만한 눈동자가 평소대로 돌아온다. 왜 다들 모르는 거야. 이것 봐, 모세는 예전처럼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어. 바보 같은 것들. 바보 같은 것들……. 하지만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자벨은 뒤를 확인하기가 두려워졌다. 그녀는 창백한 뺨에 떨어지는 눈물을 결국 막지 못했다. 수페리우스 앞에서도 지켰던 눈물에의 자존심은 결국 아무도 없는 곳에 닥쳐서야 마구잡이로 흐르는 것이다. 그 때, 기적처럼 그녀의 귓가로 모세의 음성이 전해졌다. 『 어디로 가는지 알려 줘. 』 “…….” 『 알려 줘…. 』 “어리석구나.” 『 …나도 알아. 』 누가 보면 이자벨이 혼잣말을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녀는 그게 아니었다. 신기하리만치 정확하게 들리는 모세의 음성이 다른 때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이자벨은 입술을 깨물며 그 위를 지나는 눈물을 귀찮다는 듯 면장갑으로 닦았다. “바보로구나….” 『 …응…. 』 별안간 가슴이 터졌다. 메마른 여기저기 꽃처럼 피어난 시련의 봉오리가 즉각 즉각 붉게 터져나갔다. 아팠다. 왜 아픈지 알면서도 이자벨은 그것을 부정하려는지 뺨을 저었다. “프랑스로 돌아 갈 거다….” 『 …나도 그럼… 갈래…. 』 등을 돌린 채 주먹을 쥐고 바른 자세로 울고 있는 이자벨은 안 우는 척 도도함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 모세를 이유로 자신이 눈물을 보인다는 게 새삼 우스웠다. 우스워서 슬펐다. 가슴이 메어졌는데 그 따위로도 차마 표현되지 않는 참담함이 또 있었다. 그녀는 울음 섞인 목소리를 티내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은 눈물처럼 솔직한 것을 꺼내버렸다. “수녀가 될 텐데도? 영원히 천주님의 품에서 지낼 텐데도? 너 따위는 지금보다 더 신경 쓰지 않을 거다.” 『 …알아. 』 “…산맥 중에서도 가장 험하고 벽이 높은 성지를 찾아 갈 거다. 순결한 수녀들 외에는 들어갈 수도 없는 곳에서 평생을 문 밖 출입 없이 기도만 하고 살 거야.” 『 ……. 』 “그런대도?”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이자벨은 죽은 듯이 조용해진 모세의 목소리를 다시 잡기 위해 평소와는 달리 묘한 것을 물었다. 바람이 한 데 짙어진다. 텅 빈 이자벨의 등 뒤로만 이상하리만치 강한 바람이 내내 스쳤다. 한 번 더, 그런대도? 라고 조바심 가득한 말을 꺼내려던 이자벨에게로 기적처럼 모세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자벨의 영혼 전체가 땅 끝으로 내려앉았다. 그녀는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 …그러면 나는… 평생 성을 지키면서 성 밖에서 살 거야. 』 “…….” 왜 자꾸 들리지. 사실을 인정하자. 그는 죽었는데 왜 들리는 거야. 『 이자벨. 』 “…….” 『 못생기고 덩치만 크고, 음악도 잘 못하고 말주변도 없고… …그래서 미안해.』 “…….” 왜 이렇게 눈물이 멈추지 않는 거야. 진짜 바보는 나 자신일지도 몰라. “…알…긴… 아는구나. 형편없는 것… 감히 나를… 좋… …사랑한다니… 분…수를… 알아라….” 『 훗… 응……. 』 모세의 대답과 함께 한데 커졌던 바람이 이자벨의 등에서 차츰 차츰 멀어지고 있었다. 아니다. 시선을 달리 바꾸니 그 거대한 바람은 영원토록 그녀를 호위 하는 기사의 방패의 모양새로 한결같이 불었다. 아래층 병실에서 입원중인 동완이 다리를 절뚝이며 다녀간 뒤, 혜성은 훨씬 상태가 나아졌다. 이자벨과의 대화는 지금도 생각할 때마다 아이를 멍하게 만들었다. 이자벨이 왜 그랬을까. 동완이에게 모세가 어떻게 되었느냐 물어 봤자 수페리우스는 속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학생 감옥으로 갔다는 것 외에 자신도 아는 게 없다며 동완이 꾹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다. 결국 내 몸이 나아져서 밖으로 나가기 전에는 모르는 걸까. 혜성은 자신이 칼에 찔렸던 죽음의 날을 떨치기 위해 노력하다가 늦은 오후 무렵이 되자 천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자 소스라치게 괴로웠던 마음에 얄팍하나마 평화가 치고 들어오는 것이다. 수페리우스는 자신의 몸에 둘린 깁스를 성한 왼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요리조리 고개를 돌려보았다. 죽지 않았다는 현실이 기적처럼 다가와서 눈을 깜빡일 때마다 지난날의 격정이며 슬픔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테레사, 그를 향했던 질투조차도 이제 보니 삶과 죽음 앞에서는 소소한 바람에 불과했다. 뒤로 밀렸던 음악에의 욕구가 뮌헨에서처럼 절실해졌다. 키르혜아이젠 교수들의 평가를 기다리며 마른침을 삼켰던 그 때, 실력 향상에 매진하느라 앞이 보이지 않았던 그 때, 자신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새삼 깨달았다. 수페리우스는 여러 궁금한 것들이 많았지만 당장은 뮌헨에서 울렸던 다뉴브의 밤만 지속적으로 떠올렸다. 땅거미가 완전히 질 무렵, 병실 도어가 열렸다. 도어가 전부 열리기도 전에 혜성은 숨을 참았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뚝, 뚝. 눈물이 떨어졌다. 테레사였다. 그는 몹시 흥분한 상태라는 걸 그의 걸음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자벨이 수페리우스를 만났다는 소문이 와전되어서 수페리우스가 또 다치고야 말았다는 소식이 오르페우스 관에서 인부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테레사에게 미쳤기 때문이다. 밤이 되니 그의 시력은 아예 없어졌다. 덕분에 이곳까지 오는 도중 몇 번 넘어졌는지 테레사의 몸은 밖의 눈과 흙이 곳곳에 묻어 있었다. “!” 혜성은 왼손으로 입을 가리며 끅, 끅, 울었다. 테레사도 울고 있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마음은 찢어져라 그를 부르며 같은 것을 소리쳤다. 지팡이조차 없이 고작 몇 걸음 되지 않는 침대에 오면서 테레사는 흥분한 나머지 곳곳을 부딪쳤기 때문이다. 쨍그랑-! 침대에 도착한 것으로 착각한 테레사가 테이블 위의 주전자와 컵을 바닥에 쏟았다. 억척같이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용케 침대를 더듬거리며 찾아온 그가 긴 숨을 내쉬었다. “테레사!” “!” 나흘 만에 아이가 깨어났다는 희소식보다 또 어디가 다쳤다는 그릇된 소문에 겁에 질린 테레사는 자신에게 안겨오는 수페리우스를 마침내 덥석 끌어안았다. 혜성 역시 그에게 몸을 내미느라 단단히 고정해 둔 링 겔이 기울다 못해 바닥에 떨어져서 완전히 깨졌다. 둘은 거의 넘어지는 모습으로 침대 모서리에서 아슬아슬하게 부등 켜 안았다. 오 하느님. 그가 걸어왔던 몇 발자국은 아주 긴 지옥이었습니다. “어… 어디. 어디를 어떻게 다친 거야… 어디야… 어디… 여기? 여… 여기가 아닌가. 방금 뭐가 깨졌는데, 어디…….” “……!” 하느님 제발. 제발…! 속으로 절규하는 혜성은 이를 악물고 쉬어빠진 숨소리를 내며 마구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아이를 끌어안는 즉시 그토록 익숙하고 그리워한 체온과 향기를 확인하면서도 덜덜 떨었다. 안아줄 때나 화를 낼 때, 혹은 그 때가 아니더라도 늘 기품 있고 단정하던 테레사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갈비뼈가 모조리 부서질 정도의 센 힘으로 안고 있는 그의 아름다운 팔, 그의 입술 밖으로 빠져나가나는 못된 신음은 감수성을 부추긴다. 흐느끼는 테레사 못지않게 혜성 역시 품 안에서 울었다. 괜찮다는 말을 해야 되는데 답답할 만치 말이 터지지 않았다. “어디… 어디 다쳤어. 어디야. 어디… 내 손이 네 상처를 만지는 거 아니야? 어디… 어디야.” 살얼음이 깨어지듯, 마음을 깨뜨리고 동시에 녹이는 음성이 있다. “흐…흑…….” 테레사는 그 말을 하면서 순간 팔 힘을 풀더니 어서 다친 곳을 알려달라며 화를 냈다. 화를 내면서도 살짝 품에 안고 있는 현재는 풀지 않았다. 어서 다친 곳을 알려줘야지 그곳만 피해서 너를 만질 수 있노라 테레사는 흐느끼고, 흥분했다. “혜성아… 혜성아….” “…제 이름 맞아요….” “!” 아이는 저의 가슴에 왼 팔로 그를 당겨 안으며 겨우 속삭였다. “울지 말아요… 울지 말아요….” “아… 여기가 붕대… 괜찮은 거냐. 혜성아… 혜성아….” “나는 괜찮아요. 괜찮아요….” “…얼마나 무서웠을까… 무서웠지. 무서웠지.” “…하나도 무섭지 않았어요. 정말 이예요.” “거짓말 하지 마. 그런 거 안 믿어.” “…테레사….” “안 믿어. 나는 지금 귀도 멀었어.” “…보고 싶었어요….” “안…!” 보고 싶었어요. 보고 싶었어요. 아이의 솔직한 말은 더 할 나위 없이 솔직한 그를 한 번 더 서럽게 했다.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을 만치 격해진 테레사는 길게 신음하며 낮게 욕을 지껄였다. “나흘 내내 잠들어 있으면서도 그리워서 가슴이 메이고 찢어졌어요….” “!” “만약 테레사를 보게 된다면, 제일먼저 하고 싶은 말이 보고 싶다는 거였어요….” “…!” 작은 가슴 안에서 움찔 놀라는 테레사를 애써 진정시키려는지 수페리우스는 왼 손바닥으로 쉬지 않고 그의 머리칼을 쓸어 주었다. 차츰 차츰 그의 흥분이 나아진다 느낄 때가 되어서야 차분한 투로 아이는 속삭였다. “선배도 그랬죠… 우리 보고 싶다는 인사만 해요….” “…….” “사랑해서… 사랑해서 미안한 게 너무 많아요.” “…….” 혜성의 얘기를 가만히 듣던 테레사가 이윽고 시트 위에 편하게 앉은 뒤 혜성을 다시 껴안았다. 보드라운 피부가 살아서 움직일 때를 나흘 내내 기다리느라 그는 지쳐 있었다. 하지만 피곤함 따위는 수페리우스의 음성이 흩어지듯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아이는 방금 전 고작 자신을 향해 걸어오면서도 헤맸던 테레사가 안타까웠는지 억눌린 통증을 꺼냈다. “내가 아니었으면 선배의 눈은….” “…그만.” “…….” 짧은 그의 입맞춤이 지나자 대화는 보기 좋게 끊겼다. 테레사는 비로소 아까 들었던 소문이 거짓이라는 것을 깨닫고 기분 좋게 수페리우스를 보듬기 시작했다. 격했던 음성 역시 차분해졌다. 나란히 껴안은 상태에서 서로의 체온이 하나로 뭉칠 때 테레사는 아이처럼 속삭였다. “혜성아….” “…네….” “숨 쉬고 있지… 그렇지…?” “…그…럼요….” “…그래….” “…….” “고맙다….” “!” 올칵 목이 메이고 사정없이 눈물이 떨어져서 테레사의 옷을 적셨다. 수페리우스는 여러 번 테레사의 가슴에 뺨을 붙이고 저의 눈물이 세이도록 내버려뒀다. 둘은 한 번 죽었던 것과 다름없었다. 한 번 죽고 나니 지난 날 음악을 이유로 사납게 굴었던 서로의 모습이 얼마나 부질없었는지를 알았다. 오래전의 혜성이 그랬듯이, 최근의 테레사가 그랬듯이, 서로에게 강요하고 반하던 음악보다 훨씬 본질적인 면을 깨달았다. 그것은 삶을 존재케 하는 영적인 사랑이었다. 테레사는 아이가 달아날까봐 겁이 났는지 더 세게 조여 안으며 속의 것을 이젠 감추지 않고 꺼냈다. “나는 네가 미안하다고 하는 거 사랑한다고 하는 것도 제대로 못 들어. 숨 쉬는 것만 계속 느끼느라고.” “오, 테레사! 나는 괜찮아요!” “…안 괜찮은 거 다 안다. …네가 정말 어떻게 되었다면, 나는 살 수 없었어.” 격정은 사그라지고 겨울은 녹는다. 그것 또한 자연의 순리였다. 둘은 꿈을 꾸듯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약간의 장난기가 수페리우스를 들뜨게 만들었다. 한없이 진지한 테레사가 낯설어서 그런 걸까. 아이는 부러 새치름한 척 굴었다. “…당신의 나라에 초대 된 사람들은요…?” “필요 없어.” 그의 팔 힘이 세어진다. 나흘 전의 당신이 완전히 진심이 아니었음을, 이젠 알 수 있다. 화를 내는 순간조차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오래전의 내 말이 진심이었듯이. “사람들이 주인은 어디 있냐면서, 당신 나라의 왕을 원망할 거예요.” “필요 없어.” “…….” “정말 모르겠어? 너만 있으면 돼. 말하기 싫으면 말도 하지 마. 괜찮아. 나한테 이런저런 말로 고백 같은 거 할 필요도 없어.” “!” “숨만 쉬어 주면 돼.” “…….” 숨만 쉬어주면 된다는 그 소리는 분명히 히스에게서도 들었던 말이다. 아이는 몸을 떨었다. 히스보다 더할 만치 솔직해진 거예요? 혹여 시간이 지나 나흘 전처럼 냉랭해져도 오늘을 기억할 수 있도록 주문을 내리는 군요 테레사. 그는 나흘 사이 완벽하게 태초로 돌아가 있었다. 혜성이 깜짝 놀랄 소리들만 줄줄이 내뱉는 통에 아이는 그에게 안겨 있는 채로 이 사람이 테레사가 맞는지 몇 번이나 귀를 의심했다. “네 앞에서 나는 하느님도 필요 없어. 음악도 어쩌면….” “테레사. 어린애가 되어서 돌아오면 곤란한데요.” 히죽히죽 웃으면서도 혜성은 그런 그가 좋았는지 뺨에 입을 맞추었다. 잠깐 굳었던 그가 활짝 웃더니 이내 시무룩해지며 답답하다는 듯 저의 가슴을 팡 쳤다. “그런 말 좀 하지 마. 차라리 사랑한다는 말 하는 게 낫겠어. …혜성아. 혜성아. 너 지금 숨 쉬는 거 맞지?” “…사실은 제가 죽어서 지금 선배가 끌어안고 있는 건 저의 영혼입니다.” 뭐라고? 테레사의 몸이 금 새 굳었다. “…그럼 못 가.” “윽. 아파요. 살살 안아줘요.” “영혼이라면 못 가. 나를 죽이고 데려가 줘.” “…화 낼 거예요. 아파요. 팔 풀어줘요.” “숨 쉬었잖아.” “…농담한 거였어요. 선배가 너무 진지해서요.” “그런 농담 하지 마.” “…….” “알았지? 혜성아. 앞으로는 절대로 떨어져 있지 않을 거다. 그런 농담 하지 마. 알았지?” “선배답지 않아요….” “…….” “어차피 우리는 음악을 이유로 또 떨어지게 될 거예요….” “…….” 이번에는 정말로 옆구리 상처가 으깨질 만치 그가 당겨 안는다. 수페리우스는 삽시간에 숨을 쉴 수 없을 만치 답답해진 현재에 당황해서 그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테레사도 수페리우스가 상처로 아파하는 걸 눈치 챘는지 약간 느슨하게 포옹을 풀어 주었다. “윽. 아파요…. 이런 사람이 어떻게 편지 한 장 제대로 없이, 저를 안 보고 사셨나요.” 이에 잠깐 골몰하던 테레사가 여전히 당당하다는 듯 지지 않고 대답했다. “편지 보냈잖아. 예전에 테오제네스 통해서 에튜드 보냈잖아!” “알아요… 저는 그 때 행복했어요.” “…지금은?” “지금두요.” “…앞으로는?” “앞으로 두요. …테레사.” “…음?” “그런 농담 안 할 게요. 늘 매달리고 흥분하는 건 내 특기였는데… 특기를 뺏어 가면 어떡해요.” “…그럼 어뜩해. 죽은 줄 알았는데…….” “키스도 안 해 줄 거예요?” 태초의 상태로 돌아간 테레사는 어쩐 일인지 이 대목에서도 고민하는 눈치이다. 혜성은 그의 급격한 변화가 낯설었지만 오히려 좋았다. 남자랑 하는 키스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자신의 키스는 값이 아로 새겨진다 라고 떵떵 이던 예전의 테레사는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적어도 수페리우스 앞에서는……. “…남자가 해 주는 건데 괜찮아?” 뭐라 구요? 약간 고민한 흔적대로 테레사는 물었고, 아이는 깔깔깔 소리 내며 웃었다. “…뮤즈는 음악과 영혼에 반하는 거잖아요. 테레사는 제가 사내애라서 이상해요?” “아니!” “…….” “…키스하는 도중에 점점 사라지는 거 아니지? 소설책처럼…….” “테레사!” “하하하… 알았다… 알았어….” 곧 두 사람의 나른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몰래 병실에 놀러왔던 동완이 꽥 소리치며 달아날 만치 하나가 된 둘의 모습은 새벽이 오기까지 떨어지지 않았다. 아뉴스데이편 끝 메일로 '나'님이 보내주신 표지입니다. 고맙습니다. wgreene@naver.com 덧글 20개 엮인글 쓰기 /data20/2006/11/12/39/1-wgreene.jpg@nhn@106401@nhn@1@nhn@468@nhn@628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70~71편 /data20/2006/11/12/39/1-wgreene.jpg@nhn@106401@nhn@1@nhn@468@nhn@628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70~71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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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았다. 언제나처럼 한가로운 병동에서 옆구리의 상처가 얼마나 아물었는지 진료 받고 약을 바른 뒤였다. 이번 주 초부터 양 쪽 팔로 연주가 가능해졌으니 팔에 평생토록 흉터가 남는 들 개의치 않으리라. “오!” 아이는 자신에게 달려오는 붉은 머리칼의 여 학우에게 수줍게 손을 흔들었다. 또래의 소녀는 구텐 탁 이라는 점심 인사를 외치며 순식간에 코앞에 섰다. 할로 할로! 라고 소리치면서도 기쁨으로 상기된 낯은 가을의 영 익은 과일처럼 탐스러운 소녀였다. 그러더니 수페리우스가 좋아할 만한 편지봉투를 건넸다. 수페리우스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네가 이것을 사무동에서 굳이 여기까지 나에게 가져왔느냐 시선으로 물었다. 붉은 머리칼의 소녀는 살며시 웃으며 수페리우스가 당케 라는 말을 끝내는 즉시 가볍게 뺨에 입 맞추고는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수페리우스는 머리칼을 긁적이며 히스의 녹색 별채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문득 뒤를 돌아볼 때마다 자신을 친근하게 쳐다보고 뺨에 입을 맞추고 달아나거나 거하게 인사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아이는 그래서 몰랐다. 뮌헨의 학생들이 자신에게 왜 달리기 경주하듯이 편지를 재빨리 전해 주는지를 알 수 없었다. 뮌헨 학생들은 자신들과 다른 생김새이지만 묘하게 이목을 끄는 아름다운 수페리우스가 마음에 들었다. 어쩐 일인지 그는 뺨에 긴 상처가 거의 아물어 가는 상태이자 어디가 아픈지 모르지만 하루에 한 번씩 뮌헨 병동을 찾아갔다. 학생들은 더 자세히 그를 관찰하고 싶어 했지만 키르혜아이젠 교수 측근들과 사비나 외에는 또래 클래스에서 수페리우스를 만날 수 없기 때문에 늘 아쉬웠다. 하지만 뮌헨 아마데우스 학생들이 수페리우스와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편지가 바로 그러했다. 한국에서 이상하리만치 편지가 자주 오는 수페리우스를 두고 뮌헨 학생들은 재미있는 경주를 시작했다. 그것은 3월 중순에 뮌헨에 온 수페리우스가 약 일주일 간 지내면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누가 먼저 사무동에 달려가서 수페리우스의 편지를 전해 주는지 집중했고 긴장했다. 그것은 그들의 유일한 인사이자 관심 표현이었기 때문에 오늘은 어떤 자가 그 권리를 쟁취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오늘은 라틴어 클래스 우등생이자 피아노과 고학년인 붉은 머리카락의 라라가 쟁취했다. 따라서 경주 내기에 가담한 학생들은 자신들의 돈이나 물건을 라라에게 줄 것이다. 물론 선량한 학생들이 수페리우스에게 호의를 갖았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즐거운 일화를 전혀 모르는 수페리우스는 자신에게 친절하게 구는 학생들이 기분 좋았다. 한 달 동안 지루하게 입원한 뒤 비로소 고대하던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던 날, 한국에 두고 온 인물들에 대한 향수는 증발했었다. 뮌헨 아마데우스에 도착하는 즉시, 바로 키르혜아이젠 교수님을 찾아가서 이론 수업을 받았다. 동완이와 미카엘 선배, 테오제네스, 프란체스코, 쇼너 스타니의 얼굴이 매일 어른거리지 않을까. 테레사가 그리워서 매일 울지 않을까 고민했던 것은 그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싹 사라졌다. 다만 걸리는 게 있다면 한국에서 떠나는 날까지 기어이 못 본 로미오였다. 한 달 입원 중에 찾아오지도 않았어. 어디가 아픈 걸까. 이제 내가 싫은 걸까. 마음을 받아주지 않아서? 혹은 오르페우스 관 폭파 때 일로 내가 저를 싫어할까봐? 그 생각은 자다가도 번쩍 일어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수페리우스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내일이면 있을 음악회의 감미로운 야상곡 선율을 기다리기로 했다. 수페리우스는 한국에서 테레사와 지냈던 것 못지않게 몇 주 전부터 시작된 뮌헨에서의 음악공부가 행복했다. 그것은 내면의 충족이자 자신감의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4월 초가 되면 히스가 얘기해 준 것처럼 곳곳에 노란 서양 민들레가 탐스럽게 피겠지. 뿌리를 내리는 굳건한 힘, 자생하는 노란 의지에의 민들레가 벌써부터 기다려졌다. 하루에 한 번씩은 도착하는 테레사의 편지가 오늘따라 유독 반갑고 애틋했다. 편지, 편지라니? 이게 무슨 소리일까. 테레사가 편지를 잘 보내는 위인이었던가? 전혀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콩 쿨 뒤에 오하이오 주에서 다시 수술을 받을 예정이긴 하지만 아직 시력이 회복된 게 아니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랑으로 단단히 묶인 뒤의 떨어짐은 전과 다른 결과를 나았다. 못 봐도 음악으로 묶인 그들은 이렇게 자연스러운 나날을 살았다. 테오제네스 덕분에 편지를 들을 수 있고 보낼 수 있는 테레사가 한 번 표현하기 시작한 사랑을 그칠 리 만무했다. 물론 혜성이 보내는 긴 편지의 반도 안 되는 짧은 내용이었지만 그래도 수페리우스는 행복했다. 오른손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 왼손으로 건반을 누르면서도 행복했다. 아직은 오른손을 많이 쓰면 안 된다는 의사의 말이 서운하지 않았다. 편지는 또 다른 사랑의 이름이었다. “이게 뭐야.” 코코아를 마시며 편지 봉투를 개봉한 수페리우스는 잔뜩 기대했던 표정을 굳혔다. 이럴 수가. 자신은 어제도 긴긴 내용으로 편지지에 적었었는데, 테레사의 오늘 편지는 ‘잘 하거라’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종이를 팔락거려봤자 ‘잘 하거라’ 외의 글자는 쏟아지지 않았다. “잘 하거라?” 한 장을 꽉 채운 날이 있는가 하면, 딱 세 줄 정도만 적기도 하는 테레사. 그나마 뮌헨의 시간이 앞으로 더 이어지면 그의 편지가 매일 오기나 할까가 의심스러웠다. “히히….” 그래도 그가 끙끙대며 보냈을 흔적이 어른거렸는지 수페리우스는 엷게 웃으며 펜을 쥐었다. 오른팔에 힘이 많이 들어가면 겨우 아물어가는 상처가 말썽이었지만 그래도 수페리우스는 천천히 라도 편지를 완성했다. 그 닥 긴 내용은 아니지만 적어도 테레사보다는 양이 많았다. 그래. 나중에 이걸로 잔소리를 해야겠다. [ 3월 27일 오늘은 오른손으로 조금씩 연주해도 괜찮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편지를 보낸 즉시 연주해 볼 참 이예요. 선배는 잘 지내시나요? 오늘은 선배가 미워서 하나도 보고 싶지 않아요. ‘잘 하거라’ 라는 말만 적힌 편지를 받아서 힘이 나지 않거든요. 사실은 그것도 고마웠지만……. 이곳에 온 지 보름이 지났지만 이상하게 몇 개월을 보낸 기분 이예요. 키르혜아이젠 교수님은 4월 중순까지 미완성곡 다뉴브의 밤을 보정하는 것에 집중하라고 하십니다. 저도 그게 좋다는 생각 이예요. 한국 오르페우스 관의 악기를 또 바꾼다니 의외였어요. 로제리오 교수님이 선배를 꼬신 게 아닐까 추측해 봤습니다. 헤헤. 이제 간단한 독일 인사는 두렵지 않아요. 게다가 히스한테 배운 독일 단어와 라틴어 단어가 상당하기 때문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다 보면, 학생들이나 교수님들이 천천히 얘기할 때 적어도 어떤 주제인지 20% 유추는 가능한 것 같습니다. 제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처음 뮌헨에 왔을 때처럼 낯설지 않으니까 이것도 큰 성과겠지요? 한 달 뒤에 우리가 다시 보겠네요. 지금 편지는 이따가 유지가 사무동에 전해준다고 했어요. 물론 손짓 발짓으로 겨우 알아들은 내용이었지만… 보고 싶어요 테레사. 잘 하거라만 보내시면 이제부터 보고 싶어 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 마지막 줄은 너무 쌀쌀맞았던가? 잠시 골몰하던 혜성이 마지막 줄을 고쳤다. 보고 싶어 하지 않을 예정이었지만 좋아 하는 거 알지요? 라고. 이것도 이상할까? 그러나 편지에 쭉 집중하자니 시간이 아쉬웠다. 아이는 곧 별채에 찾아온 유지에게 편지봉투를 건네고는 따뜻하게 인사했다. 다음날이 되자 사정은 달라졌다. 더 이상 테레사에게 쓸 내용이 없어진 것이다. 하루에 한 번씩 서로에게 편지를 보내기로 약속한 게 후회스러웠다. 심신이 피로할 때는 추억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걸 알았다. 게다가 오늘 테레사의 편지는 내용이 상당했다. 꽃잎을 말려서 보낸다거나 하는 낭만적인 부분은 전혀 없었지만 일상의 내용을 고스란히 담는 테레사는 자신의 방에 컵이 하나 들어오는 것 까지도 상세히 알려줬기 때문이다. [ 어제는 피곤해서 도저히 뭘 적을 수가 없었다. 설마 그것 가지고 서운해 하지 않았겠지? 난 분명히 편지 보냈다. ] 아이는 이 대목에서 하얗게 질렸다. 이럴 수가. 어제 그렇게 적지 말걸. 후회 해 봤자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아이는 피곤을 떨치며 최대한 상냥한 투로 테레사를 위해 편지를 적었다. 피곤 때문인지 적다가도 꾸벅꾸벅 조는 통에 몇 번이나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다음번에 또 긴 시간 헤어질 때는 매일 편지 보내기라는 숙제는 빼야겠다. 안 보내자니 지는 것 같아서 속상했다. 사소한 신경전이 그와 좋아하는 과정에 분명히 있었다. 절대로 질 수 없지. “음… 진짜로 적을 게 없는데…….” 그러나 약속을 깰 수도 없을 뿐더러 저가 먼저 편지는 생각날 때마다 보내자고 말을 바꾸기도 싫었다. 아이는 하는 수 없이 펜을 굴렸다. [ 다음 주 쯤에 히스가 인부를 보낼 거래요. 도배를 새로 하라는데 저는 왜 도배를 새로 해야 되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히스는 이상해요 테레사. ] 너무 히스 얘기만 한 걸까? 곧 펜을 멈춘 혜성이 그 부분을 북 찢어낸 뒤 새 종이에 다시 적기 시작했다. 글을 적는다는 게 이렇게 고된 노동인 줄 전혀 몰랐다. 물론 처음 몇 주는 행복했지만 가끔은 쉬고 싶을 때마저 숙제가 남아 있다는 게 곤란했다. 음악 얘기는 물론이거니와 집안의 장식들까지도 일전에 다 적어버렸다. 자신 역시 낭만적으로 뭔가를 적는 사람이 아니 라는 게 뼈저리게 느껴진 혜성은 긴 숨을 내쉬며 방금 생각난 재미있는 문장을 단숨에 적었다. [ 이대로 가다가는 정작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할 말이 없지 않을까 고민 되요. 어뜩하죠? ] 민들레 편지 4월 초순이 되자 히스의 별채 내부가 신선한 도배로 바뀌었듯이 뮌헨은 노랗고 하얀 물결로 채워졌다. 따뜻한 봄의 시작은 바람도 물도 아닌 꽃이었다. 뮌헨 아마데우스를 상징하는 노란 민들레는 어디서 그렇게 숨어 있었는지 놀랄 만치 길목마다 탐스럽게 피었다. 혜성은 잘 걷다가도 빼곡히 들어선 노란 물결에 압도되어 수도 없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세상은 온통 노란 물결이었다. 아름다운 뮌헨 학생들은 봄 페스티벌 시즌에 맞춰서 꽃이 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어딜 가도 활기찬 미뉴에트가 청각과 피부에 스몄다. 짜릿한 그 때를 어찌 이기랴. 아이는 레슨과 연습, 또 편지 쓸 때를 제외하면 넋을 잃고 낮과 밤의 민들레만 따라다녔다. 모차르트 동상 주변에도 노랗고 하얀 꽃이 만발했다. 세상은 뮌헨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착각마저 일었다. 벌과 나비가 날아들어서 어느 곳을 봐도 벽걸이형 그림처럼 섬세하게 다가왔다. 은은한 꽃향기와 노란 시각 효과가 젊은 뮤즈들, 그리고 수페리우스에게 감동을 주었다. 히스, 히스. 부를수록 정다운 너의 이름! 네 말은 정녕 사실이구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넋이 달아나는 민들레의 향연. 그것들이 만발할 때마다 스치는 히틀러의 향기. 이곳은 천국이구나. 마리아 칼라스와 견줄 만치 대단한 민들레의 나라야. 민들레가 뮌헨을 정벌한 4월 초순, 하루에 두 시간 이상 수면하지 않았던 수페리우스는 드디어 온갖 억측에 휩싸였던 다뉴브의 밤 악장을 완성했다. 유리에게 찾아 달라고 했던 다뉴브의 밤, 하지만 나의 시련과 닮았던 테레사의 시련이니만치 비슷했던 악장이 있어서 나를 아프게 했던 다뉴브의 밤, 모든 악장이 완성될 때의 희열은 테레사와 포옹한 것만치 섬세하고 짜릿했다. 다뉴브의 밤을 시작으로 기쁨은 쉬지 않고 쏟아졌다. 오늘이 그러했다. 뜻밖의 손님이 뮌헨에까지 찾아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민들레꽃이 한창인 일반인을 위한 산책로에, 한국에서 손님이 와서 수페리우스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소식을 전한 사비나는 레슨 중이던 키르혜아이젠 교수님께 대신 양해를 구하고는 수페리우스를 밖으로 풀어주었다. “수페리우스! 뛰면 안 된다! 상처가-” “괜찮아요!” 한국에서 먼 곳까지 온 손님은 다름 아닌 이민우, 수페리우스의 로미오였다. 테레사, 테레사. 오늘 편지에는 할 말이 굉장히 많을 것 같아요. 아이는 날개를 단 것처럼 단숨에 오르페우스 관 밖으로 달려 나갔다. 중간 중간 상처들이 욱신거렸지만 속도는 전혀 늦춰지지 않았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헤이 수페리우스! 테레사의 편지 건으로 안면을 튼 학생들이 가끔 수페리우스를 알아보고는 의기양양한 투로 팔을 저었다. 아니면 다자고자 껴안거나 뺨을 부볐다. 작고 하얀 한국의 수페리우스가 그들은 신선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자신들의 히틀러가 인정한 수페리우스를 독차지 하고 싶은 게 분명했다. 아이는 멀리서 자신을 기다리는 까만 머리칼을 보는 즉시 걸음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쩡 얼어붙은 내면이 녹았다. 물처럼 흘렀다. 한국에로의 향수가 은은하게 스쳤다. 노란 민들레길 사이에 서있는 장정한 저 청년은 기억 속의 로미오가 확실했다. 새삼 눈물이 차올랐던지 수페리우스는 뺨의 밴드를 무의식중에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걸었다. 휘이-- 바람이 불 때마다 간지러운 봄과 노란 향이 주변처럼 화사하게 퍼졌다. 길의 끝에서 로미오는 수페리우스의 걸음을 눈치 챘는지 돌아보았다. 뮌헨까지 나를 보기 위해 날아와 준 정다운 인물이 있다. 한국에서는 만나려고 애를 써 봐도 멀게 느껴졌던 그 인물이 저 혼자 꿋꿋하게 일어서서 오늘에 와 주었다. “…….” 수페리우스는 조용히 오른팔을 내밀었다. 팔목부터 팔꿈치까지 죽 그어진 상처는 얇은 붕대와 정복으로 가려져서 괜찮았다. 왼 뺨의 상처를 보고 로미오가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지만 자신이 괜찮듯이 그도 괜찮으리라 믿는다. “……어…….” “…….” “어어…?” “…….” 그럴싸하게 소설책처럼 악수하려던 기대보다 더 한 것이 펼쳐졌다. 수페리우스의 작은 손을 유심히 내려 보던 로미오가 별안간 포옹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랑 보다는 반가움 이라는 단어와 가까운 것이라서 아이는 잠깐 굳었던 몸을 천천히 풀며 미소 지었다. 큰 키의 로미오는 한층 성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아이는 기특한 자신의 후배의 품에서 스스럼없이 팔을 올려서 넓은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굉장히 오랜만이다… 미오야….” “…….”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대답 없이 약하게 미동하던 로미오는 한숨처럼 진한 어절을 꺼냈다. 그는 반가움과 지난 시련들이 한꺼번에 터져서 감정을 억제하지 못 해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의 눈물은 수페리우스의 마음조차 뒤흔들어서 둘은 잠시지만 눈시울이 그렁그렁해진 채로 가만히 껴안았다. “예전의 나와 비슷해질 때를 기다렸어요.” “…….” “그래서 늦었습니다.” “…….” “나의 큰 바위 얼굴….” “…그래….” “줄리엣… 이상한 닭….” “하하… 그래… 그래… 우리 울보 오리도 오랜만이다.” “!” 오리 라는 구절에서 발끈한 미오가 번쩍 수페리우스를 들어올렸다. 이에 놀란 수페리우스가 옆구리가 아팠는지 비명을 질렀다. 힘만 센 녀석! 아이가 윽박지를 때가 되어서야 아차 싶었는지 미오는 되레 화를 내며 저의 집인 양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훈훈한 기운이 둘에게 아로새겨지는 현재, 수페리우스는 당장 쫒아가서 로미오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많이 힘들었는데… 선배 보니까 괜찮아졌어요.” “…….” “나는 수페리우스를 보면 이상하게 힘이 나니까요.” “…….” 그의 아픔이 어땠을지 수페리우스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우지끈- 이마가 울린다. 아이는 양 쪽 눈을 괴롭게 감았다. 잠시 잊었던 한국에서의 아픔이 한꺼번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유리의 편지를 시작으로 오르페우스 관이 폭발했고, 샤우트 녀석들이 공격하는 통에 난리가 났었지. 거대한 십자가가 쓰러지는 바람에 동완이도 다쳤었고, 로미오는 반 아마데우스 기지 감옥에 갇혔었다. 그리고 테레사가 나타났는데… 모세도… …모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겪었던 공허함과의 사투, 그 저릿한 나날을 과연 평생에 걸쳐 나는 잊을 수 있을까. 미소로 응수하면서도 수페리우스는 결국 작게 눈물을 보였다. 둘은 곧 히스의 별채로 나란히 걸었다. 길목마다 지나치는 아름다운 독일 학생들이 수페리우스에게 말을 붙였고, 아이도 짧은 인사말을 건넸다. 로미오는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독일 아마데우스에는 놀라지 않았지만, 마리아 칼라스의 우아함과 비슷하면서도 색이 다른 노란 민들레에 큰 감명 받은 눈치였다. 말없이 걸을 때조차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입 밖으로 신음소리를 내는 로미오를 한두 번 올려보면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굉장하네요.” “그렇지? 작은 디딤대조차 민들레가 자생하고 있어. 여긴 자생의 원천지야. 한국보다는 확실히 자생력이 뛰어난 학생들이 많다는 증거처럼 꽃이 만발해 있어….” “…….” “이제 곧 한국 아마데우스에도 일반인의 길이 넓어져서 아름다운 장미로 꽉 찰 거야. 그리고 연주회가 우리 식으로 종종 생기지 않을까….” “!” “왜?” “아니에요.” 작은 것에도 저의 식으로 해석하고 그리운 한국을 잊지 않는 수페리우스가 로미오는 감동적이면서도 충격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커다란 부분보다는 수페리우스의 뺨의 상처와 몸이 걱정이었다. 둘은 상처와 관련된 부분은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그 부분이 생각날 때마다 민들레를 떠들었다.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건물들을 지나 은빛 호수를 걸었다. 큰 봄바람이 열정을 쥐고 둘을 스쳤다. 별채동의 입구를 지날 때, 로미오가 때마침 생각난 것을 떠들었다. “유리 라는 애를 아세요? 한국 아마데우스 가십 란에는 최근 붙여졌는데…….” “유리?” 뜻밖의 만남처럼 별안간 터지는 이름 역시 의외의 몫이었다. 혜성은 크게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반문했다. 유리? 그 애가 왜? “샤우트에 갔을 때 저를 노려보던 예쁘게 생긴 애였는데… 가십에 붙여지고 얼마 안 되서 로제리오 교수님을 뵌다면서 아마데우스에 왔었거든요. 중간에 만났지요.” “어째서?” 가십, 가십이라니? 가십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수페리우스는 겪어봐서 알았다. 그곳에 오르지 못한 숱한 인재들이 억화 심정을 어쩌지 못해서 반기를 들었던 혁명조차 생생했다. 불현듯 소중한 그녀임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불안한 감정이 휙 스쳤다. 왜 그럴까? 또 그녀에게 부탁했던 악보와, 우연찮게 샤우트로부터 소식을 전해 주었던 그녀가 동시에 생각났다. 표정이 모호해진 혜성이 히스의 별채 문을 열고 들어갈 때가 되어서야 로미오는 말을 잇는다. “유리라는 애가… 선배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던데…….” “아…….” “어쨌든.” “…….” 응접실에 편하게 앉으며 기지개를 켠 뒤, 로미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십을 회상했다. 그럴수록 이상하게 혜성의 기분은 좋았다가도 불유쾌해지고 여러 가지로 들끓었다. 이상한 노릇이다. “이례적인 일이랍니다. 작곡에 굉장한 신동이래요. 이번 신입생 선발에서 최상위로 뽑혀서 봄 콩 쿨 때 유리의 곡이 연주된다고 하고, 가십의 첫 장을 장식했으니까 말은 다 한 거지요.” “…….” “5학년 이상 선배들은 죄다 예전의 수페리우스를 보는 것 같다고 합니다. 악기에는 영 소질이 없는 대신에 작곡에 뛰어나면서 가십을 차지했으니까요.” “…….” “소문에 따르자면 그 곡은 그녀의 시련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대단한 신입생이지요?” “…그렇지….” 좋은 소식이 아닌가요? 로미오의 시선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혜성은 대답 대신 코코아를 내밀며 그의 옆에 앉았다. 작은 몸이 앉자 건장한 사내의 팔이 어깨에 둘러진다. 혜성은 그를 꾸짖으려다가 여기까지 찾아온 정성이 기특해서 가만히 놔두었다. 둘이 또 조용해지자 테라스 밖에서 은은한 꽃향기가 실려 왔다. 향기는 조금씩 멀어졌던 둘의 거리를 좁혀주었으며 데면데면해진 말투를 정화시켰다. “사랑만 갖고는 살 수 없다고 했던 말 기억해요?” “…….” 정말은 하고 싶었던 얘기를 꺼내며 로미오는 시선을 흐렸다. 수페리우스는 가만히 그의 소리를 경청하며 작게 웃었다. “테레사와 사랑, 음악. 나로서는 이해 못 할 그 때를 기억해요?” “…….” “지금 또 테레사랑 떨어져 있지만 나는 봤습니다. 한국에서 둘이 내내 붙어 다니면서 연인처럼 지낸 것을. 어떻게 변한 거지요?” 아이는 로미오의 놀리는 듯 한 쓴 소리에 잠시 놀랐지만 곧 편하게 웃으며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대답을 했다. “달라진 건 많지 않아. 틀은 달라지지 않아.” “…….” “다만 사랑이 커지고 커져서 이제 가끔 음악을 이길 뿐이지.” 오,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그러고 보니 편지에 적은 기억이 없어. 그로인해 내가 얼마나 충만한지조차 적지를 못했어. 짧은 한 줄을 대신해서 일상만 지루하게 보냈지. 나 없는 당신을 상상할 수 없듯이, 나도 당신 없는 나는 없는 걸요. 사랑해요. 테레사, 오늘 편지는 그것밖에 없을 거예요. “최근에 그런데 테레사는 몇 번…….” “응?” “아니… 아닙니다.” 수페리우스의 눈동자는 대단한 확신으로 차올라 있었다. 그래서 로미오는 최근의 테레사에 대한 어떤 부분을 얘기하려던 것을 관두었다. 지금의 수페리우스의 열정과 믿음을 억측만으로 건드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민들레 하니까 생각나는 사람 히스클리프. 히틀러. 해달이가 그려준 그림입니다. 당신의 상상속의 히틀러는 어떠신지요.^^ wgreene@naver.com 언제나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우리는 마지막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간다는 것을... 왜 벌써부터 아쉬워서 나는... 덧글 19개 엮인글 쓰기 /data20/2006/11/15/238/히스-wgreene.jpg@nhn@140239@nhn@1@nhn@429@nhn@515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72-1(민들레편지) /data20/2006/11/15/238/히스-wgreene.jpg@nhn@140239@nhn@1@nhn@429@nhn@515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72-1(민들레편지)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72-2편 ▼ 다음글 - 2악장 70~71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72-2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11/16 22:29 http://blog.naver.com/wgreene/110010977260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1116 72-2편 업데) Amadeus 음악 : You Raise Me Up - Josh Groban(재생버튼클릭) You Raise Me Up-Josh G.. 네 스스로가 얼마나 ‘보배’인지. 너는. 알아야 한다. 2악장 72-2편 뮌헨 공항까지 로미오를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즉시 수페리우스는 편지지를 찾았다. 그러나 후배가 타지까지 날아왔다는 기쁨과, 막 헤어졌으나 차분할 수 없는 설렘이 가로막았다. 수페리우스는 별 수 없이 히스의 별채를 돌아다니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로미오에게 테레사의 안부를 물어보지 못한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것은 부러 생략한 것과 같았다. 자신은 매일 그와 글자로 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미오에게 테레사의 안부를 묻는다는 것은 마치 반칙을 하는 기분이어서 수페리우스는 그러지 않기로 한 것이다. 덕분에 테레사에게 할 말은 더욱 많아졌다. 안부를 물어야겠지. 그 뒤에 미오가 뮌헨에서 봤던 민들레를 다시 자랑하리라. 그 때 사비나 교수가 별채로 찾아왔다. 아이는 부리나케 현관으로 달려가서 그녀가 내미는 민들레꽃 다발을 받았다. “으와!” 품에 한가득 안겨오는 꽃은 밖의 향기를 담고 있었다. 줄기 채 뽑혔음에도 불구하고 싱싱한 민들레는 밖의 수려함에 뒤지지 않았다. 민들레 못지않게 어쩐지 아름다워 보이는 사비나가 수페리우스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꽃을 들고 이리 저리 돌아다니며 어디에 꽂을까 고민하던 수페리우스가 겸연쩍은 낯으로 실실 웃으며 사비나와 시선을 교차했다. 그간 자신을 찾아올 때 사적인 이유가 거의 없던 사비나가 웬일일까. 지금의 그녀는 음악 이야기도, 콩 쿨 이야기도 전혀 꺼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사이좋게 로미오가 돌연 찾아왔던 아까를 떠들며 저녁 식사를 했다. 가벼운 빵과 스프가 전부였지만 이상하리만치 배가 부르고 평화로웠다. 후식으로 코코아를 내밀자 사비나는 웃으며 받아주었다. 아이가 코코아만 잘 마시는 점을 진즉부터 알고 있는 히스가 자신의 별채에 대량 준비해둔 탓이었다. 코코아를 대신 할 만 한 음료는 히스가 좋아하는 우유밖에 없었기 때문에 혜성은 냉장고 문을 몇 번이고 열고 닫으며 난감해 했다. 하지만 다른 때 같으면 농담조라도 뭐라고 했을 사비나는 유유히 음료를 마시며 미소 지었다. 오, 사비나 교수님께 뭔가 즐거운 일이 생기신 걸까? 아이도 흡족한 표정으로 그녀와 나란히 응접실에 마주앉아서 진한 코코아를 마셨다. 그러고 보니 봄이었다. 추위가 가신 뒤 느긋해지는 마음처럼 세상은 풍요로웠다. 벌거벗은 채 뛰놀아도 피부가 부드러운 계절이라서 그럴까. 이 행복은 영원할거라며 저절로 믿게 된다. 문득 테라스 밖에 펼쳐진 노란 색채를 응시하던 사비나가 무심코 입을 열었다. “요새 테레사와 편지를 많이 주고받는가 보구나….” “네…….” “애들이 그래서 즐거워하더구나.” “?” “편지를 쓰고 싶지만 지금 나는 말 할 시간밖에 없는 걸…?” “교수…님?” 문득 말을 멈추고 골몰하던 사비나는 다시 얘기를 시작했다. “테레사를 많이 아껴 주어라.” “…네…?” 민들레의 향기와 함께 시작 된 그녀의 움직이는 편지를 두고 수페리우스는 경악했다. 테레사? 수페리우스는 별안간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홍당무가 되어서 다른 쪽을 응시했다. 사비나의 음성은 유독 부드러우면서도 다른 때와 다르게 약간의 그리움과 또 약간의 슬픔마저도 담고 있었다. 이상한 노릇이다. 가벼운 대화인데 어째서? “테레사가 너를 아껴 준 것의 반의 반 만큼만 실천해도 성공일 걸…?” “그게 무슨…….” “사랑은 실천이 중요하거든.” “!” 그 때 봄의 벼락이 떨어져서 아이의 심장을 반으로 갈라놓았다. 창백해진 수페리우스를 지그시 응시하는 사비나의 눈은 정확한 것만 꺼낸다. 그녀는 충분히 알고 있는 것이다. 테레사와 수페리우스의 영적인 사랑, 아름답지만 훤하게 내놓지 못하는 빛을. 요지부동으로 뛰기 시작하는 심장 소리를 생생히 전해 들으며 수페리우스는 뭐라고 반문하려다가 관두었다. 어차피 사비나는 아이를 추궁하기 위해 꺼낸 말이 아니었음을 다음 말로 증명했기 때문이다. “놀랄 것 없다. 테레사는 외형의 아름다움에 도취되는 인물이 아니고, 마음으로부터 쉽게 우러나는 정을 주는 인물이 아니거든. 너의 다른 쪽 뺨에 물 사마귀가 나거나 흉터가 또 생겨도 그 애는 대수롭지 않게 여길 거야. 그 애는 외형으로 사람의 됨됨이를 따지지 않는다. 겉으로는 낭만적이고 그래서 정치적이지만 너는 알지 않더냐. 그 애도 몰랐던 외로움과 절망을. 마냥 좋아하는 마음만 갖고 있어서 남들 앞에서 보이는 연극과는 달리 정작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표현이 예상과 다르다는 것을.” “!” “너를 만난 뒤 테레사가 자신의 음악을 세상에 내놓았다. 맹인 협회에 기부하는 양도 늘었지. 반 아마데우스 가십을 읽었을 때 나는 너를 생각했단다. 수페리우스… 그에게 너는 빛이다. 그걸 잊지 말아라.” “교수님… 어째서…….” 어째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떨리는 입술을 대신하여 마음이 묻는다. “네가 만약 여자애였다면 테레사는 너와 약혼했겠지. 그리고 세계는 너와 테레사의 2세를 벌써부터 기다리며 샴페인을 터뜨렸겠지만, 오히려 그게 아니기 때문에 내 주관으로는 너희 둘이 떨어지지 않는 것 같다.” “…….” 오늘의 그녀는 필요 이상의 말을, 긴 시간을 두고 해도 좋을 격려를 한꺼번에 꺼내고 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나 눈치 챌 만한 변화였다. 테레사가 변했다는 것 즈음은 혜성 역시 알고 있었다. 그가 에튜드 집을 펼쳤을 때? 혹은 학생재판 때 스릴 있게 나타났을 때? 반 아마데우스를 이끌었을 때? 어쨌든 그가 변했다는 것은 아마데우스 학생을 비롯한 세계 음악인이라면 다 알 만 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비나가 자세히 설명해주고 유독 쏟아내듯 말을 하는 지금 만큼의 충격은 주지 못했다. 수페리우스는 초조함을 감추기 위해 두 잔째의 코코아를 아주 쓰게 만들었다. “테레사는 너를 보물이라고 했다.” “……!” 그럴수록 사비나의 진지한 음성은 화살처럼 날아와서 청각을 뚫었다. “테레사는 너를 전부라고 했지.” “…….” 선량한 독화살이 가슴을 뚫었다. 왜 저런 이야기를 갑자기 꺼내는지가 관건이 아니었다. 코너에 몰린 쥐가 된 수페리우스는 진지하면서도 칼 같은 그녀가 낯설었지만 그것 또한 관건이 아니었다. 흔들리는 동공을 향해 불어오는 지혜의 음성이 있다. “너는 그런 사람을 받아 줄 수 있니, 수페리우스.” “…….” 그래. 중요한 것은 테레사와 자신을 누구보다 꿰뚫고 있는 사비나 그녀 자체였다. 누구의 변화가 아니라 지금이었다. 둥- 둥- 내면을 타고 기나긴 북소리가 울렸다. 수페리우스는 현기증을 느꼈는지 이마를 짚으며 오래도록 바닥을 노려보았다. 나를 전부라고 하는 테레사, 그런 테레사를 어릴 적부터 알고 이해하는 사비나 교수님.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 옳을까. “잘 모르겠다는 대답을 하면 회초리로 때릴 거야.” “…….” 수페리우스는 대답을 해야 한다고 마음으로부터 울먹였다. 그러나 입술은 쉬이 열리지 않았다. 분명히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면서도 쉽게 언어로 표현되지 않았다. 감히 어떤 미사여구도 허용되지 않았다. 몇 분이 지나자 사비나가 비로소 엷게 웃으며 식은 코코아를 마셨다. 그리고 어머니와 같은 어절로 분명하게 하지만 상냥하게 입을 열었다.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나 보구나.” “…….” 가끔은 나조차도 모를 마음이라는 게 있다. 정답을 알면서도 쉬이 열리지 않는 입술을 원망할 때가 있다. 가슴을 조이는 푸르른 정경이 어울리지 않다며 뺨을 돌리기도 한다. 형상을 부정하며 사차원에 빠지듯 나를 두고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다. 지금이 그러했다. 지긋지긋했던 절망과의 사투를 뮌헨에서 떨치지 않았던가. 내면의 정해진 결계는 작은 아픔이라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 때 타인으로부터 들리는 요구와 힐책, 혹은 몸보다 무거운 체중은 내 것으로 흡수되지 않는다. 수페리우스는 딱딱하게 선 채로 숨만 내쉬었지만 사비나는 오히려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래… 그거면 됐다. 오히려 쉽게 하는 대답은 가벼울지도 모르니 천천히 네 자신과 대화 해 봐.” 교수님, 사비나 교수님? 아이는 오늘따라 당혹스런 그녀가 염려되었다. 어디 아프신 게 아닐까? 아니면 나에게 지적할 게 있기 때문에 지금을 먼저 꺼내신 게 아닐까? 어쩌면 테레사를 평생 그리워하기로 결심한 못난 나를 다른 쪽으로 비꼬시려는 걸까? 아니야. 그러실 분이 아니다. “예쁘지?” “예?” “꽃이 참 예쁘지? 탐스러운 작은 잎이 자존심 강한 척 구는 게 가끔은 이자벨로 보이고, 부드러운 흙을 뚫고 나와 자생할 때는 너를 보는 것 같아.” “예….” 남자의 사랑이라는 주제 때문에 약간 어색해진 분위기를 전환 하려는지 사비나는 그 뒤로 줄곧 즐거운 내용을 꺼냈다. 뮌헨에는 페스티벌이 상당한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가 줬던 열쇠는 아직 간직하고 있느냐 등등 사비나는 평소와 다르게 열심히 즐거운 것을 알려주었다. 수페리우스 역시 언제 시무룩했었냐는 듯 금 새 상기되어 그녀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감탄사를 꺼냈다. 둘의 이야기가 무르익어갈 때 약간 열린 테라스 창으로 봄바람이 부드럽게 밀려왔다. 넓은 응접실의 소파에 앉은 사비나와 바닥에 앉아서 그녀를 올려보는 수페리우스의 정다움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애틋했다. “5학년이 되면 수페리우스, 너도 오케스트라 룸에 가입하겠지?” “룸? 오케스트라 룸이요?” 자신을 편하게 대해주는 교수님이니만큼 마음이 들뜬 수페리우스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작은 공을 발로 툭툭 차던 도중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무심코 살펴봐도 이 별채에는 혼자 지내다가 심심하면 갖고 놀라는 뜻으로 수페리우스를 위해 사다 놓은 히스의 흔적이 상당했다. 꼬마 아이나 즐거워 할 작은 공을 사비나도 툭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국에서도 만들고, 콩 쿨이나 음악회 뒤의 파티 같은 곳에서 만난 다른 지역의 아마데우스 친구들이랑 만들어도 좋고… 아마 교수들보다 그들에게서 얻는 점이 많을 거다.” 들어도 또 들어도 질리지 않는 포근한 음성이 있다. 자신이 앉은 쪽으로 공을 차는 사비나가 좋아서 수페리우스는 함지막한 웃음을 지으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에이~ 사비나 교수님. 그런 건 제가 5학년이 된 다음에 알려주셔도 좋은 거잖아요.” “…….” “?” 당연하다는 투로 가볍게 대꾸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비나는 이 부분에서 정지했다. 작은 공으로 오락가락 재미있던 놀이도 짧게 끝났다. 덜컥- 이유 없이 심장이 떨어졌다. 봄바람이 피부에 느껴지지 않을 때, 수페리우스는 괜스레 염려하는 내면을 꾸짖으며 그녀가 또 다른 즐거운 내용을 꺼낼 때를 기다렸다. 하지만 즐거운 농담은 사비나로부터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네가 5학년이 되기 전에 아마데우스를 떠난단다, 아름다운 러시아 인형아.” “!” 그 대신 청천 벽력같은 음성이 봄을 겨울보다 더 한 힘을 앞세워 치고 들어왔다. 순간 시야가 까맣게 흩어졌다. 낮도 밤도 없이 오로지 암흑으로 수놓는 세상에서 수페리우스는 테레사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착각이 아닐 것이다. 테레사였어도 사비나의 지금 말에 경직 했을테니. “내 나이 마흔이 지나도록 음악 외에는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어. 세상에 그런 사람이 아주 많단다. 그런 면에서 보면 너와 테레사는 행복한 사람이지.”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음악 때문에 우리는 많이 괴로 웠어요… 서로 좋아한다는 걸 알면서도 음악으로 풀어줘야 했어요… 그건 아주 끔찍하지만 당연한 행동 이었어요….” 아이는 세차게 도라 질을 치며 부정하면서도 자신이 정확히 어떤 내용을 떠드는지 몰랐다. “그랬니….” 그녀가 너그럽게 웃어서야 뇌가 움직였다. 수페리우스는 황급히 떨리는 음성을 열었다. “죄송해요… 제가 지금 무슨 소리를… 감히 무슨 말을…….” “오… 귀여운 아이야. 괜찮다. 사랑에는 시험처럼 나이 자격을 따지면 안 되거든.” “…….” 두근, 두근, 두근, 청각을 스치는 심장 소리는 사비나의 음성보다도 컸다. 동공이 좁아질 때, 기다렸다는 듯 부드러운 사비나의 다음 말이 전해졌다. “나는 곧 결혼해.” “!” 오, 하느님. 아이는 귀를 막으려 했지만 자신의 유치한 행동이 상상만으로도 싫어서 관두었다. 어머니와 같은 그녀가 결혼한다는 사실에 놀라서? 아니다. 수페리우스는 테레사와는 별개로 곧은 기둥인 사비나와 헤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하느님을 절로 소리쳤다. 하느님, 하느님. “만약 스무 살에 내 넋을 흔들었던 그와 결혼했다면 지금 너와 비슷한 나이의 자식이 있었겠지.” “교수님…….” 문득 젊은 시절의 추억을 상기하는지 사비나의 눈망울이 짙은 안개를 헤치듯 총명하게 빛났다. 수페리우스는 그 부분에서 그녀를 막을 무기가 있다 한 들 쥘 수 없음을 알았다. 그녀의 행복이 어떤 크기일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와 나도 음악 때문에 헤어 졌었단다… 이 부분은 잘 공감하겠구나.” “!” 자신보다 더 알아주는 지혜로운 눈빛이 다시 스치자 마음은 또 불안해졌다. 당연히 존재하리라 여겼던 것이 내미는 상실은 가히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마땅히 던질 대답이라는 게 없었다. 웃지도 울지도 않는 무색의 표정은 저 쪽 모차르트 동상과 견줄 만치 굳었다. “각자의 세계가 분명해서 결혼하면 틀림없이 어긋날 게 훤했지. 우리는 그렇게 두려웠단다. 젊기 때문에 야심이 많았어. 양보 할 줄을 몰랐지.” “…….” “너는 나처럼 어리석게 이십년을 보내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사랑은 기적처럼 다가오는 법이다. 그러나 마법사가 휘두르는 지팡이처럼 단숨에 사라지기도 하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죄다 그런 식이지만 사랑은 특히나 더……. 죽는 날까지 음악은 할 수 있지만 사랑은 놓치면 없어지기도 해. 나는 그것을 그와 헤어지고 나이 들면서 차차 깨달았단다.” “…….” “스무 살 때의 그도 많이 변했지만 그 닥 늙지 않았어. 그가 프로 포즈를 했고, 나는 받아들였다.” “…….” 사비나는 부러 수페리우스를 내려 보지 않았다. 그녀의 열정과 인생의 순환이 다른 바람을 택할 때, 지켜보는 자로서 어떤 기분일지 사비나는 알기 때문에 꿋꿋하게 이야기를 해 나갔다. 그 대신 자신의 품에 안겨오는 아이를 정성스레 포옹해 주었다. 그것이 사비나로서 최선의 친절이리라. “교수직은 둘 다 관두기로 했다. 그 대신 먼 시골로 가서 함께 작은 음악학원을 차리기로 했어. 근사하지?” “흐읍….” 품 안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수페리우스는 알을 반 정도만 깨고 나온 새처럼 춥고 서러워 보였다. 사비나는 아이를 포근히 감싸주며 잠깐 동안 말을 멈추더니 곧 조용히 입을 열었다. “죽을 때까지 작은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음악을 가르칠 거란다.” “…흡. ……흡. ……흐읍….” “언제든지 내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 와도 돼. 어차피 결혼식은 콩 쿨 뒤에 한국 아마데우스 성당에서 치룰 예정이니까.” “아아….” 작은 머리에 입을 맞춰주며 사비나는 비로소 자신에게 매달리는 인영이 보였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수페리우스….” “축하… 드립니다… 교수님… 사비나 교수니임… 흐으….” “…….” 가십보다 빠르게 당사자로부터 듣는 소식은, 수페리우스가 담았던 추억의 여러 가지 상자를 열리게 했다. 뜨거웠던 열정의 시절과, 가시밭길의 밑바닥에서도 들렸던 풍부한 나날이, 곧 다가올 이별 앞에서 선물처럼 열린다. 평소에는 쉬이 스치지도 않던 것이 하필이면 가장 아찔할 때 차례대로 열리는 것이다. 그것 또한 무지한 사람에게만 진행되는 운명의 바퀴일까. 『 너는 박자감각이 둔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 다른 교수들이 침묵할 때, 테레사의 수페리우스라는 점에 전혀 흔들리지 않고 지적해주셨던 입술을 기억한다. 『 중요한 것은, 사람의 의지라는 것이다. 』 애송이의 몸으로 여러 번 쓰러질 때마다 휘두르셨던 채찍을 기억한다. 『 네 스스로가 얼마나 ‘보배’인지. 너는. 알아야 한다. 』 테레사마저 멀어졌던 그 때, 단 한 번이지만 영원토록 기억될 문장을 꺼내주신 입술을 기억한다. 『 영원히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아. 여기도 네가 있다면 빛이 될 수 있어. 그러니 굳이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다, 수페리우스. 여기 있어도 괜찮다. 너는 괜찮은 거야. 세상 모든 것은 보배이니까. 』 밑바닥의 룸펜에 찾아오셨던 진주보다 귀한 음성을, 내 몸이 잊을 때도 영혼은 기억한다. 모두가 나를 포기했을 때 테레사와 마찬가지로 믿어 주셨던 분을, 보내야 한다. 규칙적으로 바쁜 일정으로 쪼개며 룸펜에 찾아오셨던 사비나 교수님을, 그 때 그녀가 건네주었던 민우의 열쇠를, 나의 투정을 이해해 주시며 기다리겠노라 안아주신 분을, 보내야 한다. “교수님이 아니었다면… 아니었다면 저는… 으윽… 흐윽…흑….” “…….” 어쩌면 룸펜에서 지냈던 무렵 나를 가장 든든하게 했을 이유를, 보내야 하는 것이다. “흐윽… 흑… …흑…….” “순간을 소중히 간직해… 나는 테레사에게도 너를 소중히 하라고 표현하라고 최근에 지적했지…. 영원한 행복이란 없다. 영원한 사랑이란 것도 없다. 그러나 신은 인간에게 그것을 지킬 수 있는 감성과 지혜를 주셨지.” 이토록 빛이신 아름다운 분을, 보내야 한다. “지켜라. 너희는 할 수 있다. 젊은 날의 과오로 서로를 잘라내지 마….” 당신의 떨리는 음성처럼 제자의 마음 또한 떨리는 것을. 수려한 풍광을 그려봤자 온통 수묵화로 바뀌는 현재에, 차츰 다가올 이별을 준비하라니. “그리고… 울지 마라… 너는 나의 자랑스러운 제자란다… 하지만 러시아 인형은 울지 말아라……. 이렇게 얘기 해 줄 날이 언제일 지 날짜를 세고 있었지… 그게 오늘일 줄은 나도 몰랐다. 어쩌면 저 민들레꽃은 알았을지도….” “흐윽… 흑… 흑….” “내일부터 다시 레슨에 박차를 가하자 꾸나… 그러니 오늘은 같이 울자. 정작 이별할 때 우리는 기쁘기만 할 거다… 수페리우스. 보름 후면 한국에 같이 가야지… 그렇지…?” “……흐으으….” 사비나의 온 몸이 천천히 숙여지며 둥글게 아이를 감쌌다. 아직 배울 게 너무 많아요. 교수님이 아니면 안 되는 앎의 욕구가 그 순간이 너무 많아요. 혜성은 자신의 눈물이 멎을 때까지 고개를 올리지 않았다. 몸을 감싸주는 사비나의 팔이 떨리고 있음을 충분히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 역시 울고 있었다. 진정으로 제자를 위해 헌신하신 아름다운 중년의 교수는 어쩌면 수페리우스보다 더 많이 더 많은 시간 동안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겠다. 그 누구도 둘에게 함부로 지껄이지 않았다. 꽃도 향기도 감히 입을 벌리지 않았다. 다만, 지평선 끝에서 불어오는 담홍색의 저녁 바람만이 하나로 뭉쳐있는 둘을 애처로이 스치고 또 스칠 뿐이었다. “…….” 사비나가 돌아간 뒤, 수페리우스는 묘한 오늘을 천천히 돌이켜보았다. 그립다 못해 궁금해서 걱정되었던 로미오와의 재회는 지금도 꿈을 꾼 기분을 주었다. 그리고, 사비나 교수님의 민들레 꽃다발, 그녀의 결혼과 앞으로의 이별 소식은 차라리 꿈이길 바란다. 진심으로 행복을 빌어주자니 미안하고 고맙고 놓치기 싫은 어린 아이 같은 감정이 자꾸만 치솟아서 괴로웠다. 하지만 진정한 이별이란 세상에 없다. 오래 전 뮌헨에서 히스와 이별할 때, 영원히 못 만날 것처럼 아팠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몇 번이나 다시 만나지 않았던가. 긴 시간 떨어졌던 테레사와 요즈음 훨씬 가까워지질 않았던가. 하지만 그들은 아마데우스 울타리에서 함께 하는 것을……! 멍하니 허공을 쳐다볼 무렵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서 다시 뺨이 젖었다. 결국 수페리우스는 긴 시간 홀로 앉아 있다가 짙은 밤이 찾아올 무렵 조용히 펜을 쥐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건반을 먼저 찾았겠지만 지금처럼 테레사와의 대화가 절실 할 때, 음률은 귀를 스치지 않을 테니. [ 테레사. 오늘은 할 말이 굉장히 많아요. 테오제네스에게 미리 차라도 대접하는 게 나을 거예요……. ] 깊은 밤, 별채 안쪽에서는 약간의 흐느끼는 소리와 규칙적인 펜 소리가 끊임없이 퍼져 나왔다. 마지막으로 편지 봉투를 닫을 무렵, 순간 저 혼자 소스라치게 놀란 수페리우스가 뒤뚱대며 응접실로 나오더니 민들레 꽃다발 중 몇 송이를 뽑았다. 아이는 소중하게 감싸고 돌아와서 기도하듯 경건한 자세로 노란 꽃잎을 봉투에 담았다. 세상 유일한 마리아 칼라스를 향하여. 민들레 편지 편 끝 wgreene@naver.com 짧은 휴식은 끝입니다.(휴식이 아닌가요? ^^) 각지 뮤즈들이 한국 아마데우스 콩 쿨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제 곧 시작됩니다.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행복하세요. ^^ 그리고, 수험생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덧글 19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72-2편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72-2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아마데우스 콩쿠르 페스티벌 ▼ 다음글 - 2악장 72-1(민들레편지)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아마데우스 콩쿠르 페스티벌 아마데우스 2악장 2006/11/17 21:25 http://blog.naver.com/wgreene/110011016054 대 아마데우스 콩쿠르 페스티벌. "오늘, 모두의 감동의 태어난다." 협찬 및 후원 : 런던 아마데우스 재단 소프라노 에스더 에빈게와 카운터테너 피터 드 그루트 초청. 런던 합창단과 히스클리프 폰 뤼겐부르크, 유지 신의 참가. 1월 각국 콩쿠르심사를 거친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각자 분야의 뮤즈들의 도약. 젊은 뮤즈들의 열정과 눈부신 경쟁은 하늘의 신도 막을 수 없다. 5월 넷째 주 금요일부터 일주일간의 치열한 경쟁이, 변방의 국가였던 한국에서 비로소 막을 올린다. 바로 이곳에서. 상냥한 그대, 긴장의 끈을 놓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wgreene- 이 포스트를.. 덧글 13개 엮인글 쓰기 /data17/2006/11/17/104/hipper6_7_1-wgreene.jpg@nhn@154639@nhn@1@nhn@539@nhn@662 화이트그린의 LEEHA 아마데우스 콩쿠르 페스티벌 /data17/2006/11/17/104/hipper6_7_1-wgreene.jpg@nhn@154639@nhn@1@nhn@539@nhn@662 화이트그린의 LEEHA 아마데우스 콩쿠르 페스티벌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73편(뮤즈 올림픽) ▼ 다음글 - 2악장 72-2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73편(뮤즈 올림픽) 아마데우스 2악장 2006/11/18 22:01 http://blog.naver.com/wgreene/110011056670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1118 73편 업데) Amadeus 음악 : 트랙스의 랩소디(재생버튼클릭) or 18일 리하음악 chi mai Rhapsody-트랙스 (Trax) 廣がる空の果てまで 想いが屆く氣がして 言葉にならない氣持ちを奏でる. 翼を廣げて　飛び立つその時がくるまでは 胸に響く Rhapsody. 靜けさに抱かれて 壞れそうな 愛を包む Melody. I want you to hold me このまま 時間を忘れて この世界が終わるまで 君を愛して 流れる時が刻む silent strokes. 雨を求める薔薇の吐息のように 靜かに花びらを震わせて. 赤く染まるまで　欲望が愛しさに變わるまでは 胸に響く Rhapsody. 靜けさに抱かれて 壞れそうな 愛を包む Melody. I want you to hold me このまま 時間を忘れて この世界が終わるまで 君を愛して 胸に響く Rhapsody. 靜けさに抱かれて 壞れそうな れそうな 愛を包む Melody. I want you to hold me このまま 時間を忘れて この世界の終わりに 永遠の詩を響かせて. I love you…. 펼쳐지는 하늘 끝까지 내 마음이 닿을 것 같아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을 읊조려 본다. 날개를 펴고 날아 오를 시간이 올 때까지는 가슴에 울리는 Rhapsody. 정적 속에 안겨 부서질 듯한 사랑을 감싸는 Melody. I want you to hold me 이대로 시간을 잊고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널 사랑하고 흐르는 시간을 새기는 silent strokes. 비를 기다리는 장미의 한숨처럼 조용히 꽃잎을 떨리게 해 줘. 빨갛게 물들 때까지 욕망이 사랑스럽게 변할 때까지는 가슴에 울리는 Rhapsody. 정적 속에 안겨 부서질 듯한 사랑을 감싸는 Melody. I want you to hold me 이대로 시간을 잊고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널 사랑하고 가슴에 울리는 Rhapsody. 정적 속에 안겨 부서질 듯한 사랑을 감싸는 Melody. I want you to hold me 이대로 시간을 잊고 이 세상의 끝에 영원의 노래를 울려 줘. I love you…. -트랙스의 랩소디 2악장 73편 5월 첫째 주 수요일, 수페리우스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짙푸른 능선 너머로 출렁이는 봄의 물결은 아찔한 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한국 특유의 수려한 장관은 타국의 봄과 전혀 색다른 멋이 돋보였다. 아이는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차창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택시 기사가 아마데우스 예식 복을 알아보고는 몇 마디 말을 걸었지만 미안하리만치 그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다. “돌아왔어… 돌아온 거야….” 번잡한 시내를 지나 눈에 익은 풍광이 밀려올 때 혜성은 떨리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팔이 완전히 다 나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보름 전이었다. 그 때 처음 다뉴브의 밤을 연주해 보았지만 그간 연습을 못 했던 만치 자신의 악장인데도 불구하고 터치가 매끄럽지 않았다. 그러나 고된 연습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몸은 후유증과 전쟁 중이었다. 옆구리의 상처가 다 나았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무거운 것을 들거나 혹사시키면 폐허에서처럼 춥다는 착각과 통증이 일어 괴로웠다. 멀쩡한 왼 손처럼 윤곽으로는 별 다른 이상 없이 흉터만 생긴 오른 팔 역시 연주에 집중하다 보면 겁이 나서 번쩍 팔을 추켜올릴 때가 많았다. 이틀에 한 번 꼴로 악몽에 시달려서 새벽에는 진땀을 흘리며 깨어나서 테레사를 외쳤다. 후유증으로 인한 극복의 단계에서 아이는 피아노를 피한 적이 상당했다. 따라서 뮌헨에서의 일정은 키르혜아이젠 교수님과 사비나 교수님과의 무대 커뮤니케이션 이론과 테크닉 시범 연주에 국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결혼식 준비 때문에 상당히 바쁜 사비나 교수님이 콩 쿨 당일에나 겨우 한국에 오실 거라는 소식에 측은했던 마음은 고향 땅을 밟는 순간 새벽 물기처럼 증발했다. 오, 그리운 사람들! 그리운 한국의 아마데우스! 마리아 칼라스! 아이는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다 왔습니다- 라는 택시 기사의 말만 알아들은 아이는 상당한 돈을 그에게 내밀고는 오는 내내 대꾸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뜻을 전했다. 그렇잖아도 적잖이 불쾌했던 그가 세 배 가까이의 요금을 받더니 흔쾌히 웃어주며 짐까지 차곡차곡 꺼내 주었다. “수페리우스?” 그를 알아본 관리인이 모자를 벗으며 정중하게 말을 붙여 왔다. 감회가 새로웠던 수페리우스는 그에게 유럽식으로 우아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 해 보았다. 그는 잠깐 당황하더니 귀여운 꼬마와 상대하는 것처럼 수탈하게 웃었다. 그리고 장미 문 옆의 사무동에 들어가서 고래 성을 치더니 두 명의 인부를 불렀다. “짐을 옮겨 드리겠습니다. 아니면, 테레사의 비서를 호출해 드릴까요?” 테레사의 비서라… 그의 모든 것이 어제처럼 생생한 현재, 그의 별채로 당장 날아가려던 마음을 접고 수페리우스는 부드럽게 대꾸했다. “아니오. 괜찮으시다면 서쪽 기숙사동의 제 방으로…….” “아, 그렇게 하겠습니다.” 돌아오니 제대로 깨달았다. 콩 쿨이 코앞이라는 것과, 자신에게 시간이 아주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혜성의 대답이 의외였던지 잠시 멈칫하던 그들은 곧 짐을 들고 사라졌다. 수페리우스는 경건한 자세로 걷기 시작했다. 잠시 눈을 감아보았다. 코끝이 시큰거릴 만치 단정한 마리아 칼라스의 향기가 영혼에 미쳤다. 그것은 향기만으로도 생김새를 유추하게끔 선량한 사람을 유도했다. 향기에 반하여 손을 내밀면 가시로 찌를 듯 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이윽고 수페리우스는 오는 내내 착용했던 순결한 면장갑을 벗고 조용히 눈앞의 장엄한 장미꽃 물결을 만져보았다. 톡 쏘는 아름다움이 장미 문을 중심으로 아마데우스 전체를 붉게 태우고 있었다. “…….” 장미는 사람에게 없던 열정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지난날의 고통을 잠재우며 앞으로 나아갈 힘을 준다. 마법처럼 진행되는 마음의 굳건함을 아로새기며 수페리우스는 실로 오랜만의 장미들을 한없이 응시했다. 자신을 빨아들이듯 멋진 몸매를 자랑하는 마리아 칼라스가 큰 바람이 일자 후두두 흩어지듯 몸을 사렸다. 휭- 저녁나절의 센 봄바람이 또 스치자 그들은 여인처럼 바람에 휘날리는 치마폭을 감싸듯 더더욱 붉어졌다. 부드러운 꽃잎이 벌어질 때면 언제 당당했냐는 듯 붉어진 뺨을 돌리더니 초록 잎사귀로 가렸다. 여자의 유두처럼 봉긋하면서도 섬세한 전체는 한국 아마데우스를 더더욱 돋보이게 했다. 문득 고개를 쳐들자 양떼구름이 동그랗게 흩어지며 파란 하늘을 하얗게 수놓았다. 성탄 전야 못지않게 부푼 기대로 다가오는 콩 쿨, 턱없이 부족한 실력이지만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순간을 고대하는 눈빛은 한없이 영롱했다. 뮤즈 올림픽 수페리우스가 뮌헨에서 지낸 몇 달 간, 한국 아마데우스의 주요 가십은 그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일까. 로미오의 소식은 사실로서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악기 실력은 부족하지만, 악보 해석과 작곡에의 능력이 뛰어난 유리의 사소한 일정까지도 가십은 펄럭이고 있었다. 수페리우스에 대한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아이는 서쪽 기숙사동까지 향하는 족족 자신과 마주치는 정다운 학생들에게 인사하면서도 그들이 열을 올리는 대화는 놓치지 않았다. “그런 특혜가 또 있을까?” “아마도 테레사의 수페리우스에 버금가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지?” 이런 식으로 특혜를 떠들며 긴 감탄사를 터뜨리는 자가 있는가 하면, 또 비슷한 말로 받아치는 무리가 상당했다. “아니지. 유리는 실력으로 치고 들어온 거니까 수페리우스가 애송이였던 때랑은 비슷하면서도 다른걸.” 이 때 수페리우스가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면 하나같이 흠칫 놀라더니 머쓱하게 표정을 마꾸는 것이었다. 뮌헨 아마데우스가 콩 쿨과 레퀴엠에 빠져서 혹독한 수련을 반복하는 때, 개최국 한국에서는 전혀 엉뚱한 소식이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었다. 하지만 유리에 대한 소식과 견줄 만치 콩 쿨에 대한 화제도 빠지지 않았다. 뮤즈들의 올림픽이나 다름없는 행사를 앞두고, 각 나라는 연일 비슷하지만 새로운 소식을 보도했다고 한다. 주인공인 학생들 역시 오르페우스 관 폭파 때의 일로 불편했던 심신을 봄의 태양처럼 푸르게 녹일 수 있었다. 콩 쿨은 그들에게 도약의 발판이자 휴식, 새로운 화제로의 전환이었다. 런던 소속의 스페인 누구가 온다더라, 혹은 뮌헨 소속의 스코틀랜드 출신 누구가 온다더라, 이번에는 보스턴에서도 선발된 인재 중에 뛰어난 기량을 선보일 자가 있다더라, 따위의 흥미진진한 소식이 전해지자 수페리우스는 그제야 적잖이 안심한 낯으로 기숙사 방에 들어갔다. 어떻게 보면 유리의 가십보다 콩 쿨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더 크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혼자 안심하며 수페리우스는 오랜만의 기숙사 방 내부를 천천히 응시했다. 보스턴 아마데우스 홀에서 있었던 테레사의 리사이틀 포스터와 라일락 향이 묻어나오는 민우의 피아노는 그대로였다. 수페리우스는 당장 피아노에 달려가서 온 몸으로 껴안았다. 하아- 긴 숨이 빠져나갔다. 진정 자신이 돌아온 것이 실감나자 동시에 멋진 행사를 앞에 두고 자신이 너무 안일하게 지낸 것은 아니었나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후유증과 싸우느라 힘들었던 나날이 수페리우스의 현재를 정당화시켰다. 아이는 금세 아마데우스 전체에 퍼진 자신의 등장 소식에 부리나케 달려올 동완이를 기다렸다. 테레사를 당장 만나고 싶었지만 이틀 동안 샤워조차 않은 상태가 내내 걸려서 그것은 저녁 이후로 미루었다. 콩 쿨 준비로 수녀님들의 건물중 반 이상이 숙소로 바뀐다는 것, 남쪽 기숙사의 학생들과 서쪽 애들이 서쪽 기숙사동에서 페스티벌 기간 내내 같이 숙식해야 한다는 것, 또 일반인의 길을 넓힌다는 것, A동의 리허설 장을 개조하거나 늘린다는 것, 기타 등등 편지를 통해 테레사로부터 전해들은 소식은 굳이 그것들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다 확인한 기분에 사로잡히게끔 했다. 그게 편지의 힘인가? 실실 웃으며 짐을 풀던 와중 벌컥 문이 열리더니 동완이와 미카엘 선배가 반가운 얼굴로 달려왔다. 다리가 다 나은 동완이는 몇 달 사이 훨씬 핸섬한 청년으로 자라 있었다. “그게 무슨 옷이니?” “옷?” 덥석 껴안고 장난 식으로 주먹질을 하던 두 소년이 떨어지며 서로를 살피기에 바쁘다. 동완이 입고 있는 옷은 아주 멋있었다. 평범한 예식 복의 우아하면서도 밝은 색채 대신에 무대에 설 복장을 입고 나타나서였다. 뒤의 깃이 긴 무대 정장은 까맣게 윤이 났다. 나비넥타이가 약간 비뚤어져 있는 것을 제외하면 지금의 동완이는 당장 무대에 설 것처럼 멋있었다. 새 옷을 자랑하며 방 안을 휙휙 돌아다니는 동완을 대신해서 미카엘이 붉어진 뺨을 돌리며 떠듬떠듬 대답했다. “나를 에스코트 해 주겠다면서 저도 옷을 주문하더구나.” “잉?” 에스코트? 눈이 휘둥그레진 혜성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미카엘 쪽으로 다가왔다. “콩 쿨 개막식 전에, 기자 간담회랑 심포지엄이 있잖니. 그 때 입어 봐도 좋을 것을…….” “?” “초청 리사이틀 후에, 첫날 바로 시작되는 게 첼로거든. 뭐… 야외 백색 홀에서는 오라토리오가 한창이겠지만…… 동완이좀 말려봐라 수페리우스. 내 반주자도 아니면서 에스코트 해 주겠다며 저렇게 군다.” “예에?” “아~ 끝장이야. 이번 토너먼트를 보니까 각 라운드 참가자들이 장난이 아니던데…….” “…….” 동완이에게 추궁하고 놀리려던 마음이, 미카엘의 뒷말 덕분에 싹 사라졌다. 이에 미카엘은 왜 가만히 있느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혜성은 비로소 콩 쿨의 힘에 절감한 눈치였다. 지나친 연습과 자기 혹사로 하얗게 마른 미카엘이 다시 보였다. 자신이 후유증과 싸우며 이론 수업에 치중할 때, 현실과 제대로 싸운 자가 승리하는 게 바로 콩 쿨인 것이다. “많이 마르셨네요….” “…너도 그래.” “…….” 연습, 과연 그것을 연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이는 일순 두려워졌다. 누구나 다 연습을 한다. 그러나 결과 앞에서 누군가는 무릎을 꿇고 누군가는 승리의 월계관을 쓴다. 수페리우스는 초조해졌다. 오른팔이 다친 대신에 왼 팔은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후유증으로 괴로웠던 이유 중의 하나가 호된 연습에서 비롯되었지만 오른팔은 그래서 불안한 것 중 하나였다. 쇼팽은 가능하지만 심적 부담 때문인지 베토벤 소나타를 연습곡으로 정해서 하루 종일 누를 때는 옆구리가 찔리는 상상마저 일었다. 내가 과연 제대로 연습을 했을까. 테레사에게 편지를 쓰는 삼십분 내지 한 시간을 제외하고 보면 다뉴브의 밤을 아름답게 구사하기 위해 밥을 먹을 때도 그것을 연상했었다. 그래도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는 걸. “누구나 다 불안해하면서도 기다리고 있어, 수페리우스.” “…….” “콩 쿨 본선 참가자들의 숫자가 총 백 쉰 아홉 명이라더라. 그들도 자신이 열심히 연습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안함과 싸우는 거야.” “…….” 미카엘의 전체가 진갈색의 첼로로 보였다. 아이는 눈을 흐리며 엷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카엘이 움직일 때마다 현의 소리가 굵게 들려왔다. 부서질 것 같은 외형으로 힘 있게 팔을 놀리고 기가 막힌 음률을 창조하겠지. 햇살에 투영되는 미카엘이 첼로로 비쳐질 때, 작은 감동에 어찌할 바 몰랐는지 수페리우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막 생각난 것을 그들에게 물었다. “유리가 가십에 많이 실렸다면서? 무슨 소식이기에 다들 그 얘기를 하는 거야?” “!” 동완이는 드디어 올게 왔다는 묘한 표정을 짓더니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비로소 대답한 것은 독일에서 산 초콜릿을 선물로 줄 때였다. 우적우적 쓰면서도 달콤한 초콜릿을 미카엘과 사이좋게 씹어 먹으며 동완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답했다. “유리의 평가 연주회가 있었는데… 런던에서 온 교수님들이 많았었나봐. 물론 유리가 만든 악장을 런던에서 함께 온 학생 중 한 명이 대신 연주했던 건데…….” “그런데?” “1악장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합격을 거머쥐었대.” “!” 동완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며 검지로 수페리우스의 앞에서 휙휙 젓더니 먼 나라 이야기처럼 말을 이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아마데우스 홀에 평가 결과가 붙여지기도 전에 그녀가 영국으로 초빙되어서 명목상으로는 교환 학생 특전으로 영국 아마데우스에서 신입생 생활을 시작한다는 거지.” “!” 내면에 휴식을 취하던 폭풍우가 돌연 길게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칼날처럼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매를 번쩍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옳거니! 폭풍우는 제대로 위치를 잡았는지 저의 거대한 몸으로 선량한 대지를 뚫고 출현했다. “기정사실까지는 아니라서 가십에서 예측성 보도를 했어. 아주 확실한 게 아니기 때문에 소문은 애들을 자꾸 떠들게 하는 거지. …너무 신경 쓰지 마 혜성아.” “…….” 테레사마저 한 때 애송이 취급했던 런던 아마데우스! 그들이 유리를? 순간 수페리우스는 생각했다. 자신이 혹시 괴물을 키운 건 아닐까 하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수페리우스?” “…….” “얘, 혜성아?” “…….” 미카엘과 동완은 통 모르겠다는 시선으로 수페리우스를 보았다. 아이는 벽을 노려보듯 텅 빈 시선으로 줄곧 무엇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유리의 소식은 그녀가 오래 전 떠들었던 천지개벽을 연상케 했다. 굳이 마음에 걸려 하지 않아도 좋을 텐데 요상한 감정이 우물처럼 아래로 떨어지게 만들었다. 그것은 매우 불유쾌한 감정 중의 하나였다. 혜성은 반가워해야 한다고 그게 옳은 일이라며 스스로를 부추겼지만 그럴수록 우물물은 가까워졌다. 첨벙-! 쏜살같이 내려가던 감정이 차가운 물과 돌이끼에 닿자 아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감정의 이름은 질투였다.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 한 불안함의 산물, 질투였다. 수페리우스를 대신 할 만한 비슷한 자가 없던 아마데우스에서, 자신과 비슷하지만 훨씬 월등한 관심과 주목을 받는 유리에게 아닌 척 굴고 싶어도 질투와 불안함은 거대하게 나타난 것이다. “유리의 곡은 그녀의 시련을 담고 있다더라.” “시련?” 아이는 필요 이상으로 격앙된 투로 반문했다. 혜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동완이 의아해 하는 미카엘에게 괜찮다는 뜻으로 싱긋 웃어주더니 가시처럼 솔직한 얘기를 덤덤하게 쏟아냈다. 아이는 그 때마다 매우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반응을 보였다. “그래, 시련. 악명조차 시련이지. 곡을 만든 시기는 네가 룸펜에서 지냈던 때로 거슬러 가. 곡이 완성된 것은 작년 크리스마스 이후였지.” “!” 기억해. 나는 기억하고 있어. 잠시 잊고 있었을 뿐이지. 이태원에서 음악을 배울 곳은 없어. 나조차도 작곡은 히스에게서 겨우 배웠을 뿐인걸. 게다가 샤우트는 유리에게 음악을 반대했지. 내가 만들었던 악보의 흔적을 그녀에게 캐물었지만, 전혀 모른다는 투로 대답했던 유리를 기억한다. 그 때를 시작으로 혜성은 지금의 유리가 만들었다는 곡의 출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생각지도 못한 충격이었다. 자신의 제자를 의심하다니? 의심과 시련, 증오와 한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빚어지기 마련이다. 남의 탓으로 돌릴수록 크기는 방대해지는 이것을, 무지한 사람은 끝끝내 모른다. 그래서 운명 이라는 글자가 세상에는 아직도 존재하는 것이다. 글자는, 감수성의 변이를 뒤흔들어 버린다. “혜성아!” “수페리우스!” 용서할 수 없는 내 안의 의심. 아이는 자신이 이런 엄청난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는지 단숨에 테레사의 에튜드집과 다뉴브의 밤 악장을 쥐고 달아나듯 뛰쳐나갔다. 노란 민들레는 사라졌다. 마음의 자생력은 온통 음표만을 자라게 했다. 그것들은 잡초와도 같은 생명력을 지녔다. 아플수록 돋아나며 생생한 목소리를 지껄였다. 움직여, 쉬지 마! 청각을 오려내듯 아프지만 쩌렁쩌렁하게 들리는 음표가 있다. 꽃처럼 자생하는 민들레 전체가 오선지로, 빼곡한 음표로 바뀌었을 때, 한국에 돌아온 지 채 한 시간이 지날 무렵의 수페리우스는 옆구리의 통증도 잊은 채 바람처럼 달렸다. A동은 초만원이었다. 연습실을 뒤져 보았지만 수페리우스에게 미안한 투로 다른 곳을 찾아보면 안 되겠냐는 대답만이 슬프게 전해졌다. 아이는 다시 독일로 날아가고픈 욕망을 꾹꾹 누르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지하 리허설장 역시 6학년과 7학년 오케스트라 단원들로 꽉 메워 있었다. 밖으로는 기발한 장식과 위품을 다는 인부들이 수페리우스를 가로막았다. 지금은 연습보다 콩 쿨 준비에 매진할 때라며 저마다 부푼 넋을 흩뜨렸다. 안 돼, 아직은! 이상한 오류가 꽃처럼 피었다. 수페리우스는 A동에서 벗어나 자신의 기숙사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기로 마음먹었다. 워낙 정신없이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달리느라 인부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테레사를 무심결에 스쳐 지났다는 것마저도 까맣게 잊었다. 잘 달리던 도중 수페리우스의 땀으로 젖은 몸이 다시 멈췄다. 남쪽 기숙사동 학생들과 서쪽 기숙사동 대표들이 함께 지내기 위해 짐을 옮기느라 그곳도 시끄러웠음이 떠올라서였다. 동완이와 다시 얘기를 해 볼까 싶었지만 시간이 아까웠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그를 부르는 소리들은 기쁘지만 의아하다는 음성으로 쉬지 않고 귓가에 스쳤다. 이토록 넓은 땅덩어리 중에 나 하나 연습할 곳이 없다고? 수페리우스는 마침내 최종 병기였던 병동 지하 창고로 달려갔다. 덜컥 덜컥! 문을 쥐고 흔들어 보았자 창고 문은 열리지 않았다. 키르혜아이젠 교수님! 교수님! 마음이 뒤숭숭할수록 건반에 대한 갈증 때문에 목이 말랐다. 아이는 목을 움켜쥔 채로 단숨에 우물에 빠진 감수성의 변이를 원망했다. 마리아 칼라스의 향기로 행복했던 찰나가 꿈처럼 멀어졌다. 지독한 현실이 화살처럼 당겨질 때 아이는 새어나오는 눈물을 닦으며 이를 악물었다.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서야 아무것도 없는 맨 주먹이 퉁! 머릿속에 스쳤다. 이자벨의 증오도 스쳤다. 증오란 당사자도 모르게 혼자 괴로운 몫이라는 그녀의 말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유리는 내 기분을 모르겠지. 하지만 나는 그녀를 두고 초조해지는 마음을 부정할 수 없는걸. 이자벨, 지금처럼 그녀와의 대화가 절실할 때가 또 없다. 그리고 얼마가 지나자 마음은 불현듯 평지를 밟기 시작했다. 그러자 괜찮아졌다. 무엇이 괜찮을까. 의기소침 하는 시간마저도 아까운 이 때, 수페리우스는 자신의 양 쪽 팔과 손가락이 건강하다는 것만으로도 새삼 감사해졌다. 이처럼 갈팡질팡 오락가락하는 감수성의 변이를 두고 피식 웃을 때, 멀리서 빛처럼 천천히 걸어오는 자가 있었다. 수페리우스는 창고 문에 등을 기댄 채 무릎을 당겨 안았다. 그리고 푹 고개를 숙였다. 한국에 오자마자 감수성은 필요 이상으로 나를 몰아세웠어. 짐을 풀기도 전에 넋이 빠져서…. 내가 왜 그랬을까……. 저벅. 저벅. 이쪽으로 걷는 소리는 규칙적이었다. 그리고 무언가가 끌리고 사람의 발과 함께 섞여있음이 캐치되었다. 미끄러지듯 걸어온 누군가가 천천히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팔에 뺨을 묻은 채 미동 없이 굳어있는 혜성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쓸어주기 시작했다. 넋이 나갈 정도로 단숨에 충격에 휘청였던 내면이 천천히 정화되었다. 그것은 누군가가 지시하는 마법처럼 진행되었다. 불안함과 초조함, 이상한 질투심이 밑바닥까지 이끌었던 와중에 위로 올려주는 것이다.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바닥은 아주 따뜻하고 섬세했다. 이윽고 손가락은 말을 걸어왔다. “바보 같기는…….” “……!” 움찔 하며 수페리우스의 몸이 크게 떨렸다. 깜깜한 지하 복도 끝에서 마리아 칼라스의 향기를 뽐내는 자를 안다. 한국으로 오는 내내 계속 떠올렸던 그리운 이를 안다. 아마데우스를 선택하던 시절, 일 올의 후회조차 없이 마음에 담았던 이를 아는 것이다.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입을 여는 자는 테레사였다. 심장은 쿵덕대며 아까와 전혀 다른 이유로 뛰기 시작했다. 테레사! 테레사다! 근데 테레사가 왜 병동 지하에 왔지? “무서워…?” “…….” 모든 것을 다 아는 그의 앞에서 무슨 말을 꺼내랴. 편지로 주고받는 내용 중에 혜성의 불안함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아이는 늘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변화를 편지에 적었었다. 왼 손이 잘 되지만 오른손이 왼손을 따라오지 않는 날 격분하느라 쉬이 잠들지 못했던 때, 테레사가 옆에 있는 것처럼 소리소리 지르며 펜을 놀렸었다. 한국에 오면 제일 먼저 테레사를 껴안을 거라고 신신당부했던 내용조차 생생했다. 은방울처럼 굴러가는 선율이 뮌헨 오르페우스 관에서 들릴 때마다 당신이 떠올랐노라 새처럼 종알거렸었다. 테레사, 그는 또 어떠했던가! 민들레꽃과 함께 사랑한다는 말을 줄줄이 적어준 수페리우스에게 감동을 받았는지 단숨에 뮌헨에 날아가고 싶다는 너를 안고 싶다는 욕망을 솔직하게 적어 주셨었다. 테오제네스가 헛기침을 할 만치 그의 솔직한 내면은 줄줄이 편지지에 적혔었다. 그런 둘이 다시 만난 현재, 잘 지냈느냐 독일에서 혹은 한국에서 어떻게 지냈느냐의 인사는 불필요한 몫이었다. 어제 만난 것처럼 익숙해진 질문이 스치자, 아이는 편지를 적는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터졌다. 그의 말마따나 진짜 바보가 되어서 언어마저 상실케 했다. “다뉴브의 밤을 연주하고 싶은데 사람들이 없었으면 좋겠지…?” “흐으…….” 그 역시 주저앉더니 지팡이를 옆으로 치운다. 천천히 머리칼을 쓸어주며 혜성이 걱정하는 것을 차분히 묻기 시작했다. 그는 양 팔을 더듬거리며 혜성의 몸과 안면을 확인했다. 팔과 어깨, 나아가 이목구비를 찬찬히 만질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긴 숨을 내쉬며 그는 수페리우스의 존재에 안심하는 눈치였다. 아이는 그가 자신을 확인하는 즉시 다시 뺨을 숙이더니 아까처럼 흐느끼기 시작했다. 테레사가 어떻게 여기에 나타났을까. 그러나 답은 쉬웠다. A동을 스치는 수페리우스를 크게 외치는 학생들 덕분에 아이가 한국에 돌아왔다는 것을 알게 된 테레사가, 물어물어 병동까지 온 과정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마법처럼 그가 나타났다고 여기는 수페리우스만이 놀랄 뿐이었다. “유리 소식에 놀랐나?” “…….” 잠시 골몰하던 테레사가 속의 것을 무덤덤한 투로 꺼내자 수페리우스는 대답하기 곤란했는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때 적막한 공간으로 침투하는 봄바람이 그들을 둥글게 에워쌓다. 짙은 장미의 향과 멀리 민들레의 색채가 섞인 봄바람은 신비로웠다. “당연히 놀라야지. 만약 네가 수페리우스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 애를 수페리우스로 지목했을지도 모르겠다.” “!” 아이는 눈물 콧물로 엉망인 채로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시큰둥한 투로 내뱉는 테레사에게 놀라서 아이는 잠깐이지만 죽은 듯이 경직했다. “농담 반 진담 반이다.” “흑… 흑… 흑….” 팅- 아이의 콧날을 더듬거린 뒤 검지로 치며 테레사가 짓궂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네가 보고 싶었다. 중요한 건 현재이지.” “…….” 슥 슥 뺨의 눈물을 저의 손바닥으로 닦아내며 테레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엄청난 눈물의 양에 그가 꽤 놀란 모양이었다. 그는 곧 힘을 주어 다시 말했다. “너도 잘 할 수 있어. 지금은 다 조바심 내고 걱정할 때다. 기간은 보름보다도 훨씬 길게 남아있는데 뭘 두려워하는 거냐. 쯧… 바보같이.” “흑… 흑… 흑…?” 그 때 내면으로부터 강인한 바람이 불어왔다.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유리? 혹은 콩 쿨? 아니면 가십? 아니다. 두려움의 정체는 바로 ‘나 자신’이었다. 죽은 척 위장하는 로린느 공주였다. 무엇도 그려지지 않는 코앞의 미래를 예측하려는, 그래서 현실을 초조해 하기만 하는 ‘나 자신‘이었던 거야. 테레사의 말은 틀리지 않다. 듣고 보니 더더욱 확실했다. 아직 연습할 시간이 충분한데 주변의 신선해진 변화에 휘둘린 꼴이라니! 둘은 잠깐 동안 쭈그려 앉은 채로 마주보았다. 누가 먼저 팔을 내밀어 안고 안기느냐가 관건이었다. 만나는 즉시 안부를 묻자니 편지로 떠든 말이 상당해서 머쓱했다. 또 안아야 할 타이밍을 처음부터 놓쳤기 때문에 새삼 반갑다! 하면서 보고 싶었어! 떠들고 끌어안자니 민망해서 참을 수 없었다. 테레사는 헛기침을 하며 이리저리 고심하더니 얕은 빛이 새어나오는 틈으로 한 발자국 옮겨 앉았다. 아무래도 오래 앉아있었더니 다리가 저린 모양이었다. “음…….” “…….” “혜성아.” “…….” “안아줄까?” “흐윽….” “!” 왜 울지? 내가 실수한 건가? 겉으로는 평화로운 척 하는 표정과는 달리 테레사는 많이 당황했다. 자신의 부드러운 말투가 끝나기도 전에 혜성이 아까처럼 끅끅 울기 때문이었다. 안기기 싫은 건가? 테레사 답지 않게 별의별 망상이 휙 스쳤다. 그렇잖아도 사비나로부터 충고를 겸허하게 받아들인 뒤라 자신은 수페리우스를 대하기가 조심스러웠다. 안기도 전에 울다니? “혜성아….” “흑… 흑….” “뽀뽀해줄까?” “흑….” “…….” 긴 침묵이 한적한 병동 지하 복도에 울렸다. 쭈그려 앉은 채로 골몰하는 테레사와 끅 끅 울기만 하는 혜성의 시간은 차츰 길어져갔다. 둘은 서로를 이미 알고 있었다. 편지를 통해서 모두 알았다. 지금의 테레사가 콩 쿨 집행 위원으로서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됨을 혜성은 알았다. 또 지금의 수페리우스가 안 좋은 시기에 팔이 다쳤고 후유증으로 고생하느라 연습이 매우 힘들었다는 점을, 그래서 유리라는 가십이 불유쾌하다는 것을 테레사는 알았다. 너무 속속들이 잘 알기 때문에 함부로 꺼내기 어려운 내용들이었다. 게다가 테레사는 다리도 저렸다. “이리 와. 안아줄게.” “…흑… 앙…대요. 흑….” “왜?” 양 팔을 벌린 채로 아이를 기다리던 테레사가 마침내 화가 났는지 벌떡 일어섰다. 핑- 발바닥부터 밀려오는 저림에 그는 괜히 발을 허공에 차며 신경질을 부렸다. 싫다니? 수페리우스 역시 천천히 일어서며 매우 곤란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흑… 앙대…흑… 요. 옹도… 흑… 더렁고… 흑… 사어도 앙해서…흑…흑….” 안돼요. 옷도 더럽고 샤워도 안 해서 안돼요. 기가 막힌 대답이 매우 진지하고 슬프게 터졌다. 뭐라고? 의외의 대답에 벙 찐 테레사가 한동안 멍청하게 서 있다가 폭포수처럼 우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대체 뭐라고 하는 거냐! 하하 하하하.” “흑…….” “그래? 그럼 나도 안 하고 말지. 하하하! 우리 떨어져서 대화만 하는 거다. 알았지? 큭…큭.” “!” 배를 쥐고 웃는 도중 테레사가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닦으며 정색했다. 그에 놀란 수페리우스는 단숨에 그에게 안기며 매달렸다. 그리웠던 둘이 하나로 껴안을 때, 비로소 테레사는 편하게 웃으며 팔에 힘을 주었다. 전보다 마른 몸이 안겨온다. 신비로운 줄로 꽁꽁 싸인 것처럼 편지로만 확인했던 둘이 다시 만났다. 그 때 뭔가가 생각났는지 테레사는 엷게 웃으며 시니컬한 투로 수페리우스를 불렀다. “어이.” “……?” 어이? 인부들 사이에서 익숙해진 말투로 몇 번, 어이 어이 라고 재미있다는 듯이 부르던 테레사는 자꾸만 품에 파고들어오는 혜성을 기특하다는 듯이 껴안으며 어두운 허공에 중얼거렸다. “내가 더 더러운데…….” “…….” 과연, 테레사의 몸에 잔뜩 묻어있던 흙먼지가 휘날리는 통에 푸에치! 하고 혜성이 안긴 채로 연방 기침을 한다. 작은 어깨가 들썩일 때마다 그게 귀여웠는지 테레사는 일부러 머리칼을 휘두르며 더러워진 먼지를 공기 중에 날렸다. 푸에치! 혜성이 또 한 번 코를 간질이는 먼지로 기침할 때, 테레사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에치!” “…….” 사랑해. 어쩌면 그가 마지막에 속삭였을 진주와 같은 음성은 삼켜지고 없었다. 바람의 마법이었을까. 혹은 환각이었을까. 두근대는 심장과 이삭처럼 나부끼는 영혼은 진실을 알고 있을까. 오, 테레사. 테레사. “에이치! 에……?” “…….” 입을 막 닫을 무렵 그의 입맞춤이 이어졌다. 그의 단단한 힘과 살아있는 근육, 영롱한 꽃처럼 핀 설렘이 짜릿함이 이어졌다. 느껴졌다. 확인됐다. 약간 푸석해진 머리칼처럼 부드럽지만은 않은 입맞춤과 포옹이 짜릿하게 지속되었다. 잠시 후, 테레사는 곧 지하 창고 문을 열어주고는 조용히 돌아갔다. 아마 그는 다뉴브의 밤을 콩 쿨 당일 날 무대에서 들을 계획일 테다. 같은 곳에서 지내지만 틀림없이 콩 쿨까지 우리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만나지 않는다는 게 정확할 테지만……. 고마워요 테레사. 테레사… 흔들림 없이 늘씬한 등을 보이며 걷는 그를 두고 수페리우스는 여러 번 마음으로 소리쳤다. 그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자 수페리우스는 경건한 마음으로 창고 내부에 들어갔다. 봄의 습기 때문에 눅눅해진 악기들이 반갑게 수페리우스를 맞아주었다. 세 대의 피아노 중 창문과 가까운 것을 선택한 아이는 조용히 뚜껑을 열었다. 가지런한 건반이 희게 빛난다. 달빛이 조여 들어와서 건반 위를 돌아다녔다. 아이는 허리를 숙였다. 잘 부탁한다는 악수 대신, 테레사와 입 맞추었던 입술을 까만 건반 위에 눌렀다. 잠시나마 폭풍으로 거세었던 마음은 평화를 되찾은 것을 기회삼아 의자에 앉았다. 아무도 찾지 않는 지하 창고에서 수페리우스는 그야말로 연습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누구의 방해 없이 고국이 주는 특유의 편안한 기분으로 장시간 스스로와 싸움을 시작했음은, 물론이다. 연습이 마이스터를 만든다. 문장은 수페리우스를 사로잡았다. 지상의 글귀는 그것밖에 없었다. 싸우지 않으면 홀로 낙오자가 된다. 룸펜에서의 솔베이지, 그 때 클래식을 멸시했던 한스의 눈동자를 기억한다. 그러나 나는 해냈어. 지금은 한스 대신에 홀로 불안해하는 내 자신을 일으켜야 한다. 혼자만이 해 낼 수 있는 싸움에서 질 수 없다. 수페리우스는 콩 쿨 이튿날이면 벌어질 경합에서 토너먼트 상대 연주자가 누구인지 아직 몰랐다. 이미 나온 결과였지만 팸플릿을 펼치지 않아서였다. 어차피 닥칠 현실이기 때문에 미리 겁먹지 않기로 했다. 상대 연주자의 스타일과 기교를 연구하는 시간조차 아이는 아까웠다. 게다가 연습 장소는 실로 매력적이었다. 습기가 많은 지하이기 때문에 악기의 소리가 원활하지 않았지만 되레 그것이 반가웠다. 일부러 무겁게 조율하지 않아도 피아노 건반은 아주 무거웠고, 때로는 몇 개의 하이 톤이 눌러지지 않았다. 이상하게 악조건일수록 수페리우스는 힘이 솟았다. 다뉴브의 밤, 전체 악장은 벌써 외웠지만 손끝에 베인 땀방울은 곧잘 연주를 방해했다. 그럴수록 아이는 신이 나서 저돌적으로 치고 들어갔다. 악센트에 트레몰로까지 겹친 16분음표의 2악장 크레셴도. 아이는 온 힘을 다하여 그 부분만 서른 번이 넘게 눌렀다. 페달을 밟는 부분이지만 굳이 밟지 않아도 쩡 쩡 울리는 더운 내부 덕분에 청각은 정확한 음정을 전해 주었다. 건반이 자신을 잡아당기는 건지, 혹은 자신이 건반에게 불호령을 내리는지 모를 아찔한 시간이 짙어져간다. 같은 곡을 수십 번 연주한다는 것, 지치지 않고 처음의 마음을 붙들고 연습하기란 상당히 지루하면서도 괴로운 작업이었다. 그러나 손놀림을 멈추려고 할 때마다 유리의 묘한 행동과 가십, 이자벨의 슬픈 증오, 키르혜아이젠 교수의 독설과 다름없었던 평가, 다가올 콩 쿨 인재들의 당당함이 숨통을 조였다. 불안함에 뛰놀던 감정은 그래서 건반을 돌아다니다 보면 차츰 나아졌다. 오 하느님. 건반에서 도저히 손을 뗄 수가 없다! 힘의 원천인가! 지금 내 뒤에 테레사가 있어도 나는 건반을 박차고 일어나서 그를 껴안을 수가 없어! 미쳤다. 나는 미쳤다. 아니다. 나는 이제야 가까스로 미쳐가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아주 즐겁게 미칠 것이다. 별안간 큰 소리 내며 웃는 수페리우스가 온 몸에 흐르는 땀을 분명하게 인식하며 건반에 엎어졌다. “하아… 하아….” 다뉴브의 밤 2악장 비바체가 다시 펼쳐질 때, 그것과 겹쳐지기 일수 인 테레사의 에튜드곡, 그의 5권 바리에이션 9번이 산산이 부서지는 비명을 질렀다. 나아가 피아노 오브 시베리아 중 라르게토 부분이 소멸하려는지 대지로 푹 꺼지는 음률이 분명히 스쳤다. 희번뜩 동공을 번쩍이며 수페리우스는 피아노 오브 시베리아와 바리에이션 9번을 위협하듯 팔을 놀렸다. 그의 곡과 비슷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때는 머지않았다. 만약 오르페우스 관이 폭발하지 않았다면, 모세가 나를 찌르지 않았다면 훨씬 많은 양의 연습이 있었을 텐데! 오, 이런 생각조차 하면 안 돼! 아이는 세어나가는 생각을 다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사비나 교수님과 키르혜아이젠 교수님은 평가 이후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다뉴브의 밤에 대한 것을 묻지 않았다. 그것은 수페리우스의 자존심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뜻과 상통했다. 아이는 더 할 나위 없이 산뜻해진 마음으로 잠깐 일어나서 작은 창문을 열었다. 쏠쏠한 밤바람이 밀려오는가 싶더니 별안간 우렁찬 봄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 내면까지 시원해지도록 화려하게 내리는 빗소리에 홀렸는지 수페리우스는 잠자코 창밖을 응시했다. 그리고 둔해진 뇌 저쪽으로부터 강렬한 무언가가 번개처럼 꽂혔다. “!” 아이의 동공이 크게 뜨인다. 오, 이럴 수가. 하지만 방금 생각난 ‘무엇’ 보다 근본적으로 떠오른 피아노에 베인 습기가 염려되었던 수페리우스는 후다닥 건반을 확인했다. 그리고 편안하게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비와 마주하는 동시에 스쳤던 번개는 따라서 잠시 뒤로 물러났다. 수페리우스는 천천히 정자세로 앉아서 연습에 몰입했다. 투둑, 투둑, 투두두두- 전쟁의 포탄처럼 우렁차게 쏟아지는 빗소리에 피아노도 반한 게 아닐까. 건반은 다행이도 습기 때문에 무거울 뿐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이 장소는 지상낙원이나 다름없어. 나의 비밀요새인 이곳을 동완이에게 알려 줘야 할까. 한국에 돌아와서 짐을 모두 풀기도 전에 시작된 미친 연주, 다뉴브의 밤을 떠올리는 강물의 움직임이 새벽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고국에의 평화와 안녕을 바라는 3악장의 코다를 한참 누를 때였다. 아까 전, 비를 보는 동시에 번개처럼 스친 ‘무엇’이 다시 떠올랐다. 오, 하느님! ‘그것’을 아예 잊을 뻔 했다니! 아이는 턱을 쳐들고 신음했다.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음률이었다. 기가 막힌 화음이 들이치는 빗물에 섞여서 아까 전 수페리우스는 굳었던 것이다. “!” 아이는 침묵했다. 그리고 건반에 양 손을 뉘인 채로 벌벌 떨기 시작했다. 비바체를 돌이킨다지만 그것과 전혀 다른 마지막이 생생히 떠올라서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이미 완성된 곡을 런던에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새로운 악장이 영혼마저 뒤흔들었다. 아이는 당장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펜과 비슷한 것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별 수 없이 지금 생각난 빗방울로 빚어진 창조 곡 부분을 쉬지 않고 건반에 눌렀다. 치고 들어갈수록 변주곡처럼 차츰차츰 변화되더니 최후에는 단단하게 묶인 음표가 악장을 읽듯이, 혹은 끊임없이 연주되는 지금처럼 생생해졌다. 코다, 완벽한 종결부 코다(Coda)! 종결부의 시작을 어디로 지정하면 좋을까? 지난 악장들을 감싸 안아주듯 힘 있고 세련된 3악장을 누르며 수페리우스는 골몰했다. 결국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병동 밖으로 뛰쳐나가 빗속을 내달렸다. 방금 생각난 코다 부분의 새로운 음표를 적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단순히 펜을 찾기 위하여. 지상 병동에서 충분히 구할 수 있는 펜이었거늘, 자신은 별세계에 갇혀 있다는 착각 때문인지 아이는 긴 시간 뭐에 홀린 듯 한 표정으로 내달렸다. “그렇지!” 펜을 쥐고 젖은 채로 창고에 돌아온 뒤, 아이는 스스로에게 경악하며 소리쳤다. 우르르르- 밤 구름이 밀려가는 소리가 짙게 전해졌다. 꽝! 카강! 건반을 비웃는 천둥소리도 찢을 듯이 울렸다. 그리고 수페리우스는 전류에 감전된 듯이 걸었다. 피아노에 흩어져 있는 악보들을 차례대로 모으고, 뒤의 빈 악장을 떨리는 눈으로 지켜보았다. “…4악장….” 왜 3악장 내에서 방금 생각났던 코다를 완성해야 된다고 강박 관념에 괴로워했을까. 간단하잖아? 너무 간단하잖아. 2악장 비바체의 안단테를 줄이고, 3악장 론도는 그대로. 그리고, 그리고…! 빗소리와 함께 창조된 종결부 전체를 짧지만 강렬한 4악장으로 하는 거야! 모두가 연습으로 지친 넋을 일으키는 때, 수페리우스 역시 불안하지만 자신감에 찬 표정으로 피곤을 억누르며 빠르게 손을 놀리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만의 연주기법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기도를 가슴에 품으며. 얼마가 지나자 수페리우스는 첫 날 두려워했던 감정이 많이 두꺼워졌음을 알았다. 별 것 아닌 것에 놀랐다는 점 또한 알았다. 아마데우스는 조금씩 일반인들과 콩 쿨 참가자들을 위해 당연히 변하고 있을 뿐인데 자신은 뭔 일이라도 난 것처럼 침울해 했다는 것을. 게다가 유리의 소식은 콩 쿨이 다가올수록 뜸해졌고, 더 큰 그녀의 소식이 붙여진 들 수페리우스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콩 쿨 개막식 뒤에 있을 신포니아를 기대하던 한국 아마데우스 학생들은 놀라운 가십을 확인했다. 게시 대 앞에 포진한 학생들은 저마다 입을 벌리며 경악했다. “피터 드 그루트!” “설마! 정말이니?” 콩 쿨 까지는 아직 보름이나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팸플릿대로라면 개막식 때 초청 리사이틀을 벌일 카운트 테너 피터 드 그루트가 오늘 밤 한국의 연주회장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거짓말이 아닐까? 학생들은 믿기지 않는다며 식사와 연습까지 걸러가며 피터 드 그루트의 아름다운 화성을 떠들었다. 여성의 화음을 구사한다는 카운터 테너의 출현은 그의 연주 일정이 아마데우스 콩 쿨과 겹쳤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각지 경연 자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그가 연주회장을 찾는 것이다. 다른 음악회 일정이라면 당연히 취소했겠지만 아마데우스라는 명칭 앞에서 그는 상당히 미안해하고 있음을 오늘 음악회로 증명하려는 것이다. 세상에 많지 않은 카운터 테너의 황홀한 음색이 곧 울려 퍼질 거란 소식이 전해지자 성악과 오페라를 전공하는 학생들은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여성만큼 높고 고운 소리를 낸다는 남성 가수를 일컫는 카운터 테너에 문외한인 수페리우스는 오늘도 동완과 간단한 식사를 한 뒤, 재빨리 병동으로 향했다. 오늘밤으로 닥친 피터 드 그루트의 음악회를 앞두고 테레사와 인부들은 훨씬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혜성은 비록 오늘의 오페라를 놓치는 건 아쉽지만 조금이라도 연습할 시간을 벌기로 새벽부터 결심했기 때문에 가십에 대해선 시큰둥한 상태였다. 병동 입구에는 어쩐 일인지 로미오가 수페리우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는 금세 화색이 돌아서 그의 앞에 섰다. “웬일이니?” “…….” “미오야?” “…너무….” “?” “너무 말랐잖아요.” “아… 그런가?” 수페리우스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몸을 새삼스럽다는 듯이 훑어보았다. 그리고 번쩍 생각난 것을 여러 번 곱씹었다. 후유증. 후유증이 나았다. 그간 연습할 때 두려웠던 후유증이 언제 가신 거지? 다뉴브의 밤 4악장을 작곡했던 그 때? 오 하느님. 이럴 수가. “괜찮아요?” “어? …그래…….” 자기 자신에게 놀랄 때, 사람은 감히 떠들 수 없게 된다. 그 경건한 세상을 지휘하는 자가 남이 아닌 스스로일 때의 짜릿한 스릴은 지난 고통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오늘 밤의 음악회에 갈건가요?” “응? 아니~?” “그래요?” “응….” 꿈을 꾸듯 스스로에게 도취된 채로 수페리우스는 로미오를 스쳐 걸었다. 주머니 속 입장권을 구기며 로미오는 음악에 완전히 몰입한 수페리우스를 아련히 응시했다. 그는 씁쓸한 투로 의미심장한 내용을 중얼거렸지만, 수페리우스는 전혀 듣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네요. 테레사가 최근에 몇 번 쓰러진 것도 모르는 눈치고… 미래의 카운터 테너가 될지도 모를 사람이 음악회에 안 간다는 게…….” wgreene@naver.com ^^ 덧글 27개 엮인글 쓰기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73편(뮤즈 올림픽)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73편(뮤즈 올림픽)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74편 ▼ 다음글 - 아마데우스 콩쿠르 페스티벌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74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11/25 16:02 http://blog.naver.com/wgreene/110011339410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1125 74편 업데) Amadeus 음악 : Un Dia Llegara - Josh Groban (재생버튼클릭) Un Dia Llegara-Josh Gr.. 지금의 열정이 죽는 날까지 잊혀 지지 않도록 해 주소서. 2악장 74편 다뉴브의 밤 4악장은 수페리우스를 잡아먹었다. 그 힘은 러시아의 겨울을 흉내 내는 북유럽의 서리보다 희고 세었다. 수페리우스에게 지상의 것 중 가장 센 몫을 안겨주어서 아이는 모래알에 빠지듯이 정처 없이 가라앉는 것이었다. 그 누구도 혹은 무엇이라도 수페리우스에게서 다뉴브의 밤을 앗아가거나 이기지 못했다. 다뉴브의 밤은 살인귀처럼 수페리우스의 곁에서 자생했다. 로미오가 두어 번 더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곡에 도취된 수페리우스는 결코 그 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로미오는 아쉬운 듯 몇 번 뒤를 돌아보았지만 잠깐의 대화는 이미 끝나 있었다. 한량 바람만이 불어와 마리아 칼라스의 향기를 뽐내었다. 푸른 봄의 대지는 아름다웠지만 사람의 마음이 모두 똑같을 수는 없었다. 누군가의 마음에는 겨울보다 시린 통증을, 이삭이 바스라 지는 열정의 여름을, 또 누군가는 천고마비의 계절을 앓았다. 청춘의 마음이란 그런 식으로 대지의 힘을 비껴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수페리우스가 현실을 잊은 걸까. 황홀한 오페라를 거부하다니? 그러나 굳이 따지자면 현실을 잊은 것도 부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예측할 수 없던 4악장의 창조가 저의 손으로 빚어졌다는 것 때문에 잠시 흥분했을 뿐, 수페리우스는 살인귀처럼 달려드는 다뉴브의 밤과 현실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하는 중이었다. 아이도 알고 있었다. 피터 드 그루트의 음악회를 놓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뼛속 깊이 새겼다. 훗날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마음은 수페리우스에게 지적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자기 훈련과 미침에의 정도를 놓치는 게 훗날 후회하게 될 몫이 훨씬 방대했다. 결국 훌륭한 성역을 지닌 중년의 성악가 피터 드 그루트의 공연이 펼쳐질 때, 수페리우스는 지하 병동에서 고집스럽게 연습을 해 냈다. 누가 보면 어리석다고 할 만한 짓이었지만 아이는 괜찮았다. 자신이 옳다고 여긴 일을 비켜가는 게 훨씬 어리석은 짓임을, 자신은 늘 이런 식이었다는 게 생각나서 괜찮았다. 전교생이 연주회장에 밀집한 가운데, 수페리우스의 피아노 선율이 아마데우스의 후미진 곳까지 구석구석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러나 문득 서러워졌다. 기쁨의 플랫폼을 출발한 기차가 서러움에서 더 이상 달려 나가지 않았다. 기다렸다. 그래도 증기 기관차는 멈춰서 탁한 매연만 뿜어댔다. 수페리우스는 피아노에 뺨을 붙였다. 온 몸의 힘이 쭉 빠지며 팔이 바닥까지 닿았다. 겨우 걸쳐 앉아있던 피아노 의자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페달이 만져졌다. 가만히 그것을 쓰다듬었다. 새삼 마지막으로 식사를 한 게 언제인지 열심히 고민해 보았지만 생각나지 않았다. 증기 기관차가 완전히 정지했다. 눈물이 주룩 흘렀다. 매연 때문인지 기침이 터져 나왔다. 아이는 몸을 움츠렸다. 그 때 적막한 지하 창고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누군가가 사납게 쳐들어왔다. “누구…….” 아이는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피터 드 그루트의 아름다운 음성이 하늘을 찌를 이때에, 누가 찾아온 걸까. 서서히 뺨을 올려야겠다고 생각하던 때, 별안간 몸이 쉭 들어 올려졌다. 아찔한 현기증이 차올라서 아이는 눈앞이 휭휭 돌았다. 토악물이 내뱉어질 뻔했다. “거울 좀 봐 이 멍청아!” “…….” 그리고 아주 익숙한 음성이 찔려왔다. 낮에 헤어졌던 미오가 다시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별안간 사자처럼 들이 닥친 것도 모자라 혜성의 어깨를 세게 쥐고 마구 흔들었다. 아이는 그가 흔드는 대로 몸을 맡기며 희미하게 웃었다. 서러움의 종착지는 웃음일까. 그러나 눈앞으로 무언가가 뚝 하고 지나가는 게 보였다. 가만히 바닥을 응시했다. 두둑. 빗줄기 같은 것이 바닥에 떨어졌다. 수페리우스는 황급히 턱을 치켜 올렸다. 그리고 웃음을 거두었다. 지하의 빗줄기의 정체는 바로, 로미오의 눈물이었기 때문이다. 오, 서러움의 종착지는 웃음이 아닌 눈물이었어. 아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로미오는 울면서 소리쳤다. “이러다가, 이러다가 부서지면 어떡해!” “…건방지구나. 신입생 녀석… 언제쯤 착해질래….” 현기증 때문에 온 몸이 저릿한 상태에서 아이는 꿈을 꾸듯 중얼거렸다. 다시 웃음이 스쳤다. 추를 매단 것처럼 무거워진 마음이 서러운 종착역을 맞이하여 깊게 떨어졌다. 로미오의 얼굴은 홍수 바다였다. 아이는 그의 뺨을 조심스레 닦아주려 했지만 와락 끌어안는 그 덕분에 움직일 수 없었다. 선선한 밖의 바람을 몰고 온 로미오는 흡사 끊어질 것처럼 말라있는 수페리우스가 조심스러웠는지 안는 힘을 약간 풀어주었다. 넓은 어깨를 떨면서 그는 흐느꼈다. “내가 건방진 거 이제 알았…냐….” “…울지 마라.” “…….” 수페리우스는 바른 자세로 서서 안겨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웠다.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피터 드 그루트의 중후한 음성이 귓가에 스치는 착각이 일었다. 서러움의 주인은 혹시 흉터가 아닐까. 아이는 연주와 훈련 내내 집중하느라 잊었던 자신의 흉터를 떠올리며 엷게 미소 지었다. “거울이라… 훈련을 통해서 나도 망각한 것을 너는 자꾸 깨우는구나. 그분도 시력이 다하여 읽지 못하는 상처를 너는 보는구나.” “……?” “거울은 볼 수가 없어. 그렇게 된지는 꽤 됐다.” “!” 뺨의 긴 흉터는 갈퀴처럼 날카로우면서도 깊어보였다. 만지면 보라색 물이 묻을 것처럼 섬뜩했다. 그러나 독일에서부터 지금까지 수페리우스는 상처를 깊게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흉터는 흉터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흉터를 두고 다른 이들이 어떻게 여길까 아예 고민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옆구리를 찔리고 오른팔의 후유증을 걱정하느라 뺨을 등한시하는 척 했던 것 뿐, 그것 또한 흉터의 하나인 것을. 수페리우스는 아침저녁으로 거울을 볼 때마다 측은해지는 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연습할 때면 괜찮았다. 평소처럼 누군가와 대화 할 때면 아무렇지 않았다. 로미오는 괜찮은 와중에 그것을 함부로 파고든 것이다. 고맙게도, 치부를 꺼내 준다. 수페리우스는 자신의 말에 놀라서 경직한 후배의 등을 조심조심 쓸어 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괜찮아….” “…….” 테레사. 그가 나에게 해 주었던 어느 날의 위로가 다른 이에게 전이된다. “나는 괜찮은 거야….” “…….” 이처럼 사람의 언어는 영원히 끊임없이 순환을 반복한다. 지지 않는 삶의 죽음과 탄생처럼…. “그러니까, 너도 괜찮아야 한다….” “!” 큰 바위 얼굴과 건방진 후배의 포옹은 한참 뒤 풀어졌다. 둘은 말없이 헤어졌지만 백 만 마디의 대화보다 값진 무엇이 아로새겨지는 기분이어서 괜찮았다. 피터 드 그루트의 공연이 완전히 끝났을 무렵, 수페리우스는 뺨의 흉터가 아까보다 더 괜찮게 느껴졌음을 깨달았다. 서러움 역에 머물 것을 고집했던 증기 기관차는 다음 역을 향하여 힘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바야흐로 5월 셋째 주가 되자 아마데우스에 또 다른 신선함이 기둥처럼 꽂혔다. 처녀의 입술보다 아찔한 모양새로 울리는 신선함은 아마데우스의 대지를 빨아들이듯이 전교생을 움직이게 했다. 과연 무엇이기에? 콩 쿨이 혹시 앞 당겨진 게 아닐까. 아니다. 만약 콩 쿨에의 소식이라면 그것은 신선함으로 부각 될 리 만무하다. 전혀 다른 것이 화살처럼 쏘였을 때의 경쾌한 박자, 그것이야말로 신선함의 주자가 아니고 무엇일까. 이자벨 장이 자퇴한 가운데 현재 한국의 아마데우스에는 학생회장의 자리가 빈 상태이다. 대다수 학생들은 수페리우스를 주목했지만 생각은 또 다른 길로 쉭쉭 지나치기 일 수였다. 수페리우스가 지금처럼 한국 보다는 수페리우스 라는 이름답게 다른 지역으로 떠나 있을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그러나 한국에만 머물러서 여타 지시를 내릴 입장은 아닐 것이다. 학생들의 이러한 생각을 반영한 것처럼 5월 셋째 주 월요일, 놀라운 가십이 게시 대에 펄럭였다. 꽃처럼 핀 가십의 주제는 ‘투표’였다. 지역 차, 실력, 학년, 여타 기준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자신들이 지지하는-설령 투표하고자 싶은 대상이 신입생일지라도- 학생을 학생회장으로 투표하라는 소식이었다. 콩 쿨 일주일 전의 돌연 투표라니! 기습적인 이 일을 두고 고학년 학생들은 역시 테레사답다며 어깨를 으쓱했지만 신입생들은 폭탄을 맞은 기분을 어쩌지 못한 채 화요일의 투표에 참석했다. 물론 투표에 있어서 테레사는 적당한 선을 고집했지만 이 얘기를 테오제네스로부터 전해들은 수페리우스가 ‘자격 조건’이라는 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투표를 시행하라는 의견을 내세웠고, 골몰하던 테레사가 수렴했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테레사의 기습적인 학생회장 선거 투표 발표와, 또 자격 조건을 파계해 버리라는 수페리우스의 고집이 맞물린 이번 일은 전대미문의 사건으로서 모두를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만들었다. 단 한 순간도 쉴 새 없이, 아마데우스는 붉은 꽃이 잎을 벌리듯이 움직이고, 숨이 막힐 만치 또 움직였다. 열린 투표의 시행, 화요일의 투표는 하루 종일 이어졌지만 기습적인 일인 반면 모두는 반갑게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전교생의 열린 투표이니만치 공약 따위는 생략한 채 무조건 자신이 찍고 싶은 학생을 선출하는 방식은, 투표라는 이름만치 신선하게 다가와서 였다. 푸릇한 봄처럼 훌륭한 누군가가 당선되기를 바라며 수페리우스를 비롯한 전교생은 목요일에 발표될 인물을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그리고 목요일 오전, 평소보다 많은 학생들이 진을 치는 가운데 테오제네스는 따끈따끈한 가십을 부착했다. 게시 대에는 새로이 한국 아마데우스를 이끌고 관리해줄 학생회장의 이름이 번쩍였으며 대다수 학생들은 뜨악스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들이 직접 선출한 학생회장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놀란 눈치였다. 당선자에게 몰린 투표수는 과반수를 훌쩍 넘어 75%의 지지율의 결과를 나았다. 하지만 그 결과에 혹시나 했던 전교생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과연 누가 이자벨 장의 후임으로 뽑혔기에 저리들 놀란 걸까. 투표 결과로 뒤숭숭해진 아마데우스는 5월 셋째 주 일요일이 되자 독이 바짝 오른 것처럼 저마다의 총명함이 반짝이고 있었다. 고된 연습의 반복 때문인지 말 수가 적어지고 입술이 하얗게 튼 수페리우스는 휴일을 맞이하여 친구들과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물론 약속장소는 자신이 연습하는 병동의 지하 창고였다. 이 장소가 자신의 소유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수페리우스는 친구들에게 공개하고 놀러 와도 좋다며 허락하기까지 많이 고민했었다. 껄끄러운 건덕 지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아이는 일주일 앞으로 닥친 콩 쿨의 긴장을 식히기 위해서라도, 또 최근 뽑힌 2대 학생 회장에 대한 신선함을 떠들고 싶어서 친구들을 지하 병동으로 초대했다. “윽.” 코코아와 프림, 그리고 적당히 요긴할 만한 비스킷을 가져 온 동완이 창고에 들어서는 즉시 이상한 감탄사를 터뜨렸다. 낮이어도 기괴한 창고가 저로서는 싫은 모양이었다. 수페리우스는 피아노 뚜껑 위에 엎드려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것을 관두고는 재빨리 코코아와 비스킷을 받아 들었다. “오우 예. 초콜릿이 박힌 비스킷. 어서 와요 동완양.” 창고 공개여부를 두고 언제 고민했느냐는 듯 순간 넘치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며 수페리우스가 비스킷을 쳐들더니 생긋 웃었다. 그러나 시선에 잡히는 족족 폴랑이는 먼지가 싫었던 동완은 코와 입을 움켜쥐고 몸서리를 쳤다. “캑! 먼지! 이게 뭐니? 선배. 우리 다시 나가요.” 다소 진심이 담긴 동완의 투정을 못 들은 척 비켜나오며 미카엘과 프란체스코는 창고 주변을 세심하게 살폈다. 저 쪽 머쓱하게 서 있는 수페리우스가 혹시나 불쾌해 하지 않았으면 싶은 마음에 미카엘은 편안하게 미소 지었다. 게다가 미카엘은 동완이만큼 속의 것을 그대로 꺼내는 유형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창고가 을씨년스럽다거나 낯설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동생 민우가 일전에 이곳 악기들을 자선 단체에 공급했던 사건 때문인지 수페리우스가 병동 지하에서 연습한다는 현실이 외려 반가웠다. “왠지 네가 좋아할 만한 장소구나, 수페리우스.” 뺨의 흉터를 측은하게 응시하던 미카엘이 재빨리 표정을 바꾸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네. 빛이 거의 없어서 그런지 집중하기가 쉬워요, 미카엘 선배.” “바, 바, 바, 바바밥. 바바바바밥은, 머, 머거, 머거, 머머머머겄.” 뭐가 튀어나온 것도 아닌데 장소가 지하 창고라는 것 때문에 긴장한 프란체스코가 영락없이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오늘은 도둑도 없고, 낮이니까 편하게 놀다 가요, 프란체스코.” “어? 어, 어, 어어.” 기숙사에 소문이 있던 때, 이곳까지 함께 찾아왔던 프란체스코에게 있어서 지하 창고는 그 닥 기분 좋게 기억할 만한 곳이 못 되었나 보다. 그는 연신 주변을 찌를 듯이 살피며 통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페리우스와 바닥에 두런두런 앉아서 각자의 사소한 이야기를 떠들던 그들은, 곧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최근의 투표 건을 화제로 삼기 시작했다. 미카엘의 눈치를 살피던 혜성이 가볍게 입을 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선배한테 축하한다고 대신 말해야 하는 걸까요?” “글쎄…….” 그러자 조용히 앉아서 온 몸을 둥글게 말고 있던 프란체스코가 버럭 소리치며 나섰다. “워싱턴이 뽑힐 줄은 몰랐어!” 오랑우탄처럼 양 주먹으로 가슴을 두들기던 그는 곧 미카엘의 눈치를 보더니 처음보다 말이 없어졌다. 코코아를 홀짝이기만 하는 동완의 옆구리를 괜히 찌르던 혜성이 조심스레 그 얘기로 파고들었다. “저도 놀랐어요. 테레사가 아무리 제한을 파괴했다고 해도, 로미오가… 아니, 민우가 뽑힐 줄은 전혀 예상도 못했거든요.” 자격 파기 건이 자기로부터 빚어졌음을 끝끝내 밝히지 않기로 한 혜성은 진정 놀랐다는 듯이 굴었다. 좁은 창가로부터 쏟아지는 일요일의 햇살이 그들의 머릿결에 반짝였다. 오래된 악기처럼 느긋한 휴식을 취해도 좋다며 마리아 칼라스의 향기까지 담은 햇살은 쉼 없이 굴러들어왔다. “너는 누구를 찍었는데, 수페리우스?” 미카엘은 대수롭지 않은 척 반문했지만 약간의 방어적인 자세는 끝끝내 굽히지 않았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별안간 로미오라니? 하지만 이들이 기겁하며 떠들듯이, 한국 아마데우스 학생들은 서로 만나기만 하면 투표 결과에 열을 올려야 했다. 콩 쿨 때문에라도 앞당겨진 투표의 결과, 그 주인은 바로 신입생 워싱턴, 희대의 반항아 로미오, 건방진 조던, 이민우였기 때문이다. 수페리우스는 미카엘의 질문이 떨어지는 즉시 몸을 사리며 움츠렸다. 자신 역시 이상하게 이민우 외의 인물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게 군중심리라는 거야.” “?” 마침내 동완이 나서서 중재하기 시작했다. 방어적으로 구는 미카엘과 자꾸 캐묻고 의구심을 좁히지 못하는 수페리우스와 프란체스코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서였다. “군중심리?” “왜?” “그러게, 왜!” 세 사람이 동시에 버럭 소리치는 통에 메아리는 한참동안 창고를 들썩였다. 동완은 긴 숨을 내쉬더니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새소리보다 정겨운 젊음의 합창은 짙어져간다. “친구가 아니라, 대표를 뽑는 거니까 당연하지.” 인간의 심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내보이면서도 동완은 스스로도 신기하다는 듯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선한 자를 평소에 좋아하면서도, 자신들을 이끌 사람은 선해서만은 안 된다고 여기거든. 사람은 그래서 이상하고, 신기하지.” “!” “군중은 솔직한 답변을 한 거야. 암암리에 퍼진 오르페우스 관 폭파의 주인공. 반 아마데우스가 밝혀지고, 그 인원이 하나 둘 펼쳐지면서 신입생 워싱턴이 그 안에 속해 있다는 게 애들은 충격이면서도 이상하게 신선했겠지. 어떤 애들은 이민우를 영웅 보듯이 하더라. 오르페우스 관이 완전히 폭파 될 뻔 했는데도, 기개가 대단하다고 여겨서.” “아…….” “혁명 때도 군중심리가 작용 한 거라면, 이번 에는 보이지 않게 작용한 거라고 볼 수 있지. 각자의 마음속에는 분명히 다른 애들은 내가 이민우를 찍을 줄 모를 거야-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투표였거든. 또, 비록 소문일 뿐이지만 반 아마데우스에서 이민우 말고는 그런 짓을 할 사람은 없었을 거야- 라는 각자의 추리가 사실은 비슷했다는 것.” “비록 사실이지만, 애들한테는 소문인데도?” 급하게 끼어들어 질문을 던지는 순간, 혜성은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질문을 후회했다. 동완이도 혜성의 표정변화를 보며 대강 속을 아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듯이 소문의 힘을 수페리우스는 겪어 봐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문은 사람과 단체를 움직이게 만들고, 적개심을 키운다. 그것은 실제보다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눈을 흐리는 수페리우스를 지그시 응시하며 약간의 텀을 준 뒤, 동완이 힘을 주어 말을 잇는다. “소문이기 때문이지. 거의 모든 소문은 사실을 반증한다는 것을 다들 아니까. 봐. 부정하고 싶어도 신선한 워싱턴의 등장과 실제는 돋보이잖아? 시기도 그럴싸하지. 폭파 때 사상자가 없었으며, 또 샤우트와 싸운 것은 폭파 주범인 반 아마데우스였으니까.” “!” “나 하나쯤이야- 라는 마음이 혼자일 땐 얌체 같다-에서 그치지만, 그것이 한 데 묶이면 거대한 회오리가 되는 거야.” “!” 동완의 유창한 언변이 지속되는 족족 그는 자신이 내로라하는 화재에 신이 났는지 양 쪽 눈을 반짝이며 가끔은 손을 휘저었다. 심리학과 관련된 주제를 꺼낼 때의 동완이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지금처럼 말이 많아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평소와 같이 툭툭거리지도 않고 화자에게 빨려 들어가게끔 유도한다. 잠잠한 호수가 저의 몸을 움직여서 바다를 찾는 우람한 몸놀림과 비슷했다. 그것은 그의 천부적인 능력이 아닐까. 만약 정답이 아닐 지라도 그와 대화 하다 보면 혜성은 늘 그의 말이 다 옳은 줄로 착각한 적이 상당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말이 확실하게 맞을 것이다. 미카엘 선배와 프란체스코도 동의하는 걸 보면……. 한꺼번에 긴 얘기를 꺼낸 탓에 목이 말랐는지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켠 뒤, 동완은 괜스레 킬킬대며 최후 일격을 가했다. “또, 걔는 스포츠맨에 꽤 잘생겨서 인기가 많은 것도 작용했겠지만.” “!” “!” 인기! 또래가 모여서 공동으로 생활한다면 당연히 자극의 요소가 되는 인기, 그것을 무시할 수 없다. 실제로 테레사만 보고 무조건 아마데우스를 선택했다는 학생들도 얼마나 많았던가. 다들 그 얘기에 진심으로 공감한다는 듯 시키지도 않았는데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둘러서 2대 학생 회장의 좋은 점들을 앞 다투어 떠들기 시작했다. “좀 잘 생기긴 했어. 애가 하는 짓이 유별나기도 하지.” “맞아. 걔가 내 동생이라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좀 개혁적인 면이 옛날부터 있었어.” “역시 그렇군요. 반항아인척 하는 게 아니라 진짜 반항아처럼 보일 때가 있어요.” “그렇지? 걔가 키만 큰 게 아니라니까.” “신입생답게 조신하기 보다는… …반 아마데우스에 속한 것만 봐도 전교생의 시선을 끌었겠지.” 그러나 곧 침묵이 그들 주변을 에워쌌다. 평소에는 화제에 오르지도 않던 인물을 줄줄이 떠들고 있음을 자각해서인지 약간의 침체기도 보였다. 동생의 일에 들떠서 맞장구를 치던 미카엘도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 “…….” 오직 동완이만이 그들이 왜 갑자기 로미오를 옹호하게 되었는지, 또 학생들의 심적 변화가 왜 있는지 다 알고도 남는다는 듯 혀를 찰 뿐이었다. 그들은 곧 붉어진 낯으로 바짝 모여서 아주 작게 속삭였다. “여기에 워싱턴이 없어서 다행이다.” “…응.” “그러게요.” “방금 마지막 얘기는 우리들끼리 비밀로 하죠.” “그게 좋겠어.” “대 찬성 이예요.” 어쨌든 그들에게 있어 꿀처럼 달콤했던 마지막 휴일이 끝나가고 있었다. 5월 넷째 주 목요일, 드디어 콩 쿨 하루 전이 되자 테레사의 유들 한 태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수페리우스와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인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콩 쿨 준비에 열을 올리는 테레사의 신경은 아주 날카로워 있었다. 하루 종일 소리 지르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그는 지나치는 길목마다 힘차게 지시를 내렸다. 히스테리칼하지만 주변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그의 음성은 박력으로 넘쳐났다. 빠르게 걷던 테레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A동 지하 리허설 관 곳곳을 지나던 중 오른손을 치켜 올렸다. “정오가 되면 창문을 열어라! 이곳은 사람이 없어도 항시 악기가 숨을 쉬고 있다!” “!” 번잡한 와중에도 칼같이 소리치는 통에 주변 학생들은 숨을 죽이고 동상이 되거나 헐레벌떡 그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여야만 했다. 테레사는 수 십 수 백 번을 지나치며 감독한 덕분에 시력이 있는 그들보다 훨씬 쉽게 걷고, 외쳤다. 리허설 관 복도의 끝에 다 달을 무렵, 이번에는 또 뭐가 문제인지 그가 휙 뒤를 돌아보더니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커튼을 쳐라! 나조차도 볕이 환한데 일반인들에게 A동의 벽화가 보일 거라 여기는가!” 뻥 뚫린 원형의 복도 벽이 그의 음성에 놀라서 움찔대는 듯했다. 이크! 불호령이 끝나는 즉시 학생들은 서둘러 커튼을 치기 시작했다. 벽화라니? 다들 바쁘게 움직이는 통에 흔한 벽화 따위가 빛에 바래진다는 것 즘은 문제도 아니었는데? 아니지. 보이지도 않았으며 신경 쓸 가치조차 없던 것을 테레사는 세세하게 파고들고 지적하는 것이다. 추르르륵 추르르륵. 거대한 넓이의 커튼이 모두 닫혀서야 테레사는 곧은 자세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팸플릿을 입체적으로 한 부 씩 만들어서 가져 와라 테오제네스! 그러면 나도 읽을 수 있다. 직접 확인하마!” 하지만 그는 곧 막 생각난 것을 골치 아프다는 듯이 테오제네스에게 말해야 했으며, 주의사항을 열심히 적으며 따라다니는 집행위원들의 기를 죽였다. A동에 오기 전에 들렀던 대 연주회장에서는 어땠던가! 위원들은 연주회장 이라는 글자만 떠올라도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곳에서의 테레사도 지금과 별 반 다를 것 없이 마왕처럼 섬뜩했다. S석의 의자를 다 뽑아내고 싶지 않다면 정성을 다 해 다시 손잡이부터 닦아라! 조잡한 장식으로 회장 복도와 좌석 길을 막지 마라! 그것은 전혀 멋있지 않고 경박하다! 겉모습이 화려해야 된다! 좌중은 바보가 아니다! 일차적인 압도가 있어야지 음악에 동화되기 쉬운 게 사람의 감수성이다! 어이 4층! 향을 뿌리지 마라! 음악으로부터 향기마저 느낄 수 있도록 연주회장은 이미 웅장하다! 건축 구조를 생각하고 움직여라! 이 대형 건물은 전혀 조잡스러울 필요가 없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완벽을 요하는 테레사의 진행사항이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테오제네스가 팸플릿 건을 두고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하려던 찰라 이번에는 눈썹을 움찔댄 테레사가 늘씬한 자태를 완전히 뒤로 돌리더니 카랑카랑하게 외쳤다. “3번 오케스트라의 수석 바이올린 녀석이 누구냐!” “예?” 3번 오케스트라? 대여섯 명 위원들은 아리송해 하며 서로를 마주쳐 보았으나 답을 알 수 없었다. “소리가 이상하잖아! 송진이 더덕이로 쌓인 소리인데?” “아….” “저 놈들은 튜닝 하는 법도 모르는 건가?” “…….” 팸플릿 건으로 대답하려던 테오제네스를 비롯한 일행들은 기가 죽어서 테레사의 시선을 피했다. 물론 그가 시력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찌르는 듯 움켜보는 시선은 살벌했기 때문이다. 그의 지적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바로, 막 지나친 미니 리허설 관에 옹기종기 모여서 막바지 연습에 한창인 3번 오케스트라 단원들 중에, 그것도 바이올린을 지적하고 있어서였다. 수 십 수 백 명이 지나가는 번잡하고 시끄러운 이곳에서, 다른 사항들을 지시하던 테레사가 그 점을 쩌렁 쩌렁 울리다니. 그가 묻는 족족 흔들림 없이 대답하기로 유명한 테오제네스조차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먼 곳을 쳐다보았다. “어이! 저 놈들은 리허설이 이르다. 방금 지나친 리허설장의 녀석들 중에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전해라. 지금 실력으로는 어림없으니 리허설을 뒤로 미루라고.” 약간 누그러진 음성이 단호하게 이어지자 개중 용기 있는 집행 단 녀석이 불쑥 끼어들었다. “이렇게 시끄러운데… 화음이 들리셨나요?” “꽃이 좋겠군.” “?” 하지만 용기 있는 녀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곧 다른 것을 생각해낸 테레사는 서둘러 오른팔을 허공에 가르며 다른 지시를 내렸다. 그의 성대가 움직일 때마다 험난한 파도가 출렁이는 것처럼 모두는 긴장했다. “별채를 감독하는 정원사를 초빙해라! 그들의 솜씨가 좋으니 장미꽃으로 백색 야외 홀을 꾸미라고 해!” “…….” “…….” “복도가 썰렁해서는 안 된다! 여기야말로 콩 쿨의 기대치와 맞닿아 있다는 걸 증명해 봐! 병동 지하 악기 중 도저히 안 되겠는 것들을 길마다 세워 놓고, 전시장을 걷는 기분이 들게 만들어라! 그 옆에 팸플릿을 배치 해!” “…….” “…….” “난잡해서도 안 된다! 흙처럼 촘촘하게 장식 악기를 세우지 마라! 그리고 여기 쓸데없이 천정을 장식한 종은 치워라! 걷고 대화하는데 종소리 따위는 필요 없어!” “…….” “…….” “아까 지나쳤던 연주회장과 A동을 비롯해서 전체를 장미꽃으로 통일시키면서 종은 전체를 다 떼버려! 누구의 아이디어 인지 모르지만 형편없다! 연주자의 것 외에 다른 소리를 조금이라도 나오게 하면 안 된다!” 완전히 겁에 질린 학생들은 서로 눈치만 보았다. 자신들이 대답해 봤자 무섭게 불호령을 내리는 테레사가 두려워서였다. 그들의 속마음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테레사는 A동 밖으로 나올 때가 되어서야 언제 히스테리칼했냐는듯 가볍게 등으로 말을 걸었다. “잘 따라오고 있나, 토끼들?” “…….” “아까부터 왜 대답을 안 하는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 “빨리 말하느라 일일이 고개를 끄덕여주지 못했을 뿐이지 너희들의 대답이며 적는 소리들은 모두 듣고 있다.” “!” “하하하… 제군들. 그래서… 지금까지 사항들을 잘 받아 적었나!” 싱긋 웃는 그의 움직임에 비로소 안심한 집행단원들은 순간 화색이 돌아 크게 합창했다. “예!!” 쥐락펴락에 능한 테레사가 그렇지~! 라고 장단을 맞춰주자 그들은 언제 주눅 들었냐는 듯이 숨겨둔 날개를 활짝 펴고 이것저것 그에게 보고할 사항을 조심스레 전하기 시작했다. 테레사의 불호령에 어긋나지 않도록 아마데우스 내부는 전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병동의 지하 창고도 마찬가지였다. 오래 되서 소리가 좋지 않지만 기품을 잃지 않은 악기들을 복도 팸플릿과 길목마다 동상처럼 세우라는 테레사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 인부들과 학생들이 찾아 와서 였다. “…테레사가…?” “응? 으응. 저어… 괜찮니, 수페리우스?” “……그래.” 가볍게 미뉴에트를 누르던 건반에서 손을 뗀 뒤 수페리우스는 자리를 피해 주었다. 아이는 자신에게 괜찮으냐 묻는 내용이 과연 자리를 피해 달라는 것인지, 아니면 뺨의 상처가 괜찮냐는 것인지, 혹은 아파 보이는데 괜찮냐는 것인지 통 알 수 없었다. 학생들은 왼 뺨의 흉터를 없는 척 굴며 수페리우스를 정답게 보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사소한 질문에도 신경계가 발동하기 마련이다. “연습해야 되는 거 아니니? A동도 지금 자리가 없을 텐데…….” 조용히 서 있는 수페리우스가 가여웠는지 북을 나르던 소년이 말을 걸어왔다. 수페리우스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을 전했다. 연습은, 끝났다. 아니다. 연습이란 끝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일을 앞두고 오늘 하루는 근 몇 달 혹사당한 손가락에 충분히 휴식을 취해 줘야만 했다. 내일의 컨디션이 어떨지 모르는 이상 몸을 함부로 굴린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오래 전 아무것도 모르던 애송이 시절에는 어땠던가. 일반인의 콩 쿨 당일까지 몸을 혹사시킨 탓에 결국 팔은 전류로 감전된 것처럼 내 것인데도 쉬이 움직여지지 않았었다……. 그런 후회는 두 번 다시 저지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수페리우스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조용히 병동 밖으로 나왔다. 선선한 저녁 바람이 뺨에 달라붙었다. 인부들과 힘껏 악기를 나르는 학생들의 구슬땀이 아름다웠다. 이윽고 자신이 굳건히 앉아서 매달려 연습했던 피아노가 밖으로 나오자, 혜성은 잠시 몸을 떨었다. 발끝부터 저려오는 묘한 감정이 체증처럼 매달려서 떨어지지 않았다. 울컥 하고 목울대가 떨릴 때 즈음 눈시울이 붉게 타들어갔다. 수페리우스의 감수성이 천 갈래로 뻗어 가듯이, A동을 지나 백색 야외 홀 쪽으로 걷던 테레사 역시 낙엽처럼 떨어지는 묘한 감정이 꼭대기부터 눌려서 걸음을 멈춰야 했다. 병동의 담홍색 노을 아래 서서 눈시울을 붉힌 수페리우스가 조용히 지평선 너머의 태양을 올려보았다. 두 갈래의 숲길 사이를 가로지르는 웅장한 강물, 수평선 끝을 적시는 적색의 태양이 있는 쪽으로 분명히 몸을 돌리는 테레사도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서로 다른 장소이지만 비슷하게 태양을 향하는 때, 시끄럽고 번잡하지만 열정적인 학생들이 휙휙 스치는 소리가 온 몸으로 느껴졌다. 별안간 숙연한 자세로 태양을 올려보는 수페리우스를 인부들은 조용히 스쳤다. 강인한 힘을 자랑하는 강물 끝 햇살을 온 몸으로 부딪히는 테레사를 그를 따르던 집행단원들은 조용히 기다렸다. 태양에 직각으로 턱을 맞추며 테레사는 강물의 소리에 집중했다. 그리고 마음을 다 해 떨리는 소리를 빚었다. 지금의 열정이 죽는 날까지 잊혀 지지 않도록 해 주소서. 병동 지하의 악기들이 비로소 숨을 쉬는 장면을 지켜보며 치밀어 오르는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던 수페리우스가 주먹을 불끈 쥔 채 더더욱 턱을 치켜 올리며 그 역시 떨리는 소리를 빚었다. 흉터가 아닌 나의 또 다른 훈장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인도하소서.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그것은 사계절의 매력을 한 데 섞은 것처럼 묘한 흡입력이 있었다. 바람은 다시 수페리우스의 기도를 안고 반대쪽 강물로 달려갔다. 테레사의 암회색 눈동자가 떨릴 때 마음은 홍수처럼 터져 나왔다. 젊은 우리들의 현재를 무르익게 하소서……. 그리고 수페리우스로 바람은 다시 스쳤다. 결코 나태해지지 않도록 이끌어 주소서……. 가끔은 둘을 동시에 스치기도 하는 바람의 세기가 짙어질 때, 테레사는 아름다운 자신의 아마데우스를 하나 둘 떠올리며 강직하게 마음을 꺼냈다. 영원히 배움을 늦추지 않도록 늘 부족함을 느끼게 해 주소서…. 수페리우스의 음성도 섞일 때, 둘의 것 중 무엇이 먼저인지 이젠 하늘의 신도 알 수 없어진다. 하지만 허황된 꿈을 좆지 않도록 어리석은 망상은 물리쳐 주시옵시며…. 수페리우스의 다정한 애원에 끼어드는 테레사의 강직함이 있다. 이 작렬하는 태양 아래 작은 먼지보다 못한 우리들이 지르는 소리를 귀담아 주시옵시며…. 약간 누그러진 테레사의 마음처럼 병동 밖에서 태양을 응시하는 수페리우스의 마음도 서서히 약동하고 있었다. 아이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마음으로부터 소리를 빚었다. 기쁨을 표현하는 능력을 상실치 않게 하소서… 감동은 표현하라고 있는 것임을……. 강물이 세게 흔들린다. 테레사의 음성이 지지 않고 자생할 때, 당신께서 주신 감각을 속으로 혼자 감추지 않고 항시 느끼고 표현하게 하소서…. 그의 음성에 기대어 같은 하늘을 응시하는 수페리우스의 성대가 떨렸다. 우리들이 얼마나 총명하고 아름다운지 항상 자각할 수 있도록…. 모두가 숙연해지도록, 아마데우스의 아마데우스는 지금의 기도를 쉬지 않는다. 지금의 행복을 위협하며 다가오고 있을 앞으로의 고통을 충분히 내려주소서…. 모두가 강해지도록, 아마데우스의 수페리우스 역시 고통을 선언하리다. 성장의 뿌리가 단단해지도록 가끔은 지옥을 펼쳐주소서…. 둘은 곧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각자 다른 곳에서 진행된 같은 시간의 기도, 마음의 음성은 서서히 끝을 보이고 있었다. 당신이 허락하신 지금의 삶에 충실하며 나 테레사 전 진은, 당신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삶을 걸어가는 나 수페리우스 신혜성은, 경건한 의식처럼 진행되는 떨리는 몸을, 그 빛을 인부들과 집행단원들은 각자의 장소에서 말없이 응시하며 저도 모르게 그들처럼 허리를 숙였다. 저 태양을 증인으로 삼아 기도합니다……. 마음으로 땅 끝까지 허리 숙여 기도합니다……. 강물과 대지를 빨아들인 저녁 바람은 그렇게 하나로 뭉쳤다. 그래서 강물이 잠시지만 흐름을 멈추고 대지로 이탈했다. 촘촘히 박혀있던 모래알이 강물로 떨어졌다. 장엄한 빛에 쏠린 이삭은 가을처럼 나부꼈다. 그리고 멀리 시계탑의 종이 울리고 있었다. 담벼락을 붉게 태우던 장미꽃은 아마데우스 내부 곳곳에도 자리했다. 그들은 바닥부터 천정, 하물며 공기까지 차지하고 앉았다. 백색의 야외 홀은 붉은 피를 흘리듯이 꽃으로 넘쳐났다. 많은 이들이 감탄하는 것 중의 하나는 테레사가 최후에 지시했던 악기 전시였는데 길목이며 복도에 빠짐없이 세워진 모양새는 아주 멋스러웠다. “분수대에도 장미 물결이야!” “아아, 드디어 오고 있어. 시간은 닥치고야 말았어. 늘 이런 식이지만 이번 경우는 훨씬 빨랐는걸.” “고작 몇 시간 뒤면 장미 문이 열리고 여러 명이 각자 나라에서 찾아오겠지? 왜 이렇게 흥분될까!” 분수대의 물은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세상을 거스르고 있었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꾸민 터전임에도 불구하고 즉각 감탄사를 터뜨리며 오전부터 쉬지 않고 들떠 있었다. 뾰족한 중심부로부터 둥글게 퍼진 C동의 지붕에도 붉은 꽃이 한국을 펼쳤다. 눈을 돌리면 바로 감탄사가 각기 다르게 터질 만치 아마데우스는 페스티벌에 걸 맞는 곳으로 변화되어 있었다. 영어 통역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는 행사 순서는 순 한국말로 이어질 것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제 이곳은 더 이상 변방의 국가가 아니었다. 당신의 자랑스러운 한국 아마데우스일 뿐이다. 5월 넷째 주 금요일 오후 한 시가 지날 무렵 슬슬 모여드는 일반인들과 초대 명사들의 숫자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있었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장미 문에서는 개선 행진곡이 연주되었다. 은은한 봄을 연주하는 플루트과 7학년들이 두 줄로 길게 늘어서서 일반인들을 환영했다. 비록 연주는 짧게 처음 부분만 장식했지만 영원히 기억해도 좋을 추억이 될 것이다. 첫 날 개막식을 앞두고 기자회견과 심포지엄이 B동에서 열렸다. 비록 짧은 시간 내에 치러졌지만 각 나라의 기자들과 인쇄매체 인파들이 삽시간에 회견장을 가득 메웠었다. 무대에 설 각지 아마데우스 학생들과, 또 그들의 교수님들, 교환 학생 자격으로 참관하게 된 큰 무리의 학생들은 하나같이 공항에서부터 아마데우스까지 끊임없이 행렬을 이뤘다. 오만한 표정으로 이곳을 찾은 초대명사들은 수려한 한국의 자연과, 테레사가 일군 한국 아마데우스의 자긍심과 아름다운 모습에 결국은 극찬을 쏟아내며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구름떼 한 점 없는 하늘은 더더욱 봄 콩 쿨의 성대한 막이 올리도록 쾌청했다. “유, 유, 유지 신. 유지 신이다!” “정말 유지 신이다!” 한국의 예식 복을 입은 학생들은 서쪽 기숙사 창 밖에 달라붙어서 믿기지 않는다며 비명을 질렀다. 그도 그럴 듯이 분수대와 사람들이 많은 쪽에 있어야 마땅할 유지신이 으스스한 서쪽 기숙사 주변에 불쑥 나타난 게 놀라워서였다. 그의 성향을 가십으로 읽어서 상세히 알고 있는 학생 몇 명이 젠체하며 구는 통에 유지 신을 두고 작은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들이 흥분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싸움은 순식간에 그쳤기 때문이다. 들뜬 기분을 어떻게든 표현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젊은 그들에게 닥친 오늘은, 참말로 눈이 부시고 버거웠다. 낯선 한국까지 와서 유독 조용한 곳만 무심한 눈동자로 거니는 유지신은 정작 자신을 두고 학생들이 흥분하고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새 다른 곳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가장 시끄러운 곳은 곧 개막 행사가 열릴 연주회 장이었다. 테레사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천정을 뚫어 버릴 것처럼 위협스레 울리고 있었다. 그는 시력이 없어도 누구보다 이곳의 구조를 꿰뚫고 있는 유일한이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맹인으로 읽지 않았다. “더 올려라! 어차피 주변에 조명이 상당해!” 스르르륵- 연주회장의 샹들리에를 한도 끝도 없이 올리라고만 하는 테레사에게 완전히 주눅 든 인부가 겁에 질린 채로 꼭대기에서 꽥 소리쳤다. “여기서 조금만 더 하면 끝입니다!” “그럼 끝까지 해!” “힉!” 천정에 붙박인 샹들리에를 볼 순 없어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테레사가 보스턴 아마데우스 건축 당시를 떠올리게끔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선택은 언제나 탁월하지만 이번은 유독 특출 났다. 장미꽃 장식 못지않게 샹들리에를 벽에 박힌 것처럼 번쩍이게 하자 연주회장 내부는 훨씬 깔끔하면서도 신비롭게 바뀌어서였다. 한 시간 뒤, 리허설에 참여할 첼로 부 학생들이 대기실로 입장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테레사는 관자놀이의 땀을 닦아내며 밀림의 사자처럼 쾌활하게 웃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테레사! 히스클리프가 선배를 찾습니다!” “히스? 그놈이 벌써 왔나?” 집행단원 중 한 명이 당혹스런 낯으로 후다닥 달려와서 소리쳤다. 로얄 석의 상단에 서서 조명과 샹들리에를 확성기에 대고 지시하던 테레사가 무덤덤한 투로 반문하자 막 달려온 치는 발을 동동 굴리며 대답했다. “예. 그게… 왜 자기가 왔는데 수페리우스도 테레사도 안보이냐면서 막 소리 치기에…….” “하하하… 그 녀석은 원래 왕자다. 냅둬.” “예? 선배 모셔오지 않으면 칼로 베어버린다고…….” “괜찮다. 지금쯤 빨빨거리면서 다른 곳에서 소리치고 있을 테니.” “그래도…….” 히스가 두려우면서도 신기한 지금 녀석을 시작으로 곧, 히스가 시켰다며 심부름을 온 녀석들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테레사가 연주회장에 있는 줄 분명히 아는 히스가, 부러 한국 아마데우스 학생들에게 귀여운 장난을 치는 모양이다. “으엿~차!” 긴 사다리를 내려오던 중 테레사가 멋지게 점프하며 바닥에 섰다. 그러자 또 다른 놈이 히스가 시켰다면서 창백한 몰골로 달려오는 것이다. “무시 해.” “!” 아까와 별 반 다를 것 없는 대답을 한 뒤, 테레사는 자신의 대답에 완전히 질려버린 선량한 학생을 뒤로 한 채 지팡이를 짚으며 무대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 때 이번에도 히스의 심부름을 왔는지 누군가가 테레사의 뒷깃을 살짝 잡아당기는 게 아닌가. 마침내 짜증이 난 테레사가 휙 몸을 돌리며 히스테리칼한 소리를 질렀다. “히스는 무시 하라고! 그 녀석은 원래 장난이 심하니까!” 그러자 아주 반가운 음성이 시원한 바람처럼 맑게 청각을 두드린다. “독일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무시해요?” “…….” “선배. 더워요? 땀이 진짜 많이…….” “…….” 얼마 만에 다시 만나는지 숫자를 세기도 싫은 사람, 수페리우스였다.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린 테레사가 이상한 표정을 짓더니 불쑥 허리를 숙였다. 많은 이들이 오고가며 그들을 주목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집중하느라 무대 주변 상황을 신경 쓸 수 없었다. 오전부터 이상하게 보고 싶었던 테레사를 결국 찾아낸 수페리우스는 별안간 자신의 뺨과 맞닿을 만치 고개를 숙인 테레사가 당황스러웠다. 아이는 휙휙 주변을 둘러보며 뺨을 붉혔다. “선배…….” “…….” 묵묵히 고개를 숙인 테레사는 대답이 없었다. 아이는 그의 상체를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해 마구 머리칼과 어깨를 잡아당겼지만 그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이럴 수가. 차라리 말을 걸지 말걸. 마구 지시하는 모습이 괜히 멋있어 보이고 또 눈물 나게 반가워서, 나 또한 오늘에 흥분해서 다가왔던 건데. 이게 뭐야. 다 쳐다보잖아. “…….” “…서…선배…?” 아이가 당황 하는 대도 뚝, 뚝. 땀을 떨어뜨리기 바쁜 테레사는 야속하리만치 허리를 숙인 채 근사하게 입 꼬리만 올리는 중이었다. 어떡하지? 한 대 치고 달아날까? 테레사에게 더 맞을지도 모르지만. 작은 머릿속에 수만 가지 발상이 휙휙 스치는 가운데, 별안간 그의 이상한 행동이 이어졌다. “……닦아주세요.” “…네…?” “나는 앞이 안보이니까 땀이 많이 나는 줄도 몰랐잖아. 그러니까 빨리 닦아 내.” “!” 역시 괜히 말을 걸었어! 앞이 안 보인다는 치사한 변명을 대는 테레사라니! 아이는 자꾸만 자신들을 주목하는 학생들과 시선이 마주치는 족족 흠칫 놀라면서 서둘러 그의 땀을 작은 손바닥으로 닦아냈다. 그의 땀이 저의 피부에 흡수될 때마다 묘한 설렘이 스쳤다. “…….” “…….” “오늘… 우리의 기쁨이… 감동이… 태어나는 거예요….” “…….” 눈물 나게 아름다운 사람, 이 사람을 영원히 사랑할 수 있도록 힘을 주소서. 새삼스러운 기도가 마음의 문을 열고 하늘로 달아났다. 수페리우스는 열심히 그의 젖은 머리칼을 치워가며 땀을 닦았다. 금방 젖어버린 손바닥으로 닦아 봤자 무용지물이지만 테레사는 묵묵히 허리를 숙인 채 정지했고, 바람조차 도망친 현재, 수페리우스는 그의 강직한 뺨과 목을 얼렀다. 땀이 약간 닦인 뒤, 기분이 좋아진 테레사가 번쩍 고개를 쳐들고 허공에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또 왜 이러는 걸까. 차라리 도망가리라 마음먹은 혜성이 슬슬 뒷걸음질 치려는 때, 누군가가 멀리서 세 시간 남았습니다-! 라고 소리쳐왔다. 도망가려던 마음은 현실을 알리는 소리에 완전히 멎었다. 그것은 테레사도 마찬가지였는지 당장 혜성의 손을 더듬더듬 잡아서 움켜쥐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어이.” “……어이?” 상당히 기분이 좋은 테레사가 웃음을 참아가며 휘파람을 불었다. “너는 손을 잡아줘야지 잡는 건가.” “선배는 먼저 손을 잡아주지도 않는 건가요.” “…….” “…….” 손을 마주잡은 채로 걷는 내내 둘은 마음과는 달리 무뚝뚝한 투를 내뱉었다. 그러나 들뜬 오늘과 마주친 현재가 주는 즐거움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마침내 텅 빈 대기실 중 한 곳을 찾아낸 둘은 서둘러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아무 말 없이 장시간 부둥켜안으며 길게 호흡했다. 마음은 쉬지 않고 서로를 확인했다. 다뉴브의 밤을 연습하느라 힘들었지. 혹은, 보고 싶었어. 혹은, 집행위원으로서 많이 바쁘셨지요. 혹은, 보고 싶었어요. 채 쏟아내기 아까울 정도의 무궁한 언어를 삼키며 두 사람은 가슴 떨리는 오늘, 한 결 같이 껴안고 체온을 확인했다. 영혼의 교감은 의식이 필요치 않았다. 서로 만나는 현실이 더없이 소중했기 때문에 둘은 오랜만의 인사와 포옹이 눈물 나게 행복했다. 발바닥부터 떨려오는 전율, 그리고 포옹. 머릿속이 터져 나갈 것 같아. “궁금한 게 있어요.” 그의 품에 안긴 채로 바싹 마른 혜성이 바시시 웃었다. “해.” “…….” 하지만 더 할 나위 없이 짧은 테레사의 대답이 이어지자 혜성은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아이는 그의 품에서 꼼지락 거리던 것을 관두고 불쑥 빠져나와서 한 걸음 물러섰다. 허공을 더듬거리는 척 하던 테레사가 그럼에도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는 혜성이 괘씸했는지 아까보다 더 세게 잡아당기더니 꽉 껴안았다. 그리고 왜 갑자기 심통 맞게 구느냐는 듯 작게 몸을 흔들었다. 쾅쾅쾅. 대기실 밖을 뛰어다니는 진행 요원들은 열심히 테레사를 찾느라 분주했다. 테레사! 로제리오 교수님이- 테레사! 히스가- 테레사! A동의 악기 몇 개가- 테레사! 남쪽 기숙사에 온 다른 학교 학생들이 지금- 테레사! 식당에 자리가- 테레사, 테레사, 테레사! 세상의 글자는 테레사 밖에 없었다. 수페리우스를 품에 안은 채로 결국 테레사는 시간에 쫓겨 속의 것을 입으로 내뱉었다. “왜?” “그렇게 쌀쌀맞게 대답하면 질문하기 싫어지잖아요.” “?” “…됐어요.” “?” 테레사-! 숱한 사람들이 그를 찾고 있었다. 아이는 샐쭉한 표정으로 그의 품에서 벗어나며 휙 뺨을 돌렸다. “가요.” “기다려.” “…….” 그러나 이번에도 아이의 팔을 붙잡는 테레사의 행동이 이어졌다. 그는 굉장히 당황하는 중이었다. 아까 만났을 때, 다른 때와는 달리 필요 이상으로 땀을 많이 흘리는 그가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테레사는 난처함을 감추지 않고 표정에 보였다. 질문할 게 있다는 혜성에게 해 보라고 대답한 것뿐인데, 난데없이 차갑게 구는 아이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당혹스런 낯으로 변한 테레사가 진땀을 흘리며 도대체 왜 그러냐는 듯이 막아섰다. “뭐가 쌀쌀맞고 뭐가 궁금하다는 거냐. 아니, 내가 방금 너한테 쌀쌀맞았다는 거냐?” “…….” “그럼 해 말고 하십시오 라고 해야 되는 건가?” “…….” “음… 그건 이상하지… 않을까.” “훗…….”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혜성은 억지로 혀를 깨물며 참아보았다. 아주 신중한 투로 물어오는 그가 기분나빠할 게 싫어서였다. 오늘이기 때문에 그가 다정한 걸까. 아니면 정말로 지난날부터 그가 쭉 변하기 위해 노력하는 걸까. 눈물겹게 아름다운 사람 앞에서 수페리우스는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은 화를 낸 게 아니었다. 그가 반가운 만치 사소한 것에도 서운해서 주체할 수 없는 감수성이 표현된 것인데……. 수페리우스는 처음보다 부드럽게 테레사의 품에 파고들어가 안겼다. “갑자기 왜 학생회 투표를 했어요, 선배?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열린 투표를 주장하느라 이런 얘기까지는 못했지만…….” “아… 그거.” “네.” 비로소 여유롭게 미소를 짓는 테레사는 눈이 부셨다. 강직한 턱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은 곧 다가올 6월처럼 뜨겁고 찬란했다. 투표 소식에 앞서 그것을 왜 하는지 따지기보다 그 방식에 곤두세웠던 수페리우스는 시간이 흐른 지금이 고마웠다. 그래서 아이는 눈을 감고 그의 음성을, 음악처럼 투명한 소리를 경청했다. “필요해서 했다.” “…….” “학교에는 사소한 일을 관리하고 주관해야 할 때가 많은데, 너는 그것들에게 많이 신경 쓰지 말라고.” “!” 그러나 너무나 놀라운 내용을 담담하게, 당연하다는 듯이 꺼내는 테레사의 대답에 그만 눈을 뜨고 눈시울이 그렁그렁해진 채로 그를 올려봐야만 했다. 짙은 암회색 눈동자는 먼 허공을 향해 반짝이고 있지만 보석보다 찬란하고 영롱했다. 시력이 없어도 오늘 가장 빛나는 사람은 테레사였다. 그가 없는 한국의 콩 쿨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혜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 하나를 위해 바쁜 일정을 쪼개서 전교생에게 투표를 시키다니…… 마음으로는 먹이 갈리는 것처럼 육중한 무게가 이쪽저쪽으로 자꾸 움직였다. “…….” “…….” 그의 자상함에 매료된 혜성이 입을 다물고 있자 이번에도 곤란해진 테레사가 머뭇거리며 입을 뗀다. “또 쌀쌀맞은 대답이라고 혼자 생각하면서 대답 안 하는 거냐.” “!” 오 테레사. 아이는 그의 목을 껴안았다. 그가 사랑스러워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달라는 건지…….” “선배… 선배… 선배에….” “왜…?” “…내 뺨에 굉장히 흉한 상처가 있어요….” “…….” “선배는 안보여서 모르겠지만…….” “…….” “이럴 때는 선배가 못 봐서 괜찮다고 여기다니, 정말 나쁘지요…?” “…….” “나중에… 나중에요… 혹시라도 선배의 시력이 돌아 왔을 때요… 그 때 제 왼 뺨의 흉터가 징그럽고 무섭다고 피하면 전 정말 슬퍼할 거예요….” “…바보 같기는.” “…….” “너는 내가 앞을 못 봐서 징그럽고 무서운가?” “!” 하느님. 인자한 당신이시여. “당당해도 괜찮아.” “!” 내 뺨까지 스치는 전율을 주신 당신이시여. “…상처가 아픈 거냐….” “아뇨….” 이 사람입니다. 이 사람 앞에서 흉터는 보석보다 진귀하게 바뀝니다. “그럼 됐어.” “…….” 이 사람입니다… 이 사람입니다…. “그럼 됐다고.” “!” 이 사람 외에는 없습니다. “왜.” “…아니에요. 선배… 선배에….”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혜성이 매달려 오는 걸 보니 썩 나쁜 대답이 아니었노라 판단한 테레사가 엷게 웃으며 힘 있게 몸을 받쳐주었다. 둘은 오래도록 함께 있고 싶었지만 오늘은 콩 쿨이었다. 페스티벌의 첫 날, 잠깐의 유희는 서둘러 마쳐야 했다. 곧 몸을 뗀 뒤, 테레사는 수페리우스의 입술에 살짝 입맞춤을 하더니 작은 어깨에 근사하게 팔을 둘렀다. “가자. 이제 시작되었다.” “…네.” 자신 있고 힘 있는 목소리는 평소와 같다. 장시간 못 봤는데도 불구하고, 혹독했던 연습 시간이 잊혀 지리 만치 반가운 오늘이 있기 때문에 둘은 행복했다. “아, 그렇지.” “?” “잠시 후에 잘 하고 와라. 수페리우스.” “!” 잠시 후에? 사랑으로 충만해진 기쁨은 순식간에 뒤로 밀렸다. 수페리우스는 당연하다는 듯 근사하게 웃는 테레사로부터 빚어지는 언어가 낯설었다. 태양이 오골 거리더니 납처럼 변하여 대지에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테레사는 풀잎의 이슬처럼 환하게 웃으며 뺨에 입을 맞추기도 한다. “다 눌러버려. 겁먹지 마라.” “?” 무엇을? 설마 연주를? 나의 콩 쿨 심사는 다음 주에 있는데? 쿵- 쿵- 쿵- 납으로 변한 태양에의 심장이 육중한 무게로 뛰기 시작했다. “…또 무서워서 대답 안하는 건가?” “갑자기… 왜… 그런 말을….” “순서를 바꿨거든.” “순…서?” 챙-! 문 밖을 뛰어다니던 누군가가 장식을 건드렸는지 가냘프게 떨어지는 소리가 스쳤다. 잠깐 미간을 찌푸리던 테레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도어를 열었다. 둘은 한 발자국 내딛었다. “그래. 첼로 부 콩 쿨이 시작되기 전에, 너의 연주로 한국 아마데우스 페스티벌은 막을 올릴 거다.” “그런-!” 수페리우스가 완전히 경직해서 멈추자 테레사도 뭔가 수상한 점을 감지했는지 다시 도어를 닫고 내부에 들어왔다. 하지만 테레사를 발견한 소수의 인파가 당장 달려와서 문을 두드리며 그를 부르기 시작했다. 쾅쾅쾅! 테레사! 여기 계셨네요? 테레사! 지금 당장 나와 주셔야겠습니다! 곧 시작되니까요! 테레사, 테레사! “팸플릿에 나와 있었을 텐데… 안 봤나?” “…….” “그리고, 바로 다음이 유리의 ‘시련’을 히스가 연주하도록 짜여 졌는데?” “!” 테레사 역시 표정이 바뀌었다. 자상한 바람이 사라지고, 그들이 기도했던 시련의 장이 열리는 걸까. 개막식을 기대하는 첫 번째 순서, 좌중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짙어져간다. 테레사는 뭐라고 말을 덧붙이려다가 잠시 텀을 주더니 늘씬한 등을 돌려버렸다. “내가 좀 그런 쪽에 기습적이라서 미안하다. 그래도, 한국 아마데우스의 페스티벌은, 너의 손으로 시작 되는 거다.” 문고리를 쥔 그가 나가며 내뱉은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사진 : 메모로그의 경민씨가 올리신 것입니다. . . . 지금의 열정이 죽는 날까지 잊혀 지지 않도록 해 주소서. 흉터가 아닌 나의 또 다른 훈장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인도하소서. 젊은 우리들의 현재를 무르익게 하소서. 결코 나태해지지 않도록 이끌어 주소서. 영원히 배움을 늦추지 않도록 늘 부족함을 느끼게 해 주소서. 하지만 허황된 꿈을 좆지 않도록 어리석은 망상은 물리쳐 주시옵시며, 이 작렬하는 태양 아래 작은 먼지보다 못한 우리들이 지르는 소리를 귀담아 주시옵시며, 기쁨을 표현하는 능력을 상실치 않게 하소서. 감동은 표현하라고 있는 것임을……. 당신께서 주신 감각을 속으로 혼자 감추지 않고 항시 느끼고 표현하게 하소서. 우리들이 얼마나 총명하고 아름다운지 항상 자각할 수 있도록…. 지금의 행복을 위협하며 다가오고 있을 앞으로의 고통을 충분히 내려주소서. 성장의 뿌리가 단단해지도록 가끔은 지옥을 펼쳐주소서. 당신이 허락하신 지금의 삶에 충실하며 나 테레사 전 진은, 당신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삶을 걸어가는 나 수페리우스 신혜성은, 저 태양을 증인으로 삼아 기도합니다. 마음으로 땅 끝까지 허리 숙여 기도합니다. 테레사와 수페리우스의 기도 wgreene@naver.com 당신에게 이 글이 눈물이신지요. 저 또한 그렇습니다... 항상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화이트그린- 덧글 24개 엮인글 쓰기 /data20/2006/11/25/299/newsies_25-wgreene_1-wgreene.jpg@nhn@59240@nhn@1@nhn@548@nhn@411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74편 /data20/2006/11/25/299/newsies_25-wgreene_1-wgreene.jpg@nhn@59240@nhn@1@nhn@548@nhn@411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74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75-1편 ▼ 다음글 - 2악장 73편(뮤즈 올림픽)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75-1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11/27 21:50 http://blog.naver.com/wgreene/110011443397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1127 75-1편 업데) Amadeus 음악 : 칼 오프르의 운명의 여신 (재생버튼클릭) 칼 오르프: 수페리우스! 2악장 75-1편 대 연주회장의 평소 수용인원은 3500명 선이었다. 그리고 테레사는 집행위원으로서 제일 먼저 4층과 6층까지의 좌석을 가렸던 벽화를 부수는 공사를 감행했었다. 따라서 5000명은 너끈히 수용하게 된 한국 아마데우스 대 연주회장이 얼마나 으리으리해졌는지 그것은 따로 설명하는 게 불가피했다. 어느 쪽에 앉더라도 넓은 무대와 붉은 막, 그리고 무대 좌우에 세워진 화강암으로 새겨진 아폴론은 훤히 보였다. 아폴론은 당장이라도 황금마차를 끌고 좌중 쪽으로 달려 나올 것처럼 사나워 보였다. 사람들은 신음했다. 세계 어느 곳에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는, 오히려 크기와 시설과 구조면에서 최고를 자랑하는 곳임이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음향 시설 역시 완벽해 보였다. 그것은 따지는 게 도리어 희귀한 취급을 당하는 꼴이었다. 황금을 뒤덮은 뒤 보석을 뿌리는 것과 같이 대형 홀의 내부는 천국을 연상시켰다. 마리아 칼라스의 향보다 진해 보이는 붉은 막 또한 웅장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시야를 압도해서 만약 사람이라면 숨을 참기 마련이다. 6단의 매뉴얼을 갖춘데 다 가 99개의 음색을 지녔으며, 8640개의 파이프를 매단 아마데우스 최대의 오르간이 무대 옆에 보석처럼 박혀 있었다. 잠시후 모든 조명이 꺼지고 무대를 가린 상태에서 별안간 거대한 바다의 형상으로 흰 막이 천천히 내려왔다. 사람들은 예감했다. 시작이다! 이제 시작되었다! 그들은 팸플릿에 적힌 순서를 익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 무대의 흰 막과 종이를 번갈아 살폈다. 여실한 조명이 흰 막을 비추었다. 5층 로얄석의 귀한 손님들 또한 목을 내밀거나 망원경을 치웠다가 끼었다 하며 안절부절 못하였다. 가벼운 시폰 소재의 옷을 입은 무용수 두 명이 흰 막 뒤에서 무음으로 허리를 꺾으며 다양한 동작을 제시했다. 모두 다 숨을 죽이는 때, 두 개의 그림자는 별안간 양 끝에서 중앙으로 달려와 불가사리의 모양새로 하나가 되었다. 오, 지저스!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하나가 된 불가사리는 크게 몸을 움직이며 태양처럼 넘실대기 시작했다. 흰 천은 처음보다 빠르게 흐려져 갔다. 불가사리 태양은 사라졌다. 곧이어 나타날 붉은 석류와 장미를 위하여. 둥- 둥- 둥- 절대 무음의 세상에서 불가사리 태양에 주목하던 5,570명의 좌중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가시의 북! 아마데우스를 졸업했거나 다니는 사람, 혹은 아마데우스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알 수 있는 가시의 북 소리가 장엄하게 울리기 시작해서였다. “테레사!” “오! 테레사! 테레사!” 3층과 4층에 빼곡하게 앉아있는 뮌헨의 학생들은 저희들도 모르게 테레사를 소리쳤다. 체면치레에 취중 하는 쪽은 오히려 한국 학생들이었다. 어쩌면 자신들의 땅에서 지금이 탄생되었다는 엄숙함에 차마 입술은 터지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 가시의 북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판단 때문인지 그들은 금세 조용해졌다. 뮌헨의 학생들은 그러나 레퀴엠과 감탄과 비평에 익숙한 유형이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이들보다 훨씬 떨리는 시선으로 무대를 주목했다. 퉁- 느린 박자의 북이 연주회장 벽면을 모조리 떨릴 때마다, 동시에 사람들은 마음으로 같이 떨었다. 테레사. 테레사. 테레사. 마음으로 울리는 가시의 북은 테레사로 물들어갔다. 그리고, 붉은 막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야속하게도 수박 향을 지닌 아름다운 은어의 주자, 테레사는 가시의 북 소리 외에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자신의 지정석으로 돌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산타-시아!” “산타시아, 산타시아!” 이번에는 1층과 2층을 차지한 보스턴과 런던의 아마데우스 관계자들과 학생들이 상기되어 흥분했다. 그들은 뮌헨의 학생들보다 약간 더 길게 산타시아 라는 이름을 자랑스럽게 외쳤다. 산타시아! 산타시아! 막이 오를수록 소리는 짙어졌다. 그 소리는 신을 비웃는 지옥의 합창보다도 컸다. 바닥에 떨어지는 심장을 죄의식 없이 밟는 군인의 장화보다도 진했다. 그렇게 런던 아마데우스 학생들의 오만한 콧대는 한층 더 높아졌다. 그도 그럴 듯이 막이 오른 뒤, 그들이 자랑스러워 할 인물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최상의 소프라노를 자랑하는 발레리 산타시아를 중심으로 무대 가장자리로부터 계단식으로 서 있는 런던 합창단의 숫자는 기존의 100 명이 훨씬 넘어 보였다. 팸플릿은 런던 합창단의 유명한 정도를 간략하게 소개했지만 굳이 그것이 아니더라도 보통의 사람들은 그들의 위대함을 잘 알고 있었다. 세계의 각 예술제와 합창제, 런던 시 청소년 합창제의 모범합창단으로 활동해 오고 있는 런던 아마데우스 합창단은 고전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화음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각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차지하는 런던 합창단의 중축이라 할 수 있는 소프라노 발레리 산타시아는 신이 질투하여 버린 자라 여길 만치 황홀한 음역이 타고났다고들 한다. 런던의 붉은 장미를 가져온 것처럼 붉게 치장한 소프라노 산타시아, 미들네임이지만 산타시아로 훨씬 유명한 그녀는 오만한 눈매로 좌중을 향해 방긋 미소 지었다. 누가 봐도 런던은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게 훤히 보였다. 특히 블론드의 푸른 눈을 지닌 그녀는 근사하게 앉아있는 앞좌석의 테레사를 도전적인 눈매로 쏘아보았다. 상황이 이렇다고 해서 한국 학생들이 새삼 위축될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산타시아가 천상의 화음으로 유명하다 한 들, 여기는 한국이지 않던가. 게다가 지금 무대에 나온 오케스트라와 런던 아마데우스 합창단은 첫 데뷔 무대를 가질 수페리우스를 ‘부른다’라는 환영과 꽃다발의 의미로 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은 당연히 테레사가 주관한 것 중 하나였다. 런던 아마데우스의 자존심이 그것을 용납할 리 없었으나 최근 에튜드 집으로 전 세계에 다시 이름을 떨친 한국의 중심 테레사를 무시할 수는 없었으리라. 결국 발레리 산타시아가 제 아무리 유명하다 한 들 그들은 이 순간, 개막식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페리우스를 위해 합창을 터뜨려야 한다. 런던 합창단과 한국의 미카엘 성가대가 함께 무대에 섰기 때문인지 무대는 아주 꽉 차 보였다. 단 두 시간만 화음을 맞춘 뒤 각기 파트를 나누고 무대에 함께 선 미카엘 성가대와 런던 합창단은 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사람을 압도했다. 그들은 등장과 숫자만으로도 카리스마가 넘쳤다. “히틀러!”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아까와는 달리 뮌헨의 학생들 전체가 벌떡 일어섰다. 그들은 일어 선 채로 거수경례를 하며 이목을 샀다. 다름 아닌 그들의 히틀러, 히스클리프 폰 뤼겐부르크가 지휘봉을 들고 여유롭게 나타나서였다. 그들은 자랑스러움과 설렘을 감추지 않고 히틀러를 소리쳤다. 무대와 연주회장이 웅 웅 울릴 만치 소리는 크고 날카로웠다. “뮌헨의 히틀러이자 망나니 폰 카라얀 히스클리프 폰 뤼겐부르크 입니다. 우리들은, 한국에 오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는 곧 유창하게 한국말을 하더니 우아하게 청중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와 함께 일어선 뒤의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런던, 그리고 미카엘 합창단도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무대에 서는 지금까지 나를 감히 환영해 주지 않은 테레사와 수페리우스는 괘씸하지만…….” “하하하하하.” “브라보!” “지금부터 지상 최대의 칸타빌레와 함께… 운명의 여신으로 그를 맞이하겠습니다.” “히틀러! 히틀러!”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천정을 들썩이듯 터져 나왔다. 사람들의 엄청난 갈채가 쏟아지고 그것은 쉬이 그치지 않았다. 음악이 시작된 것도 아닌데 지나친 흥분은 박수를 멈추려고 해도 자꾸만 움직이도록 영혼마저 마구 유도했다. “!” 칼 오프르의 카르미나 부라나. 히스가 지휘봉을 쳐드는 동시에 폰 카라얀의 날렵한 그의 지휘처럼 웅장한 음악이 공간을 치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대 형식에 의한 칸타타 3부작 중, 제 1부 작품인 운명의 여신! 수페리우스를 맞이하기 위해 무대에서 개선문이 된 모두는 황홀하고 장엄한 운명의 여신을 뽑아낸 것이다! “O--- Fortuna---” 3분의 2박자의 느린 서주가 완벽한 D음으로 바퀴를 굴리듯이 시작되었다. 총명해진 눈을 빛내며 저마다 호흡을 참는 이 때, 많은 이들은 벌써부터 테레사의 수페리우스를 기다리려고 한다. “statu variabilis----” 중앙의 앞자리에 앉아서 천천히 고개를 뒤로 뻗으며 테레사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그가 중얼거릴 때, 여신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듯이 신비롭고 강렬한 리듬이 펼쳐졌다. “obumbrata!” “et velata!” “!” 지상에서 가장 완벽한 합창, 그것이 시작된 것이다. 온음표에 의한 느린 서주가 언제 있었냐는 듯 아주 빠르면서도 엄청난 에너지를 느끼게 하는 음이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로부터 빚어질 때, 좌중은 눈시울을 떨어야 했다. 소프라노, 바리톤, 테너, 그들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악기에 스며들었다. 연주회장을 뒤흔들었다. 여신은 계절을 몽땅 한가지로 끌어올린 뒤 다시 내던졌다. 힘은 무한대로 뻗어나가 대지를 받쳐주던 나무의 뿌리마저 단숨에 뽑았다. 합창과 선율은 인간에게 숨 쉬는 것마저 허락 치 않을 만큼 아름답고 명쾌하게 이어졌다. 움츠린 히스의 어깨가 리드미컬해진 박자처럼 단단하게 펴지고 허공을 가를 때, 붉은 전체에 파란 파도가 치듯 사방은 폭포수로 뒤덮였다. 오 하느님, 저마다 탄식을 쏟아내면서도 청각에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팀파니와 피아노, 첼레스타, 글로켄시필, 저 쪽의 심벌즈? 무엇이 먼저일까? 감동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졌지만 저마다 떨리는 정도는 극과 극을 보였다. 북과 심벌즈가 울리고 화음이 큰 창조의 에너지를 터뜨릴 때, 사람들은 완전히 하얗게 질려 입술을 떨었다. 강인한 악센트가 다시 이어질 때, 좌중의 시선, 그리고 합창단원의 시선은 동시에 왼 쪽의 무대 뒤로 쏠렸다. 수페리우스! 바로 이 부분에서 그가 나와야 한다! 한국 학생들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땀을 닦았다. 누군가는 기도를 드렸다. 런던의 붉은 장미와 파란 폭포를 눌러 줘, 수페리우스! 학생들은 어느 때보다 간절히 자랑스러운 수페리우스를 똑똑히 소리쳤다. 경쾌하면서도 산란한 합창의 환영 속에 어서 어서 등장하라며 다뉴브의 밤을 마음으로 찢어지게 외치는 것이다.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그의 서주를 향하여. “!” 그러나 곧 모두의 시선은 기대에서 놀라움으로, 놀라움에서 실망으로 변해갔다. 지휘봉을 쳐들고 압도하며 시선을 끌던 파란 머리칼의 히스 역시 뭔가 이상하다는 듯 뒤의 테레사를 의식했다. 수페리우스가 나와야 할 부분에 등장하지 않은 것이다. 이미 한 참을 지나쳤다. “!”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중앙에 앉아계셨던 사비나 교수와 바오르 신부님이 벌떡 일어났다. 기자들과 함께 앉아있던 로제리오 교수님은 완전히 굳어버렸다. 4층에서 벗어나 비상구 쪽에 기대어 있던 유지신이 흥미롭다는 듯 처음으로 눈을 반짝였다. 뒤의 대기실에서는 삽시간에 어수선해져서 수페리우스를 찾기 시작했다. 운명의 여신이 막바지로 가는 아찔한 이 때, 수페리우스는 머리카락조차 보이지 않았다. Hac in hora! 조용히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테레사가 벌떡 일어났다. sine mora! 합창이 쭉 이어지는 가운데, 테레사는 일어선 채로 지팡이를 짚고 입술을 깨물었다. 바닥까지 떨어진 심장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기분이었다. “테레사님.” “?” 식은땀이 흐르려던 찰라, 테레사의 왼 옆으로 앉아있던 유리가 그를 불렀다. 그녀는 매우 감동받은 시선으로 테레사가 아닌 무대를 향하여 입을 열었다. 어깨까지 닿는 다갈색 머리칼은 풍성하고 아름다웠지만, 갸름한 그녀의 얼굴과 맵시 있는 드레스만큼은 아니었다. 아니다. 곧 신입생이 될 입장이 전혀 아닌 것처럼 편안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서 묘하게 아름다웠다. 그녀가 어떻게 생긴 줄 전혀 모르는 테레사는 혹시 수페리우스에 대해 유리가 알고 있는 게 아닌지 싶어서 재빨리 방향을 틀었다. 합창은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선생님이 어디 아프신 게 아닐까요. 많이 긴장하셨나 봅니다.” “!” “선생님은 감수성이 밑바닥까지 떨어지면, 무언가를 초월한 상태가 되어서 나타나실 것입니다.” “넌…….” “샤우트가 룸펜의 유리를 모두 깨뜨릴 때, 그 분은 전혀 도망가지 않으셨으니까요.” “…….” “저는 선생님을 기다리고, 믿습니다. 테레사님은 그렇지 않습니까?” 과연 테레사와 대기실에서 헤어진 뒤 3시간 동안, 수페리우스는 어디에서 무엇을? 사진: this is amadeus의 경민님 깊숙히 침묵하기 시작했다. 나는 체념의 바다에 잠기어 있다. 불다 마는 것이 바람이기에 나는 오히려 벼락을 갈구했다. 산산히 부서져 흩어질 유리같은 섬광이 내 발끝에 떨어지길 온 마음을 다해 바라였다. 그리고 오늘. 나는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만든다. 글 : 경민님의 This is AMADEUS 中 연주회장에 들어서며. (메모로그->소설감상->11편까지 나온 경민님의 글 확인가능) wgreene@naver.com 나는 당신의 심장을 완전히 터뜨릴 것이다. 덧글 26개 엮인글 쓰기 /data19/2006/11/27/31/ayashi_71-wgreene_1-wgreene.jpg@nhn@75552@nhn@1@nhn@392@nhn@548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75-1편 /data19/2006/11/27/31/ayashi_71-wgreene_1-wgreene.jpg@nhn@75552@nhn@1@nhn@392@nhn@548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75-1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75-2편 ▼ 다음글 - 2악장 74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75-2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12/01 23:08 http://blog.naver.com/wgreene/110011593127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1201 75-2편 업데) Amadeus 음악 : Less Than A Pearl - enya (재생버튼클릭) Less Than A Pearl-Enya 그녀의 시련 2악장 75-2편 수페리우스는 테레사의 충격적인 고백이 있은 뒤로 무감각하게 문을 노려보았었다. 그 시간은 아주 길고 잔인해서 누가 만지는 즉시 가루가 될 수 있겠다 싶을 만치 메마르고 공허했다. 대기실 밖으로 나간 테레사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나간 장소임을 알아서인지 사람들은 이곳을 찾지 않았다. 완전히 혼자가 된 수페리우스는 사정없이 노려봤던 도어로부터 시선을 들었다. 감각을 실은 마차가 정지하고 있었다. 살은커녕 뼈를 찔러도 무감각이 영원을 지배할 것처럼 뇌를 휘저었다. 힘겹게 감았던 눈을 뜨자 새파란 천정이 쏟아질 듯 시선에 부딪혔다. 천국의 벽화가 심어진 아름다운 천정은 아주 높았지만 숨을 쉬기에는 좁았다. 다뉴브의 밤을 첫 번째로 연주……. 문장은 끝나기도 전에 아이의 목을 졸랐다. 따뜻한 봄의 연못이 단숨에 옷을 벗고 붉은 해협으로 바뀐 것 만 못했다. 자신의 것인데도 불구하고 심장의 고동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아서 이상했다. 영혼과 감각이 정지되는 것이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물처럼 자연스러웠던 세상이 고체로 굳었다. 하지만 이 감정에의 변화 역시 몇 번씩 겪었던 것 중의 하나이다. 언제, 어디에서? 수페리우스는 도저히 움직여지지 않는 발을 떼고 걸었다. 도어와 천정을 노려보며 목석으로 굳은지 삼십분만의 변화였다. 그러자 죽은 척 위장했던 심장이 비명을 질렀다. 곧 열차보다도 빠르게 뛰는 것이다. 아이는 자신을 부르는 숱한 인파를 물리친 뒤 연주회장 밖으로 나갔다. 백인들과 흑인들, 아시아계 사람들이 그야말로 이 땅에서 지구촌을 이루고 있었다. 봄의 태양은 아찔한 자태를 펄럭였다. 땅거미로 숙이는 태양의 자태는 낮보다 황홀하게 다가왔다. 태양은 대지에 뻗은 깃발보다도 힘이 세었다. 내 안의 신이시여. 아이는 멍한 표정으로 걷는 도중 평평한 내면을 꾸짖으며 하늘로 화살을 쏘았다. 그래도 무감각은 나아지지 않았다. 가만히 정지한 수페리우스는 자신을 스쳐 날아가는 봄의 꽃잎을 몽중의 장면처럼 아련히 응시했다. 오색 꽃잎이 붉은 장미를 따라다니고 있다. 수페리우스는 저도 모르게 엷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움직임을 시선으로 쫒았다. 수풀의 향이 조금씩 느껴졌다. 그리고 발끝부터 올라와서 손가락에 끼이는 얕은 세포의 움직임을 느꼈다. 몸의 컨디션은 썩 나쁘지 않았지만 누가 잡아당기면 죽 늘어날 것처럼 감정은 먹물보다 시컴했다. 하지만 조용하기 때문에 섬세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러한 어두움이어서 괜찮았다. “!” 그 때 커다란 바람이 작은 가슴을 뚫는 것보다 아프게 치고 달아났다. 아이는 양 손을 조용히 허공에 올린 뒤 그대로 굳어버렸다. 순간 느낀 모든 감정이 거허 하게 묶이더니 가슴으로 치고 들어왔다. 뻥! 운동선수의 공을 맞은 것보다 더 한 충격 때문인지 아이는 온 몸을 움츠렸다. 생각이 돌아왔다. 다뉴브의 밤을 연주 하라구요? 별안간 눈물이 치솟았다. 이상하게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억울하고 분했다. 왜? 어째서? 그를 이해하기도 전에 그는 항시 나를 이해했었다. 한때는 나조차도 그를 몰랐지만, 지금은 알 수 있다. 그는 나를 시험하려는 게 아니라 음악과의 줄다리기를 쉬지 않으려는 것을. 그가 음악을 야기할 때의 표정은 길 잃은 하이에나가 멀리 사람의 불빛을 발견하고 쫒는 찰나처럼 아찔하고 낯설어.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테레사와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교묘한 줄다리기였다. 사랑 앞에서는 깨끗한 장화를 더럽히며 산을 오르는 정복자이지만, 음악을 야기할 때의 테레사는 팽팽히 줄을 잡아당기며 삼각 끈을 만들었다. 누군가에게 호소한 들 지금의 스릴과 힘겨움, 또는 지지 않으려는 심산과 여러 가지를 완벽하게 이해시킬 자신이 없었다. 아이는 하는 수 없이 골몰하는 표정으로 구석구석을 거닐었다. 그런 수페리우스를 두고 많은 이들이 말을 걸었다. “수페리우스! 어딜 가는 거니? 우리들은 좌석 표가 꽤 괜찮은데, 한 장 남았어. 너도 같이 갈래?” 수페리우스는 정중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생긋 웃었다.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공허의 지대에서 짓는 표정은 아주 색달랐다. 그러나 자신을 보며 신기해하는 학생들의 기분을 수페리우스는 몰랐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그 쪽이 아니야!” “수페리우스! 히스가 너를 찾더라!?” “연주회장의 대형 문이 열렸어! 수페리우스, 우리와 같이 갈래?” “멀리서 봐도 너인 줄 알겠더라, 유난히 분위기가 멋지구나, 수페리우스! 컨디션은 괜찮니?”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개막식을 앞두고 학생들은 들떠서 그를 불렀다. 평소에 안면을 튼 무리는 물론이거니와 작은 인사조차 없던 낯선 이들까지 수페리우스를 휙 지나치며 웃음꽃을 남발했다. 무감각은 차츰 늪으로 빠지듯 끝을 향해 달려갔다. 제일 먼저 바람이 스쳤고, 지금은 청각이 울렸다. 나아가 자연이 송두리째 피부에 닿았으며 기가 막히도록 아름다운 젊은 영혼들과 지금의 시간조차 아쉬워 슬퍼지기까지 하는 아마데우스, 아마데우스가 보였다. “…너도 보이니…….” 아이는 주머니 속에 늘 간직해뒀던 감옥 열쇠를 꺼내었다. 그리고 목에 걸었다. 찰랑 하는 경쾌한 쇳소리가 스치더니 그것은 곧 오후의 태양에 지지 않고 빛을 발하였다. “너도 느껴지니…….” 땅거미가 짙어질 무렵의 수페리우스는 조용히,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걸음을 떼며 학생 감옥으로 향했다. 그러나 곧 발을 멈추고 지금보다 훨씬 영혼을 죽인 뒤 화려한 장미 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말을 하지 않고 마음의 언어를 움직이지 않았지만 경건한 자세로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은 뒤 기도하는 기분이었다. 연주회장에 가야 한다고 이성은 멀리서 소리쳤다. 하지만 아이는 장미 문 밖의 푸른 들녘을 거닐었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지만 내면은 그러라고 시키는 것이다. 납작한 가슴에 찰랑이는 열쇠를 움켜쥐었다. 가슴의 고동이 느껴졌다. 성대한 무대의 막이 오를 때, 그 아찔함이 현실로 아직 인식되지 않아서 아이는 자꾸만 ‘지금’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 기대했던 무대가 닥치기 전의 짜릿함과 설렘, 불투명 수채화처럼 어물거리는 공포와 절박함, 하지만 아름다운 아마데우스. 이 모든 것은 ‘지금’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진주였다. 콩 쿨 개막식 직전의 쾌락, 이 감정은 오래 전 아마데우스 입학식 전 날의 것과 닮아있었다. 그렇다. 수페리우스는 지금을 놓치기가 싫은 것이었다. 혹자는 비웃고 이해하지 못 할 지금의 감정은 그러나 수페리우스에겐 절대적인 몫이었다. 감수성의 변이가 남들보다 깊고 높다는 건 결코 자랑이 아니었다. 다른 이가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게 했다. 그리고 남들은 느끼지 못하는 기포의 분자가 찢어질 때의 함성까지도 슬프게 해석하도록 유도했다. 그것은 감정이 풍부하다는 말인 반면 아주 피곤하고 서러운 이면을 끄집어낸다. 길의 잡초에서조차 슬픔과 기쁨이 무한대로 뻗어 나와서 아이는 눈시울을 떨었다. 자연스럽게 폐허에 도착했다. 아이는 조용히 피아노 뚜껑을 열고 아무 건반이나 살짝 살짝 누르기 시작했다. “!” 놀라운 그대로 눈을 크게 뜬 뒤 본격적으로 가벼운 곡을 눌렀다. 무감각의 지대에 꽃이 만발하고 수직선상에 태양이 떠오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겉모습은 전보다 볼품없어졌는데, 피아노를 누가 손 본 게 틀림없어! 완벽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음계가 확인된다! 입가로 신음이 마구 빠져나갔다. 소름이 끼치는 가운데 수페리우스는 새삼스럽다는 듯이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그리고 마치 예감했던 것처럼 선량한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정지했다. 반대편 입구로는, 언젠가부터 자신을 뒤따라온 유리가 저녁을 등지고 서있었다. 또 놀랍게도 폐허의 구석에 교묘히 만들어진 반 아마데우스의 입구 문이 열리더니 아주 단정한 정장 차림의 쇼너 스타니가 나타났다. 셋은 서로를 마주보며 이질적인 감정보다는 놀라움을, 놀라움에 앞선 묘한 반가움에 시선을 떨었다. “쇼너 스타니?” 아이는 제일 먼저 그에게 말을 걸었고, 쇼너 스타니는 피아노와 함께 있는 수페리우스로부터 진한 무언가를 느꼈는지 흐릿해진 시선을 재빨리 풀더니 대답했다. “데블 관 입구를 막아놔서, 이쪽으로 나와야 했는데…….” “그러셨군요.” “수페리우스. 너를 찾으려고 그랬던 건데…….” “저를요?” “그게…….” 그리고 또 폐허의 비밀 문이 열리더니 땀으로 범벅이가 된 로미오가 달려 나왔다. 그는 아주 놀랐는지 저 혼자 비명을 지르고는 세 사람을 두리번거렸다. “멍청아! 너-- 아니, 왜 여기 있습니까! 개막식이 곧 시작될 텐데요? 어. 그리고 저 애는…….” “……너도 나를 찾은 눈치인데…?” “…….” 쇼너 스타니가 쭈뼛대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던 혜성이 넘겨짚는 소리에 로미오가 움찔 몸을 떨었다. 과연 틀린 소리는 아니었나보다. 수페리우스는 그러나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뜻을 전한 뒤, 자신에게 걸어온 제자 유리를 다정하게 응시했다. 그림자가 짙어질 때, 유리가 모두를 향해 품에 쥐고 있던 악보를 내밀더니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이다. “누구든 세련된 솜씨를 지닌… 아니, 연주가 가능하다면 이것을 연주해 주세요.” “!” “!” 유리는 드레스를 입고 숨을 죽인 채 따라오느라 상기되어 있었다.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개막식의 화려한 막이 오르기까지 채 한 시간 반이 남지 않았는데 그녀가 뭐라고 하는 거지? 혜성은 당장 표정을 굳힌 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쏘아보았다. 그녀는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응당 반응했다. “제 음악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쇼너 스타니와 다급해서 우왕좌왕하는 로미오에게 미안하리만치 지금은 유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룸펜에서 잃어버렸다고 단정 지었던 악장, 그리고 유리의 모른다는 대답이 번쩍 떠올랐다. 런던 아마데우스에서 화려한 신입생 생활을 시작할거라는 그녀의 가십이 불쾌하게 스쳤다. 유리는 혜성의 표정에 쓰인 말을 모두 알아들었지만 무시하며 악보를 내밀었다. “선생님이 먼저 들으셔야 합니다.” “뭐……라고?” “저는 선생님에게 제일 먼저 들려주고 싶었으니까요.” “!” “저의 시련을 들어주시고, 그 뒤에 다뉴브의 밤을 연주하세요.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 “제가 어떤 시련으로 괴로웠는지, 그것은 선생님밖에 모르니까요.” “!” 번개같이 스치는 잔상이 있다. 샤우트의 공격이 있은 뒤로 유리가 흐느끼며 고백했던 내용이 줄줄이 떠올라서 소름이 끼쳤다. 『 아버지는 저를 사랑하세요. …여자로서……. 』 시련, 그것은 곧 그녀도 금지된 사랑에 발을 디뎠음을 의미한다. 헌데, 이 사실을, 그녀가 자신을 담은 진정한 시련을 나 밖에 모른다니?! 모두가 당황하는 가운데 시간은 아주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꿀 먹은 벙어리로 변한 네 사람 중 그 누구도 치고 들어오지 못했다. 다급하기만 한 표정은 감추지 못 한 로미오만이 거친 숨소리를 낼 뿐, 멀리 아마데우스 내부의 시계탑 소리가 잔잔히 울려왔다. 한참 후, 쇼너 스타니가 팔을 걷더니 냉큼 악보를 집었다. “쇼너?” “내가 연주한다.” “!” “이것저것 따질 시간이 없어.” 수페리우스와 유리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보이는 의자를 질질 끌어와서 앉았다. 빠르게 악보를 읽은 뒤, 그는 약간 곤란하다는 듯 어물거렸다. “…비슷하기만 하면 되는 건가?” 반대편의 유리가 처음으로 활짝 웃으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쉬운 부분만 치셔도 좋습니다!” “유리… 넌…….” “쉿. 선생님. 저 분의 말씀대로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들어주세요.” “…….” 초조함으로 달아오른 유리의 시련 1악장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사랑을 거부할 수 없노라 금지 영역을 넘나드는 짙은 어두움이, 쇼너 스타니로부터 빚어진 것이다. 폐허의 뚫린 천정으로 초저녁의 달이 고개를 내밀었다. “!” “…….” 아이는 첫 장이 지나기도 전에 흙에 주저앉았다. 펑! 하고 무언가가 마음에서 여러 번 터졌다. 바닥의 잔풀을 쥐고 잡아당겼다. 쇼너 스타니가 연주를 했다는 것 때문에?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다. 눈가로부터 일렁이는 여러 가지가 음표와 전혀 섞이지 않았다. 딴-- 따단-- 쇼너 스타니의 어깨가 크게 꺾이며 무너지는 벽과 같은 형세로 내려앉기를 여러 번, 그만큼 포르테보다 진한 피아니시모의 행렬이 느리게 지속되었다. 그는 자신 있는 부분만 연주하는 게 아니었다. 상당한 실력을 지닌 자라는 것을 몇 마디만 들어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쇼너 스타니의 테크닉 보다 현재 주목해야 할 것은 곡의 구성이었다. 1악장의 초반을 장식하는 침체기는 눈물보다 무겁고 웅장했기 때문이다. 저 쪽 짙은 그림자 끝으로 죽음의 꽃이 탐스러이 잎을 벌린다. 죽음 이라는 수식어 덕분에 아름답지만 영원히 영롱할 수 없는 음표가 덕지덕지 벽을 발랐다. 청각을 오로지 시련으로 조정한다. 매우 느린 단조가 폐허를, 폐허가 아닌 슬픔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슬픔 속에서 뛰노는 사랑에의 광기와 쾌락의 기대가 보였다. 슬프고 암울하지만 적당한 쾌락이 빚어진 느린 단조 곡은 높은 음 자리와 낮은 음이 바하의 곡과 같이 따로 놀았다. 선율은 아주 느렸고 찢어질 듯 아프기만 했다. 수 만 가지의 꽃 중에서도 죽음으로 향하는 꽃이 서서히 봉오리를 벌리는 듯한 이 곡은 표현만 바하와 비슷할 뿐 느낌은 굳이 따지자면 라흐마이노프 보다 서러웠다. 그러나 샘솟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어서 잠시도 놓칠 수가 없었다. 저렇게 느린데도! 저렇게 움직이지 않는 음표인데도! 1악장부터 펼쳐진 시련은 가라앉는 과정조차 없이 무작정 바닥에서 놀아야 하는, 하지만 이상하게 가슴이 뛰는 음정이 섞여 있었다. “…….” “…….”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가운데, 겨우 끝나는가 싶었던 비슷한 부분들이 주기적으로 반복되었다. 일반 악보들과는 달리 곳곳에 가시처럼 데카포를 활용했음을 수페리우스는 알았다. 너의 슬픔이니… 이 정도로 너는…? 수페리우스는 눈물이 뺨에 젖는 것도 모르는지 벙어리가 된 그녀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녀 전체가 시련으로 보여서 눈을 비비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만.” “?” “쇼너 스타니. 나머지 연주는 무대에서 직접 듣고 싶습니다. 연주는 훌륭했습니다… 고맙습니다….” “…….” 그는 곧 격정으로 도배 될 번 한 도입부에서 아쉽게 손을 떼며 물러났다. 수페리우스는 천천히 일어섰다. “들려줘서… 고맙다… 고맙습니다….” 수페리우스는 쇼너와 유리 두 사람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려 했지만 목이 떨려서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첫 음률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나는 무너졌어. 1악장의 반도 다 듣지 않았지만 알 수 있어. 이 곡은 아주 달라. 그녀가 단숨에 시험을 패스했다는 점을 두고 나는 의심했는지도 모르는데……. 이 곡의 전체 형식은 다뉴브의 밤, 혹은 테레사의 에튜드, 그것의 찌꺼기도 찾을 수가 없어…! “선생님. 괜찮으세요?” “…….” 그동안 골몰했던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선생님?” “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어. 오히려 전부를 듣지 않아서 다행이다. …대단한… 곡을… 만들었구나….” “…….” “나는 너를 한 때 의심하기도 했는데….” “…….” 내 스스로 파놓은 의심의 늪에 내가 빠진 것이다. 내 스스로 파놓은 질투의 늪에 가라앉았던 것이다. 이런 딜레마라니! “하. 하하하하하!” 속절없는 웃음꽃이 피었다. 테레사 덕분에 잠시 잊었던 유리에게 지닌 적개심이 완전히 증발하고도 남았다. 의심, 파멸, 이 수식어는 자기 자신에게 비롯된다는 것을, 이자벨이 해 준 말의 진 뜻을 비로소 깨달았다. 수페리우스는 입으로만 웃었다. 마음과 영혼마저 정지한 가운데 터지는 웃음은 기괴할 정도였다. 쩌렁쩌렁 울리는 웃음소리는 방 금의 시련과 닮아 있었다. “수페리우스.” “하… 하하…….” 끼어들기 힘든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쇼너 스타니가 많이 참았음을 시사하며 불쑥 말을 붙였다. “…지금 지하로 내려가 줄 수 있겠나? 잠깐이라도….” “하아…… …?” 바야흐로 삼십분이 더 지난 현재, 시계탑은 야속하리만치 정확한 초침을 세상에 울렸다. wgreene@naver.com 바로 여기에 이 음악이 필요했습니다... 부서지는 기분... 부탁이 있는데.. 이제 곧 닥칠 마지막에서 도망치고 싶은 나를 잡아주세요... 덧글 20개 엮인글 쓰기 /data20/2006/12/19/233/dfsf_1-wgreene.jpg@nhn@48025@nhn@1@nhn@333@nhn@366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75-2편 /data20/2006/12/19/233/dfsf_1-wgreene.jpg@nhn@48025@nhn@1@nhn@333@nhn@366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75-2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76편 ▼ 다음글 - 2악장 75-1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76편 아마데우스 2악장 2006/12/02 17:47 http://blog.naver.com/wgreene/110011616189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1202 76편 업데) Amadeus 음악 : 아래 두 가지 중 듣고 싶은 것 재생버튼클릭(저는 두 곡을 들으면서 적었습니다.) I Surrender - Celine Dion (재생버튼클릭) I Surrender-Celine Dio.. or 여린 합창곡 야누스데이(재생버튼클릭) 야누스 데이 한국의 혁명 2악장 76편 당신께서 지켜보시기를, 나란 존재와 우리들은 얼마나 작고 어리석단 말인가. 필시 먼지보다 작은 존재이거늘 싸움과 쾌락, 기대와 파멸을 반복하는 그것이 삶이라 주장하는 우리들은 그래도 때가 되면 당신을 찾는다. 기쁠 때보다 슬픔과 좌절에서 기대려 하고 믿음을 강조한다. 비겁한 당신은 그런 식으로 자신을 증명한다. 기도와 애원, 집착과 증오, 무엇도 아닌 하늘을 향해 읊조리는 마음을 접은 뒤, 수페리우스는 편안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시련을 들려 준 유리마저도 스승과 떨어지고 싶지 않았는지 비밀 문으로 앞장서는 쇼너 스타니들을 조용히 따랐다. “너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 “…그렇지만 저는 나중에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선생님.” “…….” 연약한 여자애가 들어오기에는 험난해 보이는 동굴에서 혜성은 별 수 없이 그녀를 인도했다. 칙칙한 어두움을 혜성으로 인해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와, 또 남들보다 뒤떨어진 부분이 있음을 자각하면서도 아마데우스를 원하는 그녀의 마음은 자꾸만 수페리우스를 아련한 추억에 빠지게끔 했다. 자신도 그랬었다. 테레사가 곁에 있을 때는 애송이인들 괘념치 않았으며, 언제 어디서나 그와 아마데우스가 곁에 있다는 충족이 함께 했었다. 수페리우스는 유리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자랑스러운 면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어딘지 불쾌하고 어두웠다. 자신의 영역이 함부로 노출된 기분이라서 그녀 자체에 완전히 좋아하지 않는 스스로가 이상했다. 별안간 섬광처럼 스치는 잔상이 있다. 테레사! 오, 테레사! 그도 그랬을까. 감히 유추하거늘, 그분도 나를 느끼고 겪으며 혹시 이런 생각들과 싸우셨을까. 제일 뒤에서 따라오던 로미오가 별안간 유리를 앞지르더니 혜성과 나란히 보폭을 맞췄다. 곧 있으면 지하 입구의 문에 도달하는 순간, 수페리우스는 급한 이 때 왜 자신을 찾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아이의 질문을 당연히 예상하고 있던 로미오는 묘한 미소를 짓더니 수페리우스마저 추월하여 쇼너 스타니께로 갔다. “제가 좀 건방져서요.” “뭐라고?” 쇼너 스타니에게 향하는 길에 던지듯 넘긴 말을 통 이해할 수 없었던 혜성이 짜증스레 되물어도 로미오는 대답이 없었다. 그가 수페리우스를 돌아보며 다시 입을 뗀 것은 통로의 끝에 다 달아서였다. “긴 설명 생략하고, 직접 눈으로 보십시오.” “?” 그게 무슨 소리지? 라고 묻기도 전에 아이는 하얗게 질렸다. 퉁- 얼기설기 붙어있던 미약한 고동이 멈추고, 심장은 짙은 아래에 깔렸다. 심장은 삽시간에 파멸을 외치며 멀리로 도망쳤다. 수페리우스는 자신의 몸이 완전히 목재이거나 기계이기를 잠깐 동안 소원했다. 반 아마데우스의 기지는 순식간에 이태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아이 특유의 착각이 이룬 감성에 지나지 않았지만, 분명히 들어본 시끄러운 소리들이었다. 재판 형식으로 자신을 추궁했던 넓은 지하 원형 내부에 들어서는 동시에 수페리우스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주춤거렸다. “한스!” 솔베이지를 알리기 위해 몸을 버릴 번 하였던, 자신은 독일인이 아니라 혼혈아, 튀기라며 씁쓸하게 강조했던 한스가 뜻밖의 모습을 나타냈다. 혜성은 눈을 비비며 그를 외쳤다. 동시에 자신을 쏘아보는 반대편의 샤우트 무리들에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반 아마데우스와 한스 패거리들, 그리고 샤우트들. 이들이 넓은 지하를 꽉 채우고 약간의 사이를 둔 채 서로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풍덩 풍덩 조약돌이 빠지듯 심장은 연못의 물결처럼 넓어지고, 다시 좁아짐을 반복했다. 저들이 왜 여기에 있지? 라며 쇼너와 로미오를 추궁하려는 찰나, 로미오가 귓가로 다가와서 속삭였다. “샤우트놈이 유리의 아버지잖습니까. 그래서 저 애의 연주를 보겠다고 잘 차려입고 왔습니다.” “!” “물론, 그건 명목상일 뿐이지요. 샤우트는 음악을 좋아하지 않고 이용해서 싸움을 일으키는 놈이라고 알고 있으니까요.” 아이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알만 굴려서 왼 쪽 중앙의 샤우트 우두머리를 확인했다. 불같은 정열이 그로부터 확 느껴져서 온 몸이 뜨겁게 타올랐다. 무서웠다. 그리고 두려웠다. 룸펜- 룸-펜! 딸 유리를 빌미로 그가 외쳤던 지난날의 격정이 깨어진 룸펜의 유리창만치 정확하게 기억났다. 서른 후반의 그는 키와 몸집이 남보다 컸지만 반면 탄탄하고 날렵했다. 또 전체적으로 무뚝뚝한 인상을 지녔으며 완벽한 성인 남자의 몸을 자랑했다. 분위기가 그랬기 때문에 감히 쳐다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가 숨을 쉬면 땅 전체가 들썩일 만치 맹수의 냄새가 풍겼다. “혼자 오면 좋을 것을 거액으로 많은 초대장을 사서 이태원의 샤우트 놈들을 우르르 데려온 거죠.” “…….” 유리는 그 구절에서 불쾌하다는 제스추어를 취했지만 로미오는 싹 무시하며 수페리우스에게 나머지 말을 속닥거렸다. “게다가 저기 한스 라는 놈들은 선배와 친한 사이인가본데… 장미 문 앞에서 선배 이름 부르면서 뭐… 지켜줘야 한다나? 의리를 지키러 왔다나? 여하튼 중요한 날에 시위를 벌일 뻔 했습니다.” “!” 퉁-! 그 한 마디에 아마데우스의 붉은 장미는 화염으로 변했다. 데블 관이 살아 움직이며 악마처럼 웃더니 선량한 사람들을 짓밟았다. 악기들은 바닥에 떨어져 스스로를 부러뜨렸다. 식은땀을 흘리는 혜성을 살짝 껴안아주며 로미오는 음습한 투로 중얼거렸다. “제 학생회장 권한 덕분에 교묘히 여기까지 겨우 모아오긴 했는데…….” “…….” 약간은 허스키한 그의 어절만치 기백명은 모아 놓은 인원들의 눈빛은 살쾡이들처럼 살벌했다. 밤의 이리보다 사나웠다. 누군가가 저 높은 벽에 초생 달을 그려 놓는다면, 이곳은 누가 봐도 짙은 밤이었다. “이 다음은, 선배님이 해결해 주십시오. 벌써 몇 번째 치고 받는지 모르겠습니다. 뭐… 그래봤자 지금처럼 노려보는 게 전부…….” “!” “아니!” “한스! 레이놀드!” 바로 그 때, 성격이 급한 놈 몇 명이 둔기를 들고 무리를 이탈하며 앞쪽으로 튀어나왔다. “!” “저 새끼들이!”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반 아마데우스의 지하 기지에서 싸움이 일었다. 샤우트의 잔챙이 놈 너 다섯이 움직인 게 화근이 되어 싸움은 휘발유를 끼얹은 것 마냥 순식간에 크게 번졌다. 계단에 조용히 앉아서 사태를 관망하던 반 아마데우스 무리들은 자신들의 공간에서 감히 싸움을 일으키는 그들에게 사내 특유의 감정이 치솟았는지 참지 못하고 우르르 불의 전차처럼 밀려 내려와서 섞였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오늘은 네 놈의 오장육부를 씹어 삼켜주마.” “다 맞대응해서 죽여 버려!” 이곳은 룸펜이었다. 혹은 샤우트였다. 어쩔 수 없이 이태원의 밤이었다. 레이놀드의 험악한 투와 샤우트의 광기에 찬 음성이 쩡쩡 울렸다. 그들의 소리는 째진 바이올린보다 시리고 소름끼쳤다. 수페리우스는 덜덜 떨며 양 쪽 손으로 귀를 막았다. 시간은 그런데도 자꾸만 흘러서 수페리우스에게 지옥을 펼쳐주었다. 마음속의 신은 비웃었다. 너는 너에게 지옥을 펼쳐도 상관없다고 나에게 기도하지 않았더냐. 때로는 자비로운 입술을 움직이며 신은 아름답게 웃는 것이다. “저 미친놈들이….” “쇼너!” “?” 아름다운 나의 아마데우스여. 모든 상황을 지켜보며 어여쁜 구름 위를 거닐 당신이시여. 버리지 말아 주소서. 마음의 기도는 빠른 순간마다 지지 않고 피었다. “당신이 섞이면 싸움은 오히려 커집니다.” “그럼 뭘 어쩌자는 건가!” 초조하게 상황을 지켜보는 로미오와, 찢어질 듯 커지는 함성들 사이에서 달려 나가려던 쇼너 스타니는 분개하며 소리쳤다. 방금 전까지 귀를 막고 두려운 시선을 어쩌지 못했던 수페리우스는 웬일인지 매우 편안해 보였다. 천지개벽을 일으키는 감수성의 변이는 정점에 다 달았을까. 먼지가 일고, 누군가는 쓰러지고 밟히는 너저분한 가운데, 아이는 별처럼 저 혼자 빛나는 것이다. 명쾌한 정답이 비로소 발할 때의 수페리우스는 이처럼 공간을 노닐었다. 상황은 느렸다. 수페리우스가 한 마디만 건네는데도 상황은 자꾸 느려졌다. 그것의 정체는 지난 혁명 때 경험했던 공포에 불과하다. 그러니 극복 역시 가능하다. 수페리우스는 쇼너와 로미오를 뒤로 밀치며 우람한 놈들의 싸움판에 쏙 사라졌다. “선생님!” “이 멍청아!” “수페리우스!” 셋의 비명이 들렸지만 수페리우스는 오히려 안심하라는 듯이 웃으며 사람들 틈에 끼어 완전히 사라졌다. 그들의 망연자실한 외침을 뒤로 한 채 겨우 한스를 찾아 낸 수페리우스는 그의 앞에 섰다. “룸펜!” “한스. 멈춰라.” 아이는 강한 명령조로 차갑게, 그러나 상냥한 척 웃으며 그에게 말하였다. 움찔 놀란 한스가 방심하는 사이 그를 노리던 샤우트 잔챙이가 엉겨붙어왔다. “우라질! 이 새끼-!” “한스!” “뺨은 왜 그래? 어떤 놈이 그었냐!” “…….” 혜성의 뺨에 그을린 흉터 자국에 놀란 나머지 오해한 한스가 잔챙이 놈을 밟으며 소리쳤다. 그리고 혜성을 발견한 샤우트가 둔기를 쥐고 달려 온 것은 순식간이었다. “꺄악! 선생님!” “!” “아학!” 유리의 비명이 터지자 막 수페리우스를 치려던 샤우트의 동작이 일순 멈췄다. 그러나 그의 뒤에서 몸싸움 중인 몇 놈이 부딪혀와 수페리우스를 깔고 바닥에 엎어졌다. “까아아악!” 몸집이 상당한 두 놈이 수페리우스의 오른 쪽 부분을 온 몸으로 누르고 있었다. 동시에 오른팔이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발작을 일으켰고, 바닥에 누운 채로 동공을 좁히며 아이는 본능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히익! 히이익! 힉! 까아아아아!” “선생님! 선생님!” “룸펜!” 하느님……. “저 개새끼! 죽여 버린다!” “로미오!” 팔이 부러지는 건 두렵지 않습니다……. 당신은 내 팔을 부러뜨릴 것처럼 위협해도 마음은 부러뜨릴 수 없음을 나는 오래전 배웠으니까요. 제가 두려운 것은, 당신께 감사의 기도를 영원히 올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미래입니다……. 그 점은 당신 또한 싫으시겠지요……. 피를 흘린 들 지금보다 아플 수는 없었다. 후유증이 완전히 나았다고 믿었던 팔은 잊었던 아픔을 되살리며 뇌에 쳐들어왔다. 세포의 중심은 오직 오른팔이었다. “힉! 히이… 힉. 히이이익. 하아… 하….” 나는 괜찮아. 아이는 자신에게 달려오는 걱정스러운 무리들을 독사처럼 쏘아보며 그러지 못하도록 물렸다. 수페리우스는 겨우 몸을 일으키며 자신의 팔임에도 쳐다보기 두려운 것을 어렵게 만졌다. 잠깐 무거운 살에 눌렸을 뿐, 움직이는데 지장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옷이 흙먼지로 더러워졌지만 그건 문제도 아니었다. “……?” 순간 혜성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며 후두두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중앙에 서 있는 자신을 보호하듯 양 팔을 벌리고 샤우트와 한스를 막아 선 유리의 등이 보였다. 죽었던 심장은 또 다시 부활을 꾀하였다. 유리! 파랗게 질린 혜성이 그녀를 부르기도 전에, 유리는 아버지에게 싸움을 멈출 것을 호소했다. 그는 곧 팔을 번쩍 올리더니 공격을 멈추게 했고, 덕분에 괜한 의협심으로 나뒹굴었던 반 아마데우스와 한스 패거리도 정지했다. 삽시간에 정적이 모두를 감쌌다. 유리의 뺨에 슬픈 눈물이 십자가의 형상으로 주룩 흐를 때, 쓰라린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샤우트가 허리를 숙였다. 딸의 키와 비슷해지도록 허리를 완전히 숙인 그는 어쩐지 순수해 보였다. “…그렇게… 클래식 음악이란 게… 하고 싶은 거냐.” 작은 말도 쩌렁쩌렁 울리는 지하의 넓은 공간에서 샤우트의 떨리는 소리가 슬프게 퍼졌다. 그는 동시에 유리의 뺨을 조용히 쓰다듬었다. 그 손바닥에 전신을 기대듯 눈을 감으며 유리는 흐느꼈다. “네, 아버지.”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 하는 대도?” “……네… 그래요.” 샤우트의 무뚝뚝한 말에 베인 사랑 때문에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치 유리의 심장은 조여졌다. 그녀는 감정을 억누르려 노력하는 대신 마구잡이로 눈물을 흘렸다. 가끔은 헐떡였다. 누가 봐도 둘은 이질적인 만치 애절해 보였다. 세속과 단절되어 단 둘만이 동떨어져 있었다. 샤우트의 커다란 손바닥이 유리의 눈물로 홍수를 이뤘다. “…나를 버리려는 거냐…?” “마음은 변할 수 없습니다.” “…….” “아버지…….” “그럼, 가거라….” “제 음악은… 나의 악장은… 소멸해가는 불씨처럼 연약하게… 그러나 지치지 않고… 당신을 부르고 있어요… 언제나…….” “그런 유식한 말은 모른다. 내 맘이 변하기 전에, 발표횐지 어딘지로 썩 사라져.” “…….” 유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등을 돌렸다. 로미오의 말마따나 초대장을 빌미로 연주회장을 망칠 계획이었던 샤우트는 손바닥에 남아있는 딸의 체온을 고스란히 주머니에 담으며 그녀가 나가는 뒷모습을 아련히 응시했다. 그는 아마도 연주회장을 망치지는 않을 것이다. 유리를 사랑한다면, 그것을 떠나 연인이 아닌 부모의 마음이 있으니……. 지금쯤 나가면 필시 연주회 개막은 볼 수 있겠지만, 문제는 남은 자들이었다. 수페리우스는 유리와 같이 이곳에서 나가고픈 한 쪽의 마음을 무겁게 억누르며 침체된 샤우트와 새삼 낯설어하는 한스 패거리들을 골고루 돌아보았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자학으로 스스로를 비판하는 반 아마데우스의 움직임도 보았다. 그리고, 아이는 진심으로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애를 썼다. 최후 단계에서 수페리우스는 샤우트가 되었고, 또 룸펜이자 한스 패거리이며 반 아마데우스가 되었다. 그러자 마음에서 약동하던 봄의 수채화가 다시금 크게 번지는 것이다. 이럴 수가. 처음에는 그들을 어떻게 하면 아마데우스 밖으로 내몰 수 있을까 고민했던 것이, 내 마음이 그들로 이해되자 그러면 안 되노라 못을 박는 것이다. 그래, 그것이 정답이었다. 내가 샤우트라면, 내가 한스라면, 내가 반 아마데우스라면, 주먹질은 하겠지만 고귀한 인사들로 그득 차 있는 연주회장에는 들어갈 용기가 없을 것이다. 왜 몰랐을까! 수페리우스는 단숨에 달려가 한스의 주머니에서 작은 단도를 꺼냈다. 한스가 당황하는 사이, 이번에는 반대편의 샤우트에게 가서 그가 무심결에 쥐고 있던 커다란 둔기를 빼앗았다. 둘이 당황하는 찰라, 수페리우스는 두 가지를 쥐고 허공에 번쩍 올리며 소리쳤다. “내 연주를 들어라!” “!” “뭐…….” 로미오가 제지하려던 때, 쇼너 스타니가 그를 막았다. 쇼너 스타니의 눈매는 붉게 충혈 되어 바람에 날리는 이삭처럼 떨리고 있었다. 수페리우스는 마음을 다하여 다시 외쳤다. “클래식에 겁낼 것 없다! 감동의 기회는 모두에게나 공평한 거야! 여기를 이태원이라고 생각해라! 여기를 룸펜이라고 생각해! 여기를 샤우트라고 생각해라! 반 아마데우스는 이미 아마데우스 이다!” “!” “!” “연주를 듣고, 성에 차지 않으면!” 잠시 입술을 깨물고 덜덜 떨던 수페리우스는 더더욱 양 손에 힘을 주며 둔기와 칼을 번쩍였다. “이 칼로 나의 심장이 아닌 뇌를 찔러라!” 배에 거대한 바람을 불어넣고, 그것이 빠져나갈 때, 음성을 소리쳤다. “이 무기로 나의 머리가 아닌 손가락의 뼈를 부셔라!” 무감각은 완전히 사라졌다. 수페리우스는 총명하게 눈을 번쩍이며 무시무시한 톤으로 지하를 울렸다. 그 누구도 양 쪽의 무기를 쥐고 선언하는 수페리우스에게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오 하느님. 그들과 다시 만나는 순간, 그들을 이해하는 순간, 내가 왜 음악을 하는지 진정 원하는 내 자신이 무엇인지 제대로 깨달았습니다. 음악이야말로 언어보다 솔직하고 사람보다 순수한 진실의 매개체라는 것을! 내가 알렸으면서도 잠시 잊었던 그 황홀함을! 무대가 그리워서 룸펜의 작은 무대만으로도 감사했던 그 때를. 잊을 리가 없다. 무대에 서면, 내가 왜 태어났는지를 깨닫는다. 무대에서 박수를 받는 순간 힘들었던 훈련들은 사라지고 짜릿한 쾌락이 나를 멈추게 한다. 거대한 무리가 봄밤을 이탈하고 있었다. 샤우트와 룸펜의 한스 무리들, 그리고 반 아마데우스까지 가세한 숫자는 몇 백에 달했기 때문이다. 선두에 선 수페리우스가 뒤따르는 쇼너 스타니에게 히스테리칼한 투로 물었다. “많이 늦었습니까?” 후다닥 정신을 차린 쇼너가 손목시계를 확인하였다. “팸플릿에 따르면 지금은 막이 올라갔고 꽤 지났을 테지만…!” “서둘러요 선배!” “…….”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던 연주회장의 대형 문이 보이자 수페리우스는 쇼너 스타니에게 빨리 따라올 것을 요구하며 쏜살같이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를 뒤따르던 어마어마한 숫자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개막식은 놓쳤지만, 연주는 놓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나를 대신해서 누군가 대신 연주한다면 그를 던져서라도 내가 자리를 차지할 테니. 불붙는 자아를 가슴에 쥐고 수페리우스는 자신을 보며 반기다가, 곧 험악한 무리들이 뒤따른 것에 경악하며 막아 선 관리자들과 소수의 경찰들을 보았다. 그러나 수페리우스가 괜찮다는 뜻으로 상냥하게 웃어주자 관리자들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며 뒤로 물러났다. 힘으로도, 무기로도 막을 수 없는 무언가가 수페리우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 아무리 능력 좋은 관리인이라 한 들 저 험악한 숫자들을 막을 용기가 사실은 없었다. 투우우우- 대형 문을 열자 아주 조용하면서도 적당히 소곤대는 정적 속의 좌중이 빛을 돌아보았다. “수페리우스!” “수페…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다!” “수페리우스!” 1층의 사람들의 외침은 파도처럼 밀려가 위층의 뮌헨 학생들까지 요동치게 하였다. 그들은 한 결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막 들이닥친 수페리우스의 몰골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주목했다. 예정보다 사십분이나 늦은 수페리우스의 등장을 두고 비로소 안심했다는 듯 저 쪽의 사비나 교수와 로제리오는 주저앉았다. 먼 곳의 유지신이 아무도 모르는 사이 피식 웃었다. 무대에서 이쪽을 향해 보다가 크게 넘어진 히스가 후다닥 일어서며 옷을 털었고, 웅장한 연주회장에 사파이어처럼 박혀있던 깨끗한 좌중은 지저분한 수페리우스와, 별안간 쑥쑥 밀려들어오는 낯선 괴한들의 등장에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자리가 없을 텐데…….” “의자 뒤에 서서 보거나, 계단 사이사이에 앉으면 돼.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한스…….” “네가 말했듯이, 여기는 룸펜이다. 그리고, 너는 우리들에게 영원한 룸펜이다.” “…….” 몇 백의 무리들이 빼곡히 들이 찬 모양새는 매우 기괴했다. 땀을 흘린데다가 더러운 몰골의 수페리우스 역시 그들과 잘 어울렸다. 냄새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청결한 척 구는 무리들은 코를 막으며 팸플릿을 펄럭였다. 수페리우스는 멀리 무대를 보며 아찔한 신음을 터뜨렸다. 둥- 가시의 북보다 진한 소리가 심장을 때렸다. 소리는 무대 위의 아름다운 피아노로 향할 때마다 점점 커졌다. 높은 무대와 붉은 막, 수천의 사람들, 반 아마데우스와 아마데우스. 일반인들과 장화 신은 이태원의 그들. 무거운 어깨에 힘을 주며 수페리우스는 힘차게 걸었다. 그가 나가는 방향을 따라서 사람들은 턱을 움직였다. “…….” “……!” 무대의 계단 앞에서는 테레사가 지엄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서있었다. 그가 비켜줘야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수페리우스는 전신이 타오르는 기분을 억누르며 겨우 말문을 열었다. “클래식에 무지한 이들에게도, 감동의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 그는 대답이 없었다. 저 쪽 중앙의 유리가 벌떡 일어나서 떨리는 시선으로 좌석 옆 계단에 서 있는 샤우트를 응시하고 있었다. 테레사… 아이는 고개를 숙이며 정중한 투로 사과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 툭- 떨어지는 굵은 땀방울이 카펫을 붉게 적셨다. 사람들이 지금의 상황 때문에 혼란스러워 한다는 것을 안다. 알기 때문에 나는 증명하려는 것이다. 혼란은, 또 다른 ‘혼란’으로 막으면 되는 것이다. 어차피 나는 음악에로의 ‘혁명’을 일으킬 테니. 아이는 곧 뺨을 치켜 올리며 도전적인 눈매로 테레사를 보았다. “존경하는 나의 아마데우스, 반 아마데우스… 테레사.” “…….” “치고 싶거든, 어서 치십시오.” “…….” “그리고 서둘러 비켜 주십시오.” “…….” “나는 기어서라도 무대에 서야겠습니다.” “…….” “벌은 나중에 받지요. 지금의 나를 당신은 막을 수 없습니다.” “…….” “그 점을 당신은 겪어 봤습니다.” “!” 번쩍- 테레사의 눈이 뜨였다. 냉기가 넘치던 암회색 눈동자가 정확하게 수페리우스를 내려 보았다. 가십 기자들조차 숨을 죽이는 가운데, 지상 최대의 칸타빌레를 앞두고 수페리우스는 자신만만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마음을 터뜨렸다. “오만한 청중이 다 빠져나가도 저들은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나는 밑바닥과 혼란, 방황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한 최종 단계에 왔습니다.” “…….” “지금의 당신은 정복자가 아니라, 내가 넘어야 할 산 입니다!” “…….” 넓은 공간을 타고 수페리우스의 음성이 울리는 듯 한 착각이 일었다. 무슨 일을 겪고 왔기에 수페리우스가 저런 말을 할까. 그리고, 방금 들어온 더러운 놈들은 누구일까. 저렇게 지저분하다니! 히스는 인내심 있게 상황을 지켜보느라 몇 년은 늙은 기분이었다. 상상도 못했던 수페리우스의 뺨 흉터가 살짝 살짝 보일 때마다 히스는 콩 쿨이고 뭐고 이 상황에서 그를 구출해야 옳을까? 하며 저 혼자 끙끙댔다. 몇 분 후, 영원히 대답하지 않을 것처럼 굴던 테레사가 별안간 입 꼬리를 올리며 언어를 쏟았다. “잘 하고 와.” “……!” 테레사-! 울컥 목울대를 타고 그의 이름만이 움찔거렸다. 수페리우스는 호흡을 참아가며 그의 나머지 말을 기다렸다. “네가 말했듯이, 나는 너를 막을 수 없다.” “…….” “초대의 명예마저 아쉬움 없이 버렸던 너를, 나는 막을 생각이 없다.” “!” “하고 싶은 대로 연주 해 봐라.” “!” 테레사… 테레사… 생기 넘쳤던 눈가에 뜨거운 분자들이 흘렀다. 눈물은 어느 때 보다 진한 행진을 반복하며 흉터와 뺨을 적셨다. “너는 혼자다. 아무에게도 기대지 마라. 이 순간에는 하느님도 없어야 된다. 그러면 정말로 너의 그대로를 건반이 표현할 테니.” “테레사…….” 아니요… 저는 많은 사람을 찾고, 하느님도 부를 것입니다. 아이는 약간이지만 마음으로 웃었다. “가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스포트라이트로 동그랗게 빛나는 외로운 피아노는 무대에 선 수페리우스를 간절히 기다리며 서있었다. 저벅. 저벅. 구두 끝에 물기가 매달린 것 마냥 곳곳의 숨소리는 바다를 연상케 했다. 곧 중앙에 선 수페리우스는 빼곡히 들어 찬 좌중을 위 아래로 둘러보며 아찔한 쾌감을 느꼈다. 아이가 천천히 허리 숙여 인사하자, 정확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와 연주회장을 뒤흔들었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와아아아!” 뮌헨의 히스와 런던의 산타시아로 흥분하는 좌중들에게 눌렸던 한국 학생들은 당장 소리치며 주먹을 추켜올렸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들은 흥분했고 자랑스러운 수페리우스를 위해 벌써부터 턱을 덜덜 떨며 온 몸으로 소리쳤다. 무대 바닥으로 충분히 느껴지는 함성의 잔여가 숨통을 조였다. 머릿속은 터져나갔다. 이 무대, 이 느낌, 이 절정, 다가올 카타르시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저에게 존재를 허락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에게 생각을 허락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에게 기회와 손놀림을 허락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에게 심장을 허락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수페리우스!” 그리고, 저에게 지금을 허락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피아노 옆에 배치된 두 대의 마이크 중 자신의 키에 맞춰진 쪽에 선 수페리우스는 다시 허리를 숙인 뒤 우레와 같은 갈채를 받았다. 그리고 좌중이 침착해지기를 기다린 뒤 말 문을 열었다. “한국 아마데우스의 수페리우스… 신 혜 성 입니다.” 여기저기서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그를 힘차게 부르는 소리가 사무치게 퍼져왔다. 아이는 눈시울을 떨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끝에 힘을 주었다. 입술을 깨물고 평온을 되찾으려 노력하며 다시 도전적인 말씨로 좌중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곡명이, 바뀌었습니다.” “!” 곡명이 바뀌었습니다. 그 말은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의 환희를 멈추게 했다. 단숨에 혼란에 빠진 교수들과 좌중은 팸플릿에 적힌 다뉴브의 밤을 똑똑히 확인하며 어수선함을 감추지 않았다. 다뉴브의 밤이 바뀌었습니다. 수페리우스는 같은 말을 다시 설명하며 부드럽게 나아갔다. “4악장으로 최근 바뀌면서 전체 구성 또한 조금씩 바뀌었습니다. 지금 들려드릴 곡은, …다뉴브의 밤이 아닌…….” 테레사에게조차 알려주지 않은 혼자만의 비밀, 처참한 밑바닥을 모두의 앞에서 꺼낼 때, 수페리우스는 견디기 어려운 뜨거운 시선들 앞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 하느님…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새로이 부각된 지금의 곡명은…….” 모두가 긴장하여 숨을 참았다. 그 때 번쩍 수페리우스의 붉은 눈이 뜨이며 명쾌한 음성이 좌중의 머리를 가르듯이 단숨에 퍼졌다. “…한국의… …혁명 입니다.” “!” 당신의 자랑스러운, 잘났다 우기는 당신들의 나라에 보여주고 싶고 증명하고픈 한국의 혁명입니다. 그의 말을 받아 적던 각지 외신기자들과, 통역하던 이들까지 단숨에 수페리우스를 돌아보며 숨을 참았다. “변방의 국가에서 내세우는 빛의 비바체 1악장, 침몰을 바라며 야유를 퍼붓는 경쟁국들을 의미하는 빠른 템포의 2악장, 클라이맥스 3악장을 지나 종결부 4악장에서 다시 터뜨리는 데카포… 3악장의 종결부가 다시 4악장에서… 그렇게 47분 50초 정도로 완성되는 이 곡은, 오늘을 반증하듯이, 한국의 혁명! …입니다.” “!!” 일반인들, 각지 아마데우스 인파들, 테레사, 히스, 유지 신,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 놀라는 분위기였다. 그것들에 섞여 한스와 샤우트, 반 아마데우스까지 혼란에 가담했다. 그러나 더 이상 말이 없는 수페리우스는 그들의 호기심을 한 데 묶어 오히려 피아노 의자에 앉아버렸다. 민우의 목걸이가 아이의 움직임을 따라서 부드럽게 출렁였다. 가슴팍에 새겨진 주홍글씨처럼 감옥 열쇠는 유난히 수페리우스를 돋보이게 했다. “후우….” 긴 호흡을 내뱉은 뒤, 수페리우스는 필름처럼 스치는 지난날의 격정과, 앎, 그리고 혼란과, 오늘을 한꺼번에 보았다. 컨디션은 지금껏 중 제일을 자랑하고 있었다. 캉-! 따당! 따당! 따당! 대포가 쏘이듯 첫 음절부터 박진감 넘치는 음률이 세차게 공간을 뚫었다. 수페리우스의 무표정은 힘 있는 선율처럼 굉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오천 명이 넘는 그들은 수페리우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금세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캉-! 따당! 캉-! 따당! 중반부를 오르내리던 손놀림은 크고 웅장하며, 사나웠다. 한국의 혁명 제 1주자의 파란. 저것은 비바체를 흉내 내는 또 다른 기법일 뿐이다. 저 작은 팔이 건반을 내리누를 때, 누구나 속이 시원해지는 경쾌한 스릴 같은 것을 느끼며 감탄을 터뜨렸다. 허공을 쉭 쉭 가르는 팔은 적군에게 던지는 표창보다도 날렵한 솜씨를 자랑했다. 산 속의 흙을 밟듯이 서정적이되 산뜻한 1악장의 중반부, 바야흐로 비바체다운 음정이 발랄하게 번질 무렵, 별안간 2층에 앉아계셨던 키르혜아이젠 교수가 벌떡 일어나 온 몸을 떨었다. 테레사의 에튜드를 흉내 낸 것에 불과하다는 평으로 수페리우스를 궁지에 몰리게 했던 미완성 다뉴브의 밤 중 소나타, 그 부분이 튀어 나와서 였다. 그 때와 전체는 비슷하지만, 다르다! 키르혜아이젠 교수는 의자에 팔을 지탱한 뒤 겨우 숨을 쉬며 눈을 크게 떴다. 저것은…! 키르혜아이젠 교수의 변화를 전혀 알 리 없는 수페리우스의 한국의 혁명은 주춤대는 과정조차 없이 단숨에 2악장을 치고 들어갔다. 경쟁국들의 야비한 심성을 의미하며 오히려 위협한다는 2악장은, 과연 혁명 이라는 주제와 맞게 D단조에서 다시 장조로, A단조에서 동시 다발 단조 화음으로 변화되어갔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고 사용되는 곡들의 2악장은 부드러운 안단테의 리드 형식이기 마련이거늘, 아이는 모든 체계를 파계하는 것이다. 2악장에서는 1악장에서와 같은 종속부가 없었다. 2분의 2박자에서 3박자로, 다시 2박자에서 거대한 8분의 6박이 잠시 끼어 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기찬 몸놀림과도 같은 2박이 연주회장에 떵떵 울렸다. 종속부란 도저히 찾을 수가 없는 희귀한 글자로 변모한다. 오로지 가슴을 깃발처럼 펄럭이게 유도하는 포르테와 악센트만이 촘촘히 쓰여 있어서였다. 하단에서 상단으로, 다시 중앙에서 하단으로, 별안간 양 팔을 벌리며- 수페리우스의 등이 크게 꺾이다가 휙 휙 숙여지는 것이 반복될 때조차 그의 손가락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현란하게 움직였다. 그것은 하늘의 별이 몽땅 이곳에 쏠리는 듯 한 착각을 빚었다. 세상의 명마가 우르르 대지를 뒤흔들며 달려온 들 지금만 못 해 보였다. 희귀하고도 리드미컬한 음역은 창조라는 이름과 걸맞았다. 서정적이지 않다. 그러나 서정적이다. 슬프다. 그러나 슬프지 않다. 참혹하다. 아니다 참혹하지 않다. 강렬하다. 그래, 강렬하다! 사계를 주름잡던 수풀이 고개 숙일 때조차 야심찬 선율은 뻣뻣한 자태를 절대 숙이지 않았다. 눈부신 절대음역이 아이의 성역처럼 천지에 울렸다. “!” 맨 앞자리의 유리가 저도 모르게 일어서서 양 손으로 입을 막았다. 무표정의 침착한 자는 수페리우스, 오직 그 하나였다. 저 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사람들은 목격했다. 이 부분은! 유리의 뺨을 타고 폭포처럼 진한 눈물이 계속해서 흘렀다. 끄윽, 끅, 그녀는 자신이 어떤 표정으로 어떻게 입을 막는 줄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러시아의 겨울을 흉내 내는 북유럽의 겨울, 그 세찬 바람과도 같은 선율과 풍랑. 얼음을 깨뜨리는 폭풍의 눈, 혁명, 다시 혁명! 유리는 기억하고 있었다. 저 미친 악장은 지난 날 언뜻 확인했을 때 실로 엄청난 공포를 주었었다. 연주자의 손가락을 부러뜨릴 만치 위협적인 16분 음표들이 다닥다닥 연결되었으며, 대다수 겹 세도막인 그것들은 2악장 전체에 악센트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저것은 미친 음악이다. 보통 연습 갖고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악보임에 틀림없다! 제시 부! 저것이 이 곡을 대표하는 제시 부였던 거야! 이토록 힘겨운 음표들을 연주하기 위해 수페리우스는… 수페리우스는…! 무궁동을 설마…! 연주자의 손가락이 부러질 만치 현란하고 빠른 악장의 변화를 두고 유리는 상상해 마지않던 음악을 실제로 감상하게 된 지금의 쾌락에 눌려 버들가지처럼 떨었다. 먼 곳의 유지신은 더더욱 침묵하며 메마른 표정에 피어나는 유채꽃과 같은 화사한 변화를 어쩔 수 없이 내보였다. “pesante… pesante…!” 무겁게, 무겁게. 저 부분의 악보를 모조리 외우고 있던 유리는 2악장의 제시마다 당시 수페리우스가 휘갈겨 적어놨던 지시용어를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무겁게, 그러나 중후하게. 그리고… 그리고…. “piangendo…!” 슬프게… 슬프게… 울면서… 몹시 울면서…! 2악장의 혁명, 전체 악장의 제시부 중간 중간 섞인 슬픈 화음, 그것들에 적힌 용어를 기억해내는 유리의 입술은 뭐에 홀린 것처럼 계속 터져 나왔다. “pathetique…!” 고통스러운 열정으로! 마침내 유리는 오열하며 비명처럼 고통과 열정을 외쳤다. 그리고 양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수페리우스가 긴 숨을 허공에 내뱉는가 싶더니, 사람들이 안심할 틈을 주지 않고 아이러니한 3악장의 클라이맥스 도입부에 들어섰다. 이럴 수가! 방금 전의 화려한 선율이 클라이맥스가 아니라고? 그것은 20분이 넘는 장대한 제시부였어! 좌중은 흥분했다. 그리고 똑똑히 청각에 전해지는 3악장과, 금세 닥친 4악장, 다시 데카토의 쉼 없는 반복과 함께 나타난 3악장에 쏠려갔다. 2악장처럼 세지 않았지만 중간의 여린 음을 활용하는 안단테가 비로소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혁명이라는 이름만치 거칠게 끊어졌고, 누가 들어도 명실 공히 변주곡 혹은 광시곡이라 이름 할 만 한 부분들이 놀람 교향곡을 흉내 내듯 짧게 짧게 튀어나왔다. 언뜻 들으면 감상적으로 취중 할 만한 녹턴의 선율이 부드럽게 퍼졌지만 아까의 폭발적인 음과 연결되는 아이러니함이 돋보였다. 운명의 마차가 정지했다. 산산이 부서졌다. 산타시아를 중축으로 내질렀던 운명의 여신마저 고개를 숙이고 자멸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완전히 혼자가 된 수페리우스는 최후 데카토를 두고 이를 악물었다. 그 때 기다렸다는 듯이 힘이 다 한 오른팔이, 아까의 싸움에서 빚어난 후유증을 일으키며 발작을 부렸다. “히익!” “!” 허공에 오른손을 번쩍 추켜올린 수페리우스는 부들부들 떨며 잠시 멈췄다. 순간 좌중의 호흡도 멈췄다. 비지땀을 흘리면서도 긴장감에 허덕이는 모두는 수페리우스와 마찬가지로 오른손을 올린 착각에 사로잡혀서 괴로웠다. 힘 있는 선율이 끊어진 지금은, 지상에서 가장 잔인한 순간이었다. 제발… 제발… 수페리우스는 이를 악물었다. 제발…! 칼자국이 선연한 팔의 상처가 벌어지는 착각 때문인지 통증은 끊임없이 뇌에 쳐들어왔다. 아이는 천천히 오른팔을 내렸다. 그리고 목걸이의 줄을, 줄 끝에 매달린 열쇠를 움켜쥐고 주룩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도저히 움직여지지 않는 대신 왼 손을 움직여서 건반을 활기차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 “수페리우스!” 심장은 벌써 터졌다. 나는 부서지고 있어. 그러나 아주 기쁜 마음으로, 부서질 것이다…. 이 무대, 이 감각, 이 전율, 아파서 눈물조차 힘들어. 집중이 어려워. 그래도 기쁘게 아파하며 집중한 뒤, 완전히 부서질 것이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오, 하느님! 눈시울이 붉어진 한국 학생들은 사무치는 감동과 격정을 어쩌지 못 하여 모두 일어서 있었다. 아이는 이를 악물며 오른 팔로 열쇠를 쥔 상태에서 바락바락 비명을 치듯 눈물을 쏟아내며 어떻게든 완벽한 왼 손 연주를 만들어냈다. 가슴이 찢어졌다. 벽이 붕괴될 정도로 참담했다. 슬퍼서 일어나야 했다. 누군가는 비명을 질렀다. 왼 팔은 괜찮아. 괜찮아. 왼 팔은 괜찮잖아. 연주는, 끊어져서는 안 돼. 절대로 안 돼! 설사 원래 음역을 탈피하는 한이 있어도 이것만은 용납할 수 없어! 빠르지만 연약한 선율이 왼 팔에서 마구 창조되었다. 원래 악보에서 변주곡으로 탈색된 지금의 3악장과 그리고 4악장의 최후 데카토. 아이는 땀으로 젖은 몸을 크게 꺾으며 클라이맥스 최종 단계에 들어섰다. 하느님…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양 쪽 손을 모두 사용한 것처럼 신기하게 들리는 왼 팔의 연주는 서러우리만치 멋졌다. 그래서 사무쳤다. 사람들은 소름이 끼쳤는지 오싹 달아오른 표정으로 굳어 있었다. 누군가는 흐느꼈고, 또 누군가는 일어섰다가 풀린 다리를 원망하며 주저앉았다. 오른손이 안 된다면 왼 손으로 싸운다. 한국의 혁명, 저것은 어떻게든 지지 않으려는 혁명이었다. 수페리우스의, 한국의 혁명이었다. 그 때, 왼손에 취중 하여 마른침을 삼키던 수페리우스의 마음 저 쪽, 잠시 잊었노라 여겼던 오래된 음성이 청량제처럼 스쳤다. 『 …해 줘…. 』 “?” 아이는 귀를 의심했다. 환청일까? 귓가에 속삭이듯 자세하고 분명하게 들리는 소리에 하마터면 일어서서 뒤를 돌아볼 뻔 했다. 그러나 곧 알았다. 무대 위에서 숨을 쉬는 자는 오직 저 혼자라는 것을. 하지만 불벼락만치 자세한 음성은 다시 퍼져왔다. 『 …수 있어… …해 줘…. 』 “?” 흐릿해진 음성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수페리우스의 팔놀림은 반대로 연주에 몰입되었다. 헌데 연주에 몰입되는 것에 전혀 방해되지 않는 환청이 계속해서 오히려 처음보다 자세히 귓가에 트인다. 『 일반 사람들에게 우리의 문화를 공개 해 줘… 평범한 학교로 만들어 줘. 』 “!” 민우야…? 왜 지금의 다급한 순간에, 어째서? 아이는 뭐에 홀린 것처럼 천천히 오른팔을 건반 위로 올렸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곡에만 집중하려는 때, 마음은 엉겅퀴처럼 엉키더니 생소한 내용을 마구 떠드는 것이다. 이윽고 번개처럼 스치는 많은 사람들의 표정과 간절함이 떠올라서 아이는 눈을 크게 떴다. 저 쪽 어딘가 유리와 샤우트가 있다. 온갖 나라에서 온 아마데우스가 있다. 나의 테레사와, 그리고… 반 아마데우스가 있어. 한스와 레이놀드… 나의 페르귄트가 있다…! 『 너는 할 수 있을 거야. 』 내가 어떻게 해… 나는 애송이란 말이야. 왼 손을 건반에 움직이며 아이는 오래 전 그때처럼 마음 저 쪽의 민우에게 나약한 소리를 지껄였다. 그런데도 그는 웃으면서 자상하게 속삭여주는 게 아닌가. 『 그러니까 할 수 있는 거야. 당장이 아니라 먼 훗날. 』 오른팔의 아픔이 가시고 있다…! 느낄 수 있다. 최종 마지막 두 페이지를 두고, 나는 새처럼 자유로워진다… 나는, 나만은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의 변이가 소리친다… 혁명… 혁명… 그것의 최종에서 나는 그를 대신해서, 모두를 증명하며, 창공을 날아다닌다…! 아이의 눈빛이 총명함을 되찾을 무렵, 기적처럼 전해진 민우의 음성은 예전의 기억이 아닌 현실로 터져 나왔다. 똑똑하게 전해진다. 예전의 기억이 아닌 지금으로… 지금으로…? 지금으로…! 『 그 날은……. 』 오 하느님. 수페리우스는 조금씩 오른팔에 힘을 주었다. 『 이 순간.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오늘. 』 “!” 아프지 않다. 아프다는 착각조차 없다…! 『 바로, 지금이다. 』 “!” 섬광처럼 번쩍였던 민우의 시선, 그것은 부리부리한 독수리의 눈동자와 같았다. 민우는 그러면서 웃어주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아이는 당장 온 몸을 건반에 낮추어 오른손 연주를 합세하였다. 대지를 박차 오르는 독수리와도 같은 몸놀림. 알르방드처럼 표현되는 기분 때문인지 최후 데카토를 두고 누군가는 독일의 무희가 출현하고 있다는 착각에 젖었다. 빠르다. 다시 느리다. 경쾌하다. 하지만 슬프다. 그러나 당당하다. 곡의 느낌은 천치만별이었다. 유리의 말마따나 천지개벽이나 다름없는 음률이 저 작은 소년이 창조했다는 것을 사람들은 확인하면서도 믿을 수 없어하는 눈치였다. “수페리우스!” 키르혜아이젠 교수와 사비나, 그리고 당사자 수페리우스 역시 최종 부분에서 놀랐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식은땀이 건반 위로 후두두 낙하했다. 밑바닥이 쩌 억 갈리며 희망의 물이 샘솟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스타일이 달라졌다! 다시 말 해 스타일이 창조되었다! 키르혜아이젠 교수는 진심으로 경악하며 다시 놀랐다. 수페리우스의 평범해 보였던 연주 스타일이 어딘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테레사와 같은 은어의 손놀림? 그림자? 하데스? 아니다. 딱히 정할 수는 없지만 저 애 만의 테크닉을 듣는 즉시 유추할 수 있게끔 변화된 무엇이 있다! 이 기법은 소수의 무리들을 경탄케 했다. 그도 그럴 듯이 대다수의 좌중은 원래의 수페리우스를 잘 모르기 때문에 그저 훌륭하고 세련된 연주라고 인식할 테지만, 한국의 고학년생과 유지 신, 히스, 테레사, 유리, 사비나, 로제리오 등은 그를 알기 때문에 지금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으리라. 아이는 턱을 세우며 가늘게 떨었다. 온 몸으로 무럭무럭 퍼지는 전율이 세포를 갉아먹어도 괜찮았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노력의 진가를 확인하게 해 주신 지금을 잊지 않겠습니다. 나에게 이런 음악을 허락해 주셔서… 내 것임에도 믿기지 않는 찬란한 눈부심을… 온 몸을 숙여 감사의 기도를 올리니 제발 받아주소서…! 아래의 건반에서 중반으로, 다시 아래에서 상단으로 차례차례 그러나 빠른 솜씨로 단숨에 행진하듯 오르는 혁명의 마무리가 그만의 독특함으로 펼쳐질 때, 한국 교수들마저 저희들의 입을 막았다. 처음부터 수페리우스를 탐탁찮게 여기던 한국의 오만한 교수들은 진심으로 놀라워했다. 대체 뮌헨에서 무엇을 배워 왔기에 그의 연주가 자기만의 스타일로 지금 이 순간 바뀐 것일까!? 1악장의 비바체에서도 없었던 ‘무엇’이 분명히 생겼다! 연약한 상단에서의 창조가 거대한 크레셴도를 맞이하여 쏜살같이 하단으로 내려왔다. 수페리우스의 어깨가 경련을 일으키듯 크게 꺾이며 아래로 단숨에 내려오는 때, 정확한 음정처럼 좌중의 몸도 왼 쪽으로 쏠렸다. “하악!” “!” “!” 한국의 혁명. 오래전의 다뉴브의 밤. 어쩌면 오해와 시련으로 빈번했던 지난날. 50분을 차지한 수페리우스의 연주가 완전히 끝났다. “…….” “…….” 죽은 듯이 고요한 침묵이 모두를 백치로 둔갑시켰다. 감히 입을 떼지 못한다. 입을 열어도 말을 뱉어내지 않았다. 한국의 수페리우스에 대해 전혀 몰랐던 이들은 새삼스럽다는 듯 눈을 빛내며 겨우 턱을 조금씩 움직였다. 침묵은 3분이라는 최대의 기록을 낳았다. 누군가가 번쩍 손을 올리다가도 주변의 장엄한 침묵에 휩쓸려 다시 내리는 과정이 3분 내내 지속되었다. 그 때, 제일 앞줄의 테레사가 천천히 일어서며 늘씬한 등을 펴고 힘껏 소리쳤다. “브라보!” “!” “!” 단 한 번도, 그 누구에게도, 혹은 자신의 리사이틀에서조차 브라보를 외치지 않았던 테레사가 주먹을 움켜쥐고 허공을 가르는 것이었다. 성대를 떨리며 천지를 울리듯, 레퀴엠을 뚫고 그는 외쳤다. “브라보!” 그제 서야 환각에서 깨어난 듯 한 시선으로 좌중은 거대한 파도처럼 움직이며 한꺼번에 갈채를 퍼부으며 소리쳤다. “우와아아아!”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는 조용히 허리를 숙였다. 해 냈어… 내가… 애송이였던 내가… 룸펜에서 주저앉으려던 내가… 이런 내가… 해 냈어…! 이를 악물었다. 허리는 쉽사리 올려지지 않았다. 벅찬 감동과 사람들이 주는 희열이 발끝부터 머리 꼭대기를 마구 휘저었다. 뚝… 뚝… 비지땀과 섞인 눈물이 우아한 무대 바닥으로 사정없이 떨어졌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박수소리는 고통을 잊게 해 주는 것을…. “혁명의 레퀴엠!” “수페리우스!” “브라보!”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거의 전원이 기립박수를 퍼붓기 시작하자 연주회장의 붉은 내부가 모조리 붉은 물로 출렁이는 착각이 이어졌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수페리우스! 사람들은 소리쳤다. 감동에 젖은 한스와, 무언가를 분명히 느낀 샤우트마저 박수를 쳤다. 반 아마데우스의 전체가 뭐에 홀린 것처럼 일어서서 자신들도 모르게 사람들에 섞이더니 수페리우스를 외쳤다. 수페리우스! 저 쪽 유지신은 빙긋 미소 지으며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유리는 흐느끼며 쉰 목소리로 수페리우스를 외쳤다. 뺨의 흉터로 처음에는 흥분했던 히스도 한국의 혁명에 진심으로 놀란 기색을 표현하며 브라보를 소리쳤다. 런던의 학생들은 갈채에서 그치는 반면, 뮌헨과 한국의 학생들은 일어서서 수페리우스를 소리쳤다. 장엄한 실내 장식이 흔들릴 정도의 함성이었다. 수페리우스가 천천히 무대 뒤로 퇴장할 무렵, 가십 기자들의 손놀림이 매우 바빠졌다. 아이는 곧 무대 밖으로 나가서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사람들은 끊어지지 않는 박수를 계속 이었다. 덕분에 수페리우스는 무려 여섯 번이나 무대에 다시 나와서 허리를 숙여야 했다. 가까스로 박수가 멎었을 때, 아이는 무대 뒤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의외의 인물을 반갑게 응시했다. “유지… 신…?” 그는 짧게 웃은 뒤, 다시 메마른 표정으로 돌아와서 당장 혜성의 팔을 쥐었다. “?” 아직 호흡이 버거운 수페리우스에겐 미안하지만 유지신은 반드시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 눈치였다. 아이는 그를 기다리며 생긋 웃었다. 땀과 눈물로 범벅이가 된 수페리우스는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다. 유지신은 수페리우스의 손가락의 굳은살을 자세히 살피며 그로서는 처음으로 크게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미세하게 턱을 떨기 시작하였다. 그는 손바닥과 손가락, 그리고 수페리우스의 해맑은 표정을 수 십 번 번갈아 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경직하였다. 그리고 잠시 뒤 팔을 풀어주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수페리우스는 유지신의 뜻이 곧 악수를 청함을 깨닫고는 부랴부랴 오른팔을 내밀고 마주잡았다. 힘 있는 악수가 짧게 끝나고, 유지신은 눈을 빛내며 독일어로 말문을 열었다. 「 피아니스트의 아름다운 손이다. 」 “!” 이상하게 그의 독일어가 해석되어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서 수페리우스는 놀랐다. 그리고 그가 말한 뜻을 깨닫고 진심으로 감탄했다. 「 너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았다. 」 “?” 「 그저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좌중이 너에게 스며들도록 했을 뿐… 그것은 기적과도 같지. 」 “…….” 그러나 더 이상은 해석이 어려웠다. 방 금의 연주 때문인지 쾌락은 채 가시지 않아서 어지러웠다. 수페리우스는 겸연쩍게 웃으며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별안간 유지신이 수페리우스의 뺨에 짧게 인사의 입맞춤을 하더니 아쉬움 없이 뒤를 돌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힘을 주어 등으로 말을 하며 가볍게 무대 뒤에서 사라져갔다. 「 대단한 노력가로 바뀌고 있군 수페리우스. 언제고 오케스트라 룸에서 경쟁할 날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 유지신이 사라진 뒤, 수페리우스는 1차 휴식 시간을 맞이하여 자신을 찾아다닐 사람들을 위해 내부 홀로 빠져나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무대 뒤로 찾아온 손님은 유지 신 만이 아니었다. 격정의 박수소리에 묻혀 혼이 이탈할 뻔 했던 유리가 겨우 틈을 내서 샅샅이 뒤진 끝에 무대 뒤의 수페리우스를 찾았기 때문이다. “아… 유리….” “!” 그녀는 눈물이 말라붙은 자리에 뜨거운 것을 다시 흘리며 와락 안겨왔다. 그리고 감동에 젖어 흥분한 채로 속삭였다. “듣고 싶었어요….” “뭐…?” “선생님이 만드실 악장을 늘 꿈꿨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과연 혁명을 완성하실까 저는 걱정 했었지요… 오늘, 듣기 위해 저는 일부러 선생님의 악보와 테레사의 악보를 베낀 뉘앙스를 풍겼던 거예요. 편지로…… 그리고 작년 성탄절에 룸펜에서…….” “!” 이럴 수가. 아이는 신음을 참으며 제자를 껴안아 주었다. 신이시여. 축복해 주소서… 그녀의 소망과 또 나의 소망이 동시에 이루어진 현재를…! “들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유리….” “저를 의심하신 건 당연해요. 저 같으면 아예 연주를 못 하게 했을 겁니다.” “…….” “또 선생님은 제가 그렇게 유도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 곡은 잊은 채 계셨을 거예요.” “…그래… 너는 그렇지만 막판에 시련을 들려주었으니까….” “네… 혹시라도 선생님이 걱정하실 게 싫어서요… 컨디션이 완벽해야 되니까요….” “!” 그녀는 진심으로 나를 존경하는 것이다. 나를 믿는 것이다. 나를 의지하는 것이다. 가슴의 폭포수가 마구 떨어져서 둘을 에워쌌다. 하지만 포옹이 풀리고 유리가 나갈 채비를 꾸릴 때, 묘한 내용을 건네는 게 아닌가. “하지만, 사람에게는 늘 경우라는 게 다르게 작용되는 거지요.” “……?” “그럼…….” 한국의 혁명 연주로 다시 빠질 뻔 했던 혜성이 후다닥 정신을 차렸다. 뭐라고? 경우? 수페리우스는 전과 비슷한 말솜씨를 구사하고 빠져 나가려는 유리를 단호히 막았다. 섣불리 의심하지 않으리라 결심했기 때문에 초조해진 맘을 감추며 그는 유리에게 물었다. “무슨 뜻이지?” “…그냥 혼잣말이었어요. 우리들에게는 지금처럼 앞으로도 중요하다는 것 뿐… 선생님의 연주 솜씨와 감각은 역시 기대 이상 이예요.” 하지만 그녀는 생긋 웃으며 묘한 대답을 전하더니 밖으로 나갔다. 앞으로도 중요하다는 말… 그래. 그것은 누구에게나 정답이 아닐까. 수페리우스는 새삼스럽다는 듯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 보며 전율에 떨었다. 무대로 터져 나오는 사람들의 함성, 연주에의 아찔함, 분명히 인식되었던 민우의 음성, 모든 것이 아직 생생했다. 자신은 무대 위에서 온 몸을 발가벗긴 채 서 있는 기분이었다. 조용히 밖으로 빠져 나가려는 때, 도어 밖으로 누군가의 팔이 불쑥 튀어나왔다. 수페리우스는 잠깐 놀랐다가 곧 자신에게 내민 손의 정체를 알아채고는 빙그레 웃으며 마주 잡았다. “테레사… 어…!” 꿈을 꾸듯 중얼거리며 수페리우스는 그가 잡아당기는 대로 끌려가서 단숨에 품에 안겼다. “내 꼬마 수페리우스에게도 드디어 라이벌 이라는 게 생기겠군.” “…테레사…?” 방금 전 문 밖으로 빠져나간 유리와 마주쳤던 테레사가 기쁘게 중얼거렸다. 수페리우스 역시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을 비롯한 세상 뮤즈들의 발판에 이젠 나도 섰습니다. “잘 했어….” “!” 눈이 녹듯 감미로운 음성이 테레사로부터 들려왔다. 믿기지 않는 그의 음성을 확인하며, 수페리우스는 온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목울대를 떨었다. “우리 혜성이가 잘 했다… 정말 잘 했다….” “흐읍….” “잘 했어… 아주 잘했어… 혜성이가 참… 잘 하고 와서 기쁘다….” “으…으흐….” 1차 휴식시간의 복도는 아주 혼잡하고 시끄러웠다. 그리고 두 사람의 체온은 영원을 약속한 것처럼 긴 시간 떨어지지 않았다. wgreene@naver.com 어떻게 적었는지 기억나지 않을정도로 아마데우스 연재중 저는 개인적으로 이번 편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적는 도중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나오는 이번편은 그래서 개인적으로 당황스러웠고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말이 많아지는 오늘입니다. 미안합니다. 당신께서 만족하셨을지 저는 그래서 모르겠습니다... 부족한 저의 글을, 저의 눈물과 쾌락, 모든 것을 드립니다. 당신 역시 이 기분을 느끼셨으리라 믿으며.. 저는 진심으로 당신과의 공감, 지금 이 순간이 주는 모든 것이 행복하고 소중합니다. 댓글을 주고, 연재물을 기다리며 읽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재미가 아니니까요. 다음편이 2악장의 마지막편이 될 것 같습니다. 항상 행복하세요. 고맙습니다. 덧글 35개 엮인글 쓰기 /data19/2006/12/2/132/23232_1-wgreene.jpg@nhn@101551@nhn@1@nhn@500@nhn@371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76편 /data19/2006/12/2/132/23232_1-wgreene.jpg@nhn@101551@nhn@1@nhn@500@nhn@371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76편 전체 포스트 보기▶▲ 이전글 - 2악장 77편(완결) ▼ 다음글 - 2악장 75-2편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오픈사전에 등록 프롤로그에 등록 프린트 하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프린트 하기 내 블로그에 담기 포토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스크랩 : 금지됨 카페에 담기 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아마데우스 2악장 (80) 2악장 77편(완결) 아마데우스 2악장 2006/12/08 16:52 http://blog.naver.com/wgreene/110011828813 쉽게 보시는 방법 : 왼쪽 '아마데우스 2악장' 클릭 -> 본문 상단에 있는 '목록보기'클릭-> 여느 홈피 게시판처럼 있는 제목들 중 클릭(061208 77 완결편 업데) Amadeus 음악 : Nights In White Satin (Notte Di Luce) - il divo (재생버튼클릭) Nights In White Satin .. 아름다운, 참으로 아름다운 젊은 날의 계절이다. 2악장 77편(2악장 완결) 한국의 혁명 연주 이후로 치러진 첼로 부 콩 쿨을 비롯한 각 부문의 심사 방식은 조금씩 달랐다. 특히 하프 부문이 독특함으로 주목을 샀는데, 입학시험 때와 똑같은 환경을 학생 개개인에게 주어서였다. A동의 3층과 4층이 연결되어있는 리사이틀 장에는 단 한 명의 좌중도 앉아있지 않았다. 심사 교수들만이 두런두런 앉아서 필기구를 펼쳤을 뿐, 무대에 선 학생들은 하프를 켜는 동시에 자신들의 입학시험 때를 떠올려야 했다. 엄숙하고 고요한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 백색의 야외 연주회장에서는 타악기의 경합이 벌여졌다. 학생들은 아주 바쁘게 움직이며 개막식에서 느꼈던 설렘을 안고 자신들의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독일과 영국 아마데우스의 배지를 달고 있는 학생들이 거의 다 휩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콩 쿨은 감동의 파노라마를, 또는 눈물의 바다를 펼치며 각양각색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각 부문의 1위부터 3위의 상위 수상자와, 토탈 3위 인물은 폐막식 직전에 게시 대에 가십으로 붙여지고, 또 팸플릿으로 제작된다고 한다. 따라서 학생들과 관객들은 어느 정도 주관적인 결과를 유추할 수는 있었지만 정확한 결과는 마지막까지 몰랐다. 긴장은 더더욱 증폭되어서 콩 쿨 일정의 중반에 이르자 갖가지 사건을 나았다. 학생들의 감수성을 파고들고 피를 말리는 콩 쿨의 진행 속도는 무시무시했다. 이틀 동안 진행되는 피아노과의 심사 도중, 보스턴 출신의 엔지 라는 학생이 건반 위에 오바이트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엔지는 사람들이 자신을 무대 밖으로 이끌고 가는 와중에도 거하게 오바이트를 하는 바람에 결국 진행이 삼십분이나 늦춰져서 나머지 순서의 학생들은 하얗게 부르튼 손을 비비며 초조해했다. 어쨌든 긴장한 학생의 오바이트 사건 덕분에 아이러니 하게도 피아노 부문의 경쟁은 가장 치열했노라 다소 과장된 소식이 입에서 입으로 빠르게 전해졌다. 학교가 행사로 바쁜 만큼, 다섯 군대나 새로 마련된 게시대도 시끄럽고 번잡했다. “가십이다!” 가벼운 입을 지닌 학생이 모두 다 아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고래 성을 질렀다. 각 나라의 언어로 나뉜 틀 사이에서 가끔은 몸싸움을 하며 게시 대 소식에 열을 올리는 무리들은 눈을 빛내며 달려들었다. “여기도! 직역판과 조금 다른 걸? 역시 영국 애들은 우월주위가…….” “저기 테오제네스가 온다! 한국 가십 란도 부착되나봐!” 세계 속 분위기에 동화된 그들은 가십의 늦고 빠르고 에도 이상한 경쟁심을 가졌다. 가십은 하루에도 수 십 번씩 간략한 내용만 담아서 부착되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역동적인 테크닉을 구사하는 어디의 누구는 훌륭했다- 의 소식이 채 삼십분도 지나지 않아 그게 아니었다 의 정정 소식이 다시 붙여지기도 하며, 새로운 일이 생길 때마다 따뜻한 용지는 온기가 식기도 전에 하늘에 펄럭이기 마련이었다. 학생들의 말마따나 단 한 시도 기계를 멈출 수 없었던 인쇄 동에서 막 빠져나온 테오제네스가 짧은 내용 몇 가지를 부착하고 금세 사라졌다. 한국의 정복을 입고 진땀을 흘리던 학생들은 콩 쿨 로고가 심어진 아름드리 소식들을 읽느라 열심이다. “역시 팀파니는 유지신과 함께 오케스트라 룸에 소속되어 있다는 마농의 차지가 되었어!” 학생들은 아쉬움을 감추지 않고 호들갑스레 소리쳤다. 적어도 타악기 부문에서는 한국 학생에게 희망을 걸었는데… 하며 실망의 숨을, 그러나 유지신의 오케스트라 룸이라면 그럴 만 하다는 인정까지 떠들며 잠시도 입을 쉬지 않았다. 금관 악기에 막 열을 올리고 온 각 나라의 학생들이 미니 연주회장을 벗어나는 동시에 근처의 게시 대에 달려왔다. 역시나 전체적인 평가를 빠르게 적어 놓은 소식이 그들의 긴장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 그 중 한 학생이 막 뜨거운 열기 속에서의 긴장이 삽시간에 풀렸는지 돌연 바닥에 쓰러졌다. 놀란 학생들은 기겁하며 그 학생을 병동으로 옮겼다. 가십 란에서 유독 호평을 사며 지면의 반 이상을 차지한 이 학생은 그야말로 기뻐서 기절한, 보스턴에서 호른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천주께 영광을. 마리아여, 호산나. 호른과의 학생은 눈물을 흘리며 후송되면서도 묘한 투를 허공에 연신 중얼거렸다고 한다. 그들보다 하루 먼저 심사를 치렀던 오보에와 클라리넷 등 목관 악기들을 관심 있게 지켜봤던 이들이 부랴부랴 그를 옮기며 기절 중인데도 불구하고 미리부터 축하한다는 인사를 전했다. 피아노과의 경합 못지않게 팽팽한 경쟁을 자랑하는 곳은 현악기들이었다. 최종 라운드인 오페라 성악에 앞서 치러지는 바이올린과 비올라, 더블베이스 등은 제일 처음 심사한 하프와는 달리 전통적인 방식으로 열렸다. 첫 날 첼로 부 경쟁을 치룬 미카엘을 비롯한 학생들은 현악기 심사에 모두 참석하며 관심을 보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밀집한 리사이틀 관과 연주회장에서 뛰어난 인재들은 줄을 문지르고 손가락을 투이겼다. 경합의 막바지에 올 때 즈음, 드디어 두 번째의 레퀴엠과 기립박수가 한국의 혁명 이후로 터졌다. 연주회장은 흥분으로 넘쳐났다. 그 날 만큼은 독일의 노란 민들레가 한국의 붉은 장미를 모조리 전멸시키며 향을 자랑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부문에 모두 참가하게 된 유지신이 자신의 곡 하이데스의 마차를 변형시켜서 콩 쿨이 아닌 리사이틀로 상황을 바꾸어서였다. 유지신! 하이데스! 그의 이름만이 떵떵 울리는 가운데, 뒤의 순서인 학생들은 절망에 허덕이며 엉엉 울었지만 그것이 유지신의 음악이 주는 감동 때문인지 자신들의 순서로 인한 불안함인지 알 수는 없었다고 가십 기자는 적었다. 어쨌든 수페리우스가 겨우 시간 내서 참관한 유지신의 연주는 기립박수와 감동, 마차의 혼까지 실은 경이적인 결과를 나았다. 그러고 보니 봄은 진주 빛 태양을 앞세우며 푸른 녹읍을 자랑했다. 한국의 자연미는 빼어난 곡선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새벽녘이면 수평선과 지평선 끝에서 발하는 영롱한 하프의 선율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환각제 역할을 했다. 바람이 불 때면 붉은 향과 땅에서 자생하는 강인한 잡초의 향이 섞여서 열정은 짙어졌다. 진열된 악기들에도 꽃잎은 쌓이고 분위기는 개울물처럼 시원하게 흘렀다. 사람이 수면을 취하는 고요한 시각에도 바람은 불고 개울물은 흘렀다. 때로는 먹구름이 뒤덮인 하늘로 불안함을 조성했지만 수면에 취한 이들은 그것을 몰랐다. 이처럼 자연의 움직임은 인간의 세월보다 훨씬 더 한 크기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약동하는 봄은 소녀의 눈물보다도 예뻐서 순식간에 지켜보는 자의 넋을 갈취한다. 그래서일까. 첫 날 첼로 부 경합을 치룬 미카엘이 약간 이상해졌다. 봄의 여신이 그를 희롱하는 건 아닐까? 동완이를 비롯한 모두는 하필이면 미카엘의 순서를 놓쳐서 그의 연주를 유추해내지 못했다. 한국의 몇 학생들만이 굉장한 연주였노라- 평소의 미카엘이 절대 아니었다- 라는 말을 해 주어서 그나마 안심할 수는 있었지만, 직접 감상하지 못 한 이상 수페리우스들은 미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선배. 괜찮아요?” 바싹 마른 미카엘은 툭 치면 부서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남모르게 열심히 준비하고 이를 악물었던 미카엘은 첼로 부 콩 쿨 이후로 끼니도 거르며 탁한 눈빛을 어쩌지 못 한데다가 말 수마저도 줄어들었다. 동완이는 그 점을 두고 화를 냈지만 프란체스코와 혜성은 그에게 미안하면서도 걱정되어서 노심초사했다. “응… 괜찮다…….” 미카엘은 자신의 연주를 그들이 못 들었다는 점에는 그 닥 괴념 치 않는 눈치였다. 그는 스스로의 억눌린 자아를 타파하여 눈부신 무언가를 손에 쥐기 직전의, 그 찰 라에서 방황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점을 전혀 알 수 없는 무리들은 긴장을 늦추어도 좋을 현재, 그의 공허한 변화에 당황했다. 어쨌든 큰일은 또 있었다. 대다수 호평을 듣고 상위권으로 예상되는 인물들이 적힌 가십은 죄다 영국, 혹은 독일 소속이어서였다. 한국 학생들과 보스턴의 무리들은 슬슬 기 싸움을 벌이며 작은 일화를 만들어냈다. 어디서나 사람이 모이면, 사건은 만들어진다. 음악이 아니라도 사람은 주어진 것으로부터 감정을 꺼내기 마련이다. 기 싸움의 출발지는 기숙사였다. 기숙사로 배정된 각 나라의 학생들은 기 싸움이 점점 커지다 못 해 큰 싸움이 일어날 뻔 했다. 테레사와 히스, 산타시아가 중재하고 나서지 않았다면 이번 한국 페스티벌에 커다란 오점을 남길 뻔하였다. 알고 보니 기숙사 지하 식당의 메뉴가 남쪽과 서쪽이 편파적이라는 것을 시작으로 한국 학생들이 자신들끼리 늘 그래왔던 기 싸움을 벌였던 건데, 그것에 외딴 타지의 학생들이 섞여서 급기야 나라대 나라별로 나뉘어졌었다는 것이다. 과연 이 일이 언론에 전해지지 않고 어떤 형식으로 가볍게 무마되었을까? 테레사는 기자들을 위해 성대한 파티를 4일째의 밤에 열어 주었다. 그들의 노고를 치하한다며, 큰 일 앞에서 작고 사소한 것에 당신들의 열정을 낭비하지 말라는 작은 연설을 해 주었다고 한다. 그는 매력적인 말솜씨와 행동으로 기자들의 환심을 다시 사며 일화를 매듭지었던 것이다. 최종 라스트 경쟁인 오페라 성악은 성대한 막을 올렸다. 장시간의 경합 내내 좌중은 숨을 죽이고 폭풍우와 같은 갈채를 퍼부었으며, 때로는 브라보를 외쳤다. 최절정의 하모니가 터질 때는 전율에 이는 그대로 눈물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재미있는 일화가 생겼다. 가장 기대를 모았던 산타시아가 웬일로 옥타브를 무섭게 치고 올라갈 무렵 아슬아슬한 부분에서 미스를 냈다는 것이다. 그녀의 실수를 두고 많은 이들이 열을 올리며 떠들었다. 특히 폐막식을 하루 앞 둔 한국 학생들이 모여 있는 쪽이 가장 시끄러웠다. 그들은 산타시아의 실수를 두고 이상하리만치 웃음이 터져 나와서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한국을 무시하는 유형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콧대 높은 그녀가 다른 곳도 아닌 한국에서, 마음껏 뽐내려던 와중에 실수를 하다니? 하하하! 학생들은 통쾌하게 웃으며 왁자지껄 모이기만 하면 떠들었다. 오페라 성악 부문의 1부만 지켜보고 산타시아가 출현한 2부 때는 아이들과 미니 야상곡이 펼쳐졌다는 소식에 자리를 떴던 수페리우스도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유난히 통쾌해 하는 한국 학생들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팸플릿만 읽어도 굉장한 인재인 산타시아의 목소리를 놓친 게 두고두고 아쉬웠다. 자신의 평가는 첫 날 개막식과 동시에 치러진 거라고 키르혜아이젠 교수측이 전달 해 주어서 아이는 곳곳에 기웃거리며 일주일을 보냈었다. 각자 떨어져서 지낸 친구들과 폐막식을 앞두고 열린 연주회에 모이자 수페리우스는 모처럼만에 웃으며 떠들 수 있었다. “선호 선배는?” “몰라. 거식증이라도 걸린 건지….” “거식증?!” 깔깔대며 웃던 그들은 선호의 얘기가 나오자 찬 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동완이의 극단적인 표현에 하얗게 질린 프란체스코가 황급히 중재하며 나섰다. “그냥 비유가 그렇다는 거야. 뭔가 열심히 생각하는 표정인데… 말도 안하고… 이상해.” “…애들 말로는 혁신적인 기법으로 굉장한 연주를 펼쳤다고 하는데… 선배의 손이 퉁퉁 불어 있잖아. 얼마나 연습했는지 대강 알겠던데…….” 차이코프스키의 아리따운 야상곡이 다시 시작되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선호 부분에서 입을 다물었다. 미카엘 선배에게 첼로 콩 쿨은 대체 어떤 의미였기에? 수페리우스는 자신 역시 공감하는 무대 위의 긴장감과 터질 것 같은 심장에의 발작은 이해했지만 그 외의 미카엘의 변화는 도저히 유추해 낼 수 없었다. 성공적인 호평을 얻은 연주였다면 더 더욱이 그의 감수성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적어도 그는 평가 가십이 붙여지지 않았던가. 물론 가십 기자들이 교수들과 상의 한 뒤 써 붙인 거겠지만……. 수페리우스는 한국의 혁명과 평가에 대한 가십이 마지막 날까지 붙여지지 않은 유일한 케이스였다. 아이는 그 점이 못내 불만이었지만 내일 오후까지 참고 기다리기로 했다. 다음날이 되자 사람들은 이른 시각부터 오후에 있을 폐막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사비나 교수님을 만난 뒤, 오랜만에 로제리오의 집무실로 찾아간 수페리우스는 조용히 홍차를 마시며 들뜬 분위기를 정돈했다. 로제리오는 긴 서류를 마저 읽은 뒤 수페리우스에게 가벼운 인사말을 건네며 테이블 건너편에 마주앉았다. 간단한 대화가 오고 가자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수페리우스는 머쓱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수페리우스.” “예?” “앞으로도 쭉 한국 아마데우스에 있는 건가……?” 로제리오는 그간 골몰했던 내용을 꺼냈다. 한국의 혁명에 대한 찬사 대신 그가 꺼낸 내용은 아주 독특한 것이었다. 한국 아마데우스에 있을 수 있겠느냐는 질문은 즉 이전처럼 계속 다녀 달라는 회유를 의미했다. 수페리우스는 엷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에게 가르침의 기회조차 묵살한 채, 내내 기다리게만 했던 한국의 교수들이 번쩍 떠올랐다. 알프레드 브렌델과 민우의 연주기법을 꺼내며 자신의 발트슈타인을 무참히 밟았던 그들을 어떻게 잊겠는가. 지옥 같았던 기다림의 시간, 한국에서 수페리우스는 무언가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자신은 독일에서 사비나 교수 덕분에 교환 학생으로 지냈으며, 아직도 그 과정이 끝나지 않았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키르혜아이젠 교수가 아니었다면 한국의 혁명은 훌륭하게 연주 해 낼 수 없었을 테다. 수페리우스는 정중히 허리 숙여 인사한 뒤 등을 돌리며 말했다. “저는 예전부터 독일로 간 교환 학생에 불과합니다. 콩 쿨 때문에 한국에 다녀가기 위해 온 것이지요.” “그런…….” “이 점을 두고 바오르 신부님과 상의 해 볼 계획이지만…….” “!” “언젠가 교수님께도 제대로 된 레슨을 받아보고 싶네요. 그럼.” “수페리우스!” 아이는 일말의 아쉬움 없이 밖으로 나섰다. 진초록 풍광이 선하게 밀려오고 있었다.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로제리오 교수에게 섭섭하다는 마음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 오히려 그를 중축으로 한 다른 교수들 덕분에 자신은 독일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워 왔기 때문이다. 설사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쭉 한국에서 배우게 된다고 해도 크게 상심할 필요도 없었다. 수페리우스는 기지개를 켠 뒤, 게시 대를 향하여 총알같이 달렸다. 폐막식을 위해 하늘은 맑고 고운 태를 펄럭였다. 각 나라의 기장이 펄럭이는 깃발은 이상하리만치 감동적이었다. 각지 인파들은 어색한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라는 말을 건네었고, 마지막이니만큼 다툼과 긴장은 거의 없어졌다. 오후 다섯 시가 되자 일반인과 초대 명사가 장미 문을 통해 입장하였다. 그리고 게시 대에는 총 평가와 결과에의 가십이, 그 옆에는 가십 그대로의 팸플릿이 가지런히 쌓였다. 점심 이후로 게시 대에 진을 치고 있던 각국의 뮤즈들은 첫 날처럼 떨리는 심장을 쥐고 결과를 주목했다. 각 부문의 3위권 내의 순위가 첫 장부터 적혀 있었다. 어딜 봐도 한국의 이름은 잘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한국의 가십 란에는 아직 한국 학생의 이름이 부착된 순위권 용지가 배달되지 않아서 그들의 초조함은 짙어져갔다. 그 때 누군가가 소리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수페리우스!” 덜컹- 평소와는 다르게 같은 이름인데도 불구하고 심장이 떨어졌다. 아이는 조심조심 걸어가서 글자들을 읽으며 긴 탄식의 숨을 내뱉었다. 온 몸에 전율이 올라왔다. 첫 번째 부착된 한국의 가십, 그것은 첫 날 있었던 한국의 혁명 연주에 대한 교수들과 심사 위원들의 전체 평가였다. 그토록 기다렸던 것이 마지막에 꽃처럼 잎을 벌린 것이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 없는 소식들을 두고 동완이를 비롯한 많은 학생들은 분개하며 땍 땍 소리쳤다. “어떻게 저런 결과를 발표했을까? 수페리우스의 연주는 최고였어!” “…….” “말 도 안 돼!” “거짓말! 나는 그 때 기절할 뻔 했어! 피아노 부문 중 최하위라니?” “4악장이 추가된 것 때문은 아니라고 나와 있는데….” “바보야! 저기 적혀 있잖니? 키르혜아이젠 교수의 부연 설명 구절!” 학생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가십은 사실만을 반영하며 자신의 탓이 아님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 신 혜 성의 창조성은 강조되었으나, 개인 테크닉 구사에 있어서는 일률적이지 않고 불안정했다. 막바지 클라이맥스 때 선보인 연주 기법으로 좀 더 분발한다면 앞으로는 기대해 볼 만 하다. 따라서 이번 피아노 과 경합에서 그의 순위는 최하위로 선정되었다. -키르혜아이젠- ] “괜찮니, 혜성아?” 옆에서 염려스러운 투로 동완이 물어왔지만, 혜성은 벅차오르는 무언가 때문에 시선을 떨기 바쁘다. 한국 학생들의 불유쾌함을 이해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혜성은 키르혜아이젠 교수의 평가마저도 이해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아이는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봄의 마디처럼 설레고 약동하는 기운을 억누르기 힘들 정도였다. 키르혜아이젠. 심사 위원장을 맡은 그가 저 정도의 평가를 따로 발췌해 주신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는 독일인이다. 독일의 평가가 얼마나 가옥하고 몸서리치는 몫인지 혜성은 그 땅에서 익히 경험해 봤다. 그렇다면, 저 글은 악평이 아닌 것이다. 오 하느님. 아이는 재차 자신에게 괜찮느냐 묻는 동완이를 천천히 돌아보며 희미하게 떨었다. “응? 으응… 난… 이상하게 괜찮아….” “?” “오히려 굉장했다느니 식의 결과가 나왔으면… …나는 실망했을지도 몰라.” “?” 그들의 방식이다. 아마도 키르혜아이젠 교수님의 저런 선처가 아니었다면, 자신의 평가는 피아노 부문 아이들에 섞여서 이름만 겨우 호명되었을 것이다. 아니, 그것조차 불투명했겠지. 수페리우스는 자신의 안에 태어난 기쁨을 껴안으며 입술을 떨었다. “독일이 원래 그래. 그들의 평가는 채찍과도 같지… 알아서 단련해야 돼.” “하지만 이건 독일의 평가가 아니라-” 멀리서 희망의 바람이 대지를 힘차게 박차며 올라왔다. 그것은 차츰 가속도가 붙더니 온 누리에 무럭무럭 퍼졌다. 산맥에서 지지대는 새의 소리마저 바람은 전해주었다. 혜성은 빙긋이 미소 지었다. “키르혜아이젠 교수님을 비롯한 교수님들의 평가겠지. 거의 모든 평가에 있어서 심사위원장이 키르혜아이젠… 질버른 교수님이니만큼…….” “……?” 동완이 열을 올리는 것에 반해 하얗게 말라서 공허한 미카엘은 여전히 말이 없이 무표정했다. 혜성은 잠시 그를 응시한 뒤, 턱을 다른 쪽으로 돌리며 힘 있게 중얼거렸다. “이제 시작인 내가, 최고의 경쟁자들 앞에서 저 정도로 ‘평가’를 받는 다는 게 중요한 거야.” “!” “모르겠니…? 동완아… 미카엘 선배… 평가를 받는다는 것. 그것이 중요한 거예요… 모르겠어요. 그게 맞는 것 같아요.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아요. 오히려 승부욕을 자극시켜요. 막 발굴되었다는 제 연주법이 저역시도 궁금한걸 보면 아직은 많이 갈고 닦아야 되거든요.” “…….” “중요한 건… 정말 중요한 건… 지금의 내가 행복하다는 것….” “…….” “…….” 수페리우스가 기뻐하니 차마 반박할 수 없었던 무리들은 간지러운 입을 다물었다. 그 때 저 편에서 인쇄동의 한 명이 득달같이 달려오며 줄줄이 눈물을 터뜨리고, 뭔가를 자꾸 소리쳤다. 숨이 턱까지 찬 그 학생은 무언가로부터 굉장한 것을 느꼈는지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그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쉬지 않고 달려왔던 탓에 헥헥대며 용지를 건너편의 친구에게 건네주는 것 이상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새로운 가십은 수페리우스의 평가 옆에 부착되었고, 빛처럼 자력으로 글자를 뽐내기 시작했다. “!” 설마 했던 일 올의 의심조차 없었던 글자가 떵떵대며 구름보다 높게 펄럭인다. 수 백 명이 모여 있던 한국의 학생들은, 그토록 고대하던 소식 앞에서 기가 막힌 함성을 터뜨렸다. “우와아아아!” “하느님! 맙소사! 그들을 전율케 하는 소식 용지가 마구 흔들리는 착각이 일었다. 주변의 영국 학생들이 무슨 일이냐며 되물을 정도로 함성은 도통 잦아들지 않았다. 혜성 역시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이는 감격에 떨며 자신의 옆에서 처음으로 공허한 표정에 실오라기 빛을 머금은 미카엘을, 그의 고뇌에 찼던 눈동자에 맺힌 굵은 눈물을 보았다. “미… 미카엘 선배!” “선배… 선배… 선배가-!” “!” [ 첼로 부문 콩 쿨 1위, 한국 아마데우스의 이 선 호. ] “선배-!” 동완이 그를 껴안으며 부들부들 떨었다. 품안에 목각처럼 굳어있던 미카엘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비로소 긴 숨을 내뱉더니 이를 악물었다. “으… 으윽… 으으윽… 윽….” “선배… 선배… 1위래요… 으흑… 선배가 유일하게 한국 애들 중에 유일한 부문 경연 중 1위….” “으… 으흐으으… 으윽….” “선배… 선배….” 미카엘의 연주를 직접 보지 못했던 모두는 진심으로 감격하며 그를 축하해 주었다. 콩 쿨 이후로 묘하게 변했던 미카엘이 처음으로 감정을 표현하며 마구잡이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혜성은 사실 독일에서 하얗게 말라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첼로 부에 나간다는 미카엘의 솜씨를 두고 그 닥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가 많이 노력했다는 것은 그의 마른 몸과 숙연해진 분위기를 통해 대강 눈치 채긴 했지만, 누구나 다 콩 쿨 앞에서는 노력을 아끼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는 해냈다. 다른 이도 아닌 죽은 듯이 평범하게 자리하던 이가 스스로의 몸을 마모시키며 동그란 보석으로 변한 것이다. 잠시가 지나자 미카엘의 연습을 목격했던 이들과, 그의 노력 가치를 인정하는 이들, 또 콩 쿨 때 자리했던 학생들은 입을 모아 그럴 만 하다고 떵떵대기 시작했다. 과연! 그럴 줄 알았어! 얼마나 연습했는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연주였어! 여기저기서 퍼져오는 감동의 하모니는 그칠 줄 몰랐다. 멀리서 학생회장으로서 바빠진 로미오가 바람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큰 소리로 자신의 형을 부르며 달려온 뒤, 로미오는 연약하게 바란 미카엘을 껴안았다. “형! 형… 형… 으윽….” 사람의 감동이란, 뇌가 지시하기도 전에 불벼락의 힘을 지닌 감성을 움직이게 한다. 평소 때는 죽은 듯 조용한 감성이 뇌를 누르는, 그것은 마법이다. 기적이다. 열정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 그래….” 뜨거운 눈물을 동생의 정복에 적시며 미카엘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때가 되자 주변의 학생들은 붉은 눈시울을 뒤로 감추며 약동하는 심장을 소중히 감싸 안았다. 혜성 역시 뭉클해지는 감정 때문인지 눈물을 닦아냈다. 진분홍 노을 아래 서로를 감싼 미카엘과 로미오는 하나 된 모양새로 긴 그림자를 이뤘다. 아름다웠다. 그들의 감동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가난을 뚫고 여기까지 선 그들이 얼마나 기뻐할 지, 같이 기뻐하면서도 벅찬 마음을 감히 유추할 수 없던 동완과 혜성, 그리고 테오제네스와 프란체스코는 지금 것 미카엘이 저 혼자 고뇌했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예상했을 뿐이다. 폐막식 직전에는 일반인들 중 성인들을 위해 B동 연회장에서 간단한 와인과 음식이 차려진 파티가 펼쳐졌다. 짧은 연회였지만 그간 긴장으로 녹초가 된 참가자들과 축제의 절정을 즐기는 무리들에게는 충분한 위로와 즐거움이 되어주었다. 벨벳 카펫 위로 드레시한 옷을 입은 각 나라 인파들은 우아하게 움직이며 샴페인 잔을 부딪혔다. 그러나 연회장 뒤의 작은 룸에서는 수페리우스와 친한 무리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몰래 술을 몇 잔 마시느라 흥겨워져 있었다. 볼이 붉어진 프란체스코가 웬일로 말도 더듬지 않고 취기에 밀려 큰 소리로 포문을 열었다. “산타시아가 테레사를 유혹했다는 소문이 과연 사실일까?” 나른한 휴식을 취하던 미카엘이 프란체스코의 잔을 빼앗자 그는 곧 조용해졌다. 하지만 산타시아와 테레사의 예전 스캔들 소식을 알고 있는 고학년 학생들이 프란체스코보다 더욱 취한 낯으로 주제에 파고드는 게 아닌가. “에헤이~ 테레사가 단칼에 거절했다는 게 진짜 소문의 진상이지.” “어쩐지. 옛날에 산타시아가 같은 과였던 이자벨 장을 오케스트라 룸에 가입시켜 주지 않으려고 여기저기 손 쓸 때부터 알아봤어. 뭐… 그래봤자 이자벨은 한국 아마데우스에서 전~혀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았으니까 상관없지만.” “이자벨은 테레사를 사랑했으니까… 음악보다 사랑이 우선이었던 거지.” 엉뚱한 이야기로 자꾸 빠지는군? 수페리우스는 마셔도 잘 취하지 않는 술을 재미없다는 듯 버려두고는 테이블에 올린 팔로 턱을 괴고 방긋방긋 웃으며 되물었다. “그럼 히스는 뭐야?” 테레사 하면 히스가 연결 지어진다. 그러고 보니 일주일 내내 많은 사람들과 부닥치느라 친한 이들과는 제대로 만날 수도 없었지. 히스는 어디 있을까? 테레사의 말에 따르자면 내 뺨의 흉터 때문에 기절 할 뻔 했다던데……. 그 때 별안간 넓은 뒤 쪽 기둥 사이로 큰 무리가 나타났다. 대답을 기다리느라 열심인 수페리우스를 알아본 누군가가 반가운 기색으로 달려오더니 뒤에서 덥석 예고 없이 끌어안았다. “!” 깜짝 놀란 수페리우스가 경직하는 동시에 파란 향이 음성을 펼쳤다. “뭐긴 뭐야. 독일의 테레사지.” “윽! 뭐, 뭐야. 무거워.” 옹기종기 모여 있던 학생들이 의외의 인물 덕분에 놀라서 경직되었고, 히스에게 꼭 안긴 수페리우스만이 안간힘을 쓰며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아니면 멋쟁이 히틀러.” “히스!” “…응?” 아이가 어떻게 움직여도 품 안에서 절대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히스는 황홀하게 미소 지으며 부드럽게 되물었다. 저 쪽 히스를 흠모하는 여 학우들의 볼이 말도 못하게 붉어졌다. 히스는 반사적으로 그녀들에게 가볍게 윙크를 했지만, 곧 튀어나오는 품안의 소리에 그 역시 볼이 붉어졌다. “무거워! 못생긴 게!” “못 생… …나쁜 다람쥐… 이렇게 사람도 많은데 그런 가슴 아픈 말을….” 큰 충격을 받은 히스가 수페리우스의 흉터에 자잘한 입맞춤을 하는 동시에 반대편 뺨을 꼬집었다. “시끄러워! 무거워! 무겁단 말야!” “…십….” “십칠 하면 이십분 동안 너랑 말 안할 거야.” “…육….” “십육도 안 돼.” “!!!” 둘의 이야기는 분명히 한국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인들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으리라. 결국 히스는 혜성을 번쩍 들더니 아이가 앉았던 자리에 저가 앉고는 무릎에 수페리우스를 앉혔다. 김이 모락모락 날 정도로 수치심으로 흥분한 수페리우스가 삿대질을 하려는 때, 히스와 함께 왔던 한스와 레이놀드, 룸펜의 식구들까지 나타났다. 샤우트와 함께 있을 유리가 자연스레 연상되는 가운데 혜성은 차례대로 험상궂어 보이는 그들을 친구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들을 통제하느라 지친 쇼너 스타니가 푸념을 늘어놓으며 준비해둔 맥주 한 병을 단숨에 비웠다. “쇼너?” “예스?” “오늘은 향수…….” “?” “아니에요.” 혜성의 옆에 앉은 쇼너 스타니는 웬일로 긴 컬을 출렁이며 붉은 정장과 함께 화장까지 하고, 또 향수를 지독하게 뿌린 상태였다. 자신에게 있어서 최고의 멋을 뽐내는 그를, 히스는 줄기차게 쏘아보며 견제했다. 쇼너 역시 히스가 이상하리만치 마음에 들지 않아서 둘은 수페리우스 덕분에 나란히 앉은 채로 주위 이목을 사면서도 서로를 기분나빠했다. “계집애처럼 생겼군.” “!” “쇼너!” 히스를 노골적으로 노려보며 비아냥대는 쇼너 덕분에 다들 놀라서 그를 불렀다. 이에 잠시 표정을 구겼던 히스는 곧 선량하게 웃더니 와인 잔을 비우며 지나치듯 하지만 분명하게 중얼거렸다. “보라색 눈 화장을 한 메두사가 걸어오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네.” “!” “히스!” 그리고 폐막식이 시작되기까지 쇼너와 히스의 이유 없는 술 대결이 쭉 이어졌었다고 한다. 밤 여덟시에 시작되는 폐막식은 백색 야외 연주회장에서 치러진다. 콩 쿨 준비 때 공사한 뒤, 백색 야외 연주회장의 크기는 매우 넓어지고 웅장해졌다. 오래 전 혜성의 헬리아가 울려 퍼졌을 당시만 해도 초라하고 외면 받던 장소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커다란 투명 돔이 얹혀 졌으며 증축 공사를 통해 객석이 두 배 이상 늘어 난데다가 붉은 장미와 카펫으로 꾸려진 백색의 홀은 마치 누군가가 조각해 놓은 미술관의 전시물 같았다. 삼천 명 가량이 입장한 뒤, 나머지 이천 명 이상의 인원은 대형 스크린이 설치된 백색 홀 밖의 자리에서 내부와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수정처럼 맑게 빛나는 조명이 돔의 곳곳에 매달려서 그것은 마치 별처럼 빛이 났다. 아름다움 이라는 단어는 식상했다. 한국의 혁명, 그 선율처럼 백색 홀의 내부는 놀랍기만 했다. 바닥에 있는 동그란 무대는 두 개로서 양 쪽 끝에 세워져 있었다. 무대를 중심으로 계단 형으로 올라가 있는 좌석은 원형 경기장처럼 서로 서로가 훤히 보이는 구조를 이뤘다. 백색의 왼 쪽 무대에는 피아노 한 대가 있었다. 까만 흑요 빛의 피아노는 지하에서 막 올라온 것처럼 힘이 넘쳐보였다. 또 반대편에 새로이 신설된 오른쪽 무대에는 웬일인지 가시의 북이, 붉은 카펫 위로 누군가의 손을 기다리며 놓여 있었다. 두 개의 무대를 이어주는 얇고 기다란 백색의 길은 두 명 정도가 오갈 수 있는 지름이었으며, 길의 좌우에 앉아있는 이들은 아마데우스 인재들 중에서도 최고의 뮤즈들만 뽑아놓은 오케스트라 룸의 재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악기를 쥐고 가만히 기다리는 중이었다. 또 오케스트라 룸 단원들 뒤로 그들을 감싸듯이 길게 서 있는 은빛 드레스와 구리 빛 정장을 입은 미카엘 성가대 학생들이 돋보였다. 곧 시작된 첫 번째 순서는 최상위 3인에게 주어지는 시상식이었다. 최종 1위는 단연 톱클래스를 자랑하는 유지신에게 돌아갔으며, 2위는 호른 부문에서 호평 가십을 보는 즉시 기절했던 보스턴의 남학생이었다. 3위는 공동 수상으로서 팀파티 부분에서 두각을 보인, 유지신과 같은 오케스트라 룸에 소속되어 있는 마농 이라는 독일 여학생이 선정되었다. 또 나머지 한 명은 첼로 부문의 미카엘, 이선호였다. 최종 3위 선정에 영국 학생은 없었다. 산타시아의 실수가 명백한 사실로 인정되는 현재, 영국 학생들은 자리에서 등을 펴고 앉은 채 무표정으로 시상식을 지켜보았다. 떨리는 걸음을 하며 믿어지지 않는 감동의 눈초리로 무대에 선 미카엘은 백색의 홀 외부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숙부님과 로미오를 떠올리며 또 한 번 눈물을 흘렸다. 그들의 시상식 이후 바오르 신부의 축연이 엄숙하게 이어지는 현재, 수페리우스는 지하의 넓은 대기실에서 테레사와 만나는 중이었다. 한국의 혁명 이후 폐막식이 되어서야 제대로 된 만난 둘은 한없이 포옹하며 서로를 느꼈다. 오늘의 테레사는 멋있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근사했다. 선글라스를 착용한 그는 유난히 턱 선이 돋보였다. 뒤의 깃이 아주 긴 아마데우스 정복을 입은 그와 예식 복을 입은 수페리우스는 빛과 어두움으로 대조될 만치 그는 달라보였다. 수페리우스는 진즉에 봐둔 팸플릿을 통해 다가올 순서를 알고 있었지만 함부로 거론할 수는 없었다. 이제, 제왕의 연주가 시작될 것이다. 뮤즈들의 올림픽이나 마찬가지였던 이번 행사를 제왕의 손으로 끝내는 것이다. 그러나 팸플릿은 그가 어떤 곡을 연주하는지 정확히 알려주지 않아서 수페리우스를 비롯한 모든 이들은 궁금해 했다. 아이는 그 점이 묻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키스하고 싶어.” “……!” 별안간 무슨 소리인가! 아이는 귀를 의심했다. “안고 싶다.” “…….” 만나서 포옹하고, 장시간 대화가 없던 둘 사이로 테레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고 있으면서, 키스도 했으면서 어째서 저런 말을 하시는 걸까. 혜성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당신은 이미 나를 안고 있어요 테레사. 아이는 마음으로 크게 외쳤다. 밖의 관계자가 달려와서 테레사를 불렀다. 그가 나갈 차례임을 굳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두 사람은 알았다. “농담하고 장난치고 싶어. 그러면 웃어 주겠지?” “…….” “왜인지 모르게 이런 마음을 감추고 싶고, 벌처럼 톡 쏘면서 피하고 싶다.” “?” “곤란하게 하고 싶고, 놀려서 울리고 싶다.” “…….” “아무대도 도망가지 못하도록 작은 방에 가둬놓고 열쇠로 잠근 다음에 몰래 구경해보고 싶다.” “…….”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너랑 있으면 1%의 수술 성공 가능성에도 의지하게 된다.” “!” 문득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것은 천국과 지옥의 문턱에서 사형수가 되어 숨이 끊어질 때를 기다리는 절박함과 닮아있었다. 수페리우스는 그의 양 쪽 뺨을 움켜쥐고 왜 그런 말을 하느냐는 듯 애처롭게 응시했다. 그리고 뒤꿈치를 들어 올려 있는 힘껏 그의 목을 껴안았다. 테레사는 감미로운 투로 하지만 서늘하게 읊조렸다. “…왜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가, 수페리우스군?” “……?” “너는 어째서 기적처럼 내 앞에 나타났는가, 마드모아젤?” “!” 수페리우스의 얇은 허리에 둘린 팔 힘이 세어질 때, 다시 한 번 그를 부르는 관계자의 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테레사는 알았다는 대답을 하는 즉시 혜성의 어깨를 쥐고 마치 아이를 똑똑히 내려 보는 것처럼 가까이에 안면을 숙였다. “왜 만지고 싶어지는 몸을 갖고 태어났으며, 지식이 없다면 다시 배워서라도 가르쳐 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자세를 지녔으며, 오케스트라 룸 중 최상위 군단이 섞인들 그것을 뚫을 만치 정확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녔지?” “선배…?” 두근- 키스할 것처럼 가까워진 그의 눈부심에 아찔해진 혜성이 다리를 휘청 였다. 그래도 테레사는 아이를 풀어주지 않았다. 어깨에 쥔 손에 힘을 줄 뿐, 아이 스스로 몸에 힘을 주어 지탱하기를 기다렸다. “…정복자로 선언한 다음에도 한동안 어려웠던 나의 과제였다.” “!” 오 하느님. 아이의 내면에 감미롭게 흐느끼던 천국과 지옥의 결계 지킴이는 죽었다. 그가 제왕의 연주를 앞두고 왜 자신을 부른 뒤 이런 말을 했는지 아이는 알 것 같았다. 그는 다른 말없이 오직 수페리우스를 만나고 지금에 오기까지의 감정들을 솔직하게 꺼내는 것이었다. 오, 테레사! 아이는 서둘러 자신 역시 느낀 감정들을 알려주려 했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과제를 끝낸 지는 오래되었지.” “……?” 몸을 뗀 뒤, 테레사는 수페리우스의 콧날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튕긴 뒤 어깨를 휘두르며 심호흡을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던지듯 경쾌한 언어를 잊지 않는다. “나는 과제 검사 받으러 간다.” “네?” “그렇지!” “?” “너는 왜, 네? 라고 말을 하는 게 못 견디게 귀여운 거지?” “…네?” 철렁- 심장이 내려간다. 사랑의 산을 오르기 위해 장화를 더럽히는 정복자의 입술은 이토록 아름답고 뜨겁다. 듣기만 해도 황홀해지는 그이기 때문에 수페리우스는 별안간 그가 왜 자신을 향해 이런 말을 하는지 추궁할 타이밍을 놓쳤다. 테레사는 깃발을 들고 앞장서는 장군처럼 돋보였다. 그런 그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을 때 혜성은 차라리 눈을 감았다. 테레사는 저의 음성에 황홀하게 도취된 혜성이 귀엽다는 듯 머리칼을 쓸어주더니 가벼운 투로 이야기를 마저 했다. “선생님.” “……?” 아주 허스키한 투를 꺼내며 그는 혜성의 몸이 다시 휘청 일 때 재빨리 허리를 단단하게 감아주었다. 그리고 더욱 장난기 짙은 미소를 지었다. “과제 검사 해 주세요.” “과제… 검사…?” 황홀한 꿈을 꾸듯 아이는 중얼거리며 반문했다. 그의 언어는 가끔 키스와 포옹보다 짜릿한 쾌락을 주었다. 지금처럼, 지금처럼……. “제 과제가 마음에 들었으면 가시의 북을 울려 주십시오.” “!” 가시의 북? 그 단어에 번쩍 정신이 돌아온 수페리우스가 눈을 뜨고 테레사를 보았다. 그렇잖아도 어째서 다른 쪽 원형 무대에 가시의 북이 있는지 의아했던 수페리우스는 단숨에 소름이 끼쳤다. 가시의 북! 그는 자신의 연주가 끝나는 즉시 어쩌면 연주 도중에, 이 손으로 가시의 북을 치라는 거였어! 그래서 다들 궁금해 하는 가시의 북을 마지막에 울리려는 거야! 잠시 충격에 빠진 수페리우스가 아무 말도 못하자 테레사는 별안간 큰 소리 내서 웃더니 씩씩하게 등을 돌렸다. “백 점짜리 과제였는데, 오십 점 취급하며 북을 작게 울리면 테레사 학생은 눈을 번쩍 뜨고 달려와서 선생님을 혼내 주겠습니다.” “!” 그리고 그는 일 올의 아쉬움 없이 명쾌하게 밖으로 나아갔다. 그제 서야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처음부터 제대로 깨달은 혜성이 조금씩 발을 뗄 무렵, 무대에 서기도 전에 막 나간 줄 알았던 테레사가 되돌아왔다. 테레사? 방금 대기실을 나갔는데……. 수페리우스가 가까스로 말을 하려던 순간, 황급하게 달려온 그는 자신을 기다리는 좌중의 애를 태우며 아이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뽀뽀 해 줘.” “…네? 네?” 나의 아름다운 정복자여……. 치밀어 오르는 다양한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아이는 눈물을 참았다. 빠른 장면들임에도 불구하고 수페리우스는 저 혼자만 느려지는 착각과 싸워야 했다. “아, 얼른!” “…….” 이크! 다급한 상황이라서 그런지 테레사의 목소리는 차츰 차츰 히스테리칼해졌다. 혜성은 당장 그의 목을 내린 뒤 가볍게 입맞춤을 해 줬다. 이에 골몰하던 테레사는 불쑥 오른쪽 뺨을 내밀며 아주 다급하다는 투로 재촉했다. “여기도.” “…….” “이마에도 해라.” “…….” “포옹 해.” “…네?” “어허- 꾸물대는 거 봐라- 시간 없다!” “!” 이제는 포옹까지 다시 하라니? 어쨌든 초조해진 혜성이 그를 덥석 껴안아 주었다. 그제야 비로소 안심한 테레사가 긴 숨을 내쉬더니 아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아까와 같이 제왕의 등을 보이며 걷기 시작했다. “됐다. 가시의 북에 서 있어. 내가 잘 보일 거다. 나도 널 느낄 수 있으니.” “네? 네.” “혜성아.” “네?” 날개를 단 사자처럼 용맹하고 당당한 나의 테레사. 그가 마지막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는 순간, 최종 대형 문이 열린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해 주자.” “…네?” 우와아아아-- 청중의 엄청난 함성이 빛과 함께 쏟아졌다. 대지가 흔들릴 정도의 에너지가 사방에서 단숨에 퍼지는 것이다. 눈앞의 아찔한 광경에 넋이 달아날 것만 같은 수페리우스의 손을 풀어주며 테레사가 들뜬 소리를 질렀다. “…달려 가!” “네? …네!” 테레사와 수페리우스의 등장에 사람들은 전원 기립 박수를 퍼부었다. 아름다운 그들의 폐막식이 비로소 시작된 거나 다름없었다. 어떤 이들은 벌써부터 울음을 짜내며 아쉬워했다. 열정의 아마데우스여! 아마데우스! 아마데우스! “아마데우스! 아마데우스! 아마데우스!” 수페리우스와 테레사의 손이 풀리고 양 쪽 무대에 천천히 걸어갈 때, 백색의 홀 내부와 외부에 있는 모두는 아마데우스를 외쳤다. 떠나갈 듯 파격적인 함성이 땅을 흔들었다. 바람을 정지시켰다. 세상의 소리라고는 아마데우스 밖에 없었다. 그들은 아마데우스 라는 글자를 외칠 때 유일하게 하나로 묶일 수 있었다. 함성이 짙어질 무렵 테레사가 피아노 앞에 섰다. 반대편의 무대에도 화사한 조명이 켜지고 수페리우스가 북채를 쥐고 엄숙하게 자리했다. 단 두 개의 스포트라이트를 제외한 나머지는 짙은 암흑과 방울처럼 투명한 조명뿐이었다. “테레-사!” 누군가가 크게 외치는 것을 시작으로, 이번에는 테레사의 이름이 우렁차게 퍼졌다. “테레-사! 테레-사! 테레-사! 테레-사! 테레-사!” 테레-사! 가운데 음절이 약간 더 길게 하나가 된 글자는 지휘자의 솜씨에 맞춰 외치는 것처럼 박자가 정확했다. 마침내 테레사가 피아노 의자에 앉자 좌중은 조용해진 채 그들 역시 자리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국 학생들은 주변의 경관과 가시의 북 채를 쥐고 있는 수페리우스, 또 한국에서 숨을 쉬어 주시는 테레사를 몇 번이고 확인하며 감격에 떨었다. “크리스마스 같아….” “응….” “!” 크리스마스! 지난 해 크리스마스 때는 어땠던가. 이자벨 장이 가시의 북을 울렸고, 별처럼 빛나는 존재들은 아무도 없었다. 테레사와 수페리우스의 부재는 성탄 전야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었다. 한국 학생들에게 있어 봄이 만연한 폐막식의 오늘,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성탄 전야로 느껴짐이 당연한 몫이리라. 테레사는 말없이 가볍게 건반을 눌렀다. 그의 건반은 첫 번째로 자신의 에튜드곡 중 하나인 피아노 오브 시베리아를 연주했다. 그러나 짧은 악장은 금세 끝을 보여서 막 몰입하려던 좌중은 탄식을 쏟아냈다. 헬리아가 있었던 백색의 야외 홀은 더더욱 숙연해진 채 봄바람을 맞았다. 테레사는 별안간 피아노 옆에 설치된 몇 개의 마이크 중 하나를 자신의 쪽에 붙여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리사이틀이나 연주회 때 별다른 미사여구를 붙이지 않기로 정평이 난 사내인데? 사람들은 의외의 장면 앞에서 훨씬 숨을 죽이고 그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혹시 피아노 오브 시베리아 연주를 통해 음향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그래서 직접 마이크를 조정하려는 걸까? 관계자들은 긴장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나 테레사는 자비롭게 웃으며 편안하게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모하는 나의 뮤즈들이여…….” 모두는 귀를 의심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의 당당하고도 낮은 저음에 전원 소름이 끼쳐서 턱을 떨었다. 테레사! 그를 흠앙하는 숱한 이들이 소리쳤다. 마이크를 타고 전해지는 그의 음성은 황홀했고, 색달랐다. 개막식 때조차 가시의 북을 울렸을 뿐 모습을 보이지 않던 테레사가 말을 하다니? 소년 소녀들이 진정되기를 기다린 후, 테레사는 싱긋 웃으며 음성만으로도 백색 연주회장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나는 위대한 음악가이다…. 그리고 음악의 테레사로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의 문장들은 지겨우리만치 자신 만만하게 표현하며 즐기며 지내왔던 내 삶에 있어서, 단 하나 빠져있던 게 사실은 있었습니다.” 테레사… 아래쪽 오케스트라 룸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로 대기 중인 유지 신이 감명 받은 듯 입술을 깨물었다. “앞을 본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노릇인지 깨닫게 해 준, 그리워 미치게 해 준, 존경하는 대자연의 풍광들이여….” 테레사… 미카엘을 비롯한 한국의 학생들, 그리고 교수님들, 여타 지역의 학생들은 시력이 없음에도 당당하게 제왕임을 뽐내는 그를 경이롭다는 듯 숙연하게 응시했다. “지금 연주할 곡은, 부드럽고 가벼운 미뉴엣일 뿐입니다.” 그의 이름의 값을 충분히 알고 있는 일반인들과 초대 명사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양 손을 모은 채 떨었다. “제 생애 최초로 깨달은 것을 연주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주 이상할 지도 모릅니다.” 성대를 울리는 그의 마음에도 여러 소리들이 구름처럼 퍼져나갔다. 테레사… 아름다운 우리의 아마데우스…. 당신의 쾌락을 선량한 자들에게 부디 나눠 주세요…. 지금이 아니면 당신은 다시 외로워집니다. 향유 빛 색채를 지닌 세상 유일의 아마데우스, 테레사여. 자신의 모든 것을 펼칠 때, 다가올 눈부심을 두려워 마세요. “테레사는 떨립니다. 아마데우스 재단이 무언지도 모르던 네 살 때, 무대에서 체르니를 연주하며 리허설을 했던 때보다 훨씬 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당신의 자식은 이렇게 볼품없이 떨리지만, 그 때 이후로 두 번째로 벅차오릅니다.” 테레사… 어머니의 구절에서 함께 숙연해지고 뭉클해진 히스가 아래에서 잠시 지휘봉을 움켜쥔 채 어깨를 떨었다. “단순하고 연약하지만 끊어지지 않는 실타래처럼 묶인 장조의 선율…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지금 곡은 사랑만을 얘기합니다.” 테레사! 오, 제발… 건너편의 혜성이 눈물을 참으며 그가 크게 얘기하다가도 다시 슬프게 꺼내는 이야기들을 경청했다. 심장이 터질 것 만 같았다. “만남과 관심, 증오와 이별, 그리고 또 만남, 다툼 속의 열정, 팽팽한 인연의 끈… 하지만 인생에 없느니 있는 게 훨씬 달콤하게 느껴지는 그것은….” 잠시 이야기를 멈춘 뒤 호흡을 가다듬은 그는 턱을 치켜 올렸다. 그의 용맹한 눈을 가린 선글라스가 유난히 차가워 보였다. 하지만 덕분에 그의 따스함과 열정이 돋보일 수 있었다. 테레사는 넓고 공허한 천정의 돔을 올려본 채로 무너지듯이 말하였다. “행복한 …사랑 입니다.” 좌중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팸플릿에도 없던 폐막의 클라이맥스! 수페리우스처럼 한국의 혁명과도 같은 장대한 제시가 아닌, 단순한 사랑! 늘 삼엄한 곡으로 서두를 압도했던 테레사의 방식이 아닌데? 자신을 두고 추론하는 몇 천 명의 사람들의 움직임을 진즉부터 예상했던 테레사는 턱을 추켜올렸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떨어지는 눈물을 내버려두었다. 어머니… 그곳에서는 페달을 밟을 수 있으신지요… 음악의 테레사였던 저는… 그 안에 사랑을 추가 합니다…. “지금의 곡명은… just, love.” 당신의 페달을 밟아주면서 처음 깨달았을지도 모를 힘을, 이제는 당신뿐만이 아닌 세상에 내놓습니다. 나는 이런 내가 자랑스럽습니다.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어려지고 있습니다. 이런 저 역시, 당당하고 눈이 부십니다. 저 쪽 가시의 북 앞에 있는 소년이 보이십니까. 어머니… 아들의 오늘은 저 사람이 쏘아올린 불화살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이 감정들이 만약 사랑이라면 음악으로 알려 드릴 수는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뜨거운 갈채를 퍼부으며 연주자에게 독려를 아끼지 않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이 손을 모을 때, 테레사는 건반을 치고 들어갔다. “!” “!” 방심하던 좌중은 한 대 맞은 것처럼 벙 찐 채로 마장조의 선율에 빨려 들어갔다. “!” 탄- 중저음부의 우직한 음이 그러나 실로폰보다 맑게 스쳤다. 벌떡- 첫 마디가 지나기도 전에 앞 쪽의 여러 무리가 벌써부터 일어서서 감동을 표현했다. 그의 연주는 이제 시작인데도 일어선 무리들이 곳곳에 속출했다. 단조란 없다. 오직 장조만으로 어떻게 사랑에의 슬픔까지 표현한다는 걸까. 하지만 그는 테레사였다. 시력이 없어도 당당하게 맞서 싸우는 자였다. 그가 왜 폐막식 때 연주를 고집했는지는 사실 아무도 몰랐다. 사람들은 그가 just, love 라는 곡을 들려주고 싶어 했노라 단순하게 여기기로 했다. 반대편의 수페리우스는 그러나 단순할 수 없었다. 대기실에서 포옹하며 그가 들려준 이야기들이 건반의 진행에 따라 사무쳐 와서 아이는 혼자서 외로움을 이기듯이 그가 해 주는 이야기를, 음악을 들었다. 그가 야기한대로 미뉴엣처럼 상쾌하면서도 야상곡과 같이 슬픈 녹턴의 선율이 밤바람을 헤쳤다. 테레제를 그리워한 베토벤을 능가하는 바가텔의 선율은 서정적이지만 전혀 침체되지 않았다. 청중을 이끌어주는 자상한 설명이 덧붙여진 그의 표제음악은 다른 미사여구가 필요치 않다. 시작부터가 죽은 듯 심장을 울리는 사랑, 사랑이었다. 2박자와 4박자로 꾸준히 이어지는 과정은 17세기로 돌아가서 감상하는 파반느보다 장엄하게 다가왔다. 클라라에게 사랑을 진심으로 표현하는 아름다운 슈만, 그는 지금 슈만이었다. 근사한 alzamento… 건반 위에서 테레사의 손이 교차되며 한 손을 다른 손 위로 올릴 때마다 새벽을 연상시키는 맑고 연약한 선율이 상단에서 창조되었다. 점차 천천히 들어서는 도입부의 중반 즈음, 부드럽게 속삭이는 듯 한 선율이 달밤에 어울리게 미끄러지듯 흘러나왔다. 하프의 선율, 이 부분은 오래 전 새벽녘 자신을 찾아와 하프의 선율을 알려줬던 테레사를 떠올리게 했다. 수페리우스는 눈을 부릅뜬 채 여러 번 입술을 깨물며 북 채를 쥐고, 숨을 참았다. 그의 열정이다! 사람들은 같은 생각을 넓게 울리며 눈시울을 떨었다. 하얀 배를 뒤집는 은어의 몸놀림과 같이 청아한 선율, 그것은 과장된 표현이 아니었다. 불같이 열정적이지만 섬세한 2주제에서의 테레사는 강물을 벗어나 바다로 향하는 아름다운 은어와도 같았다. 양 손을 교차하며 금관악기가 째질 때의 것과 비슷한 선율이 나왔을 때, 좌중은 시련을 떠올렸다. 테레사의 시련은 호기심을 달고 있었다. 캉- 따라락, 따라라락. 여러 번 반복되는 깊고 중후한 선율과 사랑이 주는 시련에의 호기심을 강력하게 묻는 하이 톤의 물음표가 음악으로 완벽하게 표현될 때, 사람들은 진심으로 경악했다. 사랑에 있어서의 테레사는 너무나도 순수했던 것이다! 자신의 주관으로 보는 사랑에서 매사 느낀 고뇌와 질문들이 다양하게 표현될 때, 사람들은 제왕의 순수한 면에 감동받아서 여기저기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제아무리 멋진 음색이라도 막 펼쳐진 달콤하고 부드럽게, 그러나 고통을 감춘 상냥함의 클라이맥스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오, 지저스!” “!” 테레사의 어깨가 크게 움찔대며 거칠어진 팔놀림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선율은 다양하고 커진 반면 슬픔보다는 화려함을 강조했다. 오, 그는 단숨에 빛으로 변화되어 저 하늘로 솟았다. 극도로 여린 음을 숨을 죽인 채 구부정하게 숙인 뒤 연주하는 테레사를 보며, 반 이상의 사람들이 일어섰다. 아무리 작은 음률이라도, 그 어떤 작은 부분이라도, 그의 손에 닿으면 힘과 광시의 계절로 변화되어 눈시울을 자극하는 것을! 그의 연주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다. 표현 이라는 글자보다 진한 사랑의 이름표를 달고 저 하늘로 솟았다. 그리고 수페리우스의 가슴에 커다란 징을 단 것 보다 세게 울려서 넋을 뒤흔들었다. 오, 하느님! 테레사, 테레사! 아이는 주저앉았다. 가시의 북을 울려야 할 때가 머지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솟구치는 눈물을 터뜨리며 전율에 떨었다. 테레사! 긴 이음줄과 함께 출현한 우악스러운 사랑에의 고집, 그의 표현대로 라면 just, love! 독일의 학생들은 모두 일어나 거수경례를 한 채 존경을 표현했다. 그의 연주는 눈물이었다. 저스트 러브. 사랑을 모르던 자가 자기 식대로의 사랑을 세상에 알릴 때, 모두는 숙연해지고 폭풍우의 감동에 사무쳐야 했다. 노년의 부부는 과거의 향기롭던 추억을 상기하며 손수건을 적셨으며, 저 쪽 중년의 부부들은 서로의 뺨에 번진 눈물을 닦아주었다. 아름다운 아마데우스! 우리의 제왕이여! 기도하듯 손을 모은 채로 소박하되 감성적인 면을 치고 들어가는 테레사를 내려 보는 소녀들의 뺨은 젖어 있었다. 그의 연주는 하나 된 힘이자 호흡이었다. 각기 다른 지역의 아마데우스와, 일반인들, 초대명사들과, 반대의 사람들인 이태원의 무리들을 사랑으로 묶어주었다. 사랑, 그것의 위대함을 글자나 대화로 표현하기 어려웠던 사람들은 테레사의 음악을 듣는 즉시 저것이야 말로 사랑임을 다시 깨달았다. 사랑, 그는 온 누리에 사랑을 펼쳤다. 자기밖에 몰랐던 테레사가? 테레사가! 자기만의 세상을 외롭게 살았던 테레사가? 그 테레사가! 하느님, 감사합니다. 좌중은 흐느끼며 저 하늘에 뜻을 전했다. 온 몸과 영혼으로 메아리를 울렸다. “!” 극한의 피날레! 테레사의 은어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바다로 헤엄쳤던 은어가 강물로 돌아와 생을 마감하듯이, 그는 자신이 던졌던 사랑의 모든 감정을 단 하나의 열정으로 승화시키기 시작했다. 포르테와 스타카토의 짧은 구절이 비록 장조이지만 가볍지 않게 야생의 선율로 표현되자 모두는 신음을 참고 일어섰다. 오, 마리아여! 백색의 홀 내부와 외부 인파들은 전원이 일어서서 감동을 표현했다. 그 누구도 가시밭이 펼쳐진 것도 아니거늘, 제자리에 앉아있지 못했다. 사랑, 그것은 아주 쉬운 공감대였다. 그는 자신의 순수한 사상을 음악으로 알려주며 속속들이 잊었던 감정을 완전히 이끌어주는 것이다. “테…레…사….” 사랑해… 그의 음성이다. 저것은 나만이 들을 수 있는 음률로 표현된 그의 음성이다. 수페리우스는 천천히 일어서며 전율로 들떠있는, 터져 나가버린 뇌를, 미쳐버린 영혼을 느꼈다. 중얼거리는 이름은 별세계의 것처럼 멀고도 가까이 다가왔다. “으… 으흐으… 테레…사….” 그의 나라의 문이 모두 열렸다. 수 백 수 천 명의 사람들이 테레사의 아름답지만 외로운 나라에 들어서고 있었다.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에튜드집 발간 때까지만 해도 조심스러웠던 그의 지역은, 그 스스로가 타파하는 것으로 벽을 무너뜨린 것이다. 피날레의 끝부분, 순수한 사랑의 대단원을 두고 한국 학생들은 가시의 북을 쥐고 흐느끼는 수페리우스를 보았다. 작고 연약하지만 하늘의 불꽃을 당긴 자여, 제왕의 심장을 가져간 자여, 천하의 테레사를 슈만으로 바꾼 클라라여, 천하의 테레사를 사랑으로 둔갑시킨 마법사여! “어… 어어… 어흐… 어어….” 눈물로 범벅이가 된 수페리우스는 이를 악물었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려 애를 써 보았다. 그의 인생을 피아노가 표현한다. 건반은 사랑을 알려주었다. 그를, 테레사를 알려주었다! 『 제 과제가 마음에 들었으면 가시의 북을 울려 주십시오. 』 테레사. 내 팔이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이 마음을 당신께 표현합니다…. 나는 당신의 숭고한 사랑 앞에 첫 마디부터 무너졌습니다…. 신이시여. 저에게 한 번 더 힘을……! 투웅--- 수페리우스의 손이 허공에 번쩍 오르고, 웅장하고 진한 소리가 넓게 퍼졌다. 북의 지름이 모두 떨리도록 수페리우스는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허공을 가르고 채를 내리쳤다. 들리시나요……. 투둥---- 저도 당신을 가슴 찢어지게 사랑합니다……. “!” 사람들의 시선은 완전히 흐려졌다. 이제 그들은 무대 전체를 주목하며 청각에 스며드는 가시의 북 소리와 마침 점에 다 달은 테레사의 음률에 몸을 떨었다. 가벼운 숨소리조차 쉽지 않은 사랑, 사랑의 끝에 달려오는 가시의 북! 테레사는 웃고 있을까. 오 테레사. 감동으로 흐르는 눈물 때문에 식별이 불분명한 현재, 가슴은 이미 터지고 없다. 수페리우스는 반대편 무대에서 반짝이는 피아노와 테레사를 마음으로 찢어지게 외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북을 울렸다. 들려… 나는 들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그가 저렇게 온 영혼을 다 해 나에게 표현하고 있어. 자신의 감동 이상의 것을 나에게 표현해…. 나도 사랑해요… 사랑해… 사랑해… 테레사… 사랑해요…. 미쳐버릴 만큼, 가슴이 터지고 산산이 분해되어도…. 투둥---- 저를 사랑하는 당신의 마음… 그리고……. 퉁--- 가시의 북으로 차마 표현되지 않는 내 심장의 울림이 들리시나요…. 두둥---- 『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해주자. 』 투둥-----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하고 있습니다…! 투둥---- 표현해 주셔서 고마워요… 테레사… 당신의 사랑은 감히 제가 흉내 낼 수조차 없지만……. 퉁---- 이렇게 온 몸과 영혼을 다 하여 사랑합니다……. 대지의 풀이 흔들린다. 바람은 선회하여 반대편으로 도망쳤다. 빛처럼 태어난 테레사의 사랑과, 그것과 어울리는 가시의 북은 넓은 피날레를 장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끝인 줄 알았던 수페리우스와 좌중은 교묘하게 세어 들어오는 낮은 음표들을 통해 또다시 경악해야 했다. 감동과 감격, 그것은 마지막의 끝까지 감정을 내몰아갔다. “!” 테레사의 손이 건반에서 떼어지는 즉시, 수페리우스는 북 소리를 멈췄다. 그리고 끝난 줄 알았던 와중에 어느새 파고들어온 미카엘 성가대의 화음이 여리게 지속되었다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좌중은 깜짝 놀라서 양 손으로 입을 막았다. 머리카락 끝까지 소름이 끼쳐서 누구도 움직일 수 없었다. 테레사의 피아노 반주로 최후에 펼쳐지는 하모니, 그것은 산타시아의 솔로와 더불어 런던 합창단, 그리고 미카엘 성가대에서 시작되었다. 허밍이 방금 전 테레사의 선율을 울리자, 이번에는 히스가 지휘봉을 넓게 휘두르며 모두에게 ‘시작’의 지시를 내렸다. “!” 두 개의 무대를 이어주는 기다란 길 양 쪽에 있던 미카엘 성가대와 런던 합창단, 그리고 히스클리프의 지휘에 따라 고개를 끄덕이는 최상위의 오케스트라 룸 단원들에게도 조명이 쏟아졌다. 수석 바이올리니스트 유지신이 까만 머리칼을 반짝이고 있었으며, 오케스트라 룸의 약한 반주가 영원토록 이어질 것처럼 자생되었다. 아아 테레사, 테레사! 혜성은 다시 한 번 북 채를 쥐고 가시의 북을 울렸다. 마구 흐느끼느라 얼굴은 엉망이었다. 상관없었다. 테레사! 테레사! 영혼은 이미 테레사로 미쳐버렸다. 그의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들의 화음과 섞였을 때 전혀 어색하지 않도록 적당한 박자를 세어가며 히스의 지휘를 따랐다. 히틀러의 지휘, 천상의 소프라노 산타시아 주축의 여린 피아노 허밍 합창, 그리고 완벽한 끝마무리의 테레사…. 테레사! 사람들은 고개를 떨구었다. 스힉- 유지의 바이올린 신호에 맞추어 완벽한 칸타빌레가- “!” 손끝을 세운 테레사가 상단부에서 미끄러지며 글리산도를 창출한 것이다. 히스의 동작이 멈췄다. 둥---- 그리고 감동을, 사랑을 주체할 수 없었던 가시의 북 소리만이 밤바다처럼 고요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 “…….” 전원 기립한 좌중으로부터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숨 쉬는 법조차 잊은 기계처럼 무언가로부터의 강인한 욕구를 발산하기 위해 애를 썼다. 날아간 영혼이 뻥 뚫린 머리 위로 돌아오지를 않았다. 긴 시간, 아주 참혹하고도 짜릿한 전율만이 백색의 홀 내부와 외부에 있는 오천 여명을 정지시켰다. 한가롭게 노니는 은어의 하얀 배가 달에 반사될 뿐, 아무것도 살아있지 않았다. 모두는 잠깐이지만 음악의 향락에 빠져 영혼을 바쳤다. 그들은 죽었다. 맨 앞자리의 사비나 교수님이 눈물로 엉망이 된 상태에서 머리위로 손을 올렸다. 그녀는 아주 힘겹게 박수를 쳤다. 짝--- “!”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기립한 전원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10분 여 만에 가까스로 몸을 움직이고 숨을 쉬듯 우레와 같은 함성을 내지른 것이다. 땅과 천정이 들썩이리만치 장대하고도 열광적인 전체의 찢어지는 함성이! 숨이 막히도록! “우와아아아아!” 백색의 홀 주변은 떠나갈 듯 엄청난 에너지와 함성이 터졌다. 거수 경례 중이던 독일 학생들은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팔이 부서져라 갈채를 퍼부으며 목이 쉴 때까지 소리쳤다. 가슴의 고동이 끝나기 전에, 어쩌면 심장이 멈출 때까지! “테레-사! 테레-사! 테레-사! 테레-사!” “브라보! 브라보!” “테레---에사!!!” 테레사는 허공을 올려보며 구슬땀이 떨어지는 미세한 소리를 들었다.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 붙는 소리조차 들렸다. 그리고 대지를 가르고 용수철처럼 튀이는 듯 한 함성을 온 몸으로 느꼈다. 어머니……. 이것이……. 반드시 오늘 꼭 보여주고 들려주고 알리고 싶었던…. 당신의 자랑스러운 아들의 사랑입니다…. “와아아아아!” “love!!” 저는 이 방법 외에 가장 좋은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니까요…. “테레-사!” 별처럼 쏟아지는 음성이 있다. 좌중의 기립 박수는 장시간이 지나도 멎지 않았다. 세상을 거스르는 갈채와 함성에 백색의 홀은 조금만 건드리면 부서질 것처럼 위태롭게 느껴졌다. 가십 기자들마저 흥분해서 소리치는 통에 이 순간 다른 생각이나 다른 행동을 하는 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테레사! 테레사! 아마데우스! 테레사! 눈물을 흘리며 머리 위로 팔을 올려 힘껏 갈채를 퍼붓는 짜릿한 함성의 하모니! 한국을 외치는 그들 모두는 방금 전의 생생했던 그의 사랑에 감격해서 마구잡이의 쾌락을 표현했다. 박수를 치다가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그들은 온 몸으로 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좌중이 뜨겁게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테레사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정확하게 걸어서 두 개의 무대를 이어주는 얇은 길에 들어섰다. “!” 테레사가 움직일 때마다 사람들은 소리쳤다. 울분을 터뜨렸다. 메마른 가슴에 단비가 되어준 그의 폐막식이 황홀해서 지금을 창조한 그를 지지했다. “테레사!” “테레사! 테레사!” 길의 중앙으로 걷는 도중, 별안간 허공에 주먹을 움켜쥐는 테레사의 행동 덕분에 한층 흥분한 좌중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하나가 되어 그를 소리쳤다. 용맹한 제왕의 주먹이 근사한 땀을 뿌리며 세워질 때, 조명의 빛마저 초라해지며 짜릿한 광속도의 전율이 온 몸으로 모두에게 퍼졌다. 맞은편에서 함께 이쪽으로 걸어왔던 수페리우스 덕분에 둘은 곧 길의 중앙에서 만났다. 둘은 서로를 잡아당기듯이 걷는 것처럼 보였다. 극과 극이 맞물릴 때의 파장, 섬세한 감동이 다시금 둘이 만날 때 파도처럼 스쳤다. 가슴이 메어진다. 혹은 찢어진다는 표현은 그들에게 식상했다. 벅찬 설렘이 손에 땀을 쥔 둘에게 공평하게 있었다. “…….” “…….” 테레사는 허공에 짐작으로 팔을 내밀었다. 곧이어 수페리우스의 작은 손이 감싸여왔다. 테레사! 테레사! 백색의 길이 들썩일 정도로 함성소리는 짙어지기만 했다. “…들었어?” 사방이 들썩인다는 환각에 젖어들도록 웅장한 함성 속에서 수페리우스는 아련하고 몽롱한 기분에 빠져 들어갔다. 이 기분은 누군가에게 딱히 설명해봤자 완벽하게 이해시킬 수 없는 자기만의 감정이었다. 수페리우스는 그 와중에도 가장 자세하게 들리는 테레사의 음성을 전해 듣는 즉시 떨리는 소리로 대답했다. “…네….” “…어땠…어….” 하느님. 당신께서 허락해주신 이 사람을… 저는 지킬 것입니다…. 나 또한 사랑이니까요…. “……그걸….” “…….” 테레사-! 테레-사! 아마데우스! 일어선 채로 갈채와 함성을 쏟아 붓는 뮤즈들의 혼이 불보다 뜨거웠다. 수페리우스는 흐느낌을 참아가며, 그 대신 폭포수와 같은 눈물은 내버려둔 채 떨리는 가슴으로 대답했다. “그걸… 어떻게 말로… 지금 이 순간… 바로… 표현 할 수가 있어요….” “…….” “내가 울고 있잖아요….” “!” “어서 안아 주세요… 안아 주세요 테레사… 나를 울려주세요… 나를 가둬주세요… 나를 향해 농담하고 어서 키스 해 주세요… 어서요….” “!” “감동이란… 쉬운 말로 표현할수록 멀어지는 기분에 숨이 가빠지고 다급해지는 것을….” “…그래….” 그의 턱이 떨리고 있다. 입술을 깨무는 테레사는 더없이 근사하고 아름다웠다. 푸른 수채화처럼 만지는 순간 바랄 것이 두려워서 수페리우스는 자꾸만 뺨을 적셨다. “과제 점수는… 세상의 숫자가 부족해서 매길 수가 없어요….” “…그래….” 테레사는 수페리우스의 손을 꽉 잡은 채로 허공에 팔을, 승리의 제스추어로 번쩍 올렸다. “!” 보아라, 좌중이여! 이 사람이다! 나의 수페리우스, 이 사람을 향한 사랑이다! 펑- 가슴 속의 무한대가 한꺼번에 다시 터졌다. 감동에 있어서 언어란 아무런 소용없는 도구에 불과했다. 혜성의 팔이 떨리고 있듯이 허공에 치켜든 그의 팔도 전율에 감싸여 있었다. 그는 직접 말을 하진 않았지만 혜성은 그가 왜 자신의 팔을 쥐고 좌중 앞에 자신만만하게 인사하는지를 알았다. 왜 자신에게 가시의 북을 누르게 했는지도 알았다. 북의 지름이 떨릴 때, 자신 역시 충혈 된 몸을 떨었었다. “브라보!” “와아아아!” 이윽고 두 사람은 함께 허리를 숙였다. 오케스트라 룸 단원들과 미카엘 성가대와 런던 합창단원들 역시 히스의 지시에 따라 아래에서 조용히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화려했던 개막식, 그리고 뮤즈들의 올림픽과도 같았던 치열한 경쟁을 지나 오늘의 폐막식은 성황리에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한국 아마데우스의 붉은 장미향이 모두의 기억 속에 영원히 자리하도록. 허리를 숙이고 오랜 시간 갈채로 흠뻑 취한 뒤 무대를 벗어나며 테레사는 수페리우스의 어깨를 껴안은 채로 사랑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림을 반복했다. 그들에게 아주 가까이 접근해 봤지만 그 어떤 가십 기자라 할지라도 내용을 파악하거나 들을 수는 없었다고 한다. 사랑해…. 사랑해요…. 나를 정말 사랑해? 지금… 이렇게… 가슴이 터져버릴 것처럼… 선배를……. …예전에는? 예전에도요…. 앞…으로는? …앞으로두요…. …영원히? …네에… 영원히요…. 억지로 하는 대답 아니지? 내가 명령조라서 니가…. 테레사. …? 저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금 내가 한 말의 증인이 되어 줄 거예요. …곧 연주회장 밖으로 없어질 사람들이잖아. 그래요… 하지만…. …하지만? 감동이란… 시간이 지나면 색이 바래질지라도, 다시 그것을 기억하는 이들을 모이게 하는 힘이 있어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태양처럼 밝은 좌중의 함성, 그리고 또렷한 감동에의 눈동자와 갈채…. 대기실로 돌아왔지만 다시금 터지는 함성과 갈채에 못 이겨 몇 번이나 무대에 손을 잡고 나타나는 테레사와 수페리우스는 중앙의 무대에서 아낌없이 허리를 숙였다. 직각으로 선 둘에게는 하프의 선율을 함께 보았던 그 날과 같은 전율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백색의 야외 홀 역시 들뜨기는 마찬가지였다. 바람에 섞인 수풀의 향이 낮보다 진한 봄을 수놓고 있어서 사람들은 밖이어도 열광의 폭을 늦추지 않았다. 어쩌면 자연에 섞인 그들이야말로 진한 감동의 ‘무엇’을 느끼지 않았을까. 붉은 마리아 칼라스로 치장 된 백색의 홀은 많은 이들에게 사랑으로 기억될 것이다. 연주회장을 쩌렁쩌렁 울렸던 한국의 혁명 역시 이다음에 사람이 죽어 없어져도 그곳에 새겨진 아폴론은 기억할 것이다. 높새바람과 지평선 끝에서 움트게 될 하프의 선율을 기다린다. 오늘 펼쳐진 격정적이고 뜨거운 밤을 지나, 다가올 내일이 설사 시련의 이름일지라도, 그들은 주저 없이 맞이할 것이다. 이 글을 지켜보는 당신처럼. 아름다운, 참으로 아름다운 젊은 날의 계절이다. -아마데우스 2악장 완결- < 저자 후 기 > 안녕하세요. 화이트그린 입니다. 짧지만은 않은 후기를 적으려 합니다. 완결 편을 읽은 직후라서 지금의 글이 방해가 된다면 읽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담배 대신에 화이트 쵸콜릿을 조금씩 먹으면서 완결 편을 적었습니다. 첫사랑을 경험하는 열일곱 소녀가 된 것 마냥 설레고 행복했습니다. 아마데우스는 저의 꿈이었고 열정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오래 전 구상해 두었던 노트와 메일들… 그 당시에는 멀게만 느껴졌던 완결 편 구상들을 새삼 돌아보았습니다. 아마데우스는, 나의 세상인 동시에 여러분의 세상이며 절망이며 행복이었습니다. 무지하고 부족한 저이지만 이 글을 적게 되어서, 여러분의 표현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 인사 올립니다. 그동안 글의 하단에 적어주신 댓글은 저의 것이 아닙니다. 훗날, 댓글을 다시 읽을 때 그 당시의 기분을 다시 느낄 수 있는 여러분만의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당신은 예전 댓글을 읽으시면 그 때의 기분을 유추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감성을 나눠주신 여러분이 고마웠습니다. 아마데우스가 적고 싶어서, 저는 하얀 세상을 버림과 동시에 절필 선언했던 것을 스스로에게 취소했습니다. 하지만 혼자였다면 그럴 용기가 단연코 없었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저는 지금의 2악장 완결이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혜성이가 영원히 자퇴생으로 남을 뻔 했던 글을 여기까지 이끌어왔다는 것에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습니다. 여러분 덕분입니다…. 잠깐 소설 이야기를 해 볼까요? 2악장의 연재 방식은 저로서도 흥미로웠습니다. 여기서 그가 나타나면 이상할거야. 암시가 필요한데 그렇지 그게 좋겠어. 이 부분을 위해서는 이게 필요해, 저 부분을 위해서는 이러이러한 경로가 필요하지. 이런 식으로 많이 고민하고 앞과 뒤를 수도 없이 교차시키던 중에, 끝이 왔으니까요. 전체적으로 다시 봐도 2악장은 수페리우스의 나태기 입니다. 1악장에서 아마데우스의 화려한 세상 그리고 그 이면을 찾아낸 수페리우스가 무조건 음악이 좋은 와중에 정점에 다 달았다면, 2악장은 왜 자신이 음악을 하고 싶어 하는가와 그가 느끼는 밑바닥, 그리고 최후의 밑바닥에서의 탈출… 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잘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최후 순간에는 그에게 앞으로의 확실한 발판을 만들어 주고 싶었습니다. 수페리우스를 보며 동화되고 힘을 낸다는 분들도 많이 생각났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앞서 말한바와 같이 잘 표현되었는지 전달되었는지는 확실히 모릅니다. 읽는 분은 여러분이니까요. 저는 언제나 당신이 느낀 감정에의 표현을 기다립니다. 기쁠 때보다 슬프고 괴로울 때 지쳐서 힘들고 무너질때 많이 적었던 것이 아마데우스 2악장 이었습니다. 이 글은 저의 외로움과 슬픔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는 게 이상하지만, 그래도 적고 나면 언제나 행복해졌으니 감사하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적는다는게 기쁜 반면 결코 쉽지 않아서 저는 많이 힘들고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글을 올리면 기뻐할 사람들이 떠올라서 그 쾌락을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이 소중합니다. 쌀쌀한 겨울에는 봄과 여름을 적고 싶습니다. 여름에는 가을 혹은 겨울을 적고 싶어 하고 실제로도 많이 그래 왔습니다. 제 마음속에 반항적인 심리가 있나 봅니다.^^ 그러니 따뜻한 열정의 봄 콩 쿨 폐막식을 통해 여러분도 따뜻하셨기를 바랍니다. 1악장 완결 후 7개월가량 뒤에 2악장이 시작되었듯이, 3악장도 아직은 먼 얘기처럼 여겨져서 저도 기다림을 시작하렵니다. 쉬고, 많이 배우고, 느끼고 돌아오겠습니다. 작은 글이지만,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함께 해 주신 분들을 뵙고 싶네요… 따로이 주시는 메일과 감상 글도 물론 좋지만 지금의 페이지에 당신의 흔적이 남기를 바라는 마음에…^^ 고마웠습니다. 저 혼자였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것입니다. 이 글을 통해서 힘을 내 주신 분들, 반대로 저에게 힘을 주신 분들께 허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긴 얘기를 하고 싶지만 지금 당장 떠오르는 것만 떠들게 됩니다. 자퇴 후 룸펜에서의 솔베이지… 샤우트… 뮌헨의 민들레… 학생재판과 헬리아… 이별… 테레사의 에튜드… 발트슈타인… 절망… 데블관 밑의 반 아마데우스… 독일에서의 성장과 기회의 장… 오르페우스 관의 폭파… 이자벨과 모세… 감정의 밑바닥들… 뮤즈들의 경합… 그리고 사랑……. 자기만의 사랑 방식을 음악으로 표현한 테레사와 같이 여러분도 자기만의 영롱하고 멋진 사랑과 감동을 마음껏 표현하시기를… 또한 룸펜에서 주저앉으려던 수페리우스가 오늘에 왔듯이, 여러분도 힘을 내셔서 이상을 이룩하시기를 바랍니다. 진심으로 바라건데 이 글을 읽고 누구보다 아름다운 당신이 행복하기를 소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올 한 해 아마데우스와 함께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wgreene@naver.com 2006년 12월 8일 젊은날의 화이트그린 덧글 43개 엮인글 쓰기 /data17/2006/12/19/60/1_1-wgreene.jpg@nhn@65861@nhn@1@nhn@385@nhn@551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77편(완결) /data17/2006/12/19/60/1_1-wgreene.jpg@nhn@65861@nhn@1@nhn@385@nhn@551 화이트그린의 LEEHA 2악장 77편(완결) 전체 포스트 보기▶▼ 다음글 - 2악장 76편